머리말


어른은 별다른 노력이 없이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그냥 나이를 먹으니 어른이 되어 버렸고, 주변 사람들도 우리를 어른으로 대접하고 있으니까요. 5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힘과 자유가 없다면, 어른이라고 해도 어른일 수 없는 법이니까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남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아야 어른입니다. 싫은 건 싫다고 하고 좋은 건 좋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어른입니다... 힘과 자유는 나이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용기를 갖고 싸워 얻어야 하는 것임을. 6



프롤로그 - 잠옷을 입고 실내에 있을 수도 없고 실외로 나갈 수도 없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는가?


‘도대체 내가 했던 모든 행동 중 오직 나만이 할 수 있었던 행동은 있기라도 한 것일까?’ ...

나와 같은 사람은 1,000년 전에도 없었고 1,000년 뒤에도 없을 겁니다. 아니, 지금도 나와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나의 모든 행동은 너무나 타인들과 유사합니다. 그것도 지독하게 유사합니다. 이건 내가 나로서 살아가기보다는 누군가를 흉내 내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 아닐까요... 베케트(Samuel Baclay Beckett, 1906-1989)라는 우리 시대 가장 탁월한 작가가 고민했던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로 행동하고 생각할 수 있을까?’ 13


‘화두(話頭)’.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결코 해결할 길이 없는 딜레마나 역설로 가득 차 있는 물음이 바로 화두입니다. ...

화두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내려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관문 같은 겁니다. 상식에 따라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풀릴 수 없는 역설로 보이지만, 자신만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쉽게 풀리는 것이 화두이기 때문이지요. 15


스님들이 싯다르타를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데 멋지게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16


‘무문관’ .. ‘문이 없는 관문’. 18


타인이 만든 문을 찾으려 두리번거리지 말고 온몸을 던져 뚫어 내라는 겁니다. 20



어느 날 사찰 깃발이 바람에 나무끼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두 스님이 서로 논쟁을 했다.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라고 말하고, 다른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라고 주장했다. 서로의 주장만이 오갈 뿐, 논쟁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이때 육조 혜능은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두 스님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문관> 29칙 비풍비번(非風非幡). 24

깨달음을 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과 그것을 몸소 체현하고 산다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습니다. 32



서암 사언 화상은 매일 자기 자신을 “주인공!”하고 부르고서는 다시 스스로 “예!”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깨어 있어야 한다! 예! 남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 예! 예!”라고 말했다. <무문관> 12칙 암환주인(巖喚主人). 33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된다면, 그때 내가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36

<논리철학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말을 빌린다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하는 법입니다. 37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단지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 달리 말해 내 자신이 가진 잠재성을 활짝 꽃피우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7



송원 화상이 말했다. “힘이 센 사람은 무엇 때문에 자기 다리를 들어 올릴 수 없는가?” 또 말했다. “말을 하는 것은 혀끝에 있지 않다.” 20칙 대역량인(大力量人) 42

‘여여(如如)’ 혹은 ‘타타타’라고 부릅니다. ‘있는 그대로’라는 뜻이지요. ...

불변하는 영원한 자아를 불교에서는 ‘아(俄, atman)’라고 부릅니다. 불교는 이런 영원한 자아를 부정합니다. 영원한 것, 불변하는 것에 대한 집착은 우리 마음에 심각한 고통을 안겨 주기 때문이지요. 세상에 영원하거나 불변하는 것은 없으니까요. 44

불교의 가르침, 그리고 수행은 우리의 생생한 경험을 떠나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겪는 경험을 있는 그대로 보는 순간, 우리의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옵니다... 희론(戱論)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올바른 인식을 희롱하는 논의,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보지 못하게 우리의 마음을 왜곡시키는 잘못된 논의라는 뜻이지요. 한마디로 말해 희론은 세상을 왜곡해서 보도록 만드는 색안경과 같은 것이지요.  45

?비트겐슈타인의 충고를 반복하고 싶습니다. "생각하지 말고, 보라(Don't think, but look)!"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럴 거야'라는 가치평가나 희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자신의 삶에서 벌어지는 근본적인 경험을 있는 그래도 여여하게 직시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50



파토 화상이 대중들에게 말했다. "너희에게 주장자가 있다면, 너희에게 주장자를 주겠다. 너희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너희에게서 주장자를 빼앗을 것이다." <무문관> 44칙, '파초주장(芭蕉?杖)'  51

주장자(柱杖子)를 아시나요. 큰스님들이 길을 걸을 때나 설법을 할 때 들고 계시는 큰 지팡이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장자는 불교에서는 깨달은 사람, 즉 '불성(佛性)', 혹은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실현한 사람을 상징하게 된 것입니다.  51

'주장자가 없다'는 생각, 그리고 부처라는 생각마저 내려놓아야 깨달을 수 있다는 파초 스님의 생각은 매우 중요합니다.  53

베그르송(Henri Bergson, 1859~1941)은 자신의 주저 <창조적 진화>에서 "'없다'고 생각된 대상의 관념 속에는, 같은 대상이 '있다'고 생각되었을 때의 관념보다 더 적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라고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 '없다'는 생각이 '있다'는 생각보다 무엇인가 하나가 더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54

'지갑이 없어',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애인과 헤어졌어' 등등. 우리는 매번 '없음'에 직면하며 당혹감과 비통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것은 물론 우리가 지갑이 주머니에 있었다는 기억을, 살아 계신 어머니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집착의 기원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에게 없어진 것이 소중한 것일수록 그것의 부재가 주는 고통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고통일 겁니다. 없다는 느낌은 그만큼 그것이 있었을 때 느꼈던 행복을 안타깝게도 더 부각시키는 법이니까요.  55, 58

"너희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너희에게서 주장자를 빼앗을 것이다." .. 부처를 꿈꾸는 마음이 강해지면, 이제 역으로 자신이 아직 깨달은 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하기 쉽습니다. 이런 절망이 다시 부처에 더 집착하도록 만들게 될 겁니다. .. 집착은 깨달은 자가 가지는 자유와는 무관한 것이니까요. .. 주장자가 있다는 오만도, 그리고 주장자가 없다는 절망도 모두 집착일 뿐입니다.  59



구지 화상은 무엇인가 질문을 받으면 언제나 단지 손가락 하나를 세울 뿐이었다. 뒤에 동자 한 명이 절에 남아 있게 되었다. 외부 손님이 "화상께서는 어떤 불법을 이야기하고 계시나요?"라고 묻자, 동자도 구지 화상을 본더 손가락을 세웠다. 구지 화상이 이런 사실을 듣고, 동자를 불러 칼로 그의 손가락을 세웠다. 구지 화상이 이런 사실을 듣고, 동자를 불러 칼로 그의 손가락을 잘랐다. 동자는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방 밖으로 나가오 ㅆ는데, 구지 화상은 동자를 다시 불렀다. 동자가 고개를 돌리자, 바로 그 순간 구지 화상은 손가락을 세웠다. 동자는 갑자기 깨달았다. 

구지 화상이 세상을 떠나면서 여러 제자들에게 말했다. "나는 천룡 스님에게서 '한 손가락 선'을 얻어 평생 동안 다함이 없이 사용했구나!" 말을 마치자 그는 입적했다. <무문관> 3칙. '구지수지(俱?竪指)'  60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자신의 본래면목을 실현하는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61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반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나는 '동일자의 반복'이고 다른 하나는 '차이의 반복'입니다.  63

<장자(莊子)>라는 책에는 '한단지보(邯鄲之步)'라는 고사가 하나 등장합니다. 초(楚)나라 사람이 세련되어 보이는 조(趙)나라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다가 조나라 스타일의 걸음걸이도 익히지 못하고 예전 초나라 스타일의 걸음걸이마저 까먹어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 다른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것이 '동일자의 반복'이라면, 자기만의 걸음걸이를 걷는 것이 바로 '차이의 반복'에 해당. 그러니까 남을 흉내 내지 않는 것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자기만의 차이를 실현할 수 없다면, 우리는 항상 남을 흉애 내는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으니까 말입니다.  65



남전 화상은 동당과 서당의 수행승들이 고양이를 두고 다투고 있으므로 그 고양이를 잡아 들고 말했다. "그대들이여, 무엇인가 한다미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고양이를 살려 줄 테지만, 말할 수 없다면 베어 버릴 것이다." 수행승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전은 마침내 그 고양이를 베어 버렸다. 그날 밤 조주가 외출하고 돌아왔다. 남전은 낮에 있던 일을 조주에게 이야기했다. 바로 조주는 신발을 벗어 머리에 얹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자 남전은 말했다. "만일 조주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를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무문관> 14칙. '남전참묘(南泉斬猫)'  68

신발을 머리에 얹었다는 것은 조주가 집착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모자는 머리에 얹고 신발을 발에 신는 것을 영원불변한 진리이자 규칙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니까 결코 신발을 머리에 얹거나 모자를 발에 신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것이야말로 주인공이 아니라 습득한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 아닐까요. 반면 신발을 머리에 얹음으로써 조주는 신발과 모자와 관련된 기존의 통념, 혹은 기존의 생활양식을 경쾌하게 부정해 버립니다.  71-73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는 판단력을 '규정적 판단력(bestimmende Urteilskraft)'과 '반선적 판단력(reflektierende Urteilskraft)'으로 구분합니다. 모자는 머리에 쓰고 신발은 발에 신어야 한다는 기존의 규칙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규정적 판단력이라면, 기존의 규칙을 부정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내는 판단이 바로 반성적 판단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규정적 판단력이 규칙을 따르는 생각이라면, 반성적 판단력은 규칙을 창조하는 생각이라고 간단히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73



어느 스님이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고 묻자, 운문 스님은 "마른 또 막대기"라고 말했다. <무문관> 21칙, '운문시궐(雲門屎?)'  104

부처에게 의지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성불할 수 없습니다. 부처란 당당한 주인공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니까요.  107

깨달음은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아는 것이고, 해탈은 조연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109



동산 스님이 설법하려고 할 때, 운문 스님이 물었다. "최근에 어느 곳을 떠나 왔는가?" 동산은 "사도(査渡)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운문 스님이 "여름에는 어디서 있었는가?"라고 묻자, 동산은 "호남의 보자사(報慈寺)에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바로 운문 스님이 "언제 그곳을 떠났는가?"라고 묻자, 동산은 8월 25일에 떠났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운문 스님은 말했다. "세 차례 후려쳐야겠지만 너는 용서하마."

동산은 다음 날 다시 운문 스님의 처소로 올라와 물었다. "어저께 스님께서는 세 차례의 몽둥이질을 용서하셨지만, 저는 제 잘못이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운문 스님이 말했다. "이 밥통아! 강서로 그리고 호남으로 그런 식으로 돌아다녔던 것이냐!" 이 대목에서 동산은 크게 깨달았다. <무문관> 15칙. '동산삼돈(洞山三頓)'  120

깨달음을 얻은 스승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은 제자가 스스로 깨달음의 등불을 발화시키도록 격려하고 자극하는 것뿐입니다.  121

<임제록>에서 임제의 속내를 가장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는 그의 사자후가 아닐까 싶습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란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는 뜻입니다. ..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해탈한다는 것, 그래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일체의 외적인 권위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당당한 주인공이 된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122-123

여행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짜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진짜 여행입니다. 눈치가 빠르신 분은 무슨 말인지 금방 짐작하실 겁니다. 가짜 여행은 출발지도 있고 목적지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짜 여행을 하는 사람은 여행 도중에서도 항상 출발지와 목적지에 집착하느라 여행 자체를 즐길 수가 없을 겁니다. 서둘러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고, 그리고 서둘러 출발지로 되돌아와야만 하니까요. 당연히 여행 도중에서 만나게 되는 코를 유혹하는 수많은 꽃 내음들, 뺨을 애무하는 바람들, 실개천의 속삭임들, 지나가는 마을에서 열리는 로맨틱한 축제조차도 그는 향유할 수도 없을 겁니다. 아니, 그는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이런 사건과 사물들을 저주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목적지에 가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이기 때문이지요. 결국 그에게 여행의 주인공은 그 자신이라기보다는 출발지와 도착지라고 해야 할 겁니다.

장자(莊子, BC369~BC289?)는 진짜 여행을 '소요유(逍遙遊)'라고 표현했던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소요(逍遙)'라는 말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한가하다'는 의미입니다. 장자도 진짜 여행이란 출발지와 목적지에 집착하지 않는 여행이라는 것을 알았던 셈입니다. 진짜 여행을 하는 사람은 항상 여행 도중에 자유롭게 행동합니다. 멋진 곳이면 며칠이고 머물지만, 그렇지 않은 곳이면 과감하게 떠납니다. 간혹 아름다운 새를 쫓다가 다른 곳으로 가기도 일쑤입니다. 그는 출발지와 목적지의 노예가 아니라, 맵ㄴ 출발지와 목적지를 만드는 주인이기 때문이지요. 알튀세르(ALouis Althusser, 1918~1990)눈 <유물론 철학자의 초상>이라는 글에서 이런 사람을 '유물론 철학자'라고 부릅니다. "그는 아주 늙었을 수도 있고, 아주 젊었을 수도 있다. 핵심적인 것은 그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언제나 그는 미국 서부영화에서 그런 것처럼 달리는 기차를 탄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기원), 어디로 가는지(목적) 전혀 모르면서."

인간의 삶을 여행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삶 자체가 바로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번밖에 없는 소중한 삶을 제대로 영위하려면 우리는 기원과 목적, 과거와 미래, 출발지와 목적지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출발지와 목적지를 염두에 두지 않으니, 우리가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자연스럽고 여유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임제 스님의 말처럼 모든 것이 참될 수밖에 없지요. 당연히 만나는 것마다 따뜻한 시선으로 모두 춤어 줄 수 있을 겁니다. 반면 목적지로 가느라, 혹은 출발지로 되돌아오느라 분주한 사람에게 어떻게 자신을 돌보고 타인을 돌보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자비로운 마음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무문관>의 열다섯번째 관문을 통화하면서 우리의 가슴에 임제의 가르침을 한 글자 한 글자 깊게 아로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수(隨)' '곳 처(處)', '될 작(作)', '주인 주(主)', '설 입(立)', '곳 처(處)', '모두 개(皆), '참될 진(眞)'. 수처작주, 입처개진!  125-127



옛날 석가모니가 영취산의 집회에서 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여 주었다. 이때 대중들은 모두 침묵했지만, 오직 위대한 가섭만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말했다. "내게는 올바른 법을 보는 안목, 즉 열반에 이른 미묘한 마음, 실상(實相)에는 상(相)이 없다는 미묘한 가르침이 있다. 그것은 문자로 표현할 수도 없어 가르침 이외에 별도로 전할 수밖에 없기에 위대한 가섭에게 맡기겠다." <무문관> 6칙, '세존염화(世尊拈花)'  130

평범한 사람에게도 그만의 세계가 있고, 깨달은 사람에게도 그만의 세계가 있는 법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자신의 세계를 부정하고 다른 진짜 세계, 혹은 초월적인 세계를 꿈꾸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집착입니다.  136-137



어느 스님이 물었다. "광명이 조용히 모든 세계에 두루 비치니..." 한 구절이 다 끝나기도 전에 운문 스님은 갑자기 말했다. "이것은 장졸 수재의 말 아닌가!" 그 스님은 "예"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운문 스님은 "말에 떨어졌군"이라고 말했다.

뒤에 사심 스님은 말했다. "자, 말해 보라! 어디가 그 스님이 말에 떨어진 곳인가?" <무문관> 39칙, '운문화타(雲門話墮)'  138

제도나 관습에 의존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주인공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숭배하는 노예의 삶일 뿐이기에, 스님이 되어야만 부처가 된다는것은 불교에서는 용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139

 - 깨달은 삶을 살아가는 것과 깨달음에 대해 말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습니다. -

현대 영국의 철학자 라일(Gilbert Ryle, 1900~1976)도 자신의 논문 <실천적 앎과 이론적 앎>에서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해당 상황에 대한 지적인 명제들을 안다고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요리하거나 운전할 줄 모를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할 줄 아는 실천적 앎과 단지 이론적으로만 아는 이론적 앎을 명확히 구분한 이야기입니다.  143-144

말이 무엇이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진짜로 깨달았는지의 여부니까요. 진짜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그의 횡설수설이 모두 오도송입니다. 반대로 깨닫지도 않은 사람이라면 그가 경전이나 선사의 말에 부합되는 말을 아무리 잘해도 그것은 모두 횡설수설에 불과한 법입니다.  145

깨달은 스승이 깨닫지 않은 제자를 강제로 깨달음에 이끌 수는 없습니다. 제자 스스로 깨닫도록 도울 수밖에 없습니다.  148



백장 화상이 설법하려고 할 때, 항상 대중들과 함게 설법을 듣고 있던 노인이 한 명 있었다. 설법이 끝나서 대중들이 모두 물러가면, 노인도 물러가곤 했다.그런데 어느 날 노인은 설법이 끝나도 물러가지 않았다. 마침내 백장 화상이 물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러자 노인은 말했다. "예.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옛날 가섭 부처가 계실 때 저는 이 산에 주지로 있었습니다. 당시 어느 학인이 제게 물었습니다.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因果)에 떨어지는 경우는 없습니까?' 저는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가 500번이나 여우의 몸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화상께서 제 대신 깨달음의 한마디 말을 하셔서 여우 몸에서 벗어나도록 해 주십시오." 마침내 노인이 "크게 수행한 살마도 인과에 떨어지는 경우는 없습니까?"라고 묻자, 백장 화상은 대답했다. "인과에 어둡지 않다." 백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노인은 크게 깨달으며 절을 올리면서 말했다. "저는 이미 여우 몸을 벗어서 그것을 산 뒤에 두었습니다. 화상께서 죽은 스님의 예로 저를 장사 지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백장 화상은 유나에게 나무판을 두들겨 다른 스님들에게 알리도록 했다. "공양을 마친 후 죽은 승려의 장례가 있다." 그러자 스님들은 서로 마주보며 쑥덕였다. "스님들이 모두 편안하고 열반당에도 병든 사람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이런 분부를 내리시는 것인지?" 공양을 마친 후 백장 화상은 스님들을 읶르로 산 뒤쪽 큰 바위 밑에 이르러 지팡이로 죽은 여우 한 마리를 끌어내어 화장(火葬)을 시행했다.

백장 화상은 저녁이 되어 법당에 올라가 앞서 있었던 사연을 이야기했다. 황벽 스님이 바로 물었다. "고인이 깨달음의 한마디 말을 잘못해서 500번이나 여우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매번 하나하나 틀리지 않고 말한다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러자 백장 화상은 말했다. "가까이 앞으로 와라. 네게 알려 주겠다."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황벽 스님은 스승 백장의 뺨을 후려갈겼다. 백장 화상은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달마의 수염이 붉다고는 이야기하지만, 여기에 붉은 수염의 달마가 있었구나!" <무문관> 2칙, '백장야호(百丈野狐)'  154-155

죽어서 천국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인간이 살아 낼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려는 것, 이것이 바로 불교의 정신입니다.  155

나가르주나(Nagarjuna, 150?~250?). .. 불교 역사상 가장 탁월한 이론가입니다. 나가르주나는 흔히 제2의 싯다르타이자 동시에 대승불교 여덟 종파의 시조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

그의 주저 <중론(中論)>에 보면 "어떤 존재도 인연(因緣)으로 생겨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空)하지 않은 것이 없다."  156

그저 인연이 맞아서, 혹은 인연이 서로 마주쳐서 무엇인가 생기는 것이고, 반대로 인연이 다해서, 혹은 인연이 서로 헤어져서 무엇인가가 소멸할 뿐입니다. 그러니 무엇인가 생겼다고 기뻐하거나 무엇이 허무하게 사라진다고 해도 슬퍼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공'이라는 개념으로 나가르주나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것을 공하다고 보기에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157-158

핵심은 '있는 그대로'라는 말로 표현되는 불교의 강력한 현실주의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 대부분이 사태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무엇인가 색안경을 끼고 본다는 것을 전제하는 겁니다.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색안경으로 사태를 보는 생각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상견(常見 항상상 볼견)이고, 다른 하나는 단견(斷見 끊을단 볼견)입니다. 글자 그대로 상견이 모든 것에는 '불변하는 것(常)'이 있다는 견해(見)라면, 단견은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변해 '연속성이 없다(斷)'는 견해(見)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상견은 아주 강한 절대적인 인과론이고, 단견은 인과론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상견도, 단견도 버려야만 합니다. 그래야 있는 그대로 사태를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 원인과 결과는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도,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무관한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158-159



혜능 스님이 혜명 상좌가 대유령에까지 추적하여 자기 앞에 이른것을 보고 가사와 발우를 돌 위에 놓고 말했다. "이것들은 불법을 물려받았다는 징표이니 힘으로 빼앗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대가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가도록 하라!" 혜명은 그것을 들려고 했으니 산처럼 움직이지 않지 당황하며 두려워했다. 혜명은 말했다. "제가 온 것은 불법을 구하기 위한 것이지, 가사 때문은 아닙니다. 제발 행자께서는 제게 불법을 보여 주십시오." 혜능 스님이 말했다. "선(善)도 생각하지 않고 악(惡)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바로 그러한때 어떤 것이 혜명 상좌의 원래 맨얼굴인가?" 혜명은 바로 크게 깨달았는데,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혜명은 깨달았다는 감격에 눈물을 흘리며 혜능에게 절을 올리며 물었다. "방금 하신 비밀스런 말과 뜻 이외에 다른 가르침은 없으십니까?" 그러자 혜능은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말한 것은 비밀이 아니네. 그대가 스스로 자신의 맨얼굴을 비출 수만 있다면, 비밀은 바로 그대에게 있을 것이네." 혜명은 말했다. "제가 비록 홍인 대사의 문하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제 자신의 맨얼굴을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오늘 스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것이 마치 사람이 직접 물을 먹으면 차가운지 따뜻한지 스스로 아는 것과 같았습니다. 지금부터 스님께서는 저의 스승이십니다." 그러자 혜능은 말했다. "그렇다면 나와 그대는 이제 홍인 대사를 함께 스승으로 모시는 사이가 된 셈이니, 스스로를 잘 지키시게." <무문관> 23칙, '불사선악(不思善惡)'  164-165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긍정하지 못하는 순간, 인간은 외적인 무엇인가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권력과 지위를 추구하는 것도, 엄청난 부를 욕망하는 것도, 그리고 학위를 취득하려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165

"선과 악을 넘어. 이것은 적어도 좋음과 나쁨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니체의 주저 중 하나인 <도덕의 계보학>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과 악(Good & Evil)'과 '좋음과 나쁨(Good & bad)'을 구별해야만 합니다. 핵심은 '선과 악'의 기준과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선과 악'의 기준은 외적인 권위에 의해 부가되지만, '좋음과 나쁨'은 우리 자신의 삶에서 판단하는 겁니다. 외적인 권위로는 종교적 명령이나 사회적 관습을 들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선악이라는 관념은 우리 자신의 삶에 기원을 두기보다는 외적인 권위에 굴복하고 적응할 때 발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9

선악을 넘어서 좋음과 나쁨을 판단하는 맨얼굴을 회복한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삶의 주인공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을 니체는 초인(Ubermensch)이라고, 혜능은 부처라고 불렀던 겁니다.  170



동산(東山)의 법연 스님이 말했다. "석가도 미륵도 오히려 그의 노예일 뿐이다. 자, 말해 보라! 그는 누구인가?" <무문관> 45칙, '타시아수(他是阿誰)'  172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 1908~2009)는 1955년에 출간된 자신의 주저 <슬픈 열대>에서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문자야말로 계급과 권력이 발생하는 기원이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문자가 출현하면서 문자를 독해할 수 있는 계층과 그렇지 않은 계층으로 사람들이 분화된다는 것입니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오래된 위계적 분업 체계가 발생한 것도 사실 문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174



