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6.08.22 이것이 인간인가 - 프리모 레비 돌베개 2007 03880
  2. 2010.09.08 아우슈비츠 2

작가의 말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우연적이고 단편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날 뿐이며 사고체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인생을 얼마쯤 살다 보면 완벽한 행복이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거소가 정반대되는 측면을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드물다. 즉 완벽한 불행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말이다. 이 양 극단의 실현에 걸림돌이 되는 인생의 순간들은 서로 똑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모든 영원불멸의 것들과 대립하는 우리의 인간적 조건에 기인한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늘 모자란 인식도 그중 하나다. 그것은 어떤 때에는 희망이라 불리고 어떤 때에는 불확실한 내일이라 불린다. 모든 기쁨과 고통에 한계를 지우는 죽음의 필연성도 그중 하나다. 어쩔 수 없는 물질적 근심들도, 이것들이 지속적인 모든 행복을 오염시키듯, 이것들은 또 우리를 압도하는 불행으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돌려놓음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파편화하고, 그만큼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18


위엄 있게 죽음을 맞을 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종종 그 소수는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이다. 침묵할 줄 아는 사람, 다른 사람의 침묵을 존중해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20


우리는 모두 그 문 안에 갇힌다. 머리를 박박 깎인 채 알몸으로 서 있다. 발이 물에 잠긴다. 샤워실이다.  29


아우슈비츠 근처 모노비츠에 와 있다.포로들은 일종의 고무인 부나(부나는 원래 부타젠과 나트륨의 첫 글자를 딴 것. 모노비츠에 있는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는 이 합성고무를 만들기 위한 공장이 있었는데 이를 부나 공장이라 불렀다)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한다. 그래서 수용소 이름도 부나다.  31


종이 울리자 여전히 깜깜한 수용소가 깨어나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진다. 5분 동안의 축복이다. ..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뭔지 알 수 없는 넝마 조각들을 우리에게 던졌고 밑창이 나무로 된 신발 한 켤레 속에 우리의 두 손을 쑤셔넣었다. 상황을 이해할 시간도 없이 우리는 바깥에, 새벽녘의 푸르스름한 눈 위에 나와 있다. 맨발에 알몸으로, 손에는 옷과 신발을 든 채 우리는 1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다른 막사까지 달려가야만 한다. 우리는 그 막사에서 옷을 입을 수 있다.  33


우리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옷, 신발,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빼앗아갔다. ..그들은 우리의 이름마저 빼앗아갈 것이다.  34


해프틀링(포로). 나는 내가 해프틀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이름은 174517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고 죽을 때까지 왼쪽 팔뚝에 문신을 지니고 살게 될 터였다...

"숫자를 보여줘야만" 빵과 죽을 받을 수 있었다.  35


수용소의 고참들은 수인번호로 모든 것을 알았다. 수용소에 들어온 시기, 타고 온 기차, 국적이 수인번호에 나타났다. 3만에서 8만 대의 번호를 지닌 사람들을 보면 누구나 존경을 표하곤 했다. 이제 겨우 수백 명에 불과한 이들은 바로 폴란드 게토의(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 14세기 초부터 19세기까지 유럽 곳곳에 존재했다. 독일군은 1940년부터 동유럽의 주요 도시에 게토를 재건했는데, 그곳은 곧 기아와 질병 수용소로의 강제연행 등으로 비극적인 죽음의 무대가 되었다. 바르샤바의 게토에서는 1943년 봄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결국 그곳에 있던 거의 모든 유대인이 학살됨으로써 진압되었다.) 생존자들이었다.  36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수용소가 그런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빨리 그리고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38


막사마다 200~250명씩 수용되는 일반 해프틀링이 사는 곳이다...

공동 침실의 바닥 면적이 얼마나 좁냐 하면, 같은 B블록에 사는 사람들은 반 정도가 침대에 누워 있지 않는다면 전체가 동시에 그 공간에 있기도 힘들다. .

우리는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이 세 부류로 나뉜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범죄자, 정치범, 그리고 유대인이었다. 모두 줄무늬 옷을 입고 있고 모두 해프틀링이지만, 범죄자들은 상의에 박힌 숫자 옆에 초록색 삼각형을 달고 다닌다. 정치범들은 빨간색이다.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빨간색과 노란색의 유대인 별을 단다.  44


우리는 음식물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다. 이제 우리도 식사를 마친 뒤 반합의 바닥을 열심히 긁어내고 빵을 먹을 때는 부스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턱 밑에 반합을 댄다. 이제 우리는 죽통의 윗부분에서 푼 죽과 밑에서 푼 죽이 같지 않다는 것도 안다. 우리는 죽통의 크기에 따라 줄을 설 때 어느 죽통 앞에 서는 게 제일 유리한지 계산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다 쓸모가 있음을 배웠다. 철사는 신발을 묶는 데, 천 조각은 발을 감싸는 데 필요하고 종이는 추위를 막기 위해(불법으로) 상의에 대는 데 필요하다. 우리는 모든 물건을 도둑맞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만 방심하면 반드시 도둑맞는다는 것을 배운다. 도둑맞지 않기 위해 반합부터 신발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모두 강의에 집어넣어 보따리를 만들어 베개로 베고 자는 기술을 익힌다.  45


자신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 이성적일 수 있는 인간은 매우 드물다. 운명이 위태로울 때 사람들은 극단적인 태도를 취한다. 성격에 따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잃었고 여기서는 살 수 없으며 종말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금방 확신하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우리를 기다리는 삶이 힘겹기는 하지만 구원의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이 멀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믿음과 힘이 있다면 우리집으로 다시 돌아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인 이 두 부류가 그렇게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불가지론자들이 많아서라기보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화 상대와 상황에 따라, 기억도 일관성도 없이 두 극단적인 입장 사이에서 동요하기 때문이다.  50


나는 수레를 밀었고, 삽질을 했고, 비에 젖었고, 바람에 몸을 떨었다. 내 육체는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배는 볼록하게 나왔고 팔다리는 장작개비 같았으며 얼굴은 아침이면 부었다가 저녁이면 홀쭉해졌다. ..

사나흘 만나지 못하면 서로를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우리 이탈리아인들은 매주 일요일 저녁 수용소 한쪽 귀퉁이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곧 그만두어야 했다 숫자를 세는 게 너무 슬펐기 때문이다. 우리의 수는 매번 줄어들었고 매번 몰골이 더 사납고 더 비참해졌다. 모임에 나가려고 몇 발짝 떼어놓는 것도 힘이 들었다. 게다가 다시 만나게 되면 필연적으로 기억을 떠올리고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51


솔직히 고백하면, 수용소 생활 일주일 만에 나는 청결의 욕구를 잃어버렸다. 내가 세면장을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거기에 쉰 살이 다 된 내 친구 슈타인라우프가 웃통을 벗고 서 있었다. 그는 몸을 문지르고 있으나 별 효과가 없다(비누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 목과 어깨를 씻는다. 슈타인라우프는 나를 보자 인사를 한다. 그러다 곧바로 정색을 하며 다짜고짜 내가 왜 안 씻는지 묻는다. 내가 왜 씻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면 내게 도움이라도 된다는 건가? 내가 누구의 마음에 더 들게 되기라도 한다는 건가? 하루, 아니 한 시간이라도 더 오래 살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 반대다. 오히려 수명이 더 짧아질 것이다. 씻는 일도 노동이고 에너지와 칼로리의 낭비니까. 슈타인라우프는 우리가 석탄 자루밑에서 30분만 낑낑대노라면 자기와 내가 구분조차 안 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런 생활환경에서 얼굴을 씻는다는 것은 어리석고 심지어 무례하기조차 한 것 같다. 이것은 기계적인 습관일 뿐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절멸의 의례를 처량하게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아니, 이미 죽기 시작했다. 기상과 노동 사이에 여우 시간이 10분밖에 없다면, 나는 그 시간을 다른 데 쓰고 싶다. 나 자신 속으로 침잠하여 결산을 하거나, 이것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늘이나 바라보고 싶다. 아니면 아주 잠시나마 한가로움이라는 사치를 즐기도록, 그냥 그렇게 살아 있도록 내버려두고 싶다. 

