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강의 - 자기 결정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내가 내 삶을 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9


스스로 결정짓는 삶은 이 규범의 틀 안에서 외부로부터의 강제가 없는 삶, 그리고 어떤 규범을 통용할 것인지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10


독립성은 타인에 관한 것이 아닌, 스스로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되지요.  11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 '부동의 동력(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타자를 움직이는 힘)'이 아닙니다. 컴컴한 어둠 속에 숨죽이고 앉아서 내적 드라마를 이리저리 조종하는 감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한 생각과 감정과 소망을 결정할 때에도 우리는 선행조건 없이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아무렇게나 하지는 않습니다. 이 두 번째의 의미로서의 자기 결정이라는 것은 소리 없이 일하는 난쟁이(큰 인격 안의 작은 인격)로 인한 인격의 중첩도 아니고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상상하는 일도 아닙니다. 어떻게 살 것인지 자문하게 되기까지 이미 그 이전에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일을 겪었고 수만 가지 것들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각인은 또 다른 것들을 향한 접점이 되는데, 우리는 이 접점들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고 해도 별 상관이 없는 이유는, 그 반대 또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점에 서 있는 사람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으니까요. 아무런 소망도 없고 아무런 경험의 발자취도 없다면 기준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의지와 경험이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삶의 역사라는 바탕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삶의 역사가 주는 조건에 의해 제약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기 결정권이 있다고 할 때, 자기 결정권은 그러한 선제 조건들로 이루어진 인과관계적 삶이 흘러온 틀 안에서의 영향력으로만 존재합니다.  11-12


내가 매 순간마다 자신의 과거가 드리우는 그림자와 외부의 영향이 미치는 자기장 안에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자기 결정권 운운할 수 있단 말입니까?  13


나의 내면 세계가 외부와 아무리 밀접하게 얽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세계와 또 다른 하나의 세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과 소망을 주관하여 말 그대로 삶의 작가요. 그의 주체가 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사건을 단순히 맞닥뜨리거나 당하여  그 일로인한 경험에 그저 속수무책으로 압도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주체가 되는 대신에 단순히 경험이 펼쳐지는 무대가 될 수밖에 없는 삶을 가리킵니다. 자기 결정을 이해하는 것은 바로 이런 차이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13-14


우리 스스로를 테마로 삼아서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특징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이것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자신의 경험과 내적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이러한 거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인식과 이해의 거리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는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 생각과 느낌과 소망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14


자기 결정은 가능성에 대한 인지력, 즉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15


내적 거리의 두 번째 종류를 보면 자신의 경험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항상 견지해 오던 나의 사고방식에 만족하는가, 아니면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가? 나의 두려움, 시기심, 증오가 마땅한 것으로 생각되는가? 정녕  나는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이 증오심을 다시 물려주는 사람이 될 것인가? 부모님이 갖고 있던 두려움을 계속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화해와 마음의 여유를 누릴줄 아는 사람이 될 것인가? 같은 질문을 내 소망과 의지에도 똑같이 던져봅니다. 좀 더 많은 돈, 좀 더 높은 지위를 추구하는 나의 의지가 정말로 내 마음을 편하게 하는가? 낵 진정으로 화려한 삶과 요란한 성공을 좇는 사람인가? 혹시 수도원 같은 고요 속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는 유형은 아닌가?  15


자기 결정이 성공하는 경험을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그 무엇이 탄생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아상입니다. 자아상은 우리가 어떤 모습이고 싶은가에 대한 생각입니다. 지그 ㅁ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우리의 자아상과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을 때, 그리고 우리가 행위와 사고와 감정과 소망에 있어서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의 사람이 되었을 때, 그것을 자기 결정적 삶이라고 하 수있다는 것이지요. 바꿔 말하면 자기 결정이 한계에 부딪히거나 실패하는 것은 자아상과 현실 사이에 큰 간극이 존재할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


자아상의 기준이라는 것도 손댈 수 없는 신성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자아상에 허리를 굽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구속하고 노예처럼 옭아매는 생각을 과감히 던져버리는 일이 오히려 더 중요할 때도 있지요. 그리고 영향력에 대해서도 그것을 잘못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내적 구조 변경은 어느 날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하여 영혼의 연금술로 뚝딱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환경을 바꾼다든가 새로운 경험을 해본다든가 낯선 인간관계를 개척한다든가 필요할 경우 치료나 훈련을 받는다든가 등등 외적인 우회로가 많이 필요하지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인식에 있습니다. 원하는 나의 모습과 현재의 내가 너무 달라 계속해서 마음의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면 자아상뿐만 아니라 자꾸만 고개를 쳐드는 그 욕구들의 근원지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자기 결정은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과 굉장히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자기 인식은 사치품이나 뜬구름 같은 철학적 이상이 아니라 자기 결정적 삶, 더 나아가 존엄성과 행복의 구체적 조건입니다.  17-18


확실하다고 믿어오던 것들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증거를 찾아가는 동안 나는 그 확신들이 변화할 수 있는 내적 과정의 문을 열게 됩니다. 이 과정이 충분히 반복되면 내 의견의 총합이 완전히 탈바꿈하여 결과적으로 생각의 정체성이 변화하게 됩니다.... 비판적 물음을 통해서 익숙하던 생각의 패턴에서 한 발짝 거리를 두고 검증 가정을 통해 생각의 주인 자리를 찾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이 지녀온 언어적 습관과 거리를 두는 것과도 큰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또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많은 것들이 모국어를 그대로따라 함으로써 생겨나기 때문이지요.  19


경각심을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정확한 의미를 따져보는 것이고 둘째는 그것이 그 의미를 가졌다는 것을 과연 무엇을 통해 알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 자신에 대해 결정한다는 것은 사고를 조망하는 능력과 사물의 명학함을 추구하는 일 모두에 언제나 굽힘 없는 열정을 가진다는 것과 통합니다.  20


인식된 경험을 세분화하고 구체화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되지 못한 것을 의식화하는 것, 이 두 가지 방법은 우리가 언어적 발현을 통해 우리의 감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기 결정이 적용 범위를 내면으로 확장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23


경험된 과거로 말로 표현하는 우리의 능력은 그러므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집니다. 첫 번째 얼굴은 자아상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허락하는 측면입니다. 이때 자아상은 과거를 특정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나서 결국 미래를 향한 설계도를 가지 ㄴ현재에 도달한 한 사람의 초상화지요. .. 또 하나의 얼굴은 모든 자아상이 그 진위가 모호하고, 착각과 자기기만과 자기 설득으로 가득 찬 구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아상은 진실이 밝혀져 어쩔 수 없을 때나 도덕적으로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을 때 등등 때에 따라 고쳐지곤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새롭게 짜이고 앞뒤가 맞는 또 다른 정황이 생겨나며 맞지 않는 부분은 억지로 잊히고 익히 알고 있던 것이라도 새로이 윤색된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25


기억이 강력하게 압도적인 그 힘으로 어떤 의지를 자꾸만 방해하거나 무시당하고 분열된 과거가 되어 우리의 경험과 행위를 비열한 어둠 속에 꼼짝 못하게 옭아맬 때, 정신의 지하 감옥이 되고 맙니다. 오직 그들을 언어로 불러내야만 그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기억은 이야기될 때 이해 가능한 것이 되고 우리는 기억의 힘없는 희생양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습니다. 기억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잊고 싶다고 해서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이러 ㄴ의미에서 볼 때 기억하는 존재로서의 우리는 자기 결정적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 결정적 존재가 되려면 일단 이해하는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즉 기억이 휘두르는 힘과 끈질김을 우리의 정신적 정체성의 표현으로 보는 법을 배우고 나면 기억은 더 이상 외부 이물질이 아니게 되어 적군으로서의 공격을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26


자신의 목소리와 자신의 울림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사건이지요. 즉 우리 안에서 잘못된 울림을 내느 ㄴ것을 추방하고 새로운 말과 새로운 리듬을 시도해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의 소설을 끝내고 난 작가는 전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장면 중 하나는 책을 들고 말없이 소파에 앉아 아주 가끔씩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30



이제 타인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31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이유가 만일 외부 권위와 그것이 주는 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면 우리는 자기 결정의 상실을  경험할 것입니다. 마치 머슴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그 두려움이 내부의 권위에 대한 두려움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스스로 삼은 자기 자신의 종이 됩니다. 도덕의식과 자기 결정이 서로 공존하려면 두려움이 원인이 되어서도 안 되며 열정 없는 의무감에 의한 것이어서도 안 됩니다. 자기 결정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야 하지요.

한 가지 방법은 이성적이고 공익적인 의미를 두어서 자기 저신의 이익으로도 해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모두 도덕적 규범을 지킨다면 서로를 적대시하는 혼란 속에서보다 자기 결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이 커지므로 결국 각자에게 모두 이득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 중에는 특히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도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도덕적 친밀감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종류의 만남 안에서는 복합적이고 깊은 도덕적 감수성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서로를 이용하기만 하려는 적수들 사이에서는 불가능한 관계입니다. 도덕적 친밀감이 있는 만남에서는 분노와 원망, 도덕적 수치심, 후회 같은 감정도 일어나긴 하지만 또한 의리나 상대방의 도덕적 숭고함에 대한 감탄 같은 감정도 일어납니다. 이러한 감정들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 단순히 사회적 게임을 같이하는 냉정한 동반자였다면 절대 될 수 없는 중요한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에게 중요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중요한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도덕적 감정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적으로 던지기 때문이지요. 이 질문은 자기 결정에 관한 문제가 나왔을 때 우리를 읶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도덕적 친밀감은 비판적인 내적 거리를 자기 자신에게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유지하는 인간관계입니다.  32-34


프랑스의 모럴리스트인 라브뤼예르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외부에서 행복을 찾는 데에 그치지 않고 굴종적이고 올바르지 않으며 정의와는 동떨어진, 미움과 정횡과 편견으로 가득찬 인간들의 판단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 대체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그가 이 글을 쓴 것은 아카데미 프랑세즈로부터 세번째로 입회를 거부당했을 때였습니다. 그가 말한 것은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으 ㄹ하는지에 대해 타인의 칭찬과 확인을 받고 싶어 하는 소망이었죠. 이것은 매력적이고도 위험한 욕구입니다. 인생에서 너무 일찍 인정을 받은 사람들은 어느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자기 자신을 크게 놓쳐버린 느낌을 받는 그런 삶을 살게 되지요.  35


타인이 휘두르는 그러한 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35


자기 결정적으로 발전해나가는 일은 타인의 시선을 맞닥뜨리고 그에 맞설 때만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가장 쉬운 방법은, 외부러부터의 모든 시선을 독립적인 정신적 정체성으로 되받아치는 것입니다. .. 타인의 시서노가의 대결이 자기 결정적인 성질을 띠려면 자기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묻고 또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

내가 가진 것 중 나는 보지 못하지만 타인은 볼 수 있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타인의 시선은 나의 자기기만을 발견하는가? .. 이러한 자아 확인에도 우리가 거리를 둬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바로 라브뤼예르가 꼬집었던 것으로, 타인은 어디까지나 타인에 불과하며 그들이 우리를 평가할 때 우리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오직 그들만의 문제인 수만 가지 요인에 의해 그 평가가 왜곡되고 부정적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결정적 삶은 이러한 낯섦도 견뎌낸다는 것을 뜻합니다.  36-37


자기 생을 스스로 이끌어나가고자 하는 욕구는 타인에게 조종당하지 않으려는 욕구와도 일치합니다. ..

조종은 계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여기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몇 가지 예가 있습니다. 최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주입되는 광고, 속임수, 정보의 차단, 사람의 감정을 비열하게 이용하는 행위, 그 어떤 생각의 형성도 못 하게 만드는 세뇌 작업등입니다.

조종이 악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자아상에 의해 걸러지지 못하는 영향력이며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가진 자아상과 너무나도 동떨어져 내적 상처를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독립적인 인격체로서의 우리는 무시당합니다. 제대로 된 독ㄹ비적인 인격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것은 존엄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가혹한 행위입니다. 

가장 비열한 것은 겉으로 바서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세간에서 통용되거나 심지어는 높이 평가받는 장면이나 은유, 미사여구의 공식 등을 통한 은밀한 조종입니다. 세계와 우리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 중에느 ㄴ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자아상과 자기 결정적 삶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방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텔레비전, 신문, 정치적 연설 같은 것들이 이런 방식의 이야기들로 넘쳐나 수없이 많은 생각의 들러리들을 양산하지요.

그것에 대항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깨어 있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물을 서술하는 데에 이 방식이 정말로 옳은 방식인가? 내가 생각하며 느끼는 방식과 정확히 일치하는가? 막강한 권위에 의해 제정된 요란한 공식이 띠는 당위성이 지극히 당연하게 다가올수록 우리는 더욱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하고 잇는 자신만의 목소리이며 참됨과 독창성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37-38


제가 원하는 문화는 조금 더 잔잔한 소리가 지배하는 문화,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도움을 받는 고요함의 문화입니다. 오직 그것이 최우선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그런 문화 말이에요.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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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나는 어디서, 어떻게, 왜 여자의 성이 우리 사회와 역사에서 제약 받기 시작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14


나는 '막간 이야기1'에 소개한 앤드루의 선택을 따르기로 햇다. 그는 자기와 아내의 행위를 '나누기(sharing)'라고 정의했다. 스윙어들은 '아내 교환하기(wife swapping)'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내가 물건처럼 다른 남자와 바꿔 쓸 수 있는 교환물이라는 암시 때문이다. 이런 대상화의 요소는 '나누기'라는 말에도 있지만, 이 말에는 협조, 연합, 관계, 의사소통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고 핵심적이다.  17



1 새와 뿔


오늘날 점점 더 많은 부부들이 아내가 다른 남자들과 성관계를 탐하는 것을 부부의 성 활동의 중심에 두는 핫와이핑(hotwifing:남편의 허락 하에 아내가 다른 남자들과 성관계하는 일)이나 쿠콜드리(cuckoldry:유부녀의 서방질) 생활 방식을 추구한다.  25


'오쟁이 진 남자'란 뜻이 있는 쿠콜드(cuckold)는 뻐꾸기의 습성에서 유래한 말이다. 일부 뻐꾸기류 새들은 암컷이 몰래 다른 새 둥지에 알을 낳는 생식 전략을 발전시켰고, 이런 일을 당한 새는 자기도 모르게 뻐꾸기 새끼를 제 자식으로 알고 키워야 했다.  26


뻐꾸기류가 모두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탁란'을 하는 것은 아니고, 일부 종만 자기 알을 알이 비슷하게 생긴 다른 둥지에 낳는 속임수를 쓴다. 뻐꾸기는 상당히 간교한 새로, 자기 존재를 잘 드러내지 않는 습성이 있다. 기묘하게도 꺼꾸기는 일자일웅이며, 장기간 한짝과 살아간다.  27


많은 문화와 언어에서 자신도 모르게 다른 남자의 자식을 키우는 불행한 남자를 묘사하는 말을 찾을 수 있다. 영어에서는 '쿠콜드'고, 이는 뻐꾸기 울음소리 '쿠쿠'에서 유래했다. 중국어로는 그런 남자를 '따이 뤼마오즈'라 하고, 이는 '초록색 모자를 쓰다'라는 뜻이다. ..

스페인어로는 '카브론(cabron)'이 사내다움을 잃은 염소 같은 남자를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은 자기 아내가 부정을 저지른 것을 알지만 그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남자, 그러니까 남자답지 못한 남자, 고환이 없는 남자를 일컫는다. 중세 영어 '위톨(witol)'이란 말도 이와 비슷한 의미로, 아내의 부정을 알면서도 내버려두는 오쟁이 진 남자를 나타낸다. 이 말은 자기가 오쟁이 진 남자라는 사실을 안다는 '위팅 쿠콜드(witting cuckold)'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31-32


쿠콜드와 핫와이프 사회에서 현재 쓰이는 쿠콜드의 의미는 '아내가 혼외정사 하는 것을 알고, 사실상 그런 일을 환영하는 남자'를 뜻한다.  32


브라지 ㄹ연구자 클라우디아 폰세카(Claudia Fonseca)는 라틴아메리카의 특징적인 남성 우월주의 마치스모(machismo)가 오쟁이 진 남자가 된느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를 만든다는 생각은 사실과 크게 다르다고 했다. 브라질 문화에서는 여성의 원형이 두 가지 이미지로 나뉘는 경우가 많다. 훌륭한 어머니이자 아내 '산타(santa)'와 난잡하고 성적으로 탐욕스러운 여자 '피라니아(piranha)'다. 그러나 폰세카는 노동자 계층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불륜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살아가는' 여자한테 다른 이름도 붙는다는 것을 알았다. 교활한 여자라는 의미의 '말란드라(malandra)'다. 이런 여자들은 자기 남편을 순종하는 오쟁이 진 남자 '코르노 만수(corno manso)'로 만든다.  32-33



막간 이야기1 앤드루와 마리


내가 만나고 인터뷰한 모든 부부들이 나를 놀라게 했고, 그 놀라움은 유쾌한 것인 경우가 많다... 나는 광란, 통제 불능의 성행위, 난교와 같은 '극단적인 성행위'를 발견할 것이라 믿으면서 이런 생활 방식에 접근했다. 그러나 내가 반복해서 본 것은 자기의 삶을 세심하고 사려 깊게 성찰하고, 사회에서 어떻게 하라고 정해준 방식이 아니라 자기들이 찾아낸 방식에 따라 행동하기로 선택하고, 그것을 자기의 결혼 생활과 성에 적용한 부부들이다.  55




2 일부일처제와 결혼


일부 인류학자들은 결혼과 일부일처제가 인간 진화의 역사와 인간 사회에 매우 유용하고 보호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말한다. 한 남자에 한 여자씩, 한 쌍의 결합이 없었다면 남자들이 여자를 놓고 싸워대면서 폭력적이고 목숨을 건 갈등이 끊이지 않았으리라는 얘기다. 경제적으로 더 성공적이고 권력과 자원을 더 많이 쥔 남자들 사이에서 일부다처제가 현저히 많았다는 근거로 볼 때 일부다처제의 기원도 분명 여기에 있었다. 사회가 일부일처의 한 쌍을 지향하면서 부족 간의 싸움은 물론 부족 내부의 갈등이 줄었고, 여자를 놓고 벌이는 쌍무도 줄었으며, 반면 부족들과 부족 내의 부부들이 자원을 공평하게 나누는 일은 늘었다. 여자를 놓고 싸우는 시간이 줄면서 부족은 더 많은 시간을 협동해서 농사짓고 사냥하는 데 쓸 수 있었다. 여자들도 다른 남자들에게 강간이나 공격을 당하는 일이 줄고, 안전뿐만 아니라 음식과 자원을 확보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일부일처제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60


1878년 미국 대법원은 일부다처제를 금지하는 법이 합헌이라고 판결했고, 더 나아가 일부일처제는 민주주의를 보전하는 데 중대한 문제라고 했다.  83


배우자가 결혼에 따르는 성적인 기대를 위반하지 않았어도 이혼율이 60&가 넘는 경우가 있어 일부일처제는 전보다 그 의미가 훨씬 덜해졌다. 이제 일정 기간마다 배우자를 바꾸는 결혼 형태인 연속 단혼(serial monogamy)이 더 적당한 용어일지도 모른다. 이 결혼 형태에서는 주어진 관계에 있는 동안은 일부일처를 유지하되, 그 관계가 끝나면 성적인 것이든 다른 것이든 다른 사람과 관계로 옮겨간다.  84-85


겉보기에는 일부일처 관계가 효과적인데도 역사는 성적이고 정서적인 정절을 지켜야 한느 일부일처제의 이상이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

일부일처제는 원래 한 번에 한 사람과 결혼하는 데 쓰이는 말이었지만, 독점적으로 성관계하는 커플에게 적용되면서 지속적으로 잘못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인류학자 헬렌 피셔(Helen Fisher)가 주장한 것으로, 두 사람 사이의 성적인 정절은 일부일처제의 정의에 필요한 사항이 아니다... 일부일처제의 기대나 요구 사항을 진정으로 위반하는 것은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집단 결혼뿐이다.  85-86




3 여자, 아내 그리고 여자의 성


그리스 신화를 보면 제우스와 헤라가 남자와 여자 중에 누가 더 성적인 쾌감을 많이 얻는지 말다툼을 벌인다. 둘은 그 답을 알아내기 위해 신의 벌을 받아 7년 동안 여자로 산 티레시아스를 찾아간다. 그는 여자로 사는 동안 매우 유명한 창녀로 난잡한 생활을 했다. 티레시아스는 그 질문에 "사랑의 쾌감의 합을 10이라고 치면 여자가 9를 갖고, 남자는 1만 갖는다"고 대답했다. 이슬람교 시아파 창시자도 "성적인 쾌감의 9는 여자에게 돌아가고, 나머지 1만 남자 몫이다"라고 티레시아스와 비슷한 말을 했다. 힌두교 전설에서는 어느 왕이 신의 분노를 사 여자로 변했다. 마침내 용서를 받은 왕은 남자로 돌아갈 기회를 얻었지만, 여자로 살면서 더 큰 쾌감을 맛본 왕은 여왕으로, 적어도 여자로 남겠다고 선택했다. 이슬람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하고, 구약성경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하는 고대의 경구에서는 이 세상에 탐욕스러운 것이 세 가지 있다고 했다. 땅(혹은 사막), 무덤(혹은 지옥), 여자의 음문이다.  110-111


역사적으로 성은 남자들이 원하는 것이자, 여자가 통제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상품'이었으므로 여자들은 성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여자를 벌하기 시작했다.  117


앨프리드 킨제이(Alfred Kinsey)는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성 연구자로, 자기 침실을 비롯하여 미국 전역의 침실에 성탐색의 문을 열게 했다. 워내 곤충학자였던 킨제이는 개인적으로나 직업적으로 성에 관심이 많았다. 킨제이는 성과학에 관심을 쏟기 전에도 노출증이 있었고, 나체주의 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고 자서전에 썼다. 그의 대학원생들은 성 경험과 자위행위 습관에 관해 킨제이와 긴 대화를 했고, 그런 대화에서 킨제이는 다른 사람들과 자기의 개인적인 경험도 공공연히 나누었다.

킨제이가 수행한 성 연구는 그가 아내 맥과 함께 한 성의 탐색으로 이어졌다. 전기 작가 제임스 존스(James Jones)에 따르면 킨제이는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자신의 동성애적인 충동과 마조히즘적이고 노출증적인 충동도 탐구했다. 킨제이는 자기 주변에서 모은 연구원들에게 성적으로 자유로운 환경을 허용했고, 사실상 이런 관행을 격려했다. 킨제이는 자기 연구원들과 친구들 범주에서는 성행위가 자유롭고, 남성 동성애도 허용되며, 아내들도 나눌 수 있다고 선포했다. 아내들 역시 자기만의 성적인 탐색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추구할 수 있었다. 킨제이의 성 유토피아는 남성 우월주의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성의 자유와 선택을 여자에게도 확대했다. 그러나 외도 문제가 생길 때는 그런 관계가 용납되거나 허용될 수 있는 문제인지 결정하기 위해 조언을 구하도록 했다.

직원의 성관계가 다른 연구원의 부부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킨제이가 그 직원에게 다른 사람의 아내와 성관계를 중지하도록 지시할 때는 명백하게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킨제이가 아내 맥을 수많은 남자들과 기꺼이 나눌 때는 부정적인 영향이 없어 보였다. 많은 연구원과 가족, 친구들이 킨제이의 아내와 섹스 했다고 말했고, 킨제이도 그 자리에 함게 하기도 했으며, 맥 혼자만 있는 경우도 있었다. 킨제이의 제자이자 가끔씩 동성연애 상대가 되기도 했던 클라이드 마틴(Clyde Martin)이 킨제이에게 맥과 섹스 해도 되는지 물었을 때도 킨제이는 그런 일은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거리끼거나 마다할 일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킨제이의 42세 된 아내는 남편의 격려 아래 젊은 클라이드의 성교육 임무를 지고, 자기가 킨제이와 함께 탐색해서 얻은 성적인 레퍼토리를 전수했다. 존스에 따르면 킨제이가 기꺼이 아내를 나누고자 한 이유는 남자들, 특히 클라이드에게 성적으로 끌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킨제이는 다락방에 있는 개인 스튜디오에서 맥이 다른 남자들과 섹스 하는 장면을 필름에 담기도 했다. 맥은 킨제이의 지휘 아래 많은 자원자와 동료 연구자들과 섹스 했다. 맥과 다른 사람들(킨제이 자신을 포함하여)의 자위행위를 필름에 담기도 했고, 킨제이의 지시 아래 집단 성행위뿐만 아니라 이성 커플과 동성 커플의 성행위도 필름에 담았다. 킨제이는 생리적인 문제로 발기부전을 겪어 그가 등장하는 필름은 거의 없다고 한다(나주엥 킨제이 내부자 가운데 한 남자는 킨제이에게 이런 생리적인 문제가 있어 아내의 욕구를 만족시필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섹스 파트너를 주선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 맥은 다락방의 성적인 만남에 행위자로 참여하지 않을 때도 안주인으로서 음료수를 대접하며 남편의 연구를 도왔다.

