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기본적으로 <바가바드기타>의 해설서이다. 해설서이긴하되 일반적으로 알려진 해설을 되짚어보고 또 뒤집어보려 한다.

재해설서이기도 하다.  17


<기타>가 인도와 힌두교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힌두교의 전형적인 신학자가 알려주는 다음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베다(Veda)>는 히말라야 설산의 정상과 같습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순백(純白)의 정상은 마치 신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장소와 같습니다. '앎'을 뜻하는 베다란 곧 계시입니다. 여러 <우파니샤드>는 그 정상의 백설이 녹아 흐르는 실개천들과 같스비낟. 눈의 결정(結晶)과 같은 계시의 말씀을 인간이 이해하고 체험하면 그 눈이 녹아 인간의 마음에 흐르는 지혜가 될 것입니다. '우파니샤드'라는 말의 뜻처럼 '가까이 내려 앉아' 겸손하게 그 말씀의 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타>는 그 여러 실개천이 모여서 이루어진 산정호수와 같습니다. 인간이 경험한 가지각색의 지혜는 흐르고 흘러 결국 하나의 진리로 수렴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여러 실개천이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모습과 같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기타(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진리의 기타는 하나뿐이랍니다. 진리는 하나인데 시인들이 여러 방식으로 노래를 부른다고 <베다>에서도 말하지 않습니까.'

<베다>라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 가운데 하나이고, <우파니샤드>라는 것은 <베다>의 끝부분을 형성하는 문헌이다.

<기타>는 이 두 문헌의 위대한 지혜를 모아 보다 대중적인 목소리로 재현한 작품이다.  27-28


호수로 강물이 흘러들어오고 흘러나가듯이 <기타>는 그 이전에 나타난 사고체계의 종착역이요, 그 이후에 등장하는 사고체계의 출발점이다.  29


<기타>를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 많다면(실제로 매우 많을 것이다.), 다음의 세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기타>는 본래 누구든지 이해하기 어렵다.

<기타>가 불가해(不可解)하거나 난해(難解)하다는 점이다.

둘째, <기타>는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지만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이해가 불가능하다.

<기타>를 탓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탓하라는 것이다.

셋째, <기타>는 읽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 이해의 폭이 천차만별이다.

자기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만큼 <기타>를 이해할 수 잇다는 현실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32-33


<기타>를 향한 맹목적인 숭배는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이분법적 견해와도 관련이 있다.

동도서기는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동양을 정신문명으로, 서양을 물질문명으로 나누면서 동양의 정신문명이 더 우월하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믿는 사상이다.

진정 동양은 정신문명이고 성양은 물질문명인지 묻지 않은 채 동양의 어떤 정신문명이 구체적으로 더 우월한지 찾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아울러 진정 동양의 정신문명이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지와 구호만 있는 곳에는 내용이 빈약하다.  35


무작정 <기타>의 위대함조차 식민지 시대의 통치 전략으로 조작된 것일 수 있으니 그 위대함을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찾아보자는 것이 포함된다.  39


<기타>를 읽을 때는 무엇보다 역사적 배경을 충분히 숙지해야 한다.

<마하바라타>와 이 서사시의 0.7%를 차지하는 <기타>.  40


<기타>의 특징을 말하면

첫째, <마하바라타>의 주인공은 왕족이지만 이 서사시가 '민중의 베다'(민중을 위해 민중의 삶을 녹여서 만든 마치 계시와도 같은 앎)라고 불리듯이 대부분의 가르침은 민중을 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타>의 주인공도 왕족이지만 신의 노래(가르침)는 민중을 위한 것이다. <베다>는 인도에 본래 살고 있던 토착민의 사상, 종교, 신화, 전설, 제도, 풍습 등이 반영되고 종합된 문헌이다.

둘째, <마하바라타>에는 고대 인도를 좌지우지하던 여러 사유체계가 절묘하게 혼합되어 있다. <기타>도 여러 상반된 사상과 사고 방식이 잘 반죽된 채 다양성의 통일을 보여준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 반죽이 너무 성급해서인지 서로 다른 사유 체계 간의 관계를 그려내는 것이 고르지 않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 때문에 <기타>를 읽기가 쉽지 않다.

셋째, <마하바라타>는 근본적으로 인도 또는 힌두의 영웅 이야기이고 이 영웅을 중심으로 인도의 민족 정체성과 힌두의 종교 정체성을 은연중에 강화한다. <기타>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넷째, <마하바라타>는 고대 인도에 힌두교 식의 사회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시키기 위해 힌두교 방식의 도덕을 곳곳에 담고 있다. <기타>는 드러내놓고 그러한 도덕을 강력하게 설파한다.

<마하바라타>가 성립한 시기는 불교가 융성한 시기와 겹친다. 당시 불교의 확산에 두려움을 느낀 힌두교의 지배층은 민중을 힌두교에 단단히 붗들어놓기 위해 민중의 삶을 <마하바라타>로 끌어들였다.  41-42


<기타>를 신비화하는 나쁜 사례들이다.  

첫째, <기타>를 깨달은 사람의 전유물로 간주한다.

둘째, <기타>의 모든 가르침을 영적인 것으로 만든다.

셋째, <기타>의 문제를 독자의 문제로 돌린다.

넷째, <기타>에 대한 파격적인 해석을 깔본다.  45-46


역사적 배경을 짚어가면서 <기타>에 접근하는 것도 왕도는 아니다. 그래도 이 접근이 중요한 이유는 균형감가 때문이다. <기타>를 신비화하는 쪽으로 지나치게 평행저울이 기울어 있어서 그 반대쪽에 무게를 더해주기 위해서다.  47


이 책의 중요한 목적은 <기타>에 대해 새로운 읽기가 지속적으로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데 있다.  48


마하트마 간디의 해석.. 기본적으로 그는 <마하바라타>의 전쟁 자체를 육신의 싸움이 아닌 정신의 싸움으로 보며, 정신의 싸움 중에서도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 사이의 싸움으로 본다.  58


아르주나와 크리슈나의 대화는 명상에 비유되기도 한다.

결론은? <기타>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최고의 영적인 스승이 인도하는 가운데 삶의 길을 잃은 듯한 어두운 영혼의 제자가 내면의 명상을 통해 기쁨의 빛이 충만한 경지를 체험하는 과정이다.

결국 모든 문제는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발생하고 또 마음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기타>의 숨은 가르침이다.  60


흑백 논리를 거부한다면 그 대척점에 회색 논리가 있다.  61

높은 품격의 회색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극단적이고 극성스런 흑백 논리를 물리치는 회색이다. 세상의 모든 일을 선과 악으로 확실히 나눌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 회색의 임무이다 회색은 흑백을 나누는 기준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63


<마하바라타>는 10만여 편의 시가 얽히고 설키면서 무수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만 이야기의 종착역은 그저 삶의 덧없음이다.  65


아르주나가 누구인가? 

