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병든 사회에서 거울 보기
에리히 프롬이 그의 마지막 책 <건전한 사회(The Sane Society)>에서 이야기한 ‘정상성의 병리성(pathoiogy of normality)’이라는 개념을 확실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병든 사회에서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이 ‘정상’으로 사는 사람은 과연 정상인가요, 비정상인가요? 저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과 관점을 가지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7

1장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

우리는 상당히 오랜 기간 수많은 투쟁과 희생을 치러냈고, 실로 위대한 민주주의를 이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민주주의는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31

광화문에 모여서 목이 터져라 민주주의를 외친 사람이 집에 가서는 완전히 가부장적인 아버지요, 다음 날 학교에 가서는 아이들을 쥐 잡듯이 들볶는 권위주의적 교사요, 혹은 회사에 가서는 갑질을 일삼는 상사라면, 민주주의는 어디서 하지요? 다시 말하면 이 나라에서는 ‘광장 민주주의’와 ‘일상 민주주의가‘ 괴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충분히 민주주의자가 되지 못한 거지요. 일상 민주주의는 광장 민주주의와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일상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31-32

사회 민주화의 기본 원리는 ‘구성원들의 자치’입니다.  38

문화 민주화, 나아가 문화혁명의 핵심적인 사례인 ‘코뮌(kommune)’운동에 대해 알아보지요. 코뮌이란 무슨 뜻일까요? ..
우리는 흔히 코뮤니즘을 ‘공산주의’라고 알고 있지만, 저는 이것이 아주 잘못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코뮌주의’ 라고 했으면 훨씬 그 의미가 왜곡 없이 전달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공산’이라고 번역해 버리니까, ‘공동체를 중시한다’라는 코뮤니즘의 본래 의미가 지나치게 ‘경제주의적으로’ 축소되어 버린 것입니다. .. 원래 코뮌주의라고 하는 것은 ‘코뮌’, 즉 자치 공동체의 삶을 중시하는 생활 방식, 거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결사체, 연합, 이런 것들을 뜻합니다.
‘코뮌’이란 넓은 의미에서 모든 종류의 공동체적 삶을 뜻하는 말입니다. ..
68혁명 전후로 독일에서도 많은 코뮌들이 생겨납니다.  50

호칭의 문제, 성 공동체의 실험, 이런 것들이 문화혁명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문화혁명의 또 다른 중요한 단면은 소비주의와 물질문명에 저항하는 탈물질주의의 흐름입니다.  52

우리는 참으로 위대한 정치 민주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우리는 정치 민주화만 이룬 것입니다. 사회 민주화, 경제 민주화, 문화 민주화의 실현은 여전히 먼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 암울한 이유입니다.  53

1969년 선거에서 “민주주의 다 해보자”라는 멋진 선거 구호를 들고 나왔던 브란트는 교육과 관련해서도 정말 아름다운 구호를 내세웠지요. 바로 ‘교육 사회’입니다. ‘교양 사회’라고도 해석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독일인이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아 교양인으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지요. 그러려면 고등교육을 확충해야 하고, 나아가 누구나 부담 없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생활비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64

어느 나라든 교육의 중점은 ‘적응’에 있는 법입니다. 기존의 질서와 규범을 익혀 잘 적응하도록 하는 것, 보통 ‘사회화’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교육의 목표이지요. 그러나 독일 교육에서는 ‘적응’보다 ‘비판’을 더 중시합니다. 기존의 질서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을 기르는 것,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 이것이 독일의 비판 교육입니다. 정말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66-67

독일 교육에서는 문학작품을 해석하는 데에도 권력의 문제를 성찰하게 하는 것입니다. 정답이라는 이름의 ‘정의 권력’을 인식하고, 필요하면 비판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68

독일의 비판 교육 ... 선다형 문제는 모르고도 맞출 수 있다는 점에서 교육적이라기 보다는 ‘사기’에 가깝다고 봅니다. 단순한 지식을 묻는 것은 위험하다고 여깁니다. 그것은 주입식 교육에 상응하는 평가 방식이고, 주입식 교육은 파시스트 교육의 전형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지배적인 지식은 지배하는 자의 지식이라고 보기 때문에 지식 그 자체보다는 특정 지식이 지배적인 지식이 된 경로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지요. ..
정답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지요.  69

저는 한국 정치인 중 사회적 정의를 외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한국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경쟁력’을 말합니다. 국가 경쟁력, 기업 경쟁력, 교육 경쟁력 등 온통 외치는 것이 경쟁력입니다. 그런데 독일 정치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회적 ‘정의’를 중시하고, 사회적 정의를 이루기 위한 경쟁을 합니다.  72


2장 대한민국의 거대한 구멍

한국인 대다수는 ‘내 안의 파시즘’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억압의 문화, 부조리의 상황을 하나의 문제로서 인식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물의 질서’, ‘세상의 이치’, ‘자연 상태’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에리히 프롬 식으로 말하자면 한국 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정상성의 병리성’ 이었던 것입니다.  95

국회는 기본적으로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 즉 대의기관입니다. 그래서 국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문성이 아니라 대표성입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세대 대표성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세대 대표성이 너무도 왜곡되어 있는 것이지요. 현재 한국 전체 인구 중에서 40대 이하의 인구가 약 40% 정도인데 국회에서는 불과 0.6%가 대의되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97

세대 대표성 못지않게 왜곡되어 있는 것이 직능 대표성입니다. 다양한 직업과 직능을 대표하는 의원이 그 현실의 분포에 맞게 국회에서 대표되는 것이 이상적인 의회일 텐데 한국은 그렇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독일 연방의회에는 교사가 많을까요, 교수가 많을까요? 교사가 훨씬 많습니다. 사회에서 교사가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대의의 의미이지요. 그러나 한국에서는 법률가, 언론인, 교수가 과잉 대표되어 있습니다. 즉 의회의 대의 기능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대의의 왜곡으로 인해 사회적 갈등이 의회 내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자꾸 의회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97-98

20세기 독일의 가장 위대한 극작가라고 불리는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한 유명한 말.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파시즘을 남기고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저는 이 말이 지금 한국 사회가 처해 있는 현실을 이해하는 데 정곡을 찌른다고 생각합니다.  .. ‘내 안의 파시즘’, ‘아주 일상적인 파시즘’을 냉철하게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100-101

많은 사람들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에게는 시대에 상당히 뒤떨어진 현살들이 참 많습니다.
그 첫 번째는 인권 감수성의 부재입니다. 한국 사회는 인권 감수성이 대단히 모자라는 사회입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정말 부족합니다.  108

68혁명의 부재가 남긴 두 번째 현상은  소비주의 문화입니다. 이 얘기는 정말 중요합니다. 지금 한국처럼 소비주의가 이렇게 전면적으로 아무런 비판 없이 번창하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109

독일의 많은 청소년들이 소비할 때 큰 죄책감을 느낀다고 고백합니다. ‘미래 생명에 대한 책임’, 이것이 그들이 당연히 가져야 할 기본자세라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기실 지구에서 잠시 살다가 떠나는 것이고, 지구는 다음 세대인 미래 생명이 살아야 할 터전이므로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금 나의 욕망을 위해서 끝없이 소비하는 것은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11

한국 사회에서 소비주의는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세요. 온통 소비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비를 해야 일자리가 생기고, 경제가 발전하고, 잘사는 나라가 된다는 논리가 우리 사회를 전일적으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도 생태적 상상력, 환경 윤리 의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소비주의와 물질주의 논리만이 전면적으로 지배하는 참으로 놀라운 사회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전면적으로 지배되는 자본 독재 단계에 들어서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111-112

독일에서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그러니까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성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교육의 첫 번째 원칙입니다. ‘성과 관련해서 절대 윤리적 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대원칙입니다. 성을 윤리적으로 비판함으로써 아이들이 죄의식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은 윤리와 아무 상관 없는 영역이라고 봅니다. 성이라는 것은 생명과 관계되고 인권과 관련된 중요하고 예민한 영역이므로, 성과관련하여 충분한 책임 의식을 갖도록 가르쳐야 하지만, 그렇다고 성을 악마화해서 아이들의 내면에 죄의식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물론 성폭력이나 성희롱, 성추행 등 성범죄에 대해서는 우리보다 훨씬 더 엄한 처벌이 내려집니다. 그리고 성교육은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성을 신비화하거나 은폐하는것은 교육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독일에서는 성교육을 가장 중요한 정치 교육으로 본다는 사실입니다.  112-113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을 의미하는 슈퍼에고와 본능과 충동의 세계인 리비도(혹은 이드) 사이에서 흔들리고 동요하는 불안한 존재가 바로 에고 입니다.  114

슈퍼에고가 리비도를 공격하면 할수록 리비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에고가 점점 더 강한 죄의식을 내면화하게 됩니다. 여기서 ‘죄의식’이라는 개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이 정치적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버젓이 살아 있는 것을 악이라고 공격하며, 인간의 자아는 죄의식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일종의 ‘성 정치학’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깊은 죄의식을 내면화한 인간일수록 약한 자아를 갖게 되고, 약한 자아를 가진 인간일수록 권력에 굴종적인 인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죄의식이라는 성적 심리적 문제가 권위주의라는 정치적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지요.
이를 요약하면 인간의 성을 억압하면 할수록, 그 개인은 권력에 굴종적인 인간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권위주의적 성격’ 이론이라고 합니다. ..
권위주의적 성격 이론에 따르면 성교육은 가장 중요한 민주주의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115-116

1970년대 교육개혁 이후 독일에서는 성교육을 정치 교육의 일환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 학교에서 성은 생명과 관계된 문제이고 동시에 인권과 관계된 민감한 영역이기 때문에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결코 윤리적으로 악마화하지는 않습니다.  117-118

성교육은 성숙한 민주주의자를 길러내기 위한 첫 걸음인데, 한국에서 아직도 제대로 된 성교육 전문가조차 없는 형편입니다.  118

68혁명 없는 한국의 상황, 그 세 번째 특징은 한국 사회가 권위주의 사회라는 것입니다. .. 권위주의라는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올라온적도 없습니다. 게다가 학교에서 벌어지는 살인적인 경쟁은 승자 독식의 논리와 연결되어 권위주의 문화를 더욱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119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라는 생각이 이미 1970년대 독일 교육개혁의 기본 원리였습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아이들을 경쟁시켜선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경쟁 이데올로기가 극단화되면 또다시 나치즘 같은 야만을 낳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나치즘의 핵심은 아리안 족이 가장 우수하고 유태족이 가장 열등하다는 식의 차별 의식과 우열 사고이고, 그 바탕에는 경쟁의식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119-120

스포츠는 당연히 경쟁을 하지만, 삶에서 스포츠의 경쟁 방식을 따르는 것은 야만이라고 아도르노도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스포츠에서 중요한 것은 ‘성과’이지만, 삶에서 중요한 것은 ‘행복’이지요.
교육이 무엇입니까? 본래 교육, 즉 ‘에듀케이트(educate)’라는 말은 ‘밖으로(e-) 끌어낸다(duc-)’는 뜻입니다. 독일어의 ‘교육하다(erziehen)’도 의미가 똑같습니다. 고유한 재능은 사람 안에 이미 다 들어 있고, 그걸 꿀어내는 게 교육이지 ‘지식을 처넣는’것이 교육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가 한국에서 배운 교육은 사실 반교육(anti-education)에 가깝습니다.  120-121

독일 만하임응용대학의 빈프리트 베버(Winfried Weber) 교수는 한국 교육을 살펴보고 나서 “독일은 텐샷(10shot)사회인데 반해, 한국은 원샷(1 shot) 사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독일인에게는 열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한국인에게는 한 번의 기회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지금 독일이 이렇게 부유하고 성숙한 사회가 된 것은 바로 그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최대한 자신의 재능을 실현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반면 한국은 너무도 많은 재능들이 발현되지 못한 채 사장되는 사회이지요.
한국은 기회를 박탈하는 사회일 뿐만 아니라,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사회이기도 하지요. 사람들은 이러한 ‘이중의 박탈’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도 엄창난 차별과 격차가 존재하지요. 이러한 현실이 우리가 지극히 기형적인 사회에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25

지금 한국은 끔찍한 ‘자기착취’ 사회입니다. 옛날에는 주인이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면서 노예를 착취했습니다. .. 오늘날에는 노예가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착취하도록 만듭니다. 비유하자면, 옛날에는 노예 감독관이 밖에서 채찍을 휘두르며 착취했다면, 지금은 노예 감독관을 내 안에 심어놓고 스스로 알아서 착취하게 합니다. 그것이 자기착취입니다. .. 자기착취가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자행되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타인이 착취를 하는 경우에는 착취당하는 자의 내면에 착취하는 자에 대한 저항 의식이 생깁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을 착취하는 경우에는 내면에 죄의식이 생겨납니다. .. 착취를 당하면서도 착취자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 문제로 부단히 전가하는 지배자들의 기만적인 논리를 내면화하고 신념화해서는 이 사회를 변혁할 수 없습니다.  126-127

