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THREE 일과 삶

 

10 우리는 시간과 투쟁한다.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전보다 더 오래 살고 있으면서도,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졌기 때문에 시간은 더 없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247

 

아이들에게 기다림을 가르치는 것은 양육에서 중요한 부분인 동시에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은 조직 시간이 자주 자기 시간이나 상호작용 시간보다 우선시되는 세계에서 꼭 필요한 기술이다. 25

 

우리 문화에서 시간은 돈이다... 일을 더 빨리 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시간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비행기, 자동차 컴퓨터는 빠르지만, 우리는 그것들과 더불어 점점 더 많은 곳을 가고 더 많은 일을 한다. 우리가 더 빨리 일할수록 우리의 시간은 더 빨리 새로운 일로 채워진다. 우리가 더 빨리 움직일수록 우리는 더 적은 시간을 갖게 된다. 사람들이 속도에 집중할수록 서로에 대한 인내심은 점점 줄어든다. 또한 빠르게 돌아가는 삶은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사람들은 자유시간이 전혀 없다고 불평한다. 253-254

 

앨빈 토플러가 <미래 충격>에서 지적했듯이, 사회 변화가 빠른 시기에는 문화 전체가 일시적인 공황을 경험할 수 있다. 254

 

시간의 속도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의 수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더 많은 시간 동안 일할 뿐만 아니라 더 많이 이동해야 하고, 가야 할 곳도 더 많다. , 더 많은 것을 사야 하고,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즐겁게 해줄 오락활동들도 더 많이 있다. 우리가 정해진 시간에 더 많은 활동들을 끼워 맞추려고 노력할수록, 시간은 더 빨리 가는 듯하다. 오늘날 우리는 시간이 더 없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더 많기 때문에 더 시간이 없는 것처럼 느끼는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255

 

사람들이 시간에 맞춰 일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뤄진 현상이 아니다. 과거 고용주들은 사람들을 시간에 맞춰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 분투했다... 숙련된 장인들은 늦게 일어나 더 늦게 일을 시작했다. .. 17세기 초까지 영국의 노동자 계급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산업화 이전의 삶은 대학생들의 생활과 약간 유사했다. 불규칙적인 식사와 수면이 과음과 파티, 그리고 잠샘 작업과 어우러져 있었다. ..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산업화 이전 사람들의 시간에 대한 태도는 우스꽝스럽고 유치해 보인다. 우리는 이미 조직 시간의 요구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 산업화 이전의 노동자는 게으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시간을 돈으로 여기지 않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돈보다 여가가 더 가치있는 것이었다. 255-256

 

17세기와 18세기 유럽의 남성 및 여성 근로자들은 매주의 첫날에는 일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스스로 정한 그 휴일을 () 월요일이라고 불렀다. 남성들은 술을 마시고, 길모퉁이를 서성거리고, 싸우고, 투견이나 투계 선술집에서 내기 게임을 하며 월요일은 보냈다. 일요일은 가족을 위한 날이고, 월요일은 친구를 위한 날이었던 것이다. 여성들도 술을 마셨지만 대개는 집안일을 하면서 월요일을 보냈다. 성 월요일의 흔적은 1970년대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서 헤일리는 베스트셀러 소설 <자동차>에서,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월요일에 만들어진 차를 결코 사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주말이 끝난 후, 근로자들은 병가를 내서나 피곤한 상태로 출근하기 때문에 월요일에 만들어진 차들은 다른 날 만들어진 차들보다 덜 믿음직한 성능 기록을 가지고 있는 편이라는 것이다. 256

 

고용주들은 사람들에게 규칙적으로 일을 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낮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일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1900년대 초, 헨리 포드는 전혀 다른 방식을 택했다. 노동규율을 강화하기 위해 낮은 임금을 이용하는 대신 오히려 보수를 높여주고 주당 근무 시간도 줄여주었다. 그는 사람들을 착실한 근로자로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탐욕스런 소비자로 만드는 것, 즉 충분한 임금과 쇼핑하기에 충분한 시감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가지 모두 기업에 이득이 되었다. 257

 

테일러화(과학적 관리법의 창시자인 테일러의 이론에 따라 모든 업무를 단편화하고, 개별 작업자의 동작을 규정, 감시함으로써 시간과 동작의 낭비를 줄여 일의 생산성을 높이려는 것.). 260

 

아마도 현대의 일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점은 자신이 생산한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시간에 대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점일 것이다. 263

 

시간에 맞춰 일하는 것에 저항했던 산업화 이전의 우리 조상들과, 시간과 과업에 의해 구조화된 일을 하는 현재 사람들의 상태는 일과 시간에 대해 세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첫째 아마도 과업 지향적인 일이 시간 지향적인 일보다 더 자연스럽고 만족스러운 듯하다. 둘째, 아마도 우리들 대다수는 짧은 시간 동안 열심히 일하고 긴 자유시간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셋째, 그러나 우리 문화에 존재하는 시간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고려한다면, 일정한 노동 시간이 정해지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다. 264

 

근무시간 자유선택제는 고용인들에게 자신의 노동시간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264

 

근무시간 자유선택제는 어떤 면에서 20세기의 가장 급진적인 경영 혁신이다. .. 지난 백년 동안, 대부분의 경영 혁신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일에 끼워맞추도록 돕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다... 근무시간 자유선택제는 바닷속의 좁쌀 한 알(滄海一粟, 창해일속)’에 불과하지만, 개인이 자기 삶을 중심으로 일을 조절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황에 맞게 일을 조정하도록 하는 또 다른 방법은 시간제 근무이다. 시간제 근무는 최근 나쁜 평판을 얻어왔으며,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 많은 고용주들은 전일제 고용인들을 해고한 다음 그들의 자리를 더 값싸고 쉽게 내보낼 수 있는 시간제 고용인들로 메우고 있다. 둘째, 시간제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회보장 혜택을 받고 있지 않으며, 임금 수준도 낮고 승진 가능성도 없는 직업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시간제 근무를 선호한다. 265

 

우리들 대부분은 업무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 266

 

일이 우리 삶에서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할수록 모든 활동은 점점 더 일처럼 느껴진다. 시계와 일정표는 우리의 사회생활로부터 자연스러움을 빼앗아간다. 이제 사람들이 친구의 집을 예고 없이 방문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 되고 있다. .. 현재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거나,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하고 있지 않은 일은 아마도 잠자는 일일 것이다. 신경 생리학자인 스탠리 코랜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첨단 기술인 시계가 지배하는 생활방식 덕분에우리는 육체적으로 필요한 것보다 연간 500시간의 수면을 덜 취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269

 

최근에는 컴퓨터, 이메일, 팩스, 휴대전화, 호출기 등이 우리를 일터의 벽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제 일부 사람들은 침대에서 잠옷을 입고 일하거나 해변에서 수영복을 입고 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

근로자들이 직장 내의 책상에서 떠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술은 일하는 시간의 범위를 넓히거나 그 시간의 양을 증가시키는 데도 이용된다. 270

 

장소에서의 융통성은 근무시간에도 융통성을 부여한다. ..

신기술은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었지만, 그것은 잠재적으로 우리를 하루 24시간, 1365일 내내 고용인으로 만든다. 271

 

시간은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것을 팔고, 사용하고, 사고, 투자하고, 아끼고, 죽인다. 274

 

샘 킨은 자신의 책 <열망>에서 .. 일이 사람들을 지배하면 사람들은 무력해지고, 성적 구별이 사라지며, 시장 원칙만이 추종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일직이 알베르 카뮈가 말했듯이, 일이 없으면 삶 전체가 타락한다.”그러나 자유시간이 없어도 삶은 타락할 수 있다. 275

 

 

11 여가와 소비주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가가 인간의 행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믿었다. ..

그리스어로 여가라는 단어는 스콜레(skole)’이며, 라틴어로는 오티움(otium)’이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모두, 일을 뜻하는 단어는 여가를 뜻하는 단어의 부정형이다. ‘이라는 뜻의 아스콜리아(ascholia)’네고티움(negotium)’은 둘다 여가가 아닌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스페인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뜻하는 스페인어네고시오(negosio)’여가각 아닌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어, 라틴어, 스페인어 모두 여가가 마치 생활의 중심인 것처럼 일을 여가와 관련시켜 비유한다. 영어단어 레저(lisure)는 라틴어의 리케레(licere)로부터 파생되었는데, 그것은 허락되다라는 의미이다. 영어에서는 마치 일이 생활의 기준인 듯 여가를 일에 빗대서 표현하고 있다. , 우리가 일을 멈추도록 허락되었을때가 여가라는 것이다. 276-277

 

사업가들은 일요일을 우울하고 지루한 날로 만들려는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그렇게 하면 일을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여가가 너무나 보람차고 즐겁다면 사람들은 일터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279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고용주들은 토요일 휴가를 주는 것에 반대했다. 그들은 고용인들이 말썽만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280

 

TV를 더 보고 싶다는 이유로 일하러 가기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 사람들은 나뭇조각으로 카누를 만들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가한 시간을 원하지만, 단지 TV를 더 많이 보기 위해 여가시간을 원하지는 않는다(비록 한가한 시간에 그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TV를 보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282

 

마르크스는 인간에게 본성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다. 283-284

 

한때 여가는 아마추어를 위한 시간으로 여겨졌다. 아마추어라는 단어는 라틴어 아마토르(amator)’, 애호가라는 단어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아마추어를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애호하는 사람또는 어떤 것에 대해 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아마추어는 돈이나 명성 같은 외적인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재미있고 본질적으로 보람을 주기 때문에 취미를 개발한다. 285

 

1970, 경제학자 스테판 린다는 <곤경에 처한 유한계급>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부유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자유시간더 많은 소비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대부분 더 많은 소비를 선택한다고 주장했다. 286

 

돈을 쓰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돈을 벌기 위한 시간, 쇼핑할 시간, 그리고 유람용 모터보트나 패키지 투어 등 돈으로 구매한 물건들을 사용할 시간이 필요하다. ...

소비는 일하고자 하는 욕구가 약할 때조차 일을 해야 할 필요를 창출한다.. 287

 

십대(teenager)들조차 자신의 여가를 소비와 교환한다. 과거의 십대들은 가족을 돕거나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 자신이 원하는 사치품을 사기 위해 일하는 중산층 십대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국인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젊은이들에게 을 장려했다. 그들은 젊은이들이 일을 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규율을 발전시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287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는 것은 십대의 학업을 방해할 뿐 아니라 호기심 많고, 상상력 풍부하고, 호전적이어야 할 시기에 적응된 온화함(adjusted blandness)”을 심어줄 수 있다는 그린버거와 스타인버그의 주장이다. 288

 

여가와 소비재를 교환하는 십대들은 그들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일과 소비의 패턴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을 잃는다. 만약 그들이 물건을 사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자유시간을 포기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여가를 가질 수 없다. 그들은 어떤 활동들이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좋은지 발견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은 (부모를 비롯하여 다른 권위 있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일이다. 말썽을 일으킬 위험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시장이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닌, 자기 방식대로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289

 

우리는 미국인들이 점차 타인 지향적으로 변해가고 있다1950년대 데이비드 리스먼의 주장을 논의한 바 있다. 타인 지향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원할 뿐 아니라 시장의 물질적 동기와 고용주가 제공하는 심리적 유인에 의해 움직인다. 리스먼의 말은 옳았다. 우리는 우리에게 선택권을 제공하는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지만, 아마도 그로 인해 우리의 행동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안에 불어넣은 욕구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쇼어는 소비가 대개 지위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290

 

주디스 윌리엄슨은 <열정의 소비>에서, 시장이 우리의 열정을 소비하고, 그것이 더는 기존의 사회 질서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무장해제시킨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

돈은 당신이 돈을 번 방법을 포함하여 많은 것을 숨겨준다... 우리는 고객으로서 권력을 가지고 있다. 시장에서는 현금이나 수표, 혹은 신용카드를 갖고 있기만 하면, 당신이 누구든 상관하지 않는다. 292

 

'여가'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본질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가행위를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단지 그 행위 자체를 즐긴다. 293

 

만약 당신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주변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지 않다면, 일과 소비를 지향하는 사회에서 여가를 즐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 여가는 돈이 들지 않는다. 친구나 가족과 어울리는 것, 소설책을 읽거나 단지 공상에 잠기는 것만으로도 여가를 즐길 수 있다. 여가는 우리에게 소중하고 할 만한 가치가 있는 활동을 하는 시간이다. 여가는 자유로운 시간 이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장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이다. 여가가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릴 것이다. 여가가 없다면 우리는 삶을 이해하는 것이 한층 더 어려울지 모른다. 295

 

 

12 의미 있는 일, 그리고 행복한 삶

 

"의미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어떤 이들에게 의미 있는 일은 흥미롭고 만족스러운 일을 뜻한다. 다른 이들은 '사회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이들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원한다. 의미 있는 일의 본지로가 그에 대한 욕구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철학적 질문의 모태가 되는 질문에 직면해야만 한다. ,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296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글을 쓰고 싶어한다. 300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 자체가 정신 질환의 징후라고 생각했다. 마리 보나파르트에게 보낸 편지엣 그는 이렇게 썼다. "누군가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묻는 순간, 그는 이미 병에 걸린 것이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 왜 나는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가?"처럼 부정적인 방식으로 제기되면 우울한것이 사실이다. ..

심리치료자이자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인 빅터 E.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중심으로 치료 방법을 개발했다. '의미치료(logotherapy : 이 이름은 '의미'리는 뜻의 그리스어인 '로고스'로부터 파생되었다)'는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 원동력이라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 프랭클은 삶의 의미는 변화하는 것이고 사람마다 다른 것이지만, 사람들은 선행을 하고, 가치를 경험하고, 마지막으로 고난을 통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300-301

 

<나의 고백>이라는 글에서 레오 톨스토이는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기 시작한다. 톨스토이는 모든 인류가 삶의 의미를 알고 있지만, 자기 자신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303

 

놀랍게도,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관심을 기울인 현대 철학자는 거의 없다. 또한 관심을 기울였더라도, 그들의 대답은 어쩔 수 없이 신학자나 심리학자들의 대답만큼 구체적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질문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곤 한다. E. D. 클림케는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영역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눈다. 첫 번째 질문은 우주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존재 이유와 그 목적에 관한 것이다. 가장 흥미를 자아내는 것은 세 번째 질문이다. 나는 왜, 어떤 목적으로 존재하는가? 만약 목적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그것을 발견할 것인가? 목적이 없다면 내 삶은 어떤 의미나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

일부 철학자들은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 자체가 하나의 대답만을 암시한다는 이유로 그 질문을 해체시킨다. 다른 이들은 그러한 질문에는 대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을 무의미한 질문으로 여긴다. 305-306

 

철학자 L.J. 러셀이 지적하듯이, 만약 삶의 의미가 오직 그 결과에 의거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결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모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내일 잼을 만들어라, 어제 잼을 만들어라. 그러나 오늘은 잼을 만들지 말아라.", "당신은 자녀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당신의 자녀들도 그들의 자녀를 위해 마찬가지로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잼을 먹지는 못한다." 의미 있는 삶이란 현재를 위한 삶과 미래를 위한 삶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러셀을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들은 삶의 의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이라고 좋아한다. 그러나 러셀은 삶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오늘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307

 

도덕성이 반드시 당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다른 모든 이들의 가치 있는 삶을 살 권리를 존중한다면, 이론상으로 우리는 모두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 행복으로 가득한 삶은 의미 있는 삶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행복한 삶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행복하기'위해 해복을 추구한다. 따라서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 즉 삶의 목표이다. 어리스토텔레스는 실용적인 지혜, 탁월함, 즐거움이라는 세 가지가 행복한 삶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세상에 대해 배우는 것은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학구적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수준에서의 학습, 재능이나 기술을 발전시키는 일이 삶의 보람된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세스는 탁월함에 대해서도 도덕적이고 지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우리는 두 가지 설명을 모두 종합하여, 행복한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다. 309-310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 또한 행복의 중요한 요소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무 즐거움이나 행복의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오직 고귀하고 도덕적인 즐거움만이 참다운 행복으로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행복은 오직 행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행복은 활동적인 사람에게만 온다. 이러한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가생활은 게으른 생활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활동적인 삶이다. 인간은 어떤 일을 '' 때 가장 행복하다. 누군가를 감옥의 텅 빈 독방에 가두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최악의 고문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죄수에게서 자유뿐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행위와 상호작용까지 박탈하는 것이다. 포로 수용소의 생존자들은 종종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활동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미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란 삶 전체에 대한 평가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삶의 행복한 부분의 총합 이상이다. 당신이 항상 행복할 필요는 없다. 행복한 삶은 고통과 슬픔까지도 포함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급자족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결핍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는 행복이란 게 반드시 살아가면서 원하는 걸 얻는 데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때때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 원하는 것을 얻어도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과 의미는 모두 도덕성과 관련되어 있다. 행복하고 싶다면 당신은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며, 도덕적으로 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원해야 한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행복에 대한 보편적인 요구와 우리 문화에 널리 퍼져있는 불행은 일을 지향하는 문화의 산물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우리는 오직 일을 통해서만 행복을 얻는다. 그것은 극도의 피로와 회복이 반복되는 과정이다. 310-311

 

심리학자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행복 연구는, '일이 행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만들어낸다'는 아렌트의 견해를 지지하는 듯하다...

칙센트미하이는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 동안에는 약 절반 가량의 시간 동안 몰입을 경험하고, 여가시간에는 18% 정도만 몰입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일에 몰입할 때 창조적이고, 강하고, 활동적이며, 집중적이고, 동기화된 느낌을 더 많이 갖는다는 의미였다. 311

 

칙센트미하이의 연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통찰은, 현재 우리의 문화에서 사람들은 일터가 아닌 곳엣 이러한 행복한 순간을 제공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312-313

 

자본주의는 삶의 수단을 제공할 뿐 삶의 목적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315

 

20세기 내내 고용주들이 조직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이것을 손에 넣어 이용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중 맨 처음에 등장한' 과학적 관리법'은 육체를 손에 넣으려고 시도했고, 다음으로 출연한 '인간관계론'은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으며, 이제 몇몇 컨설턴트들은 '영혼'을 건드리려 하고 있다. 317

 

'직장에서의 영성'은 대중 심리학과, 일시적으로 유행했던 경영학 이론이 항상 해왔던 일을 반복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 그것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듦으로써, 애초에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만들었던 권력과 갈등, 자율성에 관한 심각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대신 그거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이다. 318

 

"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제공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의미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320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처럼, 의미 있는 일은 주관적인 특성과 객관적인 특성을 모두 지닌다. .. 일의 사회적 의미와 도덕적 가치는 문화와 개인에 따라, 그리고 시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세상을 '인식'할 뿐 아니라,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창조'해주지 않는다. 320

 

개인이나 조직이 의미를 창출하려고 시도할 수는 있지만, 만약 그러한 의미가 교묘한 속임수로 만들어낸 환상이라면 그것은 냉소주의만을 가져올 뿐이다. 앞서 우리는 따로따로 일하는 사람들을 ""이라고 불렀던 회사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어떤 것의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그 의미까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한 상황 혹은 실재를 파악해야만 한다. .. 모든 고용인들은 존엄과 존중을 가지고 처우받아야 한다(너무나 많은 근로자들이 수년간 자신들이 '성인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해왔다)...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이라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삶에 참여하는 방식에 대해 약간 다른 주장을 했다. 그는 결정하고 생각하는 능력이 결여된 노예라도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워지면 이러한 능력을 되찾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일부 사람들은 노예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대신해서 생각하고 결정해주는 것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한다. 321

 

의미 있는 일은 우리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정의할 수 없을지 몰라도, 그것을 보면 알게 된다. 종교직과 같은 일부 직업들은 본질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직업들보차도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이 의미를 발견할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의미 있는 일이 항상 편안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 고통이나 고된 일 혹은 스트레스를 수반한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여전히 좌절하거나 지쳐서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은 대체로 개인의 삶에 활기를 북돋워준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경험과 우리가 논의한 숭고한 여가의 개념은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322-323

 

모든 사람이 의미 있는 일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존중받기'를 워하며, 어느 정도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고 싶어할 뿐이다. 결국 선의는 심리적으로 계획되기보다는 존중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번성하는 경향이 있다. 323

 

 

 

에필로그 - '''삶의 질'을 향상시켰는가?

 

이 책은 저주로부터 소명으로, 그리고 그 이상의 것으로 변화한 일의 의미를 추적하고 있다...

일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첫째, 일은 더 나아졌는가? 그리고 "더 낫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분명 임금 노동자는 노예보다는 낫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을 노예와 농노, 계약제 하인, 그리고 초기 산업 노동자들보다는 육체적으로 덜 고되고 덜 지저분하고 덜 위험하다. 그러나 "더 낫다"는 것은 또한 고용주와 고용인들 간의 도덕적 관계를 포함해야만 한다. 직장 내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공정성이 존재하는가? 개인들은 '더 나은' 처우를 받고 있는가? 혹은 일이 우리의 삶을 향상시켰는가? 이 역시 "더 낫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달려 있다. 일이 삶의 물질적 조건들을 향상시켰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삶의 질'을 향상시켰는가? 우리의 직업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324-325

 

나는 현대의 경영자들이 올바른 직장을 '만들기'보다는 개인으로 하여금 기분 좋게 '느끼도록'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을 비판해왔다. .. 현대의 경영 기법이 낳은 또 다른 결과는 일이 점차 우리 삶의 보다 큰 부분을 차지하도록 일의 사회적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

오늘날의 고용주들은 자신들이 많은 것을 고용인들에게 약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특히 주주들에게 그토록 많은 것을 약속해야 할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들은 교묘한 속임수로는 신뢰와 헌신을 얻어낼 수 없음을 알고 있다. 325

 

고용주들은 자기 책임을 회피하고 고용인들에 대한 의무 없이 그저 권한만 유지하려 든다. 글나 근로자들은 자신의 실수뿐 아니라 경영자 및 경제의 실수와 "불운"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더욱 나쁜 것은 그들이 그것을 개인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질책한다는 것이다. 326

 

고용불안정은 실업률이 낮을 때보다 새로운 삶의 방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326

 

정직한 직장은, '약속을 지키는 최상의 방법은 자신이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하는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328

 

과거의 사회계약이 사라졌다면 새로운 사회계약은 어떤 것일까? 조직은 직업 안정성을 약속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정보의 공유를 약속할 수는 있다. .. 경영자들은 조직의 모든 정보까지는 아니더라도 고용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될 정보는 가능한 한 많이 고용인들과 공유해야 한다. .. '정직한 직장'이란 고통스러운 진실을 이야기해줌으로써 그들이 그것에 대비할 수 있게 해주는 조직을 의미한다. 결국 그것이 "근로자들을 성인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329

 

상호존중은 단기적인 헌신관계를 만들어내는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서로에게 존중을 표하고 존중을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진실이 항상 듣기 좋은 것만은 아니며, 우리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항상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사람을 '신뢰'한다...

존중, 신뢰, 정직은 양 방향으로 작동한다...

'진실'은 그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울 것이다. 분명 대부분의 고용인들과 학생들은 평균 이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향상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준다면 그들은 진짜로 평균 이상이 될 기회를 얻는 것이다. 330

 

전통적인 노동윤리 아래서 개인의 고결함은 그가 어디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일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일하는지에 달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경영이론가와 고용주 들은 '일을 잘하는 고용인일수록 자기 삶을 희생한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한다. 331

 

 

내가 현대인의 일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한 가지 이유는 단지 직장 내의 불의, 경영 술수, 혹은 경제적 불안정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적인 큰 그림을 살펴보았을 때, 나는 삶 자체가 더 편해져야 할 시대에 이르러서도 유급고용이 살을 지배하는 것을 보고 당혹감을 느꼈다. 우리들 대다수는 어디서 어떻게 살지, 어느 곳에서 일하고 어떤 물건을 구입할지에 대해 전례 없이 많은 선택권을 가진 놀라운 시대, 후기 산업사회에 살고 있다. 기계들은 우리의 노예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기본적인 필수품을 상대적으로 쉽게 얻을 수 있다. 지금은 삶이 온갖 종류의 보람 있는 활동들로 가득 차야 할 시기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오랜 근무시간뿐 아니라 채무에 시달리고 있으며, 스트레스와 외로움, 그리고 가정해체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왜 그런가?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가 항상 더 많은 것을 워하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331-332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우리는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 , 생활 속에서 선택의 방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학예(liberal arts)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332

 

보다 광범위한 질문은 "우리는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삶을 원하는지 알고 있고, 그것을 위해 무언가를 기꺼이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그것을 위해 현재 포기하고 있는 것만큼의 가치를 갖는가?"이다. ..

