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는 <안네의 일기>, 빅토르 프랑클의 <밤과 안개>, 엘리 비젤의 3부작 <밤> <새벽> <낮>과 함께 나찌 독일이 저지른 만행의 진상을 전하는 증언 문학의 대표작으로서 지금도 널리 읽힌다.  22


1987년 4월 11일에 또리노의 레 움베르또(Re Umberto)거리에 있는 자택에서 자살했다.  23


67세의 쁘리모 레비는 아파트 4층 난간을 넘어 아래층의 홀로 몸을 던졌다.  27


생전의 쁘리모 레비와 면식이 있던 타께야마 씨는 "내가 아는 레비는 명랑하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를 지닌 쾌활한 인물로, 눈에는 지적 호기심이 넘치고, 언제나 농담을 즐겨 했다.(...) 그런 그가 돌연 자살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고 회고한다.(<지금이 아니면 언제>의 역자후기)

그 부분을 읽을 때, 내가 바로 머릿속에 떠올린 것은 한나 아렌트의 [우리 망명자들]이라는 글이었다. 그 글은 <파리아(pariah, 차별받는자를 뜻한다)로서의 유대인>이라는 평론집에 수록되어 있다.

'우리 중에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한참 나눈 후, 집으로 가서 가스를 틀어놓거나 마천루에서 뛰어내리는 기묘한 낙관주의자들이 있다. 우리가 선언한 쾌활함이 죽음을 곧바로 받아들일 듯한 위험스러움과 표리일체임을 그들은 증명하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는 생명이야말로 최고의 선이며 죽음이 최대의 공포라는 확신 아래서 자랐는데, 생명보다 지고한 이상을 발견하지 못한 채 죽음보다도 나쁜 테러의 목격자가 되고 희생자가 되었다.'

한나 아렌트가 이 글을 쓴 것은 1943년이었다.  28-29


아렌트는 여기에서 망명 유대인드의 '동화' 지향, '성공' 지향을 비판하고 하이네, 카프카에서 채플린에 이르는 "'의식적 파리아'의 입장을 선호한 유대인 소수파의 전통"을 상기할 것을 주장했다. '파리아'라는 아이덴티티에 입각하여 차별과 억압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모든 '파리아'의 해방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과 통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렌트는 망명 유대인의 자살 충동을 분석하고, "(그들은) 싸우는 대신에 또는 어떻게 하면 저항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대신에, 친구나 친척의 죽음을 바라는 것에 익숙해져버렸다"고 진술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누군가 죽으면 이제야 그 사람이 완전히 어깨의 짐을 벗었구나 하고 쾌활하게 생각하"곤 한다. 결국에는 "자신도 얼마나마 어깨의 짐을 벗을 수 있길 원하게 되고, 그래서 실제로 자살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 표면상의 쾌활함과는 정반대로 그들은 항상 자신에 대한 절망감과 싸운다. 그리고 결국 일종의 자기 본위로 죽음을 선택한다"고 말했다.  29-30


1943년 7월 10일 연합군이 씨칠리아(Sicilia)섬에 상륙하자 이딸리아의 정세는 크게 역전되었다. 7월 25일에 파시스트정권은 내부적으로 붕괴하여 무쏠리니는 실각하고 바돌리오정권이 새로 들어섰다. 바돌리오정권은 독일과 관계를 끊고 연합국과 단독강화의 길을 찾아, 9월 3일 드디어 연합군과 비밀리에 휴전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9월 8일에 그것이 공표되자 독일군은 곧바로 북이딸리아를 점령해 감금되었던 무쏠리니를 구출하고, 그를 옹립하여 가르다(Garda)호반(湖畔 호수호 두둑반)의 쌀로(Salo)를 보넉지로, 흔히 '쌀로공화국'이라 불리는 '이딸리아사회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때부터 반파시즘 운동은 독일 점령군과 그들을 돕는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무장투쟁의 시기로 접어든다.  35


1943년 12월 13일 쁘리모 레비는 스파이에게 속아 산중의 외딴집에 갇힘으로써 어이없이 체포되고 말았다. 부대에 참가한 지 불과 몇 주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38


즉결로 총살된 많은 빨치산과는 다르게, 유대인인 그는 다음 해인 1944년 2월 이딸리아의 포쏠리 디 까르삐(Fossoli di Carpi) 중계수용소에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죽음보다도 나쁜 테러의 목격자"가 되었다.  39


쁘리모 레비는 1919년 7월 31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기사(技師 재주기 스승사)였다. 지적인 중산계급 가정에서 자란 레비는 지역의 명문 마씨모 다젤리오(Massimo D'Azeglio) 고등학교를 나온 후 역시 같은 지역의 또리노대학에 들어가 화학을 전공했다. 무쏠리니의 파시스트당이 정권을 쥔 때가 1922년임을 생각하면, 그는 소년기를 전부 파시스트체제 아래서 보낸 것이다.

''아리아인'이든지 유대인이든지, 나 혹은 우리 세대의 전반에는, 파시즘에 저항해야 하며 또 그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아직 확실하게 의식화되지 않았다.'<주기율>  50-51


레비는 대학의 화학과를 함께 다니던 친구 싼드로 델마스뜨로(Sandro Delmastro)에게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물질에 대항해 이긴다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며, 물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주와 우리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때문에 그때 피나는 노력으로 구명하던 멘젤레예프의 주기율이야말로 한 편의 시였으며, 고등학교 시절 암기해온 어떤 시보다도 장중하고 소중했다. (...)

