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은 고대라는 시대를 총결산한 사회입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유럽은 중세 기대로 접어들었고 이후 근대와 현대에 이르렀습니다.  14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수없이 많은 왕정 시대에 관해 증언과 물증이 일치하는 중요한 사실은 로마와 그 주변의 라티움 문화는 초기 단계부터 사비니 문화나 에트루리아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 이런 문화구너에 로마가 초기 단계부터 속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라티움 문화는 빌라노바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초기 철기 문화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라티움 문화는 사비니 문화나 에트루리아 문화의 영향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로마가 나중에 세력을 확대할 때 별다른 문화충격 없이 사비니인이나 에트루리아인의 땅을 로마의 영토로 편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6-37


집정관의 선출이나 전쟁 개시 등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다수결을 원칙으로 했지만,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투표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켄투리아에 한 표가 할당되어 있었으므로 총 투표 수는 193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을 반영할 수는 없었지만 상당히 민주적이 ㄴ제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들의 의견이 우선시되는 교묘한 구조였습니다. 토표가 기사부터 시작되어 제1계급, 제2계급으로 재산이 많은 순으로 이루어지고, 과반수에 달하는 시점에서 끝났기 때문입니다. 기사 켄투리아 18표와 제1계급 켄투리아 80표에서 이미 98표로 과반수에 도달하므로 제2계급 이하의 투표는 사실상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40-41


피로스 전쟁 이전의 젼쟁은 승리하면 적의 영토와 재물을 획득하는 단순한 도식의 전쟁이었습니다.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 벌어진 한정된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중해 세계라는 당시 국제 사회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로마는 복잡한 국제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피로스와의 전쟁에서 처음 경험했던 것입니다.  65


기원전 130년에 37만 5천 명이었던 인구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약 100만명으로 팽창했습니다.  148


봄부터 가을까지 지중해가 호수와 같이 평온한 시기에 적재량이 100톤에서 300통인 배가 밀을 싣고 옵니다. 적재량 300톤의 배라 해도 1400척의 배가 당시 수도 로마의 가장 큰 외항인 나폴리 만의 푸테올리(현재의 포추올리)에 짐을 가득 싣고 도착했습니다.  151


건강하지도 않고 용모도 볼품없고 말솜씨도 업성 일족의 지지를 얻지 못했던 클라우디우스였지만 연설만큼은 품격과 박식함이 넘쳤습니다. 황제가 되기 전에는 공적 활동을 해야 할 시간에 독서만 했기 때문이겠지요. 

역사, 문학, 로마의 오랜 관습에 정통한 문인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대국 로마에 어울리는 행정권을 강홧하고, 국고 관리를 간소화하고 따로 독립시켰으며, 제국의 영토를 확대하는 커다란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161


네로가 즉위 이후 모친인 아그리피나를 암살하기까지 첫 5년은 후대의 현제들로부터도 가장 좋은 정치가 이루어진 시대로 높이 칭송받았습니다. ..

하지만 17살의 네로가 당시의 정치 상황을 파악하여 원로원 의우너들을 감탄시킬 만한 정책을 만들어냈을 리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스토아학파 철학자이자 당대 최고의 저술가였던 세네카(네로의 가정교사이자 후견인이기도 했습니다)의, 현실을 꿰뚫어본 상황판단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163


이제껏 없었던 대화재가 일어납니다. 64년 7월 19일 일몰 무렵이었습니다. 이 화재는 엿새나 계속되어 시가지 대부분이 불탔습니다. 불에 타 허허벌판이 된 로마를 재건하기 위해 네로는 '신도시 계획'을 세워 방재 도시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거리의 폭을 넓히고, 주택과 주택을 나누는 벽을 방화벽으로 만드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면 네로는 후세에 로마의 재건자로서 높이 평가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정치에 대한 관심을 잃고 개인적인 취미와 정념의 포로가 네로가 가장 정열을 쏟은 것은 신도시 계획이 아니라 자신이 기거하기 위한 황금 궁전(도무스 아우레아)의 건설이었습니다. 80헥타르나 되는 토지를 수용하여 온갖 사치를 다 부린 궁전을 세우고 그 주위에 푸른 정원과 인공 호수를 배치했습니다. 화재로 집을 잃은 많은 시민들로부터 비난을 산 것은 당연했습니다. 게다가 복구 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증세를 단행했으며, 대부호들을 잇따라 처형하여 그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166


로마 제국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관료 제도가 없었습니다. 원로원에는 법무관, 조영관, 재무관 등 정무관 제도가 있어 의원들의 호선으로 연령에 따라 선출되었습니다. 직책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각각 재판, 건설 사업 및 치안, 국고 관리 등을 담당했습니다.  169


클라우디우스 시대에는 방대한 행정 사무를 처리하는 조직이 정비되었고, 그 정비에 의해 권력이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황제가 관할하는 행정의 경우에는 유능한 해방노예를 많이 거느린 기사계급 가운데 클라우디우스의 신임이 두터운 사람들에게 운영과 관리를 맡겨 황제 관료단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조직이 형성되었습니다. 그 조직은 적어도 다섯 개의 담당 부서, 즉 내무, 재무, 법무, 진정 접수, 그리고 문교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내무는 황제와 속주 사이에 오가는 서신, 보고서, 의결서 등을 작성하고 관리하는데, 내무장관인 그리스인 해방노예가 호아제 행정의 중심인물로서 실권을 가졌습니다. 또 재무장관에도 그리스인 해방노예가 임명되어 재정을 관리하는 중임을 맡아 큰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두 사람의 강대한 권력은 그만큼 그들의 권익을 보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국고가 비었을 때, 클라우디우스의 고민을 들은 어느 남자는 그 두 사람의 재산과 황제 금고를 합치면 돈은 남아돌게 될 것이라고 비아냥거렸을 정도입니다.  171


로마 사회의 노예는 공노예와 사노예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공공 시설의 청소와 유지, 행정 사무, 죄인의 처형 등에 종사하는 공노예는 일반적으로 사노예보다 더 혜택을 받고 있었습니다. 또 사노예라도 가내 노예는 농사나 채석 일을 하는 노예만큼 중노동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172


2세기 초반에 하드리아누스는 노예의 생살여탈권을 주인으로부터 거둬들여 재판에 준한 절차를 밟도록 했고, 4세기 초반에 콘스탄티누스는 노예 살해를 살인으로 규정했습니다...

노예는 생산 활동 외에도 공적인 장에서의 노동이나 가내 노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도맡았기 때문에 단순히 속박하며 강제적으로 노동을 시키기만 해서는 효율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노예들이 일할 의욕을 가지게 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한 방책이 노예 신분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노예는 해방노예라고 불리며 자유민과 거의 동등한 권리를 얻을 수 있었지만, 지방 도시에서 선거권 등을 가진 시민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노예를 해방하려면 소유자가 재판관이나 감찰관에게 신청하거나 유언에 명기할 필요가 있고 어떤 경우든 일정한 절차와 심사가 필요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해방노예가 너무 많아지지 않도록 소유하는 노예의 수에 따라 해방할 수 있는 노예 수를 정해두었습니다.  173-174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는 교육 제도를 정비하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그때까지 어느 황제도 손을 대지 않았던 분야이고 그래서 더욱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그때는 자녀 교육을 부모가 도맡았으므로 수업료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 가정의 자녀들만이 교사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 교사는 초보적인 읽고 쓰기나 주판을 가르치는 초등교사(리테라토르), 그리스어 혹은 라틴어 문법이나 초보적 수사학을 가르치는 중등교사(그람마티쿠스), 그리고 수사학이나 철학, 법률을 가르치는 고등교사(레토르)로 나누어졌는데, 각각의 지도 내용이나 명성에 따라 수업료도 달랐습니다. 그 밖에 기하학, 음악, 체육 등을 가르치는 학교나 상업에 필요한 산술과 속기를 가르치는 실업 학교도 있었습니다. ..

한 명의 교사가 점포나 다락방을 빌려 운영하였으므로 오늘날의 학교와는 달랐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중등교사와 고등교사에게 면세 특궈능ㄹ 주고 그리스의 우수한 교사가 수도 로마로 이주하도록 장려했습니다. 이러한 교사으 특권은 뒤에 의사에게도 적용되어 면세뿐 아니라 병역과 부역의 면제로까지 확대됩니다.  183-184


영토 확대 정책을 포기하기로 한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이라는 범위 안에서 경제 활동을 활성화하고자 애썼습니다. 이것은 속주 중시 정책으로서 내수를 확대하기 위한 정책입니다. 황제가 속주 곳곳을 방문하여 적절한 지시를 내리고 중앙정부의 지원을 약속함으로써 내수가 확대되고 속주 경제도 호전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고, 경제 활동을 자극하는 새로운 방책이 필요했는데, 하드리아누스 이후의 황제들에게는 효과적인 방책이 더이상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부터 북방과 동방에서 전쟁이 시작됩니다.  214


열악한 품질의 화폐를 주조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황제들은 세금을 더 걷기 위해 범죄나 다름없는 정책을 실시한 것입니다.  216


멸망의 원인을 하나의 요소, 하나의 현상에서만 찾을 수는 없습니다. 쇠퇴 증후군과도 같은 상황에 여러 가지 요인이 겹치면서 멸망하는 속도가 빨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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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시오노 나나미의 표현은 독자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하였다.
로마인 이야기에 대한 전반적인 핵심내용들을 담고 있다.
물론 15권의 내용을 한 권에 담기는 힘들다. 그래서 저자는 생략할만한 것들은 생략하고 사견도 집어넣으면서 정리해 놓았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것은 책의 말미에 저자가 매긴 로마 영웅들의 성적이다.
저자는 방대한 사료들을 통해 영웅들을 수치로 점수를 매겼다.
이 책을 내기 전부터 나름대로 점수를 매겼다고 하는데, 그 내용을 실어놓았다.
물론 이 점수는 저자가 자기의 생각에 입각하여 매긴 점수이기에 객관적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저자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를 읽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일것이라 생각된다.

