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독립 이후에 언어 분포를 조사하였는데, 인도 국민이 사용하는 언어가 179개이고, 방언도 544개나 존재한다고 한다. 현재 인도 정부가 공용어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 산스크리트어(Sanskrit, 범어梵語)를 포함해서 18개에 이른다.

이 많은 언어를 크게 구분하면, 북부의 인도아리아 어군(語群)과 남부의 드라비다 어군으로 나눌 수 있다. '인도아리아어'는 인도 인구의 70퍼센트가 넘는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고, 이는 산스크리트에서 파생된 것이다. 인도 아리아어도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누어진다.

1. 힌디(Hindi)는 인도의 북부 지방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언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체 인구의 40.22%가 사용하는 언어다. 수도 뉴델리(주민의 81.6%)를 비롯해서 하리아나(91%), 우타르프라데시(90.1%), 라자스탄(89.6%), 히마찰프라데시(88.9%), 비하르(80.9%), 마디아프라데시(85.6%), 찬디가르(61.1%) 등에서 주(州)의 제1공식어로 사용하고 있다. 또 네팔에서도 800만 명이 힌디를 사용한다.

2. 벵갈리(Bengali, 벵골어)는 캘커타(현재의 콜카타)를 중심으로 한 벵골 지방과 방글라데시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인도 전체 인구의 8.3%가 사용한다. 웨스트벵골 주의 공식어로서 이 주의 주민 86%가 벵갈리를 사용한다. 

3. 우르두(Urdu)는 펀자브 지방과 파키스탄에서 사용하는 이슬람교도(모슬렘) 언어로, 이 언어의 문자와 말은 아라비아어와 비슷하다. 인도 전체 인구의 5.18%가 이 언어를 사용한다.

4. 구자라티(Gujarati, 구자라트어)는 서해안 지방에서 사용되는 언어로, 구자라트 주민 91.5%가 사용한다. 그래서 구자라티는 '인도의 비즈니스맨의 언어'라고도 불린다. 구자라티는 인도 전체 인구의 4.85%가 사용하는데, 전 세계적으로 이 언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6,0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5. 마라티(Marathi, 마라티어)는 인도의 경제 수도 봄베이(지금의 뭄바이)를 중심으로 한 마하라슈트라 지방의 언어로, 이 주의 주민 73.3%가 이 언어를 사용한다. 인도 중부의 데칸 지역에서도 이 언어가 많이 쓰인다. 인도 전체 인구의 7.45%가 이 언어를 사용한다. 

6. 오리야(Oriya)는 동해안 지방에서 사용되는 언어다. 이는 오리사 주민 82.8%가 사용하며, 많은 방언과 지방 사투리가 있는 것이 이 언어의 특징이다. 

인도이ㅡ 남부 지역에서 주로 사용하는 드라비다어는 인도 인구의 30% 정도가 사용하는 언어다. 드라비다어도 몇 가지로 구분된다. 

7. 텔루구(Telugu)는 동부 지방의 안드라프라데시 주민의 84.8%가 사용하는 언어이고, 또한 인도 제2의 실리콘밸리로 통하는 하이데라바드 사람이 주로 사용하는 언어다. 이는 인도 전체 인구의 7.89%가 사용한다.

8. 타밀(Tamil)은 마드라스(지금의 첸나이)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는 언어다. 또한 타밀나두 주민의 86.7%가 사용하는 언어이고, 인도 전체 인구의 6.32%가 사용하는 언어다. 

9. 칸나다(kannada)s는 남서부의 마이소르(카르나타카 주) 지방에서 사용되는 언어로, 이는 인도 시리콘밸리 방갈로르에서 사용되며, 인도 전체 인구의 3.91%가 사용한다. 

10. 말라야람(Malayaram)은 인도의 가장 남쪽 케랄라 지방에서 쓰이는 언어로, 이는 인도 전체 인구의 3.62%가 사용한다.

그 밖에도 11. 펀자비(Punjabi)는 펀자브 주민의 92.2%가 사용하고, 인도 전체 인구의 2.79%가 사용하는 언어다.

12. 아싸미스(Assamese)는 아삼 주민의 57.8%가 사용하는 언어로, 인도 전체 인구의 1.56%가 사용한다.

13. 신디(Sindhi)는 구자라트 주 등, 인도와 파키스탄의 접경 지역에 사는 주민이 사용하는 언어로, 이는 인도 전체 인구의 0.25%가 사용한다.

14. 네팔리(Nepali)는 네팔의 국어다. 이는 네팔 인구의 90%가 사용하는 언어이며, 인도 전체 인구의 0.25%가 사용하는 언어다.

15. 콘카니는 고아 주민의 51.5%가 사용하는 언어로, 인도 전체 인구의 0.21%가 사용한다. 

16. 마니푸리는 보석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마니푸르에서 사용되는 언어다. 이는 이 지역 주민의 60.4%가 사용하는 언어로, 인도 전체 인구의 0.15%가 사용한다. 

17. 사큐미리(Kashmiri)는 잠무카슈미르 주에서 주민의 55%가 사용하는 언어로, 인도 전체 인구의 0.01%가 사용하는 언어이다.  32-35


2001년 발표된 인구 조사를 보면 인도의 주택 수는 모두 1억 7,900만 개이다. 평군 잡아 한 집에 6명이 사는 셈이다.  35


4만 루피의 연봉을 받는 사람은 한국의 화폐로 약 100만원 정도를 받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5~10배의 소득 효과가 잇다.

최근 인도인은 부수입을 올리기 위해서 상당히 노력하고 있다. 이는 경제에 눈을 뜬 것이고, 그래야 자식 교육과 자신의 노후가 보장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9


1999년 현재, 350만의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 감염자가 있다고 하고, 일부 비정부 기구에서는 800만의 감염자가 있다고 주장한다.  42


웬만한 중산층 가정의 경우 제대로 된 집안에 딸을 시집보내려면 신랑에게 '산트로(현대자동차)'정도는 지참금으로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도의 여성은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낼 수도 없다. 인도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성이 결혼하지 않는 것을 큰 수치로 받아들이고 있고, 독신 여성을 사회적으로 천시하고 있다.  48


사트푸라 마을에서는 차란 부인의 '사티'를 포함해서 지난 50여 년동안 4건의 '사티'가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이 사티 기록을 대단한 자랑과 명예로 여기고 있다.  50


미망인이 끝까지 자결하는 것을 거부할 경우에는 천한 사람으로 낙인찍혀서 집안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 버림을 받았다. 버림받은 미망인은 죽을 때까지 힌두교 사원에 가서 가장 천한 막일을 하거나 심지어 창녀로 일해야 하며, 이렇게 해서 번 돈은 힌두교 사원에 바쳐야 했다.  51


인도에는 "과부가 먹다 남긴 음식은 개도 먹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과부가 다시 시집가는 것도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다. 과부는 시집에서만 아니라 친정에서도 배척을 받는다.

과부들이 브린다반의 사원에 모여들게 된 것은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자신의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이다. 실제로는 남편이 죽자 집안에서 버림을 받고 브린다반으로 쫓겨 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52


인구 비례로 따지자면, 영어를 읽고 쓸 수 있는 인구는 4!10%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간단한 영어회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70%는 될 것으로 추정된다.  76



인도 역사를 크게 4시기로 구분하는 견해가 있다. 힌두시대, 이슬람시대, 영국식민지시대, 오느르이 독립국가시대이다.

인도의 한 소설가가 4가지 시대에 대해 재미있는 비유를 들어서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이 소설가는 인도 민중을 참새 부부에 비유한다. 각 시대를 연대순으로 힌두 시대를 '금으로 만든 새장'으로 비유하고, 이슬람 시대를 '은으로 만든 새장', 영국의 식민지 시대를 '알루미늄으로 만든 새장', 오늘날의 독립국가 시대를 '삼색기(三色旗)로 만든 새장'으로 비유하였다.

필자는 '힌두시대'를 4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 1시기는 아리아인이 인도에 정착한 시기인 '베다시대'이고, 2시기는 '도시국가'와 '영역국가'가 서로 경합을 벌이던 시대이며, 3시기는 '마우리아 왕조'에 의해서 통일을 이룬 때이고, 4시기는 '굽타 왕조'에 의해서 고전적 힌두 문화가 어느 정도 완성된 시대이다.  81-82


힌두교의 성격으로는 대체로 다음의 6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베다 종교를 계승한 힌두교는 기본적으로 다신교(多神敎)이다. 둘째, 힌두교는 다신교이지만, 여러 신의 배후에 최고신(最高神)을 설정한다. 이것이 브라흐마 비슈누 쉬바의 삼신일체(三神一體)로 나타난다고 한다. 셋째, 힌두교에서 아바타라(avatare, 化身)의 관념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이다. 이는 비슈누가 여러 신 인간 동물로 나타난다는 것인데, 이것을 통해서 여러 지방 부족 카스트의 신들을 통일할 수 있었다. 넷째,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특징이 있다. 힌두교에서는 이슬람교나 유대교에 비해서 신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적다. 이는 '아바타라'의 관념에서 파생한 것이다. 다섯째, 힌두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단(異端)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정통과 이단의 대립을 거의 볼 수 없다. 여섯째, 힌두교에 이단이 없다는 점은 힌두교가 다른 종교, 사상과 접촉하는 점에서 관용을 발휘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힌두교에서는 대립하는 모든 종교, 사상에 대해서 정면으로 대결하기보다는 자기영역에 있으면서 대항하지 않거나, 자신의 울타리 안으로 흡수하였다. 예컨대 사회적 신분제도에 저항했던 '불교'도 힌두교의 한 파(派)로 간주되어, 불타(佛陀)는 비슈누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렇지만 불교 자이나교 이슬람교 시타 토착적 요소가 어울려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보면 힌두교도로서 그 주체성을 잃지 않았다.