여자들과 성에 관해 면담한 결과를 보고하는 글을 보면 킨제이는 여성의 성에 대한 개인적이고 직업적인 개념화에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자의 성적 능력이 남자보다 덜하다는 빅토리아시대적인 사고를 했다. 연구 과정에서 그는 여자의 성에 관한 연구는 여성의 전면적인 노출에 대한 사회적인 압력으로 방해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연구와 면담 절차에 이런 어려움을 반영했다. 킨제이는 분명 성의 해방과 간련하여 사회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의도가 있었다. 여자의 성욕이 '덜하다'는 견해는 킨제이가 저작과 연구에서 변혁을 이루고자 노력한 견해와 대조적이다. 그러나 킨제이는 여자들이 엄청난 성적 능력과 욕구가 있다는 보고를 접해도 남자의 성과 비교해 여자의 성이 억제되었다는 견해를 바꾸지 않았다. 킨제이는 자기 표본 내의 여자들은 결혼 전후에 남자보다 오르가슴이나 성적인 생활과 성관계에도 오르가슴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보고했다.

킨제이는 남자의 성과 함께 여자의 혼외정사에 관해서도 광범위하게 보고했다. 그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혼외 성관계에 연루되는 일이 많다고 보았다. 킨제이에 따르면, 많은 경우 혼외정사가 부정적인 결과에 이르지 않았다. 키넺이는 외도가 갈등과 문제를 야기하더라도 그런 결과를 피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여자가 혼외의 성적 교류를 추구하는 이유가 애정 문제뿐만 아니라 결혼 생활의 권태와 성적 불만족, 친밀한 우정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자의 혼외정사가 가끔 결혼 내의 성관계를 개선하거나 증가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킨제이는 내적으로 강인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부부 관계를 지키기 위해 혼외정사는 비밀에 부치는 것이 좋다고 했다.

킨제이는 부부가 모두 내적으로 강인하고, 아내가 남편의 전적인 동의와 인지 아래 혼외정서를 한 부부들과 면담했다. 그 결과 킨제이는 일부 남자들이 아내에게 밖으로 나가 섹스하라고 격려했고, 남편들도 혼외의 성행위(가끔은 동성애)를 탐했으며, 많은 남자들이 아내에게 성적인 만족을 맛볼 기회를 주기 위해 이런 일을 했다고 답했다. 존스는 킨제이가 허용된 여자의 혼외정사에 관해 설명할 때 그의 묘사와 설명을 인용하면서, 킨제이가 아내 맥을 다른 남자들과 나누는 것을 좋아한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고 했다.

따라서 아내 나누기에 대한 킨제이의 설명에는 자기 자신의 동기가 명백하게 반영되었다. 그 하나는 아내가 성적 만족감을 누릴 범위가 남편인 자신에게 제한되지 않도록 하자는 이타적인 요구고, 다른 동기는 자신이 혼외의 성적 교류를 하는 데, 특히 다른 남자들과 성적 교류에 제약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킨제이가 관음증을 통해, 자기 아내를 함께 나누는 남자들과 직접적인 성행위를 통해 자신의 동성애적인 성향을 탐색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기도 했다. 아내 나누기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은 무익하다고 한 킨제이의 주장에는 나도 같은 생각이다. 킨제이 부부의 경우에서 보듯 한 부부 내에서도 다른 남자와 아내의 성을 나누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129-134


1960년대, 성 연구자 윌리엄 마스터스(William Masters)와 버지니아 존슨(Virginia Johnson)은 킨제이가 남긴 것을 취해 미주리 세인트루이스에서 선도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이들은 성행위의 기교에 관해서 많은 매춘부들과 면담한 뒤 단순한 인터뷰를 넘어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 대상자로 남자와 여자를 보집하여 성적인 자극, 삽입, 오르가슴의 생리학적인 요소를 측정하고 분석하고 기록했다. 연구 결과 여자가 오르가슴을 느끼기 위해서는 음핵을 자극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이 연구는 남자와 여자의 성적인 반응의 핵심적인 차이를 처음 경험적으로 기록했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마스터스와 존슨의 연구에서 남자는 오르가슴 후에 신체적으로 다시 발기나 오르가슴을 성취할 수 없는 불응기를 보인 반면, 여자는 그런 제한을 보이지 않았다. 셔피(Sherfey)는 여기서 더 나아가 여자는 성적인 자극이 지속되면 오르가슴도 증가되는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생리적인 수주에서 여자의 성적 능력이 남자보다 높고, 이런 능력은 자연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기나긴 천년 왕국 동안 여자의 성적 능력을 두려워하고 거부한 것과 대조적으로 셔피는 여자의 성적인 반응을 천부적으로 지칠 줄 모르는 것으로 보고, 그 한없는 능력에 찬사를 보냈다.  135-136


마스터스와 존슨의 연구 덕분에 음핵, 음핵 오르가슴, 멀티오르가슴을 느끼는 여자가 모두 건강한 것으로 수용되지는 못한다 해도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38


성 혁명의 파고는 1960년대에 여성용 피임약이 나오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

많은 여자들이 사랑이나 일부일처, 혼약에 대한 요구 없이 성을 즐기려는 욕망을 인정하고, 임신에서 안전해지면서 병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여자의 성에 대한 정의도 다시 한번 바뀌었다.  139-140


<성의 침묵(The erotic silence american wife)>의 저자 델마 헤인(Dalma Heyn)은 남자의 외도는 보통 충동으로 촉발된 생물학적이고 긴급한 욕구인 반면, 여자의 부정은 더 계산되고 더 정서적인 원인에서 나오며, 여자 본인에게나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음을 암시한다고 했다. ..

헤인은 여자가 성적인 이유와 신체적인 친밀함에서 오는 자극적인 기분을 위해 외도한다는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으며, 일부일처제만 중요한 여성의 자질인 듯 다뤄졌다고 한다.  147-148


최근 연구는 여자들이 혼외의 섹스 파트너를 두는 빈도가 젊은 여성들 사이에 높아지고 있고, 그 정도에 있어서도 남녀 간의 차이가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고 했다.  148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더 성적으로 분방할 역량이 잇다. 킨제이, 피셔 그리고 다른 유명한 인류학자와 성 연구자들이 사회가 여자의 난교를 처벌하거나 금하지 않았다면 여자가 남자보다 성적으로 훨씬 더 문란하고 섹스 파트너가 많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남자는 사정 후 불응기가 있어 성적 활동 능력을 잃는다. 하지만 여자에게는 그런 휴지기가 없고 오르가슴을 여러 차례 느낄 수 있으며, 성적 수용력이 거의 무한정하다. 마스터스와 존슨의 주장에 따르면 여자는 한 번에 50번까지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다. .. 전문가들은 남자의 사정이 언제나 오르가슴을 의미하지 않고 일부 남자들은 사정 없이도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다는 데 주목한다. 그런데도 여자들이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다는 데 주목한다. 그런데도 여자들이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남자를 훨씬 능가해서 모터스쿠터가 페라리를 쫓는 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153


역사적으로 부인에게 성의 자유가 허락된 경우는 부를 통제할 수 있거나, 정치적인 권력이 있거나, 경제적으로 독립했을 때다.  155



막간 이야기3 미셸과 크리스


나는 프린세스라는 별명을 사용하는 텍사스 의사와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그녀도 핫와이프다. 프린세스는 10대 시절에 부모님이 다른 사람들과 섹스 하는 사진과 비디오를 보았다. 그녀는 비디오 화면에 어머니가 다른 남자들과 섹스 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고 섹스는 결혼할 때까지 기다려야하는 것이라거나 사랑할 때만 하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쓰레기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몇 주 후 프린세스는 이웃 소년과 처음으로 섹스를 했다. 그 경험은 영 실망스러웠지만, 그 소년의 형과 했을 때는 다른 느낌이었다. 프린세스가 이 소년들 중 하나와 있는 것을 어머니가 본 이후 모녀 관계는 영원히 변했다.

'내가 브라우스는 벌린 채로 서 있는데, 어머니가 나를 보고 비명을 질렀어요. 그런 다음 조용히 나를 바라보더군요. 내가 말했어요. 내가 매트와 섹스 하는 것을 보고 소리 지르다니 어머니는 참 뻔뻔한 사람이라고요. 어머니에게 사진과 비디오 본 것을 모두 말했어요. 어머니는 할 말을 잃었고, 우리는 곧 같은 입장이 되었지요. 어머니와 앉아서 처음으로 진짜 어른다운 성에 관한 대화를 시작했고, 어머니는 자신과 양아버지가 스윙어라고 하면서 스윙잉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었어요. 서로 질투심을 느끼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그렇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섹스 하는 모습을 보거나 그런 사실을 아는 것이 성적인 흥분을 일으킨다고 했어요. 그날 이후로 저는 성적으로 매우 적극적이 되었고, 그 일을 어머니와 양아버지에게 숨길 필요도 전혀 없었어요.'  171-172


사회학자 린 애트워터(Lynn Atwater)는 어머니와 아내인 여자라도 자기의 성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성적인 존재로서 유용성이 증가되면 딸에게 성교육을 더 잘할 수 있다고 했다.  173




4 일부일처제의 대안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거의 모든 사회가 다양한 결혼 제도를 두었고, 그중에서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가 가장 흔하지만, 의무적으로 일부일처제를 강요한 사회는 드물다. 현재 전 세계에서 일부일처제를 요구하는 문화는 20%도 안 되며, 대다수 문화가 일부다처제를 허용한다. 드물지만 일처다부제 사회도 잇다(전 세계 1% 이하에서 발견된다). 일부 인류학적 연구에 따르면 전 세계 40%에 해당하는 사회에서 혼외 성행위를 금지한지 않았고, 사회 규칙과 규범이 이러 ㄴ일을 부추기기도 했다. 일부 문화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다른 남자와 나누는 것을 정중한 예의로 여겼고, 어느 문화에서는 일정 사람들 혹은 명절이나 다산 의식(fertility rite)같은 일정 시기에 혼외정사를 격려했다.  177-178


아내를 손님과 '나누는 영광'은 이뉴이트와 마찬가지로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미크로네시아, 폴리네시아, 아시아, 인도, 아프리카, 호주 원주민 등 다른 문화에서도 볼 수 있었다. 사우스샌드위치제도에서는 손님이 주인의 아내나 심지어 딸과 동침하는 기회를 비롯해 주인이 제공하는 모든 환대를 누릴 수 있었다.  182


경제적인 자원을 상당 부분 남자가 통제하는 사회에서는 일부다처제가 보편적이었고, 여자가 부를 쥔 사회에서는 일처다부제가 흔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형제처럼 유전적인 연관성이 있는 남자들이 여자를 나누는 관습 가운데 주된 형태는 형제다부혼이다.  184


스윙어들은 스윙 문화가 '생활 방식(lifestyle)'이라고 한다. ..

1960년대의 키 파티(key party)에서 유래한 것이라고도 한다. 키 파티는 남자들이 그릇에 자동차 키를 담으면 부인들이 아무 키나 집어 그 자동차 키 임자를 섹스 파트너로 집에 데려가는 섹스 파티를 말한다. 스윙잉에 관한 글에 따르면 이런 문화는 1970년대에 급격하게 늘었다가 1980년대에는 HIV가 퍼지면서 급감했으며, 지난 10년 동안 다시 점차 상승하고 있다.  193


폴리아모리(polyamory:비독점적 다자 연애)  197


폴리아모리는 1990년대에 '책임 있는 비일부일처제'에 대한 인터넷 논의에서 발전해 정의된 개념으로 개방 결혼과 공동생활, 성의 자유 개념을 포함한다.  199


폴리아모리는 '많은 사랑'을 의미하고, 진정한 사랑은 한 번에 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이는 여러 다른 관계 형태와 접근을 포괄하는 폭넓은 개념으로 개방 결혼, 집단 결혼, 과거 수십 년 동안 계속된 성적인 탐색에서 발전한 것이다. 폴리아모리 운동은 일부일처제 안에서건 밖에서건 사람들이 관계에 책임지고 정직하기를 기대하는 것 외에는 별 제한이 없다. 폴리아모리 관계와 성적 교류는 스윙잉이나 집단 결혼에서와 같이 부부의 양 배우자를 다 포함하지만, 한 배우자나 둘 모두 혼외 관계를 하는 개방 결혼과 더 유사하다.  201


스윙어 연구에 포함된 것이나 동성애 커플에서 폴리아모리를 살펴본 것을 제외하면 이 관계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 많은 포리아모리스트들이 스윙잉이 성적인 것에 중점을 두는 것에 비해 자기들은 사랑, 관계, 정직성에 중점을 둔다고 강조하면서 스윙잉과 구별하고자 한다.

스윙어들은 파트너들과 친밀한 우정을 오래 지속하는 반면, 폴리아모리스트는 성적인 모험에 자주 나서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한다고 말한다.  201-202


위키피디아에는 핫와이프가 스윙잉의 하부 문화라고 정의되었다. 

'핫와이프는 남편의 동의 아래 자기 배우자가 아닌 다른 남자들과 섹스 하는 여자를 지칭한다. 대부분 남편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즐기는 것을 보고 대리 만족하거나, 아내의 모험을 지켜보고 듣고 아는 것을 즐긴다. 남편도 같이 스리섬에 참여하거나 아내를 위해 데이트를 알선하기도 한다.'

위키피디아는 핫와이프에 속ㅎ사는 다른 하부 집단을 찾아내는 데까지 나아갔다. "아내 나누기의 독특한 하부 문화인 쿠콜딩은 뒤바뀐 역할에 따르는 성적인 수치심을 강조한다. 아내는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반면 남편은 수동적이고 종속적인 역할로 제한되며, 에로틱한 성행위를 거부하는 것까지 포함될 수 있다."

쿠콜드는 아내의 바람에 따라 오로지 아내하고 섹스 한다는 면에서 자기들은 핫와이프의 남편과 다르다고 한다. 쿠콜드 관계에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섹스를 허락하지 않기도 하고, 남편가 섹스 하는 것보다 연인과 하는 것이 훨씬 좋다는 말을 남편에게 하기도 한다. 아내가 남편 앞에서 다른 남자와 성행위를 하며 남편을 조롱하고 모욕하기도 하는데, 이런 아내들은 '휴밀리아트릭스(humiliatrix)'라는 이름을 얻었다.  203-204


스윙어가 스윙잉에 나서는 일차적인 이유는 성적 모험을 위해서다. 스윙어를 대상으로 한 연구들은 스윙잉을 하는 동기가 다양한 성적 경험, 금지된 성적 만남, 노출증과 관음증으로 얻는 스릴이라고 했다. 그러나 스윙어들이 드는 다른 이유는 새로운 친구를 만들고, 가치와 관심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교류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스윙어들은 일부일처제에 만족하는 척하지 않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즐겁다고 말한다. 스윙잉 활동을 즐기는 동안 윤리적인 원칙을 지키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 생활 방식에 참여하는 데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다. '안 돼요'는 스윙잉에서 큰 효과를 발휘하는 말이고, 다른 사람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배척되며, 스윙어 클럽에서 거부 당하는 일도 종종 있다. 폴리아모리 관계에서는 '안 돼요'라는 말이 여러 가지 수준으로 받아들여진다. 공통의 동의로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이기도 하고, 자기 파트너의 다른 관계를 막거나 끊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스윙어의 삶은 전적으로 왜곡되었을 거라는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스윙어도 평범한 사람들과 비슷한 가치를 가지고 산다. 이들이 사회적인 가치보다는 개인적인 발전에 좀더 가치를 두는 것은 사실이다.  211


많은 개인과 커플, 가족에게 비일부일처 관계는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지만, '평생' 비일부일처 관계를 살펴보았거나, 자녀들과 가족 전반에 미치는 전체적인 영향을 탐구했거나, 이 관계를 일부일처 관계와 비교한 연구는 거의 없다. 일반 대중에 비해 합의한 비일부일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나 혼외정사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신장애, 성폭력, 성 기능장애 발생 비율이 높지도 않았다. 연구 결과들을 보면 비일부일처로 사는 사람들이 부부간의 외도 문제를 겪는 커플보다 긍정적인 관게를 경험하고, 일부일처를 유지하는 보통 부부보다 개인적인 욕구와 성적인 욕구에 대해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

현재 존재하는 연구와 그 결과를 근거로 보았을 때 그런 관계가 역기능적이고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보는 믿음은 비일부일처 관계의 진정한 영향에서 근거한 것이기보다는 문화적인 기대에 어긋나는 비일부일처 관계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인 듯하다.  213-214


지금까지 진행된 연구들은 연구 문제와관련해 시대에 뒤떨어졌거나 제한점이 있지만, 비일부일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매우 활기넘치는 성격 양상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일반 대중에 비해 정서적인 문제나 정신 질환을 많이 겪는다는 근거는 없다. 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성격 유형과 정서와 관계 면에서 기능 상태는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에따라 차이가 많은 곳으로 보이며, 비일부일처 생활 방식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빈약한 정신 건강과 기능 상태를 보인다는 믿음을 지지할 근거는 없다. 스윙잉을 하는 여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이 남자만큼 자기의 성 활동과 살메 행복하고 만족하는 것으로 보이며, 남자들에게 성적으로 이용 당한다는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상 일부 비일부일처 관계는 전적으로 여자의 욕구에 중심을 두고 있다. 폴리아모리보다는 스윙잉이 여성 험오증에서 나온 관계라고 인식되지만, 폴리아모리 활동에 관해서는 정보가 거의 없다. 그러나 폴리아모리 사회에서 여자의 강력한 지도력을 고려한다면 폴리아모리 생활 방식 전반에서 여자가 희샹한다는 근거는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214-215


인간이 자연적으로 일부일처에 적합한 존재인지 아닌지는 인간의 행위와 별 관계가 없다... 인간은 일부일처를 유지할지 말지 선택할 수 있지만 연구는 많은 사람들이 일부일처를 선택하지 않고, 결혼이나 현재 관계에서 벗어나 성적 교류를 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 그런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병 발생률이 높지도 않고, 정서적이고 성적으로 불안하다는 근거도 없으며, 규범에서 벗어난 성 활동이 관계를 해친다는 근거도 없다.  215-216


어느 하나의 비일부일처 관계가 사회와 법적인 수용을 얻어 궁극적으로 승리를 쟁취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친밀한 관계에 대한 사회의 시각이 더 융통성 있게 바뀌어 개개인의 욕구를 충족할 유연한 관계를 허용할 가능성은 있다.  218




5 역사를 통해 본 욕망의 아내들


<유혹의 기술2:세상을 매혹했던 여자들>의 저자 벳시 프리올뢰(Betsy Prioleau)... 에 따르면 여자는 자연적으로 다혼(多婚 많을다 혼인할혼)성이고, 오르가슴을 여러 차례 맛볼 수 있으며, 남자들은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성적 능력이 있다. 프리올뢰는 태초 이래 핫와이프와 다른 유혹녀들의 삶과 역사를 검토하면서 남자의 넋을 흐려놓은 여자의 성적 원동력에 찬사를 보냈다. 이런 일은 남편의 동의 아래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241-242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 243

칼리굴라 치세 동안 클라우디우스는 그의 사촌 메살리나와 결혼했다.  344

역사상 악명 높은 쿠콜드 이야기 가운데 캐슬마인의 로서팔머(Roger Palmer) 백작  246

보르자 가문의 수장 로드리고 보르자(나중에 교황 알렉산데르6세)의 딸 루크레치아  248

샤틀레 후작 부인으로 불린 에밀리 뒤 샤틀레  250

제인 엘리자베스 디그비(Jane Elizabeth Digby)  257

빅토리아 우드헐(Victoria Woodhull)은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던 욕망의 아내다  261

20세기 초 위대한 피아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인 바이올렛 고든 우드하우스(Violet Gordon Woodhouse)  265

안느 루이즈 제르맨 네케르  267

요크셔 가문의 후손인 검은 눈의 미녀 엘리자베스밀뱅크  271


역사에 걸쳐 많은 아내들과 여자들이 일부일처제의 구속과 침대를 한 남자와 나눠야 한다는 제한을 거부했다.  279


성적으로 힘 있고 부정한 많은 여자들이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성공적으로 이런 생활을 이끌어갔다. 이런 성적 관행이 상류층에 제한되지 않았다는 근거는 있지만,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경우는 지식인 계급과 문인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다.  280




6 문학과 영화 속의 아내 나누기


에리카 종은 소설 <날기가 두렵다>엣 여자의 성을 탐색했다.  296


케이트 쇼팽의 소설 <각성(The Awakening)>  297


2002년, 카트린 밀레(Catherin Millet)는 '여자가 쓴 가장 노골적인 섹스 관련 책'이라는 말을 듣는 <카트린 M의 성생활>을 내놓았다.  298


아이작 싱어의 <하우스 프렌드>  300


로렌스 블록의 Small Town(작은 마을)

영국 소설가 하워드 제이콥슨의 Act of love(사랑의 행위)  302


<펜트하우스 레터스>의 편집장 캐시 카바노프는 지난 몇 년 동안 잡지사에서 받은 편지 중 가장 인기 있는 주제는 아내를 다른 남자와 나누는 경험이나,아내가 다른 남자(아니면 남자들)와 함께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말했다.  306


제22권 처음 몇 페이지에는 편집자가 이렇게 언급했다. "우리가 받는 편지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주제는 관음증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내를 지켜보는 것이다. 이런 남편들에게는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 어느 경우에는 여러 남자들과 정열을 불태우는 것을 지켜보는 일보다 흥분되는 일은 없는 듯하다. 다른 남자가 제공하는 봉사와 기교로 아내가 몸을 흐느적거리고, 땀을 쏟으며 오르가슴으로 몸을 떠는 것을 지켜보는 남편의 마음은 에로틱한 몽상으로 들끓는다."  307


니 잡지에 실린 편지들... '그 이야기에 댛나 기억이 상당히 흐릿하긴 하지만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남자들이 보통은 여자 친구나 아내가 그런 일을 한다면 처음에는 충격이고 상처를 받겠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 일로 성적 자극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는 점이다.'  308


영화 <사이드웨이>

덴마트 영화 제작자 라스 폰 트리에가 만든 <브레이킹 더 웨이브>

카트린 브레야가 감독한 독립 영화 <로망스>

카드린 드뇌브가 주연한 1967년 영화 <세브린느>

데미 무어와 로버트 레드포드가 출연한 영화 <은밀한 유혹>




7 페티시와 판타지


상당히 많은 연구들이 정신 건강 전문가 대부분이 비일부일처 관계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을 정신 질병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단느 것을 보여주었다. 아내 나누기에서 이런 가정은 수많은 방식으로 나타난다. 첫째, 아내 나누기가 보통 '페티시'라고 부르는 성도착이 있음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둘째, 아내 나누기에 관심이 있는 것은 정신 질병과 성격장애가 있음을 나타낸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 아내 나누기에 대한 욕구, 흥미, 실행이 정신장애와 정서장애의 증상이라고 믿는 것이다. 

