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 위험한 현대사
모든 역사는 ‘주관적 기록’이다. 역사는 과거를 ‘실제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방송뉴스와 신문보도가 현재를 ‘실재 그러한 그대로’ 전해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가들이 일하는 방식도 언론인과 다르지 않다. 역사가도 각자 나름의 개성과 취향이 있고 서로 다른 욕망과 감정에 끌리며 저마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과거의 사실 가운데 자신이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을 선택해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한다. 사실의 선택과 선택한 사실의 해석, 역사 서술의 핵심인 두 가지가 모두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역사를 둘러싼 다툼이 생기는 것이다.

현대사를 이야기하는 데는 위험이 따른다. 다수 대중의 판단과 정서에 어긋나게 말하면 험악한 구설에 휘말린다.

없는 것을 지어내거나 사실을 왜곡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들을 선택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인과관계나 상관관계로 묶어 해석할 권리는 만인에게 주어져 있다.

역사를 정직하게 대면하려면 당위(當爲, 마땅히 해야하거나 되어야 할 것)로 현실을 재단하려는 집착을 버려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훌륭한 이상국가 또는 그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외국에 견주어 우리의 현대사를 본다. 더 훌륭한 대상을 보고 배우려는 자세는 바람직하다. 하지만 남과 비교하는 데 너무 집착하면 우리 역사의 어둡고 수치스러운 장면만 주로 보이기 때문에 자칫 ‘자학적 역사 인식’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 반면 어떤 사람들은 우리 역사가 반드시 훌륭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현대사의 밝고 자랑스러운 장면만을 보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너무 집착하면 객관적인 사실을 부정하고 명백한 불의까지도 합리화하는 ‘자아도취적 역사인식’에 빠질 수 있다.


프롤로그 : 프티부르주아 리버럴의 역사체험

흐름 속에 있는 것은 사건만이 아니다. 역사가 자신도 그 속에 있다. 어떤 역사책을 집어들 때, 책 표지에 있는 저자의 이름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출간 일자나 집필 일자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것이 때로 훨씬 많은 것을 누설한다. - 에드워드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책을 읽을 때는 글쓴이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살피는 게 좋다.

*이 책에서 인용하는 인구통계는 모두 국가통계포털(kosis.kr)에서 가져온 통계철의 데이터.

내가 이 책에서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감정과 느낌이다.

역사는 주관적인 기록이다. 누가 쓴 어떤 역사도 과거를 ‘원래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들의 지속적 상호작용이다.

“당신, 가치관이 문제가 있어. 인생 잘못 사는 거야!” 이런 말을 듣고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다. 그런데 같은 말을 해도 역사를 가지고 하면 부담이 덜하다. “당신, 역사를 잘못 아는 거야!” 이것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에 대한 인식과 견해를 비판하는게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한 비난일 수 있다.



제1장 역사의 지층을 가로지르다 : 1959년과 2014년의 대한민국


우리를 압살하고 지나가는 근대화와 자본의 맹목적이고 무서운 속도를 일시 정지시키고 ‘이것이 과연 인간다운 것인가’ 물었던 것, 그것이 1980년에서 내가 가져온 작은 불꽃이다. 나는 이 불꽃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그러나 아주 작은 것들 하나하나를 비추어 보려 한다. 1980년대 내내 나는 얼마간 비관주의자였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나는 고통스러운 자기응시를 통해 작지만 단단한 희망을 말하고 싶다. “30년에 300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는 나의 고통스러운 자기응시에 붙여진 이름이다. - 김진경 <30년에 300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


우리 역사에서 모든 청년에게 ‘제대로 된 일자리’가 주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승만 정부는 ‘북진통일’, ‘멸공통일’을 외쳤지만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않았으며 헌법이 명시한 민주주의를 실현하지도 않았다. 국민을 빈곤에서 구해내는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다. 국부(國父)를 자처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무능하고 이기적인 ‘폭력가장’이었을 뿐이다. 국민의 삶은 불안하고 비참했다.

당시 정부는 국민을 보호할 최소한의 능력도 없었다.

무엇이 역사의 지층을 가로지른 것 같은 대한민국의 변화를 일으켰는가. 흔히들 위대한 국민의 힘이나 지도자의 뛰어난 리더십을 거론한다. 하지만 우리가 남달리 위대한 국민이라는 증거는 없다. 정말 위대한 국민이라면 지난날 나라를 빼앗기지도, 동족상잔의 내전을 벌이지도, 남의 원조를 받으며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권력자들이 특별히 대단했다고 주장할 근거 역시 희박하다. 이승만에서 박근혜까지 저마다 좋아하는 대통령과 싫어하는 대통령이 있겠지만, 누구도 ‘위대한 지도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자신의 과제라고 믿은 일들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하려 했을 뿐이다.

1959년 국민의 가장 강력한 욕망은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 북한의 위협과 사회 내부의 혼란에서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문제였다. 사람들은 이 욕망을 충족할 수 있게 해주기만 한다면 어떤 사람이나 집단에게도 복종할 뜻이 있었다. 4.19에서 5.16까지 1년을 제외하면, 국민들은 정부 수립 이후 1987년까지 40년 동안 권력에 굴종하며 살았다. 이승만 정부는 ‘멸공통일’을,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는 그와 더불어 ‘경제발전’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힘으로 대중을 억눌렀다. 격렬하게 저항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자유과 인권, 민주주의에 대한 억압을 기꺼이 받아들이거나 어쩔 수없이 굴복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에 근접해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자원을 어느 정도 확보한 다음에야 대중은 분명한 태도로 자유와 민주주의, 사회정의와 인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그렇게 해서 일어났다.

제헌국회는 계급제도를 부정하는 민주공화제 헌법을 채택했지만 우리 국민은 그때까지 민주공화국이 무엇인지 듣지도 배우지도 겪지도 못했다. 큰 틀에서 볼 때 제헌헌법은 유럽과 미국의 헌법을 복사한 것이었다. .. 민주광화국은 사유재산제도와 법치주의의 토대 위에서 개인의 인권과 자유, 창의성과 경쟁을 북돋우는 체제이며, 정부와 의회 지도자를 선출하고 입법 사법 행정 권력을 분산해 서로 견제하게 함으로써 국가가 시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분권적 정치 시스템이다.
민주주의는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삼는다.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 한 욕망을 표출하고 추구할 자유를 무제한 인정한다. ..제도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배적 사고방식의 산물이지만, 외부에서 어떤 제도가 ‘이식’(移植)되는 경우에는 거꾸로 제도가 그에 맞는 사고방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자연이 진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사회는 권력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제2장 4.19와 5.16 : 난민촌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


사고하는 역사가는 엄밀하게 말하면 과거의 문제를 풀고 잇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긴급하게 해결을 요하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리의 역사성에 관한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책임감 있게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의 역사를 회피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해야만 하는 긴장관계를 견뎌 내야만 한다. - 한스 위르겐 괴르츠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프랑스 정치가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805~1859)이 한 말로 알려져 있다.

토크빌이 전적으로 옳다. ‘국민의 수준’에는 훌륭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능력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을 비롯한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분단을 막으려고 38선을 넘나들며 협상을 벌이는 동안 이승만 박사는 차근차근 분단국가의 권력을 장악할 준비를 했다.

정치인 이승만은 한반도에 지구촌 냉전체제의 모델하우스를 세웠다. 제주4.3사건을 비롯해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일어났지만, 1948년 5월 10일 한반도의 북위 38도 이남지역에서는 유엔 감독 아래 국회의원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승만은 제헌의회 의장이 되었다. 제헌의회는 대한민국 헌법을 채택했고 7월 20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1948년 8월 25일 우리의 국회의원 총선과 비슷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유권자 대부분이 투표했고 단독후보에 대한 찬성률도 거의 100%였다. 최고인민회의는 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했으며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했다.

포병 소위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삼팔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민족의 분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

역사에는 가정이 필요 없다고 하지만, 때로 가정은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공산화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통일국가로 가는 결과 북한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고 남한에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길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분단을 거부한 민족주의자는 전자를 선택했지만 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은 차라리 후자가 낫다고 판단했다. 그 대표자가 바로 이승만 박사였다.

이승만 대통령 .. 그는 민주공화국이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은 너무 많이 했다. 국가의 정통성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 국가의 정통성은 특정한 이념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 국가의 정통성은 내부에서 형성된다. 내세우는 이념이 무엇이든 국민이, 민중이, 인민이, 또는 대중이 그 나라의 국민임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국가의 결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복종할 때,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무질서에 대항해 공동체를 지키려고 헌신하려는 태도를 보일 때, 그 국가는 정통성 있는 국가가 되며 자연스럽게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다.
식민지에서 풀려나 만든 신생국가는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정통성을 가질 수 있다. 첫째는 역사적 대의명분이다. 신생 대한민국의 긴급과제는 일제 잔재를 청산해 민족사의 정통성을 세우는 일이었다. .. 둘째는 경제적 효율성이다. 민중을 빈곤에서 해방하고 물질적 삶을 개선해야 국민이 최소한의 기대를 품고 국가에 복종 협력하게 된다. 셋째는 민주적 정당성이다. 헌법에 따라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고 주권재민 또는 인민주권의 원리를 실현해 정치적 정당성을 지닌 정부를 세워야 한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과 집권세력은 오로지 권력의 단맛을 누리는 데만 몰두했을 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정치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손을 잡았다. 자발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했다가 광복 후 ‘친미’, ‘반공’의 깃발을 들고 살아남은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일본군 장교는 국군 장교가 되었으며 조선총독부를 위해 일했던 특고형사는 경찰 간부가 되었다. 판사, 검사, 공무워, 교사, 지식인, 경제인도 모두 독립국가의 지배층이 되어 예전보다 더 큰소리치며 살게 되었다.

대한민국 제헌국회는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와 특별경찰, 특별검찰, 특별재판소를 설치했다.

반민특위는 일단 6682명을 조사해 559명을 특별검찰에 송치했다. 특별검찰이 그중 일부를 기소하자 특별재판소가 재판을 열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가 헌법의 삼권분립 정신을 해친다면서 반민특위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 절정은 1949년 1월 반민특위가 노덕술을 체포한 사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을 즉각 석방하고 반민특위 관계자를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그에게 노덕술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해 악랄하게 고문했던 일제 특고형사가 아니라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공산당을 때려잡는 대한민국의 경찰관이었다. 노덕술이 국회보다 더 중요했다. 이때 살아남은 노덕술은 후일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고문해 반국가 인사 또는 간첩으로 조작하는 고문수사와 노하우를 대한민국 경찰과 정보기관에 전수했다. 1985년 민주화운동 청년연합 김근태 의장을 참혹하게 고문한 이근안과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 씨를 죽인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형사들은 모두 노덕술의 후예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반민특위 해체와 정부요인 암살 음모를 꾸몄다가 실패하자 반민특위법 제정과 특위활동에 앞정선 젊은 국회의원들을 간첩으로 몰아 구속했다. 소위 ‘국회프락치 사건’이다.

경찰이 특별조사위원과 특별검찰관의 집을 수색하고 사무국과 재판부의 서류를 탈취했다. 겁을 먹고 굴복하는 국회의원이 늘어났다. 결국 국회는 공소시효를 단축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일을 할 수 없게 된 김상덕 반민특위 조사위원장과 특별조사위원 전원, 일부 특별검찰관과 특별재판관들이 사표를 냈다. 국회는 친일파 비호세력을 주축으로 새로운 특위를 구성했다. 반민특위는 이렇게 막을 내렸고, 국회는 1951년 반민법을 폐지했다. 처벌받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이 민족사적 정통성을 결여한 채 출발한 이유와 과정을 엄정하게 평가하고 철학적으로 소화하는 것뿐이다.



미완의 혁명 4.19

국가가 민중에게 지속적인 승인과 복종을 요구하려면 잘살게 해주어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발전계획을 세워 생산력을 높이고 국민의 생활을 개선하는 정책을 거부했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주권재민’의 원리와 합법적 절차에 따라 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정부는 헌법과 법률에 의거해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다수 국민들이 원할 때는 평화적 합법적으로 정부를 교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럴 때 국가는 민주적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을 짓밟고 국회와 법률을 무시했으면 부정선거를 일삼았다.

민족사적 정통성도 없고, 경제적 효율성도 없으며, 민주적 정당성마저 없는 정부가 들어선 나라는 정통성있는 국가일 수 없다. 결국 국민들이 저항권을 행사하기로 결심했다. .. 그것이 4.19혁명이었다.

혁명의 첫 징후가 나타난 곳은 대구였다. 1960년 2월 28일 일요일에 수성천변에서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 연설회가 열렸다. 그런데 대구의 국공립고등학교에 등교령이 내렸다. 영화 관람이나 토끼 사냥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일요일 등교령의 목적은 학생들이 장면 후보 연설회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대구상고 등 시내 거의 모든 고등학교 학생들이 교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독재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함성을 내지르면서 대구 중심가를 달렸다. 이것이 대구 시민들이 자랑하는 ‘2.28학생의거’다.

4.19혁명의 불길을 피워 올린 것은 고등학생들이었다. 대학생들은 수많은 중고등학생이 체포되고 맞고 다치고 죽은 다음에야 집단으로 투쟁에 참여했다.

4워 19일 아침 이승만 대통령 과저 경무대ㅐ와 서대문 이기붕이 집 앞에 중학생과 초등학생을 포함해 수만 명이 시민이 모였다. 시위대는 대통령 면담과 김주열 사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경무대 정문을 밀고 들어가려 했다. 서대문 이기붕 집의 상황도 비슷했다. 경찰이 총을 쐈다. 두 곳에서 21명이 죽고 172명이 총상을 입었다. 이렇게 되자 시위는 단순한 부정선거 규탄을 넘어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정치혁명으로 치달았다. 오후 3시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시민들은 경찰 총기를 빼앗아 곳곳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날이 저물자 서울 시내에 계엄군이 진입했다. 그런데 계엄사령관 송요찬 장군이 군의 선제발포를 공개적으로 금지했다. 이승만 정권을 지켜줄 의사가 없다는 뜻을 밝힌 셈이다. 시민들은 두 팔을 벌려 계엄군을 환영했고 탱크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었다.

4월 25일에는 대학교수들이 거리로 나왔다.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하야를 권고했다. 법무장관 권승려르 외무부장관 허정도 하야를 요청했다. 4월 26일 오후, 마침내 대통령 담화가 나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1960년 4월 29일 국회는 만장일치로 내각책임제 개헌을 결의했다. 4.19혁명 와중에 직을 사임한 장면 부통령 대신 수석 국무위원이었던 허정 외무부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국회는 내각제 개헌안을 처리하고 총선을 실시해 새로운 양원제 국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대통령에는 윤보선 총리에는 장면을 선출해 제2공화국을 출범시켰다.

4.19는 미완(未完)의 혁명이었다. 부정선거 규탄으로 시작해 민중의 힘으로 독재자를 축출하고 새 정부를 세웠다는 점에서는 분명 성공한 정치혁명이었지만 그 혁명을 완성할 능력과 의지를 가진 주체가 없었기에 혁명의 정치적 결과는 기존 정치세력 민주당의 집권으로 귀착되었다.