또한 힌두교에서는 4가지 생활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카마(kama)는 적당한 감각적 쾌락과 성적 향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애정의 기술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한 것이 <카마수트라>이다. 둘째, 아르타(artha)는 재물과 재산의 향유와 이득을 뜻한다. 이는 인생에서 부(富)의 추구가 인간의 정당한 행위라는 것이다. 셋째, 다르마(dharma)는 사회적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 이는 <마누 법전>과 여러 법률서에 나와 있는 내용을 실천하는 것이다. 넷째, 해탈(moksa)은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열반에 들어가서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4가지 생활 목표와 상응해서 인새으이 4주기도 제시하고 있다.

첫째, 범행기는 스승의 지도 아래 <베다>등의 학문을 배우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시기다. 둘째, 가주기는 결혼해서 가정을 돌보는 시기다. 이때 자식을 낳고 부를 추구하는 생활을 하면서 가장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 <마누법전>에 따르면 결혼한 남자에게 주어진 의무는 신, 브라만, 조상 등에게 제사를 성대하게 치르는 것이다. 셋째, 임주기는 재가자의 삶을 마치고 숲속으로 들어가서 은거하고 명상과 금욕생활을 하는 시기다. 이는 세속을 떠나 청정한 종교생활을 하는 시기다. 넷째, 유행기는 숲속에서 수행이 끝난 뒤에 탁발(걸식)하며 돌아다니는 시기다. 이때에는 모든 사회적 유대관계를 끊고 오로지 해탈의 세계만을 추구한다.  140-142


힌두교(브라만교)의 흐름은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에서 6파 철학으로 이어진다. 그 내용을 순서대로 살펴본다.

1. 우파니샤드(Upanisad)는 '가까이 앉는다'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이는 스승과 제자가 가까이 앉아 대화로 비밀스런 지식을 전수한다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사상은 다양해서 일률적으로 개괄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우주의 근원인 '브라흐만(brahman)'과 진정한 자아인 '아트만(atman)'이 같다는 것(梵我一如)이 <우파니샤드> 사상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타이티리야 우파니샤드>에서는 5단계의 아트만을 주장한다. 첫째, 물질로 이루어진 자아인데, 이는 음식을 가리킨다. 둘째, 동물과 식물로 이루어진 자아인데, 이는 식물과 동물에 공통된 생명으로 이루어진 자아이다. 셋째, 동물에만 공통된 지각 활동으로 이루어진 자아이다. 넷째, 인간만이 소유하고 있는 인식활동으로 된 자아이다. 다섯째, 희열로 이루어진 자아인데, 이는 인간의 깊은 곳에있는 브라흐만 그 자체이다. 이것은 인간 내면 깊은 곳에 간직되어 있는 희열이야말로 자신의 참 자아이며 우주의 근원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같다는 주장이 의미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2. <바가바드기타>은 힌두교의 바이블로 불릴 만큼 중요한 문헌이다. <바가바드기타>는 바수데바(Vasudeva)를 신봉하는 종파에서 작성한 시편(詩篇)인데 나중에 <마하바라타>에 편입되었다. '바가바드기타'는 '숭배할 만한 자' 혹은 '지극히 존귀한 자'라는 의미이고, '기타'는 '노래' 혹은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바가바드기타>는 체계적인 철학을 담고 있는 저술이라기보다는 실천적 성격이 강한 종교적 작품이고, 또한 요가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바가바드기타>에서는 3가지 요가를 말하고 있다. 첫째, 지(知)의 요가(jnana-yoga)이다. 이는 뒤에 소개할 상키야학파처럼 영원한 정신으로서 '참 자아'와 '물질적 현상적 자아'를 구분하는 것이고, 또는 <우파니샤드>에서 주장한 것처럼 범아일여(梵我一如)와 신을 아는 지혜를 의미하기도 한다. 둘째, 신애(信愛)의 요가(bhakti-yoga)이다. 이는 신에게, 특히 비슈누에게 온 정신을 집중하고 그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헌신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셋째, 행(行)의 요가(karma-yoga)이다. 이는 윤리와 해탈 간의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참다운 체념은 '행위를 전혀 하지 않는 체념'이 아니라 '행위 하는 가운데 체념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행위를 하지만 욕망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행위하는 한, 업보(業報)를 부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3. 상키야(Samkhya)학파에서는 2원론을 주장하낟. 이 학파에서는 진정한 자아 푸루샤(purusa)와 현상적인 자아 물직적 근원인 프라크리티(prakrti)를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평범한 사람은 프라크리티를 진정한 자아라고 생각하고 잇다. 이것은 잘못이고 진정한 자아는 푸루샤라는 것이 이 학파의 주장이다. 이 학파에서는 프라크리티에서 육체와 세계가 전개되는 것을 설명한다.

4. 요가(Yoga)학파에서는 상키야학파와 형이상학을 같이하지만 두가지 점에서 다르다. 그것은 마음의 잠재적인 힘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무지(無知)를 주장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 학파에서는 구체적 수행 방법으로 요가를 제시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유신론적(有神論的)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5. 바이셰쉬카(Vaisesika)학파는 다원론의 입장에 선다. 이 학파에서는 6범주 또는 7범주를 말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번째 항목인 실체이다. 이 학파에서는 실체에 9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지, 수, 화, 풍, 공, 시간, 공간, 의근, 자아이다.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고, '허공'은 소릴는 성질이 어딘가에 있어야 하므로 이 점에 근거해서 추론되는 것이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와 젊음과 늙음을 인식하는 근거로서 추리되는 것이며, '공간'은 여기, 저기, 가깝다, 멀다 등을 인식할 수 있는 근거로서 추론되는 것이다. 의근(意根)은 내적 감각기관이다. 눈과 코 등의 외적 감각기관이 바깥 대상을 인식하듯이, 의근은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는 것이다. 지각은 의근이 작동해야 이루어진다. 자아(영혼)는 인식현상의 밑바닥을 이루는 실체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개인 영혼인데, 이는 의지 욕망 기쁨 아픔 등의 여러 가지 정신적 상태에 근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안다"와 "나는 아프다"라는 말을 통해서 자아가 의식에 속하는 실체임을 알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최고 영혼으로서 신이다. 이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영혼으로서 모든 고통과 욕망에서 벗어난 존재이고 세계의 창조자라고 추리되는 존재이다.

6. 니야야(Nyaya)학파에서는 바이셰쉬카학파와 형이상학의 내용은 거의 같이한다. 이 학파에서는 괴로움의 근원이 그릇된 지식에 있다고 보고 올바른 지식을 얻기 위한 인식 방법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래서 이 학파에서는 논리학이 발달하였다.

7. 미맘사(Mimamsa) 학파에서는 <베다>에서 명령하는 행위를 왜 실천해야 하는지 그 의무에 대해 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 학파에서는 무전력(無前力, apurva)을 주장한다. 베다에서 말하는 제사의 행위는 잠깐 동안 이루어지고 이내 끝나기 때문에 제사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이에 이 학파에서는 가설로서 '무전력'을 인정하면 제사의 행위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증명할 수 있다고 한다. 제사 지내는 행위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인 '무전력'을 생기게하고, 이 힘이 제사 드리는 주체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서 그 업에 해당하는 과보를 반드시 받게 한다는 것이다. 인도에서는 일반적으로 베다 성전을 '제사부'와 '지식부'로 구분하고 있다. '제사부'는 브라만교의 제사를 설명하는 부분인데, 이것을 중시한 학파가 미맘사학파이다. 뒤에 소개할 베단타 학파는 베다 성전의 '지식부', 곧 <우파니샤드>를 중시하는 학파이다.

8. 베단타(Vedanta) 학파는 힌두교(브라만교)의 사상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있는 것이다. 이 학파는 과거 1,000년 동안 다른 학파의 활동을 누르고 압도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베단타라는 말은 본래 베다의 '끝' 혹은 '목적'을 의미하는 것이엇는데, 이는 <우파니샤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베단타'라는 말이 <우파니샤드>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해석하고 발전시킨 사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베단타학파는  샹카라, 비슈누파, 쉬바파로 구분된다.

이 학파의 근본경전은 <브라흐마 수트라>이다. 이 경전에서 말하는 내용은 브라흐만과 합일하여 해탈하는 것이다. 해탈을 얻는 방법으로, 명상을 통해서 브라흐만을 알게 되는 지(知)를 얻고, 이 '지'를 얻은 사람은 죽은 뒤에 신의 길을 따라 최후에 브라흐만에 이르러 브라흐만과 합일한다는 것이다.