사물을 생각할 수 있는 인간에게 그 무엇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치욕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모든 독단, 증명 없는 단언, 유무를 대답할 수 없는 명령에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가?' ([철], <주기율>)

쁘리모 레비에게는 화학과 물리학이 파시즘에 대한 대항물이었다. 그것은 '명료하며 하나하나가 증명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60


열여섯 살 때 화학에 심취한 그가 친구와 함께 몰래 전기분해 실험을 하는 이야기가 <주기율>의 [수소]라는 단편에 그려져 있다. 어린 쁘리모는 "부푸는 꽃봉오리나 화강암 안에서 빛나는 운모 그리고 자기 자신의 손을 보고" 마음속으로 부르짖는다.

"이것도 밝혀내고 말 테다. 하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바와는 다른 방법으로 모든 걸 밝혀내고 말 테다. 지름길을 밝혀 낼 테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고 말 테다, 문을 비집어 열어 보이겠어."

'이해'에 대한 간절한 욕망, 그것은 소년 시절부터 변함없이 쁘리모 레비의 생애를 관통하고 있다. 과학정신은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한 무기였다. 그는 비합리적인 정신주의에 대한 경멸과 혐오감을 통해 파시즘에 의한 부식으로부터 자신의 혼을 지켰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아우슈비츠라는 이해할 수 없는 역(逆 거스를 역)유토피아의 세계에 던져졌을 때, 역유토피아를 지상에서 실현한 '독일인'을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이어져갔다.  61


쁘리모 레비의 선조는 1492년 대추방으로 인해 에스빠냐에서 쫓겨난 유대인이며, 남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을 거쳐 1500년경에 삐에몬떼 지방으로 왔다. 그들은 또리노에서 거부당해 삐에몬떼 지방 남부의 농업지대에 정착하며 견직 기술을 도입했지만, "최전성기에도 대단히 수가 적어, 소수파의 상태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73


쁘리모 레비는 또리노를 '진정한 고향'이라고 했는데, 실은 그가 태어난 1919년은 그의 선조 유대교도들이 또리노에서 살도록 허락되고부터 불과 70년 정도밖에 흐르지 않은 싯점이었다. '고향'은 오랜 기간 그들을 계속 거부해왔던 것이다.  74


무쏠리니의 파시스트정권도 당초는 유대인 배격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이딸리아에는 망명 유대인이 유입되었고, 독일에서 압력이 강하게 들어왔다. 무쏠리니 측에서도 독일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할 방침을 정했고, 1937년 11월에 일본, 독일, 이딸리아는 삼국 방공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1938년 9월에 파시스트 정권은 인종법을 제정하여 일련의 반유대 조치를 선포했다.

이 싯점에 이딸리아에는 전인구의 0.1% 전후에 해당하는 약 5만 7천 명의 유대인이 살았다. 그 가운데 약 1만명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망명한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도시에 살았으며, 1만 3700명이 살았던 로마를 필두로 밀라노, 뜨리에스떼에 이어서 쁘리모 레비의 고향인 또리노에는 네번째로 많은 3700명의 유대인이 살았다.  81-82


1939년 6월에 공포된 정부령에 따라서 전문직에 종사하는 유대인은 유대인 고객과 환자만을 상대해야 했다. 또 유대인과 이딸리아인의 결혼을 금지하고, 유대인이 재산 소유, 특히 농지 소유를 제한했다. 1919년 이후에 국적을 취득한 귀화 유대인(쁘리모 레비의 일가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의 국적을 박탈하고, 외국 국적의 유대인과 귀화 유대인에게 1939년 3월까지 재산을 포기하고 이딸리아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1941년 말까지 7천 명의 사람들이 해외로 이주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귀화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이딸리아에서 반유대정책은 불완전하게 실시되었을 뿐이다. 법령은 외견상 독일에서 실시되던 것과 동일할 정도로 철저했는데, 이딸리아 정부는 그 법령을 철저하게 시행할 수 없었다. 실제 이딸리아에서는 유대교도와 기독교도의 '혼합물(混合婚 섞일혼 합할합 혼인할혼)' 비율이 높았고, 상당히 많은 유대인이 군의 장교나 고급관료, 고위정치가 같은 직책에 있었다. 이렇게 유대인이 이딸리아 사회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유대인 박해는 심리적으로도 행정적으로도 곤란한 측면까지 있었다.(<절멸>)  82-83


쁘리모 레비는 자신을 유대인이라기보다 이딸리아인이라고 느꼈을 것이며, 그보다 이성에만 복종하는 '인간'의 일원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보편성 앞에서는 '유대인'인 것이 '주근깨'정도의 차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대학에 입학한 이듬해에 인종법이 공포되자, 기독교도인 학우와 교수는 대부분 쁘리모 레비에게서 멀어져갔다.  84


아우슈비츠는 폴란드 남서부의 고도(古都 옛고 도읍도) 크라쿠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마을이다. 본래 지명은 오시비엥침이지만 나찌 독일이 점령한 후 그와 같은 독일식 지명으로 개칭했다.  93


'아우슈비츠'라는 말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 마을과 그 주변 지역에 위치한 45개 강제수용소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아우슈비츠'는 수인의 수용, 노역, 절멸과 같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세 단계에 모두 대응할 수 있는 거대한 수용소복합체였다. ..