하지만 슈타인라우프가 내 생각을 가로막는다. 그는 세수를 다 했고, 무릎 사이에 끼워두었던, 나중에 걸칠 아마포 상의로 몸의 물기를 닥는다. 그러고는 나에게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는데, 그 와중에도 자기가 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56-57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도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이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 우리는 나막신을 질질 끌지 말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

이것이 바로 마음씨 좋은 사람 슈타인라우프가 나에게 말해준 것이다.  57-58


카베는 크랑켄바우, 즉 위무실의 약자다. ..

회복의 기미를 보이는 사람은 카베에서 치료를 받고, 병이 점점 심해지는 사람은 가스실로 보내진다.

이 모든 게 우리가 다행히 '경제적으로 유용한 유대인'으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  65


카베의 삶은 림보(<신곡>의 지옥을 구성하는 아홉 개의 원 중 가장 형벌이 가벼운 제1원을 말한다.)의 삶이다. 굶주림과 질병 본래의 아픔 말고는 불편함이 상대적으로 적다. 춤지도 않고 일도 안 한다.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구타를 당하지도 않는다.  72


11시 30분에 오늘 죽은 어느 정도일지, 맛은 어떨지, 죽통의 윗부분 혹은 아랫부분 중 어느 것이 우리 차지가 될지 하는 판에 박은 질문들이 시작된다. 난 이런 질문들을 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그래도 그 대답에 탐욕스럽게 귀를 기울이고 부엌에서 실려오는 연기에 코를 킁킁거리지 않을 수 없다.  103


삶의 의미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모든 힘줄 속에 뿌리 박혀 있다. 이것이 인간 본질이 지닌 속성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이러한 목적에 많은 이름을 부여하며 그 성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토론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문제는 훨씬 더 단순하다.

오늘 그리고 여기서 우리의 목표는 봄에 도달하는 것이다. 지금은 다른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제 이런 목표 뒤에 다른 목표는 아무것도 없다.  106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이 애초에 완전한 행복의 상태를 누릴 수 없어서라기보다 불행의 상태가 지니는 복잡한 성질을 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없이, 차례대로 늘어선 그 불행의 이유들이 단 하나의 이름을, 가장 큰 이유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 이유가 힘을 잃어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 때 우리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비탄에 잠길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뒤로 또 다른 이유들이 줄을 서 있다.  110-111


민간 관리국은 부나에서 도둑질하는 것을 벌주지만, SS는 오히려 허용하고 조장한다. SS가 엄금하는 수용소 안에서의 도둑질이 민간인들에게는 정상적인 교환 행위로 간주된다. 해프틀링들 간의 도둑질은 일반적으로 처벌을 받으며, 도둑과 피해자가 동일한 강도의 벌을 받는다. 나는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이라는 단어가 수용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지 한번 생각해보라고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다.  130


우리는 명백하고 손쉬운 추론을 믿지 않는다. 모든 문명적 상부구조가 제거되면 인간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잔인하고 이기적이고 우둔하다는 추론 말이다. 이러한 추론에 따르면, '해프틀링'은 거리낌이 없는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생각에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궁핌과 지속적인 육체적 고통 앞에서 수많은 사회적 습관과 본능이 침묵에 빠진다는 것뿐이다.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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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생각/내용 2010. 9. 8. 00:59