성공한 쿠데타 5.16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인 박정희 소장이 3,500여 명의 무장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서울에 들어와 정부청사와 언론기과 등 주요 시설을 점령했다. 대통령과 정부, 국회 등 모든 국가기관의 헌법적 권한과 기능을 폭력으로 정지시키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반공, 한미동맹, 사회적 부패와 정치적 구악(舊惡) 일소 등을 열거한 혁명공약의 핵심은 두 가지 였다. 국가 자립경제 재건에 총력을 기울여 기아선상에 방황하는 민생고를 해결함으로써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4항), 혁명의 과업을 이루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학고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6항)는 것이다.
‘민생고 해결’을 내세운 것은 아마도 박정희 소장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병영복귀’ 약속은 의도적인 거짓말이었다. .. 혁명에 성공하려면 적을 최소화하고 대중의 신뢰를 얻을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래서 마치 순수한 애국심에서 거사한 것처럼 보이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박정희 소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꾼 다음 장도영 장군을 밀어내고 스스로 의장이 되었으며 군부의 반대파를 차례차례 제거했다.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정보공장정치를 할 태세를 갖추고 국회에서 자신을 보위할 민주공화당을 창당한 다음 헌법을 바꾸어 의워낸각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중심제를 도입했다. 그런 다음 병영으로 복귀한다는 혁명공약 제6조를 폐기하고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제5대 대통령이 되었다. .. 그는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윤보선을 꺾고 재선했다.

헌법의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폐지하고 1971년 금권, 관권을 동원한 부정선거로 제7대 대통령이 되었다. 1972년 10월에는 또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시대 왕보다 더 강한 권력을 수중에 넣은 다음 대통령 긴급조치를 아홉 번이나 발동해 야당과 비판세력을 목 졸랐으며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납치해 죽이려 했다. 자신의 추종자들만 체육관에 모아놓고 혼자 출마해 100% 찬성으로 제8대와 제9대 대통령이 되었다.
5.16은 단순히 제2공화국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4.19가 만든 모든 것을 파괴해버렸다.

혁명인지 쿠데타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쿠데타는 혁명과 달리 민중의 동의와 지지와 참여가 없이 폭력으로 국가질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다. 군대를 동원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군사쿠데타다. ..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운영을 잘해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도 5.16이 군사쿠데타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제3장 경제발전의 빛과 그늘 : 절대빈곤, 고도성장, 양극화


‘여가가 없는 시민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는 아무 의미가 없다. 90% 사람들은 항상 일만 하고 여가가 없는 반면 10% 사람들은 늘 놀면서 전혀 또는 거의 일하지 않는다면 자유란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 ..’ - 버나드 쇼, <쇼에게 세상을 묻다>


박정희 정부는 산업화와 경제발전의 토대를 구축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지배한 것은 기회균등과 공정경쟁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이었다. 이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대한민국은 박정희 정부 이래 개발독재와 재벌 중심의 자본 축적, 수출주도형 산업화의 길을 걸었다.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낡은 경제 구조를 혁신하지 못했으며, IMF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과거와는 양상이 다른 정글법칙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한국 경제는 1970년대에 ‘이륙(離陸, take-off)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저 사실일 뿐이다. 그 사실을 곧바로 특정한 가치판단과 규범적 평가로 바꿀 수는 없다. “산업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독재를 해야 했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동시에 이룰 수 없다.”, “독재를 해서 경제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민주화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산업ㅎ호하를 함께 추진해볼 기회를 자기 손으로 봉쇄했다.

나는 인간 박정희가 아무 ‘주의자’도 아니었다고 본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반공주의, 군국주의, 자유주의, 그 어떤 이념도 그를 온전하게 사로잡지는 못했다. 생애 전체를 볼 때 그가 일관성 있게 추구한 것은 권력 하나뿐이었다.

박정희 시대 한국 경제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자본주의 선진국과 제국주의 일본,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을 절반씩 닮은 체제였다. 다시 말해서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기본질서에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를 결합한 혼합형 경제체제였던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경제체제도 그와 비슷하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가동하는 데 필요한 최초의 자본을 형성하는 것을 ‘자보의 원시적 축적’이라고 했다. 영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선진국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이 과제를 해결했다. 첫째는 봉건적 특권을 자본화하는 것이었다. 유럽의 귖족들은 중세 이래 농민들이 가지고 있던 경작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함으로써 토지에 대한 봉건적 특권을 자본주의적 소유권으로 전환했다. ..
둘째는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수탈이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등 모든 산업국이 군사력으로 다른 전통사회를 정복해 부와 노동력과 자원을 약탈함으로써 자본을 축적했다. 소련과 중국은 다른 방식으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이루었다. 그들은 봉건적 특권을 사유재산이 아닌 국가자본으로 전환했다.

대한민국은 서유럽 국가와 달랐으며 사회주의 국가도 아니었다. 자본화할 수 있는 중세적 특권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다른 나라를 수탈할 능력도 없었으며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동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실정에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했으며 자본을 해회에서 차입하고 기업으로 하여금 폭리를 취하게 함으로써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이룬 것이다. 최초 해외자본 차입의 줓체는 정부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업의 해외 차입을 조금씩 열어주었다. 정부는 독점기업들이 시장지배력을 이용해 폭리를 얻도록 했으며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소비자와 노동자를 착취함으로써 기업들은 짧은 기간에 막대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정부는 한일국교 정상화와 베트남전쟁 파병 등을 계기로 일보노가 미국 자본을 들여와 중화학공업 건설작업에 시동을 걸었고 제3차 5개년 계획 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얻었다.


예나 지금이나 성매매는 엄연한 불법이다. 하지만 정부는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소위 ‘기생관광’을 공공연하게 허용했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로 일본인 관광객이 급증했다. 1973년 외국인 관광객 68만 명 중 80%가 일본인이었는데, 그 대부분이 기생관광을 즐기러 온 일본의 하위 소득계층 남자들이었다. ‘외화벌이’를 한다면 안 될 일이 없었다. 종로 10곳을 비롯해 서울에만 14곳, 부산에 7곳, 경주에 4곳, 제주도에 2곳의 관광요정이 있었다. 가장 규모가 컸던 삼청각과 대원각에는 ‘관광기생’ 수가 800명이나 되었다. 여행사와 관광요정, 호텔이 삼각 동맹을 맺은 이 국제적 성매매상업은 1973년 한 해에만 2억 달러의 관광수입을 안겨준 것으로 추정된다.

박정희 정부는 <공산당 선언>에서 “현대 국가는 부르주아지의 일상사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한 마르크스의 견해가 최소한 진실의 일면을 포착한 것임을 증명해 보였다.


한국 경제는 시장경제체제가 아니었다. 시장의 원리에 따르면 자본은 저절로 수익성 높은 투자 프로젝트를 가진 산업과 기업으로 흘러간다. 그런데 산업화 이전의 대한민국에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시장과 금융시자이 존재하지 않는다. 외국이나 한국 은행에서 돈을 빌려 만든 투자재원을 정부가 기업에 직접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정부의 실체는 박정희 대통령과 특근 참모들이었다. 아무리 수익성 있는 투자 프로젝트를 가진 사람이라도 정부에 줄을 대지 못하면 자금을 받을 수 없었다. 특혜가 있는 곳에는 정경유착과 부패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재벌체제가 탄생했다.
대통령과 참모들의 신임을 받은 기업인들은 물가인상률보다 훨씬 낮은 이자를 내는 정책자금을 받았다. 각종 특혜와 행정편의를 제공받으면서 국내시장의 독과점 공급자가 되어 소비자인 국민을 착취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여러 산업 분야에 진출해 거대한 기업집단을 형성했다. 삼성그룹 이병철, 현대그룹 정주영, 선경그룹 최종현 등 거대 기업집단을 만든 재벌 창업자들은 그런 일에 빼어난 능력을 발휘한 사람들이었다. 정부는 재벌 대기업이 수출을 해서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도록 자금과 세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재벌 총수들은 대통ㄹㅇ과 권력실세들에게 ‘통치자금’ 명목의 뇌물을 넉넉하게 바쳤다.

한국 경제의 성장은 생산기술 향상을 동반했다. 노동자를 생산에 투입하려면 기술교육을 해야 한다. 봉제, 섬유, 합판, 식품, 전자조립 등 산업화 초기의 단순 제조업 분야에서는 기업이 스스로문제를 해결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도 채 마치지 못한 어린 노동자들을 ‘시다’로 채용해 급여를 적게 주고 일을 시켰다.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책자를 껴안은 채 분신했던 청계천 옷 공장이나 지금은 가산디지털단지로 변모한 구로공단 봉제공장들이다 그랬다. 하지만 금속, 전자, 전기, 자동차, 조선, 철강 등 부가가치가 높은 제조업과 중화학공업 분야에서는 더 높은 수준의 지식과 기술을 지닌 노동자가 필요했다.
정부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지원하는 한편 전국 각지에 직업훈련원을 만들었다. 고등학교를 마친 청년들이 여기서 2년 정도 교도소 수용자들보다 적은 급식예산으로 제공하는 밥을 먹고 군대와 비슷한 집단생활을 하며 기술교육을 받은 다음 울산과 창원 등의 대공장에 집단적으로 투입되었다. 이 직업훈련원들은 오늘날 평생교육을 담당하는 폴리텍대학이 되어 있다. 대학과 전문대학들은 새로운 산업과 관련된 학과를 신설했다. 정부는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국가연구소를 만들고 민간기업도 연구소를 만들도록 독려했다. 한국의 산업화는 전쟁과 비슷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채택한 북한이 혁명이념을 주입해 ‘천리마운동’과 ‘새벽별 보기운동’에 노동자를 동원하던 그 기간에 자본주의 계획경제를 선택한 대한민국에서는 더 나은 물질적 삶을 바라는 욕망과 자본가들의 이윤추구 욕망이 노동자들을 ‘만리마운동’과 ‘별도 보지 않고 밤새 일하기 운동’으로 몰아넣었다. 노동자들은 잠을 쫓기 위해 ‘타이밍’이라는 이름의 알약을 먹으면서 철야작업을 했고 공장 관들은 옷핀으로 팔을 찔러 피로에 지쳐 조는 여성 노동자를 깨웠다.
이것은 자본의 원시적 축적과 생산능력의 확대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 정부는 극단적인 수출장려와 수입억제 정책을 채택하고 ‘애국적 소비’를 권하는 대규모 캠페인을 전개했다.

소비재 수입을 사실상 금지한 대한민국에서 시장을 독식한 재벌 대깅업들은 마음껏 독점시윤을 얻었다.

무역정책과 산업정책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19세기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애국지사였던 프리드리히 리스트(Friedrich List, 1789~1846)의 충실한 제자였다고 할 수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풍미했던 19세기 중반, 리스트를 자신이 독일인이기 때문에 자유무역론을 거부한다고 말했다. 그는 산업기반이 약한 독일이 자유무역을 하면 경제적으로 영국의 패권 아래 편이뵈어 별 볼일 없는 산업을 가진 2등 국가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래서 먼저 높은 무역장벽을 치고 자국의 산업을 육성한 다음, 충분한 실력을 갖추었을 때 국내시자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스트를 독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 공산품에 높은 관세를 매겨야 한다고 제안했으며, 그런 목적으로 부과하는 관세에 ‘보육관세(保育關稅, Erziehungszoll)라는 멋진 이름을 붙였다. 대한민국의 무역정책은 뒤늦게 산업화를 시작한 나라에는 보호무역주의자 리스트의 전략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리스트의 이론을 212세기 버전으로 감상하고 싶은 독자들은 보호무역주의와 국가산업 정책을 옹호하는 장하준 교수의 책들을 보면 좋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국 경제는 19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세계사에서 보기 힘든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성장 속도에서 한국을 추월한 나라는 중국뿐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것을 이루기 위해 18년 동안 철권통치를 했다. .. 그래서 그는 교육과 언론을 통제하고 여론을 조작함으로써 국민을 세뇌하려고 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는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를 불러들인다.


부당한 권력 행사를 비판하고 싸우는 사람도 있지만 더 많은 사람이 그에 적응하거나 편승해 자기의 이익을 도모한다.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남들이 그렇게하기 때문에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한다. 그것이 산업화시대 대한민국의 현실이었으며 그런 현실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건설사가 중동 국가를 비롯한 외국에서 지은 건물과 교량이 무너진 일은 없었다. 그런데 나라 안에서 지은 것은 종종 무너졌다. 여러 원인이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부정부패였다. 우리나라 재벌그룹은 대부분 건설사를 계열사로 보유하고 있다. 없으면 만들었고, 만들지 못하면 인수합병이라도 했다. 그 목적이 불법 비자금 조성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 모두가 재벌 탓은 아니겠지만, 부패문화의 진원지가 재벌과 정치권력의 유착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재벌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으며, 어쩌면 우리의 미래마저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 재벌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헌법 위에 군림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국가 권력을 통한 정치적 민주적 개입과 통제뿐이다. 나는 이것이 ‘경제민주화’의 핵심이라고 본다.


전두환의 ‘제5공화국’은 모든 면에서 유신체제의 불필요한 연장이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승리와 더불어 국내 경제환경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노동자들이 노조활동 자유 보장과 임금,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7~8월 대투쟁을 일으켰다.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12.12와 5.18의 주동자였던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36% 득표율로 당선하긴 했지만, 1988년 4월 국회의원 총선에서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가 출현해 민주화는 더욱 진전되었다.

1990년대 중반은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민간소비와 기업의 설비투자가 활발했다. .. 냉전시대에 구축한 ‘자본주의적 계획경제’를 ‘개방적 시장경제’로 전환하기 위해 정부는 외국환 거래와 민간기업의 해외 금융채무 취득 등을 비롯한 금융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외환위기의 원인은 기체결함과 조종밈숙 둘 다 였다. 김영삼 정부는 국내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와 민간기업의 자본수입 규제를 대폭 완화하면 한국은행의 통화관리 능력이 크게 위착된다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재벌그룹의 연쇄부도로 금융기업들은 막대한 부실채권을 떠안게 되었다. 금융기업의 재무 건전성이 악화되자 한국 경제 전체의 신뢰가 하락했다. 외국 금융기업들이 단기채 채무상환기간 연장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 당시 맹위를 떨치던 국제투기자본이 한국 경제를 멋잇감으로 지목하고 원호와 원화표시 자산을 투매했다.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 공급이 끊기가 기업과 금융기관들은 해외결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 1997년 11월 21일, 한국 경제는 기초가 튼튼해서 외호나위기는 없을 것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던 정부는 국제투자기금(IMF)에 자금지원을 요청했고 11월 29일 IMF는 구제금융을 제공한다고 발표했다. .. 캉드쉬 총재는 협약을 충실하게 이행하겠다는 서약서에 김대중, 이회장, 이인제 등 유력 대통령 후보들의 서명을 받았다. IMF 의 ‘경제신탁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IMF가 추구한 목표는 명확했다. 박정희 정부 이래 남아 있던 중앙통제식 계획경제 요소를 완전히 없애고 미국식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을 이식하는 한편 IMF의 구제금융 자금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일본의 금융기관이 한국 금융기관과 기업에 제공한 대출금과 이자를 완벽하게 회수하는 것이었다.

수익성 낮은 부실 기업을 정리하기 위해 금리를 대폭 높이고 정부의 재정지출을 축소했다.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라는 명분으로 노동자를 대량 해고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 모든 것은 IMF가 중남미와 동남아시아 등 구제금융을 받은 모든 나라에 내린 표준처방이었다.