그는 판다바의 다섯 형제 가운데 셋째로서 왕자의 신분이었고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대단한 장수였다. 특히 활에 관하여 그 어떤 적수도 없는 신궁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무사의 의무인 싸움을 철저하게 수행했으며 모든 왕자 가운데 가장 정의롭다고 알려졌다. 고귀한 신분인 데다 자신의 의무에 늘 충설하며 균형 잡힌 정의감을 가진, 한마디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아르주나 "우리가 이기든 저들이 우리를 이기든 어느 쪽이 우리에게 더 좋은지 우리는 그점을 알지 못합니다. 바로 저들을 죽이고서는 우리가 살고 싶지 않은데 저 드리타라슈트라(백부님)의 아들들이 반대편에 정렬해 있습니다. 연민이라는 해악으로 말미암아 제 본성이 뒤흔들리고 정의(의무)에 대한 제 생각이 혼란스러우니 당신께 여쭙니다...."(2.6~2.8)

여태껏 자신이 굳건하게 올바르다고 믿던 것들이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정의로운 것과 정의롭지 않은 것을 나름대로 확실히 구분하면서 잘 살아왔는데 전쟁을 앞두고 머릿속이 새까맣게 변하면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 고백은 그가 철처하게 회색의 인간으로 서 있음을 암시한다.  71-73

"크리슈나여 양 군대 사이에 저의 마차를 세워주십시오. 싸우기를 원하여 정렬된 저들을 제가 관찰하는 데까지, 시작되려는 전쟁에서 누가 저와 더불어 싸워야만 하는가를 제가 관찰하는 데까지..."(1.20~1.23)  75


아르주나가 그 사이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굳건한 기준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으리라. (양 군대 사이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적군으로 진열해 있는 친족들을 가까이서 보지 못했을 것이다. 친족들을 가까이서 보지 못했다면 아마도 그는 동요되지 않았을 것이다.)  76


요점은 이거예요. 언제든지 우리 삶은 회색의 현실감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거예요. 음, 물론 출발점이 그렇다는 거고 도착점이 그래서는 안 되겠죠. 회색의 현실감을 인정하되 항상 그 회색에서 빠져 나오도록 애써야 한다는 거예요. 회색에서는 도통 의지할 게 없으니 보통 사람이 계속 회색으로 살아가기는 힘들어요. 빠져나와야 하죠.  80


하나, 크리슈나는 고통에 빠져 있는 아르주나의 마음에 커다란 충격을 던지는 말을 한다. 매우 당혹스러운 조언의 요점은 이러하다. '전쟁터에서 육신을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을 죽일 수는 없다. 육신과 달리 영혼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둘, 아르주나는 최후에 크리슈나의 가르침을 다 듣고서 자신의 모든 미혹이 사라졌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잘못된 생각들이 사라졌고 올바른 생각들로 채워졋다는 것이다. 생각이 바뀌면서 난제가 다 해결되엇다면 그것이 마음의 ㅣ문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애초에 아르주나는 스스로 자신의 어리석음과 혼란을 고백한다. 크리슈나 역시 첫 가르침에서 아르주나더러 지혜로운 척하지 말라고 하낟. 이처럼 모든 것은 어리석은 생각 때문이다.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기타>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셋, 아르주나가 고통을 겪는 큰 이유는 너무 많은 생각 때문이므로 키리슈나는 내내 그것을 버리라고 충고한다. 생각을 넘어선 상상이고 상상을 넘어선 망상이다. 그래서 크리슈나는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 행동의 결과를 미리 생각하면서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89-90


<기타>에서 아르주나는 정의롭지 못한 적군에 대비하여 자신의 정의로움에 자부심을 가져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고 있다. 아르주나는 자신의 본성에 맞게 전쟁터에서 진실하게 행동해야 함에도 자신을 속이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크리슈나가 '싸우라!'고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너 자신과 싸우라'고 하는 뜻이다. 자신 안에 놓여 있는 유약함과 거짓됨을 물리치기 위해 그렇게 만든 원인을 찾아 당당하게 대면하고 싸우라는 뜻이다. 따라서 싸우라는 가르침은 폭력의 가르침이 아니다. 도리어 자신과 싸워 이김으로써 진리에 도달하게 만드는 가혹하고 냉철한 비폭력의 가르침이다.  116


라즈니쉬의 <기타> 해석은 간디보다도 한발 더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일단 제가 주목한 부분은 이 구절입니다. <기타>에서 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가치한 자신의 의무가 잘 실행된 타인의 의무보다 낫다오. 자신의 의무 속에서 죽는 것이 낫다오. 타이느이 의무는 두려움을 초래한다오"(3.35) 여기서 자신의 의무와 타인의 의무가 나옵니다. 타인의 의무가 아무리 좋다 한들 초라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아르주나는 무사이기 때문에 무사로서의 자기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조언인 셈이지요. 아르주나가 누굽니까? 천하에 둘도 없는 장수입니다. 장수면 장수답게 전쟁에서 싸워야지 자기가 마치 승려인 양 이상한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117


아르주나에게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라고 조언한 것은 자기 본성에 충실하라고 조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을 왜곡해서 보지 말고 제대로 보라는 것이지요.  118


<기타>에서 비폭력주의를 이끌어낸 것은 언제부터일까?  '비폭력'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아힘사'에서 기원한다. 이 단어는 불살생 즉 살생하지 않음을 뜻한다. 

<기타>에서 요가란 정신을 수련하여 보다 더 잘 살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삶의 길을 가리킨다.

인도인이 따르는 가장 전형적인 세 가지 좋은 삶의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 잘 살기 위한 세 가지 길을 뜻하는 그 세 가지 요가는 주로 지혜(지식)의 요가, 행위의 요가, 사랑(신애, 헌신)의 요가로 불린다.

이런 큰 츨 아래 이 세상에서 세 유형의 인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유형은 앎을 좋아하고 둘째 유형은 행동을 좋아하고 셋째 유형은 감정을 좋아한다. 첫째는 머리로 살고 둘째는 팔과 다리로 살며 셋째는 심장으로 산다. 이 세 유형이 각각 차례대로 지혜, 행위, 사랑의 요가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왜 <기타>의 크리슈나는 세 가지 요가를 가르칠까? 이유는 꽤 분명하다. 전쟁에서 싸우지 않으려는 아르주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다.  144

 

지혜의 요가 - 지혜의 요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는 우리의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보지요. 이 무지를 없애기 위해서 지혜의 길을 내세우는 거예요.

지혜란 뭘까요?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을 구별해서 아는 힘을 가리키지요.

불변하는 것을 그 누구도 소멸시킬 수는 없다오. 이 유한한 육신들이란 영원하고 불멸하며 불가사의한 영혼의 것이라고 말해진다오. 육신은 영원하지 않은 반면 영혼은 영원한 것이라는 가르침이죠.

행위의 요가 - 크리슈나는 행위를 탁월하게 잘하는 것이 행위의 요가라고 말해요. 크리슈나는 '행위에 대해서도 깨달아야만 하고 그릇된 행위에 대해서도 깨달아야만 하며 행위를 하지 않음에 대해서도 깨달아야만 하기 때문이오. 행위의 길은 심오하다오'(4.17)

행위의 요가란 행위를 하되 행위의 결과에 신경쓰지 말고 행위 자체에 몰두하라는 거예요. 

