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입는 일상복은 일반 사람 눈에도 보이지만 옷 밖으로 드러나는 신체의 일부분, 그러니까 손이나 목이나 얼굴이나 머리카락이나 귀때기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같은 투명인간끼리는 서로를 볼 수 있다.  6


자전거는 빠른 속도로 인도와 차도를 달리기 때문에 사고 위험이 높아 머리를 보호하는 헬멧은 필수품이다. 넘어졌을 때 손을 다치지 않기 위해서는 장갑을 끼어야 한다. 거기다 눈을 가리는 고글을 쓰고 마스크와 버프로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다...

자전거 라이더 복장을 하면 일반인처럼 보이기가 쉽기 때문이다.  7


일소일소 일노일로(一笑一少 一努一老 한일 웃을소 한일 적을소 한일 힘쓸노 한일 늙을노)라, 한번 웃을 때마다 하루 젊어지고 한번 화낼 때마다 하루씩 늙어지나니 네가 웃음만 잃지 않으면 평생 없는 복도 받아가며 살리라.  24


옛적부터 현명한 어른들이 물만 먹고도 살아오셨으니 그것을 백비탕(白沸湯 흰백 끓을비 끓일탕)이라 하느니라, 신라시대 화랑이나 법사는 호랑이에게 물려갔다 돌아온 사람에게 백배탕을 만들어 먹임으로써 정신을 차리게 했다. 만드는 것은 아주 쉽다. 차갑고 깨끗한 샘물을 준비한 뒤 숯불에 물을 팔팔 끓여 달인다. 그 물 삼분의 이를 그릇에 담고 찬 샘물 삼분의 일을 부어 두가지 다른 성질의 물이 섞이기를 기다렸다가 밥 한끼를 먹을 시간 동안 천천히 마시면 된다. 백비탕은 머리를 맑게 하고 잠을 깨우며 허기와 갈증을 면하게 한다. 하루 한번씩 십년을 꾸준히 마시면 석사, 박사보다도 똑똑해질 수 있다.  26


아이가 늦되고 자라면서도 어리숙하고 바보 같은 걸 두고 동네 사람들은 '어비'라고 했는데 만수가 바로 그 짝이 났다. 아이가 비실비실 허약하고 주눅이 들어 매사에 자신이 없으며 경쟁에 뒤처지는 것을 두고 '지실이 든다'고 하는데 만수가 바로 지실이 든 아이였다.  33


소질이 없는 건 할 수 없는 일이나 만수는 성의가 있었다.  39


만수야, 너는 아직 재주가 다 드러나지 않은 망아지, 덜 벼려진 칼과 같구나.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가지만 돈 끼호테의 로시난떼처럼 비루먹고 약한 말도 열흘을 부지런히 가면 천리를 간다고 했다. 또 천리마의 꼬랑지에 붙어 있는 쇠파리 또한 천리를 간단다. 네가 하루 천리를 가는 명마가 아니라고 실망하지 마라. 뭐든지 잘보고 기술을 배워 하루하루 열심히 하면 너는 전기기사, 시계 수리공, 운전기사 등등의 기술자가 될 수 있다... 귀를 크게 열고 입은 꼭 다물고 네 길을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40


그나마 신통한 것은 바로 아래 여동생 명희도 아니고 더 어린 남동생 만수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요강이라도 부시고 할아버지 한테 가서 잘 주무셨는지 손 모아 인사를 하고 와서 돼지며 닭이 제 먹을 것 찾아 밖으로 가도록 문도 열얻주고 제 손으로 세수하고 아침을 먹고는 설거지물 버리는 것도 도와주고 비 오면 빨래도 같이 걷었다. 아버지 따라다니며 나무도 하고 농사도 거들고 온갖 심부름을 다 하고 소 끌고 나가 풀을 뜯기고 소꼴을 베어오고 뱀이든 개구리든 잡아다 돼지우리에 던져넣었다. 나보다 더 나물을 잘 알고 잘 찾고 잘 캐고 했다. 삘기, 오디, 망개, 까마중, 깨곰(개암), 산딸기, 머루, 밤, 도토리, 더덕, 도라지 등등 만수가 집으로 가지고 오는 건 누구보다, 심지어 아버지보다 더 다양했다. 만수는 손재주도 좋아서 동생들한테 새총이나 종이비행기, 바람개비 같은 장난감도 많이 만들어주고 그랬다. 마음이 착하고 순하고 무슨 일에든 제맡은 몫을 다하려고 애를 쓰고 그렇게 신통할 수가 없었다.  71