조주가 어느 암자 주인이 살고 있는 곳에 이르러 물어싿. "계십니까? 계십니까?" 암자 주인은 주먹을 들었다. 그러자 조주는 "물이 얕아서 배를 정박시킬 만한 곳이 아니구나"라고 말하고는 바로 그곳을 떠났다. 다시 조주가 어느 암자 주인이 살고 있는 곳에 이르러 물었다. "계십니끼? 계십니까?" 그곳 암자 주인도 역시 주먹을 들었다. 그러자 조누는 "줄 수도 있고 뺏을 수도 있으며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구나"라고 말하고는 그에게 절을 했다. <무문관> 11칙, '주감암주(州勘庵主)'  189

<서경(書經)>에도 나오지 않던가요. "성인도 망념을 가지면 광인이 되고, 광인도 망념을 이기면 성인이 된다."  195



어떤 스님이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고 묻자, 마조는 말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무문관> 33칙, '비심비불(非心非佛)'  197

마조의 개성을 이해하려면, 그가 자신의 스승 남악(南岳, 677~744)에게서 무엇을 배웠는지 알아야만 합니다. 남악 스님은 바로 육조 혜능(六祖慧能)의 직제자이지요. 마조와 나악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옵니다. 어느 날 남악이 마조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대는 좌선하여 무엇을 도모하는가?" 그러자 마조가 말했습니다. "부처가 되기를 도모합니다." 그러나 남악은 벽돌 한 개를 가져와 암자 앞에서 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기이한 풍경에 마조는 스승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벽돌을 갈아서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당황스런 얼굴로 마조는 물었다고 합니다. "벽돌을 간다고 어떻게 거울이 되겠습니까?" 그러자 남악은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벽돌을 갈아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좌선하여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마조의 이야기를 담은 <마조록(馬祖錄)>에 실려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198-199

더 좋다는 것을 추구하고 더 나쁘다는 것을 피한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외적 가치의 노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런 일체의 가치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아닐까요. .. 평생 남의 꽁무니마 ㄴ쫓아다녀서야 어떻게 자신의 의지대로 한걸음이라도 걸어 보는 경험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처란 무엇인가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집착은 무엇인가에 집중해 마음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200

마조를 상징하는 명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평상시의 마음이 바로 부처가 되는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교종이 자랑하는 불겨엥 대한 지적인 이해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종 전통에서 강조하는 좌선도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그저 평상시의 마음만 유지할 수만 있다면, 바로 그 순간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203

물을 긷고 땔나무를 나를 때도, 제자들에게 몽둥이질을 할 때도, 최고 권력자를 만날 때도, 어느 경우나 '평'의 마음이 '지속'될 때 마침내 우리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204



어느 스님이 말했다. "저는 최근 이 사찰에 들어왔습니다. 스승께 가르침을 구합니다." 그러자 주조는 말했다. "아침 죽은 먹었는가?" 그 스님은 말했다. "아침 죽은 먹었습니다." 조주가 말했다. "그럼 발우나 씻게." 그 순간 그 스님에게 깨달음이 찾아왔다. <무문관> 7칙, '조주세발(趙州洗鉢)'  213

마음을 양파 껍질처럼 벗겨서 제거하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지박이라고 말입니다. 불교의 가르침, 즉 불법은 집착을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불법에 집착하는 것 자체도 집착일 수밖에 없습니다. ..  중요한 것은 내면이냐 외면이냐가 아닙니다. 핵심은 집착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217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순간, 아니면 무엇인가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219



운문 화상이 말했다. "세계는 이처럼 넓은데, 무엇 때문에 종이 울리면 칠조(七條)의 가사를 입는 것인가?' <무문관> 16칙, '종성칠조(種聲七條)'  221

벤야민의 주저 <아케이드 프로젝트(Arcades Project)>에는 "역사의 진보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진보도 항상 그때그때의 1보만이 진보이며 2보도 3보도 n+1보도 결코 진보가 아니다." ...

1보는 걷지 않고서 꿈꾸는 2보도, 3보도, 그리고 n+1보도 단지 백일몽에 불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현실적으로 말해 2보보다는 3보를, 3보다는 4보를, 아니 100보를 꿈꾸는 순간, 우리는 1보 내딛는 것의 중요성을 망각하게 됩니다.  222



'젊은 사람의 소중한 역할이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과 부딪히는 것,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런 가치도 없어!'라고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으며 강압적이라는 걸 스스로 확신하는 데 있다. - 바디우(Alain Badiou, 1937~)  231



위산 화상이 백장 문하에서 공양주의 일을 맡고 있을 때였다. 백장은 대위산의 주인을 선출하려고 위산에게 수좌와 함께 여러 스님들에게 자신의 경지를 말하도록 했다. "빼어난 사람이 대위산의 주인으로 가는 것이다." 백장은 물병을 들어 바닥에 놓고 말했다. "물병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너희 둘은 무엇이라고 부르겠는가!" 수좌가 먼저 말했다. "나무토막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백장은 이어 위산에게 물었다. 그러자 위산은 물병을 걷어차 넘어뜨리고 나가 버렸다. "수좌는 위산에게 졌구나!"라고 웃으면서 마침내 위산을 대위산의 주인으로 임명했다. <무문관> 40칙, '적도정병(?倒淨甁)'  232

모든 사람이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삶을 사는 것, 그래서 들판에 가득 핀 다양한 꽃들처럼 자기만의 향과 색깔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화엄세계입니다.  233

불교의 역사도 마찬가지지만 선종의 역사는 자기가 속한 학파를 극복하는 역사, 혹은 스승의 스타일을 부정하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단독화(singularization)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순간이 바로 깨달음에 이른 순간.  233

스승을 통쾌하게 짓밟고 자신의 길을 가는 것, 이것이 바로 다른 종교나 사상이 범접하기 힘든 불교만의 정신이자 스타일입니다.  234

삶의 주인공은 죽이 되는 밥이 되든 스스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 합니다.  238



흑암 화상이 말했다. "서쪽에서 온 달마는 무슨 이유로 수염이 없는가?" <무문관> 4칙, '호자무수(胡子無鬚)'  240

<이입사행론>은 깨달음에 들어가는(入) 두 가지(二)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입(理入)'이고, 다른 하나는 '행입(行入)'입니다. 이치로 드어가는 지적인 방법과 실천으로 들어가는 실천적인 방법, 이 두 가지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겁니다.  242



어느 스님이 노파에게 "오대산으로 가는 길은 어느 쪽으로 가면 되나요?"라고 묻자, 노파는 "똑바로 가세요." 스님이 세 발짝이나 다섯 발짝인지 걸어갔을 때, 노파는 말했다. "훌륭한 스님이 또 이렇게 가는구나!" 뒤에 그 스님이 이 일을 조주에게 말하자, 조주는 "그래, 내가 가서 너희들을 위해 그 노파의 경지를 간파하도록 하마"라고 이야기했다. 다음 날 바로 노파가 있는 곳에 가서 조주는 그 스님이 물었던 대로 묻자, 노파도 또한 대답했던 대로 대답했다. 조누는 돌아와 여러 스님들에게 말했다. "오대산의 노파는 내가 너희들을 위해 이제 완전히 간파했다." <무문관> 31칙, '조주감파(趙州勘婆)'  266

용기가 있어서 번지 점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번지 점프를 하는 것이 바로 용기가 있는 겁니다. 근기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상근기여서 부처가 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끈덕지게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상근기인 겁니다. 그러니까 산사에는 상근기가 많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산사라는 좋은 조건 때문에 부처가 되려는 열망이 쉽게 식지 않아서 사람들이 끈덕지게 수행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268-269



향엄 화상이 말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나무에 올랐는데, 입으로는 나뭇가지를 물고 있지만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붙잡지도 않고 발로고 나무를 밟지 않고 있다고 하자. 나무 아래에는 달마가 서쪽에서부터 온 의도를 묻는 사람이 있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가 질문한 것을 외면하는 것이고, 만일 대답한다면 나무에서 떨어져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무문관> 5칙, '향엄상수(香嚴上樹)'  282

불교에서는 행동을 업(業, Karman)이라고 합니다. 행동은 그에 걸맞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 바로 이것이 불교의 업보(業報, karma-vipaka)이론입니다. 타인에게 좋든 그르든 강한 결과를 남기는 업을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바로 삼업(三業)이지요. 몸으로 짓는 업을 신업(身業), 말로 짓는 업을 구업(口業), 생각으로 짓는 업을 의업(意業)이라고 부릅니다.  283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해야만 하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에도 침묵해야만 합니다. 침묵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침묵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286



어느 날 덕산 화상이 발우를 들고 방장실을 내려갔다. 이때 설봉 스니이 "노스님!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도 북도 울리지 않았는데,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시나요?"라고 묻자, 덕산 화상은 바로 방상실로 되돌아갔다. 설봉 스님이 암두 스님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암두 스님은 말했다. "위대한 덕산 스님이 아직 '궁극적인 한마디의 말'을 알지 못하는구나!"

덕산 화상은 이 이야기를 듣고 시자(侍者)를 시켜 암두 스님을 불러 오라고 했다. 덕산 화상은 암두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는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암두 스님이 아무에게도 안 들리게 자신의 뜻을 알려 주자, 덕산 스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덕산 화상이 법좌(法座)에 올랐는데, 정말 평상시와 같지 않았다. 암두 스님은 승당 앞에 이르러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이제 노스님이 '궁극적인 한마디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으니 기뻐할 일이다. 이후 세상 사람들은 그를 어쩌지 못하리라." <무문관> 13칙, '덕산탁발(德山托鉢)'  298

누구나 알고 있듯 불교는 자비를 슬로건으로 합니다. 보통 자비는 불쌍한 사람에게 베푸는 연민이나 동정의 뜻으로 쓰이지만, 산스크리트어를 살펴보면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됩니다. 우정을 뜻하는 '마이트리(maitri)'라는 말과 연민을 뜻하는 '카루나(karuna)'로 구성된 합성어가 바로 자비(maitri-karuna)니까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마이트리, 즉 우정 혹은 동료애라는 의미 아닐까요. 자비라는 말에는 근본적으로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라는 수직성보다는 동등한 두 사람이라는 수평성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사람일지라도, 그 역시 우리와 동등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299



오조 법연 화상이 말했다. "길에서 도(道)에 이른 사람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응해서는 안 된다. 자, 말해 보라! 그렇다면 무엇으로 대응하겠는가?" <무문관> 36칙, '노봉달도(路逢達道)'  323

'왜 부처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응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깨달은 사람, 그러니까 주인공으로 삶을 당당히 영위하는 사람은 타인의 평판, 즉 타인의 말이나 침묵에 동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27



조산 화상에게 어느 스님이 물었다. "저 청세는 고독하고 가난합니다. 스님께서는 제게 무언가를 베풀어 주십시오." 조산 화상은 말했다. "세사리!" 그러자 청세 스님은 "네"라고 대답했다. 이어 조산 화상은 말했다. "청원의 백 씨 집에서 만든 술을 세 잔이나 이미 마셨으면서도, 아직 입술도 적시지 않았다고 말할 셈인가!" <무문관> 10칙, '청세고빈(淸稅孤貧)'  334

생면부지의 남이나 혹은 미워하는 사람에게 소중한 것을 주는 행위, 즉 보시는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보시라는 실천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엄청난 의지를 수반하는 수행 행위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사랑하든 그렇지 않든, 나와 관계가 있든 없든 타인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것, 바로 그것이 보시이기 때문이지요.  337



점심 공양 전에 스님들이 법당에 들어와 앉자 청량(淸?)의 대법안 화상은 손으로 발을 가리켰다. 그때 두 스님이 함께 갓 발을 걷어 올렸다. 그러자 대법안 화상은 말했다. "한 사람은 옳지만, 다른 한 사람은 틀렸다." <무문관> 26칙, '이승권렴(二僧卷簾)'  343

세상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상태에 있지 않고, 최소한 세 가지 마음 상태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객(主客) 관계에 사로잡힌 마음 상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번데기는 맛있는 대상이고 자신은 번데기를 좋아하는 주체라고 믿는 사람이거나, 혹은 반대로 번데기는 혐오스러운 대상이고 자신은 번데기를 싫어하는 주체라고 믿는 사람의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들의 특징은 모두 자신의 과거 습관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을 아는 마음 상태를 가진 사람입니다. 번데기가 먹음직스럽거나 혐오스러운 것은 모두 자신의 과거 습관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이 경우에 속할 겁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메커니즘을 알고는 있지만, 그들은 현실에서 여전히 번데기를 좋아하거나 혐오하리라는 점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자신의 과거 습관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는 마음 상태를 가진 사람입니다. 번데기를 기호 식품으로도 혐오 식품으로도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깨달은 사람, 즉 부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344-345



남전 화상이 말했다.

"마음은 부처가 아니고, 앎은 도가 아니다." <무문관> 34칙, '지불시도(智不是道)'  351

참선과 같은 치열한 내성을 거쳤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불성을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스스로 불성을 실현하며 사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354

임제의 말처럼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야" 부처입니다. 홀로 있을때는 주인으로 살 수 있지만 타인과 만났을 때 바로 그 타인에게 휘둘리는 사람이 어떻게 부처일 수 있겠습니까. 결국 혼자 있을 때도 주인이고, 열 명과 함께 있을 때도 주인이고, 만 명과 함께 있을 때도 주인일 수 있어야 우리는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358

자신이 부처가 되었다고 확신하는 것과 실제로 부처가 되었다는 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는 법입니다.  358



석상 화상이 말했다. "100척이나 된느 대나무 꼭대기에서 어떻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겠는가!" 또 옛날 큰스님은 말햇다. "100척이나 된느 대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는 사람은 비록 어떤 경지에 들어간 것은 맞지만 아직 제대로 된 것은 아니다. 100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서 반드시 한 걸음 나아가야, 시방세계가 자신의 전체 모습을 비로소 드러내게 될 것이다." <무문관> 46칙, '간두진보(竿頭進步)'  360

실연을 당한 사람만이 실연한 사람을 제대로 위로할 수 있고, 음악을 제대로 들을 수 있게 된 사람만이 음악을 들으려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  361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 1813~1855)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는 주관적이지만 모든 타인들에 대해서는 객관적,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객관적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정확히 자신에 대해서는 객관적이고 모든 타인들에 대해서는 주관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주저 중 한 권인 <사랑의 역사>에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 '주관적'이라는 말은 'subjective'를 번역한 겁니다. 잘 알다시피 철학에서 ' subject'는 주관이자 주체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에 대해서는 주관적"이라는 말은 자신을 하나의 주체로, 그리고 주인으로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객과적'이라는 뜻을 가진 'objective'는 사물이나 대상을 뜻하는 'object'라는 말에서 유래한 겁니다. 그러니까 "타인드에 대해서는 객관적"이라는 말은 타인을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 본다는 것을 말하는 셈이지요.  364-365

키에르케고르의 주장은 아주 단순합니다. 보통 우리는 자신을 주체로 생각하지만, 타인들은 하나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타인들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물건처럼 생각한다는 겁니다. 타인을 물건처럼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타인을 노예로 부리는 것에 다름 아니니까요. 당연히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타인도 나와 마찬가지로 주체이고 주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무에 대해 이야기했던 겁니다. "정확히 자신에 대해서는 객관적이고 모든 타인들에 대해서는 주관적일 수 있는 것이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고민하니까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고, 이것은 물론 타인을 주관으로, 즉 당당한 주체로 보아야만 가능한 겁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바로 이것이 사랑을 하려는 사람이 반드시 수행해야 할 임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365-366



외도(外道)가 세존에게 물었다. "말할 수 있는 것도 묻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것도 묻지 않으렵니다." 세존은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감탄하며 말했다. "세존께서는 커다란 자비를 내려 주셔서, 미혹의 구름에서 저를 꺼내 깨닫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예의를 표하고 떠나갔다.

아난이 곧 세존에게 물어보았다. "저 사람은 무엇을 깨달았기에 감탄하고 떠난 것입니까?" 그리저 세존은 말했다.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는 좋은 말과 같은 사람이다." <무문관> 32칙, '외도문불(外道問佛))'  376

지적인 허영에 빠진 학생에게는 그 허영을 충족시켜 줄 지적인 대답을 해 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학생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생과 지적인 대화를 한다는 허영심만 가중시킬 테니까요. 제가 아무리 친절하게 대답을 해도 그 학생은 제 이야기를 그냥 지적으로 납득할 뿐, 자신의 삶으로 흡수하지 않을 겁니다.  378

삶의 차원에서 매순간 중요한 문제는 오직 하나일 뿐입니다. 만일 두 가지의 문제가 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삶의 차원이 아니라 머리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자신의 삶을 살아 내지 못하고, 그저 관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379

무문 스님은 서른두 번째 관무을 마무리하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합니다. "계단이나 사다리를 밟지 않아야 하고, 매달려 있는 절벽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계단이나 사다리에 의존해 절벽에 매달려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설 수가 없을 겁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계단이나 사다리가 우리의 당당한 삶을 막고 있었던 셈입니다. 무언가에 의존한다는 것, 그건 우리가 그것에 좌지우지된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도움이 되어도 그것이 외적인 것이라면, 어느 순간 반드시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만 합니다. .. 계단과 사다리로 상징되는 일체의 외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온몸으로 깨닫지 않는다면, 그건 깨달음일 수도 없는 법이니까요. 깨달음은 스스로 주인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82



어떤 스님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법(法)이 있으신가요?"라고 묻자, 남전 화상은 "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스님은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법인가요?" 남전 화상은 말했다. "마음(心)도 아니고, 부처(佛)도 아니고, 중생(物)도 아니다." <무문관> 27칙, '불시심불(不是心佛)'  400

디테일에 빠지지 말고, 그 핵심을 보아야 합니다.  401



오조 법연 화상이 말했다. "비유하자면 물소가 창살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머리, 뿔, 그리고 네 발굽이 모두 창살을 통과했는데, 무엇 때문에 꼬리는 통과할 수 없는 것인가?" <무문관> 38칙, '우과창령(牛過窓櫺)'  409

창이 있는 방을 생각해 보세요. 그곳에 자유를 잃고 갇혀 있는 물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중 한 마리는 남달랐습니다. 구속에 적응하기보다는 구속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으니까요. 자유를 되찾으려는 열망과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어서 인지, 그 물소는 창살을 지나 바깥으로 나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자유의 대로가 펼쳐진 겁니다. 이제 그냥 아무 곳이나 뛰어가면 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몸통이 창살을 통과했다면, 꼬리는 어렵지 않게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요. .. 무엇일까요. 창살을 통과하지 않은 그 물소의 꼬리는? 자유를 되찾은 그 물소는 혼자서 자유를 만끽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자신이 탈출한 방에는 아직도 동료 물소들이 갇혀 있으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물소들이 탈출할 수 있을 때까지, 그는 탈출구를 동료들에게 알려 주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니 꼬리를 창살에 남겨둘 수밖에요. 이것이 자비의 마음, 다시 말해 이타의 마음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416



도솔 종열 화상은 세 가지 관문을 설치해, 배우려는 사람에게 물었다. "깨달은 사람을 찾아 수행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불서을 보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대의 불성은 어디에 있는가? 자신의 불성을 알았다면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어떻게 그대는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하겠는가?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다면 바로 가는 곳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육신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가 흩어질 때, 그대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무문관> 47칙, '도솔감관(兜率三關)'  418

<무문관>의 48개의 관문을 지키고 있는 선사들은 가혹하게 자신이 들고 있는 등불을 꺼 버리면서 제자들이 스스로 불을 켜기를 촉구합니다.  420

새끼들을 절벽에 던지는 호랑이와 같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천 길이나 되는 낭떠러지로 제자들을 무자비하게 밀어붙이니까요.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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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것의 테러


오늘날 타자의 부정성은 같은 것의 긍정성에 밀려나고 있다. .. 박탈이나 금지가 아니라 과잉소통과 과잉소비가, 배제와 부정이 아니라 허용과 긍정이 사회체를 병들게 한다.  7


타자의 폭력만 파괴적인 것이 아니다. 타자의 추방은 아주 다른 파괴 과정을, 즉 자기파괴를 작동시킨다. 타자의 부정성을 거부하는 시스템은 자기파괴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이러한 폭력이 변증법은 보편적으로 작동한다.

같은 것의 폭력은 그 긍정성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다. 같은 것의 창궐은 스스로를 성장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어떠 ㄴ특정한 지점을 넘어서면 생산은 더 이상 생산적이지 않고, 파괴적이며, 정보는 더 이상 정보를 주지 않고 왜곡하며, 소통은 더 이상 소통적이 아니라 그저 누적적이다.

오늘날에는 지각 자체도 "빈지워칭(Binge Watching)"즉 혼수상태에 이르도록 뚫어지게 보기의 형태를 취한다. 이는 어떠한 시간 제한도 없이 비디오와 영화를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 소비자들의 취향에 아주 잘 맞는,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드는 영화와 시리즈 들이 지속적으로 소비자들에게 제공된다. 소비자들은 언제나 새로운 같은 것을 섭취하고 소비가축처럼 살이 찐다. 혼수상태에 이르도록 뚫어지게 보기는 오늘날의 지각 방식 전반으로 일반화될 수 있다. 같은 것의 창궐은 악성종양이 혼수상태처럼 작동한다. 그것은 어떠한 면역 방어의 방해도 받지 않는다.  8


경색은 같은 것의 과잉, 시스템의 비만으로 인해 일어난다. 경색은 감염적이 아니라 과지방적이다. 지방에 대해서는 항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9


같은 것은 형태가 없다. 같은 것에는 변증법적인 긴장이 없기 때문에 서로 무관심한 병존, 서로 구별되지 않는 창궐하는 덩어리가 생겨난다.  9


오늘날 같은 것의 테러는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산된다. 우리는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면서도 하나의 경험도 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인지하면서도 어떤 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정보와 데이터를 쌓으면서도 어떤 지식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체허모가 흥분을 애타게 추구하면서도 언제나 같은 상태로 남아 있다. 친구와 팔로워를 쌓으면서도 어ㄸㄴ 타자도 만나지 못한다. 사회 매체들은 사회적인 것의 절대적인 소멸 단계를 보여준다. 

전면적인 디지털 네트워크와 소통은 타자와의 만남을 쉽게 해주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히려 낯선 자와 타자를 지나쳐 같은 자와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발견하도록 하고, 우리의 경험 지평이 갈수록 좁아지게 만든다.  10


타자의 부정성과 변모가 엄밀한 의미에서의 경험을 만들어낸다. 어떤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우리를 기습하는 것, 우리를 맞히는 것, 우리를 덮치는 것,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 우리를 변모시키는 것"을 말한다. 경험의 본질은 고통이다. 그러나 같은 것은 고통을 주지 않는다. 오늘날 고통은 같은 것을 지속시키는 '좋아요'에 밀려난다.

정보는 단순하게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에 반해 엄밀한 의미에서의 지식은 느리고 긴 과정이다. 지식은 아주 다른 시간성을 지닌다. 지식은 성숙한다. 성숙은 오늘날 우리가 점점 잃어버리고 있는 시간성이다.  11


정보들을 가장 대규모로 모아놓은 빅데이터에도 지식은 거의 들어 있지 않다. 빅데이터는 상관성을 조사하는 데 사용된다. 상간성이란 A가 발생하면 흔히 B도 발생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알지 못한다. 상관성은 인과관계, 즉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조차 밝혀내지 못하는 가장 원시적인 지식의 형태다. 그것은 그렇다. 왜라는 질문은 제기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것도 파악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식은 파악하기다. 빅데이터는 이렇게 사유를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은 그렇다'에 만족한다.

