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소비자본주의가 전성기를 맞은 지금, 소비에 관해 정면으로 부딪히며 따져보고, 생각한 바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나는 당초 예상보다 훨씬 많은 변화를 실감했다.  9



사람은 무언가 물건을 보고 그것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야 소비를 하게 된다. 무슨 물건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면 사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 법이다.  19


먹고사는 데 돈을 쓰는 행위를 '소비'라 불러야 할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고 이 책에서 말하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소비'는 살아가는 데 굳이 필요하지 않은 무언가를 원하고 그런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돈을 벌어서 쓰는 행위를 가리킨다.  21


적어도 나는 '빈자는 아름답고, 부자는 저속하다'는 가치관 속에서 자랐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가난한 사람이 멸시 받는 세상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 같은 변화는 누군가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니다. 누군가의 지시도 아닌데 마치 종교를 바꾸기라도 하듯 사람들의 가치관은 극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24


최근에는 노동자도 물건을 생산하기보다는 자신을 얼마나 비싼 값에 팔 것인가, 즉 자신을 소비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강하다....

핵심은 돈이 가장 중요해졌다는 것.  26


돈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물론 입증할 수 있는 이론은 아니다. 다만 세상을 살아가는 근거가 되는 신앙 내지 신념 같은 것이다. 이런 신념은 극도로 경쟁적이고 야박해지는 세상의 변화를 막을 수 있다. 또 조금이나마 신중하게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해준다. 생활에 규범과 기준이라는 것을 제공한다는 얘기다.  27


쇼핑몰에는 매일 상품이 쌓인다. 오늘날의 소비자들은 바로 그곳에서 필요도 없는 물건까지 사도록 부추김을 당한다. 똑같이 필요 없는 물건이라 할지라도 우리 어머니의 경우와 현대 소비자의 경우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어머니에게 그것은 이차적인 행위이고, 상점가 사람들과의 친밀감이 우선이었으나 현대 소비자의 소비는 공허한 욕망을 물건으로 채우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 소비는 채워지지 않는 생활을 반영하며 한편으론 정신적인 허기를 채우기 위한 보상행위로 변질된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이 소비병에서 탈출해야 한다.  29


어떤 의미에서는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유일한 답일지도 모른다. 대단히 어렵겠지만 소비 사회에 일격을 가하고, 거기서 탈피하기 위해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32


'스펜드 시프트(spend shift, 소비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 경제위기와 재해 등을 겪으면서 과거보다 지역과 공동체를 더 윤택하게 하고, 유대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데 가치곤을 두는 방향으로 소비와 생활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는 개념이다.)'다. 선책하는 물건을 바꾸고, 사는 장소를 바꾸며, 사는 행위와 관련된 모든 것을 바꾸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소비가 가진 근본적 문제를 뿌리째 뽑아버리는 것이 스펜드 시프트이다.  33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를 따져보면 반드시 사야하는 물건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34


전에는 돈 쓰는 일이 악덕이었으나 서서히 미덕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악이 정의로 변하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변화다. 바로 거기서부터 '소비화'의 물결이 단숨에 밀려든 것이다.  44


돈의 최대 특징은 교환가치만 있을 뿐 사용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돈의 가치를 과도하게 중시하는 사회는 돈의 특징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요구된다. 한마디로 유동성 선호 현상에 지배되는 사회라는 말이다. 언제든지 쉽게 이동할 수 있고, 교환가능한 존재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다.  57


편의점의 계산대에서는 말도 필요 없고 얼굴도 필요 없다. 표시된 금액을 확인하고 지갑에서 돈만 꺼내면 된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오가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능적 언어일 뿐이다. 점원이 고객의 얼굴과 이름을 모르듯(기억하지 않듯) 고객도 점원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얼굴과 이름은 순수한 상품교환에는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익명의 소비자. 이제껏 존재한 적이 없는 집단이다. 하지만 출현한 후에는 역설적이게도 다른 소비자와의 차별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인간이란 원래 타인과의 차별화를 원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애당초 차별의 지표는 개개인의 개성이어야 하지만, 익명의 소비자에게는 돈의 많고 적음만이 차별의 지표가 된다. 돈이 있는지 없는지 또는 씀씀이가 좋은지 아닌지가 다른 소비자와의 차이를 만들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58


소비화의 과정을 다른 말로 바꾸면 도시화의 과정이다.

도시 자체는 익명을 전제로 이루어져 있다.  59



세계 각국은 저마다 발전 단계가 다르고,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가 존재하며, 서로 다른 가치관이 공존하기 때문에 이른바 글로벌 표준을 적용한다는 것은 결코 공평하지도 않거니와 합리적이지도 않다.  116


따지고 보면 국가도 인간이 생존전략상 선택한 창조된 허구라고 할 수 있다. 소위 근대 국민국가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 프랑스어로 작성된 평화조약으로 '국제법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을 계기로 탄생했다.

그 이전의 30년간 유럽의 봉건 영주들은 영토를 둘러싸고 쉼 없이 분쟁을 일으켰다(30년 전쟁). 봉건 영주들이 유럽 안에 뒤얽힌 영지의 지분을 다투고 영주가 사망할 때마다 서로 간여하다 보니 더 이상은 수습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30년 동안이나 같은 일을 겪은 끝에 봉건 영주들도 지칠 대로 지쳐 두 손을 들고 협상한 것이 베스트팔렌 조약이다. 영토를 확정해 국가를 만들고, 그 안에서 일어난 일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내정간섭 불가에 관한 규칙을 정한 것이다. 그래야 서로 살 수 있다는 생존전략에 따른 판단이었다.