일이 지배하는 삶 역시, 그것이 의식적인 선택이고 개인을 행복하게 만든다면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삶을 일에 꿰어맞추는 대신 일을 삶에 통합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333

 

 

 

 

역자 후기 - '일과 삶', 그 본질에 대한 고찰

 

일 혹은 일의 부재는 우리 삶에 너무나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정작 지금껏 우리가 하는 ''에 대해, 그리고 '일과 삶의 관계'에 대해 통찰해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335

 

현대사회에서 일은 자아실현의 수단이자, 개인의 존재를 의미 있게 만드는 도구로 그럴듯하게 포장된다. 일은 우리의 모든 것이며, 우리는 일을 잃음으로써 그에 수반되는 모든 것을 - 심지어 가정까지도 - 잃게 된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올바르고 바람직한 현상인가? 일은 본래부터 모든 희생을 감내하면서 지켜야 하는 무엇이었나? 일은 종류에 상관없이 무조건 개인에게 성취감과 만족을 주는가?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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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TWO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5 일과 자유

 

독립, 자유, 평등과 같은 미국의 문화적 가치들에 비춰볼 때 타인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은 ()미국적인것에 가깝다. 이것은 미국인들이 서로 돕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그들은 자기 방식대로 무언가를 하고 싶어할 뿐이다. 115

 

노예제도는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는 방법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방법이다.

노예제도는 일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말이다. 그것은 인간 가치의 타락, 최악의 상태로서의 일을 의미한다. 오늘날까지도 노동자들은 그는 나를 노예 취급해라든지 나는 그녀의 노예가 아니야혹은 그 사람은 정말이지 노예 감독관이야라는 말을 종종 한다. 불쾌하지만, 노예제도는 매혹적인 관리법의 전형이다. 그것은 일꾼들에 대한 완전한 소유와 통제를 의미한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기위해 일한다. 그러나 노예는 살아 있기위해 일한다. 117-118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도를 찬성했지만, 노예제도가 사람들로 하여금 짐승과 분되는 인간의 측성, 즉 선택하고 숙고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 등을 발휘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인간 이하로 만든다고 저술했다. 그의 글에 따르면, 노예들은 자신들의 삶에 대해 아무런 통제권을 갖지 못하므로 어떠한 행복도 갖지 못했다. 그들의 랆은 대부분 일과벌, 음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노예들을 동기 부여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에게 언젠가는 자유를 주겠다는 상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들은 다시 인간이 되는 셈이다. 118


가장 가혹한 근로조건 아래서 일하는 현대의 고용인들조차도 노예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 노예들과 달리 그들은 항상 일을 그만둘 수 있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유를 되찾을 때까지 보통 여덟 시간만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항상그만둘 수 있을까? . 일터를 떠난다고 해서 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118-119

 

불행히도, 노예제도는 완전히 과거의 것은 아니다. 영국의 노예폐지협회(Anti Slavery Society), 노예제도에 관한 국제연합 실무위원회(UN Working Group on Slavery), 그리고 인도의 노예해방전선(Bonded Liberation Front) 같은 단체는 노예제도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 여전히 존재한다고 보고한다. 이들 집단은 자신의 노동으 자발적으로 그만둘 수 없는 사람은 누구나 노예로 간주한다. 여기에는 대금업자에게 돈을 갚기 위해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하는 강제 노역자들, 자신이 일하는 경작지를 떠날 수 없는 농노들,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착취당하거나 가족에 의해 팔려 무보수로 일하는 아동들이 포함된다. 119

 

계약제 하인들에게 사회계약은 실질적으로 고용주가 대부분의 힘과 권리를 갖는 법적 계약이었다. 뉴잉글랜드 바깥 지역의 초기 백인 이주자들은 절반 이상이 계약제 하인이나 무임도항(無賃渡航) 이주자들(도착한 후 일정 기간 동안 노동을 해주기로 약속하고 무임으로 도항한 이들)로 미국에 왔다. 그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일해야만 했다. 결국 고용이란 자유와 기회로 이어지게 될 일시적인 노예 상태를 의미하였다. 122

 

영국 정부는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한 수단으로 계약노예제도를 인가했다. 앞서 말했듯이, 민간 해운 업체들은 다른 어떤 상품보다도 노동력을 팔아 더 많은 돈을 벌곤 했다. 존 반 더지는 새뮤얼 애덤스, 존 애덤스, 제임스 오티스,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작가들이 폭정(tyranny)’굴종(slavery)’ 같은 단어를 자주 사용한 이유가 계약노예제도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계약노예제도는 과거의 유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연구자들은 불과 몇 년 전에 로스앤젤레스의 노동착취 사업장(sweat shop)에서 계약노예제도를 사용하는 태국인 고용주를 발견했다. 그들은 하루 열일곱 시간씩 재봉틀로 옷을 박는 일흔 네 명의 태국인 여성들을 발견했다. 고용주는 한 아파트에 여성들을 가두고는, 만약 도망치려고 시도하면 그들과 가족들을 해치겠다고 위협했다. 미국의 초기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오는 뱃삯을 갚는 데 수년이 걸렸던 것처럼 태국 여성들도 고용주에게 항공료를 지불하기 위해 칠 년간 일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여성들 중 일부는 자신들에 대한 처우 방식에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오로지 집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부치는 것뿐이었다. 또한 미국에서는 오페어(au pairs)들의 처우에 관련된 추문도 있었다. ‘오페어란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외국 여자로, 숙식을 무료로 제공받는 대신 한 가조고가 살면서 가사를 돕고 아이를 보살피는 일을 한다. 당시 미국에 온 젊은 오페어들은 학대와 과로, 저임금에 시달리곤 했다. 그들은 미국에 가게 된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싼값에도 기꺼이 일하러 온다. 그리고 땔 그들은 자신들이 계약제 하인보다 나을게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24-125

 

노예제도와 계약노예제도에서는 타인의 노동을 빌리기보다는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드러난다. 백인 계약제 하인들은 1650년경에 시작되어 1800년대에 확대된 흑인노예들의 대규모 유입 이전에 미국에 왔다. .. 남부의 농장주들은 백인인 하인들보다 흑인노예들을 훨씬 좋아했는데, 이는 흑인노예들이 기후에 더 잘 적응하고 더 온순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주인이 그들을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25

 

노예제도를 옹호했던 노예 소유자들은, 남부의 노예들이 북부의 임금노예들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오히려 남부의 노예들이 더 나은 상태에 있다고도 주장했다. 주인들이 노예들을 부양하고 있고, 어둡고 더러운 공장에서 일하는 산업 고용인들과는 달리 위생적인 야외에서 더 짧은 시간 동안 일한다는 것이었다. 북부 사람들은, 임금 노동자들이 자신의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자신의 일에 대해 현금으로 보수를 받는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이에 대해 반박했다. 그러나 자물쇠를 채운 상태로 장시간 공장 노동을 시키는 것, 아동의 노동, 위험한 기계, 유해한 공기 등을 포함한 끔찍한 노동조건은 북부인들의 이러한 도덕적 주장을 약화시켰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영국의 산업 노동자들을 미국의 노예들과 비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그들은 미국의 흑인들보다도 못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철저히 감시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처럼 살아가도록,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도록 요구되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그들도 비인간적인 생산양식으로 인해 마찬가지로 모욕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북부 생산업자들에 대한 반론은 임금노동자들의 자유가 비인간적인 노동 현실을 보상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126

 

문제는 그들이 과연 북부의 생산업자들보다 더 적은 이윤을 원했거나 필요로 했을까하는 점이다. 127

 

한 개인이 자신의 일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사실이 고용주의 학대를 반드시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문제는 한 개인이 얼마나 많은 선택권을 실제로갖고 있는가이다. 127

 

굶주리고 겁에 질린 사람이 자신에게 음식과 안전을 제공할 만한 사람과의 계약관계를 자유롭게맺기로 선택할 수 있는가? 128

 

철학자 존 로크는 빈곤한 자의 복종은 주인의 동의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굶어죽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하인이 되는 것을 택한 가난한 자의 동의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노예가 되도록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가난한 사람이 당신의 노예나 계약제 하인이 되기로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란 얘기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것일까? 128-129

 

우리는, 착취당하는 가난한 자들이 만약 착취당하지않았다면 훨씬 더 못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라는 착취의 논리에 쉽게 빠져든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이러한 논리를 보여주는, 일하는 원숭이들에 대한 풍자적인 보고서를 실은 적이 있다. 채국 남부에서는 매년 150만 톤의 코코넛 열매를 따기 위해 수천 마리의 원숭이들이 고용된다. 마을의 가족들은 원숭이를 훈련시켜, 농장주들에게 빌려준다. 원숭이들은 농장주로부터 달걀과 쌀, 과일 등 원숭이 임금으로 매달 약 12달러 정도를 벌어들인. 일하는 원숭이들에게는 이름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목욕시키고, 돌보고, 하루 세 번 음식을 준다. 때로 그들의 주인은 자신의 모터스쿠터 뒤에 그들을 싣고 일하는 곳가지 태워다주기도 한다. 아픈 원숭이는 하루 동안 일을 쉰다. 너무 늙어서 일을 할 수 없는 원숭이는 은퇴해서야생으로 돌아가거나 가족의 애완 동물로 남는다. 일하는 원숭이의 불리한 점은 항상 사슬에 묶여 있고 원하는 대로 번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사는 이러한 형태의 고용이 인간에 의해 서식지가 파괴되고 있는 게잡이원숭이 같은 몇몇 종들의 멸종을 막아준다고 지적한다. ...

농부가 원숭이의 자유를 빼앗기는 하지만, 원숭이들은 특히 서식지 대부분을 농부들에게 빼앗긴 이후 그들끼리 야생의 생태계에 남겨지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지내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는 원숭이의 생각이 어떤지 알 수없다. ... 제도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간단하다. 농부들은 원숭이가 원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생각하기에원숭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원숭이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괜찮다고 한다...

농부는 원숭이가 하루 세 번의 식사를 필요로 한다고 결정하고 원숭이가 이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때로 고용주들은 고용인들이 갖고 있지 않거나 원하지 않는 욕구를 충족시킨다. 130-131

 

우리 모두 정도는 다르지만 생계를 꾸리기 위해 우리의 노동과 시간을 팔아야 한다. 131

 

일반적으로 우리는 취직을 할때,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고용주들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는 것에 동의한다. ..

임금이 상실된 자유에 대한 보상이라는 견해는 또한 몇몇 터무니없는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은 한 살마이 직업에서 더 적은 자유를 누릴수록, 더 많은 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현실은 정반대이다. 표면적으로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직업일수록 더 높은 지위를 나타내고, 더 많은 돈을 받는 경향이 있다. 폴 퍼셀은 자신의 책 <계급>에서, 한 사람이 직업에서 누리는 자유의 양이야말로 임금보다 나은 계급의 지표하고 주장한다. 132

 

사람들은 직업에서 더 많은 통제권을 갖도록 해주는 전문 지식을 얻기 위해 기꺼이 시간과 돈을 희생한다. 예를 들면, 과거 젊은이들은 장인의 도제로 수년을 보냈는데 이것은 사실상 계약고용었다. 미국의 도제들은 장인과 일하기 위해 노동계약서에 서명했다. 영국의 도제제도는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그 제도를 운용했던 조합은 건너오지 않았다. 그 결과, 자격 기준이나 인증서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133

 

장인의 가치와 힘은 무언가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버지들은 기술의 비밀을 아들들에게 물려주었고 스승들은 도제들에게 물려주었다. .. 비밀은 장인들에게 힘과 자율성을 주었다. 그러나 미국에는 비밀성을 강화해줄 만한 강한 조합제도가 없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장인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책과 간행물을 통한 정보의 보급이 광범위해지면서 몇몇 장인들은 자신의 비밀을 인쇄하여 대중들에게 팔기도 했다. <유용한 천 가지 비밀(1795)>과 같은 실용서(how-to book)들은 조각, 철물상, 니스칠, 시멘트 바르기, 밀랍으로 봉하기, 유리, 페인트, 도금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다. 135

 

오늘날에도 여전히 번성하고 있는 실용서의 전통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실용서가 아닌 산업화가 장인들의 힘과 권위를 무력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일이 갖는 의미를 급격히 변화시켰다. .. 기계화는 일을 보다 효율적으로 실행시켰을 뿐 아니라 몇몇 업무를 단순 작업화함으로써 사람들은 기계의 일부처럼 쉬비게 대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136

 

 

6 일꾼 길들이기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의 생산업자들은 미국인 숙련 노동자의 태도 문제(attitude problem)”와 싸워야 했다. 숙련된 미국 태생의 일꾼들은 자신의방식으로, ‘자신의 속도에 맞춰 일하고 싶어했다. ..고용주들은 생산에 대한 통제권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미국의 자유와 평등 원칙에 공공연히 위배되지 않으면서도 노동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해야만 했다. 137

 

테일러는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를 중퇴하고, 산업 현장에서 일하기 위해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할 기회를 거절했다. 140

 

노동자들을 장악하고 생산 속도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열쇠는, 누구나 최대한 효율적으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도록 일을 설계하는것이었다. 141

 

1878년 미드베일 제강에 입사한 테일러는 빠른 속도로 십장과 주임기사 자리에 올랐다. 미드베일에 있는 동안, 그는 산업 생산성을 증진시키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 테일러가 창안한 가장 유명한 과적적 관리법의 실례는 펜실베이니아로 이민 온 네덜란드인 헨리 놀의 사례이다. 테일러는 자신의 연구에서 그를 슈미트라고 이름붙였다. 141

 

테일러는 슈미트가 제대로만 한다면 하루에 47톤의 무쇠를 실어나를 수 있다고 계산했다. 현재 속도는 하루 12.5톤이었다. 테일러는 슈미트와 나눈 대화를 <과학적 경영의 원리>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그는 당신은 몸값이 높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값싼 노동자들 가운데 한 명입니까?” 하고 슈미트에게 묻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그러고는 하루 1.15달러를 벌고 싶은지, 아니면 1.85달러를 벌고 싶은지 물어본다. 슈미트는 후자를 택하고, 테일러는 이 냉정하고 짧은 대화에서 값비싼 일꾼(혹은 더 많은 보수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을 제시한다.

이제 당신은, 몸값이 비싼 사람은 아침부터 밤까지 지시받은 대로 정확히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값비싼 일꾼이라면 당신은 이 남자가 내일 당신에게 지시하는 대로 아침부터 밤까지 정확히 실행해야 합니다. 만약 그가 당신에게 무쇠를 들고 걸으라고 말하면 .. 당신은 무쇠를 들고 걷습니다... 그가 앉아서 쉬라고 하면 당신은 앉습니다. 이제 값비싼 일꾼은 지시받는 대로만 행하고 말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슈미트는 지시에 따랐고 하루에 47.5톤의 무쇠를 운반했다. 60% 더 많은 보수를 받는 대가로 400%나 더 많은 일을 한 것이다. 그러자 다른 노동자들도 변하기 시작했다.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든 돈을 위해서든 혹은 두 가지 모두 때문이든, 그들 여기시 슈미트와 똑같이 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테일러가 <과학적 경영의 원리>를 출판한 덕분에 슈미트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노동자가 되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곧 에스페란토를 포함한 12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테일러의 방식은 세계 도처에서 위대한 발전으로 인정받았다. 비평가들은 슈미트의 경험과 그에 대한 테일러의 묘사에 숱한 경멸감을 나타냈다. 이 책이 노동과 생산에 대한 엄격한 통제에 관한 것임을 고려한다면, 러시아 판에 주를 단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나 아돌프 히틀러, 그리고 한 때 테일러의 미망인을 만나 그의 사진을 요청한 적이 있는 베니토 무솔리니 등이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142-143

 

과학적 관리법의 네 가지 기본 요소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첫째, 과학적 관리법은 중앙집권화된 계획과 일의 순차적 단계들을 정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과거에사람이 먼저였다면, 미래에는 체계가 먼저일 것이다.” 둘째, 과학적 관리법은 각각의 작업을 가장 단순한 부분들로 쪼갰다. 셋째, 과학적 관리법은 경영진에게 고용인들을 훈련시키도록 요구했고, 각각의 노동자들은 업무 수행을 면밀히 감시받게 되었다. 테일러는 일의 구조뿐 아니라 고용인들의 가치관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용인들은 서로를 통해 일뿐만 아니라 할당량을 유지하고”, “남자답게 처신하는도덕적 자세를 배웠기 때문에 회사로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일하도록 고용인들을 훈련시키는 편이 더 나았다. 속도를 중시했던 테일러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할당량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과학적 관리법의 넷째 요소는 고용인이 지시받은 대로 일하도록 하기 위한, 주의 깊게 고안된 임금 체계에 기초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자신의 논문 <왜 생산자들은 대학생을 싫어하는가?>에서 협력이란 노동자들이 지시를 받았을 때 의문을 제기하거나 제안하는 일 없이 신속히 지시받은 대로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저술했다. 테일러는 순종을 얻어내고 할당량을 깨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용인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의 사리사욕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920년대 중반, 과학적 관리법의 논리는 거의 모든 산업에서 호응을 얻는다. 143-144

 

미국노동총연맹에서는 테일러의 체계를 생산성 증가 체계(speedup system)”라고 불렀다. 144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에서는 노동쟁의가 밣생했다. 145

 

대부분의 고용주들은 평온한 노사관계를 원했기 때문에 고용인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기로 했다. 1차 세계대전이 할창일 때, 애국심이 사람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을 보고 감명받은 몇몇 고용주들은 자신들의 조직에서 그러한 종류의 정신과 헌신을 끌어내는 것을 보고 감명받은 몇몇 고용주들은 자신들의 조직에서 그러한 종류의 정신과 헌신을 끌어낼 수는 없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복지 자본주의에 대한 영감은 노동 불안에 대한 두려움, 높은 이직률로 인한 비용, 자선 단체들, 그리고 대외관계 등을 포함한 여러 원천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또한 진심으로 고용인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고 싶어하는 사업주들도 있었다. 복지 자본주의의 이면에 자리잡은 일반적인 생각은 고용인들을 행복하게 하거나 그들의 이익이 그들 자신의 계급적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닌, 고용주의 이익과 결합된는 공동체에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146

 

초기 복지제도의 일부는 침대차 제조업자인 조지 모티머 풀먼이 고용인들을 위해 1880년 시카고 외곽에 지은 시범 마을처럼 근로자들의 삶을 통제하기 위해 고안된 온정주의적 기획이었다. 풀먼은 그들의 고용주였을 뿐 아니라 집주인이자 지역 상점의 소유자였다. 146-147

 

또 다른 복지제도들은 근로자들에게 회사의 주식과 더 높은 안정성을 제공하기도 했다. .. 1923P&GIBM같은 회사들은 연간 48주의 전일 고용을 보증하기 시작했다. P&G는 또한 1886년 이익분배제도를 시작했으며, 시어스 로벅 사도 1886년에 그것을 시작했다. 1927년까지 80만 명의 근로자들이 이러한 이익분배제도나 소위 근로자주식소유제도(ESOPs; employee stock ownership plans)10억 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 인터내셔널 하비스터 사는 1911년에 연금제도를 실시한 수많은 기업들 중 하나였다. 당시의 또 다른 혁신에는 건강보험, 안전기준의 개선, 회사 구내식당 같은 시설이 포함되었다. 147

 

고용주들은 미국식 제도 아래서 복지 자본주의의 많은 교의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고용인들의 충성과 협력을 얻어낼 수 있기를 바랐다. 148

 

1935, 전국노동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s Act)은 고용인들이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할 권리나 결정에 관한 진정한 발언권을 갖고 있지 않다면 품질관리 서클을 비롯한 모든 유사한 참여 조직들도 불법이라고 규정했다. 법안은 허위조합(sham unions)”, 또는 실제 조합을 막으려는 시도로 고용주가 만든 사내 조합을 금지했다. 오늘날 고용주들은 이 법안이 작업장에서 참여 조직의 활동을 금지한다고 불평하곤 한다. 148

 

복지 자본주의와 미국식 제도는 192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고, 1930년대 대공황이 오자 재빨리 자취를 감추었다. 당시의 한 비평가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분명한 것은 임금노동자들의 복지를 고용주들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많은 회사들은 실제로 고용인들엑 대해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대공황기에 미국식 제도가 소멸되자 곧바로 고용주와 고용인 간의 신뢰와 충성을 방해하는 주요한 장애물 가운데 한 가지가 부각되었다. ..

1935년의 한 경영자 회의에서, 뉴저지 벨 사의 회장인 체스터 버나드는 복지 자본주의가 근로자의 발전이나 협력 증진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49

 

1920년대는 산업 혁신과 실험 그리고 노조 억압의 시대였다. 경영에서의 인간관계 접근은 고용인들의 태도와 감정이 어떻게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 경영진은 고용인들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고용인드로과 대화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방법을 알 필요가 있었다. 150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조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노조라고 하면 어떤 이들은 게으르고 돈만 많이 받는 부패한 특수 이익집단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어떤 이들은 노조가 지나친 욕심과 낮은 생산성으로 세계시장에서 미국의 경쟁력을 파괴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 노동조합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많은 부패와 난폭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의 탄생은 여전히 역사상 가장 중요한 노사관계 혁신이다. 이는 노동조합이 양자간에 존재하는 힘의 불균형을 조절해주기 때문이다. 157

 

 

7 노동의 두 얼굴

 

1950년대에 C.라이트 밀스 같은 사회 비평가들은 대기업이 고용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우려했다. 그는 거대한 관료 조직에서의 사무직 노동의 우울한 모습을 그렸다. 밀스에게 일의 황금기는 가족 농장과 소규모 독립 상인들의 시대인 1850년대였다. 그는 1850년대에는 일이 삶과 잘 통합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다고 기술했다. 자신이 사는 집에서 일했던 장인이나 상인에게는 이것이 사실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밀스는 또한 일을 살에 통합시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고, 소외는 나쁜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는 산업 노동자들과 사무직 노동자들에게는 일의 의미가 너무나 축소된 탓에, 일이 더는 내적인 방향성과 사회와의 연결성을 제공하지 모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믿었다.

밀스가 보기에, 사무직 노동은 어떤 면에서 비숙련 노동보다도 못했다. 그는 계약노예들(paroles)”은 육체적으로는 고생스럽더라도, 적어도 집에 가면 자유인 반면 사무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뿐 아니라 개성까지도 팔아치워야 한다고 말했다. 밀스는 사무직 노동자를 새로운 작은 사람(new little man)””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고, 뿌리가 얕아 충성심이라고는 없으며, 항상 서두르지만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밀스에 따르면, ‘새로운 작은 사람은 반영웅적이고, 자신의 역사를 알지 못하며, 어려운 시기에 회상할 만한 황금기를 겪어보지 못했다. 162

 

새로운 작은 사람에 대응하는 인물을, 밀스는 미국 조직의 새로운 권력자(new men of power)””라고 불렀다. ...

밀스에 따르면, 일의 상당수가 파편화되고 무의미해져서 계급 이동성과 향상의 여지가 거의 없는 대규모 복합 조직에서는, 열심히 일한 개인이 자기 발전(혹은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가 실행될 수 없다. .. 밀스는 인사 부서의 목적이 쾌활하고 협조적인 부하들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용인들의 감정마저도 조직이 바라는 대로, 조직의 손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직장 내의 정서를 통제함으로써, 고용주들은 근로자들을 소외시키지 않고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정당화할 수 있게 되었다.

밀스는 사무직 근로자가 조직의 목적에 적합한 사람이 되도록 조직에 의해 심리적으로 강요당하며, 자신의 개성을 팔아버렸기 때문에 이후 일 외의 부분에서는 천박하고 보잘것없는 삶을 살도록 운명 지워진다고 주장했다. .. 밀스가 설명하듯이, 일은 가정생활과 공동체 내애서의 생활을 향상시키기보다는 파괴한다. .. 밀스와 같은 비평가들이 실제로 우려하는 것은, 근로자들이 이로 인해 시간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 미치는 조직의 영향력으로 인한, 일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개인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163-164

 

데이비드 리스먼이 1950년에 출간한 책 <고독한 군중>

이 책 속의 타인 지향의 생활: 보이지 않는 손에서 악수하는 손까지라는 장에서, 리스먼은 타인 지향적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공예 기술보다는 사람 다루는 기술을 더 강조하고, 은행계좌의 잔고보다는 교제비를 더 중시한다고 주장했다. 일은 재미있는 것으로 가정되고, 관리자들은 비서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사장과 고객들을 기쁘게 하는 악수하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리스먼에 따르면, 타인 지향적 사람은 회사에 우선적으로 속하고, 가정과 교회, 공동체에는 더 얕게 뿌리내리는 경향이 있다.

