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경험은 우리안의 불순물을 태워 버린다. 24

강박적인 생각을 내려놓을 때 마음과 가슴이 열린다. 28

생각만큼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없다. 마음은 한개의 해답을 찾으면 금방 천 개의 문제를 만들어 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뛰어난 상상력을 가진 작가이다. 마음이 자기와 전쟁을 벌이지 않을 때 완전히 다른 세상을 경험한다. 30

문제와 화해하고 받아들일 때 그 문제는 작아지고 우리는 커진다. 실제로 우리 자신은 문제보다 더 큰 존재이다. 31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 34

구차하게 의존하는 것, 시도와 모험을 가로막는 것을 제거해야만 낡은 삶을 뒤엎을 수 있다. 47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삶의 여정에서 막힌 길은 하나의 계시이다. 59

‘작가(writer)는 글을 쓰는 사람이며, 기다리는 사람은 웨이터(waiter)이다’라는 말은 나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이상적인 집필 환경을 기다리는 작가는 한 문장도 쓰지 못한 채 인생을 마친다는 말도.
한때는 주로 밤에 글을 썼지만 새벽에 글을 쓴 지 오래되었다. 오전 5시 반에 일어나 20분 명상을 하고 오후 3시까지 글을 쓰고 번역을 한다. 나는 타고난 재능을 가진 작가나 번역가가 전혀 아니기 때문에 매일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한 단락도 끝내지 못하고 오전을 다 보낼 때도 있다. 여행 산문가 피코 아이어가 말한 대로, 글을 쓴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에게 은밀한 편지를 쓰는 것과 같다.
여행 중에도 거의 예외가 없다. 새벽 기차 안에서 글을 쓴 적도 많다. 여명이 터 오는 갠지스강 계단에 앉아서도 쓰고, 히말라야 고개를 넘는 트럭 조수석에서도 계속 중얼거리며 써서 운전사를 겁먹게 만들었다.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면 한 편의 글도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영감은 그저 매일 계속 쓰는 것이다. 멋진 소재가 그냥 굴러들어오는 행운은 매번 나를 비켜 간다. 집필의 신이 내 집필실에는 안 오고 다른 작가들의 집필실만 편애한다는 생각을 지을 수 없다. 다음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 쥐어뜯은 머리카락을 다 모으면 지금보다 훨씬 멋진 장발이 되었을 것이다.
마라톤 선수가 달리기가 쉬워서 달리는 게 아니듯 글쓰기가 쉽다면 나는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인생의 모순이다. 글쓰기가 너무 어려워서 계속 쓰고 있는 것이다. 그만두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글을 쓰지 않으면 다른 무엇을 할수있겠는가? 상상력이 완전히 고갈되지 않는 한 내가 무턱대고 할 수 있는 일이 글쓰는 일인데.
글을 잘쓰는 비결을 묻자 『톰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말했다.
“나 자신이 글 쓰는 데 소질이 없음을 발견하는 데 15년이 걸렸다. 하지만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계속 써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때 이미 나는 유명 작가가 되어 있었으니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는 아무리 퇴고를 많이 해도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수십 년 동안 글을 썼는데도 여전히 그렇다.”하고 고백했다.
나는 지금 단순히 ‘노력'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명'을 주제로 이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자신의 가슴이 원하는 일을 하는 소명 말이다. 하지만 취미 생활이 아니라면 무슨 일이든 수도사가 되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글쓰기 역시 그저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밑바닥에 있는 진실성에 다가가 자신의 것을 건져 올리는 시도여야 하기 때문이다.
인도의 피리 연주자 하리프라사드 초우라시아는 40대에 이미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기 시작했다. 80세인 지금도 그의 연주를 능가할 자가 없다. 나는 20년 가까이 해마다 그의 연주를 들으러 다녔다. 한번은 델리의 신년 음악회에서 만나 “하리지, 이제 한국에 오실 때입니다 ”라고 요청하자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래서 그해 10월 서울과 부산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아침마다 그의 호텔 방에 들렀는데, 그는 매번 연습을 하고 있었다. 평생 피리 연주를 해 왔으며, 예술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인도 정부가 외교관 여권을 발급하고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훈장까지 수여받은 대가가 뭄바이에서 델리로, 다시 델리에서 서울로 긴 시간 비행기를 타고 왔음에도 불구 하고 다음날 단 40분의 연주를 위해 계속해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쉬라고 해도 듣지 않았다.
지난 2월 동인도 카락푸르에 있는 인도공과대학에서 특별 연주회가 있어서 그와 동행했다. 아침 일찍 콜카타를 출발해 점심 시간이 지나 도착했는데, 그는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저녁 공연을 위해 곧바로 방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바로 전날 밤 콜카타에서 연주회를 가졌는데도!
연주를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에 그 학교에서 요가와 명상을 가르치는 교수가 질문했다.
“당신은 평생 동안 음악을 해 왔는데, 이 삶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가?”
하리지는 말했다.
“나는 이 인생을 통해 분투노력하는 것을 배웠다. 어렸을 때 일찍 어머니를 잃어 한 조각의 차파티(통밀 가루를 반죽해 얇고 둥글게 구운 인도의 주식)를 얻는 데도 분투 노력해야만 했다. 늦게 음악을 시작했을 때는 스승이 원래 레슬링 선수였던 나의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남들처럼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피리를 불라고 가르쳤다. 그것에 적응하기 위해 끝없이 분투노력했다. 나는 타고난 음악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 몸을보라 몇년전 교통사고로 어깨를 다쳐 한쪽 팔을 쓰는 것이 힘들다. 따라서 지금도 무한 노력하지 않으면 피리를 불 수 없다. 이곳에 함께온 한국인 친구는 나더러 이제 그만 쉬라고 하지만 나는 숨이 멎을 때까지 피리를 불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삶이 내게 준 소명이다.”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아마도 그 명상 교수는 ‘마음의 평화' 같은 초월적인 대답을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가의 솔직하고 위선적이지 않은 답변, 삶에 대한 진실성에 청중은 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앞에서 밝혔듯이 나는 타고난 작가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애초에 이 글에 담으려고 마음먹었던 주제를 제대로 전달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나름 분투노력했다. 누군가가 말 했듯이 진짜 작가는 그저 계속 글을 쓰는 사람이다. 이 삶에서 진실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축복할 수 있으므로. 당신과 나, 우리는 어차피 천재가 아니다. 따라서 하고 또 하고 끝까지 해서 마법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다. 66-70

