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글

장르소설과 순문학소설의 가장 큰 차이는 장르소설은 단 한 권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 물론 탐정추리소설을 단 한 권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마 탐정추리소설의 재미는 각 소설 간의 호응과 간섭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탐정추리소설도 무협소설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작품이 상호 연결되는 장르의 기반을 따르는데, 그 상호 연결 기반은 크고 복잡하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이 분야의 전통은 벨기에, 프랑스, 미국, 일본, 이탈리아, 스웨덴 등으로 이어졌지만 모두 다른 흐름을 형성했다. 신기한 것은 각각의 흐름이 결국 원래의 기반을 따르고, 서로를 증명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는 점이다.


코넌 도일


‘추리소설’이라는 표현은 일본에서 수입되었다. 일본에서도 원래는 없던 표현으로,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이런 유형의 소설을 ‘탐정소설’과 ‘미스테리’라고 불렀다.
‘탐정소설’과 ‘미스테리’는 모두 서양에서 왔다. ‘미스테리’는 영어의 ‘mystery’ 를 가타가나로 적은 것이고, ‘탐정소설은 영어 ‘detective story’를 일본어로 옮긴 말이다.

‘추리’라는 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서 유행한 새로운 이름으로 영문으로는 적절한 표현이 없으며, 이 점 역시 일본인이 이룬 중요한 공헌이다. 일본인은 미스터리 작품에서 얻은 새로운 결론을 ‘추리’정신에 결합시켰다.

‘탐정’같은 말은 추리 소설이 기본적으로 범죄와 관련된 소재를 다루지만, 범죄를 조사하는 사람과 범죄를 조사하는 행위를 통해 범죄에 접근한다는 점을 알려 준다. 추리소설은 범죄소설이 아니다. 그러나 범죄라는 요소가 없으면 추리소설은 성립하기 어렵다. 추리 소설은 보통 하나의 범죄에서 시작된다.
추리 소설의 기원은 어째서 19세기일까? 이 시기의 유럽에서 범죄는 더 이상 개인의 일이 아닌 사회 현상이 되었기 때무닝다. 이 시기에 사람들의 시선은 ‘sin’(죄악)에서 ‘guilt(죄악감)로 옮겨 갔다. 이전에는 ‘죄’에 대한 징벌이 인간 세상의 법률이 아닌, 죽은 뒤에 하느님과 마주했을 때 받는 것이었다. 이는 기독교 전통의 핵심 개념과 근본 가치인 동시에 교회를 없어서는 안 되는 기구로 존재하게 하는 토대였다.

‘이 세상’에 있으며, 현실 세계에서 사회의 수단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인식이 바뀐 것이 19세기에 완성된 거대한 변화였다.
또한 19세기의 유렵에는 도시화가 폭넓게 일어났다.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이 친족이나 이룻과 단단한 유대를 맺지 않는 생활로 들어서면서 범죄가 발생할 여지도 늘었다. .. 도시 이주가 시작된 후 누구도 나를 모르고, 누구도 내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신경 쓰지 않는 상황은 죄를 저지르고 처벌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미스터리’는 추리 소설이 성립하는 다른 조건인 ‘there is something mysterious’(뭔가 이상하다)를 알려 준다. 추리 용어로 말하자면, 소설에느 반드시 ‘수수께끼’가 있어야 한다. 소설이 시작되면 이상한 일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희귀한 일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다. 사건의 전체 혹은 일부가 일반 상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탐정’, ‘미스터리’, ‘추리’가 가리키는 세 가지 조건은 우리에게 추리소설이 무엇인지, 추리소설을 읽을 때 무엇에 신경을 써야 하는지, 나아가 추리소설을 읽기 전에 어떤 준비, 즉 ‘독자의 약속’을 해야 하는지 알려 준다.

‘장르’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해 장르소설에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와 작품을 읽는 독자 사이에 이미 약속된 특수한 사항이 있다. 장르가 만들어지면 작가와 독자는 장르의 관습에 딸 무엇을 써야 할지 무엇을 읽을지 예상한다.

소설을 읽기 전에 이런 소설에는 무엇을 읽게 되리라는 점을 알고 있는가에 있다. 그리고 작가는 소설을 쓸 때 자신의 소설을 읽을 사람이 어떤 예상과 기대를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고 가늠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장르에 초점을 맞춰 만들어진 작가와 독자 사이의 묵계다.