1950년대 후반의 직장은 오늘날의 직장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 “사회윤리이러한 윤리는 조직의 충성 요구를 합리화하고, 진심으로 스스로를 희생하는 고용인들에게 헌신하고 있다는 느낌만족을 준다. 이러한 윤리에는, 집단은 창조성의 원천이며 개인은 궁극적으로 소속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리고 경영학 분야에서 일하는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들이 그러한 소속감을 창출하는 방법을 고안할 수 있다는 믿음이 포함된다. 165

 

1950년대의 사회 비평가들은 사람들이 조직에 순응하는 것, 그리고 새로 등장한 교외생활의 가치에 대해 걱정했다. 오늘날 우리는 합의된 가치의 부재와 도시 및 교외 공동체의 파괴를 우려한다. 직장에서는 여전히 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이 증가하고 있고, 집단의 가치가 강조된다. 누구도 창조성의 상실이나, 개인의 정체성이 집단의 정체성에 종속되는 문제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듯하다. 경영자들은 팀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의 문제에 보다 큰 관심을 갖는다. 너무나 많은 그들의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오늘날 경영 이론가들은 집단과 팀이 모든 바람직하고 생산적인 것의 토대라고 믿는다.

와이트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릇된 집단화에서 가장 잘못된 시도는 집단을 창조적 도구로 보려는 시도이다.” 오늘날 인기 있는 경영 개념과는 반대로, 와이트는 사람들이 집단 내에서 제대로 사고하거나 창조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집단은 단지 일의 시행을 지시할 뿐이다. 166

 

와이트의 책 이후로, ‘팀의 영광(glories of teams)’에 대한 끝없는 저작과, ‘집단에 대한 엄청난 양의 연구가 쏟아졌다. 오늘날 조직의 수사학(rhetoric of organizations)은 팀, 파트너, 가족, 동료와 같은 단어를 포함한다. 그러나 단결된 조직과 팀이 일을 하거나 의사결정을 하는 데 늘 최상의 방법인 것은 아니다. 어빙 제니스 같은 연구자들은 우리에게 집단적 사고의 불이익을 경계하라고 충고했다. 집단적 사고 강태에서 한 집단의 구성원들은 비슷하게 사고하기 시작하고,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보지 못하게 된다. ...

조직은 더 이상 와이트가 자신의 책에서 논의했던 인성 검사를 실시하지는 않지만, 대신 마이어스브리그스 유형지표(MBTI ; Myers-Briggs Type Indicator) 같은 다른 유형의 검사들을 실시한다. 이것은 개인의 성격 유형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지표이다. 167

 

일부 조직들은 순응적인 고용인을 선택하기 위해 아직도 검사를 이용하고 있다. 168

 

와이트가 보기에 인성 검사는 개인의 자율성과 사생활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러나 많은 고용인들은 그러한 검사를 자기 인식 및 발전을 위한 도구로 여긴다. 별자리 운세나 성적 매력에 대한 잡지 퀴즈들처럼, 심리 검사는 내적인 자아를 명확히 보여줄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문제는 우리가 직장에서 그러한 검사를 받게 되면, ‘자기 인식을 얻은 대가로 자기 노출과 어쩌면 부당한 분류깢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

책의 결론 부분에서 와이트는 독자들에게 조직과 싸울 것”, 그리고 회사의 순응 요구에 말려들지 말 것을 권고한다. 168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욕구 단계” ...

욕구야말로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전부라고 가정하는 것은 인간의 열정, 이상, 가치가 갖는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자신의 가치나 자신에게 중요한 것에 기반한 선택을 한다. .. 우리는 우리가 가치있게 여기는 것을 선택한다. .. 피라미드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우선순위를 갖고 있는 고용인들은 경영진에게 악몽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조직이 줄 수 있는 것, 즉 소속감과 명성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172

 

일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의미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들로부터 다양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다른 사람들과 일할 때, 우리들 대부분은 적어도 일정 기간 동안은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우리가 걸치는 페르소나와 허용되는 감정의 범위는 직업에 띠라 달라진다. 181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하는 동안 자기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서비스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특정한 감정 상태를 지녀야 한다. 과거의 서비스 분야 종사자들은 정중해야 했다면, 오늘날에는 친절하기까지 해야 한다. 알리 러셀 혹실드는 그녀의 도발적인 책 <감정의 통제>에서 ...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제품을 생산하는 데 지적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서비스를 제공할 때 자신의 실제 감정을 항상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서비스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은 자신의 존재와 아무 상관도 없는 무언가를 마지못해 생산하고 있다고 느낀다. 182-183

 

유리는 매일 상업화된 개별화와 쾌활함, 친절함에 노출되어 있다(비록 어떤 경우, 이러한 감정은 상당히 진실된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서비스의 즐거운 얼굴(happy face)” 관점은 정중함과 공손함 이상의 것이다. 183

 

 

8 유망한 직장

 

1980년대에는 수많은 최신 경영 방법들이 엄청나게 유행했다. .. 직장 민주주의 실험이 쇠퇴했음에도, 많은 회사들은 고용인들에게 권한을 주거나일에 대한 더 많은 발언권을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학자들은 점점 더 많은 근로자들이 일에서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지식노동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해싿. 1980년대가 되자, 일은 매력적이고 재미있으며 흥미로운 것처럼 보였으며 직장은 마치 행복한 대가족인 듯했다. 187

 

하버드나 와튼 같은 주요 경영대학원들은 그러한 주제에 대한 강의를 들으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6년까지, <포춘>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의 75%사명선언문이나 윤리강령을 갖고 있었다.

윤리강령에 대한 관심이 1980년대에 높아진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일부 회사들은 부정적인 보도 추무느 소소으 불법 활동들에 대해 염려했다. 또 다른 회사들은 고용인들이 다양한 배경과 가치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통된 윤리적 가치를 진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대중 및 고객과 즇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바람을 가진 일부 기업들은 윤리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말뿐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체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사는 윤리강령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막연하게 느끼는 기업 지도자들도 있었다. 188

 

노예제도와 계약노예제도, 그리고 과학적 관리법을 거친 1980년대 중반의 기업들은 과연 이상적인 직장이 되었을까? 189

 

1980년대의 잘 팔리는 경영학 서적들에서 자주 몸델로 제시되었던 회사들은 휴렛팩커드, 존슨 앤 존슨, 리바이 스트라우스, AT&T와 같은 존경받는 성공한 기업들이었다. 또한 경영학 연구에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기업드로과 잘 팔리는 경영학 서적을 쓴 컨설턴트의 고용주들이 이런 책에 자주 등장했다. 이들 회사는 경영 혁신의 성공을 증명한다. 한편 이러한 상황은 대기업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자금 지원을 받은 경영학 연구가 과연 객관성을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질손의 견해가 여전히 타당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또한 조직 내의 힘, 권력, 갈등에 관한 질문들이 왜 경영학 교과서나 대중 문학에서 논의되는 일은 드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을 수 있다. 190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 그리고 주로 일본과의 세계경쟁에 의해 많은 기업들이 황폐화되었던 1980년대에 경영자들은 좋은 충고를 갈망했다. 시장에는 경영자들의 사기를 향상시키고 근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쓰여진 경영학 서적들이 일시적으로 넘쳐났다. 191

 

<초우량 기업의 조건>은 분명 1980년대의 가장 중요한 경영서였다. ..

피터스와 워터만은 조직 속에서의 경영자 역할이 기업문화를 형성하고, 고용인들에게 의미를 창출해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피터스와 워터만은 가치, 상징, 이데올로기, 언어, 신념, 의식([儀式 거동의 법식), 그리고 조직의 신화를 의미하는 말로 기업문화를 사용했다. .. 피터스와 워터만은 직장 민주주의를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통제되고 잘 조직화된 체계 내에서 자신의 일을 잘할 수 있는 자유를 강조했다. 그들은 무엇이 고용인들을 흥분시키는 지 알아내고 조직내에서 호손 효과를 의도적으로 지속시키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고용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92-193

 

1982년에 출판된 텔렌스 E. 딜과 앨련 A. 케네디의 <기업문화>.. “강한 문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하는 일을 더 기분 좋게 느끼도록 만든다. 따라서 그들은 더 열심히 일하는 경향이 있다.” ... 딜과 케네디는 강한 기업문화가 고용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 즉 구조와 가치 체계, 그들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회사에 소속되었다는 자부심 등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삶에서 불확실성을 제거해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위 고용인들이 인식하고 있는 문제점들 중 일부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았다. 과연 고용인드르의 개인적인 취미는 무엇이며, 그들이 거기에 시간을 쓰는 것이 왜 잘못되었는가? 우리는 우리 삶의 가치를 확신하고있어야 하는가? 193-194

 

강한 기업문화의 커다란 이점은 그것이 포괄적이고 자동 조절되는 사회 체제라는 점이다. 불리한 점은 그것이 억압적인 동시에 변화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부정적인 면은 고용인들이 충분히 일 바깥에서 충족시킬 수 있는 욕구, 예를 들면 우정의 욕구 같은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점점 더 일에 의존하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당신이 실직하게 되면 당신은 이로가 소득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195

 

로버트 하워드는 <놀라운 새 일터>에서 새로운 조직은 일터를 보다 인간적으로 만듦으로써 다시 마술에 걸리도록 시도하는 조직이라고 주장했다. .

하워드의 놀라운 새 직장에서는 도넛 타임이나 맥주 파티 같은 사교 모임들이 의사소통을 증진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임에 참석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일종의 억압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장치들은 팀 정신과 조직에 대한 헌신을 끌어내기 위해 적절히 이용되었다. .. 기업문화가 다양한 노동자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더라도 여전히 모든 살마들은 함께 도넛을 먹어주어야 한다. 마법에 걸린 회사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종류의 일을 하도록 요구한다. 본래의 업무와 이러한 사교생활에 참석하는 일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두 가지 일 모두에 대해 평가를 받는다. 에티켓 전문 작가인 주디스 마틴(“미스 매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업무상 사교(business entertaining)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줌으로써, 직무관계(business dealing)에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 충성같은 사회적 기준을 적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업무상 사교는 모순 어법이다. 196-197

 

프레더릭 윈슬로 테일러가 말한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조직에서 일터는 ... 힘과 통제의 관계가 명확했다. 주어진 기능을 수행하면 될 뿐 자아를 요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 단순하고 눈에 보이는 세계이다. 하지만 이제 더욱 고달파지고 둔감해진 일의 세계에서는 직업을 계속 유지하는 것 자체가 유인(誘引)이 된다. 197

 

존 미클스웨이트와 애드리언 울드리지는 자신들의 책 <주술사들>에서, 오늘날에는 너무나 많은 경영 이론들이 있으며, 그들이 서로 모순되곤 한다는 점을 지적햇다. 예컨대 어떤 이론은 독특한 기업문화일수록 좋은 것이라 말하고, 다른 이론은 다문화적인 기업일수록 좋은 기업이라고 말한다. 한 이론은 (quality)’’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다른 이론에서는 중요한 것은 속도라고 말한다. .. 경영학 이론의 유행 주기는 10년에서 1년으로 짧아졌다. 컨설팅 회사 베인 앤 컴퍼니25개의 인기 있는 경영학 이론들을 골라, 기업들이 얼마나 많은 이론들을 자신들의 업무에 적용하는지에 대한 조사를 전세계에 걸쳐 실시했다. 조사 결과, 1993년에는 평균 11.8, 1994년에는 12.7개의 이론이 사용되었으며, 1995년에는 그 수가 14.1개로 증가할 것이라고 베인앤 컴퍼니는 추정했다. 제너럴 일렉트릭 사의 CEO인 잭 웰치는 기업이 서로 다른 경영 아이디어들을 시도해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고용인들에게도 유익할까? 201

 

1980년대, 그들은 조직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회사의 사교 모임에 참여했다. 1990년대, 이제 훈련은 팀 만들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202

 

경영학에서의 일시적 유행과 관련된 문제점은 그들이 종종 무비판적이고 역사적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경영 이론가들은 일에 대한 동일한 사실을 반복해서 발견하고, 그것을 발견할 때마다 매번 또다시 기뻐한다. ‘팀워크1980년대와 1990년대 경영자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던 커다란 ()개념들 가운데 하나이다. 203

 

미클스웨이트와 울드리지는 오늘날 스포츠팀은 점점 더 사업가처럼 활동하는 반면, 회사 조직들은 고용인들로 하여금 보다 더 스포츠팀처럼 행동하도록 장려한다며, 이런 상황이 얼마나 반어적인지에 주목한다. ..

팀은 문화보다 훨씬 더 강력한 형태의 사회적 통제를 가능하게 만든다. 204

 

고용인들이 협력을 얻어내는 것은 항상 도전이었다. 많은 회사들이 팀을 만들어 이끌거나 코치하는 법을 배우는 데 투자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205

 

팀 지도자들은 팀과 한몸이 되어야 하는 반면, 팀 구성원들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205-206

 

딜버트 만화는 이러한 태도를 가장 잘 요약한다. 딜버트의 상사가 고용인들에게, 그들을 빠르게 움직이는 팀으로 재편성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자, 고용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좋은 계획이네요 우리가 스스로를 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그 다음엔 우리가 무기력하고 세밀하게 조종되는 노예라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할 테니까요.” 206

 

1980년대의 경영 이론들 중에서 종합적 품질경영(TQM; Total Quality Management)만큼 열렬히 신봉된 것은 없었다.. ..이것은 품질관리가 전 과정에 걸쳐 이루어져야 하지, 과정의 마지막에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208

 

만약 제품의 질을 향상시키면 생산성도 향상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완제품에 대한 품질관리를 하는 대신 전 과정에 걸쳐 품질관리를 하라는 것이다. 209

 

미국 정부는 TQM을 채택하고 장려했다. ...

리처드 J. 피어스는 TQM과 리더십에 관한 자신의 책에서 현장 관리자들이 지도자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 피어스는 계속해서, 근로자들 또한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분야에서 품질 성과를 개선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기는 해도, 아무런 부가적 보상을 가져오지 않을 것(“내게 무슨 득이 돌아오나요?”)이다. 그렇지만 생산성 및 품질의 개선은 장기적으로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 필요가 있다. .. 당근을 대신하는 채찍(혹은 숨겨진 위협)인가? TQM의 이면에는 기술에 대한 자부심과, 제대로 행한 일은 본질적으로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을 포함한 장인윤리의 회복이라는 고귀한 정신이 존재한다. 210-211

 

데밍이 원래 제시했던 품질경영의 열네 가지 본질적 요소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이 회사를 위해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두려움을 몰아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직장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직장에서의 두려움에 관해 연구한 캐슬린 D. 라이언과 대니얼 K. 오스트리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복과 앙갚음, 그리고 징계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두려움을 낳는 또 다른 원인들은 조직 내에서 사람들이 논의하기 두려워하는 것, 논의 불가능한 것들에서 발견된다. 22개 조직의 260인을 대상으로 한 라이언과 오스트리치의 조사에서 가장 논의 불가능한 것으로는 사장의 경영 방식이 꼽혔다. 그 다음으로는 동료의 서오가와 보상 및 급여가 차지했다. .. 생산성 증가는 팀워크코칭과는 전혀 상관없는, 두려움 같은 요인들의 결과일 수 있다. .. TQM을 비롯한 경영 혁신들은 사람들에게 일을 더 나은것으로 만들어주었는가? 다시 말해 일은 보다 즐겁고, 의미 있고, 유익한 것이 되었는가? 이러한 새로운 제도들은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해주었는가? 그것들은 약속했던 모든 것-권한위임, 훈련, 팀 구성원이 되는 기쁨-을 주었는가? 213-214

 

리엔지니어링(Reengineering)20세기의 마지막 주요 경영 이론으로서 과학적 관리법과 적절한 대조를 이룬다... 리엔지니어링은 일련의 과업들이 한 사람에 의해 행해질 수 있도록 조정하는 새로운 기법을 사용했다. 과학적 관리법은 근로자들을 전문가로 변화시키고, 일을 지루한 것으로 만들었다. 리엔지니어링은 고용인들을 만능일꾼으로 만듦으로써 일을 보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것으로 만든다. ...

리엔지니어링은 마이클 해머와 제임스 챔피의 공동 작품이다. ..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모든 경영 혁신들 주에서, 리엔지니어링은 한 개인이 하는 일을 보다 흥미롭게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214-215

 

한때 지시받은 대로 일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다... 경영자들은 이제 감독관처럼 행동하지 않고 코치처럼 행동한다. 근로자들은 상사에게 덜 신경 쓰는 대신 소비자의 욕구에 더 신경을 쓴다.’ ..

해머는 리엔지니어링은 더 적은 인원으로 더 적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구조조정이나 조직개편과는 다르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리엔지니어링은 더 적은 인워능로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다. 216-217

 

 

9 배신하는 직장

 

1990년대 중반의 많은 미국인들... 회사에서 해고당한다. .. 그들은 회사가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일을 해치우고 싶어했기때문에 직정을 잃은 것이다. 그들은 세계경제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여성들과 소수민족의 사람들도 해고를 당했으며...직장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 소득, 연금, 친구, 평판, 심지어 가족까지 잃는 일도 있다, 그들이 일한 세월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조직이 약속했던 것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일만 잘하면 은퇴할 때까지 직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묵언의 사회적 꼐약을 고용주들과 맺었던 것이다. ...

해고의 아픔을 극복하고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기술을 배워 더 나은 직장으 얻은 사람들에 대한 좀더 유쾌한 이야기도 있다. .. 그러나 이들 성공 스토리에 등장하는 사람들조차도 이전 직장에서 누렸던 것과 같은 생활 수준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1995년 노동부는 실직 노동자의 35%만이 동일하거나 더 나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 직장을 얻게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221-222

 

어떤 이들은 구조조정이 올바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잘못될 것이 없다고 좋아한다. ..

1990년대의 커다란 아이러니 중 하나는 실제 경영에 있어서는 구조조정을 강조했던 반면, 당시의 경영서들과 경영학적 수사법들은 헌신”, “충성”, “신뢰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

헌신은 노동력을 줄이고, 근로자들의 작업량을 두 배로 늘린 회사들이 특히 필요로 하는 덕목이었다. 222-223

 

구조조정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존재했으며 강한 노동조합에 의해 강화되어온 노동의 암묵적인 사회계약을 변화시켰다. ..

사회적으로 구조조정은 근로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알고 있었거나 의심해온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 고용주들과 경제는 변덕스러우며, 당신은 조직에 너무 많은 것을 투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말이다. .. 산업화와 더불어 근로자는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취급받았다. 225

 

근로자에 대한 배신에 있어, 구조조정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 지난 20년간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기업들은 고용인들과 이윤을 공유하기는 커녕, 시장과 주식시장에서 거둔 성공을 치하한다며 임원들에게만 막대한 상여금과 스톡옵션을 주고 있다. 226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고든은 저서 <살찌고 비열한>에서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갖고 있는 경제적 문제들의 주요 원천은 대부분의 미국 기업들이 고용인들을 다루는 방식과 비대한 관료주의를 유지해온 방식에 있다고 주장했다. .. 대중은기업의 이윤과 중역들의 보수는 증가하지만 자신들의 임금은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정체되거나 하락한 임금을 설명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끌어들이는 혐의는 세계 노동시장에서의 경쟁이다. ..

경제학자 제임스 K. 갤브레이스는 정부가 부자들의 편에 서 있는 탓에 중산층과 빈자들을 위한 정책에 실패하여 임금 및 소득의 불평등이 증가했다고 비난한다. 227

 

1974CEO들은 평균적인 근로자보다 40배나 많은 돈을 벌었다. .. 1999년 노동조합 단체인 페이워치(Paywatch)CEO의 평균 급여가 공장 근로자 평균 임금의 326배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급여 전문가인 그래프 S. 크리스탈은 이렇게 말한다. “CEO의 급여는 너무 빨리 오르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더는 놀라지 않는다.” 228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 기분 좋게느끼게 만듦으로써 고용주들은 근로자들의 내게 무슨 득이 돌아오느냐?”고 묻지 않도록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현혹시킨다. .. 오늘날에도 불성실한 경영자들은 갈등과 사기 문제를 피하기 위해 근로자들에 대한 평가를 부풀린다(이것은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영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임금 인상은 억제되었고, 노동조합 참여는 감소했으며, 남아 있는 노조들의 힘도 약해졌다. 힘의 균형은 압도적으로 고용주에게 유리한 상태가 되었다. 229

 

엘튼 메이오의 시대 이후 경영진의 목표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돈을 덜 주면서 더 많은 일을 시킬 수 있을까?”였다. 연구 결과는 월급 인상이 반드시 사람들을 더 열심히 일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니며, 근로자들은 자신의 성과에 대해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어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직장에서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주되니 이유가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한다는 느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TQM이 너무나 효과적으로 실행되어서 근로자들이 실제로 내게 득이 되는 게 뭐죠?”라고 묻지 않는 일이 이제 가능해진 것인가? 그들은 정말로 업무 품질에 대한 인정만을 바랄 뿐 보수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가? 231

 

일을 보다 흥미롭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본래 그 자체로는 훌륭한 의도이다. 그러나 근로자들이 부당한 임금을 받고도 열심히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 일을 더 그럴듯해 보이게 하는 것은 착취이다. 232

 

미래의 불확실성에 근거한 미묘한 두려움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일에 매달리도록 만든다. 우리들 대다수는 어떤 막연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더 오랫동안 일한다....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와 달리 두려움의 노동윤리는 구원의 희망을 약속하지 않는다. 단지 좀더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시장은 변덕스러워서 개별 고용주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오늘날 고용주는 사람들을 해고할 때 미안 하네, 경기가 안 좋아서...”라든지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지 않으면 경쟁할 수가 없네라고 이야기한다. 좌절한 실직자들은 누구를 비난하고, 누구에게 소리쳐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경영자들이나 정치가들을 비난할 수 없다. 그들 역시 세계경제를 통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직한 근로자들은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초점 잃은 분노를 품는다. 확정되지 않은 미래의 언젠가, 그들의 회사를 보다 경쟁력 있게 만들기 위해 그들의 삶은 혼란에 빠진다. 235

 

만약 카를 마르크스가 오늘날에도 살아 있었다면 그는 혁명을 요구했을 것이다. - “전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너희들이 잃을 것은 구속뿐이다.” 그러나 칸막이나 팀 안에서 일하는 오늘날의 근로자들은 단결할 수도 없고, 단결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잃을 것이 있다. 바로 그들의 직장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파업이나 저항 운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

냉소주의자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고, 단결하여 조합을 형성하지도 않고, 저항하지도 않기 때문에, 혁명론자들보다도 함께 일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대신에 그들은 봉급을 받을 때 수동적인 저항과 비웃음으로 침묵의 파업을 행한다.

복지 혜책의 과감한 삭감, 더 긴 노동시간, 증가된 노동량, 구조조저으 그리고 급등하는 중역들이 보수에 대한 근로자들의 공공연한 침묵은 우리의 귀를 멀게 한다. 238



PART ONE 일의 의미와 역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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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일의 의미, 삶의 의미를 찾아서

 

우리가 가진 모든 연장들이 우리의 명령에 의해서든, 스스로 필요성을 인식해서든, 알아서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라... 베틀의 북이 혼자서 앞뒤로 움직이고, 연주자가 저절로 움직이는 리라를 연주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면 공장주들은 더 이상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노예의 주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쉬지 않고 일하는 로봇들에 의해 자동화된 공장을 보며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다수는 그렇지 않다. 이 시대를 기쁨으로 맞이하는 대신, 우리는 전보다 더 필사적으로 일(work)에 매달린다. 우리 사회는 일을 지향하는 사회이다. .. 우리는 일을 축복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일을 없애려고 하는 모순적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8

 

이 책은 우리 삶에서 일과 직장이 갖는 의미에 관한 책이다. 8

 

일은 우리의 지위뿐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까지도 결정한다.

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시장이나 고용주의 손에 맡겨두는 결과를 가져온다. 괜찮은 삶을 사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 이상의 것(something more)’을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용주들은 자기개발이나 자아실현 같은 다양하고도 추상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방법을 찾는다. 9-10

 

오늘날의 일은 대부분 우리 사생활의 일부를 포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과거의 노동자들이 단지 과로했을 뿐이라면, 오늘날의 많은 노동자들은 과로할 뿐 아니라 과도한 통제를 받고 있다. 14

 

 

 

PART ONE 일의 의미와 역사

 

1 왜 일하는가?

