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의 글


우리 인간은 기능적으로 가장 탁월한 두뇌를 지닌 것은 분명하지만 현명하다는 데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 최재천(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  8



저자 소개 - 스테판 에셀은 누구인가?

'세계시민주의'를 온몸으로 실천한 인물이다. 세계시민주의 정신으로 무장하여 인권, 불법 체류자와 노숙자 문제, 불평등 문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등에 맞서 뜨겁게 투쟁해왔다.  14


질문자 : 질 방데르푸텐

답변자 : 스테판 에셀


그 옛날 우리가 제안했던 개혁안들을 지금도 그대로 적용할 수는 물론 없지요. 또한 그 시절을 맹목적으로 따르자는 식으로 추진해서도 결코 안 됩니다.

그러나 당시 우리가 추구했던 가치들은 아직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는 그 가치들을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공화국의 가치, 민주주의의 가치들이기 때문입니다.  23


저항이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우리 주위에 터무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에 강력히 맞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인 줄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단정하고 체념하는것, 그것을 거부해야 하는 것이지요.  24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면 주로 어떤 것을 꼽을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경제적인 것들이겠지요. 사회적 불평등 말입니다. 즉 상호연결된 지구촌 안에 극단적인 빈부의 형태가 공존한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단지 부자 나라, 가난한 나라가 있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진다는 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불의에 저항하는 일...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성적으로 상황을 개선하려면 깊은 성찰이 필요하고 설득력 있는 글을 써야 합니다. 또한 현명한 정치인이 당선되기를 바라며 민주적으로 선거에 참여해야 합니다. 요컨대 이 시대의 레지스탕스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말이지요.  25


인생에 대해 중대한 결저을 앞둔 청소년들을 만나면 저는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무엇이 너희를 분노케 하는지, 무엇이 참을 수 없는 일인지 스스로 한번 물어보라. 그리고 그 답을 찾았다면, 그에 맞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싸울 것인지를 알려고 노력해보라."고 말이지요.  26-27


질 : 저항은 단지 지성(知性)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실천이 있어야 하고,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에셀 : 저항이란 단지 문제를 깊이 생각하거나 상항을 조리 있게 서술하는 데서 그치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행동이든 실천으로써 보여주어야 합니다.  27


질 : 명확안 입장을 취하고 참여한다 함은 필연적으로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선택인가요? 때로는 표현의 자유마저 포기해야만 하는 것인지요?

에셀 : 위험을 무릅쓸 수밖에 없다면 그건 그만큼 참여하는 여러분의 뜻이 결연하다는 징표일 뿐이지요.  29


진보란 현재 실제로 존재하는 여러 힘드르이 협력에 의해 가능하다고 확신합니다.  30


전 지구적인 시민정신이 필요한 때입니다.  32


지구와 환경의 파괴는 지금 세계 어디에서나 부딪히는 두 번째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33


에너지나 자원의 과소비를 줄이는 일에 젊은 세대가 참여하는 것 역시 구체적인 참여 행위에 해당합니다.  34


질 : '발전' 개념에 있어서는 미국이 주도해온 자유주의 사고방식이 아주 오랫동안 세계를 지배해왔는데요.

에셀 : 진정 사람을 잘 살게 하는 발전이란 국민총생산(GNP)의 수치로는 측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경제 발전보다는 우리 스스로 좀 더 나아졌음을 의식할 때 비로소 발전했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게 되지요. 다시 말해 교육, 건강, 개인의 문화나 정체성 보호 면에서 나아졌음을 경험할 때만이 진정 행복한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36


빈곤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들 빈국을 상업적인 다국적 기업의 침탈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그리고 발전의 토대가 되는 요소들을 육성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해야 하지요. 

학교 교육과 문맹 퇴치, 혹은 건강 보장에 주력해야 합니다. 또한 농업처럼 땅과 가장 가까운 생산을 장려해 최대한 자급자족을 실현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부자 나라들이 대폭 지원하는 과잉 수입에 대한 의존성을 줄임과 동시에, 자국의 고유한 자원을 개발하고 지켜내는 데 주력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이 차츰차츰 실행되어야 합니다. 그 길만이 빈국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됩니다.  37


저는 '지속가능한(durable)' 발전이라기보다는 '지탱가능한(soutenable)' 발전이라 해야 타당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지속가능한'이라 할 때 그 지속 기간이란 대체 무엇이지요? 

발전의 토대는 천연자원입니다. 그런데 지구가 점점 훼손되고 있으니, 우리는 개발에 필요한 자원들을 더 이상 지구로부터 공급받을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탱가능한 발전이라 한것은 야만적인 방법으로 단기간에 자원을 착취애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쓴 말입니다. 

계속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39


질 : '발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논의 대상 아닌가요?

에셀 : 발전이 기술과 에너지에만 국한된 의미라면  현실적으로 우리는 더 많은 부존자원을 보유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을 뿐더러, 발전 또한 보유한 자원에만 기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우리의 자우너들은 생태적 균형과 양립하여 개발되어야 합니다.

좀 더 지구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부유해진다는 것은 사용 에너지의 양이나 금전적 수이그이 증가처럼 단지 양적(量的)인 결과로 드러나는 풍요로움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문화, 정신, 윤리 등이 풍부해져야 합니다. '항상 더 많이'라는 말로 촉발되는 생산 위주의 생각은 이제 끊어버려야 합니다.  43-44


생태주의자로 산다는 것은,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단지 자연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기능에 대해 진일보한 배움을 통해 꺄들은 인간이 진정 새로운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47


질 : 문화를 완전히 개방했을 때의 역효과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서구 문화와 본질적으로 매우 다른 문화 전통을 지닌 나라들이 서구 발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소비지상주의 이데올로기에 그냥 침탈당하고만 잇다는 사실을 어떻게 분석하시나요?