1942년 7월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이 이송되기 시작해, 종전까지 폴란드에서 30만 명을 비롯해서 네덜란드에서 6만 명, 프랑스에서 6만 9천 명, 헝가리에서 43만 8천 명 등 다수의 유대인이 이송 수감되었다. 그중 이딸리아에서 이송된 7500명은 이들 중에서도 '소수파'였다.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된 희생자 수는 110만 명 내지 150만 명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그중 90%는 유대인이었다.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될 때, 1백만 벌 이상의 의복, 7톤의 모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구두와 안경이 발견되었다. 그 싯점에 살아남은 수인은 6만 5천여 명, 그 대부분은 철수하는 나찌에 의해서 '죽음의 행진'에 연행되어갔기 때문에 해방된 수인은 약 7천 명에 불과 했다. 쁘리모 레비는 이 행운의 7천 명 중 한 사람이었다.  96-97


유대인 희생자의 총수는 6백만 명이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97


도시 안의 폐쇄된 좁은 지역에 유대인을 몰아넣는 '게토화'정책. ..

바르샤바에서는 1940년 10월 12일에 게토 설치를 명하는 법령이 공포되었다. 게토는 십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벽으로 외계와 완전히 격리되었고, 그로 인해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접촉은 단절되었다. 바르샤바 전역의 2.4%밖에 안되는 좁은 지역에 시 전체 인구의 30%에 해당하는 4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갇혔다.

주거 환경은 콩나물시루 속과 같아서 4인 기준의 방에 보통 10명에서 15명이 생활했다. 게토에 공급되는 식료품은 심하게 제한되었기 때문에 수인들은 기아에 시달렸으며 열악한 위생 상태와 함께 발진티푸스 등의 전염병으로 하나둘 죽어갔다. 사체는 매장할 인력이 없어 며칠이나 도로에 방치되었다.  99


나찌 친위대(SS) 경제관리본부 본부장 오스발트 폴은 1942년 4월 30일 정부령에서 강제수용소에서의 노동을 이렇게 정의한다. "사역(使役 부릴사 부릴역)이란 최고의 생산 상태를 얻기 위해서 말뜻 그대로 '소모'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해 9월 14일 법무장관 티라크가 괴벨스와 회담할 때 이 '소모'라는 말에 주석을 달아 "노동을 통한 절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반제 회의의 서기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증언에 따르면, 회의에서 '문제 해결의 여러 형태', 즉 여러 살해 방법이 솔직하게 토의되었고, 참가자들에게 "진심 어린 동의" 이상의 것을 얻어냈다. 회의는 한 시간 반 이상 걸리지 않았고, 그후에는 음식이 나와서 그들 모두는 점심 식사를 했다. "기분 좋고 조촐한 사교적 모임"이었다.

'아이히만에게 이 회의가 잊힐 수 없는 데는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는 최종적 해결에 협력하기 위해서 이제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이런 피비린내 나는 폭력에 의한 해결'에는 다소 마음속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 의문이 지금 풀린 것이다. "지금 이 반제 회의에서 당시 가장 높은 자리의 사람들이, 제3국의 법왕들이 발언했던 것이다." 히틀러, 하이드리히와 '스핑크스' 뮐러, SS나 당뿐만 아니라, 전통을 자랑하던 국가관료 엘리뜨들까지도 이 '피비린내 나는' 문제에서 서로 선두에 서려고 경쟁하는 것을 그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빌라도가 맛본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에게는 전혀 죄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01-102


영화 <쇼아>에도 등장하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필립 뮐러(Filip Muller)는 특별작업반으로서 사체 처리작업에 종사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가스실에서의 살육 모습은 다음과 같다. 

가장 먼저 몇 알의 치클론 B가 가스실 바닥에서 승화하면, 희생자들은 절규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올라오는 독가스를 피해 도망치려고 힘센 사람은 약한 사람을 때려눕히고, 좀더 살겠노라고 아직 독가스에 오염되지 않은 공기를 찾아서 쓰러진 사람들 위로 올라섰다.

15분 내에 가스실 안의 전원이 사망했다.

약 30분 후에는 문이 다시 열렸다. 사체는 탑처럼 층층이 쌓여 있었고, 앉은 채로 죽은 자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죽은 자도 있었다. 밑에는 아이나 노인의 사체가 있었다. 사체에는 녹색 반점이 있었고, 피부는 핑크빛으로 변해 있었다. 입에 거품을 문 사체나 코피를 흘리는 사체도 있었다. 대소변 배설물로 뒤범벅이 된 사체도 있었고, 임신중이 ㄴ여성 중에서는 출산이 시작된 경우도 있었다.

유대인으로 구성된 특별잡업반이 가스마스크를 착용하고 통로를 만들기 위해 문 근처의 사체를 잡아 끌어낸 후, 사체에 호스로 물을 뿌려, 사체 사이에 남은 독가스를 씻어냈다. 특별작업반은 그런 위에서 비로소 사체를 옮겼다. 