이름난 재벌그룹들이 부도를 맞거나 대규모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구조조정은 대량해고와 같은 말이었다. 정부는 철도, 통신, 전력 등 국가기간산업의 공기업을 민영화 또는 사유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정부는 IMF의 긴축재정 요구에 굴복해 사회간접자본을 해외투기자본에 개방했다. 엉터리 교통량 예측을 토대로 사업을 발주하고 높은 수익률을 보장한 민자 고속도로 외국투기자본의 먹이가 되었다. 부실 생명보험사 네 곳이 알리안츠생명, 삼성생명, 대한생명, 교보생명으로 넘어갔다. 부실금융기관과 부실기업을 회생시키기 위해 막대한 규모의 공적 자금을 투입한 탓에 국가채무가 급증했다. 그런 혼란과 고통을 겪은 끝에 대한민국은 2001년 구제금융 전액을 상환함으로써 IMF경제신탁통치를 마감했다.
한국 경제의 기체결함은 ‘죽기에는 너무 큰(too big todie) 재벌이 국민경제의 중심이라는 것이었다. 삼성, 현대, LG, 대우, SK 같은 대형 재벌그룹이 망하면 수많은 협력업체와 자금을. 대출한 금융 기관이 망하고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는 실업자가 된다. 재벌 총수들이 회사를 잘못 운영해 망할 위기에 빠져도 국민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정부가 회사를 살려주어야 한다. 재벌 입장에서는 위험한 투자를 해서 돈을 벌면 자기 것이 되고 방만한 경영을 해서 문제가 생기면 국가와 국민에게 짐을 떠넘길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이익을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하는 행동을 경제학 전문용어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라고 한다.

외환위기의 두 번째 원인은 정부의 환율고나리 실패였다. .. 환율은 세 가지 요인으로 인해 변화한다. 첫째, 장기적으로 환율은 물가인상률에 좌우된다. 물가인상률이 높으면 그 나라 화폐는 값이 떨어진다. 1980~1990년대 한국의 물가인상률은 미국, 유럽, 일본보다 높았다. 장기적으로 달러 환율은 오르는 게 정상이었다. 둘째, 단기적으로 환율은 경상수지에 좌우된다. 지속적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보는 나라의 환폐는 가치가 떨어진다. 그렇게 해서 수입가격은 오르고 수출가격이 떨어져야 경상수지 적자가 해소된다. 199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는 지속적으로 경상주시 적자를 기록했다. 그런데도 1997년 여름까지 몇 년 간 달러 환율이 점진적으로 하락했다. .. 이렇게 된 것은 환율변동의 초단기 요인인 자본수지가 흑자였기 때문이다. .. 서울 외환시장의 달러 공급이 늘어났기 때문에 환율이 낮게 유지된 것이다.

신 자유주의에 입각한 IMF의 표준 처방전은 심한 부작용을 야기했다. ..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이름 아래 기업이 노동자를 사실상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게 허용하는 정리해고제를 도입했고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연봉제와 성과급 제도를 확산시켰다. 노동조합은 야과되었고 실질임금이 하락했으며 고용불안은 높아졌다.

구제금융을 상환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던 제도들이 시자유주의로 표현되는 국제 경제환겨으이 변화와 맞물리면서 사회경제적 양극화라는 사회악을 키웠다.

기업이 정리해고를 사실상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고, 파견과 사내하청 등 간접고용이 널리 퍼진 결과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이 되었고 임금노동자 내부의 임금격차는 크게 확대되었다.

IMF 경제위기에서 탈출하고 새로운 발전전략을 찾기 위해 정부는 두 갈래로 노력했다. 첫째는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대세를 형성한 세계 경제환경을 받아들이면서 기회균등과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장경제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해 복지 정책 또는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민주정부 10년 동안 둘 모두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소득불평등 또는 소득불균등을 측정하는 지표로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 지니계수와 소득 5분위 배율이다. 지니계수는 모든 국민이 완전하게 균등한 소득을 얻으면 0이 되며 한 사람이 모든 소득을 독점하면 1이 된다. 지니계수가 0.3미만이면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0.4를 넘어가면 사회적 불안이 야기될 가능성이 높다. 소득 5분위 배율은 최고 소득계층 20%의 평균소득을 최저 소득계층 20%의 평균소득으로 나눈 값이다. 소득격차가 커질수록 소득 5분위 배율은 높아진다.

예컨대 지니계수는 여러 종류가 있다. 전국 모든 가구를 대상으로 한 것이 있고 2인 이상 도시근로자 가구만을 대상으로 한 것도 있다. 시장소득 지니계수가 있는가 하면 납부한 세금을 제외하고 국가보조금을 더해 산출한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도 있다.



통계청이 전국 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 소득분배지표를 발표한 것은 2006년이 처음이었다. 2006년도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전국가구 0.330, 2인 이상 비농가 0.312, 2인 이상 도시가구 0.305였다.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는 각각 0.306, 0.291, 0.285였다. 가처분소득 지니계수와 시장소득 지니계수의 격차가 0.02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은 조세와 복지제도를 통한 국가의 재분배기능이 매우 약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2006년 시장소득 5분위배율은 전국가구 6.65, 2인 이상 비농가 5.74, 2인 이상 도시가구 5.39였다. 가처분소득 5분위 배율은 각각 5.38, 4.83, 4.62였다. 시장소득 5분위 배율과 가처분소득 5분위 배율의 격차 역시 그리 크지 않았다. 전국가구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2008년과 2009년 0.314로 최고점을 찍었고 2012년에는 0.307로 조금 하락했다. 전국가구 시장소득 5분위 배율은 계속 상승해 2011년 7.86으로 최고점을 찍었고 2012년에는 7.51로 조금 하락했다. 전국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모든 소득분배지표가 2006년 이후 지속적 악화 추세를 보인 것이다. 조사방법이 달라지면 지니계수도 달라진다. 통계청과 금융감독원, 한국은행이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산출한 2012년 전국가구 지니계수는 0.357로 예전 방법으로 조사한 0.307보다 훨씬 높았다.**
**『한겨레」, 2013년 11월 20일자 보도. 기존의 지니계수는 도시와 농촌을 섞은 1만2,000 표본가구를 대상으로 하며 재투자와 저축 등 유보분을 제외한다. 새로운 지니계수는 2만 가구를 표본으로 가구의 유보분을 포함한 • 기준으로 산출한 것이다 재투자와 저축 등 유보분이 많은 고소득층의 소득이 더 높게 잡히기 때문에 새로운 방식으로 통계를 산출하면 지니계수와 소득 5분위 배율 등 모든 분배지표에서 소득격차가 더 크게 벌어진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부자감세다. 이명박 대통령은 법인세와 소득세율을 인하함으로써 재임 중 누적효과가 100조 원에 육박하는 감세를 했고 혜택은 대부분 대기업 주식 소유자와 고소득층의 몫이었다. 자영업자와 임금근로자 절반이 소득세 면세점보다 낮은 소득을 얻기 때문에 직접세 감세는 중간소득 이하 계층의 국민들에게는 단 한 푼의 혜택도 주지 않는다. 대기업의 투자와 부유층의 소비를 유도한다는 목적을 내세웠지만 감세의 투자촉진 효과는 별로 없었다. 둘째는 부동산 거래 규제완화로 단기적 경기부양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동산 가격은 오히려 하락했다. 부동산 투기 시대의 거품이 덜걷힌 상황에서는 규제완화로 부동산 경기를 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셋째는 4대강 사업이다. 초대형 토목공사를 벌려 경기를 부양하려 했지만 환경을 파괴하고 국가의 돈을 건설회사 금고로 이전시켰을 뿐 고용증대와 경기진작 효과는 거의없었다. 넷째는 수출을 증진하기 위해 환율을 인위적으로 올린 정책이다. 이 정책은 미국의 리먼 브러더스 파산사태와 맞물려 환율폭등을 일으킴으로써 달러로 표시한 1인당 국민소득의 대폭 하락을 불렀다. 양극화의 원인이었던 경제력 집중과 오남용,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확산, 낙수효과 감소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이명박 정부 경제정책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는 부자감세 정책을 철회하지 않았다.박근혜 정부가 처음 편성한 2014년도 정부 예산안에는 기초노령연금 수급액을 두 배로 올리는 것 이외에 복지지출을 크게 확대하는 정책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는 철도 민영화 정지작업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수서발 KTX 자회사를 설립했고 비영리 의료법인이 영리 자회사를 세울 수 있게 하는 의료법 개정을 추진했다. 공공부문의 사유화 또는 시장화 정책을 강행한 것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입법과 정책은 전무했고 재벌 경제력집중의 폐해를 시정하는 경제민주화 공약도 완전히 실종되었다.
2014년 들어서는 규제를 ‘암 덩어리’, ‘쳐부숴야 할 원수’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규제철폐 작업을 시작했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2012년 이명박 후보와의 후보경선 때 내세웠던 ‘줄푸세' 공약, 다시 말해서 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는 것으로 귀착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서 4대강 사업하나를 빼면 곧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이 된다. 소득분배의 개선과 양극화 해소에 관한 한 특별한 기대를 할 수 있는 근거는 찾을수가 없다.




제4장 한국형 민주화 :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한 민주주의 정치혁명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는 개혁이 불가능한 전제정치에서 폭력 행사는 정당하다. 그런데 그 목적은 오직 폭력을 쓰지 않고도 개혁을 할 수 있는 민주정치를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민주 헌법과 민주주의적 방법을 파괴하려는 안팎의 공격에 대항하는 폭력 행사 역시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시민의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민주주의의 요체는 무엇인가. 첫째, 주권재민(主權在民)이다. 권력의 정당성 또는 정통성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다수 국민의 동의를 받지 않고 성립된 권력은 인정할 수 없다. 둘째는 국가권력의 제한과 분산, 상호견제다. 민주주의는 국가권력의 오남용을 막기 위해 입법권과 사법권, 행정권을 분리하고 선출 공직자의 임기를 제한하며 권력기관들이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게 한다. 셋째는 법치주의다. 시민의 자유와 권리는 오로지 법률로만 제한할 수 있으며, 정부는 헌법이 부여한 권한의 범위 내에서 법률에 따라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



20세기의 대표적 자유주의 철학자 칼 포퍼(Karl R. Popper, 190~1994)의 정치이론을 활용할 수 있다. 포퍼는 어떤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인지 전제정치 체제인지 가리는 기준을 하나로 정리했다. 다수 국민이 마음을 먹었을 때 정권을 평화적으로 교체할 수 있으면 그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다. 그게 불가능한 나라는 독재국가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하는 법률과 제도가 아예 없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 제도가 있다고 해도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서 평화적 정권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면 그 역시 민주주의가 아니다.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I> 민음사 2006, 209쪽)

1959년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할 수 있는 제도는 있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좋은 헌법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집권세력 또는 통치자가 헌법과ㅏ 민주주의 기본원리를 존중해야 하며 시민들이 자기의 권리를 제대로 알고 행사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최선의 인물이 권력을 장ㅇ악해 최대의 선을 실현하도록 하는 제도가 아니다.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악을 마음껏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민주주의는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악을 최소화함으로써 사회를 지속적으로 개량해나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전제정치를 타도하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유일한 방법은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궐기해 경찰과 군대, 사법기관과 정보기관을 동원한 권력집단의 폭력을 힘으로 제압해야 정치혁명을 할 수 있다.

전국적, 동시다발적, 연속적 도시봉기를 일으키려면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데 테러는 이에 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들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였다.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대의를 알리고 대중의 관심과 각성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테러와 암살이 아니라 분신과 투신을 선택한 투쟁방식은 세계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로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한 최초의 사례는 3.1운동이다. .. 두 번째 사례는 4.19혁명이다. .. 세 번째 사례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가 엮은 <한국민주화운동사 1, 2, 3>를 권한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한 경험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래서 과거와는 성격이 다른 도전에도 예전에 성공했던 방식으로 응전하는 경향이 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어울리는 새로운 전략과 행동양식이 등장하는 무척 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모든 권력은 집중과 확대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진보든 보수든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감시와 견제가 느슨해지면 누구나 권력을 오남용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 집권세력의 반민주적 행태는 대통령과 여당 정치인들의 교만과 성숙하지 않은 시민의식을 반영한다.


1965년 2월 한일 양국 정부 회담 실무자들이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했고 양국 외무부장관은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과 네 건의 협정문에 정식 서명했다. [한일기본조약]은 한일강제병합조약을 포함해 대한제국와 일본제국이 체결한 모든 조약과 협정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일본이 대한민국 정부를 유엔결의 제195호에 따른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하는 바탕 외에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했다. 일부 약탈 문화재 반환을 합의한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연안 기점 12해리 수역이 배타적 관할권을 인정한 [어업협정], 해방 이전 일본 거주 대한민국 국민과 가족의 영주허가를 규정한 [재일교포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무상 3억 달러와 장기저리 차관 2억 달러로 양국 국민간의 청구권 문제를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확인한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었다. 바로 이 협정을 근거로 오늘날까지 일본 정부는 징용, 징병, 정신대,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들ㅇ의 개별적 청구권이 모두 소멸되었다고 주장해왔다. (<실록 박정희와 한일회담 : 5.16에서 조인까지> 이도성 편저 한송 1995, 32~34쪽)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결국 그렇게 끝이 났다. 무려 1,000여 명이 넘게 체포되고 350여명이 내란죄와 소요죄로 구속당하면서 박정희 정부와 2년 넘게 투쟁을 벌였던 청년들은 ‘6.3세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당시 학생 운동 리더로 명성이 높았거나 정계, 학계, 언론계에서 활약을 펼친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중태, 손학규, 이재오, 김덕룡, 현승일, 이명박, 정대철, 이부영, 서청원, 박관용, 하순봉, 김경재 등이 있다. 그런데 그때 거리시위에 참여했던 20대 청년들이 지금은 70대 고령층이 되어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철옹성처럼 지키고 있다.

권력형 부정부패 사건에 대해 국민들은 그때가 지금보다 더 예민했던 것 같다.


1960년대 후반 유럽과 미국은 베트남전 반대와 사회문화 개혁요구가 뒤범벅된 청년세대의 ‘68혁명’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반공주의라는 이념의 벽에 갇혀 있었다. 1968년 1.21사태와 북한의 미국 푸에블로 호 납치사건, 울진 삼척 무장 공비사건이 일어나자 반공, 반북 정서가 하늘을 찔렀고 전국에서 관제 규탄대회가 벌어졌다. 7월 20일 중앙정보주는 ‘통일혁명당 사건’을 발표하고 158명을 체포해 96명을 기소했다. 이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병영국가’ 북한에 맞서기 위해 대한미국 역시 ‘병영국가’로 개조하기로 결심한 듯 보인다. 병영의 기본은 인원 점검이다. 정부는 국민 전체를 조직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주민등록제도를 도입했다. 향토예비군을 만들어 군복무를 마친 남자 250만 명을 정기적으로 병영에 소환했고 대학입시에 반공도덕을 포함시켰다. 초중고 학생과 교사에게 반공교육을 실시했으며 전국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군사교육을 받도록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초부터 3선 개헌 작업에 착수했다. 기술적으로는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고 규정한 헌법조항의 ‘1차’를 ‘2차’로 고치는 간단한 작업이었다. .. 신민당과 재야인사들이 반대투쟁에 나섰고 사태는 한일협정 반대투쟁이나 6.8부정선거 규탄투쟁과 마찬가지로 대학생 교내집회, 거리시우, 중고등학생 가세, 휴교령 발동으로 이어졌다.