사랑의 요가 - '나에게 모든 행위를 바치고서 나를 지고한 자로 여기며 오로지 전념하는 요가로써 나를 명상하면서 숭배하는 자들에게, 나에게 마음이 몰입된 자들에게, 머지않아 나는 죽음과 윤회의 바다로부터 구해주는 구세주가 된다오. 아르주나여, 바로 나에게 마음을 고정하시오. 나에게 생각을 고정하시오. 그 결과로부터 그대는 의심 없이 바로 나에게 머물 것이오.'(12.6~12.8)

어떤 행위를 하든지 마치 신의 행위인 양 항상 조심스럽게 하라는 거니까요.  177-180


<기타>에서 크리슈나의 모든 설교는 어김없이 이 세가지 요가로 분류된다.  181


각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길이 어떤 모습으로 얽히고설켜 있는지 <기타>는 광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상상의 최고 정점에서의 대답은 이것이다. '얽히고 설켜 있는 모양새가 어떠하든지 모든 요가가 하나고 모든 길이 하나다.'  183


행위의 방법, 행위의 본성, 행위의 근거를 죄다 탐구해야만 보다 성공적인 행위가 나온다는 거지요. 그리고 행위의 방법은 행위의 요가이고 행위의 본성은 지혜의 요가이고 행위의 근거는 사랑의 요가.  197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욕망도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욕망이 없으면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이 없으면 욕망이 없다.' 이것은 <우파니샤드>의 가르침과도 흡사하다. 두려움이 없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자유이다.  201


작은 것과 큰 것, 작은 결과와 큰 결과, 작은 행복과 큰 행복, 이것은 인도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이층의 사유이다. 일틍은 작운 것의 공간이고 이층은 큰 것의 공간이다. 일층은 시간이 흐르는 무상한 공간이고 이층은 시간이 멈춘 영원한 공간이다. 보통 사람들은 일층에서 살지만 가끔 이층에 도달하는 경우도 있다.  218


'왜냐하면 태어난 것은 명백하게 죽고 죽은 것은 명백하게 태어나기 때문이라오.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그대는 슬퍼하지 않아야 하오.'(2.27)


제어할 수 없는 것은 제어할 수 없고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제어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둘을 뒤 섞는다. 제어할 수 없는 것을 제어하려고 하고, 제어할 수 있는것을 제어하지 않으려고 한다. 즉 운명을 제어하려고 하고 욕망을 제어하지 않으려고 한다. 즉 운명을 제어하려고 하고 욕망을 제어하지 않으려고 한다.

<기타>의 결론은 이 둘을 뒤섞지 말라는 것이다. 제어할 수 없는것과 제어할 수 있는 것을 분명하게 구별하면서 사는 지혜를 가지라는 말이다.  245


힌두교 연구자를 만난다면 그는 업 이론의 기원과 내용을 다름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해 주리라.

"업 이론이라는 건 쉽게 생각해서 '뿌린 대로 거둔다'는 내용이죠. 사실 굉장히 합리적인 이론이에요. 이 이론은 세 가지 이유에서 만들어졌어요. 첫째는 이 세계가 우연적이지 않고 뭔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제시하기 위해서예요. 콩 심은 대는 콩이 나야지 팥이 나면 안 되잖아요. 둘째는 이 세상의불공평함을 설명하기 위해서예요. 누구는 부자로 태어나고 누구는 가난뱅이로 태어나는 그러한 차별을 설명하고 싶은 거죠. 셋째는 숙명이 아닌 자유의지로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확인시키기 위해서예요.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죠. 연재의 삶이 과거에 뿌린 것 때문에 결정된다면 그건 숙명론이에요. 하지만 현재에 무엇을 뿌리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면 이건 자유의지잖아요. 그래요. 업 이론은 확정된 운명을 조금은 받아들이되 자유의지로써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가기 위해 처음 창안된 건데 어쩌다 보니 운명에 순종하는 이론으로만 잘못 알려지고 말았어요."


애당초 업 이론은 숙명론적인 사고방식보다 운명을 개척하는 사고방식에 더 가까웠다. 새로운 씨앗을 잘 뿌리기만 하면 언젠가 훨씬 나은 열매를 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점차 두 가지 특면에서 숙명론이 되었다. 하나는 현재의 고통을 참으면 그 결과로 더 좋은 세상이 오므로 현재의 고통을 숙명인 양 여기면서 인내하라는 것. 다른 하나는 현재의 모든 삶은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고 가치가 있으므로 현재의 위치를 숙명인 듯 수용한 채 만족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매우 적극적으로 운명에 도전하던 인생관은 사라지고 그 운명에 대해 체념하는 인생관이 나타난다. 업은 반드시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 된다. 업은 굴레가 되고 속박이 된다. 자우의 반대말이 되는 것이다. 급기야 업 자체가 고통이다.  246-248


어쩌면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자유를 외치는 목소리가 크면 클수록 그만큼 구속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을 가능성도 더 높아지요. 더 강하게 구속하기 위해서는 자유의 달콤함을 담은 희망의 찬가를 계속 틀어주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기타>는 자유의 창문을 열어놓고 잇는 듯하지만 좁은 창문으로 빠져나가려는 사람을 열심히 다시 불러들이죠. 그를 운명의 하수인으로 만들고 순응적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예요.'  248-249


"법전의 명령(가르침)을 내버린 채 욕망에 따라 행하는 자는 완성에 도달하지 못하고 행복이나 지고한 목적지에도 도달하지 못한다오."(16.23)

크리슈나의 이 말은 다음의 두 가지를 암시한다. 하나, 반드시 행해야만 하는 행위 이외에 다른 행위들을 결코 행해서는 안 된다. 둘, 반드시 행해야만 하는 행위를 하는 자는 행복이나 지고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250


<기타>는 힌두교의 최고신이 인간에게 들려주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노래이다. <기타>는 많은 사람이 귀 기울여 들을 만한 가르침을 담은 지혜서이다. 

어렵지 않게 실행할 수 있는 방법들로 다음 몇 가지를 제시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생명력 있는 내용을 구하기 위한 방법들이다.

첫째, 과대평가와 과소평가를 하지 않도록 한다. <기타>를 신비주의나 영성주의의 시각에서 접근할 때 주로 과대평가에 빠진다. 또 <기타>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지혜를 담고 있다거나 인류에게 가장 보편적인 지혜를 담고 있다고 여기는 것도 엉성한 과대평가이다.

인도인이 <기타>를 과대평가하는 간접적인 예가 있다. 조금만 가방끈이 긴 사람이라면 <기타>의 어느 한 구절을 암송하면서 삶에서 대면하는 이런 저런 문제에 관해 그 구절로써 평가하거나 적용하려는 태도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는 <기타>를 인용하기 위한 인용일 뿐 거의 설득력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은 것처럼 우스꽝스럽다. <기타> 만능주의에 빠진 듯한 사람은 <기타>를 경외하기만 할 뿐 이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른다.

과소평가는 어쩌면 더 위험할 수 있다. 이성과 합리성의 시대에 어찌 미개한 인도의 고대 문헌을 가져와서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바탕 난잡한 말들을 풀어놓느냐, 하는 그런태도다. 눈이 있어도 읽으려 하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오나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서구적인 생각의 틀에 인도의 <기타>가 끼어드는 것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밀어내고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타>에 익숙한 사람조차도 종종 과소평가에 가담하곤 한다. 하지만 과대평가에 적절한 근거를 내세우는 경우가 매우 드문 것처럼 과소평가에도 그런 경우가 매우 드물다. 대부분이 신념과 정서와 감정을 앞세운 채 <기타>를 거부하거나 폄하한다.