세상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대로 존재한다. 무엇을 보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는가. 무엇을 듣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듣는가, 무엇을 느끼는 가가 아니라 어떻게 느끼는가가 우리의 삶을 만들어 나간다. 75

라틴어에서 레푸기움은 ‘피난처, 휴식처’의 의미이다. ...
단순한 생활과 음식이 나를 단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단순함이 나를 나 자신에게 가까워지게 했다. 그 삶은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순전히 내 영혼에 관한 일이었다. 꼭 필요하지 않은 일과 만남들이 줄어들면서 기쁨은 늘어났다. 사치가 문화를 창조하기도 하지만, 소박함은 정신을 창조한다. 그곳에서 나는 사원들을 들여다봤고, 신상들을 보았고, 그런 다음 나 자신 안에서 성소를 발견했다.
<기억, 꿈, 회상> 에서 융은 말한다.
“사람들은 점점 커져 가는 부족감, 불만족, 불안 심리에 떠밀려 새로운 것을 향해 충동적으로 돌진한다.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가 약속해 주는 것들에 의지해 살아간다. 모든 좋은 것이 더 나쁜 대가를 치르고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눈부신 과학의 발견이 우리에게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들은 전체적으로 인간의 기쁨, 만족, 또는 행복을 증가시키지 못한다. 예를 들면 시간을 단축하는 조치들은 불쾌한 방식으로 속도만 빠르게 해 전보다 더 시간이 부족하게 만든다. 볼링겐에 있는 나의 탑에서는 사람이 마치 수백 년을 사는 것처럼 산다. 만약 16세기 사람이 그 집으로 이사 온다면 그에게 새로운 것은 단지 석유 등잔과 성냥일 것이다.”
당신에게 그런 곳은 어디인가? 자기만의 사유 공간에서 호흡을 들이쉬고 내쉴 수 있는 곳은? ...
자신만의 레푸기움, 자신의 탑을 갖는 일은 중요하다. .. 자신의 본얼굴을 감추느라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자신의 레푸기움에서는 타인을 위해 표정을 꾸밀 필요가 없으며, 외부의 지나친 소란으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지킬 수 있고, 당신을 움켜쥐었던 세상의 요구에서 벗어난다. 85-86