코넌 도일은 세심하게도 전지적 시점과 일인칭 시점 사이, 객관과 주관 사이에 놓이는 신선한 서사 방법을 발명했다. 소설의 문자오가 사건 기록은 모두 왓슨의 시점을 거친 것으로 주관적 판단과 강한 호불호가 뒤섞인 그의 정서가 독자에게 전달되어 독자의 마음에 스며든다. 이를 통해 우리는 홈스의 시건 조사와 모험 과정을 알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왓슨과 함께 경험한다.
왓슨은 우리에 가깝고, 우리처럼 평범하다. 적어도 홈스처럼 비범하지는 않다.

코넌 도일의 최대 공헌은 추리소설과 독자 사이에 합리적이고 안정된 관계 형태를 만들어 낸 데 있다. 사실이라는 환상은 소설을 둘러싸고 틀을 만들어 독자가 비정상적인 범죄와 극적인 플롯에 의심을 품거나 거부하지 못하도록 한다.

코넌 도일은 기이한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고 믿고자하는 기이한 이야기를 지어냈다.




레이먼드 챈들러


‘뽐내지 않음’의 가치관은 ‘하드보일드 맨’의 특질 가운데 하나이며, 우리가 ‘하드보일드 탐정’을 이해하고자 할 때 명심해야 할 기본이다.

‘Hard-boiled’는 보통 달걀을 익힐 때 쓰는 말로, 미국인은 이 단어를 보면 자연스럽게 아침 식사에 나오는 ‘hard-boiled egg’를 연상한다.

벽과 비교하면 ‘hard-boiled egg’는 여전히 약한 달걀일 뿐이다. 다른 점이라면 그렇게 약해 보이지 않는 척한다는 것이다. 날달걀과도 다르고 다른 일과도 다르다. ‘Hardboiled egg’는 벽에 부딪힌 순간 흰자위와 노른자위를 쏟아내 참담하게 패배한 불쌍한 모습을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벽에 대항할 수 있고 벽을 쓰러뜨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알과 비교해 ‘hard-boiled egg’는 단단하다. .. 스스로 꽤 단단하다고 여겨 이따금 벽처럼 단단한 상대에도 대항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벽 앞에서 ‘hard-boiled egg’는 여차하면 강한 척하는 달걀로 돌아갈 뿐이다.

우리가 소설의 인물이고 업무 통지를 받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에 갔는데 웬 엘리베이터의 문 앞에 안내되었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거대한 거실 같은 내부가 펼쳐진다면 어떤 기분이겠는가?
우리는 놀라고 당황하고 비명을 지를지도 모른다. 그러고는 당장 어떻게든 그곳을 빠져나가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달걀이지 ‘hard-boiled egg’는 아니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은 난생처음 보는 엘리베이터를 보고 몹시 이상하다고 여기면서도 어쨌든 이 세상에 거실처럼 생긴 엘리베이터도 있을 수 있다며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다른 사람은 큰 소리로 떠들 만한 일을 놀라지 않고 조용히 받아들이는 이런 태도는 ‘하드보일드 탐정’의 전통.

‘하드보일드 맨’의 인물 형상을 구축하는 데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준 인물이 잇으니 바로 헤밍웨이다. 헤밍웨이-해밋-챈들러는 명백하고도 공공연한 문학 계보를 이룬다. (새뮤얼 대실 해밋(1894~1961)은 미국 작가로 냉혹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창시자)

헤밍웨이의 독특한 소설 스타일을 가리켜 ‘빙산 이론’이라고 한다. 얼음의 질량은 물보다 가벼워 얼음덩어리를 물에 넣으면 십분의 구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십분의 일만 수면 위로 드러난다.

우리가 있는 세계, 특히 사람이 구성하는 범위는 이처럼 복잡해서 겉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안에 숨겨져 드러나지 않는 것에 비해 훨씬 적다. 비유해 보자면, 소설가 프루스트는 잠수부다. 그는 보통 사람에게는 없는 특이한 잠수 실력으로 깊은 바다까지 잠수해 여기저기를 탐색하여 구십 퍼센트의 빙산이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고, 뭍으로 올라와 우리에게 묘사해 준다.