이 <브라흐마 수트라>는 문구가 대단히 간결해서 그 의미를 알기가 어렵다. 그래서 여러 주석서가 나왔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샹카라, 라마누자, 마드바이다. 샹카라는 가현설(假現說)을 주장했는데, 이는 영혼과 물질세계는 브라흐만이 나타난 것이어서 영혼과 물질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현설'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는 일원론에 속한다. 라마누자는 전변설(轉變說)을 통해서 영혼과 물질세계가 신에 의존해 있는 것이지만, 영혼과 물질세계에는 독자적 성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라마누자는 영혼과 미세한 물질은 실재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이 점에서 라마누자의 주장은 2원론에 속한다. 마드바(Madhva)는 '가현설'과 '전변설'을 부정하고 현실의 차별적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자 하였다. 이 점에서 마드바는 다원론을 주장하였다. 라마누자와 마드바는 비슈누파에 속한다.  143-148


자이나교의 사상

초기 자이나교의 가르침은 7체(諦)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영혼(jiva)은 모든 만물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인데, 이 영혼은 청정하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청정한 영혼이 업(業)에 의해서 속박당해 자신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둘째, 영혼에 반대되는 비영혼(非靈魂, ajiva)을 설명한다. '비영혼'에는 5가지가 있다. 그것은 물질, 법, 비법, 허공, 시간이다. 물질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법(法)은 원자가 움직이게 하는 원리이며, 비법(非法)은 원자가 정지하게 하는 원리이고, '허공'은 우너자가 놓여 있는 공간이다. '시간'은 초기 자이나교에서 조금 뒤에 추가된 것인데, 원자가 시간 속에서 작용한다는 의미다. 셋째, 유입(流入, asrava)은 몸, 이브 마음의 업으로 미세한 물질인 비영혼이 영혼을 둘러싸는 것이다. 넷째, 계박(繫縛, bandha)은 영혼을 둘러싼 미세한 물질이 미세한 신체를 이루어서 영혼을 속박하는 것이다. 다섯째, 제어(制御, samvara)는 영혼이 속박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새로운 업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이미 들어온 업은 없애는 것이다. 과거의 업을 없애기 위해서는 고행이 필요하다. 새로운 업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기 위해서는 '5대서(五大誓)'를 지켜야 한다. 그것은 살생하지 않는 것, 진실한 말을 하는 것, 도둑질하지 않는 것. 음행하지 않는 것, 무소유이다.

여섯째, 지멸(止滅, nirjara)은 수행이 완성되어 업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일곱째, 해탈(解脫, moksa)은 업의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은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다.  156-157


자이나교단은 뒤에 백의파와 공의파로 나뉘어졌다. 백의파(白衣派)는 흰옷을 걸치는 종파이고, 공의파(空衣派)는 옷을 걸치지 않는 종파이다.  157


불교는 한국인에게 친밀한 종교이지만, 인도의 불교에 대해서 한국인이 잘 알지는 못한다. 한국인에게 친숙한 불교는 중국불교와 한국불교이다. 물론 중국불교와 한국불교는 인도불교를 근간으로 한 것이므로 크게 보아서 인도불교와 중국불교, 한국불교는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분명히 인도불교와 중국불교, 한국불교에는 다른 측면이 있다. 그 핵심적 내용은 인도 불교에서 논리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또한 카스트제도를 비판하는 진보적 성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161


불교사상의 전개 과정

1. 초기불교의 사상은 3가지 내용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첫째는 사성제(四聖諦)이다. 이는 4가지 성스러운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고(苦)'는 인생의 현실은 고통스럽다는 것이고, '집(集)'은 인생이 고통스러운 원인은 잘못된 욕망에 있다는 것이며, '멸(滅)'은 인생의 고통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고, '도(道)'는 인생의 고통을 없애는 길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도'는 팔정도(八正道)로 구성된다.

둘째는 삼법인(三法印) 또는 사법인(四法印)이다. '법인'은 불교의 징표, 불교의 증거라는 의미다. 이는 제행무상 등의 3가지 또는 4가지 조건이 갖추어지면 그 가르침을 올바른 불교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라는 도장을 찍는다는 의미이므로 그만큼 이 명제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삼법인 또는 사법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고, 모든 것은 고통스럽다는 것이며, 모든 존재는 무아(無我)라는 것이고, 열반(涅槃)의 경지는 고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연결해서 보면, 모든 것은 변하는데 그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집착하면 고통스럽다는 것이고, 이처럼 고통스러운 것에는 진정한 자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모든 것이 변하고 고통스럽고 무아임을 자각할 때, 진정한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삼법인 또는 사법인의 내용이다.

셋째는 연기설(緣起說)이다. 이는 사물이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상호 의존성'을 말하는 것인데, 경전에서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기며, 이것이 멸(滅)하기 때문에 저것이 멸(滅)한다"라고 한다. 이는 이 세상 어떤 사물도 서로 관련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일상의 삶이 가능한 것은 누군가가 농사를 짓고 옷을 만들고 기름을 만들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이 물건들은 내가 돈을 주고 사용하는 것이지만, 누군가가 만들지 않았다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하더라도 이것들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에 철저히 기대어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상호의존성이다. 초기 불교에서는 이 연기설을 더욱 발전시켜 12항목의 연기설을 주장한다. 그 요점은 중생이 고통을 겪고 윤회하는 원인은 지혜가 없는 무명(無明)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불교의 경전은 <아함경(阿含經)>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역본과 팔리어본이 있다. 팔리어본은 '니카야(Nikaya)'라고 한다.

2. 불교 고단은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누어진다. 이는 계율문제를 두고 보수파와 진보파로 나누어진 것이다. 상좌부(上座部)는 보수파인데 불타가 정한 율(律)을 그대로 지키자는 쪽이고, 대중부(大衆部)는 진보파로서 불타가 정한 율이라고 할지라도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다. 상좌부와 대중부는 10가지 문제를 놓고 대립을 하였는데, 그 중에 핵심적 사항은 금은을 보시(기증) 받을 것인지 하는 문제였다. 상좌부는 금은을 보시 받아서는 안 된다는 쪽이고, 대중부는 시대가 바뀌었으므로 금은을 보시 받아도 된다는 쪽이다. 이렇게 2개의 부파로 나누어진 다음에 18개 부파로 나누어져 모두 20개 부파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상좌부 불교가 동남아로 전파되었다. 

3. 대승(大乘)불교는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경, 활발한 힌두교의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새롭게 출현한 불교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普薩)을 강조하였는데 여기에 2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범부(凡夫)보살인데 대승불교경전에 나오는 미륵, 관세음, 문수, 보현보살 등을 말하는 것이다. 이 대보살은 이미 수행을 완성한 존재이고 한편으로 중생을 교화하고 있는 존재이다. 이 대보살은 힌두교에서 토착신앙을 포섭하고 대중성을 확보한 것에 대항하기 위해서 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존재를 제시한 것이다. 미륵(彌勒)은 미래에 태어난다는 부처님인데, 다음 생(生)에 부처가 되는 것이 결정되어 있고, 현재는 보살로서 도솔천(兜率天)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자비(慈悲)를 상징하는 존재이고, 문수보살(文殊菩薩)은 지혜를, 보현보살(普賢菩薩)은 실천행(實踐行)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또한 대승불교에서는 불타관(佛陀觀)에도 변화가 있었다. 대승불교에서는 불타의 개념이 일반화하였고, 구제자로서 뛰어난 능력을 불타가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중에서도 아촉불(阿?佛), 아미타불(阿彌陀佛), 약사여래(藥師如來)는 많은 사람이 귀의하는 대상이었다. 이는 불교의 대중화를 위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대승불교에서는 ,많은 경전을 제작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화엄경>, <법화경>, <무량수전>, 반야경전 계열, <유마경>, <승만경>, <해심밀경>, <열반경>이다. <화엄경(華嚴經)>은 불타가 되는 수행단계를 50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는 경전으로, 중국에 전해져서 화엄종(華嚴宗)의 근본경전이 되었다. <법화경(法華經)>은 소승(상좌부)불교와 대승불교의 조화를 말하는 경전으로, 중국에 전해져서 천태종(天台宗)의 근본경전이 되었다. <무량수경(無量壽經)>은 중생을 극락정토에 태어나게 한다는 내용의 경전으로, 중국에 전해져서 정토종(淨土宗)의 근본경전의 하나가 되었다.

반야(般若)경전 계열은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공(空)의 가르침을 강조하는 경전이다. <유마경(維摩經)>은 출가하지 않는 재가 거사 유마힐(維摩詰)이 등장해서 불교이 가르침을 말하는 경전이다. 이는 재가 중심의 대승불교 정신을 잘 보여주는 경전인데, 중국에서는 <유마경>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승만경(勝?經)>은 출가하지 않은 재가의 여인 승만(勝?) 부인이 부처님을 대신해서 가르침을 말한 경전이다. 이것도 재가 중심의 대승불교 정신을 잘 보여주는 것이고,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성향이 강한 인도에서 매우 이례적인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열반경(涅槃經)>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경전이다. <열반경>은 경전이지만 논서의 치밀함을 보이는 경전이다. <해심밀경(解深密經)>은 인도 대승불교의 유식학파에서 중시하는 경전으로 심층무의식으로서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하고 있다. <능가경(楞伽經)>은 모든 중생이 여래(부처)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여래장사상과 유식학파의 사상을 결합한 경전이다. 이 <능가경>은 중국에 전해져 초기 선종(禪宗)에서 중요시하는 경전이 되었다.

또한 대승불교에서는 2대 학파가 있다. 그것은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이다. 중관(中觀)학파에서는 공(空)사상을 강조하고 범부의 집착을 논리적으로 깨뜨리려고 하였다. 그 대표적 저술이 용수의 <중론(中論)>이다. 유식(唯識)학파에서는 범부의 마음에 주목해서 8식설을 주장하였다. 세친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이 유식학파를 대표하는 저술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승불교가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에 전파되었다.