일부 대학생들이 전기와 수돗물 공급이 끊기 학교 도서관을 점거해 장기농성을 벌였다. 학생들은 시 낭송, 노래 부르기, 마당극과 연극 공연을 하면서 농성대오를 유지했는데, 이 새로운 투쟁 방식이 세월을 거치면서 시민문화행사와 춧불문화제로 발전했다. 공화당은 1969년 9월 9일 새벽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이 아닌 별관에서 개헌안과 국민투표법을 날치기 의결했다.

‘40대 기수’ 김대중 후보는 미,일,중,소 4대국의 한반도 평화보장론, 3단계 통일론, 자립경제와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대중경제론으로 의제를 선점했으며 향토예비군과 학생 군사 교육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책 선거를 보여주었다.

김대중 후보는 득표율 8%, 90만 표 차이로 졌다. 공무원을 동원한 관권선거와 금품 살포, 군 부재자 부정투표, 야당 참관인 매수와 부정 투개표 등 만만치 않은 부정선거를 한 사실을 고려하면 사실상 김대중 후보가 이긴 선거라고 할 수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3선을 하면 선거제도를 없애 총통이 될 것이라고 한 김대중 후보의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박정희 정부는 거칠 것 없는 독재의 길을 갔다. 무엇보다도 언론에 대한 겸열과 언론인에 대한 탄압을 대폭 강화했다.

검찰이 공안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린 현직 판사들에 대해 수뢰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판사들의 잡단사표 제출과 법관 독립선언이 이어졌다. 하지만 판사들은 결국 중앙정보부 통제 아래 들어갔고 헌법의 3권 분립 조항은 효력을 잃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 책동 강화’를 이유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안보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국회에서 날치기 처맇해 대총령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와 노동 3권 등 헌법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게 했다. 1972년 유신쿠데타 예행연습을 한 것이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두 번의 극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첫번째는 7월 4일 남북한 당국이 동시에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이다. ..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입각해 통일을 추진하기로 한 이 성명이 나오자 국민들은 20년에 걸친 군사적, 이념적 대결이 끝나고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에 들떴다. 두 번째 사건은 그로부터 석 달 후에 일어났다. 10월 17일 밤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특별선언을 발표했ㄷ. 그는 남북대화와 통일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려면 냉전시대에 만든 헌법을 고쳐 새로운 정치체제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화문에 탱크를 세우고 정부기관과 언론사 등 민간 주요 시설에 군을 퉁입했다.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했으며 헌법 효력을 정지시키고 비상국무회의가 국회 기능을 대신하게 했다.

닷새가 지난 11월 21일 계엄령하에서 국민 투표를 실시했다. 토론이나 찬반운동은 완전하게 봉쇄한 가운데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91.9%가 투표했고 91.5%가 찬성했다ㅏ. .. 절반의 반혁명이었던 5.16과 달리, 10월 유신은 평화적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완벽하게 차단한 완성형 반혁명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반쪽 민주주의 국가에서 완전한 독재국가로 전락했다.

유신헌법의 핵심은 몇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국민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뽑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대통령을 뽑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야당 성향 인사의 출마를 막고 지지자들만 대의원이 되게 함으로써 영구집권의 꿈을 이루었다. 둘째,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하고 국회의원을 한 선거구에서 둘씩 뽑도록 선거법을 고쳤다. 여당의원과 대통령이 임명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합치면 의원 정수의 3분의 2가 되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국정감사권마저 폐지함으로써 국회를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법률을 통과시키는 ‘통법부’로 전락하게 했다. 셋째,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과 헌법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부여했다. 대통령이 무제한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유신헌법 초안을 만든인물은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파견 근무를 했던 김기춘 검사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그는 공무원과 공공기관장들을 모아놓고 화끈한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한 ‘초원복집 사건'을 일으켰다.* 다시 20여 년이 지난 2013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되어 국정운영을 전횡함으로써‘기춘 대원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1992년 12월 11일,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은 부산에 있는 '초원복집'에서 김영환 부산시장, 박일용 부산경찰청장, 김대규 부산 기무부대장,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우명수 부산교육감, 정경식 부산지검장 등 공무원들을 상대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민간에서 지역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말했다.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 진영에서 이대화를 도청·폭로해 큰 파문이 일었지만 위기감을 느낀 부산·경남 유권자들은 김영삼 후보에게 몰표를 던졌다. 이 사건은 국가기관의 불법 선거개입, 지역감정 조장, 유권자들의 비이성적 투표행태 등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며, 2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현재까지 우리 국민은 그 후진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학교든 사회든, 오로지 복종할 자유만 있었다. 유신 이후 1979년 19월의 ‘부마항쟁’까지 7년 동안, 대중적인 반정부투쟁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로지 야단, 재야인사, 지식인, 대학생들이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지키려고 저항했다가 구속되고 박해받은 사건들이 있었을 뿐이다. .. 중앙정보부는 ‘예방적 목적’에 입각한 조직사건을 연달아 터뜨렸다. 국민 대중의 불만이 팽배해도 뇌관을 제거하면 화약고가 폭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1973년 8월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다.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을 죽이지 못하고 자택 근처에 내려주었다. ..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시작된 교내시위가 경북대를 비롯한 다른 대학으로 번져나갔다. 그러자 중앙정보부는 10우러 25일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 11월 들어 대학생들의 동맹휴학과 교내시위가 전국 대학ㅇ으로 번졌으며 경기고, 대광고, 광주일고 등 고등학교까지 확산되었다.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 결의대회를 열었고 재야인사들의 시국 선언도 줄을 이었다. .. 박정희 대통령은 마침내 유신헌법이 부여한 비상대권을 휘둘렀다. 1974년 1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한 것이다. .. 1974년 3월 개학과 동시에 여러 대학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민청학련(민주청년학생연맹)이라는 이름을 기재한 유인물이 뿌려졌다. 4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민청학련이라는 반국가단체’를 뿌리 뽑기 위한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75년 2월 석방된 김지하 시인은 [동아일보]에 연재한 옥중수기 <고행1974>에서 하재완과 이수병 등 인혁당 사건 구속자들에게 들은 중앙정보부의 잔혹한 고문과 허위조작 실상을 폭로했다. 이 수기는 김지하 시인의 재구속,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기자 대량해고 사태로 이어졌다. 정부의 압력을 받은 기업들이 광고를 취소해 [동아일보] 광고 지면이 백지로 나왔다. 그러자 시민들이 돈을 보내 [동아일보]를 격려하는 광고를 실었다.

민청학련 사건은 반정부투쟁을 뿌리 뽑으려고 한 정부의 의도와 달리 민주화운동을 대중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1974년 12월 25일 민주화세력은 ‘민주회복국민회의’를 창립했다. .. 저명한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이 중심이었다. 김영삼 씨를 총재로 선출한 신민당은 적극적인 개헌투쟁에 나섰다. 박정희 대통령이 곧바로 역공을 취했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의 신임을 묻기 위해 국민투표를 하겠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 야당이 거부의사를 밝혔지만 1975년 2월 13일 국민투표를 밀어붙였다. 투표율 79.8%에 찬성률 73.1%가 나왔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재판장 민복기)은 서도원, 김용원, 이수병,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하재완, 도예종 등 대학생이 아닌 인혁당 관련 피고인 여덟 명의 항소를 기각해 사형을 확정했고, 다음 날 새벽 정부는 그들을 지체없이 사형해버렸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국제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다. .. 민청학련과 인혁당 관련자들은 민주화 이후 열린 재심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재심 판결을 하면서 사법부의 잘못을 사과했고 국가가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1975년 봄 베트남에 사회주의 통일정부가 들어섰다ㅏ. 5월 13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해 유언비어 날조 유포, 헌법에 대한 부정, 반대, 왜곡, 비방, 헌법개정 청원 선전, 선동, 긴급조치에 대한 비방을 모두 처벌대상으로 규정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고 살지 않으면 누구든 범죄자가 될 수 있었다. 1979년 10월까지 4년 반 동안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은 1,400여 명이었고, 그중 1,000여 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민주화 이후 헌법재판소는 1호부터 9호까지 모든 긴급조치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부마항쟁은 국지적 도시봉기였다. 부마항쟁의 충격은 집권세력의 내분을 부추겨 유신체제를 무너뜨렸다. 1979년 10월 26일 밤, 서울 궁정동 안전가옥 만찬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쏜 것이다. 김재규 부장의 군법회의 진술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했으니까 총살됐지 내가 발포 명령을 하는데 누가 날 총살 하겠느냐.”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나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에서 200만 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가 문제냐”고 맞장구쳤다. 김재규는 ‘각하;와 ‘자유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10.26은 민주혁명이며, 5.16이 정당하다면 10.26도 정당하다고 주장했던 그는 1980년 5월 24일 교수대에 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 성공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생물학적 생명을 빼앗은 것은 총탄이었지만 정치적 생명을 앗아간것은 그 자신이 이룬 성공이었다. 그는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대중의 욕망을 무제한 분출시키고 그 탁류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했다. 그런데 산업화의 성공으로 절대빈곤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대중은 다른 욕망에 끌리기 시작했다. 자유, 정의, 민주주의, 인간적 존엄성을 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욕망을 존중하지 않자 많은 국민이 마음으로 그를 버렸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것은 그와 같은 민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10.26사건을 그렇게 이해한다.



인류 역사는 숱한 반란, 봉기, 내전, 혁명,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사태의 원인과 계기, 전개과정과 결과는 저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같은 게 있었다.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을 덮친 것이 혼돈이었다는 사실이다. 무리를 지어 폭력으로 부딪치는 격동의 순간에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동기와 지향에 따라 제각기 활동한다. 모두에게 익숙한 일상의 소통방식이 무너진 상황에서는 냉철한 논리와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충동이 행동을 지배한다. 어디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누구도 전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끝나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역사가들이 사태의 전모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해석한다. 그때에야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 대한민국현대사도 예외가 아니다. 제주 4.3사건, 6.25전쟁, 4.19혁명, 5.16쿠데타, 5.18광주민중항쟁, 6.10민주항쟁의 한복판에 있던 사람들이 본 것은 혼돈이었다.



5월 18일 오전부터 전남대 앞에서 학생과 계엄군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계엄군이 학교 밖으로 나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것을 본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하면서 도시 전체가 궐기했다. 여기까지는 부마항쟁과 같았다. 그런데 광주 시민들은 부산·마산 시민들보다 더 절박했고 더 용감했다. 공수부대는 시내곳곳에서 대검을 장착한 소총과 '충정봉’(忠淸棒)이라는 박달나무 몽둥이로 마구잡이 폭력을 휘둘렀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자시위는 더 확산되었다. 계엄사는 더 많은 특전사 병력을 광주로 보냈다.
비무장 시위가 무장투쟁으로 번진 것은 계엄군이 발포를 했기때문이다.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정문 앞에 진 치고 있던제11공수여단 병력이 갑자기 흘러나온 애국가 연주에 맞추어 일제히 M16소총과 M60기관총을 공중으로 발포했다. 그래도 시위대가 흩어지지 않자 곧바로 사람을 향해 총을 쏘았다. 전일빌딩,상무관, 수협 전남지부 건물 옥상에서는 저격수들이 조준사격을가했다. 그것은 명령에 따른 조직적·계획적 집단발포였다. 5월19일과 20일에도 제11공수여단과 제3공수여단 병력이 권총과M16을 발포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그것은 산발적·돌발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도청 앞 발포는 달랐다. 거리는 순식간에피바다로 변했다.
분개한 시민들은 광주 시내뿐만 아니라 나주, 화순, 장성, 영광,담양 등 인근지역 파출소와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해 카빈소총과M1소총을 확보했고 화순탄광의 다이너마이트를 반입했다. 시민들이 먼저 총을 쏘았기 때문에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했다는 신군부의 주장은 거짓이었다. 군의 모든 기록 가운데 최초로 등장하는무기탈취 사례는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상 일지」에5월 21일 오후 1시 35분 전남 화순파출소 무기 피탈' 사건이었다.* 특전사가 전남도청 앞에서 발포를 할 때에는 시민들에게 총이 없었다. 시민들이 무장항쟁을 시작하자 경찰관들이 사복으로 갈아입고 광주를 빠져나갔고 특전사 병력은 외곽으로 이동해 광주의 교통과 통신을 차단했다. 그들은 인근 도시로 가는 국도에서광주를 빠져나가는 민간차량을 저격하고 주둔지 인근의 민가에총을 쏘았다.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해 많은 시민이 죽었다. 다른도시에서는 대중투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신군부는 모든화력을 광주에 집중했다. 특전사 3개 여단 3,500명, 보병 20사단 5,000명,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소속 병력 1만 2,000명 등 무려 2만이 넘는 병력을 광주시 일원에 투입한 것이다.
도청을 점령한 시민군은 부대를 편성하고 치안질서를 유지했으며 시민들은 그들에게 음식과 물을 제공했다. 시민자치에 들어간 광주 시내는 평온했으며 범죄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병원에는 헌혈 신청자들이 줄을 섰고 도청 공무원들이 다시 출근했다. 지역사회 원로들이 수습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광주 상무대에 있던 전남북 계엄분소를 방문했다. 그러나 계엄사는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광주항쟁에 대한 소식은 닷새째인 5월 22일에 가서야 석간 『동아일보』가 처음으로 보도했다. 그 닷새 동안 광주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으며 국민들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신군부는 광주 시민을 폭도로 규정했고 계엄군은 광주시를 포위했다. 5월 27일 새벽 계엄사는 6,000여 명의 병력을 투입해 광주를 탈환하는 ‘상무충정작전'을 전개했다. 도청을 중심으로 최후의 항전을 준비한 시민군은 카빈총과 M1소총을 든 157명뿐이었다.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윤상원 씨를 비롯한 열세 명을 사살하고 100여 명을 체포했다. 또 다른 거점이었던 광주공원과 전일빌딩도 손쉽게 점령했다. 그들은 도청 앞 상무관에 있던 광주 희생자들의 시신 129구를 덤프트럭에 싣고 가서 망월동 산비탈에 묻었다. 5·18유족회의 집계에 따르면 항쟁 당시 사망자는 166명, 행방불명 65명이었다. 부상 후 사망자는 400명이 넘는다. 군경 사망자는 27명이었는데 군인들끼리 벌인 오인전투 사망자가 많았다. 계엄사는 광주항쟁과 관련하여 무려 2,500명이 넘는 시민과 대학생을 체포해 600명 이상을 검찰에 송치했다. 정동년, 배용주, 박남서는 군법회의와 대법원 최종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홍남순, 정상용, 허규정, 윤석루 등 일곱 명은 무기징역, 김상윤, 김성용, 명노근, 전옥주, 윤강옥 등 열한 명은 징역 20년에서 10년, 152명은 징역 10년에서 5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모두 풀려났다.
광주민중항쟁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가능성과 당시 민주화운동의 현주소를 명료하게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전제정치를 타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속적·동시다발적·전국적 도시봉기라는 것, 그리고 아직 대한민국 국민은 그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참혹한 패배로 막을 내린 광주민중항쟁은 많은 국민의 가슴에 깊은 죄책감을 남겼다. 신군부가 광주에서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를수 있었던 것은 다른 지역 시민들이 계엄군의 폭력에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987년 6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어느 지역도 고립되지 않는 전국적 도시봉기를 정밀하게 기획하고 준비했다. 광주 시민들만 홀로 고립의 아픔을 겪게만든 1980년 5월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6월 민주항쟁은 사실상 광주민중항쟁의 전국적 확대판이었다.