헤밍웨이의 작품은 ‘빙산’을 형용된다. 그가 오로지 수면에 드러나 보이는 부분만을 썼기 때문이다.

헤밍웨이의 대단한 성취는 모더니즘 소설의 세례를 거친 시대에도 겉으로 보이는 행위만 쓰고, 복잡한 표현 없이, 심리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않으면소도 독자를 끌어들이고 비평가를 설득하는 소설 작품을 썼다는 데 있다.
헤밍웨이는 독자에게 이 사람이 무엇을 했다고만 알려줄 뿐 왜 그렇게 했는지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서사와 대구(對句)를 골라 내용을 한정하는 독특한 재능이 있어서, 독자가 ‘이 일은 이게 다가 아닐 거야, 그저 이렇지만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 점이 중요하다.

그는 독자에게 무엇을 알려 주기보다 독자 스스로 추측하고 보충하도록 자극한다. 헤밍웨이가 어떤 현상의 일부를 설명하면, 그 뒤에 그가 말하지 않은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고 느낀 독자가 흥미로운 눈빛을 하며 내용을 상상해 채운다.
그렇다고 해서 헤밍웨이의 소설이 조이스나 프루스트의 소설보다 쓰기 쉽다는 말은 아니다.

헤밍웨이의 화자는 보통 ‘말수가 적다’ 우리는 그들이 말하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렬히 느끼게 된다. 그들은 말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차라리 숨기려고 한다. 우리나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도 비밀을 가진 사람이다. 소설을 읽어 나가면서 우리는 그의 비밀에 호기심을 느끼는 한편, 그가 말한 내용에 자연스레 의심을 품게 된다.

헤밍웨이는 ‘빙산’ 유형의 화자, 즉 ‘하드보일드 맨’에게 그가 본 세계를 말하게 하고, 자연스럽게 독자의 마음에 낯선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헤밍웨이의 펜 아래에서 만들어진 ‘하드보일드 맨’의 형상은 훗날 해밋과 챈들러에게 영향을 주었고, 두 사람은 거드름을 피우지 않으며 무슨 일에든 놀라지 않는 캐릭터를 그렸다.
이 캐릭터들에게는 항상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그는 놀라는 일이 없다. 우리라면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칠 법한 일이 일어나도, 심지어 자기가 얻어맞아 쓰러지는 일이 있어도 그의 반응은 한결같다. ‘세상은 늘 그렇지 항상 그래. 이런 일이 터지는 걸 피할 수 없어.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면 호들갑을 떨어도 소용없잖아.’ 언제나 이런 태도와 말투다.
그들은 뽐내지도 않는다.

챈들러는 말로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일곱 권 썼는데, 이 일곱 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말로의 말투와 그가 사건을 설명하는 습관에 익숙해지지만 그의 삶에서 일어났던 중요한 일을 자세히 알기는 꽤 어렵다.

그는 분명히 다양한 사건과 풍랑을 거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하고 싶어 하지 않고, 아무리 이상하고 곤란한 일을 마나도 늘 ‘이게 뭐 말할 만한 가치가 있어?’ 하는 태도를 유지한다.