사유는 아주 다른 것으로 진입할 수 있다. 사유는 같은 것을 중단시킬 수 있다. 그래서 사유는 사건성을 지닌다. 이에 반해 계산은 같은 것의 무한한 반복이다. 사유에 반해 계산은 어떤 새로운 상태도 낳을 수 없다. 계산은 사건을 모른다. 반면, 진정한 사유는 사건적이다.  11-12


엄밀한 의미에서의 인식도 변모를 낳는다. 인식은 새로운 의식의 상태를 산출한다. 인식의 구조는 구원의 구조아 비슷하다. 구원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구원은 구원이 필요한 자를 완전히 다른 존재 상태로 옮겨 놓는다.  12-13


사건에는 부정성이 내재한다. 사건은 현실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새로운 세계를, 있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낳기 때문이다. 사건은 갑자기 모든 것이 아주 새로운 빛 속에서 나타나도록 한다. 하이데서(Martin Heidegger)가 말하는 "존재망각(Seinsvergessenheit)"이란 바로 이 사건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14


오늘날 네트는 모든 다름, 모든 낯섦이 제거된 특별한 공명 공간으로, 메아리의 방으로 변하고 있다. 진정한 공명은 타자의 가까움을 전제로 한다. 오늘날 타자의 가까움은 같은 것의 무간격에 밀려난다. 지구적인 소통을 같은 타자 혹은 다른 같은 자만을 허용한다.

가까움에는 그 변증법적인 상대방으로서 멂이 새겨져 있다. 멂의 제거는 가까움을 키우지 않고, 오히려 가까움을 파괴한다. 가까움 대신 완전한 무간격이 생겨난다. 가까움과 멂은 서로 얽혀 있다. 변증법적인 긴장이 양자를 결합시킨다. 사물들이 그 대립물, 즉 그 자신의 타자에 의해 활력을 얻는다는 것이 이 긴장의 핵심이다. 무간격과 같은 단순한 긍정성에는 이런 활력을 주는 힘이 없다. 가까움과 멂은 동일자와 타자처럼 서로를 변증법적으로 매개한다. 그러므로 무간격도, 같은 것도 활력이 없다.  15


디지털 무간격은 가까움과 멂의 모든 변주 형태들을 제거한다. 모든 것이 똑같이 가깝고, 똑같이 멀다. ... 아우라에는 타자, 낯선 자, 수수께끼의 부정성이 내재한다. 디지털 투명사회는 세계의 아우라를 없애고, 신비를 없앤다.  16


타자의 추방은 충만함의 비만한 공허를 낳는다. 같은 것이 질주하는 정지 상태를 초래하는 과잉가시성, 과잉소통, 과잉생산, 과잉소비는 외설적이다. "같은 것을 같은 것과 연결하는 것"은 외설적이다. .. 

유혹의 양태는 성과와 생산에 대립되는 양태로서의 유희다. 오늘날에는 유희조차 생산 형태로 바뀌고 말았다. 노동이 게임화되는 것이다.  17


클론들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모두가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18




세계적인 것의 폭력과 테러리즘


세계화는 모든 것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것, 비교할 수 있는 것(vergleichbar)으로, 따라서 같은 것으로 마드는 폭력적 힘이 있다. 전면적인 같게-만들기(Ver-Gleicben)는 궁극적으로 의미의 소멸을 낳는다. .. 같은 것이 같은 거소가 만나는 지점에서 세계적인 것은 최고 속도에 도달한다.  21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이미 세계화의 광기가 테러리스트라는 광인을 만들어 낸다고 지적한 바 있다.  22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일반적인 교환에 순응하지 않는 모든 단독적인 것을 쓸어 없앤다. 테러리즘은 세계적인 것에 맞서는 단독적인 것의 테러다. 어떤 교환도 거부하는 죽음은 단독적인 것 그 자체다. 죽음은 테러리즘과 함께 시스템 속으로 난폭하게 침입한다. 시스템 안에서 삶은 생산과 성과로 전체화된다. 죽음은 생산의 종말이다. 테러리스트들의 죽음 예찬과 삶을 그저 삶으로서 무조건 연장하려고만 하는 오늘날의 건강 히스테리는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다. "너희는 삶을 사랑하고, 우리는 죽음을 사랑한다"라는 알카에다의 구호는 바로 이런 체계적인 연관을 지적하고 있다. 22-23


신자유주의는 세계적 차원에서 엄청난 불의를 낳고 있다. 착취와 배제는신자유주의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신자유주의는 체제비판적인 혹은 체제에 부적합한 사람들을 달갑지 않은 인물들로 확인하고 배제하는 "반옵티콘(banopticon)", 즉 추방의 옵티콘을 구축한다. 판옵티콘(panopticon)은 훈육을 위해 작동하지만, 반옵티콘은 안전을 위해 작동한다. 서양의 복지 지역 안에서조차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철폐한다.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의 창시자인 알렉산더 뤼스토우(1885~1963, 독일의 사회학자, 경제학자)는 이미 신자유즈의적 시장법칙에만 맡겨지면 사회는 반인간적으로 변하고, 사회적인 배척을 야기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그는 연대와 공동체의식을 산출하는 "생명정치(Vitalpolitik)"로 신자유주의를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24-25


자신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외국인에대한 적대적 태도로 바뀐다. 자신에 대한 걱정은 외국인에대한 증오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증오로도 표현된다. 두려움의 사회와 증오의 사회는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다.  ... 

이슬람 테러리스트와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는 실제로는 적이 아니라 형제다. 양자는 동일한 발생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25


오늘날, 같은 것을 전체화하는 세계적인 것의 지배적인 질서 안에는 사실상 같은 다른 것 혹은 다른 같은 것밖에 없다. 새로 설치된 경계 울타리들 주변에서는 타자에 대한 환상이 생겨나지 않는다.  26


이주자들과 난민들도 실제로는 실재하는 위협, 현실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타자도, 낯선 자도 아니다. 이들은 오로지 상상적인 것 속에만 있다. 이주자들과 난민들은 오히려 부담으로 여겨진다. 이웃이 될 수도 잇는 그들이 일으키는 감정은 분노와 질투인데, 이는 공포와 두려움, 역겨움과는 달리 진정한 면역 반응이 아니다. 외국인에게 적대적인 대중은 북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반감을 느끼지만, 바로 이 대중이 북아프리카로 패키지여행을 떠난다.  27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라(Protect me from what I want)"라는 제니 홀저(미국의 개념미술가)의 구호는 긍정성의 폭력이 지닌 탈면역적인 성질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28


신자유주의는 절대 계몽주의의 종착지가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이성에 의해 인도된 것이 아니다. 바로 신자유주의는 광기가 테러리즘과 민족주의의 형태로 분출되는 파괴적 긴장을 산출한다. 신자유주의는 자신을 자유로 내세우지만, 이 자유는 광고다. 세계적인 것은 오늘날 보편적 가치들까지 잠식하고 있다. 그 결과 자유 자체가 착취당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실현한다는 망상에 빠져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한다. 자유의 억압이 아니라 자유의 착취가 생산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으의 비열한 기본 논리다.

세계적인 것의 폭력에 맞서 우리는 보편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에 의해 잠식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따라서 단독적인 것에도 자신을 열어놓는 보편적 질서를 반드시 만들어내야 한다. 세계적인 것의 시스템에 폭력적으로 침입하는 단독적인 것은 대화를 허락하는 타자가 아니다. 테러리즘은 대화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악마적이다. 멂과 다름이 허용된 가까움 속에 머무르는 화해된 상태에서만 단독적인 것은 악마성을 버릴 것이다.  28-29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실제의 세계 전쟁처럼 사망자들과 난민들을 만들어낸다. 상업정신이 강요하는 평화는 한시적일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반옵티콘으로서의 복지 지역 혹은 복지의 섬은 경계를 표시하는 울타리들과 난민수용소와 전쟁터로 둘러싸여 있다.  30


이성에 의해 세워진 영구 평화에 대한 칸트의 관념은 무조건적인 "환대"에 대한 요구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이에 따르면 모든 이방인은 다른 나라에서 체류할 권리를 지닌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평화로운 태도를 유지하는 한" 적대적으로 취급받지 않고 머무를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지구상의 어떤 장소에 있을 권리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갖고 있지 않다." 환대는 유토피아적 표상이 아니라 이성이 강요하는 관념이다. "앞선 조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우리는 인간애가 아니라 권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환대(손님으로 머무를 권리)는 이방인이 타지 사람의 땅에 도착했다는 이유로 타지 사람에 의해 적대적으로 취급받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환대는 "법에 대한 공상적이거나 과장된 표상 방식이 아니라, 공적인 인권 자체를 위해, 따라서 영구 평화를 위해 국내법과 국제법의 성문화되지 않은 법전을 보충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조건을 충족시킬 때만 우리는 영구 평화를 향해 지속적으로 접근해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환대는 자기 자신에 도달한 보편적 이성의 가장 높은 표현이다. 이성은 동질화하는 힘을 행사하지 않는다. 이성은 친절함을 통해 타자를 그 타자성 안에서 인정하고 환영할 수 있게 된다. 친절함은 자유를 의미한다.

환대의 관념은 이성을 넘어서서 보편적인 무언가를 제시한 다.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환대가 "너무나 풍요로운 영혼"의 표현이라고 했다. 이런 영혼은 모든 단독적인 것들을 자신 안에 머물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생성 중인 것, 떠도는 것, 추구하는 것, 덧없는 것을 나는 여기서 환영한다! 이제 환대는 나의 유일한 친교관계다." 환대는 화해를 약속한다. 미적으로 그것은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낯선 것에 대한 우리의 선의와 인내심과 공평함과 온유함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된다. 이 보상은 낯선 것이 천천히 자신의 베일을 벗고, 새롭고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음으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이루어진다-이것이 우리의 환대에 대한 그의 감사다." 아름다움의 정치는 환대의 정치다.  31-33


한 사회의 문명화 정도를 보여주는 척도는 바로 이 사회의 환대, 나아가 친절함이다. 화해는 친절함을 뜻한다.  33




진정성의 테러


오늘날 진정성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진정성은 신자유주의의 모든 광고들과 마찬가지로 해방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진정하다는 것은 사전에 만들어진, 외부에서 정해진 표현과 태도의 틀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말한다. 진정성은 오직 자기 자신과만 같을 것, 오로지 자신을 통해서만 자신을 정의할 것, 자기 자신의 저자이자 원작자일 것을 강요한다. 진정성의 명령은 자신에 대한 강제를 만들어낸다. 영구적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자신을 듣고, 자신을 엿보고, 자신을 포위하라는 강제 말이다. 그럼으로써 진정성의 명령은 나르시시즘적인 자기관계를 첨예화한다.

진정성의 강제는 자아로 하여금 자신을 생산하도록 강요한다. 진정성은 궁극적으로 자아의 신자유주의적 생산 형태다. 진정성은 만인을 자기 자신의 생산자로 만든다.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의 자아는 자신을 생산하고, 자신을 실행시키고, 자신을 상품으로 내놓는다. 진정성은 판매 논리다. 

오로지 자신하고만 같고자 하는 진정성의 노력은 타인들과의 영구적인 비교를 낳는다. 같게0만들기의 논리는 다름을 같음으로 바꾼다. 그 결과 다름의 징정성은 사회적인 동형성을 고착시킨다. 이 진정성은 시스템과 일치하는 차이만을, 다시 말해 잡다함만은 허용한다. 신자유주의적 용어로서의 잡다함은 착취할 수 있는 자원이다. 이런 잡다함은 어떠한 경제적 활용도 거부하는 상이성과 대립한다.

오늘날에는 누국나 타인들과 다르고자 한다. 그러나 이 타인과 다르고자 함 속에서 같은 것이 계속된다. 이는 보다 높은 차원의 동형성이다. 같음은 다름을 관통하여 계속 자신을 고수한다. 다름의 진정성은 오히려 억압적인 획일화보다 더 효과적으로 동형성을 관철시킨다.  34-35


신자유주의적 생산 전략으로서 진정성은 상품화할 수 있는 차이들을 산출한다. 이를 통해 진정성은 자신을 물질화하는 상품들의 다양성을 증가시킨다. 개인들은 자신의 진정성을 무엇보다 소비를 통해 표현한다. 진정성의 명령은 자율적인 주권자로서의 개인을 형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명령은 상업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다.

진정성의 명령은 나르시시즘적인 강제를 낳는다. 나르시시즘은 병적인 것과는 무관한, 건강한 자기애가 아니다. 건강한 자기애는 타자에 대한 사랑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나르시시즘은 타자를 보지 못한다. 타자는 에고가 이 타자 안에서 자신을 알아볼 때까지 계속 왜곡된다.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는 세계를 오로지 자신의 음영으로만 지각한다. 그 불행한 결과가 타인의 소멸이다. 자신과 타인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자신이 용해되어 불명료해진다. 자아는 자신 안에서 익사한다. 이에 반해 안정된 자아는 타인에 직면할 때 비로소 형성된다. 이와 달리 과도하고 나르시시즘적인 자기연관은 공허감을 낳는다.  37-38


자존감은 나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다. 이를 위해서 나는 나를 사랑하고, 칭찬하고, 인정하고, 높이 평가해주는 타자를, 충족을 제공해주는 기관으로서의 타자를 필요로 한다. 인간의 나르시시즘적 고립화, 타자의 도구화, 전면적인 경쟁은 충족이 생겨날 수 있는 환경을 파괴한다. 나를 확인해주고 인정해주는 시선이 사라지고 있다. 안정된 자존감을 갖기 위해 나는 내가 타인들에게 중요한 사람이며, 타인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표상을 필요로 한다.  40


모든 부정성의 제거가 오늘날 사회의 특징이다. 소통 또한 매끄러워져서 서로 만족감을 교환하는 행위가 된다. 슬픔처럼 부정적인 감정에는 어떤 언어도, 어떤 표현도 제공되지 않는다. 타인으로 인한 상처의 모든 형태가 회피된다. 그러나 이는 자기상해로 부활한다. ..

알랭 에랭베르(Alain Ehrenberg)에 따르면 우울증이 증가하는 것은 사람들이 갈등 관계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오가와 최적화를 중시하는 오늘날의 문화는 갈등을 처리하는 작업을 허용하지 않는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 때문이다. 오늘날의 성과주체는 오직 두 가지의 상태만을 알고 있다. 기능하기와 실패하기다. 이 점에서 성과주체는 기계와 비슷하다. 기계 또한 갈등을 알지 못한다. 기계는 오류없이 기능하거나, 아니면 고장이 났다.

갈등은 파괴적이지 않다. 갈등에는 건설적인 측면이 있다. 갈등을 통해서야 비로소 안정된 관계와 정체성이 성립된다. 사람은 갈등을 처리하는 작업을 하는 가운데 성장하고 성숙한다. 생채기를 내는 행윈느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갈등 처리 과정 없이, 누적된 파괴적 긴장을 신속하게 완화시켜준다는 점에서 유혹적이다. 생채기로 인한 화학 과정이 신속하게 긴장을 완화한다고 한다. 몸이 스스로 산출하는 마약이 뿌려진다는 것이다. 이 마약은 항우울제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항우울제 또한 갈등 상태를 억압함으로써 우울한 성과주체가 신속하게 기능하도록 만든다.  41-42


셀카 중독도 자기애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셀카 중독은 고립된 나르시시즘적 자아의 공회전일 뿐이다. 내면의 공허에 직면하여 사람들은 자신을 생산하려고 헛되이 노력한다. 그러나 공허만 재생산된다. 셀카는 공허한 형태의 자아다. 셀카 중독은 공허감을 강화한다. 자기애가 아니라 나르시시즘적인 자기관계가 셀카 중독을 낳는다. 셀카는 텅 빈, 불안한 자아의 매끄러운 표면이다. 고통스런 공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오늘날 면도날을 들거나 스마트폰을 쥔다. 셀카는 공허한 자아를 잠시 동안 은폐하는 매끄러운 표면이다. 그러나 셀카를 뒤집으면 피가 흐르는 상처들로 가득한 뒷면을 보게 된다. 셀카의 뒷면은 상처들이다  42-43




두려움


두려움은 아주 다른 것의 부정성을 전제로 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두려움은 존재자의 전적인 타자로서 경험되는 무 앞에서 생겨난다. 존재자의 전적인 타자로서 경험되는 무 앞에서 생겨난다.  45


"세인(das man, 世人 대(代, 대신할대)세 사람인)"은 사회적인 동형성을 체현한다. 세인은 우리가 어떻게 살고, 행동하고, 지각하고,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는지를 정한다. "우리는 세인이 향유하는 대로 향유하고 즐긴다. 우리는 문학과 예술에 대해 세인이 보고 판단하는 대로 읽고, 보고, 판단한다. (...) 우리는 세인이 괘씸하게 생각하는 것을 '괘씸하다'라고 생각한다." "세인"인 독재는 현존재로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으로부터, 고유성으로부터 소외시킨다. "이 안정화된, 모든 것을 ' 이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자기-같게 하기 속에서 현존재는 소외로 빠져든다. 이 소외 속에서 현존재에게는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이 은폐된다." 익숙한 이해 지평의 붕괸느 두려움을 낳는다. 두려움 속에서 비로소 현존재에게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의 길이 열린다.

지금은 "세인"의 특징인, "모든 타인이 다른 타인과 같은" 획일성이 지배하지 않는다. 획일성은 생각들과 선택지의 잡다함에 밀려난다. 잡다함은 제체 순응적인 차이들만 허락한다. 잡다함은 소비할 수 있게 만든 다름이다. 이 잡다함은 획일성보다 더 효과적으로 같은 것을 지속시킨다. 가상적이고 피상적인 다양성으로 인해 우리는 같은 것의 체계적인 폭력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양성과 선택 가능성은 실제로는 없는 다름이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한다.  46-47


하이데거가 말하는 "고유성"은 진정성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심지어 진정성과 대립하기까지 한다. <존재와 시간>의 용어에 따르면 오늘날의 진정성은 "비고유성"의 한 형태다. 고유성은 일상성의 붕괴를 전제로 한다. 안정화하는 세인의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 현존재는 집 바깥의 섬뜩함에 직면한다. 이에 반해 다름의 진정성은 일상성의 질서 속에서 발생한다. 진정한 자신은 자신의 상품 형태다. 그는 소비를 통해 자신을 실현한다.  47


정신은 "부정적인 것을 똑바로 쳐다보고, 부정 적인 것의 곁에 머무를 때만 이 힘"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부정적인 것 곁에 머무르는 대신 그것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긍정적인 것을 고수하면 같은 것만 재생산된다. 부정성의 지옥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성의 지옥도 있다.  49


익숙한 세계으 부오기가 일으키는 두려움은 깊은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깊은 권태와 비슷하다. 얕은 권태는 불안하게 "바깥을 향해 안달한다." 깊은 권태에 빠질 때는 현존재가 모조리 우리로부터 분리된다...

깊은 권태는 지금은 나는 권태를 느낀다는 상태 속에 방치되고 있지만 현존재를 움켜잡을 수도 잇는 저 행동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깊은 권태는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움켜잡으라고, 다시 말해 행동하라고 현존재에게 요구한다. 깊은 권태에는 요구하는 성질이 있다. 그것은 말하낟. 그것은 목소리가 있다. 과잉활동에 수반되는 오늘날의 권태에는 언어가 없다. 이 권태는 침묵한다.  50


오늘날은 존재론적 무차별성이 지배하고 있다. 사유도 삶도 자신의 내재성의 차원을 스스로 보지 못하게 하고 있다.  51


오늘날의 두려움은 병원학적으로 아주 다른 원인을 갖는다. .. 그것은 일상적인 동의 안에서 생겨난다. 그것은 일상적인 두려움이다. 그것의 주체는 "세인"이다. "자아는 타자를 기준으로 삼고, 더 이상 보조를 맞출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게 된다. (...) 타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내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표상이 이렇게 사회적 두려움의 원인이 된다. .. 

하이데거가 말하는,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과 고유한 자기존재를 택할 결단을 내린 현존재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지향한다. .. 내부 지향은 타인과의 영구적인 비교를 필요 없게 만든다.  52-53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실패와 좌절과 배척에 대한 두려움, 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결정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자신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리라는 두려움 등 여러 막연한 두려움에 고통받고 있다. 이 두려움은 타인들과의 지속적인 비교로 인해 강화된다. 이 두려움은 전적인 타자, 섬뜩한 것, 무 앞에서 느끼게 되는 수직적인 두려움과 반대로 수평적인 두려움이다.  53


신자유주의의 기만적인 논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두려움이 생산성을 높인다.  54




문턱


두려움은 문턱에서도 깨어난다. 두려움은 문턱에서 생기는 전형적인 느낌이다.문턱은 미지의 것으로 넘어가는 이행의 장소다. 문턱 너머에서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 상태가 시작된다. 그래서 문턱에는 항상 죽음이 새겨져 있다. 모든 이행의 이식들, 이른바 통과의례(rites de passage)에서 우리는 한 번 죽고, 문턱의 저편에서 다시 태어난다. 여기서 죽음은 이행으로 경험된다. 문턱을 넘어가는 사람은 자신을 변신에 내맡긴다. 변신의 장소로서 문턱은 고통을 준다. 문턱에서 고통의 부정성이 내재한다. "문턱의 고통을 느낀다며느 너는 관광객이 아니다. 네게는 이행이 일어날 수 있다." 오늘날 문턱이 많은 이행은 문턱이 없는 통로에 밀려난다. 인터넷 속에서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관광객이다. 우리는 더 이상 문턱에 거주하는 호모 돌로리스(homo doloris, 슬픔의 인간)가 아니다. 관광객은 변신과 고통을 수반하는 경험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상태에 머무른다. 그들은 같은 것의 지옥을 여행한다.  55-56


투명성의 강젠느 모든 시각적 빈틈과 정보의 빈틈을 제거하고, 모든 것을 전면적인 가시성에 내놓는다. 그리고 후퇴와 보호의 공간들을 모조리 제거한다. 그 결과,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위협적일 만큼 가깝게 다가온다. 우리를 차단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는 우리 자신이 세계적인 네트워크 안에 있는 통로에 지나지 않는다. 투명성과 과잉소통은 우리를 보호해주는 모든 내면성은 앗아간다. 실로 우리는 이 내면성을 자발적으로 양도하고 우리 자신을 디지털 네트워크에 내던진다. 그리고 이 네트워크는 우리를 관통하고, 투광(透光 통할투 빛광)하고, 우리에게 구멍을 숭숭 뚫어 놓는다. 디지털 과잉조명ㅇ과 노출은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이 과도함으로 인한 잠재적인 두려움을 낳는다. 같은 것의 투명한 지옥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계속 강화되어가는 같은 것의 소음은 두려움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57




소외

(독일어의 소외(Entfremdung), 이방인(der Fremde), 낯섦(die Fremheit)은 모두 '낯설다'는 뜻의 형용사 fremd에서 파생된 말이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소설 <이방인>은 낯섦을 존재와 실존의 근본적인 감정으로 서술한다. 인간은 세계에 대해 이방인이며, 인간들 사이에서 이방인이며, 나아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방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는 언어 창살에 의해 타인들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낯섦은 말없음으로 나타난다. 각자는 언어 창살로 타인들로부터 격리된 감방에 갇혀 있다 이 낯섦은 오늘날의 과잉소통 시대에도, 안락함의 지대 혹은 백화점으로서의 세계에도 속하지 않는다.  58


오늘날 우리는 이방인의 부정성이 제거된 안락함의 지대에서 산다. 좋아요가 이곳의 구호다. 디지털 화면은 점점 더 우리를 낯선 것, 섬뜩한 것의 부정성으로부터 차단한다. 오늘날 낯섦은 정보와 자본의 순환을 가속화하는 데 장애가 되므로 달갑지 않게 여겨진다. 가속화 강제는 모든 것을 같은 것으로 획일화한다. 과잉소통의 투명한 공간은 비밀도, 낯섦도, 수수께끼도 없는 공간이다.