저자가 로마를 연구한 이유는 '로마인만큼 재미있고 멋진 사람들은 없는 것 같아서'라고 하였다.
꼭 그말이 아니어도 고대 로마는 오늘날에 우리가 교훈을 받기에 충분하며, 그 내용또한 매우 흥미진진하다.

저자가 표현한대로 유럽인들은 고대 로마를 바라보는 시각이 부정적으로 출발한다고 한다. 그들은 직접적인 역사적인 연결이 되어 있어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고대 로마의 흥망성쇄는 분명 많은 교훈을 담고 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뿐아니라 실제 우리 개개인들이 생각해야 하는 것들이 많이 들어있다.
지식이 많다고 지성이 높다고 표현할 수 없지만, 지성이 높은 사람들은 지식이 많다. 
그처럼 고대 로마를 통해 우리는 지성을 높이기 위해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볼 수 있다면 고대 로마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로마에 대한 내용이 그렇게 거창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한국에 많이 들어와 있는 미드(미국드라마) 중에 'ROME'이라는 드라마는 고대 로마를 재현하고 있다. 
시즌1은 매우 흥미진진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으로 안다.
이러한 드라마를 볼 때 배경지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기 위해 이 책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이 든다. 
물론 15권 전권을 읽으면 좋겠지만..

또 하나의 드라마인 '스파르타쿠스'가 있다.
검투 노예들의 반란을 다룬 드라마로 이 책에서는 언급이 거의 되지 않지만 드라마의 주요 거점지인 '카퓨아'에 대해서는 잠시 언급이 된다. 책을 통해 배경 지식을 쌓은 상태로 특히나 로마 공화정의 계급에 대해서 알고 있는 상태로 드라마를 보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이 드라마는 사실 <30포인트로 읽는 로마 제국 쇠망사>가 더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처럼 로마 제국은 현대 우리에게 흥미와 즐거움에 더해 교훈도 주고 있다.
저자는 <로마인 이야기>시리즈를 읽고 이 책을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 추천하고는 있지만, 독자가 치우치지만 않는다면 이 책을 먼저 읽으며 로마에 대한 개론을 조금이나마 알고 시리즈를 읽는 것도 무리는 없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스타일이 달르기에 자신이 어떤지를 잘 알테니 자신에게 어떤 순서가 더 좋은지 잘 판단하여 읽으면 되리라.


역사는 인간이다.  15

켈트 족이 물러간 다음, 그들 로마인은 '야만족'에 불과한 켈트 족의 침략을 허용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고민하였다.
실패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딛고 반드시 성공으로 나아가려 했던 정신 작용에서 로마인의 강인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때 로마인들은 패배의 원인이 그들 내부에 있다는 것을 직시한다. 단순히 반성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국론 분열이라는 손실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활성화하고 정치 개혁 형태에 결부시켰다.
이리하여 완성한 것이 역사상 널리 알려진 로마 특유의 '공화정' 즉 황제가 통치하는 제정으로 이행되기가지의 정치 체제이다.  25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처음에 '신부 강탈'을 계기로 시작된 로마인 특유의 동화정책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패자마저도 자신들에게 동화시킨다'는 이 방식만큼 로마를 강하게 만들고 영토를 확장시키는 데 기여한 것은 없다.  49

신참인 로마가 살아남기 위해 전쟁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계속 되는 전쟁 속에서도 로마가 순조롭게 거듭 승리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독특한 정치 체제에 있다.
형식상 왕정이었으면서도 그 왕은 시민회에서 선출하였다. 즉 로마 시민의 의식 속에 로마는 '왕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곧 국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로마인들은 계속되는 전쟁조차 참고 견딜 수 있었으며, 전의도 상실하지 않았다.  50

로마인은 결코 혈통이나 태생 등을 따지지 않았다. 
아직 소년기에 지나지 않는 로마가 살아남기 위해서 로마인들은 민족 감정 같은 것은 일단 접어 두고 어디까지나 능력주의로 관철 시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현실적인 선택이 이루어졌고, 또한 선출된 왕들도 그 기대에 부응했다.  56

로마인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절실히 느끼는 것은 로망에서는 개혁이 결코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들여 조금씩 개혁을 이루어 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때로는 답답함조차 느껴질 때가 있었다.
로마인이 개혁을 행하겠다고 결정하면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도 둔한 소처럼 착실하게 전진해 나간다 그래서 로마는 개혁의 속도는 늦지만, 그것이 일단 성공하면 장기간에 걸쳐 유지될 수 있었다.  93

정치란 어디까지나 결과론의 문제이다. 그래서 비록 원로원의 돌출로 로마의 공화정이 변질 되었다고 해도, 그것으로 정치가 잘 기능하고 있으면 불만은 일어나지 않는다.
로마인은 어디까지나 현실주의적인 민족이다. 관념론으로 '이렇게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리스인과는 다른 정신세계의 소유자들이었다.  169

진정한 개혁이란 결국 재구축을 하는 것이고, 카이사르가 실행하려고 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어떤 민족이나 어떤 조직도 자신들의 체질에 맞지 않는 것을 외부에서 가져와 이식하면 성공하지 못한다. 비록 한때는 극적인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도 토양에 맞지 않는 개혁은 정착하기 어렵다. 따라서 개혁이란 우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자질이나 특징 중에서 어떤 것을 살리고 어떤 것을 버려 조합해야 하는지를 결정해서 재구축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카이사르가 실행하려고 한 '신생 로마'의 개혁도 바로 그것이었다.  212

로마는 어디까지나 당사자가 스스로 노력하는것이 중심이고, 공적인 보조는 생활의 최저한도를 지원해 줄 뿐이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수도 로마에서는 빈민에게 매월 약 32.5kg의 밀을 무료로 배포했다. 이것만 들으면 마치 '뿌리기 복지'가 이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내가 실제로 같은 양의 밀로 빵을 구워 보았는데 그 정도 배급량으로는 도저히 한 가족의 생활을 조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대의 극진한 복지와는 달리 로마의 사회복지로는 일하지 않고 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역시 스스로 일해서 그 결과에 따라 보수를 받는 것이 어디까지나 기본이 되어 있었다.
현대에도 로마제국이라고 하면 '빵과 서커스' 정책에 의해 시민은 무료로 식량 배급을 받아 일하지 않고 황제가 개최하는 구경거리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는 이미지가 남아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완전한 오해이다. 
현대의 일중독만큼은 아니더라도 고대 로마 시민들 또한 생활을 위해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황제가 로마 시민 모두를 놀고 먹는 한량으로 만들 만큼 국가 예산을 사용했다면, 로마의 국고는 금세 거덜 나고 말았을 것이다.  267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이 왜 멸망했는지를 배우기보다 왜 로마제국이 그만큼이나 오래 지속되었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277

※ 교양학과 - 로마의 아이들은 어렸을 때는 '읽기, 쓰기, 주판'을 배우지만 성장하고 나서는 ①라틴어와 그리스어의 문법 ②수사학 ③변증학 ④수학 ⑤기하학 ⑥역사 ⑦지리의 일곱 학과를 습득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을 '교양학과(직역하면 '자유학과')라고 한다.

내가 새삼 통감한 것은 로마인이 '구조 조정'에 아주 뛰어난 민족이었다는 사실이다. 
재편성이나 재구축이 여러 차례에 걸쳐 성공했지 때문에 로마는 1,000년이란 긴 역사를 가질 수 있었다.  280
아무리 뛰어난 시스템이라도 인간이 만든 것은 반드시 결함이 숨겨져 있다는 현실적인 감각을 그들은 항상 지기고 있었다.  281

고대 로마 사람들과 교제해 오면서 내가 무엇보다 감탄한 것은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그들이 약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304


저자가 이렇게 점수를 주는 이유를 책에서 개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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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유명하다.
고대 로마에 관한 내용들로 유명한 책들이 여러 권있는데, <로마인 이야기>, <로마제국 쇠망사>이다.
이 책들은 워낙 유명하고 현재 가장 유명한 것으로 따지면 로마인 이야기 일것이다.
하지만 에드워드 기번의 쇠망사는  1737년에 태어난 기번이76년에 1권을 시작으로 88년에 6권을 발펴면서 10년이넘는 기간동안 조사하여 기록한 것이라 당시만해도 대단한 작품이었다. 
처칠이나 인도 수상이었던 네루도 기번의 책을 탐독했다고 할 정도로 그 책은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쇠망사에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이후부터 기술하고 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 역사에 대해 잘 아는 편이었고, 특히 쇠망사 이전의 로마 역사에 대해서 (한니발 전투, 포에니 전쟁, 스파르타쿠스 반란, 키게로의 활약, 갈리아 정복기, 클레오파트라 자살.... 등) 익히 잘 아는 편이었기에 기번은 2000년 동안 번영한 로마의 쇠망역사에 초점을 맞추어 최고의 테마로 작성해 내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는 로마 제국의 시작과 번영의 시절이 어느정도 흐른후의 이야기이고, 생각보다 딱딱한 부면이 있다.
그렇기에 <로마인 이야기>는 우리에게 더 쉽게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책 <30포인트로 읽는 ....>은 편역자가 나름대로 30개의 주제로 기번의 내용을 바탕으로하여 이전의 핵심적인 내용과 쇠망사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전달하려 노력하였기에 기번의 책을 어려워 한다면 그 전에 읽어보면 좋을듯 싶다.
기번의 책을 읽으려는 사람이라도 로마 역사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편이라면 먼저 읽어보면 기번의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옮긴이의 표현을 보면...
무엇보다도 로마가 융성한 요인은 기번도 말하고 있듯이 패배자까지도 동화시켜 버리는 로마인의 영민한 지혜와 강력한 정신력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318


로마 제국은 고대에도 현대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배운다. 좋은것이든 좋지 않은것이든...
그들의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무엇이든 자신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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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7세(기원전 69년 - 기원전 30년)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성 파라오이다.