아우슈비츠 수용소 (Auschwitz Concentration Camp)
살인악마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독일 총리로 권력을 잡을 당시(1933년)
수용소 정문. "노동이 자유를 만든다" 라고 씌여있다
버려진 시체들
산을 이룬 희생자들의 신발
가스실 내부
생체실험에 이용된 아이들
      아 !, 아우슈비츠! 이 한마디 외침 밖에 달리 무슨 말이 있을수 있으랴.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잔혹행위의 박물관이라 할 이 거대한 시설을 둘러보는 관광객들은 누구나 입을 굳게 다문다.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야만의 극치가 모두 엄연한 사실이었다고 이 수용소 시설과 유물과 사진들은 웅변하고 있다. 이 역사의 현장과, 전쟁범죄의 전형을 보여주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요즘 평화를 기원하는 사람들의 발길로 붐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아우슈비츠의 외국 관광객 가운데 피해국 이스라엘과 가해국 독일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이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는 피해자 나라와, 끝없이 과거사를 참회하는 가해자 나라가 모두 정책적으로 이 도시로의 수학여행을 권장하기 때문이다.
 수용소 의사 멩겔레 박사에 의해 인체실험을 받고있던 집시소녀들. 너무 여위어 성별구분도 어려울 정도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폴란드 남부 아우슈비츠에 있었던 독일의 강제수용소이자 집단학살수용소. 나치 학살의 생생한 현장에 400만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가스실, 철벽, 군영, 고문실 등이 있다.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50㎞ 지점에 위치한 아우슈비츠는 문명을 배반한 야만의 극치이며 인류가 저지른 가장 잔혹한 행위의 흔적이다.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의 상징인 강제수용소로 잘 알려져 있는 아우슈비츠는 원래 인구 5만 명의 작은 공업도시로, 폴란드어로는 오슈비엥침 이라고 한다. 이 도시의 외곽에 있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수용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생지옥을 만나게 된다. 학살한 시체를 태웠던 소각로, 카펫을 짜기 위해 모아둔 희생자들의 머리카락, 유대인들을 실어 나른 철로, 고문실 등이 끔찍했던 광기의 역사를 전해 준다.4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의 현장.1940년 봄, 친위대 장관인 하인리히 힘러가 주동이 되어 가시철망과 고압전류가 흐르는 울타리, 기관총이 설치된 감시탑을 갖춘 공포의 강제수용소를 세웠다. 그 해 6월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고, 1941년 히틀러의 명령으로 대량살해시설로 확대되었으며, 1942년부터 대학살을 시작하였다. 열차로 실려온 사람들 중 쇠약한 사람이나 노인, 어린이들은 곧바로 공동샤워실로 위장한 가스실로 보내 살해되었다. 이처럼 가스, 총살, 고문, 질병, 굶주림, 심지어는 인체실험을 당하여 죽은 사람이 40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 중 3분의 2가 유대인이다. 희생자의 유품은 재활용품으로 사용했고, 장신구는 물론 금니까지 뽑아 금괴로 만들었으며, 머리카락을 모아 카펫을 짰다. 뼈는 갈아서 골분비료로까지 썼으니 사람의 몸뚱이 중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1945년 1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나치는 대량학살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막사를 불태우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 수용소 건물과 막사의 일부가 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7년 폴란드의회에서는 이를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희생자를 위로하는 거대한 국제위령비를 비르케나우에 세웠으며, 수용소 터에 박물관을 건립하였다. 또한 나치의 잔학 행위에 희생된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 유네스코는 1979년 아우슈비츠를 세계문화유산에 지정하였다.인구 5만명 남짓한 수용소 도시 오시비엔침 시가지를 약간 벗어난 수십만 평 들판에 자리 잡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겉으로는 아주 평화롭게 보인다. 고압전류가 흐르던 철조망만 아니라면, 아직 붉은 색이 고운 2층 벽돌 건물들은 전원적인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키 큰 포플러의 정연한 행렬과, 잘 가꾸어진 잔디와 꽃밭이 연출하는 겉모습이다. 그러나 줄 지어 늘어선 건물 안으로 한 발자국만 들어서면 관광객들은 고통스러운 정서의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수용소 지하감방 '질식의 방' 수감자들이 손톱으로 그린 벽화. 해골같은 모습은 자신들의 얼굴이다.  첫 건물에서는 끔찍하게 살해당한 유태인 시체를 태운 재그릇이 관광객을 맞아준다. 유럽 각지에서 강제로, 혹은 기만적인 수법으로 연행해 온 유태인 열차가 도착하면, 나치는 노동력이 없는 어린이와 노약자, 부녀자, 불구자 등을 따로 집합시켜 즉시 가스실로 데려갔다. 총살, 교수형, 강제노동, 질병, 굶주림, 고문, 인체실험 등으로 죽은 사람들을 합쳐 이 수용소에서 생목숨을 뺏긴 사람은 150만 명으로 추산된다.그렇게 죽은 시체들은 가스실에 딸린 소각시설로는 다 처리할 수가 없었다. 야외 소각장을 여럿 만들어야 했다. 
시체 소각로
      죽은 사람의 옷과 신발과 소지품들은 재활용품으로 쓰였고, 잘라낸 머리칼로는 카펫을 짰고 뼈는 갈아서 골분비료로 썼기 때문에 유태인은 죽어도 버릴 것이 없었다. 이 대목에서는 구역질을 참지 못해 밖으로 달려 나가는 관광객들도 있다. 휴먼 카펫의 원료인 머리털이 전시실을 가득 메운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볼 사람이 있을까.갈비뼈가 앙상한 가슴에 말라붙은 젖가슴을 부끄러워하는 여인과, 인체실험 대상인 집시 소녀들의 앙상한 전신 사진은 체중 35kg이 넘는 여성 재소자가 없었다는 안내자의 설명을 증명해 주었다. 한 여성 재소자가 먹을 것으로 유혹하는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고 빵 3개로 허기를 채웠다니 배고픔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인지를 말해준다. 가스실 바로 옆에 설치된 소각장. 독일에서 만들어 현지에서 조립한 시체소각로.  한꺼번에 900명을 살해하였던 가스실은 인간의 야수성을 웅변하는 증거다. 인근 제2, 제3, 제4수용소에는 그보다 더 큰 가스실이 있었다니 살인의 공업화, 살인기술의 과학화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가스실 옆에 있는 시체소각로는 아직도 가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탈주자, 탈주 방조자, 정치범 등을 처벌하던 지하 감방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최대의 모욕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아사의 방' 이란 곳은 음식공급을 끊어 굶겨 죽이는 곳이고, '질식의 방' 은 산소 결핍으로 서서히 죽게 하는 시설이다. 이 방에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사력을 다해 손톱으로 벽에 새긴 그림과 글씨들이 남아있다. 해골 같은 얼굴들은 아마도, 그 방에서 죽어가던 자신과 동료들 모습일 것이다.1982년 교황청이 성인 순교자로 추서한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가 순교한 곳이 바로 이 방이다. 폴란드 출신 사제였던 그는 탈주자 발생에 대한 징벌로 10명의 동료가 '아사의 방' 으로 가게 되자, 아내와 어린 자식 걱정으로 우는 젊은이를 대신해 그 방에 들어가기를 자청한 것이다. 면적이 54만평이나 되는 제2수용소 구내로 뻗은 철도 인입선. 유럽 각지에서 끌려온 유태인들은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남자는 강제노역장, 노약자는 가스실로 끌려갔다.  200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임레 케르테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출신이라는 사실도 우연이 아니다. 유태계 헝가리인인 그는 열다섯 어린 나이에 이 죽음의 도시에 끌려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이다.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운명> 3부작에서 홀로코스트는 인간세상에서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규정하였다.그 예단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현대사에서 여러 차례 적중되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르완다와 코소보의 인종청소, 체첸과 중동지역 종족분쟁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아우슈비츠는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런 야만을 인류사회에서 영원히 뿌리 뽑아야 한다.
      글이 너무 장문이어서 읽기에 불편하셨으리라 생각 된다.그러나,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인종말살 사건이니 만큼기왕에 읽는 분들을 위하여 몇 군데 검색을 거쳐압축, 또 압축한 글임을 밝혀 두는 바이다.60 년대 후반의 '킬링필드' 사건처럼 사후에 씌어진 글이라 이론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편적이나마 여러 사진들을 살피며 사실성에 입각 편집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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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슈비츠 여성 인체실험 기구 발견


      아우슈비츠 수용소 인근에서 150개가 넘는 부인과 및 외과 시술기구가 무더기로 발견됐다고 아우슈비츠 박물관이 26일 밝혔다.

      이들 기구는 당시 여성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잔인한 인체실험을 했던 외과의사 카를 클라우베르크의 행적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분석된다.

      문제의 기구들은 폴란드 남부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 근처 한 주택에서 발견됐다.
      나치 학살의 생생한 현장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인근에서 150개가 넘는 부인과 및 외과 시술기구가 무더기로 발견됐다고 아우슈비츠 박물관이 26일(현지시각) 밝혔다.

      이들 기구는 당시 여성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잔인한 인체실험을 했던 외과의사 카를 클라우베르크의 행적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분석된다.

      문제의 기구들은 폴란드 남부 오시비엥침(독일어로는 아우슈비츠) 근처 한 주택에서 발견됐다.

      박물관 측은 "최근 몇년 사이 가장 눈에 띄는 발견 가운데 하나"라며 "모든 정황이 클라우베르크에 의해 기구들이 사용됐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나치의 SS 엘리트 친위대원이었던 클라우베르크는 여성의 집단 불임시술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 여성 수용자 수백명이 그의 실험대상이 돼 생을 마쳐야 했다.

      그는 1945년 1월 옛소련의 '붉은 군대'가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를 몰아내자 독일 베를린 근처의 라벤스브뤽 여성 수용소로 자리를 옮겨 실험을 계속했다.

      그해 6월 소련인들에게 체포돼 25년형을 받은 그는 1955년 서독으로 보내졌다. 이곳에서 수용소 생존자들에 의해 또다시 기소됐고, 2년 뒤 숨졌다.

      이번에 기구들이 발견된 주택은 2차 세계대전때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둘러싸여 완전히 폐쇄됐던 지역에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처음에는 폴란드 정치사범을 수용하기 위해 세워졌지만 유럽 유대인을 집단학살하는 장소가 됐다.