‘하드보일드 탐정’을 이해하는 방식 가운데 한 가지는 셜록 홈스와 비교하는 것이다.
첫째, 하드보일드 탐정은 홈스처럼 똑똑하지 않다. .. 홈스는 우리가 모르는 일을 과학적으로 일사불란하고 의심의 여지없이 풀어 보여 준다. .. 홈스는 과학의 이데아를 대표하며, 과학 추리의 능력으로 안개 속을 헤치고 진상을 드러낸다. .. 홈스는 완벽하며, 사실을 복원해 드러낼 수 있다. 그는 19세기 과학의 꿈을 대표한다.
하드보일드 탐정은 이런 조건이 없다. 조금도 과학적이지 않다. 우리는 그들이 물증을 수집하고 물건을 검사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한다. 그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관찰하고 조사하면서 수수께끼를 풀고자 동분서주한다.
둘째, 그들은 홈스처럼 범죄자보다 위에, 심지어 영국 경찰청의 경감 위에 있지 않다.
난제에 부딪힌 영국 경찰청의 경감이 막다른 길에 이르러 공손히 협조를 청하고, 홈스는 그들을 도와 답을 찾아낸다. 하지만 챈들러가 그리는 세계에서 경찰은 사립탄정을 막고 오도하며 이용하기도 한다. ..
챈들러의 말로는 운이 없다. 미녀를 정복하는 것도 아니면서 매번 미녀를 만나면 일이 꼬인다.
셋째, 하드보일드 탐정 곁에는 숭배하는 마음으로 사건 해결 과정을 하나하나 기록하는 왓슨이 없다. 챈들러가 쓴 말로 시리지는 모두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된다. 홈스는 하나의 현상이고 놀라운 광경이다. 우리는 왓슨의 눈을 통해 이 놀라운 광경을 우러러본다. 왓슨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특수한 관점을 제공하는. .. 말로의 일인칭 서술을 읽으면서 우리는 말로의 주관과 편견을 피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챈들러가 강조하려는 내용은 이렇다. 상상의 문학, 고상한 문학은 인간 세상에서 벗어난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쓸 수 있지만 만약 실제 거리, 실제 세상을 쓰려고 한다면 다른 전략을 써야 하고 다른 주인공을 써야 한다. 이 주인공은 평범하되 평범하지 않아야 하며, 진실한 동시에 이상적이어야 한다.

헤밍웨이에서 해밋과 챈들러까지, 그들은 ‘영웅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고민했다. 챈들러는 특히 진지하게 탐색했다. ‘지금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영웅이란 무엇인가?’

말로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반드시 평범한 사람이어야 우리와의 선명한 연결이 끊어지지 않아 그에게 이렁난 일을 어떤 머나먼 허구의 동화나 환상으로 보지 않을 수 있다.

홈스는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탐정이다. 범인이나 사건을 일으킨 사람과 섞여 들어가는 일이 없다.
말로 같은 하드보일드 탐정은 그렇지 않다. 그가 사건을 조사하면서 보고 만나는 용의자는 그 자신과 절대적인 차이가 없다. 말로는 그들과 함께 할리우드 거리에 살고 있고, 그들과 밀접한 상호 관계를 반복해 맺으며 사건을 조사한다. 그가 특히 똑똑해서 범인을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와 범인, 범인일지도 모르는 모든 사람 사이에 ‘지대지(地對地, 땅 위에서 땅 위로 향함)’의 가까움과 익숙함이 있기 때문이다.

말로의 이야기는 범인을 잡아서 해결되는 내용이 적다. 전체 사건의 맥락을 분명히 하고, 사건의 자초지종을 밝히는 일이 나쁜 일을 벌인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챈들러는 말로가 ‘평범하게 좋은 사람’이기를 바랐을 뿐이다. 말로에게는 좋은 사람이 보통 갖고 있는 기질이 없다. 그는 사람을 해치지 않고, 일부러 남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것을 갖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가 가진 원칙의 마지노선은 상황이 다르다고 바뀌지 않는다.

사립 탐정인 말로는 사건이 얼마나 위험하든 조사가 얼마나 어렵든 사건에 얼마나 많은 이익이 걸려 있든 언제나 고객에게 하루에 이십오 달러를 지급하라고, 추가로 필요한 금액은 결산 때 보고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하는 동안 그의 손에서 얼마가 나가든 일당 이십오 달러만 받는다. 사건을 맡기로 하면, 그는 나주엥 어떤 변수가 나타나도 포기하지 않는다. 의뢰인이 죽어서 일당 이십오 달러는 받을 수 없을 것 같더라도 일을 완수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시 ㄴ카카가 바로 우리 이웃에 산다. 그녀의 차는 매일 우리 집 앞으로 지나간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본래 이런 반응을 보일 법한 우리는 말로의 눈을 거침으로써 냉정해질 수밖에 없다. 그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매일 지나가야 하는 길을 오가며, 이웃집 문 앞을 지날 뿐이다. 놀랄 일이 뭐가 있는가.
‘그럴 줄 알았어.’ ‘그렇군. 이제 잘 알겠다.’ 더욱 이상한 일은 하드보일드 맨은 대단히 좋은 일과 대단히 나쁜 일을 한결같이 이런 태도로 대한다는 점이다.