한국인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 그러니까 행복감을 느낄 권리마저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는 끊임없이 자기를 착취하도록 요구합니다.  128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내가 느끼는 감정, 내가 어떤 대상을 받아들이는 감수성, 심지어 내가 품고 있는 욕망, 내 꿈에서 나타나는 무의식까지 과연 그게 ‘나’의 것일까요? 아니면 나를 노예로 부리는 자의 것일까요? 이 구호가 던지는 물음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나의 사유, 감정, 감수성, 욕망, 무의식이 나의 것이 아니라 나를 노예로 만드는 자의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 거기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129

68세대의 ‘정신적 지도자’ 허버트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에서 “자유인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노예 상태에 있으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노예 상태를 인식하는 것, 이것이 자유인의 첫 번째 조건이니다. 다시 말하면 노예 상태에서 있으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자유인이  못 된다는 거지요. 129-130

이제라도 내 ‘안’에 있는 노예 감독관과 정치 투쟁을 개시해야 합니다. 나의 생각, 감정, 감수성, 욕망, 무의식까지 다시 분해하고, 체질하고, 점검하고, 분리하고, 조합해야 합니다. 무엇이 나의 것이고, 무엇이 저들의 것인지, 무엇이 나를 자유인으로 만들고, 무엇이 나를 노예로 만드는지 꼼꼼히 따져봐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생각, 감정, 욕망, 무의식이 나의 노예 감독관이었음을 충격적으로 각성하는 것, 그것이 ‘최전선에서의 정치투쟁’인 것입니다.
애초에는 권력이나 권위가 외부에 있었습니다. 권력이나 권위는 물리적 폭력에 기초한 외적인 것이었지요. 그 후 권력과 권위의 형태는 내적인 방향으로 발전합니다. 이른바 ‘내적’ 권위 혹은 권력이 강력해지는 것이지요. 도덕이나 윤리가 그런 권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강력한 권위는 또 다른 형태입니다. 이른바 ‘익명’의 권위이지요. 익명의 권위는 무엇일까요? ‘너는 상식도 없니?’ 이런 말은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익명의 다수가 공유하는 지식이나 인식, 즉 상식, 여론 같은 것이 익명의 권위이지요. 요컨대 외적 권위, 내적 권위, 익명적 권위, 이런 것들이 모두 이 사회를 지배하는 권위 혹은 권력이지요.
그런데 사실 이 모든 것은 이 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종의 변형된 지배 방식이지요.  130-131

내 안의 노예 감독관은 ‘물리적 권위’에서 ‘윤리적 권위’로, 다시 ‘익명의 권위’로 발전해 온 것입니다.   131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131

68혁명의 부재와 관련하여 ‘소외(Entfremdung)’의 문제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소외’는 현대인을 이해하는 데 정말 중요한 개념인데, 한국에는 자기착취라는 개념처럼 소외라는 개념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소외는 사실 깊은 철학적 함의를 지닌 좀 어려운 개념입니다. 우리는 일상용어로서 소외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지만, 그 철학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배제시킨다, 고립시킨다, 왕따시킨다 정도로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원래 소외의 의미는 ‘배제’라기보다는 ‘전복’에 그 핵심이 있습니다. 즉 흔히 ‘현대인의 소외’라고 말할 때는 현대인이 고립되고 배제된 삶을 산다는 의미보다는 현대인의 삶이 ‘뒤집어져 있다’는 의미가 강한 것이지요. 그래서 소외란 말이 중요합니다. 바로 우리의 삶이 뒤집어져 있으니까요.
소외라는 개념은 원래 종교 분석에서 나왔습니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소위 헤겔 좌파에 속하는 사상가로서 종교를 일종의 ‘소외’ 현상으로 보았습니다. 그의 명제는 간명하고 분명합니다.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이다’라는 거지요. 기존의 지배적인 학설인 창조설을 완전히 ‘전복’한 겁니다. 신이라는 존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소망, 좌절과 절망을 외부에 투사한 존재인데, 이 신이 인간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면서 어느 순간 낯설어지더니 마치 하나의 독자적인 존재인 것처럼 인간을 지배하고, 역으로 인간이 신을 경배하는 전도된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대상이나 현상이 본래는 ‘나’의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나’의 것이었는데, 이것이 점점 ‘나’로부터 멀어져 낯설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 이제는 역으로 ‘나’를 지배하고, ‘나’는 그것에 종속되는 전도 현상 - 이것을 소외하고 부르는 것이지요.
현대사회는 완전히 소외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돈, 즉 화폐를 예로 들어보지요. 돈은 인간이 필요에 의해서 발명한 것이지만, 지금은 돈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화폐는 본래 인간이 교환의 편리를 위해서 만든 수단에 불과하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것이 인간으로부터 낯설어지더니 독자적인 세계에 있는 듯이 자기운동을 하고, 이제는 아예 인간의 통제를 넘어서 버렸습니다. 돈이 ‘나’를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노동을 하고 노력을 해봐야 돈이 자기들 세계에서 노는 것이 내가 창출해 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화폐’라고 일갈한 것입니다. 완전한 전도지요. 화폐는 하나의 사례일 뿐입니다. 132-134

한국에서는 소외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습니다. 우선 우리의 삶이 거대한 소외에 빠져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식이 필요하고, 인식을 위해서는 독서가 필요합니다.  .. 인식과 성찰이 사회 문화로 자리 잡지 못한 공동체에서 소외를 극복하기란 불가능합니다.  135


3장 악순환의 연결 고리를 찾아서

한국인은 ‘노동 기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치 노동하기 위해서 태어난 인간인 것처럼 일하고 있습니다.  154

지금과 같은 끔찍한 사회 질서를 만들어낸 곳은 바로 ‘여의도’입니다.  163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 300명 가량의 국회의원 중에서 290명 정도는 자유시장경제(free market economy)를 지지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164

한국 사람들은 자유시장 경제가 정확히 무엇이고, 그것이 자신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64

독일 연방의회(2013~2017)의 사례를 살펴보지요. 베를린에 있는 연방의회에는 631명의 의원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서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의원은 ..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자유민주당이 의회 진출에 실패했기 때문이지요. 독일은 정당 지지율이 5%를 넘어야 의회에 진출할 수 있는데, 자유민주당이 4.8%를 얻는 데 그쳐 의회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다른 정당들은 어떤 정당이었을까요? 우선 기독교민주당을 들 수 있지요. 현재 독일 총리를 맡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이 소속된 정당입니다. 독일의 전통적인 정치 구도에서 가장 보수적인 정당입니다. 기민당이 내세우는 기본적인 정책 기조는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입니다. 사회적 시장경제란 시장경제의 활력과 효율성은 활용하되, 시장경제가 몰고 오는 핵심적인 문제, 즉 실업과 불평등은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개인에게 ‘자유롭게’ 내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독일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야수 자본주의(raubtierkapitalismus)’라는 흔히 사용합니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자유롭게 놓아두면 인간을 잡아먹는 야수가 된다는 의미이지요. 특히 이는 1970년대 총리를 지냈던 사민당의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가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야수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가 사회에서 인간을 잡아먹는 것을 막아내는 것이 정치의 책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65-166

자본주의가 효율적인 체제임은 분명한데, 인간을 잡아먹는 야수의 속성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때로는 매우 ‘효율적으로’ 잡아먹습니다. .. 많은 나라들이 시장경제의 ‘효율성’은 활용하되, ‘야수성’은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국가가 나서서 야수에게 재갈도 물리고 고삐도 채워 컨트롤을 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사회적 시장경제에 붙은 ‘사회적(social)’이라는 말은 바로 국가가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야수가 인간을 잡아먹지 못하게 해야 한다 - 그것이 ‘사회적’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핵심입니다.
기민당이 사회적 시장경제를 정책 기조로 삼아 정책을 펼칠때 가장 중요시하는 수단은 바로 보세제도입니다. 정부는 주로 조세제도를 통해서 시장경제의 야수성을 통제합니다. 그렇다면 야수 자본주의라고 할 때 ‘야수’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무엇이 인간을 잡아먹는 요인일까요? 바로 실업과 불평등, 이에 따르는 빈곤과 불안이지요. 자본주의는 실업과 불평등을 필연적으로 낳는 체제입니다. ..
일반적으로 자본주의는 5~8%의 실업을 내장하고 있는 시스템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실업 문제는 자본주의라는 상당히 효율적인 시스템을 활용하기 위한 일종의 비용, 대가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 기본적으로 실업 문제는 사회의 문제입니다. 실업 문제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돌리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책임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있다는 것이 사회적 시장경제의 기본철학입니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실업 문제를 기본적으로 정부가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로 봅니다. 실업자에게 실업수당을 주고, 재교육 프로그램을 돌리고, 이를 통해 재취업에 성공하는 것까지 정부의 책임 영역에 있다는 것이 그들이 공유하는 생각입니다.  166-168

이제 독일 의회에 앉아 있는 두 번째 정당을 볼까요? 기독교민주당보다 왼쪽에 있는 사회민주당은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적 시장경제(socialistic market economy)’를 주장합니다. 그것은 시장경제의 효율성은 인정하지만, 인간이 존엄한 존재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이 되는 영역, 즉 교육, 의료, 주거 영역은 기본적으로 시장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169

세 번째 정당은 많은 분들이 잘 알고 있는 녹색당입니다. 녹색당은 생태적 시장경제(ecological market economy)를 주장합니다. 시장경제는 용인하지만 그것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녹색당의 강경한 입장이지요. 녹색당은 근대의 발전 이데올로기는 잘못된 것이며, 그것이 초래하는 자연 파괴는 인류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는 인식 아래, 환경, 생태 문제에 대단히 전투적이고 비타협적인 입장을 보이는 정당입니다. 그런 정당이 지난번 독일 의회에서 10% 가까이 의원을 보유했습니다.  170

세계적으로 눈을 돌려보아도 우리처럼 과도하게 우편향된 정치 지형을 가진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국인은 대부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한국 정치의 기형성을 모른 채, 우리 정치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언론이 거짓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지금 보수와 진보가 서로 경쟁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것은 한국의 기득권이 만들어낸 최악의 거짓말입니다. 사실 해방 이후 한 번도 보수와 진보가 경쟁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한국의 정치 지형은 ‘보수’와 ‘진보’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수구’와 ‘보수’가 손을 잡고 권력을 분점해 온 구도입니다. 저는 이것을 ‘수구-보수 과두지배(oligarchy)’라고 부릅니다.  172

현실을 잘못된 언어로 이해하는 자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174

보수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공동체입니다.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시하는 것이 보수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개인을 공동체보다 더 중시하는 쪽은 자유주의이지요. 그래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구분할 때의 결정적 기준이 개인을 우선하느냐, 공동체를 우선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
보수주의자는 대부분 민족주의자인 거지요. 김구 선생이 바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
다음으로 보수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역사입니다. 전통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과거에서 배우려는 자세가 보수의 자세이지요. ..
또한 보수주의자들은 문화도 중시합니다. 세련된 언어를 쓰려고 노력하고, 품위와 품격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175-176

수구란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하여 외세와 손잡고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는 무리들입니다.  176

복지국가란 정부가 충분한 재정지출을 통해 자본주의 시장이 초래한 실업과 불평등 문제 등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나라이기에, 재정지출 규모를 보면 그 나라의 복지 수준을 알 수 있는 거지요.  178

재정지출 비율이 큰 나라는 당연히 세금이 많은 나라입니다.  179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조세 저항이 거의 없습니다. 시민들이 자신이 낸 세금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나중에 되돌려 받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80

한국의 수구는 이 분단체제에 기생하여 70여 년을 연명해 온 세력입니다. 반공주의와 독재가 수구 역사의 핵심적인 특징입니다. 한국의 보수는 진보인 척하면서 개혁보다는 기득권 유지에 골몰해 온 세력입니다. 이 두 세력이 사실상 결탁하여 수구-보수 과두지배 체제를 만들었고, 그것이 지난 70년간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것입니다.  180

이들의 대립이 연극에 불과하다는 것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들이 정말로 중요한 싸움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벌개혁을 어떻게 할 것인가, 노동자들을 ‘기업 살인’으로부터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세계 최고의 불평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어떻게 정의로운 과세를 실현할 것인가, 어떻게 아이들을 이 살인적인 경쟁에서 해방시킬 것인가, 어떻게 이 학벌 계급사회를 혁파할 것인가? 모든 국민을 고통스럽게 하는 이런 중요한 문제들을 두고 이들은 싸우지 않습니다. 두 정파 모두 현행 질서의 기득권이기에 현재의 상황에 두 정파 모두 만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극단적으로 우경화된 정치 지형을 가진 나라입니다.  181-182