에셀 :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문화의 행복한 다양성을 수호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 있습니다. 특히 농업에서 그런 목표가 필요합니다. 유전자 변형 식품(GMO)과 그것을 유통시키는 다국적 기업들은 정말 위험 요소입니다. 이는 문화의 다양성을 제한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문화의 다양성을 보호할 뿐 아니라 모두가 서로 다른 문화를 존중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저마다 자기 문화를 누릴 권리,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자기 문화를 존중받고 인정받을 권리, 이런 권리가 보장될 때 다양한 문화가 공존할 수 있고, 더불어 대결이 아닌 다른 가치가 창출될 수 있습니다.  62


질 : 경제 위기에 대해 사람들은 규제 부족을 원인으로 지목하는데요.

에셀 : 세계적인 위기기 휩쓸고 간 뒤 우리가 사는 이곳은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고달픈 세상이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금융화된 세계 경제에서 막대한 이득을 취하는 자들에 의해 이렇게 된 것입니다.  66


클로드 알팡데리는 사회적 , 연대적 경제를 진흥시키려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에 의하면, 이윤 개념에 갇혀 있는 자본 경제 말고도 다른 경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형태 말고도 연대적 경제의 여러 형태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70


우리에겐 레지스탕스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저 저항만 한다고 해서 레지스탕스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항 그것은 창조요, 창조 그것은 저항이다"라고. 

항상 긴장해야 하고 항상 창조적이어야 합니다. 저항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무엇이든 단순화하려는 시도는 굉장히 위험한 사고입니다. 지혜롭게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지혜로운 사고는 지성이나 창의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균형 감각에서만 나옵니다.  73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일보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편이 훨씬 쉬운 법이지요. 전략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리하는 작업입니다. 우리가 곧 맞닥뜨릴 문제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전략은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수립될 수 있습니다.  74


엔지오들은 국제사회에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아햐 합니다. 

엔지오의 권한이 팽창된다고 위협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국가는 엔지오가 가져온 성과 중에서 자국의 이익이 될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76


사르트르의 말.. "사람은 진정으로 참여할 때, 그리고 자신의 책임을 느낄 때 비로소 참된 사람이다."  85


우리가 수많은 장애물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덜 폭력적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떠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86


이제는 혁신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지나친 전통 존중이나 노인들의 권위 때문에 젊은이들의 창의성이 위축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활발한 세대간 교류는 매우 바람직합니다. 노인들은 젊은이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잘 배워야 하며, 젊은이들 역시 노인들의 축적된 경험에서 뭔가 배우는 게 있어야 합니다. 

잠재된 여러 뷔험을 결코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위험이든 모두 우리가 맞설 수 있고 뛰어넘을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 됩니다.  92



세계 인권 선언 내용




해제 - 분노하고 참여하라(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스테판 에셀은 무관심은 최악의 태도라고 얘기한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요소 중 하나인 분노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참여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스테판 에셀은 "무엇이 너를 분노케 하는지, 무엇이 참을 수 없는 일인지 스스로 한번 물어보라. 그리고 그 답을 찾았다면, 그에 맞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싸울 것인지를 알려고 노력해 보라"고 말한다. 사실 분노라는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참여할 수 있다. 나의 문제, 주위에 있는 사람의 문제, 사회의 문제에 대해 내가 느낀 분노를 드러내는 방법이 바로 참여이기 때문이다.  114-115


에셀이 분노하는 중요한 문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극단적으로 심각해지는 불평등의 문제이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불평등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아프리카 등에서는 5초마다 열 살 미만의 어린이 한 명이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고 있는 반면, 선진국이라고 하는 국가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서 각종 성인병이 늘어나고 잇다. 기막힌 일이다. 한 국가 내에서도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빈곤이 대물림되는 현상 또한 날로 심각해지고 잇다. 15세 때 가난하면, 그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 확률이 지극히 높다. 비싼 집값, 점점 벌어지는 임금격차, 점점 줄어드는 일자리... 이런 것들은 많은 청년들에게 절망을 안겨 주고 있다., 이런 현실에 대해 스테판 에셀은 분노한다.

둘째, 지구환경이 위기에 처해 있다. 핵(원자력)발전의 위험, 날로 심각해지는 기후변화, 식량위기, 자원고갈... 이런 문제들이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잇다. 스리마일, 체르노빌, 후쿠시마로 이어지는 대형 핵발전소 사고는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켰을 뿐 아니라, 넓은 땅 덩어리를 수백 년 이상 오염시키고 있다. 그리고 누출된 방사능이 세계 곳곳으로 퍼져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후변화 또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지구의 온도가 0.8도 올랐을 뿐인데, 전 세계가 홍수와 가뭄, 해수면 상승 등의 피해에 시달리고 있다. 이대로 방치한다면, 앞으로 더 빨리, 그리고 더 높이 온도가 올라갈 것이다. '유엔 정부 간 기후변화위원회(IPCC)'에 따르면 이번 세기말까지 최대 6.4도의 온도상승이 예상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1~2도만 올라도 재앙이 올 것이고, 3.5~4.5도가 오르면 생물종의 40~70%가 멸종할 상황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홍수와 가뭄, 사막화가 식량위기를 가속화시킬 것이다. 이미 세계의 곡물가격은 널뛰기를 하고 있고 식량위기가 현실화되고 있다.