성 장애와 정신장애를 연구한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정신 건강에 관한 연구는 상당 부분이 주로 사회적인 편견과 비과학적인 판단에 근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 다시 말해 흔하지 않은 행위는 정상이 아닌 것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치유와 회복 과정의 일부일 수 있다.  325-326


성 연구자와 임상의는 성 장애 가운데 관음증과 노출증을 배우자가 다른 사라모가 섹스 하는 것을 지켜보는 순전한 판타지와 구별한다. 이런 판타지에서 나온 행위는 임상적으로 관음증과 노출증으로 진단된(가끔 기소 당하기도 하는) 사람들이 흔히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행동을 한다고 보고되는 것과 다르게 안정적인 관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 관음증 환자들은 발각될지 모르는 두려움이라는 스릴을 맛보기 위해 그런 일을 한다지만, 서로 합의하여 배우자의 성행위를 지켜보는 판타지에서 그런 두려움은 찾을 수 없다.  330


헤로도토스(herodotos)는 헤라클레스의 후손인 리디아의 왕 칸다울레스(Candaules)의 이야기를 했다. 칸다울레스는 자기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믿었고, 아내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칸다울레스의 시종 가운데 기게스(Gyges)라는 경호원이 있었다. 그는 칸다울레스의 조언자면서, 왕이 자기 아내의 아름다움을 찬미할 때는 경청자 역할을 했다. 어느 날 칸다울레스가 기게스에게 왕비의 아름다움을 확실하게 믿으려면 왕비의 벗은 모습을 봐야 한다고 고집했다. 기게스는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거절했지만, 왕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칸다울레스는 기게스를 침실에 몰래 들여서 왕비가 잠자리에 들기 전 옷 벗는 것을 지켜볼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기게스가 침실에서 빠져나올 때 왕비가 그를 보았고, 그와 남편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아챘다. 다음 날 왕비는 기게스를 불러 그의 행동에 대한 벌로 죽음을 택하거나, 칸다울레스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뒤 자기와 결혼하라고 명했다. 그날 밤 왕은 전날 밤과 같이 기게스를 침실에 들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게스가 칼로 무장하고 있다가 왕이 잠든 틈을 타 심장을 찔렀다. 기게스는 왕위를 빼앗고 왕비와 결혼했다.

다양한 자료에 따르면 칸달리즘(candaulism)이란 다른 남자들에게 아내의 누드 사진이나 이미지를 보여주는 행위 혹은 아내의 동의 없이 다른 남자에게 아내의 벗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일을 말한다.  336


스윙어들이 정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이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지만, 이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이런 인식과 다른 결과를 보인다. 1970~1980년대에 연구자들은 스윙어 집단을 대상으로 다양한 성격검사와 심리검사를 한 결과, 이들이 적그적이고 자발적인 생활 태도를 보인다고 했다.  338


이 책에서 본 부부들이 의도적으로 행위하는 것과 같이 쿠콜드 관계에서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 훨씬 명백하고 조심스런 협상이 진행된다. 남편은 결혼 관계에서 아내에게 행사하는 성의 주도권을 포기하고 복종적인 역할을 수용한 채 자기의 욕망과 흥미를 조심스럽게 펼쳐야 한다.  351


바우마이스터는 여자가 남자 파트너의 부정함을 즐기는 '반대 쿠콜드리'는 거의 들어본 일이 없다면서 이는 핵심적인 성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352


내가 기술한 부부들의 성행위는 조증 증상이 있는 기간이나 다른 심각한 정신병 증상가 함께 나타나지 않았다. 경계성인격장애와 같은 성격장애로 진단된 사람들은 격렬한 자극에 대한 갈망, 정서장애와 성격장애가 결합되어 거칠고 경계를 파괴하는 성행위를 자주 보인다. 그러나 강박성 성행위, 정신 질병과 성격장애가 있는 경우라면 이 부부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긍정적 생활 기능 수준을 보이지 못하도록 방해할 만큼 증상이 심각했을 것이다.  356-357


아내의 난교와 쿠콜드 남편의 복종적이고 양성애적이며 자기 패배적인 행위가 아동기에 당한 성폭력이 어른이 되어서까지 영향을 미친 탓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원인과 결과라는 실타래를 풀기는 쉬운 일이 아니고, 비일부일처 관계가 건강하지 못한 것이라는 핵심적인 가정은 연구 결과가 아니라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금지에서 나온 것이다.  357-358


핫와이프 현상을 병적이고 건강하지 못하며 부정적인 감정이나 경험에 뿌리를 둔 것이라는 가정으로 접근하는 것은 사회적인 금지와 도덕적 판단, 여자의 성에 대한 두려움의 결과이자 영향이다. 내 표본은 광범위하지도 과학적이지도 못하지만, 내가 이 조사를 하면서 인터뷰하고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감정, 성격 문제, 정서 문제의 증상을 보이거나 보고하지 않았다.  358-359


스웨덴의 국민건강과 복지위원회(National Board of Health and Welfare)는 2008년 11월에 사도마조히즘, 페티시즘, 복장도착증과 관련한 행위들은 더 이상 정신 건강 문제가 아니라고 결정했다. 라스 에릭 홈(Lars-Frik Holm) 위원장은 "이런 진단은 이성애 선교사 체위가 아닌 것은 모두 성적 이상이라고 여기던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이들의 성적 취향은 사회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선언했다. 미국정신과학협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APA)도 정신장애 진단에 대한 미국의 접근 방식을 최신화하면서 비슷한 논의를 했다.

성해방연맹(Thw National Coalition for Sexual Freedom)은 특히 사디즘, 마조히즘, 복장도착증의 경우, 성도착에 대한 APA의 진단 기준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APA의 진단 기준에 있는 많은 진술들이 모순된 연구를 인용하면서 진단 기준이 과학적이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나온 것이라고 했다.  360




8 쉬운 일은 아니다


에리카 종은 <날기가 두렵다>를 쓸 때 아내가 혼외의 성적 모험을 한 뒤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것으로 책을 끝내고 싶은 욕구에 저항하느라 갈등을 겪었다고 했다. 나도 이런 생활 방식으로 부정적인 결말에 이르는 경우도 보여주어 이 책의 시각에 균형을 잡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생활 방식을 추구하면서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많은 사람들과 부부를 만났다. 그러나 이 책을 위한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성적 판타지를 좇던 많은 이들이 예상치 못한 이유로 파경에 이르거나, 다른 불행한 결과를 겪은 이들도 만났다. 이 생활 방식 역시 인간의 다른 시도들과 마찬가지로 동전의 양면 같은 면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388-389


역사를 통틀어 그리고 현시대에도 아내 나누기가 만연하지만, 이런 생활 방식이 보편화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사회가 이런 행위를 금지한 길고 긴 역사가 사라지지 않았을 뿐더러, 오늘날이라고 해서 훨씬 누그러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비일부일처는 관계에 무엇을 의미인가? 서구 사회에서 혼인 관계 외에 다른 사람과 섹스 하는 것은 엄청난 기만과 경멸, 정직하지 못한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며, 규범을 위반하는 행동으로 인지된다. 그러나 부정과 결혼에 관한 수많은 책들이 혼외정사가 자동적으로 결혼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다는 생각하는 반기를 들고 있다. 부정이 조용히 수용되는 서구 문화에서도 이런 일은 은밀하게 해야지, 공개적으로 그런 관계를 했다가는 명예와 존중에 도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믿음의 근원은 일부일처 관계를 사랑의 가장 순수한 형태로 인지하는 데 있을 것이다. 혼외 관계를 하고,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다면 당사자나 관계에 잘못된 점이 있는 것이라는 믿음도 한몫한다. 부부와 개인을 상담하면 나는 이런 믿음을 '디즈니 신화'라고 이름 붙였다. 자기의 천생연분을 만나면 행복하게 사는 일만 남았다고 믿는 것이다.  397-398


스위어를 대상으로 한 많은 연구에서 이들의 결혼 생활 만족도는 다른 과계와 비교햇을 때 별 차이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스윙잉이 관계를 파괴한다고 믿지만, 연구 결과에 따르면 스우이어들은 자기들의 생활 방식이 관계에 긍정적이고 이로운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399


스윙어와 폴리아모리스트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이 대부분 이혼 경험이 있고, 일부일처 관계에서 갈등을 겪었으며, 현재의 비일부일처 관계에서 이전 관계보다 훨씬 만족감과 충족감을 얻는다고 했다. 스윙잉과 비일부일처 커플들이 자기들의 관계에 만족하고 행복을 느낀다는 결과를 도출한 연구는 이런 관계에 대한 연구자들의 긍정적인 편향이 개입된 것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399-400


대다수 스윙어 커플은 각자 활동해도 보통 배우자에게 자기가 경험한 일을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감정을 배우자에게 감추기는 커녕 자세히 들려주어 성적 흥분을 자극하고, 부부의 성생활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비일부일처 관계의 동성애와 양성애 커플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대다수 커플이 혼외 관계의 자세한 사항을 배우자와 이야기하지만, 그 정도와 내용은 개인이나 커플마다 달랐다.  401-402


'컴퍼션'은 폴리아모리 관계에서 정의된 개념으로, 자기 파트너가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이다. 따라서 컴퍼션을 느끼는 남편과 아내는 파트너가 다른 사람과 정서적이고 신체적인 사랑을 나누면서 얻는 쾌감을 경험하는 것에서 대리적인 감각보다 깊은 기쁨을 얻는다.  403


다양한 비일부일처 생활 방식 전반에 걸쳐 가장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문제가 질투심이다. 이런 커플들은 질투심이란 문제를 놓고 끝없이 논의하고 논쟁을 벌인다. 

연구와 일화적인 보고에 따르면, 여자가 남자보다 자기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신체적으로 친밀하거나 관계하는 것에 질투심이 심하다고 한다.  404-405




9 아내 나누기의 거침없는 신세계


이 세상 거의 모든 것처럼 아내 나느기도 기술을 받아들이고 바꿨으며, 기술에 의해 변했다.  429


자신을 '킹불(Kingbull)'이라고 부르는 한 사업가는 아내가 자신을 쿠콜드로 만들어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남편들을 돕기 위해 나섰다. 그는 자기 웹사이트에서 '최상의 쿠콜드 지침서(Ultimate Cuckold Manual)'라는 전자책을 판매한다.  434


어쩌다 만난 사람과 하는 성행위나 핫와이핑의 그룹 섹스와 유사한 것으로 영국에는 '도깅(Dogging)'이 있다. BBC의 보도에 따르면 도깅은 커플들이 외진 곳에서 카섹스를 하는 동안 차 밖에 있는 남자들이 구경하거나 자위를 하고, 사진을 찍거나 섹스에 함께 참여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런 행태는 커플이나 청소년이 차 안에서 성행위하는 것을 남자 청소년이 몰래 구경하던 데서 나온 것으로, 10~15년 전부터 성행했다. 일부 커플은 구경꾼드의 즐거움을 높이기 위해 차 안에 조명을 켜고 일을 벌인다. 차창이나 문을 열어놓고 구경꾼의 참여를 부추기는 커플도 있다. 가까이 다가와서 혹은 차안으로 들어와 구경하게 하거나, 섹스에 동참하도록 하기도 한다. 도깅 장소는 경찰이나 이웃의 분노를 피할 수 있는 다양한 장소를 찾을 수 있다.(일설에 따르면 이런 커플들을 달아나게 만들기 위해 경찰 사이렌을 구입해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현재 영국 법에 따르면 쌍방이 합의한 일이고, 성인이라면 그리고 분노한 이웃만 없으면 도깅이 위법 행위는 아니다.  440-441




10 수태를 위한 액체


여자의 사정에 관한 이야긴느 질 오르가슴이 우위냐, 음핵 오르가슴이 우위냐를 놓고 벌이는 일진일퇴의 논쟁까지 얽히면서 복잡하게 돌아갔다.  469


고대 그리스인은 여자의 성액을 성적인 쾌감뿐만 아니라 생명 창조와도 관련된 일로 여기고, '생산' 능력이 있다 하여 예찬했다. 히브리인은 여자의 성액을 '깨끗하지 않은' 월경혈과 다르게 여겼다.  470


힌두와 탄트라 경정에서도 여자의 사정이 여자의 '커다란 쾌감'과 관련 있고, 여자가 사정하려면 남자의 사정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자극이 필요하다고 했다.

의사가 여자 환자의 '히스테리성 발작'을 멎게 하기 위해 손으로 자극하거나 기계적인 마사지를 하던 시절에는 여자의 '씨앗 방출'을 야기하는 것이 윤리적이고 건강한 일인지 논쟁이 많았다. 그러나 일부 의사들은 여자가 씨앗을 보유하는 것이 질병과 광기를 일으킨다면서 이런 상태를 해소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의사의 의무라고 했다.

킨제이는 여자의 사저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것을 오르가슴과 연결하지 않았다. 마스터스와 존슨도 킨제이와 마찬가지로 여자의 오르가슴이 남자와 다를 것 없지만 사정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 

여자의 사정을 둘러싼 논란은 대부분 사정액의 성분에 대한 우려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 액체는 소변인가, 아닌가? 사정하는 여자들은 케이의 10대 시절 연인이 케이가 침대에 오줌을 누엇다고 몰아붙인 것처럼 단순히 소변을 배출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생물학적인 과정으로 나오는 액체인가? 이 문제에는 과학적인 논란이 있고, 연구자마다 의견이 달랐다... 

여자의 사정액은 요도 안에 있는 여러 관을 통해 배출되는데, 액체가 솟구치거나 분사된다.  471-472


지금은 스킨샘(Skene's Gland)이라고 부르는 비뇨생식기계에 있는 샘이 '여자의 전립샘'으로 작용하고, 남자의 전립샘이 정자를 전달하는 정액을 만드는 방식으로 여자의 성과 관련된 액체를 생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472


독일 산부인과 의사 에른스트 그뢰펜베르크의 이름을 따서 붙인 지스팟(G-spot)에 대한 설명은 1980년대에 나왔다. 대중과 성 전문가들이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과학계에서는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되는 개념이다.  473


성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심리치료사 리사 로리스(Lisa Lawless)는 여자의 사정을 가르치는 일을 전문으로 한다. 그녀는 모든 여자들이 사정을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비디오와 책을 냈고, 사정을 경험하지 못하는 여자는 특별한 경험을 놓치는 것이라고 했다.  473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사정을 경험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앗다.(이 비율이 약 40%라고 한 조사 결과도 있기는 하다). .. 대다수 여자는 한 번이나 두 번 정상적인 오르가슴 후에 사정한다.  474


남자의 전립샘액은 정자가 살아갈 양분과 환경을 제공한다. 여자의 몸에서는 이 액체가 죽은 세포를 제거하는 것을 도와 질을 청소하고, 질에 필요한 산성도 균형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연구자들은 여자의 사정이 종종 오르가스모가 연관되지만 이것이 보편적으로 오르가슴과 연결되지는 않고, 가끔 오르가슴과 동시 혹은 전과후에 독립적으로 일어난다고 했다. 여자의 사정은 질에 잇는 정액을 청소하고 배출하므로, 진화 과정에도 하는 역할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474-475


질이 해부학적 구조를 보면 오르가슴과 상관없이 삽입후 정자를 보유하도록 되어 있다. 성교 후 여자의 질에서 정액과 액체가 흘러나오지만, 삽입 후 30분까지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정자가 모이는 자궁 경부 근처 질에서 풀 혹은 컵을 이루기 때문이다. 정자가 즉시 배출되는 일도 있지만(얼룩말은 암컷이 질에서 정자를 즉시, 극적으로 뿜어낸다) 정액은 상당 부분 이 풀에 고여 있고, 질과 자궁 경부의 해부학적 구조에 따라 여기서 자궁으로 이동한다.  478-479


연구 결과를 보면 여자가 피임하지 않고 오르가슴을 느낄 때 정자의 70%가 질과 자궁 경부에 남았다. 반대로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했을 때는 30%만 남았다. 이는 부분적으로 여자의 오르가슴이 자궁 경부의 점액 필터를 약하게 함으로써 정자가 자궁에 도달할 길을 더 많이 만들어주고, 오르가슴을 느낄 때 질의 근육이 수축되어 자궁 경부로 정자를 더 많이 흡입하기 때문이다.  479


갤럽과 레베카 버치가 정액이 신체의 생리와 인간 행위에 어떤 효과를 미치는지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연구는 더욱 광범위해졌다.(나는 여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구강이나 항문 성교 중에 받아들인 정액이 남자에게 미치는 효과도 포함했다.)  481


1970년대 <코스모폴리탄>과 <플레이보이>는 독자들에게 혼외정사가 결혼 생활에 다시 정열의 불꽃을 피우게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501




11 성녀인가, 창녀인가?


증명할 수는 없더라도 나는 미국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현재의 미국 중산층 남편들이 결혼 당시 아내가 처녀가 아니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아내에게 혼전 관계가 있었거나, 현재 그런 관계라는 사실을 가장 잘 받아들인다고 생각한다. 남편들이 그 사실을 알고도 마음이 전혀 불편하지 앟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현시대 남편들은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와 달리 그런 소식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삶이 조각날 일로 여기지 않고, 여자를 성적인 존재로 더 잘 받아들이며, 극단적인 경우 부정한 아내나 경쟁자 남자에게 폭력으로 복수한다고 말하는 정도다. - 게이 탈레스  506


한 부부가 내게 말한 것처럼, 더 중요한 문제는 상대 남자의 성격이다. "그 남자를 믿을 수 있어야 해요. 그 남자를 집으로, 우리 삶으로, 내 아내의 침대로 불러들이는 일이잖아요. 그런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해요."  513


영국에서 수행한 연구들을 보면 외도하는 여자들은 남편보다 성공적이고 사회적인 지위도 높은 남자를 선택했다. 여자들이 자기 남편보다 낮은 계층의 남자를 애인으로 선택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516


스윙잉, 핫와이핑, 폴리아모리 그리고 다른 형태의 비일부일처 생활 방식은 내면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으며, 사회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특혜를 누리는 삶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들은 역사를 통해 왕과 여왕, 대통령, 지배자, 최고경영자, 백만장자에게만 허락되던 일부일처제 법칙의 예외를 자기도 실현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517


쿠콜드리가 드물고, 아내의 성적인 부정이 인정되는 일은 더더욱 드물다는 일반적인 믿음과 다르게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아내에게 다른 애인을 두도록 허용한 남편들의 역사는 길고도 길다. 역사를 보면 이런 사건이 예술, 문학, 지식인 사회에서 많이 일어나긴 했지만, 이런 생활 방시고가 성적 관행이 사회 계층 전반에 걸쳐 보편적으로 존재하던 일임을 알 수 있는 기록도 있다. 이런 행위를 탐하지 못하게 한 사회의 금기가 이런 일이 만연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현재 이런 생활 방식이 퍼진 것은 사회적 금기의 변화를 반영하는 일인지도 모르며, 단순히 인터넷이라는 익명의 공개 토론장을 통해 이런 행위를 표현하는 것이 자유로워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내 나누기, 핫와이핑, 쿠콜드리는 본질적으로 병적이거나 파괴적인 행위가 아니다. 이런 생할 ㅂ아식을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추구해온 부부들은 지극히 건강한 관계고, 부부간의 의사소통 방식이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인 경향이 있다. 이런 생활 방식이 정서장애나 관계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그런 문제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오히려 개인과 부부에게 적응적인 기능도 있다. 두려움, 힘과 주도권 문제, 자유와 독립에 대한 요구 같은 문제를 극복하고, 권위를 포기하고 사회의 기대에 부합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내려놓기 위한 방식이다.

이런 생활 방식을 추구하는 아내들은 일부일처제와 결혼의 복잡한 기대뿐만 아니라 1000년 동안 여자에게 내려진 사회의 기대와 명령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이런 생활 방식에는 단순한 성을 넘어 여성주의의 복잡하고 강력한 메시지와 여성에게 부여된 힘이 놀라운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 문화에서 여자들은 착한 여자가 되라고 하면서도 착하지 않게 살라고 하고, 섹시하게 행동하라도 하면서도 그런 행동은 안 된다고 하는 이중성을 갖고 살도록 압박 받는다. 아내 나누기를 받아들이는 아내는 그 안에서 힘을 발견했다. 사회가 그들에게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지시하고 자신을 정의하게 만든 것, 선택하게 한 것을 거부할 힘이다.  522-523


내가 흥미로운 연구 결과와 인터뷰한 내용을 이야기해주었을 때 놀랍다는 반응과 호기심을 보인 사람도 있었다. 그 가운데 우리 아버지의 반응이 가장 재미있었다. 아버지는 "뭐에 관해 쓴다고? 네가 미친거 아니냐? 그런 것을 쓰고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게다. 세상의 모든 남편들이 네 멀를 베어버리려고 할 거야. 모든 아내들이 자기도 그런 걸 원한다고 할 테니까!"하고 말했다.  527-528


쿠콜드리나 핫와이핑을 통해 혼외의 성을 탐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이런 부부들도 부단히 움직이면서 의사소통하고,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고, 질투심과 시기심의 불꽃을 장애가 아닌 암시와 신호로 받아들이면 성공할 수 있다. 이것도 다른 관계와 다르지 않다. 이런 부부들이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할 일은 다른 부부에게도 똑같이 필요한 일이다. 건강한 관계는 부부가 함께 하는 일이 무엇이냐에 달린 것이 아니다. 서로 어떻게 의사소통하느냐, 서로 어떻게 대하느냐, 제대로 기능하고 상대에게 도움이 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달렸다. 모든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는 성행위와 상관없이 의사소통, 자유, 지지, 상호 존중이다.  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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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인간 혐오

나는 사람들을 뜨겁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혐오증이 있다고까지도 할 수 있다. 지하철에서 양옆에 사람이 앉는 게 싫어서 구석자리를 찾아 맨 앞칸까지 가곤 한다. 제주도 송악산에 처은 간 날, 둘레길 입구에서 쏟아져나오는 알록달록 등산복 차림에 흥겨워 목소리 높아진 아주머니 아저씨들의 무리를 보는 순간 바로 절경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려 사람 없는 중산간 마을만 한탐 걷다 온 일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이 회식이고 행사다. 어렸을 때는 친척들 모이는 명절이 제일 싫었다. 114교환원이 "사랑합니다, 고객님" 하길래 반사적으로 질색을 하며 "왜요?" 한 적이 있다. <사람이 꽅보다 아름다워>란 노래를 들을 때마다 머릿속에 '무슨 근거로?'가 떠오른다. 그런 나지만 무인도에서 혼자 살수는 없기에 사람들과 어울려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그건 필연적으로 무수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낳는다.  7


사랑받지 못하는 건 별 상관없지만(대체로 사랑받으면 기대에도 보답해야 하므로 귀찮은 일도 생긴다), 그렇다고 내 자유를 지키기 위해 매사에 일일이 투쟁할 열의까지는 없기에 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양보와 타협을 해야 한다...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사회에서 투사가 되기 싫으면 연기자라도 되어야 하는 거다.  8


'다름'은 물론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가능한 한 참아주는 것, 그것이 톨레랑스다. 차이에 대한 용인이다. 우리 평범한 인간들이 어찌 이웃을 '사랑'하기까지 하겠는가. 그저 큰 피해 없으면 참아주기라도 하자는 것이다.  10


글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일이었다.  11


지금 힘들어하는 모든 이들에게 드리고 싶은 한상궁 마마님의 말씀이 있다.

'장금아, 사람들이 너를 오해하는 게 있다.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 모두가 그만두는 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시작하는 것. 너는 얼음 속에 던져져 있어도 꽃을 피우는 꽃씨야.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데 있어"라고 격려해주면서도, 끝에는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라며 알아주는 마음, 우리 서로에게 이것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13-14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싶다. 내 공간을 침해받고 싶지 않은 것이 내 본능이고 솔직한 욕망이다.  19


개인주의자로 살다보면 필연적으로 무수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고민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와 다른 타인을 존중해야 하는 가. 아니, 최소한 그들을 참아주기라도 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가끔은 내가 양보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내 자유를 때로는 자제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타인들과 타협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과 연대해야 하는가.

결국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목적이고 나머지는 방편이다.  21


집단, 공동체가 개인에 우선하는 숭고한 유기체고 개인은 이를 위해 기쁘게 헌신하고 희생해야 할 나사못인 것이 아니다. 왼쪽으로든 오른쪽으로든 신의 나라로든, 집단에 대한 헌신을 찬양하며 사람들을 몰고 가는 피리 소리는 불길하고 미심쩍다. 인간 세상에 정답은 없고 현실에서 유토피아는 대체로 디스토피아로 실현되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한다.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인 집단이 거꾸로 개인의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리는 순간, 집단이라는 리바이어던은 바다괴물로 돌아가 개인을 삼킨다.  22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23


어른이 되어서 비로소 깨달았다. 가정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군대를 모델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상명하복, 집단 우선이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의사, 감정, 취향은 너무나 쉽게 무시되곤 했다. '개인주의'라는 말은 집단의 화합과 전진을 저해하는 배신자의 가슴에 다는 주홍글씨였다.  24-25


여기서 말하는 개인주의란 유아적인 이기주의나 사회를 거부하는 고립주의가 아니다. 개인주의는 근대 계몽주의, 합리주의와 함께 발전하며 서구하회의 근간을 형성했다.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어 살 수밖에 없고, 그것이 개인이 행복 추구에 필수적임을 이해한다. 그렇기에 사회에는 공정한 규칙이 필요하고, 자신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음을 수긍하고, 더 나아가 다른 입장의 사람들과 타혐할 줄 알며, 개인의 힘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들과 연대한다. 개인주의, 합리주의, 사회의식이 균형을 이룬 사회가 바로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다.  26


어차피 정답을 가진 인느 아무도 없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어서 박문수나 판관 포청천처럼 누군가 강력한 직권 발동으로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악인을 엄벌하는 것을 바란다. 정의롭고 인간적이고 혜안 있는 영웅적 정치인이 홀연히 백마 타고 나타나서 악인들을 때려잡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주길 바란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일은 없을 거다. 링에 올라야 할 선수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27


수직적 가치관이란 사회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획일화되어 있고, 한 줄로 서열화되어 있다는 뜻이다.  28


모두가 상대적 박탈감과 초조함, 낙오에 대한 공포 속에 사는 사회다.. 우리 사회가 집단적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29


'갑질

의 심리 역시 수직적 가치관의 사회에서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있으면 그걸 이용해 상대에 대한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려는 수컷 동물 사이의 우세경쟁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약자는 자기보다 더 약자를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이다.