미국 시인 마야 안젤루는 썼다.
“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과 당신이 한 행동을 잊지만, 당신이 그들에게 어떻게 느끼게 했는가는 잊지 않는다.”
나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가는 감추거나 꾸미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드러내며, 내가 주장하는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행동이 나에 대해 가장 잘 말해준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인가? 그것이 가장 진실된 나의 모습에 가깝다. 105

이십 대에 신춘문예로 등단한 나는 몇 권의 시집으로 명성을 얻어 어딜 가나 시인, 혹은 작가로 불리게 되었다. 나 역시 그것을 당연히 여겨 스스로도 자신을 시인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시인’의 품사는 삶, 사랑, 여행처럼 명사보다는 동사에 가깝다. 그 단어들은 현재진행형일 때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시를 쓰고 있을 때 나는 시인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시인이 아니다. 다른 작가의 책을 읽을 때는 독자이고, 버스를 타면 승객이며, 병원에 가면 환자이고, 식당과 카페에서는 손님이다. 사랑하는 이에게는 연인, 아들에게는 아버지, 함께 사는 강아지에게는 반가운 주인이다. 그런가 하면 힌디어 선생에게는 단어를 잘 까먹는 학생이고, 외국에서는 배낭여행자이다. 이렇듯 나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동사이다.
고정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명칭은 역할에 따른 약속 명사일 뿐이다. 115-116

나에게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면 허무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역동성에 눈뜨게 된다. 그때 지금 이 순간 속에서 열심히 놀이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다른 놀이로 옮겨 간다.
‘나’의 품사는 흐르는 강처럼 순간순간 변화하는 동사이다. 나는 ‘나의 지난 이야기(My Story)’가 아니라 이 순간에 ‘있음(I Am)’이다. .. 내가 시인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 오히려 나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오직 모름과 모름일 때 존재와 존재로 마주하는 일이 가능하다. 순수한 있음과 순수한 있음으로. 121

추구의 여정에는 두 가지 잘못밖에 없다. 하나는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끝까지 가지 않는 것이다.
“어떤 길을 가든 그 기로가 하나가 되라.”
길 자체가 되기 전에는 그 길을 따라 여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긍정의 길이든 부정의 길이든 자신이 선택한 길과 하나가 되어 묵묵히 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길이 끝나는 곳에서 모든 길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 시인 찰스 부코스키는 썼다.
“무엇인가를 시도할 것이라면 끝까지 가라. 그러면 너는 너의 인생에 올라타 완벽한 웃음을 웃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훌륭한 싸움이다.” 140

생각은 언어만큼이나 쉽게 전염된다. 마음이라는 공간 안에 담겨 있는 ‘나의 고유의 생각’들은 수많은 ‘타인의 생각’들과 혼합되어 있다. 따라서 내가 어떤 생각들과 나를 동일시하면서 ‘이것은 나야’라거나 ‘이것은 내가 아냐’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 참일까? 혹시 외부와 상호작용하면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나’인데도 내가 마음이라는 공간 안에 가상의 고정된 나를 만들어 놓고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이 자기 착각은 가장 알아차리기 어렵다.
우리에게는 ‘나’를 유지하기 위해 내 언어, 내 생각, 내 존재가 다른 것들과 분리된 고유의 것이라는 고집스러운 전제가 있는 듯하다. 그 전제마저도 과거로부터, 타인들로부터 배운 것인데도, 만약 실제로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동일하기까지 한 언어와 생각과 마음의 내용물들을 모두 제외시킨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그 나는 ‘고유의 나’일까? 그렇다면 붓다는 왜 ‘고유의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단지 세상 만물에 서로 의존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토록 강조했을까? 144