생애

기원전 69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부왕이 죽은 뒤(기원전 51년) 18살에 15세 된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재위: 기원전 51~47년)와 결혼, 공동 파라오가 되었다. 하지만 또 다른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재위: 기원전 47~44년)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권력 기반인 그리스계의 외면으로 자리에서 일시 물러났다.

기원전 48년 10월, 클레오파트라 7세는 폼페이우스와 권력투쟁을 벌이다가 이집트에 온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협상하였다. 다시 파라오 자리에 복귀한 클레오파트라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물리친 후 정치에 몰두하였다.

기원전 47년 3월 27일 승리를 거둔 카이사르는 이후 2주일 동안 클레오파트라와 지낸 뒤 이집트를 떠났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카이사리온이 실제로 카이사르의 아들이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기원전 44년에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후에는 기원전 42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협동하였으며 3년 후 결혼하였다. 결혼 후 그녀는 남편 안토니우스의 권력투쟁을 경제적으로 도운 대가로 페니키아유다등의 쓸모 있는 영토를 할양받아 확장하였다.

권력구조의 변화로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레피두스와의 삼두정치가 깨지자 클레오파트라 7세는 BC 31년 9월 2일 명분상 자신에게 선전포고한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하여 안토니우스와 함께 악티움 해전을 결행했다.

하지만 전쟁은 실패하였고 자신을 일개 이집트 여인으로 취급하는 옥타비아누스와 연합할 수 없음을 직감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살했다. 에 물려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독가스를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자살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옥타비아누스가 죽여놓고 뱀에 물려 자살했다고 발표해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려고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뱀에 의한 자살, 독가스에 의한 자살, 타살, 에이즈(AIDS) 감염에 의한 병사(病死)등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평가

클레오파트라는 지식인인 블레즈 파스칼조차도 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역사가 바뀌었다고 할 정도로 남성들에게 성적인 관점에서 평가받았다. 그리고 살아 있을 때에도 옥타비아누스로부터 로마를 짓밟는 이집트 여인 취급을 받은 일이 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가 강대국 로마 제국을 이용하여 나라를 보전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그녀의 진짜 모습은 미모로 남성들을 유혹하는 요녀가 아니라, 궁전 밖의 세계를 다스리고자 한 여걸(女傑)이었다는 관점이 있다. 



클레오파트라



기원 전 50 년경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는 역사상 그 어떤 여인보다 극적인 삶을 살았다. 한 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그녀의 흥미진진한 생애와 러브스토리는 지금껏 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창작의 원천이 되었다.
파라오 율법에 따라남동생들과 두 번씩이나 결혼해 왕좌에 올랐고 왕권을 쟁취하기 위해 남편이며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리했다.
마케도니아의 마지막 여왕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생애는 소설보다 더 흥미롭다.
클레오파트라의 생애 중에서 일반인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부분은 그녀가 로마의 지배자인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유혹한 과정이다. 당대 최정상에 오른 두 남자를 어떻게 그처럼 완벽하게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기원 전 48년 클레오파트라는 남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후 강제로 폐위되어 유배된 상태였다. 막다른 골목에 처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침공한 카이 사르의 막강한 힘을 빌어 왕권을 되찾는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로마의 최고 실력자인 카이사르와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가졌다. 위 그림에서 보면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를 정복한 카이사르가 이집트 왕궁에 묵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몰래 그에게 접근하려던 그녀는 기막힌 계락을 떠올렸다. 스스로 양탄자 위에 드러누운 뒤 충복에게 자신의 몸을 양탄자로둘둘 말 것을 명령했다. 충복은 어깨에 맨 양탄자를 호위 병사들에게 보인 후 집정관에게 줄 값진 선물을 가져왔다고 둘러댔다. 큼직한 양탄자는 카이사르의 눈길을 끌었고 호기심이 발동한 카이사르는 서둘러 양탄자를 풀게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양탄자를 펼치기가 무섭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반라의 여왕이 비너스처럼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완전히 반한 카이사르는 연인이 되었음은 말한 나위가 없고 여왕의 정적을 모두 제거하고 그녀를 왕좌에 앉혔다. 여왕은 카이사르의 권력을 이용해 왕권을 되찾고 피맺힌
복수를 감행할 수 있었다..  
 
그의 연인이 되어 아들 카이사리온까지 낳고야망을 키우던 클레오파트라에게 
찬 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원 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의 무한한 권력에 
위협을 느낀 정적들이 카이사르를 암살하였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음 상대로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로마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한 안토니우스를 점 찍었다. 
삼두 정치인 중 한 사람인 안토니우스가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 사령관 에 오른 후 
동방 원정길에 나섰다는 정보를 입수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안토니우스를 유혹하기 위해 묘안을 짜냈다. 위의 그림에서 앨마 테디마는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르크가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만남을
묘사한 글을 토대로 이 그림을 그렸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첫 만남을 
가진 장소는 타르수스다. 오늘날에는 터키의 한 지방 도시에 불과하지만 고대의 
타르수스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시가지는 강으로 이어져 있었는데클레오파트라는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안토니우스를 만났다. 
선체는 황금빛이요, 바람을 받아 크게 부풀어 오른 돛은 가장 값비싼 색깔인 
자주색이었으며 갑판 중앙에는 금실로 수놓은 장막이 좌우로 열려 있고 그 아래 
옥좌에 사랑의 여신 비너스로 분장한 
클레오파트라가 앉았다. 노예들은 은으로 만든 노를 저으며 피리와 하프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고 배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바람을 타고 진동했다. 
이 화려한 첫 만남에 안토니우스는 
그만 혼을 뺏기고 말았다. 정신이 나간 안토니우스가 벌떡 일어서서
두려움과 경이로움이 가득 찬 눈길로
클레오파트라를 바라본다. 클레오파트라는 금으로 장식된 이동 닫집 아래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앉아요염한 눈초리로 안토니우스를 탐색한다. 
안토니우스와 극적인 첫 만남을 가진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행여 안토니우스가 권태를 
느낄새라 늘 새로운 쾌락을 개발했고 날마다 산해진미에악사와 무희를 동원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이런 생활이 10년이 넘도록 이어지자 클레오파트라는 
연인을 아예 자신 곁에 못 박아두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려  
안토니우스의 사랑이순간적인 열정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끝내 신분과 국적 동양과 서양이라는 인종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이국의 여왕과 혼인식을 올릴만큼 안토니우스는 철저하게 여왕의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결혼 선물로 여왕에게 엄청난 
이권이 걸린 오리엔트 지방의 통치권을 주었다. 로마의 권력자를 
애인으로 둔 덕분에 그녀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재물과 권력을 
소유한 여왕이 되었다. 

Cleopatra 사랑에 눈이 먼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아내 옥타비아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편지를 쓰고 또 다른 권력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의 지배권을 동서로 양분할 것을 요구했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자 
로마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국사를 돌보기는 커녕 
힘들게 정복한 식민지에서 나온 귀한 수입을 이집트 여인에게 몸땅 
안겨주는 사령관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특히 로마의 상속자요,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여왕의 노예로 전락한 안토니우스를 로마의 
수치로 생각했다. 그는 두 남녀를 국가의 명예를 더럽힌 탕아와 
국제적인 창녀의 야합으로 매도한 후 안토니우스를 제거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에 벌어진 악티움 해전의 
승자가 되었고 패전 사령관이 되어 벼랑 끝에 몰린 안토니우스는 자결하였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갑작스럽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안토니우스의 묘를 참배하고 돌아온 그녀는
 곧바로 최후를 맞았고 역사가들은 그녀가 독사에 물려 죽은 것으로 추정했다. 
클레오파트라를 그릴 때는 독사가 벌거벗은 여왕의 젖가슴을 무는 자극적인 
장면을 선택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에로티시즘이 
강하게 풍겨 나오는 것은 죽음과 성을 한 쌍으로 묶어 표현했기 때문이다. 
The Death of Cleopatra 클레오파트라가 팜므 파탈의 원형이 된 것은 정치적인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권력의 최정상에 앉은 남자들을 차례로 유혹해 희생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을 이용해 왕권을 
차지했고 애인들의 막강한 힘을 빌어 정적을 제거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플루타르크는 클레오파트라의 신비로운 죽음에 대해 여왕의 갑작스런 죽음은 
탐스런 무화과 바구니를 든 농부가 여왕을 방문한 직후에 일어났다. 무화과 
바구니에 맹독성이 강한 독사가 들어 있었던 것일까? 라고 강한 의문을 던졌다. 
들라크루아는 클레오파트라를 방문한 농부의 바구니 속에 숨겨져 있는 뱀을 
그려 넣어 극적인 죽음을 예견하고 있다. 우리가 클레오파트라 라고 부르는 
여왕은 클레오파트라 3세 이다 
이집트 왕조에서는 여왕이 제법 있었는데 고대 이집트 역사 연대기 문헌을 보면 
클레오파트라의 시대가 제법 있었다 
몇 명의 클레오파트라 라는 이름을 가진 여왕들 중 가장 활약상이 두드러졌던 여왕이 
클레오파트라 3세 였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 파스칼의 유명한 말처럼 
 