남들 눈에 비치는 내 모습에 집착하는 문화, 집단 내에서의 평가에 개인의 자존감이 좌우되는 문화 아래서 성형 중독, 사교육 중독, 학력 위조, 분수에 안 맞는 호화 결혼식 등의 강박적 인정투쟁이 벌어진다. 사실 이건 같은 현상이다. 

'남부럽지 않게'살고 싶다는 집착 때문에 인생을 낭비하는 이들을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그냥 남을 안 부러워하면 안 되나. 남들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안 되는 건가. 배가 몇 겹씩 접혀도 남들 신경 안 쓴 채 비키니 입고 제멋으로 즐기는 문화와 충분히 날씬한데도 아주 조금의 군살이라도 남들에게 지적당할까봐 밥을 굶고 지방흡입을 하는 문화 사이에 어느 쪽이 더 개인의 행복에 유리할까.

우리가 더 불행한 이유는 결국 우리 스스로 자승자박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32-33


신해철은 <비정상회담>에 출연해 행복에 관해 이야기했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방송이 되었다.

타인과의 비교에 대한 집착이 무한경쟁을 낳는다. 잘나가는 집단의 일원이 되어야 비로소 안도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탈락의 공토에 시달린다. 결국 자존감 결핍으로 인한 집단 의존증은 집단의 뒤에 숨은 무책임한 이기주의와 쉽게 결합한다. 한 개인으로는 위축되어 있으면서도 익명의 가면을 쓰면 뻔뻔스러워지고 무리를 지으면 잔혹해진다. 고도성장기의 신화가 끝난 저성장시대, 강자와 약자의 격차는 넘을 수 없게 크고, 약자는 위는 넘볼 수 없으니 어떻게든 무리를 지어 더 약한 자와 구분하려든다. 가진 것은 이 나라 국적뿐인 이들이 이주민들을 멸시하고, 성기 하나가 마지막 자존심인 남성들이 여성을 증오한다.

반면 합리적 개인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배려, 사회적 연대와 공존한다. 자신의 자유를 존중받으려면 타인의 자유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톨레랑스, 즉 차이에 대한 용인, 소수자 보호, 다양성의 존중은 보다 많은 개인들이 주눅들지 않고 행복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동성동본 금혼으로 고통받는 연인들을 노래하고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간통죄 폐지, 학생 체벌 금지를 주장한 그의 행보는 개인의 행복을 중시하는 합리적 개인주의자로서의 면모다.  36-37


재미있어서 쓰는 것 같다... 외부에서 주어진 자극(소재)에 대해 내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글을 써봐야 생생하게 할 수 있다. 돌어서며 잊어버리기 때문에 적어둔 글을 나중에 읽는 재미가 있다.  41


노력은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맹목적인 노력만이 가치의 척도는 아니다.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지 성찰이 먼저 필요하고, 노력이 정당하게 보상받지 못하는 구조에 대한 분노도 필요하다.  45


행복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은 없을 거다.  50


만국의 개인주의자들이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그대들이 잃을 것은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판이지만, 얻을 것은 자유와 행복이다.  57-58


이미 우리 사회의 교육격차는 형식적인 기회 균등만으로 해소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른 것인지도 모른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끊어지고 빈곤이 대물림되는 사회는 역사가 증명하듯 근본적 기반이 흔들린다. 모든 곳에 희망이 있어야 사회가 유지된다. 이를 위해서는 형식적 평등을 넘어 실질적 평등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91-92


뉴욕타임스 도쿄 지국장이 후루이치 노리토시(<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저자)에게 "일본 젊은이들은 이처럼 불행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왜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 겁니까"라고 묻자, 노리토시는 "왜냐하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일본 젊은이의 행복은 이렇다. "유니클로나 자라에서 기본 패션 아이템을 구입하고 맥도날드 런치 세트로 식사하며 친구들과 수다 떨고, 집에서 유튜브를 보거나 스카이프 채팅을 하고 가구는 이케아에서 구매, 밤에는 친구 집에서 식사하며 한잔한다. 그리 돈을 들이지 않고도 나름 즐겁다.'Wii나 PSP를 구입할 정도 수입은 있고, 이걸 함께 즐길 수 있는 연인이나 친구가 있다면 대개의 셩우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116-117


한 학자의 해석은 이렇다.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되었을 때 자신의 처지에 만족한다고 답한다.  117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황현산 선생의 글이다.  119


생생하게 느껴보는 것과 단지 머리로만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천양지차다.  121


법관들도 말에 대해 주의하고 반성하기 위해 전문가의 강의를 듣는다. 그때 배운 것이 있다. 데이의 <세 황금문>이다. 누구나 말하기 전에 세 문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흔히들 첫번째 질문만 생각한다. 살집이 좀 있는 사람에게 '뚱뚱하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참말이기는 하지만 굳이 입 밖에 낼 필요는 없는 말이다 사실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말라는 두번째 문만 잘 지켜도 대부분의 잘못은 막을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필요 없는 말로 남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가고 있는지...

더 나아가 진심으로 친구의 비만을 걱정해 충고하고 싶다면 말을 잘 골라서 '친절하게' 해야 한다. 옳은 충고도 '싸가지 없이'하면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진심이 담긴 필요한 말이라고 해도 배려심 없이 내뱉으면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더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도 있다.  136


재판에서 분쟁을 해결하는 실마리는 상호 비난을 자제하고 본질적인 문제로 돌아가는 것이다.  150


문학은 겉으로 드러나는 세계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숨기고 싶은 속내 깊숙한 곳을 파헤쳐 보여주곤 한다. 문학이 보여주는 인간 세상의 민낯은 전형적이지 않다. 작가들은 뻔하고 예측가능한 것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충동적이고, 불가해하고, 모순 덩어리인 인간 마음의 꿈틀거림을 묘사하는 것에 몰두한다. 그리고 그 관찰의 주된 재료는 작가 자신의 내면일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마음을 스쳐갔던 온갖 미묘한 감정과 충동들, 질투, 선망 욕정, 열등감, 우월감, 증오, 살의... 자신을 주어로 하여 털어놓기는 어려운 날것의 내면적 충동들을 재료로 상상력을 가미하고 증폭, 변형하여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창조해낸다.  154


모든 걸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잔혹한 논리이고 절대로 사회적으로 찬양되어서는 안 될 위험한 이데올로기다.  164


분쟁을 해결했다는 생각은 착각일 뿐이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중립적인 사람이 멍석만 깔아주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그 중립성에 대한 신뢰를 얻기는 아주 어렵고, 잃기는 아주 쉽다. 오직 진심만이 그 신뢰를 얻는 열쇠일 것이다.  174


자연 그대로의 것은 무조건 옳다고 보는 것을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한다. 실은 그 반대가 맞는 경우가 많다. 하다못해 식재료도 자연 상태 그대로는 독성을 갖고 있다. 우리가 먹는 것들은 대부분 오랜 시간 인위적인 종자 개량을 통해 먹을 수 있게 만든 것들이다. 인류는 자연 상태의 폭력성을 문명화 과정을 통해 극복하여 현대적인 평화를 이루고 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옳고 그른 것이 아니다. 옳고 그른 것의 기준은 지금의 발전한 문명을 기준으로 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에 따라 옳은 것은 더욱 북돋우고 그릇된 것은 제어해야 한다.

불편한 진실 자체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어 왜곡하지 말고 그 진실을 토대로 '어떻게 사회를 개선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200


어느 집단도 이 복잡하고 급변하는 세계에 대한 완벽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남의 판단으로 자기 판단을 대체하지 말고 각 개인이 눈을 부릅뜨고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실사구시 정신이 필요하다.  203


세상이 복잡하다고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신념과 분노에만 의지하다가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도 최악의 결과만 가져올 수 있다. 의심하고, 근거를 찾고, 다시 생각하고, 아니다 싶으면 주저 없이 결론을 바꾸는 노력 없이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 잡을 수 없다. 깨어 있어야 한다.  204


구체적으로 무슨 이념과 무슨 이념이 대립한다는 것일까? 정말 우리나라에 공산주의자와 파시스트들이 스페인내전 때처럼 대립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나라 양대 정당이 이념정당인가? 두 정당의 공약집을 표지 가리고 읽어서 구분하기란 펩시 챌린지 이상의 도전이다. 한쪽의 인기 공약을 곧바로 다른 쪽이 따라하는 일도 흔하다. 이념정당은 고사하고 미국의 공화당, 민주당 정도의 차이도 찾기 어렵다.  205-206


보수, 진보란 보통 정부의 역할, 복지정책, 조세정책 등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구별한다. 그런데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열렬히 대립하는 사항은 실은 이념, 정책이 아니라 어느 대통령을 '사모'하느냐와 애향심 아닐까. 여기에 세대 문제가 결합된다. 조용필 세대와 서태지 세대가 서로 '울 오빠'의 업적이 더 뛰어나다고 싸우는 꼴이다. 자기 세대의 우상이란 결국 자신의 청춘 시절에대한 자기애다. 객관적이기 어렵다. '울 오빠'를 모욕하는 안티들에 대한 분노,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영우에 대한 연민. 이런 정서의 무넺가 결부되기 때문에 갈등은 더 불타오른다. 미래에 대한 비전보다 과거에 대한 평가에 더 집착한다. 하지만 정작 현재 청춘들은 과거 우상에 대한 '리스펙트' 따위엔 관심 없다는 것이 함정이다. 진학, 취업, 결혼,.. 당장 자기 앞가림하는 것만도 전쟁인 미생의 청춘들에게 기성세대의 이념 논쟁, 역사 논쟁은 한가한 소리로 들리 수밖에 없다.  206-207


미디어 이론가 더글러스 러시코프는 <현재의 충격>에서 실시간 SNS로 연결되어 모든 것이 생중계되는 지금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이 순간의 현재에만 집중하는 현재주의가 지배하는 시대라면서, 과거의 불의를 극복하고 미래의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식의 20세기적 서사 구조가 붕괴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거대 담론인 이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시대다.  207


이념이란 신념의 체계이기에 타협의 여지가 없다. 그 결과 이념 간 갈등은 혁명운동과 전쟁을 일으키며 수천만 단위 희생을 낳았다. 그러나 정책은 토론과 타협이 가능하다. 탈이념의 시대에는 보수 진보 자체보다 양자가 교대하는 동태적 과정이 더 중요하다. 이념이든 정책이든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208


이념 문제 아닌 것을 이념 문제화하는 강박증은 두 가지 점에서 위험하다. 첫째, 실제적으로 필요한 토론과 의사결정을 방해한다. 각 방안의 장단점을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따지는 머리 아픈 과정을 '우리 편의 주장인지 적들의 주장인지'로 광속 대체하는 반지성주의를 낳는다. 둘째, 삼인성호(三人成虎 석삼 사람인 이룰성 범호). 몇몇이 떠들어대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진다. 몇몇 소수가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념 투쟁을 벌이는 것을 보다 보면 마치 이 사회에 진짜 심각한 이념 대립이 있는 것처럼 착시 현상이 생긴다. 거짓 선지자들에게 인류는 속을 만큼 속았다.  208-209


종교, 문화 따위가 야만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지금 그 사회에서 다수의 의견이락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246  


북유럽사회에서 배울 것은 정치나 제도 이전에 먼저 그들의 문화적 전통이 아닐까 한다. 스웨덴의 문화적 전통 중 중요한 것으로 '라곰(Lagom)'이 있다.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게, 적당히'라는 뜻이다. 바이킹 시대 술통을 돌려가며 마시는 풍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 사람이 너무 많이 마셔버리면 다음 사람이 마시지 못하니 적당히 나눠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라고 한다.

북유럽 전역에서 관습법처럼 통용되는 '얀테의 법'이라는 것도 있다. 1933년 산데모제라는 노르웨이 작가가 이를 정리하여 소설 속 가상의 덴마크 마을 얀테의 관습법으로 발표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의 핵심은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지 마라, 남보다 더 낫다고 남보다 더 많이 안다고 남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남을 비웃지 마라'다.  260


노력이라도 해보려는 남을 냉소함으로써 그것도 하지 않는 비루한 자신을 위안한다. 어차피 세상은 바뀌지 않는데 다 쇼일 뿐이라며.

팔짱을 낀 채 '한계' '본질' '구조적인 문제' 운운 거창한 얘기만 하며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진짜 용감한 자는 자기 한계 안에서 현상이라도 일부 바꾸기 위해 자그마한 시도라도 해보는 사람이다. 어떤 통속적인 미국 드라마를 보다가 아래 대사를 듣고 그 통찰력의 깊이에 놀란 일이 있다.

'냉소적으로 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Anyone can be cynical).'

'담대하게 낙관주의자가 되라구(Dare to be an optimist).'  268


우리 사회는 '결과책임론'이 지배하는 사회다. 물론 이런 가정이 무의미할 정도로 현실에서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준 자들을 변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이런 문화가 최악과 차악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책임자를 결정 장애와 도피심리로 몰아넣는 측면이 있음도 직시해야 한다고 본다. 영미식의 실용주의 가치관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전제 아래 해야 할 의무를 다 이행했다면 과감하게 면책한다. 결과가 제 아무리 중대하더라도 말이다. 이것이 강한 책임을 기꺼이 지게 하는 사회의 비결인지도 모른다.  269





에필로그 - 우리가 잃은 것들


한 개인으로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것만도 전쟁같이 힘든 세상이다.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입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업 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혼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고통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아이가 다시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지키기 위해, 그런 개인들이 서로를 보듬어주고 배려해주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또 그렇기에 얼마나 귀한 일인가.

우리 하나하나는 이 험한 세상에서 자기 아이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 우리는 서로의 아이를 지켜주어야 한다.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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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가벼움이 횡행하는 시대, 인문 내공을 권하다


인문적 마인드를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이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건이기 때문이다. 인문적 사유 능력은 어떤 문제의 핵심을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인문적 사유 능력을 가진 사람은 주체적이고 지혜롭게 자기 인생을 꾸려갈 수 있다.  8


정직하고 성실하게 노력해서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은 대개 인문적이라는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고, 부단한 노력은 대개 '깊이 있는 탐구'를 동반하게 되는데, 그 탐구가 인문적 사유를 유도하기 때문이다. '깊이 있는 탐구'는 자연스럽게 다양하고도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낳고 그로 인해 사람을 인문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9


지식인들이 제시한 아이디어들 중 무엇이 올바르고 나은 것인가를 검토하고 판단하는 것은 시민들의 몫이어야 한다.

인간의 지력은 읽고, 쓰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 그 중에서도 '인문적으로' 읽고, 쓰고, 생각하는 것은 지력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 책은 그 세 과정에 대한 이해와 그 원칙과 방법, 나아가 태도의 문제까지를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10


일반적으로 지력을 발전시켜나가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11




서장 - 삶을 돌파하는 힘, 인문 내공


인문적 가치의 핵심. 인문 정신의 요체 중 하나는 내 삶이 존엄하다는 것, 타자 역시 나만큼 존엄하고 동등한 가치를 가졌다는 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17


자기 이익에 반해 보이는 일들을 태연히 일어나게 내버려둔다.  23


나의 어머니는 .. 젊은 시절부터 근 40년 동안 남의 옷을 만들고 수선해주면서 세 남매를 키웠다... 어머니가 하루는 '바느질도 다 같은 것이 아니며, 하는 사람에 따라 격(格)이 다르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다.  23


인문적 사유 능력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그는 자기 내부에 일종의 자가발전 시스템을 갖춘 것과 같다. 그는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날마다 조금씩 발전한다.  24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자기 신념을 좇아 사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좋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의 자기 신념대로 사는 것뿐 아니라, 지속적인 노력으로 그것을 갱신해 나갈 필요가 있다.  25


생명이 탄생하기 이전의 무(無), 생명이 소멸한 이후의 무에 대한 호기심이다.

'무'에 대한 관심, 그것은 철학의 시초이고 종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33


인간은 밖으로는 하느르이 별을 보며 우주를 상상한다. 외부 세계에 대해 일정한 형태를 상상한다. 그 일정한 형태를 '범형(凡形)'이라 한다. 또한 인간은 안으로는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그것을 '성찰'이라고 한다.  35


서양에서는 인문을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studia humanitatis)'라고 했다. '인간성에 대한 연구'를 의미한다.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간다운 것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답하는 것이 '인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인류 문화에 대한 '정신과학'이었다. 

동양에서는 인문을 한자로 '人文'이라고 쓴다. '文'을 우리는 '글월 문'이라 읽는다. 그것은 본래 '무늬'를 의미했다. 동양에서 '글'이라 하면 주로 한문을 말한다. 동양에서 라틴어와 같은 지위를 갖고 있는 한문은 잘 알다시피 상형문자다. 상형문자는 사물의 모양을 본떠 만든 글자다. 그것은 말하자면 사물의 실루엣을 그린 것이다. 그렇게 '文'은 '무늬'와 '글자'를 동시에 의미하게 되었다.

'人文'은 직역하면 '사람의 무늬'라는 뜻이다.  37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스스로 생각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내 생각인가?' 하고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그 중 많은 것은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본 것이다. 많은 사람드은 그것을 자기 생각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44


'혼돈의 내면을 가진 현대인들이 아무 맥락 없는 혼돈과 부딪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 [우리 안의 히틀러] 막스 피카르트  48


현대인은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저 단편적인 지식과 정보들이 맥락 없이 머릿속을 부유(浮游)할 뿐이다.  49


인문서를 읽으면 인문적 사유 능력이 생긴다. 인문적 사유 능력이 있으면 대중의 행동, 사회현상, 자연의 변화, 지식과 정보, 예술 작품, 과학기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고,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에 기반해 삶의 지혜가 생긴다. 그로 인해 인문적 사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 현명하게 인생을 살아 나갈 수 있다.  52





1부 공력(功力) - 지성인으로 거듭나는 생각의 내공


"모두가 비슷하게 생각할 때, 아무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 월터 리프먼  54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망연해지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 배우기만 하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그물(罔)'에 걸린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암담해지고, 혼자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자기 생각에 갇혀 편협해지거나 오만해지기 쉽다는 뜻이다.

오늘날에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는 것' 중 무엇이 더 큰 문제인가? 당연히 전자다. 요즘에는 '학력 인플레'라는 말이 나돌 만큼 고학력자가 많다. 유치원에서부터 따지면 많은 사람들이 20~30년 동안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고학력자들이 투자한 시간과 비용, 노력한 만큼 지적 성취나 사고력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유가 무엇인가?

이른바 '티처 보이(teacher boy)'라는 말이 있다. '맘마 보이(momma boy)'가 엄마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다면, '티처 보이'는 선생이 없으면 공부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왜 그런가? 유치원 시절부터 한 번도 선생 없이 공부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선생이 가르쳐준 것을 그대로 외우는 데는 도사다. 그러나 스스로의 머리로 의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유추해보라고 하면 어려워한다. 그렇게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오늘날의 문제는 너무 적게 배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이 배워서 문제다. 사고 능력에서 중요한 것은 분석과 종합이다. 분석과 종합은 독학(獨學), 즉 혼자서 책을 읽고 이렇게 저럭헤 생각해 볼 때 배양된다.

학력만큼 지력이 발전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평가 중심의 교육제도에 있다. 우리는 국어, 영어, 수학을 배웠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국어, 영어, 수학의 '시험 보는 법'을 배운 것이다. 학생들은 교육 받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있다.  57-58


역사적으로 국가 조도의 근대적 교육의 기원은 19세기 초반 프로이센에서 시작되었다. 프로이센의 교육 목적은 군대에 충성하는 군인, 사용자에 순종하는 노동자,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진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의무교육은 공립학교, 개인 학교, 홈스쿨링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던 교육 형태를 강제로 소멸시켰으며, 국가가 교육을 독점하게 되었다. 의 무교육의 목표는 가정으로부터 아이들을 떼어내어 '부모 없는 사회(학교)'를 구성해 기업이 필요로 하는 훈련된 노동자로 변모시키는 것이었다. 그낻 교육 자체가 애초부터 지성인의 양성 같은 고매한 목표와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제도 교육이 목표하는 것은 여러 지식을 하나의 의미 있는 질서로 통합하는 지적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사회가 처방하는 특정 기호와 정보를 얼마나 받아들였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제도 교육은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없애고, 기득권을 향한 개인의 노력을 끊임없이 생산해낸다. 그것은 제도 교육을 많이 받을수록 비판적 사유 능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도 교육은 교과서나 참고서 같은 교재를 통해 가르친다. 문제는 이 교재들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는 커녕, 오히려 지적 탐구에 대한 열정을 불식시킨다는 점이다. 교재에는 많은 지식들이 무미건조하게 '교양의 차원'에서 개괄되어 있을 뿐이다. 교재에는 여러 지식인들이 애초에 가졌던 문제의식의 심각서오가 진지함, 철받함이 소거되어 있다. 학생들은 지식의 뿌리인 '현실적 문제의식'과 '윤리적 호소'를 실감할 수 없게 된다. 학문에 대한 열정은 학위나 학점에 대한 열정으로 대체될 뿐이다.  59


지성인이 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혼자 탐구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그들은 그냥 많이 배워서 지성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를 바탕으로 '독학 능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지성인이 된 것이다. 지성인의 핵심적 능력은 독학 능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학은 독립적인 사고를 가능케 하고, 다양한 사고를 낳는다.  61


대중매체는 여론을 전달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묘한 현상이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알려줄 때, 대중매체는 대중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거울처럼 비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대중매체는 어떤 방식으로, 어떤 단어를 써서 질문하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통계나 답변에 대한 해석의 권한도 대중매체에게 있다. 그를 통해 대중매체가 자신이 원하는 여론을 형성해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대중매체가 여론을 전달하는 것은 단순한 사실 전달 이상이다. 여론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당신도 이렇게 생각하라'는 암묵적인 압력이 존재한다. 특별한 자기 입장이나 자기 확신이 없는 한, 사람들은 이 압력의 영향을 받게 된다.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잘못 판단할 리 없다'고 믿는 것이다. 대중매체도 이런 영향을 알고 있다. 그래서 대중의 생각을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여론을 가시화하기도 한다. 그럴 때 여론은 '대중의 생각을 담은 결과들'이 아니라, 반댈 대중의 생각을 낳는 씨앗이다. 대중매체는 단순한 여론의 전달자가 아니다. 여론의 창조자이자 여론 형성의 주체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언론 매체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일은 세상에 없는 일이다. 그만큼 언론의 사회적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언론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활동하는 범위는 좁고 잘 아는 사람도 몇몇에 불과하다. 언론사는 주로 경찰서, 시청, 법원, 청와대, 국회 등 국민과 당국이 접촉을 일으키는 곳에 -주로 권력기관에- 기자들을 배치할 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주로 기사화한다. 언론은 자신들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알고 개괄해줄 수 있음을 암묵적으로 전제하지만, 그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오늘날에는 언론 플레이가 중요하고, 그에 따라 기업이나 관료 집단, 정치 집단은 대개 언론 홍보팀을 운영한다. 언론 홍보팀은 어떤 사안에 대한 보다 자료를 각 언론사에 보낸다. 기자는 보도 자료를 토대로 기사를 작성하게 되는데, 단지 참고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대로 베끼는 경우가 많다. 그런 보다 자료의 재뇽은 객관적이 수 없다. 그것은 해당 기관들이 독자들에게 보이고 싶은 내용과 관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언론사들이 보도 자료를 베낌으로써 독자들은 기억이나 관료 집단, 정치 집단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64-66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절대 진리가 아니다. 근대 학교 교육의 주체는 국가이고, 그런 만큼 거기에는 국가 이데올로기, 국가 이익의 논리가 반영되어 있다. 근대 교육 시스템은 기업이 요구하는 노동자를 길러내는 목적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학교 교육에는 국가의 논리와 더불어 기업의 논리가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66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적 성찰>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상당수의 그릇된 의견들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 그리고 확실하지 않은 원리에 기초를 두고 받아들인 것들은 의심스럽고 불확실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받아들였던 모든 의견을 회의에 부치고 근원적인 것에서 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추론 방식이 바로 '방법적 회의'였다. 그 과정을 통해 마지막으로 남은 명제가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였다.  67


불교 경전 <앙굿타라 니카야(ANgutara Nikaya)>에도 리런 글이 있다. "어느 것이든 계시나 전통이나 보고 같은 것에 근거해서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말고, 또 그것이 단순히 사변의 산물이라거나, 어느 한 입장에서 볼 때 진실되다거나, 사물의 피상적 관찰에 의한 것이거나, 선입견에 맞아덜어진다거나, 권위가 있다거나, 스스의 위신 때문이라거나 하는 등의 이유만으로 받아들이지 말지어다." 지성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상식과 권위에 쉽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 상식과 권위로 무장된 모든 관념을 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안으로는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밖으로는 타인의 의식을 일깨울 수 있다.  68


고대인들은 관계 속에서 만물이 생겨나고, 살아가고, 소멸한다는 것을 이미 알았던 것 같다. 예를들어, 한자 '목숨 명(命)'을 파자(破字)해 보면 '모두 합(合)'과 '나눌 분(分)'으로 나누어진다. 이 한자에는 '합쳐지고 분리되는 과정이 반복됨'을 통해 모든 생명 혹은 생태계가 유지된다는 고대인들의 통찰이 깃들어 있다. 내가 어제 돼지고기와 배추 김치를 먹었다면, 그것은 지금 내 몸의 일부를 이루고 잇다. 남이 나의 일부로 합쳐진 것이다. 화장실에서 우리가 큰일을 보면 그것은 나누어지는 과정이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합쳐진 결과이고, 죽는 것은 그것이 다시 불리되는 과정이다. 사람이 죽어 해체된 원소들은 다시 다른 생명체의 일부가 된다. 이 모든 과정이 합쳐지고 나누어지는 과정의 반복이다.  70-71


관계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불교 철학이다. 불교의 <상응부경전>에는 붓다의 가르침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이것을 '연기(緣起)'라고 한다. 연기란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탄생하고 소멸한다. 나는 타자의 존재 조건이고, 타자는 나의 존재 조건이라는 말이다.  71


흔히 인간은 '지적 존재'로 인식되지만,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 지적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보고 듣는 것이 있어야 지력이 발전한다.

