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 "길은 우리가 걸어가는 데서 완성된다."
오직 장자만큼은 길이 미리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길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당돌하게 외쳤습니다. 5
길의 끄트머리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이곳에 우리는 바로 타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장자가 우리에게 만들라고 이야기했던 길은 다른 것이 아닌 타자에게로 향하는길이었던 셈입니다. 6
장자가 매번 망각을 강조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오직 망각만이 우리 삶을 좀먹는 기억들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망각은 하나의 통과의례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인문학의 최종 목적은 사랑과 연대를 가능하도록 하는 새로운 기억들을 구성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7
장자의 망각은 철학사상 가장 긍정적인 개념입니다. 그렇습니다. 망각이란 타자로 비약하기 위한 가벼움과 경쾌함을 얻기 위한 노력입니다. 간혹 장자가 비움을 뜻하는 '허(虛 빌 허)'라는 글자를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8
타자로 비약하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무거운 것들을 비운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우리가 타자에게 건너가는 데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망각과 비움은 타자에게 비약하는 데 있어 필요조건일 뿐 결코 충분조건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9
망각이나 비움이라는 개념.
장자가 문제 삼았던 것은 타자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우리의 판단 혹은 추측이라는 거지요. 23
장자의 소통(疏通 트일 소, 통할 통)이란 개념.
흔히 소통이라는 것은 마음과 뜻이 전해지는 것, 즉 의사소통을 상징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번역어 정도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통이란 개념은 이보다 더 복잡한 것입니다. 이 개념은 '트다'라는 뜻의 '소'와 '연결하다'는 뜻의 '통'이란 글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소'라는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막혔던 것을 터서 물 같은 것이 잘 흐르도록 한다는 작용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제 왜 이 '소'라는 글자를 강조했는지 아시겠지요. '소'라는 개념은 우리 마음에서 건입견을 비운다는 것. 그러니까 장자가 말했던 망각 혹은 비움과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24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타자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그에게 비약하는 것뿐입니다. 26
서양 철학이 망각의 중요성을 발견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닙니다. 망각은 이미 니체(F. W. Nietzsche, 1844~1900)에 의해 진지하게 숙고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는 플라톤으로부터 가장 멀리 벗어났던 철학자로 기억됩니다. 플라톤은 이데아에 대한 '상기'나 '기억'을 그것에 대한 '무지'나 '망각'보다 탁월한 상태라고 이야기 합니다. 36
니체가 이야기하는 망각은 기억을 초월하려는 능동적 힘, 기억을 벗어나려는 치열한 투쟁. 38
"물이 소용돌이쳐서 빨아들이면 저도 같이 들어가고, 물이 나를 물속에서 밀어내면 저도 같이 그 물길을 따라 나옵니다. 물의 도를 따라서 그것을 사사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물을 건너는 방법입니다." 49
우리는 물이 빨아들이면 그것에 저항하고, 혹은 물이 밀어내면 그것에 저항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과는 달리 땅은 우리를 빨아들이거나 밀어내지 않습니다.
물의 복잡하고 다양한 흐름들에 맞추어 '감각-운동'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51
땅에서 편안해하던 주체가 물에서도 편안해하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 그는 자신에 대한 기억 혹은 주체의 동일성을 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52
망각은 타자와의 소통을 방해하는 '의식의 자기동일성'만을 잊으려는 것이지, 삶 자체의 능동성을 잊으려는 것은 아닙니다. 63
장자느 우리도 일종의 피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작동하는 피리라면, 우리는 타자와 마주쳐서 그에 걸맞은 소리를 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그런 소리를 내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소리를 내기에 바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속이 꽉 막힌 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79
남곽자기의 섬세함 묘사.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걱정, 염려, 변덕, 고집, 아첨, 오만, 허세, 가식 등과 같은 사람의 마음은 음악이 비어 있는 곳에서 나오고 버섯이 습한 데서 나오는 것처럼, 밤낮으로 우리 앞에 번갈아 나타나지만, 그것이 어디서부터 싹터서 나오는지 알지 못하겠다!' 세계 모든 것이 그렇듯이, 사람도 하나의 피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피리를 마음이라고 부를 수 있지요. 나무는 바람을 만나서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무가 비어 있는 구멍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79-80
결국 타자와 마주치지 않았는데도 발생한 소리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는 소음일 뿐입니다. 80
우리는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소음을 제거해야 합니다. 81
비워질 때에만 나는 마주치는 타자에 걸맞은 소리를 낼 수 있는 피리가 될 수가 있습니다. 내 마음의 피리는 오직 그 경우에만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시작하겠지요. 82
소통(疏通)이란 개념은 '트다'는 뜻의 '소'와 '연결된다'는 뜻의 '통'이라는 글자로 구성되어 있는 말입니다. 막혔던 것이 터서 역동적으로 흘러가는 물길이, 그리고 막힌 구멍을 터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된 피리를 생각해보세요. 남곽 자기의 입을 빌려 장자가 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소통'이란 글자에 응축되어 있던 셈입니다. 83-84