      1940~1945년 이곳 수용자들을 비롯해 폴란드인, 소련인 등 약 110만명이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미워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은(안내자설명)

          첫:어머니가 유방암으로 2년 고생후

          죽었다.유대인 담당의사에게 "우리 어머니를 잘 고쳐 주셔서 고맙다" 고


                      반어법적으로 의사에게 비꼬는 편지를 쓴다. 또 예술학교에 낙방한 것도 유대인 선생이 떨어

          뜨렸다고 한다

          둘:나라없이 떠도는 유대인들이 뛰어난 머리와 장사수완으로 대부분의 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근히


       그들을 미워하고 질투하던 사람들이 그들이 없어지면 자기들에게 이익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는 것


      2차대전 당시 유대인 박해및 학살의 진상

       

      첫째 - 1차대전직후까지 독일은 유대인에 대해 관대했다

      유태인 박해는 다른 유럽국가들이 심했으며 독일은 오히려 관대했다. 그래서 많은 유태인들이 2차대전 전에는 독일에 가장 많이 거주 했다. 그리고 독일계 유태인 금융제벌인 막스바르부르크는 히틀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걸로 유명하다.

       

      둘째 - 독일은 유태인들에 대해 차별을 별로 하지 않았다

      독일 유태인들은 다른 유럽국에 비해 출세나 사업을 하기 쉬웠고 이들은 학계, 법조계, 의학계, 금융계, 언론계등 독일사회 전분야를 장악할수 있었지만 유태인들은 독일사회와 화합하려 하지 않았고 나중에 독일 국민들의 반감을 사게 되는 원인이된다(1992년 LA폭동때 빈민폭도들이 자수성가한 한인교포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약탈한것과, 인도네시아 폭동때 짱골라교포들이 원주민들에게 당한것과 같은 이치이다)

       

      셋째 - 독일은 유태인의 독립국가 형성에 신경을 썼다

      1933~1941년 까지 독일은 유태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고(독일의 밀텐슈타인이 유대인이주를 하인리히 히믈러 SS사령관은 시온주의자의 대아랍 지하군사 조직인 '하가나'의 활동을 도왔다.), 1942년 요제프 괴밸스의 본격적인 유태인박해 주장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유태인 학살 보다는 그들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섬으로 보내 그들만의 국가를 형성시키고 나중에 독일의 우방으로 삶으려 했다.

       

      넷째 - 독일의 등뒤에 칼을 꽃은 유태인

      독일이 친영국 성향의 유태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려하자 당시 독일의 경제를 잡고 있던 유태인들은 독일을 굴복시키기위해 독일의 수출을 분쇄시키고 전세계적인 독일상품 불매운동을 벌인다. 그리고 이 활동을 신성한 전쟁이라고 하면서 세계 유태인경제 연합회 회장인 운터마이어가 앞장을 선다 뿐만아니라 전쟁중에 일부 유태인이 연합군과 결탁하여 연합군의 폭격을 유도하는 신호등을 장착하는 등의 밀정행위를 하자 히틀러는 모든 유태인을 소용소에 강금 시킨다.

      이쯤되면 유대인의 행위는 국가 반역죄에 해당되며 국가반역죄는 어느나라에서나 사형에 해당 된다.

       

      다섯째 - 그러나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만다

      시온의 칙훈서(유태인의 세계경영지침서)가 발견되어 알려지고, 공산당활동에 유태인들의 간접협조한 혐의와, 1936년 프랑스주체 독일 외교관을 암살하자 반유대감정으로 독일이 들끓기 시작했고 크리스탈학살 사건으로 유태인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더이상의 피해를 막기위해 유태인이 학살당하지 않도록 2만명의 유태인을 강제로 수용소에서 수용하게 된다.

      좀더 덧붙여서 말하자면 독일을 패하게 만든 세계 1차대전의 배후에는 바질 자하로프라는 유대인 전쟁무기상인이 있었는데 이 사람의 영국의 군수제벌인 빅커스사의 영업이사로써 친독적인 그리스 국왕을 추방하여 세계대전의 장기화를 획책했다고 한다.

      특히 독일의 군사기밀을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으로 빼돌린 사실 하나 만으로도 독일이 유대인을 증오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영국군이 사용한 수류탄은 독일의 기술로 만들어진 수류탄으로써 이 성능좋은 독일제 수류탄이 독일군을 죽이는 촌극까지 벌어지게 된다.

       

      여섯째 - 유태인 600만 학살은 조작 확대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발진티푸스와 장티푸스)

      실제로는 60만정도이며 그것도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과 전염병(더이상의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시체들을 소각하게 된다)으로 사망한 사람이 대다수이다 25(7.6평)평방미터 되는 곳에 7~800명을 집어넣고 독가스로 죽였다는데, 실제론 그런 계산이 안나옴니다, 그리고 관광객들에게 전시되는 아우슈비츠 가스실과 소각로는 194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스탈린의 소련군 또한 폴란드 유태인을 많이 죽였으며 나중에 이것마저 독일의 만행으로 뒤집어 쓰게 된다.

       

       

      유태인 홀로코스트,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내가 알기로 이 세상에서 유대인만큼 그들이 겪었다는 수모와 고난과 순교에 대해 우는 소리를 하는 족속도 없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들이야말로 유럽의 정치와 경제, 주식시장, 그리고 국가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실질적 군주들이란 사실을 알 수 없을 정도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1919년에 유태인 희생자가 600만명?
      1차대전 직후 미국과 유럽에서는 그 진위를 떠나 이 전쟁에 대한 유태인 국제은행가들의 배후 음모설이 무성했다. 서구의 유태계 언론은 이러한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런 맥락에서 1919년 미국의 유태계 유력지 American Hebrew 에 실렸던 한 기사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눈길을 끈다:

       

      유태인 남자와 여자 600만 명 생필품의 부족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80만 명의 어린 아이들이 주린 배를 안고 울부짖고 있다. 이러한 비참한 운명은 이들이 신의 계명이나 인간의 법을 어겨서가 아니라 전쟁의 참상과 유태인의 피를 원하는 가혹한 인종차별주의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이와 같은 홀로코스트는...” (The Crucifixion of Jews Must Stop!, October 11, 1919)

       

      유태인 희생자 600만 명이라는 수치는 2차대전과 관련하여 또 다시 등장하게 된다. 뉴욕의 유태교 랍비 이스라엘 골드슈타인은 1942년 12월13일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당시까지 독일 점령지의 유태인 600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으며, 1943년 3월2일 뉴욕 메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열린 유태인들의 독일규탄집회에 대한 1943년 3월 2일자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랍비 헤르츠(Rabbi Hertz)는 히틀러 정권에 희생된 유태인의 수가 600만 명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2세기 로마 치하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던 바코크바 항쟁에 관해 탈무드(Gittin. 57b-58a)는 로마군이 베타르에서 40억명의 유태인을 학살했으며 1천6백만 명의 유태인 어린이들을 두루마리에 감아 불태워 죽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 40억 명의 유태인은 고사하고 1천6백만 명의 유태인 유아들이 지구상에 존재했는지 의문이다.

       

       

      Holocaust revisionism의 선구자 뽈 라시니에; 그 자신이 전쟁 중 독일 강제수용소 수감자였다.