그 결과 국가는 전쟁을 치를 이유가 없어졌고, 자국 산업 육성의 기운이 싹텄다. 그러다 보니 자유무역보다는 관세장벽을 만든느 편이 국가에 더 이익이 되었는데, 그 장벽이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을 펼치는 기업에게는 그야말로 장애물로 작용했다.  119-120


인구란 기업에게는 시장 그 자체이며, 이익의 원천이다. 인구감소는 시장의 축소를 뜻한다. 시장이 축소되면 경제성장은 지속적 상향 곡선을 그릴 수 없다. 인류는 역사상 한 번도 그 같은 사태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런데 유렵과 일본 같은 선진국에서 인구가 줄기 시작했다. 이런 사회적 축소 현상은 주식회사 시스템의 존망 및 생존과 관련되는 문제다. 그래서 기업들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살아남기 이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것이다.  122-123


초조해진 기업들이 내세운 전략 중 하나가 국가라는 틀을 깨고 시장을 재구성하겠다는 발상이다. 전 세계를 다시 한 번 휘저으면 주식회사라는 체제가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봤을때 세계는 아직 인구 증대 국면에 있기 때문이다.  123


기업의 국가 점령은 리먼 사태 이후 미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라는 엄청난 사기성 '상품'으로 인해 세계 경제르 위기로 몰아넣은 금융업계의 수장들은 누구 하나 형사상 기소되지 않았다. 버보가 정의를 중시하는 미국에서 흔치 않은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진 뒤, 그 엄청난 국부를 탕진하고도 당사자인 도쿄전력엣 누구 하나 체포된 사람이 없었다. 리먼 사태가 터졌을 때 '너무 커서 무너뜨릴 수 없는' 기업이 국고 지출을 통해 구제되는 것을 보고 미국 사회의 병리가 현실로 드러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125


인류 역사에 있어서 진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결과적으로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진보의 유통기한이 다 되어가는 모양이다. 그것이 거대한 문명사의 현대적 의미다. 이미 과학기술의 진보도 마냥 반가운 일만은 아니게 되었다. 사람들은 점점 갈 곳을 잃는다. 이름 없는 소비자로서 그저 기업을 살찌우기 위해, 새장 속의 통닭 같은 존재가 되어 돈을 쓰고 기업의 이익을 창출시킨다. 

이런 구도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탈소비자'를 지향하는 길이다.  127


미국은 소비문화로 상징되는 사회다.

소비문화의 핵심은 소비자 개개인이 익명의 존재라는 점이다. 거대한 소비자 집단을 필요로 하는 생산자에게 소비자는 그저 숫자로서의 의미만 가진다.

소비자 측도 서로의 입장을 특징짓는 지표, 기호로서 돈과 브랜드에만 주목한다. 소비사회는 거대 기업이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사회다. 그런데 소비자도 자진해서 소비사회를 희망한 측면이 있다. 여러번 언급했다시피 소비사회 이전의 사회는 지연이나 혈연에 얽매이는 성가시고 자유롭지 않은 사회였기 때문에 지갑만 있으면 자유로운 삶이 가능한 사회에 대한 기대가 높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익명의 소비사회에서는 얼굴이 있는 인간관계는 경시된다. 상대가 가난하지만 재미있는 사람이니까 만난다는 관계성이 예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돈이 있으면 유능한 인간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능하고 존재가치 없는 사람으로 분류된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상식이지만 사람들은 비상식일지라도 편한 설정을 믿으려 한다.  146-147


거기서 벗어나려면 소비자가 현명해지는 수밖에 없다. 무조건 싼 상품을 원하는 성향이 터무니없는 사기사회를 만든다.(PB수법, 위약금제도, 회원가입 등) 따져보면 싸지도 않다. 싸게 보일 뿐이다.  174


사기에 가까운 상술이 횡행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시장이 포화상태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 없는 물건까지 억지로 사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시장이 축소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장곡선을 그리던 과거를 지향하기 때문에 기업 간 경쟁은 날로 치열해진다. 그래서 기업은 쪼그라드는 시장 안에 또 새로운 시장을 만든다. 그것이 바로 '시장 창조'다. 없어도 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는 물건을 소비자의 욕망을 자극해 사게 하는 것이 시장 창조인 셈이다. 그러니 사기에 가까운 요소가 포함될 수밖에 없다. 정직하게 판매해서는 소비욕이 환기될 리 없기 때문이다.

소비자도 문제다. 대기업의 수법에 고스란히 속아 넘어가면서도 아무 문제의식 없이 카드를 긁어 빚을 내면서까지 물건을 사들인다.  175


유익성만이 인간 사회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무익하더라도 아니, 지금 당장에는 무익하더라도 사람이 위해서는 필요한 자양분이라는 것이 있다.  177


철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이 말했듯, 인간이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다...

문제는 인간이 남과 같아지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타인과 다르기를 원하는 모순된 존재라는 데 있다...