모든 수용소에서 사체의 구멍이란 구멍을 수색해 귀중품을 숨겼는지 확인했고, 죽은 자의 입에서 금니를 뽑았다.  105-106


약 9백만 명의 유럽 유대인 중 3분의 2가 살해되었다. 특히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유대인 주민의 9할이 살해되었다. 

특정한 인간 집단에 대한 이 특이하고 철저한 절멸정책은 오늘날 주로 '홀로코스트'라 불린다. 그 어원은 구약성서에 기술된 "구워서 신전(神殿 귀신신 대궐전)에 바치는 희생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라고 한다. 또한 최근에는 '대파괴, 파멸'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쇼아'가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107


레비의 팔에 새겨진 번호는 174517 이었다.

"수인번호에는 유럽 유대인의 말살 과정이 요약되어 있다." 10000부터 80000까지의 수인은 폴란드의 게토에서 몇 안되는 생존자였고, 119000부터 117000은 그리스의 쌀로니까(Salonica) 출신자였던 것이다. 이딸리아 유대인은 174000번대의 번호를 받았다.  117


인간이 어떻게 이토록 잔혹할 수 있을까?

인간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같은 잔혹함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을까?  137


'아우슈비츠'가 비교 불가능한 '유일무비(唯一無比 오직유 한일 없을무 견줄비)'의 사건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아우슈비츠'는 '비교 가능'한 사건이다. 비교 후에 도출된 대답은 그것이 과거 인간 또는 인간사회의 제도가 보여줄 수 있었던 냉혹함과 잔인함의 극한적 실례라는 것이다.  138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 따라서 내일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얼굴을 씻고 이를 닦는다. 자기 자신에게 규율과 질서를 부과하고 자기 생활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 때문에 노예보다 못한 신분으로 추락하더라도 '덕과 지'를 구하는 것이다. 단떼를 상기하고, 오디쎄우스처럼 끝없는 고난의 항해를 이겨내려고 하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금 지옥에서 인간세상으로 생환하여 증언하기 위해서.  155


장 아메리(Jean Amery)의 본명은 한스 마이어(Hans Mayer)라고 한다.  157


벨기에에서 추방된 유대인 2만 5437명 가운데 약 2만 3천 명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아메리는 불과 615명의 생존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전후에는 오스트리아 국적을 회복했지만, 브뤼쎌에 계속 거주하며 저술가가 되었다. 본명인 마이어(Mayer)의 철자를 바꿔서 아메리(Amery)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55년부터다. 1976년에 <자신에게 손을 내밀며 - 자살에 대해서>를 간행하고 그 2년 뒤인 1978년 10월 16일 잘츠부르크의 한 호텔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

쁘리모 레비에게 아메리의 자살은 틀림없이 대단히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159


아메리는 말한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수용소에 없다. 오히려 어떻게 죽을까 생각한다. 가스실에서 독가스의 효과가 나타나는 데 걸리는 시간에 대해서 논쟁하거나, 페놀 주사에 의한 죽음의 고통을 추측하여 서로 대화하거나 하는 등.  161


1944년 크리스마스도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쁘리모 레비가 있던 모노비츠 수용소의 수인들은 점호를 받기 위해 광장에 정렬했다. 

투광기의 빛과 나무틀 교수대, 그런 도구들과 잔인한 의식은 그들에게 이미 낯설지 않았다. 쁘리모 레비는 그때까지 열세 차례나 교수형 장면을 목격했다. 예전에는 교수형이 보통 사소한 범죄나 주방에서의 절도, 태업, 탈주 등에 대한 징벌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공개 처형의 희생자는 비르케나우의 소각로를 파괴한 반란 집단의 일원이었다. 이 반란은 가스실에서 사체 처리를 강요받았던 유대인 특별작업반 340명이 감행한 것이었다. 머지않아 자신들도 처분될 거라 확신한 그들은 몇 개월 동안 준비해 경기관총 한 정, 권총 몇 정, 수제 폭탄, 톱, 도끼, 쇠지렛대, 호미 등을 가지고 1944년 10월 7일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제4소각로에 방화하고, 제2소각로의 설비를 파괴한 후 철조망을 절단하여 도주를 기도했다. 그러나 반란은 나찌 친위대의 공격을 받고 250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결국 실패했다. 그날 밤, 또다시 2백 명의 유대인이 사살되었다. 친위대 쪽 희새자는 세 명이었다. 이 사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역사에서 유일한 무장 저항이었다.(<절멸>)  175-176


우리 생존자들은 진정한 증인이 아니다. .. 우리는 극히 적을 뿐만 아니라 이례적인 소수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눈속임이나 요령 혹은 행운에 의해서 심연의 바닥까지 가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이다.(<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  178


츠베땅 토도로프는 쁘리모 레비가 시달리던 수치의 감각을 '기억으로서의 수치' '살아남은 자의 수치' '인간이라는 수치'등 3단계에 걸쳐 분석한다. ...