4. 기원후 7세기와 8세기에 접어들어 힌두교가 인도에서 완전히 주류 문화가 되자 이에 대응하고자 나타난 불교의 흐름이 밀교(密敎)이다. 대승불교도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밀교는 힌두교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것이다. 밀교를 대표하는 경전은 <대일경>과 <금강정경>이다. <대일경(大日經)>은 중관사상의 영향을 받은 밀교경전이고, <금강정경(金剛頂經)>은 유식사상의 영향을 받은 밀교경전이다. 그 뒤를 이어서 무상유가(無上瑜伽) 탄트라가 등장했는데, 이는 인도의 탄트라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 밀교 계열의 가르침이 티베트에 전래되었다.  161-166


불교와 힌두교의 차이점

불교는 인도의 문화 토양에서 자라났지만, 힌두교(브라만교)와는 4가지 점에서 구분된다. 첫째, 불교는 힌두교의 카스트제도와 남녀차별을 부정하고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힌두교는 기본적으로 인도의 문화와 토양에 국한되는 '인도의 종교'로 머물렀지만, 불교는 인도의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는 세계 종교로서 보편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국제적인 포교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는 점이다. 셋째, 힌두교에서는 통일된 교리가 없고 믿음의 체계가 여러 가지라고 한다면, 불교는 가르침이 명료하고(철학적 내용은 복잡하지만) 교리체계도 일관성이 있다는 점이다. 넷째, 힌두교는 통일된 조직이 없는 느슨한 종교이지만, 불교는 교단을 구성하고 불교대학을 설립하여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종교활동과 포교활동에 나선다는 점이다.  166


시크교

시크교는 힌두교에 기초를 두고 이슬람교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이 두 가지 사상을 결합시킨 개혁종교이다. 이 종교를 처음 일으켜 세운 사람은 나나크(Nanak, 1469~1539)이다. 그는 카비르(Kabir, 1440~1518)의 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았고, 이슬람교 신비주의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나나크는 진정한 종교는 내면성에 있고 또한 진정한 종교는 신을 만나기 위한 심성의 준비라고 보았다. 이 때문에 그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형식적인 의례를 부정하고 우상숭배를 금지하며 고행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나크는 만물은 신의 피조물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카스트와 성적 차별도 부정하였다. 그래서 시크교에서는 어떠한 카스트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함께 동일한 음식물을 먹고 음식물에 관한 금지조항을 만들지 않았다.

또한 나나크는 내면적 청정의 중요성, 곧 종교의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였는데, 그래서 술, 마약, 담배를 금지하였고, 보통의 직업에 종사해서 다른 사람에게 봉사할 것을 권장하였다. 이것이 바로 자기중심성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자기중심성이 강한 사람은 자아에 결사적으로 집착하여 탐욕과 분노와 집착과 자만에 지배당하고 언제나 불안하고 두려워한다. 따라서 수행자는 이러한 자기중심성을 극복할때 평호를 얻어 자기 자신의 본래적 원만함에 돌아오게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신(神)과 하나가 되는 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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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는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와 같이 교직과정을 이수해야 하는데 학부교직(B-ed)을 이수하면 보통 초중등 과정 교사가 되고 석사교직(M-ed)을 이수하면 고등과정 교사가 된다. 공립학교 교사로 임용되면 정년이 보장되지만 사립학교의 경우는 철저한 실력 위주의 선발로 항시 능력을 검증받고 그에 상응한 대우를 받기 때문에 우수한 교사들은 사립학교를 선호한다.

사립학교에서는 단순히 교직 이수 자격증뿐만 아니라 각 과목에 필요한 여러 분야의 자격증을 요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연히 경쟁이 심한 사립학교의 교사들은 자신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인도 수도 델리의 유명한 사립학교 중 하나인 바산트 밸리스쿨에서 5학년 영어수업을 맡고 있는 수렌드란 교사의 말에 따르면 사립학교에는 교사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키우기 위한 자체 프로그램들이 있다고 한다. 그녀가 속한 학교에서도 일 년에 한번씩 교사들의 해외 연구 워크숍을 통해 지속적으로 관련 분야의 최신 정보를 접하고 수준높은 영어로 유지하도록 한다고 한다.  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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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쓰면서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라고 고백했다.

체가 표현했던 것처럼 나는 인도 여행기를 쓰면서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며, 나는 생각보다 더 많이 변했고, 예전의 나는 사라지고 없다.'


엄마는 인도에 꼴까따만 있는게 아니라면서 방학만 되면 배낭 하나만 걸치고 인도의 곳곳으로 나는 데리고 떠났다. 가까이는 타고르의 고향이자 이상향으로 삼았던 산티니케탄으로, 멀리는불교의 성지인 부다가야로, 차로 유면항 다르질링으로, 인도인들이 마지막 귀의처로 여기는 바라나시로, 인도의 수도인 델리로, 아시아의 스위스라고 불릴 만큼 멋진 곳이지만 분쟁과 테러가 끊이지 않는 스리나가르 주의 카슈미르로 돌아다녔다.


막막히 기다리다보면 시간은 어느새 형체를 잃고 내 몸 속에 천천히 고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류시화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에서 표현에 공감한다. '형이상학적 관념의 비약을 꾀하기 전에, 창문을 열어젖히고 아침의 인도와 마주하는 것이 좋았다. 아열대의 공기, 이상한 새들, 꽃과 차의 향기, 신전의 인상적인 지붕들, 사리를 휘감고 광활한 들판 너머로 신기루처럼 사라져가던 여인들, 그러한 것이 나는 좋았다. 내 인생의 황금기는 여행에 있었으며, 특히 인도 여행은 그 황금기의 열매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삶을 배웠고, 세상을 알았다.'


바울은 '바람처럼 떠도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왜 그렇게 옛날 언어를 힘들게 배우느냐고 나는 속없이 물어보았다. 마그다 이모(폴란드인)는 웃으면서 '쓸모'가 별로 없기 때문에 배운다는 말을 했다. 

쓸모가 없기 때문에 배운다니. 마그다 이모는 세상이 너무 쓸모 위주로만 흘러가고, 쓸모가 있는 것만 중시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탐욕을 부리고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고 했다. 쓸모없는 공부를 하는게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운지 모른다고도 했다. 세상에는 별 쓸모없는 공부일지 모르지만 자신에게는 쓸모없는 공부를 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도 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세상은 넓고, 그 넓고도 넓은 세상에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은 없다.


인도를 여행할 때는 물리적인 시간의 개념을 아예 마음속에서 내려놓거나 미리 포기하는게 좋다.


부다가야는 북동부에 위치한 비하르 주의 한 마을답게 조용했다. 비하르 주는 인도에서 가장 가난하고 낙후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말로 깨달음을 보디(Bodhi)라고 한다. 보디를 한자로 보리라고 음사해서 쓰게 되었는데, 깨달음을 얻은 나무여서 보리수라고 부른다고 한다.  


여러 각도에서 타지마할을 찍으라고 조언을 하기도 했다. 타지마할의 대리석은 각도에 따라, 시기에 따라, 계절에 따라, 전혀 다른 색감과 분위기를 연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달빛에 비친 타지마할의 모습은 정말로 고혹적이라고 했다.


높은 곳에서 보니 시재 집들 지붕이 핑크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래서 자이뿌르를 핑크시티라고 하나보다.


조드뿌르, 이곳은 블루 시티라고 한다.


인도 북서부에 위치한 잠무 카슈미르 주의 주도인 스리나가르는 아시아의 알프스로 소문난 아름다운 곳이지만, 지리적 위치 때문에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나 암살과 폭탄 테러가 끊이지 않는 위험지대라는 사실이 조금은 두려웠다.


사리는 보통 폭이 1미터 정도 되고, 길이는 지방과 개성에 따라 다 다르다. 하지만 보통 5~6미터 되는 길이인데 길면 12미터를 넘기도 한다.

바느질 한 번 되어 있지 않은 한 장의 천으로 몸을 가리고 맵시를 내는 매우 실용적인 옷이 사리이다.


사리의 끝을 앞에서 뒤로 넘기는 것은 남쪽 사람들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뒤에서 앞으로 넘기는 방법은 북부 지방의 방식으로 유명하다.




난은 밀가루에 물과 소금만 넣고 평평한 세모 모양으로 빚어 탄두리라는 화덕에 구워 만든 빵이다.


필라프라는 볶음밥도 인기가 많은 음식 중에 하나다.

 

커리라고 하거나 까리라고 해야 그제야 고개를 끄덕거린다.


맛살라라는 양념은 인도인들이 죽고 못 사는 음식 재료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김치 없이는 못 사는 것처럼 인도 사람들은 맛살라 없이는 못 살 정도.


달이라는 음식이 있는데 부드럽게 삶은 코에 맛살라는 넣은 음식이다.


인도식 치즈인 빠니르


간식 중에 하나는 만두피 같은 것에 야채나 고기, 치즈등을 듬뿍 얹어 삼각형 모양으로 만들어내는 인도식 만두 사모사가 있다.


짜이는 찻잎에 우유와 설탕을 넣어 끓인 음료다.


라시 라는 음료가 잇는데 요구르트에 설탕과 물을 넣어 걸죽하게 만든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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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을 전공하고 가야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러시아사람이며 노르웨이에서 교수로 재직중인 박노자 교수의 글이다.

이 글은 4년간 한겨레에서 연재한 내용을 정리하여 책을로 엮은 것인데, 내용은 우리에서 여러가지 생각할 것들을 지적해 주고 있었다.