클레오파트라는 세계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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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틴어: Gaius Iulius Caesar영어: Gaius Julius Caesar 가이어스 줄리어스 시저[*]기원전 100년 또는 102년 7월 13일 ~ 44년 3월 15일)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 장군, 작가이다. 그는 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치적으로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노선에 섰다. 기원전 60년대 말에서 5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는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소위 제1차 삼두 정치라는 초법적 정치 연대를 이루어 수년간 로마 정계를 장악하였다. 이들 파벌은 자신들끼리 권력을 분점하고자 하여, 원로원 내에서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小 카토),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등벌족파의 반대를 받았으며,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이에 가세하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기원전 59~55년)하여 로마 제국의 영토를 북해까지 넓혔으며, 기원전 55년에는 로마인 처음으로 브리타니아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공훈 덕분에 카이사르는 강력한 세력가로 입지를 굳혀 폼페이우스를 위협하게 되었으며, 카라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삼두정의 두 정치가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이렇듯 로마 정계가 재편되면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서로 대치하게 되었으며,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대의를 내세웠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으로 하여금 루비콘 강을 건너게 하는 결단을 내려 기원전 49년에 내전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카이사르는 로마 세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등극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뒤 그는 로마의 사회와 정치에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는 공화정의 귀족 정치를 고도로 중앙집권화하였으며, 급기야 종신 독재관으로 선언하였다. 기원전 44년 3월의 열닷새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일군의 원로원 의원들이 공화정을 복고하고자 카이사르를 살해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내전이 일어났으며, 결국 카이사르의 양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영속적인 전제정을 성립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은 지 기원전 42년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공식적으로 로마의 신으로 축성하였다. 따라서 그의 사후 그의 공식명칭은 신격 카이사르가 되었다(Divus Caesar). 또한 그 이후부터 로마 황제가 죽었을 경우 후임자가 그를 신격화시키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카이사르의 삶은 본인이 쓴 전쟁 기록(갈리아 전쟁기내전기)을 통해 상당 부분 알려져 있으며, 정적임과 동시에 오랜 친구였던 키케로와의 서신과 그의 연설, 살루스티우스의 기록, 카툴루스의 시 등 당대의 다른 사료도 남아 있다. 또 아피아노스수에토니우스플루타르코스카시우스 디오스트라본 등 여러 후대 역사가들의 기록도 그의 삶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생애


유년기

카이사르는 귀족인 율리우스 씨족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율리우스 씨족은 베누스 여신의 아들이라는 전설상의 트로이아 왕자 아이네아스의 아들 율루스의 후손을 자칭하는 집안이었다.[1] 소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그의 코그노멘(cognomen, 가문 이름) "카이사르(Caesar)"는 조상 가운데 제왕절개 수술(라틴어로 '자르다'라는 뜻의 caederecaes-)로 태어난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2] 황제 역사(Historia Augusta)에는 다른 설명이 나오는데, 카이사르의 굵은 머리카락(caesaries)이나 밝은 회색 눈(oculis caesiis) 때문이라거나 혹은 그의 선조가 2차 포에니 전쟁에서의 전투 중 코끼리(무어말caesai)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한다.[3] 카이사르는 코끼리를 새긴 동전을 주조하였는데, 그가 자신의 이름에 대한 해석 가운데 코끼리와 관련된 해석을 좋아했다는 점을 암시한다.[4]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은 유서깊은 계보를 지녔으나, 정치적으로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으며, 가문에서 배출한 집정관 수도 세 명에 불과하였다. 카이사르의 아버지인 동명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공화정에서 두 번째로 높은 법무관직까지 올랐으며, 아시아 속주 총독을 지냈는데, 아마도 매형이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영향력 덕분이었을 것이다.[5]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는 여러 집정관을 배출한 영향력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또 카이사르의 가정 교사는 갈리아 출신의 웅변가이자 문법가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니포였다.[6] 카이사르는 누이가 둘 있었는데 모두 이름이 율리아였다. 카이사르의 유년 기에 대해서는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수에토니우스나 플루타르코스의 카이사르 전기에 보면, 내용이 10대 때부터 시작하며, 두 책의 시작부는 모두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7]

카이사르의 유년기는 혼란한 시절이었다. 기원전 91년에서 88년 사이에 로마와 이탈리아 동맹국들이 로마 시민권 문제를 놓고 동맹국 전쟁을 벌였으며, 그러는 사이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의 동부 속주를 위협하였다. 로마 정계는 벌족파(optimates)와 민중파(populares)로 갈라져 있었는데, 엄밀히 말해 두 파벌은 각자 공통적인 대의가 없어서 정당이나 정파와는 다르다. 벌족파는 원로원의 전통적이고 헌정상의 경로를 통해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는 정치가들이었으며, 민중파는 전통적인 과정 대신 유권자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정치가들이었다. 카이사르의 숙부인 마리우스는 민중파 정치인이었으며, 그의 부하였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벌족파였는데, 카이사르의 유년기 때 두 정치가의 대립으로 내전이 일어났다.

마리우스와 술라 모두 동맹국 전쟁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두 사람 모두 미트리다테스 정벌 전쟁에 지휘권을 원하였으나, 당초 술라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술라가 로마 도성을 떠나자 어느 호민관이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기는 법안을 통과시켜버렸다. 이에 술라는 로마로 진군하여 자신의 지휘권을 주장하며 마리우스에게 망명을 강요하였으나, 술라가 원정을 떠난 사이에 마리우스가 임시로 모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그와 그의 정치적 동맹자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도시를 장악하고, 술라를 공적(公適)으로 선언하였으며, 마리우스 군대는 술라 지지자들을 잔혹하게 복수하였다. 기원전 86년 초에 마리우스가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지지자들이 계속 정권을 잡았다.[8]

기원전 85년 어느날 아침에 카이사르의 아버지는 신발을 신는 중에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갑자기 죽자[9] 카이사르는 16살의 나이에 가장이 되었다. 이듬해 그는 유피테르의 고위 사제인 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로 지명되었는데, 전임자인 메룰라가 마리우스의 숙청 당시 죽었기 때문이었다.[10]이 사제직에 오르는 사람은 귀족일 뿐 아니라 귀족과 결혼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는 기사 출신 가문의 평민 여자인 코수티아(Cossutia)와 어릴 때 맺은 약혼을 파기하고, 당시 민중파의 영수였던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였다.[11]

이때 미트라다테스와 협정을 맺었던 술라가 돌아와 돌아와 마리우스 지지자들에 대항한 내전을 종결하였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작전을 수행한 뒤 그는 기원전 82년 11월에 콜리나 대문의 전투로 로마를 장악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독재관에 임명하였는데, 전통적으로 6개월 동안 단 한 번 재직하는 독재관직과 달리 술라의 독재관직에는 임기 제한이 없었다. 마리우스의 상은 모두 파괴되었으며, 마리우스의 시신은 무덤에서 파내어 티베리스 강에 던져졌다. 당시 킨나는 항명을 일으킨 자신의 병사들에게 이미 살해된 상황이었다.[12] 술라의 처벌자 명단 공개로 그의 정적 수 백명이 죽거나 추방되었다. 마리우스의 처조카이자 킨나의 사위였던 카이사르 역시 명단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유산과 사제직, 아내의 지참금 덕분에 처형을 면하였으나, 아내 코르넬리아와 이혼하기를 거부하여 잠적하는 수밖에 없었다. 술라파가 있던 모계쪽 집안과 베스타 여사제의 관여 덕분에 그에 대한 위협은 취소되었다. 술라는 망설이며 결국 사면에 승낙하였는데, 카이사르 속에 수많은 마리우스가 있음을 보았노라고 말한 바 있다.