이것은 물질과 성장만 추구해 온 선진국들이, 그리고 그동안 물질적 풍요를 누려온 세대가 초래한 사태다. 그 결과 이 사태에 대해 아무 책임 없는 어린이, 청소년들 및 미래세대가 이 모든 문제로 인한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스테판 에셀 역시 이런 현실에 분노하는 것이다.  115-117


기후변화의 가장 큰 희생자 역시 가난한 국가, 가난한 사람들이 될 가능성이 높다.  117


에셀은 생태위기를 보면서, 환경문제도 인권문제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의 권리와 자연의 권리를 동등하게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생태주의자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도 자연의 하나라는 점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118


문제는 정치에 있다.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대안에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119


구체적으로 에셀은 경제, 사회분야의 안전보장이사회를 만들 것과 세계환경기구(WEO:World Environment Organization)를 만들것을 제안한다.  120


스테판 에셀은 이 시대의 레지스탕스는 기차를 폭파할 것이 아니라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설득력 잇는 글을 가지고 투쟁'하고, '현명한 정치인이 당선되기를 바라며 민주적으로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121-122


우리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은 바로 절망이다. "손을 쓰기엔 너무 때늦은 게 아닐까요? 이젠 틀렸습니다. 더 이상 아무 대책도 없어요. 우린 다 끝난 것입니다."

이런 절망이 우리를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좌졸과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절망하는 대신 분노하고 참여해야 한다.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행복과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있다. 그것이 95세의 깨어 있는 한 노인이 지구 위에 사는 청년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다.  122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내용보기 


스테판 에셀의 <정신의 진보를 위하여> 내용


스테판 에셀의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내용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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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프랑스에서 최고의 책이라고 한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정치사건들도 참 많은데 외국의 정치까지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다.
내가 아는 사르코지는 해외토픽으로 종종 보았던 젊은 미모의 아내 또는 스캔들.. 이런것들 뿐이었다.

처음 책 제목을 듣고는 느낌이 좋지 않았으나 애써 인간적으로는 기대하지 않아도 본을 보인 내용들이 어느정도 이상은 나올꺼야라는 말도 안되는 기대를 하였다.
물론 내심 기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기대를 하고 싶은 제목도 아니었다.

한국보다는 7개월여 빨리 이루어지는 프랑스의 대선.. 7개월여 먼저 대통령직을 숳행하는 프랑스..
그런데 7개월 빠른 시간에 대한민국의 정권을 선행한 정권이었다는 점에 기가막혔다.
프랑스 국민들에 대해 괜히 정이 간다. 가재는 개편이고, 초록은 동색이라 했던가.. 그들의 고통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내용을 읽으면 읽을 수 록 왜 프랑스 대통령이 아니라 지금 한국의 대통령에 대한 내용을 읽는듯한 느낌이 들었을까..아~~ 애둘러 쓰려니 머리가 아프다.

읽을 수록 책에 짜증이 났다.
'왜 내가 이런걸 읽어야 하지?' , '굳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인데 뭐하러 번역하나' 번역자에 혼자서 짜증을 부려보기도 한다.
이런 부류의 책이야 당연히 관심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해서 나온것인데, 정작 읽는 사람들은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인것 같다.
책의 말미에도 나오지만 소수의 기득권은 진입장벽을 만들며, 대다수의 소시민들을 바쁘게 만들어 생각하지 못하게, 알지 못하게, 알아도 움직일 수 없는 무기력증을 증가시켜 놓는다. 그러니 알 수 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나 역시도 별 수 없는 사람중에 한 명일 수 밖에 없다.
저자는 부자들의 행태를 연구하는 학자이며 학계에서 꽤나 인정을 받고 있는 부부학자이다.
이들은 글을 쓰고 사례들을 연구 조사하면서 얼마나 무기력함을 느꼈을까.
마지막 챕터에서 전달하는 메시지를 위해 그들은 사례들을 싣고 내용들을 전해가면서 가슴을 쳤을 듯 하다.

책을 읽으면서 자본주의 자들에 의한 과두권력은 결코 사르코지주의가 아니라 그들만의 리그라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나게 한다.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의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는다. 사르코지는 어떻게 교묘하게 잡히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비굴하게 그들에게 굴복해야 한다. 그렇게 반면교사가 되어가야 한다. 물론 그러면 더 교묘하게 정권을 휘두를 존재가 나타나게 되지는 모르지만.  
책에서 우리는 멍청하고 비굴하며, 살아남기 위해 교활함만 발휘하는 한 정치인을 보는것이다. 


과연 민주주의가 정답인가?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그나마 제일 나은것이기에 따를 뿐이다. 다시말하면 모순투성이이지만 조금은 덜 하다는것일뿐.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고, 무엇을 따라야 하는지 생각해야만 하는 시점에 있다.

이 책에 관심을 가지지만 더러운 내용이라 읽기 싫다면 '시작하는 글'의 4장짜리 서문만 읽어도 다 읽은 것이라 생각이 든다.(그래도 조금 적다 싶으면 그전에 나오는 목수정 작가의 추천글에 모든 내용들이 요약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무엇을 할 것인가'만 읽으면 될 것이다. 저자는 무슨 의도로 이 내용을들 서술했는지 모든 내용이 집약되어 있다.
이런 문제에 뚜렷한 답이 있을 수 있겠는가.. 뚜렷하진 않아도 해볼만한 결론은 있다.
다만 소수의 기득권은 그런 해결책에 대한 방어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하고 있긴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해볼만할 수 있다.