만수가 소를 열심히 끌고 다니며 풀을 뜯게 하고 정성을 들이는게 그 소를 잘 키워가지고 팔아서 그걸 학비로 삼아 서울서 공부하려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수는 공부를 못하니까 그럴 일이 없다. 옛날처럼 시험을 쳐서 가면 중학교에도 못 갈 거다. 무시험 뺑뺑이가 됐으니 가는 거지. 대학은 턱도 없고 고등학교도 가기 힘들 거다...

누가 봐도 만수가 내 상대가 안되게 멍청하다는 건 분명했다. 줏대가 없이 남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아무리 잘해봤자 중간밖에 안된다.  105


베트남 국민 약 4백만명이 베트남전 당시 고엽제에 노출됐고 기형아 출산이 급증하는 등 부작용이 속속 보고되었습니다. 세계의 비난이 집중됨에 따라 1969년 11월 25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앞으로 미국은 어떤 종류의 세균전도 포기하며 현재 저장된 모든 생물학무기를 파괴하고 인간을 살상하는 화학무기도 선제사용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고엽제의 후유증인 것으로 판단한 미국, 호주, 뉴질랜드 3개국의 월남전 참전 환자 24만명이 미국 정부와 고엽제 제조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손해배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미국 연방법원은 2억 4천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하도록 판결했습니다. 독재정권하에 있는 한국에서는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소송 참가와 언론보도를 금지해 환자들 대부분이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129



야, 이 개씨바라, 니주라기 씹창 내기 전에 해골 디밀지 말고 아가리 처닫아. 네 곱차에서 올라오는 똥 냄새 때문에 오바이트 나올라고 하거든.

해삼 멍게 말미잘 해파리 같은 놈이 이빨 좀 까네. 쪼다 촌놈하나 갈구니까 똥창이 흐뭇하냐.  138-139



내 평생에 가장 한스러운 일은 맏손자 백수가 머나먼 이역 월남에서 비명횡사한 것이다. 나는 백수를 죽게 만든 이데올로기와 전쟁을 증오한다. 백수처럼 무고한 청년들을 죽음의 전장으로 내몬 권력자들, 독재자의 나팔수가 된 언론과 사회지도층이라는 종자들, 동족의 목숨과 피땀으로 제 배를 불린 더러운 장사치들, 죽음의 독약을 만들어 뿌린 제약회사며 군수산업체며 군 지휘자며 죽음의 시공간을 만들어낸 모든 존재를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이십대에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던 벗들이 있다면 물을지도 모른다. 개체의 생물학적 연장인 핏줄에 집착하고 연연하는 것이 세계를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바꿔나갈 책무를 지닌 깨어 있는 인간으로서 온당한 태도인가. 자손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생명을 영세불멸의 것으로 하려는 동물적인 욕망이며 봉건적인 세계관의 발로가 아닌가. 예전이라면 내 속내가 훤히 드러난 것을 부끄러워했겠지만 이제 나는 바로 그게 우리가 바꿔나가려 했던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고 반론할 것이다... 내가 일평생 가장 잘한 일은 식구들을 데리고 개운리 산골짜기로 들어온 것이다. 내가 두번째로 잘한 일은 개운리 살골짜기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이다. 나갔다면 내 벗들이 그랬던 것처럼 옳은 뜻을 제대로 펴지도 못한 채 훼절하고 보도연맹 사건 같은 백색 테러에 어이없게 목숨을 버려야 했을 것이다. 소심한 자의 우연한 선택으로 일신을 지키고 분에 넘치는 자손을 얻고 일신의 기쁨을 누렸으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악랄한 이빨과 발톱에 백수를 잃었다. 실로 통분하다. 억울하다. 나의 무력함이 뼈에 사무친다.  162-163