소설가 보르헤스는 썼다.
“우리 살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이들은 각각 특별한 존재이다. 누구든 항상 그의 무언가를 남기고, 또 우리의 무언가를 가져간다. 많은 것을 남긴 사람도 적은 것을 남긴 사람도 있지만, 무엇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누구든 단순한 우연에 의해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이다.” 179-180

평생의 관계는 당신에게 평생의 배움을 준다. 굳건한 감정적 토대를 갖기 위해 당신이 쌓아 나가야만 하는 것들을. 당신이 할 일은 그 배움을 받아들이고,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관계에서 당신이 배운 것을 주변의 모든 관계와 삶의 영역에 적용하는 것이다. 사랑은 맹목적이지만 진정한 우정은 천 리 밖을 본다는 말이 있다.
당신이 내 삶에 나타나 준 것에 감사한다. 그것이 이유가 있는 만남이든, 한 계절 동안의 만남이든, 생애를 관통하는 만남이든. 181

인내는 단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인내는 앞을 내다 볼 줄 알고 살아가는 일이다. 187

티베트어에 ‘셴파’라는 단어가 있다. 대개는 ‘집착’으로 번역하지만, 정확히는 물고기가 낚싯바늘에 걸리듯 ‘붙잡히는 것’ 혹은 ‘생각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티베트 불교에 정통한 페마 초드론은 셴파를 ‘가려운 곳을 긁는 고통’에 비유한다. 가려우면 자꾸만 긁게 되고, 긁을수록 더 가려워진다. 그래서 어느 순간 가려움이 고통으로 변한다. ...
셴파가 가려워서 자꾸 마음이 쓰이는 동시에 가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조차 어리석어서 생기는 고통이다. 모기에게 물렸든 모욕적인 비난을 들었든, 혹은 자기 자신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든 머릿속에서 강박적으로 그것 외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는 상태로 고착되는 것이 셴파이다. 모기에 물린 것도 괴로운데 그곳을 계속 긁어서 스스로 더 고통받는 것이다. 199-200

나날의 삶에서 셴파는 흔하게 일어난다. 누군가의 비난, 무례함, 불친절, 나의 잘못된 판단과 실수 등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영혼을 괴롭힌다. 삶에서 고통받는 이유가 그것이다. 셴파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것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을 자각하는 일이다. 204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덩이를 더 파는 것이 아니라 구덩이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일이다.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이다. 티베트 속담은 말한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205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잘 모른다는 것과 동의어일 때가 많다. 누군가를 안다고 믿지만,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생각과 감정을 믿는 것이다. 또한 누군가를 조항하고 싫어하지만, 사실은 나의 판단과 편견을 신뢰하는 것이다. 206

관계가 공허해지는 것은 서로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 누군가를 안다는 것, 진실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자신의 편견을 깨고 그와 함께 계단 끝까지 내려가는 숙제를 안는 일이다. 209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바닷물을 뚫고 달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라고 어느 시인은 썼다. 그런 노력없이 상대방의 마음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내 계산법을 가르치려 드는 것은 병이다. 211

트라피스트회 신부 토머스 머튼은 <인간은 섬이 아니다>에서 썼다.
“인간은 다른 누군가와 소통할 수 없는 그 자신만의 비밀과 고독을 가지고 있기에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를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과 자신의 영혼을 모두 황폐하게 만든다. 그것은 자신을 중심에 놓고 자기 삶의 방식에서 상대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212


- 독서 모임에서 나온 문장들
어떤 사람을 만날 때 마음이 열리는 순간이 있다. 나의 감각과 느낌, 혹은 삶에서 경험하는 기쁨이나 두려움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과는 나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자발적인 열람이 폭풍에 길 잃은 새 같던 우리를 연결시켜 주며, 그때 세상과의 거리도 가까워진다. 삶이라는 여행의 한 구간을 그런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행운이다. 104