소외로서의 타자도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의 노동관계는 소외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는 서술할 수 없다.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란 노동자가 자기 노동의 생산물을 낯선 객체로 대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에서도, 자신의 행위에서도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 노동자는 더 많은 재화를 생산할수록 더 빈곤해진다. 그는 자신의 생산물을 박탈당한다. 노동자의 행위는 그의 탈현실화를 초래한다. "노동의 실현은 노동자가 아사(餓死 주릴아 죽을사)에 이르도록 탈현실화될 만큼 지극한 탈현실화로 나타난다." 노동자가 자신을 소모할수록, 그만큼 더 그는 착취하는 타자의 지배를 받게 된다. 마르크스(Karl Marx)는 소외와 탈현실화로 이끈느 이 지배관계를 종교와 비교한다. "인간이 신에게 더 많은 것을 부여할수록, 인간 안에 남아 있는 것은 줄어든다. 노동자는 자신의 삶을 대상 속에 투여한다. 그러나 이제 그의 삶은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라 대상의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 활동이 커질수록 노동자는 더 대상을 상실한다. 그의 노동의 생산물은 그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생산물이 커질수록 노동자 자신은 더 작아진다." 노동관계 속의 소외로 인해 노동자는 자신을 실현할 수 없다. 그의 노동은 지속적인 자기 탈현실화다.  60-61


나는 나를 실현한다느 믿음 속에서 자발적으로 나 스스로를 착취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비열한 논리다. 소진(Burn-out)에 대한 열광의 첫번째 단계가 그러하다. 나는 열광적으로 노동 속으로 뛰어들어 결국 쓰러진다. 나는 죽음에 이르도록 나를 실현한다. 나는 죽음에 이르도록 나를 최적화한다. 신자유주의의 지배는 망상적인 자유 뒤에 숨어 있다.  62


오늘날에는 새로운 형태의 소외가 생기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세계나 노동으로부터의 소외가 아니라, 파괴적인 자기소외, 즉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다. 이 자기소외는 다름 아닌 자기최적화 및 자기실현과 더불어 생겨난다.  62




반체(反體 되돌릴반 몸체)


"객체(Object)"라는 말은 내던지다. 앞에 두다, 앞에 던지다와 같은 뜻을 지닌 라틴어 동사 오비케레(obicere)에서 유래한다. 객체는 무엇보다도 반대다. 나에게 대립하는 것, 나를 향해 던져지고 내게 맞서는 것, 나를 거역하는 것, 내게 반대하고 저항하는 것이다. 이것이 객체의 부정성이다. 이의 혹은 반론을 뜻하기도 하는 프랑스어 오브젝시옹(objection)에는 객체의 이런 의미 차원이 남아 있다.  64


오늘날 반대의 소멸은 모든 차원에서 일어난다. '좋아요'는 오비케레에 대립한다. 이제는 모든 것이 '좋아요'를 요구한다. 반대의 전적인 부재는 이상적 상태가 아니다. 반대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런 완충장치도 없이 우리 자신에게로 추락하기 때문이다. 반대의 부재는 자기침식을 낳는다.  68




시선 


독서는 주시(注視 물댈주 볼시)됨을 의미한다.  71


영화 <달콤한 인생(La Do;ce Vita)>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먼동이 틀 무렵 파티에서 밤을 새운 사람들이 해변으로 나가 거대한 가오리가 바다에서 건져지는 것을 관찰한다. 카메라는 가오리의 크고 심원한 눈을 근접 촬영으로 보여준다. 주인고 ㅇ마르첼로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저놈이 계속 노려보는군." 자크 라캉은 여러 번 이 장면을 파고 들었다. <정신분석의 윤리 : 세미나7>에서 그는 우리를 쳐다보는 가오리를 흉측한 "사물"로 서술한다. "날이 밝아올 때, 향락자들의 그룹이 떨리는 빛 속에서 곧 헤어질 것처럼 해변의 소나무 줄기들 사이에 가만히 서 있다가 갑자기 무엇을 목표로 삼는지도 알 수 없이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 바로 이 순간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내가 말한 저 유명한 사물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 순간을 좋아했다. 그 사물이한 그물에 갇혀 바다에서 건져지는 어떤 흉측한 것이었다.

라캉이 말하는 "사물"은 영상으로부터, 재현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얼룩, 오점이다.  71-72


사물은 나를 쳐다보는 전적인 타자다. 그래서 사물은 두려움을 낳는다. "바로 그것이 극도로 우리를 쳐다보는 것, 우리에게 관여하는 것이며, a(라캉이 말하는 대상 a는 결여된 타자로서 욕망의 원인이자 대상이다)의 명령을 받는 욕망의 장소에서 어떻게 보는 행위로부터 두려움이 생겨나는지를 밝혀준다.  73


사르트르(Jean-Paul sartre)에게도 타자는 시선으로 나타난다. 사르트르는 시선을 인간의 눈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제한하지 않는다. 주시된다는 것은 오히려 세계 내 존재의 핵심적인 측면이다. 세계는 시선이다. 나뭇가지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나 반쯤 열린 창문, 혹은 커튼의 가벼운 움직임도 시선으로 지각된다. 오늘날 세계에는 시선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주시된다거나 어떤 시선에 내맡겨져 있다는 느낌을 거의 받지 않는다. 세계는 우리의 마음에 들고자 하는 눈요기로 나타난다. 디지털 화면도 시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윈도우(Windows)는 시선 없는 창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시선으로 부터 차단한다.  74-75


오늘날 시선은 여러 층위에서 사라지고 있다. 지배도 시선 없이 이루어진다. 벤담(Jeremy Bentham)이 말한 판옵티콘은 시선의 지배에 기초한다. 판옵티콘에 갇힌 수감자들은 감시자의 시선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 감시탑에 있는 감시자는 모든 것을 보지만, 그 자신은 보이지 않도록 구성 되어 있다. "판옵티콘은 보기와 보이기라는 쌍을 분리시키기 위한 기계다. 감시탑을 둘러싼 원형 건물에 있는 수감자는 완전히 보이지만, 그 자신을 전혀 볼 수 없다. 중앙탑에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보지만, 그 자신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수감자들은 중앙탑의 실루엣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감시당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감시자가 없을 때에도 언제나 주시되고 있다고 느낀다. 시선의 지배는 중앙원근법적이다.  75-76


디지털 매체는 시선 없는 매체라는 점에서 시각적 매체와 구별된다. 사실은 옵티콘(opticon, '모든 것을 본다'는 의미의 판옵티콘(panopticon)에서 '모든 것'을 뜻하는 pan을 뺀 opticon은 '보는' 구성물을 의미한다.)이라고 할 수도 없는 디지털 판옵티콘 또한 시선에, 중앙원근법적 광학에 의존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디지털 판옵티콘은 아날로그 판옵티콘보다 훨씬 많이, 나아가 훨씬 더 깊이 본다. 여기서 중앙과 주변의 구별은 아무 의미가 없다. 디지털 판옵티콘은 원근법 없이 작동한다. 원근법 없는 전면 조명은 원근법적 감시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우리를 모든 측면에서, 심지어 내부로부터도 샅샅이 비추기 때문이다. 시선은 생각을 파고들 수 없다. 그러나 디지털 판옵티콘에서는 생각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빅데이터에는 시선이 전혀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중앙원근법적인 감시와는 반대로 원근법 업슨 전면 조명에는 맹점이 전혀 없다. ..

디지털 판옵티콘의 수감자들은 누군가 자신으 ㄹ주시한다고, 다시 말해 감시받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롭다고 느끼며, 자발적으로 자신을 노출시킨다. 디지털 판옵티콘은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착취한다.  77-78




음성 


음성은 다른 곳으로부터, 바깥으로부터, 타자로부터 온다. 우리가 듣는 음성은 장소를 전혀 특정할 수 없다. 서양의 형이상학이 음성을 직접적 자기현존의, 직접적 현재의 장소로 선호했고, 음성이 의미와 로고스에 특별히 가깝다고 생각한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유명한 음성중심주의 테제는 음성의 탈영토성을 전혀 보지 못한다. 시서노가 마찬가지로 음성은 오히려 자기현존과 자기투명성을 파괴하고, 자기 안에 전적인 타자, 미지의 것, 섬뜩한 것을 써 넣는 매체다.  79


카프카는 음성을 타자의, 전적인 타자의 매체로 자주 등장시킨다. 약점, 형이상학적인 허약함, 근본적인 수동성이 비로소 타자의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해준다. 밀레나(Milena Jesenska, 1896~1944 : 1920년 즈음에 카프카의 애인이었다.)에게 보낸 편지에서 카프카는 예언자들을 "음성이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뇌가 찢어지는 듯한 두려움"을 느낀 "허약한 아이들"에 비교했다. 그들은 타자의 위력적인 음성 앞에서 허약하다. 음성의 에로틱함 또한 "심리적 주체"가 "자신을 견고하게 만드는 것"을 가로막는 데 있다. 음성은 주체를 허약하게 만든다. 주체는 자신을 잃어버린다. 음성은 "자기상실"로 이끈다.  82


칸트의 이성 또한 명령하는 음성으로서 등장한다. 행복과 감각적 성향에 맞서 오로지 도덕 법칙에, "이성의 음성"에, "악한들조차 떨게 만드는" "천상의 음성"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바로 인륜성이다. 하이데거는 이성의 음성 대신 "양심의 음성"을 내세운다. 이 양심의 음성은 현존재에게 "가장 고유한 존재의 가능성"을 붙잡으라고 요구한다. 여기서도 음성에는 탈영토성이 깃들어 있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아주 갑작스럽게 "모든 현존재가 자기 곁에 두고 있는" "친구의 음성"에 대해 말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친구의 음성을 듣는 것"은 "심지어 현존재를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향해 본질적이고 실제적으로 열어놓는다." .. 친구는 타자다. 여기서 하이데서는 음성에 일정한 초월성을 부여하기 위해 친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87


하이데거는 "음성과 시선의 같음"에 대해 말한 바 있다.  88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는 디지털 반향 공간으로부터 점점 더 타자의 음성이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타자의 부재로 인해 음성이 줄어들었다. 너와는 달리 그것(Es, 마르틴부버에 따르면 진정한 만남과 대화는 나-너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나-그것의 관계에서는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다.)에는 음성이 없다. '그것'에서는 상대를 향한 말도, 시선도 생겨나지 않는다. 상대가 사라짐으로써 세계는 음성과 시선을 잃는다. 

디지털 소통에는 시선과 음성이 매우 부족하다. .. 실로 관계와 만남은 음성과 시선의 특별한 경험들이다. 그것들의 몸의 경험들이다.  89-90


디지털 매체는 탈육체화하는 작용을 한다. 디지털 매체는 음성으로부터 거칢을, 육체성을, 나아가 공동(空洞 빌공 마을동)과 근육, 점막, 연골의 심층을 빼앗는다. 음성은 매끄러워진다. 음성은 의미를 위해 투명해지고, 완전히 기의로 변한다. 이 매끄럽고, 육체가 없고, 투명한 음성은 유혹하지 않고, 아무런 육욕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유혹을 낳는 것은 기의로 환원될 수 없는 기표의 과잉이다.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고, 아무 정보도 전달해주지 않는 그 음성은 "기표들의 육욕"을 가능하게 한다.  90




타자의 언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세상에 대한 낯섦"을 예술의 한 계기로 본다. 세상을 낯선 것으로 지각하지 않는 자는 세상을 전혀 지각하지 않는다. 음전압, 즉 부정적 긴장은 예술에 본질적이다. 따라서 아도르노는 편안함의 예술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낯섦은 철학의 계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정신 자체에 내재 한다. 따라서 정신은 본질적으로 비판이다.

'좋아요'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것이 된다.  93


디지털 화면은 경이를 전혀 허락하지 않는다. 익숙함이 증가할수록 정신을 활성화하는 경이의 잠재력이 모조리 사라진다. 예술과 철학은 낯선 것, 주관적 정신과 다른 것에 대한 배반을 철회하는 작업을 할 의무를 지닌다. 다시 말해 주관적 정신의 확정적인 네트워크로부터 타자를 구원하고, 타자에게 그 낯설게 하는, 경이로운 다름을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이다.  94


"폭력 없는 관찰"과 "거리의 가까움", 나아가 멂의 가까움만이 사물들을 행동 주체의 강제로부터 해방시킨다. .. 행동 주체가 뒤로 물러날 때, 객체를 향한 주체의 맹목적인 충동이 꺾일 때, 그럴 때만 사물들은 그 다름을, 그 수수께끼의 성질을, 그 낯섦과 비밀을 돌려받는다.  94-95


예술은 자기초월을 전제한다. 예술을 염두에 두는 사람은 자신을 망각한다. 예술은 "나에 대한 멂"을 만들어낸다. 자신을 망각한 채 예술은 섬뜩한 것, 낯선 것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나의 의문에 부로가하지만, 무낳ㄱ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망각한 자아와 함께 저 섬뜩한 것, 낯선 것으로 나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지상에서 시적으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안락한 디지털 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 우리는 같은 것의 수적인 디지털 공간 속을 돌아다닌다.  96


오늘날의 과잉소통은 침묵과 고독의 자유 공간을 억압한다. 그러나 이 자유 공간 안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실로 말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말할 수 있다. 과잉소통은 자신 안에 침묵을 본질적 요소로 지니고 있는 언어를 억압한다. 언어는 정적으로부터 생겨난다. 정적이 없으면 언어는 이미 소음이다. 첼란에 따르면 문학에는 "침묵을 향한 강한 성향"이 내재한다. 소통의 소음은 경청(Lauschen)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97


프랑스의 작가 미셸 뷔토르(1926~2016, 프랑스 누보로망을 대표하는 작가)는 문학이 오늘날 위기에 빠졌음을 확인하고, 이 위기를 정신의 위기로 파악한다. "지난 10년 혹은 20년 동안 문학에서는 거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신작들이 홍수처럼 쏟아졌지만, 정신적으로는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어요. 이는 소통의 위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경탄할 만한 새로운 소통 수단을 갖게 되었지만, 그것은 엄청난 소음을 불러일으킵니다."  97-98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도 관심을 타자의 호출을 전제로 하는 "더 많은 의식"이라고 보았다.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타자의 탁월함을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지금은 관심의 경제가 관시의 시학과 관심의 윤리학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관심의 경제는 타자에 대한 배반을 추동시키고, 자아의 시간을 전면화한다. 이에 반해 관심의 시학은 타자에 고유한, 가장 고유한 시간을, 타자의 시간을 발견한다. 관심의 시학은 "그것, 즉 타자에 가장 고유한 것이 함께 말하게 한다. 타자의 시간 말이다."  99-100


오늘날의 소통은 극도로 나르시시즘적이다. 이 소통은 너가 전혀 없이, 타자를 전혀 호출하지 않은채 진행된다. 이에 반해 시에서는 나와 너가 서로를 만들어낸다. "이 대화의 공간 안에서 비로소 말상대가 구성되고, 이 말상대는 그에게 말을 걸고 이름을 지어주는 나의 주위에 집결한다. 그러나 말상대는, 그리고 이 이름을 통해 말하자면 너가 된 자는 그 자신의 다름 또한 현재 속으로 가지고 온다."  100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매체를 통해 타인을 최대한 가까이 내게로 끌어오고자 한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이상 타자를 갖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는 타자를 소멸시킨다. .. 

오늘날의 소통은 타자로부터 너-계기를 제거하고, 타자를 "그것(Es)"으로, 즉 같은 것으로 획일화하려고 한다.  101




타자의 생각 


자신으로 존재함은 단순히 자유롭게 존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은 짐과 부담이기도 하다. 자신으로 존재함은 자신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102


오로지 에로스만이 자아를 우울증으로부터, 자신에게 나르시시즘적으로 얽혀 있는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타자의 구원의 공식이다. 나를 나로부터 떼어내어 타자에게 끌고 가는 에로스만이 우울증을 이길 수 있다. 우울한 성과주체는 타자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다. 타자에 대한 욕망, 나아가 타자를 향한 호출 혹은 "전향"은 자아의 나르시시즘적 껍질을 깨는 형이상학적 항우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에 의해 깨어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수수께끼 혹은 비밀로서의 타자에 대한 경험을 잃어버렸다. 타자는 이제 유용성의 목적론에, 경제적 계산과 가치평가의 목적론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 타자는 투명해진다. 타자는 경제적 객체로 강등된다. 이에 반해 수수께끼로서의 타자는 전혀 가치평가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다름을 전제로 한다. 타자의 다름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다름도 사랑의 전제다. 사람의 이원성은 자신에 대한 사랑에 필수적이다. "다른 한 사람이 우리와 다른, 우리와 대립된느 방식으로 살고 활동하고 느낀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기뻐하는 것 말고 무엇이 사랑이겠는가? 대립하는 것들을 기쁨으로 연결하려면 사랑은 이 대립하는 것들을 제거해서도, 부정해서도 안 된다. 심지어 자기애도 한 사람 속에 있는, 서로 뒤섞을 수 없는 이원성(혹은 다원성)을 전제로 한다.  105-106


사랑은 세상을 타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창조하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사랑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 시작되게 하는 사건이다. ... 

우리는 삶을 다시 타자로부터, 타자에 대한 관꼐로부터 새롭게 보고, 타자에게 윤리적인 우선권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나아가 타자를 경청하고 타자에게 대답하는 책임의 언어를 다시 배워야 한다. 레비나스는 "말하기(dire)"로서의 언어를 다름 아닌 "한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이라고 보았다.  107




경청하기


오늘날 우리는 경청하는 능력을 갈수록 잃어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점점 더 에고에 집중하는 것이, 사회가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이 경청을 어렵게 한다.  108


경청은 수동적 행동이 아니다. 특별한 능동성이 경청의 특징이다. 나는 우선 타자를 환영해야 한다. 다시 말해 타자의 다름을 긍정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를 경청 한다. 경청은 선사하는 것, 주는 것, 선물이다. 경청은 타자가 비로소 말을 시작하도록 돕는다. 경청은 타자의 말을 수동적으로 좇아가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경청은 말하기에 선행한다. 경청은 타자로 하여금 비로소 말을 하게 한다. 나는 타자가 말을 하기 전에 이미 경청한다. 혹은 나는 타자가 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경청한다. 경청은 타자를 말하기로 초대하고, 타자가 그의 다름을 드러내도록 풀어준다. 경청은 타자가 자유롭게 말하는 공명이 공간이다. 그래서 경청은 치유할 수 있다.  108-109


손님을 환대하는 경청자는 자신을 비워 타인을 위한 공명 공간을 만들어낸다.  110


경청의 기술은 호흡의 기술로 수행된다. 타자를 환대하는 영접은 들숨이다. 하지만 이 들숨은 타자를 자신에게 편입시키는 대신 그에게 장소를 제공하고 그를 보호해준다. 경청자는 자신을 비운다. 그는 무명의 인물이 된다. 이 비어 있음이 경청자의 친절함의 핵심이다. "그는 지극히 다양한 것들을 받아들여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타자에 대한 경청자의 책임감 있는 태도는 인내로 표현된다. 인내의 수동성이 경청자의 준칙이다. 경청자는 망설임 없이 자신을 타자에게 내맡긴다. 내맡김은 경청자의 윤리학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준칙이다. 오직 이것만이 우리가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것을 막는다. 에고는 경청하지 못한다. 경청의 공간은 에고가 보류된 타자의 공명 공간으로서 열린다. 나르시시즘적인 에고 대신 타자에 대한 몰입, 타자에 대한 욕망이 들어선다.  111-112


경청은 정보의 교환과는 아주 다른 것을 의미한다. 경청할 때는 어떤 교환도 일어나지 않는다. 친근함과 경청이 없으면 공동체도 형성되지 않는다. 공동체는 경청하는 집단이다.  115


오늘날 인터넷은 고립화된 자아의 공명 공간일 뿐이다. 광고는 어떠한 경우에도 경청하지 않는다.  117


소란스런 피로사회는 듣지 못한다. 어쩌면 미래의 사회는 경청하고 귀 기울이는 자들의 사회라고 불릴지도 모르겠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전혀 다른 시간이 시작되게 하는 시간혁명이다. 타자의 시간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 오늘날의 시간 위기는 자기 시간의 가속화가 아리나 전면화로 인한 것이다. 타자의 시간은 가속화 압박을 낳는, 성과와 효율성 제고의 논리를 벗어난다. 신자유주의적 시간 정책은 타자의 시간을 제거한다. 이 시간 정책에게 타자의 시간은 그저 비생산적인 시간일 뿐이다. 자기 시간의 전면화는 오늘날 모든 생활 영역을 파고들어 인간의 전면적인 착취를 낳고 있는 생산의 전면화와 동시에 진행된다. 신자유주의적 시간 정책은 생산 논리를 벗어나는 고양된 시간인 축제의 시간도 제거한다. 축제는 탈생산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고립화하고 개별화하는 자기 시간과는 반대로 타자의 시간은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타자의 시간은 좋은 시간이다.  119-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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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강의 - 자기 결정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내가 내 삶을 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9


스스로 결정짓는 삶은 이 규범의 틀 안에서 외부로부터의 강제가 없는 삶, 그리고 어떤 규범을 통용할 것인지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10


독립성은 타인에 관한 것이 아닌, 스스로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되지요.  11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 '부동의 동력(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타자를 움직이는 힘)'이 아닙니다. 컴컴한 어둠 속에 숨죽이고 앉아서 내적 드라마를 이리저리 조종하는 감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한 생각과 감정과 소망을 결정할 때에도 우리는 선행조건 없이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아무렇게나 하지는 않습니다. 이 두 번째의 의미로서의 자기 결정이라는 것은 소리 없이 일하는 난쟁이(큰 인격 안의 작은 인격)로 인한 인격의 중첩도 아니고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상상하는 일도 아닙니다. 어떻게 살 것인지 자문하게 되기까지 이미 그 이전에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일을 겪었고 수만 가지 것들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각인은 또 다른 것들을 향한 접점이 되는데, 우리는 이 접점들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고 해도 별 상관이 없는 이유는, 그 반대 또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점에 서 있는 사람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으니까요. 아무런 소망도 없고 아무런 경험의 발자취도 없다면 기준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의지와 경험이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삶의 역사라는 바탕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삶의 역사가 주는 조건에 의해 제약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기 결정권이 있다고 할 때, 자기 결정권은 그러한 선제 조건들로 이루어진 인과관계적 삶이 흘러온 틀 안에서의 영향력으로만 존재합니다.  11-12


내가 매 순간마다 자신의 과거가 드리우는 그림자와 외부의 영향이 미치는 자기장 안에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자기 결정권 운운할 수 있단 말입니까?  13


나의 내면 세계가 외부와 아무리 밀접하게 얽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세계와 또 다른 하나의 세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과 소망을 주관하여 말 그대로 삶의 작가요. 그의 주체가 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사건을 단순히 맞닥뜨리거나 당하여  그 일로인한 경험에 그저 속수무책으로 압도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주체가 되는 대신에 단순히 경험이 펼쳐지는 무대가 될 수밖에 없는 삶을 가리킵니다. 자기 결정을 이해하는 것은 바로 이런 차이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13-14