 

잠시 동안 일하지 않는 생활을 상상하기는 쉽지만, 평생을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어떤 사람들에게 왜 일하는가?”라는 질문은 우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한 선택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합니다.” 이것이 대다수 사람들이 유급노동을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종류의 일을 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19

 

윌리엄 줄리어스 윌슨은 그의 저서 <일이 사라졌을 때>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일자리가 부족하면 사람들은 단지 빈곤으로 고통을 겪을 뿐 아니라 공식적인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소소감을 상실한다. 더는 일이 그들의 생활을 규제하는 규칙적인 힘으로 작동하기를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윌슨에 따르면,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단지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일은 규율, 소속감, 규칙성, 자기 효능감 같은 다양한 심리적 사회적 욕구를 만족시킨다. 그러나 과연 일이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가? 왜 실직자들은 여가를 통해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가? 20-21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직자들이 여가를 갖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또 다른 통찰을 제시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는 평화나 적당한 미덕, 교육이 없이는 여가도 가질 수가 없다. “비즈니스에는 용기와 인내가 요구되며, 여가를 위해서는 철학이 요구된다. 절제와 정의는 두 가지 모두에 필요하지마 특히 평화와 여가의 시기에 더욱 요구된다. 절제와 정의는 두 가지 모두에 필요하지만, 특히 평화와 여가의 시기에 더욱 요구된다. 왜냐하면 전쟁은 사람들을 공정하고 절제하도록 만드는 반면, 평화와 함께 찾아오는 상당한 재산과 여가는 사람들을 오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2

 

두려움, 물질적 필요, 책임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여가를 통해 스스로를 계발하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여가를 위한 교육을 통해 스스로에게 유익한 학습과 활동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인간을 동물과 구별짓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활동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들이 읽기, 쓰기, 미술, 신체적 훈련, 음악 같은 과목들을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교양인 학계(liberal arts)’의 기초가 된다. 로마의 키케로도 학예가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교육에서, 삶의 필수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진리와 그 자체로 추구할 가치가 있는 지식을 분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론적으로 볼때 교양은 일하는 방법이 아닌, 여가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

여가는 단순한 자유시간이상이다. 그것은 일에 대한 욕구와 필요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이며, 특정한 일으르 하기 위한 기회이다. 직업을 이맇었거나 직업을 가질 수없는 사람들은 결코 일에서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일할자유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선택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23

 

인간의 가장 흥미롭고 독특한 점은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난 에도 스스로 일하기를 선택한다는 점이다. 24

 

일을 통해 소득을 얻는다는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직업을 갖는 것이 우리 문화에서 그토록 바람직한 이유는 명백하다. 일은 우리에게 유용하기 때문이다. 일은 규율과 정체성, 가치를 제공한다. 일은 우리의 시간을 조직하고 우리의 삶에 리듬을 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이 우리에게 매일매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 준다는 점이다. 교육과 소득, 평화와 안전이 주어진다 해도, 유급노동이 일의 중심이 되는 문화에서 자발적으로 일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매일매일을 만족감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활동으로 채울 수 있을까? 우리들 대다수는 그것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일을 통해 만족과 행복을 얻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일은 우리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준다. 그러나 인간이 일 자체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많은 학자들을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장 자크 루소는 게으름이야말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생산활동의 필요성은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부지런한 습관은 일이 가져다주는 산물이며, 우리가 일을 통해 얻는 실용적인 교육이 무언가를 해야 할 필요성과 바쁜 습관을 만들어낸다고 저술하고 있다. 요컨대 우리는 타고난 기질 때문이 아니라, 훈련과 도덕적 조건화로 인해 일할 필요성을 느낀다는 것이다. 25-26

 

일의 의미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일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27

 

개미와 같은 이런 유형의 사람은 은퇴를 위해 저축하며, 남은 20년 동안 이전의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바라면서, 삶의 45년 내지 50년 동안 어느 정도의 즐거움을 저당잡힌다. 32

 

개미는 미래를 위해 살지만, 막상 미래가 왔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항상 아는 것은 아니다. 33

 

개미와 달리 베짱이는 현재를 위해 살고 미래를 희생한다. 그의 놀이는 아무데에도 이르지 못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노는 삶에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 있는 삶인가? 꿀벌은 개미처럼 일하면서도 베짱이처럼 자신이 우추구하는 것을 즐긴다. 꿀벌은 다른 사람들이 고맙게 여기는, 훌륭하고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데서 기쁨을 얻고 의미를 찾는다. 꿀벌은 유용하고 보상을 주는 일을 상징한다(물론 실제 꿀벌의 삶은 이야기 속의 꿀벌의 삶과는 전혀 다르다). 개미는 일하는 삶, 안전한 삶의 표본인 반면, 베짱이는 놀이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경솔한 삶을 대표한다. 그렇다고 해서, 베짱이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34-35

 

버나드 수츠 <베짱이의 놀이, , 유토피아>.. 수츠의 주장에 따르면, 당신은 다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에만 일하면서 놀 수가 있다. 첫째, 당신은 일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둘째, 당신은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방식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

이솝 우화의 꿀벌은 개미처럼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개미와 달리 꿀벌은 꿀을 만드는 과정 자체를 즐기거나, 꿀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즐기거나, 여전히 꿀 만들기를 즐긴다. .. 몇몇 생산적인 활동은 필요성은 없으나 만족을 준다. 36

 

매미의 노래처럼, 놀이를 하는 유일한 목적은 즐거움이다. 이솝 우화 속의 베짱이는 무책임해서 굶어 죽지만, 매미는 배고픈 예술가로 그려진다. 매미는 음악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굶어 죽는 것이다. 두 개의 우화는 서로 다른 메시지를 전달한다. 예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반면 일보다 노래를 더 좋아해서 죽는 것은 어리석다. 우리들 대다수에게 더욱 적절한 질문은 만약 당신이 개미처럼 산다면, 즉 나이 들어 쇠약해질 때까지 일해서 돈을 저축한다며, 그것은 의미 있는 인생인가?”이다.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주어진 시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37

 

일은 일 이외의 삶을 잠식한다. 일 이외의 삶은 일하는 삶보다 더 많은 것을 제공한다. 44

 

 

2 일이란 무엇인가?

 

일의 의미를 탐색하기 위한 좋은 출발점은 일(work), 노동(labor), 수고(toil), 업무(job)와 같은 단어들의 뜻을 살펴는 것이다. 우리가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정의하는 방식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어휘 사용이 시간이 지남따라 그 단어의 집합적인 이용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46-47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거나, 어떤 것의 이름을 바꾸는 행위는 잠재적으로 강력한 행위이다. 당신이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은 그것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48

 

일에 붙는 직함이나 사람들이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용어들은 직장에 대한 개념도를 형성한다. 고용주가 조직문화를 바꾸고자 할 때, 그들은 자주 재명명 방법을 사용한다. 49

 

필요성’.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 그것을 반드시 해야 하거나,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51

 

모든 문화에서 일에 대한 태도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태국어에서는 을 뜻하는 단어와 파티를 뜻하는 단어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

태국 사람들은 일이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며, ‘일 자체는 좋은 것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도 태국인들은 결코 게으르지 않다. 그들의 문화는 재미를 뜻하는 사눅(sanuk)’에 큰 가치를 둔다. 모든 활동은 사눅(재미있는)’마이 사눅(mai sanuk:재미없는)’로 구분된다. 사눅은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근심없는 즐거움을 뜻한다. 일이건 놀이이건 상관없이 어떤 활동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속성이 바로 사눅이다. 가령 태국의 어느 마을주민에게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하는 단조로운 업무가 주어진다면, 그는 그 업무를 팽개치고 가버릴 것이다. 그것은 사눅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그 사람은 여러 날 동안 쉬지 않고 마을이 사원을 짓는 일을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일에서는 사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태국에 처음 공장을 지었을 때, 그들은 사눅의 중요성을 발견했다. 사실 초기에는 태국인들이 그다지 열심히 일하지 않았으며, 특히 아침마다 차려 자세로 서서 사가(社歌)를 부르는 의식을 싫어했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관습을 버리고 공장에서 음악을 틀어주기 시작했드며, 더 많은 휴식시간을 주고 작업중에 할 수 있는 놀이도 가르쳐주었다. 태국인들의 의식 속에서 일이 사눅이 되자 생산성이 증가 했다. 일과 놀이에 대한 태국인들의 태도는 같다. , 작업 파티는 생일 파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53

 

(work)은 너무나 다양한 것을 의미한다. 정말이지 대단한 단어이다. 우리는 일(work)하고일터(work)간다.’일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하는것이며, 우리가 만들어내는것이다. 미술 건축 음악 문학 작품(work)’도 있다. 우리는 의사, 회계사, 자동차 수리공이나 카펫 판매원의 솜씨(work)에 감탄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공간이나 나뭇조각, 빵 반죽, 고장난 자물쇠 등을 가지고도 일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의 해답을 내거나(work someone over), 운동을 하거나(work out), 좋은 일을 하거나(do good works), 누군가를 때려주거나(work someone over), 흥분하거나(get worked up), 자칫하면, 심지어 일벌레(workaholics)까지 될 수 있다.

이라는 단어는 동사이자 명사이며, 활동이자 활동의 산물이기도 하다. 55

 

노동(labour)’이라는 단어는 14세기 영어에서 최초로 등장했다. ..

동사노서의 노동(labor)은 행위만을 나타낼 뿐 행위의 대상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지만, 우리는 그가 딸기를 만들었다:고 말하지 안흔다. 비록 그의 행위가 딸기를 따는 이주 노동자보다는 훨씬 더 딸기를 만든 것에 가깝더라도 말이다. 화가가 그림 그리는 행위를 통해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노동하는 사람들은 대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는 육체적인 일을 하지만 직접 그것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56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노동,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필요한 물건을 다루는 일을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하는 하인의 일과 같다고 생각했다. 노동과 일은 두 가지 요인에 의해 구분된다. 첫째, 노동은 일에 비해 육체적 노려고과 더 크게 관련된다. 둘째, 노동자와 노동 대상의 관계는 일하는 사람과 그 대상과의 관계와 다르다. ..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노동자의 첫번째 정의는 봉사행위로서, 혹은 생계를 위해 육체적인 노동을 행하는 살마인 반면 일하는 사람의 첫 번째 정의는 만들거나 창조하거나 생산하거나 고안해내는 사람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노동이라는 단어가 로 격하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이 한 개인에 의해, 그리고 개인을 위해 행해지는 것인 반면 노동이라는 단어는 무언가를 만들거나 행하는 데 대한 개인의 기여를 암시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용어라고 말했다. ‘은 노동의 산물을 나타내는 명사이지만 노동은 일하는 사람들을 나타내는 명사이다. ‘노동은 육체적인 일을 하는 살마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반면, ‘은 다양한 행위나 그러한 행위의 대상을 가리킨다. 우리는 일조합이 아닌, ‘노동조합을 결성한다. 대부분의 조직에서 일은 협동적이며 상호 의존적인 사람들의 집단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터라는 말 대신 일터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집합적이고 육체적인 일보다는 개인적이고 비육체적인 일을 강조하는 것이다. 57

 

노동이나 수고같은 단어어비해 업무(job)’라는 단어는 상당히 유쾌하게 들린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명사 ‘job’덩어리(gob)’라는 단어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려준다. .. 17세기까지.. ‘업무란 영구적인 고용이 아니라, 일시적인 일을 의뢰받거나 잠시 고용되는 것을 가리켰다. 60

 

업무라는 단어는 대개 명사로 사용되는 반면 일하다라는 동사의 형태와 그들의 일에서와 같은 명사의 형태가 거의 비슷하게 사용된다. .. ‘업무의 또 다른 차이는 일은 보수를 받는 것과, 받지 않고 행하는 활동까지 가리키는 반면, ‘업무는 보수나 소득을 얻는 일에만 구체적으로 관련된다는 것이다. 61

 

업무라는 단어는 보수를 받기 위해 하는 도구적인 활동을 나타낸다. 그것은 일, 노동, 수고, 고역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업무의 정의는 일하는 살마과 그 산출물 간의 연관성을 암시하지 않는다. .. 일의 양에 대해서 ..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이 보수를 받기 위해 하는 한정된 양의 활동이라는 점이다. 62

 

 

3 일의 역사

 

살기 위해 일한다는 우리의 인식은 어떻게 해서 일하기 위해 산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을까? 64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일은 저주였다. ... 기원전 4세기의 역사가인 크세노폰은 사람들이 생의 좋은 것들을 누리는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 일이라고 기록했다. 만약 일이 신들의 저주라면, 그것은 정복당한 적이거나 포로가 된 외국인, 혹은 노예의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저주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편이 가장 낫다. 노예는 부유한 고대 그리스인들을 일에서 해방시켰다. 그리스인들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활동을 노예의 일로 여겼다. 노예제도는 인간의 지위를 강등시켰을 뿐 아니라 일의 사회적 도덕적 가치까지도 격하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이란 가능하면 노예들에게 떠맡겨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이득을 얻기 위해 하는 일은 그 자체로 저주가 되리 수 있다고 믿었다. 재산(땅과 노예들)을 소유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이 두 가지야말로 그가 생각한 인간적인 삶의 기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집 안에서 사용할 물건을 만드는 일과 상업적 이득을 위한 일을 구분했다. 그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기 위해 집에서 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인간의 필요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도 유한하다고 말했다. ..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소매업이나 금전적인 이득을 위한 일은 인간의 욕망(want)을 위해 실행되는 것이므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욕망은 인간의 필요(need)와 달리 무한한것이다. .. 돈을 벌거나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는 것 자체에만 열중할 뿐 잘 사는데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 어떤 것을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여가 활동의 정의이다. 게다가 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는데, 그들이 원하는 것과 그것을 얻기 위한 일은 결코 중단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65-66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개인의 생각과 견해가 그의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 평범한 거리의 그리스인은 유용한 상품을 개발하는 것에 대해 이러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을 것 같지 않다. 물론 우리는 그들이 정말로 그랬을지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평범한 살맘들은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을 하기 전에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원전 여러 동양 문화에서도 물질적인 세계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세계보다 덧없고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들이 을 경멸한 것은 아니다. 67

 

정신적 수양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이었다. 일의 과정은 결과보다 더 중요했다. 부처에게는 바닥을 쓸고 닦고 연료를 모으는 것 같은 가장 비천한 일조차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었다. 68

 

종교나 문화에 따라 일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혹은 중립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문화 내에서도, 서로 다른 종류의 일은 상이한 영적 도덕적 사회적 가치를 지닐 것이다. 모든 사회에는특정 유형의 일에 대한 고유한 편견이 존재한다. 68

 

고대 그리스인들은 다른 살맘들에 대한 봉사와 일반적인 육체노동에 대해 강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봉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시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치학>에서 그는 장인과 노동자들은 공동체의 하인들, “꼭 필요한사람들이기 때문에 시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장인이 시민이 될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로는 그들 대다수가 노예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조각의 황금기에 이 책을 저술했지만 조각가들이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조각은 격렬한 육체노동을 포함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조각을 노예 예술(servile art)’로 여겼다. 고대 그리스에서 육체노동자들은 시민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몇몇 훌륭한 조각가들은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반면 그림을 그리는 일은 육체적인 노력을 덜 필요로 했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람이 행하는 학예(學藝)로 간주되었다. 학예는 깨끗하고 지적인 일일 뿐 아니라, 자유로운 사람의 일을 암시했다. ..

육체노동에 대한 편견은 르네상스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그림이 학예와 노예 예술의 중간쯤에 위치한다고 생각한 반면 조각은 여전히 노예 예술이었다. 69

 

생업이 목수였던 그리스도는 직업이란 무의미한 것이라고 설교했다. ...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질서와 정당한 보상, 수양을 위한 일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그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규칙적으로 살라고 충고한다. “여러분 가운데는 무절제하게 살면서 일을 하지는 않고 만들기만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하는데, 다른 이들의 빵을 먹음으로써 그들에게 짐이 되지 말라.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 여기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있다. 첫째, 일은 생활 리듬의 일부이며 사람들을 시끄러운 문제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둘째, 개미에 관하 이솝 우화에서처럼 일하지 않는 자가 먹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71

 

교회는 을 세 가지 정도로 구분했다. 그것은 삶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 다른 이들을 위한 일, 개인적인 이득이나 물질적 이득을 얻기 위한 일이다. 72

 

우리가 태만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기력이라는 뜻의 아시디아(acedia)’를 대략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태만을 게으름이나 일하기 싫어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시디어의 본뜻이 아니다. 태만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게으름에 대한 비난이 아니며, 일의 가치에 대한 긍정도 아니다. 태만은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73

 

단순한 노동에 불과했던 이 두러지게 긍정되기 시작한 것은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이다. .. 529년 성 베네딕트는 몬테 카시노의 꼭대기에 수도원을 지었다. ...

성 베네딕트 이전의 수도사들은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힘들고 고통슬운 노동을 해야 했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육체적인 일에 보다 긍정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의 규정집의 주제는 오라 에 라보라(ora et labora)’,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이다. 베네딕트는 수도사들에게 신에 대한 헌신의 한 방버브으로서 무슨 일을 하든 착월함을 추구하라고 장려했다. “무엇보다, 어떤 일을 시작하든지 그것을 완전하게 해주십사 하고 신에게 진심으로 기도하라.” 74

 

성 베네딕트에게 일은 직업이나 소명(calling)이 아니라, 일종의 눈에 보이는기도였다. .. 베네딕트 교단은 유럽 전역에 걸쳐 퍼져나갔으며, 중세의 마으로과 도시를 발전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베네딕트회 수도사들은 중세 초기의 가장 능숙한 농부이자, 장인이자 기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노동을 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수도사들 중 가장 낮은 지위로 간주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일 자체를 가치 있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일과 신앙심 사이에 일련의 관계가 있음을 발견햇다 베네딕트 수도회의 전통에서 비롯된 노동윤리는 기독교인의 영적 미덕을 수공업을 비롯한 다른 직업에 까지 확대시켰다. 75

 

12세기에 이르러, 그 사람의 직업과 동일시한 성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베이커(빵 굽는 사람), 카펜터(목수), 대처(이엉장이), 스미스(대장장이), 위버(베 짜는 사람), 골드스미스(금 세공인), (요리사). 77

 

개인 및 집단의 정체성이 직업에 따라 새로이 형성되자 교회의 정책도 자신들의 일에 대해 보다 존중해 달라는, 조합과 중산층의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교회는 기꺼이 실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한 예로, 교회는 이 무렵 증가하는 중산층을 위한 중간 단계의 집으로서 연옥을 만들어냈다. 연옥은 중산층에게 천국과 지옥, 힘 있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존재하는 그들만의 진정한 영적 지위를 부여하였다. 연옥의 개념은 15세기 이전까지는 별로 유행하지 않았다. 15세기에 이르자 비록 비참하기는 해도 훌륭한 자금조달 장치(gimmick)인 연옥이 소곡(小曲)을 통해 찬미되었다. “금고에 동전 소리가 울리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솟아오른다.” 78

 

일에 관해 말할 때 우리가 가장 애용하는 묘사, 창조로서의 일은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했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으며 인간은 음악과 미술을 비롯한 아름다운 거슬의 창조자이다. .. “예견하다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프로메테우스.. 고대인들에게 프로메테우스는 인류를 고된 노동으로 몰아넣은 사기꾼이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면 인류가 운명을 붙잡을 수 있도록 허락한 영웅이 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신의 섭리를 막연히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기 시작하면서, 일이 지니는 가치도 커졌다. 14세기의 피렌체는 우리에게 세계를 만들어내고 자연의 형태를 바꾸는 창조자로서의 인간, 즉 호모 파베르(homo faber)의 이미지를 선사했다. .. 만약 종교가 중세의 아편이었다면 창조성과 미는 르네상스 시대의 각성제였다.

르네상스 시대는 고유한 노동윤리를 가지고 있었다. .. 자신의 돈으로 무엇인가를 도모하되 구두쇠처럼 돈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부자가 되어도 상관이 없었다. ..

육체와 정신을 룬련시켜야 한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믿음에, 르네상스는 손을 훈련시키는 것을 더했다. 81-82

 

15세기 인문주의자 로렌조 발라는 중세의 전통과 교황이 누리는 현세의 권력을 공격했다. 진정한 선의 본질에 대한 그의 저서 <쾌락에 대하여>에서 발라는 쾌락과 덕을 재정의함으로써 쾌락과 아름다움을 가득 찬 삶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 학파와, 소박함과 자기 절제를 명하는 스토아 학파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다. .. 그는 덕()쾌락으로 환원될 수 있는 요소(calculus pleasure)”라고 주장했다. 쾌락은 짐승 같은 충동이 아니라 이성과 통찰의 원리이며, 덕은 재능이자 인내하는 능력이었다. 82-83

 

1516년에 저술된 모어의 <유토피아>는 공리주의 원칙에 입각한 공산주의 사회를 이상향으로 그리고 있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는 청소나 도살, 사냥과 같이 시민들이 비천하고 창피스럽게 여기는 일은 모두 범죄자와 노예들이 도맡아 했다. 따라서 시민들은 보다 흥미로운 일에 종사할 수 있으며, 하루에 여섯 시간만 일해도 된다. ..

1602년에 쓰여진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는 공동체 생활과 과학적인 사회 질서를 강조했다. 캄파넬라의 이상향에서는 모든 사회 계층이 평등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그곳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캄판넬라는 가장 고귀한 사람들은 한 가지 이상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

일이 인간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일을 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르네상스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고 성취를 이룬 사람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고 자신의 일을 조절할 수 있는 사라이다. 따라서 전형적이 르네상스인은 오늘날의 인간관과는 급격한 대조를 이룬다. 83

 

16세기부터 18세기 사이에는 노동자의 자살을 금지하는 법이 확산되었다. 이는 당시 사회가 더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했고 그만큼 노동자 가치가 증가한 반면 노동자들의 절망 역시 더 커지고 있음으로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지표이다. 84


루터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게으른 거지와 부랑자들을 꾸짖었다. 그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집이 없는 이유는 그들이 일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믿었다.(바로 이 시점부터 오늘날까지, 몇몇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러한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다른 주요 종교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 관점에서 크게 이탈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코란에서는 거지들을 세상의 자연스런 질서의 일부라고 생각했으며 자선은 도덕적 영적 의무라고 생각했다. 85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 자체를 위한 일이라는 개념과 휴식과 쾌락에 대한 혐오는 칼뱅과 루터로부터 비롯된 거이다. 이것은 노동윤리라고 불리는 것의 수많은 형태 중 하나에 불과하다. 85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일과 모든 노동자들을 똑같이 존중하도록 가르쳤다는 점이다. .. 루터와 칼뱅의 노동윤리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람들을 구속해온 믿음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선하고, 일하지 않거나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이다. 86

 

종교 개혁가들은 모든 일을 베루프(Beruf, 시간을 차지하는 이르 직업이라는 의미의 독일어), 소명으로 정의했다. 소명은 일의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에 대한 태도를 일컫는다. ... 모든 일이 신의 명령이라는 생각은, 일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불쾌하며 보수가 적더라도 누구나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보증해주었다. .. 프로테스탄트의 소명 개념은 일에 영적인 차원을 부여했다. 그것은 결코 일이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 ‘소명이라는 개념은 이제 우리의 일상 언어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현재는 종교적인 직업을 일컫는 데 주로 사용되고 있다. 대신에 소명이라는 말은 천직(vocation)’이라는 말로 세속화되었다. 우리는 때로 소명천직을 번갈아 사용하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창가 있다. 당신의 소명은 신이 결정하지만 천직은 당신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다. 87

 

우리는 지금까지 종교가 일의 도덕적 가치를 형성해온 과정을 살펴보앗다. 고대인들은 일을 강제적인 것이자 저주로 보았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일에 단순한 위엄(simple dignity)’을 부여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일에 매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신교도들은 일을 의미와 정체성, 구원의 징표를 찾는 과정으로 만들었다. 단순한 노동을 넘어선 일, 즉 소명으로서의 일 개념은 일의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특징을 강조했다. 일은 일종의 기도가 되었다. 일은 삶의 수단을 넘어 삶의 목저이 되어싸다. 일은 저주에서 소명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이르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수많은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 88

 

 

4 일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

 

우리가 물려받은 노동윤리는 단일한 개념이 아니라 세 가지 개념이 융합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첫 번째 개념은 공정함과 사회적 책임의 원칙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부양할 의무를 갖는다. .. 두 번째 요소는 우리의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한다는 것. 세 번째는, 루터와 칼뱅의 독특한 견해로 일 자체가 도덕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지니며, 모든 사람은 살면서 어떤 종류의 일을 하도록 신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일은 그것이 아무리 비천해도, 또한 보수가 얼마든 간에 좋은것이다. .. 공정함, 개인의 탁월성, 개인의 선함이라는 이 세 가지 기본 개념으로부터 일은 고역아니라 의미 있는 것이라는, 일에 대한 낭만적 개념이 생겨났다. 그리고 우리는 일을 통해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89-90

 

18세기, 벤자민 프랭클린은 프로테스탄트의 관점과 계몽주의의 이상을 조합하여 새로운 노동윤리를 만들어냈다. 그는 사람들이 인도적인 방법으로 부를 사용하여 사회를 돕기 위해서는 우선은 부를 얻으려고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는 종교적 의무가 아닌, 사회적 책임으로서의 일을 강조했다. 92

 

막스 베버는 프랭클린이 노동윤리로부터 윤리학을 이끄르어냈다고 생각했다. 프랭클린의 노동윤리가 낳은 윤리학은 두 가지 도덕적 개념에 기반하였다. 첫 번째는 공리주의이다. .. 두 번째 도덕적 개념은, ‘유용성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는 것이다. 92-93

 

프랭클린은 자서전에서 성공을 위해 필요한 열한 가지 미덕을 열거하는데 절제 침묵, 규율, 결단, 성실, 중용, 청결, 평정, 순결, 겸손이 그것이다. 그는 현세에서의 금욕주의를 설교했지만 또한 돈이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그 목적은 바로 생을 즐길 수 있는 자유였다. 93

 

1836년부터 1900년 사이에 모든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맥거피가 엮은 <간추린 어린이 독본> 시리즈를 읽었다. 이 시리즈는 칼뱅의 신학을 강조했으며 고된 노동과 근면, 검약의 윤리를 찬양했다. 94

 

메인 주 출신의 목사이자 교육자인 자콥 애벗은 1832롤로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들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 내에 자리잡은 프로테스탄트의 노동윤리를 명확히 표명했다. 예를 들어 <일하는 롤로>에서 롤로의 아버지는 그에게 한 시간 동안 못을 분류하라고 했다. 롤로는 그 일이 매우 지루하다고 불평했고,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한 가지 일에 꾸준히, 끈이 있게 몰두하는 능력을 가져야 해. 어린 소년들은 일이 놀이처럼 재미있을 거라는 잘못된 기대를 하더구나.” 롤로의 아버지에 따르면, 진정한 남자는 일이 노력과 자제력을 요구하며, 고되고 지루한 것임을 안다.