그러나 선거법을 개정한다면 상황은 바뀔 수 있습니다. 독일처럼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채택한다면 정의당, 녹색당 같은 정당이 의회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단언컨대 독일의 선거제도처럼 내가 던진 표가 사표가 되지 않고 그대로 의석으로 반영되는 정상적인 선거제도가 실현된다면, 저으이당은 아마도 최소한 20%, 녹색당은 5% 정도의 의석을 확보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기득권 세력에게 유리한 잘못된 선거제도 때문에, 가장 시급한 사회적 의제들이 정치적으로 해결될 가망이 전혀 없는 정체된 사회로 굳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선거법 개정은 단순한 ‘형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선거제도를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바로 어떤 정치 지형을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2019년 선거법 개정 협상은 한국 정치를 질적으로 변혁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결정권을 쥐고 있던 민주당이 보인 당리당략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행태로 인해 의미 있는 개정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저 비례 대표를 약간 늘리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민주당은 기존의 선거 제도를 사실상 고수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민주적 개혁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수구-보수 과두지배 체제의 특원적 지위를 계속 누리겠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표명한 것입니다.  183-184

한국이 수차례의 민주 혁명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의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더 지옥이 되어가는 이유는 이러한 ‘구조적’인 결함에 있습니다.  185

한국의 거의 모든 제도를 미국식입니다. 대학 제도를 보세요. 엘리트 대학 시스템과 과열된 입시 경쟁에서부터 엄청나게 비싼 학비와 과도한 사립대학체제까지 모두 미국의 제도와 관행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188

유럽의 대다수 나라에서는 대학이 평준화되어 있고, 대학 입학의 기회는 폭넓게 열려 있으며, 대부분 국립대학이 고등교육의 중심을 이루고 있고. 대학의 학비는 저렴하거나 무료입니다. ..
정치 지형도 미국과 빼닮아 있습니다. 미국은 보수양당제라고 하는 아주 ‘예외적인’ 정치 지형을 가진 나라입니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모두 보수정당이고, 진보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아주 특이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선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사회적 변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188

정치를 통해서 사회적 문제를 이성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장치가 마비된 사회에서 그 많은 사회적 좌절과 절망은 어디에서 출구를 찾을까요 이런 절망적인 사회에서 번성하는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190

한국에서 기독교가 놀라울 정도의 성공을 거두고, 기독교 선교사상 유례가 없는 ‘선교의 기적’을 이룬 것은 한국인이 지닌 ‘종교적’ 심성보다는 한국 사회에 각인된 왜곡된 정치사회적 구조와 관련이 깊습니다. 이처럼 종교의 경우에도 미국과 한국은 유사한 점이 많지요.  191

앞서 제도의 미국화에 대해 몇 가지 사례를 들었지만, 더 심각한 것은 ‘영혼의 미국화’입니다. 한국인은 세계 어느 나라 사람보다도 미국인에 가깝습니다.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 감정, 감수성, 욕망, 심지어 무의식까지도 거의 미국인의 그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191-192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상식’들이 국제적인 표준에 비추어 보면 맞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들은 대개 ‘미국식’ 상식인거지요. 그래서 지금의 한국 사회가 왜 이렇게 ‘헬조선’이 됐느냐를 살펴볼 때, 우리가 미국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그리고 미국은 도대체 어떤 나라인지에 대한 객관적인 관점을 갖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193


4장 우리는 함께 웃을 것이다

통일은 천천히 해도 된다고 했지만, 만약 통일을 이룬다면 그 방식은 대체적으로 세 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소위 ‘양국 체제론’입니다. 각각 두 개의 서로 다른 나라로 인정하는 것이지요.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생각하면 쉽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같은 게르만 민족이지만 서로 전혀 다른 국가이지요. 상호 대사관도 두고 있고요. 완전히 서로 ‘외국’인 것이지요. 이것을 양국 체제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국가연합제(Konfederation)입니다. 동서독 간의 관계를 생각하면 됩니다. 이를 보통 ‘1민족 2국가론’이라고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서로를 국가로서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외국은 아니다’라는 입장입니다. 독립된 국가로서 서로를 인정하지만 상호 외국은 아닌, 독일만의 특수한 ‘내부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서독은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고, 대사관을 두는 대신 상주 대표부를 두고 교류했던 거지요.
세 번째는 ‘연방제(federation)’입니다. 통일에 가장 가까운 형태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상 하나의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200

독일과 한국을 단순 비교하면서 엄청난 통일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고 과장된 허풍을 늘어놓은 쪽은 주로 일본 언론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특히 <교도 통신>은 ‘천문학적인 통일 비용’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었고, 이를 집중적으로 주도면밀하게, 또 악의적으로 퍼뜨렸습니다. 국내에서는 <조선일보>가 교도 통신의 기사를 받아 열심히 퍼 날랐고요. 그 때문에 통일 비용 문제가 한국에서 통일 논의의 중심이 되고, 반통일 정서를 확산시켰지요. 221

근대 사상가들이 품은 이상은 ‘인간이 이성에 의해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이성의 힘으로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며, 이성의 힘으로 좋은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그 ‘이성의 기획’이 바로 사회주의였습니다.  224-225

우리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상상력이 너무도 빈약하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종속변수로 보는 태도도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움직임으로써 새로운 상황을 창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바뀌는 상황에 무조건 적응하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새로운 상황을 만들고, 잘못된 상태를 바꿀 만한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단지 그것을 실행에 옮길 용기와 비전이 없을 뿐입니다.  254


에필로그 - 거울 앞에서 당당하기

삼권분립과 대의민주주의를 신봉한다고 다 민주주의자가 아닙니다. 민주주의자는 어디서나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타인의 의사를 존중하고,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강한 자아’를 가진 자입니다.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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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월가점령시위 연설 -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지 마라"

서구 사회의 우리는 금지가 필요 없다. 이미 지배체제가 우리가 꿈꿀 능력마저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 보는 영화를 생각해보라. 세상의 종말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종말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7

기억하라.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니다. 체제 그 자체가 문제다. 그것은 사람들을 부패하게 만든다. 적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위에 물타기를 하기 위해 행동에 돌입한 가짜 친구들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카페인 없는 커피, 알코올 없는 맥주, 지방 없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투쟁을 무해한 도덕적 저항으로 만들고자 할 것이다. .. 노동과 고문을 아웃소싱하고 결혼정보업체가 우리의 사랑을 아웃소싱하게 된 이후, 우리는 오랫동안 정치적 참여 역시 아웃소싱 되도록 내버려뒀다. 이제는 되찾아야 한다.  9

사람들은 종종 무언가를 갈망하지만 진정으로 원하지는 않는다. 갈망하는 것을 진정으로 추구하길 두려워하지 마라.  11

2011년 10월 9일 뉴욕 주코티 공원



감수의 글 - '로쟈' 이현우

현재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거스르며 맞서는 행위  15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이라는 게 철학에 대한 그의 정의.  15

왜 모든 문제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가? 그것은 오늘날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손쉬워진 만큼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15

2012년 초 슬라보예 지젝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달라는 주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사유를 시작하라. 단순한 호기심에 그치지 말고 전 생애에 대해 고민을 해야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을 시작해야 한다."  16




1 와 남 니하단 Wat Nam nihadan


페르시아어에는 '와 남 니하단'이라는 멋진 표현이 있다. "누군가를 살해하려면, 시체를 묻은 다음 그 위에 꽃을 심어 시체를 숨기라."  19

지배이데올로기의 일차적 과제는 이러한 사건들의 진정한 중요성을 무효화하는 것이었다. 언론의 지배적인 반응이야말로 정확히 '와 남 니하단'이 아니었던가?  20

(지젝이 말하는 '자본주의의 핵심 적대'는 크게 네 가지다. "다가오는 생태적 파국의 위협, 소위 '지적 재산권'과 관련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새로운 기술과학의 발전의 사회 윤리적함의, 새로운 장벽과 빈민가 등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의 생성"(<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창비 2010 p182)  20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결정적인 역사적 순간에는 대다수의 예술적 양식이나 이론적 주장이 모두 합쳐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경향으로 정리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0

현실이 우리의 생각에 부합하지 않으면, 현실은 그만큼 더 악화될 것이다. 반면 우리의 체계가 적합하다면, (불완전하게나마) 현실에 들어맞는 형식적 틀을 구축하게 된다. 마르크스가 이미 인지했듯이, 사회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규정은 곧 현실에 얽매인 주체들의 '주관적인' 생각, 규정이고, (우리 사고의 한계, 즉 사고의 교착상태와 모순이 곧 객관적인 사회 현실의 적대가 되는)이 구별 불가능한 지점에서는 "진단이 그 자체의 증상"이 된다. 우리의 진단(우리의 행동 범위를 규정하는 모든 가능한 입장들의 체계에 대한 '객관적' 해석)은 그 자체가 '주관적'이다. 진단은 우리가 실천하면서 맞닥뜨리는 교착상태에 대한 주관적인 반응 체계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 해결되지 않는 교착상태 자체의 증상을 나타낸다.  21-22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말했던 "이성의 공적인 사용"이다. 오늘날의 공산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성의 공적인 사용'과 평등주의적 보편적 사유로, 생각하면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칸트에게 '세계시민사회'의 공적 공간이란 보편적 단독성(unversal singularity)의 역설, 즉 일종의 단락(short-circuit)으로 특수성의 매개 없이 곧바로 보편성에 참여하는 단독적 주체의 역설을 가리킨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What is Enlightenment)?>의 그 유명한 구절에서 '사적'에 대립되는 '공적'이라는 표현으로 의미했던 바다. 여기서 '사적'이란 공동적 연대에 반대되는 개인적 유대가 아니라, 한 사람이 특별히 동일시하는 공동적 제도적 질서를 말한다. 이에 반해, '공적'이란 이성의 행사의 초국가적인 보편성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는 이러한 이분법은 좀더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이성의 공적 사용이 지닌 상징적 효능(또는 수행 능력)을 유보하는 데 의존한 것이 아닐까? 칸트는 "생각하지 말고 복종하라!"라는 복종의 일반적인 공식을 거부하지도 않았고, 이와는 '혁명적인' 대척점에 있는 "(남이 시키는 대로) 복종하지 말고 (스스로 머리를 써서) 생각하라!"라는 말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그의 공식은 차라리 "생각하고 복종하라!"였다. (이성을 자유롭게 사용하여)공적으로 생각하고 (권력의 위계 조직의 일부로서) 사적으로 복종하라는 말이다. 

요컨대,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공적 사용'을 통해 기존 질서의 약점과 불의를 목격하게 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통치자에게 개혁을 호소하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G. K. 체스터턴(G. K. Chesterton)처럼 능동적으로 생각하거나 의심할 수 있는 추상적 자유가 실질적 자유를 제한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우리는 대체로 자유사상이 자유를 방지하는 안전 장치 중에서 으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현대적인 예로 다시 표현하면, 노예의 정신적 해방이야말로 노예 해방을 막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의미다. 노예로 하여금 자신이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에 관해 고민하도록 가르쳐라. 그러면 그는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  23-25

'이성의 공적 사용'의 보편성과 참여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을 접목시킨 접근만이 우리가 처한 상항에 대한 '인식적 지도'를 제공할 수 있다. 레닌의 말처럼 "우리는 '사실만을 말해야 하고', 어떤 경향이 있다는 진실을 인정해야 한다."  26




2 지배에서 착취와 저항으로(From Domination to Exploitation and Revolt)


현대 자본주의의 세 가지 특징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이윤 추구에서 지대(rent)(주로 사유화된 '공유 지식'과 천연자원에 기초한 두 가지 형태) 추구로 전환되는 장기적 추세다. 둘째, 더 오랜 기간 '착취'당하는 일이 오히려 특권으로 인식되면서 실업의 구조적 역할이 한층 더 강화되는 현상이다. 그리고 마지막 특징은 장 클로드 밀네(Jean-Claude Milner)가 '봉급 부르주아(salaried bourgeoisie)라고 부른 새로운 계급의 부상이다.  29

밀네의 표현에 따르면, 잉여급여의 필요성은 경제적 의미보다 정치적 의미가 더 강하다. 즉 사회적 안정을 위해 '중간계급'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사회적 위계질서의 자의성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핵심인데, 평가의 자의성이 시장 내 성공의 자의성과 유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폭력은 너무 많은 우연성이 존재할 때가 아니라 그 우연성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 폭발할 위험이 있다.  34

소설 <아틀라스 : 지구를 떠받치기를 거부한 신>에서 에인랜드(Ayn Rand)가 즐겨 쓰던 이데올로기적 환상, 즉 파업에 나선 ('창의적') 자본가의 환상을 떠올려보자. 특권을 누리던 '봉급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들의 특권(최저임금 이상의 잉여가치)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이는 오늘날의 수많은 파업에서도 이러한 환상이 도착적인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들의 시위는 프롤레타리아적 시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전락할 위험에 저항하는 시위다. 달리 말하면, 정규직을 얻는 것 자체가 특권인 요즘 상황에서 감히 시위를 벌일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는가? (사양 산업인) 섬유업 등에 종사하는 저임금 노동자가 아니라, (주로 경찰, 사법 관계자, 교사, 대중교통 근로자 등 주로 공무원직에 근무하여) 직업이 보장된 특권층 노동자일 것이다. 학생시위의 새로운 흐름도 동일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이들이 시위를 벌이는 주된 동기는 고등교육을 받아도 졸업 후 잉여급여를 보장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인 것이 틀림없다. 