'우선 책의 추천사에서는 역사를 그린다는 것은 현재적인 선책의 문제이다. 역사는 언제나 미래를 지향하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다(E.H. 카)'
'이 책을 모두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그간의 한국고대사가 한반도에서 전개된 사람들의 풍성한 삶을 너무 단순화해온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집안 자랑이나 우리 동네 자랑 같은 사적이고 지역적인 역사 서술로는 상대가 되지 않으며, 무엇보다 그러한 수준의 한국사로는 국제적인 학술 세계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라는 표현들을 사용하면서 우리가 우리집안에서만 좋은 나라, 강성한 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세뇌를 시키는 것이 우물안 개구리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지지해 주고 있는 듯하다.

프롤로그에서 박교수의 말은 이 책을 더욱 인식하게 해주었다.
그는 '선택받은 민족'이란 구호를 늘 외치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고대만들기가 실제와의 괴리감을 지적하면서...
'이 책은, 아쉽게도, 한반도의 민족사학자들이 이스라엘 형 위대한 고대 만들기에 치중해왔다는 사실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지금 우리의 과제는, 지역 내의 이웃나라들과 보다 잘 어울리고, 다양한 소수자들에 대한 관용을 가지고, 피지배계급이 지배계습의 영향력을 견재할 수 있는, 성숙한 동북아시아의 사회민주적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광대토왕의 칼보다 고대 한반도 젊은 남녀들의 야합(중매 없는 자유 결혼)이 더 매력적이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썼다.'
'역사속에서 사람을 죽이는 전쟁보다 민중이 하루하루 사는 일상을 더 주목하는 사회를 그려본다.'
이처럼 책의 내용은 제국적인 위대함을 추구하기보다, 때론 소소한 때론 국제적인 때론 생활상을 보여 주기 위한 글들이 많이 있었고, 우리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본기등을 참조하며 중국과 일본사의 역사서들을 동시에 고려하여 좀더 사실적이고 객관적이며,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내용들이 들어있었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3부 일본은 언제나 우리의 적이었는가'의 내용들이 많이 와 닿았다.
어릴때부터 배운것은 일본놈은 왜놈이고 때놈이며 무자비한 놈들이다..
예전에는 체격도 조그만 놈들이었으며 우리에게 빌면서 문물들을 받아갔었다. 등
매우 어려운 나라이었으나, 잔머리 잘 굴려 한국을 무참히 짓밟은 야만족처럼 보이게 교육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의문이었던것은 그정도의 나라가 어떻게 위대함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우리 나라를 짓밟게 할 수 있었는가 였고, 그것을 국사책에서는 친일파들 때문이라고 그들을 몰아갔었다. 
그런가보다란 생각들은 들긴 했지만, 그래도 미심쩍은 부분들은 있었는데, 이 책은 그러한 것들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해 주었다.
일본은 백제의 문물을 받아 들이긴 했지만 백제와 일본의 친밀성은 꽤나 강한 면모를 가지고 있었고, 때때로 백제뿐 아니라 적략적으로 한반도에 군사력으로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는 점들, 한반도의 삼국시대에서 우리와 친교를 맺은 적인 한 두번이 아니었다는 사실들... 
이러한 사실들은 내 머릿속에 각인된 인식을 바꾸어 주기도 하며,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물론 다은 주제들도 우리가 단편적인 생각들에서 벗어나 지금의 시대에서 무엇을 더 생각해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점들을 던져 주기에 좋은 내용들이 들어있었다.
하나만이 정답이 아니라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보아야 하는 지금 우리 시대에 이 책은 하나 이상의 도움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아래는 박노자 교수의 인터뷰 글이다.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한 나만의 인상적인 글들을 남기는 스타일로 책을 기록하였는데 이 책은 인터뷰로 대신해도 될만큼 좋았다.

'평화의 민족.' 우리는 늘 이렇게 배웠다. '단군' 이래 반만 년의 역사 동안 한민족은 한 번도 외국을 침략해 짓밟은 적이 없었다고. 물론 미국의 베트남 침략에 동참한 사실이나, 윤관이 수천 명의 여진족을 살상하고 그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은 사실은 '파병' 혹은 '정벌' 등의 수사에 가려졌지만….

이렇게 '제국주의자의 희생자'이자 '평화의 민족'이 사는 한반도의 남쪽에 난데없이 '제국'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TV 드라마는 가장 대표적인 예다. 고구려 제국, 신라 제국에 이어서 최근에는 가야 제국, 백제 제국이 등장했다. 경상도의 한 구석에서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고대 국가를 놓고 '제국'이라는 딱지를 붙이다니….

과연 이들 한반도의 고대 국가는 제국이었을까? 예를 들자면, 고구려는 어땠을까? 정말로 <태왕사신기>와 같은 드라마나 이른바 '재야 역사학자'들이 쓴 책에서 나오듯이만주는 물론 내몽골, 시베리아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이었을까?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박노자 교수(한국학)의 견해는 다르다. 그는 <거꾸로 보는 고대사>(한겨레출판 펴냄)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광개토왕 시기의) 고구려가 랴오둥 지역이나 오늘날 지린성 지역에서 패권을 행사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그러나 (이 지역에서의 고구려의 영향력은) 근대 제국들과 달리 기껏해야 주변부 지역을 토착적 지배 집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할 수 있을 뿐이었었다. (…) 더구나 이 시기에 고구려가 정치·군사적으로 동북아시아의 강자가 되긴 했지만, 문화 차원의 영향력은 정치적 영향력에 비례하지 못했다." (57~62쪽)

이뿐만이 아니다. 고조선은 만주를 지배했을까? 만주 벌판과 한반도의 반쪽을 당나라에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한 신라는 민족의 배신자였는가? 백제, 가야는 물론이고 통일신라와도 긴밀한 동맹 관계를 유지했던 왜국(일본)은 왜 항상 '우리의 적'으로 즉 '왜구'로만 묘사되는가? 또 대중은 왜 이런 판타지에 열광하는가?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진보 논객'으로 알려진 박노자 교수가 답했다. 러시아에서 가야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박 교수는 국내외 학계의 성과를 갈무리해 민족주의, 대국주의, 근대주의의 틀에 갇히지 않은 새로운 고대사 읽기를 시도한다. 박 교수는 이런 새로운 시도를 '흘러가는 고대사'로 명명했다.

다음은 오슬로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는 박노자 교수와 이메일을 통해 오고간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20대의 러시아 청년, 가야에 반하다


▲ 박노자 오슬로 대학교 교수(한국학). ⓒ연합뉴스
프레시안 :
 이번에 나온 <거꾸로 보는 고대사>를 본 많은 독자들이 일단 당혹스러웠으리라 생각합니다. '박노자가 고대사?' 하지만 선생님께서 러시아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점을 염두에 두면 이런 고대사 책은 좀 늦은 감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 대중을 상대로 고대사 책을 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박노자 : 사실, 몇 년 전부터 주간지 <한겨레21>에 써왔던 '고대사' 관련 연재를 책으로 엮은 일일 뿐입니다. 연재가 끝나고서, 아무래도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책으로 엮는 게 좋다는 의견이 나와, 그 의견에 따라 이렇게 책을 출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연재를 약 4년 전에 시작했는데, 그 때만 해도 '북방 사극 열풍'이 한창이었습니다. '고대사'라면, 만주 벌판에서 중무장한 "우리 조상"들이 "남"인 중국인들이나 각종 유목민을 "영웅적으로" 무찌르거나 "억울하게 외침을 당하는" 일로 대중적으로 인식되곤 했습니다. 이러한 민족, 군사 위주의 고대사 인식에 문제제기를 하고 싶어서 연재를 시작했죠.

프레시안 : 고대 가야사는 한국에서도 그다지 학자들에게 매력적인 영역이 아닙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조선학과(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동방학부 조선학과)를 나온 20대 청년이 조선의 고대사에 또 특히 가야사에 관심을 가졌다는 게 이채롭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박노자 : 석사 과정 시절에 제 지도 교수는 11년 전에 서거하신 (물론 러시아와 같은 "후진 지역" 학계에 무관심한 국내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고(故) 니키티나(Marianna Ivanovna Nikitina) 레닌그라드 과학아카데미 산하 동양학 연구소 교수이셨습니다. 신라의 향가와 <삼국유사> 전문가이셨습니다.

그녀는 <삼국유사> 중에서 김해가야(남가야=가락국) 관련 기록인 '가락국기'를 많이 못 보셨다는 걸 아쉬워하면서 저보고 이를 러시아어로 번역하면서 역사적 맥락에서 연구해보라고 권하셨습니다. 저도 최초의 러역이다 싶어 신이 나서 번역도 하고, 거기에다 고고학적 자료를 덧붙여 남가야와 그 출신인 신(新) 김 씨 가문의 역사에 대해 논문을 제출했습니다.

그 다음에 박사 과정에서 2009년에 서거하신 고(故) 미하일 박 모스크바국립대학교 교수(2009년 서거)를 만났습니다. 그는 제가 '가락국기'를 번역한 걸 염두에 두고, 저보고 가야의 정치·사회 (국가 형성 단계), 그리고 특히 외교를 중심으로 논문을 쓸 것을 권하셨습니다.

1960년대에 가야인 등 고대 한반도인들이 일본을 "정복"해서 거기에 "분국"을 세웠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석형, 조희승 두 분의 학설을 미하일 박 교수가 반박하신 바 있었어요. 그는 본인이 그 때에 정밀하게 연구하지 못하신 걸 제대로 해서 가야 여러 나라와 일본 정치체 사이의 관계 형태를 알아보라고 권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러시아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가야학 박사"가 되었습니다.