표지에는 "반면교사 사르코지를 통해 MB를 본다" -파리에서 작가 목수정
"소통없는 정권이 민주주의에 드리우는 불안한 그림자" - 르몽드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서 다행일지 모른다.
한국에서 한국 작가를 통해 이런 책이 쓰여진다면 지금의 한국에서 책이 출간되었을때 어느정도의 여파가 일어날까..
당신의 상상에 맞긴다. (다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매우 암담하다.)
암담함을 이기려면 답은 결국은 뭉치는 것이다. 쉽지 않지만 여러곳에서 반복해서 듣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여 뭉쳐지지 않을까... 제발 그렇게 되기를 기대한다.




한국 독자들에게 드리는 추천의 글 - 목수정
"계급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현실이다. 그러나 이 전쟁을 주도하는 것은 내가 속한 부자 계급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쌍무에서 이기고 있다."  - 워런 버핏
계급투쟁은 언제나 크고 작은 폭으로 역사 속에서 진행 중이었다. 지금 벌어지는 계급 투쟁은 매우 노골적이며 전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12
사회 저소득계층의 저조한 투표율, 그리고 부자계층이 맹렬히 연대하는 높은 참여수준의 계급투표  15

시작하는 글
이 불확실한 투쟁에서는 상대의 수단과 방법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급선무이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그들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이 책은 그것을 이해하는 데 문을 약간 열어 줄 것이다.
그들은 그저 가장 힘 센 사람들일 뿐이다.  22
엘리트들의 음모에 맞서 이기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는 것이 첫 번째 투쟁목표이다. 그리고 좌절한 서민들을 상대로 단호한 심리전을 전개하는 사람들에게 비판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것도 투쟁이다.  24


19세기 정치가 프랑수아 기조가 외쳤던 그냥 '부자가 되자'는 메시지에 더 가까웠다.
부자들은 자기들 가운데서 더 유능한 자의 승리,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자신의 우수성을 결정적으로 입증한 사람의 승리를 축하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32

2007년 테파법(TEPA)이라는 이름의 '노동고용 및 구매력에 관한 법'이 이미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더 우대하고 있다.  34
"납세자에게 자기 수입의 절반 이상을 국가에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틀 일하고 그중 하루치를 국가에 바치라는 게 말이 되는가?" 대통령이 짐짓 순진한 체하면서 던지는 질문이다. 

사람들을 속이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대통령의 그럴 듯한 주장은 세 가지 논리로 반박할 수 있다.
첫째, 잡세 대상이 되는 수입 가운데 노동으로 번 수입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수입에서 많은 부분은 이익배당이나 재산 가치상승, 기타 유가증권, 공동투자 펀드 같은 동산과 토지, 건물 등의 부동산, 자본수입니다.
둘째, 조세상한제의 이름으로 혜택받는 것은 소득총액이 아니다.
셋째, 세금 계산 때 납세자의 사회비용 분담금을 조세 상한선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35-36

흥미롭게도 2007년 9월 30일, 2722 가구만이 조세상한선 실시전 세율로 납부한 세금을 환불해 달라는 신청을 함.
환불 요구 권리 있는 9만 3천 가구의 2.9%에 불과한 숫자이다.
한 세무전문가의 설명은 "조세 상한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조세 담다 관리 앞에 본인이 직접 나가서 모든 것을 솔직히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무 관리들은 무언가 숩ㅁ긴 것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게 되고, 그러면 당연히 신고내용을 철저히 검토하게 되기 때문이다."
"조세 상한 혜택을 신청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사회의 열등생들이다. 납세 관련 조항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정말 약삭빠른 사람은 그런 싱청을 하지 않는다."  38-39

참으로 수치스러운 사례 하나를 소개하면, 2009년 12월 이후 근로사고 희생자들에게 지급하는 보상금이 소득으로 간주되고, 그래서 과세 대상이 됐다. 거센 분노를 불러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이 파렴치한 제안은 채택됐다. 이 항목으로 과세될 세금 액수가 2억 3천만 유로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문제는 이러한 개혁이 국민의 이름으로 제안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니콜라 사르코지는 위임일인 2007년 5월 6일부터 "나는 국민들로부터 이런 변화를 추진하라는 권한을 위임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42

스스로 자신들을 필요불가결한 존재라고 믿고 있는 부자들은 곧잘 프랑스를 떠나겠다고 위협한다.  43
지배층은 항상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이익을 챙기는 쪽으로 계급 전쟁을 이끌어 간다.  44

2003년에는 감세할 수 있는 틈새의 수가 418개로 추산됐다. 그런데 2008년에는 이 숫자가 48개로 늘어났다.  46

권력이 집단을 형성해 서로 긴밀한 과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의 손에 모두 들어가 있는 것을 과두권력이라고 부른다.  58


니콜라 사르코지, 만약에 그가 2012년에 재선되지 못하면 권력 네트워크는 그의 진영이나 다른 진여에서 언제든지 그의 대타를 찾을 것이다.
우익이나 좌익 진영 모두 금융자본주의에 제일 유리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최고의 책임 있는 지위를 맡을 인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과제이다. 니콜로 사르코지도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 과두권력의 핵심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지도자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있다. 1980년대에 은행 국유화를 단행한 것이 사회주의자들이었지만, 얼마 후 은행을 다시 민영화한 것도 사회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67-68