신군부는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을 내쫓았다. 그는 유신헌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대통령이 되었지만 퇴진 요구를 받자 군소리 없이 물러났다. 전두환은 곧바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소집해 100퍼센트 찬성으로 제11대 대통령이 되었다. 모든 신문·방송이 그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특집보도와 특집기사를 내보냈다정부는 지체 없이 헌법개정안을 만들었다. 1980년 9월 29일 공고한 '제5공화국' 헌법안은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제로 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이름을 대통령 선거인단으로 바꾸었다. 대통령이국회의원 3분의 1을 임명하는 제도를 없애는 대신 비례대표를 의원 정수의 3분의 1로 하고 제1당에 비례의석 3분의 2를 배분하는 괴상한 제도를 도입했다. 10월 22일 실시한 국민투표에 95.5퍼센트의 유권자가 투표했고 91.6퍼센트가 찬성했다. 유신헌법국민투표 때와 비슷한 결과였다. 국민들이 다시 한 번 폭력의 공포에 굴복한 것이다.


1987년이 되자 국민의정치적 관심은 헌법 개정 여부에 집중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의임기가 1년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헌법을 바꾸지 않으면 또 5,000명의 선거인단이 차기 대통령을 뽑게되고, 그렇게 되면 정권교체도 민주화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민주화세력은 민주화를 위한 최소 요구이자 절대적 조건인 대통령직선제 회복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1월 14일, 어찌 보면 필연적이고 달리 보면 우발적인 사건이 터졌고 이 운명적인 사건이 대한민국의 진로를 바꾸었다. 서울대학교 언어확과 3학년 박종철 씨가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한 것이다. <중앙일보>가 대학생 사망 사실을 최초 보도했고 <동아일보>가 더 많은 사실을 취재해 더 크게 보도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수사관이 범죄사실을 추궁하면서 주먹으로 책상을 ‘탁’ 치자 박종철 군이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 초기 <동아일보> 기자들의 활약은 역사적으로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 <동아일보>는 시신에 피멍자국이 있었다는 부검 관련 소식에 이어 쇼크로 인한 심장마비가 아니라 물고문으로 인한 사망이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의사의 검안소견서를 보도했다. 그때의 <동아일보>는 오늘의 <동아일보>와 전혀 다른 신문이었다. 비난 여론이 끓어오르자 검찰이 경찰관 두 사람을 구속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유감을 표명하고 치안본부장과 내무부장관을 경질했다.

2월 7일 서울 명동성당을 비롯해 전국에서 열린 추도대회가 거리시위로 번졌을 때 5.18 이후 처음으로 일반 시민들이 반정부시위에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4월 13일에 전두환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한 그는 개헌을 하지 않을 것이며 계속 개헌을 주장하면서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을 엄단하겠다고 말했다. ..
호헌선언은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뿌린 행위였다. .. 바로 그날부터 국민적인 ‘호헌철폐투쟁’이 불붙었다.

다시 5월이 오자 전국 62개 대학에서 광주항쟁 추모집회가 열렸고 명동성당에서는 ‘광주민중항쟁 제7주기 미사’가 열렸다. 그런데 이곳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핵폭탄급 진실을 폭로했다. 이미 구속된 경찰관 두 사람 이외에도 박종철씨를 죽인 범인이 더 있다는 것이었다. 김승훈 신부는 고문살인범 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사, 이정오 경장이 현직에 그대로 근무하고 있고 치안본부의 전석린 경무관과 유정방 경정이 사건을 조작했으며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사건은폐와 번인조작에 개입했다고 폭로했다. 사흘이 지난 후 검찰은 고문경관이 셋 더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동아일보>는 김성기 법무부장관과 서동권 검찰총장이 범인 축소, 은폐 사실을 석 달 동안이나 알면서 감추었다고 보도했다. 정부는 임시국무회의를 열어 내각 총사퇴를 결정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대규모 개각을 단행했다. 검찰은 공안수사의 대부로 통하던 치안본부의 박처원 치안감을 구속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6월 민주항쟁 후에 구속되었다.
그러나 분노의 불길은 잦아들지 않았다.


6월 18일 ‘최루탄 추방 국민대회’에서 더 큰 민심이 파도가 밀어닥쳤다. 전국 16개 도시에서 150만 명이 참여한 이날 시위의 하이라이트는 서울이 아니라 30만 명이 시위를 벌인 부산이었다. 부산 시민들은 거리에서 교대로 잠을 자면서 밤샘시위를 벌였다.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세 번째 파도는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이었다. 전국 33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80만 명이 거리시위에 나왔다. 맨손으로 시위를 한 6.10대회와 달리 시민들은 도처에서 투석전을 벌였으며 대학생들이 던지는 화염병에도 큰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전국 거의 모든 도시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를 10만여 명의 경찰력으로 진압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8개 항으로 이루어진 시국수습 특별선언을 전격 발표했다. 소위 ‘6.29선언’이다. 대통령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과 정치범 석방, 국민 기본권과 언론 자유 보장, 지방자치제 실시와 교육자율과, 자유로운 정당활동 보장 등을 담은 이 선언으로 전국적 도시봉기는 막을 내렸다.

7월 5일 이한열 씨가 끝내 숨을 거두었다. 7월 9일 서울역 관장에서 100만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영결식이 열렸다. 이 행사는 6월 민주항쟁의 에필로그였다. 영결식이 끝나고 경찰이 해산을 종용하면서 페퍼포그와 최루탄을 쏘자 100만 시민은 조용히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헌법을 고치고 선거를 하면 정권을 바꾸고 민주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그들의 희망은 다섯 달 뒤에 물거품이 되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1987년 이후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 하지만 아직 성숙하지는 않았다.

민주적 제도가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에 맞는 생각을 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성숙한 민주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민주주의는 제도와 행태, 의식의 복합물이다. 물론 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장기적으로 보면 모든 제도가 의식과 행태의 산물이지만, 단기적으로는 특정한 제도가 그에 맞는 의식과 행태를 북돋우기 때문이다.

1987년 체제는 현행 헌법과 선거제도를 만든 정치 지도가 ‘1노 3김’의 동상이몽(同床異夢)과 이해타산이 만든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 5년만 하고 나가는 데 합의했다. .. 확실하게 하기 위해 헌법 제128조 2항에 임기를 늘리거나 중임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을 할 경우 개정 조항은 현직 대통령에게 적용하지 않는다는 안정장치까지 넣어두었다.

우리 헌법은 국민의 저항권을 인정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명시했다. 제10조부터 37조까지 신체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노동 3권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비롯한 시민의 기본권을 명확하게 보장했다.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국회와 사법부의 권한을 대폭 확대해 권력의 분산과 상호견제를 강화했다.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부활하고 법관의 독립성을 높였으며 헌법재판소를 설치했다. 최저임금제를 명시하고 성장, 안정, 적정한 소득분재, 독과점 폐해 방지, 경제민주화를 위해 국가가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두었다. 시각에 따라 비판할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헌법은 민주주의 선지국의 헌법에 견주어 크게 손색이 없는 훌륭한 헌법이 되었다. 나는 이것이 바로 헌법에 투영된 6월 민주항쟁의 성과라고 본다.

1987년 10월 27일의 헌법 개정 국민투표에 78%의 유권자가 투표했고 93%가 찬성했다.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유효표의 36.6%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다. .. 엄청난 희생을 츠르면서 민주화를 이루어놓고서는 결국 12.12군사반란과 광주학살, 제5공화국 강권통치와 권력형 부정부패의 제2인자를 대통령으로 뽑았으니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민주화운동의 전위였던 재야와 학생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농민운동, 각계각층 지식인운동에 변화를 요구했다. 그들은 정치, 민중운동, 시민운동으로 갈라져 점차 1987년 체제에 통합되었다.


누가 하는 어떤 것이든, 민주주의와 관련한 헌법의 규정을 실현하려는 활동은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대통령에 대해서든, 정치에 대해서든, 통일문제에 대해서든, 혁명에 대해서든, 그 무엇에 대해서든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 헌법이 우리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정부가, 또는 압도적 다수의 국민이 옳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위한 것이 아니다. 대다수 국민이 터무니없다고 판단하는 견해까지도 제한없이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 비록 진리가 아닌 견해라 할지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그것을 제약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헌법의 정신이며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다. 노태우 정부는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에 대한 대학생과 시민들의 의사표현을 탄압했다.

김영삼 정부는 노동법을 날치기했다. 1996년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 소속 의원 154명이 야당에 회의 개최 사실도 통보하지 않은 채 버스를 대절해 국회 본회의장에 몰래 들어가 파견근무제, 정리해고제, 파트타임근로제와 변형시간근로제 등 노동자의 지위에 엄청난 악영향을 주는 조항이 담긴 노동관계법을 의결했다.

한 달 가까이 이어진 노동법 날치기 무효화 투쟁 분위기는 마치 6월 민주항쟁 전야 같았다. 개정 노동법의 내용도 문제가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정부가 국회법의 의결 절차를 지키지 않았고 헌법이 보장한 노동 3권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이 날치기 행위에 대해 사과했고 국회는 임시국회를 열어 노동법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


1997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룸으로써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성숙해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공안통치를 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어 정부와 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부당하게 억압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견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김대중 대통령이 정리해고제를 도입하는 등 노동법을 개정함으로써 노동자의 지위를 현저히 약화시켰다. .. 대규모 파업이나 시민사회의 연대투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구제금융을 제공한 IMF가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리해고제 도입을 강요했다. 둘째, 김대중 대통령은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노동계와 합의하려고 노력했으며 고용을 유지하는 기업을 지원하는 등 정리해고의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국민들이 벼랑 끝에 몰려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심정에 공감하면서도 정부를 심하게 비난하지 않은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권력의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

2004년 봄의 탄핵규탄 촛불집회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시민들이 현직 대통령의 편이 되어 자발적으로 전국적, 동시다발적, 연속적 집회시위를 벌인 적은 그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탄핵규탄 촛불집회의 투쟁대상은 야당이었다. 임기가 넉 달밖에 남지 않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국민이 뽑은 임기 5년 대통령의 직무를 겨우 1년 만에 정지시킨 사건에 대해 국민들은 분개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객관적으로 보아 미국산 쇠고기로 인한 광우병 발병 확률은 매우 낮았다. 문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을 완화하는 결정을 내린 과정이었다. 아무 예고도 하지 않고 최소한의 공론화 과정도 없이, 국민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대통령과 정부가 그런 결정을 한 것이다. .. 물대포와 최루액을 동원한 경찰의 진압과 ‘명박산성’이라고 불린 경찰차벽에도 굴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거짓 사과 말고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지만, 촛불집회는 자발적으로 행동하면서 수평적으로 연대할줄 아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출현을 예고했다.

2013년 시민들은 다시 촛불을 들었다. 이번에는 2012년 대통령 선거에 국정원과 기무사,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이 불법 개입한 것을 규탄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집회였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시국미사를 열었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은 이명박 대통령이 국가기관을 정치적으로 사유화해서 같은 당의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키기 이해 국민을 상대로 온라인 심리전을 벌인 조직범죄였다.




제5장 사회문화의 급진적 변화 : 단색의 병영에서 다양성의 광장으로


인간이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것이 유익하듯이, 삶의 실험도 다양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한, 각자의 개성을 다양하게 꽃피울 수 있어야 한다. 각자의 고유한 개성이 아니라 전통이나 관습에 따라 행동하게 되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자 개인과 사회 발전의 불가결한 요소인 개별성을 잃게 된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반공 난민촌’이었던 대한민국은 사회 전체가 ‘병영’과 비슷했던 산업화시대를 통과해 각자의 개성과 문화적 다양성이 발현되는 민주화시대의 ‘광장’으로 바뀌었다. 지난 55년 동안 대한민국이 겪은 사회문화적 변화는 그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반도국가가 아니라 삼면이 바라로 막히고 북쪽은 철조망으로 차단된 섬나라다.

돈이 많고 자손이 귀하면 당연히 사람을 귀하게 여기게 된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길수록 사람들은 부, 명예, 지위, 쾌락의 추구를 넘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욕망에 더 끌리게 된다. 자신의 존엄을 깨달은 사람이 타인의 존엄성도 존중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귀하게 여기는 곳에서는 다양한 개성을 존중한다. 출산율 저하 현상은 대한민국이 다양성의 광장으로 진화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 것이다.

난민촌을 병영으로 개조한 수단은 군사쿠데타와 공안통치, 독재와 같은 폭력이었다. 그러나 폭력만 가지고 나라를 병영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그 병영은 적어도 난민촌보다는 살기가 나았다. 국가를 병영처럼 만들려면 국민들의 기본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어야 한다.

병영에는 군기가 있어야 한다. 국민들이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조국 근대화라는 국가 목표를 개인적 인생 목표와 일치시키도록 ‘건전한 가치관’을 심어주고 사상과 이념을 통일해야 한다.

우리 정부가 출산율을 억제한 것은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1인당 국민소득을 신속하게 높이기 위해서였다. .. 1961년 장면 정부가 세운 최초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 목표가 바로 ‘빈곤의 악순환을 타파’라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선택한 방법은 일단 외국에서 차입한 자본을 지렛대 삼아 산업을 육성하고, 기업이 돈을 벌어 국적자본을 축적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숙련된 기술을 가진 노동력을 자본과 결합해야 했다. 숙련된 노동자를 얻으려면 교육과 훈련을 시켜야 한다.


밥을 먹게 해주고 겁을 주어 국민을 복종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장기간 권력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국민이 스스로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다. 그렇게 하려면 교육과 미디어를 장악해 대중을 세뇌함으로써 사상을 통일하고 가치관을 통제해야 한다. 국가의 목표와 자기 인생의 목표를 일치시킨 사람은 겁을 주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협력하고 복종한다. 이일을 누구보다 잘해낸 것이 바로 북한이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교육과 언론을 장악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똑같은 시도를 했다. 그러나 겨우 절번쯤, 그것도 잠시만 성공했을 뿐이다.

국민을 학살하고 집권한 전두환 정부는 콤플렉스 때문인지 국민을 즐겁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 전두환 정부는 스포츠, 스크린, 섹스를 부추기는 3S정책을 썼다. 정부가 참혹한 인권유린과 공안통치를 저지르는 동안 <애마부인> 시리즈를 위시한 에로영화 개봉이 봇물을 이루었다. 1980년 컬러 방송을 시작한 텔레비전에는 쇼 프로와 드라마가 넘쳐났고 2년 뒤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1983년 박종환 감독의 청소년 축구 대표팀이 멕시코 세계대회에서 4강에 진출해 국민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야간통금을 해제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표면적 계기는 서울올림픽이었다. 우리나라는 1981년 88올림픽 유치권을 획득했다. 뒤이어 86아시안게임 유치권도 따냈다. .. 정부는 대한민국이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라임을 과시하려고 1982년 1월 5일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통금을 해제했다.