추리소설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범죄 행위를 추리하여 누가 어떤 방법으로 어떤 나쁜 행동을 했는지 밝히는 종류, 다른 하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범죄 행위 뒤에 있는 동기를 추리하고 누군가가 무엇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범죄를 저질렀는가 묻는 종류다.
챈들러의 말로 시리즈는 분명 후자에 속한다. 소설은 말로의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지만 말로가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에 대한 정보는 한정된다. 말로는 자신의 추리를 거의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대부분 조사 행위, 그러니까 어떤 곳으로 달려가 이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다거나 저기로 가서 저 사람에게 얻어맞아 기절했다거나 이상한 곳에서 아름다운 여자에게 끌렸다는 정도로, 이런 조사가 그에게 어떤 단서나 답을 주었는지는 마음속에 숨긴 채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게다가 말로 곁에는 그에게 따져 묻거나 설명을 기다리는 왓슨이 없다.

그는 말로가 만나는 일들을 독자가 따라가다 마지막에 스스로 단서를 이어 추리 과정을 풀길 기대한다.
이는 어쩌면 다른 각도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런 글쓰기는 챈들러의 소설에서 사건을 어떻게 저지르고 숨겼는지 같은 경과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할리우드 감독이 챈들러의 소설을 영화화허려고 시나리오 작가를 찾아 각색하면서 챈들러에게 협조를 구했다. 시나리오 작업이 절반 정도 이르렀을 때 작가가챈들러를 찾아와 난처해하며 물었다. “차 안에서 죽은 인물을 도대체 누가 죽인 건지 아무래도 알 수가 없습니다.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챈들러가 딱 잘라 대답했다. “못합니다. 저도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움베르토 에코


에코의 출판계 친구는 ‘아마추어 탐정소설’ 시리즈를 출판해 이탈리아 독자에게 불붙은 추리 호기심을 만족시켜 줄 계획이었다. ‘아마추어’는 소설의 탐정이 아마추어라는 뜻이 아니라 소설을 쓴 저자가 아마추어라는 뜻이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에코가 말했듯 이탈리아에 거론할 만한 탐정소설 전문 작가가 애초에 없기 때문.

그들이 에코를 찾아간 이유는 그가 평소 탐정소설을 즐겨 읽어 자기 나름의 생각과 의견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제안을 들은 에코의 첫 반응은 이랬다. 작고 얇은 탐정소설 같은 걸 어디다 쓰게? 탐정소설을 쓰려면 오백 쪽은 써야지, 작고 얇은 양에 탐정추리 이야기를 어떻게 담아?
에코의 말에 출판계 친구는 재미있는 여극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에코를 부추겼다. 그럼 어디 한번 오백 쪽짜리 탐정추리소설을 써봐! 그리하여 ‘살해된 교황’ 붐위기에 고무된 에코는 정말로 썼고, 정말로 오백 쪽을 썼고, 아니 오백 쪽으로도 다 담지 못한 대작을 썼다.


<장미의 이름>을 쓰기 전에 에코는 서구 학계와 문화계에 약간 이름 있는 기호학자이자 중세사가였다.

탐정추리소설을 14세기인 1320년대로 설정했다. 이 시기는 기독교회 역사상 ‘대분열’이 재난이 일어났던 시기다. 로마와 아비뇽에 각각 교황이 나타나 서로 싸우는 기괴한 상황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대였다.

에코는 자신의 풍부한 중세사 지식을 소설 속에 한껏 써먹을 수 있었다.

에코는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확실히 과시할 만한 재료가 들어 있다. 에코는 우리가 책을 읽는 동안 그의 박학을 알아주길 바란다.

우리는 책을 읽는 내내 에코가 ‘이거 압니까? 이거 모르지요?’하고 말하는 걸 분명하게 느낀다. ..
이러한 박학이 중세 역사의 세세한 요소를 쌓아 우리의 눈을 어지럽히는 드러난 과시라면, 숨은 과시도 있다. 그는 드러내지 않은 채 추리소설 전통의 ‘상호 텍스트’(intertextual)를 암시하는 내용을 엮었다. .. 숨은 과시는, 잊지 마시라, 그가 열정적인 미스터리 팬이라는 사실이다.