       

       

      홀로코스트 (Holocaust)
       

      a. 美-英의 프로파간다

      - 이미 근거 없는 낭설로 밝혀진 유태인의 기름으로 만든 비누(Haaretz, Nazi Soap Stories Termed 'Invention', February 11, 2005)나 멩겔레 박사의 생체실험에 대한 얘기는 고사하더라도 2차대전 중 미국과 영국에서는 주요언론의 反독일 흑색선전이 난무했다. 한때 미국에서는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유태인들이 조직적으로 감전사(感電死) 당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들까지 가미된 기사가 유포되기도 했다. (이 기사에는 가스실에 대한 언급이 없다.) 1945년 2월 미국의 주요 일간지들은 아우슈비츠를 해방시킨 소련 병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독일군이 “일시에 수백 명을 전기 처형할 수 있는 특수 콘베어 벨트를 가동했고 시신들은 벨트에 의해 소각로에 옮겨져 몇 초 내에 화장된 뒤 그 재는 근처 양배추 밭의 비료로 쓰였다...”고 보도했다. (United Press dispatch from Moscow; Washington D.C. Daily News, February 2, 1945)

       

      - 당시 현직 미국 대법원 판사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연합국측 수석검사로 활약했던 Robert Jackson은 독일군이 일시에 2만 명의 유태인을 자취도 없이 “증발”시킬 수 있는 “새로 발명된” 기계를 아우슈비츠에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blue series, Vol. 16, June 21, 1946)

       

      b. 유태인 희생자 600만 명 (아우슈비츠 사망자 400만 명에 근거)

      - 1990년까지 폴란드 아우슈비츠 기념관에 있었던 추모석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40년에서 1945년까지 이곳에서 수감자 400만 명이 나치 살인마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舊추모석판

       

      그러나 교체된 새 추모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곳이 영원히 인류에 대한 절망의 울부짖음과 경종의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이 곳에서 나치스는 150만 명의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를 살해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끌려온 유태인들이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1940-1945.”

       

      새로 교체된 석판

       

      1991년 10월 20일자 벨기에 일간지 Le Soir 에 따르면, “국제 아우슈비츠 보존위원회는 1990년 11월 400만 명의 희생자를 명시했던 아우슈비츠의 추모석판을 “150만 이상의 희생자”로 표기되어 있는 새 석판과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 1989년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역사가 예후다 바우어(Yehuda Bauer) 교수는 이제까지 아무 이의 없이 수용되어 왔던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희생자 400만 명設이 의도적인 허구임을 인정할 때가 왔다고 밝혔다. 1990년 7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기념관은 이스라엘의 야드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과 공동으로 유태인과 비유태인을 도합해 약 100만 명이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두 기관은 이들 가운데 몇 명이 의도적으로 처형되었으며, 몇 명이 다른 원인으로 사망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Y. Bauer, Fighting the Distortions, Jerusalem Post - Israel, September 22, 1989)

       

      - 1998년 9월 8일자 워싱턴포스트는 아우슈비츠에서 400만 명의 유태인이 독가스로 살해되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라는 월터 라이히(Walter Reich) 前워싱턴 홀로코스트 박물관장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라이히는 보다 사실에 가까운 숫자는 110만에서 150만일 것이라고 밝혔다.

       

      Former Sorbonne literature professor Robert Faurisson: "The alleged Hitlerite gas chambers and the alleged genocide of the Jews constitute one and the same historical lie, which has made possible a gigantic financial-political swindle, the principal beneficiaries of which are the State of Israel and international Zionism, and whose principal victims are the German people and the entire Palestinian people."

       

      - 유명한 홀로코스트 역사가 제랄드 라이트링어(Gerald Reitlinger)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유태인의 숫자를 약 70만으로 추정했다. 좀더 근래에 들어서, 프랑스 홀로코스트 역사가 장-끌로드 프레삭(Jean-Claude Pressac)은 아우슈비츠의 총사망자 80만 가운데 63만 명을 유태계로 추정했다. (G. Reitlinger, The Final Solution, 1971; J. C. Pressac, Le Crematoires d'Auschwitz: La Machinerie du meurtre de mass, 1993)

       

      - 1990년 5월 31일 프랑스의 보수성향 시사지 National Hebdo 는 아우슈비츠 사망자 수(비유태인 포함)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어떻게 수정되어 왔는가를 보도했다:

       

      “8백만(프랑스 전범조사국) - 5백만(르몽드, 1978년 4월20일자) - 4백만(1990년까지의 아우슈비츠 기념관 추모비) - 3백만(아우슈비츠 소장 Rudolf Hoess의 자백) - 160만 (예후다 바우어 교수) - 125만(Raul Hilberg 교수) - 85만(제럴드 라이트링어, The Final Solution) - 7만5천(소련 국립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는 아우슈비츠 관련문서들).”

       

      (Source: National Journal, 2003)

      Date

      Official sources of information

      Figures

      31.12.1945 French Investigation Panel on Nazi-War-Crimes

      8.000.000

      19.08.1998 Chief Rabbi from Poland (Süddeutsche Zeitung)

      6.000.000

      20.04.1978 Le Monde (French daily paper)

      5.000.000

      23.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5.000.000

      20.04.1989 Eugen Kogon, Der SS-Staat (famous book of a holocaust survivor, page 176)

      4.500.000

      31.12.1952 Der Neue Herder (Enzyclop., Germany) 7th edition (p. 214)

      4.500.000

      01.10.1946 IMT-doc-ument 008-USSR (Nuremberg Military Tribunal)

      4.000.000

      02.05.1997 USA-Today (daily paper USA)

      4.000.000

      24.11.1989 Chief Prosecutor, Mr. Majorowsky, Wuppertal, Germany (indictment 12 Js 1037/89)

      4.000.000

      26.07.1990 Allgem. Jüdische Wo.Ztg. (Jewish weekly, Bonn)

      4.000.000

      08.10.1993 ZDF-Nachrichten (German TV, ZDF-News Magazine)

      4.000.000

      25.01.1995 Wetzlarer Neue Zeitung (German daily paper)

      4.000.000

      01.10.1946 IMT-doc-ument 3868-PS (Nuremberg Military Tribunal)

      3.000.000

      01.01.1995 Damals (official monthly magazine on history, sponsored by the Bonn government)

      3.000.000

      18.07.1990 The Peninsula Times (daily paper, S.Francisco, USA)

      2.000.000

      25.07.1990 Hamburger Abendblatt (daily paper Germany)

      2.000.000

      27.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quoting Chancellor H. Kohl. Minimum of 2 million)

      2.000.000

      02.05.1997 USA-Today (daily paper USA)

      1.500.000

      11.06.1992 Allgem. Jüdische Wo.Ztg (Jewish weekly, Bonn)

      1.500.000

      08.10.1993 ZDF-Nachrichten (German TV, ZDF-News Magazine)

      1.500.000

      23.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1.500.000

      03.05.2000 Die Welt (German daily paper)

      1.500.000

      01.09.1989 Le Monde (French daily paper)

      1.433.000

      02.02.1995 BUNTE Illustrierte (German weekly magazine)

      1.400.000

      22.01.1995 Welt am Sonntag (German daily, Sunday edition)

      1.200.000

      27.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1.100.000

      27.01.1995 IfZ (Institut for Contemporary History, München, a government institution)

      1.000.000

      03.05.2000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reputed German daily)