타인을 욕망함과 동시에 타인의 욕망이 되기를 욕망하고, 자신은 또 다른 물건을 탐내는, 이런 모순된 욕망 구조가 소비사회를 쉬지 않고 달리게 한다. 그 같은 욕망은 아무도 제어할 수 없기에 그 욕망을 채우는 것만이 삶의 목적이라고 믿는 인간은 점점 늘어난다.  179


사기 같은 상술에 기대는 기업이 겁내는 것은 소비자의 불매운동이다. 소비자의 행동에는 기업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184


우리는 생활 속에서 가치관을 바꿈으로써 소비행태를 바꿀 수 있다.  192


중요한 것은 돈벌이가 아니라 살아가기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살기 위한 전략으로 '탈소비자'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193


동네 가게를 소중하게 여기자는 생각이 싹트면 직접 그 가게를 이용함으로써 소비행태를 조금씩 바꾸어보는 것이다. '스팬드 시프트'를 일으키자는 얘기다.  194


현재의 상품경제 속에서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성립되는 증여경제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196


근대화란 오로지 쾌적함을 찾아 소비생활을 영위하는 과정이었다. 쾌적함이란 '변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요로 다케시 교수는 말했다. 원래는 더워졌다 추워졌다 해야 정상인데 인간은 석유를 펑펑 태워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한다. 인위적으로 질서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202


'경제성장을 하지 않는 사회'를 재설계하는 것만이 우리 사회에 남은 유일한 해결책이다. 경제성장이라는 지표로 세상을 바라보면 효율이 떨어지는 것들은 도태되어야만 한다.  206


인간이 불안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미래가 지금보다 나빠질 것 같은 조짐이 보이기 때문이다. 미래가 지금과 같다면 지루할지는 몰라도 신경증적 불안에 빠지는 일은 없다...

사람은 욕심이 많은 존재다. 주변에 욕망을 오나전 긍정하는 소비문화가 있으면 평온한 삶에 만족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욕망을 내려 놓기 위해 주변에 새로운 풍경을 만들 수는 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든다기보다 이미 있는 것에 만족하는 습관을 기른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는 자신의 신체와 자연으로 눈을 돌리면 된다...

실마리는 자기 주변에 있다. 지금 가진 무언가를 내려놓으면 틀림없이 가까운 곳에 숨어 있는 풍요로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10-211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극복하려면 우선은 진보와 진화라는 개념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그것이 구조주의(structuralism, 수학, 언어학, 생물학, 정신분석학, 문화인류학, 사회학 등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친 20세기 철학 사조. 모든 현상은 근본 요소들의 상호관계 위에 언어적, 사회적, 문화적 '구조'가 성립하며 그 구조를 통해 개인과 사회, 문화의 의미가 생산된다는 주의)자들이 밝혀낸 성과다. 구조주의자의 대표 주자인 레비스트로스는 근대사회와 부족사회를 각각 '뜨거운 사회'와 '차가운 사회'라 불렀다. 근대인은 물이 끓듯 사회가 진보, 발전을 거듭하는 뜨거운 사회를 살았다. 한편 미개 부족사회처럼 오랜 세월 동안 변치 않는 순화형 차가운 사회도 지구상에는 존재했다. 

근대화, 또는 산업혁명 이후 근대인은 진보를 옳다고 여기는 사회를 살아왔다. 그 귀결로 공동체는 무너졌고, 개인이 사회의 구성단위로 등장했으며, 돈이 사회를 살아가는 안전망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종국에는 가족을 만들지 않고 사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저출산 현상이 그것이다. 

저춣산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는 현상만 지적할 것이 아니라 개인이 혼자서도 살 수 있게 된 결과 가족을 만들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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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인들이 사는 섬은, 중앙이 너비 2백 마일로 가장 넓고, 양쪽 끝 부분이 가장 좁습니다. 섬 전체가 5백 마일의 곡선을 그리며, 양쪽 끝이 서로 가까이 마주하고 있어서 초승달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11마일쯤 서로 떨어져 있는 초승달의 양쪽 끝 부분 사이로 바닷물이 들어와서 넓은 만이 형성되어 있지요.  81


이 섬에는 규모가 크고 웅장한 도시가 모두 쉰네 개가 있는데, 언어와 관습과 제도와 법이 모두 동일합니다. 지리적인 여견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모든 도시들이 동일한 설계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외양도 동일합니다.  83


10년마다 추첨을 통해서 집을 바꿉니다.  89


이 나라 사람들이 입는 옷은, 남녀의 차이와 기혼과 미혼의 차이를 제외하면 수백 년이 지나오도록 스타일이 같습니다. 옷이 멋있으면서도 몸동작에 방해가 되지 않고 날씨가 덥거나 춥거나 입을 수 있는, 각자 집에서 만드어 입을 수 있다는 좋은 점도 있습니다.  92-93


유토피아 사람들은 하루 스물네 시간 중 여섯 시간만 일을 합니다.  93


유토피아 사람들은 단 한 벌의 망토로 만족해하며, 그걸로 대개 2년 동안 입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유용한 직종에서 일을 하고 아무도 과소비를 하지 않아서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99


모든 피조물이 탐욕스러워지는 것은 결핍에 대한 공포 때문입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자만심 때문에, 소유의 과시로 타인을 제압하는 것에서 승리를 맛보는 자만심 때문에 탐욕스러워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악덕은 유토피아의 생활 양식에서는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습니다.  102