둘째, 전후좌우로 종횡무진하며 읽어보도록 한다. 전후라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가리키고 좌우라는 것은 저곳과 이곳을 가리킨다. 그러니 전후좌우란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종횡무진이란 거침없이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기타>를 과거의 유산으로만 여기지 않고 <기타>를 인도만의 문화적 틀에 한정시키지 않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횡성수설하며 함께 더들도록 한다.

넷째, 해석과 체험을 끝없이 순환시키도록 한다.  316-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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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접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어느 시공간에서 벌어진 일들이 하나하나의 점이 되어

생에 대한 흔적이 한 장의 점묘화(點描畵)로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 또한 한 장의 점묘화가 아닐까.



델리 


양개 선사에게 한 스님이 물었다. "뱀이 개구리를 잡아 먹으려 하고 있을 때 개구리를 구해줘야 합니까, 가만히 내버려둬야 합니까?"

"구해준다면 도를 보지 못하게 되고, 구해주지 않는다면 생명을 저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  15


여행자 숙소가 몰려 있다는 파르간지의 메인 바자르(시장)을 찾았다.  16

시크교도들은 힌두교 전통을 따르면서도 카스트의 차별과 모든 의식을 무시하고, 이슬람의 유일신 사상을 강조해 우상숭배를 금하고 있다. 그들은 경전인 <그란트(Granth)>를 구루로 삼아 날마다 암송한다.  21


인도의 명동이라고 할 수 있는 코넛 플레이스는 내가 생각한 인도와는 달랐다.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고, 대형 백화점도 있었다. 쇼핑몰답게 밖에서 봐도 조명의 화려함이 극에 달했다.  26


가네샤는 고난과 재난을 없애는 신으로 숭배되고 있으며, 가게나 버스의 앞유리에는 락슈미 여신의 사진과 함께 가네샤의 사진이 부착되어 있다.

인도의 신들을 알면 인도의 문화를 알게 되고, 그 사람들의 생활방식도 이해하게 된다.  30-31


<바가바드기타>는 인도 문학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마하바라타>의 한 부분이다.  44



아그라


<우파니샤드>에 '우유는 그 안에 소리를 갖고 있어 마시는 사람에게 좋은 소리를 내게 한다'고 쓰여 있다.


타지마할의 입장료로 가난한 인도를 먹여살린다고 한다. 외국 관광객은 950루피, 인도 사람은 15루피.  53

안으로 들어가면 곽을 둘러싼 대리석 판으로 외어 있는 흰 격자창살이 보인다. 격자창살 위는 영원히 지지 않는 튤립이나 작은 꽃들로 장식되어 있다. 여러가지 보석으로 상감한 이 꽅들은 화병에 꽂혀 있으니 샤 자한은 날마다 부인에게 꽃을 바치고 싶었던 것이다. 

영묘 건물은 세 겹의 벽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나는 이곳에서 죽은 영혼 마저 자기 곁을 떠날 수 없게 세 겹의 벽 속에 가두어버린 한 남자의 소유욕을 보았다. 다음 생에 또다시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왕의 애끓는 사랑이 느껴진다.


달밤에 왕이 여인과 산책하는 그림을 보면, 그 주변의 사물들까지 자세히 화푝에 옮겨놓았기에 두 사람이 나누는 농밀한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질 정도다. 한 가지 재미있느 사실은 이집트의 그림들처럼 사람들의 얼굴을 대부분 측면으로 그려놓았다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사람을 측면으로 그린 이유가 정면 모습을 그리기 어려워서였다고..  54-55


아그라 성의 왕의 알현장은 하얀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그 앞에는 깊은 우물이 있다. 그 우물은 식수 공급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처형을 위한 곳이다.  56


아버지를 유폐시키고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왕이 된 아우랑제브는 왕좌에 오르면서 엄격한 고행에 전념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먹지 않았고 야채와 과일 졸임만 먹었다. 또한 자주 단식을 행했고 아그라에서 큰 혜성이 나타났을 때는 소량의 물과 기장으로 만든 빵만 먹었는데, 자칫 죽을 뻔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우랑제브는 호랑이 가죽 하나만 덮고 땅 위에서 잠잤다고 전할 만큼 금욕적인 생활을 햇다. 그런 금욕적인 생활로 자신의 죄가 씻어지리라 생각했을까? 이러한 인간의 이중성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57-58



파테푸르시크리


무굴 제국의 악바르는 8백여 명의 여인들로 채워진 아방궁을 지녔음에도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아들이 없던 악바르 대왕은 이슬람 수피성자 셰이크 살림 치스티를 찾아가 아들을 점지해달라고 부탁했다. 래서 그는 성자로부터 아들을 갖게 되리라는 예언을 받는다. 성자의 예언대로 1569년 시크리 근방에서 아들 자한기르가 태어나자 크게 기뻐한 악바르 대왕은 황량하게 버려진 억덕이었던 이곳에 도시를 건설할 계획을 세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파테푸르 시크리로, 14년간 무굴 제국의 수도였다. 악바르 대왕은 인도의 여러 종교를 아우르는 통치철학을 갖고 있었는데, 파테푸르 시크리는 힌두와 이슬람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악바르는 자신의 무덤을 살아 있을 때부터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들어가는 네 개의 문마다 힌두, 기독교, 이슬람 등의 양식을 상징해 세웠다고 하니, 그가 각 민족과 여러 종교의 화합을 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자신의 색깔을 죽인다는 것, 그것을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67-68


악바르 왕이 아홉 개 보석 중 하나로 꼽는 비르발 재상을 위해 지은 건물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악바르 왕은 글자를 모르는 문맹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혜로운 비르발 재상을 항상 옆에 두고 모든 일을 의논했는지도 모른다. 악바르 왕과 비르발 재상 사이에는 수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71

 

파테푸르 시크리의 왕궁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72



오르차


오르차는 인도의 비경 중 하나다. 이곳은 폐허가 된 낡은 성을 보러 오기보다는 작은 마을의 고즈넉함과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75


자한기르 성은 비밀통로가 많아 자칫하면 길을 잃을 정도로 미로다.  77



카주라호

남녀의 교합상을 미투나 상어라고 하는데, 카주라호 사원 외벽에는 온통 미투나상이 조각되어 있다.  85


신은 왜 이런 미투나 상이 필요했을까? 

우리의 거친 에너지를 명상과 기도를 통해 맑은 기운으로 승화시키듯, 탄트라에서는 우리의 에너지를 성행위를 통해 깨달음의 에너지로 변형하려는 것이다. 두 개의 육체를 통한 만남은 깊은 영적 결합으로 승화되어야 하고 궁극에는 빛으로 변형되어 신비의 절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86  


자이나교에서는 무소유를 철저히 지키기 위해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앟고 나체로 수행하기도 한다.  91



바라나시


인도에는 여러 들급의 기차가 있다. 가장 빠르고 시설이 좋은 초특급열차와 특급열차가 있다. 특급열차에도 여섯 등급이 잇어 일등칸부터 삼등칸에는 에어컨이 설치 되어 있다. 배낭여행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특급열차 SL(Sleeper Class) 객실에는 에어컨은 없지만 가격이 저렴한데다 각 칸마다 양쪽으로 세 개의 침대가 있어 장거리 여행을 하는 데 별다른 불편이 없었다.  99


사두들은 죽으면 화장을 하지 않고 오렌지색 천으로 감아 수장시킨다고 한다.  106


아씨 가트에서 가까운 힌두 대학에 갔다. 규모가 워낙 커 걸어서는 다 둘러보지도 못할 정도다  110


저녁 6시가 되면 날마나 갠지스 강변에서 신을 위한 푸자가 행해진다.  112


두르가 사원은 시바의 부인인 두르가 여신을 모신 곳으로, '원숭이 사원'이라 부르기도 한다.  116


바랏트 마타 사원은 영국 식민지 통치 아래서 독립 그리고 종교적인 갈등과 빈부의 격차를 넘어 한 민족으로서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네루가 세웠다.  116


아소카 왕은 최초로 인도의 통일을 완성시킨 왕이며, 인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삼국유사>에는 아육왕이라고 기록.