'물질이 주인인 세상'  164


어쩌다 내기장기를 둬서 고물 자전거를 하나 딴 적이 있었는데 그 자전거를 타고 낯선 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 보고 이야기도 듣고 사는 것도 보고 웃기도 하고 욕도 하고 그랬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나는 누군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공부 같은 거였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보려고 한 거였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년을 매일 술 처먹고 공부 비슷한 걸 하다보니 아버지가 서울에서 공부를 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짐작이 갔다. 서울에서는 사는 것 자체가 일이었다. 보통 일이 아니라 큰일이었다.  165


태어날 때부터 싹수가 노란 인간들은 교육만으로 고칠 수 없다. 가정교육 개판, 학교 개판, 사회 개판이니 선생이 아무리 애를 써서 가르쳐봐야 학생이 개보다 좀 낫기나 하면 다행이다. 사실 교사들 역시 수준 차이가 너무 난다. 군 장교 출신인 나 같은 사람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볼 때 후진국인 우리나라는 최상의 교육을 받은 군인들이 국가의 엘리뜨로서 국민과 자라나는 세대의 교사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우리 군인들만이 신라 화랑과 이충무공을 이어 호국선무정신으로 나라를 지키고 경제를 건설하면서 썩어 빠진 정치와 사회의 환부를 도려내왔다.  171


'어벙해 보이는 놈이 알고 보니 당수 팔단'  231



만수는 자신의 시간과 노력이 동생들, 제가 사랑하는 가족에게 투입되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들끼리의 강력한 결속에 내가 끼어들어갈 틈은 없었다.  236


부치지 않을 편지라면 쓰고 싶은 대로 써도 된다. 일기도 쓰고 살아온 날들에 대한 기억에 대해서도 쓴다. 그냥 아무거나 쓰기도 한다. 

뭘 쓴다는 것은 살아온 날을 돌이켜볼 수 있게 해준다. 어떤 사람에 대한 생각, 감정, 어떤 순간을 문증으로 표현하면 조금 더 그게 선명하게 보이고 정리되고 객관적으로 보게 만든다.  237


전두환이가 80년대 체육관 선거에 단독출마해서 99.9퍼센트 득표를 해가지고 대통령이 된 건 알죠? 그때 통일주체국민회의인가 뭔가 하는 허수아비들 이천오백스물다섯명이 딱 한명만 빼고 다 전두환을 찍었지. 그 한명은 반대를 한 게 아니라 어디 찍는 줄 몰라 실수를 해서 무효표가 된 거고...

그때부터 컬러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했잖아. 스리 에스가 뭔지 아나? 스포츠, 섹스, 스크린이야. 컬러텔레비전으로 프로야구 중계하고 야간통행금지도 해제하고 밤새도록 디스코텍에 술집이 영업하고 [에마뉘엘]같은 포르노 영화를 할리우드 직배로 들여와 심야극장에서 상영했지. 그런 게 다 국민들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우민정책이야. 올림픽 유치한 건 바로 스포츠로 국민들 관심을 돌리려고 한 거라고.  249


정말 회의를 해보니까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고 하는 게 민주주의를 못하게 하려고 만들어낸 말이라는 걸 알겠어요. 백성이 입도 벙끗 못하게 하고 시키는 대로만 하게 하는 게 진짜 독재고 철의 장막 같은 거죠.  285


아무튼지 간에, 안 아프고 안 죽었으면 그래도 복 받은 거라고 생각한다고, 우리만 성실하게 열심히 살면 다 잘 풀릴 거야. 

아니, 형님 다니던 회사가 형님이 게으르고 일 안해서 망한 겁니까. 망해도 그렇지, 자본가라는 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그놈들이 형님네처럼 아무것도 없이 나갔겠냐고요.지금도 홍콩이나 하와이 해변 같은 데 가서 빼돌린 돈 가지고 떵떵거리면서 잘살고 있어요.