나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가는 감추거나 꾸미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드러내며, 내가 주장하는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행동이 나에 대해 가장 잘 말해준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인가? 그것이 가장 진실된 나의 모습에 가깝다. 105

“너는 누구인가?”
“저는 쿠퍼 부인으로, 이 시의 시장 아내입니다.”
“나는 너의 이름이나 남편에 대해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사랑하는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네가 누구의 엄마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초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나는 너의 직업을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기독교인이며, 남편을 잘 내조했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나는 너의 종교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116

모든 일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며, 모든 만남에는 의미가 있다. 누구도 우리의 삶에 우연히 나타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내 삶에 왔다가 금방 떠나고 누군가는 오래 곁에 머물지만, 그들 모두 내 가슴에 크고 작은 자국을 남겨 나는 어느덧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당신이 내 삶에 나타나 준 것에 감사한다. 그것이 이유가 있는 만남이든, 한 계절 동안의 만남이든, 생애를 관통하는 만남이든. 174-175

힌디어에 ‘킬레가 또 데켕게’라는 격언이 있다. ‘꽃이 피면 알게 될 것이다.When it flowers, we will see.)’라는뜻이다. 지금은 나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고, 설명할 길이 없어도 언젠가 내가 꽅을 피우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자신의 현재 모습에 대해, 자신이 통과하는 계절에 대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시간이 흘러 결실을 맺으면 사람들은 자연히 알게 될 것이므로.
독일 시인 라이너 쿤체는 썼다.
‘꽃피어야만 하는 것은 꽃핀다.
자갈 비탈에서도 돌 틈에서도
어떤 눈길 닿지 않아도’
인내는 단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인내는 앞을 내다 볼 줄 알고 살아가는 일이다.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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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소비자본주의가 전성기를 맞은 지금, 소비에 관해 정면으로 부딪히며 따져보고, 생각한 바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나는 당초 예상보다 훨씬 많은 변화를 실감했다.  9



사람은 무언가 물건을 보고 그것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야 소비를 하게 된다. 무슨 물건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면 사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 법이다.  19


먹고사는 데 돈을 쓰는 행위를 '소비'라 불러야 할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고 이 책에서 말하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소비'는 살아가는 데 굳이 필요하지 않은 무언가를 원하고 그런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돈을 벌어서 쓰는 행위를 가리킨다.  21


적어도 나는 '빈자는 아름답고, 부자는 저속하다'는 가치관 속에서 자랐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가난한 사람이 멸시 받는 세상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 같은 변화는 누군가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니다. 누군가의 지시도 아닌데 마치 종교를 바꾸기라도 하듯 사람들의 가치관은 극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24


최근에는 노동자도 물건을 생산하기보다는 자신을 얼마나 비싼 값에 팔 것인가, 즉 자신을 소비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강하다....

핵심은 돈이 가장 중요해졌다는 것.  26


돈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물론 입증할 수 있는 이론은 아니다. 다만 세상을 살아가는 근거가 되는 신앙 내지 신념 같은 것이다. 이런 신념은 극도로 경쟁적이고 야박해지는 세상의 변화를 막을 수 있다. 또 조금이나마 신중하게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해준다. 생활에 규범과 기준이라는 것을 제공한다는 얘기다.  27


쇼핑몰에는 매일 상품이 쌓인다. 오늘날의 소비자들은 바로 그곳에서 필요도 없는 물건까지 사도록 부추김을 당한다. 똑같이 필요 없는 물건이라 할지라도 우리 어머니의 경우와 현대 소비자의 경우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어머니에게 그것은 이차적인 행위이고, 상점가 사람들과의 친밀감이 우선이었으나 현대 소비자의 소비는 공허한 욕망을 물건으로 채우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 소비는 채워지지 않는 생활을 반영하며 한편으론 정신적인 허기를 채우기 위한 보상행위로 변질된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이 소비병에서 탈출해야 한다.  29