사르나트 박물관은 작지만 볼 만한 것들이 많았다.  120



라즈기르


인도에서도 몇 개밖에 없다는 온천장.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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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여행이 내 인생의 한 변곡점이 될 줄은 몰랐다.  6


인도의 신화와 종교, 사원, 자연, 그리고 사람들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 인도의 영성이랄까 그 뿌리를 더듬어보고 싶었다.  7


'우파니샤드'란 말에는 '가까이' '아래로' '앉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니까 우파니샤드는 스승이 아끼는 제자를 무릎이 닿도록 가까이 앉히고 은밀히 전해주는 지혜인 것이다.  10


인도의 4대 성지 가운데 하나인 오리사 주의 푸리. 오리사 주는 유난히 힌두교 사원이 많이 '인도의 영혼'으로 불린다.  20


인도의 신들은 사람들의 삶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그들 삶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29


인도의 신들은 대체로 두 종류로 구분된다. 베다(힌두교 법전)에 나오는 신들과 힌두교의 브라흐만의 신들이 그것이다.

베다에 나오는 신들은 자연의 힘을 의인화한 신으로, 태양신 수리아, 바람의 신 바유, 불의신 아그니등 자연이 곧 신으로 숭배된다.

한편 브라흐만의 신들은 <우파니샤드>가 확립되면서 베다시대의 자연신을 대히한 힌두교 신들이다.

물론 <우파니샤드>는 철학적 성격이 강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인 브라흐만을 우주와 존재의 궁극적 원리로 인식한다. 따라서 브라흐만은 노자가 말하는 도(道)처럼 비인격적인 존재이다.  30


브라흐만은 산스크리트어로 '넓게 퍼져 있다'는 뜻이다.  34


가난한 농사꾼의 집안에서 태어난 카틱에게 "당신은 행복하오?" 하고 물었다.

"집에는 닷새쯤 먹을 수 있는 쌀과 감자가 있답니다. 그리고 아내는 매일 아침 숲에서 땔감을 구해다가 차를 끓여 줍니다. 아내가 끓여주는 차는 아주 맛있습니다. 그걸로 나는 만족합니다."

주어진 여건을 달게 받아들이는 자족의 품성이 넉넉히 몸에 배어 있는 듯 싶었다.  55-56


소리'아움 또는 옴'(AUM, Om이라고도 말해진다)은 우주의 신성한 원음으로 여겨진다.  63


우파니샤드의 현자는 브라흐만을 '존재' '지성' '무한'이라고 일러준다.

첫째로 브라흐만은 불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의 변하는 것들과 구별된다.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변화의 낙인'이 찍혀있다. 따라서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소위 변화를 겪는 것들은 지본재이고 불변하는 브라흐만은 존재인 것이다.

둘째로 브라흐만은 정신의 영역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들과 구별된다. 따라서 물질적인 것은 비지성이고, 브라흐만은 지성이라는 것이다. 즉. 브라흐만은 앎의 대상이 아니라 앎의 근거이므로 참된 지성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브라흐만은 불멸이기 때문에 소멸할 것들과는 구별된다. 따라서 소멸할 것들은 유한이고 불멸의 신비인 브라흐만은 무한이다. 브라흐만은 태어남도 죽음도 여읜 존재이며, 유한한 인간이 갇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이기에 무한이라 일컬어지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본질적 속성에 '희열'을 덧붙이기도 한다. 브라흐만은 절대적 기쁨인 '희열'의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65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금화가 주인이 된 세상에서는 값없는 것들의 고마움을 모른다. 본말이 뒤집혀, 오로지 돈을 주인으로 섬기는 세상에선 값없는 것들의 소중함을 쉽게 망각한다. 쓸모는 오직 돈으로 환산된다. 돈이 안 되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 된다.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진정 쓸모 있는 것임을 모른다.  76-77


눈을 감고 자리를 틀고 앉아서도 질주 하듯이 살아간다. 그렇게 미친 경주마처럼 질주하고 질주한 결과는 무엇이던가.  78

밥벌이에 급급해 코끝의 숨을 잊고 산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79


숨이 인간의 육신을 지배하듯이 아트만은 인간의 생명을 존재하게 하는 어떤 불변의 원리이다. 숨이 끊어져 육신이 불에 태워져도 사라지지 않는 불멸의 영혼이 곧 아트만이다.  82


우파니샤드가 제시하는 아트만이라는 개념은 자기 바깥에서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던 사람들의 시선을 자기 내면으로 향하도록 만든다.  86


우리가 '내가 아트만이다'라는 놀라운 신비를 깨닫게 되면 만물이 소중해진다고 한다.  87


"강들이 흘러흘러 바다에 도달하면 '강'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바다와 하나가 되듯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은 '이름'과 '형태'의 구속에서 풀려나 신성한 푸루사에 도달하게 되리라." - 문다카 우파니샤드


<이샤 우파니샤드>는 세상을 '변하는 것들'이라 묘사하는데, 사실 산스크리트어로 '세상'이란 말 자체가 '변화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영속하는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127


인도의 대표적인 신 시바는 '춤추는 자들의왕(나타라자)'이라고도 불린다.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시바상은 한쪽 다리를 쳐들고 다른 쪽 다리로는 악마의 머리를 밟고 있다. 네 개의 손 중 하나는 보호의 몸짓을 하고, 다른 손으로는 들어 올린 발을 가리키며, 또 다른 손에는 창조물의 심장 고동을 재기 위한 북을 들고, 마지막 한 손에는 분리의 횃불을 들고 있다. 춤추는 자들의 왕 나타라자의 춤은 정신적 재생과 신과의 합일에서 오는 황홀을 상징한다고 한다.  135


"나 이외에 아무도 없는데 도대체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두려움이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 두려움이란 다른 존재에 대해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의 감정은 '나' 이외에 타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두려움은 항상 그 무엇에 대한 두려움이다.  154


나 역시 젊은 날 구도자 행색을 하고 살아 왔지만, 솔직히 말하면 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반쪽이었다. 신을 사랑하노라 하면서도 그 쏠쏠한 세상 재미에 언제나 한쪽 발을 걸치고 살아왔다. 그런 나에게 인도에서 만난 빈털터리 수행자들의 모습은 충격과 도전으로 다가왔다.  

나는 무엇을 제대로 버린 적이 있던가. 버리기는커녕 무얼 쌓으려고만 하지 않았던가.  168


힌두교인들은 인생의 단계를 성실히 실천하고 살아야 이상적인 삶이라 생각한다.

첫 단계는 학생기(學生期, 1~25세)로 금욕과 학습의 기간이다. 이 시기에는 경전(베다)을 공부하고 카스트의 구성원으로서 각자 해야 할 의무를 익히는 데 전념한다.