처남이 착하다는 건 인정한다. 성실하기도 했다. 그런데 방향이 틀렸다. 같이 해야 할 일은 같이 열심히 하겠지만 싸울 일은 싸워서 해결해야 하지 않는가. 또 싸울 때도 상대를 제대로 골라서 싸워야지 제 편, 제 식구에게 피해를 입혀가며 제 살 깎아먹기 식으로 하는 건 나부터 용납할 수 없었다. 그냥 놔두니까 처남은 계속 주절주절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 어릴 때 굶기를 밥 먹듯 하던 때를 생각해봐. 나는 원망하는 사람이 없어. 내 팔자가 그런 걸 뭐. 또 원망해서 뭐해? 그 사람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도 아니고 그럴 능력도 없고. 그 사람들이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냐고. 부도내고 싶어 부도내는 회사가 어디 있겠어? 나는 이렇게 가난하지만 소박하게, 보통 사람 나름의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하네.  290-291


엄마가 없다. 엄마 대신 누가 차가운 손으로 나를 붙잡고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밥을 먹인다. 엄마를 찾아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내가 숟가락을 집어던지니까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두었다. 울었다. 그래도 오지 않는다. 엄마가 아니다.

엄마가 있을 때는 배고파도, 추워도, 옷이 젖어도 울 수 있었다. 울면 엄마가 와서 먹을 걸 주고 과자도 주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노래도 불러주었다. 잘 자라고, 그냥 자라고, 자고 있으면 무서운 일도 배고플 일도 추울 일도 슬플 일도 없다고, 그런데 엄마가 없다.

엄마가 없는데 내가 울면 무서운 사람이 와서 나를 잡아갈지도 모른다. 나를 해칠 수도 있고 때릴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엄마가 없으면 슬프다. 슬퍼도 눈물이 나지 않고 웃음만 난다. 내 마음대로 울 수도 없다. 더 슬프다. 

엄마가 없다.  295-296


힘 있고 돈 있고 법까지 제 편인 개새끼들한테 계속 갈굼을 당하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뭐예요? 

만수 형님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가 우리 일곱명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책임을 질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게 올바른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무식해서 정치도 모르고 법 같은 건 잘 몰라도 정의가 뭔지는 알아. 아, 이렇게 하는 게 맞다는 게 그냥 느껴지더라고. 할아버지, 형님 같은 가족들, 나중에 사회에서 만난 강철 선배님 같은 분들한테 잘 배워서 그렇지. 노래도 있잖아. 우리들은 정의파다 훌라훌라.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 나는 죽어도 당당하게 서서 고개 들고 웃으며 죽고 싶어.  302-303


가난하고 가진 게 없는 사람들끼리 싸울 일이 더 많은 거였다. 그 연탄을 우리에게 팔아먹고 돈 많이 벌고 세금 많이 걷고 영원히 부와 권력을 물려주고 물려받을 인간들하고 싸울 생각은 하지도 않고, 쳐다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비슷한 처지의 가난한 인간들끼리 머리 뜯고 대가리 깨지고 피 흘리며 싸우고 또 싸우는 것이었다. 그래도 서로 없이 산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정이 들어서 명절에는 서로 떡도 주고받고 어떤 집, 아니 같은 집에 사는 아이가 맞고 오기라도 하면 우르르 몰려가서 같이 복수를 해주곤 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데서 늦게까지 놀고 있는 애가 있으면 귀때기를 붙들어다가 데려다주기도 하고.  304-305


초등학교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과 달리 아이들을 정상, 비정상이라는 자기들에게 편리한 기준으로 구분했다. 평균적인 아이들을 길러내는 교육방식에 맞지 않는 아이들은 가차없이 걸러졌다. 태석이의 담임을 맡은 여교사는...  321



우리가 오이씨디 국가 중에서 제일 자살률이 높다는 오명을 쓰고 있어도 해마다 삼십만이 자살 시도해서 죽는 사람이 만오천명뿐이래. 확률로 치면 오 퍼센트라고.  354



어떤 사람이 투명인간이 되는지 정확하게 잘 모르겠다.  361



행복은 성적순으로 매겨지고 부는 상위 일 퍼센트가 독점하며 권력은 세습된다. 정경유착, 금권언(金權言 쇠금 권세권 말씀언)유착, 초국적기업, 신정주의(神政主義 귀신신 정사정 주인주 옳을의), 광신적 테러가 그런 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나 혼자 깨끗하게 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것도 상관이 없다는 건가. 