      1.000.000

      31.12.1989 Pressac, Auschwitz, Technique ... (official report on Auschwitz, commissioned by the Jewish Beate Klarsfeld Foundation)

      928.000

      27.09.1993 Die Welt (German daily paper)

      800.000

      22.01.1995 Welt am Sonntag (German daily, Sunday edition)

      750.000

      01.05.1994 Focus (German weekly magazine)

      700.000

      23.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700.000

      31.12.1994 Pressac, Die Krematorien ... (2nd official report on Auschwitz, commissioned by the Jewish Beate Klarsfeld Foundation)

      470.000

      08.01.1948 Welt im Film (British news reel, nbr. 137)

      300.000

      06.01.1990 Frankfurter Rundschau (German daily paper)

      74.000

      31.05.1994 Hoffmann, Stalins Vernichtungskrieg (Book on Stalin's war by a renowned German historian, p.302 f.)

      74.000

      17.08.1994 Intern. Red Cross Arolsen - Department of holocaust investigations (Ref. nbr.: 10824)

      66.206

       

      호주 출신 revisionist Dr. Frederick Toben

       

      c. 사망원인


      - 전후 연합군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수용소들의 운영과 관련된 수만 건의 독일 문서들을 획득했으나 이 가운데 독일 수뇌부가 독가스로 유태인을 대량학살하려 했음을 입증하는 문서는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유태계 역사가들은 독일이 연합군이 진주하기 전 관련문서들을 소각했거나, 혹은 독일이 모종의 암호 문서를 통해 대량학살을 조직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연합군이 확보한 독일 문서들 가운데 유태인에 대한 인종말살 계획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문건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역사가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사실 유태인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압수된 독일 측 문서들은 독일과 폴란드에 설치되었던 강제수용소들이 사람을 죽이기 위한 시설이 아니라 유태인과 전쟁포로들을 동원한 강제노동시설이었음을 보여준다.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의 Arthur Butz 교수에 의하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다른 수용수로의 배치를 기다리는 수감자들을 수용했던 일종의 강제노동인력 집결지였다. 아우슈비츠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온 이유는 노역이 불가능한 노약자나 병자가 주로 이곳에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탈출시도를 비롯한 수용소규칙 위반자들에 대한 처형사례를 제외하고 사망자 대다수의 사망원인은 비위생적 환경으로 인한 전염병(특히 발진티푸스)의 창궐과 영양실조 및 기아였다. (Arthur Butz, The Hoax of the Twentieth Century, 1976)

       

       

      - 유태계인 프린스턴대의 Arno Mayer 교수는 1942년 ‘반제회의’에서 도출되었다는 소위 ‘최종해법(Final Solution)'에 대한 그의 저서에서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사망자들 가운데 수용소 당국에 의해 처형된 숫자보다 각종 질병이나 기아에 의한 사망자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고 밝히고 있다. (Arno Mayer, Why Did the Heavens Not Darken?: The 'Final Solution' in History, 1989)

       

      - 전쟁 중반기부터 많은 강제수용소들에서 창궐하기 시작한 발진티푸스를 억제하기 위해 독일 당국은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의도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독일이 유태인을 조직적으로 말살하려했다는 혐의에 반박하기 위해 피고측의 증거물로 제출된 문서들에서도 드러난다. 한 예로 1942년 12월 28일 친위대 산하의 수용소 관리행정국이 아우슈비츠를 포함한 각 수용시설들에 하달한 공문은, “Heinrich Himmler 친위대 총감의 지상명령”이라는 전제 하에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 숫자의 절대적 감소를 위해 수감자들의 건강 및 영양상태와 작업환경을 개선하는데 총력을 기울일 것”과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여 상부에 제출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Nuremberg doc-ument PS-2171, Annex 2. NC & A red series, Vol. 4, pp. 833-834)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d. 독가스 사용설


      -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을 대량 살상하기 위한 독가스실이 가동되었다는 設은 독가스실이나 처형장면을 직접 목격한 적은 없다는 유태인 前수감자들의 증언에 의존한다. 이는 전쟁 중 독일이 탄환 절약을 위해 독가스로 유태인을 대량학살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연합군은 선전활동의 일환으로 강제수용소들에서 - 딱히 유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 수감자들이 독가스로 집단 처형되고 있다는 요지의 폴란드어와 독일어로 작성된 전단을 자주 살포했다. 또한 같은 내용은 연합군이 운영하는 단파 라디오를 통해 주기적으로 전 유럽에 방송되었다.

       

      아우슈비츠의 한 작업실

       

      - Marika Frank라는 한 유태인 여성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 수감되었을 때는 하루당 최소 2만5천명의 유태인들이 독가스로 처형-화장되고 있었다는 1944년 7월 이었다. 1945년 2월 소련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그곳에 수감되어 있었던 그녀는 아우슈비츠에 머무는 동안 가스실에 대해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으며 그곳에서 유태인들이 독가스로 살해되었다는 얘기는 전쟁이 끝난 뒤에 들었다고 술회했다. (Sylvia Rothschild, Voices from the Holocaust, 1981)

       

      - 33년간 듀퐁社에서 화공학자로 근무했던 William B. Lindsey 박사는 1985년 캐나다의 법정에서 독가스로 그 만한 인명을 살상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technically impossible") 얘기라고 증언했다. 이 분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와 마이다넥에 전시되어 있는 가스실을 현지 조사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했다는 방법으로는 지클론-B로 사람을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일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The Globe and Mail - Toronto, February 12, 1985)

       

      *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주요 수용소들에는 실제로 이들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들 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가스실이 존재했다. 이들의 목적은 발진티푸스를 옮기는 이를 죽이기 위해 수용소 운영진을 포함, 수감자들의 의복과, 침구 등을 소독하는 것이었다. DDT가 등장하기 전까지 지클론-B는 세계적으로 널리 쓰였던 대표적인 살균소독제였다.

       

      프레드 루처

       

      - Fred A. Leuchter는 사형수를 처형하기 위한 가스실 제작 전문가로 미주리 주(州)교도소의 가스 사형집행실을 도안하고 제작했던 보스턴 출신의 공학자이다. 1988년 2월 아우슈비츠와 마이다넥 “가스실”에 대한 현장조사를 단행한 그는 법정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단정했다, “현존하는 가스실 및 관련시설들이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 시설들에는 적절한 봉인장치와 환기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만약 이 시설들이 독가스로 인명을 살상하는데 사용되었다면 독일인을 포함, 그 시설 밖에 있는 사람들도 안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The Leuchter Report: An Engineering Report on the Alleged Execution Gas Chambers at Auschwitz, Birkenau and Majdanek, 1988)

       

      이반 라게스

       

      - 1944년 내내 매일같이 독가스로 살해된 수만 구의 시신들이 화장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의문은 남아있다. 캐나다 캘거리에서 대형화장터를 운영하는 Ivan Lagace는 1988년 4월 독일계 홀로코스트 연구가 Ernst Zundel 소송 심리에서 그와 같은 일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증언했다. 이에 덧붙여 그는 하루당 1만에서 최고는 2만구에 이르는 시신들이 화장되었다는 주장은 "한 마디로 비상식적(preposterous)”이며 “현실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beyond the realm of reality)”이라고 증언했다. (Canadian Jewish News - Toronto, April 14, 1988)

       

      수감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미공개 사진)

       

      e. 국제적십자협회(International Red Cross) 보고서

       

      “국제적십자협회 보고서가 지니는 가장 큰 의미는 전쟁의 말기를 향해 의심의 여지없이 이들 수용소에서 대량 발생한 사망자들의 진정한 사망원인을 규명해주고 있다는데서 찾아 볼 수 있다. 보고서의 일부를 발췌하면;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이후 독일의 수송체계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특히 전쟁의 마지막 몇 개월 동안 수용소들은 거의 식량을 보급받지 못했고 따라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사자(餓死者)의 숫자는 급증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독일정부는 1945년 2월 1일 이와 같은 사실을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에 통보해 왔습니다... 1945년 3월, 적십자협회 회장은 독일 친위대의 칼텐브루너 장군과 만나 문제를 논의했고 양자의 합의 하에 ICRC는 구호품을 수용소 수감자들에게 직접 전달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ICRC 대리인을 수용소들에 상주시키게 되었습니다...’