우리 스스로를 테마로 삼아서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특징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이것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자신의 경험과 내적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이러한 거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인식과 이해의 거리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는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 생각과 느낌과 소망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14


자기 결정은 가능성에 대한 인지력, 즉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15


내적 거리의 두 번째 종류를 보면 자신의 경험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항상 견지해 오던 나의 사고방식에 만족하는가, 아니면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가? 나의 두려움, 시기심, 증오가 마땅한 것으로 생각되는가? 정녕  나는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이 증오심을 다시 물려주는 사람이 될 것인가? 부모님이 갖고 있던 두려움을 계속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화해와 마음의 여유를 누릴줄 아는 사람이 될 것인가? 같은 질문을 내 소망과 의지에도 똑같이 던져봅니다. 좀 더 많은 돈, 좀 더 높은 지위를 추구하는 나의 의지가 정말로 내 마음을 편하게 하는가? 낵 진정으로 화려한 삶과 요란한 성공을 좇는 사람인가? 혹시 수도원 같은 고요 속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는 유형은 아닌가?  15


자기 결정이 성공하는 경험을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그 무엇이 탄생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아상입니다. 자아상은 우리가 어떤 모습이고 싶은가에 대한 생각입니다. 지그 ㅁ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우리의 자아상과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을 때, 그리고 우리가 행위와 사고와 감정과 소망에 있어서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의 사람이 되었을 때, 그것을 자기 결정적 삶이라고 하 수있다는 것이지요. 바꿔 말하면 자기 결정이 한계에 부딪히거나 실패하는 것은 자아상과 현실 사이에 큰 간극이 존재할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


자아상의 기준이라는 것도 손댈 수 없는 신성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자아상에 허리를 굽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구속하고 노예처럼 옭아매는 생각을 과감히 던져버리는 일이 오히려 더 중요할 때도 있지요. 그리고 영향력에 대해서도 그것을 잘못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내적 구조 변경은 어느 날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하여 영혼의 연금술로 뚝딱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환경을 바꾼다든가 새로운 경험을 해본다든가 낯선 인간관계를 개척한다든가 필요할 경우 치료나 훈련을 받는다든가 등등 외적인 우회로가 많이 필요하지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인식에 있습니다. 원하는 나의 모습과 현재의 내가 너무 달라 계속해서 마음의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면 자아상뿐만 아니라 자꾸만 고개를 쳐드는 그 욕구들의 근원지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자기 결정은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과 굉장히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자기 인식은 사치품이나 뜬구름 같은 철학적 이상이 아니라 자기 결정적 삶, 더 나아가 존엄성과 행복의 구체적 조건입니다.  17-18


확실하다고 믿어오던 것들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증거를 찾아가는 동안 나는 그 확신들이 변화할 수 있는 내적 과정의 문을 열게 됩니다. 이 과정이 충분히 반복되면 내 의견의 총합이 완전히 탈바꿈하여 결과적으로 생각의 정체성이 변화하게 됩니다.... 비판적 물음을 통해서 익숙하던 생각의 패턴에서 한 발짝 거리를 두고 검증 가정을 통해 생각의 주인 자리를 찾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이 지녀온 언어적 습관과 거리를 두는 것과도 큰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또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많은 것들이 모국어를 그대로따라 함으로써 생겨나기 때문이지요.  19


경각심을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정확한 의미를 따져보는 것이고 둘째는 그것이 그 의미를 가졌다는 것을 과연 무엇을 통해 알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 자신에 대해 결정한다는 것은 사고를 조망하는 능력과 사물의 명학함을 추구하는 일 모두에 언제나 굽힘 없는 열정을 가진다는 것과 통합니다.  20


인식된 경험을 세분화하고 구체화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되지 못한 것을 의식화하는 것, 이 두 가지 방법은 우리가 언어적 발현을 통해 우리의 감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기 결정이 적용 범위를 내면으로 확장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23


경험된 과거로 말로 표현하는 우리의 능력은 그러므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집니다. 첫 번째 얼굴은 자아상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허락하는 측면입니다. 이때 자아상은 과거를 특정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나서 결국 미래를 향한 설계도를 가지 ㄴ현재에 도달한 한 사람의 초상화지요. .. 또 하나의 얼굴은 모든 자아상이 그 진위가 모호하고, 착각과 자기기만과 자기 설득으로 가득 찬 구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아상은 진실이 밝혀져 어쩔 수 없을 때나 도덕적으로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을 때 등등 때에 따라 고쳐지곤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새롭게 짜이고 앞뒤가 맞는 또 다른 정황이 생겨나며 맞지 않는 부분은 억지로 잊히고 익히 알고 있던 것이라도 새로이 윤색된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25


기억이 강력하게 압도적인 그 힘으로 어떤 의지를 자꾸만 방해하거나 무시당하고 분열된 과거가 되어 우리의 경험과 행위를 비열한 어둠 속에 꼼짝 못하게 옭아맬 때, 정신의 지하 감옥이 되고 맙니다. 오직 그들을 언어로 불러내야만 그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기억은 이야기될 때 이해 가능한 것이 되고 우리는 기억의 힘없는 희생양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습니다. 기억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잊고 싶다고 해서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이러 ㄴ의미에서 볼 때 기억하는 존재로서의 우리는 자기 결정적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 결정적 존재가 되려면 일단 이해하는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즉 기억이 휘두르는 힘과 끈질김을 우리의 정신적 정체성의 표현으로 보는 법을 배우고 나면 기억은 더 이상 외부 이물질이 아니게 되어 적군으로서의 공격을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26


자신의 목소리와 자신의 울림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사건이지요. 즉 우리 안에서 잘못된 울림을 내느 ㄴ것을 추방하고 새로운 말과 새로운 리듬을 시도해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의 소설을 끝내고 난 작가는 전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장면 중 하나는 책을 들고 말없이 소파에 앉아 아주 가끔씩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30



이제 타인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31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이유가 만일 외부 권위와 그것이 주는 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면 우리는 자기 결정의 상실을  경험할 것입니다. 마치 머슴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그 두려움이 내부의 권위에 대한 두려움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스스로 삼은 자기 자신의 종이 됩니다. 도덕의식과 자기 결정이 서로 공존하려면 두려움이 원인이 되어서도 안 되며 열정 없는 의무감에 의한 것이어서도 안 됩니다. 자기 결정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야 하지요.

한 가지 방법은 이성적이고 공익적인 의미를 두어서 자기 저신의 이익으로도 해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모두 도덕적 규범을 지킨다면 서로를 적대시하는 혼란 속에서보다 자기 결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이 커지므로 결국 각자에게 모두 이득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 중에는 특히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도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도덕적 친밀감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종류의 만남 안에서는 복합적이고 깊은 도덕적 감수성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서로를 이용하기만 하려는 적수들 사이에서는 불가능한 관계입니다. 도덕적 친밀감이 있는 만남에서는 분노와 원망, 도덕적 수치심, 후회 같은 감정도 일어나긴 하지만 또한 의리나 상대방의 도덕적 숭고함에 대한 감탄 같은 감정도 일어납니다. 이러한 감정들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 단순히 사회적 게임을 같이하는 냉정한 동반자였다면 절대 될 수 없는 중요한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에게 중요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중요한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도덕적 감정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적으로 던지기 때문이지요. 이 질문은 자기 결정에 관한 문제가 나왔을 때 우리를 읶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도덕적 친밀감은 비판적인 내적 거리를 자기 자신에게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유지하는 인간관계입니다.  32-34


프랑스의 모럴리스트인 라브뤼예르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외부에서 행복을 찾는 데에 그치지 않고 굴종적이고 올바르지 않으며 정의와는 동떨어진, 미움과 정횡과 편견으로 가득찬 인간들의 판단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 대체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그가 이 글을 쓴 것은 아카데미 프랑세즈로부터 세번째로 입회를 거부당했을 때였습니다. 그가 말한 것은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으 ㄹ하는지에 대해 타인의 칭찬과 확인을 받고 싶어 하는 소망이었죠. 이것은 매력적이고도 위험한 욕구입니다. 인생에서 너무 일찍 인정을 받은 사람들은 어느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자기 자신을 크게 놓쳐버린 느낌을 받는 그런 삶을 살게 되지요.  35


타인이 휘두르는 그러한 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35


자기 결정적으로 발전해나가는 일은 타인의 시선을 맞닥뜨리고 그에 맞설 때만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가장 쉬운 방법은, 외부러부터의 모든 시선을 독립적인 정신적 정체성으로 되받아치는 것입니다. .. 타인의 시서노가의 대결이 자기 결정적인 성질을 띠려면 자기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묻고 또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

내가 가진 것 중 나는 보지 못하지만 타인은 볼 수 있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타인의 시선은 나의 자기기만을 발견하는가? .. 이러한 자아 확인에도 우리가 거리를 둬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바로 라브뤼예르가 꼬집었던 것으로, 타인은 어디까지나 타인에 불과하며 그들이 우리를 평가할 때 우리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오직 그들만의 문제인 수만 가지 요인에 의해 그 평가가 왜곡되고 부정적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결정적 삶은 이러한 낯섦도 견뎌낸다는 것을 뜻합니다.  36-37


자기 생을 스스로 이끌어나가고자 하는 욕구는 타인에게 조종당하지 않으려는 욕구와도 일치합니다. ..

조종은 계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여기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몇 가지 예가 있습니다. 최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주입되는 광고, 속임수, 정보의 차단, 사람의 감정을 비열하게 이용하는 행위, 그 어떤 생각의 형성도 못 하게 만드는 세뇌 작업등입니다.

조종이 악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자아상에 의해 걸러지지 못하는 영향력이며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가진 자아상과 너무나도 동떨어져 내적 상처를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독립적인 인격체로서의 우리는 무시당합니다. 제대로 된 독ㄹ비적인 인격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것은 존엄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가혹한 행위입니다. 

가장 비열한 것은 겉으로 바서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세간에서 통용되거나 심지어는 높이 평가받는 장면이나 은유, 미사여구의 공식 등을 통한 은밀한 조종입니다. 세계와 우리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 중에느 ㄴ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자아상과 자기 결정적 삶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방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텔레비전, 신문, 정치적 연설 같은 것들이 이런 방식의 이야기들로 넘쳐나 수없이 많은 생각의 들러리들을 양산하지요.

그것에 대항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깨어 있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물을 서술하는 데에 이 방식이 정말로 옳은 방식인가? 내가 생각하며 느끼는 방식과 정확히 일치하는가? 막강한 권위에 의해 제정된 요란한 공식이 띠는 당위성이 지극히 당연하게 다가올수록 우리는 더욱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하고 잇는 자신만의 목소리이며 참됨과 독창성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37-38


제가 원하는 문화는 조금 더 잔잔한 소리가 지배하는 문화,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도움을 받는 고요함의 문화입니다. 오직 그것이 최우선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그런 문화 말이에요.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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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나는 어디서, 어떻게, 왜 여자의 성이 우리 사회와 역사에서 제약 받기 시작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14


나는 '막간 이야기1'에 소개한 앤드루의 선택을 따르기로 햇다. 그는 자기와 아내의 행위를 '나누기(sharing)'라고 정의했다. 스윙어들은 '아내 교환하기(wife swapping)'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내가 물건처럼 다른 남자와 바꿔 쓸 수 있는 교환물이라는 암시 때문이다. 이런 대상화의 요소는 '나누기'라는 말에도 있지만, 이 말에는 협조, 연합, 관계, 의사소통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고 핵심적이다.  17



1 새와 뿔


오늘날 점점 더 많은 부부들이 아내가 다른 남자들과 성관계를 탐하는 것을 부부의 성 활동의 중심에 두는 핫와이핑(hotwifing:남편의 허락 하에 아내가 다른 남자들과 성관계하는 일)이나 쿠콜드리(cuckoldry:유부녀의 서방질) 생활 방식을 추구한다.  25


'오쟁이 진 남자'란 뜻이 있는 쿠콜드(cuckold)는 뻐꾸기의 습성에서 유래한 말이다. 일부 뻐꾸기류 새들은 암컷이 몰래 다른 새 둥지에 알을 낳는 생식 전략을 발전시켰고, 이런 일을 당한 새는 자기도 모르게 뻐꾸기 새끼를 제 자식으로 알고 키워야 했다.  26


뻐꾸기류가 모두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탁란'을 하는 것은 아니고, 일부 종만 자기 알을 알이 비슷하게 생긴 다른 둥지에 낳는 속임수를 쓴다. 뻐꾸기는 상당히 간교한 새로, 자기 존재를 잘 드러내지 않는 습성이 있다. 기묘하게도 꺼꾸기는 일자일웅이며, 장기간 한짝과 살아간다.  27


많은 문화와 언어에서 자신도 모르게 다른 남자의 자식을 키우는 불행한 남자를 묘사하는 말을 찾을 수 있다. 영어에서는 '쿠콜드'고, 이는 뻐꾸기 울음소리 '쿠쿠'에서 유래했다. 중국어로는 그런 남자를 '따이 뤼마오즈'라 하고, 이는 '초록색 모자를 쓰다'라는 뜻이다. ..

스페인어로는 '카브론(cabron)'이 사내다움을 잃은 염소 같은 남자를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은 자기 아내가 부정을 저지른 것을 알지만 그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남자, 그러니까 남자답지 못한 남자, 고환이 없는 남자를 일컫는다. 중세 영어 '위톨(witol)'이란 말도 이와 비슷한 의미로, 아내의 부정을 알면서도 내버려두는 오쟁이 진 남자를 나타낸다. 이 말은 자기가 오쟁이 진 남자라는 사실을 안다는 '위팅 쿠콜드(witting cuckold)'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31-32


쿠콜드와 핫와이프 사회에서 현재 쓰이는 쿠콜드의 의미는 '아내가 혼외정사 하는 것을 알고, 사실상 그런 일을 환영하는 남자'를 뜻한다.  32


브라지 ㄹ연구자 클라우디아 폰세카(Claudia Fonseca)는 라틴아메리카의 특징적인 남성 우월주의 마치스모(machismo)가 오쟁이 진 남자가 된느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를 만든다는 생각은 사실과 크게 다르다고 했다. 브라질 문화에서는 여성의 원형이 두 가지 이미지로 나뉘는 경우가 많다. 훌륭한 어머니이자 아내 '산타(santa)'와 난잡하고 성적으로 탐욕스러운 여자 '피라니아(piranha)'다. 그러나 폰세카는 노동자 계층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불륜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살아가는' 여자한테 다른 이름도 붙는다는 것을 알았다. 교활한 여자라는 의미의 '말란드라(malandra)'다. 이런 여자들은 자기 남편을 순종하는 오쟁이 진 남자 '코르노 만수(corno manso)'로 만든다.  32-33



막간 이야기1 앤드루와 마리


내가 만나고 인터뷰한 모든 부부들이 나를 놀라게 했고, 그 놀라움은 유쾌한 것인 경우가 많다... 나는 광란, 통제 불능의 성행위, 난교와 같은 '극단적인 성행위'를 발견할 것이라 믿으면서 이런 생활 방식에 접근했다. 그러나 내가 반복해서 본 것은 자기의 삶을 세심하고 사려 깊게 성찰하고, 사회에서 어떻게 하라고 정해준 방식이 아니라 자기들이 찾아낸 방식에 따라 행동하기로 선택하고, 그것을 자기의 결혼 생활과 성에 적용한 부부들이다.  55




2 일부일처제와 결혼


일부 인류학자들은 결혼과 일부일처제가 인간 진화의 역사와 인간 사회에 매우 유용하고 보호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말한다. 한 남자에 한 여자씩, 한 쌍의 결합이 없었다면 남자들이 여자를 놓고 싸워대면서 폭력적이고 목숨을 건 갈등이 끊이지 않았으리라는 얘기다. 경제적으로 더 성공적이고 권력과 자원을 더 많이 쥔 남자들 사이에서 일부다처제가 현저히 많았다는 근거로 볼 때 일부다처제의 기원도 분명 여기에 있었다. 사회가 일부일처의 한 쌍을 지향하면서 부족 간의 싸움은 물론 부족 내부의 갈등이 줄었고, 여자를 놓고 벌이는 쌍무도 줄었으며, 반면 부족들과 부족 내의 부부들이 자원을 공평하게 나누는 일은 늘었다. 여자를 놓고 싸우는 시간이 줄면서 부족은 더 많은 시간을 협동해서 농사짓고 사냥하는 데 쓸 수 있었다. 여자들도 다른 남자들에게 강간이나 공격을 당하는 일이 줄고, 안전뿐만 아니라 음식과 자원을 확보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일부일처제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60


1878년 미국 대법원은 일부다처제를 금지하는 법이 합헌이라고 판결했고, 더 나아가 일부일처제는 민주주의를 보전하는 데 중대한 문제라고 했다.  83


배우자가 결혼에 따르는 성적인 기대를 위반하지 않았어도 이혼율이 60&가 넘는 경우가 있어 일부일처제는 전보다 그 의미가 훨씬 덜해졌다. 이제 일정 기간마다 배우자를 바꾸는 결혼 형태인 연속 단혼(serial monogamy)이 더 적당한 용어일지도 모른다. 이 결혼 형태에서는 주어진 관계에 있는 동안은 일부일처를 유지하되, 그 관계가 끝나면 성적인 것이든 다른 것이든 다른 사람과 관계로 옮겨간다.  84-85


겉보기에는 일부일처 관계가 효과적인데도 역사는 성적이고 정서적인 정절을 지켜야 한느 일부일처제의 이상이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

일부일처제는 원래 한 번에 한 사람과 결혼하는 데 쓰이는 말이었지만, 독점적으로 성관계하는 커플에게 적용되면서 지속적으로 잘못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인류학자 헬렌 피셔(Helen Fisher)가 주장한 것으로, 두 사람 사이의 성적인 정절은 일부일처제의 정의에 필요한 사항이 아니다... 일부일처제의 기대나 요구 사항을 진정으로 위반하는 것은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집단 결혼뿐이다.  85-86




3 여자, 아내 그리고 여자의 성


그리스 신화를 보면 제우스와 헤라가 남자와 여자 중에 누가 더 성적인 쾌감을 많이 얻는지 말다툼을 벌인다. 둘은 그 답을 알아내기 위해 신의 벌을 받아 7년 동안 여자로 산 티레시아스를 찾아간다. 그는 여자로 사는 동안 매우 유명한 창녀로 난잡한 생활을 했다. 티레시아스는 그 질문에 "사랑의 쾌감의 합을 10이라고 치면 여자가 9를 갖고, 남자는 1만 갖는다"고 대답했다. 이슬람교 시아파 창시자도 "성적인 쾌감의 9는 여자에게 돌아가고, 나머지 1만 남자 몫이다"라고 티레시아스와 비슷한 말을 했다. 힌두교 전설에서는 어느 왕이 신의 분노를 사 여자로 변했다. 마침내 용서를 받은 왕은 남자로 돌아갈 기회를 얻었지만, 여자로 살면서 더 큰 쾌감을 맛본 왕은 여왕으로, 적어도 여자로 남겠다고 선택했다. 이슬람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하고, 구약성경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하는 고대의 경구에서는 이 세상에 탐욕스러운 것이 세 가지 있다고 했다. 땅(혹은 사막), 무덤(혹은 지옥), 여자의 음문이다.  110-111


역사적으로 성은 남자들이 원하는 것이자, 여자가 통제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상품'이었으므로 여자들은 성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여자를 벌하기 시작했다.  117


앨프리드 킨제이(Alfred Kinsey)는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성 연구자로, 자기 침실을 비롯하여 미국 전역의 침실에 성탐색의 문을 열게 했다. 워내 곤충학자였던 킨제이는 개인적으로나 직업적으로 성에 관심이 많았다. 킨제이는 성과학에 관심을 쏟기 전에도 노출증이 있었고, 나체주의 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고 자서전에 썼다. 그의 대학원생들은 성 경험과 자위행위 습관에 관해 킨제이와 긴 대화를 했고, 그런 대화에서 킨제이는 다른 사람들과 자기의 개인적인 경험도 공공연히 나누었다.

킨제이가 수행한 성 연구는 그가 아내 맥과 함께 한 성의 탐색으로 이어졌다. 전기 작가 제임스 존스(James Jones)에 따르면 킨제이는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자신의 동성애적인 충동과 마조히즘적이고 노출증적인 충동도 탐구했다. 킨제이는 자기 주변에서 모은 연구원들에게 성적으로 자유로운 환경을 허용했고, 사실상 이런 관행을 격려했다. 킨제이는 자기 연구원들과 친구들 범주에서는 성행위가 자유롭고, 남성 동성애도 허용되며, 아내들도 나눌 수 있다고 선포했다. 아내들 역시 자기만의 성적인 탐색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추구할 수 있었다. 킨제이의 성 유토피아는 남성 우월주의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성의 자유와 선택을 여자에게도 확대했다. 그러나 외도 문제가 생길 때는 그런 관계가 용납되거나 허용될 수 있는 문제인지 결정하기 위해 조언을 구하도록 했다.

직원의 성관계가 다른 연구원의 부부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킨제이가 그 직원에게 다른 사람의 아내와 성관계를 중지하도록 지시할 때는 명백하게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킨제이가 아내 맥을 수많은 남자들과 기꺼이 나눌 때는 부정적인 영향이 없어 보였다. 많은 연구원과 가족, 친구들이 킨제이의 아내와 섹스 했다고 말했고, 킨제이도 그 자리에 함게 하기도 했으며, 맥 혼자만 있는 경우도 있었다. 킨제이의 제자이자 가끔씩 동성연애 상대가 되기도 했던 클라이드 마틴(Clyde Martin)이 킨제이에게 맥과 섹스 해도 되는지 물었을 때도 킨제이는 그런 일은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거리끼거나 마다할 일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킨제이의 42세 된 아내는 남편의 격려 아래 젊은 클라이드의 성교육 임무를 지고, 자기가 킨제이와 함께 탐색해서 얻은 성적인 레퍼토리를 전수했다. 존스에 따르면 킨제이가 기꺼이 아내를 나누고자 한 이유는 남자들, 특히 클라이드에게 성적으로 끌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킨제이는 다락방에 있는 개인 스튜디오에서 맥이 다른 남자들과 섹스 하는 장면을 필름에 담기도 했다. 맥은 킨제이의 지휘 아래 많은 자원자와 동료 연구자들과 섹스 했다. 맥과 다른 사람들(킨제이 자신을 포함하여)의 자위행위를 필름에 담기도 했고, 킨제이의 지시 아래 집단 성행위뿐만 아니라 이성 커플과 동성 커플의 성행위도 필름에 담았다. 킨제이는 생리적인 문제로 발기부전을 겪어 그가 등장하는 필름은 거의 없다고 한다(나주엥 킨제이 내부자 가운데 한 남자는 킨제이에게 이런 생리적인 문제가 있어 아내의 욕구를 만족시필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섹스 파트너를 주선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 맥은 다락방의 성적인 만남에 행위자로 참여하지 않을 때도 안주인으로서 음료수를 대접하며 남편의 연구를 도왔다.