프레시안 : 이 책에서 선생님께서는 가야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카의 지적을 염두에 둔다면, 지금 가야에 주목을 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박노자 : 가야는 '교류' 그 자체였습니다. 대가야가 있었던 고령에서 일본계 갑옷 등이 발굴되는 점으로 봐서 대일 교류가 활발했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문헌 자료를 보면, 함안의 아라가야가 대일 교류의 중심으로 부각됩니다. 이외에도 낙랑과 일본열도 사이의 교역을 맡은 것도 가야였습니다.

후기에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가야는 끊임없이 이런저런 '관계'를 맺으면서 병탄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거꾸로 보는 고대사>를 꿰뚫는 문제의식입니다만, 이런 '관계' 중심의 고대사를 보여주는 가야의 경험이야말로 지금 이 시점에 깊이 음미해 봐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만주 벌판을 차지했다?" 판타지 소설일 뿐

"고조선의 지배자들이 나름대로 그 휘하의 여러 소국들을 통솔할 만큼 강성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 당시 동북아에서 가장 선진적인 철 문화를 자랑했던 연나라에 비해 그들의 힘은 부족하기만 했다. (…) 즉 청천강이 연나라 세력의 영향이 미치는 남쪽 경계선이 된 셈이고, 고조선의 영향력은 청천강과 한강 사이의 영역에서 중점적으로 펼쳐졌던 것이다." (34~35쪽)

프레시안 : 최근에 고구려(<주몽>, <태왕사신기>, <자명고>), 발해(<대조영>), 신라(<선덕여왕>)에 이어서 백제(<근초고왕>), 가야(<김수로>)까지 고대사를 다룬 드라마가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혹시 관심 있게 봤던 드라마가 있습니까? 이런 고대 드라마 열풍을 어떻게 보십니까?

박노자 : 저는 좀 답답한 사람이에요. 텔레비전을 절대 보지도 않고 집에 두지도 않습니다. 다만 한국 대중문화 연구 차원에서 인터넷 사이트에서 VOD로 보려고 했는데, 유료 서비스일 경우가 많고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해 가입해야 볼 수 있는 게 많으니 저 같이 주민 등록 못하고 있는 외국 상주 교민은 뭘 보겠습니까?

그런데 거시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북방 드라마 열풍'은 아마도 한국 자본주의의 새로운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한 것 같아요. 국내 민중의 삶이 답답하고 날로 궁해지고 있지만삼성이 소니를 밀어내는 등 재벌들의 국제적 경쟁은 (초과 착취를 당하는 비정규직, 하도급 노동자들의 참상을 대가로 해서) 당분간 성공적으로 보이니까요.

또 이제 곧 바닥이 들어나 부동산 신화는 무너지겠지만, 또 여태까지 국민 혈세로 뒷받침되어온 4대강 죽이기와 같은 대형 토건 프로젝트들은, 또 건설 경기를 인위적으로 부양시켜 한국이 대공황을 '졸업'한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등 '주류'의 허위적 자만심을 제고시켰습니다.

더구나 국가가 국민의 혈세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같은 쓸모없는 국제 이벤트를 자꾸 유치해 개최하니 대한민국은 그 중산층들에게 좀 위대하게 보이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그러니 그 "위대함"을 자꾸 과거에 투영시켜서 "위대한 과거"를 만들어내고 즐기려 하는 셈이죠.

프레시안 : 이렇게 고대사가 대중문화의 소재로 쓰이는 반면에 정작 학계와 대중 사이의 거리는 굉장히 멉니다. 그 틈을 이른바 민족주의, 대국주의를 부추기는 재야 역사학자의 고대사 대중서가 메우고 있습니다. 이런 책의 시각이 앞에서 언급한 드라마에도 많이 반영돼 있고요. 이 책이 그런 흐름에 대한 일종의 반박이라고 볼 수도 있을까요?

박노자 : 뭐, "우리가 만주 벌판을 차지했다(고조선이 만주를 지배했다)", "한사군이 한반도에 없었다(낙랑이 랴오둥반도에 있었다)" 등 그 소위 "재야 사학자"의 저서 대부분은 사실 반박의 가치도 별로 없습니다. 그냥 별로 과학적이지 않은 판타지 소설이라고 보시고 읽으시면 되니까요.

저는 그저 근대적 "민족"과 같은, 고대사와 실제로 무관한 이념들을 제외시키고 되도록이면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최대한 복원해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근대 이후 만들어진 우리의 이념에 젖지 않은, 사실 그대로의 과거가 너무나 흥미롭고 매력적이기 때문이죠.

프레시안 : 이들 재야 역사학자들의 고대사 대중서는 한반도의 고대 국가, 특히 고조선, 고구려, 백제, 발해 등이 한반도보다 더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다는 것을 내세웁니다. 판타지 소설 같은 이런 설정은 독자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이 책은 크게 불편할 것 같습니다만….

박노자 : 말씀드린 대로, "고구려 제국"이니 "발해 제국"이니 그런 류의 책을 그저 판타지 소설로 읽으면 별로 문제없어요. 문제는, "상상 속의 과거"를 진짜 있었던 것으로 착각할 때부터 발생되죠. 또 그러한 류의 책을 쓰시는 분들이 자기 저서를 "역사 소설"이라고 명기하지 않고 "역사"라고 잘못 부르니 독자를 오도하게 되는 것이죠.

그게 도덕적으로 큰 문제라고 봅니다.

프레시안 : 이런 고대를 염두에 둔 상상력은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대표적인 '진보' 작가를 표방해온 황석영 씨가 이명박 정부의 '유라시아 문화대사'를 역임한 것도 판타지 소설 같은 대국주의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노자 : 한때 베트남에서 제3세계의 자원을 탐내는 미국 제국이 벌인 "더러운 전쟁"의생리를 폭로한 <무기의 그늘>이라는 명작(제가 가장 좋아하는 현대 한국 소설 중의 하나입니다!)을 남기신 분께서, "유라시아"를 "자원 보고"라고 생각하여 그 자원에 대한 한국 지배 계급의 기형적인 아류 제국주의의 욕망을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객관적으로) 대변하시게 되어서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정말 반제국주의자로 인생을 살기가 아주 힘든 일인가 봐요. 특히 한국처럼, 명실상부한 제국이 되지 못하면서도 그 논리를 완벽하게 내면화한 곳에서 말입니다.

신라는 민족의 배신자였는가?

김춘추와 김유신에 대한 비판의 목적이 한·미 동맹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라면 필자도 그 목적에는 동의한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한·미 동맹은 냉전의 산물"이라고 훈계한 중국 정부 쪽의 이야기는 외교적 결례일지라도 내용상 틀리지 않다. 그런데 오늘날과 본질적으로 달랐던 1500년 전의 상황에 오늘날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중국인들이 보기에 신라, 고구려, 백제는 서로 풍속이 비슷한 '삼한의 후예'였지만, 실제 신라인들은 고구려나 백제를 동족으로 보지 않았다. 세 나라는 각각 지배층 사이의 신화나 제사 체계는 물론 언어라든가 행정 체계 등이 서로 달랐던 데다 누적된 적대감까지 가미돼, 동족이 아닌 경쟁 세력일 뿐이었다. (101~102쪽)


프레시안 : 사석에서 한 신라사 전공자가 의외로 학계에서 신라사가 인기 있는 연구 주제가 아님을 고백한 적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 책에서 지적한 대로 1980년대 이후 좌파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남한 사학은 기존의 고구려-발해 중심의 민족주의 사학을 고수해온 북쪽 사학과 많이 유사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견해는 교과서에도 실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김춘추와 당나라의 밀약설("한반도의 반쪽을 당나라에 떼 준다")'이 언급되고 있으니까요. 또 대중도 암묵적으로 신라 때문에 우리나라가 만주 벌판을 잃었다,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2부('신라는 민족의 배신자였는가')에서 그런 시각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박노자 : 고대는 고대일 뿐입니다. <삼국사기>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잘못 대한 불효자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 나오는데, 그게 고대인들의 세계관 그대로입니다. 거기에서 '우주'와 (유교적) '도덕'은 그대로 중첩되고 도덕률을 어기는 자는 우주 속에서 더 이상 존재 못하고 천벌을 받게 되는 것이죠.

그런 고대인들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민족'은 존재할 리는 없었죠. 김춘추에게는 백제도, 고구려도 당나라와 똑같은 외국일 뿐이었습니다. 뭐, 고구려를 방문한 김춘추를 구금한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과연 그를 '동족'으로 대한 것 같습니까? 고구려와 신라는 피차 간에 본질적으로 같은 상대방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결국 김춘추 일파가 당나라의 천하통일 작업에 편승해 그 먼 외국과의 협력으로 가까운 외국인 백제를 정복하고 고구려 영토의 일부를 통합시켰습니다.

백제도 고구려도 7세기 중반 신라의 입장에서는 그냥 외국도 아니고 '숙적'이었습니다. 우리들의 '민족' 논리로 이를 비판하는 것이나, 불효자가 벼락을 맞아 죽는다는 고대인의 사고를 비과학적이라고 목청 높여서 비판하는 것이나 똑같은 일이죠. 도대체 고대를 왜 우리 기준으로 재단해야 합니까?

고대 일본은 '후진 종족'이었나?