이념전쟁에서 텔레비전은 가장 중요한 전략적 주제이다. 이 이미지 상자는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조종하는 가공할 도구이기 때문이다.  92
"이제 위선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프랑스 텔레비전의 제1주주가 국가인데 왜 내가 그 사장을 임명해서는 안 되는지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니콜라 사르코지는 은연중에 '짐이 국가다'라고 말한 루이 14세처럼 행동했다.  97

물질적이고 상징적인 이익을 받은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계에서 성장한 상류계급의 자녀들은 성년이 되어서도 같은 특혜를 기대하도록 성격이 형성된다.
권위에 대한 선망도 독서나 음악에 대한 선망처럼 만족과 쾌감을 주고, 더 내면적인 자기 자신의 성취감을 느끼게 하며 제2의 천성이 된다.  114

좌파 정치인 장-피에르 브라르는 "사르코지는 우리의 건망증을 이용한다. 그는 놀라운 성과를 약속하는 탁월한 계획들을 발표한다. 그러나 대단한 결과는 고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의 발표를 조금 기억하거나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결과가 실제로 어떻게 나타났는지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191

명문 귀족가족과 유서 깊은 부르주아지 가족은 예나 지금이나 코스모폴리탄주의 생활방식으로 살아 왔다.  204

긴축정책으로 가장 혹독하게 고생하는 것은 서민층과 중산층이다. 그러한 부채가 최고 부자들의 무책임한 투기로 빚어진 것일 때도 고통을 받는 것은 서민들이다.  205

자체가 목적이 된 돈은 사람들의 가치를 돈으로 측정한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자들은 부와 사회적 성공을 중시한다. 이것이 바로 사르코지주의이다.  210


결론-무엇을 할 것인가?
체계적 불평등. 분명히 지배계급은 힘을 규합해서 잘 조직화 된 세력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수가 적다.  212
우리의 목적은 권력을 잡고 있는 과두체제의 기능을 거부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를 몰아내는 것은 단순히 한 정치인을 교체하는 것에 그칠 수가 있다.  213

- 부자들의 이익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되찾자
대상을 한정한 지원조치가 사회정책을 대신한다.
예방 대신 치료하겠다는 것은 일종의 공공 자선행위로 국가의 잘못을 땜질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동정으로 정책을 대체하는 것이다. 권리와 법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세력관계의 산물이다.  215

시민들은 자신들의 권리, 즉 노동권 주거권, 교육권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218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시도해 보는 가운데 사회생활 내에서 자신의 위치에 관해서 생각해 보게 되고, 개인적인 생활로부터 좀 거리를 두고 자신이 포함되기도 하지만 배제되기도 하는 복잡한 관계 속에 들어가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시청과 기업 도서관은 경영진들의 네트워크에 관한 유익할 정보가 포함된 참고자료를 독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게 돼 있다.  219

끝으로 인터넷 사이트는 무궁무진한 정보의 원천이다.  220
경계심과 호기심을 갖는 태도, 그리고 이런 문서들을 검토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투쟁에 속한다.  221

-정치 무관심을 부추기는 현실
-무시당하는 서민들의 표심
(이 외에도 여러가지 안을 내 놓고 있다. 이 부분은 직접 읽어보는것이 좋을 것이다.)

해제 - 프랑스와 한국의 닮은꼴 대통령(장행훈, 언론인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파리의 한 잡지는 <부자들의 대통령>이 과장된 표현을 절제하면서도 사르코지의 정책과 사람 됨됨이를 생채해부 한 책으로서 지금까지 나온 사르코지 책 중에서 완결판이라고 높이 평가.
저자들은 학자의 양심에서 책을 통해 다시는 '부자 대통령'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242
이 책은 부자들의 대통령이 얼마나 민주주의에 역행하고 있는지, 소수 부자집단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단결하고 있는지를 고발하는 민주주의 교과서 역할을 하고 있다.  247


부자들의 대통령 십계명
1. 재벌오너들과 친구로 지내라
2. 세금으로 부자들을 보호하라
3. 누가 뭐래도 측근을 챙겨라
4. 공과 사를 구분하지 말라
5. 편법을 두려워하지 말라
6. 검찰을 권력의 하수인으로 만들어라
7. 언론을 장악하라
8. 토목공사로 승부하라
9. 부자동네에 투자하라
10. 이념은 상관말라 정권만 지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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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적 의미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철학적 개념.

노마드(nomad)는 '유목민', '유랑자'를 뜻하는 용어로,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가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1968)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현대 철학의 개념으로 자리잡은 용어이다.

노마디즘은 이러한 노마드의 의미를 살려 철학자 이진경이 들뢰즈의 저서 《천()의 고원》(1980)을 강의하면서 남긴 글을 정리하고 보충해서 2002년 출간한 책의 제목으로, 우리말로는 유목주의로 번역된다.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불모지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일체의 방식을 의미하며, 철학적 개념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화·심리 현상을 설명하는 말로도 쓰인다.

노마드란 공간적인 이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불모지를 새로운 생성의 땅으로 바꿔 가는 것, 곧 한 자리에 앉아서도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 가는 창조적인 행위를 뜻한다. 철학적으로는 철학·문학·정신분석·신화학·수학·경제학 등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새로운 삶을 탐구하는 사유의 여행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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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 신문에 실린 서면 인터뷰입니다


- 한국에 처음 노마디즘이라는 용어가 전래되고 자리를 잡게 된 과정은?