여자들과 성에 관해 면담한 결과를 보고하는 글을 보면 킨제이는 여성의 성에 대한 개인적이고 직업적인 개념화에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자의 성적 능력이 남자보다 덜하다는 빅토리아시대적인 사고를 했다. 연구 과정에서 그는 여자의 성에 관한 연구는 여성의 전면적인 노출에 대한 사회적인 압력으로 방해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연구와 면담 절차에 이런 어려움을 반영했다. 킨제이는 분명 성의 해방과 간련하여 사회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의도가 있었다. 여자의 성욕이 '덜하다'는 견해는 킨제이가 저작과 연구에서 변혁을 이루고자 노력한 견해와 대조적이다. 그러나 킨제이는 여자들이 엄청난 성적 능력과 욕구가 있다는 보고를 접해도 남자의 성과 비교해 여자의 성이 억제되었다는 견해를 바꾸지 않았다. 킨제이는 자기 표본 내의 여자들은 결혼 전후에 남자보다 오르가슴이나 성적인 생활과 성관계에도 오르가슴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보고했다.

킨제이는 남자의 성과 함께 여자의 혼외정사에 관해서도 광범위하게 보고했다. 그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혼외 성관계에 연루되는 일이 많다고 보았다. 킨제이에 따르면, 많은 경우 혼외정사가 부정적인 결과에 이르지 않았다. 키넺이는 외도가 갈등과 문제를 야기하더라도 그런 결과를 피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여자가 혼외의 성적 교류를 추구하는 이유가 애정 문제뿐만 아니라 결혼 생활의 권태와 성적 불만족, 친밀한 우정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자의 혼외정사가 가끔 결혼 내의 성관계를 개선하거나 증가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킨제이는 내적으로 강인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부부 관계를 지키기 위해 혼외정사는 비밀에 부치는 것이 좋다고 했다.

킨제이는 부부가 모두 내적으로 강인하고, 아내가 남편의 전적인 동의와 인지 아래 혼외정서를 한 부부들과 면담했다. 그 결과 킨제이는 일부 남자들이 아내에게 밖으로 나가 섹스하라고 격려했고, 남편들도 혼외의 성행위(가끔은 동성애)를 탐했으며, 많은 남자들이 아내에게 성적인 만족을 맛볼 기회를 주기 위해 이런 일을 했다고 답했다. 존스는 킨제이가 허용된 여자의 혼외정사에 관해 설명할 때 그의 묘사와 설명을 인용하면서, 킨제이가 아내 맥을 다른 남자들과 나누는 것을 좋아한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고 했다.

따라서 아내 나누기에 대한 킨제이의 설명에는 자기 자신의 동기가 명백하게 반영되었다. 그 하나는 아내가 성적 만족감을 누릴 범위가 남편인 자신에게 제한되지 않도록 하자는 이타적인 요구고, 다른 동기는 자신이 혼외의 성적 교류를 하는 데, 특히 다른 남자들과 성적 교류에 제약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킨제이가 관음증을 통해, 자기 아내를 함께 나누는 남자들과 직접적인 성행위를 통해 자신의 동성애적인 성향을 탐색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기도 했다. 아내 나누기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은 무익하다고 한 킨제이의 주장에는 나도 같은 생각이다. 킨제이 부부의 경우에서 보듯 한 부부 내에서도 다른 남자와 아내의 성을 나누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129-134


1960년대, 성 연구자 윌리엄 마스터스(William Masters)와 버지니아 존슨(Virginia Johnson)은 킨제이가 남긴 것을 취해 미주리 세인트루이스에서 선도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이들은 성행위의 기교에 관해서 많은 매춘부들과 면담한 뒤 단순한 인터뷰를 넘어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 대상자로 남자와 여자를 보집하여 성적인 자극, 삽입, 오르가슴의 생리학적인 요소를 측정하고 분석하고 기록했다. 연구 결과 여자가 오르가슴을 느끼기 위해서는 음핵을 자극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이 연구는 남자와 여자의 성적인 반응의 핵심적인 차이를 처음 경험적으로 기록했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마스터스와 존슨의 연구에서 남자는 오르가슴 후에 신체적으로 다시 발기나 오르가슴을 성취할 수 없는 불응기를 보인 반면, 여자는 그런 제한을 보이지 않았다. 셔피(Sherfey)는 여기서 더 나아가 여자는 성적인 자극이 지속되면 오르가슴도 증가되는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생리적인 수주에서 여자의 성적 능력이 남자보다 높고, 이런 능력은 자연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기나긴 천년 왕국 동안 여자의 성적 능력을 두려워하고 거부한 것과 대조적으로 셔피는 여자의 성적인 반응을 천부적으로 지칠 줄 모르는 것으로 보고, 그 한없는 능력에 찬사를 보냈다.  135-136


마스터스와 존슨의 연구 덕분에 음핵, 음핵 오르가슴, 멀티오르가슴을 느끼는 여자가 모두 건강한 것으로 수용되지는 못한다 해도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38


성 혁명의 파고는 1960년대에 여성용 피임약이 나오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

많은 여자들이 사랑이나 일부일처, 혼약에 대한 요구 없이 성을 즐기려는 욕망을 인정하고, 임신에서 안전해지면서 병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여자의 성에 대한 정의도 다시 한번 바뀌었다.  139-140


<성의 침묵(The erotic silence american wife)>의 저자 델마 헤인(Dalma Heyn)은 남자의 외도는 보통 충동으로 촉발된 생물학적이고 긴급한 욕구인 반면, 여자의 부정은 더 계산되고 더 정서적인 원인에서 나오며, 여자 본인에게나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음을 암시한다고 했다. ..

헤인은 여자가 성적인 이유와 신체적인 친밀함에서 오는 자극적인 기분을 위해 외도한다는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으며, 일부일처제만 중요한 여성의 자질인 듯 다뤄졌다고 한다.  147-148


최근 연구는 여자들이 혼외의 섹스 파트너를 두는 빈도가 젊은 여성들 사이에 높아지고 있고, 그 정도에 있어서도 남녀 간의 차이가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고 했다.  148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더 성적으로 분방할 역량이 잇다. 킨제이, 피셔 그리고 다른 유명한 인류학자와 성 연구자들이 사회가 여자의 난교를 처벌하거나 금하지 않았다면 여자가 남자보다 성적으로 훨씬 더 문란하고 섹스 파트너가 많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남자는 사정 후 불응기가 있어 성적 활동 능력을 잃는다. 하지만 여자에게는 그런 휴지기가 없고 오르가슴을 여러 차례 느낄 수 있으며, 성적 수용력이 거의 무한정하다. 마스터스와 존슨의 주장에 따르면 여자는 한 번에 50번까지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다. .. 전문가들은 남자의 사정이 언제나 오르가슴을 의미하지 않고 일부 남자들은 사정 없이도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다는 데 주목한다. 그런데도 여자들이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다는 데 주목한다. 그런데도 여자들이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남자를 훨씬 능가해서 모터스쿠터가 페라리를 쫓는 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153


역사적으로 부인에게 성의 자유가 허락된 경우는 부를 통제할 수 있거나, 정치적인 권력이 있거나, 경제적으로 독립했을 때다.  155



막간 이야기3 미셸과 크리스


나는 프린세스라는 별명을 사용하는 텍사스 의사와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그녀도 핫와이프다. 프린세스는 10대 시절에 부모님이 다른 사람들과 섹스 하는 사진과 비디오를 보았다. 그녀는 비디오 화면에 어머니가 다른 남자들과 섹스 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고 섹스는 결혼할 때까지 기다려야하는 것이라거나 사랑할 때만 하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쓰레기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몇 주 후 프린세스는 이웃 소년과 처음으로 섹스를 했다. 그 경험은 영 실망스러웠지만, 그 소년의 형과 했을 때는 다른 느낌이었다. 프린세스가 이 소년들 중 하나와 있는 것을 어머니가 본 이후 모녀 관계는 영원히 변했다.

'내가 브라우스는 벌린 채로 서 있는데, 어머니가 나를 보고 비명을 질렀어요. 그런 다음 조용히 나를 바라보더군요. 내가 말했어요. 내가 매트와 섹스 하는 것을 보고 소리 지르다니 어머니는 참 뻔뻔한 사람이라고요. 어머니에게 사진과 비디오 본 것을 모두 말했어요. 어머니는 할 말을 잃었고, 우리는 곧 같은 입장이 되었지요. 어머니와 앉아서 처음으로 진짜 어른다운 성에 관한 대화를 시작했고, 어머니는 자신과 양아버지가 스윙어라고 하면서 스윙잉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었어요. 서로 질투심을 느끼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그렇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섹스 하는 모습을 보거나 그런 사실을 아는 것이 성적인 흥분을 일으킨다고 했어요. 그날 이후로 저는 성적으로 매우 적극적이 되었고, 그 일을 어머니와 양아버지에게 숨길 필요도 전혀 없었어요.'  171-172


사회학자 린 애트워터(Lynn Atwater)는 어머니와 아내인 여자라도 자기의 성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성적인 존재로서 유용성이 증가되면 딸에게 성교육을 더 잘할 수 있다고 했다.  173




4 일부일처제의 대안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거의 모든 사회가 다양한 결혼 제도를 두었고, 그중에서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가 가장 흔하지만, 의무적으로 일부일처제를 강요한 사회는 드물다. 현재 전 세계에서 일부일처제를 요구하는 문화는 20%도 안 되며, 대다수 문화가 일부다처제를 허용한다. 드물지만 일처다부제 사회도 잇다(전 세계 1% 이하에서 발견된다). 일부 인류학적 연구에 따르면 전 세계 40%에 해당하는 사회에서 혼외 성행위를 금지한지 않았고, 사회 규칙과 규범이 이러 ㄴ일을 부추기기도 했다. 일부 문화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다른 남자와 나누는 것을 정중한 예의로 여겼고, 어느 문화에서는 일정 사람들 혹은 명절이나 다산 의식(fertility rite)같은 일정 시기에 혼외정사를 격려했다.  177-178


아내를 손님과 '나누는 영광'은 이뉴이트와 마찬가지로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미크로네시아, 폴리네시아, 아시아, 인도, 아프리카, 호주 원주민 등 다른 문화에서도 볼 수 있었다. 사우스샌드위치제도에서는 손님이 주인의 아내나 심지어 딸과 동침하는 기회를 비롯해 주인이 제공하는 모든 환대를 누릴 수 있었다.  182


경제적인 자원을 상당 부분 남자가 통제하는 사회에서는 일부다처제가 보편적이었고, 여자가 부를 쥔 사회에서는 일처다부제가 흔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형제처럼 유전적인 연관성이 있는 남자들이 여자를 나누는 관습 가운데 주된 형태는 형제다부혼이다.  184


스윙어들은 스윙 문화가 '생활 방식(lifestyle)'이라고 한다. ..

1960년대의 키 파티(key party)에서 유래한 것이라고도 한다. 키 파티는 남자들이 그릇에 자동차 키를 담으면 부인들이 아무 키나 집어 그 자동차 키 임자를 섹스 파트너로 집에 데려가는 섹스 파티를 말한다. 스윙잉에 관한 글에 따르면 이런 문화는 1970년대에 급격하게 늘었다가 1980년대에는 HIV가 퍼지면서 급감했으며, 지난 10년 동안 다시 점차 상승하고 있다.  193


폴리아모리(polyamory:비독점적 다자 연애)  197


폴리아모리는 1990년대에 '책임 있는 비일부일처제'에 대한 인터넷 논의에서 발전해 정의된 개념으로 개방 결혼과 공동생활, 성의 자유 개념을 포함한다.  199


폴리아모리는 '많은 사랑'을 의미하고, 진정한 사랑은 한 번에 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이는 여러 다른 관계 형태와 접근을 포괄하는 폭넓은 개념으로 개방 결혼, 집단 결혼, 과거 수십 년 동안 계속된 성적인 탐색에서 발전한 것이다. 폴리아모리 운동은 일부일처제 안에서건 밖에서건 사람들이 관계에 책임지고 정직하기를 기대하는 것 외에는 별 제한이 없다. 폴리아모리 관계와 성적 교류는 스윙잉이나 집단 결혼에서와 같이 부부의 양 배우자를 다 포함하지만, 한 배우자나 둘 모두 혼외 관계를 하는 개방 결혼과 더 유사하다.  201


스윙어 연구에 포함된 것이나 동성애 커플에서 폴리아모리를 살펴본 것을 제외하면 이 관계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 많은 포리아모리스트들이 스윙잉이 성적인 것에 중점을 두는 것에 비해 자기들은 사랑, 관계, 정직성에 중점을 둔다고 강조하면서 스윙잉과 구별하고자 한다.

스윙어들은 파트너들과 친밀한 우정을 오래 지속하는 반면, 폴리아모리스트는 성적인 모험에 자주 나서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한다고 말한다.  201-202


위키피디아에는 핫와이프가 스윙잉의 하부 문화라고 정의되었다. 

'핫와이프는 남편의 동의 아래 자기 배우자가 아닌 다른 남자들과 섹스 하는 여자를 지칭한다. 대부분 남편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즐기는 것을 보고 대리 만족하거나, 아내의 모험을 지켜보고 듣고 아는 것을 즐긴다. 남편도 같이 스리섬에 참여하거나 아내를 위해 데이트를 알선하기도 한다.'

위키피디아는 핫와이프에 속ㅎ사는 다른 하부 집단을 찾아내는 데까지 나아갔다. "아내 나누기의 독특한 하부 문화인 쿠콜딩은 뒤바뀐 역할에 따르는 성적인 수치심을 강조한다. 아내는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반면 남편은 수동적이고 종속적인 역할로 제한되며, 에로틱한 성행위를 거부하는 것까지 포함될 수 있다."

쿠콜드는 아내의 바람에 따라 오로지 아내하고 섹스 한다는 면에서 자기들은 핫와이프의 남편과 다르다고 한다. 쿠콜드 관계에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섹스를 허락하지 않기도 하고, 남편가 섹스 하는 것보다 연인과 하는 것이 훨씬 좋다는 말을 남편에게 하기도 한다. 아내가 남편 앞에서 다른 남자와 성행위를 하며 남편을 조롱하고 모욕하기도 하는데, 이런 아내들은 '휴밀리아트릭스(humiliatrix)'라는 이름을 얻었다.  203-204


스윙어가 스윙잉에 나서는 일차적인 이유는 성적 모험을 위해서다. 스윙어를 대상으로 한 연구들은 스윙잉을 하는 동기가 다양한 성적 경험, 금지된 성적 만남, 노출증과 관음증으로 얻는 스릴이라고 했다. 그러나 스윙어들이 드는 다른 이유는 새로운 친구를 만들고, 가치와 관심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교류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스윙어들은 일부일처제에 만족하는 척하지 않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즐겁다고 말한다. 스윙잉 활동을 즐기는 동안 윤리적인 원칙을 지키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 생활 방식에 참여하는 데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다. '안 돼요'는 스윙잉에서 큰 효과를 발휘하는 말이고, 다른 사람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배척되며, 스윙어 클럽에서 거부 당하는 일도 종종 있다. 폴리아모리 관계에서는 '안 돼요'라는 말이 여러 가지 수준으로 받아들여진다. 공통의 동의로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이기도 하고, 자기 파트너의 다른 관계를 막거나 끊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스윙어의 삶은 전적으로 왜곡되었을 거라는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스윙어도 평범한 사람들과 비슷한 가치를 가지고 산다. 이들이 사회적인 가치보다는 개인적인 발전에 좀더 가치를 두는 것은 사실이다.  211


많은 개인과 커플, 가족에게 비일부일처 관계는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지만, '평생' 비일부일처 관계를 살펴보았거나, 자녀들과 가족 전반에 미치는 전체적인 영향을 탐구했거나, 이 관계를 일부일처 관계와 비교한 연구는 거의 없다. 일반 대중에 비해 합의한 비일부일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나 혼외정사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신장애, 성폭력, 성 기능장애 발생 비율이 높지도 않았다. 연구 결과들을 보면 비일부일처로 사는 사람들이 부부간의 외도 문제를 겪는 커플보다 긍정적인 관게를 경험하고, 일부일처를 유지하는 보통 부부보다 개인적인 욕구와 성적인 욕구에 대해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

현재 존재하는 연구와 그 결과를 근거로 보았을 때 그런 관계가 역기능적이고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보는 믿음은 비일부일처 관계의 진정한 영향에서 근거한 것이기보다는 문화적인 기대에 어긋나는 비일부일처 관계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인 듯하다.  213-214


지금까지 진행된 연구들은 연구 문제와관련해 시대에 뒤떨어졌거나 제한점이 있지만, 비일부일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매우 활기넘치는 성격 양상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일반 대중에 비해 정서적인 문제나 정신 질환을 많이 겪는다는 근거는 없다. 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성격 유형과 정서와 관계 면에서 기능 상태는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에따라 차이가 많은 곳으로 보이며, 비일부일처 생활 방식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빈약한 정신 건강과 기능 상태를 보인다는 믿음을 지지할 근거는 없다. 스윙잉을 하는 여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이 남자만큼 자기의 성 활동과 살메 행복하고 만족하는 것으로 보이며, 남자들에게 성적으로 이용 당한다는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상 일부 비일부일처 관계는 전적으로 여자의 욕구에 중심을 두고 있다. 폴리아모리보다는 스윙잉이 여성 험오증에서 나온 관계라고 인식되지만, 폴리아모리 활동에 관해서는 정보가 거의 없다. 그러나 폴리아모리 사회에서 여자의 강력한 지도력을 고려한다면 폴리아모리 생활 방식 전반에서 여자가 희샹한다는 근거는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214-215


인간이 자연적으로 일부일처에 적합한 존재인지 아닌지는 인간의 행위와 별 관계가 없다... 인간은 일부일처를 유지할지 말지 선택할 수 있지만 연구는 많은 사람들이 일부일처를 선택하지 않고, 결혼이나 현재 관계에서 벗어나 성적 교류를 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 그런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병 발생률이 높지도 않고, 정서적이고 성적으로 불안하다는 근거도 없으며, 규범에서 벗어난 성 활동이 관계를 해친다는 근거도 없다.  215-216


어느 하나의 비일부일처 관계가 사회와 법적인 수용을 얻어 궁극적으로 승리를 쟁취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친밀한 관계에 대한 사회의 시각이 더 융통성 있게 바뀌어 개개인의 욕구를 충족할 유연한 관계를 허용할 가능성은 있다.  218




5 역사를 통해 본 욕망의 아내들


<유혹의 기술2:세상을 매혹했던 여자들>의 저자 벳시 프리올뢰(Betsy Prioleau)... 에 따르면 여자는 자연적으로 다혼(多婚 많을다 혼인할혼)성이고, 오르가슴을 여러 차례 맛볼 수 있으며, 남자들은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성적 능력이 있다. 프리올뢰는 태초 이래 핫와이프와 다른 유혹녀들의 삶과 역사를 검토하면서 남자의 넋을 흐려놓은 여자의 성적 원동력에 찬사를 보냈다. 이런 일은 남편의 동의 아래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241-242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 243

칼리굴라 치세 동안 클라우디우스는 그의 사촌 메살리나와 결혼했다.  344

역사상 악명 높은 쿠콜드 이야기 가운데 캐슬마인의 로서팔머(Roger Palmer) 백작  246

보르자 가문의 수장 로드리고 보르자(나중에 교황 알렉산데르6세)의 딸 루크레치아  248

샤틀레 후작 부인으로 불린 에밀리 뒤 샤틀레  250

제인 엘리자베스 디그비(Jane Elizabeth Digby)  257

빅토리아 우드헐(Victoria Woodhull)은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던 욕망의 아내다  261

20세기 초 위대한 피아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인 바이올렛 고든 우드하우스(Violet Gordon Woodhouse)  265

안느 루이즈 제르맨 네케르  267

요크셔 가문의 후손인 검은 눈의 미녀 엘리자베스밀뱅크  271


역사에 걸쳐 많은 아내들과 여자들이 일부일처제의 구속과 침대를 한 남자와 나눠야 한다는 제한을 거부했다.  279


성적으로 힘 있고 부정한 많은 여자들이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성공적으로 이런 생활을 이끌어갔다. 이런 성적 관행이 상류층에 제한되지 않았다는 근거는 있지만,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경우는 지식인 계급과 문인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다.  280




6 문학과 영화 속의 아내 나누기


에리카 종은 소설 <날기가 두렵다>엣 여자의 성을 탐색했다.  296


케이트 쇼팽의 소설 <각성(The Awakening)>  297


2002년, 카트린 밀레(Catherin Millet)는 '여자가 쓴 가장 노골적인 섹스 관련 책'이라는 말을 듣는 <카트린 M의 성생활>을 내놓았다.  298


아이작 싱어의 <하우스 프렌드>  300


로렌스 블록의 Small Town(작은 마을)

영국 소설가 하워드 제이콥슨의 Act of love(사랑의 행위)  302


<펜트하우스 레터스>의 편집장 캐시 카바노프는 지난 몇 년 동안 잡지사에서 받은 편지 중 가장 인기 있는 주제는 아내를 다른 남자와 나누는 경험이나,아내가 다른 남자(아니면 남자들)와 함께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말했다.  306


제22권 처음 몇 페이지에는 편집자가 이렇게 언급했다. "우리가 받는 편지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주제는 관음증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내를 지켜보는 것이다. 이런 남편들에게는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 어느 경우에는 여러 남자들과 정열을 불태우는 것을 지켜보는 일보다 흥분되는 일은 없는 듯하다. 다른 남자가 제공하는 봉사와 기교로 아내가 몸을 흐느적거리고, 땀을 쏟으며 오르가슴으로 몸을 떠는 것을 지켜보는 남편의 마음은 에로틱한 몽상으로 들끓는다."  307


니 잡지에 실린 편지들... '그 이야기에 댛나 기억이 상당히 흐릿하긴 하지만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남자들이 보통은 여자 친구나 아내가 그런 일을 한다면 처음에는 충격이고 상처를 받겠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 일로 성적 자극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는 점이다.'  308


영화 <사이드웨이>

덴마트 영화 제작자 라스 폰 트리에가 만든 <브레이킹 더 웨이브>

카트린 브레야가 감독한 독립 영화 <로망스>

카드린 드뇌브가 주연한 1967년 영화 <세브린느>

데미 무어와 로버트 레드포드가 출연한 영화 <은밀한 유혹>




7 페티시와 판타지


상당히 많은 연구들이 정신 건강 전문가 대부분이 비일부일처 관계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을 정신 질병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단느 것을 보여주었다. 아내 나누기에서 이런 가정은 수많은 방식으로 나타난다. 첫째, 아내 나누기가 보통 '페티시'라고 부르는 성도착이 있음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둘째, 아내 나누기에 관심이 있는 것은 정신 질병과 성격장애가 있음을 나타낸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 아내 나누기에 대한 욕구, 흥미, 실행이 정신장애와 정서장애의 증상이라고 믿는 것이다. 

성 장애와 정신장애를 연구한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정신 건강에 관한 연구는 상당 부분이 주로 사회적인 편견과 비과학적인 판단에 근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 다시 말해 흔하지 않은 행위는 정상이 아닌 것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치유와 회복 과정의 일부일 수 있다.  325-326


성 연구자와 임상의는 성 장애 가운데 관음증과 노출증을 배우자가 다른 사라모가 섹스 하는 것을 지켜보는 순전한 판타지와 구별한다. 이런 판타지에서 나온 행위는 임상적으로 관음증과 노출증으로 진단된(가끔 기소 당하기도 하는) 사람들이 흔히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행동을 한다고 보고되는 것과 다르게 안정적인 관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 관음증 환자들은 발각될지 모르는 두려움이라는 스릴을 맛보기 위해 그런 일을 한다지만, 서로 합의하여 배우자의 성행위를 지켜보는 판타지에서 그런 두려움은 찾을 수 없다.  330


헤로도토스(herodotos)는 헤라클레스의 후손인 리디아의 왕 칸다울레스(Candaules)의 이야기를 했다. 칸다울레스는 자기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믿었고, 아내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칸다울레스의 시종 가운데 기게스(Gyges)라는 경호원이 있었다. 그는 칸다울레스의 조언자면서, 왕이 자기 아내의 아름다움을 찬미할 때는 경청자 역할을 했다. 어느 날 칸다울레스가 기게스에게 왕비의 아름다움을 확실하게 믿으려면 왕비의 벗은 모습을 봐야 한다고 고집했다. 기게스는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거절했지만, 왕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칸다울레스는 기게스를 침실에 몰래 들여서 왕비가 잠자리에 들기 전 옷 벗는 것을 지켜볼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기게스가 침실에서 빠져나올 때 왕비가 그를 보았고, 그와 남편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아챘다. 다음 날 왕비는 기게스를 불러 그의 행동에 대한 벌로 죽음을 택하거나, 칸다울레스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뒤 자기와 결혼하라고 명했다. 그날 밤 왕은 전날 밤과 같이 기게스를 침실에 들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게스가 칼로 무장하고 있다가 왕이 잠든 틈을 타 심장을 찔렀다. 기게스는 왕위를 빼앗고 왕비와 결혼했다.