둘째 단계는 가주기(家住期, 26~50세)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가족의 부양을 위해 전념하는 기간이다.

셋째 단꼐는 임서기(林棲期, 51~75세)로 앞의 두 단계를 통해 이룬 경제적 기반과 가업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숲으로 들어가 명상에 임하는 시기이다.

마지막 단계는 유행기(遊行期, 76~100세)로 숲에서 나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세상을 주유하는 시기이다. 이때는 탁발이 주요 생계수단이 되며, 세상의 모든 애착을 던져버리고, 지금까지 자기가 배우고 명상한 내용들을 현실 속에서 다시 몸으로 확인하는 단계이다. 이 인생의 네 단계는 인간이 점차 세속의 오염을 씻고 자신의 영적인 본향에 적합하게 되는 과정들을 나타낸다.(라다크리슈난)  169


사람들은 포식으로 자기 몸을 괴롭힐 줄은 알면서도 자기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금식은 하려 하지 않는다.  174


몇 차례의 여행, 짧은 식견으로 인도라는 거대한 나라를 규정하고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넓게 둘러보고,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할 것 같았다. 사랑하면 보인다고 했으니 더 깊이 사랑해야 할 것 같았다.  213


기원전 1000년경에 씌어진 힌두 경전 <리그베다>에는 인간의 계급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에 대ㅐㅎ 인간의 신체에 비유하여 기록되어 있다. 태초에 우주의 보질을 상징하는 신 푸루사가 죽으면서 인간을 창조했는데, 푸루사의 입에서 사제 계급인 브라만이 나왔고, 파에서는 군인계급인 크샤트리아가, 허벅지에서는 상인계급인 바이샤가, 두 발에서는 노예계급인 수드라가 생겨났다고 한다. 상체로 올라갈수록 신분이 높고 하체로 내려갈수록 신분이 낮아진다. 소위 사성제라 부르는 것이다.

이 사성제에도 들지 못한 아웃카스트가 있는데, 그들이 바로 가장 밑바닥에 속하는 불가촉천민들이다. 이 불가촉천민의 수는 인도 인구의 16%인 1억 650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무려 3500년 동안 짐승 취급을 받으며 살아온 것이다.  234


'진실한 마음으로 진리를 찾으려는 사람은 카르마나 윤회 이론을 배우는데 시간을 소비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기를 변형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따름이다.' 위대한 구루인 바바 하리다스의 말  247


빛을 비추는 건 태양의 자연스런 존재 방식이다. 그러나 자기 본성에서 멀어진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참자아'를 망각한 인간은 자기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선을 행할 때도 행위 뒤의 결과를 생각한다. 은행에 예치한 돈이 있으면 돌아올 이자를 계산하듯이, 우리의 행위가 가져올 열매를 기대한다는 말이다.

사랑할 때도 손익을 따지고 남을 도울 때도 돌아올 보상을 계산한다. 행위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순수성을 잃어버린 사랑은 소유욕에 불과하다. 순수성을 상실한 자선은 자기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려는 욕심에 불과할 뿐이다.  269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은 행위 그 자체가 되라는 것이다.  270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아!'하고 감탄하는 이는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우파니샤드의 현자는 말했다.  279


'코함'이란 산스크리트어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뜻이다.  283


자신의 본질을  망각한 사람은 '나는 누구인가?'를 거듭해서 물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물론 세상에는 이런 물음조차 지니지 않고 사는 사람이 더 많다.  284


세속적인 것들과의 동일시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는 누구일까?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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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를 읽으면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 갇혀 있는 인간의 삶 저 너머에 있는 무한히 넓은 세상으로 흥미로운 여행을 떠날 수 있습니다. 신화 속에는 우주 만물의 생성원리에 대한 의문과, 인간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영원한 세계와 인간을 뛰어넘는 존재에 대한 즐거운 상상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8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인도인들에게 민화를 그리는 일은 신을 명상하고 신에게 기도를 바치는 하나의 의식으로 여겨집니다.  10




베다 신화에서는 주로 자연물을 숭배하여 신격화했는데, 불의 신 아그니, 태양의 신 수리야, 새벽의 여신 우샤스, 천지를 유지하는 신 바루나 등이 찬양되었고, 아그니, 인드라, 수리야는 베다의 삼신으로 알려져 있다.

힌두교의 삼식으로는 창조의 신 브라마, 보호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시바가 있다.  18


라마

<라마야나>는 인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이야기로 아요지아의 왕자 라마와 그의 사랑하는 아내 시타가 그 주인공이다. 

<라마야나>는 효성과 복조으 용기와 힘, 인내와 희생, 단결과 충성, 그리고 우애와 우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한 라마를 도와서 시타를 구해주는 동물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39

오늘날에도 수많은 인도인들은 매년 빛의 축제인 디왈리 기간 동안 라마와 시타의 승리의 귀환을 기념하기 위해 집안 곳곳에 촛불을 밝힌다.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착한 아들 라마, 남편에게 순종하며 자신의 순결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락슈마나, 정의를 지키기 위해 불의에 대항해 싸우는 원숭이 하누만 등이 등장한다.  57


크리슈나

크리슈나는 '검은' 또는 '구름처럼 어두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59


시바

몸에는 화려한 의상 대신 호랑이 가죽을 걸치고, 목에는 해골목걸이를 걸고 다니며, 머리에는 늘 치명적인 독을 지닌 코브라를 두르고 화장터에서 일하는 천민들과 친하게 지내기 때문에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신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모든 신들이 힘을 합쳐도 그를 당해낼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신이다.  71

시바는 힌두교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 가운데 인도인들의 사랑과 경배를 가장 많이 받는 신 가운데 하나이다.  73


가네샤

그는 '장애물의 제거자'이다. 그래서 인도인들이 크거나 작은 문제 또는 어려움이 있을 때 그에게 의지한다.

무엇보다 가네샤는 지혜의 신이다.  90


두르가

인도에서는 9월에서 10월 사이에 '두르가 푸자'축제가 열린다. 벵골, 비하르, 오리사 등에서 나흘간 열리는 이 축제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연례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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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록이지만 무엇보다 살의 기록이기도 하다.

과거의 삶을 진정으로 신기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여행은 자신의 삶을 신기하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4


여행의 가장 큰 재미는 사람을 만나는데 있다. 역사를 만나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이고, 문화를 만나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5



델리는, 그 지리적인 중요성으로 중세 인도의 5왕조(노예왕조 1206~90, 할지왕조 1290~1320, 투글루크왕조 1320

~1413, 사이이드왕조 1414~51, 로디왕조 1451~1526)의 주요 거점이었다.

1526ㄴ녀 무굴제국의 창건자인 바부르에 의해 멸망한 이후에도 델리의 영화는 계속되었다. 

황금의 삼각형이라고 불리는 델리-아그라-자이푸르의 화려한 건축과 미술은 거의가 무굴제국 시대의 산물이다.  11


바부르는 아그라로 진주해 아람박이라는 정원을 만들었다.  13


초대 황제 바부르는 정원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아들인 2대 황제인 후마윤은 당시의 문화선진국이었던 페르시아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무굴-사라세닉 건축의 기반을 만들었다.  15-16


아우랑제브 황제가 죽은 뒤 궁정문화의 중심은, 델리에서 러크나우와 하이데라바드의 궁정으로 서서히 옮겨가게 되면서 델리는 잠시 그 영화를 잃는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말한 것은 라캉이었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시선을 느끼면서 그 시선에 부합하려 할 때 생긴다.  27


"스승이시여, 어찌하여 이곳에서 열반에 드시려 하시옵니까?"