병영의 기본은 피아(彼我) 구분이다. 그래서 정부는 온 국민이 주민등록증을 만들게 했다. .. 최초의 주민등록제도는 1942년 조선총독북 도입했다. 일본 호적법에 바탕을 둔 ‘조선기류령’을 제정해 징용과 징병 등 식민지 수탈을 효율화했다. 1962년 국가 재건최고회의가 제정한 ‘주민등록법’의 목적도 일제의 기류령과 거의 같았다. 현행 주민등록증과 주민등록번호가 생긴 것은 1968년 가을이었다.

시행 초기 주민등록번호는 열두 자리였지만 1975년부터 생년월일 여섯 자리+숫자 일곱 자리로 변경되었다. 뒷자리 첫 번째는 성별(남자1, 여자2)을 구분한다. 그다음 다섯 자리는 출생신고를 한 동사무소의 고유번호와 그 동사무소에서 그날 한 출생신고 순서를 나타낸다. 마지막 숫자는 기술적인 오류 검증에 필요해서 붙인 번호다. 재외동포는 뒷자리가 다 0으로 통일된다. 남자는 1000000(혹은 3000000), 여자는 2000000(혹은 4000000)이다.

주민등록번호 덕분에 국가는 편리하게 국민을 관리할 수 있다. .. 우리는 평생 이 번호를 벗어나지 못한다. 주민등록번호만 보면 그 사람의 나이와 출생지, 성별을 바로 알 수 있다.

지구촌 문명국가들 가운데 우리와 같은 주민등록제도를 가진 나라는 거의 없다. 주민등록번호는 대한민국의 진화과정에 병영국가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화석이라 할 수 있다.


병영국까의 최대 피해자는 노동자였다.

보수 성향의 한국노총 말고는 자주적인 연맹을 만들 수 없게 한 것이다. 한국노총은 해방 직후 사회주의 노선읭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에 대항하기 위해 하향식으로 급조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을 모태로 한 조직이다. 오랜 세월 관변 또는 어용노조 역할을 했으며 1960년 한국노총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다. 그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한국노총은 정부와 손잡고 자주적인 노동조합을 탄압했고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선언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으며 1987년 노동자투쟁 때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 선거 때는 편의에 따라 여당과도 연합했고 야당과도 연합했다.
자주적인 노동조합연합체는 광장의 시대가 열린 후에야 비로소 탄생했다. 1995년 11월에 출범한 민주노총이 그것이다. .. 민주노총은 1997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 이후 10여 년 동안 조직적,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민주노동당의 국회 진줄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만성적인 정파갈등과 대기업 노동조합의 자기중심적 행태 등으로 대중의 신망이 크게 하락했으며 2008년 이후에는 정부의 노골적이고 일상적인 탄압에 직면했다.


1970년대 이후 노동운동, 노학연대와 천년지식인들의 노동현장 투신, 노동운동의 정치적 진출, 민주노총의 탄생은 모두 전태일의 분신에서 시작되었다.


김대중 정부는 ‘생산적 복지’라는 구호를 내걸고 복지국가로 가는 첫걸음을 떼었다 사회보험이 작동하지 않는 사각지대에 햇빛을 비추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전동휠체어를 지원해 고방에 유폐되어 살던 중증장애인들을 사회로 불러냈다. 시민운동가와 자원봉사자들이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돌보던 공부방을 국가정책으로 품어 지역 아동센터로 발전시켰다.
노무현 정부는 그 연장선에서 노인장기요양보험을 새로 도입해 5대 사회보험체제를 완성했고 보육에 대한 대규모 국가 재정지원을 시작했다. 중증장애인 활동보조인 제도를 도입하고 장애수당을 크게 인상했으며 자활사업을 키우고 시설아동과 가정위탁아동에게 아이들과 국가가 함께 저축하는 예금계좌를 만들어주었다. .. 이 모든 것은 이명박 정부를 거쳐 박근혜 정부까지, 예산 부족으로 진통을 겪으면서도 큰 틀에서는 흔들리지 않고 성장해왔다.



제6장 남북관계 70년 : 거짓 혁명과 거짓 공포의 적대적 공존

역사에 대한 지식은
어떤 유형의 정부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으며
또한 어떤 유형의 정부가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가에 대해서도
실마리를 제공한다. - 버넌 보그다너, <역사, 시민이 묻고 역사가가 답하고 저널리스트가 논하다> 리처드 에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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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나 답게 살기
나는 비행기에서 책을 읽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으로서 이 책을 썼다.

제1장 어떻게 살 것인가

사람이 즐기는 놀이에는 한계가 없다.

문제는 무슨 일을 했느냐가 아니다. 왜, 어떤 생각으로 그 일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크라잉넛 멤버들은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스스로 설계했고 그 삶을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았다.

크라잉넛 멤버들은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을 물질이나 지위, 사회 통념이나 타인의 시선, 어떤 이념이나 명분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두었다. 마음이 내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면서 행복한 삶을 스스로 설계했다. 그리고 그 삶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밀고 나갔다. 주눅 들지 않고 세상과 부딪쳤다 인생이 성공했으며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계속 그렇게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고 싶다고 한다.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 그러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대로 계속해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이미 훌륭한 인생이다. 그대로 가면 된다. 그러나 계속해서 지금처럼 살 수는 없다고 느끼거나 다르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아직 충분히 훌륭하다고 할 수 없다. 더 훌륭한 삶을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  

세상은 제 갈 길을가고, 사람들은 또 저마다 자기 삶을 살 뿐이다. 세상이, 다른 사람이 내 생각과 소망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해준다면 고맙겠지만, 그렇지 않다고해서 세상을 비난하고 남을 원망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소극적 선택도 선택인 만큼, 성공이든 실패든 내 인생은 내 책임이다. 그 책임을 타인과 세상에 떠넘겨서는 안 된다. 삶의 존엄과 인생의 품격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죄악과 비천함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훌륭한 삶을 살 수 없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자기 결정권’이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이며 권리이다.

재능의 본질은 즐기면서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왜 자살하지 않느냐고 카뮈가 물었다. 그냥 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사는 이유를 찾으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삶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삶의 의미는 사회나 국가가 찾아주지 않는다. 찾아줄 수도 없고, 찾아주어서도 안 된다. 각자 알아서 찾아야 한다. 찾지 못할 경우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그 사람 자신에게 있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가방끈’이 길지 않아도 된다. 재산이 적어도 상관없다. 나이도 관계없다.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에게 타인의 위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제도 개선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단지 삶의 환경을 조금 덜 냉혹하게 만들 뿐, 그 자체가 내 삶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한다.

자기가 원인을 제공하지 않은 문제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책임이든 사회의 책임이든, 닥쳐온 고통은 일단 내가 견디고 이겨내야 한다. 세상을 원망해본들 달라질 것은 없다. 누구도 그 짐을 대신 져주지 않는다. .. 각자 이겨내야 한다.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다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힘과 능력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 사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렇게 자신의 인격적 존엄과 인생의 품격을 지켜나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타인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다.



제2장 어떻게 죽을 것인가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철학자 밀의 주장.

원하는 인생을 스스로 설계하고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훌륭한 삶, 품격 있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 나름의 견해를 세워야 한다. 그러려면 삶과 함께 죽음도 알아야 한다. 죽음을 모르거나 오해하면 삶을 망칠 수 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문명이 억압이라는 말에는 분명 일리가 있다.

욕망을 억압하면서 규범을 따르는 일이 참기 어려울 만큼 어색하고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진다면 욕망을 표출할 수 있는 문을 더 넓게 열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규범은 자기 자신이 기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따르면 된다.

칸트(Immanuel Kant)에 따르면 존엄한 것은 ‘가치(value)’를 따질 수 없다. 어떤 것의 ‘가치’는 사람들이 가치를 인정하는지, 인정한다면 얼마만큼 높게 평가하는지에 좌우된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은 가치를 따질 수 없다.

자유의지를 발현할 때 지켜야 할 규칙 또는 도덕법이 있다. 칸트는 이 규칙을 이성이 내리는 ‘정언명령(Kategorische Imperativ)’이라 했다. 그는 경험의 도움이 없어도 사람은 이 규칙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칸트의 도덕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준칙이라야 한다.” “둘째, 나 자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로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 존엄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옳게 발현하려면 이 두 가지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사지가 마비된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삶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죽기로 결심했다. 그렇지만 굶어서 죽는 방법은 택하고 싶지 않았다. 굶는 것이 특별히 나쁜 방법이라서가 아니라, 사지가 마비된 사람이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죽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자살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 가운데 오로지 그것만이 허용된다면 강제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강제에 굴복하는 죽음은 존엄하지 않다. 그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가 원하는 벙법은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잠들어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누군가 자기에게 수면제를 제공할 경우 형법의 자살방조죄로 처벌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남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가상 상황이 아니다. 그런 남자가 정말 있었다. 그의 주장은 단순했다. ‘사지가 마비된 삶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자유의지에 따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끝내고 싶다. 이것은 국가와 사회가 억압하거나 침해할 수 없는 정당한 권리이다. 내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행위 역시 정당하다. 그렇게 하는 사람을 처벌하지 마라.’ 이 남자는 정부와 의회에 ‘안락사(安樂死)’를 허용하라는 입법청원을 냈다.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수많은 종교지도자, 의사 , 지식인들과 길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된 여인이 몰래 가져다준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는데 마침내 성공했다. 그의 이름은 라몬 삼페드로(Lamon Sampedro), 스페인 남자였다. 그는 <죽음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였다>라는 책을 남겼다.
스물다섯 살에 물이 빠진 해변에 떨어져 일곱 번째 경추가 부러지는 사고가 없었다면 라몬 삼페드로는 열정적이고 평범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스물 두 살때부터 노르웨이상선을 타고 세계 마흔아홉 군데 항구를 누볐던 이 청년은 여자 친구와 약혼을 할 것인지 여부를 고민하다가 해변가 바위에서 발을 헛디뎠다. 그리고 정밀검사와 재활치료를 받은 끝에, 죽을 수도 없고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라몬 삼페드로는 이때부터 30년 동안 똑같은 하루를 살았다.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침대에서 책과 신문을 읽고, 침대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침대에 누운 채 찾아온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침대에 누워 창문으로 하늘과 바다를 내다보았다. 라몬은 휠체어 타기를 거부했다. 전신이 마비된 삶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로지 죽기만을 원했지만 물과 음식을 끓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것이 강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라몬의 투쟁은 사람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만들었다. 위로하고 격려하는 편지가 쇄도했다. 교황을 비롯한 세계 종교지도자들이 자살은 잘못된 선택이라고 설득하는 편지를 보냈다.  저명한 지식인들이 라몬의 생각을 비판하는 칼럼을 썼다. 스페인 정부와 의회, 법원, 인권재판소는 심리를 회피하면서 대책 없이 시간만 끌거나 다른 기관에 책임을 떠넘겼다. 라몬은 펜을 입에 물고 편지를 쓰고 언론에 기고하였다. 방송에 출연해 자기의 견해를 이야기했다. 1995년 그는 이렇게 쓴 편지와 시, 산문을 한데 묶어 책을 냈다. 여기서 라몬 삼페드로는 자신이 생각하는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면 휠체어를 타든 목발을 짚든 지팡이를 짚든 간에 그 삶은 언제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사라지면, 그래서 그것을 이성으로 깨닫게 되면 그때가 죽을때인 거지요. 전 지금처럼 살아가는 시간이 과연 저에게 가치 있는 것인가에 대해 많이, 아주 많이 생각했습니다. 결론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고통은 아무 가치가 없고 제 고통의 원인 역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제때 죽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면 그 아픔은 인간적인 수준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죽는다는 건 단지 그런 거예요. 태양이 제 기억 속에 가장 아름다운 작별 인사를 새겨두는 것처럼 각자 가지고 있는 좋은 추억을 이 세상과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에 남겨두는 것, 잠드는 것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슬픔도 원망도 없이 그저 피곤에 지쳐 고요하고 평온하게 눕는 겁니다. 그러나 죽음을 그렇게 느끼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인간적이길 바란다고 할 만큼 굉장히 자유롭고 선해야 하겠지요. 안락사, 또는 품위 있게 죽을 권리를 인정하려면 진정으로 인간과 삶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하고 선의 심오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쟁은 전쟁이 아니다. 져도 죽지는 않는다. 이겨서 꼭 행복한 것도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 가진 것으로 인생을 산다. ... 끝없는 경쟁 속에 살아야 하지만, 즐기면서 경쟁에 임하면 이겨도 이기지 못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식이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두 가지를 가지도록 도와줄 수 있다. 첫째는 행복을 느끼는 능력, 둘째는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다.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가지려면 삶을 설계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자녀가 스스로 이것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시행착오를 경험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아이를 잘 키우려면 도를 닦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두 가지만 이야기하자. 따지고 드는 아이를 존중해야 한다. 공정성(fairness)에 대한 인식이 일찍 발달하는 아이일수록 지적 재능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사회성은 가장 높이 발달한 생물학적 재능이다.  끝없이 “왜?”를 쏟아내는 아이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더 창의적인 아이들은 덜 창의적인 아이들보다 부모를 더 힘들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기존의 규범으로 길들이면 아이는 호기심을 버리고 창의적이기를 그만둔다. 어떤 부모도 자기에게 없는 것을 자식에게 줄 수는 없다. 자녀에 대한 사랑과 훌륭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부모만이 그것을 자녀에게 줄 수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언어로 대화하는 것이다. 사람은 언어로만 소통하는 존재가 아니지만 소통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언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말을 하기 전에 아이들은 먼저 말을 알아듣는다. 뱃속에 들어 있을 때부터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완전한 문장으로 아이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아이의 뇌 속에 음성 정보를 처리하는 뉴런과 신경세포가 제대로 자리 잡게 하려면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갓난아이 때부터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집중해서 듣는 아이가 있고 그렇지 않은 아이도 있지만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아이를 씻길 때도 지금 목욕을 할 것인지, 아니면 조금 더 놀다가 할 것인지를 물어보는 게 좋다. 어느 쪽이든 큰 문제가 없는 경우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말과 더불어 진행된다. 인간은 언어로 사유한다. 부모가 반쪽짜리 ‘아기 말’을 쓰면 아기의 생각도 반쪽짜리가 된다.
원하는 것을 성취하려면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 아이큐가 높고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경쟁력이 있는게 아니다. 사람의 경쟁력은 인지적, 정신적, 정서적, 신체적 능력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삶에는 인과관계를 찾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그냥 일어나는 일이고, 일단 일어나고 나면 되돌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칸트의 충고를 기억하자.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그것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하라.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도척이 개 범 물어갔다”는 속담이 있다. 나쁜 사람에게 좋지 않은 일을 당하는 것을 볼 때 우리 어머니가 쓰던 속담이다. 그 이름이 수천 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은 도척은 누구인가? 도척은 중국 춘추 시대 혼란기를 주름잡았던 살인강도단 두목이다. 부하 9천 명을 거느리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힘이 약한 제후의 성을 공격해 재물을 약탈하고 여자들을 강간했다. 사람을 죽여 간을 날로 먹었다고도 전해진다. 그런데 도척도 나름 도(道)를 깨달은 자였다고 한다. <장자> [외편]에 따르면, 부하가 도둑질을 하는 데도 도가 있는지 물었다. 도척은 어디에 간들 도가 없겠느냐면서, 다섯 가지 도를 갖추지 못하면 큰 도적이 될 수 없다고 대답했다.
남의 집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마음대로 알아맞히는 것이 성인이다.
남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은 용기이다.
남보다 뒤에 나오는 것이 의로움이다.
도둑질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를 아는것이 지혜이다.
고르게 나누어 가짐이 어짊이다.