<장미의 이름>을 쓸 무렵 기호학은 서구 학계에서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었으며, 기호학과 밀접하게 호응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도 나타났다. 기호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중요한 연결점은 기표와 기의의 경계를 새롭게 정의하여, 기표와 기의를 우연하고 인위적이며 사회적으로 약속된 관계로 환원하는 데 있다.

빈 것은 채우고 찬 것은 비워, 우리가 기호에 대해 당연히 연상하는 것을 부수고 뒤집기.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 사고다.

에코는 난이도가 높은 소설 내용을 설정했다. 그는 지금 우리 시대의 이런 환경에서는 절대 발생할 리 없는 살인 사건을 쓰고자 했고, 그러면서도 우리를 충분히 이해시키고자 했다. .. 그 시대의 신앙 분위기와 조직 구조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장미의 이름>은 역사가 들어간 추리소설도 아니고, 추리가 들어간 역사소설도 아닌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역사추리소설이다. 그 추리는 특수한 역사 배경 아래에서만 성립되는데, 뒤집어 말하면 시대의 특수한 믿음과 풍습이 살인 사건과 추리를 통해 입체적으로 드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는 인상을 남긴다.




미야베 미유키


독자는 소설의 등장인물을 통해 이런 사람은 이렇게 살아가고,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그의 생활에서는 이런 정류의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다가가서 보고 느끼고 싶어 한다.

진정한 허구란 거짓의,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내 머리로 조종하는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신으로 변신해 현실에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완전한 이해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본격파 추리소설.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를 설정하고 모든 단서를 펼쳐 독자에게 자신의 추리 능력을 시험하게 한다는 본격파의 가정은 게임 혹은 시합의 개념에 가깝다. .. 마지막에 수수께끼를 풀고 사건을 해결하는 명탐정은? 그의 기능은 참고서 뒷면에 붙어 있는 해답에 비교적 가깝다. 독자가 자신이 추리한 결과가 맞았는지 틀렸는지 확인하도록 해 주고 틀렸다면 어디가 틀렸는지 알려 준다.

추리소설의 스펙트럼에는 본격파와 정반대의 자리에선 사회파가 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 사회파 추리의 개조(開祖)이자 일본 사회파 추리에서 오늘날까지 추격당해 본 적이 없는 이정표이기도 하다. ..
마쓰모토 세이토는 전쟁(2차대전) 후 일본의 혼란과 모색 사이에서 일어난 사람으로 그것을 깊이 관찰하고 느꼈으며, 사회파 추리소설을 창조해 시대가 그에게 준 것에 구체적으로 보답했다. ..
그는 추리를 미끼로 삼아 이후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엄숙한 사회 메시지를 전하고, 독자에게 ‘정의’란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고 사고하도록 요청하고 심지어 강요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펜 한 자루에 의지ㅣ해 홀로 매일 성실하게 평균 구천 자의 원고를 써 소설로 내며 독자에게 반복해 물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동기로 이런 죄를 지었다면, 당신은 어떻세 보시겠으며 어떻게 판단하시겠습니까?’

본격파에서 범인을 찾으면 범인은 그저 범인일 뿐이지만, 마쓰모토 세이초에게 범인을 찾는 일은 ‘이 사람은 어떻게 범인이 되었는가?’라는 또 다른 의혹의 시작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 문제에 관심이 없을 수 있으며, 어떻게 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모방범>(미야베 미유키)의 서사 구조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제1부에는 범인과 경ㅊ찰과 사회의 수수께끼(mystery)가 완전하게 펼쳐진다. ..
제2부의 시작에서 그는 추리소설의 의혹을 다루는 방식을 철저하게 위반하는 글쓰기로, 범인을 등장시키고 범인의 자리에 서서 전지적 시점으로 다시 한 번 사건을 말한다. 그러니까 미야베 미유키는 제1부에서 경찰, 피해자, 방관자 들이 모르고, 그래서 간절히 간구하던 정보인 범인은 누구인가, 어떻게 사건을 저질렀는가, 왜 사건을 일으켰는가 그리고 그 과정엣ㅓ 그들은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빠짐없이 우리에게 알려 준다. ..
제2부에서 다시 말하는 것은 그저 ‘어떻게’를 설명할 뿐이다. 왜 방송국에 전화를 했을까? 왜 먼저 건 전화와 나중에 건 전화의 말투가 달랐을까? 제1부에 나타났던 일들이 제2부에서 반복되면서 ‘왜’를 설명한다.