1950년대 중반, 산업화가 시작될 무렵부터 아이들의 동화는 바뀌기 시작했다. ..

1800년대 중반에 등장한 싸구려 소설은 올리버 옵틱을 비롯한 수많은 아동문학가들로 하여금 이야기의 색채를 바꾸게 만들었다. 지나치게 교훈적인 이야기들은 본격적인 모험소설만큼 잘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옵틱은 범죄나 잃어버린 친척, 인디언 전쟁 등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 이들의 모험은 단지 주인고으이 도덕적 개선이라는 진짜 이야기이 배경이 뿐이라며 독자들을 설득한 것이다. 옵틱의 새로운 영웅들을 여전히 도덕적 모범이 되었지만, 그들의 규범은 부지런히 일하는 것에서 용감한 행동으로, ‘개인적인 절제에서 추진력으로 변화했다. 95

 

일에 대한 교훈이 가득한 아동용 동화들은 미국 남부에서는 제대로 뿌리내린 적이 없었다. 그곳에서는 누구나 땅과 노예를 소유하고 싶어했고, 그들은 돈보다 혈통을 더 중시했다. 97

 

경제 전문 기자(business jounalists)의 수가 증가하면서 많은 이들이 사업가들을 추켜세우기 시작했다. 나중에 스코틀랜드 이민자인 버티 찰스 포브스는 덕 잇는 사업가에 대한 찬양을 영구적인 예술의 형태로 표현했는데, 그것은 일과 미덕, 부는 행복과 사회적 이이긍로 이어진다는 프랭클린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1916<포브스>지를 창간하면서 그는 이 간행물이 사업과 인생 전반에 더 많은 인간애, 기쁨, 만족을 줄것이라고 설명했다. 98

 

위대한 사업가의 신화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기가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그저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99

 

예일 대학교 출신의 콘웰은 1888년 필라델피아에 템플 대학교를 설립한 침례교 전도사였다. 그는 오늘날 사람들이 동기부여자(motivational speaker)”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 콘웰 목사는 도덕적 충고와 사업상의 건전한 충고를 혼합했다. 그는, 돈을 버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내어 그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

18세기와 19세기의 노동윤리 옹호자들은 강한 도덕성이야말로 부에 이르는 열쇠라고 설교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데일 카네기가 1936년에 쓴 <카네기 인간 관계론>에 나타나듯이 개인의 성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도덕성이 아니라 심리학이 성공에 이르는 열쇠가 된 것이다. 99-100

 

성공에 대해 이야기하는 19세기의 많은 작가들과 설교자들, 심지어 몇몇 정치가들은 상업을 칭송하고 정치를 비방했다. 제임스 A. 가필드는 대통령이 되기 전인 1869, 워싱턴 전문대학의 졸업반 학생들에게 고전 학문을 가르치는 대학은 젊은이들의 직업 생활 준비에 완전히실패했다고 이야기했다. 100

 

19세기 미국을 방문한 유럽인들은 미국인의 에너지와 근면성에 아연실색했다. 특히 그들은 유한계급이 없다는 것에 대해 놀아워했다. 빈의 이민자인 프란시스 그룬트는 미국에서 상업이 주된 쾌락과 즐거움의 원천이라는 데 주목했다.

활동적인 직업은 그들 행복의 주요 원천이자 그들 국가를 위대하게 만드는 근원이다. .. 그들은 돌체 파르 니엔테(dilce far niente : 게으름의 달콤함)’대신, ‘게으름의 공포만을 알고 있다. 상업이야말로 미국인의 정수이다. .. 모든 인간 행복의 원천으로서 그것을 추구한다. .. ’. 101

 

과거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과 스스로를 동일시했고, 심지어 자기 이름까지 일에 맞추어 지었다. 반면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는 일과 정체성에 대한 두 가지 새로운 견해를 내세웟다. 일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를 발견하거나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1

 

산업화 이후부터는 이리에 대한 두 가지 유형의 견해가 존재했다. 첫 번째 견해는 계몽주의적인 것, 즉 과학과 지식이 진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산업화 이전에 일은 거칠고도 육체적으로 고된 노역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 두 번째 견해는 장 자크 루소와 같은 비평가들이 말한 것으로, 일이 일종의 은총받은 상태로부터 타락했다는 것이다. ‘은총으로서의 일이란, 자율적인 장인이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여 유용하고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어내고,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농부가 자신의 풍성한 녹색 들판에 씨를 뿌리고 수확하면서 조용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18세기의 저작에서, 루소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임금을 받기 위해 일하는 산업 사회의 몇몇 문제점을 예견했다. 루소는 인류가 타인의 노동으로부터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부터 일의 황금기는 끝났다고 믿었다. ..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일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창조성과 일하고자 하는 욕구를 잃었다. .. <에밀>에서 루소는 최상의 삶의 방식으로서 장인의 기능을 강조했다. 그의 낭만적 이상은 농부처럼 일하고 철학자처럼 사고하는 인간으로, 말에 편지를 박는 동안 진리와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는 목가적인 르네상스인이었다. 102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유재산과 자본주의 생산체제는 일로부터 얻는 창조적이고 사회적인 보상과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을 사용하는 기쁨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켰다.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일과 동일시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여겼는데, 특히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대한 선택권을 거의 갖지 못하고 매우 세부노화된 일을 할 때 그러했다. .. 마르크스는 루소를 흉내내어 이러한 세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가 오른 한 가지 일을 하고 내일은 다른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 세상, 사냥꾼이다. 어부, 소 치는 사람이나 비평가가 되지 않고도, 마음먹은 대로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고기를 잡으며 저녁에는 소를 사육하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비평을 할수 있는 세상이다.’ 103

 

중요한 점은 이러한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한 가지 직업의 정체성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일과 정체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를 극단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림 그리는 사람만 있을 뿐 화가는 없을 것이다. 103

 

마르크스의 이상적인 세계에는 단 한 사람의 전문가도 없는 것일까? 병을 고치는 사람만 있을 뿐 의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마르크스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만약 당신이 청소부로 고용되어 있는 동시에 교회 집단의 우두머리이자 조각가라면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을 그저 청소부로만 여기기를 원하겠는가?... 마르크스는 사람들의 살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일이 유급고용 이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04

 

윌리엄 모리스는 당대의 르네상스인이자, 도이시대인들의 묘사에 따르면 일벌레였다. 그는 설계자, 장인, 시인, 번역가로서 탁월성을 발휘했다. 1884년 모리스는 사회주의 연맹을 창설하고 자본주의 노동체제와 생산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모르스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을 공유했지만, 동시에 일 자체의 심미적 가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한 편지에서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나는 왜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살 수 없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네.... 정말이지 나는 행복하게 일한다네. 그런 나의 시간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운명지워진 것, 칭찬받거나 보상받지 못하는 단조로운 고역일 뿐인 것과 비교하면, 부끄러움을 느낀다네.’

산업화된 영국의 짙은 매연과 보기 흉한 건물을 보며 경악한 모리스는 작업장에 아름다운 정원을 꾸밀 것을 제안했다. 그는 또한 대량생산된 상품들의 흉한 모습을 조롱했다. 그는 기계가 노동을 절약해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생각하는 손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 자체가 주는 심미적 가치는 유용성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물건들을 만들어내는 데서 오는 만족감에서도 비롯된다고 믿었다. 104-105

 

일의 의미에 대한 모리스의 흥미로운 통찰 가운데 하나는 가치 있는 일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모리스는 일이 삶의 빛이 될 수도, 혹은 삶의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첫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있는 반면 두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모리스에 따르면, 사람들로 하여금 일을 원하도록 하고 그 일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희망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가치 있는 일은 휴식의 즐거움에 대한 희망, 일을 통해 만든 것을 사용함으로써 느끼게 되리 즐거움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일상적인 창조의 기능에서 느끼는 즐거움에 대한 희망을 수반한다.” 105

 

가치 있는 일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희망이 잠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일뿐 그 실현 가능성 여부는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주관적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만든 물건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리스의 논점은 만약 그들이 그럴 수 있다면 그들은 그것을 사용하거나 소유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낄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사람들은 다양한 창조적 기술을 이용하여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할지에 대해 제각기 다른 희망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분한 여가와 고품질의 유용한 산물, 기술을 연마할 기회를 제공해주는 직업을 갖고 싶어하리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일은 객관적이다. 106

 

인간이 실제로 하는 에는 두 가지 이상적인 유형이 있다. ‘장인의 일혹은 손을 이용해서 하는 일과, ‘전문가의 일혹은 정신을 가지고 하는 일이 그것이다. 106

 

전문가( professional)’ 라는 단어는 원래 성직에 들어가는 사람이 공식적인 선서를 하는데 사용된 공언하다(profess)’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107

 

중세의 유일한 전문직은 대개 학자이자 법률가이자 의사였던 성직자들이었다. 전문직의 근저에는 세 가지 기준이 존재했다(이러한 기준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첫 번째, 모든 전문직은 공식적인 기술교육과 그러한 훈련을 확인시켜주는 일정한 제도적 인증 과정을 요구했다. .. 두 번째 기준은 전문직에서 사용하기 위한 기술을 발전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 세 번째로, 전문가는 그 전문직이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게 이용되도록 보장하는 일종의 제도적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윤리적 행위를 보증할 수 있는 조직화가 이뤄져야 한다. 미국의 변호사협회나 의사협회의 목적이 그러한 것이다. ..

사회학자 탈콧 파슨스는 “”기업인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에 상관없이 사리사욕만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반며느 전문가는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이타적으로 봉사한다.” 이것은 그가 50년 전에 쓴 글이다. ...

이상적으로 생각하자면 전문가들은 일에 대한 보수를 받지 않아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문가는 업무를 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비용을 보조받는것이기 때문이다. 108

 

대중이 전문가들의 비윤리적 행위에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여전히 전문가들이 사회에 대해 공식적 서약을 맺는다고 암묵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109

 

일에 대한 우리의 열정은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가 되고 싶은 것, 혹은 얻고 싶은 것에 달려 있다. 일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모리스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일을 원하려면 먼저 미래에 대한 어느 정도의 희망 혹은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노예와 농노들, 그리고 지독하게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힘 없는 사람들에게 노동윤리는 결코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111

 

 




PART TWO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바로가기



PART THREE 일과 삶 바로가기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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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25일 비즈니스 카페 재팬이 주최한 최고경영자 모임에서 있었던 강연입니다. 비즈니스 카페 재팬은 나의 오랜 친구 히라카와 카츠미가 설립한 회사로, 컨설턴트를 주 업무로 하고 있습니다.  21



1. 공부로부터 도피하기


교육 받을 기회로부터 스스로 달아난다는 말은 머지않아 '하류사회'로 계층이 내려가는 것을 뜻한다.  25


학령기 자녀를 둔 어른들은 무의적으로 자기 자식을 제외한 다른 아이들의 학력이 내려가면 자기 아이에겐 이익이 된다는 기대감을 자기고 있다. 그런 무의식적인 욕망이 아이들의 학력저하를 심리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31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잠시 보류해 둠으로써 지성이 활성화되는 인간적인 기능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인상을 받는다.  36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모른다'는 것보다 이처럼 '모르는 것이 있어도 개의치 않는 '것이 위기의 징후로 여겨진다.  37


의미를 몰라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이다.  38


어두운 밤 갑판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항해사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바다 위에 떠 있으면 긴장한다. 하지만 만약 시야게 들어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투성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런 상황에서는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또 하나 새로 등장한다 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40


'최근 우리는 하나에서 열까지 돈이 들어가는 생활을 처음으로 경험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각종 미디어에서 정보가 들어오는 생활도 처음이다. 돈이 돈을 낳는 경제구조 속에 완벽하게 말려들어가 있다. 아이들이 일찍부터 '자립'의 감각을 체득하는 것도 이러한 경제 사이클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어 '소비주체'로서의 확신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은 현재의 경제 구조가 보내오는 메시지를 여과 없이 곧바로 받고 있다. 학교가 오늘날의 사회를 가르치고자 '생활주체'나 '노동주체'로서의 자립의 의미를 설명하기도 전에 이미 아이들은 어엿한 '소비주체'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있다. 이미 경제적인 주체인데 학교에 들어가면 새삼스레 교육의 '객체'가 된다는 것은 아이들 입장에서 내키지 않는 일일 것이다.' 스와 테츠지 <왕자와 공주가 되어가는 아이들>

이 부분은 내가 최근 십년 동안 읽었던 교육 관련 글 중에서 가장 계몽적이다. '아이들은 이미 취학 전에 소비주체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있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 

요즘 아이들과 삼십 년 전 아이들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은 처음 사회관계에 들어설 때 노동을 통해 들어가는가, 소비를 통해 들어가는가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벌써 사십 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우리들이 어렸을 때 사회적인 활동은 먼저 노동주체로서 자기를 세우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사회적으로 무능력한 어린아이가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가사노동이었다. 식사가 끝난 후 밥그릇을 부엌까지 갖다놓거나, 마당을 쓸거나, 화초에 물을 주거나,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거나, 아버지의 구두를 닦아놓거나, 이처럼 가정에는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꽤 있었다. 부모는 당신들이 분담해야 할 가사노동을 아이들이 적게나마 줄여주니까 당연히 "고맙다"거나 "참 잘했어" 하고 칭찬해준다. 아이들은 그 칭찬이 기쁘고 자랑스럽다.

아이들이 가족이라는 최초의 사회관계 속에서 처음으로 유용한 구성원으로 인지되기 시작하는 것은 가사노동을 분담하면서부터이다. 작지만 가족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감사와 인정을 보상으로 획득하면서 어리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다져간다. 이러한 데서 예전에 아이들은 사회화 과정을 밟아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좀더 자라면 가사노동에 머물지 않고 바깥 사회활동에도 참가하는데, 타인에게 뭔가 도움되는 일을 하면서 그에 대한 감사와 사회적 승인이라는 대가를 받는 교환 행위를 통해 자기 정체성의 기초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는 가사노동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노동의 작은 분담자로서 사회관계 속에 자기를 등록하면서 아이들은 먼저 노동 주체로 자기를 세운다. 아니 이렇게 하는 것 말고는 달리 자기를 세울 방법이 없었다. 적어도 1960년대 중반까지 일본의 아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노동주체로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은 사뭇 다르다. 지금 아이들은 노동 주체라는 형태로 사회적 인정을 받아 스스로를 세울 수 없다. 그럴 기회를 구조적으로 빼앗겼다.

둘러보면 오늘날 가사노동 자체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게다가 남은 가사 일이라는 것도 그리 생산적인 일이 아니다. 가령 청소나 빨래처럼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집안이 엉망이 되어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노동은 남아 있지만, 그 일을 하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거나 성취감을 얻거나, 또는 사회성을 기르고 자연스레 학습과 연결되는 일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개를 산책시키고 화초에 물을 주고 풀을 뽑는 일상적인 일들은 자연과 연결되는 일로, 많든 적든 아이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할 수 있는 요소가 있었지만 이제는 가정에서 그런 일을 찾기가 힘들다. 부모들 입자에서는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고 싶어도 일거리가 없어서 가사노동을 시킬 수가 없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부모에게 가사노동 분담이라는 작은 선물을 할 수도 없고, 가정이라는 시스템에 작게나마 자신도 공헌하고 있다는 기쁨을 누릴 기회도 없다. 

오히려 지금의 아이들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다. 아이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자체가 집안 질서를 어지럽히는 요소여서, 가능하면 그들에게 할당된 공간 안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공헌이 되었다. 이런 가정이 매우 많다고 본다. "됐으니까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줄래!" 하는 엄마들의 화난 목소리는 요즘 다든 익숙할 정도로 많이 듣는 거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런 식의 금지는 우리들이 어렸을 때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어린아이의 미약한 도움일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고, 그 고사리 같은 손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일본 속담에 '고양이 손이라도 비리고 싶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바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부탁할 만한 생산 활동이 거의 없어졌다. 반면에 아이들의 소비활동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촉발된다.  48-51


한 사람 몫으로 사회관계의 장에 등장하는 경우, 만일 그가 네 살짜리 어린아이라면 그를 교섭 상대로 대등하게 대우해줄 어른은 없다. 하지만 돈을 쓰는 사람으로서 등장한다면 그 사람의 나이나 식견, 사회적 능력 따위의 속인적 요소는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쓰는 돈이 얼마인지가 중요하지, 돈을 쓰는 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고려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돈의 투명성'이라는 특권적 성격이다. 사회적 능력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어린아이가 여기저기서 쥐어주는 용돈을 가지고 소비주체로 시장에 등장할 때 처음 느끼는 소감은 '법을 뛰어넘는 전능함'일 것이다.  52-53


* 니트(NEET) : 용국 정부가 노동정책상 인구 분류로 정의한 용어로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의 약자이다. 교육을 받지 않고, 노동을 하지 않고, 직업훈련도 받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니트는 일반적으로 '일할 의욕이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63


"그럴 시간 있으면 공부해라" 또는 "학원이나 가라"는 요구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국영수 학원에 가거나 예체능 학원에 간다. 그리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지쳐 말할 기운도 없고, 가족들을 신경 쓸 여력도 없다. 그저 온몸으로 피로와 불쾌함을 표현함으로써, 아이도 아이 나름대로 주어진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엄마 아빠가 그렇듯이 자신도 충분히 기분이 언짢은 상태라는 것으로, 자신도 불쾌함을 견디고 있고 따라서 집안에 보탬이 되고 있음을 과시한다.

가족 중에서 '누가 가장 집안에 보탬이 되는가'를 '누가 가장 기분이 나쁜가'로 측정한다. 이것이 현대 일본 가정의 기본 규칙이다.  65


'시장 원리를 기초로 할 때 배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68


배움이란 자기가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모르고, 그것이 어떤 가치와 의미와 유용성을 갖는지도 말할 수 없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71


자신의 유아적 욕망을 가슴에 품고, 결코 성장하거나 변화하지 말고 그저 소비주체로 안주할 것. 시장원리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존재하길 요청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이들을 외계의 변화에 적응해 살아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사실을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77


30센티미터 자로 잴 수 없는 것들, 예컨대 무게나 빛, 탄력 같은 것들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가진 거라곤 30센티 자밖에 없어 오로지 그 잣대로 세상의 모든 것을 계량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어린아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82




2. 리스크 사회의 약자들


얼마만큼 노력하면 얼마만큼의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노력과 성과의 안정적인 관계가 붕괴하기 시작한 것, 이것이 리스크 사회의 특징이다.  89


리스크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 생존 전략의 선택에 따라서 양극화는 더욱 진행된다.  90


리스크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것이 국민들에게 부여된 중요한 과제라고 정부틑 선언하고 있음에도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위정자와 교육행정 책임자, 대중매체 지식인들은 '리스크를 제거하라'고만 가르치지, 어떻게 '리스크를 방어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중앙교육심의회의 답신이나 교육학자의 제언 중에 '아이들에게 어떻게 리스크 헤지 방법을 교육할 것인가'를 다룬 내용을 본 적이 없다. 리스크 사회가 도래했다고 경종을 울리면서 아무도 '리스크를 헤지하는 법'을 국민들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105


우리들은 지금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실업을 당해도, 노숙자가 되어도, 병이 들어도 모든 것이 이러한 리스크가 있는 삶을 선택한 자신의 책임이라는 말은 리스크란 개인적인 것임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왜냐하면 리스크 헤지는 자기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105-106


중국인은 자식들을 일본이나 미국, 호주 등지로 뿔뿔이 유학을 보내 그곳에서 사업을 하게 한다. 어느 한쪽이 전쟁이나 공황으로 재산을 잃거나 인종박해로 추방을 당해도 다른 나라에 있는 친족이 지원하거나 받아줄 수 있도록 안전망을 쳐놓는다. 이것은 역사적 경험 속에서 갈고닦은 리스크 헤지의 기법이다. 

유대인도 마찬가지다. 로스차일드 재벌의 창시자 마이야 로스차일드는 다섯 명의 아들에게 유럽 네 도시에 은행을 열게 했다. 장남은 창업지인 프랑크푸르트 본점에 남겨두고, 둘째는 빈, 셋째는 런던, 넷째는 나폴리, 다섯째는 파리에 지점을 열게 했다. 그로부터 2백년이 흐르는 동안 본저모가 나폴리 지점은 폐업하고, 빈 지점은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할 때 망했다. 하지만 런던 지점과 파리 지점은 살아남아서 일족의 이름을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과 두 차례에 걸친 유럽 대전에서도 살아남았기에 이것이야말로 리스크 헤지의 교과서 같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알수 있듯이, 리스크 헤지는 '살아남기'를 목표로 집단이 합의한 계획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그러므로 '개인이 리스크 헤지를 하고, 발생한 리스크에 개인이 대처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개인이 리스크 헤지를 한다는 것은 원리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들은 '살아남는 것을 집단의 목표로 내걸고 상부상조하는 집단에 속한 사람들'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리스크 사회를 살아간다'는 의미는 항간에서 이야기하듯 '자기가 결정하고 그 결과도 혼자서 책임진다'는 원리로 사는 게 결코 아니다. 자기가 결정하고 결과도 자신이 책임지라는 말은 리스크 사회가 약자에게 강요하는 삶의 방식(또는 죽음의 방식)이다.  107-108


고립된 아이가 혼자서 학교라는 시스템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자기 가치관을 학교 시스템에 대등한 것으로 대치시킨다. "이것을 왜 배워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들이댄다. 스스로 배울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지 못하면 아이는 배움을 거부한다. 이것이 자기결정이다. 배우지 않음으로써 초래되는 리스크를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사칙연산을 못하고, 알파벳을 모르고, 한자를 못 읽는다. 흥미 있는 영역에 대한 사소한 지식은 있을지라도 흥미가 없는 분야는 아예 모른다. 벌레가 파먹은 듯 의미의 구멍이 숭숭 뚫린 세상이 별로 불쾌하지 않다는 듯 살고 있다. 이렇게 아이들은 계층 하강의 리스크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115


오늘날의 교육 문제는.. 아이들이 나태해서 초래된 결과가 아니라 노력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학력저하가 아이들의 나태와 주의산만의 결과라면 그 보정은 교육기술 차원의 문제에 지나지 않지만, 현실에서 상당수의 아이들이 학습을 포기하고 공부로부터 도피하는 데서 자신감과 성취감을 얻는다면, 그리고 그 수가 계속 늘어난다면, 이 문제는 교육기술이나 방법을 바꾸는 식의 기술적 차원으로는 해결하기 힘들다. 사회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없이는 이 문제를 해결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120-121




3. 노동으로부터 도피하기


젊은 회사원에 대한 얘기다. 평소 그의 일솜씨를 높이 평가한 상사가 새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되어보라고하자 그는 그 길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책임 있는 자리에 앉으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자기 일은 자기가 결정한다'는 가지결정권에 대한 고착이다. 자기가 결정한 것이라면, 그 결정이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불이익을 초래할지라도 상관없다. 일종의 '자기결정 페티시즘'이다.  125


선택을 강제하면서 선택한 것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것을 강요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조리하다.  128


니트는 영국에서 처음으로 문제화된 사회현상이다. 하지만 일본의 니트 문제는 영국의 경우와는 많이 다르다. 영국은 전형적인 계급사회여서, 하층계급 사람들은 취학 기회나 취업훈련 기회에서 불이익을 받고 있다. 학습 의욕은 있지만 사회적으로 상승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는 젊은이들도 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이민을 대량으로 받아들인 사회에서 이민자의 아이들은 교육 기회와 문화자본에서 구조적으로 멀어질 수밖에 없다. 파리 근교에는 HLM(저가 임대 주택)이라는 거대한 주택단지가 있다. 그곳에는 이민자를 비롯한 빈곤층 주민들이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살고 있다. 예전에 이런 교외지역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던 프랑스 여성에게 들었는데, 이런 거대 단지에는 도서관이나 미술관, 책방, 극장, 콘서트홀 같은 문화시설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문화를 접할 기회가 없다고, 설령 예술적 재능이 있다 해도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기회 조차 없는 셈이다. ..