지식이 체감되기 위해서는 현실과의 연관성이 풍부해야 한다.  76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현실적 문제 해결'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잊고 지식 자체에 집착하곤 한다. 심지어 특정 지식을 만고불변의 절대 진리로 믿기도 한다. 그것을 '교조주의(敎條主義)'라고 한다. 교조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 지식과 사상이 현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늘 자문해야 한다.  77


문화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사고는 나의 직업"이라고 했다. 지성인이 되려면 생각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치열하게 사고해야 한다. 그 치열함에는 현실적 맥락 속에서 사고하는 것, 사고 내용을 현실적 맥락 속에서 해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을 도외시하는 것은 지적으로 안이한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78


깨어 있는 의식은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계기로 생겨난다.  79


쾌락과 고통의 관계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반대가 아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인간의 대표적인 쾌락인 식욕과 성욕을 보자. 어떤 사람이 배가 몹시 고플 때 산해진미로 가득 찬 식사를 한다면 만족도는 극에 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매 끼니 계속된다면? 만족도는 점차 떨어지다가 나중에는 별 맛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도 계속 먹어댄다면? 과도한 영양 섭취로 각종 질병이 생기고, 그로 인해 오히려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성적 쾌락도 마찬가지다. 성적 쾌락을 과도하게 추구하면 그것은 더 이상 쾌락이 아니다. 만약 극단적으로 추구한다면, 그는 죽음에 이를 것이다.

쾌락은 한계효용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쾌락은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금세 저만치 달아난다. 아무리 좋은 쾌락도 시간이 지나면 일상성이 감각을 무뎌지게 만든다. 그 때문에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계속 강도를 높여가고, 한 욕망으로부터 다른 욕망으로 계속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런 쾌락의 극단적인 추구는 불행과 고통을 낳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지속적인 쾌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고통은 지속적이다. 배고픔, 질병, 고문 등으로 인한 고통은 시간이 지난다고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82-83


여행은 현대인들이 대표적인 즐거움으로 꼽는 것이다. 사실 '집 나가면 고생'이다. 그런데도 여행이 즐거움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이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여행은 낯선 곳으로의 탐험이다. 그 과정에서 여행자는 여러 당혹스럽고 불편한 일들과 조우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여행자가 길을 헤매다 더위와 배고픔에 하루 종일 시달렸다 하자. 그러다 어두컴컴한 저역에 겨우 민박을 구해 지친 몸을 쉬게 되었다. 거기서 샤워를 하고, 먹을 것을 구했다. 그럴 때 여행자는 집에서는 쳐다보지도 않을, 보잘것 없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아, 정말 행복하다. 이것이 바로 여행이 주는 기쁨이지!' 하고 여길 수 있다.

그것은 평소보다 무엇이 더 채워지는 데서 오는 행복감이 아니다. 더러워진 몸과 배고픔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결핍감이 사라지는 것에서 오는 행복감이다. 말하자면 무엇이 플러스됨으로 인해 행복한 것이 아니라, 마이너스의 상태가 사라지는 것에서 오는 행복감인 것이다. 그 마이너스는 여행하지 않으면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늘날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인위적으로 결핍의 상황을 만들고, 그 결핍이 제거되는 것에서 쾌감을 맛본다. 이런 여행의 즐거움 역시 고통과 쾌락이 동전의 양면임을 잘 보여준다.  83


인간은 범형의 구성 능력과 성찰 능력을 가진, 그리고 생각한 것을 세계에 구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인간은 분명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는 존재다. 그러나 가능성이 오만함으로 변질될 때 인류는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어리석은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90


칸트 "인간은 인식된 현상세계만을 알 수 있으며, 인식되기 이전의 세계인 '물자체'는 알 수 없다.  91


세계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감각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그 감각 방식이 달라지면 그에 따른 인식도 달라진다. 그것을 철학적 용어로 '움벨트(Umwelt)'라고 한다. 그것은 감각기관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 세계를 일컫는다. 모든 동물은 '움벨트'가 다르다. 무엇이 우월한가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모든 생물은 상이한 움벨트 속에서 살고 있다.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는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우리는 인간 인식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인류는 자신의 지적 능력에 대해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94


모든 대상은 거리르 두고 볼 때 전체가 파악된다. 사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거리를 두고 봐야 어디에 어떤 무넺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98


사물을 거리를 두고 봐야 하는 것은 넓게 볼 수 있어서만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래야만 대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거시적으로 보는 것은 시야의 문제를 넘어 사유의 문제다. 거시적으로 봐야 대상에 대한 객관적이고 냉철한 판단이 가능해진다. 내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질곡에 빠졌을 때, 내 문제를 남의 문제처럼 거리를 두고 보면 훨씬 지혜로운 판단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조언이 도움이 되는 것도, 그들이 내 문제를 나보다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99


인문적으로 사유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시간적 거리를 두는 것이다.  100


시간적 거리가 가져다주는 지혜를 잘 표현한 유명한 말이 있다. 헤겔이 좋아했던 말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가 그것이다. 미네르바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그리스 신화의 '아테나'와 같은 여신)이고, 올빼미는 철학의 상징이다. 지혜의 여신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올빼미가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비상(飛上)하기 위해, 서서히 날개를 편다는 말이다. 지혜의 여신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철학의 상징인 올빼미, 얼마나 현명하겠는가? 그야말로 '지혜의 정수'다. 그런 올빼미가 왜 다른 때가 아닌 '황혼녘'에 날개를 펴겠는가?

황혼녘이 성찰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하루를 준비하는 아침이나 한창 일하는 낮에는 하루를 돌아볼 수 없다. 사람이 상념에 빠지기 가장 좋은 시간은 저녁이다. 일을 마치고 난 후, 해가 지는 시간, 세상의 온도가 가라앉는 시간이 되어서야 인간은 비로소 하루를 돌아보고 생각할 만한 여유를 갖게 된다. '황혼녘'이란 결국 하루를 돌아볼 만한 시간적 거리가 확보된 때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황혼녘인 노년에 이르러서야 인간은 '나의 삶은 어땠나?'하고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지혜를 얻는다.  101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사는 것은 심리적 정신적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인간은 혼자서는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 집단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때에만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를 느낄 수 없다. 아무리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도 어떤 집단에도 속해 있지 않다면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인간이 실존적 의미를 획득하는 것도 사회 속에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번우주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의 존재적 의미는 오로지 사회적으로만 획득될 수 있다. 인간이 실존적 충만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존재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

그런데 집단은 그냥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집단의 논리'를 개발한다. 집단의 논리는 집단에게 이익이 되는 노리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집단 전체에게 골고루 이익을 주지 않는다. 집단 논리의 가장 큰 수혜자는 대개 지도칭이다. 그들의 이익이 집단 전체의 이익으로 포장되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집단의 논리는 보다 고차원적인 도덕적 규범으로 포장된다. 예를 들어, 국가의 이익은 애국의 이름으로, 종교 집단의 이익은 순교의 이름으로, 사회의 이익은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된다.

집단의 논리는 공적 이익의 논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사적 이익의 논리보다는 도덕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그러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논리는 범인류적 차원에서 보면 비도덕적으로 보인다. 집단을 위한 헌신과 희생도 범인류적 차원에서 보면 우스워 보이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익의 논리'는 그것이 개인을 위한 것이건 집단을 위한 것이건 아무리 그럴싸히게 포장되어도 그 본질은 유치한 것이다. 남과 우리를 가르고, 그에 따른 차별과 배제의 원리를 기본으로 삼기 때문이다.  104


애개 개인의 가치관은 주로 자신이 속한 집단이 생산해내는 집단 이익 논리들이 내재적으로 수용된 결과이기 십상이다. 그것은 개인의 자율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특별한 지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많은 파괴와 억압, 폭력적 현상 배후에는 집단의 논리에 기반을 둔 '집단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철학 개념 중에 (被投)'라는 것이 있다. '내던져짐'이라는 뜻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들이다. 자기 의지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날 국가, 가문,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그 선택은 운명적이다. 그리고 인간은 태어나면서 속하게 된 집단이 생산한 논리를 지속적으로 학습하며 성장한다. 학습된 집단의 논리는 어릴 때부터 익숙하다. 그런 까닭에 그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는 쉽지 않다. 그것을 대상화하고 낯설게 바라보는 것이 훨씬 지성적인 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사회에는 집단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각종 제도적 장치들이 있다. 이 또한 집단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어렵게 만든다. 예를 들어, 국가는 각종 작위와 지위, 메달, 휘장, 훈장 등의 서훈 체계를 통해 청성 경쟁을 유발시킨다. 또한 국기, 국립묘지, 국가 유공자, 국민의례, 기념일, 기념행사, 어용 예술 작품, 동상, 기념관, 박물관, 정부가 발행하는 출판물 등 다양한 명예 상징을 통해 압도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들은 자연스럽게 개인들을 국가 중심의 사고와 감정에 젖게 한다.  105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지적 탁월성의 본래적 의미는 비판 정신이며 지적 독립성이다"라고 말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권력과 지성인>에서 "권력에 흡수되거나 고용디지 않고 언제나 주변에 머물러야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지성인이 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모두 지성인의 독립성을 강조한 말들이다.  106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 의해 생산되는 논리를 자신의 신념으로 알고 산다. 그러나 그것은 난센스다. 왜냐하면 신념이란 자신이 이성적 판단으로 '선택'한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이란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해 이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고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릴 때부터 학습된 자기 집단의 논리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 그러니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는 학습된 집단의 논리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보거나 판단해보지 않았다. 결국 그것은 신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107


'깊이 파려면 넓게 파야 한다'

깊이와 넓이는 상반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둘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넓게 파야 깊이 팔 수 있고, 깊이 파기 위해서는 넓게 파야 한다.  108


의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인간의 몸을 공부하면서 인간의 몸 역시 여러 생물의 진화와 그들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파생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다 보면 생물학에 대한 관심이 생길 수 있다. 생물학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의 탄생과 진화는 지구 환경의 변화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 생태학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인간의 몸의 변화가 심리 변화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 심리학으로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심리학에 대한 관심은 인간 심리의 한 양태로서의 종교로 확대될 수 있고, 종교의 탄생과 변화가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한 것으로 건너갈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공부해 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다방면에 걸쳐 많이 아는 사람)가 된다.

인문적 사유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내부에서 생겨나는 지적 호기심을 억제하지 말아야 한다. 궁금증과 지식은 상호 촉진 관계에 있다. 흔히 사람들은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더 이상 궁금한 것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반대다. 대개는 아는 것이 많을수록 궁금한 것이 더 많아진다. 인간에게는 '지적 공백을 메우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알기 힘들다. 그래서 궁금증도 잘 생기지 않는다. 반면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아, 내가 이것을 미처 모르고 있었구나!'하고 느끼게 되고, 그 '지적 공백'을 마저 채워 넣으려 한다.  110-111


인간은 제너럴리스트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분업화된 시스템은 인간이 가진 제너럴리스트적 역량을 발휘하기 힘들게 한다. 분업화된 시스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의 기능인으로 존재한다.

많은 현대인들은 자신이 맡은 한 가지 일만 한다. 그러면서 돈만 번다.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나머지 일들은 돈으로 물건을 삼으로써, 혹은 돈을 지불하고 다른 전문가들에게 맡김으로서 해결하려 한다. (심지어 돈만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문제들, 예를 들어 정서적 유대가 핵심인 가정 문제나 양육 문제까지도 그러하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다양한 능력을 이용해 직접 무엇을 하지 않는다. 대신 남에게 맡긴다. 그결과 노동의 기쁨도 상실되고, 주체적 책임도 상실되며, 의존성은 강화된다. 또한 자기 소외가 증대되며, 실존적 무력감도 증대되고, 육체와 정신의 균형 파괴에 따른 건강도 상실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113


틀에 박힌 사고를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는 활력을 잃을 뿐 아니라, 더욱 진보하지 못한다.

진부한 표현이나 사고를 이른바 '클리셰(cliche)'라고 한다. 클리셰가 문제가 되는 것은 식상함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클리셰는 진실을 은폐한다. 그래서 우리는 클리셰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사고를 하는 데는 나름대로 노하우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비단 노하우의 문제만은 아니다. 새로운 사고에는 세상을 바라고는 그 나름의 고유한 시각이 투영되어 있다. 그것은 가치관의 문제다...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갖는 기본적인 특징이 있다. 바로 스스로 '실감'하기 전에는 함부로 믿지 않는 지적 태도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이가 '이 말은 옳다'고 떠들어도 '과연 그럴까?', '왜 그렇게 되었을까?'하고 자문해본다. '과연 그럴까?'는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명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따져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철학적 태도를 갖는 일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는 명제가 옳은 것으로 여겨지는 '현실적인 이유'를 따져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 말을 처음 한 사람이 누구이며, 그는 어떤 경로를 통해 지적 권위를 획득했으며, 그 지적 권위가 어떻게 그것을 정당화시켰으며, 어떤 정치 경제적 여건이 그 말을 옳은 것으로 만들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사회과학적 태도다. 창의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태도와 사회과학적 태도가 필요하다.  114-115


브레인스토밍(Brainstoming)기법도 규칙적인 사고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 기법은 '스캠퍼(SCAMPER)'라고 불린다.

대체하기(Substitute), 조합하기(Combine), 적용시키기(Adapt), 변형하기(Modify), 다른 용도로 써보기(Put to order use), 삭제하기(Eliminate), 역발상 해보기(Reverse)의 일곱 가지 단어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115


몸이 아픈 어떤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몸의 병을 알아내기 위해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의사들은 몸에 물리적인 이상이 없어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소견을 보였다. 고통은 있는데 그 원인을 알 수 없다니! 여인은 속을 끓이며 마지막으로 어떤 의사를 찾아갔다. 그 의사 역시 물리적인 원인을 찾아낼 수는 없었지만 대화를 통해 여인에게서 특이한 사항을 발견했다. 여인은 어떠한 삶의 의욕도, 생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의사는 그것을 병의 원인으로 보고 '우울증'이라 이름 붙였다. '우울증'이 탄생하는 순간이엇다. 병명이 생긴 뒤, 의료계는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음을 발견했고, 치료약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던 많은 사람들은 그제야 '가짜 환자'라는 오명을 벗고 비로소 치료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말과 인식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무엇이 실존하더라도 그것을 일컫는 이름이 없으면 우리에게 잘 인식되지 않는다.

말이 우리 인식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말이 있어야 우리는 그것을 인식한다. 말이 갖는 이미지와 상징, 뉘앙스는 대상을 인식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말을 사유의 수단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말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언어 전체 혹은 특정 낱말에 대해 철학적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다. 말은 우리의 인식을 대상에 이르게 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대상을 인식하게 해주는 매개인 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  121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으면, 보이는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사과는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햇볕, 바람, 이슬, 안개, 비, 흙의 작용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인식하기는 어렵다. 인문적 사유가 어려운 것도 눈에 보이는 것(현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본질)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은 "사물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영어로 '메타피직스(Metaphysics, 형이상학)'라고 한다. 여기에도 같은 논리가 포함되어 있다. 그 어원은 '메타피지카(Metaphysica)'로서 '뒤, 다음, 배후'라는 뜻을 가진 '메타(meta)'와 '자연'이라는 뜻의 '피지카(physica)'의 합성어다. '피지카'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 즉 형체가 있는 것을 말한다. '메타피지카'는 '자연의 배후'라는 뜻이다. '메타피직스'는 자연을 잘 관찰해야 그 뒤에 숨어 있는 본질-형체가 없는-에 대한 이해가 따라온다는 논리를 내포한다.

이러한 논리는 동양에도 있다.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가 그것이다. '격물치지'에서 '격(格)'은 '잣대로 잰다'는 뜻이다. 직역하면 '사물을 잣대로 재면 앎에 이른다'가 된다. '사물을 잣대로잰다'는 말은 '사물을 잘 살펴서 꼼꼼히 따져보고 분석한다'는 의미다. '메타피직스'와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사물을 잘 관찰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지식(앎)으로 나아간다는 논리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서양의 논리가 같은 것이다.  126


문제의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그 과정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127


"물에 대해 가장 잘 모르는 것은 물속에 사는 물고기"라는 말이 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조건을 인식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이다.  131


나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적응'의 문제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은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매우 뛰어난 동물이다. 그런데 이 '적응'이 묘한 문제를 일으킨다. 의식적인 존재인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합리성을 부여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사회 환경에 적응하면 그 환경을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사회나 집단에 '적응'한다는 것은, 그 질서, 논리, 체제, 문화 등을 내면화한다는 것을 말한다. 환경이 불합리하더라도 그것을 내면화하는 데 성공하면 비판적 의식이 줄어든다.

보통, 뛰어난 적응력은 생존에 유리한 장점이라고만 생각된다. 자연 환경에 대한 적응력은 분명 그런 측면이 크다. 그러나 사회 환경에 대한 뛰어난 적응력은 보다 신중하게 생각될 필요가 있다. 자칫 잘못하면 자승자박(自繩自縛)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의 경제 시스템은 전무후무한 규모로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는데, 모든 사람이 이 시스템에 성실히 적응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른 생물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물론 인류의 자멸을 초래할 것이다.

환경은 인간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남고 성공하기 위해 그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환경과 조건 자체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심지어 혁명기에도 마찬가지다. 혁명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폭동이나 봉기에 가담하지만, '환경과 조건 자체를 변화시키겠다'는 명확한 목표 의식을 갖고 행동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현실적 고통, 특히 경제적 고통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혁명에 일조하게 된다.  132


인간은 적응력이 높은 동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는 사회 환경의 진화를 못 따라가고 있다. 생물학적 진화는 점진적이지만 사회 환경의 진화는 급진적이기 때문이다. 그 격차는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134


우리는 누군가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할 때 나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전에 그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그 환경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그것은 인문적 사유에서 매우 중요하다. 환경과 조건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자기 자신, 인간, 사회의 본질을 비로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경과 조건은 현상의 배후이자 토대다. 현상의 본질을 꿰뚫기 위해서는 반드시 환경과 조건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  136




2부 공감(共感) - 남의 글에서 내 생각을 발견하는 독서 내공


'생기'란 '살아 있다는 느낌'이다. 모든 인간은 살아 있는 한 '생기'를 추구한다. 만약 살아 있어도 생기를 하나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생기'는 삶의 필수요소이며 쾌락의 원천이다. 생기를 충족시키는 방식에는 '극단적인 방식'과 '중용적인 방식'이 있다. 극단적인 방식에는 폭식, 과도한 성행위, 음란물 중독, 게임 중독,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도박 중독, 쇼핑 중독, 일중독, 폭력, 살인, 권력에 대한 과도한 집착 같은 것이 있다. 중용적인 방식에는 적당한 운동과 노동, 음식과 섹스의 절제, 문학 예술을 감상하거나 창조하는 것 등이 있다.

극단적인 방식은 일시적으로 삶에 큰 생기를 부여하지만, 그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사람을 불행과 죽음으로 몰아가곤 한다. 그러나 중용적인 방식은 반대다. 쾌감의 크기는 작지만, 육체와 정신을 풍요롭게 만들고, 삶을 건강하게 유지시켜준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우선 책을 읽어야 하는 개인적 이유를 보자. 개인적인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독서는 경험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다. 중국의 비평가 린위탕은 이렇게 말했다. "평소에 독서하지 않는 사람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자기 하나만의 세계에 감금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이라도 손에 책을 들면 별천지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세계에 대한 시야가 넓게 트이지 않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전부인 줄 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무엇을 경험했기 때문에 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경험했다고 해서 아는 것은 아니다.  141-142


경험이 곧 앎이 되지 않는 것은, 경험이 해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험이 글이 되기 위해서는, '그 경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것을 어떤 형식으로 써야 메시지가 잘 전달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내 경험을 남의 경험처럼 냉정하게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경험에서 사회적 의미가 생겨나고, 비로소 글이 된다. 경험 자체가 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해석된 경험만이 글이 된다.  144


책을 읽어야 하는 개인적인 이유 두번째는, 독서가 개인을 심미적 존재(아름다운 존재), 철학적 존재(사유하는 존재), 도덕적 존재(양심적인 존재)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145


독서는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실존적 요구를 충족시킨다. 독서는 기본적으로 이 요구에 부합해야 하고, 그래야 열정적인 독서가 지속된다.  146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고요하게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혼자 집에 있을 때에도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틀어놓는다. 젊은이들은 컴퓨터나 모바일로 게임에 열중한다. 소음도 중독된다. 그렇게 시끄럽게 있다가 전자제품들을 끄고 책을 읽으려 하면 뭔가 허전하고 막막한 기분이 들면서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람이 고요하게 있는것은 중요하다. 그럴 때 사람은 자신과 대면하고, 타인과 세상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남들이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럴 때 뇌는 활발하게 움직인다.  156


독서를 하기는 쉽지만, 열정적인 독서를 지속하기란 쉽지 않다. 열정적인 독서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지적인 자극을 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책과 연관된 문화생활을 할 필요가 있다.  157


자신의 내적 욕구에 충실한 독서란 우선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책을 보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호기심이 왕성한 동물이다. 자신의 호기심에 맞는 책을 읽으면 누구나 즐겁게 독서할 수 있다. 그래야 열정적인 독서도 가능해진다. 또 하나는 자기 삶의 문제와 연관된 독서를 하는 것이다.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다. 인생은 그 문제들을 해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럴 때 독서를 통해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라. 그러면 자연스럽게 열정적인 독서가 된다. 자기 문제와 관련된 문제를 다룬 책을 읽을 때와 달리 책의 내용들이 머릿속으로 쏙쏙 잘 들어올 것이다. 여기에 열정적인 독서의 열쇠가 있다.  161-162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나'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나는 세상이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다. 내 안에는 나 자신에 대한 이미지와 세상에 대한 이미지가 함께 들어 있다. 그러므로 세상이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인 나 자신에 대한 관심과 성찰은 매우 중요하다.  163


독서는 단지 저자의 생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독서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발견하는 것이다. 진정한 독서가에게 모든 책은 참고 문헌일 뿐이다. 독서의 궁극적인 목적은 책에 있는 텍스트를 읽음으로써 자기 내부의 텍스트를 발견하는 데 있다.