신라로서는 왜인들이 서울인 금성까지 쳐들어와 며칠간 포위 공격(393, 405년)을 할 만큼 강군(强軍)을 가졌기에 왕자 미사흔을 볼모로 보내 우의를 맺을 정도로 대접해야 했던 것이고, 백제로서도 역시 왕자를 인질로 보내야 할 정도로 왜국과 주요한 파트너 관계를 맺고 있었다.

(…) 경주평야와 낙동강 유역은 물론 한반도 중부 지방(황해도)에서도 동북아의 강대국 고구려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신라·백제 왕자들을 인질로 데려가고, 백제왕의 즉위에 군사적 지원을 해줄 정도였던 왜인들이 과연 단순한 '후진적 오랑캐'였을까? 그들이 임나일본부를 세워 한반도 남반부를 다스렸다는 이야기야 낭설이지만, 한국 자료를 봐도 왜국은 한반도 정세에 큰 영향을 줄 만한 주요 세력 중 하나였다. (154~155쪽)


프레시안 : 이 책에서 독자들이 가장 불편하게 읽을 대목은 일본과의 관계를 언급한 제3부('일본은 언제나 우리의 적이었는가')일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고대 일본이 상식처럼 '후진 종족'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백제, 신라, 가야와 이질감도 크지 않은 나라였다고 지적합니다.

더 나아가서 선생님은 '임나일본부'와 같은 주장이 식민사학이 만든 허구일 가능성이 크지만,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것 역시 사실이라고 인정합니다. 이렇게 이 책에서 고대 일본과 한반도 국가들의 관계를 특별히 부각하는데 신경을 쓴 이유는 무엇입니까?

박노자 : 객관적으로 본다면 고대 국가로서의 고대 왜국(일본)의 성장은 백제, 신라 사이의 '중간' 속도였습니다. <송서> 등 중국 사료에 의거하면 5세기에 접어들어 이미 중국과 활발한 외교 교류를 했던 왜국은, 이미 4세기말에 고대 국가 건설 작업을 어느 정도 마친 백제보다는 조금 늦었지만, 일부 측면에서는 신라보다 약간 빠른 부분도 있었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의 역할 등을 생각하면 고대 한반도 국가들이 고대 일본의 성장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 반대급부로 고대 일본열도의 정치체도 한반도 군주들의 요청으로 한반도로 파병하는 등 '쌍방적' 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고대 한반도와 고대 일본열도 정치체 사이의 관계가 '쌍방통행'이었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것도, 자존심이 상할 만한 것도 전혀 아닙니다.

프레시안 : 이어지는 질문입니다만 3부를 읽다보면 박노자 선생님께서 고대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에 대해서 남다른 학문적 관심을 보여 온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의 연구에 특히 매력을 느낀 이유는 무엇입니까?

박노자 : 김석형 원사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동료들과 논쟁하신 적이 있었던 미하일 박 은사님께서 제게 특히 이 부분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할 것을 유촉하신 바 있었고, 저도 이 부분에 대한 민족주의적 신화에 대한 불만도 있고 해서 이 공부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프레시안 : 이 책은 <일본서기>와 같은 일본 측 자료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 <일본서기>는 일본에서도 '설화'를 짜깁기한 것이므로 엄정한 사료 비판이 필요한 자료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록 면에서는 부실하지만, 완전한 날조라고 볼 수 없는 어떤 현실을 반영한다"는 선생님의 시각이 비판받을 여지도 있을 듯합니다.

박노자 : 식민사학자들이 <일본서기>를 왜곡하여 '임나일본부'와 같은 날조된 역사를 만들어 이용한 것은 엄연히 사실이고, (<삼국유사> 등 한반도 계통의 여러 자료보다 더) <일본서기>가 다분히 설화적 요소를 내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본서기>를 그냥 무시하기에는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특히 <일본서기>에는 백제계 자료가 많이 살아 있고, '백제기' 등 한반도에서 남지 않은 백제 (내지 도일한 백제 유망인의) 기록들이 인용됩니다. 많은 경우에는 가필, 윤색을 거쳐 인용되지만, 어쨌든 이러한 귀한 자료를 그냥 무시만 할 수 없어서 제한적으로, 사료 비판을 가하면서 이용하려 했던 것이죠.

'조공'의 진실은 무엇인가?

근대적 주권국가론 입장에서야 조공이나 책봉이 '독립 포기'처럼 보이지만, 중원 국가와 비중원 국가 사이의 모든 외교 관계가 조공으로 인식됐던 전통 시대의 동아시아에서는 조공과 국가적 자주성은 얼마든지 양립 가능했다. 독립국임이 틀림없는 영국이 청나라에 최초의 사절단을 파견(1793년)한 것도 청나라 쪽에서는 조공으로 인식하지 않았던가?

(…) 그러나 조공을 단순히 허례로 치부해 조공 관계가 우리 고대사에서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도 민족주의 이념에 기반을 둔 '전근대사의 부적절한 현대화'에 불과하다. 적어도 고대사에서 중원과 중원 바깥의 나라들 사이에는 경제·문화 등 여러 영역에서 현저한 수준 차이가 나타났기에 조공은 큰 의미를 지녔다. (254~255쪽)


프레시안 : 선생님은 고대의 조공 체제를 근대의 국제 관계와는 다른 물적, 인적 교류가 포함된 관계로 봐야한다고 지적합니다. 이미 이삼성 한림대학교 교수(<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한길사 펴냄)) 등의 노력으로 그런 시각이 상당히 알려져 있습니다만,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박노자 : 조공이라는 것은 결국 중원 국가를 정점으로 설정한 서열적인 세계 체제였습니다. 조공 체제는 그 경직성 등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장점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잘만 작동됐다면 전쟁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었고, 또 조공 사절들을 통한 서적 교환부터 일정의 관무역 및 사무역까지 다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의학 서적 <황제내경>이나 불교 서적 <조당집> 등이 중국에서 자취를 감추어도 고려에 남아 있었다는 건, 조공을 통한 서적 구입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얼마나 문화적 영향을 끼쳤는지 잘 보여줍니다. 베이징으로 갔다 오는 조공 사절이 아니었다면 허균이 일찌감치 <수호전>을 얻어, 그 아이디어를 창조적으로 활용해 <홍길동전>을 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조공은 경직성과 위계성 등 단점들도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안정적이고 문화 교류의 통로를 보장해주는 국제 관계 시스템이었죠.

프레시안 : 이런 조공 체제에 대한 설명에 수긍하면서도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책을 읽다보면, 특히 자국 방어를 위한 고대 각국의 상호 동맹을 설명하는 부분은 근대 국제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즉 신라가 당과 협력해 고구려, 백제를 압박한 부분이나 고구려, 신라에 대항해 백제, 가야가 왜국과 연합하는 것 등.

박노자 : 조공이란, 한편으로는 중원의 문화적 선진성을 인정하는 '선진 문화 수입'이라는 측면도 있었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서열적 관계의 '장식' 뒤에 각자가 실리를 챙기는 관계이기도 했습니다. 신라는 당나라의 조공국이었지만, 670년에 당나라가 백제의 영토를 내놓으려 하지 않자 전쟁을 벌여서 그 땅을 자국의 영토로 만들었잖아요?

그게 조공이라는 형식 뒤의 또 하나의 현실이었는데, 저는 조공의 의미도 그 현실의 의미도 이 책에서 동시에 살리려 했습니다.

프레시안 : 책을 읽다 보면, 마치 논리가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목이 또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4부의 한 장('고대 한반도는 공포의 전제왕국?)'에서는 고대 국가가 일종의 합리적 조절자에 가까웠다고 보면서도, 그 다음 장('신라에 금속화폐가 왜 없었을까')에서는 고대 국가가 국가 위주의 사회였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박노자 : 돈(금속화폐)이 필요 없을 정도로 국가가 재분배 구조를 잘 운영했다면 상당히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국가라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방금 언급한 두 측면이 꼭 상충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와 관련해 다른 예를 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국가가 유통 체계를 철저하게 관리했던 신라에서는 이미 6~7세기에 동시전, 남시전, 서시전 등 시장을 관리하고 물가를 단속하고 상인들의 교환 행위를 조정하는 관청이 존재했습니다. 이런 시스템을 가동시키려면 상당한 정보부터 확보해야 했고, 국가는 고도의 통제 기능을 담지해야 했지요.

사실, 어떤 면에서는 이게 오늘날 남한의 국가 주도 개발이나 북쪽의 스탈린주의적인 국가자본주의 (이른바 "사회주의")의 고대적 '뿌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전통 속에서 이와 같은 적극적이고 개입적인 국가가 없었다면 과연 근대적인 초고속 개발은 가능했겠습니까? 부작용(국가주의 이데올로기 등)도 많지만 말입니다.

다문화 상생 사회를 만드는 첫걸음

대한민국의 교과서나 개설서야 원효를 '신라 고승'이자 '한국 불교의 자랑'으로 호명하지만, 원효의 저서에서 신라라는 고유명사는 기껏해야 몇 차례밖에 보이지 않는다. 백제로 이주한 보덕에게 불교 교리를 배우고, 고구려 출신 승랑의 학설을 계승한 길장의 삼론학을 하나의 바탕으로 삼았으며, 사후에 고국 신라보다 오히려 일본에서 더 유명해진 원효를 신라 사상가라기보다는 동아시아 사상가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73쪽)

프레시안 : 책 전체에서 '고여 있는' 민족사 대신 '흘러가는' 고대사를 강조합니다. 이런 시각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박노자 : 한국은 무역 위주의 국가고, 가면 갈수록 외국계 인구가 많아지는 국제 자본 축적의 중심 중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타자를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역사야말로 현재의 생활에 가장 닿아 있고, 또 그 생활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한반도의 고대사를 '흘러가는' 것으로 파악하면 바로 그런 점을 볼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 : 흘러가는 고대사를 상징하는 인물로 장보고, 원측, 원효와 같은 이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런 인물을 통해서 특히 강조하고 싶었던 점은 무엇입니까?