추리소설을 소개할 때 가장 어렵고 금기시되는 점은 절대로 핵심이 되는 사건을 알리지 않는 것인데, 독자가 수수께끼를 풀 재미를 부숴서는 안 되지 때문이다. 그러나 <모방범>에는 이런 문제가 없다.

<모방범>에서는 도리어 탐ㅈ덩이 오리무중에 있고, 독자는 이미 범인이 누구인지뿐 아니라 그들이 사건을 저질렀을 때부터 연막 작전을 쓰기까지 모든 단계를 하나하나 알고 있다.

다카이 가즈아키라는 등장인물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해 이야기 속에 배치했다. 다카이 가즈아키가 있어 <모방범>은 단순히 추리소설에 그치지 않고 심리소설이자 나아가 사회소설이 될 수 있었다.

제3부의 의혹은 우리의 독서에 던지는 시험이다. 즉 정의에 대한 의혹이다.

우리는 나중에 정의가 실현되는지에 관심이 있다.

제2부에서 구리하시 히로미와 함께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줄곧 구리하시 히로미가 어릴 때 지어 준 별명 ‘피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제3부에 이르러서야 아미카와 고이치라는 본명이 나온다.

수수께끼를 푸는 의혹과 정의에 대한 의혹은 여기에서 하나가 된다. (우리 독자가 아니라)오로지 그들이 진상에 다가가고 드러낼 방법을 찾아야만 다카이 가즈아키의 누명과 억울함을 벗길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43명의 등장인물 가운데 보조인물이 없다. .. 독자는 43명의 등장인물의 주관적인 시야로 거의 들어가다시피 하며, 소설은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두려워하는지, 무엇에 분노하는지, 또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고 분노하는지 보여 준다.

미야베 미유키는 소설에 추리가 아닌 주제를 더해 죄와 벌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이해와 소통을 탐구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모방범>의 놀라운 특색은 이 작품이 주인공 없는 소설, 특히 추리하는 주인공이 없는 소설이라는 점이다.

초기에는 홈스처럼 우리보다 백배는 똑똑한 사람이 주인공을 맡았다. 나중에는 말로처럼 우리보다 백배는 운이 없고 백배는 고통스러운 사람이 주인공을 맡았다. 또는 달리 선택의 여지없이 사건 조사와 추리가 자신의 일인 형사, 검사 혹은 검시관이 주인공을 맡기도 한다. ..
<모방범>에는 이런 주인공이 없다.

‘절대악’을 대표하는 아미카와 고이치에 대해 미야베 미유키는 그가 대체 어떻게 자랐는지, 성장하면서 어떤 일을 당했기에 ‘절대악’을 믿고 추구하게 되었는지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소설의 기교는 표현이나 묘사뿐 아니라 독자의 반응, 즉 독자가 누구에게 이입할지, 누구를 반대할지, 누구를 탓하고 이해할지를 예상하고 조종한다. 소설 기법에서 오랜 세워에 걸쳐 검증된 하나의 원칙은 한 사람의 어린 시절에 대해 쓰면, 그 사람은 용서할 수 없는 나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어린 시절, 아이였을 때에는 누구나 천진하고 스스로를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은 한 사람의 나쁜 성향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때이고, 천진이 악으로 변하는 이유와 요소가 나타나는 때이다. 이러한 이유와 요소가 그의 책임에 한계가 있다는 걸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그의 나쁜 행동이 그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이해하고 나면 그를 멸시하고 미워할 수 없게 된다. 미야베 미유키는 일부러 독자가 아미카와 고이치의 어린 시절을 이해하도록 두지 않았다. 어떤 악은 일정 정도에 이르고, 일정 정도를 넘어서면 이런 방식으로 해설될 수 없다. 해석할 수 없는게 아니라 도덕적으로 해석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해석하지 않음은 하나의 가치 태도다. 악에는 반드시 인과관계가 있지만 어떤 행위의 한계선은 해석과 합리화가 섞이는 것을 절대 거부하도록 한다. 우리가 해석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란 해석을 하면 이 사건 나름의 논리가 가진 의미를 따라갈 수밖에 없고, 악에 대한 우리의 절대적인 경아고가 혐오와 비난 또한 감소하게 된다. 소설에는 도덕적 책임이 있고, 적어도 소설가로서 미야베 미유키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런 도덕적 입장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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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관찰을 통해 나는 인간이 영혼과 동물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둘은 서로 별개일지라도 하나가 다른 하나에 완전히 포섭되거나 딱 겹쳐지기도 한다. 따라서 둘을 확연히 구분 지으려면 영혼이 동물성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

