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끌렸다. 그래서 내용을 보지도 않고 골랐다. 물론 도서관이니까...
고전.. 많은 사람들이 열망하지만, 열망하는 만큼 봐지지는 않는 책이 아닐까 싶다.
정보 홍수의 시대에 넘쳐나는 정보와 매일매일 새로이 출판되는 지식의 책들..
우리는 이 속에서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매우 버거울 정도이다.

우리는 농경시대로 시작하여 산업혁명을 거쳐 서비스산업에서 정보화 사회, 그리고 이제는 창조적인 상상력의 시대에 와 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정보화 사회라고 생각하는것이다.
정보화 시대는 이미 수년전에 마감하였다.
어느 정보학자에 의하면 2014년쯤에는 어느시점에서의 정보의 2배가 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그 날로부터 80여일 후 라고 한다.
정보의 양은 범람하고 있다. 그것들에서 우리가 찾아야 하는 필요한 정보를 선별하고 가꾸어 새로운 자신만의 독창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지금 우리시대의 요구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의 책 읽기는 정말 예전으로 돌아가야 하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고전은 길고 긴 시간동안 살아남아 있는 만큼 세대를 아울러 시대에 맞는 생각꺼리를 가지고 있는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정보에 힘겹게 따라갈때 깊은 지혜를 깨달을 수 있는 책이 더욱 필요한 건 아닐까...!!

이 책은 그런 생각에서 많이 접하지 못하지만 늘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고전이라는 단어에 끌려 골랐다.
종교학자의 고전읽기는 다분히 종교적인 색깔을 띠고 있기도 하지만, 저자의 생각들을 엮어놓은 부분들에서 다시읽기를 통해 자신이 더욱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였다.
비교적 젊은 편에 속하는 나에게 '되읽음'이라는 책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책이라면 어느것이든 되읽음이 필요하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 책이 고전이라면 더욱 깊이 있을 것이다.

책은 8가지의 책의 되읽기를 통해 저자의 생각들이 정리되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일연 <삼국유사>
허먼 멜빌 <모비 딕>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세르반테스 <돈 키호테>
노신 <아Q정전>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0년, 20년, 어느것은 40년의 간격을 두고 되읽은 것이었는데, 그것은 실은 '되읽음'이 아니었습니다. 역설적인 말입니다만 그것은 '되읽은 처음 읽음'이었습니다. 작품도 저도 모두 '이전의 작품. 이전의 나'가 아니었습니다.
회상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난 과거를 지금 이 자리에 현존하게 하면서 그것을 새로운 처음이게 한다는 회상에 대한 존재론적 서술이 그대로 낯설지 않은 내 삶의 현실로 다가온 것입니다.  10
어떤 이야기가 '처음 읽기'와 '한 번 읽기'를 넘어 '되읽기'의 자리에 이르러 비로소 권위를 확보하고, 그로부터 경전이 출현한다는 사실.  11

경험은 만남에서 비롯합니다. 그런데 만남은 지녀지기도 하고 스쳐 지나가기도 합니다. 지녀지는 것은 경험으로 남지만 스친 것은 사라집니다. 그것은 만남이되 만남이 아니고 맙니다. 그런데 알 수 없습니다. 사라짐이 결코 무화(無化)일 수 없다는 사실을 터득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지 않은 듯합니다. 우리는 흔히 그러한 일을 겪습니다. 언젠가 겪었던 것 같은 일을 지금 다시 겪는다고 느끼는 일은 누구나 당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막연한 '그럴 것 같음'이 아니라 분명한 '그러함'이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25

책의 평가도 보는 이의 자리에 따라 높낮이와 무게가 서로 다릅니다.  69
삶이 '지금 여기'로 점철된 지평을 넘어서 지금 여기에 담을 수 없는 이상스러움에 담기기까지, 그렇다는 것이 기이하지 않을 때까지, 우리는 실은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다. 역사를 역사이게 한 뿌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96
사람들은 '큰 것'을 동경한다. 그러나 막상 커 빼어나게 되면 한 없이 외롭다. 짝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이야기'속에는 이렇듯 '거인(巨人)' 또는 '거녀(巨女)'의 이야기가 어디, 어느 때나 자리잡고 있다. 무릇  사람들은 누구나 짝할 이가 없을 만큼 자기 나름의 빼어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믿기 때문일까?  99