청년 시절

도주했던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오는 대신 군 입대를 택하여, 아시아 속주에서는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 휘하에서, 킬리키아에서는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밑에서 복무하였다. 역설적으로 카이사르가 군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연유는 사제직을 잃은 덕분이었는데, 플라멘 디알리스 사제는 말을 만지거나 자신의 침대가 아닌 곳에서 사흘 밤을 자거나 로마 바깥에서 하룻밤을 자거나 군대를 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13] 그는 미틸레네 공성전에서 공을 세워 시민관을 수여받았다. 비튀니아 임금 니코메데스 4세의 함대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던 중 카이사르는 궁정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어 왕과 동성애 염문이 돌았으며, 이후에도 이 소문은 계속 그를 따라다녔다.[14]

기원전 80년, 독재관에 오른 지 2년 만에 술라는 사임하고, 다시 집정관제를 복원하였으며, 집정관을 재직한 뒤 정계에서 은퇴하여 사인(私人)으로 물러났다.[15]나중에 카이사르는 술라가 독재관직을 포기한 일을 두고 "술라는 정치의 가나다도 모른다"고 비웃었다.[16]2년 뒤인 기원전 78년에 술라는 세상을 떠났으며, 국장이 열렸다.[17] 술라의 사망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로마에 돌아와도 안전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유산을 몰수당한 터라 재산이 없던 카이사르는 로마 시에서 하층민들이 사는 수부라에 평범한 집을 얻었다.[18] 그가 로마로 돌아올 때 반술라파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반란을 시도하였으나, 레피두스의 지도력을 신뢰하지 않은 카이사르는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19] 대신에 그는 변호사로 나섰다. 그는 빼어난 웅변에다가 인상적인 제스처와 높은 목소리로 갖추었으며 금품 강요와 부패로 악명 높던 전직 총독들을 가차없이 고발하여 유명해졌다. 키케로도 그를 칭찬하며 "이제 나와보라, 어느 웅변가가 그대를 능가하겠는가?"라고 말한 바 있다.[20] 수사학을 완성하기 위해 기원전 75년에 그는 로도스 섬으로 유학하여 일전에 키케로를 가르친 바 있는 아폴로니우스 몰론 밑에서 공부하였다.[21]

에게 해를 지나던 중,[22] 카이사르는 킬리키아 해적에 잡혀, 도데카니사 제도의 파르마쿠사 섬에 갇히게 되었다.[23] 잡혀있는 동안 카이사르는 거만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카이사르는 포로로 잡혀있을 때 해적들을 십자가형에 처하겠다고 공언하였는데,[24] 해적들은 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해적들이 그의 몸값을 은 20 탈란톤으로 잡자, 카이사르는 50 탈란톤을 요구하라고 고집하였다.[25][26] 몸값이 지불되자 카이사르는 배를 모아 해적들을 추적해 잡았으며, 이들을 페르가몬에 투옥시켰다. 아시아 총독 마르쿠스 융크투스는 카이사르의 요구대로 이들을 처형하길 거부하고 해적들을 노예로 팔고 싶어하였다.[27] 그러나 카이사르는 해안으로 돌아가 자신의 권리에 따라 이들을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그런 다음 로도스로 갔으나, 곧 아시아에서 군사 작전에 불려갔으며, 폰토스의 침략을 막고자 보조군을 모병하였다.

로마로 돌아오는 중에 그는 쿠르수스 호노룸의 첫 단계인 군사 참모(military tribune)으로 선출되었다. 이 시기에 스파르타쿠스 전쟁이 일어났는데(기원전 73~71년), 카이사르가 이때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이에 관여했다. 기원전 69년에 그는 재무관에 선출되었으며,[28] 그 해에 마리우스의 미망인이었던 고모 율리아의 장례식 연설을 하였는데, 장례 중에 (술라 집권 이후로 볼 수 없었던) 마리우스의 상을 전시하였다. 그의 아내 코르넬리아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29] 기원전 69년 봄 혹은 초여름에 장례가 끝나고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의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휘하에서 재무관직을 수행하였다.[30] 이곳에서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상을 보고는 알렉산드로스가 세계를 제패할 때와 같은 나이에 자신은 이룬 것도 없다는데 불만을 느끼며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재무관직 조기 해임을 요청하여 승인받고 로마 정계로 돌아왔다. 기원전 67년에 돌아와서,[31] 그는 술라의 손녀인폼페이아와 결혼하였다.[32] 그는 조영관으로 선출되어 마리우스의 승전 기념비를 복구하였는데, 이는 술라파가 아직 정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물의를 빚었다. 그는 또 술라의 재산 몰수로 이익을 봤던 사람들을 기소하였으며, 공공 사업과 경기에 막대한 돈을 빌려 써서 동료 조영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보다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두 차례 반란 모의에 연루 혐의를 받기도 하였다.[33] 

 

정계에서 두각을 드러내다
 
기원전 63년은 카이사르에게 파란 많은 해였다. 그는 호민관 티투스 라비에누스를 설득하여 벌족파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라비리우스에게 37년 전에 원로원 비상 결의로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하고 자신을 이 사건을 심리할 두 재판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명하게 하였다. 키케로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가 라비리우스의 변호를 맡았으나, 그는 대역죄(perduellio)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인민에게 청원할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였으나 법무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가 야니쿨룸 언덕에 군기를 내려 민회를 산회시켰다. 라비에누스는 다음 회기에 기소를 재청할 수 있었으나, 카이사르의 지시로 재청하지 않아 이 문제는 중지될 수 있었다.[34] 카이사르의 목적은 라비리우스 개인이 아니라, 집정관들이 민회에 대한 상소권도 무시한 채 이른바 국가의 적들을 처형할 때 휘둘러온 원로원 비상 결의의 정당성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35] 덕분에 그는 원로원을 장악하고 있던 주류 세력들이 카이사르와 같은 민중파 정적들에 대하여 궁극적인 방호책으로 삼았던 비상 결의에 반대 여론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35] 라비에누스는 이후 십년간 카이사르의 중요한 친구가 되었다.

술라가 임명했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가 그 해에 죽자 카이사르는 로마 국가 종교의 수장인 대신관직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에게는 강력한 벌족파 경쟁 후보 두 사람이 있었는데, 집정관을 지낸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였다. 후보들은 서로에게 뇌물 수수 혐의로 고발하였다. 선거일 아침에 카이사르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면 대신관에 당선되어 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선거 운동으로 막대한 빚을 져서 추방되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경쟁 후보들은 뛰어난 겨험과 지위를 가졌지만 카이사르가 무난히 당선되었는데, 아마도 두 경쟁 후보가 서로 표를 잠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36] 대신관은 신성로(Via Sacra)에 관저가 있었다.[18]

그 해 집정관이었던 키케로는 공화국을 장악하려는 카틸리나의 음모를 알렸으며, 카툴루스 등은 카이사르가 이 음모와 연관이 있다고 고발하였다.[37]다음 해 법무관으로 선출되었던 카이사르는 이 음모 연루 문제 처리를 놓고 벌어진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였다. 회의 중에 카이사르는 쪽지를 받았다. 그러자 카이사르의 정적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는 카이사르가 음모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며 그 쪽지를 크게 읽도록 요구하였다. 카이사르는 카토에게 쪽지를 넘겨주었는데, 당황스럽게도 그 쪽지는 카토의 의붓누이인 세르빌리아에게서 온 연애 편지였다. 반역 음모자를 사형에 처하자는 의견에 대해 카이사르는 설득력 있게 반박하면서 종신 징역에 처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카토의 연설로 결국 음모자들은 처형되었다.[38] 다음 해 이 반란 음모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카이사르는 다시 공범 혐의로 고발되었다. 그러나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이 음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스스로 보고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여 문제가 풀렸으며, 고발자 가운데 한 사람과 또 위원회 위원 한 사람이 구금되었다.[39]

기원전 62년에 법무관이었던 카이사르는 당시 호민관이었던 메텔루스 켈레르가 논쟁적인 입법 제안에 지지하였으며, 두 사람은 매우 완고하여 원로원에서 이들을 직무 정지에 처하였다. 카이사르는 계속 법무관직을 수행하고자 하였는데, 폭력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가 자신을 지지하는 대중 시위를 진정시키자 원로원은 그를 복직시키기로 하였다.[40]

그 해에 보나 데아(Bona Dea, "선한 여신") 제사가 카이사르의 관저에서 열렸다. 이 제사에는 남성이 출입할 수 없었으나,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라는 젊은 귀족 청년이 여자로 변장하고 몰래 입회하려고 하였는데, 이는 카이사르의 아내인 폼페이아를 유혹할 목적이 분명하였다. 그는 잡혀서 신성 모독죄로 기소되었다. 재판에서 카이사르는 로마의 유력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거스르지 않고자 클로디우스에게 불리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으며, 클로디우스는 막대한 뇌물과 협박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내 아내는 어떤 의심도 받아서는 안된다"면서 폼페이아와 이혼하였다.[41]

법무관직을 수행한 뒤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이베리아 바깥)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아직도 상당한 빚을 지고 있던 터라 로마를 떠나기 전에 빚쟁이들을 설득해야 하였다. 그는 로마의 갑부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도움을 받았다. 폼페이우스에 반대하는 자신을 지지하는 대가로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의 빚 일부를 지불하고, 나머지 빚에는 보증을 서 주었다. 그렇게 하고도 카이사르의 법무관 임기가 끝나 일반 시민 지위가 되면 빚 때무에 기소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속주로 떠났다. 히스파니아에서 그는 칼라이키족과 루시타니족을 정복하여 그의 군대에게서 임페라토르(최고 군사령관)로 환호받았으며, 채무 관련 법을 개혁하고, 매우 존경을 받으며 총독직을 마쳤다.[42]

'임페라토르'로 경례를 받으면서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공화정 최고위직인 집정관직에 출마하길 원하였다. 만일 그가 개선식을 열려면, 행사 전까지 군인 신분으로서 도시 바깥에서 대기해야 하는데, 선거에 입후보하려면 사령관직에서 이임하고 일반 시민 신분으로 로마에 들어와야 했다. 결국 그는 개선식과 선거 출마를 동시에 할 수 없었다. 그는 원로원에 부재중 출마 허가를 요청하였으나, 카토가 이를 막았다. 두가지 사이에서 카이사르는 집정관직을 선택하였다.[43]


첫 집정관 재직과 삼두 정치

 이 부분의 본문은 제1차 삼두 정치입니다.