우리는 흔히 "몰입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몰입을 '매몰'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진정한 몰입에는 주체의의지가 살아 있다. 그래서 책의 내용에 빠져 들었다가도 자신이 원할 때는 언제든지 그로부터 빠져나와 "이 말이 맞나?"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거나, 내용과 관련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것을 말한다.  164


'매몰의 독서'는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기에만 급급해 아무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165


무릇 책은 평가하고 질문하며 읽어야 한다.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가? 첫째, 저자의 주장이 타당한지를 물으며 읽어야 한다. 그 타당성은 저자의 논리와 근거가 적절한지를 살펴봄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 둘째, 그 반대의 주장은 말이 안 되는지, 혹은 예외는 없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반대의 주장과 예외는 책에 기술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이것은 책에 없는 내용을 생각하고 검토하는 것이 된다. 셋째, 저자의 주장이 우리 사회의 현실, 혹은 나의 현실에 맞는가를 물어봐야 한다. 이 역시 책에 기술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아무리 저자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현실에 적용될 수 없으면 곤란하다.  165-166


거칠게 구분하자면, 지적 도약은 세 단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첫 번째 단계는 앞서 말한 것처럼 자신의 내적 욕구를 잘 들여다보고 그에 맞는 책을 읽을 때다. 이때, 사람들은 독서가 주는 지적 희열을 맛보게 되고, 그에 따라 열정적으로 책을 읽게 됨으로써 최초의 지적 도약을 이루게 된다. 두 번째 단계는 꾸준한 독서를 통해 주요 고전의 내용을 이해하게 될 때다. 이를 기점으로 지식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논의를 모두 이해하는 지적 도약을 이루게 된다. 세 번째 단계는 독립적인 연구와 조사, 분석과 종합을 통해 여러 지적 논의에 대해 가치판단을 내리 수 있게 될 때다. 이것이 지성인으로 진입하는 단계다.  171-172


좋아하는 작가의 전작을 읽는 것, 좋아하는 작가가 자주 참고하는 저자의 책을 읽는 것, 같은 주제의 책을 잇달아 읽는 것, 이 세 가지 방법이 '네트워크 독서법'이다. 한마디로 '네트워크 독서법'이란 서로 관련 이쓴 책을 잇달아 읽는 것을 말한다.  185




3부 공명(共鳴) - 세상과 나 사이에 울림을 만드는 글쓰기 내공


신중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그것을 표현해도 좋은가, 어떻게 표현하면 좋은가'하고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글쓰기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오히려 글을 씀으로써 모호하던 생각들이 뚜렷해지고 섬세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글을 쓰는 과정 자체가 치밀한 생각들을 만들어낸다는 말이다.  194


글쓰기와 사유 능력의 발전은 상호 촉진 관계에 잇다. 글쓰기를 하면 사유 능력이 발달하고, 사유 능력이 발달하면 글쓰기를 더 잘할 수 있다.  195


유시민이 한 말로 기억한다. "마당발 치고 지적인 사람이 드물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지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많이 생각하고 읽고 써봐야 하는데. 이 세 가지는 모두 혼자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성인은 늘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저런 사람(집단)들과 친교 맺기를 좋아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을 마음껏 비판할 수 없게 된다.

글쓰기도 어느 정도 고립을 요구한다.  197


지적으로 살려는 사람은 기꺼이 홀로 있을 수 있어야 하고, 홀로 있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지성인이란 스스로를 고립시킴으로써 소통하는 사람이고, 소통하면서도 세상의 모든 것과 거리를 두는 사람이다.  198


롤랑 바르트는 "글쓰기란 하얀 종이 위에 저자의 순수한 의도가 지나가는 길이 아니며, 저자와 독자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정치, 경제적 사건이다.

C. W. 밀즈는 이런 말을 했다. "학자들이 글을 쉽고 명료하게 쓰지 않는 것은 주제의 복잡성이나 사고의 심오함과는 무관하며 자신의 지위를 걱정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학자들이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은 , 그것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높이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물론 주제 중에는 쉽게 쓰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특히 철학적인 주제들이 그렇다. 그러나 학자들이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폼'나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은 정직한 고백에 가까우며, 글쓰기에 대한 신비적 색채를 거두어준다.  199


실제로 자신의 생활 관리에 성공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작가의 성공 여부에 결정적인 요소다. 시간 관리에 실패하면 무절제하고 방탕하게 생활하게 된다.

작가로 성공하고 싶다면 시간 관리에 철저해야 하며, 금욕적으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책 읽고, 생각하고, 글 쓰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지적 도약이 이루어지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다. 지적 도약은 흔히 좋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거기에도 감수해야 할 것은 있다. 바로 세속적인 즐거움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전에는 재미있고 즐겁게만 생각되던 대화나 오락 거리들이 유치하고 시답잖게 느껴질 수 있다. 지적 발전이 이루어질수록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는 깊어진다. 그러나 그만큼 더 인간과 사회를 거리를 두고 보게 된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보통 사람드로가 더 멀리 떨어진다는 것, 심리적으로는 더 고독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204-205


글이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글이 창의적인 시각을 담고 있는 경우다. 창의적인 시각이란 지배적인 시각, 전통적인 시각과 다른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글을 읽을 때 독자는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의 뿌리, 생각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둘째, 이전의 글들보다 새롭거나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다. 외국의 최신 동향이나 최근의 연구 결과를 빨리 소개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혹은 오래된 정보라도 잘 알렺지 않았던 것이면 가치가 있다.

셋째,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것들을 대비시켜 새로운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경우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과 오늘날의 사건과 인물을 대비시킴으로써, 외국과 우리 사회를 비교함으로써 일정한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것이다. 혹은 오래된 역사적 사건과 오늘날의 사건을 비교해 이해시키는 것도 새로운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이런 방식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일들을 낯설게 보게 하고, 우리 사회의 특징을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시킨다.

넷째, 결과만 알려진 것의 '과정'을 면밀하게 폭로하는 경우다. 예를 들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이미 알려진 사건이 나중에 소설화되고 영화화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새삼스럽게 그 사건에 대해 다른 생각과 느낌을 갖게 된다. 대개 사건의 본질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그러므로 글을 통해서 사건의 과정을 잘 검토하는 것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돕는다.

다섯째,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이나 인물, 주제에 관해 깊이 있게 설명해주는 경우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월터 리프먼은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비슷하게 생각할 때, 아무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만큼 습득한 지식의 양은 적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다 알고 있는 것이라도 '그것이 이런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 독자들은 흥미를 느낀다.

여섯째, 기존의 메시지를 감각적인 글쓰기를 통해 정서적 설득력을 갖게 하는 경우다. 트깋 기존의 글이 이성적 설득을 하는 데 그쳤다면 이러한 전략은 유효할 수 있다. 어렵게 쓰인 인문적 메시지를 수필이나 소설 같은 문학적 글쓰기로 변용시켜 전달한다면 많은 독자들이 재미있고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08-209


처흠은 쉽게 시작해서 나중은 어렵게 끝나야 한다. 이 원칙을 구현하는 전술은 다음과 같다.

첫째, 흥미로운 것에서 따분한 것으로 써 나간다. 글을 흥미로운 것으로 시작하면 독자의 주의를 끌 수 있어 선택 받기 쉽다. 여기서 '따분한 것'이란 식상하거나 고리타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애매모호한 것,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설명하기 까다로운 것을 의미한다.

둘째, 개인적인 것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써 나간다. 개인적인 양상은 사회적인 양상의 일부이며 실례다. 그러나 개인적인 양상은 이야기로 되어 있어서 사회적인 양상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다. 개인적인 예로 글을 시작하면 독자들의 정서적 공감을 얻기도 쉽다.

셋째,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써 나간다. 구체적인 사회적 사건이나 역사적 사건 혹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 , 그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철학적 담론 같은 추상적인 내용을 나중에 쓴다. 그러면 역시 독자들이 부담 없이 글을 읽기 시작할 것이다.  210-211


어디서 좋은 글감을 발견할 수 있을까?

첫째, 남에게 받은 질문이나 대화에서 글감을 발견한다. 우리는 늘 타인과 대화하며 산다. 그리고 그러한 대화에는 심리적 사회적 철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는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말을 하는가?', '나는 왜 이런 주장을 하는가?', '그 말은 어떤 논리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가?', '그 논리는 어떤 권력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가?' 같은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타인들과 대화, 그리고 타인과 나의 대화를 잘 곱씹어보면 많은 글감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 지배적인 견해에 의문을 제기해 본다. 인류의 정신사는 지배적인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 의해 풍부해져왔다. 지배적인 견해는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견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견해를 받아들이게 된 과정의 중심에는 대개 권력의 작용이 있다. 또한 그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렇게 보면 지배적인 견해라는 것도 별것 아니다. 그런 새악을 갖고 늘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셋째, 자신이 갖고 잇는 불만과 바람,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불만과 바람에 귀 기울인다. 예를 들어,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초기 자본주의에 대한 불만과 바람이 글이 된 경우다. 초기 자본주의사회에서 나타난 농민과 노동자의 고통, 그것을 바라보는 모어의 불만, 그리고 그것이 극복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 그 바람은 이상적인 사회상을 통해 제시된다 - 글의 모티프였다. 인문적 글쓰기는 비판적 글쓰기이고, 그것은 사회적 불만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가 갖고 있는 사회적 불만은 인문적 글쓰기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넷째, 자신의 경험에서 글감을 찾을 수 있다. 경험은 가장 기본적인 글감의 원천이다. 자신의 경험 중에서 사회적인 의미를 지닌 것을 찾으면 좋은 글감이 될 수 있다. 경험 중에는 사회적 의미가 본래 강한 것이 있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사회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경험들이 많다.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섬세한 사유가 요구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경험을 잘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다섯째, 동서고금의 유명한 일화나 에피소드에서 글감을 찾을 수 있다. 이야기는 대중적 글쓰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쉽고 재미있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은유로 쓰기 쉽다. 그러므로 하나의 이야기로도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이용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나중에 쓰일 법한 이야기를 접하면 평소에 잘 수집해둘 필요가 있다.

여섯째, 시사적인 사건에서 글감을 발견한다. 시사적인 사건들은 사회의 여러 구조적인 문제들이 집약되고 중첩되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그것을 잘 관찰하면 사회의 본질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시사적인 사건은 두 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에피소드와 마찬가지로 대개 스토리를 갖고 있다는 점. 사회적 이슈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일곱째, 개념에서 글감을 찾는다. 항상 말이 중요하다. 개념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다. 하나의 개념은 그 자체로 일정한 관점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경제 분야에서 흔히 쓰이는 '노동의 유연화'를 보자. '노동의 유연화'는 친자본적 친 기업적 관점을 담은 말이다. 실업자, 비정규직, 인턴, 파트타임을 양산하는 '노동의 유연화'는 노동자에게 결코 '부드럽지 않다' 그것은 팍팍한 삶을 의미할 뿐이다.

이렇듯 조금만 신경을 써서 주변을 살펴보면 생각하고 쓸 것들이 널려 있다.

자세히 관찰해야 포착된다.  211-213


글도 자기 취향이나 기질에 맞게 써야 한다. 그래야 글이 잘 써지고 좋은 글도 쓸 수 있다.  215


비평가는 자기 말을 하되, 작품을 매개로 말하는 형식을 취할 뿐이다.  218


비평가는 객관적인 작품 해설이 아니라 독자들이 자신과 같은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 글을 쓴다. 그렇게 비평가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끼어들어 독자의 시선을 조작한다. 한 마디로 '관찰의 조작'이다.  219


서평 쓰기는 습작기에 있는 사람드에게 분명 용이한 측면이 있다.  221


독후감이 개인적인 '감상'을 쓰는 것이라면, 서평은 논리와 근거를 동원한 이성적 글쓰기다.

독후감이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글쓰기라면, 서평은 좀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글쓰기다.  222


서평은 독서하다가 떠오른 문제의식이 있다면 모두 글감이 될 수 있다. 텍스트를 읽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그중에 문제의식이 있으면 그것을 주제로 논리와 근거를 동원해 글을 써내면 좋은 서평이 된다.

서평도 창작이다. 자기 생각을 쓰는 것이다. 책을 매개로 한 자신의 생각과 통찰을 적는 것이다.  223


칼럼을 쓰는 것 외에 시사적 글쓰기를 하는 방법 중 하나는 독립적인 인터뷰어(interviewer, 인터뷰를 하는 사람)가 되는 것이다.  229


'인문적이면서 문학적인 글'인 인포멀 에세이는 작가의 철학과 인격, 정서가 잘 조화된 글이라 할 수 있다.  231


인포멀 에세이를 쓸 때, 중요한 것은 하나의 소재를 붙들고 파고드는 집요함이다.  233


철학적인 글쓰기에서는 암시와 비유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암시나 비유는 메시지를 명료하게 하기보다는 그것을 뭉개면서 의미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235


링컹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게 장작을 패기 위한 여덟 시간이 주어진다면 도끼를 가는 데 여섯 시간을 사용하겠다." <장자>의 [소요유]편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백 리 길으 ㄹ가려는 사람은 하룻밤 양식을 찧으면 되지만, 천 리 길을 가려는 사람은 석 달의 식량을 모아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 준비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을 잘 쑤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그 준비란 평소 읽은 책을 자료 삼아 정리하는 것이다.  242


자료 정리를 하면 첫째, 백지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다. 습작기에 있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어떻게 쓸까'가 아니라 '무엇을 쓸까'이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절실한데 무엇을 써야 할지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글감이 없다면 무작정 책상에 앉아 글을 쓸 일이 아니라, 자신이 인상적으로 읽은 책들을 자료 삼아 정리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책 내용 중 마음에 드는 글을 베끼고, 그 내용과 관련해 떠오른 자기 생각을 컴퓨터에 옮겨 적어야 한다.

자료 정리하는 시간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이 시간을 많이 가질수록 더 좋은 글을 쓰게 된다.  243-244


둘째, 자료 정리를 하면 자기 세계관이 치밀해진다. 글쓰기가 힘든 것은 단지 표현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거기에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거이다. 이 문제 역시 자료 정리를 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어떤 책에서 마음에 드는 글을 컴퓨터에 옮겨 적을 때, 그 글의 내용은 대개 자신이 적극 동의하는 내용인 경우가 많다. (비판하기 위해 베끼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얼마 안 된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정리된 자료는 '자신이 동의하는 내용들'이 거대한 집적물이다. 그 자료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주로 무엇에 관심이 있고, 어떤 주장에 동의하는지가 명확해진다. 내가 내 생각을 명확히 알 수 있다는 말이다.  244-245


셋째, 자료를 정리하면 문장력이 좋아진다. 자료 정리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만 '베껴 쓰는' 과정이다. 베껴 쓴 이후에도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주 그 자료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좋은 문장들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입력된다. 자료 정리를 하다보면 사용하는 단어의 양이 늘고, 어휘의 개녀모가 지시성에 대한 감각이 섬세해지며, 문장과 표현이 정밀해지고, 논리적 사고 및 언어 사용 능력이 생겨난다. 심지어 문장의 리듬감까지 익힐 수 있다. 문장이 좋아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좋은 방법을 놔두고 문장력을 강화하기 위해 문법, 맞춤법을 공부하거나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되는 책을 통째로 베끼는 사람들이 있다. 혹은 '자신의 부족한 어휘량'을 채우기 위해 사전을 외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시간 대비 효과가 낮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자료 정리'만 한 것은 없다.  245


글을 간결하게 쓰라.

첫째, 불필요한 부사를 줄여야 한다. (사실, 일반적으로, 더 이상...)

둘째, 불필요한 '형용사'를 줄여야 한다. (유명한, 오래된, 비참한...)

셋째, 불필요한 지시어를 지워야 한다. (이처럼, 그러한...)

'빼도 말이 되는지'를 본다. '빼도 말이 된다' 싶으면 되도록 빼는 것이 좋다.

넷째, 불필요한 접속사를 최대한 빼야 한다. (즉, 그리고...)  275-277


인생에는 별자리를 보는 것과 눈앞의 파도를 보는 것 둘 다 필요하다. 배가 목적지에 잘 도착하려면 그 두 과제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사회가 자본에 의해 지배 받고, 과학기술이 첨단화될수록 인문적 사유 능력은 더욱 절실해진다. 왜냐하면 자본과 과학기술은 그 스스로 나아갈 방향을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방향을 정하는 것은 인문적 사유다.  315


비판적 이성이란 '왜(why)'를 묻고 답하는 이성이다. 

비판적 이성을 사용하지 않으니, 삶에 대한 확신이 없고, 정체성이나 진로 문제 같은 것을 서른 가까운 나이에도 고민하는 일종의 정신 지체 현상이 발생한다.

도구적 이성이란 '어떻게(how)'를 묻고 답하는 이성이다. '어떻게 하면 집값을 더 올릴까?', '어떻게 하면 좋은 직장에 취직할까?', '어떻게 하면 컴퓨터나 영어를 잘할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이 도구적 이성에 속한다. 비교해보면 도구적 이성보다 비판적 이성이 훨씬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비판적 이성을 사용해야 가치 지향적인 삶, 후회 없는 삶, 보람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도구적 이성에 훨씬 경도되어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보다 현대 사회의 성격 자체가 도구적이기 때문이다.  317


경제 발전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느냐'를, 가학기술의 발달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편리함을 누리느냐'를 문제 삼는다. 두 가지 모두 '어떻게'를 문제 삼는다. 거기에는 '왜 더 많은 부를 축적해야 하느냐?' 혹은 '왜 더 많은 편리함이 필요한가?'에 대한 고뇌가 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도구적 이성'이다. 경제 발전과 과학기술의 발전의 맹목적 추구는 현대사회에서 압도적인 분위기와 생활 방식, 사고 방식을 만들어낸다. 그런 사회 속에서 사는 개인들 역시 도구적 이성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성의 도구화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지지 않고 곧바로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  318


여기 한 젊은이가 있다. 글에게 환경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오염되어 있었다. 그는 여러 경로를 통해 지금도 환경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는 환경 문제에 대해 별다른 감각이 없다.그는 애초부터 좋은 환경 속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평생 환경의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오염된 환경은 가장 익숙한 환경이다. 그런 그가 환경의 위기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경계하며 살기란 쉽지 않다.

마르크스는 "그들은 자신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환경 문제에 관한 한, 독일의 이론가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말이 더 옳아 보인다. 그는 마르크스의 말을 이렇게 바꾸었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잘 알지만, 여전히 그렇게 행동한다."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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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이 순간 행복하게 웃고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의 눈물 때문이다. 우리들이 건강한 것은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 덕분이다. 우리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은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굶주리는 사람들의 희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울부짖고 있는 사람과 주리고 목마른 사람과 아픈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된다.  22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쓴 <완덕의 길> '정말 필요한 것이면 보아줄 사람이 얼마든지 있으니,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스스로 걱정하지 마십시오.'  30


어때서 일어나지도 않은 현상을 미리 가불해서 앞당여 근심하고 있단 말인가.

성녀 데레사는 이렇게 말했다. '매 순간 단순하게 살지 않는다면 인내심을 갖기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과거를 잊고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합니다. 우리가 실망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곰곰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35


선승 황벽(黃檗)은 이렇게 말했다. '과거는 감이 없고, 현재는 머무름이 없고, 미래는 옴이 없다.'

주님도 이에 대해 분명하게 못 박고 계시지 않는가.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36


프랑스 시인 아폴리네르.

그가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대답했다.

우린 두렵습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왔다.

그는 그들을 밀어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날았다.  38


일찍이 당나라의 선승 동산(洞山)에게 한 스님이 찾아와 물었다. 

"추위와 더위가 찾아오면 이를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

동산이 대답했다.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면 되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가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입니까?"

그러자 동산이 소리쳤다.

"이놈아! 추울 때는 그대를 더 춥게 하고, 더울 땐 그대를 더 덥게 하는 곳이다."

우리는 추우면 본능적으로 더운 곳으로 피하려 한다. 더운 곳으로 피하면 추위는 일시 가실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추위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고통이나 근심이 있을 때 술을 마시거나 다른 방법으로통해 고통을 피하려 한다. 피하고 잊는다고 해서 고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고통은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추위를 피하려면 애써 더 추운 곳으로 찾아가라는 동산 스님의 말은 고통이 오면 더욱 그 고통을 직시하라는 뜻이다. 


중국의 도가서(道家書)인 <열자(列子)>에는 전설적인 신궁 비위(飛衛)의 이야기가 나온다. 제자 기창(紀昌)이 찾아와 활쏘기를 배우려 하자 비위가 말한다. 

"활쏘기보다, 먼저 눈을 깜빡거리지 않고 끝까지 보는 공부부터 하게."  58


이순신 장군도 말씀하셨다.

"살려 하면 죽을 것이요, 죽으려 하면 곧 살 것이다."


주님도 이렇게 못 박고 계시지 않는가.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59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인간은 고통을 느끼지만 고통이 없다는 것은 못 느낀다. 두려움을 느기지만 평화는 못 느끼며, 갈증이나 욕망은 느끼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면 금세 잊어버린다. 마치 심한 갈증으로 허겁지겁 물을 마신 후에는 남은 물을 버리는 것처럼."  77


<성녀 소화 데레사 자서전>

소화 데레사 성녀는 널리 알려진 대로 15세에 가르맬수도회에 들어가 24세에 선종함으로써 10년도 못 되는 짧은 수도원 생활을 한 새내기 성녀다... 봉쇄수도원에서 기도를 하고, 마룻바닥을 닦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것과 같은 평범한 일상생활에 전념했던 수도자였다.  97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아주 소소하고, 그러니까 마룻바닥에 떨어져 있는 바늘 하나를 주울 때에도 주님에 대한 사라응로 주우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영혼 하나를 구원한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당신의 사랑을 증거하는 데 조그만 희생 하나, 눈길 한 가닥,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아주 작은 것도 이용하고 그것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성인의 길'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녀 소화 데레사가 발견한 '겨자씨'의 비밀이었다.  98


주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은 우리들의 수도우너인 가정 속에서부터 타올라야 한다.  100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음식을 만들때도 데레사처럼 사랑으로 하고, 자식들을 아기 예수처럼 대하고, 아내를 성모님처럼 공경하고, 남편을 주님을 대하듯 사랑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면, 우리의 가정은 성가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01


[두메꽃]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미나 내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 숨어서 피고 싶어라.  117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죄는 반드시 이 단계를 거치게 되어 있다. 우선 유혹에 넘어가 그 죄를 응시하는 첫 발견 단계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고 나서 생각한다. 먹음직스럽다. 화려하다. 향기롭다. 감미롭다. 죄는 본능적인 감각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후에는 맹렬한 상상이 일어나고 쾌락에 대한 기대감이 용솟음친다. 이 과정을 <준주성범>은 '처음에는 마음에 단순한 생각만 하고, 그 다음에는 상상이 일어나고, 쾌락이 생기고, 잇따라 악한 중동이 발하고, 마침내는 승낙을 하게 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와가 느낀 '사람을 영리하게 해줄 것 같다'는 느낌은 악의 논리다. 결정적인 악의 정당화가 생기기 전까지는 그나마 유혹과 맞서 싸우려는 의지가 있지만, '딱 이번 한 번뿐인데', '이생은 원래 즐기는 거야', '사랑은 불나비야'라는 식의 악의 논리는 여지없이 충동적인 만용을 불러일으켜 마침내 열매를 따 먹고 남편에게도 따 줌으로써 악은 습관화(중독)되고 전염되어 온 세상에 만연하게 되는 것이다.  127


미국의 CIA는 거짓말을 백색, 회색 그리고 흑색으로 분류하고 있다. 남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행하는 흑색 거짓말과 완전한 거짓은 아닌, 상대방을 위한 선의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백색 거짓말, 그리고 그 경계가 애매한 회색 거짓말.  139


남전이 주석하고 있는 선당은 동서에 선방을 두어 동쪽의 선방에 사는 수자를 동당(東堂), 서쪽의 수자를 서당(西堂)이라고 불렀다. 