 노마디즘은 본래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1968)에서 등장한 개념이었습니다. 그것을 고병권, 이진경, 고미숙이 주도하는 ‘수유 너머’와 이정우가 선전하고 전파시킴으로써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노마디즘을 현대 사회를 설명하는 이데올로기, 미래의 대안이 될만한 이데올로기로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노마디즘이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먹히기 시작한 것은 2000년 이후 자크 아탈리의 『21세기 사전』과 『호모 노마드』가 번역 출간되면서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후 ‘수유 너머’와 이정우의 주장에도 더욱 힘이 실리게 됩니다.

 

『21세기 사전』를 보면, 이정우의 추천사가 실려 있습니다. 저는 이정우가 자크 아탈리의 주장이 자신들의 사회적 입지를 확대시켜주는 계기가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노마디즘은 정말 현대사회의 모든 생활과 연관돼 있는 것 같다. 교육, 직업, 쇼핑 등 여러 분야에 적용되는데, 이럴 수 밖에 없는 원인이 있다면? 

교육, 직업, 쇼핑 등 현대인의 생활을 모두 노마디즘적 패턴으로 귀속시키려는 경향이 생겨난 것은 자크 아탈리 때문입니다. 본래 그럴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어서 노마디즘이 모든 생활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자크 아탈리가 그렇게 주장한 것이 원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들뢰즈의 철학적 개념인 노마디즘을 사회문화적 용어로 변환시켰습니다. 그리고 노마디즘이라는 용어를 현재의 모든 패턴을 설명해주고 미래를 예언하는 요술방망이로 사용했습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주효했던 것이지요.

 


- 한국인들은 유목민적인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런 와중에 이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 근하게 된 계기는?

저의 문제의식은 진보와 보수(특히 시장만능주의자들) 모두가 노마디즘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진보와 보수가 특정한 사상에 모두 공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노마디즘을 매개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요.

 

개인적인 계기도 없진 않습니다. 4-5년 전쯤인가요. 당시 조선일보는 몽골 유목민의 수장으로써 세계를 점령한 칭기즈칸을 재조명함으로써 노마디즘 선전의 첨병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친분이 있는 진보적인 사람들이 노마디즘을 매개로 조선일보와 타협하는 것을 보고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한겨레문화센터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지금도 ‘수유너머’에서 공부하다 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개 자신을 진보적인 사람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들도 노마디즘을 진보적인 이데올로기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노마디즘이 진보주의자들의 사회적 비판의식을 불식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마디즘의 기묘한 논리가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드러내고 그것을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 부정적인 측면이 있음에도 사람들이 이를 계속해서 추구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노마디즘은 간단히 말해서 ‘이동의 담론’입니다. 들뢰즈의 노마디즘은 철학적 ․ 정신적 이동에 대한 담론이고, 아탈리의 노마디즘은 현실세계와 가상세계의 이동에 대한 담론이죠. 진보주의자들은 노마디즘에서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와 생활태도’를 연상하고, 보수주의자들은 노마디즘에서 이동이 갖는 해방성, 창조성, 생산성에서 친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적 요소들을 발견합니다. 그 결과 진보와 보수가 모두 노마디즘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압도적 다수가 노마디즘에 대해 별다른 반감을 갖지 않고 받아들이는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노마디즘의 현실적 기반이 되는 것은 자동차, 비행기, 노트북, 인터넷, MP3, PDA, 디지털 카메라, 텔레비전, 휴대폰, 네비게이션 같은 첨단기술 제품들입니다. 그것들이 현대인의 이동을 가능케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노마디즘은 친기술주의적 경향을 갖습니다. 이러한 첨단 제품은 대개 초국적 자본이나 대자본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노마디즘의 친기술주의적 경향은 자본에 대한 관용 혹은 찬양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그 결과 진보주의자들이 자본의 논리에 자연스럽게 포섭되는 양상이 전개됩니다.


 

- 현 대학생들이 노마디즘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지금의 대학생들은 ‘88만원 세대’라 불립니다. 그리고 이러한 높은 청년 실업의 문제는 비단 우리 사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청년 실업이 이렇게 만연하게 된 데는 자본주의의 경제 구조 자체의 결함 때문입니다. 여기에 모든 것이 자동화 기계화 되는 것도 청년 실업을 높이는 주범입니다. 자본주의와 기술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가 젊은이가 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젊은이들은 친자본주의적 친기술주의적 경향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최전선에 노마디즘이 있습니다. 노마디즘의 시작은 68혁명을 배경으로 들뢰즈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들뢰즈의 노마디즘은 68혁명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노마디즘이 회자되는 현실은 68혁명 시기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지금의 현실에 고스란히 적용될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지금의 노마디즘은 들뢰즈의 정신보다는 아탈리의 몫이 훨씬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초기에 건강했던 이데올로기가 세월이 흐르면서 건강하지 못한 것으로 변질되는 경우는 많습니다. 나는 대학생들이 자신을 옭죄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기술만능주의의 입지를 넓혀주는 노마디즘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자는 플라톤의 경우처럼 격투기선수일 수도 있고 아우렐리우스에픽테토스처럼 황제나 노예일 수도 있으며, 스피노자처럼 첨단 과학의 기술자일 수도 있고, 라이프니츠처럼 외교관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목동은 될 수 없는가? 양을 치며 유목하는 민족을 통해 한 종교가 탄생한 이후 목자의 이미지는 종종 사상을 지배해왔다. 가령 하이데거는 ‘존재의 목자’라는 인상 깊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목자의 이미지, 즉 지킴이의 이미지와는 다른 목동의 이미지는 없는가? 물론 있다. 그것이 노마드(nomade, 유목민)이다. 땅에 뿌리내리고 토박이로 살며 정체성과 배타성을 지닌 민족을 이루기보다는, 어떤 정해진 형상이나 법칙에 구애받지 않고 바람이나 구름처럼 이동하며 삶을 정주민적인 고정관념과 위계질서로부터 해방시키는 유목인의 사유가 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존 쿠체(John Maxwell Coetzee)의 작품인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야만인이란 바로 유목민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런 인상 깊은 구절을 이 책에서 읽는다. “유목민들은 1년에 한 번씩 우리를 찾아와 교역을 한다오. 내가 지난 20년 동안 치안판사로서 싸워야 했던 문제는 가장 저질적인 마부들이나 농사꾼들이 유목민인 야만인들을 모욕하고 경멸한다는 사실이었소. 특히, 그 경멸이라는 것이 식사예절이 다르고 눈까풀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 말고는 구체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라면, 당신은 그것의 뿌리를 어떻게 뽑을 수 있겠소?”