어떤 의미에서는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유일한 답일지도 모른다. 대단히 어렵겠지만 소비 사회에 일격을 가하고, 거기서 탈피하기 위해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32


'스펜드 시프트(spend shift, 소비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 경제위기와 재해 등을 겪으면서 과거보다 지역과 공동체를 더 윤택하게 하고, 유대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데 가치곤을 두는 방향으로 소비와 생활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는 개념이다.)'다. 선책하는 물건을 바꾸고, 사는 장소를 바꾸며, 사는 행위와 관련된 모든 것을 바꾸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소비가 가진 근본적 문제를 뿌리째 뽑아버리는 것이 스펜드 시프트이다.  33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를 따져보면 반드시 사야하는 물건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34


전에는 돈 쓰는 일이 악덕이었으나 서서히 미덕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악이 정의로 변하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변화다. 바로 거기서부터 '소비화'의 물결이 단숨에 밀려든 것이다.  44


돈의 최대 특징은 교환가치만 있을 뿐 사용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돈의 가치를 과도하게 중시하는 사회는 돈의 특징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요구된다. 한마디로 유동성 선호 현상에 지배되는 사회라는 말이다. 언제든지 쉽게 이동할 수 있고, 교환가능한 존재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다.  57


편의점의 계산대에서는 말도 필요 없고 얼굴도 필요 없다. 표시된 금액을 확인하고 지갑에서 돈만 꺼내면 된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오가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능적 언어일 뿐이다. 점원이 고객의 얼굴과 이름을 모르듯(기억하지 않듯) 고객도 점원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얼굴과 이름은 순수한 상품교환에는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익명의 소비자. 이제껏 존재한 적이 없는 집단이다. 하지만 출현한 후에는 역설적이게도 다른 소비자와의 차별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인간이란 원래 타인과의 차별화를 원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애당초 차별의 지표는 개개인의 개성이어야 하지만, 익명의 소비자에게는 돈의 많고 적음만이 차별의 지표가 된다. 돈이 있는지 없는지 또는 씀씀이가 좋은지 아닌지가 다른 소비자와의 차이를 만들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58


소비화의 과정을 다른 말로 바꾸면 도시화의 과정이다.

도시 자체는 익명을 전제로 이루어져 있다.  59



세계 각국은 저마다 발전 단계가 다르고,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가 존재하며, 서로 다른 가치관이 공존하기 때문에 이른바 글로벌 표준을 적용한다는 것은 결코 공평하지도 않거니와 합리적이지도 않다.  116


따지고 보면 국가도 인간이 생존전략상 선택한 창조된 허구라고 할 수 있다. 소위 근대 국민국가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 프랑스어로 작성된 평화조약으로 '국제법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을 계기로 탄생했다.

그 이전의 30년간 유럽의 봉건 영주들은 영토를 둘러싸고 쉼 없이 분쟁을 일으켰다(30년 전쟁). 봉건 영주들이 유럽 안에 뒤얽힌 영지의 지분을 다투고 영주가 사망할 때마다 서로 간여하다 보니 더 이상은 수습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30년 동안이나 같은 일을 겪은 끝에 봉건 영주들도 지칠 대로 지쳐 두 손을 들고 협상한 것이 베스트팔렌 조약이다. 영토를 확정해 국가를 만들고, 그 안에서 일어난 일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내정간섭 불가에 관한 규칙을 정한 것이다. 그래야 서로 살 수 있다는 생존전략에 따른 판단이었다.