물론 아랍권에서 서유럽까지, 월스트리트에서 중국까지, 스페인에서 그리스까지 번져간 대규모 시위의 부활을 단순한 봉급 부르주아 계급의 봉기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36

진행중인 경제 위기를 한 측면에 함몰되지 않고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  37

오늘날 우리는 생태자본주의(eco-capitalism)부터 기본소득자본주의(Basic Income capitalism)까지 자본주의를 순치하려는 수많은 공세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시도의 배후에는 다음과 같은 추론이 존재한다. 자본주의가 현재로서는 부를 창출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었지만, 동시에 이대로 방치될 경우 자본조의의 재생산 과정에서 착취, 천연자원의 파괴, 집단 고통, 불의, 전쟁 등이 수반된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이윤을 추구하는 재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기본 틀은 유지하되, 글로벌 복지와 사회 정의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자본주의를 조정하고 규제해나가는 것이다. 또 시장에는 그 나름의 수요가 있음을 존중하고, 시장 메커니즘을 직접적으로 교란시키면 대재앙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자본주의라는 짐승이 제 기능을 다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 짐승을 길들이는 일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는, 실용주의적 현실주의와 정의를 고수하는 원칙주의를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보통 그러하듯, 선의로 시작하여 조만간 두 가지 차원의 적대라는 실재(the Real)에 직면하게 된다. 자본주의라는 짐승이 자애로운 사회적 규제로부터 도망치는 일이 거듭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시점엔가 우리는 숙명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정말로 자본주의라는 짐승과 함께 가는 것만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방법일까? 아무리 자본주의가 생산적이라고 해도,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커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일 우리가 계속 이 질문을 회피한 채 자본주의를 길들인다면,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힘을 실어주는 꼴밖에 안 될 것이다.  43-44




3 정치적 대표의 꿈 작업(The 'Dream-Work' of Political Representation)


마르크스는 1848년 프랑스 혁명과 그 여파에 대해 분석한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사회적 대표(경제적 계급과 세력을 대표하는 정치적 행위주체(agent))의 논리를 정확히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복잡화(complicate)'했다.  49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줘야 하므로 공공사업에 착수한다. 그러나 공공사업은 국민의 조세 부담을 가중시킨다. 따라서 종래 5부 이자를 4부5리 이자의 공채로 전화하여 금리생활자를 공격함으로써 세금을 낮춘다. 그러나 중간계급에게도 떡고물이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술을 소매로 구입하는 인민에게는 주세를 배로 인상하고, 도매로 사는 중간계급에게는 주세를 반으로 인하한다. 또 현실의 노동자 조합은 해체하면서, 앞으로 꿈같은 조직을 만들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농민도 원조해줘야 한다. 저당은행들 때문에 농민의 부채가 급증하고 부의 편중이 가속화된다. 그러나 이 은행들은 오를레앙가에서 몰수한 영지를 현금화하는 데 이용되어야 한다. 법령에도 나와 있지 않은 이런 조건에 동의할 자본가는 아무도 없고, 그래서 저당은행은 단지 법령으로 남는다, 등.

한마디로 보나파르트는 모든 계급에게 가부장적 은인으로 비쳐지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느 한 계급을 착취하지 않고서는 그 어느 계급에게도 은혜를 베풀 수 없다.  52-53

스스로 대표하지 못하여 누군가에 의해 대표될 수밖에 없는 계급이란 당연히 분할지 소농 계급을 말한다.  54

모든 계급 위에 군림하고, 모든 계급 사이를 오가며, 모든 계급의 비천한 잔여물에 직접적인 기반을 두면서도, 아울러 스스로 정치적 대표를 요구하는 집단적 행위주체가 될 수 없는 계급을 궁극적으로 대표해야 한다. 이 역설이 의미하는 바는 순수한 대표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라캉 식으로 표현하자면, 계급 적대는 그러한 전체 대표가 실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게 만든다. 계급 적대는 결국 한 사회의 중립적인 '전체'란 없고, 모든 '전체'는 특정 계급에 은밀하게 특권을 부여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55

오늘날 대부분의 '전문가'와 정치가가 따르는 공리를 떠올려보자. 누누이 들어왔듯이, 우리는 적자와 부채로 점철된 위태로운 시대에 살고 있기에, 모두가 고통을 분담하며 생활수준의 저하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니까. (최고) 부유층을 제외한 모두가 말이다. 부유층에 대한 증세는 절대적인 금기사항이다. 세금이 늘면 그들의 투자 의욕이 꺾여 신규 고용 창출이 줄어들므로 우리 모두가 고통받게 된다는 논리다. 결국 이 힘든 시절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빈자는 더욱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부자들의 부가 조금이라도 상실될 위험에 처하면 사회가 나서서 막아줘야 한다. 금융 위기가 과도한 정부 차입과 지출에서 비롯되었다는 금융 위기에 대한 지배적인 시각은 아이슬란드에서 미국까지 위기의 궁극적인 책임이 대규모 민간은행들에 잇다는 사실과 노골적으로 배치된다. 그 은행들의 도산을 막기 위해 정부는 납세자의 엄청난 혈세를 투입하며 개입했던 것이다. 

계급 적대를 부인하고 전체를 대표한다는 입장을 내세우는 전형적인 방법은, 그 적대의 원인을 그 자체로 사회를 위협하는 반사회적 요인이자 사회에서 배설된 과잉의 상징인 외국인 불청객들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유대주의는 단지 수많은 이데올로기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자체로 본원적인 이데올로기다. 반유대주의는 기본 좌표를 설정하는 영도(zero-lenel)(또는 순수한 형태)의 이데올로기를 구현한다. 이로써 사회적 적대('곅,ㅂ투쟁')는 신비화되거나 전치되어 그 원인을 외부 침입자에게 투영할 수 있게 된다. 라캉의 '1+1+a'의 공식의 가장 좋은 예가 이러한 계급투쟁이다. 두 개의 계급에 '유대인'이라는 과잉, 대상a(object), 대립쌍의 보충물이 덧붙는 것이다. 이 보충적 요소의 기능은 이중적이다. 계급투쟁에 대한 물신주의적 부인(fetishistic disavowal)인 동시에, 바로 그 자체가 '계급 평화'를 영원히 가로막는 이 적대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 만약 보충물없이 '1+1' 상태로 두 계급만 존재했다면, '순수한' 계급 적대 대신 두 계급이 상호 보완하여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는 계급 평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계급투쟁의 '순수성'을 흐리거나 전치하는 요인이 바로 계급 투쟁의 원동력이라는 데 역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현실 세계에서 적대적인 두 계급만 존재하는 경우는 절대 없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 비판자들은 핵심을 놓치고 있다. 바로 그러헥 적대적인 두 계급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계급투쟁이 존속하는 것이다.  55-57

소농은 오늘날 악명 높은 중간계급이 되었다. .. 중간계급은 정치화에 반대한다. 이들은 그저 자신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면서 간섭 없이 일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사회의 광적이 ㄴ정치적 동원을 종식시켜 모두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겠다고 약속하는 독재 쿠데타를 지지하는 성향을 보인다.  58

주인 담론에서 대학담론으로 바뀌는 전 세계적 추세의 일환으로 새로운 집단이 등장했다. 특정한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않고 중립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으로 상황을 지배(또는 차라리 '관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기술, 금융) 전문가 집단이다.  58

문화 전쟁이 곧 전치된 양식의 계급 전쟁이라는 뜻이다.  69

모든 이데올로기 체계는 연쇄적인 등가물을 정립하거나 부여하려는 헤게모니 투쟁의 산물이자, '객관적인 사회경제적 입장'등 외재적 참조점으로는 결코 보장되지 않는 철저히 우연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투쟁의 산물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답변에서 이 수수께끼는 간단히 자취를 감춘다.

여기서 첫 번째로 주목할 것은 일단 문화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양 진영이 있어야 하고, 문화는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근본주의에 저항하고 다문화적 관용을 옹호하는 데 정치를 집중하는 '계몽된'자유주의자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주제라는 점이다. 핵심 질문은 이렇다. 왜 '문화'가 우리 생활의 중심 영역으로 등장했는가? 종교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실제로 믿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속한 공동사회의 '생활양식'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일부) 종교 의식과 관습에 따를 뿐이다. '전통에 대한 존중심'으로 코셔(kosher-유대인의 율법을 따르는 정결한 음식) 원칙을 지키는 비신도 유대인 등이 그런 예다. "실제로 그것을 믿지는 않아. 그냥 내 문화의 일부일 뿐이야."라는 말이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거부되거나 전치된 신앙의 두드러진 양식인 듯하다. 이렇듯 '실제' 종교, 예술 등과는 구별되는 '문화'의 '비근본주의적' 개념이야말로 버려지거나 특정 개인과 무관해진 신앙의 영역을 보여주는 핵심일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믿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키는 '문화' 말이다.

두번째로 주목할 점은 자유주의자들이 가난한 자와의 연대를 주장하는 한편, 대립적인 계급 메시지로 문화 전쟁을 코드화하는 방식이다. 다문화적 관용과 여성의권리를 지지하는 이들의 싸움은 '하층계급'의 이른 바 비관용, 근본주의, 가부장적 성차별주의와 대척점에 설 때가 많다. 이 혼란을 해소하는 한 가지 방법은 진정한 구분선을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 중재적인 용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최근 이데올로기적 공세에서 '현대화'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방식이 그러한 예다. 우선 '현대화주의자'(경제부터 문화까지 모든 측면에서 글로벌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와 '전통주의자(세계화를 반대하는 사람)' 사이에는 추상적인 대립관계가 형성된다. 그러고 나면 전통적 보수주의자와 포퓰리스트에서 '구좌파(복지국가, 노동조합 등을 계속 지지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전부 이 세계화에 반대하는 사람의 범주로 분류된다. 이러한 범주와는 분명히 사회적 현실의 일면을 포착한다. 2003년 초반에 독일에서 교회와 노동조합이 연대를 통해 상점들의 일요일 영업 법제활르 막았던 일을 떠올려보라. 그러나 이 '문화적 차이'가 다양한 계층과 계급을 아우르는 전반적인 사회적 장을 가로지른다고 말하기엔 충분하지 않다. 또 다른 대립관계와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될(그래서 글로벌 자본주의의 '현대화'에 저항하는 보수주의의 '전통적 가치'나 자본주의적 세계화를 완전히 지지하는 도덕적 보수주의자가 나올)수 있다는 말도 부적절하다. 요컨대 이러한 '문화적 차이'가 현대 사회적 과정에서 작동하는 일련의 적대 중 하나라고 주장해봐야 별 소요이 없다.  70-72

세번째로 주목할 것은 페미니스트, 반인종차별주의자, 반성차별주의자 등의 투쟁과 계급투쟁 간의 근본적 차이다. 다른 투쟁의 목적은 적대를 차이로 변화하는 것(다양한 성, 종교, 민족 집단의 평화로운 공존)이지만, 계급투쟁의 목적은 정반대로 차이를 계급 적대로 바꾸는 것이다. '빼기'의 요지는 전체적으로 복잡한 구조를 그 적대적인 극호한 차이로 환원하는 것이다. 인종, 성, 계급의 연쇄는 계급의 경우 정치적 입장에 대한 논리가 다르다는 점을 모호하게 만든다. 반인종차별주의자와 반성차별주의자의 투쟁은 상대를 충분히 인정하려는 노력을 지향하지만, 계급투쟁은 서로를 극복하고 진압하며 심지어 근절하는 데 목표를 둔다. 직접적인 물리적 전멸은 아니더라도, 상대의 사회경제적 역할과 기능을 말살하는 것이 목표다. 다시 말해, 반인종차별주의자가 모든 인종이 저마다의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입장을 자유롭게 주장하고 깨닫기 바란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이 되어도,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목표가 부르주아 계급이 그 정체성을 충분히 주장하고 목적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전자의 경우에는 다양한 정체성을 인정하는 수평적 논리가 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적과의 투쟁이라는 논리가 존재한다.  73-74




4 사악한 민족주의의 귀환(The Return of the Evil Ethnic Thing)


중동 협상 역시 평화의 문제가 관건이 아니다. '평화협상'이라는 명칭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점령을 기정사실화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인 사라들의 손을 들어주는 셈이다.  80

반유대주의는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동성애반대주의 드오가 같은 연장선상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82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는 노골적인 암시인 것이다. 