유럽의 니트는 계층화의 한 증상이다. 사회적 상승 욕구가 있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일본의 니트는 유럽과 사뭇 다르다. 사회적 상승의 기회가 열려 있느넫도 아이들이 스스로 그 기회를 포기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일본에서는 사회적 약자가 자진해서 차별적인 사회구조를 강화하는데 가담하는 방법으로 계층화가 진행되고 있다. 다시 말해 약자가 자신의 사회적 입장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세계에서도 예외에 속하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129-130


공교육의 이념은 유럽의 시민혁명기에 제창되었지만, 일찍이 제도적으로 정비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00년 당시 미국 고등학교 (14세~17세) 취학률은 8.4%였다. 같은 시기 유럽에서 중등하굑 취학률은 3.8% 미만이었다. 그보다 반세기 전 1840년에 초등학교 취학률은 미국 전국 평균이 38.4%였다. 단, 이 경우 '취학자'는 단 하루라도 학교에 갔던 사람까지 포함하고 있고, 당시 미국의 보통학교 개강일은 연간 40일 정도였다(카리야 타케히코 <교육의 세기>)

근대의 초등교육 기관은 부모에 의한 사적 수탈과 지배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는 '피난소'라는 공적 기능도 함께 수행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적인 공교육 사상을 기초로 한 일본 헌법에서는 교육받을 권리를 정한 제26조 다음에 '아동을 혹사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제 27조가 따라온다. 헌법에 이러한 규정이 있는 것은 산업혁명 이후 근대 산업사회가 취학 기회를 갖지 못한 아동을 '저가노동'으로 혹사시켰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다.  131


지금 아이들에게 교육을 받는 것이 '권리'인지 '의무'인지를 묻는다면 아마 90%늬 아이들이 '의무'라고 답할 것이다. 이 대답에는 교육은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강제하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의무를 위반하는 것을 일종의 정치적 이의제기'로 보는 시각도 성립한다....

'배움'이란 본시 아이들이 먼저 나서서 '침해할 수 없는 권리'로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것을 고역으로 여기게 되었을까?  132


교육의 '권리'를 '의무'로 바꿔서 읽는 도착 행위가 일어난 이유는 경제적 합리성이 사회 구석구석까지 침투했기 때문이다.  133


노동에의 가치에 비해 임금이 낮은 것은 원리상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임금이란 노동자가 창출한 노동가치에 비해 항상 적다. 당연하다. 그렇지 않다면 기업이 이윤을 낼 수가 없고, 주주에게 배당도 할 수 없으며 설비투자도 불가능하고, 연구개발도 할 수 없다. 경제활동에 들어가는 자금은 모두 노동자로부터 '수탈'한 노동가치에서 조달된다. 노동자가 자신이 창출한 노동가치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경제의 기본 원리다. 여기서 발생한 잉여가 교환을 가속시키고, 그 결과 시장이 형성되고 분업이 이루어지며 계급과 국가가 생겨난다. 인간은 이런 방식으로 사회를 만들어왔다.  141-142


배움의 본질은 지식과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방법에 있기 때문이다.  155

 

졸업생은 '대학이라는 공장'에서 송출한 '제품'이며, 이 제품을 기업이 '매입'한다는 또 하나의 소비모델이 존재한다.  157




4. 이들을 어떻게 도울까


히라카와 : 지식은 일본에서도 활용할 수 있고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교환 가능성에 입각하여 표준화됩니다. 모든 것을 표준화해버리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앞에서 언급했던 '자기 찾기'가 꽤 화재를 모았는데, 모두가 표준화되면 이제 '나'라는 것은 없어집니다. 옆 사람과 나의 차이를 측정하는 도구로 경제적 잣대밖에 없다면, '자기다움'이란 애당초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붕괴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일한 척도인 돈을 양적으로 불려서 자기붕괴를 막고자 합니다.  168


우치다 : 아동학대 사례가 점점 늘고 있습니다만, 이 현상은 육아를 등가교환 관점에서 생각하는 습관이 낳은 피연적인 결과로 보입니다. 육아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엄마들은 육아를 긴 안목으로 생각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극히 짧은 안목으로 생각합니다. 아마도 육아를 비즈니스 관점에서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식은 자기가 만들어낸 '제품'이며, 부모의 서오가는 이 제품에 어떤 부가 가치를 덧붙이느냐에 따라 평가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서오가가 평가를 받으면 부모는 '육아의 성고'이라는 형태로 사회적인 자기실현을 다했다고 여깁니다. 회사가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의 매출이나 평가에 일희일비하는 것과 같은 심리입니다.  

처음에는 똥오줌을 가린다거나, 말을 한다거나, 걸을 수 있다는 식의 눈에 보이는 형태로 아이의 능력을 개발하는 데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 다음에는 영어를 구사한다거나, 피아노를 친다거나, 명문학교에 입학했다거나, 역시 눈에 보이는 형태로 아이들의 부가가치를 높이고자 합니다. 아이들에게 부가된 가치를 부모인 자식의 '사업' 성과로 가시적, 외형적으로 과시하려고 하는 한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학력이나 자격과 같은 외형적으로 주위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누넹 보이는 성과' 이외의 것은 육아의 부가가치로 쳐주지 않습니다.

자식이 있으면 이해하시겠지만 본래 육아는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는 일로, 육아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20년이 걸려도 잘 모르는 법입니다. 잘 모르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육아 노동의 성과를 1~2년안에 눈에 보이는 형태로 드러내 보이라고 압력을 가해서는 곤란합니다. 짧은 시간에 측정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부모들은 눈에 보이는 형태로, 수치화할 수 있는 형태로, 정량적인 형태로 육아의 서오가를 올리라고 재촉당하고 있습니다. 부모 스스로 이런 압력을 강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성장을 느긋하게 기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종종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 또 가닭 모를 행동도 합니다. 이럴 때 "이 아이가 뭘 하는 걸까?"라며 아무 말 없이 그냥 바라보는 것이 옳은 양육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양육법은 오늘날 허용되지 않습니다. 

정시노가 의사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사춘기 때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아이들의 부모에게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아이가 "기분이 좀 나빠요"라거나 "이건 싫어요"같은 불쾌한 메시지를 발신할 때 부모가 이런 메시지는 선택적으로 배제해버립니다. 아이가 심신에 불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정보는, 말하자면 '제품'이 소음을 내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제품이 소음을 낸다는 것은 제품 공정에 하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부모는 자신의 '육아 실패'라는 기호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귀를 막아버리는 것이지요. ...

아이들은 몸과 마음에 이상이 오면 위험신호를 보냅니다. 그런데 부모는 그 신호를 청취하면 자신의 육아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정하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발신하는 '도와주세요'라는 신호에 눈을 감고 귀를 막아버립니다. 이렇게 둔감한 부모와 살고 있는 아이들은 심리적으로 무너집니다. 

어린 아이들은 아직 자기가 느끼는 몸과 마음의 불쾌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들이 보내오는 위험신호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신호가 아니라 소음으로 들리니까요. 하지만 여기에서 부모가 제대로 자기 역할을 해내야 합니다. 바로 아이들이 발신하는 소음을 신호로 변환시키는 일입니다. 아이들과 긴 시간을 함게 지내다보면 어느 순간에 아이들이 내는 소음이 신호로 들리게 됩니다.

이것은 아이가 모국어를 습득하는 과저오가 똑같습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지속적으로 해주는 의미 불명의 말들을 분절하여 해독함으로써 마침내 모국어를 습득합니다. 다시 말해 무의미하게 들리던 소음이 의미 있는 신호로 바뀌는 것이지요. 이건 흔히 말하는 커뮤니케이션과는 다릅니다. 커뮤니케이션의 기초가 되는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을 일으키는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음을 신호로 변환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목숨을 건 도약'입니다.  169-172


전후 60년 동안 일본 사회는 약자의 안전망이었던 중간적인 공동체를 계속해서 무너뜨렸습니다. 지역공동체, 친족, 주종관계, 사제관계 전부 다 무너뜨렸습니다.  201


아이들이 노동주체로 출발할지 소비주체로 출발할지 학교에 들어가기전에 이미 결정됩니다.  211


요로 타케시(해부학자, 도쿄대 명예교수, 마음의 문제나 사회현상을 뇌과학, 해부학을 비롯한 의학, 생물학 영역의 다양한 지식으로 설명하는 저술 활동으로 폭넓은 독자층을 얻고 있다.) 선생님께서 "이제는 삶의 매뉴얼이 없는 시대여서 각자가 연구해야 합니다"라는 내용으로 1시간 30분 정도 강연을 하셨는데 한 질문자가 "선생님, 매뉴얼이 없는 시대에는 어떻게 살면 될까요?"라고 물어서 아연실색하셨다고 합니다. 저 역시 때때로 강연을 하기 때문에 비슷한 느낌을 받는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내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에서 무엇을 듣고 있었을까?"라고 말이빈다. 그런 사람은 그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이전부터 자신이 갖고 있던 틀 속으로 모두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틀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부분은 다 잘라버리고 자기 식으로 이해한 부분만 취합니다. 그래서 가끔 "내가 이런 사고방식은 좋지 않다"고 거론한 부분을 거꾸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설이 있는데, 그런 건 경솔하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라고 얘기했는데, 나중에 "좀 존에 선생님은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하면서 확인하러 옵니다. 그때 "아닙니다"라고 말하면 깜짝 놀랍니다. 자기가 동의할 수 있는 내용만 잘라서 듣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꾸 늘어나고 있습니다.  220


히라카와 : 체험교육이라고 할까 수련이라고 할까, 이런 전통적인 교육 기술을 통해 지금은 잃어버린 능력을 계발하는 방법을 어떻게 교육 시스템 안에 다시 한 번 프로그램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지역사회에 합기도 도장을 연 지 15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설계한 교육 프로그램에는 나름대로 확신이 있지만, 어떻게 이 프로그램을 누구에게든 적용할 수 있는 좀 더 보편적인 형태로 전개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계획이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일단 제자를 많이 길러내어 제 프로그램을 충분히 체험한 제자들이 도장을 열고 이를 통해 이런 내용을 널리 알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수 서당식 체인점 같은 방식으로 말입니다.  22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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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편


왜 속으로는 '노'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예스'라고 할까요? 용기가 없어서 그랬던 겁니다.

용기가 먼저 있어서 '노'라고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노'라고 할 때, 우리에게는 없던 용기가 생기는 겁니다.  18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이 말은 당나라 때의 백장(百丈)이라는 스님의 말입니다.  27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이건 일을 하지 않으면, 혹은 일을 못하면 죽겠다는 이야기예요. 혹은 그만큼 목숨처럼 생명처럼 일이 중요하다는 거지요.

복잡하게 읽을 수도 잇지만 이 이야기는 우선 언제 우리가 눈감아야 할지 가르쳐 주는 이야기예요.

아기 기저귀라도 하나 갈고 마당이라도 빗자루로 쓰는 거예요. 그렇게 움직이면 먹어도 된다는 겁니다.  28


일을 안 하고 먹는다는 건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 먹는 거예요.  29


백장 스님 머리에 '이 일을 해서 돈을 받아야 된다'라는 건 없어요. 일을 하는 게 소중한 거예요.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죠.  32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일을 부정하게 됩니다. 일을 폄하하죠. 이건 어느 순간부터 우리 스스로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을 노예로 자처하면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일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죠.  35


'내가 원하는 일들을 어떻게 찾을까?', 이게 지금 문제인 거예요. 주인으로서의 삶은 여기서 결정되는 거예요. 여러분들 고민의 대부분은 노예의 투정이에요. 대개 노예는 노예인데 일은 안 하고 밥만 먹고 싶다는 내용이에요. 밥을 먹을 수만 있으면 된다는 노예적 절박함이라고 해야 할까요?  37


타인이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노예라고 부르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주인이라고 부릅니다.

기껏 대학 나와서 됐다는 게 최고급 노예인데, 이제 돈 좀 들어오니까 찝찝한 거예요.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타인이 원하는 일을 하는 걸 노예라고 부른다고요. 일하는 걸 싫어하는 게 노예의 근성이에요.  38


제 집필실이 광화문에 있는데, 가끔 광화문에서 사람들을 생태학적으로 관찰하면 패턴이 보여요. 광화문에는 직장이 많죠. 오전 8시에서 9시 사이에 사람들이 막 모여들고 우르르 각자 사무실로 들어가요. 그런데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서 11시 30분이 넘으면 사람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해요. 밥을 먹으려고. 그러면 밥을 먹다가 12시 30에서 40분쯤 되면 커피 가게로 막 들어가요. 그리고 1시 좀 넘으면 직장에 들어가서 5시가 넘어가가 시작하면 우르르 나와요. 해맑은 모습으로요. 제가 그래서 어떤 분한테 직장인들은 오후만 일하니 오전에 쉬게 하지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분 이야기가 오전에 불러서 그렇게 뭉그적거리게 해야 오후에 일을 하지. 사람들을 1시에 나오게 하면 일한다고 워밍업하고 인터넷 보고 커피 마시고 어제 포털에 나왔던 거 다 이야기하고 일 시작하면 일하는 시간 달랑 30분밖에 안 된다고요.

우리는 노예로 살죠.  39

영어를 좋아해서 영어 공부하신 분 있어요? 대부분 우리는 영어가 좋아서 공부하는 게 아니죠. 영어 능력을 원하는 자본에 팔려고 영어를 공부하는 거죠. 손님에게 팔리기 이해 화장을 하는 매춘부처럼 말예요. 그래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시대를 '보편적 매춘의 시대'라고 이야기했던 거예요.

재미있지 않아요? 옛날에 노예를 부릴 때는 때리면서 강제로 노예한테 기술을 가르쳤어요. 자본주의 사회는 묘하게 자유롭습니다. 자본주의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가 '자발적 복종'이에요. 한 단계를 건너뛴 거죠. 누가 시키지를 않아요. 옛날엔 노예가 잡혀 와서 일을 제대로 하나 안 하나 감시당했죠. 그리고 능력 있는 노예가 있으면 가령 그 노예가 배를 만드는 게 좋겠다면서 억지로 배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요. 지금은 거꾸고 됐어요. 이게 참 묘하다니까요.  40


옛날의 노예는 탈출을 하려고 했는데, 우리는 나를 써 다라고 해요. 이게 자본주의의 비법이에요.  41


여러분들이 직장 생활을 하더라도 머릿속에 넣어 두셔야 합니다. '난 노예다' 주인 입장에서 생각하지 마세요. '월급을 받으니 이만큼은 일을 해야지'. 절대 이런 이야기는 하시면 안돼요. 버티면 월급은 나와요. 그렇지만 갑자기 해고되면 막막하니까. 일하는 척 잘 버텨야죠. 게으르지만 잘리지 않게! 마르크스의 사위가 하나 있어요. 라파르그라는 사람이 입니다. 기억해 두세요. 이 사람이 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라는 책이 있어요. 두께도 얇야요. 책의 서두에 있는 얇은 논문이 있는데, 읽어보세요. 이 글이 바로 노예의 지침서예요. 월급은 받되, 잘릴 정도로는 게으르지 않기! 역시 마르크스의 사위다운 글입니다.(라파르그는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몸을 잘 움직일 수 없을 때 자살합니다. 백장 스님의 기개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주인 입장에서는 묘한 거예요. 이 노예가 하자는 없는데 일은 진척이 안 되는 거죠. 누구 좋으라고 일을 해요?

때때로 이런 느낌도 들어요. 전시에 포로를 잡아서 포로들에게 땅을 깊게 파라고 해요. 그리고 땅이 다 파지면 포로들을 거기 들어가게 해서 총으로 쏘고 덮어요. 그게 정리해고예요. 일이 다 끝나면 여러분이 회사에서 나가는 논리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요? 삽질하는 척 하기. 너무 노골적이며 죽여요. 그러니까 삽질하는 척은 하는데 땅은 안 파지는 그 묘한 형국을 만드는 거죠. 거기서 살아 있어야지 탈출이라도 하죠. 회사에서 여러분의 에너지를 다 쓰지 마세요. 주인의 일에 에너지를 모두 쓰지 말아요. 회사에서 에너지를 쓰면 여러분이 원하는 일을 찾을 시간과 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직장 다니시는 분들, 반드시 해야 될 일이 뭔지 아시겠죠? 회사에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겁니다. 일이 끝나고 나서 그 모든 에너지를 가족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거예요. 보고 싶은 연극을 보세요. 연극 봐서 피곤하니까 그 다음날 오전에 출근해서 또 잘 쉬어요. 하지만 완전히 들키지는 않게. 할 수 있어요? 그러면 고용도 촉진돼요. 사람을 몇 명 뽑았는데 효율이 안 오르면, 또 사람을 뽑아요.  44-45


여러분의 일을 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부지런해져요.

남이 원하는 일을 할 때는 게을러야 돼요. 게으르되 잘리지 않을 그 미묘한 경계가 있어요.  45


페이비언 소사이어티(Fabian Society). 파비우스 막시무스라는 한니발을 이긴 로마의 장군이 있어요. 파비우스는 한ㄴ발이 워낙 강력하니까 지구전을 사용해요. 그런데 이걸 원로원에서 가만히 두겠어요? 장수로 보내 놨더니 진영은 차지하고 밥만 먹는 것 같잖아요. 로마 대군 5만 명이 매일 밥만 먹어요. 다섯 명도 아니고 5만 명이거든요. 이러니 쇼부를 빨리 쳐야 되잖아요. 그래서 원로원에서 파비우스를 자르고 다른 사람을 장수로 보냈는데, 이 사람은 한니발을 공격하다 박살이 나요. 그래서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또 부르죠. 그랬더니 또 다시 밥만 먹어요. 그리고 나중에 이겨요. 그래서 페이비언이라는 말이 나와요. 

페이비언 소사이어티는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방법으로 사회를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가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자라는 사회로 갈때까지 느리게 천천히 사회를 바꾸자는 것입니다. 급진적인 혁명을 이끌던 지도자가 나중에 일하지 않고 먹으려고만 할 수 있다는 것을 안 거죠.  47


여러분이 즐거워하는 일을 했었을 때 그게 돈벌이가 되면 여러분들은 진짜 제대로 자리를 잡은 거예요.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자신이 하는 일이라는 것, 그게 중요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해서 돈을 벌면 '땡큐'고 아니면 좀 힘들게 사는 겁니다.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것이 바로 주인의 삶이다' 이걸 명심해야죠.  48


여러분들 각자의 삶의 시간은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 이 둘로 할당이 될 거예요. 노동하는 시간은 대부분 그 자체로 목적은 아닙니다.(물론 그 자체가 목적인 사람들이 있어요. 저 같은 사람이요.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거죠. 저는 글을 안 써도 됩니다. 누가 시키는 건 아니에요. 제가 쓰고 싶은 때 쓰는 거예요.) 대개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이 따로 있어요.  54 


여러분께 지혜를 하나 알려 드릴게요. 보통 사람들은 최저임금을 이야기하거나 가급적 많은 임금을 생각합니다. 이제 '최적임금'을 생각할 때입니다. 최저임금이 아니라 최적임금입니다. 나의 최적임금은 얼마인지, 이 정도 벌면 됐다는 걸 정할 수 있어야 해요. 그걸 아는 사람은 내가 돈을 버는 목적이 향유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에요.  55


한 사회가 얼마나 나쁜지의 척도는 노동시간의 길이입니다. 노동 시간이 늘어나는 사회는 나쁜 사회예요.  55


모두 먹고사는 고민만 있어요. 생존만 있고, 향유는 없어요. 거기에는 의무만 있어요. 

여기에 무슨 살 이유가 있어요? 즐거운 것이 있어야 된다고요. 노동은 힘들어요. 유사 이래로 인간이면 다 그래요.  56


다음 공식을 머릿속에 넣어 놓으세요. '삶의 행복은 노동하는 시간보다 향유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커진다'라는 공식 말이에요. 여러분이 일하는 시간을 줄여야 행복해져요. 물론 이 시간을 절대적으로 제로로는 만들 수 없어요.  57


가장 행복한 삶은 스스로 하는일, 지금 땀을 흘리고 하는 일이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면서도 즐거운 일이면 됩니다.  59


우리의 가장 큰 착각은 우리가 자본가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84


여러분이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본이 원하지 않아도 내가 행복하다면 기꺼이 그 일을 하고, 내가 행복한 일을 하는 데 돈이 필요하다면 또 사냥을 떠나면 됩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이 향유이자 동시에 노동이기도 한 사람이겠죠. 제작하고 창조하고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이죠. 홀로 하는 직업일 때만 가능해요.  85


누누이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가져야 할 지혜는 시간에 대한 것입니다. 삶의 시간은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 둘로 양분됩니다. 우리의 행복은 가급적 노동하는 시간을 줄이는 데 있는 것이죠.(하지만 노동하는 시간을 아예 없애고 향유하는 시간만 있다고 하면, 그건 누군가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다는 걸 의미합니다. 어쨌든 우리의 삶에서 일과 노동은 뺄 수 없어요.)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하면, 우리는 제대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사회철학자나 정치가들도 모두 이 삶의 시간을 기준으로 주어진 사회를 부넉하고 도래할 사회를 꿈꾸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봤을 때 사람들이 노동하느 시간이 너무 많아서 향유하는 시간이 없다고 하면 그 사회는 나쁜 사회인 거예요. 이런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불행이자 남루함이지요.  85-86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인지, 그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다는 것, 아니 생각하지 말아야 했었다는 것. 그것이 박정희 지배가 독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생각은 오직 최고 통치자만 하면 됩니다.  90


분명 우리는 양적으로 원시인들보다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문명의 혜택을 다 누리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불행하기만 합니다. 지금 우리는 향유하는 시간을 위해 일한다는을 까먹고 잇기 때문이지요. 일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것에 젬병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하나에 능숙하다는 것은 다른 것에는 서툴다는 것을 함축하니까요. 그러니 아이들과 노는 것, 아내와 산책을 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 심지어 가족과 함께 공연장에서 연주에 몸을 맡기는 것, 어느 것 하나 피곤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없ㅅ브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한다는 것은 항상 가도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일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다시 일에 몰입하게 됩니다. 잘할 수 있는 것이 일밖에 없고, 그래서 일할 때 편안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식으로 마침내 우리는 구제할 수도 없는 워커홀릭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98


이제 깊게 생각할 때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 그리고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는 어떤 덕목이 필요한지. 이제 눈에 들어오시나요?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진정한 덕목이 바로 용기라는 것이. 사랑하고 창조하는 시간, 즉 향유하는 시간을 위해 일하는 시간을 줄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닐 테니 말입니다.  99




정치 편


이론상 차이가 없다고 하더라도 삶에서 50보와 100보는 다릅니다.