夫妄意室中之藏 聖也 (부망의실중지장 성야)
入先 勇也 (입선 용야)
出後 義也 (출후 의야)
知可否 知也 (지가부 지야)
分均 仁也 (분균 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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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리영희 선생은 말한다. 진실, 진리, 끝없는 성찰, 그리고 인식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신념과 지조.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용기. 지식인은 이런 것들과 더불어 산다.  47-48



우리 모두는 갖가지 편견과 고정관념을 지니고 산다.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모든 종류의 통념이 논리적, 경험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일일이 시험하고 검토할 수 없는 일이기에, 많은 경우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관념과 사고방식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는 맬서스와 얼마나 다른가. 내가 옳다고 믿는 것, 내 신념을 받치고 있는 수많은 통념들 가운데 그릇된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없을 것인가? ..

<인구론>과 맬서스는 금이 간 거울이다. 내 생각도 그릇된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일그러져 있지 않은지 경계하면서, 거기에 나를 비추어 본다. 생각은 때로 감옥이 될 수 있다!  90-91



배불리 먹고 편안하게 지내기만 하면서 배우지 않으면 백성은 짐승에 가까워지므로...  126



마르크스는 사회를 "대립하는 계급의 통일"로 보았다. 그의 세계에는 언제나 투쟁이 진행 중이며 혁명이 준비되고 있다. 그는 부르주아 독재를 타도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혁명이 필연적이며 그것이 역사의 진보라고 믿었다.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마르크스가 혁명의 소용돌이에 몸소 뛰어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베블런의 세계는 유한계급과 생산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그의 세계는 매우 안정되어 있다. 여기서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 인습과 제도의 진화가 있을 뿐이다. 보수성은 지배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보편적 특성이다. 유한계급의 규범과 생활양식은 모든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명예로운 표준으로 통용된다. 하층계급은 유한계급을 타도하기보다 그 일원이 되기를 원하며 그들을 흉내 내려고 애쓴다. 사회와 인간을 이렇게 보면 세상의 소란에 신경 쓰지 않고 이방인으로 살다 가는 쪽이 자연스럽다.  238-239


폭력이 '무지'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무지'란 "처지를 바꾸어놓고 생각해보는 능력의 전적인 결여"를 의미한다.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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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은 ..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인간의 자유와 사회의 정의를 파괴한다고 믿었고, 모든 유형의 집단주의와 전체주의를 악으로 규정했습니다.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글 쓰는 이유를 네 가지로 나누었는데요. 뜻은 그대로 전하되 표현은 제 취향에 맞게 바꾸어 보겠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욕망입니다. 

둘째는 의미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학적 열정'입니다. 자신이 보고 느낀 세상의 아름다움을 글로 표현하고 싶어 하며,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험을 글에 담아 타인과 나누려고 한다는 것이죠. 

셋째는 역사에 무엇인가 남기려는 충동입니다. 자기가 발견한 사실과 진실을 기록해 후세에 남기려고 하는 욕구는 영원한 것에 대한 갈망과 관계가 있습니다. 

넷째는 정치적인 목적입니다. 여기서 정치적인 목적이란 '세상을 더 좋게 바꾸는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입니다.  17-18


사람은 무엇을 글로 쓸까요? 

우리는 내면에 지닌 생각과 감정을 글로 씁니다.  39


글쓰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답게 글을 쓸 수 있습니다.  42


글 쓰는 사람은 관념에 속박당하기 쉽습니다.  44


글 쓰는 사람이 미학적 열정을 자유롭게 발현하려면 어떤 도그마에도 예속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믿기 때문에 저는 어떤 '주의'가 아니라 '옳은 것'과 '선한 것', 그리고 '아름다운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직관의 힘에 의지합니다.  50-52


예술적으로 쓰고 싶다면 자유롭게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정해진 도그마보다 자기 자신의 눈과 생각, 마음과 감정을 믿는 게 현명합니다.  60


저는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문제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글을 씁니다.  65


'완벽하고 치열한 무플'로 대응하는 것이 저의 '민간요법'입니다. 악플러와 싸우지 마십시오. 달래려 하지도 마십시오. 눈길을 주지 마십시오. 극복하려고 하지도 마십시오. 싸울 가치가 없고, 달랠 수 없으며, 눈길을 줄 이유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으니까요. 'X무시'가 최선의 대처법입니다.

악플은 그 대상이 된 사람의 잘못이 아니며 그 사람이 해결해야 할 문제도 아닙니다. 악플을 쓴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남루하며 황폐한지 보여 주는 증거일 뿐이에요.  74


악플 다는 사람을 미워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나쁜 사람만 악플을 다는 게 아니니까요. 다른 사람 처지에서 생각해 보는 태도가 없으면 악하지 않은 사람도 악플을 답니다. 해결해야 할 갈등이 있는데도 소통이 잘 되지 않아 감정이 격해질 때도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악플은 소통을 가로막는 원인인 동시에 소통이 막혀서 생긴 결과이기도 합니다.  82


우리는 남들이 주는 것을 안 받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마음도 살펴서 받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83


비정상적인 악플과 정상적인 비판 글을 구별하는 기준은 근거가 있는지 여부 하나뿐입니다.

표현이 거칠고 어조가 아무리 격렬하다고 해도 일정한 근거를 제시하면서 어떤 주장을 한다면 악플이 아닙니다.  88


틀린 주장이라고 해서 악플이 되는 건 아니에요...

우리는 절대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알려고 노력할 뿐이지요.  89


말이 도무지 통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제 대답은 내버려 두라는 겁니다. ...

사람은 스스로 바꾸고 싶을 때만 생각을 바꿉니다.  95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요? 대화하는 것뿐입니다. 강요하지 말고, 바꾸려 하지 말고, 이기려고 하지 말고, 무시하지도 말고, 그 사람의 견해는 그것대로 존중하면서 그와는 다른 견해를 말과 글로 이야기하면 됩니다.  96


말로든 글로든, 싸워서 이기려고 하지는 맙시다.  97


상대방이 토론하다 말고 화를 내면 한발 물러서는 게 좋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논리적으로 흔들린다는 증거입니다.  98


소수의 사악함보다 다수의 어리석음이 사회악을 부르는 때가 더 많습니다.  101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좋게 바꾸려면 우리 자신이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덜 어리석어져야 합니다.  102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대답할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대답할 수 있습니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대답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다운 글을 쓸 수 있으니까요.

나는 누구인가? 이름을 묻는 게 아닙니다. '나'라는 철학적 자아의 특성이 무엇인지 묻는 겁니다. 인간 일반의 본성 위에 그 어떤 '자기만의 것'을 세웠는지 말하라는 것이죠.  106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한다고 해서 정체성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잇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 것 아닌 게 많거든요. 내가 가진 생각과 감정, 세계관과 인생관은 모두 내가 오감을 동원해서 스스로 경험하고 깨달은 것인가? 자문(自問 스스로자 물을문)해 보면 아니란 것을 바로 알게 됩니다. 우리들 각자의 정신세계에는 문명이 생긴 후 수천 년 동안 철학자와 과학자, 지식인들이 창조한 지식과 정보와 이론의 조각들이 무수히 박혀 있습니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이것을 '문화유전자(밈, memo)'라고 했습니다.  106-107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인문학의 중심을 꿰뚫는 질문입니다. 제대로 살아가려면 끊임없이 내가 누구인지 물어야 하고,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어떤 대답을 찾아야 합니다.  108


쓰고 싶고 또 의미도 있다 싶은 주제를 찾으면 관련 자료를 읽으면서 글을 구상합니다. 초고는 빠른 속도로 씁니다. 문장의 멋보다는 내용을 채우는 데 초점을 두고 쓰기 때문에 초고의 상태가 좋을 리 없죠. 초고가 다 되면 그때부터는 횟집 주방장이 칼을 벼리는 것처럼 내용과 문장을 다음어 나갑니다.  130


베스트셀러 글을 쓰려면... 문장 쓰는 기술이 첫 번째 조건입니다. 좋은 문장으로 표현한 생각과 감정이 훌륭해야 합니다. 두 번째 조건입니다. ...

세 번째 요소는 감정 이입입니다. 독자가 쉽게 이해하고 깊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도록 써야 한다는 것이죠.  131-132


글로 타인의 공감을 일으키려면 쓰는 사람이 독자에게 감정을 이입해야 합니다. 자신이 쓴 글을 타인의 눈으로 살펴보면서 읽는 이가 쉽고 명확하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지 점검해 보는 것이죠.  135


독자가 깊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도록 글을 쓰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그렇게 쓰려는 의지, 둘째는 그렇게 쓸 수 있는 능력입니다.  137


감정 이입을 하기 좋게 글을 쓰는 능력에 대해서 말해 보겠습니다. 일반적 원리는 저도 모릅니다. 제가 쓰는 방법을 말씀드릴 테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텍스트 자체만 읽어도 뜻을 알 수 있도록 씁니다.

둘째, 텍스트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데 필요한 콘텍스트를 텍스트 안에 심어 둡니다.  140-141


길든 짧든, 텍스트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콘텍스트(context)를 파악해야 합니다.

콘텍스트는 텍스트와 직간접으로 관련된 환경, 배경, 조건, 사실, 관계, 맥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콘텍스트를 '문맥'이라 옮기는 분들도 있는데 문맥은 의미가 너무 좁습니다. 텍스트와 쌍을 이루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여기서는 콘텍스트라는 말을 그대로 쓰기로 하겠습니다.

글은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문자 텍스트입니다. 그런데 독자는 나와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내가 쓴 텍스트를 나와 똑같이 해석한다는 보장이 전혀 없습니다. 내가 글에 담은 생각과 감정을 독자도 똑같이 읽어 가도록 하려면 그에 필요한 콘텍스트를 함께 담아야 합니다. 글쓴이가 독자에게 해석의 자유를 무제한 허용하는 문학 글쓰기라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겠지만, 정보 교환과 소통, 공감을 목표로 하는 생활 글쓰기와 논리 글쓰기라면 그렇게 써야만 제대로 메시지를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42-143


마크 트웨인의 말로는 딱 맞는 표현과 대충 어울리는 표현은 반딧불과 번개만큼 차이가 크다니까, 퇴고는 정말 중요한 작업이에요.  151


책을 많이 읽는 데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단 한 권을 읽더라도 책 속으로 젖어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남이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이해하지도 못할 책, 읽어도 공감이 일어나지 않는 책을 굳이 붙들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161-162


독자가 이해하기 어렵고 공감할 수 없는 책은 올라갈 길이 없는 산과 같습니다. 아무리 대단하고 아름다워도 소용이 없습니다. 길이 있다고 해도 너무 크고 높은 산은 오르기 어렵습니다. 히말라야 봉우리를 아무나 오를 수는 없어요.  162


'배우는 책 읽기'를 넘어 '느끼는 책 읽기'에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169


중요한 문장을 남의 글에서 통째로 가져온 경우에 인용 표시를 하는 정도면 충분해요. 각주나 후주로 출처를 밝히는 것이죠. 원문 그대로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자료를 요약해서 한 문장이나 한 단락을 썼을 때는 참고한 자료가 무엇인지 밝혀 두는 게 좋습니다.  182


<국가란 무엇인가>는 제 자신이 국가의 본질과 진화 과정을 알고 싶어서 공부하면서 썼죠. 국회도서관에서 국가론 관련 책을 검색해서 100권 넘게 빌렸습니다. 하나씩 읽으면서 흥미로운 대목마다 색종이를 붙여 표시했어요. 하나라도 색종이가 붙은 책은 따로 추려서 표시한 대목들을 발췌했습니다. 발췌한 인용문을 큰 주제로 나누어 관련성이 있는 것끼리 묶은 다음 작은 주제로 또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책의 목차를 만들었고, 엮어 놓은 인용문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제 생각을 보태 본문을 썼지요.  192-193


사람 따라 책 따라 자료를 찾고 활용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뚜렷한 목표와 방향을 정하고 써야 한다는 점은 같습니다. 어떤 글을 쓰든, 자료를 찾기 전에 먼저 질문을 만들어야 합니다. 질문을 잘 만들면 글은 이미 절반은 완성한 거나 다름없어요.  194


비평다운 비평은 아래 네 가지 조건을 갖추면 된다고 저는 생각.

1) 무엇에 관한 글인지 주제가 분명하다.

2) 필요한 정보를 적절한 논리적 맥락으로 말이 되게 엮었다. 

3) 주제와 무관한 것을 끌어들이거나 엉뚱한 곳으로 가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했다.

4) 꼭 맞는 단어와 표현, 자연스럽고 쉬운 문장으로 주장을 명확하게 전달했다.  205-206


저는 서평이라면 두 가지를 반드시 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에 대한 '객관적 정보'와 비평하는 사람의 '주관적 해석'입니다.

서평은 책 자체를 정확하게 소개해야 합니다. 누가 무엇에 관해 쓴 책이며 그 특성은 어떠한지, 책에 대한 핵심 정보를 제공해야 합니다.  216


일단 어떤 책인지 최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소개해야 읽는 이가 관심을 갖게 됩니다.

서평은 또한 책을 읽은 소감, 해석, 평가를 담아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책 소개일 뿐 서평은 아닙니다.  218


글을 잘 쓰려면 문장 쓰는 기술, 글로 표현할 정보, 지식, 논리, 생각, 감정 등의 내용, 그리고 독자의 감정 이입을 끌어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어느 것이 제일 중요할까요? 독자의 감정 이입을 끌어내는 능력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글쓰는 기술은 외모입니다. 롱다니, 브이라인, 에스라인, 빨래판 복근 같은 것이죠. 내용은 사람이 가진 것이에요. 체력, 돈, 재능, 지식입니다. 감정 이입 능력은 성격, 마음씨, 인생관이라고 할 수 있죠. 사람들은 흔히 외모를 부러워하고 돈과 지식을 선망하지만 행복한 삶을 사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성격과 마음씨와 인생관입니다.  231


일상적으로 쓰는 글은 무엇보다 '유머코드'를 살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면 자신부터 행복해야 합니다.  232


거듭 말씀드리지만 글쓰기는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자기표현은 강제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표현하고 싶어야 잘 표현할 수 있습니다.  250




정훈이의 '표현의 기술'


어릴 때부터 저는 놀이를 통해 상상훈련을 했습니다. 습관적으로 말이죠.  279


상상은 무한한 자유를 누린다는 거 다들 동의하실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적 통념으로 자기검열을 하면서 스스로 그 자유를 억압합니다.

자랄 때 늘 듣던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해라.'처럼 현실적인 생각이 상상을 억압하기도 합니다.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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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은 논리적 글쓰기 일반론이다...

논리적인 글은 구조와 특성이 모두 같다.  11


두려움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글쓰기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12


생각과 느낌을 소리로 표현하면 말이 되고 문자로 표현하면 글이 된다. 생각이 곧 말이고, 말이 곧 글이다. 생각과 감정, 말과 글은 하나로 얽혀 있다. 그렇지만 근본은 생각이다. 논증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여주는 글을 쓰고 싶다면 무엇보다 생각을 바르고 정확하게 해야 한다. 논리 글쓰기를 잘하려면 먼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18


논증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려면 꼭 지켜야 하는 규칙 세 가지를 먼저 소개하겠다.

첫째, 취향 고백과 주장을 구별한다.