저항의 의지조차도 전면적으로 파괴된 굴욕의 기억, 자신은 '카인'이라는 자기 고발. 증인으로 자신이 적격한지를 둘러싼 의혹(하지만 궁극적으로 '진정한 증인'은 죽은 자이며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자기 자신도 인간이라는, 수치심을 느껴야 할 종족의 일원이라는 생각... 이렇게 몇 겹으로 쌓인 수치의 감각이 자신의 몸을 갉아먹어가자 쁘리모 레비는 자신의 몸을 '심연의 바닥'에 내던진 것일까?  178-179


왜 아우슈비츠의 생존자가 '인간이라는 수치'에 시달려야 했을까? 수치스러움을 모르는 가해자의 수치까지도 피해자가 고스란히 받아서 시달려야 하는, 이 부조리한 전도가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

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은 인간 이하'라는 사상에 희생된 까닭에, 그 사상을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대치해야 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독일인'도 물론 '인간'에서 예외는 아니다. 한번 파괴된 '인간'이라는  척도를 재건하려고 하는 한, '인간'이 저지른 죄는 어김없이 그들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181-182


싸르트르의 이런 말이 떠올랐다. 알제리 해방전쟁중에 프랑스군이 알제리에서 자행한 고문이나 잔학 행위를 고발한 글의 한 부분인데,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적을지도 모른다.

'언제 어디서라도 그리고 어떤 안전책을 두더라도 모든 국민이, 인류 전체가 비인간적인 것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실제 우리가 왜 인간이 되기 위해서 혹은 계속해서 인간의 위치에 있기 위해서 크게 괴로워하는 걸까? 비인간적인 것이 바로 우리의 진실이 되는 것이다. (...)

음침하며 허위에 가득 찬 그런 생각들은 모두 '인간은 비인간'이라는 동일한 원리에서 나온다([하나의 승리] <상황들>)  184


바르똘로뮤 라스 까싸스가 쓴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서>.

그들은 누가 단칼에 몸을 정확히 두 동강 낼 수 있는지, 누가 일격에 머리를 잘라낼 수 있는지, 내장을 파열시킬 수 있는지 등의 내기를 했다. 그들은 어머니에게서 젖먹이 아이를 빼앗아 그 아이의 다리를 잡고서 바위에 머리를 내려치기도 했다. (...)

그리고 그들은 겨우 발이 땅에 닿을 정도의 커다란 교수대를 만들고, 다른 방법도 있으련만 자신들이 구세주와 12명의 사도를 받들기 위해서라며 항상 13명씩 교수대에 걸고 그 밑에 장작불을 지폈다. 이렇게 그들은 인디오들을 산 채로 구웠다. (...)

보통 그들은 인디오들의 영주나 귀족을 다음과 같은 수법으로 살해했다. 땅속에 박아둔 4개의 봉 위에 가느다랗고 긴 봉으로 만든 석쇠 같은 것을 얹어놓고, 거기에 그들을 매달아 그 밑에서 약한 불을 지폈다. 그러면 영주들은 그 잔학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절망하다가 서서히 죽어갔다. (...)

기독교도들은 마치 미친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인류를 파멸로 내모는 사람들이었으며 인류 최대의 적이었다. 비인도적이고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쳐 살아남ㅇㄴ 인디오들은 모두 산속으로 숨거나 다른 방법으로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자 기독교도들은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사냥개를 사납게 훈련했다. 사냥개는 인디오를 한 명이라도 발견하면 순간적으로 그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들'이란 말할 것도 없이 에스빠냐 정복자를 가리킨다.

신대륙으로 건너간 에스빠냐 사람들은 원주민에게 공조(貢租 바칠공 구실조)를 요구하고, 그것이 부족하면 강제노동을 부과했다.  185-186


에스빠냐인은 기독교화라는 미명 아래 아스께까왕국이나 잉까제국을 정복한 후 원주민을 혹사하고 학살했다. ..

라스 까싸스는 1541년 국왕을 알현하고 자신의 견문에 기초한 보고서를 제출하여 정복 중지를 호소했다. 그 보고서를 훗날 가필하여 발간한 것이 바로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서>다. 

라스 까싸스는 이 <보고서>에서 신대륙 도착 이후 40년 동안 1200만 명 내지 1500만 명의 원주민이 희생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 그 희생자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미증유의 제노싸이드(대학살)였음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 또한 기독교화되지 않은 원주민은 인간 이하라는 사상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86-187


대서양을 넘어 신대륙으로 '이송'된 아프리카인의 수는 1200만 내지는 2천만 명이라고 하지만, 이 숫자도 지금은 확정 불가능하다. 더구나 거기에는 노예사냥 도중에 죽은 사람이나 항해주엥 죽어서 바다에 버려진 사람들의 수는 포함되지 않았다(<신서 아프리카사>)  189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는 '일부 인간은 인간 이해'라고 하는 사상, '인간은 비인간이다'라는 원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는 한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2


소련군에 의해 해방된 그는 이딸리아인 수인이나 포로 들과 함께 전쟁 말기의 오랜 혼란기 내내 폴란드와 소련의 영토 내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리고 거의 8개월 후에야 비로소 특별열차로 루마니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그리고 독일 영토를 거쳐 이딸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환까지의 혼돈과 권태의 시간, 그 부조리하며 축제 갇기도한 나날을 그린 작품이 쁘리모 레비의 두번재 작품 <휴전>이다.  198


<주기율>의 [바나듐]이라는 단편에 ..

레비가 부나에서 실험실에 배치되었을 때, 거기에 출입하던 민간인 주에 뮐러 박사라는 인물이 있었다. ..