우리는 이 논리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제는 서로 독립적일 뿐 아니라, 현재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중립적'이고 비정치적인 테크노크라시의 경제 정책에 대한 대중의 반대 속에서 진정한 민주 정치가 표출된다.  89

지금 단계의 우리는 당연히 충분히 관용적이지 못하거나, 아니면 이미 너무 지나치제 관용적이어서 여성권 등을 방치하고 있다.  94

우리의 과제는 단지 타인에 대한 관용을 넘어 진정한 공존과 다양한 문화의 혼합을 영속시킬 수 있는 적극저깅고 해방적인 지배문화를 추구하는 것이고, 그 지배 문화를 위한 다가올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다. 단순히 타인을 존중하지 말고, 그들에게 공동의 투쟁을 제안하자. 오늘날 우리를 가장 크게 압박하는 문제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문제이니 말이다.  95




5 탈이데올로기의 사막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Desert of Post-Ideology)


최근 캘리포니아를 방문한 동안, 나는 어떤 교수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슬로베니아인 친구 한 명과 함께 참석했다. 이 친구는 골초였다. 늦은 저녁, 담배 생각이 간절해진 친구는 집주인에게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피워도 되는지 정중히 물엇다. (그에 못지않게) 정중한 태도로 주인이 안 된다고 말하자 친구는 집밖으로 나가서 피우겠다고 말했지만, 그조차도 안 된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이면, 이웃들에게 자기 평판이 떨어진다는 것이 주인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 놀란 것은 저녁식사가 끝나고 집주인이 우리에게 가벼운 마약을 권했을 때였다. 이러한 종류의 흡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마치 마약이 담배보다 훨씬 덜 위험하기라도 한 듯이.96-97

라캉이 말하는 '향락(jouissance)'(주이상스)은 치며억인 과잉의 쾌락으로, 쾌락원칙(pleasure principle) 너머에 위치한다. ...

한쪽은 즐거움을 연장시키고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피하기 위해 쾌락을 신중히 계산하는 계몽된 쾌락주의자이고, 다른 한쪽은 치명적으로 과도한 향락 속에서 존재의 절정에 도달하려는 향락주의자(jouisseur)다.  97

계몽된 소비주의적 쾌락주의는 기본적으로 향락에서 그 과잉의 차원, 불온한 잉여, 그리고 아무데도 도움이 안 되는 측면을 박탈하는 기능이 있다. 향락은 용인되고 심지어 권유되지만, 우리의 정신적, 생물학적 안정성을 위협하지 않고 건전해야 한다는 단서조항이 붙는다.  98

예카테리나 대제(Catherine the Grest)의 일화. 그녀는 노예들이 뒤에서 술과 음식을 훔치고 심지어 자신을 조롱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그저 미소만 지었다. 가끔씩 향락의 부스러기를 떨어뜨려줘야 그들이 계속 노예 자리를 지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00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선택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부르짖지만 강요된 민주주의적 합의의 대안이라곤 맹목적인 실력행사뿐인 이 사회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우주인가? .. 유일한 선택이라곤 규칙에 따르는 것과 (자기)파괴적인 폭력 사이 중 하나뿐일 때, 우리가 그토록 찬양하는 선택의 자유란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우리가 점점 더 "세계 없음(Worldless)"으로 경험되는 사회적 공간에 살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러한 공간에서 저항이 취할 수 유일한 형식은 의미 없는 폭력뿐이다.  108-109

영국 폭동이 안고 있는 문제는 폭력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진정한 자기주장이 없었다는 것이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능동적이지 않고 반동적인, 무력한 분노이자 무력(武力 굳셀무 힘력)의 탈을 쓴 절망이었고, 승리의 카니발의 가면을 쓴 질투였다.  120




6 아랍의 겨울, 봄, 여름, 가을(The Arab Winter, Spring, Summer, and Fall)


도하(Doha)의 이슬람미술관(Museum of Islamic Art)의 PO24.1999번 소장품. 

10세기의 단순한 원형 토기접시로, 직경 42센티미터의 매끄러운 흰색 바탕에는 검은색 글씨로 야히아 이븐 지야드(Yahya ibon Ziyad)가 말했다는 속담이 새겨져 있다. "어리석은 자는 기회를 놓치고 나중에 운명을 탓한다."  122

중앙부의 그림. 자기 꼬리를 먹고있는 유명한 뱀 그림과 유사하다.  124

이 말을 뒤집어 보자. "어리석은 자는 기회를 놓치고도 자신의 실패가 운명의 조화임을 알지 못한다." 이것은 세상에 우연이란 없고 모든 것은 불가해한 운명으로 결정된다는 진부한 종교적 문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접시의 속담을 곰곰이 되씹어보면, 이러한 상투적 문구의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다시 한 번 이 접시를 사용하는 시간적 차원을 고려해보자. 저녁 식사가 시작될 때 손님은 음식이 가득 담긴 접시의 가장자리에 새겨진 글귀를 처음 보고 기회를 붙잡으라는 기회주의에 관란 교훈 정도로 일축해버린다. 그러나 음식을 다 먹은 후 접시 밑에 숨어 있던 진짜 메시지가 상투적 상징임을 알고 나면, 처음 본 글귀에 숨어 있던 진실을 놓쳤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 문구로 되돌아가 다시 읽어본 후에야 그것이 기회와 운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하고 흥미로운 이야기, 즉 운명을 선택하는 것은 그들의 소관이라는 메시지임을 알게 된다.  125-126

독재정권이 최후의 위기에 다다를 때 보통 그 붕괴는 두 단계를 거친다. 실제 무너지기 전에 불가사의한 파열이 생긴다. 어느날 문득 사람들은 이미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깯다고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130




7 월가점령시위, 또는 새로운 시작을 부르는 폭력적 침묵(Occupy Wall Street, or The Violent Silence of a New Beginning)


축제를 즐기기는 쉽다. 그러나 그 진정한 가치는 축제 다음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의 일상생활이 어떻게 바뀌었고 또 바뀔 것인지에 달려 있다. 여기에는 힘들고 끈질긴 노력이 요구되며, 시위는 그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시위의 기본 메시지는 이 정도다. "금기는 깨졌다. 우리는 실현 가능한 최선의 세계에 살지 않는다. 고로 우리는 대안을 생각해볼 수 있고, 또 생각해봐야만 한다."  146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식 모티프 - <최악을 향하여>에 나오는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를 의미한다 - 의 이러한 변주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실패 뒤에 남은 결과에 집중해야 한다.  147

시위대는 적뿐 아니라 가짜 친구들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시위대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시위를 무해한 도덕적 저항으로 바꾸어 그 의미를 희석시키고자 갖은 애를 쓴다. 복싱에서 '클린치(clinch)'란 상대방의 펀치를 막거나 방해하기 위해 한 팔이나 양 팔로 상대방의 몸을 붙잡는 행위다 월가점령시위에 대한 빌 클린턴의 대응은 정치적 클린치의 완벽한 사례다. 그는 시위가 "종합적으로 볼 때 긍정적인 일"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대의 모호함에 대해 우려는 표했다. "어떤 일에 반대만 하다 보면 우리가 만든 이 진공을 다른 사람이 채우게 될 테니, 그저 반대만 하지 말고 특정한 어떤 것을 지지해야 한다." 그러면서 클린턴은 "1년 6개월 안에 일자리 200만 개"를 창출하겠다고 주장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일자리 정책을 지지하라고 시위대에 제안했다. 그러나 시위대가 거리로 뛰쳐나온 것은 콜라 캔을 재활용하고, 자선단체에 푼돈을 기부하며, 스타벅스 카푸치노를 구매하여 가격의 1%를 제3세계로 보내는 것마능로 만족하는 세계에 질릴 만큼 질렸기 때문이다.  155-156

민주주의는 법치주의에 기반을 둔다.  158

마르크스는 자유의 문제를 고유의 정치적 영역에서 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국가에서 자유선거가 실시되는가? 사법부가 독립적인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가? 인권이 존중되는가? 등). 실제 자유의 핵심은 오히려 시장에서 가족에 이르는 사회적 관계들의 그물망에 있고, 이 영역을 진정으로 개선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정치적 개혁이 아니라 '비정치적'인 사회적 생산 관계의 변혁이다.  161-162

민주주의 기제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자본주의 재생산의 원활한 가동을 보장하는 '부르주아' 국가 장치의 일부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적은 제국이나 자본이 아니라 민주주의라고 불린다."라는 알랭 바디우의 언뜻 의아하게 들리는 주장은 정곡을 찌른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관계의 모든 급진적 변화를 가로막는 주범은 민주주의적 절차 내에서만 모든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민주주의적 환상'인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구체적 강령을 만들어내기 어려운 데는 이처럼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162

월가점령시위의 수많은 (종종 혼란스런) 발언들 기저에는 두 가지 기본적 통찰이 깔려 있다. 첫째, 현재 대중의 불만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대한 것이다. 문제는 시스템 자체이지 그 특정한 부폐 사례가 아니다. 둘째, 현재와 같은 다당제 형태의 대의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해결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는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월가점령시위의 가장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경제생활의 파괴적 결과 앞에서 속수무책임이 입증된 현행 정치형태를 벗어나 민주주의를 어떻게 확장해 나갈 것인가? 다당제 대의민주주의를 뛰어넘어 이렇게 재발명된 민주주의에 과연 이름이 있을까? 있다.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163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어떻게 민주적 다당제 체계를 넘어 집단적 의사결정을 제도화할 수 있을까? 또 누가 이 재발명이 주역이 될 것인가? 잔인하게 말하자면, 당장 오늘 무엇을 해야할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지식인이든 일반인이든 그것을 아는 주체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은 장님이 장님에게 길을 안내하는, 좀 더 정확히는 장님끼리 길을 안내하면ㅅ 서로 상대방은 볼 수 있다고 믿는 교착상태인 것일까? 아니다. 각자 모르는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중은 답을 가지고 있다. 다만 자신들이 답을 가진(혹은 스스로가 답인) 질문을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존 버거(John Berger)는 내부인과 외부인을 가르는 벽의 잘못된 쪽에 서있는 '대중(multitude)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대중은 아직 제기되지 않은 질문의 답을 알고 있고 벽보다 오래 살아남을 능력이 있다. 질문이 아직 제기되지 않은 것은, 그러자면 진심으로 와닿는 용어와 개념이 필요한데 민주주의, 자유, 생산성 등 현재 사건드을 명명할 때 사용되는 용어와 개념은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곧 새로운 개념과 더불어 새로운 질문이 대두할 것이다. 역사는 바로 그러한 질문의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니까. '곧'이라면 언제? 한 세대 내에.'165-166




8 <더 와이어>, 이 아무 일 없는 시대에 해야 할일(The Wire, or What to Do in non-Evental Times)


-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허위적인 종언 이후의 '그저 그런 삶(mere life)'과 '진정한 삶(real life)'을 대비시킨다. '그저 그런 삶'은 자신의 삶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삶이고, 자신의 기득권이 아무 탈 없이 그대로 대대손손 보존되기를 매일 기도하는 삶이다. 그것의 정치적 버전이 자유민주주의다. 지젝이 보기에 자유 민주주의의 최대 관심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마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자유민주주의는 무사건의 당(party of non-party)이다."(이현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자음과 모음 2011 p72, 슬라보예 지젝,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자음과 모음 2011 p210 참조  167

금기어를 사용하여 금기를 깨는 효과.  169

'와이어(wire)'에는 다양한 함의가 있지만(철조망을 따라 걷는다거나 도청장치를 착용하는 등) 사이먼에 따르면 이 제목은 주로 "두 개의 미국 사이의 거의 가상적이지만 침범 할 수 없는 경계", 즉 아메리칸 드림에 동참한 사람들과 낙오된 사람들 사이의 경계를 가리킨다. 따라서 <더 와이어>의 주제는 한마디로 계급투쟁이자 그 문화적 결과를 포함한 우리 시대의 실재다.  170

사이먼은 이 급진적인 분열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 매우 명료하게 설명한다. 

'우리는 마약에 대해 전쟁을 벌이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단지 더이상 노동공급원으로 필요가 없어진 도시 최하층계급을 짐승 취급하며 인간성을 말살하고 있을 뿐이다. (중략) <더 와이어>는 미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낙오된 미국에 대한 이야기다. (중략) 마약 전쟁은 현재 최하층계급이 벌이는 전쟁이다. 그것이 전부다. 다른 의미는 없다.'  170-171

운명이 어떻게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승리를 거두는지에 대해 <더 와이어>는 체계적으로, 이어지는 각 시즌마다 한 단계씩 분석을 진행해 나간다.