뉴토피아인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별도 볼 수 있고 태양도 볼 수 있는데 어찌하여 작은 보석이나 밝은 돌조각이 발하는 약한 광채를 보고 기뻐하는지 불가사의해합니다. 특별히 좋은 양모로 만든 옷을 입고 있다는 이유로 자신이 남들보다 더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어리석음에는 경악합니다. 양모가 아무리 곱다고 해도 한때는 양이 걸쳤던 것이고 지금도 여전히 무용한 물품인 금은 어디에서나 하도 높은 가치를 부여받아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금에 이러한 가치를 부여한 인간 자신은 이제 금보다 가치가 훨씬 적다는 사실에 이 사람들은 놀라워합니다. 어리석은 것에 못지않게 부정직한 데다 나무토막 같은 두뇌를 가진 멍청이가 어쩌다가 막대한 양의 금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현자와 선인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을 이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만약 이 멍청이가(뜻밖에 당하거나 혹은, 법이란 운과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반전을 초래할 수 있으니까, 법적인 사기에 휘말려) 문중에서 가장 비열한 악당에게 전 재산을 빼앗기게 되면,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이 금전에 부착되어 있었고 금전을 따라 움직이는 부속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즉시 악당의 하인들중의 하나가 된다니요. 이보다 더욱 유토피아인들을 경악시키는 것은 부자에게 빚을 진것도 없고 아무런 의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자를 거의 숭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숭배자들이 감격해하는 것은 단순히 상대가 부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부자란 지독히 인색하고 욕심이 많아서 살아생전에는 자신이 쌓아 놓은 돈더미에서 단돈 한 푼도 절대로 남의 손에 들어가게 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유토피아인들의 사고방식과 태도는 그러한 어리석음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사회제도 내에서의 성정과 교육과 좋은 독서를 통하여 얻어진 것입니다. 각 도시에서 노동을 면제받고 학문에만 몰두하도록 지정되는 사람들의 수효는 비록 많지 않지만(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두뇌와 학문에의 헌신을 보여 준 사람들입니다), 이 나라에서는 모든 아이드이 좋은 책을 접할 기회를 가지며,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녀 모두 일생 동안 여가 시간을 독서로 보냅니다.  1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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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포.

"대충 설명하자면 한 사물을 다른 사무로가 비교하면서 말하는 방법이지."  27


"우연이 아닌 이미지는 없어."  31


"선생님, 저 사랑에 빠졌습니다."

"별 심각한 일은 아니군. 다 치료법이 있으니까."

"치료법이라고요? 치료법이 있다 해도 차라리 아프고 말겠어요. 사랑에 푹 빠져버렸단 말이에요."  41


"번드르르한 말처럼 사악한 마약은없어."  63


"네 젖통이 어루만지고 싶은 두 마리 비둘기가 될 거고, 네 젖꼭지는 물오른 머루 두 알, 혀는 신들의 포근한 양탄자, 엉덩짝은 범선 돛, 그리고 지금 네 사타구니 사이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는 고것은 사내들의 그 잘난 쇠몽둥이를 달구는 혹옥 화로가 될걸! 퍼질러 잠이나 자!"  67


"내가 편지 읽는 것보다 자네가 쪽지 읽는 게 더 오래 걸리는군."

"장모님은 글을 읽는 게 아니라 삼켜버리잖아요. 글이란 음미해야 하는 거예요. 입 안에서 스르르 녹게 해야죠."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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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11


에이드리언..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에서 그는 검시관에게 자신의 자살 이유를 설명해놓았다. 그는 삶이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된 선물이며, 사유하는 자는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88


에이드리언.. 그는 논리적으로 사고했고, 논리적 사고로 도출한 결론에 따라 행동했다. 반면 우리 대부분은, 정반대로 행동하는 것 같다. 우리는 충동적으로 결정한 다음, 그 결정을 정당화할 논거의 하부구조를 세운다. 그런후,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를 상식이라고 말한다.  95


에이드리언이 줄곧 인용했던 말이 무엇이었나? '역사는 ㅂ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106


어쩌면 나는 대략 합의하에 결정된 역사가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전과 똑같은 역설이거나. 즉, 바로 우리 코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가 가장 분명해야 함에도 그와 동시에 가장 가변적이라는 것.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그것은 우리를 제한하고 규정하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측량하게 돼 있다. 안 그런가? 그러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속도와 진전에 깃든 수수께끼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역사를 어찌 파악한단 말인가. 심지어 우리 자신의 소소하고 사적이고 기록되지 않은 것이 태반인 그 단편들을.  106-107


살아갈 날이 줄어들수록 헛되이 살고 싶지 않게 된다.  120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165


'축적의 문제'라고 에이드리언은 썼었다. 축적의 문제. 어떤 말에 돈을 걸고, 그 말이 이기면, 그 상금을 다음번 경기의 다음번 말에게 건다. 이런 식으로 승리는 축적된다. 그렇다면 패배도 축적되는 걸까? 경마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저 첫 번째 노름 밑천을 잃을 뿐이다. 그렇다면 인생에서는? 다른 법칙을 적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한 관계에 승부를 걸었으나 실패로 끝난다. 계속해서 다음번 관계에서도 실패하고 만다. 이때 잃는 건 단순히 두 번 뺄셈을 하고 난 값이 아니라, 우리가 내걸었던 것의 배수이다. 아무튼 그런 기분일 것이다. 인생은 단순히 더하고 빼는 문제가 아니다. 상실의, 혹은 실패의 축적과 곱셈이다.  180-181