'지인(至人 이를 지, 사람 인)의 마음씀은 거울과 같아 일부러 보내지도 않고 일부러 맞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대로 응할 뿐 저장해 두려 하지도 않는다.' 자신 앞에 사람이 도래했는데도 거울이 직전에 비추고 있던 나무의 상을 지니고 있으려 한다면 어떨까요? 그것은 거울이 아닐 것입니다. 87
거울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갖지 않고, 철저하게 현재 마주친 타자를 지각하는 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장자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미래에 대한 기대가 현재의 지각을 왜곡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88
장자가 이야기하는 '지인(至人)'이란 바로 과거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 기억의 작용에서 가능해지는 미래에 대한 기대를 비워버린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인이란 일체의 허구적 매개 없이 혹은 미리 사변적으로 정립된 본질 없이 직접적으로 타자와 직면해서 조우해야 하는 삶의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89
기존의 생각, 혹은 기존의 의미를 비웠기 때문에 지인은 어떨 수 없이 새로운 의미를 채워야 할 숙명에 놓이게 된다고, 물론 새로운 의미는 타자와 마주쳐서 이 공백을 채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92
'A=-A'는 A라는 규정과 -A라는 규정이 겹쳐지는 공간, 그래서 언어와 그것에 의해 작동하는 사유의 분별작용이 불가능해지는 공간입니다. 장자는 이 공간을 '도추(道樞 길 도, 지도리 추)'의 공간이라고 규정합니다. '도추'란 글자 그대로 '도의 지도리'를 의미합니다. '지도리'란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도록 해주는 문의 회전축을 뜻합니다. 결국'도추'란 도가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는 계기나 조건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장자에게 있어 도란 미리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우리가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장자는 "도는 우리가 걸어 다녀야 이루어지는 것"(도행지이성 道行之而成)이라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115-116
사르트르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항상 내가 아닌 자로 존재하고, 나는 항상 내가 존재하는 자로 존재하지 않는다." 118
'원숭이를 키우는 사람'이 원수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셋, 저녁에 넷 주겠다"고 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고 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명목이나 실질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원숭이들은 성을 내다가 기뻐했다. (그 원수이 키우는 사람도) 있는 그대로를 따랐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옳고 그름'(을 자유롭게 사용함)으로써 대립을 조화시키고, '천균'에 편안해 한다. 이를 일러 '양행(兩行 두 양, 다닐 행)'이라고 한다. 143
'알 수 없다'는 경험 혹은 실존의 상태는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판단을 중지하고, 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만듭니다. 스스로 판단할 수 없으니, 이제 타자의 거동에 자신을 조율할 수밖에 없게 된 거지요. 장자는 이것을 '인시(因是 인할 인, 바를 시)'라고 부릅니다. 147
'롷고 그름(을 자유롭게 사용함)으로써 대립을 조화시킨다"는 표현이 '타자성의 테마'없이는 이해불가능한 것이라면, "천균(天鈞 하늘 천, 서른근 균)에서 편안해 한다"라는 표현은 '판단중지의 테마'없이는 이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자에게 있어 이 두 가지 테마는 "둘이 함께 가는(兩行)"것입니다. 다시말해 타자성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일종의 판단중지 상태에 이르게 되고, 역으로 일종의 판단중지 상태에 있게 되면 우리는 타자성을 경험하게 된다는 거지요. 151-152
판단중지에 대한 경험을 기술한 후 바로, 장자는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장주일 때 날개를 휘저으며 날갯짓을 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나비일 때 인생에 대해 철학적 성찰을 할 수도 있습니다. 장자에게 어느 경우든 "구분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상태는 타자와의 소통은 커녕 일종의 착각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6-157
우리 자신과 타자 사이에 엄청난 틈을 긍정하고 이 심연을 건너가려고 모색했다는 점에서, 그의 철학이 지니는 깊이와 근본성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길은 걸어 다녀서 이루어진다" '길'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걸어감'이 먼저 있습니다. 태초에 '길'이라는 원리가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걸음'이라는 행동이 먼저 있었다는 것입니다. 162
자타(自他) 사이의 심연을 건너기 위해서는 일종의 결단과 비약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비약이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는 충분히 가벼워야만 합니다. 심연을 건너기에 충분히 가볍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을 비워야만 하는 거지요. 타자와의 소통을 가로막는 심연 앞에서 우리는 자신이 보물처럼 가지고 있었던 것들(선입견, 오만, 자의식, 사변적 사유 등등)과 경건하게 작별의식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심연을 건너는 데 장애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비워야만 우리는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가벼움과 경쾌함, 도약의 힘을 얻을 수 있게 되지요. 163-164
비움의 수양은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일 뿐 결코 타자와의 소통을 필연적으로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164
시간을 '지속'이라는 존재론적 원리로까지 승화시켰던 베르그손의 입장을 살펴보지요.
'모든 의식은 기억이다. 즉 현재 속에서의 과거에 대한 보관과 축적이다...'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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