어느날 모든 납자들이 들에 나가 일을 하고 있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서로 자기네 고양이라고 주장하며 동당 고양이, 서당 고양이 하고 싸움이 벌어졌다.

다툼이 시끄러워지자 스승 남전은 무슨 일인가 나와 지켜보다가 싸움의 원인이 고양이 한 마리 때문임을 알고는 고양이의 목을 한손으로 쥐어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칼을 들어 모가지에 들이대고는 말했다.

"너희들이 뭔가 한 마디 할 수 있다면 이 고양이를 죽이지 않겠지만 말할 수 없다면 목을 베어 죽일 것이다."

서슬이 퍼런 스승의 선기에 압도되어버린 대중들은 입조차 달싹 못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남전은 그 자리에서 고양이의 목을 베어 죽였다.

그날 밤 외출에서 돌아온 제자 조주(趙州)가 스승에게 인사하러 왔을 때 남전은 낮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네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어떻게 했겠느냐?"하고 물었다. 그러자 조주는 말없이 자신이 신던 짚신 한 짝을 머리 위에 얹고 걸어 나갔다. 이에 스승 남전이 혀를 차며 말하였다.

"네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고양이는 살 수 있었을 터인데."

그 이후부터 '불살생'의 계율을 파계하여 고양이의 목을 벤 남전의 칼은 애욕을 끊기 위한 '사람을 죽이는 칼'이며, 그것이 분쟁의 원인인 고양이라 할지라도 하찮은 짚신조차 머리 위에 떠받으는 것처럼 섬기겟다는 조즈의 칼은 '사람을 살리는 칼'로 불리게 되었다.  148-149


근세의 선승 혜월(彗月)은 1937년 죽기 전 선암사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천하의 명검'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이 말을 들은 헌병대장이 명검을 보고 싶은 욕망에 절을 찾아왔다. "그 칼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라는 간청에 "물론입니다."하고 앞장서 걷던 혜월은 느닷없이 뺨을 후려쳐 헌병대장을 섬돌 아래로 떨어뜨렸다. 졸지에 수모를 당한 헌병대장이 허리에 찬 칼을 빼려 하자 혜월이 먼저 다가가 그를 부축하여 일으키면서 말했다.

"이것이 내가 갖고 있는 천하의 명검이오. 내가 때려 섬돌 아래로 떨어뜨린 손은 사람을 죽이는 칼이며, 부축하여 일으켜 세운 손은 사람을 살리는 칼입니다."  150


혀와 손과 생각은 모두 양면의 날을 가진 불칼임을.  155


불교에는 '불재가중(佛在家中)'이란 말이 전해져온다. 당나라 때 양보(楊補)라는 사람이 사천에 유명한 무제(無際)보살이 있다 해서 먼 길을 떠났다. 한참을 가던 양보는 "어디를 가오?"하고 묻는 노인에게 "무제보살을 스승 삼고자 길을 떠났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노인은 "보살을 찾아가느니 부처를 찾으러 가지 그래."하고 말했다. "부처가 어디에 있는데요?" 하고 양보가 묻자 노인은 대답했다.

"집에 가면 이불을 두르고 신발도 거꾸로 신은 채 나와서 맞아주는 분을 만나게 될 텐데, 그분이 바로 부처시네."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오바 이불을 두른 채 신발을 거꾸로 신고 뛰어 나오는 어머니 모습에서 비로소 양보는 '집 안에 있는 부처'를 견성(見性)할 수 있었던 것이다.  162


예수께서 저를 붙드신 목적은 제가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향해 달음질치게 하려는 것에 있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 안에 있는 하느님으로서의 '말씀'능력과 예수로서의 '행동'능력과 성령으로서의 '생각'능력, 즉 '지언행(知言行)'을 일치시키려 노력하는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170



스님, 정말로 죽음이 무섭지 않습니까? _최인호

죽음을 받아들이면 사람의 삶의 폭이 훨씬 커집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한다면 지금까지의 삶이 소홀했던 것입니다. _법정



내가 좋아하는 선가(仙家)의 말 중에 '살아도 온몸으로 살고 죽어도 온몸으로 죽어라' 라는 말이 있다.  180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평론가였던 A. 모루아는 "병은 정신적 행복의 한 형식이다. 병은 우리들의 욕망, 우리들의 불안에 확실한 한꼐를 설정해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위대한 사상가였던 C. 힐티는 <행복론>에서 "강의 범람이 흙을 파서 밭을 갈듯이 병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파서 갈아준다. 병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견디는 사람은 보다 깊게 보다 강하게 보다 크게 된다."

강이 범람하여 홍수가 나지 않으면 대지는 황폐해진다. 기름지고 비옥한 땅이 되기 위해서는 홍수로 땅이 뒤집혀야 하는 것이다. 태풍이 바닷물을 엎어버리지 앟으면 플랑크톤은 사라지고 물고기들의 먹이사슬은 끊어진다. 바다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태풍이 몰아쳐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서는 병의 홍수와 태풍을 견디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182-183


당나라 때 향엄(香嚴)이란 선사가 있었다. 등주(鄧) 사람으로 법명은 지한(智閑)이었다. 키는 7척이나 되고, 학문에 조예가 깊어 아는 것이 많고, 말재주가 능하여 당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날 스승 위산영우(僞山靈祐)를 찾아가 불법에 대해 묻자 위산은 이렇게 답하였다.

"그대가 터득한 지식은 전부 남에게서 보고 들었거나 부처께서 말씀하신 삼장십이부경(三藏十二部經)의 뜻을 의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묻지 않겠다. 나는 그대에게 묻겠다. 아직 어머니의 배 안에서 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本來面目)에 대해서 한 마디 일러 보아라. 그것으로 그대의 공부를 가늠하겠노라."

향엄은 여러 가지로 대답했으나 위산은 인정해주지 않았다 위산에게 가르침을 간청하자 스승은 "나의 말은 나의 견해일 뿐 그대 스스로의 안목으로 일러야 그대의 안목이 아니겠느냐." 하고 거절한다. 이에 향엄은 자기가 읽던 모든 책을 불살라버린 후 "이번 생에는 불법을 깨닫지 못했다. 오늘까지 나를 당할 사람이 없다고 느꼈는데, 스승에게 한 방망이 맞고 보니 그 생각이 깨끗이 없어졌다. 이제부터 나는 그저 밥이나 먹고 살아가는 중이 되겠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스승과 작별하고 암자에 들어가 수행을 하였다. 

하루는 마당의 풀을 베면서 무심코 던진 기왓장 한 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치며 난 '딱'소리를 듣고 순간 크게 깨달았다. 이 장면을 선가에서는 향엄격죽(香嚴擊竹)리라고 부른다. 향엄은 스승에게 돌아가 깨달음을 인정받고 오도송을 읊었다.

작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去年貧 未是貧

금년 가난이 비로소 가난이로다. 今年貧 始是貧

작년에는 송곳꽂을 땅이 없더니 去年 無卓錐之地

금년에는 송곳조차 없더라. 今年 錐也無

이 선화에서 나온 것이 그 유명한 화두, 즉 '그대가 아직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나기 전의 본래 얼굴'이란 공안인 것이다.  200-201


향엄 스님은 "이번 생애는 불버븡ㄹ 깨닫지 못하겠다."고 절망 했지만 용맹정진 끝에 무심코 던진 기왓장 한 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딱' 소리에 크게 때닫고 부모가 태어나기 전의 참나, 즉 '본래면목'을 견성하엿다.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첫 일성으로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언하셨다면 하늘나라는 이미 와 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면 어느 날 문득 어린이가 되어 하느님이 '빚어 만드신 최초의 참사람'으로 돌아가 원죄 없는 원형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철학자 스피노자는 말했다.

"지금 이 순간을 영원의 눈에서 바라보십시오."

심학규는 공양미 삽백 석이 있어야만 눈을 뜨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한 것은 바로 눈앞에 있는 자신을 위해 죽었던 심청이를 보고 싶다는 참사랑의 열망 때문이었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지금 이 순간을 시작도 끝도 없는 '이제와 항상 영원한 시선'에서 바라본다면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치마를 뒤집어쓰고 임당수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심청이의 본래면목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나의 참모습을 견성할 수 있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눈을 뜨는 데는 공양미 삼백 석과 같은 수천 년 세월이 걸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는 것은 <심청가>에 나오듯 '휘번쩍'눈을 뜨는 한 순간이다.  209-210


운동처방학을 전공하는 윤기운 교수는 운동선수들에게 세 가지 종류의 혼잣말 훈련을 실험하고 그 결과를 지켜본 후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혼잣말의 종류에는 '지도적 혼잣말'과 '동기적 혼잣말', '긍정적 혼잣말'등이 있는데 지도적 혼잣말은 '천천히' 혹은 '침착하게' 같은 교훈적인 것이며, 동기적 혼잣말은 '이번이야말로 최고의 기회야', '드디어 때가 왔어'같은 심리적인 동기부여를 가리키며, 긍정적 혼잣말은 '좋아, 할 수 있어', '난 내 자신을 믿어'와 같은 말인데 마음속으로 외우기보다는 실제로 입 밖으로 드러내어 혼잣말을 하는 실험대상이 그렇지 않은 상대보다 월등히 실제 행동과 학습효과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215-216


중국의 당나라 때 절강성의 서암사라는 절에는 사언이라는 선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화두로 유명한 암두의 제자였다. 사언은 스승으로부터도 인정 받지 못했던 치둔인이었다. 

그가 그렇게 불린 데는 어느 날 공양 초대를 받아 신도 집에 갔을 때 주인이 유리와 구슬로 된 염주알을 바구니에 잠아 각자 골라 가지라고 햇던 데서 비롯되었다. 사언은 다른 스님들이 다 고른 후 마지막에 남은 가장 볼품없는 것을 집어 들고 "이것이 가장 내 마음에 든다."라고 흡족해하여 '바보선사'라 불리게 된 것이다. 

사언은 아침에 일어나면 판도방(큰방) 앞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주인공아."

그러고 나서 사언은 대답했다

"네."

"정신차려라."

"네."

"앞으로도 속지 말아라."

"네."

사언의 자문자답은 자기 속의 자기야말로 만유의 근원적인 한 물건이자 본질 이전의 진아(眞我)임을 깨닫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경책하는 벽력임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216-217


웰만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벗은 나 자신이며, 세상에서 가장 나쁜 벗도 나 자신이다. 나를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힘도 나 자신 속에 있으며 나를 해치는 무서운 칼날도 나 자신 속에 있다. 이 두 개의 나 자신 중의 어느 나를 좇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  217


프랑스의 모럴리스트였던 라로슈푸코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귀중한 사람의 죽음에 눈물을 흘린다고 말하면서 신제로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추기경님은 그날 대담(2003년이엇던가. 새해를 맏아 동아일보에서 기획한 새해 특집으로 김수환 추기경과의 대담)에서 내개 한 가지 수수께끼 같은 화두를 던졌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가장 긴 여행이 뭔지 안세요?"

"모르겠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추기경님은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셨다.

"바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지요. 나 역시 평생이 짧은 것처럼 보이는 여행을 떠났지만 아직 도착하기엔 멀었소이다. 기독교인들은 항상 반성과 회개를 통해 조금씩 우리 마음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하느님께 나아가고 예수를 닮아가야 합니다."  246-247


성경의 한 구절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까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 주거라.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러가.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사람의 정을 물리치지 말아라."  255


세속과 청산을 따져 무엇 하겠는가. 길상사건 대원각이건 굳이 어느 쪽이 옳은가 따져 무엇하겠는가. 봄볕이 비추면 꽃피지 않는 곳이 없지 않는가. 꽃피는 곳마다 부처 역시 살아나고 있는 것. 봄볕이 비추는 곳을 찾아갈 일이지 굳이 세속과 청산을 구분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258


신문에는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성철 스님이 내린 법어가 실려 있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며 하늘과 땅이 무너진다 해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유형무형 할 것 없이 모든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들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함으로 종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종말을 걱정하여 두여워하며 헤매고 있습니다.

...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원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주러 온 것입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행복합니다.'  268


내가 "스님, 어느 책에선가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하셨는데, 정말 무섭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법정 스님이 이렇게 대답했다.

"실제로 죽음이 닥치면 어떨진 모르지만 지금 새악으로는 무섭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죽음은 인생의 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확고해지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어요. 죽음을 받아들이면 사람의 삶의 폭이 훨씬 커집니다. 사물을 보는 눈도 훨씬 깊어집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한다면 지금까지의 삶이 소홀했던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나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277


법정 스님은 근대 불교계의 큰 어르신이셨던 효봉(1888~1966)의 애제자였다.

효봉은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알려졌던 법기로, 우리나라 최초로 법관이 되었다. 36세가 되던 어느 날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조선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후 삶에 대해 큰 회의와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나와 엿장수를 하며 3년간 방랑생활을 하다가 비교적 늦은 나이인 38세에 불문에 귀의하셨던 늦깍이셨다. 법정 스님이 출가를 결정하고 여부를 묻자 효봉 스님은 생년월일을 묻고 간지를 짚어본 후에야 이를 허락하였으며, 훗날 새로 출가한 법정 사미만을 데리고 지리산 쌍계사 탑전(塔殿)에 가서 수행에 몰입할 만큼 법정을 각별히 아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때의 일화 중에 한 토막.

어느 날 아침 공양 후 우물가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오자 효봉 스님이 법정 사미를 부르며 빈 그릇하고 젓가락을 가져오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법정 사미가 그릇과 젓가락을 가지고 우물가로 가자 효봉 스님은 설거지를 하며 버린 밥알과 시래기 줄기를 주워 담은 후 법정 사미가 보는 앞에서 밥알과 시래기를 물로 씻은 후 훌쩍 한 입에 들이마셨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출가해서 수도하는 사람이 무슨 일이든 아끼고 절약해서 시주한 사람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부자 살림이고 되도록 몸에 지니지 않는 무소유야말로 참으로 전부를 갖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법정 스님의 철저한 무소유는 바로 스승이셨던 효봉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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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책을 읽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좀 더 올바른 시각으로 삶을 대하는 것.  7


頓悟漸修(돈오점수) - 돈오, 갑작스럽게 깨닫고 그 깨달은바를 점수, 점차적으로 수행해가다.  8

(돈오돈수, 점오점수, 점오돈수, ..)


1강 자존(自尊) - 당신 안의 별을 찾으셨나요?

'아모르 파티(Amor fati)', 네 운명을 사랑하라.

'모멘토 모리(Mo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메멘토 모리와 아모르 파티. '죽음을 기억하라'와 '운명을 사랑하라'는 죽음과 삶이라는 상반된 의미의 조합이지만 결국 같은 방향을 바라봅니다. 내가 언젠가 죽을 것이니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하라는 것이고, 그러니 지금 네가 처한 너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죠.  17-20


(한국 교육은) 기준점을 바깥에 찍죠... 이렇게 교육받은 우리는 '다름'을 두려워해요. 기준점이 되는 누군가와 다른 내 모습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20

남과 다르면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드는 환경에서 자존감을 가지고 살려면 스스로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21

기준점을 바깥에 두고 남을 따라가느냐, 아니면 안에 두고 나를 존중하느냐일 겁니다.  22


[어느 대학 교수는 미국 사람과 한국 사람의 차이를 이질 문화와 동질 문화라는 말로 해석한다. 미국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너와 나는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객관적인 정보를 준다. 반면, 우리는 '너와 내가 생각하는 바가 비슷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내가 "저어~기"라고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도 "음, 저기를 이야기하는구나!"라고 알아들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한다는 이야기. 미국이 인종 전시장이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세계에서 흔치 않은 단일 민족 국가라는 점을 고려할 때 공감이 가는 설명이다. 

이질 문화를 가장 단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역시 거리 풍경이다.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피부색이 다르고 입는 옷이 다르고 하는 말이 다르다. 그것뿐만 아니다. 너와 내가 다른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을 쓸 일이 별로 없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사는 방식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뿐.  ...

가끔은 틀을 벗어나는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23-25


우리는 아직도 각자의 상자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십 대가 살아야 할 상자, 삼십 대가 살아야 할 상자, 사십 대가 살아야 할 상자. 그 상자의 바깥으로 벗어나면 매년 명절마다 고문을 당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측은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실패한 인생이라고 손가락질 받죠.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자존을 싹 틔우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25


칭찬은 자존감을 키워주는데, 가진 것에 대한 칭찬이 아닌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질타는 눈치를 자라게 합니다.  27


정신과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모든 사람은 완벽하게 불완전하다"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28


제가 좋아하는 부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존중해야 하는 것이죠. 단점을 인정하되 그것이 나를 지배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 못났다고 외로워하지도 마세요. 모든 인간은 다 못났고 완벽하게 불완전하니까.  29


자기의 길을 무시하지 않는 것. 바로 이게 인생입니다. 

각기 다른 자신의 인생이 있어요. 그러니 기회다 다르겠죠. 그러니까 아모르 파티, 자기 인생을 사랑해야 하는 겁니다. 

우리에겐 오직 각자의 점과 각자의 별이 있을 뿐입니다.  

모든 인생은 전인미답(前人未踏)이에요. 인생에 공짜는 없어요.

준비해야 하죠. 내가 뭘 봐야 하는지, 다른 사람과 어떻게 다른지.  33-34


Be yourself. 너 자신이 되어라. 34


'다르다'와 '틀리다'는 다릅니다.  37


You should take me as I am.  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야 해.(브리트니 스피어스의 What you see)

Take me as I am.(나를 그대로 받아들여)!  38




2강 본질(本質) -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


<생각의 탄생>에서 리처드 파인먼은 '현상은 복잡하다. 법칙은 단순하다... 버릴게 무엇인지 알아내라.'  43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 모든 것은 변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브랜드 에르메스(HERMES)의 지면 광고)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요.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47


저는 게으른 사람입니다. 그럼 제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변하지 않는 것, 본질을 보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본질일까요? 바로 콘텐츠입니다. 콘텐츠는 '사람을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한 메커니즘입니다. 이것만 확실하면 페이스북에서, 트위터에서 퍼갑니다.  52


급변하는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게 있고, 그걸 잡는 게 나의 유일한 돌파구입니다.  55


본질은 결국 자기 판단입니다. 나한테 진짜 무엇이 도움이 될 것인가를 중심에 놓고 봐야 합니다.  60


시간의 세월을 잘 견뎌낸 것들은 본질적인 것들이에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국 기행>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소속 칼리지들의 주요 목표는 학식이나 지식을 두뇌에 채워 넣는 것만이 아니다. 이곳 졸업생은 의사나 변호사, 신학자, 물리학자, 운동선수 같은 전문가가 되어 나가지 않는다. 여기에는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어느 한 방면의 전문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는다. 그레이트브리튼 최고의 젊은이들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와서 2,3년 머무르며 <조화>를 배운다. 육체, 정신, 심리가 고루 단련된 완벽한 인간이 유일한 목표이다. 이 기간이 지난 후에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종합 대학이나 법학 대학원, 종합 기술 전문대학, 병원 등 어디서나 전문적인 공부를 계속한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서는 전공 분야에 대한 증서를 받지 않는다. 그들이 받는 것은 <인간의 증서>이다.'  

본질은 탄탄하게 만들어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거죠. 

미국의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컬럼비아 대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학교는 전공을 2년 동안 정하지 않아요. 2년 동안 교양만 가르치는데, 학생들은 총 8개의 교양을 배웁니다. 고대와 현대 그리고 비영미권의 문학, 사학, 철학 그리고 이과 과목 두 가지, 쓰기, 음악, 미술. 1905년도에 컬럼비아는 이 제도를 만들었고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교육의 본질은 교양과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전인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62-63


지식은 본질은 익힌 후에 있어야 합니다.

본질이 아닌 것 같다면 놓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63


그리고 자기를 믿는 고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피카소의 연작. 이 작품을 그리면서 피카소가 했던 일은 아이디어를 더하는 게 아니라 빼는 것이었습니다. 빼고 또 빼서 본질만 남기는 것이었죠.  64



복잡한 사물의 색심이 무엇인지 보려는 노력, 어떤 것을 보고 달려가느냐가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커다란 무기입니다.  68




3강 고전(古典) - Classic, 그 견고한 영혼의 성(城)


김용택 시인의 <첫사랑>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해 같은 처녀의 얼굴도 

새봄에 피어나는 산중의 진달래꽃도 

설날 입은 새 옷도


아, 꿈같던 그때

이 세상 전부 같던 사랑도 

다 낡아간다네

나무가 하늘을 향해 커가는 것처럼

새로 피는 깊은 산중의 진달래처럼

아, 그렇게 놀라운 세상이 

내게 새로 열렸으면

그러나 자주 찾지 않는

시골의 낡은 찻집처럼

사랑은 낡아가고 시들어만 가네


이보게, 잊지는 말게나 

산중의 진달래꽃은 

해마다 새로 핀다네

거기 가보게나 

삶에 지친 다리를 이끌고

그 꽃을 보러 깊은 산중 거기 가보게나

놀랄걸세

첫사랑 그 여자 옷 빛깔 같은

그 꽃 빛에 놀랄 걸세

그렇다네

인생은, 사랑은 시든게 아니라네

다만 우린 놀라움을 잊었네

우린 사랑을 잃었을 뿐이네.  71-72


얼마 전에 경기 지역의 교사 4백 분에게 강연을 했습니다. 선생님들이 어떻게 하면 창의력이 있는 아이들로 기를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 저는 느끼게 해달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82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가리고 있다는 말을 자주합니다.

진짜 알려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궁금해질 겁니다. 그 대상의 본질에 대해서, 그리고 그걸 알기 전에는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위험합니다. 모르면 모른다로 해야 합니다.

정보는 인터넷으로 조금만 찾아보면 다 나옵니다. 알려고 하기 전에 우선 느끼세요. 고전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느껴야 해요. 그러다 보면 문이 열려요. 그 다음에는 막힘 없이 모모가 영혼을 타고 흐를 겁니다.  86


처음 그림을 볼 때는 감동을 짜내려고 미간에 힘을 주기도 했었는데, 아무리 해도 감동이 안 와요. 그래서 책을 몇 권 살펴 읽었고, 조금 알고 나니까 이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감동을 받을 수 있게 됐죠. 조금 더 덧붙이자면 그날의 감동은 제일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보다 컸어요. 죽음의 냄새를 맡고 그림 한 장이 주는 스토리를 읽고 화가의 천재성을 발견할 때 짜릿하죠.(뭉크의 The Death Bed 와 The Three Stages of Woman)  89




4강 견(見) - 이 단어의 대단함에 대하여


기술이나 이론은 만들 수 있어요. 법도 판례를 남겨 참고가 되도록 하죠. 그런데 창의력은 지난 번 것이 참고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상자안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면 더 이상 창의력이 아니겠죠. 그러니 창의력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죠. 창의력을 기를 수 있는 단 하나의 교실이 있다면 바로 현장입니다.  103


심부재언 시이불견 청이불문 식이부지기미(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그 맛을 모른다는 뜻으로 유교 경전 중 <대학>에 나오는 말.

흘려 보고 듣느냐, 깊이 보고 듣느냐의 차이.  110


존 러스킨이라는 영국의 시인은 "네가 창의적이 되고 싶다면 말로 그림을 그려라"라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뭘 봤니?"라고 물었을 때 그저 "풀"이라고 대답하지 말고, 풀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고, 잎이 몇 개 있었는데 길이는 어느 정도였고, 햇살은 어떻게 받고 있었으며 앞과 뒤의 색깔은 어땠고, 줄기와 잎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 등 자세하고 소상히 그림 그리듯 말하라는 것이었죠. 이것은 즉, 들여다보라는 겁니다. 

앙드레 지드도 <지상의 양식>에서 "시인의 재능은 자두를 보고도 감동할 줄 아는 재능이다"라고 했습니다. 시인의 재능은 자두를 보고도 감동하고, 간장게장을 보고도 감동하는 겁니다.  113


영화<시>에서 김용택 시인이 김용탁 시인으로 출연을 하는데요. 그 김용탁 시인이 할머니들에게 시에 대해 수업을 합니다.