석가모니는 "여래가 태어난 곳은 북쪽의 룸비니이고, 깨달음을 얻은 곳은 동쪽의 보드가야니라. 최초의 설법지는 서쪽의 사르나트이다. 이 세곳의 중간에 쿠쉬나가르가 있다...."  57


증오에는 이유나 반항이 없었다.

그것은 앞뒤가 꽉 막힌 고무 호스안에서 점점 압력이 높아지는 물줄기와도 같았다.


'학대당하고, 맞고, 우는 아이가 이 지상에 단 한 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어른들의 이유 때문에 학대당해야 하는 아이가 이 지상에 단 한 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난 절대로 신을 인정할 수 없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187


인도에 살면서 여러 가지 이해하기 힘든 일을 많이 본다. 다 이해할수도 없고 이해 목할 일도 아니기에, 그냥 색다른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202


20세기의 대표적인 종교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신비주의를 낮은 형태의 신비주의와 높은 형태의 신비주의로 구분하고 있는데, 그가 말하는 낮은 형태의 신비주의란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힘을 통해 믿기 어려운 놀라운 일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리키는데요. 우리가 신비주의를 떠올릴 때 곧 바로 '비의적'이거나 '마술적'인 분위기를 연상하게 되는 것도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이지요.

그 반면 높은 형태의 신비주의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지점은 진리에 대한 순수직관, 다시말하면 자기 자신을 절대자 혹은 그러한 섭리와 흐름에 온전히 내맡겨 완전한 합일을 이루는 상태라지요. 가장 깊이 잇는 자기의 존재를 완전히 구현한 상태 말이지요. 그래서 인도 종교의 기배적인 특징은 해탈의 투구에 있고 인도인들은 고통스러운 현실의 삶을 초월하여 절대적이고 영원한 자유를 꿈꾼하도 합니다.

비단 인도뿐만 아니라 유럽의 신비주의 그리고 불교나 기독교, 이슬람 혹은 민중신앙에서 말하는 신비주의는 신과의 몰아적인 친교를 통해 그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과 관계있다지요.  212-213


최근의 젊은 시인들 중에는 희곡을 써 보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들 역시 미지의 참험가들처럼 시 자체가 아니라 시적인 어떤 기미를 찾아 경계를 넘나드는 멀고도 긴 여행길에 나선 거겠지요.

수백 개의 언어가 동시에 사용되는 인도는 하나의 국가가 아닌 큰 대륙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극과 극을 오가는 모순 된 세계가 마구 섞여 있는 땅이기도 하지요. 벌레 한 마리도 함부로 죽이지 않는 자이나교의 교리 한편에 종교 갈등으로 인간 폭력이 만연하고 있고, "세계가 한 가족"이라는 <베다>의 구절과는 상관없이 사우너에 드나들 자유마저 제한된 최하틍계급인 불가촉천민이 버젓이 존재하며 그러면서도 세계 최대의 의회 민주국가로 손꼽는 곳이 인도입니다. 국민들의 대부분은 여전히 궁색한 가난의 때를 벗지 못했지만, 국가 자체로 보자면 이미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고 핵실험에도 성공했으며 IT산업 최강국으로 초국가주의적인 정보망을 가진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 혼재의 땅에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즘과 힌두교의 대중 신앙운동인 박티 사상이, 마더 테레사의 캘커타 거리와 달라이라마의 다름살라 망명정가 함께 공존하고 나란히 숨을 쉬고 있습니다.  237-238


암베르 카르는 독립 인도의 초대 법무장관으로 불가촉천민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 초안을 작성하였다. 힌두 민족주의와 카스트 제도 안에서 불가촉천민을 바라봤던 간디와 그 자신이 불가촉천민 출신으로 마르크시즘에 기대고 있던 암베드 카르는 인도 독립 과정에서 많은 갈등을 겪어야 했다. 인도 밖에서는 간디가 더 유명하지만, 인도에서는 암베드 카르에 대한 외경심이 강해 오히려 간디보다 더 많은 동상이 있다고 한다.  245


박티 요가는 우리에게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고 오직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274



여행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얘기하는 것, 그들의 모습을 내 눈으로 바라보고 내 모습을 그들이 바라보는 것. 그러면서 그곳의 풍경들과 삶들과 내가 대화하는 것이리라.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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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제 신화의 시대는 갔다고 말하낟. 한없이 복잡다단해지는 현대사회 속에서 우주의 근원이니 신이니 하는 알 수 없는 세계로 들어갈 여유가 없어진 것이다.  8


이슬람교는 신자도 (인도)전체 인구의 12% 이상(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인도 인구가 12억이니 1억 4천이 넘는 것이다)이며, 타지마할이나 쿠트브미나르, 자마 마스지드 등 대단한 건축 유산을 남기고 있다. 남인도의 고아 지방 같은 경우는 기독교의 세력이 만만찮을 뿐만 아니라 그곳의 기독교 사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불교, 자이나교의 유산도 인도 역사를 더욱 풍부하게 한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인도에 뿌리를 내린 모든 종교는 브라흐만교(바라문교)와 힌두교의 신화를 껴안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10-11


자이푸르의 현대식 힌두교 사원인 락슈미 나라야나 사원 벽면에는 예수와 프란체스코, 공자의 상이 있다. 


인도 신화는 크게 베다 신화(브라흐만교 신화)와 힌두교 신화로 나뉠 수 있다. 인도 종교의 역사를 거칠게 나눠보면, 기원전 15~5세기는 브라흐만교, 기원전 6~5세기부터 기원후 8~9세기는 불교, 6~7세기 이후는 남인도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온 브라흐만교를 계슬 발전시킨 힌두교가 점차 불교를 완벽하게 흡수하였고, 12세기 이후는 이슬람교가 승하였다. 인도신화는 브라흐만교 시대와 힌두교 시대에 형성된 것을 말한다.  11


고대 인도인들은 자연과 싸우려 하지 않고 자연을 신으로 모셨다.

베다의 신화는 바로 자연물과 자연현상을 신격화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신화를 창조한 이들은 시인들, 곧 리쉬(Rsi)들이었다.  31


인도인은 착하고 고운 신보다는 힘 있는 신을 좋아한다.  41


인드라는 갈색이나 황금색 피부에, 네 개의 팔과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으며, 두 손에는 창을, 한 손에는 바즈라(번개, 금강저)를, 그리고 나머지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잇으므로 우주의 모든 일을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인드라와 나중에 나오는 천 개의 팔을 가진 라바나가 합치면 천수천안(千手千眼)의 관세음보살이 됨은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44


인간에게 불을 준 신이나, 불을 주관하는 신을 섬기는 경우는 있지만, 불 자체가 신이 된다는 상상력은 오직 인도에서만 가능했던 것 같다. 자연 자체를 신성화했던 인도인들이,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게 해주고 집안을 밝고 훈훈하게 해주는 불을 성스러운 존재로 여긴 것은 당연했다.  54-55


인도인들은 자신의 몸을 화장한다. 화장함으로써 자신이 신의 세계에 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자신의 몸이 깨끗하게 화장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돈이 많은 사람들은 장작을 충분히 사서 화장하는 것이다. 지금도 바라나시의 마니카르니카 가트에는 수많은 시체가 자신의 몸을 태우면서 신에게로 한발짝 한발짝 다가가고 있다.  62


오늘날 인도에는 베다의 자연신들이 없다.