옮긴이의 말 - 예감하지 못하는 모든 평범한 이들을 위한 서글픈 면죄부


왜곡이 본질인 기억과 우연과 무상성이 본질인 시간의 담합이 만들어낸 파국이 아닐 수 없다.  264


젊은 시절, 토니는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 했지만, 노년에 이르러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고 번복한다.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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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서문 - 복종할 것인가. 자유로울 것인가

"먹고살아야 한다"는 그 말은 얼마나 자주 우리를 악마와의 거래로 인도했던가.  7


자발적 복종이라는 병균을 담은 물.. 대체 언제부터 이 검은 물은 우리의 발밑으로 밀려오기 시작한 것일까?

그 원죄는 우리가 한 번도 깨끗이 밀어내지 못한 유교적 봉건적 질서에서 찾을 수 있다.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고, '홍익인간(弘益人間)'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건구이념을 가졌던 이 나라. 그러나 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한 이성계가 나라를 지배할 사상적 무기로 유교사상을 택한 후 무려 5백여 년간 충과 효가 결합되고 사농공상(士農工商)과 삼강오륜(三綱五倫)이 뒤범벅되어 빚어낸 옹골진 수직의 질서가 우리의 삶에 고착된다. 

20세기에 이르러 마침매 붕괴되고 만 이 봉건의 질서를 대신한 것은 일제 35년, 이 치욕의 시절과 해방 이후 친일파들에게 다시 권력을 맡기게 된 치명적 역사의 오류는 기회주의가 가장 현명한 삶의 해법임을, 힘 있는 자 밑에 엎드려 마름 노릇을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생존의 전략임을 제대로 주입했다. 

그리고 철저하게 일제의 충성스러운 개로 살았던 자가 18년간 이 땅에서 총칼로 휘둘렀던 독재 시절, 우리는 공포에 장악되었다. 자유, 평등, 정의 따위는 '개발'과 '반공'의 불도저로 밀어버렸고, 순응하지 않는 살마들은 의문의 죽음을 맞거나 먼 곳으로 유배당한다. 박정희 독재를 잇는 또 다른 군부의 독재는 피와 땀을 거리에 뿌린 시민의 힘으로 극복되었으나, 이번에는 자본의 독재가 우리를 삼켜버렸다. 

20세기 말 한국사회를 점령한 외환위기는 한국인들을 더 내려갈 곳이 없을 것만큼 완벽하게 바닥에 주자앉혔다. 상점을 지키는 젊은 처자들의 목소리가 공장에서 태엽이 감겨 나온 장난감들의 음성을 똑같이 내고 있는 것을 목격했을 때, 정신적인 노예화가 우리의 육체까지 변형시켜버렸음을 알 수 있었다.  8-9


천민자본주의이 최첨단 국가로 브레이크 없는 질주가 가속화되던 끝에, 자서성가한 부자라는 매력을 높이 평가받으며 이명박이 새 지도자로 당선되었고, 그가 자신의 재주를 오로지 자신의 배를 불리는 데 쓰고 권좌를 유유히 내려가는 것을 지켜봤다. 그리곤 유신(維新)의 딸이 다시 청와대로 들어간다. 박근혜의 청와대 입성은 한국인의 머릿속에 '정의는 없다'라고 명확히 각인시키는 사건이었다.  10


2014년 4월 16일,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많은 아이들을 포함한 3백여 명이 거대한 배와 함께 서서히 수장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린 비로소 후최해온 모든 세월을 한꺼번에 보상받고, 시대를 배반하고 국민을 유린한 자들을 심판해야 할 시간이 왔다고 느꼈다. 함께 분노했고, 함께 절규했다. 아이들을 속수무책으로 떠나보낸 부모들은 회유와 협박 앞에서 굳건했다. 단호하게 오직 진실을 알 것을 권력에게 요구했던 그들은 아직 고개를 똑바로 들고 두 발로 선 사람들의 중심이 되어, 거짓으로 뒤덮인 양아치 권력집단에 맞섰다. 

그러자 그들 앞을 겹겹이 가로막고 나선 건 자발적으로 복종한 자들이었다. "너희가 노예임을 잊었냐, 당신들이 뭔데 진실을 원한단 말이냐. 감히 어디서 정의를 말하냐.."고 그들은 유족들을 꾸짖으며 상상을 초월한 행패를 자행한다. 이후 언론은 정해진 수순처럼 유족들의 얼굴을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발목에 찰랑이던 검은 물은 이제 무릎을 넘어 배꼽까지 차올랐다.  12-13


지난해 12월, 대한항공의 '땅콩회항' 사건에서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동료를 대신해 오너의 딸의 행패에 원칙대로 대응한 사무장을 지지하기 위한 대한항공 동료들의 그 어떤 집단행동도 없었다는 것이다. 오너 일가가 행해온 그간의 만행을 일거에 바로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대한항공 직원들은 깊이 침묵하며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발길에 차이고 짓밟혀도 더 굳건한 충성을 바칠 뿐이라면, 계속 밟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오늘의 위상을 만든 것은 바로 복종해온 그들 자신이었다. 