지금 이 세상이 이렇게라도 굴러가는 것이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누군가는 노력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그렇게 하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363-364


내 경험으로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살을 기도하거나 아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지기로 선택한 사람들 중에 투명인간이 된 사례가 더러 있다. 당신은 그런 생가을 한 적이 없는가. 죽는 게 낫겠다.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데로 가서 새로운 생을 개척해보자든가. 그래서 다리 위에서 투신을 했다든가.  354-365  




작가의 말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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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러명의 모험가들을 알고 있다. 콜롬보스나, 제임스 쿡, 암 스트롱, 마르코 폴로...
그러나 저자는 생소한 이름이긴 하지만 남극 탐험사에 관한 거론에서는 절대 빠지지 않는, 어니스트 섀클턴 경(Sir, Ernest Shackleton)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는 무려 3차례에 걸쳐 남극을 탐험했다. 1901년에 로버트 스콧대령 휘하에서, 1907년 독자적으로 탐험대를 이끌고, 1914년에 세번째 남극 탐험을 떠났다.
우리는 세 번째 남극 탐험을 고려할 것이다. 무려 635일간의 사투가 진정 어떤 의미를 주는지에 대해서..

1913년 섀클턴은 "대단히 위험한 탐험에 동참할 사람을 구함. 급여는 쥐꼬리만함. 혹독한 추위와 암흑과 같은 세계에서 여러 달을 보내야 함. 탐험 기간 동안 위험은 끊임없이 계속될것이며, 무사히 귀환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음. 그러나 성공할 경우 명예와 만인의 사랑과 인정을 받게 될 것임."이란 문구의 탐험대 모집 광고를 냈고, 3명의 여자를 포함한 5000여 명의 지원자 중에 각계각층의 28명 탐험대원으로 출발 하였다. 선원의 비율이 많긴 하였지만, 생물학, 지질학, 물리학, 생화학드을 전공하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강사들, 어부,의사, 사진사, 조각가등 언뜻 오합지졸처럼 보이는 이들이 남극에서 극적으로 630여일을 버텨내었다.


예상 경로는 사우스조지아 섬을 출발, 웨들 해를 거쳐 남극 대륙에 상륙한 후 2400킬로미터를 걸어서 이동한 다음, 남극점을 거쳐 반대편 해안인 로스해로 빠져 나오는 것이다. 예정대로면 하루에 최소한 24킬로미터를 이동해야 했다. 

이들은 2년 넘게 걸려 버려져 있던 폴라이스 호를 인수하여 '인듀어런스(Endurance)라 부르고, 1914년 8월 1일에 출정의 돛을 올렸다. 불행하게도 출항일과 거의 동시에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총동원령이 내렸지만, 해군성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 경이 계속 항해를 하게 해 주었다.
2달 간의 항해 끝에 11월 5일, 남극 탐험의 전초 기지인 사우스조지아 섬의 그리트비켄 포경 기지에 도착했다. 다시 한 달 후인 1914년 12월 5일에 출발하여 1915년 1월 전에 웨들 해를 건너 남극 대륙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부빙들과 마주쳐 1915년 1월 18일 부빙속에 꼼짝없이 갇히게 되었다. 2월 24일 결국은 풀려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갇힌 채 겨울을 나기로 결심한다.
드디어 5월초, 해가 마지막으로 수평선 위로 떠오랐다가 천천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남극의 밤이 시작되어 79일간 암흑의 시간을 이겨 내야만했다. 사람은 해를 보지 못하면 우울증에 걸리는데,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만났기에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다.