예전에 한 선생이 플라톤은 물질을 타자(他者 다를타 사람자)로 지칭했었다는 얘기를 해 준 적이 있다. 참으로 어울리는 명칭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이 명칭을 영혼과 더불어 인간을 구성하는 동물성에 갖다 쓰기로 한다. 동물성이라는 실체야말로 타자이며, 아주 요상하게 우리 인간을 희롱하기 때문이다.  30


동물성이 영혼에 끌려다니기도 하고, 반대로 영혼이 동물성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원리에 입각해 보면 한쪽은 입법권을, 다른 한쪽은 집행권을 지닌 셈인데, 이 두 권력은 곧잘 충돌한다. 뛰어난 이들은 자신의 동물성을 조련하는 데 가장 신경 쓴다. ..

이 점에 대해서는 예가 필요할 것 같다.

책을 읽다가 갑자기 흥미로운 생각이 뇌리를 스치면 그 생각에 사로잡힌 나머지 기계적으로 글자와 문장을 따라갈 뿐, 이미 책은 안중에도 없을 때가 있다. 무엇을 읽었는지도 모르고 방금 읽은 내용도 기억하지 못한 채 책장만 넘긴다. 당신의 영혼은 자신의 짝인 동물성에게 책을 읽으라고 명령은 해 놓은 채, 정작 자신은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는다. 그러면 타자는 영혼이 더는 귀 기울이지 않는 책 읽기를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31-32


물질에서 벗어나 영혼이 언제든 홀로 여행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람직하고도 유용한 일이다.  37


아, 왜 우리는 근심 걱정과 고통스러운 야망을 타자에게 넘기지 않는 걸까? 가엾은 그대여, 이리 오라. 그대가 지은 감옥의 문을 부숴 버리고 내가 그대를 인도할 천상과 낙원의 저 하늘 위에서 홀로 부와 명예를 좇는, 세상에 던져진 그대의 동물성을 내려다보라. 세상 사람들 속에서 그대가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지 보라. 세상 사람들은 예의상 서로 거리를 두고 있지만, 각자 홀로라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 안을 배회하여도 사람들은 그대에게 영혼이 깃들어 있기나 한지 혹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  42


나는 의자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걸친 뒤 벽난로 선반 위에 두 발을 올려놓았다... 참으로 아늑한 자세가 아닐 수 없다. 긴 여행길에서 어쩔 수 없이 한곳에 머물러야 할 때 이보다 더 유용하고 편한 자세가 있을까.  66


독자 여러분은 시시콜콜하다고 나에게 뭐라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여행자들이 좀 그렇지 않은가. 몽블랑을 오르거나 쫙 벌어진 엠페도클레스의 무덤으 오를 때면 소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고 기록할 것이다. 일행은 몇 명이며, 노새는 몇 마리인지, 챙겨 간 음식의 맛은 어떠한지 그리고 일행들은 얼마나 잘 먹었는지부터 노새가 발을 헛디뎌 비틀거린 얘기에 이르기까지 노트에 꼼꼼히 다 기록할 것이다.  69


진솔한 자세로 이론을 개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음과 같이 답할 것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글을 쓸 때는 어조가 단정적이 되곤 하는데, 이는 글쓴이가 제가 회하를 옹호할 때 그랬던 것처럼 겉으론 공정한 척하면서 미리 어떤 암묵적 판단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쓴 길은 반박을 낳을 수밖에 없고, 결론은 미심쩍을 수밖에 없지요.  103


나의 하인과 나의 개에게 철학과 인도주의를 배우고 있다.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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