그 결과 국가는 전쟁을 치를 이유가 없어졌고, 자국 산업 육성의 기운이 싹텄다. 그러다 보니 자유무역보다는 관세장벽을 만든느 편이 국가에 더 이익이 되었는데, 그 장벽이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을 펼치는 기업에게는 그야말로 장애물로 작용했다.  119-120


인구란 기업에게는 시장 그 자체이며, 이익의 원천이다. 인구감소는 시장의 축소를 뜻한다. 시장이 축소되면 경제성장은 지속적 상향 곡선을 그릴 수 없다. 인류는 역사상 한 번도 그 같은 사태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런데 유렵과 일본 같은 선진국에서 인구가 줄기 시작했다. 이런 사회적 축소 현상은 주식회사 시스템의 존망 및 생존과 관련되는 문제다. 그래서 기업들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살아남기 이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것이다.  122-123


초조해진 기업들이 내세운 전략 중 하나가 국가라는 틀을 깨고 시장을 재구성하겠다는 발상이다. 전 세계를 다시 한 번 휘저으면 주식회사라는 체제가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봤을때 세계는 아직 인구 증대 국면에 있기 때문이다.  123


기업의 국가 점령은 리먼 사태 이후 미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라는 엄청난 사기성 '상품'으로 인해 세계 경제르 위기로 몰아넣은 금융업계의 수장들은 누구 하나 형사상 기소되지 않았다. 버보가 정의를 중시하는 미국에서 흔치 않은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진 뒤, 그 엄청난 국부를 탕진하고도 당사자인 도쿄전력엣 누구 하나 체포된 사람이 없었다. 리먼 사태가 터졌을 때 '너무 커서 무너뜨릴 수 없는' 기업이 국고 지출을 통해 구제되는 것을 보고 미국 사회의 병리가 현실로 드러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125


인류 역사에 있어서 진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결과적으로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진보의 유통기한이 다 되어가는 모양이다. 그것이 거대한 문명사의 현대적 의미다. 이미 과학기술의 진보도 마냥 반가운 일만은 아니게 되었다. 사람들은 점점 갈 곳을 잃는다. 이름 없는 소비자로서 그저 기업을 살찌우기 위해, 새장 속의 통닭 같은 존재가 되어 돈을 쓰고 기업의 이익을 창출시킨다. 

이런 구도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탈소비자'를 지향하는 길이다.  127


미국은 소비문화로 상징되는 사회다.

소비문화의 핵심은 소비자 개개인이 익명의 존재라는 점이다. 거대한 소비자 집단을 필요로 하는 생산자에게 소비자는 그저 숫자로서의 의미만 가진다.

소비자 측도 서로의 입장을 특징짓는 지표, 기호로서 돈과 브랜드에만 주목한다. 소비사회는 거대 기업이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사회다. 그런데 소비자도 자진해서 소비사회를 희망한 측면이 있다. 여러번 언급했다시피 소비사회 이전의 사회는 지연이나 혈연에 얽매이는 성가시고 자유롭지 않은 사회였기 때문에 지갑만 있으면 자유로운 삶이 가능한 사회에 대한 기대가 높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익명의 소비사회에서는 얼굴이 있는 인간관계는 경시된다. 상대가 가난하지만 재미있는 사람이니까 만난다는 관계성이 예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돈이 있으면 유능한 인간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능하고 존재가치 없는 사람으로 분류된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상식이지만 사람들은 비상식일지라도 편한 설정을 믿으려 한다.  146-147


거기서 벗어나려면 소비자가 현명해지는 수밖에 없다. 무조건 싼 상품을 원하는 성향이 터무니없는 사기사회를 만든다.(PB수법, 위약금제도, 회원가입 등) 따져보면 싸지도 않다. 싸게 보일 뿐이다.  174


사기에 가까운 상술이 횡행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시장이 포화상태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 없는 물건까지 억지로 사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시장이 축소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장곡선을 그리던 과거를 지향하기 때문에 기업 간 경쟁은 날로 치열해진다. 그래서 기업은 쪼그라드는 시장 안에 또 새로운 시장을 만든다. 그것이 바로 '시장 창조'다. 없어도 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는 물건을 소비자의 욕망을 자극해 사게 하는 것이 시장 창조인 셈이다. 그러니 사기에 가까운 요소가 포함될 수밖에 없다. 정직하게 판매해서는 소비욕이 환기될 리 없기 때문이다.