8월 1일 드디어 부빙이 갈라졌지만, 더 큰 위기가 온다. 배를 둘러싸고 있던 부빙들이 배를 들이박기 시작한 것이다. 10월 27일 드디어 배를 포기하고 탈출하게 된다.
이들은 폴렛 섬을 향해 행군을 하기로 결심한다. 북서쪽으로 약 557킬로미터 떨어진 그곳에 1902년 스웨덴 탐험대가 만든 오두막과 비상 물품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짐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10월 30일 드디어 행군을 시작한다. 하지만 하루에 1킬로미터도 전진하지 못했다. 얼음위를 걷기에 보트를 들고 가야했지 때문이다.
결국 11월 1일 걸음을 멈춘 섀클턴은 일명 '오션 캠프(Ocean Camp)'를 치고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그곳에서 버티자고 제안한다. 이들은 이제 살아남는것이 문제였다. 오직 음식으로만 체온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고래 기름까지도 먹을 태세였다.
부징 군집은 하루 3킬로미터로 전전히 이동하엿지만 그들은 부빙위에서 북쪽으로 130킬로미터를 이동하였다. 
12월 23일 더 이상안되겠다는 판단하에 이동을 개시했지만 2킬로미터의 전진에 그쳤다. 결국 다시금 행군을 멈추고 '페이션스 캠프(Patience Camp)'를 쳤다. 1916년 4월 9일 그들은 인듀어런스 호의 목재를 이용해 선체를 보강한 3척의 보트, 제임스 커드호, 더들리 더커 호, 스탠콤 윌스 호를 바라에 띄웠다. 교대로 노를 저어가면서 힘겨운 여정을 이어가는 동안 섀클턴은 거의 잠을 자지 못하였다. 언제 어디서 부빙이나 빙산이 덮칠지 몰랐기 때문이다.
1916년 4월 15일 드디어 뭍에 발을 내려 놓았다. 출항을 시작한 날로 497일 만의 일이었다.
비록 폭 30미터 길이 15미터에 불과한 엘리펀트 섬의 귀퉁이였음에도 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쓰러지고  쉬려고만 하였으나 섀클턴은 안주하면 죽는다고 생각하여 1916년 4월 24일 5명의 대원만을 대리고 바다에 배를 띄웠다. 그는 사우스조지아 섬에 닿을 확률이 거의 희박한 것을 알았지만 모험을 시작하였다.
기다리는 이들도 언제 올지모를 사람들을 기다리며 체념할 수도 있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들을 언급하며 구조선이 오리라는 기대를 결코 놓지 않았다.

1916년 5월 10일 섀클턴과 5명의 대원들은 기어코 기적적으로 사우스조지아 섬에 도착하였다.
부서지기 직전의 보트로 섬 맞은편의 포경 기지까지 돌아가는 것은 무리였다. 대원들은 고개를 저엇던 해발 3000미터가 넘는 산을 넘자고 섀클턴은 말하였다. 
뜻을 같이 하기로 한 대원 2명과 산을 올랐다. 방전될 대로 방전된 상태에서 산을 오랐고 그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미끄럼 타듯 산을 내려갔다. 
 
드디어 5월 20일 3명은 스트롬니스 포경 기지에 도착하였다.

다음 날인 5월 21일 나머지 3명의 대원이 먼저 구조되고, 3일째 되는날 나머지 대원을 구조할 배가 떠났지만 불과 60여 킬로미터 앞두고 부빙 군을 만나 회항하고 말앗다. 
아직 세계대전 중이라 더 큰 배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4개월이 지난 8월 25일, 칠레 정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얼음 없는 바다에서만 항해하라는 조건을 달고 옐코 호를 내주었다. 
1916년 8월 30일 마침내 엘리펀트 섬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섬에서는 기적처럼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쌍안경을 든 섀클턴은 서둘러 대원들의 숫자를 세어 보았다.
정확히 22명, 한 사람도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아 있었다. 
얼마나 눈시울이 뜨거워 졌겠는가.. 이글을 치고 있는 나도 가슴이 뭉클해지는데...