다양한 자료에 따르면 칸달리즘(candaulism)이란 다른 남자들에게 아내의 누드 사진이나 이미지를 보여주는 행위 혹은 아내의 동의 없이 다른 남자에게 아내의 벗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일을 말한다.  336


스윙어들이 정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이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지만, 이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이런 인식과 다른 결과를 보인다. 1970~1980년대에 연구자들은 스윙어 집단을 대상으로 다양한 성격검사와 심리검사를 한 결과, 이들이 적그적이고 자발적인 생활 태도를 보인다고 했다.  338


이 책에서 본 부부들이 의도적으로 행위하는 것과 같이 쿠콜드 관계에서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 훨씬 명백하고 조심스런 협상이 진행된다. 남편은 결혼 관계에서 아내에게 행사하는 성의 주도권을 포기하고 복종적인 역할을 수용한 채 자기의 욕망과 흥미를 조심스럽게 펼쳐야 한다.  351


바우마이스터는 여자가 남자 파트너의 부정함을 즐기는 '반대 쿠콜드리'는 거의 들어본 일이 없다면서 이는 핵심적인 성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352


내가 기술한 부부들의 성행위는 조증 증상이 있는 기간이나 다른 심각한 정신병 증상가 함께 나타나지 않았다. 경계성인격장애와 같은 성격장애로 진단된 사람들은 격렬한 자극에 대한 갈망, 정서장애와 성격장애가 결합되어 거칠고 경계를 파괴하는 성행위를 자주 보인다. 그러나 강박성 성행위, 정신 질병과 성격장애가 있는 경우라면 이 부부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긍정적 생활 기능 수준을 보이지 못하도록 방해할 만큼 증상이 심각했을 것이다.  356-357


아내의 난교와 쿠콜드 남편의 복종적이고 양성애적이며 자기 패배적인 행위가 아동기에 당한 성폭력이 어른이 되어서까지 영향을 미친 탓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원인과 결과라는 실타래를 풀기는 쉬운 일이 아니고, 비일부일처 관계가 건강하지 못한 것이라는 핵심적인 가정은 연구 결과가 아니라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금지에서 나온 것이다.  357-358


핫와이프 현상을 병적이고 건강하지 못하며 부정적인 감정이나 경험에 뿌리를 둔 것이라는 가정으로 접근하는 것은 사회적인 금지와 도덕적 판단, 여자의 성에 대한 두려움의 결과이자 영향이다. 내 표본은 광범위하지도 과학적이지도 못하지만, 내가 이 조사를 하면서 인터뷰하고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감정, 성격 문제, 정서 문제의 증상을 보이거나 보고하지 않았다.  358-359


스웨덴의 국민건강과 복지위원회(National Board of Health and Welfare)는 2008년 11월에 사도마조히즘, 페티시즘, 복장도착증과 관련한 행위들은 더 이상 정신 건강 문제가 아니라고 결정했다. 라스 에릭 홈(Lars-Frik Holm) 위원장은 "이런 진단은 이성애 선교사 체위가 아닌 것은 모두 성적 이상이라고 여기던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이들의 성적 취향은 사회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선언했다. 미국정신과학협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APA)도 정신장애 진단에 대한 미국의 접근 방식을 최신화하면서 비슷한 논의를 했다.

성해방연맹(Thw National Coalition for Sexual Freedom)은 특히 사디즘, 마조히즘, 복장도착증의 경우, 성도착에 대한 APA의 진단 기준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APA의 진단 기준에 있는 많은 진술들이 모순된 연구를 인용하면서 진단 기준이 과학적이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나온 것이라고 했다.  360




8 쉬운 일은 아니다


에리카 종은 <날기가 두렵다>를 쓸 때 아내가 혼외의 성적 모험을 한 뒤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것으로 책을 끝내고 싶은 욕구에 저항하느라 갈등을 겪었다고 했다. 나도 이런 생활 방식으로 부정적인 결말에 이르는 경우도 보여주어 이 책의 시각에 균형을 잡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생활 방식을 추구하면서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많은 사람들과 부부를 만났다. 그러나 이 책을 위한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성적 판타지를 좇던 많은 이들이 예상치 못한 이유로 파경에 이르거나, 다른 불행한 결과를 겪은 이들도 만났다. 이 생활 방식 역시 인간의 다른 시도들과 마찬가지로 동전의 양면 같은 면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388-389


역사를 통틀어 그리고 현시대에도 아내 나누기가 만연하지만, 이런 생활 방식이 보편화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사회가 이런 행위를 금지한 길고 긴 역사가 사라지지 않았을 뿐더러, 오늘날이라고 해서 훨씬 누그러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비일부일처는 관계에 무엇을 의미인가? 서구 사회에서 혼인 관계 외에 다른 사람과 섹스 하는 것은 엄청난 기만과 경멸, 정직하지 못한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며, 규범을 위반하는 행동으로 인지된다. 그러나 부정과 결혼에 관한 수많은 책들이 혼외정사가 자동적으로 결혼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다는 생각하는 반기를 들고 있다. 부정이 조용히 수용되는 서구 문화에서도 이런 일은 은밀하게 해야지, 공개적으로 그런 관계를 했다가는 명예와 존중에 도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믿음의 근원은 일부일처 관계를 사랑의 가장 순수한 형태로 인지하는 데 있을 것이다. 혼외 관계를 하고,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다면 당사자나 관계에 잘못된 점이 있는 것이라는 믿음도 한몫한다. 부부와 개인을 상담하면 나는 이런 믿음을 '디즈니 신화'라고 이름 붙였다. 자기의 천생연분을 만나면 행복하게 사는 일만 남았다고 믿는 것이다.  397-398


스위어를 대상으로 한 많은 연구에서 이들의 결혼 생활 만족도는 다른 과계와 비교햇을 때 별 차이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스윙잉이 관계를 파괴한다고 믿지만, 연구 결과에 따르면 스우이어들은 자기들의 생활 방식이 관계에 긍정적이고 이로운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399


스윙어와 폴리아모리스트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이 대부분 이혼 경험이 있고, 일부일처 관계에서 갈등을 겪었으며, 현재의 비일부일처 관계에서 이전 관계보다 훨씬 만족감과 충족감을 얻는다고 했다. 스윙잉과 비일부일처 커플들이 자기들의 관계에 만족하고 행복을 느낀다는 결과를 도출한 연구는 이런 관계에 대한 연구자들의 긍정적인 편향이 개입된 것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399-400


대다수 스윙어 커플은 각자 활동해도 보통 배우자에게 자기가 경험한 일을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감정을 배우자에게 감추기는 커녕 자세히 들려주어 성적 흥분을 자극하고, 부부의 성생활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비일부일처 관계의 동성애와 양성애 커플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대다수 커플이 혼외 관계의 자세한 사항을 배우자와 이야기하지만, 그 정도와 내용은 개인이나 커플마다 달랐다.  401-402


'컴퍼션'은 폴리아모리 관계에서 정의된 개념으로, 자기 파트너가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이다. 따라서 컴퍼션을 느끼는 남편과 아내는 파트너가 다른 사람과 정서적이고 신체적인 사랑을 나누면서 얻는 쾌감을 경험하는 것에서 대리적인 감각보다 깊은 기쁨을 얻는다.  403


다양한 비일부일처 생활 방식 전반에 걸쳐 가장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문제가 질투심이다. 이런 커플들은 질투심이란 문제를 놓고 끝없이 논의하고 논쟁을 벌인다. 

연구와 일화적인 보고에 따르면, 여자가 남자보다 자기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신체적으로 친밀하거나 관계하는 것에 질투심이 심하다고 한다.  404-405




9 아내 나누기의 거침없는 신세계


이 세상 거의 모든 것처럼 아내 나느기도 기술을 받아들이고 바꿨으며, 기술에 의해 변했다.  429


자신을 '킹불(Kingbull)'이라고 부르는 한 사업가는 아내가 자신을 쿠콜드로 만들어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남편들을 돕기 위해 나섰다. 그는 자기 웹사이트에서 '최상의 쿠콜드 지침서(Ultimate Cuckold Manual)'라는 전자책을 판매한다.  434


어쩌다 만난 사람과 하는 성행위나 핫와이핑의 그룹 섹스와 유사한 것으로 영국에는 '도깅(Dogging)'이 있다. BBC의 보도에 따르면 도깅은 커플들이 외진 곳에서 카섹스를 하는 동안 차 밖에 있는 남자들이 구경하거나 자위를 하고, 사진을 찍거나 섹스에 함께 참여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런 행태는 커플이나 청소년이 차 안에서 성행위하는 것을 남자 청소년이 몰래 구경하던 데서 나온 것으로, 10~15년 전부터 성행했다. 일부 커플은 구경꾼드의 즐거움을 높이기 위해 차 안에 조명을 켜고 일을 벌인다. 차창이나 문을 열어놓고 구경꾼의 참여를 부추기는 커플도 있다. 가까이 다가와서 혹은 차안으로 들어와 구경하게 하거나, 섹스에 동참하도록 하기도 한다. 도깅 장소는 경찰이나 이웃의 분노를 피할 수 있는 다양한 장소를 찾을 수 있다.(일설에 따르면 이런 커플들을 달아나게 만들기 위해 경찰 사이렌을 구입해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현재 영국 법에 따르면 쌍방이 합의한 일이고, 성인이라면 그리고 분노한 이웃만 없으면 도깅이 위법 행위는 아니다.  440-441




10 수태를 위한 액체


여자의 사정에 관한 이야긴느 질 오르가슴이 우위냐, 음핵 오르가슴이 우위냐를 놓고 벌이는 일진일퇴의 논쟁까지 얽히면서 복잡하게 돌아갔다.  469


고대 그리스인은 여자의 성액을 성적인 쾌감뿐만 아니라 생명 창조와도 관련된 일로 여기고, '생산' 능력이 있다 하여 예찬했다. 히브리인은 여자의 성액을 '깨끗하지 않은' 월경혈과 다르게 여겼다.  470


힌두와 탄트라 경정에서도 여자의 사정이 여자의 '커다란 쾌감'과 관련 있고, 여자가 사정하려면 남자의 사정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자극이 필요하다고 했다.

의사가 여자 환자의 '히스테리성 발작'을 멎게 하기 위해 손으로 자극하거나 기계적인 마사지를 하던 시절에는 여자의 '씨앗 방출'을 야기하는 것이 윤리적이고 건강한 일인지 논쟁이 많았다. 그러나 일부 의사들은 여자가 씨앗을 보유하는 것이 질병과 광기를 일으킨다면서 이런 상태를 해소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의사의 의무라고 했다.

킨제이는 여자의 사저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것을 오르가슴과 연결하지 않았다. 마스터스와 존슨도 킨제이와 마찬가지로 여자의 오르가슴이 남자와 다를 것 없지만 사정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 

여자의 사정을 둘러싼 논란은 대부분 사정액의 성분에 대한 우려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 액체는 소변인가, 아닌가? 사정하는 여자들은 케이의 10대 시절 연인이 케이가 침대에 오줌을 누엇다고 몰아붙인 것처럼 단순히 소변을 배출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생물학적인 과정으로 나오는 액체인가? 이 문제에는 과학적인 논란이 있고, 연구자마다 의견이 달랐다... 

여자의 사정액은 요도 안에 있는 여러 관을 통해 배출되는데, 액체가 솟구치거나 분사된다.  471-472


지금은 스킨샘(Skene's Gland)이라고 부르는 비뇨생식기계에 있는 샘이 '여자의 전립샘'으로 작용하고, 남자의 전립샘이 정자를 전달하는 정액을 만드는 방식으로 여자의 성과 관련된 액체를 생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472


독일 산부인과 의사 에른스트 그뢰펜베르크의 이름을 따서 붙인 지스팟(G-spot)에 대한 설명은 1980년대에 나왔다. 대중과 성 전문가들이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과학계에서는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되는 개념이다.  473


성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심리치료사 리사 로리스(Lisa Lawless)는 여자의 사정을 가르치는 일을 전문으로 한다. 그녀는 모든 여자들이 사정을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비디오와 책을 냈고, 사정을 경험하지 못하는 여자는 특별한 경험을 놓치는 것이라고 했다.  473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사정을 경험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앗다.(이 비율이 약 40%라고 한 조사 결과도 있기는 하다). .. 대다수 여자는 한 번이나 두 번 정상적인 오르가슴 후에 사정한다.  474


남자의 전립샘액은 정자가 살아갈 양분과 환경을 제공한다. 여자의 몸에서는 이 액체가 죽은 세포를 제거하는 것을 도와 질을 청소하고, 질에 필요한 산성도 균형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연구자들은 여자의 사정이 종종 오르가스모가 연관되지만 이것이 보편적으로 오르가슴과 연결되지는 않고, 가끔 오르가슴과 동시 혹은 전과후에 독립적으로 일어난다고 했다. 여자의 사정은 질에 잇는 정액을 청소하고 배출하므로, 진화 과정에도 하는 역할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474-475


질이 해부학적 구조를 보면 오르가슴과 상관없이 삽입후 정자를 보유하도록 되어 있다. 성교 후 여자의 질에서 정액과 액체가 흘러나오지만, 삽입 후 30분까지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정자가 모이는 자궁 경부 근처 질에서 풀 혹은 컵을 이루기 때문이다. 정자가 즉시 배출되는 일도 있지만(얼룩말은 암컷이 질에서 정자를 즉시, 극적으로 뿜어낸다) 정액은 상당 부분 이 풀에 고여 있고, 질과 자궁 경부의 해부학적 구조에 따라 여기서 자궁으로 이동한다.  478-479


연구 결과를 보면 여자가 피임하지 않고 오르가슴을 느낄 때 정자의 70%가 질과 자궁 경부에 남았다. 반대로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했을 때는 30%만 남았다. 이는 부분적으로 여자의 오르가슴이 자궁 경부의 점액 필터를 약하게 함으로써 정자가 자궁에 도달할 길을 더 많이 만들어주고, 오르가슴을 느낄 때 질의 근육이 수축되어 자궁 경부로 정자를 더 많이 흡입하기 때문이다.  479


갤럽과 레베카 버치가 정액이 신체의 생리와 인간 행위에 어떤 효과를 미치는지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연구는 더욱 광범위해졌다.(나는 여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구강이나 항문 성교 중에 받아들인 정액이 남자에게 미치는 효과도 포함했다.)  481


1970년대 <코스모폴리탄>과 <플레이보이>는 독자들에게 혼외정사가 결혼 생활에 다시 정열의 불꽃을 피우게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501




11 성녀인가, 창녀인가?


증명할 수는 없더라도 나는 미국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현재의 미국 중산층 남편들이 결혼 당시 아내가 처녀가 아니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아내에게 혼전 관계가 있었거나, 현재 그런 관계라는 사실을 가장 잘 받아들인다고 생각한다. 남편들이 그 사실을 알고도 마음이 전혀 불편하지 앟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현시대 남편들은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와 달리 그런 소식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삶이 조각날 일로 여기지 않고, 여자를 성적인 존재로 더 잘 받아들이며, 극단적인 경우 부정한 아내나 경쟁자 남자에게 폭력으로 복수한다고 말하는 정도다. - 게이 탈레스  506


한 부부가 내게 말한 것처럼, 더 중요한 문제는 상대 남자의 성격이다. "그 남자를 믿을 수 있어야 해요. 그 남자를 집으로, 우리 삶으로, 내 아내의 침대로 불러들이는 일이잖아요. 그런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해요."  513


영국에서 수행한 연구들을 보면 외도하는 여자들은 남편보다 성공적이고 사회적인 지위도 높은 남자를 선택했다. 여자들이 자기 남편보다 낮은 계층의 남자를 애인으로 선택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516


스윙잉, 핫와이핑, 폴리아모리 그리고 다른 형태의 비일부일처 생활 방식은 내면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으며, 사회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특혜를 누리는 삶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들은 역사를 통해 왕과 여왕, 대통령, 지배자, 최고경영자, 백만장자에게만 허락되던 일부일처제 법칙의 예외를 자기도 실현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517


쿠콜드리가 드물고, 아내의 성적인 부정이 인정되는 일은 더더욱 드물다는 일반적인 믿음과 다르게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아내에게 다른 애인을 두도록 허용한 남편들의 역사는 길고도 길다. 역사를 보면 이런 사건이 예술, 문학, 지식인 사회에서 많이 일어나긴 했지만, 이런 생활 방시고가 성적 관행이 사회 계층 전반에 걸쳐 보편적으로 존재하던 일임을 알 수 있는 기록도 있다. 이런 행위를 탐하지 못하게 한 사회의 금기가 이런 일이 만연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현재 이런 생활 방식이 퍼진 것은 사회적 금기의 변화를 반영하는 일인지도 모르며, 단순히 인터넷이라는 익명의 공개 토론장을 통해 이런 행위를 표현하는 것이 자유로워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내 나누기, 핫와이핑, 쿠콜드리는 본질적으로 병적이거나 파괴적인 행위가 아니다. 이런 생할 ㅂ아식을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추구해온 부부들은 지극히 건강한 관계고, 부부간의 의사소통 방식이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인 경향이 있다. 이런 생활 방식이 정서장애나 관계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그런 문제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오히려 개인과 부부에게 적응적인 기능도 있다. 두려움, 힘과 주도권 문제, 자유와 독립에 대한 요구 같은 문제를 극복하고, 권위를 포기하고 사회의 기대에 부합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내려놓기 위한 방식이다.

이런 생활 방식을 추구하는 아내들은 일부일처제와 결혼의 복잡한 기대뿐만 아니라 1000년 동안 여자에게 내려진 사회의 기대와 명령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이런 생활 방식에는 단순한 성을 넘어 여성주의의 복잡하고 강력한 메시지와 여성에게 부여된 힘이 놀라운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 문화에서 여자들은 착한 여자가 되라고 하면서도 착하지 않게 살라고 하고, 섹시하게 행동하라도 하면서도 그런 행동은 안 된다고 하는 이중성을 갖고 살도록 압박 받는다. 아내 나누기를 받아들이는 아내는 그 안에서 힘을 발견했다. 사회가 그들에게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지시하고 자신을 정의하게 만든 것, 선택하게 한 것을 거부할 힘이다.  522-523


내가 흥미로운 연구 결과와 인터뷰한 내용을 이야기해주었을 때 놀랍다는 반응과 호기심을 보인 사람도 있었다. 그 가운데 우리 아버지의 반응이 가장 재미있었다. 아버지는 "뭐에 관해 쓴다고? 네가 미친거 아니냐? 그런 것을 쓰고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게다. 세상의 모든 남편들이 네 멀를 베어버리려고 할 거야. 모든 아내들이 자기도 그런 걸 원한다고 할 테니까!"하고 말했다.  527-528


쿠콜드리나 핫와이핑을 통해 혼외의 성을 탐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이런 부부들도 부단히 움직이면서 의사소통하고,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고, 질투심과 시기심의 불꽃을 장애가 아닌 암시와 신호로 받아들이면 성공할 수 있다. 이것도 다른 관계와 다르지 않다. 이런 부부들이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할 일은 다른 부부에게도 똑같이 필요한 일이다. 건강한 관계는 부부가 함께 하는 일이 무엇이냐에 달린 것이 아니다. 서로 어떻게 의사소통하느냐, 서로 어떻게 대하느냐, 제대로 기능하고 상대에게 도움이 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달렸다. 모든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는 성행위와 상관없이 의사소통, 자유, 지지, 상호 존중이다.  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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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짝짓기가 지닌 모순적인 속성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손실은 학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못 크다.  19


생존상의 이득이 아니라 번식상의 이득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어떤 형질이 선택되어 진화하는 현상을 다윈은 성선택(sexual selection)이라 이름 붙였다.

다윈에 따르면 성선택은 두 가지 형태를 띤다. 우선 동성의 개체들이 이성 배우자들에게 성적으로 접근할 기회를 놓고 경쟁을 벌여서 경쟁에서 이긴 개체가 더 많은 기회를 얻는 형태가 있다. 성 내 경쟁(intrasexual competition).  20


성선택의 또 다른 형태에서는 하나의 성(性)에 속하는 개체들이 특정한 특질을 지닌 이성 배우자보다 더 선호한다. 이렇게 배우자로 더 자주 선택받는 개체들은 유전자를 후대에 보다 많이 남길 수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러한 특질들이 진화하게 된다.  21


우리는 진화의 산물인 근원적인 심리 기제(psychological mechanism), 즉 남성과 여성이 열심히 추구하는 짝짓기 전략뿐만 아니라 인간 행동의 엄청난 유연성까지 설명할 수 있는 심리 기제를 밝혀내고자 했다. 이 새로운 학문 분야를 진화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이라 한다.  22


남성과 여성의 성 심리에 대한 표준적인 관점을 과감히 벗어버릴 때가 온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쓴 목적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발견들을 통해서 낭만적인 희망이나 낡고 진부한 이론이 아닌, 현대 과학적 증거들에 탄탄히 기반을 둔 인간 짝짓기의 통합 이론을 형성하는 것이다.  24


이 책의 목적은 남성과 여성이 짝짓기 과정에서 부딪혀 왔던 적응적 문제들을 한 겹 한 겹 벗겨 내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진화해 온 복잡한 성 전략들을 밝혀내는 것이다.