이 사건을 화제에 올렸던 모든 대화에서 프랑스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대목은, 대한항공 직원들은 왜 지금까지 그런 행동을 받아들였는가였고, 홀로 회사와 맞서게 된 사무장을 지지하기 위한 파업이 없다는 지점에서 그들은 바로 그 해답을 찾았다. 한국판 재벌 자본주의가 빚어낸 이 슬픈 우화에 등장하는 인물 중 단 한 사람, 박창진 사무장은 방송에서 이렇게 말을 했다. 

"내가 이 싸움에 나서는 건.. 나의 존엄을 내가 지키기 위해서다."  13-14


자유인이 되는 것, 노예의 삶을 벗어나는 것은 의외로 쉽다. 나의 존엄을 내 손으로 지키기만 하면, 내 모든 권리와 자유를 압류했다고 착각하는 권력자에게 굴종하지 않으면 된다. 내가 고객이라는 이유로 진상을 부리지 않고, 소비로 점철되는 삶을 거부하는 것.  15


라 보에시의 <자발적 복종>이 처음 세상에 나온 것은 16세기였다. 18세 청년의 손에서 나온 이 짧은 글이 오늘까지 생생하게 살아남아, 현대사회의 모순을 해석ㅎ는 데 핵심적인 영감을 주는 언설로 남아 있다는 사실. 그것은 불행하게도 인류가 여전히 자발적 복종의 자세에서 자신들을 지배해줄 독재자를 기다리는 일을 되풀이해왔음을 증명한다. 굴종의 독배를 기꺼이 들이켜며, 지배자가 너무 멀리 가면 새로운 지배자를 맞이해왔던 사람들.  16


자유를 애써 쟁취하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이 주어져도 참기 힘들어하는 민중은 끊임없이 독재와 파시즘의 출현을 허락한다. 거기에 인류의 비극이 있다.  24


라 보에시가 말하는 복종의 가장 큰 이유는 '습관'이다. 그리고 자유에 대한 '망각'이다. 자유를 누려보지 못한채 이미 모든 선택이 차단되고 종속이 일상화된 상태를 받아들이는 부모의 밑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자유를 알지 못한다. 누려보지 못한 것을 갈망할 수는 없는 노릇. 그 세대는 처음부터 종속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많은 사람들은 복종이 강요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복종은 자발적으로 이뤄진다.  25


자발적 복종이 작동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자유를 잃은 사람들이 용기도 함께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자유를 잃은 자는 존엄과 자존도 함께 상실한다. 당연히 그들은 고통스럽지 않게 비굴 모드를 취하게 된다...노예의 삶을 받아들이는 한 삶의 그 무엇도 절실할 수 없다. 삶은 그저 살아내야 하는 고통의 과정일 뿐이다. 인생의 계획자도 실행자도 아니다. 거대한 기계를 굴리기 위해 박혀 있는 나사 하나에 불과하다.  27-28




복종, 인간의 놀라운 악습


독재자의 권력이란 그 권력에 종속된 다른 모든 이들이 그에게 건네준 힘일 뿐이다. 다른 모든 이들이 독재자를 참고 견디는 한, 그의 권력이 부리는 횡포는 계속될 것이다. 사람들이 독재자에게 저항하지 않더라도, 단지 견뎌내기를 멈추기만해도, 독재자는 더 이상 그들에게 어떤 해악도 끼칠 수 없다.  36-37


두 명이나 서너 명이 한 명을 대적하지 못한다면 좀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치부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용기가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백 명, 1천 명이 단 한 명 때문에 괴로움을 감수한다면 그들은 그 한 사람에게 저항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하기보다 감히 대적해보려는 의사 자체가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에게는 비겁함이 아니라 굴욕이나 경멸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40-41



자유,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목록


나는 사람들이 소유하길 희망하는 재산의 목록에서 한 가지가 늘 빠져 있음을 목격한다.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이 본질적인 욕망의 목록에서 어떻게 그것이 빠질 수 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바로 '자유'다. 

우리가 자유를 잃으면 온갖 악행들이 순식간에 우리를 포위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유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너하기만 한다면 취득할 수 있고, 원하기만 하면 쉽게 누릴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49-50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감정을 가진 모든 세상 만물은 구속을 경험하는 순간, 그것이 끼치는 해악을 느끼며 자유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한다.  61



독재자의 유형


독재자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민중의 선출로 권력을 부여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자, 무력으로 나라를 차지해 통치하는 자, 권력을 상속받아 군림하는 자.

전쟁으로 나라를 얻은 독재자는 정복한 영토 내의 모든 것들 위에 군림한다. 태생부터 왕으로 태어난 군주들은 전쟁으로 나라를 얻은 독재자보다 나을 것이 거의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독재의 가슴에서 양육되어 젖을 먹을 때부터 독재자의 근성을 자연스럽게 흡수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발아래 놓인 국민을 상속 노예처럼 간주한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기질에 따라 야박하거나 혹은 인심 후하게 내키는 대로 국가를 상속받은 재산처럼 다룬다. 

국민의 선출로 국가를 맡게 된 군주는 그나마 가장 견뎌내기 쉬운 편이다. 앞으로도 그리 생각하겠지만, 이들 역시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위대함이라 불리는 그 무엇에 홀려 기고 만장해지고, 급기야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기로 작정하면서 흔히 국민에게 위임받은 귄세를 자식들에게 대물림한다. 그리고 그 후계자들은 다른 독재자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종류의 악행과 도를 벗어난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다. 