집정관 선거에 카이사르,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몇 년 전에 카이사르와 함께 조영관직을 맡은 바 있다), 루키우스 루케이우스 세 후보가 출마하였다. 선거는 깨끗하지 못했다. 카이사르는 키케로에게 지지를 청하였으며 부유한 루케이우스와 제휴하였으나, 체제의 주류 세력은 보수파인 비불루스를 밀어주었으며, 청렴하기로 유명했던 카토조차도 그를 지지하여 뇌물을 썼다고 한다. 카이사르와 비불루스는 기원전 59년에 임직하는 집정관으로 당선되었다.[44]

카이사르는 이미 크라수스에게 정치적인 빚을 지고 있긴 하였으나, 폼페이우스에게도 손을 내밀었는데, 그는 자신의 퇴역병에게 준 동방의 정착지와 농지를 원로원에서 비준받기 위해 싸우고 있었으나 성과를 얻지 못한 상황이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기원전 70년에 함께 집정관직을 역임한 이래 적대 관계였으며, 카이사르는 만약 자신이 한쪽과 손을 잡으면 다른 한쪽의 지지를 잃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을 화해하고자 하였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세 사람은 충분한 자금과 더불어 공공 사업을 장악할 정치적 영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의 비공식적 정치 제휴를 제1차 삼두 정치라고 하는데,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와 폼페이우스가 결혼하면서 공고해졌다.[45] 카이사르는 재혼하였는데, 이번 배우자는 다음 해 집정관으로 당선된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의 딸인 칼푸르니아였다.[46]

카이사르는 빈민에게 공유지를 재분배하는 법을 제안하였는데, 폼페이우스는 필요할 경우 무력도 불사하며 지지했으며, 크라수스도 마찬가지로 지지하여 삼두 정치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폼페이우스가 불러들인 그의 병사들이 도시에 운집하였으며, 삼두정의 반대자들을 위협을 받았다. 비불루스는 불길한 전조(前兆)가 있었다고 선언하여 법을 무효화하려 시도하였으나, 카이사르의 무장 지지자들이 그를 포룸에서 쫓아내 버렸다. 비불루스의 릭토르(lictor)들이 들고 다니는 속간은 부러졌으며, 그와 함께 있던 호민관 두 사람이 다쳤고 비불루스 자신도 똥 한 바가지를 뒤집어썼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그는 집으로 물러나 그 해 내내 틀어박혀 지내다가 이따금 나쁜 전조를 선언하였다. 이렇듯 카이사르의 입법을 방해하려는 시도는 별 소용이 없었다. 로마의 풍자가들은 이때부터 그 해를 "율리우스와 카이사르가 집정관이었던 해"라고 불렀다.[47]

카이사르와 비불루스가 처음 선출되었을 때, 귀족들은 카이사르가 집정관 임기를 마친 다음 해에 맡을 전임 집정관 자리로 속주 총독직 대신 이탈리아의 목초지와 숲을 맡겨서 장래에 그의 권력에 제약을 두고자 하였다.[48] 그러나 피소와 폼페이우스의 도움으로 나중에 이 조치는 취소되고 카이사르는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이탈리아 북부)와 일리리쿰(발칸 반도 서부)의 총독으로 임명하였으며, 나중에는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도 맡겼고 그에게 4개 군단을 주었다. 집정관 임기를 마치고 그가 맡을 전임 집정관 임기는 단 1년이 아니라 5년으로 정해졌으며, 이 기간 동안 그는 법정 기소가 면제되었다.[49] 집정관 임기가 끝나자 카이사르는 변칙적으로 정한 직무 때문에 기소되는 것을 가까스로 피하고 서둘러 임지로 떠났다.[50]


갈리아 정복

 이 부분의 본문은 갈리아 전쟁입니다.

카이사르는 여전히 많은 빚을 지고 있었는데, 속주 총독은 착취[51]나 위험한 군사 원정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휘하에 4개 군단이 있었으며, 임지 중 두 곳 일리리쿰과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는 북방의 미정복지와 접경하고 있는데, 이곳의 독자적인 갈리아인들은 불안정한 상태로 알려져 있었다. 로마의 동맹인 갈리아의 아이두이족(Aedui)은 전에 아이두이의 땅을 정복하고 정착한 아리오비투스가 이끄는 게르마니아의 수에비족(Suebi) 분견대의 도움을 받은 다른 갈리아 부족에게 패하였으며, 헬베티족이 이주를 위해 대규모로 이동하면서 로마인들이 우려하던 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새로이 두 군단을 조직하고, 처음에는 헬베티족을 다음으로 아리오비투스를 무찔렀으며, 겨울에는 세콰니족 영토로 군대를 물렸는데 이는 즉 카이사르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바깥 영토에 관심을 둔 것이 일시적이지 않다는 뜻이었다.[52]

겨울 동안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신규로 2개 군단을 또 편성하여, 임기 2년째에 카이사르는 처음보다 배가된 군사력을 갖추었다. 이런 자의적인 군 편성은 적법성이 의심스러웠는데, 키살피나 갈리아인은 로마 시민이 아니었기 대문이었다. 작년 카이사르의 군사 활동에 대응하여 갈리아 북동부의 벨가이부족들이 무장을 시작하였다. 카이사르는 이를 공격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였으며, 통합된 벨가이 동맹군과 한 차례 전투를 벌이다 결판을 짓지 못한 뒤에 차차 각 부족을 하나씩 정복하였다. 그러는 사이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가 지휘하는 1개 군단이 아르모리카 반도(Armorica)의 부족들을 정복하는 작전을 개시하였다.[53]

기원전 56년 봄에 삼두 정치 인사들은 갈리아 키살피나의 루카에서 회합을 열어 만났다. 로마는 혼란에 빠져 있었으며, 클로디우스의 민중 선동으로 크라수스의 폼페이우스의 사이가 나빠진 상황이었다. 회의에서 삼두 정치를 갱신하고, 카이사르의 전임 집정관(총독) 임기를 5년 더 늘렸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다시 집정관에 오르기로 하고 이후에는 카이사르처럼 장기 전임 집정관직을 맡기로 하여, 크라수스는 시리아를,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 속주를 맡는 것으로 정하였다.[54] 아르모리카 정복은 카이사르가 베네티족을 해전에서 무찔르면서 완수하였으며, 젊은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갈리아 남서부의 아퀴타니족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56년에 군사 작전을 종결하면서, 해안 저지의 모리니족(Morini)과 메나피이족(Menapii)만 저항하였다.[55]

기원전 55년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침략한 게르마니아의 우시페테스족(Usipetes)과 텡크테리족(Tencteri)을 몰아냈으며, 이들을 추격하여 라인강에 가교를 건설하고, 게르마니아 영토에 진입하여 무력 시위를 하였으며 돌아올 때 다리를 해체하였다. 그 해 늦여름에 모리니족과 메나피이족을 정복하면서브리타니아 섬(오늘날의 브리튼)에 건너가서 지난 해에 브리타니아 사람들이 베네티족을 도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섬에 대해 잘 몰랐으며, 켄트에 상륙 거점을 얻긴 하였으나 더 나아갈 수 없어서 겨울에 갈리아로 돌아갔다.[56] 이듬해 그는 더욱 준비하고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브리타니아에 돌아왔으며 더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내륙으로 진격하였으며, 트리노반테스족(Trinovantes)의 만두브라키우스 왕과 동맹을 맺고, 그의 적인 카시벨라우누스를 항복시켰다. 그러나 갈리아에서 에부로네스족(Eburones)의 암비오릭스가 이끄는 반란이 퍼져 작황이 나빠지자 카이사르는 겨울 동안 군사 작전에 나서야 했으며, 전쟁은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암비오릭스를 무찌르면서 카이사르는 이제 갈리아를 평정하였다고 생각하였다.[57]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에 있을 때,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딸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카이사르는 조카의 딸인 옥타비아를 남편 가이우스 마르켈루스와 이혼시키고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켜 그의 지지를 확보하려 하였으나, 폼페이우스는 거절하였다. 기원전 53년 크라수스는 파르티아를 침공하다카라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로마는 폭력 사태로 치닫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비상 수단으로 1인 집정관에 임명되었으며, 카이사르의 정적인 퀸투스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고, 장인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동료 집정관으로 삼아 일단 질서를 회복하였다. 이로써 삼두 정치는 결렬되었다.[58]

기원전 52년, 갈리아 아르베르니족(Arverni)의 웨르킨게토릭스가 일으킨 반란이 또 한번 크게 번졌다. 웨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 부족들을 통합하고자 하였으며, 게르고비아 전투 등 여러 차례 전투에서 카이사르를 무찔러 자신이 기민한 지휘관임을 입증하였으나, 알레시아 전투에서 카이사르가 공들여 준비한 공성 작전으로 마침내 로마에 항복하였다.[59] 이듬해에 산발적인 교전이 일어났으나,[60] 이로써 갈리아는 사실상 정복되었다.