중요한 건 정확한 기준을 가지고 잇어야 한다는 거죠. 가령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을 때, 그냥 누구는 좋고 누구는 싫다. 소녀시대가 좋냐 2NE1이 좋냐가 아니라 민주주의 본령과 원칙을 정확히 알고 그 기준을 통해 투표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기준을 두고 누가 50보를 갔고 누가 100보를 갔는지를 보자는 거예요.  122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죠? 그리고 그게 맞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고요. 하지만 실제의 삶은 어떤가요? 국민이 전쟁을 원하지 않아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즉 대표자에게는 교전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잇어요.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전쟁을 원하지 않더라도, 대표자들은 전쟁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어떤 인간은 대통령이 되어서 전쟁을 하려 할 거고, 어떤 인간은 끝내 안 하려고 할 겁니다. 50보와 100보의 차이는 있는 것이죠.  123


유럽 국가 중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가 프랑스죠. 프랑스 사회는 왜 민주적일까요? 왕을 죽였거든요. 왕을 죽인 국민한테는 축복이 있어요. 왕을 죽였으니 내가 왕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이게 프랑스 전통이에요. 우리의 가장 큰 슬픔은 고종을 못 죽인 데 있어요. 우리가 죽였어야 했는데, 일본이 해결을 한 거죠. 그러면 총독이라도 죽였어야 햇는데 그것도 못 했죠. 그 다음에 보니 이승만이나 박정희와 같은 독재자도 죽이지 못했어요. 한 사람은 죽이기 전에 하와이로 도망가서 죽었고, 한 사람은 죽이기 전에 측근에게 먼저 살해당했으니까요. 단 한 번도 독재자를 죽인 경험이 없는 겁니다. 한 명만 죽이면 되거든요. 딱 한 명만, 그 다음부터는 웬만하면 대통령 안 하려고 할 걸요? 잘못하면 훅 가는데 누가 하려고 하겠어요.  130-131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도 말하잖아요. "어떤 인간이 왕이라는 것은 다만 다른 인간이 신하로서 그를 상대해 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그가 왕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신하가 아니면 안 된다고까지 믿고 있다." 완전한 심리적 전도이자 착각이지요. 임제(臨濟)라는 스님이 있어요. 이 스님이 남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야 자유인이 된다는 거죠. 멘토를 만나면 멘토를 죽여야 돼요. 멘토는 무슨 멘토예요? 자신이 어리석고 멍청하다고 생각하니, 자꾸 멘토를 찾아서 지침을 들으려고 해요. 하지만 멘토의 지침을 계속 찾으면 우리는 계속 멍청해지는 거예요. 스스로 당당한 주체가 되기를 비겁하게 회피하는 순간, 우리는 점점 더 우유부단한 사람으로 전락하는 거라고요.  132


좋은 군주, 나뿐 군주를 가르는 건 착각입니다. 중요한 건 군주라는 형식 그 자체니까요. 이 형식을 어떻게 없앨지, 과연 이 형식은 없어진 것인지 이걸 고민해 보시길 바랍니다.  133


한 개인의 독자성 같은 것들은 사람 수가 많아질수록 희생됩니다.  141


보수는 자신을 사랑하고, 진보는 타인을 사랑한다고 정리될 수 있습니다.  147


'인간이 먼저고 이념은 나중'이라는 사람이 진보라면, '이념이 먼저고 사람은 나중'이라는 사람은 보수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보수적인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올라 자신의 이념을 관철하려고 하는 겁니다. 물론 이웃과 후손들을 사랑한다고 이야기는 하겠죠.  148


용서요?

아버지 한테 매 맞는 아이가 아버지를 용서하게 돼요. 심지어 자기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를 이해한다고요. 어머니가 나갔으니까 나한테 화풀이 한다고 생각하죠. 그게 용서인가요? 용서는요. 그 사람이 완전히 자립하고 당당해졌을 때 힘이 세졌을 때 하는 거예요. 약한 자가 용서를 할 수 밖에 없는 조건에서, 용서한 것을 용서라고 하진 않아요.

강해서 용서했다고 하지 마세요. 예수의 정신, 이런것도 아니에요. 자비, 이런 것도 아니에요. 어떻게 못하니까 그런 거에요. 슬픈 거죠. 그래서 용서하면 안 돼요. 용서하지 맙시다 약한 자는 용서하는 거 아니에요. 자격 없어요. '더럽게 약하다'를 각인하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쟤를 때리지도 못하는구나' 이렇게요. 중간에 용서하고 모든 걸 퉁치려고 그러죠. 그냥 그렇게 살려고요. 그럼 안 되는 거 같아요.

누간가 한 명이 '전두환을 죽이자'고 할 수 있어요. 누가 죽일래요? 우리는 그 회의를 합시다. 누군가 죽일 수 있어요. 누가 광주에서 죽었던 사람들 대신 그 복수를 해 줄 수 있을까요? 민주주의를 외쳤던 사람들을 공수부대로 잔혹하게 도륙했던 그 인간을 그들 대신 누가 죽일까요? 죽일 수 있어요? 역사에 길이 남는데 죽이실래요? 우리는 불행히도, 역사보다 자신을 더 아껴요. 우리는 감옥에 가는 것도 싫고, 그렇게 약하고 비겁하다고요. 내가 당할 불이익들이 있는 거죠. 이것부터 우리가 아프게 자각해야 돼요. 용서하면 죽이러 갈 필요도 없고 편하잖아요. 이것도 가슴 속에 아프게 넣어 놓으셔야 됩니다.  164-165 




쫄지마 편


'쫀다'라는 표현은 무언가 두렵다는 것을 말하죠. 두려움이라는 건 안해 본 것들을 무서워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는 판타지를 가질 수 있거든요.  188


무서운 것이 있어서 쪼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지 못해서 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걸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은 그냥 하는 거예요. 모든 판타지의 특징은 우리가 그곳에 걸음을 훅 내딛었을 때 신기루처럼 없어진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혼 무섭죠? 이혼을 한 번 해 보면 더 이상 무섭지 않아요. 해보고 나면 별것 아니란 걸 알게 되죠. 그런데 참 힘든 말이죠? 무서운데 그냥 하라고 하니까요. 사실 하기가 힘들거든요. 그렇지만 뭐든지 한 번의 경험은 필요합니다. 어떤 경험이든 상관없어요. 인생에서 너무나 무서운 것들을 한 번은 눈 질끈 감고, 과감하게 해 보는 경험이 필요해요. 그 경험이 한 번만 잇으면 돼요. 내가 무섭다고 생각하는 걸 한 번 해 보는 거죠. 조금 상처를 받더라도 후유증이 적은 것들을 통해 그런 경험을 조금씩 쌓을 필요가 있스빈다. 쪼는 것이 상당히 줄어들 테니까요.  189-190


너무 많이 안다는게 때로는 축복이기보다는 저주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이 알게 되면 힘들다고요.  191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높은 정상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정상이 어딘지 모르고 무식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다 보면, 정상에 오를 희망이라도 생기는 법이죠. 반면 정상까지 얼마나 힘든 여정인지 정확히 안다면, 우리는 한 걸음을 내딛는 용기마저ㅓ도 포기할지 몰라요. 냉소적으로 변하는 거죠. 그래서일까요? 과거 사회에도 못 배운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지 지식인 계층에서 혁명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사회에 대해 투덜거리지만 바꾸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겁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죠? 이 말은 우리가 "유식해서 비겁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요?  194


쪼는 사람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은 뻔뻔한 사람이에요. 쪼는 것의 반대말은 당당함이 아니에요. 뻔뻔한 사람이 현실적인 힘까지 얻을 때, 오직 그때만 당당해질 수 있어요. 

다음 순서는 성장해야만 해요. '쪼는 나' -> '뻔뻔한 나' -> '당당한 나'. 그러니까 우리는 당당해질 때까지 뻔뻔해지도록 노력해야 해요. 무모함이나 순박함이 아니라 뻔뻔함이라고요.  195


뻔뻔해지기 실천강령(1):우아하게 거짓말하기

미리 말씀을 드리지만 강한 사람만이 거짓말을 해요. 약자는 정직하게 진실만을 얘기하죠.  197


거짓말이 정당화될 때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도 사랑하는 사람은 나보다 강자인 것처럼 느껴질 겁니다. 애인이 만남을 지속할 수도 있고 끊을 수도 있는 역량이 있는 것처럼 다가오는 경험이 사랑이니까요. 자기와 놀아 달라는 애인에게 '친구와 게임을 하기로 했어'라고 하면, 애인은 내게 크게 실망하고 나를 떠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쿨하게 거짓말을 해야죠. '삼촌이 위독해! 미안해. 삼촌만 아니었다면, 너와 놀 수 있을 텐데.'

그리고 사회에서 여러분보다 더 강한 놈이 정직을 강요하고 압력을 가해 올 때, 여러분들은 거짓말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 돼요. 거짓말이 정당화되는 두 번째 경우죠. 강자 앞에서 약자가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쿨하게 거짓말하는 겁니다. 이때 진실을 이야기하면 강자는 우리를 자기 식대로 통제하려고 할 테니까요. 애인이랑 데이트 약속이 정해졌다면, 직장 상사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부장님,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 못합니다. 힘 있는 사람이 '너 이거 했지?' 이러면 찔려요. '들킨 거 아니야?' 이런다고요. 그러니 뻔뻔함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연습을 통해서만 경지에 오를 수 있는 덕목입니다.

여러분을 쫄게 만드는 대상들은 대개 뻔뻔해요. 거꾸로 얘기해 보면 여러분들이 '밥'이라는 거예요. 이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보다 더 뻔뻔해지는 겁니다. 싸우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당당해하지 마세요.  200-201


세상은 우리를 다 쫄게 한다고요. 우리가 쪼는 건, 어린애 같고 정직해서 그래요. 일기장 쓰는 사람처럼 산단 말이에요. 이 태도를 가지면 안 돼요. 일기를 쓰는데, 첫 번째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순 거짓말인 일기를 써 보세요. 그리고 그 일기장을 애인한테 주는 거예요. '나의 마음을 받아 줘' 하실 수 있어요? 못하죠? 이게 교육의 병폐에요. 사회화의 목적은 국가나 권력이 힘 있는 사람한테 복종하도록 만드는 거예요. 교육의 목적이 뭐예요? 기성세대가 편한 거예요. 아이가 대소변을 가리면 누가 편해요? 부모가 편하죠. 어머니는 그런다고요. '얘야, 이제 품위 있게 기저귀에 똥을 누니 얼마나 좋니?' 사실은 이런 거죠. '얼마나 좋니? 나한테 안 맞고' 교육의 목적이 뭐라고요? 기성세대들이 편한 거예요. 

여러분들은 교육을 너무 잘 받은 겁니다. 정직학 까놓고 고발하는 사람들, 자기 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약해요. 자기의 속내를 이야기했다가 부당한 대우를 받지요. 여러분드르이 가장 큰 문제는 너무 정상적으로 중고등학교를 나왔다는 거예요. 중학교 때 본드도 마시고 고등학교 때 애인과 모텔도 가고, 할 거 다 해 본 다음에 개과천선했으면 여기 상당하러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202-203


그러면 이 뻔뻔함을 어떻게 얻어야 돼요? 바깥에 나와 봐야 돼요. 바깥에 나와서 독립적인 생활도 하고 스스로 선택도 해 봐요. 돈이 많이 들죠. 지비에서 나갈 수도 있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뻔뻔스럽게 집에 들어와 사는 사람의 비범함을 아셔야 됩니다. 부모한테도 쫄고 바깥에서도 쫄아서 오갈 데 없이 집에 있는 사람과는 다른 사람인 거예요. 뻔뻔한 사람은 부모님이 더 이상 밥도 안 주고 잠자리도 내주지 않고 구박을 하면, 그때가 되어서야 '음, 이제 떠날 때가 왔네. 지금까지 편했는데. 쩝, 어쩔 수 없지'라고 하면서 자신의 짐과 모아 둔 돈을 챙겨서 집을 나가죠. 

거짓말을 하세요. 거짓말은 뻔뻔하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뻔뻔하기는 해도 쪼는 사람은 아니에요. 편안하게 거짓말을 하세요. 이 능력을 기르면 여러분들은 사회에 물의를 많이 불러일으킬 거예요. 대신 쫄진 않아요. '아, 이 세 치 혀로 인생이 거의 다 해결되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될 거예요. '하루에 세 번씩 거짓말을 안 하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각오로 거짓말을 하면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하나도 쪼는 게 없을 거예요. 거짓말 잘하시는 분? 나는 거의 문학적 수준에 이르렀다? 이런 분 계신가요? 모든 문학은 거짓말이죠. 그들은 당당해요. 문학자들처럼 뻔뻔스러운 사람이 없고 당당한 사람도 없어요. 한국사회에서 민주화운동을 문인들이 끌고 갑니다. 왜죠? 그들은 거짓말쟁이거든요. 거짓말을 한다는 건 우월한 거예요. 이런 세계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뻥을 뻥뻥치면 사람들이 그거에 속아서 또 사회를 만들어요. 미래의 꿈이라는 게 뭐예요? 지금 사회는 우리를 이렇게 착추한다고, 그래서 이렇게 하면 자신이 뻥치고 있는 사회가 가능하다고, 누군가 막 뻥을 치는 거죠. 그 뻥이 긴가민가하다가 사회가 그걸 받아들이면 그 사회는 변화하는 거예요. 거짓말 속에서 새로운 역사가 열리는 겁니다.  204-205


중국 철학자 송견(宋?)의 테마는 견모불욕(見侮不辱). '모욕을 당해도 치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게 또 핵심적이죠. 모욕을 당해도 치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예쁜 사람이고 싶고, 고상하고 싶고, 순수하고 싶고요. 우리는 이런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칭찬해 주면 훅 넘어갈 사람들인 거죠. 그게 거짓된 칭찬이어도요. 이게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문제예요. 그래서 누군가 칭찬해 주면 좋고, 누군가 칭찬 안 할 거 같으면 쫄죠. 인정받고 싶으신 거예요. 

모든 인간관계의 문제는 인정을 받으려고 해서 생겨납니다. 인정받으려고 하지 말아요. 왜 인정받으려고 그래요? 진짜 위대한 인격은 뻔뻔스러운 거라니까요? 인정받으려는 사람은 항상 정직하려고 한다고요. 많은 우화는 사람들이 거짓말을해서 우울해지고 외로워진다고 그러죠. 사실이에요. 하지만 인정을 받으려는 사람만이 아기처럼 진실을 얘기해요. 그러니까 절대 남한테 인정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이라는 멘트를 하던 개그 프로그램의 코너가 있었는데 기억 나세요? 진짜 좋은 멘트죠. 그 사람이 쫄 거 같아요? 세상에 대해서? 누가 무슨 욕을 하든지 간에 그걸 의식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누군가 욕을 했는데 그걸로 화가 나고 속상하다는 것은 인정받겠다는 걸 드러내는 거거든요. 누가 여러분에게 '야, 이 개새끼야!'라고 욕을 하면, '그래요. 난 개새끼예요. 만세!' 이러면 되는 거예요. 남이 인정하든 안 하든 내가 무슨 상관이에요?  205-206


누군가한테 인정받으려고 그럴 때 또 쫄아요.  207


'거짓말하라' 이후의 두 번째 행동 강령은 '기꺼이 욕을 들으라'는 겁니다. 스스로 내가 어느 정도의 인간인지 시험해 보려면 욕을 들어 봐야 돼요. 남의 험담, 음해를 들어야 돼요. 무슨 소리인지 알죠? 자꾸 남에게 인정받는 이 메커니즘이 우리를 세상에 쫄게 만들어요. 검열하게 만들고요. 예쁜 사람 콤플렉스를 버려야 돼요. 남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 말 것. 어머니의 칭찬 들으려고 하지 말 것. 어머니의 칭찬 들으려면 남자 친구, 여자 친구랑 모텔도 못 가요. 그 칭찬이란 게 나한테 뭔 상관이예요. 여러분들의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오만 가지 욕이 달려도 이렇게 생각하세요. '반응이 좋은걸?' 욕 좀 달렸다고 트위터 끊고 페이스북 끊고 뭣들 하는 거예요? 그게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친구를 만나시면, 서로 계속 욕을 하세요. 칭찬하지 말고 욕을 해요. '오늘 네 옷은 거의 걸레인 걸?' 이렇게요. 무슨 말인지 알죠? 그걸 견디는 거예요. 좋은 친구 사이에서는 서로 칭찬을 하지 않아요. 병신같고 나약하고 여린 애들끼리만 둘이 모여서 서로 '너는 예쁘네, 고상하네, 지적이네' 그러는 거죠. 그렇게 살다 보니까 바깥에 나갔을 때 욕 한 번 듣고서는 상처받고  또 그 친구한테 가요. 이게 뭐예요? 친구들끼리 서로를 강하게 만들어야 되잖아요. 서로를 욕해 줘요. 만나자마자 허점을 찾아야 돼요. 처음엔 힘들지만 그걸 경디면 놀라운 일이 벌어져요. 심지어 그 다음부터는 화장도 안 할 거예요.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친구들끽 만나서 칭찬하고 서로 위로하지 말아요. 아부하는 사람이랑 아첨하는 사람은 군주를 붕괴시켜요. 회사에 갔을 때도 너무 열심히 일해서 인정받지 말아요.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한 달 동안은 사고를 치세요. 복사기에다 커피 쏟고 복사기를 망가트리는 거예요. 온갖 욕을 다 듣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회사에서 안 쫄아요. 자기가 정말 잘못을 할 때도 있을 겁니다. 이 경우 보통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지'라며 자책하죠. 그러면 또 실수할까 봐 쫄게 되어 있어요. 잘못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스스로 검열하지 않는 방법은 누가 나한테 욕을 하거나 뭐라고 할때 그것에 쿨해지는 것입니다. 쿨해지면, 여러분은 세상에 쫄지 않아요. 아시겠죠?  208-209


뻔뻔함의 두 가지 강령, 첫 번째, 거짓말 잘하기. 들키지 않고 부드럽고 우아하게.

두 번째, 기꺼이 욕을 먹기, '하루에 욕을 세 번 안 먹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생각으로 욕듣기. 욕이 부족하면 반드시 나서서 욕먹을 짓을 하기.

뻔뻔스럽고 당당한 사람들, 쫄지 않는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게 아니라 실전무공으로 단련된 거예요.  212


철학자들이나 지식인들 대개는 자기도 경험하지 못했던 얘기를 뻐꾸기처럼 계속 날리는 거예요. 거기에 취어잡히면 안 돼요. 쫄아서는 안 돼요. 지적으로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되죠. 그래서 거기 말리는 거예요. '음,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어요. 선생님' 이렇게 뻔뻔스럽게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해요.  220


진짜 위대한 사람은, 혼자 있는 사람이에요.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누군가를 만나서 주체적으로 사랑할 수도 있어요. 누구든 외로워서 사랑하면 안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도도하게 혼자 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성숙한지를 알 수 있죠. 힘들거나 외로울 때 친구한테 전화하지 말아요. 아셨죠? 절대 외롭다고 놀아달라고 하지 말기. 강하게 꿋꿋하게 슈베르트 음악을 들으면서 견디는 거예요. 우아하게.

잊지 마세요. 뻔뻔스럽게 대하고 세계와 단절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계에 쫄지 않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이 뻔뻔스러움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진정한 친구와 애인을 가질 수 있어요. 잊지 마세요. 그때가 되어서야 진짜 만날 수 있는 거예요. 제가 가르쳐 준 대로 하면 왕따 당하고 패가 망신하고 집에서는 쫓겨날 것 같죠? 여러분 주변의 쓰레기 같은 사람들, 내가 결정하지 않은 인간관계들이 다 정리가 되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새로운 관계가 열립니다.  229-230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하나 해 드릴게요. 어느 보살 할머니가 자신이 성불은 안 되니 스님을 한 명 키우기로 하고 10년 동안을 봉양해요. 그러다가 이 할머니가 스님이 깨우침으로 가고 있는지 밥만 처먹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어요. 시험을 해 봐야 되잖아요. 그래서 마을에서 가장 섹시한 기생을 데려다가 안겨 줬어요. 그러고 나서 스님의 반응을 보는 거죠. 스님이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안아 주면서 기생에게 말해요. "나의 마음은 얼음과도 같다." 그 말을 듣고, 그 보살 할머니가 스님이 있는 암자를 불태워 버려요. 왜요? 억지로 하잖아요. '여자를 탐해선 안 된다. 품어선 안 된다 흔들리면 안 된다.' 그 흔들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흔들린 거예요. 흔들리지 않는다면, '얼음'이라는 생각조차 안 들었겠죠. 쫄고 잇는 사람만이 '쫄지 말아야지. 쫄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생각해요. '쫀다'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없어져야 되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죠? 그러니 당당해지지 말고, 뻔뻔해지세요. 그게 안 쪼는 거예요.

그리고 비겁한 걸 받아들이세요. 자신이 어디까지 비겁한지만 알면 돼요. 이 세상에서 제일 바보가 '모 아니면 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중국 한나라에 한신이라는 장수가 있었어요. 한고조 유방을 도와서 한나라를 구축했던 유명한 장수예요. 이 한신이 저잣거리에서 깡패들을 만나요. 칼을 든 깡패 열댓 명을 만난 거예요. 깡패들이 한신에게 자기들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라고 해요. 딱 보니까 게임이 안 돼요. 한신이 어떻게 했게요? 쏘 쿨! 기면 돼요. 뻔뻔하게! 그렇다고 그들에게 굴복하는 건 아니에요. 그게 바로 한신이라는 사람이 가진 능력이라고요. 그리고 나중에 히을 가졌을 때, 나라를 건립한다고요. '완전히 당당해지지 않으면 난 비겁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게 문제거든요. 

여러분 자신을 오버해서 보지 마세요. 여러분이 역사를 바꿀 것 같아요? 집을 바꿀 것 같아요? 어머니를 바꿀 것 같아요? 바꾸지 못해요. 여러분들이 해야 될 일은 내가 얼마나 무능력한지, 얼마나 비겁한지를 아는 겁니다. 이 말은,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안다는 얘기예요.  255-257


자본에게 쫄지 않는 방법은 뭘까요? 자본이나 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겁니다. 전셋집도 갖지 마세요. 가지고 잇으면 낚이는 거예요. '최적생계비'만 갖고 있어야 해요. 최저생계비가 아니라 최적생계비예요. 그래야 뻔뻔해져요. 그래야 사장한테 뻔뻔해진다고요. 사장이 밤에 일하자 그래도 이래요. '됐어요. 월급 됐어요.' 최적생계비를 계산하는 거예요. 최대생계비는 끝이 없어요.  265


자본주의는 순수한 게임의 세계입니다. 세상이 모조리 다 투자고 '돈 넣고'로 좌지우지도는 리얼리티 없는 세계. 게임가가되면 그 안으로 들어가게 돼요. 도박사, 도박군들이 도박에 빠지는 이유를 야셔야 돼요. 그게 순수한 자본가의 세계예요....

우리가 돈에 쫄지 않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나의 최적 생계비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거예요. 최적생계비만 벌면 되니까 나머비 시간에는 뻔뻔해질 수 있죠.  266


디오게네스가 왜 당당해요? 옷 한 벌, 지팡이 하나, 자루 하나 들고 통에서 살았잖아요. 통! 통 하나밖에 없잔하요. 집을 갖고 있으면 쫓겨나지만, 처음부터 쫓겨날 데가 없는데 쫄 이유가 없죠.  267


'뻔뻔하다'는 말의 긍정성을 아셔야 된다는 거예요. 이건 소중한 거예요. 

죽을 때까지 인정을 받지 않겠다는 각오로 사시면 돼요. 그러다 진실을 얘기해야 될 때가 올 수도 있어요. 어쩌면 그때는 '모 아니면 도'일 거예요. 진실에 대해서 쉽게 얘기하진 말고요. 그 뻔뻔함으로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냈을 때 여러분들은 쫄지 않는 자아. 뻔뻔한 자아로 만들어져요.