시즌1은 마약상 대 경찰이라는 갈등을 제시하고, 시즌2는 노동 계급의 붕괴라는 갈등의 궁극적인 원인을 파해치며, 시즌3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치 전략 및 경찰과 그 실패를 다룬다. 시즌4는 왜(흑인 노동계급 청소년의) 교육만으로는 불충분한지를 보여주고, 마지막 시즌5는 언론의 역할, 즉 일반 대중이 이 문제의 실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유에 초점을 맞춘다.  173

핵심은 그들 모두 어떤 식으로든 법을 위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178

마르크스도 비록 한정된 주관적 입장에서는 생산의 목적이 생산물, 즉 사람들의 (가상적 또는 현실적) 수요를 충족시킬 물건이고, 다른 말로는 사용 가치지만, 이 시스템 전체라는 '절대적 관점'에서 보자면, 개인의 수요의 충족은 단지 자본주의적 (재)생산 지게를 계속 유지시키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일 뿐이라 말한다.  183

제임슨이 말한 대로 <더 와이어>는 범인이 일개 번죄자(나 범되 단체)가 아니라 사회 전체이자 전체 시스템인 탐정물이다.  183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실재가 추사적이고, 자본의 추상적 가상적 운동이며, 실재와 현실의 라캉식 차이를 동원하자면, 현실이 실재를 가린다는 것이다. '실재의 사막'은 자본의 추상적인 움직임이고, 마르크스가 말한 '실재적 추상(real abstraction)'도 같은 맥락이다.  183

마르크스는 자본의 광포한 자기 증식적 순환을 묘사했고, 자본의 유아론적인 자기 수태적 행보는 오늘날 메타 반영적인 선물 투기에서 절정에 이른다. 아무런 인간적, 환경적 고려 없이 자기 갈 길만 추구하며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는 이 괴물의 유령이란 이데올로기적 추상성에 불과하고, 그 뒤에는 거대한 기생동물 같은 자본적 순환의 토대가 되는 생산력과 자원을 제공하는 실제 사람들과 자연물이 있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문제는 그 이데올로기적 추상성이 금융 투기자의 사회 현실에 대한 오해의 일부일 뿐 아니라, 물질적 사회 과정의 구조를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정확히 실재라는 것이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때로는 모든 국가의 운명이 자본의 유아ㅇ론적이고 투기적인 춤사위에 따라 결정되는 판국에, 정작 자본은 자신의 운동이 사회 현실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전혀 무관심한 채 수익성이라는 목표만 추구한다.  183-184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체계적 폭력.

이 폭력은 더 이상 개인이나 그들의 '사악한' 의도에 책임을 물을 수 없이 순수하게 '객관적이고' 체계적이며 익명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reality)과 실재(the real)에 대한 라캉식 구분과 마주하게 된다. 현실은 실제 인간들이 상호작용과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사회 현실인 반면, 실재는 사회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결정하는 자본의 냉혹하고 '추상적'이며 유령 같은 논리다. 이 간극은 생태적 파괴나 인간의 고통으로 얼룩져 생활이 분명 혼란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경제 보고서상으로는 '재정적으로 건전한'국가로 발표되는 어떤 국가를 방문해 보면 실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자본의 상황인 것이다.  185

마르크스도 <자본론>의 유명한 구절에서 상품의 교환과 순환으 감춰진 논리를 끄집어내기 위해 의인법에 의존한다. "만약 상품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의 사용가치는 인간들에게 관심사일지는 몰라도 물적 존재로서의 우리에게는 속하지 않는 것이다. 물적 존재로서 우리에게 속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다. 상품으로서 우리가 교환되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단지 교환가치로서만 서로 관계를 맺는다.  187

<더 와이어>는 종종 권력과 저항, 또는 법과 그 위반 사이의 관계에 대한 푸코식 주제(topos)의 관점에서 해석된다. 순응을 요구하는 규제 과정이 오히려 '억압'하고 규제하려는 대상을 낳는다.  192

주변부의 주관적 입장에서 지배적인 장치에 '저항'하는 식의 전략을 확산하고자 애쓸 것이 아니라 지배적인 장치 자체 내에서 가능한 파열 양상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저항의 현장'에 대한 모든 이야기에서, 비록 당장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때로는 우리가 저항하는 장치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193-194

삶은 거대한 순환이고, 우리는 기린을 먹고, 기린은 풀을 먹는다. 그러나 그 후 우리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풀에게 먹혀 순환이 종료된다. 이것이 가장 꼭대기에 있는 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메시지다. 결정적인 것은 우리가 이러한 '지혜'에 부여하는 정치적 해석이다. 이것은 단순한 철수의 문제일까, 아니면 급진적 행동 조건으로서 철수의 문제일까? 다시 말해, 삶은 항상 원을 이루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 위계질서를 오르내릴 뿐 아니라 원 자체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199-200

운명에 저항하는 (그래서 운명의 실현을 돕는, 마치 오이디푸스(Oedipus)의 부모나 바그다드에서 사마라로 도주했던 하인처럼) 것이 아니라, 운명 자체, 그 기본 좌표를 바꾸는 것이다.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는 "무엇인가를 바꾸어야만 모든 것이 그대로 남는다."라는 말을 뒤집어 언젠가 "아무것도 바꾸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이 달라지게 하자."는 의견을 제안했다.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 혁명화가 요구되는 후기 자본주의의 역동성 같은 일부 정치적 성좌에서는, 어떤 것도 바꾸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오히려 진정한 변화의 주체다. 변화의 원리 자체의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00

우리는 오늘날 '전면적인 경제 불황'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전망이 진정한 집단적인 반체제주의를 야기할까? 결과가 어떻든 간에, 한 가지는 분명하다. 사이먼의 비극적인 비관주의를 오나전히 수용하고 (시스템 내에서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1-202




9 시기와 분노를 넘어서(Beyond Envy and Resentment)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가 이른바 '복지 국가의 이율배반'이란 문제에 대해 해법으로 제시하는, 단순한 시장 교환을 넘어서는 '기부의 윤리학(ethics of gift-giving)'.  203


그가 말하는 변화를 달성하려면, 민주주의 시대에 이상하게 살아남은 전제정치의 잔재인 국가주의(etatisme)를 탈피해야 한다. 전통 좌파조차 놀랄 만큼 강한 이 개념은 국가가 국민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필요시) 그들의 생산물 일부를 법적 강제력을 동원해 몰수 및 결정할 수 있는 명백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것이다. 시민은 자신의 소득 일부를 국가에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날 때부터 국가에 빚을 진 존재처럼 취급받는다.  204

첫 번째 단계는 납세 의무자에서 자원자로의 변경이다. 부자에게 과중한 세금을 매기는 대신, 자발적으로 자신의 부를 어느 정도나 공공복지에 기부할 지 결정할 (법적) 권한을 제공해야 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세금을 급격히 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기부자가 스스로 어디에 얼마를 기부할지 결정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작은 여지라도 열어놓아야 한다는 뜻이다.이러한 시작은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점차 사회 결속력의 근간이 되는 사회 전체의 윤리를 변화시킬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상화이야 어째됐든 결국 해야만 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게 된다는 오랜 역석레 빠지는 것은 아닐까? 선택의 자유가 실은 강요된 선택에 기초하는 거짓 자유가 아닐까?  205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에서 실시된 연구에 대한 보고 내용.

'... 일정 수준이 충족되면, 사람들은 돈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일에 대해 생각한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을 기꺼이 무료로 하거나 일주일에 20시간, 때로는 30시간을 자원 봉사하는 살마도 대단히 많다. 그들은 자신이 만든 것을 팔지 않고 그냥 나눠준다. 대부분 고도의 전문 기술을 보유하고 직업도 있는 이들이 왜 회사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무료로, 때로는 업무시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일하는 것일까? 참으로 이상한 경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 '이상한 행동'은 마르크스의 유명한 구호인 '능력에 따른 노동과 필요에 따른 분배'를 좇는 공산주의자의 행동이다. 이것암ㄴ이 진정한 유토피아적 차원을 갖는 유일한 기부의 윤리학이다.  210

MIT 실험에 어떠한 문제가 있든 간에, 자본주의적 경쟁과 이익 극대화가 전혀 '천성적'이지 않다는 점만은 분명히 입증된다. 기본적 욕구가 일정 수준 이상 충족되면, 사람들은 금전적 보수가 아닌 능력에 따라 사회에 기부해가며 '공산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212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건 힘겨운 투쟁을 통해 쟁취하는 것이다. 스파르타인의 가혹한 군사적 규율은 아테네인의 '자유민주주의'와 외적으로 대립하는 동시에 그것의 근간을 이루는 내적 조건이다. 이성이 있는 자유로운 주체는 오로지 혹독한 자기 규율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진정한 자유는 딸기 케이크와 초코 게이크 중 하나를 고르듯이, 안전한 거리를 두고 행해지는 선택의 자유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필연성과 겹쳐진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걸 때에만,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때에만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 조국이 다른 나라에 점령당했을 때 맞서 싸우는 것은 '선택할 자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존엄을 지키고 싶다면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219




10 미래가 보내는 징후(Signs From the Future)


꿈이 사라져버린 듯한 이 우울한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열정이 넘치던 숭고한 순간을 회상하며 향수와 자아도취에 빠지거나,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이러한 시도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냉소적이고 현실적으로 설명하는 것 외에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가장 먼저 언급할 것은 수면 아래에서 여전히 불만이 들끓고 있다는 사실이다. 분노가 계속 쌓여가고 있으니 새로운 저항의 물결이 뒤따를 것이다. .. 확실한 돌파구가 없는데다, 지배 엘리트는 명백히 통치력을 상실하고 있다. 더욱 불안한 것은 민주주의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228

월가점령시위, 아랍의 봄, 그리스와 스페인에서의 시위 같은 사건들은 그렇게 미래에서 보내온 징후로 읽어야 한다. 바꿔 말하자면, 맥락과 기원을 바탕으로 사건을 이해하는 일반적인 역사주의적 관점을 뒤집어야 한다.  229

우리는 공간상으로는 여기에 위치하고 있지만 시간상으로는 공산주의 사상의 미래, 즉 해방된 미래에 위치한 요소를 적극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에서 인식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징후를 포착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한편, 현재 우리의 행동도 미래가 되어야 온전히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오늘날의 사회에서 '공산주의의 싹'을 필사적으로 찾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허비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가설상 공산주의의) 미래에서 오는 징후를 읽는 이과 그 미래의 근본적인 개방성을 유지하는 일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잡는 일이다. ..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그 균형은 양 극단을 핗는 일종의 현명한 '중도(中道)'와는 무관하다.  229-230

칸트의 이성과 직관의 관계 도식 (-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233

오늘날 공산주의자를 규정짓는 특성은 (현대식 버전의) '기적', 즉 타흐리르 광자의 시위와 같은 예상치 못한 사건 속에서 공산주의적 요소를 찾아내고, 그것을 (공산주의적) 미래에서 온 징후로 읽어내게 해주는 '독트린(이론)'이다.  234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미래는 '객관적'이지 않다. 그 미래를 지탱하는 주관적 참여를 통해서만 현실이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비난을 되돌아봐야 한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적어도 장기적으로는)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원하지 않는 것, 즉 현재 누리는 '자유' 중에서 포기할 각오가 된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을까? 우리는 커피를 원하지만, 우유나 크림이 없는 커피를 원할까? (국가가 없는 자유? 사유재산이 없는 자유? 등)  235

우리에게 위기가 임박했다고 설득하려는 생태학자에 대한 유일하게 적잘한 답변은 그의 필사적인 설득의 진짜 타깃은 자신의 비(非)신념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대답은 이것이다. "걱정 마, 재앙은 반드시 닥칠 거야! 불가능한 일이 이미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어. 하지마 인내심을 가고 지켜봐. 성급한 추측에 굴복하지도 말고, '지금이야! 두려운 순간이 다가왔어!'라고 생각하며 도착적인 기쁨에 빠지지도 마." 생태학에서 이런 종말론적 환상은 다양한 형태를 띤다. 예를 들어, 지구 온난화로 수십 년 내에 모두 물에 잠길 것이라거나, 유전자공학이 인간의 윤리와 책임의식의 종말을 의미한다거나, 벌들이 곧 멸종하고 전 세계적인 기아가 뒤따를 것이라는 등. 물론 이 모든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이러한 주장에 현혹되거나 거짓된 죄책감과 정의감("우리가 만물의 어머니인 대지를 노하게 했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다!")에 빠져서는 안 된다. 대신 냉정한 상태를 유지한 채 '지켜보자.'