성 전략이라는 용어가 짝짓기 문제를 푸는 해결책들을 생각해 보기 위한 쓸모 있는 은유이긴 하지만, 모든 성 전략이 의식적으로 의도된 행위라는 잘못된 인식을 줄 수도 있다. 성 전략은 의식적인 계획이나 지각을 요구하지 않는다. 땀샘은 체온 조절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이지만 우리가 그 목표를 의식적으로 계획했거나 알고 있기 때문에 땀을 흘리는 것은 아니다.  27


이 책은 배우자의 특정한 자질들에 대해 남녀가 갖고 있는 보편적인 선호 경향을 밝히고, 남녀의 각기 다른 욕망에 깔린 진화적 논리를 드러내며, 사람들이 일시적인 연애에서 상호 헌신적인 애정 관계로 목표를 바꿀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탐구한다.  30


이 책은 남녀가 이성에게 접근하기 위해 동성 경쟁자들끼리 어떻게 경쟁하는지를 탐구한다.  34


사랑벌레로 알려진 프리시아 니악티카(plecia nearctica)는 다른 수컷들이 암컷을 가로채 교미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수컷은 길게는 장장 사흘에 걸쳐서 암컷을 끌어안고 교미를 계속한다. 그래서 이들에게 '사랑벌레'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35


우리는 인간 짝짓기에 대한 진실을 너무 오랫동안 무시해 왔다. 갈등, 경쟁, 그리고 조작도 인간 짝짓기에 만연해 있다. 우리 삶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이 인간관계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 눈을 스스로 가려 왔던 커튼을 걷고 똑바로 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  51


인간에서 장기적인 남성 배우자를 고를 때 남성이 가진 자원에 대한 여성의 배우자 선호가 진화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다. 첫째, 인간의 진화 역사를 통해서 남자들이 자원을 모으고, 지키고, 통제할 수 있어야 했다. 둘째로, 남자들이 자원을 구하는 능력과 그 자원을 여자와 자식들에게 투자하려는 의향이 제각기 달라야 했다. 만일 모든 남자가 똑같은 양의 자원을 가졌고 그 자원을 투자할 의향 역시 같았다면, 여자들이 이러한 자질에 대한 선호를 발달시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고정불변한 상수는 짝짓기 결정에 무관하다. 셋째, 한 남자에게 머무름으로써 받는 이득이 한꺼번에 여러 남자를 거느림으로써 받는 이득보다 커야 했다.  60


많이 다른 삶들끼리 맺어진 커플은 서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맺어진 커플보다 쉽게 헤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85


여성 대다수가 사랑이 결혼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고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99


여성들은 짝짓기를 통해 대단히 많은 번식 자원을 내주기 때문에 어느 남성과 짝짓기할지를 놓고 신중하게 이모저모 따져서 심사숙고 끝에 결정을 내린다.  105


여성들은 돈 그 자체보다는 야망이나 지위, 지능, 혹은 나이처럼 자원을 모으게 해 주는 자질들에 더 영향을 받는 듯하다. .. 헌신할 상대를 골라야 한다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한다. 사랑과 진실성을 추구하는 것은 헌신의 문제에 대한 두 가지 해결책이다. 진실성은 남자가 헌신할 의향이 있음을 알려 준다.  106




남자들이 왜 결혼하는지는 어려운 문제다. 우리의 조상 남성들은 번식 하기 위해 여성을 임신시키기만 하면 끝이었기 때문에 어떤 여자에게도 헌신하지 않는 일시적 섹스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109


조상 남성들은 어떤 여성이 가장 높은 번식 가치(reproductive value)를 지니는지 파악할 마땅한 방도가 거의 없었다.  113


30대 남성들은 대략 5살 어린 여성을 선호하는 반면에, 50대 남성들은 10~20살 어린 여성을 선호한다.  115


매력적인 아내가 남성의 사회적 지위에 끼치는 영향을 밝힌 실험적 증거가 있다. 사람들에게 신체적 매력이 서로 다른 '배우자'들과 함께 찍은 남자들의 사진을 보여 주고 그 남자의 여러 가지 자질에 대해 추측해 보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배우자의 신체적 매력이 남성의 사회적 지위를 유추하는 데 특히 큰 영향을 끼쳤다. 직업에서의 위상과 같이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범주에 대해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있는 못생긴 남성은 다른 모든 가능한 쌍들, 곧 못생긴 아내와 함께 있는 잘생긴 남성이나 못생긴 남편과 함께한 못생긴 여성, 심지어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한 잘생긴 남성과 비교해서도 가장 높이 평가되었다. 사람들은 변변치 않아 보이는 남성이 기가 막힌 여성과 사귀고 있다면 그가 틀림없이 높은 지위를 갖고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아마도 매력적인 여성은 배우자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아서 원하는 대로 상대 배우자를 고를 수 있으리라고 모두들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128


<플레이 보이>는 잡지 중간에 실리는 큰 브로마이드 사진을 얻기 위해 약 6,000장의 사진을 찍어 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00명이 될까 말까 한 작은 집단에서 주로 살았던 우리의 조상 남성들이 평생 실제로 마주쳤을 여성들과 현대의 광고 속 여성들을 비교해 보라.  138


문화적 변이에도 불구하고 성적 정절은 남성의 장기적인 배우자 선호 목록에서 맨 윗자리를 차지한다. 서구 문화권에서는 대다수 남성들이 처녀성을 요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결혼 후에는 성적으로 충실하기를 강요한다.  150



우리가 진화한 환경에서 여성이 혼외정사를 할 기회가 열리는 대표적인 경우는 여성의 본래 배우자가 여성을 감시하다가 잠시 자리를 비울 때이다. ..

찰나적인 성 관계가 폭넓게 존재하며 진화적으로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인간 짝짓기에 관한 거의 모든 연구는 결혼에만 초점을 맞추어 왔다.  154


많은 사람들이 난잡하게 성 관계를 갖거나 혼외정사를 저지르는 사람을 기피하고 경멸하는 이유는 그들이 종종 우리 자신의 성 전략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155


여러 상대와 성적으로 결합하는 문제에 대한 심리적 측면에서의 해결책의 하나는 원초적인 욕정이다. 남성은 여러 여자와 섹스를 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진화시켰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한 기자를 향해서 "마음속에 욕정을 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성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남서으이 욕망을 솔직히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남성이 항상 이 욕망을 행동에 옮기지는 않지만, 일종의 동인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충동이 1,000번 일어나서 그중 한 번이라도 현실에 옮겨진다면, 욕정의 기능은 섹스를 이끄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160


많은 여성들과 성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적응적 문제를 풀기 위한 또 다른 심리적 해결책을 남성들이 여성에 의해 성적으로 흥분하는 현상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를 쿨리지 효과(Coolidge effect)라고 한다.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 1872~1933년, 제30대 미국 대통령) 대통령과 영부인이 정부가 새로 지은 농장을 각자 시차하고 있을 때였다. 닭장을 지나치다 수탉이 암탉과 열심히 교미하는 장면을 본 영부인은 수탉이 얼마나 자주 교미하는지 물었다. "하루에 수십 번은 합니다." 관리인이 말했다. 영부인은 관리인에게 부탁했다. "이 사실을 대통령이 오면 꼭 말씀해주세요." 대통령이 나중에 닭장에 도착해서 수탉의 정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렇게 물었다. "항상 같은 암컷과 하오?" "아, 아닙니다." 관리인이 대답했다. "매번 다른 암탉과 합니다." 대통령이 관리인에게 말했다. "그 사실을 꼭 좀 영부인에게 말해 주시오." 이렇게 수컷들이 새로운 암컷을 접하면 다시 성적으로 흥분하게 되는 현상을 일컬어 쿨리지 효과라 부른다. 이로 인해 수컷은 여러 암컷들에게 성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강한 자극을 받게 된다

쿨리지 효과는 포유동물에서 광범위하게 분포하는 형질로서 여러 번 기재되었다. 숫쥐, 숫양, 수소에서 모두 쿨리지 효과가 관찰된다. 이 효과를 관찰하기 위해서 대개 연구자는 암소를 황소 우리에 넣어 준 다음 교미가 끝나면 새로운 암소를 바꿔 넣어 준다. 황소의 성적 반응은 새로 암소가 들어올 때마다 시들지 않고 계속되지만, 암소를 교체하지 않고 그냥 우리에 내버려두면 급격히 감소한다. 인간 남성들은 새로운 여성을 접하면 성적으로 흥분하여 매번 사정까지 이르며, 여덟 번째, 열 번째, 열두 번째 여성에 대한 반응 강도는 첫 번째 여성에 대한 반응 강도와 거의 차이가 없다.

새로운 대상에 대한 성적 흥분은 매우 강력해서 이 반응을 줄여 보려는 갖가지 시도들은 대개 무위에 그친다.  166


인간의 외도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대다수 문화권에서 아내보다 남편들이 혼외정사를 더 추구한다. 예컨대 <킨제이 보고서>에 따르면, 남편의 50%가, 그러나 아내는 26%만이 혼외정사를 한 경험이 있다.  167


미국 내에서 배우자 바꾸기(swapping)는 거의 항상 남편의 제안에 의해 이루어진다. 집단 섹스도 주로 남성들이 추구한다. 인도의 무리아 족의 한 남성은 다양성에 대한 남성의 욕망을 간겨랗게 요약했다. "매일 똑같은 채소만 먹고살 순 없는 노릇이죠." 남아프리카의 크가틀라 족의 다른 남성은 그가 거느린 두 아내에 대한 성욕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한텐 둘 다 똑같이 예뻐요. 그런데 한 여자랑 내리 3일 동안 자고 나면 네 번째 날에는 지겨워져요. 그래서 다른 여자한테 가면 난 아주 불이 붙어요. 그 여자가 훨씬 더 예뻐 보이거든요.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난 알아요. 원래 여자한테 되돌아오면 똑같은 열정이 다시 치밀어 오르니까요."  168


성적 판타지, 쿨리지 효과, 욕정, 사귀는 사람과 빨리 성 관계까지 나아가려는 경향, 상대의 기준을 낮추는 것, 매력을 지각하는 양상의 변화, 동성애 성향, 매매춘, 그리고 근친상간 성향 등은 모두 찰나적인 성 관계를 추구하는 남성의 전략을 밝혀 주는 심리적인 단서들이다.  177


찰나적인 성 관계가 여성에게 가져다주는 핵심 이득 가운데 하나는 자원을 즉각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아주 오랜 옛날의 원시 부족 사회에 갑자기 기근이 강타했다고 상상해 보자. 사냥감이 드물어졌다. 서리가 벌써 음산하게 내렸다. 덤불 숲에서 더 이상 딸기류를 찾을 수 없다. 그런데 한 남자가 운 좋게 사슴을 사냥하는 데 성공한다. 주린 배를 움켜쥔 한 여자가 그가 사냥감을 끌고 돌아오는 것을 본다. 그녀는 그 남자가 잡은 고기의 일부를 얻고자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자원을 위한 섹스, 혹은 섹스를 위한 자원 이 두가지는 수백만 년 동안의 인간 진화사에서 줄곧 이루어진 거래를 통해 수없이 교환되어 왔다.  179



황금으로 명예르 사고, 황금으로 사랑을 얻는다. 우리는 아직도 황금만능의 시대에 산다.  207


여성이 섹스로 미끼를 던진다면, 남성은 투자로 미끼를 던진다.  246


남성은 가벼운 성적 이득을 얻기 위해 헌신을 할 용의가 다분히 있는척 연극을 해서 여성을 속인다. 그리고 하룻밤 정사를 위해 없는 자신감과 지위, 친절, 자원 등이 있는 척 행동한다.  247


남녀 모두 이성이 꾀하는 속임수에 매우 민감하다. 여성은 성 관계를 종종 거부하며, 신뢰할 만한 마음씨와 헌신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며, 얕은 속임수를 꿰뚫어 본다. 남성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헌신을 겉으로만 부풀리며, 묻는 말에 답변을 피하고 애매모호한 태도를 견지한다. 그들은 헌신이라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서 성적 이득만 취하고 사라지려 애쓴다.  248



모든 문화권에서 이혼이 보편적이며 특히 서구 사회에서는 이혼률이 매우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계속 함께 산다는 것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일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일도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252


남성의 성적 질투는 아내를 구타하거나 살해하는 등 아내에게 가해지는 폭력 사건의 가장 빈번한 원인이다. .. 성적 질투는 또한 살해의 주요 동기이다. ...

여성에 의해 저질러지는 살인 사건 또한 상당수가 남성의 성적 질투가 저변에 깔려 이슨 것으로 보인다.  263


압도적으로 많은 대다수 사례에서 질투는 살인처럼 극단적인 전술보다는 배우자를 지키게끔 작용하는 좀더 양호한 전술을 가동시킨다. 이러한 전술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배우자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노력이다.  267


배우자가 처음에 지녔던 짝짓기 욕망을 채워 주는 행동은 배우자를 지키는 전술로서 매우 효과적임이 밝혀졌다.  268


문화적으로 인가된 예방책이 시행되기도 한다. 아프리카의 북부 및 중부, 아라비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의 여러 문화권에서는 생식기 절단을 통해 혼외정사를 예방하는 수단이 발달되었다. 음핵(陰核 그늘음 씨핵)절제술, 즉 여서잉 성적 쾌락을 느끼지 못하게끔 음핵을 제거하는 수술이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 여성들에게 행해지고 있다.  279-280


남성이 성적으로 질투심을 느끼지 않는 문화는 어디에도 없다.  281


세계 어디서나 남성은 아내를 자신이 소유하고 관리하는 재산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세계 어디서나 남성은 자기 아내가 간통을 저질렀을 때 마치 자기 재산을 도난당한 양 반응하며, 때때로 더럽혀진 자신의 '소유물'을 고의로 파손하기도 한다.  282


배우자에게 사랑이나 자원을 제공하는 것처럼 이득을 주는 전술은 남편에게 효과적이다. .. 남편을 지키고자 하는 아내에게는 신체적 외모를 향상시키는 전술이 효과적이다. ..

부부가 계속 함께 살게 해주는 주요 기제인 남성의 성적 질투심은 남성들로 하여금 배우자에게 폭력을 휘두르게 만든다.  283



성 간의 갈등은 사회적 갈등이라는 보다 광범위한 맥락하에서 비추어 볼 때 가장 적절하게 이해된다.  286


남녀 간의 갈등은 한 성의 목표와 선호를 다른 성이 간섭할 때 일어난다. 예컨대 상대에게 투자는 하지 않으면서 성 관계만 챙기려는 남성은 정서적인 헌신과 다량의 물질적 투자를 바라는 많은 여성들의 짝짓기 목표 달성에 차질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간섭은 쌍방향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즉 남성이 여성의 성 전략에 간섭을 일으키듯이 기나긴 구애 행동과 막대한 투자를 요구하는 여성 또한 최소한의 요구 조건만 들어 주면서 성관계를 맺으려는 남성의 성 전략에 간섭을 일으킨다. 

성 간 투쟁의 본질이 무엇이든 간에 갈등 그 자체에는 어떤 진화적 목적도 없다.  286-287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른 성 전략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도 서로 다르다.  288


유감스러운 결과 중 하나는 남성은 여성이 성폭력을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지를 흔히 과소평가한다는 점이다. ..

반면에 여성은 여성이 남성에게 가하는 성폭력이 남성에게 얼마나 고통을 안겨 줄지에 대해 과대평가한다.  293


결혼이 투자를 둘러싼 갈등을 없애 주지는 못한다. .. 

상대방에 대한 무시를 정반대로 뒤집으면 상대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소유욕이 된다.  301


여성은 성적인 사기꾼이 되기 쉽지만, 남성은 헌신 사기꾼이 되기 쉽다.  306


학대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그중 한 가지는 심리적 학대가 있다. .. 배우자를 얕보거나 비방하는 전술이 사용된다.  311


배우자 학대는 분명 위험한 게임이다. ...

아내 학대는 서구의 발명품이 아니다. 이는 문화를 막론한 보편적인 현상이다.  314


남성이 종종 배우자에게 저지르는 또 다른 형태의 학대는 아내의 신체적 외모에 대해 모욕을 주는 것이다.  315


배우자 학대를 줄이는 첩경은 배우자 학대가 획일적이고 변경 불가능한 남성의 생물학적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특정 상황에 좌우되는 반응임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다.  315



'여자는 남편이 변하리라 믿으며 결혼한다. 남자는 아내가 변치 않으리라 믿으며 결혼한다. 둘 다 틀렸다.' - 무명 씨  333


장기적인 배우자를 버리게 만드는 세 가지 주요한 상황

첫째, 현재의 배우자가 자원이나 능력이 감소하거나 번식에 관련된 자우너을 제때 제공해 주지 않기 시작하여 그의 배우자 가치가 떨어졌을 때, 둘째, 나 자신의 자원이나 평판이 증가해서 이전에는 얻을 수 없었던 짝짓기 가능성이 열렸을 때, 셋째, 강력한 대안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등이다.  338


이혼 원인의 절대적인 빈도는 계산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상대적인 빈도는 구할 수 있었다.  342


세계 어디에서나 장기적인 배우자의 특질 가운데 가장 높이 평가받는 것 중의 하나는 친절함이다. 왜냐하면 친절은 장기적인 짝짓기에서 성공하기 위한 필수 요소인 서로 협동하는 결합을 꾸려 나가겠다는 의향을 신호하기 때문이다.  355



인간의 짝짓기에서도 평생 동안 변치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363


남성의 더 이른 사망은 짝짓기 시장에서 성비의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하는 몇 가지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다. 자연히 이 불균형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심해진다. 이와 같은 현상을 가리켜 결혼 압착(marriage squeeze)이라고 하는데, 이는 어떤 여성들은 짝짓기 시장에서 함께 어울릴 만한 남성이 부족해서 억지로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393



남녀 관계에 대한 통찰은 반드시 성적 동일성과 성적 차이의 수수께끼를 꿰뚫어야 한다.  407


진화심리학은 짝짓기 전략의 변이를 설명하기 위해 생애 초기의 경험, 양육 태도, 기타 환경적 요인들에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어 심리학자 제이 벨스키와 그의 동료들은 가혹하고 소원하고 변덕스러운 자녀 양육 태도, 불규칙적으로 제공되는 자원, 부부 간의 불화 등이 자식들로 하여금 일찍 번식하고 여러 상대를 즉시 갈아 치우는 짝짓기 전략을 채택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한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한 명의 배우자에만 의존해선 안 된다는 것을 배운다. 따라서 그들은 빨리 성생활을 시작하고 여러 명의 일시적인 상대로부터 즉각적인 자원을 얻는 단기적인 짝짓기 전략을 택한다. .. 이혼한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로부터 얻은 증거들은 이 이론을 뒷받침한다. ..

생애 초기의 경험에 의해 짝짓기 전략이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 아마도 각 문화권이 정절에 부여하는 서로 다른 현상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419


서로의 진화된 욕망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남녀의 화합을 이루는 열쇠이다.  427


우리는 35억 년 간의 지구상의 생명 역사에서 우리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최초의 종이다. 우리의 진화적 과거를 잘 이해한다면 우리 자신의 운명을 설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  429



여성의 짝짓기 전략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 다양하다.  431


이 장은 인간 여성의 짝짓기 전략에 대한 최근 연구들이 활발히 다루어 온 네 가지 진화적 난제에 초점을 맞춘다. 여성의 오르가슴은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가? 여성들은 왜 혼외정사를 갖는가? 여성의 성 전략은 월경 주기에 따라 변하는가? 남성은 여성이 언제 배란하는지 알 수 있는가?  432


오르가슴을 체험한 여성들이 기술한 다음 내용을 살펴보자.

'온몸의 근육이, 특히 등과 다리가 아주 팽팽하게 긴장되고, 약 5초간 몸이 뻣뻣하게 펴지면서 고조된 흥분감을 맛본 다음에 몸이 갑자기 이완되고 기분 좋게 지치면서 안도감을 느낌.'

'매우 강렬한 쾌감과 긴장의 고조가 파도처럼 여러 번 밀려오면서 마침내 환상적인 극치가모가 긴장이 탁 푸어짐을 경험함.'

'기대에 찬 긴장과 흥분으로 시작하며, 직장이 수축되어 일련의 짜릿한 느낌이 등골에 전해진다. 긴장되고 열렬한 늒미이 갑자기 생식기에서 폭발을 일으킨 다음, 어지럽고 축 늘어지는 감정을 느끼며 거의 정신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든다. 생식기에서 시작된 폭발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전해진다.' ...

여성의 오르가슴은 여성에 따라 매우 변이가 심하다. 전형적인 한 연구에서는 여성의 15%가 성 관계마다 항상 오르가슴을 경험하고, 48%가 대부분의 경우 경험하며, 19%가 때때로 경험하며, 11%가 가끔 경험하며, 7%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433-434


획일적이고 규칙적으로 존재하는 남성의 오르가슴과 달리 여성의 오르가슴은 분명히 존재하면서도 관심, 토론, 논쟁, 이데올로기, 기술적 지침서, 논문과 대중 문헌 등을 유발시킨다. 존재하지 않을 때가 매우 잦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435


적어도 다섯 가지 상이한 적응적 기능이 여성의 오르가슴을 설명하기 위해 제안되었다. 

첫 번째 기능은 쾌락 가설(hedonic hypothesis)로서 여자들은 단지 즐기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적응적 기능은 이상적인 남편감 가설(Mr. Right hypothesis)로서 여성의 오르가슴이 배우자 선택 도구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남편가 가설이 여성의 오르가슴이 여성에게 주는 정보적 가치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부성 확신 가설(paternity confidence hypothesis)은 오르가슴이 그녀의 배우자에게 주는 신호로서의 가치에 초점을 맞춘다.

네 번째 기능은 부성 혼동 가설(paternity confusion hypothesis)로서 ... 이 관점에 따르면, 여성의 오르가슴은 문란한 짝짓기를 촉진하기 위해 진화하였다.

정자 보유 가설(sperm retention hypothesis). 이 가설에 따르면, 여성의 오르가슴은 정자를 흡수하여 자궁 경부와 자궁 안으로 끌어들여 수정 확률을 높이는 기능을 한다. ..

다음 세 가지 중 하나를 통해 그 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첫째, 자궁 경부가 내려앉게 만들어 정액이 고인 곳에 잠기게끔 할지도 모른다. 둘째, 자궁 경부가 정액이 고인 곳에 더 오래 머무르게끔 할지도 모른다. 셋째, 오르가슴에 따른 수축으로 인해 자궁 경관의 점액이 정액을 자궁 내부로 끌어들일지도 모른다.  441-444


예컨대 영국에서 실시된 최근 연구에 따르면 여성의 71%가 오르가슴 없는 섹스도 여성에게 진한 만족감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흥미롭게도 여성보다 10%나 더 많은 남성들이 여성이 진정한 쾌락을 맛보기 위해선 오르가슴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이는 여성의 오르가슴이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더 큰 고민거리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사한다.  444-445


오르가슴을 자주 경험하는 기혼 여성은 드물게 경험하는 기혼 여성보다 결혼 생활에 더 행복감을 느낀다고 답한다. 이러한 결과는 이상적인 남편감 가설을 뒷받침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오르가슴이 처음에 배우자를 선택할 때뿐만 아니라 이미 선택한 배우자와 계속 함께 살 것인지를 결정할 때에도 기능한다고 가설이 수정될 때에만 가능하다.  445-446


외도 상대로 택하는 남성은 어떤 특성을 갖는가 등을 질문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정규적인 상대와의 결혼을 계속 유지하는 여성들에게 혼외정사는 '우수한 유전자'기능, 즉 한 사람으로부터 투자를 얻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우수한 유전자를 얻는 기능을 수행하리라 생각된다. 또 다른 여성들에게 혼외정사는 배우자 교체 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혼외정사는 여성들의 자존심을 높여 주어 지금의 관계를 털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추진력을 제공해 준다.  463


24개월 동안 여성 참여자들은 성욕을 느낄 때마다 일일 차트에 'x'표시를 했다. 이들 x 표시들을 28일 월경 주기에 대한 그래프로 작성했다. 여성의 성적 욕망은 배란이 가까워짐에 따라 꾸준히 증가해서 배란 바로 전에 가파른 정점에 다다랐으며 이는 월경 주기의 14일째 되는 날에 해당했다. 성욕은 이후 여성의 월경이 시작되는 시기에 접근하면서 꾸준히 하강 곡선을 그린다.  464-465


생물학의 오래된 정설 가운데 하나가 "배란은 은폐되거나 숨겨진다." 이지만 태고로부터 내려온 성적 열망은 여성들이 가장 임신하기 쉬울 때 기지개를 켜는 것 같다.  465




역자후기


진화생물학자는 어디서나 진화를 본다.  583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모든 심리와 행동을 연구 대상으로 삼지만, 특히 인간의 짝짓기 행동은 진화심리학자들이 가장 활발히 연구하고 있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585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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