앞서 얘기했지만 쫀다는 것과 당당함을 대척되는 것으로 두면 안 돼요. 쫄다가 뻔뻔스러워 졌다가 그 다음에 마지막에 오는 것들이 당당함이에요. 당당함은 그렇게 쉽게 얻을 순 없어요.  267


라캉도 말했던 겁니다. 주체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275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임제어록>에 나오는 말입니다. 물론 진짜 살인을 하라는 것은 아닐겁니다. 위악은 위악일 뿐, 진정한 악을 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빈다. 단지 우리 스스로 주인으로 서는 데 방해되는 일체의 권위를 마음속에서 제거하자는 겁니다.  277




에필로그 - 존 레논의 '이매진'을 읊조리며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 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Imagine no posse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타인이 자신의 삶을 억압할 때는 저항이라도 가능하지만, 자발적으로 타인에게 복종하는 경우에는 답조차 없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깊게 가슴에 아로새겨야만 합니다. 타인의 삶을 흉내 내지 말라는, 그리고 타인에게 내 삶을 흉내 내도록 강요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말입니다. 하긴 다른 팽이의 회전이 멋있다고 해서 그것을 흉내 내는 순간 자신만의 스타일로 돌고 잇는 팽이는 더 이상 돌 수 없을 겁니다. 그 역도 비극으로 끝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억압뿐만 아니라 모방이나 자발적 복종도 철저하게 거부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모방이나 자발적 복종도 철저하게 거부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문정신이 가진 소명입니다. 인문학은 다른 학문과는 달리 '고유명사'를 지향하는 학문입니다.  288-289


"공통된 그 무엇"을 거부해야, 우리는 "스스로 도는 힘"을 지킬 수가 잇습니다. 아니 그 역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스스로 도는 힘"을 강화할 때에만 우리는 "공통된 그 무엇"을 극복할 수 있을 테니까요. '공통된 그 무엇'의 자리에는 그 어떤 것이라도 올 수 있습니다. 자본, 종교, 민족, 인종, 정치권력, 스승, 멘토 등등. 우리만의 스타일로 삶을 살아 내는 힘을 빼앗는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통된 그 무엇"이 들판의 야생화들처럼 단독적인 개인들을 '우리'로 만드는 근본적인 계기로 기능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말장난을 조금하자면, 공통된 그 무엇이 만드는 것이 바로 '울(타리)'. 그러니 '우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공통된 그 무엇이 만든 '우리'에 갇히는 순간, 개인들은 '우리'로 변한다는 겁니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겁니다. '울타리'를 의미하는 '우리'라는 말이 개인들의 단독성을 부정하고서 출현하는 집단적인 '우리'라는 말과 같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공통된 그 무엇의 '우리'에 갇혀 '우리'가 되는 순간, 더 심각한 위기가 먹구름처럼 몰아닥치게 됩니다. 우리와 공통된 것이 없는 타자들을 '적'으로 여기는 후속 사태가 벌어질 테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 순간 개인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슈미트의 말처럼 '정치적인 것'의 범주, 그러니까 '적과 동지'라는 치명적인 범주에 포획되고 맙니다.  290-291


"공통된 그 무엇"을 극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개개인들을 '우리'로 가두는 우리를 부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힘을 내서 스스로 다시 돌아가야만 합니다. "스스로 돌아가는 힘"을 유지하는 단독적인 개인들로 우리가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야만적인 적대와 대립, 그리고 끝내 모두를 절멸시키는 전쟁만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존 레논은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모든 종교, 모든 국가, 모든 소유를 철폐하는 꿈을 꾸었던 적이 있습니다. 종교, 국가, 그리고 소유를 통해 적과 동지로 갈라서서 싸우는 인간의 모습이 참담했던 겁니다.  292-293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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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어떤 거리에서 보느냐에 따라 느낌이 확확 달라지는 것 같다. 일 안에 완전히 묻혀 있으며, 그 의미는 커녕, 즐거움이니 괴로움이니 하는 말이 나오려면 어느 정도 거리가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하물며 기쁨이나 슬픔이라는 말이 나오려면, 일을 원경으로 멀리서 보아야만 할 듯하다. 곧 관찰자의 시점으로 물러난다는 뜻인데, 우리가 일의 관찰자가 되는 것은 자의든 타의든 일에서 떠나 있게 되거나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아닌 상태에 머물 때이다. 만일 다수가 타의에 의해 일의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자리에 서게 된다면-이것이 지금 우리의 큰 문제이기도 하거니와-그것은 일의 비극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373)라고 한 옮긴이의 말에 공감한다.
일이 기쁨일까 슬픔일까를 생각해본적이 과연 있을까?

저자는 일을 따라가면서 글을 썼다. 
때로는 탐방을 통해 때로는 관찰을 통해 때로는 참관을 통해 일을 바라보는 소설가적인 입장으로 묘사를 하고, 때로는 특정한 모습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곁들이고, 때로는 그들과의 대화를 기술하면서 우리에게 일을 바라본 저자의 관점에서 표현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일을 이야기하는데'있어서 우리가 바라보지 않는 관점을 때로는 사소한것에서 때로는 독특한 것에서 때로는 일반적인 것에서 기술한다.
저자의 관점에서 우리의 관점까지 덧붙여보는 시간을 가진다면 좋을듯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저자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현대의 일하는 세계의 아름다움, 권태, 기쁨 그리고 가끔씩 느껴지는 공포에 눈을 뜨게 해주는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특히 일이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줄 수 있다는 그 엄청난 주장을 한 번 파헤쳐보고 싶었지요.'

일의 아름다움이란 표현. 나는 일을 아름답게 본적이 없었던것 같다. 일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떤 의미를 주느냐에 따라 일은 아름다워 질 수 있다.
일에 의미를 둔다는 것 자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다시금 의미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될 수 있었다.



1. 화물선 관찰하기
그레이브젠드의 방파제 끝에는 남자 다섯 명이 비를 맞으며 함께 서 잇다. 방수 비닐 재킷에 창이 두춤한 장화 차림이다. 그들은 말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안개에 덮인 강을 내다보고 있다. 어떤 형체를 좇는 중이다. 시간표를 보고 이미 그것이 '그랑드 니제리아'호임을 알고 있다. 또 그 배가 라고스로 가고 있으며, 화물창에는 아프리카 시장에 팔포드 자동차 부품이 가득하고, 줄처 900 디젤 엔진 두 대로부터 동력을 얻고 있으며, 이물에서 고물까지 길이가 214미터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들이 잃게 꼼꼼하게 조사를 해야 할 실용적인 이유 같은 것은 엇다. 다음에 탈 사람을 위해 배의 침상을 정돈할 책임이 잇는것도 아니고, 근처의 통제탑에 있는 직원처럼 이 배가 북해로 나아갈 때 사용할 뱃길을 지정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이 배 자체에 감탄할 뿐이며, 그냥 그녀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싶을 뿐이다. 항구에 삶을 연구하는 데 쏟는 그들의 열정은 종종 예술을 대하는 태도와 비슷하다. 그들의 행동을 보면, 사하라 서부 끝을 돌아 굴대를 운송하는 데에도 임파스토(유화에서 물감을 겹쳐 두껍게 칠하는 기법) 기법으로 여성의 누드화를 그릴 때와 같은 창조성과 지성이 필요하다고 믿는 듯하다. 이들과 비교해보면 금방 싫증을 내며 카페테리아에 관심을 보이고, 선물 가게에 마음이 흔들리고, 틈만 나면 벤치에 앉고 싶어하는 박물관 관람객들은 얼마나 변덕스러워 보이는지. 사실 먹을 것이라고는 보온병에 든 커피가 전부인 채로 '헨드리키에 바딩'이라는 이름의 배 앞에서 폭풍우를 맞으며 두 시간을 보낸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겠는가.
물론 배를 관찰하는 사람들이 특별한 상상력으로 열광 대상에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통계다. 그들은 운행 날짜와 항해 속도에 에너지를 집중하며, 터빈 숫자와 샤프트의 길이를 기록한다. 마치 깊은 사랑에 빠져 여인에게, 내 감정에 따라 행동해도 좋으냐고, 당신의 팔꿈치와 어깨뼈 사이의 거리를 재도 좋겠냐고 묻느 ㄴ남자 같다.  29-30
배를 관찰하는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는 방식은 근대 이전 여행자들의 습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새로운 나라에 도착하면 그 나라의 곡물창고, 도수관, 항구, 작업장에 특별한 호기심을 드러내곤 했다. 노동 현장을 관찰하는 것이 무대나 교회 벽을 구경하는 것만큼이나 흥미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관광이라고 하면 바로 노는 것을 연상하고, 그래서 알루미늄 공장과 하수 처리 시설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우리 눈길을 빼앗아 뮤지컬이나 납인형 진열관의 널리 떠벌려지는 즐거움 쪽으로 몰고 가는 현대의 관점과는 사뭇 다르다.
강가에 서 있는 사람들은 그런 현대적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화물의 움직임과 컨베이어 벨트의 우르릉거리는 소리에 대한 관심을 자유롭게 표현한다. 지나가던 구경꿈이라면 그들이 서 잇는 부두의 같은 자리에 선다 해도 공장 마당에서 나오는 트럭 세 대밖에 못 볼지 모르지만, 이들은 배에 실린 브라질 산 사탕수수의 오디세이의 다음 장을 예특할 수 있다. 이 사탕수수는 화물선 '발레리아'호를 타고 건너와 이제 설탕으로 변신했으며, 실버타운에 잇는 테이트 앤드 라일 정제 공장을 떠나 건포도 케이크를 만드는 더비의 시설로 가고 있다. 이들은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조류학자와 비슷한 만족감을 느낀다. 조류학자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파란색과 잿빛이 섞인 보통 새라고 여기고 곧 고개를 돌려버릴 새를 쌍안경으로 관찰하고, 상아 해안의 늪지대 서식지에서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여 6천 킬로미터가 넘는 여행을 한 끝에 쉬고 있는 필로스코푸스 트로킬루스(연노랑솔새)를 올해 처음 만낫다며 기뻐하지 않는가.
그들에 비하면 우리 대부분은 얼마나 무지한가.  32-33
나는 부두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현대 일터의 지성과 특수성, 아름다움과 두려움을 노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특히 일이 우리에게 사랑과 더불어 삶의 의미의 주요한 원천을 제공할 수 있다는 그 특별한 주장을 주의 깊게 들여다볼 생각이다.  34


2. 물류
현재 우리는 많은 물건을 실제로 손에 넣을 수 는 있지만, 그런 물건들의 제조와 유통 과정이 어떠한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 이런 소외 과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경이, 감사, 죄책감을 경험할 수많은 기회를 박탈당한다.
물류(logistics)'라는 말은 군데 용어로는 병참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로지스티코스(logistikos)' 즉 군대에서 식량과 무기의 조달을 책임지는 병참 장교라는 말에 뿌리를 둔 것이다.  39
지구의 기울어 있는 축 때문에 고객이 음식에서 만족을 느끼는 일이 지연되는 사태를 슈퍼마켓은 앞으로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가령 딸기는 한겨울에는 이스라엘, 2월에는 모로코, 봄에는 스페인, 초여름에는 네덜란드, 8월에는 잉글랜드, 9월부터 크리스마스 사이에는 샌디에이고 뒤의 과수원에서 들어온다. 딸기를 따는 순간부터 잿빛 곰팡이의 공격에 굴복하기 시작하는 순간까지 여유는 96시간뿐이다. 그래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어른이 이 부드럽고 통통한 과일의 엄중한 요구에 굴복하여 어쩔 수없이 게으름을 떨쳐내고, 창고들 사이에 화물 받침대를 깔아옿거나 우르릉거러는 디젤 트럭 안에 앉아서 기다린다.
창고 소유자들의 상상 속에서 보안에 대한 걱정이 그렇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만 않는다면, 창고는 완벽한 관광지가 될 것이다.  49
내 흥미를 자극하는 것은 이런 성취에 대하여 거의 음모를 꾸민 듯 모두가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시간이 지나자, 이 물고기 한 마리에서 출발하여 이 물고기가 이곳까지 올 때보다는 조금 느린 속도로 다시 바다까지 거슬러 이곳까지 올 때보다는 조금 느린 속도로 바다까지 거슬러 가보고 싶은 욕망마저 생긴다.  53


3. 비스킷 공장
"요즘 비스킷은 요리가 아니라 심리학의 한 분야입니다." 로렌스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로렌스는 슬라우에 있는 한 호텔에 선문 대상자 몇 명을 모아놓고 이 비스킷을 만들었다. 그는 일주일에 걸쳐 그들의 생활에 관해 질문했다. 그들에게서 감정적인 갈망들을 끄집어내, 새로운 제품의 조직 원리로 통합해내려는 것이었다. 템스 리비엘 호텔의 어느 회의실에 모인 저소득층의 어머니들은 대부분 공감, 애정, 그리고 로렌스가 경구처럼 간결하고 단순하게 표현한 대로 '내 시간'에 대한 갈망을 토로했다. '모먼트' 비스킷은 그들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 대한 그럴 듯한 해결채긍로 모스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밀가루 반죽으로 심리적 갈망에 응답을 하겠다는 계획은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로렌스는 그런 계획이 노련한 브랜딩 전문가의 손에 들어가면 비스킷의 폭, 형태, 코팅, 포장, 이름 등으로 구체화되며, 이런 결정에 따라 비스킷도 위대한 소설의 주인공처럼 상황에 어울리는 미묘한 느낌을 발산하는 인격을 부여받게 된다고 설명했다. 
로렌스는 처음부터 자신의 비스킷이 사각형이 아니라 원형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거의 모든 문화에서 원과 여성성과 전체성이 서로 연겨로디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쾌적한 탐닉의 인상을 전달하기 위해 작은 건포도 조각과 초콜릿 칩이 들어가는 것도 필수였다. 그러나 노골적인 퇴폐의 분위기를 환기하는 것은 막아야 했기 때문에 크림은 넣지 않았다. 
로렌스는 그 뒤 반년 동안 동료들과 포장 문제로 고민을 하다가, 마침내 단순하게 비스킷 아홉 개를 검은 플라스틱 트레이에 넣은 다음 광택이 나는 24센티미터 길이의 판지 상자에 담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때부터 로렌스는 이 비스킷의 이름을 두고 토론을 시작했다. '리플렉션' , '리트리트' , '딜라이트' , 그리고 비스킷의 기초가 되었던 개념인 '마이 타임' 등이 물망에 오르다. 로렌스에게 적당한 이름이 떠올랐다. 번쩍이는 영감이 찾아왔다고 표현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제 글자체의 선택에 주의를 기울일 시간이 왔다. 디자이너의 최초 레이아웃은 상자를 가로질러 로맨틱 에드워디언 글자체로 'Moments'라는 단어를 적는 것이었다. 그러나 몇몇 임원은 이 디자인이 현실 생활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쾌적한 보완물이 되고자 하는 이 제품의 본래 의도보다 너무 멀리 나가는 것 같다고 걱정했다. 그래서 현실로부터 잠시 풀려날 기회를 주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현실을 존중하는 스낵에 어울리도록 마지막 순간에 m과 s를 좀 더 수직으로 세우는 쪽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80-84
일이 의미 있게 느껴지는 건 언제일까? 우리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자아내거나 고통을 줄여줄 때가 아닐까? 우리는 스스로 이기적으로 타고났다고 생각하도록 종종 배워왔지만, 일에서 의미를 찾는 방향으로 행동하려는 갈망은 지위나 돈에 대한 욕심만큼이나 완강하게 우리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합리적인 정신 상태에서도 안전한 출세길을 버리고 말라위 시골 마을에 먹을 물을 공급하느 ㄴ일을 도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또 인간 조건을 개선하는 면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고급 비스킷보다도 섬세하게 통제되는 제세동기가 낫다는 것을 알기에, 소비재를 생산하는 일을 그만두고 심장 간호사 일을 찾아볼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가 그저 물질만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라 의미에 초점을 맞추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86
정신이 고결하고 도덕적인 야심이 있는 구성원들은 사회의 방종에 경악했다. 그들은 소비주의를 매도하면서 대신 아름다움과 자연, 예술과 우애를 찬양했다. 그러나 비스킷 회사는 초콜릿 비스킷의 효율적인 생산을 무시하고, 사회의 가장 유능한 구성원들이 혁신적인 마케팅 프로모션 기법을 개발하면서 인생을 보내는 것을 엄하게 막는 나라들이 너무 버거워 감당하기 힘든 문제에 늘 직면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는 점에서 의미잇는 곳이다. 그런 나라들은 가난하다. 너무 가난해서 정치적 안정을 보장할 수도 없고, 가장 취약한 상태에 있는 국민을 돌보지도 못한다. 그 결과 이런 나라의 국민은 기근이나 전염병에 목숨을 빼앗긴다. 고상한 나라들은 국민이 굶주리게 놔두는 반면, 자기중심적이고 유치한 나라들은 도넛과 6천 가지 종류의 아이스크림 덕분에 산과 병동과 두개골 스캐닝 기계에 투자할 자우너을 갖추고 있다.
암스테리담은 건포도와 꽃의 판매를 기반으로 건설되었다. 베네치아의 궁들은 양찬자와 향료 교역에서 생긴 이윤으로 지었다. 설탕은 브리스톨을 건설했다. 상업적인 사회는 종종 비도덕적인 정책을 펼치고, 이상을 무시하고, 이기적인 자유주의에 빠져들지만, 그럼에도 물건이 많은 상점과 돈이 그득한 금고를 갖추어 신전이나 고아원을 건설할 자금을 댈 수 있다.
나는 오스텐드 외곽의 도로변 휴게소 창가에 앉아 트럭 한 대가 두루마리 화장지를 싣고 덴마크로 출발하느 ㄴ것을 지켜보다가 포티에가 작별 선물로 준 모먼트 한 상자를 뜯으며 우리 사회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이 사회는 우리의 진지하고 의미심장한 요구와 관계가 없는 산업, 그 결과 컴퓨터 터미널 앞과 창고 안에서 우리를 의미 상시의 위기로 몰아넣기 십상인 산업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나는 우리 노동의 진부함을 생각하며 희미한 절망감을 느끼다가도, 거기에서 나오는 물질적 풍요를 졵ㅇ하지 않을 수 없엇었다. 겉으로는 유치한 게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이 우리의 생존 자체를 위한 투쟁과 절대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초콜릿 코팅을 한 끈적끈적한 모먼트가 뜻밖에도 위로가 되었는데, 거기에는 그런 모든 생각들이 담겨 잇는 것처럼 느껴졌다.  112-114


4. 직업 상담
우리의 과학기술이 아무리 강력하고 우리 회사들이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현대의 일하는 세계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결국 내적인 것으로서 우리 정신의 한 측면을 구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느 ㄴ널리 퍼진 믿음이다. 일을 중심에 둔 것은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이 형벌이나 속죄 이상의 어떤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가 처음이다. 경제적인 필요가 없어도 일은 구해야 한다고 암시하는 것도 우리 사회가 처음이다. 직업 선택이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새로 사귀게 된 사람에게도 어디 출신이냐, 부모가 누구냐 묻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길로 나아가려면 보수를 받는 일자리라는 관문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가정이 깔려 있는 것이다.  116
시먼스의 책상 위에는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아틀라스의 노예>라는 제목으 미완성 조각을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 사진에는 원재로에서 박물관에 들어갈 작품으로 여행을 하던 중간에 멈춘 조각이 포착되어 잇었다. 아직 머리가 없는 인간 형체가 대리석 토막으로부터 빠져 나오려 애쓴느 모습이었다. 시먼스는 직업 상담이 우리 모두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을 이 미완의 작품이 매혹적이 ㄴ비유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우리 각자가 진정한 나 자신이 되도록 돕는 일이었다.  128
지금보다 더 위계적이었던 사회에서는 개인의 운명이 대체로 출생이라는 우연에 의해 결정되었다. 성공과 실패가 나는 산을 움직일 수 있다는 선언을 동반한 실력에 달려 있지 않았다. 
그러나 능력주의적인, 또 사회적 이동이 심한 현대 사회에서 사람의 지위는 자신감, 상상력,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몫을 설득하는 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출세를 할 가능성 때문에 금욕과 체념의 철학들은 환영받지 못할 수도 잇다. 시끄럽게 부추겨대는 소리를 들을 만큼 자신이 저급하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성공하겠다는 의지>같은 제목이 붙은 책을 고자세로 경멸햇다가 필생의 기회를 놓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종의 비관주의적 자부심 때문에 인생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134
나는 시먼스의 회사를 나오면서, 모두가 일과 사랑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너그러운 부르주아적 자신감 안에 은밀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배려 없느 잔혹성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 두 가지에서 절대 충족감을 얻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충족감을 얻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뜻일 뿐이다. 예외가 규칙으로 잘못 표현될 때, 우리의 개인적 불행은 삶에 불가피한 측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저주처럼 우리를 짓누르게 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운명에서 갈망과 오류를 위해 마련된 자연스러운 자리를 부정하여, 우리가 경솔하게 결혼을 하고 야망을 실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집단적인 위로를 받을 가능성을 부인해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어떻게 해도 진정한 나 자신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 혼자만 박해와 수모를 당한다느 ㄴ느낌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142


5. 로켓 과학
나는 근대를 살아가려면 고통스러운 심리적 적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달았다. 과학이 제공하는 잠재력을 존중하면서도 그 혜택이 좁은 틀 안에 갇혀 공혹스러울 정도로 제한적일 수도 있다는 점 또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활동이 공학처럼 흥분을 자아내고 엄격성을 고수하기를 바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런 유혹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의 성취에 지나치게 감동을 받아 저열한 형태의 오류와 부조리가 집요하게 우리를 따라 다닌다는 사실까지 간과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87


6. 그림
테링러는 자신이 설정한 도전의 성격이 제한적임을 인정한다. 5년간의 그림을 모은 전시회에 맞추어 쓴 에세이는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시작된다. "나는 어른이 되어 거의 모든 시간에 물리적 세계를 관찰하는 일을 해왔다. 특히 지난 10년 동안은 해를 볼 때와 해에서 고개를 돌릴 때 일어나는 빛의 변화에 관심을 가졌다." 자기비하와 과대망상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은 야심을 요약한 말이다.  200


7. 송전공학
미국 작가 랄프 월도 에머슨은 1844년에 발표한 '시인'이라는 제목으 ㅣ에세이에서 그의 동료들이 아름다움을 너무 좁게 정의한다고 개탄했다. 시인들은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과거의 유명한 화가나 시인의 작품에 나오는 전원적인 풍경, 또는 때 묻지 않은 목가적 장면에만 한정해서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에머슨 자신은 산업 시대에 새벽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철도, 창고, 운하, 공장이 급격히 증가하는 것을 유심히 관찰했으며, 다른 형식의 아름다움이 존재할 가능성에 여지를 주고 싶었다. 에머슨은 노스탤지어에 젖어 구식 시에 헌신하는 사람들과 그가 진정한 현대적 시 정신을 자겼다고 판단한 사람들-그들이 실제로 쓴 것보다는 편견이나 편애 없이 세상에 접근하고자 하는 태도 때문에 시인이라는 이름을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을 비교했다. 에머슨은 구식의 시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공장톤과 철도를 보면서 그것들 때문에 풍경의 아름다움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그들이 읽은 책에서 그런 것들이 아직 거룩하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정한 시인은 공장톤이나 철도가 벌집이나 기하학적인 거미줄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자연 질서 안에 포함된 것이라고 본다. 자연은 그 생명력 넘치는 품 안에 그것들을 빠르게 받아들이며, 미끄러져 가느 ㄴ자동차들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다.  246


8. 회계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자유의 끝이라는 뜻이지만, 동시에 의심과 집념과 변덕스러운 욕망의 끝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회계사의 만 가지 가능성도 이제 마음에 드는 몇 가지로 줄어들었다.  266


9. 창업자 정신
나는 영감과 동시에 벌을 받은 기분으로 창업자들의 모임을 떠났다. 나는 모센 바마니(물에 뜨는 신발 발명가) 같은 비전을 품은 사람들을 존경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했다. 그의 갓 태어난 사업은 한층 주류에 속하는 기업들이 간과하는 욕망을 포착하여 그것을 활용하려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정력적인 사람들이 설정한 목표가 호수를 건너거나 포테이토칩을 먹는 문제, 욕실에 물건을 보관하고 불을 끄는 문제에서 실제로 보통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결정을 내리는지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빛이 바랜다는 사실도 놓치지 않았다.  322
우리(그러니까 니체의 말처럼 아직 나 자신이 되지 못한 많은 수의 우리)는 혼자 있을 때면 우리가 해보고 싶어하는 여러가지 일을 그려보면서 스스로 세상을 더 낫게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자신에게 더 도취되어 있을 때면, 심지어 가게 처마는 어떤 모양이어야 하고, 새로운 서비스의 광고는 어떤 식으로 써야 하는지까지 꼼꼼하게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런 유쾌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는 백일몽은 우리 인격 가운데 한 측면, 그러니까 어린 시절에 부엌 한구석에 식료품점을 차려놓고 기뻐하거나 정원에 판지 상자로 호텔을 짓고 만족하던 바로 그 측면에서 나오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안에 깊이 자리 잡은 어떤 열망과 통찰에 창업이라는 형식을 부여하고 싶은 인간적 충동은 태어날 때부터 평생 동안 끈질기게 지속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324-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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