베다 신화가 유목민인 아리아 족의 신화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아리아 족 이전에 인도에는 주로 드라비다 족이 살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모헨조다로와 하랍파를 중심으로 형성된 인더스 문명이 곧 드라비다 족이 구축한 세계이다. 청동기를 쓰는 드라비다 족은 철기를 쓰는 유목민족 아리아인에게 정복당했고, 결국 인도의 주류신화를 아리아 신화가 되었다.  122-123


유목민인 아리아인이 구축한 베다 신화는 그러다보니 현세적인 신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무서운 신들을 달랠 수 있는 것이 제사라고 믿었기 때문에 브라흐만교의 제사와 의식은 대단히 복잡하고 정교했다. 

브라흐마나 계급의 부패를 틈타 무사 계급인 크샤트리아가 힘을 키우기 시작한다. 

왕조의 모습이 윤곽을 잡아나갔다.

전쟁이 잦아지면서 다양한 물자를 제공할 상인 계급도 강력하게 부상한다.

브라흐마니즘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124-125


답이 사라진 인도 땅에 새로운 깨달음을 구하러 떠나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그들을 슈라만이라고 불렀다. 

돋보이는 인물이 두 사람 있었으니, 한 살마은 고타마 싯다르타요. 다른 한 사람은 마하비라였다.  125


마하비라는 극단적이고 철저한 고행을 통해 과거의 업을 제거하는 것이 또다른 업의 유입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며, 그럴 수 있을 때 해탈에 이른다고 말한다. 

집착을 거부함으로써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불교의 입장과는 달리, 이 우주에는 생명체의 수만큼이나 많은 자아가 있다고 주장한다. 자아가 있는 곳에는 카르마(Karma, 業)가 존재하므로, 그 카르마를 고행을 통해 제거함으로써 완전한 해탈에 도달한다고 말한다.

불교와 자이나교의 중요한 특징이자 공통점은 베다의 권위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정통은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철학이요. 비정통은 베다의 권위를 부정하는 철학이다.  126-127


기원전 6세기경부터 정통파 내에서도 브라흐마니즘에 대한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이 생겨서 자체적으로 정화해 나갔다. 중세 기독교가 부패하자 종교개혁이 일어났듯이, 브라흐만교의 근본적인 반성을 부르짖는 젊은 브라흐마니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들은 재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주장을 논리적으로 구성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경전이 바로 우파니샤드이다.

우파니샤드에 오면 베다 시대의 수많은 자연신은 하나로 모인다.  127


우파니샤드에서 브라흐만과 함께 가장 중요한 개념인 '아트만(Atman)'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개체 속에 현존하는 신성이 곧 아트만(참자아)이다. 

한자성어로는 범아일여(梵我一如)로서, '브라흐만과 아트만은 하나다'라는 뜻이다.  128


우파니샤드 시대에는 브라흐마니즘이 철학화함을 알 수 있으며, 이로부터 브라흐마니즘이 발전한 힌두교에 이르면 비로소 다신교라기보다는 '유일신교'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러나 지나치게 철학화하면 브라흐만이라는 근본적인 '신성'을 믿는다는 것이 민중에게는 실감나지 않을 수 있다. 이에 그 신성은 다시 신격화 또는 인격화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창조의 신 브라흐마와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시바가 탄생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가 인도 땅에서 만나는 수많은 신전은 대부분 이 세 신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비슈누와 시바는 인도의 도처에서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누워 있거나 요가를 하는 자세로 우리를 맞이한다. 인도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그들을 만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인도를 신의 땅이라 하는 것이다.  129-130


힌두교도는 삶의 세 가지 중요한 목표를 설정하여 일생을 매진한다. 

첫째는 아르타(Artha), 아르타는 '유일'이란 뜻으로 정치나 전쟁. 가정과 국가의 번영을 의미한다. 인도인은 일생에서 이 아르타를 중요한 목표로 삼는다.

둘째는 카마(Kama), 즉 에로스, 사랑을 추구한다. 사랑은 후손을 낳기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삶의 윤활유가 된다. 그러기에 인도의 사원에는 성행위를 형상화한 미투나(Mithuna, 성행위를 묘사한 인도의 조각이나 회화)가 노골적으로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셋쩨는 목샤(Moksa), 즉 해탈(解脫)을 추구한다. 윤회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의 경지에 진입하는 것을 꿈꾸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목표를 향해 인도인은 다르마(Darma, 法)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노력하낟. 다르마는 두 가지 차원으로 살펴볼 수 있다. 개인적인 차원과 사회적인 차원이 그것인데, 개인적인 차원은 아슈라마(Asrama)이론, 즉 인생의 단계설로 정리되고, 사회적인 차원은 바르나(Varna), 즉 카스트 이론으로 정리된다.

아슈라마는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네 단계를 밟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첫째가 범행기(梵行期, Brahmacarya)인데, 심신이 훈련과 단련의 시기이다. 어린 시절 배움의 시기를 생각하면 되겠다. 

둘째 단계는 가주기(家住期, Garhastya)이다. 이 시기는 가장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할 시기로, 혼인하여 자식을 낳고, 또 그 자식을 출가시킬 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셋째 단계는 임서기(林棲期, Vanaprasthya)이다. 이때부터는 영적인 훈련을 하는 시기로 고행과 명상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도록 노력해야 하는 시기이다. 

마지막 단계는 유행기(流行期, Samnyasa)로서, 삶을 정리하면서 해탈의 길을 걷는 시기이다.

이렇게 보면 힌두교는 불교나 자이나교에 비해 현세 지향적임을 알 수 있다. 궁극적으로 해탈을 지향하는 것이 옳지만, 현실적으로 여론을 주도하는 장년기까지는 지극히 현세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불교나 자니아교 등 비교적 현실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부정하는 종교가 인도인의 의식을 끝내 붙잡지 못했던 이유는 아닐까?  129-132



브라흐마의 역할은 창조의 임무를 다하는 순간 실질적으로 끝났기 때문에 그의 지위는 시비나 비슈누에 비해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인도 여행 중 만나는 주요 신은 주로 시바와 비슈누를 비롯하여 그들과 관계 있는 신이다.  141-142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브라흐마를 주신으로 모신 사우너은 푸쉬카르의 브라흐마 사원 하나밖에는 없다.  162


인도의 철학자 라다크리슈난의 말대로 "세계는 자기 파괴에 의해서 자기를 완성시킨다"는 것이 인도인. 그리고 인도신화의 세계관이다.  165


아무리 힘센 신일지라도 힌두교에서는 고행을 하지 않으면 그의 힘은 보잘것 없어진다.  259


아부 산에서는 마운트 아부 투어를 할 필요가 있다. 버스는 아부 산의 중요한 볼거리를 대부분 보여준다. 브라흐마 쿠마리 대학, 아다르 데비 템플, 구루 쉬카르 템플, 아차르가르 템플, 그리고 이름난 자이나교 사원인 딜와라 템플 등을 돈다.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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