이 세습된 독재자는 새로 구축된 체제를 더욱 안전하게 굳히기 위해 억압의 범위를 확대하고, 민중을 자유로부터 철저히 격리시킨다. 아직 그들이 누렸던 자유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민중의 머릿속에서 자유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도록...

그러니 세 유형의 독재자들 사이에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를 선택하는 것이 옳은지는 사실 알 수가 없다. 통치 권력에 도달하는 방법은 달라도 통치하는 방식은 항상 거의 동일하다. 선거로 권력을 쥔 지배자들은 민중을 마치 사나운 황소를 길들이듯 취급한다. 정복자들은 백성을 노획물로 여기며, 권력을 세습받은 자들은 백성을 그들의 당연한 노예로 간주한다. 

지금 막 새로운 인간들이 태어났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은 예속에 길든 적도 자유를 누려본 적도 없는, 말하자면 지금까지 인간의 삶의 조건을 겪어보지 못해 어느 상태가 더 생존에 적절한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노예 신분이나 자유인 신분을 제안하면 그들은 각각의 신분이 요구하는 룰에 따라 자신을 맞추려 할지도 모른다.  63-65



습관, 자발적 복종의 첫 번째 이유


멍에를 지고 태어나 노예 상태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전 세대가 어떤 삶을 누렸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이 태어난 대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재산,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도 하지 않고 출생 당시부터 주어진 삶의 조건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여기게 된다.  69


관습은 우리가 굴종을 거부감 없이 삼키게 함으로써 더 이상 굴종의 독으로부터 쓴맛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가 좋고 나쁜 일을 판단하고 행하는 데, 타고난 본성이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관습이 우리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는 이르지 못한다. 타고난 성품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이 제대로 가꿔지지 않고 후천적으로 받은 교육이 그 천성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소멸하고 만다. 자연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씨앗들은 너무 작고, 고착된 것이 아니어서 그것을 억압하는 아주 작은 교육의 타격만으로도 싹트지 못하고 사라져버릴 수 있다.  70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며, 또한 그 상태로 계속 존재하길 희망한다. 그러나 그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교육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받아들이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도니다. 인간이 지니는 모든 것들-무엇을 먹고 살며 어떤 습관을 갖고 있는지 등-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타고난 것처럼 보이지만 단지 타고난 본성이 그러할 뿐, 이후 사람이 갖추게 도는 성품은 교육과 양육 방식에 의해 길들여지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자발적 복종의 일차적 근거가 습관이란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말이 길드는 과정과 같다. 말에 재갈을 채우면 처음에는 재갈을 물어뜯다가 나중에는 익숙해져 재갈을 갖고 장난질한다. 말에 안장을 얹으면 처음에는 격렬하게 반항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장비와 장신구를 뽐낸다.  81



맑은 오성, 굴종의 관습을 깨부수다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복종하는 백성이었다고. 조상들은 그렇게 살아왔으며 그 고통을 참고 견디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고, 이대로 자손을 낳으며 살아야 한다고. 그들은 심지어 복종 상태가 지속된 시간의 길이를 통해 그들 위에 군림하는 폭군의 지배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월은 결코 악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폐해를 늘려갈 뿐이다.  82


반듯한 오성과 맑은 정신을 지닌 이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발치 앞만을 바라보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이들은 사안의 전후를 살피는 데 주의를 기울이며, 현재를 판단하고 미래를 통찰하기 위해 과거를 떠올린다. 정돈된 두뇌의 소유자는 탐구와 지식으로 사고의 힘을 더욱 연마한다. 자유가 완전히 사라져 세상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을 때조차 이들은 자유를 상상하고 정신 속에서 자유를 느끼며 자유의 맛을 음미할 수 있어 아무리 잘 포장해서 들이대도 굴종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83


폭군은 자신의 치하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하고 말하는 자유, 심지어는 생각하는 자유마저 박탈한다.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생각 속에만 머물러 있도록 억압한다.  84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첫 번째 이유는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다른 이유가 추가된다. 독재하에서 사람들은 쉽사리 비겁해지고 나약해진다.  87-88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자유를 잃으면 용기도 함께 잃고 만다. 종속된 사람들은 투쟁에 대한 열의도, 다부진 결기도 갖지 못한다. 그들은 위험에 처하면 결박된 사람처럼 마지못해 움직인다. 위험을 무릅쓰고 전우들 사이에서 장렬한 죽음으로 명예와 영광을 얻고자 하는 자유인의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갈망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89



백성을 잠들게 하라


키루스 대왕은 리디아 왕국의 수도 사르디스를 정복하고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Kroisos)를 체포해 포로로 만들었다. 

사르디스 주민들은 이에 저항했다.

키루스는 병력을 투입해 이들을 한 손에 진압할 수도 있었다...

키루스가 해결책으로 내놓은 묘안은 사르디스에 사창가와 술집, 공중도박장 등을 허가하는 것이었다. 이 방침을 왕령으로 발표하고 국민들도 그 사업에 참여하도록 했다. 모든 국민이 이 정책을 환영했다. 그러자 더 이상 국민들을 다스리는 데 무기가 전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가련하고도 비참한 국민들은 점점 더 많은 놀이에 빠져들어 갔다. 라틴어 사용자들이 만들어낸 말 가운데 놀이 혹은 심심풀이를 뜻하는 라틴어 'LUDE'는 리디아의 지명에서 유래하기도 했다.