뮐러는 착하고 소심하며 정직하면서도 무기력했다. 대다수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당시 자신의 무관심이나 무기력을 무의식 속에서 정당화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직접적인 가해자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나찌의 범죄에 가담하거나 그것의 수혜를 받은 인물이 희생자에게 무거운 말투로 '원수에 대한 사랑'이나 '인간에 대한 신뢰'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안의 천박함, 아니 불쾌감 ..게다가 그가 완고한 나찌였다면 이야기는 간단했을 테지만, 그는 당혹스럽게도 '과거의 극복'을 바란다고 말한다.

'일단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할 준비는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개전의 태도를 확실히 보일 때, 즉 원수임을 포기할 때 가능하다고 밝혔다. 반대의 경우, 계속 원수로 존재하며 고통을 만들어내겠다고 고집할 경우에는 물론 용서해서는 안된다. 그 사람을 옳은 방향으로 고치려고 노력하고, 그 사람과 토론하는 것은 가능하지만(그래야 한다!),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 현실에서는 무장 집단이 존재했고, 아우슈비츠를 만들었으며, 정직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은 그것을 위한 정지(整地 가지런할정 땅지)작업을 했다. 그 때문에 아우슈비츠에 대해서 바로 모든 독일인에 그리고 인류 전체에 책임이 있으며, 아우슈비츠 이후 무기력한 것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레비가 뮐러의 만나자는 요청에 답하기 위해서 쓴 편지의 초안이다....

결국 이 편지를 우체통에 넣지는 못한다. 뮐러에게서 뜻하지 않게 전화가 걸려 와 만날 약속을 했는데, 그러자마자 그가 병사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세계는 여전히 단절된 그대로였다. 그뿐만 아니라 단절은 점차 절망적인 것이 되었다. 저편과 이편은 '사랑'이나 '인간'이라는 말의 의미조차 서로 통하지 않은 것이다.  200-206


나도 뮐러와 같은 일본인을 자주 만난 적 있다.

일본에는 예전부터 그때는 '시대'가 좋지 않았고 '전쟁'은 그런 것이며, 일부의 '광신적 군인'이 폭주한 것이지 국민도 천황도 이 '사실을 몰랐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조선의 식민지 지배에 관해서는 일본이 아니었으면 러시아가 그렇게 했을 것이라며, 결과는 불행했지만 일본은 뒤처진 조선인을 일본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했고, 그 '선의'는 인정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편다. 하지만 나의 '뮐러'는 이 타입이 아니다.

나의 '뮐러'도 또한 내게 "왜 그렇게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까?"라며 일견 성실한 듯 보이는 둔감함으로 묻곤 한다. 혹은 "왜 그러헥 화난 겁니까?"라든가 "왜 슬퍼하는 겁니까?"라든가... 그들은 자기 자신도 그 불안과 분노 그리고 슬픔의 원인과 관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대개 자신을 휴머니스트이며 평화 애호가라고 굳게 믿고 있다. 서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면, 한국에 여행한 적이 있다는 둥 친한 친구 중 '재일(조선인)'이 있다는 둥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자신은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둥 자신은 '재일일본인'이라는 둥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다도 좀 있으면 '도대체 언제까지 사회하면 되는 걸까요?'라는 흔한 질문을 슬쩍 던져본다. 그리고 이쪽이 무언가 말하려 하기 전에 지금은 '국제화' 시대이기 때문에 서로 '미래지향적'으로 '공생'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며 공소(空疎 빌공 트일소)한 키워드를 늘어놓는다. 

'뮐러와 같은 일본인'이라고 했지만 재일조선인 중에소 '뮐러'는 있다. 이 '뮐러'들은 한목소리로 '공생'을 위해서는 서로 '원한(ressentiment)'을 버릴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혼화한 어조로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들은 미리 자신들을 '원한'등과 같은 비생산적인 감정을 초월한 이성의 높은 위치에 두고, 어느새 이쪽의 위치에 저급한, 보복 감정을 지닌, 비이성적인 사람들이라는 레테르를 붙인다. 나는 조선인이 일본인에게 '원한'을 품는 이유를 얼마든지 댈 수 있지만, 그와 반대의 경우는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서로'라는 말이 어쩐지 수상쩍기만 하다. 이와 같이 그들은 실제 '증오'의 원인이 된 역사적, 사회적 현실을 개선하려고 하기는 커녕 가해자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들고, 상처를 치유할 수 없는 피해자에게 은근한 어조로 과거를 잊어버리라고 강요한다.  206-208


'죄'는 법적 개념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과 관련된다." 그와 다르게 정치 공동체의 성원이라면 누구나 짊어져야 할, 정치적 의미에서의 '집단적 책임'이 있다. 바꿔 말하면 '독일인'이라는 집단 중에서 '죄'를 지은 개인은 있지만 '독일인' 전체에 '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독일인 전체의 죄'라는 생각은 오히려 죄를 지은 개인을 은닉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독일 국민이라면 누구나 독일이라는 정치 공동체의 행위에 '집단적 책임'이 있는 것이다.  212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의 권말에 젊은 독자와의 문답이 실려 있다. 거기에서 "독일인은 몰랐나요?"라는 물음에 레비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대다수 독일인은 알지 못했다. 그것은 알고 싶지 않았고 무지의 상태로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행사하는 테러리즘은 분명 저항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무기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독일 국민이 전혀 저항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 일반 독일 시민은 무지한 채 안주하고, 그 위에 껍질을 씌웠다. 나찌즘에 동의한 것에 대한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무지를 이용한 것이다. 눈, 귀, 입을 모두 닫고 눈앞에서 무엇이 일어나든지 상관하진 않았다. 때문에 자신은 공범이 아니라는 환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220-221