       

      Ernst Kaltenbrunner, 1946년 처형; 마지막 유언, "독일에게 행운을!"

       

      수용소들에 대한 식량보급이 중단된 원인으로 독일 교통수송망에 대한 연합군의 공습을 지목한 적십자는 수용소 수감자들의 안위를 위해 1944년 3월 15일, ‘연합군의 야만적인 폭격’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4년 10월 2일 ICRC는 수송체계의 붕괴로 인해 전 독일국민이 대규모 기아사태에 직면해 있다는 우려를 독일 외무성에 전달했다. 영양실조와 기아, 이에 더해 의약품이 극도로 희귀했던 전쟁말기, 발진티푸스를 비롯한 각종 전염병이 만연했다는 사실은 해방된 수용소들에서 연합군 병사들이 발견한 많은 시체들에 대해 설명해준다. (실제로 독일 전역에 흩어져 있었던 강제수용소들은 인근 도시들에서 발생한 폭격, 질병, 기아로 인한 독일인 사망자들의 시신을 처리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따라서 연합군이 발견한 시체더미에는 적지 않은 수의 독일인 시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 중 적십자위원으로 일했던 스위스 태생의 Maurice Rossel 박사는 Serge Lanzmann과의 1993년 인터뷰에서 아우슈비츠를 예고 없이 시찰한 그는 그곳에서 가스실이나 굴뚝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으며 시체를 태우는 냄새도 접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Theresienstadt 수용소에 그가 목격한 것은 좋은 옷을 입은 부유한 유태인들이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뿐이었다.” (Richard E. Harwood, Did Six Million Really Die?, 1988)

       

      *1984년 소련이 최초로 공개한 아우슈비츠 관련 문서들을 토대로 작성된 국제적십자협회의 해당년도 12월 31일자 감사보고서에는 독일이 전쟁기간(1939-1945) 동안 운영했던 모든 강제수용소들에서 발생한 총 사망자수(모든 국적과 사망원인 포함)가 282,077명으로 나타나 있다. 아우슈비츠 사망자 수는 53,633 명이다.

       

       

       

       

      f. 2차대전 前後 세계 유태인 인구

       

       World Almanac, 1929 - 15,630,000 (p.727)

       

       World Almanac, 1933 - 15,316,359 (p.419)

       

       World Almanac, 1936 - 15,753,633 (p.748)

       

       미국유태인위원회(AJC, Bureau of the Synagogue Council), 1939 - 15,600,000

       

       World Almanac, 1940 - 15,319,359 (p.129)

       

       World Almanac, 1941 - 15,748,091 (p.510)

       

       World Almanac, 1947 - 15,690,000 (p.748)

       

       미국 이민귀화국 (INS), 1950 - 15,713,638 (Appendix VII, 'Statistics on Religious Affiliation'; Report to U.S. Senate Judiciary Committee, 1950)

       

      Jews In Europe - 1938:
      8,039,608 - 1948: 9,372,668

       

       

       

      2000년, 유태계인 미국의 노먼 핑클슈타인(Norman G. Finkelstein)교수는 유태인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모든 논란을 이렇게 요약했다:

       

      “히틀러의 유태인 대학살과 관련된 책들의 대부분은 사료(史料)로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실로 홀로코스트 연구는 뻔한 거짓말 아니면 넌센스로 채워져 있다... 홀로코스트 업계가 매일같이 만들어 내는 얘기들의 비상식적 본질을 감안할 때, 신기한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별 의심 없이 그런 얘기들을 믿는다는 사실이다.” (The Holocaust Industry, 2000)

       

       

      Anne Frank
      그녀가 쓴 일기로 인해 안네 프랑크는 아마도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유태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수 많은 다른 유태인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안네와 그녀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도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1944년 9월, 15세의 나이로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에서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프랑크는 몇 주 뒤 Bergen-Belsen 수용소로 옮겨졌고 이 곳에서 1945년 3월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아우슈비츠에 남아 있던 중 발진티푸스에 감염된 오토 프랑크는 수용소 병원에 입원 중 병상에서 아우슈비츠에 진주한 소련군을 맞았다. 그는 1980년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아우슈비츠 병원

      - 아우슈비츠 수용자인 유대인을 치료해주는 의사 -

       

      아우슈비츠의 간호원들

       

      만약 독일의 국가정책이 유태인 안네 프랑크와 그녀의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었다면 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안네 프랑크와 그녀의 가족사가 비극임은 분명하나 그들의 이야기는 독일이 의도적으로 유태인을 말살하려 했다는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전쟁 전 유태인에 대한 독일정부의 주안정책은 국외이민이었고 전쟁발발 직후에는 게토에, 그리고 1943년 이후로는 강제수용소에 수용하는 것이었을 뿐 유태인의 인종적 말살을 노린 genocide가 아니었다.

       

      미국 revisionist Michael Hoffman과 Canada의 Ernst Zundel

       

      관련 링크:

       

       http://www.zundelsite.org/

                   

       http://www.revisionist.com

       

       http://www.ihr.org

       

       http://www.adelaideinstitute.org/

       

       

       

      Abraham Foxman.  ADL National Director
      "The Holocaust is something different. It is a singular event. It is not simply one example of genocide but a near successful attempt on the life of God's chosen children and thus, on God Himself. It is an event that is the antithesis of Creation as recorded in the Bible; and like its direct opposite, which is relived weekly with the Sabbath and yearly with Torah, it must be remembered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ADL bulletin - ADL on the Frontline, January 1994)

       

      *"The Talmudic epigraph of Stephen Spielberg's Schindler's List, "'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 The observant knew that the traditional version, the one taught in all Orthodox yeshivot (religious schools), speaks of 'whoever saves the life of Israel.'" (Peter Novick, The Holocaust in American Life, 1999)

       

      에밀리 & 오스카 쉰들러

       

      "What did I think? I'll tell you. Scheisskopf (sXhead). But I was the idiot for falling in love with him. I am never going to cry; there is no sense in it. Schindler changed women like he changed suits. Once, we were well-off, but then we lost everything and he abandoned me and I have not recovered... There never was a 'Schindler's List'. It was drawn up by a man called Goldman. This man took money to put a name on that list - no money, no place on the list. I was told this by a Dr. Schwartz, in Vienna; he had paid in diamonds to save his wife... Hah! Neither of us was a hero... Oskar was always complex; he was playing both extremes, always, even at the end with Nazis against the Jews." - Emily Schindler, wife of Oskar Schindler, Drudge Report, June 1, 1999