어떤 독재자도 자신이 지배하는 백성들을 유약하게 만들 계략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부분의 전제군주들이 물밑에서 백성들을 어리석고 나역하게 만들기 위한 술수를 모색했고, 다양한 방법들을 실행으로 옮겼다.  93-94


연극 구경, 광대, 검투사, 낯선 짐승들, 훈장, 그림, 기타 또 다른 마약 같은 것들이 고대 사람들에게는 복종에의 미끼요 자유를 파는 값이었다. 고대의 독재자들은 백성을 예속 상태에 빠뜨리기 위해 이들을 잠재우는 유혹의 수단과 방법으로 이 독재의 도구들을 사용했다. 그렇게 길든 사람들은 바보가 되어 마약 같은 놀이와 구경거리에 중독되어버리는 것이다.  94-95


로마의 폭군들은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그들은 자주 민병대(군대에 등로되어 있지만 평소에는 군인으로 일하지 않고 필요한 때만 군인의 역할을 했던 로마 시민들로, 상비군은 아니지만 잦은 전투 경험과 정기적인 훈련으로 전투 태세를 잘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황제에게 복종하는 대가로 국가로부터 일종의 급여를 지급받았다. 이들은 로마군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의무라기보다 시민으로서 누리는 하나의 특권으로 간주했다.)에 성대한 파티를 베풀었다. 복종하는 근성에 젖은 비천한 무리들에게 무엇보다 식탐을 충족해줌으로써 부하로 만드는 술책을 부렸던 것이다.  95


폭군들은 지지자를 얻기 위해 또 다른 방법, 이를테면 곡식과 술, 돈을 뿌리기도 했다. 이대 선물을 받은 자들이 외치는 "폐하 만세!" 소리를 듣는 것은 매우 가련한 노릇이었다. 본래 자신의 것이던 물건이 다시 돌아온 것뿐인데도 아둔한 사람들은 그것을 왕의 호의라고 착각했다. 


오늘란에도 통치자들의 태도는 나아진 것이 없다. 통치자들은 대형 범죄를 저지르기 직전 언제나 공공의 복지와 안녕을 수렁으로 빠질 위기에 처한 국민들을 달콤하게 달랜다. 우리는 그들의 이 간교한 술책, 이 상투적인 화법을 잘 알고 있다.  99


어리석을 백성들은 스스로 거짓말을 지어내고 나중에는 자신들이 지어낸 거짓말을 믿는다.  101



지배의 공식 


이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제군주의 지배 원동력이자 그 비밀이다. 


도끼나 창, 경비병, 헌병대가 독재자를 지킨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큰 오산이다. 독재자들이 이 세 가지를 사용하는 것은 신뢰해서라기보다 일종의 형식과 겁박 효과 때문이다...

독재자를 보호하는 것은 기마대도 보병대도 아니며 무기도 하니다. 처음에는 이 사실이 언뜻 믿기지 않겠지만 이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언제나 대여섯 명이 독재자의 권력을 떠받들고 그것을 유지한 바로 이 대여섯 명의 신하가 온 국민을 노예처럼 부리는 것이다. 이들은 언제나 왕의 귀 노릇을 한다. 그들은 스스로 왕에게 접근했거나 왕의 부름을 받고 왕의 잔악한 짓을 공모하기 위해 모인 자들이다. 이들은 왕의 쾌락을 위한 동반자고 왕의 애욕을 채우기 위한 뚜쟁이며 왕의 재산을 축적하기 위해 국민들의 살림을 약탈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공범이다. 이들은 군주 본연의 악함을 넘어서 측근들 자신의 악함까지 모두 삼키게 하려고 군주를 제대로 길들인다. 

이 여섯 명은 수하게 조력자 6백 명을 거느리고 있다. 그리고 이 6백 명은 여섯 명이 왕에게 하는 그대로 여섯 명에게 반복한다. 6백 명은 그들 수하게 다시 6천 명의 부하를 거느린다. 6백 명은 부하 6천 명이 지방 총독이나 관리가 될 수 있도록 훈련시킨다. 자신들의 엄청난 물욕과 잔인한 행각으로 나라 전체를 장악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너무도 많은 죄를 저지르는 까닭에 상관의 그늘에서나 보신할 수 있으며 상관의 덕으로 법의 심판과 징벌로부터 놓여날 수도 있다. 그 다음 단계에서 쳐진 그물망의 규모는 엄청나다.  108-110



군주와 신하들, 그 인간 이하의 삶


사랑하는 방법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제국을 스스로 무너뜨린다.  121


그러니 배우자. 옳게 처신하기 위해 우리는 배워야 한다. 눈을 들어 하늘을 향하자. 우리의 명예를 위해, 우리의 미덕에 대한 사랑을 위해.  131




역자후기-"반공주의는 독재정권의 시작을 알리는 징후다."


라 보에시는 독재자의 가장 패악적인 범죄는 민중을 우둔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정의에 무지하고 무감각하게 민중을 길들이면서 선량한 국민으로 교화하는 것이라고 감언이설로 교묘하게 둘러대는 것이다.  149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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