그는 '독일인'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우슈비츠에서 해방된 지 20년 이상이 지나 유령처럼 나타난 뮐러, 정직하고 무기력한 평균적인 독일인인 그는 '과거의 극복'을 말하는 한편, I.G. 파르벤을 변호하고 유대인이 학살된 사실은 "몰랐다"고 한다. 부나에 있으 ㄹ때조차 유대인인 레비에게 "왜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느냐?"고 물은 인물이었다. 말살의 위협에 노출된 강제수용소의 수인이 매일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측의 사람에게 자신이 왜 불안한지 설명하기를 요구받은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그런 부조리를 전혀 "모른다"고 한다. 그런 인물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227


쁘리모 레비는 생존자들이 두 부류로 나눠진다고 말한다. 첫번째는 잊고자 애쓰면서도 강제수용소의 "악몽에 시달리며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 사람들" 혹은 "제대로 잊고 모든 것에서 벗어나 무(無)에서부터 다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한편 두번재 부류의 생존자들은 "기억해내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며, "그들은 잊으려고 하지 않은 채, 오히려 사회가 망각해가는 것을 경계한다." 물론 레비는 자신을 두번째 부류로 규정했다. 그는 "판사보다 증인이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이 보고 견뎌 이겨낸 것을 증거로 가지고 돌아오는" 일이 자신의 '의무'였다고 거듭 밝히고 있다.(<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  242


수용소에서 쁘리모 레비를 매일 밤 고통스럽게 한 악몽은 현실이 되었다. '이편'으로 살아 돌아와보니 사람들은 오디쎄우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옥은 이미 종교적인 신념이나 몽상이 아니라, 집과 돌 그리고 나무처럼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누구 하나 그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파리아로서의 유대인>)  244-245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는 '인간'이라는 이념이 보편적으로 공유된 단순 명쾌한 세계가 아니다. 단절되고 금이간 세계다. 여기에서 '인간'이라는 말은 단절을 숨기는 미사여구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단절 속에서 온몸으로 떨쳐 일어난 증인들이 '인간'의 재건을 위해서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이편'의 사람들은 보신이나 자기애 때문에, 천박함과 나약함 때문에, 상상력의 빈곤함과 공감대의 결여 때문에 증인들의 모습을 바로 보지 않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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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위한 학문인 인문학을 알아가는 것은 어쩌면 인간으로 태어나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인간과 인간이 어울려 살아가고 소통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인간이 인간은 이해하고 살아간다는것은 매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엄청난 발전의 속도 속에 그것에 허덕이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어쩌면 별 생각없이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이라고 하면 누구나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인문에서의 생각은 생활에서 무의식속에 이루어지는 단순한 선택에 의한 생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좀더 깊이있는 생각 공감하고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는 생각, 그것은 쉽게 이루어 지지 않으며, 그것이 가능해 지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인문학이 필요할 것이다.
흔히 말하는 '문사철' 문학과 역사와 철학..
인문의 틀이다. 세 가지에 대한 고루한 지식이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는 한 분야라도 고려해 보는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그 점에 대해 이 책은 잘 정리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인문학의 어려움을 기본적인 지식의 부족에서 시작하는데, 저자는 15개 테마의 기본지식을 고려하고 있다. 표현대로 하자만 '바탕지식'이다.
기본적인 틀을 알고 깊이 있게 가자는 주제로 15개의 바탕지식을 설명하고 있다.
인문학에 대한 전체적인 흐름을 보지 않은 나로서는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었다.
물론 체계적인 강의나 토론회가 아니라면 모든 테마를 두루 살피기는 그것도 개인적으로 살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바탕지식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관심있는 테마들을 하나씩 선정하여 알아가면서도 이웃테마들을 함께 생각해 보게 하는 면에서 도움이 많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이 세상 어느 지식 하나 인문학이 아닌 것이 없다. 어느 분야 하나 인간을 위하지 않은 지식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5

서양인을 만난다면 그들 문화를 형성해온 두 기둥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즉, 그리스 로마 신화, 그리스 철학과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14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는 <새로운 미래가 온다>에서 21세기에 요구되는 중요한 능력으로 'High Concept'(창의성)과 'High Touch'(좋은 인간관계를 설정하는 능력)을 들고 있다. 
로버트 라이시는 <부유한 노예>에서 다니엘 핑크의 두 인간형을 'Geek'(엉뚱한 사람, 기발한 사람)와 'Shrinks'(사람들의 마음속을 꿰뚫는 사람, 인간을 잘 이해하는 사람)로 표현한다.  15
수학여행의 기원은 18세기 영국 귀족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 영국의 귀족들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가정교사를 붙여 교육에 힘썼고, 소년기를 벗어나면 유럽 대륙으로 수학여행을 보냈다. 기간은 3년으로 프랑스, 독일과 같은 국가들을 돌며 여러 가지 경험과 함께 문물을 배웠다. 이때 꼭 빠지지 않는 것이 지성인들과의 만남이었다.  18