둘째, 주장은 반드시 논증한다.

셋째,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한다.  19


논리학이나 수학에는 공리(公理 공변될공 다스릴리, axiom)라는 것이 있다. 증명하지 않고도 참이라고 인정하는 명제가 공리다. 유클리드기하학의 평행선 공리가 널리 알려진 사례다. 글을 쓸 때는 사실을 수학의 공리처럼 대해야 한다. 증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사실로 인정받지 못한 주장은 반드시 그 타당성을 논증해야 한다. 사실과 주장을 엄격하게 구별하고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27


논증 없는 주장으로는 타인의 생각과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설득과 공감은 고사하고 기본적 소통과 교감도 하기 어렵다.  ...

우리는 오랜 세월 논증 없는 주장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 살았다. 사실과 논리에 입각해 합리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목소리 크고 힘센 쪽이 이기는 현실에 익숙하다. ...

부모들은 꼬박꼬박 어른한테 말대꾸한다며 논리적인 주장을 펴는 자녀를 혼냈다. 교사와 교수는 질문하는 학생을 귀찮게 여기거나 구박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서 논리적인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다.  31-32



글을 쓸 때는 주제에 집중해야 한다...

이 규칙을 지키려면 무엇보다 주관적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자기의 감저엥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제어하고 관리할 수는 있다.  37


냉정한 태도로 글을 써야 한다. 자기 자신의 감정까지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해야 한다.

말과 글로 논증하고 토론할 때 지켜야 할 규칙을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그 규칙을 지키면서 글을 쓰는 것은 훨씬 어렵다.  45


글쓰기를 하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텍스트 발췌 요약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61


글쓰기에는 철칙(鐵則 쇠철 법칙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많이 읽어야 잘 쓸 수 있다. 책을 많이 읽어도 글을 잘 쓰지 못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많이 읽지 않고도 잘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많이 쓸수록 더 잘 쓰게 된다. 축구나 수영이 그런 것처럼 글도 근육이 있어야 쓴다. 글쓰기 근육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쓰는 것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그래서 '철칙'이다.  62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거의 100% 발췌 요약'이었다. ...

어떤 텍스트를 요약하려면 가장 중요한 정보를 담은 부분을 먼저 가려내야 한다. 효과적으로 요약하려면 정확하게 발췌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63


내가 남의 말을 경청하고 바르게 이해해야, 남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남들이 잘 이해하고 공감하는 글을 쓰고 싶다면, 내가 먼저 남이 쓴 글을 이해하고 공감할 줄 알아야 한다.  65


논리글.. 우선 쉽게 읽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반박하거나 동의할 근거가 있는 글이어야 한다. 

이렇게 글을 쓰려면 네 가지에 유념해야 한다.

첫째,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주제가 분명해야 한다.

둘째, 그 주제를 다루는 데 꼭 필요한 사실과 중요한 정보를 담아야 한다.

셋째, 그 사실과 정보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분명하게 나타내야 한다.

넷째, 주제와 정보와 논리를 적절한 어휘와 문장으로 표현해야 한다.  74-75


어떻게 하면 훌륭한 글을 쓸 수 있을까? 

첫째는 텍스트 독해, 둘째는 텍스트 요약, 셋째는 사유와 토론이다.  77


논리적인 글을 잘 쓰려면 주제와 관련되어 있는 중요한 사실과 정보를 최대한 많이 그리고 정확하게 알아야 하며, 그것을 적절한 논리적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78


글은 지식과 철학을 자랑하려고 쓰는게 아니다. 내면을 표현하고 타인과 교감하려고 쓰는 것이다.  91


독해력과 언어 구사 능력을 기르려면 책 읽기를 즐겨야 한다. 책에서 우리는 지식을 얻는다. 일상생활의 범위에서 벗어나 추상적, 논리적 사유를 하는 데 필요한 개념을 익히며, 여러 개념을 연결하는 논리적 상관관계를 배운다. 하지만 독서도 억지로 하면 좋지 않다.  123


독해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텍스트는 내용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문제점과 한계까지 탐색하면서 읽어야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면 그 문제점과 한계가 어디서 왔는지도 추론해볼 수 있다.  132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글로 쓰라고 하면 더 어려워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견해를 세우는 데 꼭 필요한 개념과 어휘를 몰라서 그런 경우가 많다. 뭘 몰라서 말도 못 하고 글도 못 쓰는 것이다. '침묵은 금'이라는 격언이 늘 타당한 것은 아니다. 적절한 때 꼭 필요한 말만 하려고 일부러 침묵을 지키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지만 뭘 몰라서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무는 것은 그렇지 않다. 모든 침묵을 다 금으로 대접하면 무지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135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책을 고르는 기준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인간, 사회, 문화, 역사, 생명, 자연, 우주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개념과 지식을 담은 책이다. 이러한 책을 읽어야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지시고가 어휘를 배울 수 있으며 독해력을 빠르게 개선할 수 있다.

둘째는 정확하고 바른 문장을 구사한 책이다. 이런 책을 읽어야 자기의 생각을 효과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문장 구사 능력을 키울 수 있다. 한국인이 쓴 것이든 외국 도서를 번역한 것이든 다르지 않다.

셋째는 지적 긴장과 흥미를 일으키는 책이다. 이런 책이라야 즐겁게 읽을 수 있고 논리의 힘과 멋을 느낄 수 있다. 좋은 문장에 훌륭한 내용이 담긴 책을 즐거운 마음으로 읽으면 지식과 어휘와 문장과 논리 구사 능력을 한꺼번에 얻게 된다.  136-137


논리적 글쓰기를 하려면 추상적 개념을 담은 어휘를 많이 알고 명료한 문장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추상적 개념을 익히려면 문학작품만이 아니라 인문학과 자연과학 교양서도 많이 읽어야 한다.  140


훌륭한 글을 쓰고 싶다면 훌륭하게 쓰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못난 글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  168


잘 쓴 글은 말하듯 자연스러운 글이다.  195


글은 단문이 좋다..

길어도 주어와 술어가 하나씩만 있으면 단문이다. 문장 하나에 뜻을 하나만 담으면 저절로 단문이 된다.  199


단문이 복문보다 훌륭하거나 아름다워서 단문을 쓰라는 것이 아니다. 뜻을 분명하게 전하는 데 편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문은 복문보다 쓰기가 쉽다. 주술 관계가 하나뿐이어서 문장이 꼬일 위험이 없다.  202


단문 쓰기만큼 중요한 것이 어휘 선택이다. ..

어휘가 부족하면 같은 단어와 표현을 반복해서 쓸 수밖에 없다.  204


무엇보다 뜻이 두루뭉수리 불분명해서 아무 곳에나 넣어도 되는 단어는 쓰지 말아야 한다.  205


딱 맞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하면 아무 데나 넣어도 대충 뜻이 통할 것 같은 단어라도 넣어야 한다. 어휘를 많이 알아도 정확한 언어로 생각하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으면 그럴 수 있다.  209


글을 쓰면서 그때그때 딱 맞는 단어와 표현을 찾는 것이 만만한 일은 아니다. 뜻은 비슷한데 느낌이 다른 말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똑같은 단어도 다른 말과 어울리면 조금은 다른 맛과 색을 낸다. 이런 것을 뭉뚱그려 '어감(語感 말씀어 느낄감)', 외래어로는 '뉘앙스(nuance);라고 한다. 토박이말로 표현하자면 '말의 맛' '색깔' '분위기' '결' '무늬' 정도가 되겠다.  210


'모양'은 겉으로 보는 생김새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뜻이 있는 단어는 '모양' 말고도 많다. '모습' '자태' '꼴' '꼬락서니' '몰골' 같은 말이다. 느낌이 좋은 순서로 배열하면 자태-모습-모양-꼴-꼬락서니-몰골이 된다. 이 여섯 단어를 잘 어울리는 다른 단어와 묶어보자. 천사처럼 고운 자태, 사나이다운 모습, 여러 가지 모양, 지저분한 꼴, 한심한 꼬락서니, 비참만 몰골, 이렇게 된다. 서로 무늬가 잘 어울리는 또는 궁합이 맞는 조합이다. 이렇게 어울리는 단어를 조합해 뜻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좋은 문장이 된다.  210-211


우리는 어휘의 무늬 또는 뉘앙스를 특별히 배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말을 익힐 때 문장 안에서 단어를 익혔기 때문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현을 만나면 저절로 어색한 느낌을 받는다. 어색하게 들리는 말은 사람들이 쓰지 않는 말이다. 그런 말은 나도 쓰지 않는게 현명하다.  211-212


스물일곱 살부터 서른 살이 될 때까지 2년 남짓, 나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글을 썼다. 작은 스프링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뇌리를 스치는 모든 생각을 적으려고 노력했다. 완전한 문장을 만들지는 않고 중요한 단어만 적었다. 나중에 메모를 보면서 그때 생각했던 것을 재생했다.  224


티끌은 모아봐야 티끌이라는 우스개가 있다. 하지만 글쓰기는 그렇지 않다. 글쓰기는 티끌 모아 태산이 맞다. 하루 30분 정도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수첩에 글을 쓴다고 생각해보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매주 엿새를 그렇게 하면 180분, 세 시간이 된다. 한 달이면 열 두 시간이다. 1년을 하면 150시간이 넘는다. 이렇게 3년을 하면 초등학생 수준에서 대학생 수준으로 글솜씨가 좋아진다.  228


글쓰기 훈련을 하는 사람은 분량을 엄격하게 정해두고 글을 쓰는 게 좋다. 그렇게 해야 압축의 미학과 경제적 효율성을 갖춘 글을 연습할 수 있다.  234


짧은 글을 쓰려면 정보와 논리를 압축하는 법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압축 기술은 두 가지다.

첫째, 문장을 되도록 짧고 간단하게 쓴다.

둘째, 군더더기를 없앤다.  236


글을 압축하려면 단문을 기본으로 하고 특별한 경우에 복문을 쓴다는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뜻과 느낌을 강하고 확실하고 깊게 전하려면 복문을 써야 한다는 판단이 들때만 복문을 쓰는 것이다. 간단한 원칙이지만 해보면 금방 효과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군더더기를 없애는 것이다. 문장의 군더더기란 무엇이며 군더더기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간단하다. 없애버려도 뜻을 전하는 데 큰 지장이 없으면 군더더기다. 문장의 군더더기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접속사(문장부사), 둘째는 관형사와 부사, 셋째는 여러 단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관형어나 부사어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문장 성분이다.  237


부사와 관형사도 적게 쓸수록 좋다. 이미 완성된 문장이라도 반드시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문장 요소가 있으면 과감하게 빼야 한다.  239


내 글이 왜 쉬울까?

어려운 용어를 쓰고 복잡한 문제를 다루어도 독자가 쉽다고 느낄 수 있도록 써서 그런 것이다. 나는 주제에 대해 특별한 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살마도 주의 깊게 읽기만 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끔 텍스트를 쓴다. ...

다른 정보가 없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텍스트를 쓰려면 철저하게 독자를 존중해야 한다.  244



우리는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로 인생을 채운다. 내면에 잇는 생각, 감정, 욕망을 제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삶이 답답해진다. 각자의 내면에 무엇이 있으며 또 어떻게 그것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  257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행위다. 표현할 내면이 거칠고 황폐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글을 써서 인정받고 존중받고 존경받고 싶다면 그에 어울리는 내면을 가져야 한다. 그런 내면을 가지려면 그에 맞게 살아야 한다.

글은 온몸으로, 삶 전체로 쓰는 것이다.  260


사람은 무엇인가 표현할 것이 있으면 글을 쓰고 싶어진다. 내면에 어떤 가치 있는 것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글로 표현해 타인의 마음을 움직인다.  263


써야 해서 쓰는 글을 잘 쓰려고 노력하면 쓰고 싶어 쓰는 글도 잘 쓸 수 있으며 그 역(逆 거스를역)도 성립한다.

기술만으로는 훌륭한 글을 쓰지 못한다. 글 쓰는 방법으ㄹ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내면에 표현할 가치가 있는 생각과 감정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훌륭한 생각을 하고 사람다운 감정을 느끼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그런 삶과 어울리는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무엇이 내게 이로운지 생각하기에 앞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해야 한다. 때로는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264


자기를 표현하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생각과 감정을, 욕망과 충동을, 기대와 소망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표현해서 타인과 교감할 때 우리는 기쁨과 성취감을 느낀다.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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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저자는 자신의 청춘시절의 책들을 다시 읽어보면서 추억과 새로움을 발견해 나가고 있었다.

이 책은 서평을 한 책이긴 하나... 오로지 주관적인 관점에서의 서평이다.
또한 그의 지식을 정리해 보면서 단편적인  지식을 유기적으로 결합도 하고 배경지식을 적어나가면서 자신의 가치관의 형성과 옛시절의 그리움도 적어 나가고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앞 부분에서와 뒷 부분에서의 느낌을 달리하면서 읽어 내려 갔다.





이 책에 언급되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벌>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코머스 맬서스의 <인구론>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대위의 딸>
맹자의 <맹자>
최인훈의 <광장>
사마천의 <사기>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찰스 다윈의 <종의기원>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14권의 책과 내용중에 나오는 몇 권을 책들...
나는 이 책들 중에 처음들어보는 책도 있었고, 읽어보고 싶은 책 그리고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책도 있었다.

우선 읽어보고 싶은 책으로는 <죄와벌>, <전환시대의 논리>, <맹자>, <사기>, <역사란 무엇인가?>이며, 이 중에 <전환시대의 논리>와 <역사란 무엇인가?>는 처음 읽는 책이다.

저자는 내용중에 여러번 표현한 것이, 청춘에 읽었을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다시 읽었을 때는 새롭게 보이고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다고 하였다.

사람이 학습을 할때, 가장 좋은 방법은 반복이다.
공부가 진짜 자신의 공부가 되게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반복학습이다.
'학습'에 대해서는 습작이긴 하나 따로 정의 내려놓은 바 있다. 물론 그 내용이 창조해낸 것이라기 보다는 나의 경험과 고전에서 이미 알리고 있는 바를 결합하여 정리한 것이긴 하다.
결국 배우고, 익히는 것에 반복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보태면 그것으로 공부의 목적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책 읽기에 그것을 적용하였고, 그것으로 부터 나오는 자신의 생각을 청춘들에게 적어나갔다.
책의 표지를 넘기면 머리말 전에 '이제 갓 세상에 나가 길을 찾는 딸에게'라는 문구가 있다.
그렇다. 자신의 딸을 위한 아버지의 입장에서 글을 써 내려 가고자 했다.
그렇다고 하여도 객관적으로 길을 알려 줄 수 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청춘들에게 아니 방황을 해야만 하는 젊은 청춘들에게 학자로써, 인생의 선배로써, 부모된 심정으로써 ... 여러가지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신을 책과 자신의 소감과 자신의 가치관을 설파해 놓은 면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읽으려 하는 책 중에 다시금 읽게 될 책들은 나에게 그런 가치관을 다시금 형성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 기대한다.
지금도 젊은 시절이긴 하지만 멋모르고 활자만 읽었을 고전들을 다시 읽으며 그 때보다는 더 많은 것을 나에게 남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인생을 더욱 부유하게 해 줄 책들을 알아가며 나를 성장시키는 책들과 함께 내 청춘의 독서는 언젠가 다시금 세상에 꽃 피우기를 열망하기 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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