소비자도 문제다. 대기업의 수법에 고스란히 속아 넘어가면서도 아무 문제의식 없이 카드를 긁어 빚을 내면서까지 물건을 사들인다.  175


유익성만이 인간 사회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무익하더라도 아니, 지금 당장에는 무익하더라도 사람이 위해서는 필요한 자양분이라는 것이 있다.  177


철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이 말했듯, 인간이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다...

문제는 인간이 남과 같아지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타인과 다르기를 원하는 모순된 존재라는 데 있다...

타인을 욕망함과 동시에 타인의 욕망이 되기를 욕망하고, 자신은 또 다른 물건을 탐내는, 이런 모순된 욕망 구조가 소비사회를 쉬지 않고 달리게 한다. 그 같은 욕망은 아무도 제어할 수 없기에 그 욕망을 채우는 것만이 삶의 목적이라고 믿는 인간은 점점 늘어난다.  179


사기 같은 상술에 기대는 기업이 겁내는 것은 소비자의 불매운동이다. 소비자의 행동에는 기업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184


우리는 생활 속에서 가치관을 바꿈으로써 소비행태를 바꿀 수 있다.  192


중요한 것은 돈벌이가 아니라 살아가기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살기 위한 전략으로 '탈소비자'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193


동네 가게를 소중하게 여기자는 생각이 싹트면 직접 그 가게를 이용함으로써 소비행태를 조금씩 바꾸어보는 것이다. '스팬드 시프트'를 일으키자는 얘기다.  194


현재의 상품경제 속에서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성립되는 증여경제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196


근대화란 오로지 쾌적함을 찾아 소비생활을 영위하는 과정이었다. 쾌적함이란 '변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요로 다케시 교수는 말했다. 원래는 더워졌다 추워졌다 해야 정상인데 인간은 석유를 펑펑 태워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한다. 인위적으로 질서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202


'경제성장을 하지 않는 사회'를 재설계하는 것만이 우리 사회에 남은 유일한 해결책이다. 경제성장이라는 지표로 세상을 바라보면 효율이 떨어지는 것들은 도태되어야만 한다.  206


인간이 불안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미래가 지금보다 나빠질 것 같은 조짐이 보이기 때문이다. 미래가 지금과 같다면 지루할지는 몰라도 신경증적 불안에 빠지는 일은 없다...

사람은 욕심이 많은 존재다. 주변에 욕망을 오나전 긍정하는 소비문화가 있으면 평온한 삶에 만족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욕망을 내려 놓기 위해 주변에 새로운 풍경을 만들 수는 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든다기보다 이미 있는 것에 만족하는 습관을 기른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는 자신의 신체와 자연으로 눈을 돌리면 된다...

실마리는 자기 주변에 있다. 지금 가진 무언가를 내려놓으면 틀림없이 가까운 곳에 숨어 있는 풍요로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10-211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극복하려면 우선은 진보와 진화라는 개념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그것이 구조주의(structuralism, 수학, 언어학, 생물학, 정신분석학, 문화인류학, 사회학 등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친 20세기 철학 사조. 모든 현상은 근본 요소들의 상호관계 위에 언어적, 사회적, 문화적 '구조'가 성립하며 그 구조를 통해 개인과 사회, 문화의 의미가 생산된다는 주의)자들이 밝혀낸 성과다. 구조주의자의 대표 주자인 레비스트로스는 근대사회와 부족사회를 각각 '뜨거운 사회'와 '차가운 사회'라 불렀다. 근대인은 물이 끓듯 사회가 진보, 발전을 거듭하는 뜨거운 사회를 살았다. 한편 미개 부족사회처럼 오랜 세월 동안 변치 않는 순화형 차가운 사회도 지구상에는 존재했다. 

근대화, 또는 산업혁명 이후 근대인은 진보를 옳다고 여기는 사회를 살아왔다. 그 귀결로 공동체는 무너졌고, 개인이 사회의 구성단위로 등장했으며, 돈이 사회를 살아가는 안전망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종국에는 가족을 만들지 않고 사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저출산 현상이 그것이다. 

저춣산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는 현상만 지적할 것이 아니라 개인이 혼자서도 살 수 있게 된 결과 가족을 만들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19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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