고전을 권하는 것만으로도 '얻는 것'이 적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누구나 압니다. 그리고 쉽게 살면 편한데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읽은 이들'이 고전을 '고전 읽기의 문화 틀'에 담지 않으려는 것은 그 고전들이 별로 귀하지 않음을 그분들이 '드디어' 터득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분들이 저어하고 삼가는 것은 글의 숨쉽이 당위성으로 단단해진 권위의 벽 안에 갇혀 자칫 사람들이 '질식할 책'을만날지도 모른다는 사려 깊음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읽은 이는 고전 읽기를 고백의 언어'에 담지만 '읽지 않은 듯한 이는 그것을 인식의 언어'에 담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125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추억 앞에서조차 현존하지 못하는 말과 글의 얄팍함을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마로가 글이 감당할 수 없는 추억의 무게를 말해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 어떤 흔적도 없이 오로지 생을 지탱하려다 '흩날리는 물방울'로 사라져도 행복한 자의 뿌듯함을 말해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경이에 가득 찬 일' 과 '깊은 추억'이란 내 생에 속에 전혀 없었노라고 말해야 하는것인가?  152

범죄가 누구나 범할 수 있는 것이듯 참회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범죄를 누구나 미워하듯이 참회를 누구나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범죄자의 참회에 대한 분노는 이른바 의로운 자의 일상이다. 이것은 참 슬픈 그림이다.  199
잔인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잔인하게 잔인해야 잔인해진다.  201

책을 쓴 사람은 그 모델이 있든 엇든 이러한 이야기를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절실한 동기가 있어 이 책을 썼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소재가 시시하다고 이 책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209

그녀는 헤어진 레옹을 다시 만난다. 그리고 다시 몸과 모음을 태운다. 그러나 그 만남 역시 불꽃이 남겨 놓은 재임에는 아무 다름이 없다. 마지막 남은 일은 자신에게 스스로 '최면(催眠)'을 거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어"라고.
욕망은 그러한 것인가? 기대와 절망을 넘나들면서 그녀는 여전히 완벽하게 욕망을 충족시켜줄 사람을 기다린다. 미소 뒤에 숨은 권태의 하품, 환희와 그 뒤에 이어지는 저주, 쾌락을 뒤쫓는 혐오, 황홀한 입맞춤이 끝나면 더 커지는 실현될 수 없는 관능, 그런 것에 대한 분명한 인식. 그러나 그녀는 달라지지 않는다.
욕망은, 일탈한 욕망은, 그런 것일까?
그녀는 그것도 모르지 않는다. 뒤에 그녀는 결혼 생활의 진부함을 간통 속에서도 그대로 발견하고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행복의 저속함에 굴욕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음' 인간이 발언할 수 있는 마지막 정직. 욕망은 그 정직함 속에서 배태되고 또 소멸한다. 모든 도덕은 그 '어쩔 수 없음'의 정직을 억제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245
삶은 산문적 현실에 담기는 것이지 시적 진실에 담기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얼마나 전자를 견딜 수 없으면 후자로 채색하여 대강 보아 넘기려는 것일까? 그러나 끝내 간과되지 않는 현실, 웃고 끝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자신을 끝내 속일 수 없었던 정직을 '절망적'으로 웃는 일밖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248

어쩌겠는가?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보는 사람 앞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은 "그저 마음대로 생각하십쇼" 뿐인 것을! 그런데 세상에는 그러한 사람이 너무 많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그저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말하면서 산다. 우리는 모두 타인에게는 산초 빤사이고 자신에게는 돈 키호테이다.  287
'날조한 망상'을 현실로 생각하는 것처럼 현실적인 일이 또 어디 있을까? 현실에 대한 상상적 인식처럼 정직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돈 키호테는 현실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다만 '망상이 만든 현실'을 '상상이 만든 현실'을 정직하게 자신의 현실이라고 여겼을 뿐이다.  288
돈 키호테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를 자기의 심장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세상에는 때로 돈 키호테와 같은 행운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그러한 행운아가 되도록 하는 산초 같은 종자도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행운아가 '돈 키호테이기 때문에'산초가 있었다는 사실은 잊고 있다.  292

노예 근성은 꿇어앉는 것이다. 설 수 없는데 서라고 하는 명령 앞에서는 누구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노예 근성은 불가항력이다. 힘 앞에서는.  334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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