       

       

      Steven Spielberg
      "Flanked by Holocaust survivors, Los Angeles teens and many of the film's stars, including Ralph Fiennes, Ben Kingsley, Embeth Davidtz and Caroline Goodall, Spielberg said he hoped "Schindler's List" would prove to Holocaust deniers that the murder of 6 million Jews did occur and that it would help educate children to prevent history from repeating itself... "There are Holocaust deniers who are so stuck in their hatred for Jews that neither 'Schindler's List' nor the Shoah Foundation will be able to convince them that 6 million murders actually occurred, but still we must try to convince them," Spielberg said... Survivor Helen Jonas-Rosenzweig told the director, "Schindler saved us, but you gave us our second life." Spielberg said that in the decade since the release of "Schindler's List," the world has become a "very sad place again," which shows that people "don't really learn that much from history, and they need to." (Spielberg: Won't comment on 'Passion',
      www.CNN.com, March 4, 2004)

       

       

      The Black Book of Communism - LE LIVRE NOIR DU COMMUNISME
      "An 800-page compendium of the crimes of Communist regimes worldwide, recorded and analyzed in ghastly detail by a team of scholars. The facts and figures, some of them well known, other newly confirmed in hitherto inaccessible archives, are irrefutable. The myth of the well intentioned founders - the good czar Lenin betrayed by his evil heirs - has been laid to rest for good. No one will any longer be able to claim ignorance or uncertainty about the criminal nature of Communism, and those who had begun to forget will be forced to remember anew." (from the dust jacket of English edition, 1997)

       

      Moshe Leshem.  former Israeli ambassador to U.N.
      "This was a movement staffed in its upper echelons by Jewish Communists and yet the world is comparatively silent about the holocaust and war crimes this thoroughly kosher system inflicted and the identity of the persons who were its architects. Auschwitz is on the tip of every tongue but who has heard of Kolyma, Magadan, the Solovetsky islands and the other infernal Soviet centers of human destruction in eastern Siberia? Who has seen films and books about the millions of human beings worked, frozen and starved to death in the construction of the White Sea-Baltic Canal, over which stood a triumphant, colossal statue of the Jewish communist mass murderer Genrikh Yagoda? The Jewish-communist epoch of mass murder has disappeared into history in one of the great vanishing acts of all time. Only practiced deceivers, with all the sleight of hand of the most accomplished stage magicians, could pull off such a coup against the rest of humanity. To trick mankind into focusing nearly all expiatory sentiment, monuments and commemoration on Jewish victims and brand the Mark of Cain - the very words war crime and holocaust itself - on Germany and upon Germans alone as their proprietary trademark, must be regarded as one of the most masterful achievements of psychological warfare in the annals of illusion... Israelis and American Jews fully agree that the memory of the Holocaust is an indispensable weapon - one that must be used relentlessly against their common enemy... Jewish organizations and individuals thus labor continuously to remind the world of it. In America, the perpetuation of the Holocaust memory is now a $100-million-a-year enterprise, part of which is government-funded." (Balaam's Curse: How Israel Lost Its Way, and How It Can Find It Again, 1989)

       

      유태인 공산주의자들의 만행

      1918년부터 1953년까지 유태인이 장악한 소련은 3천만에서 5천만으로 추정되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발틱3국, 폴란드, 헝가리 국민들을 학살했다.

       

      라트비아 1941년

       

      




      1983년 5월말 어느날 폴란드 크라코프市 공항 입국장 앞, 흰머리의 60대 노인이 터질 듯 붉은 색의 장미 39송이를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라? 진짜 실라야?”

      세련된 옷차림의 50대 후반 여인이 그에게 달려와 안겼다. 두 사람은 헤어진 지 39년만에 만났다. 이 남자 유라세크 빌레키의 손에 들린 장미의 개수는 그들이 헤어져있던 년수 만큼이었다.

      1944년 7월 21일 23살 청년이던 폴란드인 빌레키는 나치 친위대 장교 복장을 한 채 유태인 죄수복 차림의 19살 처녀 실라 시불스카를 데리고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을 막 통과하고 있었다.

      유태인 수만명이 학살당한 아우슈비츠에서 유라세크는 나치군복생산 공장 인부로 일하고 있었다. 폴란드 태생 유태인 실라는 가족과 함께 끌려와 하루하루 죽음의 문턱을 넘기고 있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실라가 끌려온 첫째 날이었다. 수용소 입구에서 유라세크가 막 잡혀온 유태인무리중에서 실라를 발견한 것이다. 두 사람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실라의 가족은 그날 바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며 나치가 끌고간 ‘샤워실’에서 가스 샤워를 맞고 숨졌다.

      실라는 유라세크가 일하던 공장에 배치돼 일하게 됐다. 유라세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실라를 살리기 위해 탈출계획을 짰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친위대 장교복을 훔쳐 입고 실라를 죄수처럼 끌고 수용소 정문을 걸어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탈출은 성공했다. 9일을 걸어 크라코프의 유라세크 부모집을 찾아갔다. 실라는 안전한 이웃집 농장 지하창고에 숨겨졌다. 둘은 약속했다, “전쟁이 끝나면 꼭 만나 결혼하자”고.

      유라세크는 바르샤바로 가서 레지스탕스가 됐다. 1945년 여름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점령하며 2차대전은 끝났다. 바로 그날 유라세크는 크라코프로 달려갔다. 하지만 실라는 없었다.

      불과 한달전 이 도시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자 실라는 유라세크를 찾아 헤맸다.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고 여긴 실라는 그가 오지 않자 죽었다고 여겼다. 절망한 실라는 생존 유태인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했다.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실라는 유라세크를 죽었다고 여겼고, 유라세크는 그녀의 행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1982년 실라가 처음으로 폴란드를 찾았다. 묵었던 호텔에서 누군가에게 오래된 사랑 이야기를 했다. 듣고 있던 사람이 “그 스토리 나도 아는데”라고 했다. 유라세크는 매년 바르샤바에서 크라코프로 찾아와 실라를 수소문했던 것이다.

      1년뒤 공항에서 만난 두 사람의 눈은 뜨여지지가 않았다. 흐르는 눈물이 전혀 멈춰지지가 않았다.

      실라가 말했다, “우리 서로 이혼하고 같이 삽시다”. 유라세크가 말했다, “당신만을 사랑해. 그렇지만 아무 것도 몰랐던 자식과 손자들을 버릴 수는 없어”.

      실라는 “우린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며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2002년 뉴욕에서 노환으로 숨졌다.

      AP통신은 두 사람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탈출한 지 정확히 66년이 되는 21일 “유라세크 빌레키와 실라 시불라스카의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가 이스라엘 야드바셈재단에 의해 공개됐다”고 보도했다.



      사진=AP통신

      통신과의 인터뷰에 나선 유라세크의 손에는 젊은 남녀의 흑백사진이 들려 있었다. 바로 20대 초반의 자신과 10대 후반의 실라였다.

      “우리는 서로 운명이었습니다. 그때가 다시 돌아온다면 똑같이 그녀를 사랑하고 함께 탈출했을 겁니다”

      유라세크 빌레키의 목소리는 89세 노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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