이 인용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인종주의에 대한 고발만을 부각시키려고 이 구절을 읽은 것은 아니다. 정주민들은 위계적 정체성을 꾸미고 사는 자들이다. 그들의 정주를 가능케 하는 경계(또는 국경)가 이미 배타적 정체성의 표현인 위계를 내포하고 있다. 농사를 짓는 카인이 가축을 치는 아벨에게 그렇게 했듯 이런 정주민들은 유목민들을 증오해왔다. 아마도 근본적으로는 유목민의 도래가 정주민들이 꾸며온 모든 체계와 질서를 와해시킬지도 모르기 때문이리라. 유목민은 정주민들의 전통과 역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는 자들이며 거기에 동화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쿠체는 말한다. “나는 역사의 바깥에서 살고 싶었다. 나는 제국이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아니 행방불명된 백성들에게조차 강요하는 역사의 바깥에 살고 싶었다. 나는 야만인들에게 제국의 역사를 강요하는 걸 원치 않았다.” 노마드에 대해 사유했던 대표적인 철학자 질 들뢰즈 역시 마찬가지로 이야기한다. “노마드에게는 역사가 없다.”


국가와 같은 형식을 통해 거주하는 자들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역사를 가지지 않으므로, 노마드는 정체성 없는 익명의 힘으로 들이닥쳐 정주민을 파괴한다. 정체성 없는 이러한 힘의 침입을, 그 파괴력을 강조하여 ‘전쟁 기계’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전쟁 기계의 기원은 황제의 주둔병이 되기를 거부하고 유목 생활을 하는 양치기한테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노마드의 출현으로 인한 파괴를 들뢰즈는 “탈영토화의 형식으로서 탈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과거 유목민들의 삶이 보여주듯 말이다. 그리고 이런 노마드의 출현은 어쩌면 해묵은 정주민의 삶에 새로운 가치와 법을 도입하는 ‘창조’의 사건이 되기도 할 것이다. “사막에서 이루어지는 히브리인의 원정, 지중해를 횡단하는 반달 부족의 원정, 스텝을 가로질러 가는 유목민의 원정, 중국인의 원정.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곳은 언제나 탈주선 위에서이다”(들뢰즈). 그런데 민족들이 투쟁하는 대륙에서뿐 아니라 철학의 평원에서도 동일하게, 노마드의 침입과 창조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철학에서 주목할 만한 노마드의 발견은 칸트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처음에 형이상학의 통치는 독단론자의 지배 아래서 전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독단론자의 입법에는 예전 야만의 흔적이 있었기 때문에, 입법은 내란으로 인해 점점 무정부상태로 타락했다. 그 다음 회의론자들이 등장했는데, 그들은 정주하여 개간하는 일을 싫어하는 유목민과 같아서 종종 시민적 단합을 파괴했다.” 이 구절은 독단론적 성격을 가지는 합리론과 회의론으로 치달은 경험론의 싸움을 전제국가와 유목민의 극적인 상쟁으로 묘사하고 있다. 대륙의 독단론이 국가를 세우면, 영국 경험론의 노마드는 그것의 전제적 성격을 간파하고서 시민적 단합을 파괴한다.

 

그러니 영토를 닦아 합리론자들 이상의 체계를 세우려는 독일인들에게도 노마드는 하나의 위협일 수밖에 없다. 들뢰즈는 저 칸트의 구절을 염두에 두고서 다음과 같이 노마드의 성격을 부각시키고 있다.

“독일은 끊임없이 토양을 갈고 다져야 한다. 다시 말해 건립해야만 한다. 건립하고 쟁취하려는 열정이 독일의 철학에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즉 그리스인들이 원주민들을 통해 소유했던 것을 독일은 정복과 창설에 의해 소유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영국은 독일에게 하나의 강박관념이다. 왜냐하면 영국인들은 철학의 내재적인 구도를 이동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는 토양으로 여긴다. 즉 그들은 그 구도를 바다 위의 섬에서 섬으로 옮겨 다니며 천막을 치기만 하면 되는 열도에 둘러싸인 어떤 세계로 취급하는 노마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텐트만 있으면 된다.”


그리스인들이 원주민처럼 그들의 일상적 삶과 일상적 언어를 통해 철학을 생래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면, 독일인들은 그리스인들에겐 생래적이었던 사유를 학문적 개념의 형태로 애써 복원하여 다시 거주지를 형성해야 했다(예컨대 우리가 상실한 그리스 말의 어원적 의미를 애써 일깨우며 사유를 진행한 하이데거에게서 보듯이 말이다). 반면 경험론자들은 유목민들로서, 개념을 텐트에 넣어가지고 다니다가, 오로지 경험에 노출시켜 개념이 작동하는지 않는지 시험해본다. 이러는 사이 비경험적인 체계로 지어진 정주민의 거주지는 무너지는 것이다.