전임 법무관 지위의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전쟁 동안 가장 고참인 군단장이었다.[61] 그 밖에 두각을 드러낸 카이사르의 다른 부관으로는 친척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62]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63]와 형제인 마르쿠스,[64]키케로의 동생인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65] 데키무스 브루투스,[66] 마르쿠스 안토니우스[67]가 있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갈리아 전쟁 기간 동안 로마군이 3백만 명의 적과 싸웠으며, 그 가운데 1백만은 죽고, 나머지는 노예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300개 부족이 복속되었으며, 800개 도시가 파괴되었다.[68] 아바리쿰(부르주) 시의 전체 주민 총 40,000명이 살육당하였다.[69]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헬베티인368,000명이 고향을 떠났으며, 이 가운데 92,000명이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는데, 군 작전 이후 총 110,000명만이 돌아왔다고 보고하였다.[70] 그러나 일단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카이사르의 보고는 선전의 목적을 띄고 있었으며, 고대 문헌에서는 보통 숫자를 과장해서 쓰기 때문에 적 전투원의 총 수효는 특히 너무 많은 것으로 보인다. 푸르거-군티(Furger-Gunti)는 헬베티 군대의 병사 수가 60,000명이 넘는 것은 기록된 전술을 고려했을 때 전혀 있을법하지 않다고 보았으며, 실제 수효는 총 이주민 수가 160,000명에 전투원 수는 40,000명 정도로 추산하였다.[71] 델브뤽(Delbrück)은 전체 주민 수가 100,000 이하일 것이며, 그 가운데 전투원은 16,000명에 불과할 것으로 보았는데, 이렇게 보면 켈트인 군대의 병력은 당시 30,000명 정도였던 로마군의 절반 수준이 된다.[72]


 
내전
 
기원전 50년, 폼페이우스가 주도하는 원로원에서는 카이사르에게 전임 집정관 임기가 만료되었으므로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귀환하도록 명령하였다.[73] 또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두 번째로 출마하려는 집정관 선거에 부재중 입후보를 금지하였다.[73] 카이사르는 집정관의 면책권이 없거나 군사력이 없는 상태로 로마에 들어간다면 기소되고 정계에서 밀려나리라고 생각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불복종과 대역죄 혐의로 고발하였다. 기원전 49년 1월 10일, 카이사르는 단 일개 군단만 이끌고 루비콘 강(이탈리아의 북방 경계선)을 넘어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아테나이의 극작가 메난드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구절인 "주사위를 던져라!(ἀνερρίφθω κύβος)"를 그리스어로 인용하였다고 썼다.[74] 수에토니우스는 이 문장을 라틴어로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라고 썼다.[75]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소 카토를 비롯한 벌족파는 도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하였는데, 이들은 특히 이탈리아 북부의 수많은 도시들이 카이사르에 항복하면서 새로이 징집한 군대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사마리움(Samarium)에 있던 한 집정관 소속 군단으로 저항을 시도해보기도 하였으나, 집정관이 방어군에 인계되고 그 군단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해버렸다. 폼페이우스의 군세는 제13군단밖에 없던 카이사르보다 훨씬 우세하였으나, 그는 싸울 뜻이 없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대동하던 원로원과 군단이 도주하기 전에 그를 생포하길 바라며 브린디시움까지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였다.[76]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추격을 피해 빠져 나오려고 카이사르가 브린디시움 항구 장벽을 뚫고 들어오기 전에 배를 타고 항구를 떠났다.

폼페이우스가 군대를 철수시키려고 해안의 모든 배를 이미 쓸어가버린 터라 카이사르는 해군력이 없었으므로 히스파니아로 진로를 돌리기로 하였다.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로마의 장관으로 남겨놓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호민관으로 이탈리아 나머지 지역을 맡겨놓고,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2개 군단과 합류하여 놀랍게도 27일만에 히스파니아로 진군하여 폼페이우스의 부하를 무찔렀다. 그런 다음 그리스에 있는 폼페이우스를 상대하고자 동방으로 향했는데, 기원전 48년 7월 10일 디라키움에서 카이사르는 포위망이 무너지면서 겨우 대패를 면하다시피하였다. 같은 해 파르살루스에서 카이사르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보병 수는 거의 두 배 이상, 기병은 더욱 차이가 났다) 매우 짧은 전투 끝에 그를 무찔렀다.[77]

로마에서 카이사르는 독재관으로 임명되었으며[78]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기병 대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카이사르는 스스로 집정관 선거를 열어 두 번째로 집정관에 올랐으며(동료 집정관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였다), 그런 다음 11일 뒤 독재관직에서 사임하였다.[78][79]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레이아로 도주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였으며, 이곳에서 폼페이우스는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임금의 궁정에서 복무하던 어느 전직 로마군 장교에게 살해당하였다.[80] 이때 카이사르는 당시 알렉산드레이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그의 누이이자 부인이며 공동 국왕인 클레오파트라 7세 사이의 권력 투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아마 프톨레마이오스가 폼페이우스를 죽이는 데 관여한 탓에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편에 선 것 같은데, 프톨레마이오스의 내시 포티누스가 선물로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바치자 카이사르는 이를 보고 울었다고 한다.[81]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에 나일 강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군대를 무찌르고,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지배자로 삼았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그 해 봄에 나일 강에서 개선 행진을 열어 알렉산드레이아의 내전에서 승리한 데 축하하였다. 파라오의 배는 400 척의 다른 배를 대동하였으며, 카이사르에게 이집트 파라오의 화려한 생활을 보여주었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결혼하지 않았는데, 로마법에서는 오로지 로마 시민 사이의 결혼만 인정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마지막으로 결혼할 때까지 무려 14년동안 클레오파트라와 관계를 이어나갔으며(로마인의 시각에서 이는 간통이 아니었다) 카이사리온의 아버지도 카이사르였던 것 같다. 클레오파트라는 한 차례 이상 로마를 방문하였는데, 로마 바깥의 티베리스 강을 건너면 있는 카이사르의 별장에서 지냈다.

기원전 48년 말, 카이사르는 다시 독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임기는 1년이었다.[79] 기원전 47년 초 몇 달간 이집트에서 지낸 카이사르는 중동 지역으로 가서 젤라 전투에서 폰토스 왕 파르나케스 2세를 절멸시켰는데, 너무나 빨리 승리를 거두어 그는 과거 폼페이우스가 이런 형편없는 적들과 오랫동안 싸워 거둔 승리를 조롱하였다.[82] 그 다음으로 카이사르는 아프리카에 남아있는 폼페이우스의 원로원파 잔당을 처리하고자 떠났다. 기원전 46년에 그는탑수스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전사)와 소 카토(자살)의 군대를 상대하여 신속히 대승을 거두었다.[83] 탑수스 전투에서 이긴 뒤 카이사르는 10년 임기의 독재관으로 임명되었다.[84]

그렇지만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로 도주하였는데, 카이사르의 옛 부관이자 갈리아 전쟁에서 부사령관을 지낸 티투스 라비에누스도 이들과 함께 있었다. 이들을 추격한 카이사르는 기원전 45년 3월에 문다 전투에서 마지막 저항 세력을 격파하였다.[85] 이런 가운데 카이사르는 세 번째와 네 번째로 기원전 46년의 집정관(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동료 집정관)과 기원전 45년 집정관(동료 집정관이 없었다)에 선출되었다.


내전 이후
 
카이사르는 아직 히스파니아에서 싸우고 있었으나, 원로원은 그가 부재중인 가운데 영예를 내리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적들을 처벌하지 않고 거의 모두 용서해 주었으며, 그에 대한 대중의 반대도 거의 없었다.

카이사르가 문다에서 승전한 데 기념하며 4월 21에는 대규모 경기와 축하 행사가 열렸다. 플루타르코스는 내전에서 무찌른 적들이 외국인이 아닌 동료 로마인들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로마인들이 카이사르 승리 이후 열린 개선식이 빈약했음을 알았다고 썼다.[86]

기원전 45년 9월에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로 돌아오면서 유언장을 썼는데, 자신의 조카손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에게 자신의 이름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상속한다고 썼다. 카이사르는 또 자신이 죽기 전에 옥타비우스가 죽는다면,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다음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적었다.

카이사르는 곡물 수매에 국가 보조금을 대도록 엄하게 제도화하였으며, 곡물 수령자의 수를 고정하여 줄였는데 모든 수령자는 특별 명부에 기록되었다.[87] 47년에서 44년까지 카이사르는 그의 전역병 약 15,000명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계획을 세웠다.[88]

카이사르는 대신관으로서 달력을 정비하는 일도 했다. 구 로마력을 철저히 검사한 그의 업적은 매우 오랜 세월동안 영향력을 이어갔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는 1년을 365일로 정하고, 4년마다 윤년을 두었다.[89] (율리우스력은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수정하여 오늘날의 그레고리오력이 되었다) 역법 개정으로 로마인에게 어떤 한 해가(아마 현대 역법으로 기원전 46년에 해당할 것이다)이 445일로 길어졌다.[89] 7월의 여러 유럽어 명칭(가령 영어의 'July' 등)은 그를 기념하여 율리우스에서 기원한 것이다.[90] 그 외 여러 공공 사업 가운데는 베누스 게네트릭스 신전이 있는 카이사르 포룸도 있다.
 