박노자 : 활동에도 배움에도 국경이 없다는 것이죠. 중국에서 활동하다 죽은 원측의 <해심밀경소>가 티베트어로까지 번역돼 오늘날 티베트 불교의 주류인 가규파의 창시자 총카파에게 큰 영향을 미쳤어요. 원효는 중국에 가지 않았지만 중국과 일본에서 아주 유명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고대 한국 문화는 동아시아의 '허브'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었죠.

프레시안 :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이 책은 다문화 공동체로 가는 한국 사회를 염두에 둔 듯합니다. 귀화한 한국인으로서 선생님 자신도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주체이지요. 선생님의 경험을 염두에 두면, 다문화 공동체에서의 역사 교육이 어때야 할까요?

박노자 : 말씀드린 대로 '관계' 중심의 역사, 오늘날의 '민족'이 개입돼 있지 않은 역사를 가르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예컨대 베트남계 한국인들이 명나라, 청나라 시절에 베이징에서 조선 사절들과 베트남 사절들이 만나 필담하면서 시를 주고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한국에 대해 훨씬 가깝게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새로운 역사 전쟁…민족주의 vs 탈민족주의


▲ <거꾸로 보는 고대사>(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프레시안 :
 이 책의 추천의 글을 쓴 일본 와세다 대학교의 이성시 교수가 인용했듯이 일본의 역사가 이시모다 쇼는 "고대는 언제나 새로운 사상과 오랜 사상이 투쟁하는 장"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선생님의 책은 전반적으로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 간의 투쟁으로 읽힙니다. 앞으로 고대사 연구자로서 어떤 연구를 진행 또는 계획 중입니까?

박노자 : 저는 비록 고대사를 전공한 "가야학 박사" 출신이지만, 요즘에는 연구를 주로 한반도의 근대사 위주로 합니다. 그러나 예컨대 근대의 사상가였던 신채호와 최남선의 고대사관 관련의 연구를 꼭 계속해서 오늘날 '민족사관'의 뿌리를 더 자세히 밝히려는 욕심은 있습니다.

프레시안 : 이 책의 뒤에 붙은 참고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선생님께서는 국내외 한국 고대사 연구의 성과를 두루 섭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한국 고대사 연구 그룹과의 관계는 긴밀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짐작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박노자 : 저야 고대사를 하다가 만 데에 대한 마음의 빚도 있고 해서, 고대사를 주제로 공동 연구를 하자 하면 웬만하면 수락하여 같이 할 마음의 준비는 다 돼 있습니다. 그런데 국내 연구자들로부터 그러한 초대를 받은 일은, 적어도 최근에는 별로 없었습니다. 제가 한국 교수라면 누구나 안식년을 가서 골프를 즐기고 싶은 미국 등 '천하 중심'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관점도 국내와 많이 다르고 해서 이렇게 별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프레시안 : 책 전체에 걸쳐서 추천의 글을 쓴 이성시 교수의 <만들어진 고대>(박경희 옮김, 삼인 펴냄)와 공명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선생님이나 이 교수와 비슷한 입장에서 고대사 연구를 진행하는 이들을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박노자 : 네, 국내에서는 근·현대사 분야에서 윤해동 선생님 등 일부 '탈민족주의적' 연구자들이 계셔서 저도 많은 협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사 분야에서는 아무래도 '민족사관'의 영향력이 아직도 절대적입니다. 세부적 연구는 탈이념화될 수도 있지만 전체적 그림은 역시 '우리 민족사' 차원이죠.

프레시안 : 고대사는 사료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료 비판의 중요성을 무엇보다 강조하는 역사학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좀 더 대담한 사료 해석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유난히 추측성의 표현이 많습니다. 사료 해석을 비롯한 근대 역사학 일반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를 간단히 듣고 싶습니다.

박노자 : 독자에게 경고해야 할 일입니다만, 결국 고대사 서술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알고 있는 한"의 복원의 시도지 "완벽한 파악"은 절대 아닙니다. 자료가 적다 보니 많은 경우에는 '추측'을 하게 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독자에게 미리 알리고 하면 꼭 나쁜 일만 아닌 것 같습니다. 단, 추측을 "정확하게 아는 사실"로 가장하면 문제가 큽니다.

불교가 꿈꾸는 세상을 만드는 길

프레시안 : 이왕 인터뷰를 하는 김에 독자들이 박노자 선생님에 대해서 궁금할 법한 것들을 몇 가지 묻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불교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표현해 왔습니다. <불교평론>에 최근 10년간 몇 편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었지요? 혹시 불교 신자로 개종한 것입니까?

박노자 : 네, 연기론, 무아론, 열반론을 믿는 차원에서는 신자가 맞습니다. 단, 국내 불교 사찰들의 '대학 입시 기도' 같은 의례 장사라든가, 교계의 중생의 아픔에 대한 무관심이 마음에 걸려서 사찰에는 잘 안 갑니다. 조계종 신도 등록도 안 했습니다. 불자로서 지켜야 할 까다로운 덕목을 염두에 둔다면, 여전히 참다운 불자가 되도록 노력 중이라는 답이 좀 더 정확하겠군요.

프레시안 : 특별히 불교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이유가 있습니까?

박노자 : 아무래도 신구의(身口意) 삼업, 즉 나의 모든 행위가 결국 악업 내지 선업이 된다는 것이 가장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행동은 물론 생각도 윤리적으로 해야 한다는 논리는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예컨대 부처님의 근본오계 중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죽이지 말라'는 계율을 생각해 볼까요?

저는 군인이나 경찰에 속하거나 도살장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기에 중생에 대한 살해를 '직업상' 입힐 일이야 없습니다. 하지만 <범망경>에 나온 부처님 계율의 내용을 보면 단순히 직접 살해만 금한 것이 아니고 '방편으로 죽이는 것', '죽임을 찬탄하는 것', '죽임을 보면서 기쁘게 따르는 것', '죽임의 인(因)을 만드는 것', '죽음에 대한 기쁜 뜻을 가지는 것'도 아울러 죄로 정해진 것입니다.

만약 '죽임의 인을 만드는 일'까지 문제시 한다면, 비록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수십 명의 군인들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략의 현장에 국비로 파견한 노르웨이 정부에 세금을 내는 저의 입장은 곤란해집니다. 피할 수 없는 일들이니까 그냥 눈감고 하는 수밖에 없지만, <법망경>의 말씀을 생각하면 마음에 적지 않게 걸립니다.

이렇게 불교는 단순한 의례 참여 여부나 행동으로 신자의 진실됨을 판단하는 차원을 초월하여 몸과 입, 생각 차원의 실천을 요구하는 가장 깊고도 '잘하기 어려운' 종교입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불교에 매료되었고 또 잘 안 될 때가 많습니다만 지금도 참다운 불교 신자가 되도록 노력 중입니다.

프레시안 : 말씀을 듣고 보니, 최근 <한겨레21>에 '국가의 살인'을 연재 중이라는 사실이 떠오릅니다.

박노자 : 방금 얘기했듯이 살인은 불교에서 최악의 악업이지만, 계급과 국가가 존재하는 한 살인은 제도적으로 늘 존재했습니다. 오히려 가면 갈수록 극악무도해지고 있지요.

이번 연재를 통해서 국가와 계급을 폐지시키는 사회주의적 혁명 ('혁명'이 꼭 '폭력'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을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혁명이야말로 세계 대전과 같은 가장 무서운 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어쩌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내지 변혁만이 불교가 원칙상 꿈꾸어야 하는 비폭력적 세상을 건설하는 길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습니다.

칼 마르크스, 에리히 프롬, 함석헌…

프레시안 : '프레시안 books'의 독자를 대신해 몇 가지 더 묻겠습니다. 평소 영향을 받은 사상가를 꼽아 주십시오.

박노자 : 국외는 아무래도 칼 마르크스와 에리히 프롬이고, 국내는 함석헌 정도일 듯합니다.

프레시안 : 항상 옆에 두고 즐겨 읽는 책이 있습니까?

박노자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트로츠키의 문학 평론, 빅토르 세르주의 자서전(<한 혁명가의 회상>) 등을 자주 읽습니다. 그저 영감을 얻으려고요. 최인훈의 <광장>도 자주 읽는 작품입니다. 또 김수영 시집도 자주 보고요.

프레시안 : 선생님께서는 러시아에서 한국어를 교육받았으면서도 유려한 한국어 글쓰기로 일찌감치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별한 글쓰기 비법이 있습니까?

박노자 : 그냥 좋아하는 책과 논문 등을 자꾸 읽고 거기에서 이용되었던 표현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나중에 자기 글을 쓸 때에 적당히 이용하면 되는 듯합니다. 결국, 그 표현들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관건 아닐까요?

프레시안 : 앞으로 저술 계획이 있습니까? <신채호 평전>, <한용운 평전> 등을 준비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박노자 : 네, 당장은 한글 저작으로서는 <신채호 평전>이 급합니다. 그리고 잘되면 금년 말이나 내년 초에 러시아 말로 <한국사 개설서>를 낼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미 나왔어야 됐는데, 지금 출판사 사정으로 출간이 다소 지연되고 있습니다.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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