'그러나 지켜보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하모가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3:33~37)

계속 깨어 있으면서 무엇을 지켜보라는 걸까?  236-238

프랑스어에는 영어로 정확히 옮기기 힘든, '미래'를 뜻하는 두 단어가 있다. '퓌뛰흐(futur, 미래)'와 '아브니흐(avenir, 장래)'다. '퓌뛰흐'는 현재의 연속선상으 미래로, 이미 존재하는 경향성이 완전히 실현된 것을 나타낸다. 반면 '아브니흐'는 보다 급진적인 중단, 현재와의 단절을 가리킨다. 단순히 '앞으로 될 것(hwat will be'이 아니라 '앞으로 닥칠 것(what to come)'을 의미한다.  240

파국에 맞서 싸우는 방법은 파국적인 '고정점'으로 치닫는 이 표류를 중단시키고, '도래할' 급진적 타자성(Otherness)을 야기할 위험을 스스로 떠안는 것이다. 여기서 "미래가 없다(no future)"는 슬로건이 얼마나 모호한지를 알 수 있다. 좀더 깊이 파고들면, 이 슬로건은 종결 혹은 변화의 불가능성을 의미하기보다, 우리가 쟁취해야 할 것, 즉 파국적 '미래'의 영향을 중단시키고 이로써 '다가올' 새로운 것을 위한 공간을 여는 일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분에 기초하면, 마르크스(와 20세기 좌파)의 문제를 알 수 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너무 이상적인 꿈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미래적'이어서 문제였다. 마르크스가 플라톤에 대해 썼던 말(플라톤의 <국가>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기존 고대 그리스 사회의 이상적 이미지였다)은 그대로 본인에게 적용된다. 마르크스가 구상했던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이상화된 이미지, 자본주의 없는 자본주의, 즉 이익과 착취가 없는 확대 재생산으로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르크스에서 헤겔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를 인도하는 어떠한 숨은 목적론도 없고, 모든 개입이 곧 미지의 세계로의 도약이며, 따라서 결과가 언제나 우리 기대를 좌절시키는 그러한 사회적 과정에 대한 '비관적' 견해로 말이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기존 체계의 무한한 재생산은 불가능하다는 사실뿐이다. .. 중동의 새로운 전쟁이나 경제적 혼란, 이례적인 환경 참사는 우리 곤경의 기본 좌표를 순식간에 바꿔놓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열린 가능성을 충분히 수용하면서, 미래가 보내는 모호한 징후에 의거하여 스스로를 익르어가야 한다.  24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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욤비 씨는 콩고의 문베는 콩고만의 문제가 아니고, 아프리카의 문제는 아프리카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제국주의 시절, 유럽 열강이 심어 놓은 분쟁의 씨앗이 오늘날 아프리카 문제의 뿌리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35


사람들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어떤 공간에서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너무나 다른 이해의 폭을 갖고 살아간다.  209


최종 판결일은 2008년 2월 20일.

드디어 2월 20일 아침이 밝았다. 선고는 오전 10시였다. 김종철 변호사와 아브라함이 함께 내곁을 지켜 주었다. 순서를 기다리는 사이 옆자리에 앉아 있던 김종철이 내 손을 한 번 꽉 잡았다. 아브라함이나 김종철이나 나만큼 긴장하며 또한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판사가 내 사건 번호와 이름을 호명했다. 

"이번 사건은 원고 승소하였습니다."

"와!"

옆에 있던 김종철 변호사와 아브라함이 소리를 지르며 나를 얼싸 안았다. 

'내가 이겼다. 아니, 우리가 이겼다!'

그 순간 우린느 한 형제나 다름없었다. 법정인 것도 잊었고, 창피한 것도 잊었다. 함께 얼싸안고 눈물을 쏟았다.

해맑게 웃는 아내의 얼굴과 라비, 조나단, 파트리시아가 기뻐서 펄쩍 뛰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보, 애들아! 우리 이제 만날 수 있겠구나.'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238-239


내가 [피난처] 사람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가 있다. 난민을 도와주는 건 좋지만 난민에 관한 정보는 그 누구와도 공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꼭 필요할 경우에는 먼저 난민에게 정보를 제공해도 될지 물어보는 게 순서라고 얘기했다. 선의로 시작한 일이 늘 선의로 끝나지 않는 게 난민들의 세계다.  268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를 알아가고 한국 역사를 공부하면서, 한국과 콩고가 비슷한 점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한국이 오랜 세월 일본의 식민지였던 것처럼 콩고도 벨기에에 의해 철저하게 수탈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두 국가 모두 내전과 쿠데타, 독재 저권을 경험했다.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역시 주요한 '난민 발생국'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 사람 대부분이 전쟁 난민이었고, 세계 각지에서 지우너의 손길을 받았다. 그중에는 <유엔난민기구>와 유사한 <유엔한국재건단(UNKRA)>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불우했던 과거는 잊혀졌다. 지금의 한국을 보면서 50년 전의 한국을 떠올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 짧은 기간 동안 한국은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278


왜 난민은 더 나은 삶을 꿈꾸먄 인 되는가? 왜 난민은 배움의 열망을 충족시킬 수 없는가? 나는 일자리를 얻고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냐고 충고하는 친구들에게 도리어 묻고 싶었다.

배워야겠다는 열정은 단지 남들처럼 번듯한 직장을 갖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나는 한국을 배워 콩고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었다. 가족의 안정만큼이나 콩고의 미래도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아이들에게 사고 싶은 것 마음껏 사 주고, 학원도 보내 주고픈 마음이 나라고 왜 없겠는가? 그러나 지금 당장 우리 가족이 조금 여유로워진다고 해서 매년 수십만 명이 죽어 나가는 콩고의 사정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넬리에게 조금만 더 우리를 희생하자고, 한국에서 보내는 시간을 훗날 콩고를 위해 쓰자고 이야기했다. 넬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고 또 미안했다.  280


피부색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하는 일을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298



 - 얼마 전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고 있는 박지성 선수에게 인종차별 발언을 한 축구 팬이 "인종차별금지법"에 따라 영국 검찰에 기소되었습니다. 만약 같은 일이 한국에서 벌어졌다면 어땠을까요?  302



나는 나처럼 운 좋은 난민이 다시 없기를 바란다.  307


난민의 지원은 한 나라의 겨엦적인 수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차라리 인권 의식이 어느 정도냐의 문제와 더 관련 있는 것 같아요.  323




욤비 : 한국은 외국인이 설 자리가 없는 나라예요. 한국인이 좋아하는 외국인은 따로 있죠. 돈을 가지고 있는 외국인, 투자하러 온 외국인들이요. 그래서 투자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만 신경을 쓰죠. 나머지 사람들, 특히 우리 같은 유색인종 사람들은 사람대접을 못 받아요.  325


욤비 : 이 책, 책에 담긴 이야기, 책에 있는 말들이 나만의 책, 나만의 이야기, 나만의 말이 아니라는 걸 사람들이 알아주면 좋겠어요. 이 책은 한국에서 살아가는 난민들의 이야기예요. 우리는 크든 작든, 비슷한 고민, 비슷한 어려움, 비슷한 고통 속에 삽니다. 그중에서 나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어요.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그들에게서 값진 사랑을 배웠으니까요. 대부분의 난민은 어쩌면 나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난민이 된다는 건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아니에요. 난민은 또 난민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슬프게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닥쳐 난민이 됐을 뿐이에요. 이런 일은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피해자들을 보세요. 여러분이 세계 초강대국의 국민이라 할지라도 어느 날 부지불식간에 난민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난민은 불쌍한 사람도, 죄를 지은 사람도 아닙니다. 난민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1980년 5월 18일에 한국인들이 독재에 맞서 '아니오'라고 외치며 들고 일어섰듯이 난민 역시 자유를 위해, 권리를 위해, 자기 자신이나 가족보다 더 소중한 다른 가치를 위해 당당하게 '아니오'라고 말한 사람들입니다.  327-328



<유엔난민기구> 통계에 따르면 2011년 전 세계 평균 난민 인정률이 약 30%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2011년 1,011명이 난민 신청을 했고, 그중 340명만이 난민 심사를 받았으며 그 가운데 47명만을 난민으로 인정했습니다. 난민 인정률이 13%에 불과한 것이죠.  333


우리에게는 난민을 보호할 '법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6조에서는 정부가 비준한 조약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이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1992년 난민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난민협약"을 비준했습니다. 그러니 난민들을 위한 적절한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의 의무입니다.  337-338


난민 제도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난민의 사회 통합입니다. 여기서 통합이란, 자신이 문화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한 사회의 핵심 가치를 수용해 적응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통합은 한 사회의 문화를 더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들어 줍니다. 

난민의 사회 통합을 이야기하려면 우선 난민에게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보장해 줘야 합니다.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시혜의 객체에 머문다면, 난민들은 한국 사회에 섞일 기회를 얻지 못하고 영원히 자신들만의 공동체에 머물 것입니다. 난민들이 자율적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차단당한다면, 그들은 한국 사회에 통합하려는 어떠한 동기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사회 통합의결정적인 계기란 개인적인 관계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환대의 마음으로 난민을 대하고 난미의 친구가 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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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60만권이나 팔렸다는 이 책은 그렇게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자기계발서나 실용서가 아니다. 역사책도 아니다. 소설도 아니다. 
이 책은 철학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중에 '이러한 책이 어떻게 많이 팔릴 수 있었을까?'였다.
내용이 재미있고 없고를 떠나서 쉽게 읽기 어려운 책을 많은 사람이 보았다는 것이 핵심이다.
하버드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라는 부제 때문일까?
단순하게 정의(Justice)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였을까...
출판사의 과감하면서도 자극적인 마케팅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이 책은 철학적인 내용..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 자유지상주의, 존 스튜어트 밀, 칸트, 존 롤스, 아리스토텔레스...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각들을 토대로 정의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생각들과 함정들과 잘못들, 그리고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들에 대해 거론하고 있다.

책이 유명해지고 EBS에서 마이클 샌델 교수의 하버드 강의 수업동영상을 방송하기도 하였다. 

과연 정의란 무엇일까...
우리는 정의란 것을 영웅들이 나오는 영화들에서 종종 접하게 된다.
그렇기에 정의롭다는 것은 약자를 도와주는 느낌이 들기도 하다.  그렇다면 사회적 약자들을 도와주는 것만으로 정의가 실현되는 걸까.. 사회 구조 자체의 인식이 인간으로서 우리가 공동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샌델 교수의 말이 정의일까..
이 책의 서두에서 부터 시작하는 가장 큰 세 가지 줄기 '행복, 자유, 미덕' 중에 하나로 선택될 수 있을까...

책에서는 정의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다만 샌델 교수의 방식대로 우리가 생각해보는 것들에 반박들을 통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통해 각자가 어느정도 정의를 실현하게 되기를 바라는 걸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 지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그렇기 위해서는 자유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공동체로서의 미덕을 유지해야만 가능할 것이다. 
사실 이것들 외에도 우리에게는 여러가지가 더 필요할 것이다. 
하나의 단편적인 사실만으로 모든 결정을 내리지 말고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통해 우리는 한발 더 나아갈 것이며, 좀더 나은 세계를 꾸려 나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허리케인 찰리가 지나간 뒤에 일어난 가격폭리 논쟁은 도덕과 법에 관한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재화와 용역을 판매하는 사람이 자연 재해를 이용해, 시장이 견디기만 한다면 어떤 가격을 불러도 상관없는가? 이때 법이 조금이라도 힘을 쓸 수 있다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가격폭리 금지가 구매자와 판매자의 자유로운 거래를 방해할지라도 주정부는 가격폭리를 금지해야 하는가?  16
가격폭리처벌법에 찬성 또는 반대하는 주장은 세 가지 항목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행복 극대화, 자유 존중, 미덕추구이다. 이 셋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정의를 바라본다.  17

고대의 정의론은 미덕에서 출발하는 반면 근현대의 정의론은 자유에서 출발한다.  21
민주 사회에서의 삶은 옳고 그름, 정의와 부정에 관한 이견으로 가득하게 마련이다.  
공적인 삶에서 도덕문제를 놓고 열정적이고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도덕적 신념이 이성과는 무관하게 가정교육이나 신앙으로 정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44

혼란의 힘과 그것을 정리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것이 바로 철학의 출발점이다.  45

도덕적 사고란 혼자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노력해 얻는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46
독자들이 정의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고민하게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47

구명보트 사건을 바라보는 두 사고방식은... 어떤 행위의 도덕성은 전적으로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에 달렸다는 시각이다.... 도덕적으로 볼 때, 결과가 전부는 아니라는 시각이다.  54
공리주의의 핵심은 도덕의 최고 원칙은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 쾌락이 고통을 넘어서도록 하여 전반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는 주장.  55
공리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약점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직 만족의 총합에만 관심을 두는 탓에 개인을 짓밟을 수 있다.  58
밀은 쾌락과 고통이 전부라고 주장하면서도, "더 바람직하고 더 가치 있는 쾌락이 있다."고 덧붙인다.  79
밀은 가장 뛰어난 사람도 "더러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고급 쾌락을 제쳐두고 저급쾌락을 사실을 인정한다.  81
욕구는 더이상 무엇이 고상하고 무엇이 저급인지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못 된다.  82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규제 없는 시장을 옹호하면서 정부 규제에 반대하는데, 그 명분은 경제 효율성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다.  89
로버트 노직은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1974)에서 자유지상주의 원칙을 철학적으로 옹호.. 노직에 따르면, 경제 불평등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는 분재 정의가 구현되려면 두 가지 필수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초기 소유물에 구현된 정의이고, 또 하나는 소유물 이전에 구현된 정의다. 
첫 번째 조건은 돈을 벌 때 사용한 자원이 애초에 합법적인 소유물이었는가를 묻는다. 두 번째 조건은 시장에서 자유로운 교환으로 또는 다른 사람이 자발적으로 건네준 선물로 돈을 벌었는가를 묻는다.
두 질문에 모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면 현재의 소유물을 가질 자격이 있으며, 국가는 소유자의 동의 없이 그것을 빼앗을 수 없다.  92-93