암살

기원전 44년, 3월의 열닷새(Idus Martias)에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전날 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라는 어느 "해방자"에게서 음모에 대해 어렴풋이 전해 들었으며, 최악의 상황을 우려하여 포룸 계단에서 약간 떨어져서 카이사르 앞으로 갔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마르스 광장에 있는 폼페이우스 극장을 지날 때 원로원 의원 무리가 그를 가로막더니 동쪽 주랑 현관에 붙은 방으로 그를 이끌었다.[91]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다다랐을 때, 원로원 의원인 루키우스 틸리우스 킴베르가 추방당한 자신의 형제를 귀환시켜달라며 청원을 하였다고 한다.[92] 다른 음모자들이 킴베르를 지지하면서 카이사르를 둘러쌌다. 플루타르코스와 수에토니우스 모두 카이사르가 킴베르의 청을 거절하였다고 했는데, 그러나 킴베르는 그의 어깨를 잡더니 카이사르의 투니카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킴베르에게 "웬 무례한 짓인가!(Ista quidem vis est)"라고 소리쳤다.[93] 이때 카스카가 단검을 빼내들어 단번에 독재관의 목을 내리찔렀다. 카이사르는 재빨리 뒤돌아보며 팔로 카스카를 잡았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라틴어로 "카스카, 이 천한 자야, 무슨 짓이냐?"라고 말했다고 썼다.[94] 겁을 먹은 카스카는 그리스어로 "동지들, 도와주시오!"(ἀδελφέ, βοήθει)라고 외쳤다. 순식간에 브루투스를 비롯한 모든 음모자들이 독재관을 공격하였다. 카이사르는 도망치려 하였으나, 피 때문에 분별을 잃고 발을 헛디뎌 넘어졌으며 주랑 현관 아랫 계단에 무방비로 쓰러지자, 암살자들은 그를 계속 찔러댔다.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카이사르를 살해하는 데 60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가담하였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23번 칼에 찔렸다.[95]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나중에 의사가 부검하기를, 그의 가슴에 두 번째로 찔린 상처 그 하나가 치명적인 일격이었다고 한다.[96]

독재관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는 학자들과 역사가들의 논쟁거리이다. 수에토니우스는 다른 사람들은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이 그리스어로 "녀석, 너도냐?"(καὶ σύ, τέκνον)였다고 말했노라고 썼다.[97] 그러나 수에토니우스 자신은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썼다.[93] 플루타르코스도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그가 암살자 사이에서 브루투스를 보자 자신의 토가를 끌어올려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고 한다.[98] 영어권 지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그의 마지막 말은 라틴어로 "브루투스, 너도냐?"(Et tu, Brute?)인데,[99][100] 이 말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 나오는 대사에서 나온 말로, 실제로는 라틴어와 영어가 혼용된 문장 "Et tu, Brute? Then fall, Caesar."의 앞부분 구절이다. 이 말은 역사적 사실로서 근거가 없으며, 셰익스피어가 대사에 라틴어를 쓴 것은 당시 카이사르가 수에토니우스가 기록한 것처럼 그리스어가 아닌, 라틴어를 썼다는 주장과도 무관하며, 단지 이 희곡을 쓴 당시 이미 대중적인 구절이었기 때문이다.[101]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살해당한 뒤에 브루투스는 동료 의원들에게 무언가 말할 듯이 앞으로 걸어 나왔으나, 그들이 건물에서 도망쳤다고 한다.[102] 브루투스와 그의 패거리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나아가 사랑하는 도시를 향해 "로마 사람들이여, 우리는 다시 자유로워졌다!"고 외쳤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소문이 퍼지면서 로마 시민들은 각자 자기 집에 문을 걸어잠그고 틀어박혀 그들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암살 이후

암살자들은 카이사르의 죽음이 결국 로마 공화정의 종말로 이어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다.[103] 갈리아 정복 전부터 카이사르를 열렬히 지지했던 로마의 중류층과 하류층 사람들은 소수의 잘난 귀족 무리가 자신들의 우상을 죽인 데 분노하였다. 카이사르와 떨어져 있었던 안토니우스는 로마 민중의 슬픔을 이용하여 이들의 분노를 벌족파들에게 쏟아버리겠다고 위협하였는데, 아마도 자신이 로마의 지배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서는 놀랍고도 분하게도, 카이사르는 조카의 아들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를 이미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로 정해두었으며, 유증을 통해 그를 로마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게 해준데다 '카이사르'라는 막대한 권위를 지닌 이름을 물려주었다.[104]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는 위대한 카이사르의 아들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로마 대중 상당수의 충성도 얻게 되었다. 며칠 뒤 로마 포룸에서 카이사르의 장례식이 열렸는데, 안토니우스는 1600여 년 뒤 셰익스피어가 쓴 것처럼("친구들이여, 로마인들이여, 동포여, 들어보시오...") 연설을 하지는 않았으나, 로마의 일반 민중들에게 호소력 있게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여론을 반영한 극적인 찬사를 바쳤다. 게다가 장례 연설 중에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따라 티베리스 강변에 있는 그의 개인 정원은 로마 시민에게 바치며, 모든 로마 시민 등록자에게 300 세스테르티우스씩 선물하기로 발표가 났다.(300 세스테르티우스는 매우 큰 액수는 아니었으나, 로마 노동자들의 평균 석달치 급료에 해당하는 돈으로 상당히 좋은 선물이었다) 안토니우스의 장례 연설과 더불어 카이사르의 유증이 알려지면서 대중 사이에서 카이사르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으며, 죽음에 대한 애도와 암살자에 대한 분노도 높아졌다. 장례식장에서 들끓어오른 군중은 카이사르의 유해를 놓은 장례용 장작에 마른 가지와 가구, 심지어 옷가지까지 던졌으며, 이로 말미암아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포룸이 심각하게 피해를 입었다. 그러자 군중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집을 공격하였는데, 이들은 간신히 피해 쫓겨났으며 결국 해방자들의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게 된다.[105]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다가올 내전의 궁극적인 결과를 예견하지 못하였는데, 특히 카이사르의 후계자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을 당시 겨우 19세의 나이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상당한 정치 감각을 입증하였으며, 안토니우스가 새로운 내전의 첫 단계에서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상대하는 동안, 옥타비아누스는 당초 빈약했던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그리스에 막대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와 싸우기 위하여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전쟁 자금과 병사가 필요하였으며, 카이사르의 이름이 지닌 명분과 정당성도 있어야 했다. 기원전 43년 11월 27일 티티우스 법(lex Titia)이 통과되어[106]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카이사르에 충성하던 기병 지휘관 레피두스 세 사람의 제2차 삼두 정치가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107]삼두 정치는 기원전 42년에 공식적으로 카이사르를 '율리우스 신'(Divus Iulius)으로 신격화하였으며, 그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신의 아들'(Divi filius)이 되었다.[108] 카이사르가 자신의 관대함 때문에 살해당한 것을 아는 제2차 삼두 정치의 세력자들은 술라 이후에 쓰인 적이 없는 숙청의 공포를 다시 일으켰다.[109] 이들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 대항하여 두 번째 내전에서 45개 군단을 유지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수많은 반대자들을 합법적으로 살해하였다.[110]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필리피에서 공화정파를 격퇴하였다.[111]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정부였던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였는데, 로마를 지배할 발판으로 이집트의 어마어마한 부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에 맞서 세 번째 내전을 벌인다. 이 마지막 내전에서 악티움 해전을 기점으로 옥타비아누스가 승세를 잡게 되고, 결국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신적인 이름을 달고 로마 제국의 첫 황제가 되었다.[112]

당초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와 캅카스스키타이를 침공하고, 동유럽을 가로질러 게르마니아에 다시 진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암살되면서 이러한 계획은 좌절되었다.[113] 그의 후계자들은 파르티아와 게르마니아를 정복하고자 하였으나, 영속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건강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근거하여,[114] 간혹 카이사르가 간질을 앓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 문제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으며, 또 특히 기원전 80년대에 술라가 처벌자 명단을 공개하던 당시 그가 말라리아에 걸린 것은 이보다는 더욱 확실하다.[115]

카이사르는 부분적으로 발작 증세를 보였던 것 같은 기록이 네 가지가 있다. 또 그는 아마도 어린 시절에 소발작(absence seizure)을 증세가 있었던 것 같다. 이렇듯 그의 발작에 대한 가장 최초의 기록은 카이사르 사후에 태어난 사람인 수에토니우스의 글이다. 그가 간질 환자였다는 주장에 대해 일부 의학 역사가들은 그의 병이 간질성 발작을 유발하는 저혈당증이라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116][117][118]


저서

카이사르는 생전에 로마에서 훌륭한 웅변가이자 산문 작가로 인정받았으며, 키케로도 카이사르의 수사와 문체를 높이 평가하였다.[119] 그의 유명한 작품 가운데는 마리우스의 아내인 아주머니 율리아의 장례 연설과, 키케로의 소 카토 회고에 대응하여 카토를 비난한 글인 안티카토네스(反카토)가 있다. 불행히도 그의 글과 연설문 상당수는 유실되었다.가장 큰 원인은 그의 사후에 그가 신격화 됨에 따라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등 몇몇 문서들을 제외한 그와 관련된 글과 연설문들의 폐기를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가 쓴 회고록으로는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가 있는데, 전자는 갈리아 전쟁 당시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서 벌인 군사 작전을 기록하였으며, 후자에서는 이집트에서 폼페이우스가 죽은 직후에 일어난 내전을 다루었다. 또 각각 알렉산드레이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에서 수행한 전투에 대해 쓴 알렉산드레이아 전쟁에 대하여(De Bello Alexandrino), 아프리카 전쟁에 대하여(De Bello Africo), 히스파니아 전쟁에 대하여(De Bello Hispaniensi) 이 세 저작도 역사적으로 카이사르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저자 여부는 불투명하다.

이러한 저서의 줄거리는 당시 전쟁 중이나 직후에 "전선에서 급송한 공문서"로서, 1년 단위로 써서 출간되었다. 카이사르의 저서는 문체면에서 분명하게 단순하고 직설적이나, 사실은 대단히 복잡하고 그의 정치적 주장을 선전하는 방향으로 미묘하게 편향되어 있고 특히 로마나, 이탈리아, 속주의 평범한 소귀족 독자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


위키백과 내용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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