비록 남극 횡단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그보다 값진 것을 얻었다. 다름 아닌 27명의 생명.
그들은 1914년 8월 1일 영국을 떠난지 760여 일만에, 1914년 12월 5일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출발한지 635일 만에 문명 세계로 쉬환할 수 있었다.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절망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환은 결국 위대함은 절망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라는 진리를 전 세계에 공표한 것과 다름없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어떻게 모두 돌아 올 수 있었을까? 섀클턴의 어떤 리더십이 발휘된 것일까?
첫째, 대원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주인으로 느끼게 하였다. 
'당신들이 바로 탐험의 주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그들이 스스로 운면의 주인이 되었다.
둘째, 그는 불필요한 것은 가차 없이 버렸다.
배가 난파된 후 비상식량이 저장되어 있는 폴렛 검까지 약 557킬로미터를 행군할 계획이었고, 살아남기 위해 짐을 최소화했다. 생존을 위한 희망만 빼고 쓸데없는 것은 모두 버렸다.
셋째, 그는 오기를 부리지 않았다.
폴렛 섬까지의 행군은 무리라는 사실이 얼마 안가 드러나자 즉시 행군 계획을 중단했다. 그는 포기해야 할 것을 빨리 포기할 줄 알았으며, 자신의 자존심보다는 27명의 생명을 존중했다.
넷째, 그는 어떠한 위기상황에서도 미래를 준비했다.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엿보았다. 결국 그들을 살린 것은 절망적인 위기 속에서도 끊임없이 손질했던 3척의 보트였다.
다섯째, 그는 최종 목표를 잊지 않았다.
497일만에 흔들리지 않는 엘리펀트 섬 해안에 닿았을때, 안주하고 싶은 유혹이 충분히 들 만했다. 하지만 거기는 그들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결국 섀클턴은 대원들에게 이섬에 안착하는 것이 목표가 아님을 확실히 주지시켰다.
여섯째, 그는 과감하게 도전했다.
사우스조지아 섬에 가기위해 탈 수 있는 보트는 1척이었고, 항해마저도 해류와 바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배를 다시 얼음 바다 위에 띄웠다. 삶의 기회는 과감히 도전하는 자에게 미소를 짓는 법이다.
일곱째, 그는 끝까지 책임졌다.
기적처럼 사우스조지아 섬의 서쪽 해안에 닿았고, 다시금 선의 산 정상을 넘어 동쪽의 포경 기지에 닿았다. 그렇게 생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섀클턴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엘리펀트 섬으로 되돌아갔다. 어쩌면 영영 돌아 올 수 없을지 모르는 그 악몽 같은 바닷길을다시 거슬러간 것이다.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서.결국 남은 22명의 대원 모두를 살려냈다. 인간이란 책임지는 만큼 존재한다. 

섀클턴과 27명의 대원은 애초 계획인 남극 횡단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실패는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 그 어떤 성공보다도 위대한 것을 이워냈기 때문이다.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를 펼쳐 보임으로써 도전와 모험의 위대함을 일깨워 주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21년 9월 17일, 섀클턴은 또 다시 남극을 향해 떠났다. 그리고 남극 대륙에 다시 발을 딛기 직전에 삶을 마감했다. 시신은 사우스조지아 섬에 묻혔다. 하지만 그의 도전과 모험을 향한 열망은 지금도 살아 남아 현실에 안주하려는 우리를 깨우고 있다. 그는 지금도 말하고 있다. 
"모험하라.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모험하라."




부끄럽다.. 이글을 읽을때도 그랬고.. 이글을 다시 올리면서도 그랬다.
악조건이 아님에도 더 이상 악조건은 없을거라 합리화하면서 진행을 멈추었던 것들이 생각난다.
솔직히 그것들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지만, 그러면서 다시금 그런 시간이 되면 그러하지 않고 어떠한 것이 와도 부딪힐수 있을 거라는 생각만하였지. 
스스로 만들어 내고 부딪히고 헤쳐나가려 뛰어들지 않고 안주하고 있는 모습에 나 자신이 부끄럽다.

글을 읽으때는 막연한 생각이 들고 가슴도 뭉클해서 여러가지 생각들을 못했는데, 글을 올리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진정한 모험가 섀클턴이 나에게 말하고 있는듯하다.
도전하라. 무엇이든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도전하라. 그리고 역경에 부딪히라. 또한 동료를 생각하면서 오기를 부리지 말라. 현실을 직시하고 제대로 파악해서 빠른 판단으로 역경을 역경대로만 받지, 그것을 부풀리지 말라.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목표를 잊지말라.

모험.. 모험.. 
언제부턴가 쉬운것들만 찾고 계산만 해보고 있는 나 자신에게 일침을 준다.
예전 첫 배낭여행을 마치고 다시금 떠나는 두번째 여행은 나에게 잊지못할 감동과 추억을 주었다. 특히 그 여행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힘든일들을 주었고, 그렇지만 즐거움을 배가 시켜 주었다.
부딪혔다. 고생을 자처했다. 그렇지만 그것들에서 제대로 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다른 문화를 가진 그들의 진정한 모습들을 관찰할 수 있었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도 있었다. 

도전하고 모험하는 그 순간 패배를 이겨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사진을 몇 장 올려 본다.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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