 

결국 노마드는 철학의 경험주의적 성격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는 개념이다. 노마디즘의 한 예를 보도록 하자. 자신의 철학을 경험주의라고 칭하기도 하는 레비나스는 예술 철학의 문제와 관련하여, 정주적 성격을 지니는 하이데거의 철학에 반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유목주의(nomadisme)는 정주 상태로의 다가감이 아니다. 그것은 거주지 없이 체류하는 것이며, 대지로 돌아갈 수 없음을 나타내는 일종의 관계이다.”

‘인간은 시적으로 대지 위에 거주한다’라는 횔덜린의 시구를 내세우며, 하이데거는 예술을 거주함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로 이해했다. 횔덜린의 시 ‘라인 강’은 라인 강이 본래적으로 있어야 할 거주의 자리를 밝혀준다. 예술작품으로서 그리스 신전은 그리스 민족이 본래적으로 거주하며 살아가는 자리를 열어준다. 이에 반해 레비나스는 유목적 삶을 상기시키며 이렇게 말한다. “모든 뿌리내림과 거주함의 바깥, 고향 상실이 본래성이다!” 예술은 우리가 익숙하던 거주의 자리에서 벗어나 우리를 유목민처럼 낯선 지역으로 내몰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레비나스의 노마드적 사유는 매우 흥미로운 것임에 틀림없지만, 노마드라는 말을 통해 중요한 성찰을 진행한 또 다른 철학, 바로 또 다른 경험론자 들뢰즈의 철학을 위해 노마디즘의 정수 자리를 남겨 두어야겠다. 정주민적인 사상가들이 동일성이나 유비 같은 개념의 울타리 속에 가축들을 가두어 놓듯 존재자를 가두었다면, 어떤 개념의 울타리도 없이 존재자들을 방목하고자 했던 것이 들뢰즈의 노마드적 존재론이다. 들뢰즈는 주저 [차이와 반복]에 ‘방목하다’라는 말의 고대적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상 깊은 구절을 남기고 있다.

“방목하다라는 말의 목축적 의미는 나중에서야 토지의 배당을 함축하게 된다. 호메로스 시대의 사회는 방목장의 울타리나 소유지 개념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당시 사회의 관건은 땅을 짐승들에게 분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짐승들 자체를 분배하고 짐승들을 숲이나 산등성이 등의 한정되지 않은 공간 여기저기에 배분하는 데 있다. 노모스는 우선 점유의 장소를 지칭하지만 그 장소는 가령 마을 주변의 평야처럼 명확한 경계가 없는 곳이다. 여기서부터 ‘노마드’라는 주제 역시 탄생한다.”

 

애초에 가축을 가르는 일은 울타리를 치는 목축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명확한 경계가 없는 장소에 가축을 풀어놓는 일, 유목이었다. 방목의 이러한 의미를 존재론의 관점에서 우리는 이렇게 바꾸어 쓸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어떤 개념적 울타리를 통해 존재자에게 존재를 배분했던 것이 아니다. 경계 없는 존재 위에 존재자를 직접 풀어놓는 것이 관건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철학사를 통해 경험론적 사유가 이 과제에 도전해 왔다.


가령 로마 시대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읽어보자. “단일한 것으로 지각된 순간 속에는, 이성이 발견해내는 수많은 순간들이 숨겨져 있다. 이런 까닭에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서 모든 종류의 시뮬라크르들(이미지들, 흔적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평균적 지각이 동일성을 지닌 사물로 보는 것의 배후에는 수많은 지각의 순간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이라면, 이 동일성의 원천으로 저 피안에 있는 이데아를 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에 충실하자면, 동일한 사물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순간의 수많은 다른 지각들이 있을 뿐이다. 이는 동일성의 개념(울타리)에 매개하지 않고 존재자를 직접 존재의 대지 위에 풀어 놓는 존재론적 유목이 아닌가?


이러한 유목적 사유는 계사(繫辭)에 대한 들뢰즈의 다음과 같은 분석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는 보통 계사를 통해, 주어 자리에 오는 동일성을 지닌 실체에 술어 자리에 오는 필연적이거나 우연적인 속성을 귀속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험 안에 있는 것은 동일성 개념이나 그에 부속하는 성질 개념에 매개되지 않는 감각들이 아닐까?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 ‘하늘은(est/is) 푸르다’는 동일성 개념에 매개된 존재자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임’과(et/and) ‘푸름’이라는 두 속성이 이웃하고 있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즉 계사의 정체는 접속사인 것이다). 그야말로 ‘하늘임’과 ‘푸름’의 가변적인 배치(agencement)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랭보의 표현을 빌려 “모든 감각들의 무질서(un dérèglement de tous les sens)”라 일컬을 수 있는 세계이며, 개념의 울타리 없이 존재자를 존재 위에 풀어 놓는 사고이다.


모든 감각들의 무질서로부터 정주민의 도시를 위협하는 유목민의 저 전쟁 기계가 생겨난다. 이것은 재앙인가? 오히려 존재자들을 동일성이나 신학적 질서를 표현하는 유비 같은 개념의 울타리 안에 가두지 않고, 직접 존재 위에 개방하여, 존재자들을 새롭게 배치해보라는 행운이 우리 손에 떨어진 것은 아닐까? 억압적 효과들을 발휘하는 개념의 체계 바깥에서 존재자들을 방목해볼 최초의 행운, 유목적 삶의 행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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