모든 게임의 시초는 전쟁의 역사로부터 비롯된다.  33
사마천은 '대게 서민들은 상대방의 부가 자기 것의 10배가 되면 이를 헐뜯고, 100배가 되면 이를 모서워하여 꺼리며, 1,000배가 되면 그의 심부름을 기꺼이 하고, 10,000배가 되면 그의 노복이 된다. 이것이 만물의 이치다.'라고 말한다.  52

신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한다.  59
동양삼국에 고사성어가 있다면(표의문자), 서양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있다.(표음문자)  65
동양의 고사성어가 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면, 서양의 신화는 인간과 신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69

성경에서는 조직경영의 중요 원칙 중 하나인 'Span of Control(통제범위의 원칙)' 즉 한 사람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사람 수에는 한계가 있다는 원칙이다.  79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 중 가장 중요한 개념은 다름 아닌 연기(緣起)다. 연기의 의미는 나와 다른 이들이 모두 연결되어 우리 모두는 둘이 아닌 하나라는 의미이고, 나아가서는 나와 우주가 하나라는 의미다. 하나는 같은 입장을 의미한다.  158

1997년 영국은 18년 만에 노동당 정권으로 토니 즐레어 총리는 정치 스승인 앤서니 기든스의 주장을 반영해 18년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던 제 2의 길인 신자유주의에 부분적인 수정을 가한다.
규제를 없애 사회 구석구석까지 경쟁체계를 도입해 생산성을 높이고 경제 활력을 높이는 것도 좋지만, 빈곤계층에 대한 안전판을 마련하는 것 역시 사회의 안정과 안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한 것이다. 
신 자유주의에서 약간 방향을 튼 새로운 정책은, 자기 상승의 기회를 확보할 수 있는 교육과 인간적 삶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의료과 같은 부문은 시장에 맡기지 않고 정부가 직접 복지정책으로 관여하는 것이었다.
제1의 길인 복지개념, 제2의 길인 신자유주의에 이어, 제3의 길로 부르는 이 길은 신자유주의와 같은 명확한 개념이 없다.  225
현실적으로 힘을 가진 미국과 같은 나라가 생각을 바꿈으로써 신 자유주의는 방향을 틀 수도 있다. 아니면 신자유주의의 문제점들이 극단적으로 노출되어 호되게 당하고 난 뒤 할 수 없이 방향을 틀 수도 있다.  226
IMF는 2차 대전 직후에 설립된 국제기구인 만큼 당시 국제사회의 패권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국가에 대한 긴급금융과 같은 주요 사안은 85% 이상의 의결을 필요로 하는데, 미국이 바로 절묘하게도 17%의 결정권을 쥐고 있다.  234

16세기 태어나 처음으로 사회계약을 주장한 홉스(1588~1679년)가 개인의 생명보호를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내세웠다면, 로크(1632~1704년)는 한 걸음 더 나가 사회계약의 중심을 재산권보호에 두었다.  243
사회계약이 장자크 루소(1712~1778년)로 넘어가면서 한 단계 더 발전하여 이제부터는 '자유'가 중심 사상을 이룬다.  244

일본의 역사는 나라를 다스리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국가 형태이전(BC1만년~ AD3세기)
2 천황통치시대(4세기~1192년)
3 막부시대(1192~1868년)
4 메이지 유신 이후(1868~현재)    259
전쟁은 기본적으로는 전력 싸움이다. 그리고 그 전력의 바탕은 다름 아닌 지식욕과 학습이다.  273

우리나라 역사는 크게 7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삼국시대 이전( ~BC18년)
2. 삼국시대(BC18~676년)
3. 남북조시대(676~936년)
4. 고려시대(936~1392년)
5. 조선시대(1382~1910년)
6. 국권피탈기(1910~1945년)
7. 대한민국(1945~현재)

중국의 역사는 삼황5제의 전설시대와 하 은 주 진 네 왕조시대를 거쳐 
1. 한(BC207~AD220년)
2. 위진남북조(220~581년)
3. 수(581~618년)
4. 당(618~907년)
5. 오대십국시대(907~960년)
6. 북 남송시대(960~1279년)
7. 원(1279~1368년)
8. 명(1368~1644년)
9. 청(1644~1911년)
10. 중화민주 및 중화인민공화국(1911~현재)

일본의 역사는 청황통치시대를 지나 막부시대를 맞이하는데, 막부는 
1. 가라쿠마 막부(1192~1333년)
2. 무로마치 막부(1338~1467년)
3. 전국시대(1467~1573년)
4. 아즈치,모모야마시대(1573~1603년)
5. 에도시대(1603~1868년)     306

성업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항상 3대 또는 최소 2대가 걸린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장수왕 두 왕의 재위기간 100년(391~491년)
백제는 동성왕, 무령왕, 성왕 3대 재위기간 75년(479~554년)
신라는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3대 76년(500~576년)에 걸쳐.  320
재주복주(載舟覆舟)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어엎기도 한다'  324


의미를 따지고 전례를 찾고 논리를 동원하고 큰 방향을 모색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일에는 인문학이 적격이다.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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