자유시장 옹호는 전형적으로 두 가지 주장에 근거한다. 하나는 자유에 관한 주장(자유지상주의자)이고, 또 하나는 행복에 관한 주장(공리주의자)이다.  111

도덕철학자인 엘리자베스 앤더슨(Elizabeth Anderson)은 (대리출산관련내용에서) 핵심은 재화라고 해서 다 같은 재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모든 재화의 가치를 이익의 수단의나 물건의 효용만을 따져 평가해서는 안 된다. 주장.  138

이마누엘 칸트는 의무와 권리에 대해서 우리는 자신을 소유한다거나 우리 목숨과 자유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주장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우리는 존중받아야 하는 존엄성을 지닌 이성적 존재라는 생각에 기초한다.  148
칸트는 쉰일곱이던 1781년 <순수이성비판>을 출간하고 4년 뒤에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를 출간하면서 공리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149
자유에 대한 그의 설명은 정의를 주제로한 오늘날의 논쟁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이 책 도입주에서,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을 구별해 소개했다. 그중 하나가 공리주의 시각으로, 이에 따르면 정의의 개념을 규정하고 무엇이 옳은 일인가를 결정하려면 사회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두 번재는 정의를 자유와 연관시키는 시각으로, 자유지상주의자들이 관련 예시를 제시한다. 이들은 소득과 부의 공정한 분배란 규제 없는 시장에서 재화와 용역의 자유로운 교환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시장을 규제하는 행위는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기에 부당하다. 세 번째는 정의란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받는 것, 즉 재화를 분배해 미덕을 포상하고 장려하는 것이라는 시각이다. 
칸트는 첫 번째 시각(행복 극대화)과 세 번째 시각(미덕 장려)을 거부한다. 정의와 도덕을 자유와 연관시키는 두 번째 시각을 열렬히 옹호한다.  150
칸트는 공리주의를 거부한다. 공리주의는 권리를 따질 때도 최대 행복에 기여하는지 계산기를 두드려보는 탓에 권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151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그를 선하게 만드는 거소가는 사뭇 다른 일이며, 이익 추구에 신중하거나 약삭빠르게 만드는 것은 덕이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순수 실천 이성'을 연습하여 도덕의 최고 원칙에 도달할 수 있다.  152
그는 우리가 이성적 동물일 뿐 아니라 지각력 있는 동물이라고 말한다. 칸트가 말하는 '지각력'이란 감각과 느낌에 반응하는 능력이다.  153
칸트는 기호를 충족하는 행위를 문제삼지 않는다. 다만 이때 우리는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이미 결정된 내용에 따라 행동할 뿐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내가 선택한게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욕구일 뿐이다.(아이스크림 선택문제에서.. 쵸코 바닐라 딸기)  154
칸트는 '타율'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가 타율적으로 행동한다면, 내 밖에 주어진 결정에 따라 행동한다는 뜻이다.  155
우리가 자율적으로, 즉 자신에게 부여한 법칙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행동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저 밖에 주어진 목적의 도구가 되지 않는다.  156
칸트에 따르면,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는 그 결과가 아니라 동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동기이며, 그것은 특정한 종류라야 한다. 중요한 것은 옳은 일을 하는 것이며, 그 이유는 옳기 때문이라야지, 이면에 숨은 동기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  157
옳은 일을 하며 쾌락을 느낀다고 해서 그 행동의 도덕적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는다. 중요한 점은 선행의 동기가 그 행동이 옳기 때문이라야지, 쾌락을 주기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62
칸트에 따르면, 내 의지가 자율적으로 결정될 때만이, 그러니까 내 의지가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지배될 때만이 나는 자유롭다.  165
정언명령 ... 어떤 행동이 다른 것의 수단으로만 바람직하다면, 이때의 명령은 가언명령이다. 어떤 행동이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면, 따라서 이성에 부합하는 의지에 꼭 필요하다면, 이때의 명령은 정언명령이다. ... 칸트가 말하는 '정언'은 조건이 없다는 뜻이다.  167
그는 오직 정언명령만이 도덕적인 명령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68
정언명령의 공식 1. 당신의 행동준칙을 보편화하라.(모순없이)
                       2.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수단이 아니라, 한결같은 목적으로 대하라)  168-171
칸트식 존중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존중이며, 우리 모두에게 비차별적으로 존재하는 이성적 능력에 대한 존중이다.
우리는 상대가 어디에 살든, 우리가 상대를 얼마나 잘 알든, 모든 사람의 인권을 옹호해야 한다.  173
'이성적 존재는 ...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그리고 자신의 모든 행동을 ... 지배하는 법칙을 알 수 있는 두 가지 관점을 갖는다. 첫째, 감각적 세계에 속해 있는 한, 자신이 자연법칙(타율)에 지배된다고 생각 할 수 있으며, 둘째, 지적 세계에 속해 있는 한, 자연법칙과는 독립되어 경험이 아닌 오직 이성을 토대로 한 법에 지배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177
타인이나 우리 자신을 단순히 물건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 자유지상주의의 자기 소유 개념과는 정반대로, 칸트는 우리는 자신을 소유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181

존 롤스는 자신의 저서 <정의론>에서 정의를 고민하는 올바른 방법은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 어떤 원칙에 동의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198
롤스가 생각한 사회계약은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가언합의다.  199
자발적 행위로서 계약은 자율을 표현한다. 계약으로 생긴 의무는 자발적으로 부과한 것이기에 중요하다. 상호 이익을 위한 도구로서 계약은 호혜원칙이라는 이상에서 나온다. 상대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이익에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에 계약을 이행한다. 
현실에서 자율과 호혜라는 이상은 불완전하게 실현된다. 어떤 약속은 비록 자발적이지만 상호이익을 실현하지 않는다. 또 어떤 때는 계약을 하지 않았더라도 호혜원칙을 근거로 내가 얻은 이익에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의무가 생길 수 있다. 여기서 합의의 도덕적 한계가 드러난다. 즉 어떤 경우엔 합의만으로는 도덕적 의무가 생기지 않고, 또 어떤 경우에는 합의가 반드시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  203
계약의 도덕적 한계 두 가지. 첫째, 동의했다고 해서 그 합의가 공정하다는 보장은 없다. 둘째, 합의만으로는 도덕적 의무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204
한쪽으로 치우친 거래는 상호 이익과는 거리가 멀어서, 아무리 자발적인 거래라도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다.  205
정의에 관한 자유지상주의 이로노가 능력 위주 이론에서 모두 발견되는 도덕적 임의성이라는 오점에 주목하면, 평등주의를 더욱 강조하는 개념이 아니고서는 어느 것에도 만족할 수 없다고 롤스는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대체 어떤 개념일까? 교육 기회 불평등을 수정하는 것과 타고난 재능 불평등을 수정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어떤 주자가 다른 주자에 비해 빠르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면, 그 빠른 주자에게 납덩이 신발이라도 신겨야 하는가? 평등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능력 위주 시장사회의 유일한 대안이라면 재는 있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어 강제로 평등을 달성하는 일뿐이라고 말한다.  217
롤스가 내 놓은 대안은 차등원칙이라 부르는 것으로, 재능 있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으면서 재능과 소질의 불공정한 분배를 바로잡는다. 어떻게? 재능 있는 사람을 격려해 그 재능을 개발하고 이용하게 하되, 그 재능으로 시장에서 거둬들인 대가는 공동체 전체에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가장 빠른 주자에게 족쇄를 채우지 말고 최선을 다해 달리게 하라. 단, 우승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재능이 부족한 사람드로가 함게 나누어야 한다는 점을 미리 알려준다.  218
롤스는 차등원칙도 격려 차원의 보상금으로 생긴 소득 불균형은 허용한다고 말한다. 단, 그 격려금은 매우 어려운 환경에 놓인 살마들의 운명을 개선하는 데 쓰여야 한다.  220
<정의론>에서 '재능이 분배되는 방식과 사회 환경의 우연성이 부당하다는 이유로 제도를 강제하는 것은 언제나 문제가 있게 마련이며, 그러한 부당함은 인간의 합의에도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 더러 부당함을 간과하는 구실로도 이용되는 그 주장은 부당함을 묵인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와 똑같이 취급한다. 자연의 분배 방식은 공정하지도, 불공정하지도 않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 놓이는 것 역시 부당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타고나는 요소일 뿐이다. 공정이나 불공정은 제도가 그러한 요소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생겨난다.'
롤스는 우리가 그러한 요소를 다룰 때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고" "우연히 주어진 선천적이거나 사회적인 환경을 [자신을 위해] 이용하려면 그 행위가 반드시 공동의 이익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자고 제안한다. 롤스는 좀더 평등한 사회를 옹호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임에 분명하다.  230-231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론의 핵심은 두 가지 인데,
1. 정의는 목적론에 근거한다. 권리를 정의하려면 문제가 되는 사회적 행위의 '텔로스(telos : 목적, 목표, 본질)'를 이해해야 한다.
2. 정의는 영광을 안겨주는 것이다. 어떤 행위의 텔로스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거나 논한다는 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 행위가 어떤 미덕에 영광과 포상을 안겨줄 것인가를 추론하거나 논의하는 것이다.  262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가 중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의에 관한 논쟁은 영광, 미덕, 그리고 좋은 삶의 본질에 관한 논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262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인가? 능력이나 자격의 근거는 무엇인가?  263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권력을 요구하는 주요한 두 세력을 비난한다. 과두정치를 행하는 독재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정치의 목적은 시민의 미덕을 키우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는 그보다 숭고한 행위인 좋은 삶을 사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정치의 목적은, 사람들이 고유의 능력과 미덕을 개발하게 만드는 것, 즉 공동선을 고민하고, 판단력을 기르며, 시민자치에 참여하고,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걱정하게 하는 것이다.  271
"도덕적 미덕은 습관의 결과로 생긴다." 행동으로 터득하는 것이다.
"미덕은 우선 그것을 연습해야 얻을 수 있다. 예술이 그러하듯이." 
미덕 갖추기란 플루트를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276
도덕적 미덕이 행동으로 배우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올바른 습관을 키워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는 이것이 법의 일차목표다.
습관은 도덕 교육의 첫 단계다.  277
문제는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정도로, 적절한 때에, 적절한 동기를 가지고, 적절한 방법으로"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습관이 아무리 필수라 해도 도덕적 미덕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늘 새로운 상황이 생기고, 특정 상황에서 어떤 습관이 적절한지 알아야 한다. 따라서 도덕적 미덕에는 판단이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천적 지혜"라 부르는 지식이다.  178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는 적합성의 문제다.  280
정의와 권리에 관한 논쟁은 사회 제도나 조직의 목적, 그것이 나누어 주는 제화, 그리고 영광과 포상을 안겨주는 미덕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법을 만들 때 이런 문제에 중립을 지키려 노력하지만, 좋은 삶의 본질을 논하지 않고는 공정성을 말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289

역사적 부당 행위에 대한 사죄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흔히 내세우는 논리는 앞선 세대가 저지른 잘못을 현 세대가 사죄해서는 안 되며, 사죄할 수도 없다는 내용이다. 사죄는 결국 부당 행위를 어느정도 책임지는 것이며, 내가 하지 않은 행위는 사죄할 수 없다.  297
내 책임은 내가 떠맡은 일에 한정된다는 생각은 자유주의적 사고다.  299
합의와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개념은 오늘날의 정치뿐만 아니라 근현대의 정의론에서도 크게 부각된다.  300
칸트와 롤스는 자신들이 특정한 도덕적 이상을 지지한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선을 이야기하면서 권리를 배제하는 이론에 대항한다. 공리주의도 그중 하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에 관해 사뭇 다른 이론을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선은 쾌락을 극대화하는 게 아니라 우리 본송을 실현하고 인간 고유의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다. 인간의 선을 미리 정해놓고 그것을 바탕으로 추론한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추론은 목적론적이다. 이는 칸트와 롤스가 거부하는 추론법이다.  303
정의는 좋은 삶을 단정하지 않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을 도덕적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지닌 자아로 본다는 뜻이다.  306
선택의 자유는, 공정한 조건에서 이루어질 경우에도, 정의로운 사회의 기초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308
자유주의적 사고에 따르면, 의무는 오로지 두 가지다. 인간이기에 생기는 자연적 의무와 합의에서 생기는 자발적 의무다.
자연적 의무는 보편적이다. 자발적 의무는 보편적이지 않고 특수하며, 합의에서 생긴다.  313



학생들을 딜레마에 빠뜨리는 수업 방식이다.  395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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