'여러분, 사과를 몇 번이나 봤어요? 백 번? 천 번? 백만 번? 여러분들은 사과를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사과라는 것을 정말 알고 싶어서,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어서 보는 것이 진짜로 보는 거예요. 오래오래 바라보면서, 사과의 그림자도 관찰하고, 이리저리 만져도 보고 뒤집어도 보고, 한 입 베어 물어도 보고, 사과의 스민 햇볕도 상상해보고, 그렇게 보는 게 진짜로 보는 거예요.'  116


<생각의 탄생>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발견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것을 보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가 보는 것을 보는 것, 시청.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 견문(見聞)이죠.  117


아이디어는 깔려 있습니다. 어디에나 있어요. 없는 것은 그것을 볼 줄 아는 내 눈이에요. Beauty is in the beholder.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들의 눈 속에 있는 법입니다. 


보기 위해서는 투자를 좀 해야 합니다. 시간과 애정을 아낌없이 쏟아야 해요.

우리가 못 보는 이유는 우리가 늘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핍이 결핍된 세상이니까요.  118


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 

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 

외면한 채 한 곳을 바라보며

고작 버스나 기다렸다는 기억에 

목이 멜 것이다.              - 조은 <언젠가는>중에서  119


떠나서 보는 건 정말 중요합니다. 제대로 볼 수 있는 게 곧 풍요니까요.  123


순간을 온전히 살려면 촉수를 예민하게 만드세요

見. 본다는 것은 사실 시간을 들여야 하고 낯설게 봐야 합니다.

익숙함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Surprise me(나를 놀라게 해!)

놀라는 것이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의 능력은 놀라는 거예요. 놀란다는 건 감정이입이 됐다는 거고요.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그 현상을 뇌리에 박으면서 경험하는 거죠.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동받는 것입니다.  124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너무 많은 것을 보려 하지 않는 겁니다. 

호학심사(好學深思), 즐거이 배우고 깊이 생각하라. 이 말에서 더욱 깊이 새겨야 할 것은 심사(深思)입니다. 너무 많이 보려 하지 말고, 본것들을 천천히 먹고, 천천히 걷고, 천천히 말하는 삶. 어느 책에서 '참된 지혜는 모든 것들을 다 해보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끝까지 탐구하면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읽었습니다. 이게 지금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 같습니다.  126




5강 현재(現在) - 개처럼 살자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선택을 하고 나면 답은 그 자리에 있습니다. 아니면 없습니다.  131


박경철씨와의 TV인터뷰에서 마지막 질문이 "박CD님은 계획이 뭡니까?"였습니다. 저는 "없습니다. 개처럼 삽니다"라고 대답했어요. 부연 설명을 부탁해서 "개는 밥을 먹으면서 어제의 공놀이를 후회하지 않고 잠을 자면서 내일의 꼬리치기를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라고 덧붙였죠.

저도 개를 길러봐서 아주 잘 압니다. 오랫동안 데리고 있다가 묻어준, 이제는 딸아이가 그린 초상화 한 장으로 기억하는 개가 있는데요. 그 개를 키울 때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가방을 내려놓고, 안경과 모자를 멋고 침대에 눕는 거였습니다. 제가 집에 돌아오면 그 개는 반갑다고 5분 동안은 제 얼굴을 핥고 나서야 짖기를 멈췄기 때문이었는에요. 그때 보면 핥는 일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요. 그리고 밥을 주면, 이 세상에서 밥을 처음 먹어보는 것처럼 먹죠. 잠 잘 때도 보면, '아, 아까 주인이 왔을 때 꼬리 쳤던 게 좀 아쉬운데 어쩌지?' 그런 고민은 추호도 없어요. 그냥 잡니다. 공놀이 할 때는 그 공이 우주예요. 하나하나를 온전하게 즐기면서 집중하죠.

밀란 쿤데라도 똑같은 걸 느꼈는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카레닌이라는 개를 이야기하면서 '개들은 원형의 시간을 살고 있다. 행복은 원형의 시간 속에 있다'라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 직선의 시간 속에서는 행복을 알 수 없습니다. 길을 지나다가 평생 동안 찾던 그 사람을 만날지 모르는 일입니다. 어떻게 알겠습니까? 안다면 행복을 준비하겠죠. 이렇듯 직선의 시간은 행복을 정확히 알 수 없어요.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개들은 원형의 시간을 살아요. 그래서 늘 행복합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이런 문장이 나와요.

'카레닌은 집에서 깨어나는 시간은 순수한 행복이었다. 그는 천진난만하게도 아직도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진심으로 이에 즐거워했다.'

개들은 잘 때 죽은 듯 잡니다. 눈을 뜨면 해가 떠 있는 사실에 놀라요. 밥을 먹을 때에는 '세상에나! 나에게 밥이 있다니!'하고 먹습니다. 산책을 나가면 온 세상을 가진 듯 뛰어다녀요.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다시자요. 그리고 다시 눈을 뜨죠. '우와, 해가 떠 있어!' 다시 놀라는 겁니다 그 원형의 시간 속에서 행복을 보는 겁니다 순간에 집중하면서 사는 개 처럼 살자. 'Seiza the Moment, Carpe diem(순간을 잡아라, 현재를 즐겨라)'의 박웅현식 표현이자, 제 삶의 목표입니다.

Seiza the Moment, Carpe diem. 이 말은 '현재를 살아라, 순간의 쾌락을 즐겨라'가 아니라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132-134


한형조의 <붓다의 치명적 농담>을 보면 어느 선사에게 누가 묻습니다. 

"스님도 도를 닦고 있습니까?"

"닦고 있지."

"어떻게 하시는 데요?"

"베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에이, 그거야 아무나 하는것 아닙니까? 도 닦는 게 그런 거라면, 아무나 도를 닦고 있다고 하겠군요."

"그렇지 않아. 그들은 밥 먹을 때 밥은 안 먹고 이런저런 잡 생각을 하고 있고, 잠 잘 때 잠은 안 자고 이런 걱정에 시달리고 있지."

현재에 집중하라는 말입니다.  135


나이 마흔이면 이 정도는 살아야 하지 않아? 뭘 그렇게까지 하고 살아? 여기저기서 제 인생을 흔들었습니다.  139

저의 마흔은 그렇게 흔들림으로 가득 찼어요.  140


다른 답은 내 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의 인정, 현재에 집중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결국 이것은 자존과 연결됩니다.  140


완벽한 선택이란 없습니다. 옳은 선택은 없는 겁니다. 선택을 하고 옳게 만드는 과정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고민하지 말고 선택을 해봤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을 옳게 만드는 겁니다.  141


우린 순간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어떤 순간이 보배로운 순간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그 순간을 우리가 보배롭게 보면 됩니다.  143


<생각의 탄생>에 나온 말을 빌리자면 '세속적인 것들의 장엄함'을 깨달은 겁니다. '우리는 아이를 위해 빵에 버터를 바르고 이부자리를 펴는 것이 경이로운 일임을 잊어버린다'고 알랭 드 보통이 이야기 했던, 이불개는 것처럼 평범한 일이 소중해지기 시작한 겁니다. 장자의 '하늘 아래 가을의 작은 나뭇잎 이상 위대한 것은 없다'는 지혜의 말을 이해한 거예요. 이 세상에 아무리 위대한 것들이 많다고 해도 지금 내 눈앞에 나타난 이 가을 나뭇잎만 못 하다는 지혜를 얻은 겁니다.  144-145


Verweilee doch, du bist so schon! (머물러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145




6강 권위(權威) - 동의되지 않는 권위에 굴복하지 말고 불합리한 권위에 복종하지 말자


문턱증후군, 즉 그 문턱만 들어서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믿음에서 시작되는 잘못된 증상이죠.  153


동의되지 않은 권위에 대한 굴복.  156


한 기자가 비틀스 멤버들 중 폴 매카트니에게 질문했어요. "당신에게는 엄청난 유산이 있다. 그 유산에 주눅들지 않느냐?"라고요. 이 물음에 폴 매카트니의 답은 "무슨 이야기인지 잘 압니다. 나는 그래서 안정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매카트니라는 스타 입장에서도 그리고 '나'라는 입장에서도 매카트니는 자기 이름을 딴 별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대중적인 스타와 나를 분리시킬 필요가 있어요. 사람들은 그걸 잘 못하는데, 나는 나를 그렇게 놔두지 않습니다. 스타로서의 업적에 대해서는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때로는 감격합니다. 하지만 집으로 가면서 '난 내 이름을 딴 행성도 있지'라고 하지는 않죠. 난 여전히 리버풀에서 버스를 타고 다니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빅 이슈> 6월호 폴매카트니 인터뷰 중에서  158-159


먼저 검증을 하세요. 박웅현의 말이 얼마나 옳은지 보고, 옳은 부분은 좋아하되 그렇지 않은 부분은 반면교사로 삼으세요. 박웅현만이 아니라, 선배, 교수, 부모님 모두를 상대로 그렇게 하세요. 이게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160


광고회사 TBWA의 월드 와이드 CEO가 '장 마리드루'라는 사람이에요. 업계 사람들 모두가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전사 팀장 회의에서 잠깐 스피치를 했어요. 

"다른 문화를 접할 때 우리에겐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호기심과 존중, 그리고 윗사람이 될수록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재능을 사는 일입니다. 프랑스 속담에 '재능은 다른 사람들의 재능을 발견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죠."  162


사회는, 기득권 세력은 고분고분한 사람을 원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도발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될 테니까요. 때문에 권위를 보이면서 복종하고 따라오라고 무언의 협박을 하죠. 우리는 그런 가짜 권위들을 검증하는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우리를 무서워하게 해야 해요.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들을 무서워하진 않아요. 회장님에게도 건의할 수 있는 거예요.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요. 상대 눈치를 보는 가장 큰 이유는 돈을 주는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일 텐데, 우리는 공짜로 일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쪽의 시혜를 받는 게 아니란 말이죠. 정당하게 일을 하고,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 것이니 할 말은 해야 하는 겁니다.  163-164


권위는 우러나와야 하는 거예요. 내가 이야기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인격적으로 감화가 돼서 알아줘야 하는 거예요. 그게 권위입니다.  166




7강 소통(疎通) - 마음을 움직이는 말의 힘


개와 남자의 공통점

 - 털이 많다.

 - 먹이를 일일이 챙겨줘야 한다.

 - 시간 내서 놀아줘야 한다.

 - 복잡한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 버릇을 잘못 들이면 평생 고생한다.

남자가 개보다 편한 점

 - 돈을 번다.

 -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출입제한을 받지 않는다.

 - 약간의 난이도가 있는 심부름을 시킬 수 있다.

 - 혼자 두고 놀러 다녀도 상관 없다.

 - 생리적 욕구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가 남자보다 좋은 이유

 - 두 마리를 함께 키워도 뒤탈이 없다.

 - 강아지의 부모가 간섭하지 않는다.

 - 이유 없이 외박하고 돌아오와도 꼬리 치면서 반겨준다.


고양이와 여자의 공통점

 - 세수를 잘한다.

 - 배고프면 혼자 챙겨 먹는다.

 - 낮보다 밤을 더 좋아한다.

 - 열 받으면 할퀸다.

 - 하루에 열두 번 삐친다.

 - 변덕이 팥죽 끓듯 한다.

여자가 고양이보다 편한점

 - 밥을 할 줄 안다.

 - 데리고 다니면 재채기 하는 사람 없다.

 - 나의 분신을 만들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양이가 여자보다 좋은 이유

 - 목만 ㅆ다듬어 주면 행복해 한다.

 - 무섭고 징그러운 쥐를 잡아준다. 

 - 꼬리만 밟지 않으면 조용하다.

 - 여자는 종일 잔소리를 하지만 고양이는 종종 애교를 부려 심심하지 않다.

 - 처갓집 개도 날 무시하는데 고양이의 어미는 나를 무시하지 않는다.


다르다는 걸 인정하면 소통이 조금 쉬워집니다.  182-184


{인정(역지사지)하고 배려(문맥파악, 본질파악)하며, 이해할 수 있게 전달(생각의디자인, 표현의 디자인, 아름다움)하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바탕으로 한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은 이겁니다.

Sender -> Message -> Receiver

즉, 커뮤니케이션이란 전하는 사람이 던지고 싶은 메시지를 받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에요. 그러니 그냥 주는 게 아니라 리시버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 거죠. 그러니까 소통을 위해서는 화살표 방향이 바뀌어야 하는 거예요.

Sender <- Message <- Receiver  196


이것을 아주 극적으로 실천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예요. 프루스트는 대인공포증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한테 따돌림을 당할 지 모른다는 공포가 있어서, 본인이 대화할 때 집중했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머릿속에 있는 걸 끌어내라고 했대요.

그런데 이것은 소통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더 강하죠.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까 소통이 어려워집니다.

요즘 영화는 뭐가 재미있니? 어제 드라마는 어땠어? 그래? 그렇구나. 하고 맞장구쳐주는 노력이 필요해요.  197


말을 디자인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언어의 집을 지어줘야 해요.

아카데미 시상식을 볼 때 가장 큰 즐거움은 그들의 수상소감을 듣는 겁니다. 2012년 시상식에서는 작품상, 남우주연상, 감독상 등 다섯 개의 상을 탄 영화 <아티스트>가 단연 화제였죠. 1920년대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한 흑백 무성영화인 <아티스트>는 그 시절을 대표하는 감독 빌리 와일더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감독 미셸 하자나비시우스는 수상소감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세 사람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네요. 빌리 와일더, 빌리 와일더, 그리고 빌리 와일더에게요. 감사합니다."라고.

같은 자리에서 <철의 여인>으로 여우주연상을 탄 메릴 스트립도 "마지막에 이야기하면 음악에 묻힐 수 있으니 먼저 남편에게 감사하고 싶어요"라고 유머를 던졌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아직은 좀 뻔하죠? 꿈만 같고, 영광이고, 감사하고 말이죠.

오래 전에 영화 <타이타닉>이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었을 때, 함께 노미네이트 됐던 영화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였습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이 잭 니콜슨이었는데 마지막에 남우주연상으로 호명됐어요. 그때 잭 니콜슨이 수상을 위해 무대에 오르자마자 "조금 전까지 나는 침몰하는 줄 알았다"고 말해서 모두들 웃음을 터뜨리고 환호했던 기억이 납니다. 숀 펜이 <밀크>라는 영화로 상을 받았을 때도, 그 영화가 동성애자인 상원의원 이야기인데 로버트 드니로가 시상을 하면서 "<밀크>봤나요? 나는 그 영화를 보기 전까지 숀 펜이 이성애자인 줄 알았어요"라며 아주 위트 있게 이야기하죠. 객석의 모든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고요. 디자인된 말들은 이렇게 여러 사람을 즐겁게 해주기도 합니다.  203-204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먼저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해 말함과 동시에 어떤 문맥으로 해야 하는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는 거예요. 여기에 힘을 싣기 위해서 지혜롭게, 생각을 디자인을 해서 말하는 것이 필요하고요.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소통을 잘하고 싶으면 몇 가지 노력이 필요합니다. 역지사지, 문맥파악, 생각을 정리해서 말하는 습관, 스케치를 할 때 형태를 잡는 데생이 필요하듯 자기 생각을 데생해야 해요. 연습하고 말을 만들어보는 거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리해보고, 어떻게 하면 내 말이 설득력이 있을까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206-207


할리우드에는 '7 Words Rule'이라는 게 있습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시나리오를 가져오니까, 투자를 받고 싶으면 시나리오를 단 일곱 단어로 설명해보라는 건데, '결혼을 했는데 마누라가 조폭이네? 조폭 마누라' 이런 식으로 그림이 확 그려지도록 설명하라는 이야깁니다.

이 훈련을 한번 해보세요.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미국에서 대학원에 다닐 때 논문을 쓰기 전에 우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딱 한 줄로 정리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걸 세 개의 패러그래프로 써보고, 그걸 다시 챕터 별로 나눠서 논문을 만들죠. 예외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됩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게 일곱 단어로 정리되지 않는 건 아직 내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207


'맥킨지 룰'도 7 Words Rule과 비슷한데요. 만약에 내가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에 CEO가 탔는데 엘리베이터는 15초 후에 문이 열린다고 가정하고, 거기서 내 생각을 어떻게 말해서 CEO의 마음을 끌 것인지 생각해보라는 거죠. 예를 들어 "왜 지역별로 마케팅을 하십니까? 타깃별로 하십시오. 자세한 건 나중에 보고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 누가 궁금해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냥 둥글게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정리하는 습관을 기르고, 그걸 더 정리해서 증류해보세요. 거기에서 나오는 엑기스가 나의 진짜 생각이 되어줄 겁니다.  208




8강 인생(人生) - 급한 물에 떠내려가다 닿은 곳에 싹 틔우는 땅버들 씨앗처럼


인생은 자존, 본질, 고전, 견(見), 현재, 권위, 소통이라는 싱싱한 재료를 담아낼 아름다운 그릇입니다.  213


전인미답(前人未踏)-어떤 일 또는 수준에 아무도 손대거나 다다라 본 적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 위험한 나이 20대. 그리고 30대, 40대, 50대, 아마도 아니생은 젊음이건 아니건 누구에게나 전인미답이 아닐까요? 그래서 늘 위험하지만 또 한편으로 매 순간이 흥미진진한 것이 바로 인생일 겁니다.  214


전인미답의 길을 즐기기 위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들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실수에 휘둘리지 않는 겁니다. 실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실수를 못 견디고 좌절하지 마세요. 나만 그런게 아닙니다.{공원의 잔디는 내 자리만 듬성듬성해 보인다}  215


중국 명나라 때 묘협이라는 스님이 불자들에게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할 지에 대해 쓴 글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몸에 병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몸은 유기체인데, 바이러스가 들어오고 나가고 나이 먹으면서 노화가 오는데 어떻게 병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 병이 없는 상태를 자기의 기본값으로 잡아놔요. 병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자기가 정한대로 설정해놓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생은 마음대로 만질 수 있는 게 아니죠. 점잖은 어른들이 들으면 쓸데없이 젊은 사람들 패기 꺾는 이야기한다고 노여워할지 모르겠지만 먼저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으로 고백하는데 인생은 절대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습니다.  218


모든 인생은 의도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남들의 영웅담은 내 이야기가 될 수 없죠.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영웅담을 들어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영웅이 되고 싶어지죠. 그런데 그 영웅이 쓴 무기는 이미 없거나,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에요. 이순신은 물살을 보고 그것을 이용해 한산대첩에서 승리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이순신의 물살이 나타날까요? 인생은 똑같이 반복되지 않습니다. 모든 인생은 전인미답이에요. 인생에 공짜는 없어요. 하지만 어떤 인생이든 어떤 형태가 될지 모르지만 반드시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러니 이들처럼 내가 가진 것을 들여다보고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준비해야 하죠. 나만 가질 수 있는 무기 하나쯤 마련해놓는 것, 거기서 인생의 승부가 갈리는 겁니다.  224-225


"기필(期必)을 버려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살면서 늘 기필코 이루어내라는 말만 들어본 제게 기필을 버리라는 말은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요. 인생은 기필코 되는 게 아닙니다. 뭔가를 이루려 하지 말고 흘러가세요.

영화평론가 이동진 씨는 자신의 책 <밤은 책이다>에서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살고 싶고,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살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건 말 그대로 지혜입니다.  226


중간중간 말씀드렸듯 무엇이 본질적인 것인지, 고전이 왜 중요한지, 발견하는 것이 왜 필요한지를 생각하며 지혜롭게 하루하루를 쌓아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꽉 채워 살다가 돌아보면 펼쳐져 있는게 인생이지, 단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를 허술하게 보내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227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세 가지 팁

첫째, 인생에 공짜 없습니다.

불환인지불기지 환기무능야(不患人之不己知 患其無能也) <논어>에 나오는 말입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고, 내가 능력이 없음을 걱정하라는 뜻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기회는 분명히 옵니다. 믿으세요. 그러니까 한탄하지 말고 준비해놓으세요. 그러면 빛을 발할 때가 옵니다.

내가 준비만 잘하고 있다면 남들이 알아줍니다.  

둘째,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셋째, 인생에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정답으로 만들어가는 과정만 있을 뿐입니다.  228-234


선택하지 않은 답은 이미 내 답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맞다 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답은 여기 있다. 아니면 없다'가 아니라 '답은 여기 없다. 어떠면 저기에 있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235


여러분, 우리 되는 대로 삽시다. 되는 대로 살되, 인생에는 공짜가 없으니 본질적으로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살피고, 질 때 지더라도 언제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답이 정답이니 아무거나 선택하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해 현명한 판단을 내리면서, 그것을 옳게 만들면서 삽시다.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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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의 마지막 챕터를 하인리히(H. W. Heinrich)의 1:29:300법칙으로 시작한다. 한 번의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면 이미 그 전에 유사한 29번의 경미한 사고가 있게 마련이고, 그 주변에 또다시 300번 이상의 징휴가 나타난 바 있다는 내용이다.
일본 도쿄 대학의 히타무라 요타로 교수 또한 " 한 번의 대실패, 대형사고, 멸망으로 이르는 길은 300번의 징후를 담고 있다." 고 말한바 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징후를 읽지 못한다고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로마 제국의 역사로 이어진다.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 <로마제국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또한 당시 흥륭과 쇠망의 기로에 서 있던 대영제국에 역사의 교훈과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서였다. 

먼저 사건은 국면을 만든다. 새로운 국면은 무수히 많은 크고 작은 사건들 가운데 하나의 어떤 돌발적인 요소가 아니라 사건의 제곱, 혹은 사건의 돌연변이 속에서 새롭
게 타나난다. 
구조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국면들이 모여 새로운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미처 예기치 못한 국면의 돌발적 요소들이 돌출하여 한 켜 한 켜 쌓여 있던 지층들을 한 순간에 뒤엎으면서 새로운 구조를 형서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장기지속으로서의 역사이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 지지 않았다. 2차례의 포에니 전쟁으로 아프리카 전쟁으로 긴시간동안의 흐름에 의해 완성이 되었다. 그렇지만 외부가 잠잠해지면 내부가 시끄러워지는것.
민중파와 귀족파가 이념 대결을 시작하고, 스파르타쿠스를 주축으로 한 7만 노예읜 반란으로 혼란을 겪으며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 장군이 난을 제압하여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의 제1차 삼두정치가 기원전 60년에 시작이 된다. 
그러나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를 거쳐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를 거치면서 암살과 배신 그리고 횡포와 전쟁들로 시간이 흐른다.
그러다가 로마의 최전성기, 팍스로마나 시대가 시작되는데, 네르바를 시작으로 '5현제 시대'가 시작된다.
네르바(96~98년)는 2년 밖에 집권하지 못했으나 재정을 안정시켰고, 친위대의 전횡을 막는 업적을 세웠다.
트라야누스(98~117년)는 수도공사와 신항구 건설, 4대가도 정비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펼친다. 트라야누스 광장도 이때 완성하였다. 또한 정복사업으로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지를 정ㅂ고해 속주로 만들고 인도양까지 세를 넓혔다. 북쪽으로는 잉글랜드,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 서쪽으로는 대서양 연안,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제국의 판도를 만들었다.
하드리아누스(117~138년)는 관료조직정비 법률체계정리 국가 관리업무에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수시로 제국 전역을 순시하며 로마의 판도를 다졌고, 현재까지 전해지는 로마의 걸작들 대다수가 이때 만들어졌다.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년)는 황재가 되자 마자 자신의 전 재산을 국고에 헌납하고 법전 정비를 완료해 '팍스 로마나(Pax Rmana)'의 실현 근거를 마련했다 사실상의 로마 최고 전성기를 바로 이때였다. 
아우렐리우스(161~180년)는 스토아 철학의 신봉자로 철처한 금욕과 극기로 수도자적 삶을 산 황제이다. <명상록>은 스토아 철학의 정수이자 고대 로마 최고의 도덕독본이었다.

하지만 이후의 역사 다음황제 콤모두스는 국정보다는 빵과 서커스(검투)로 민중을 병들게 하였고, 페르티낙스 시대 부터는 명망의 길을 단계로 밟아 나갔다.
저자는 개략적인 왕들의 일들을 나열하는데, 이것들로 인해 로마는 점점 쇠퇴해가고 분열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반란과 침입들이 일어나고 결국은 로마가 나뉘고 서로마는 476년에 동로마는 15세기에 멸망하게 된다.

저자는 로마 제국은 인과론적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무게 때문에 내려앉은 것이라 표현한다.
흥륭의 극점과 쇠망의 개시는 공교롭게도 겹친다. 흘륭의 절정에 도달할 때, 동시에 쇠망의 징조도 마나탄다. 흥륭의 이유가 쇠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로마를 번영시킨 사건과 사건이, 그리고 로마를 흥하게 한 국면과 국면의 누적이, 장기지속의 과정 속에서 결국 로마라는 거대한 구조물을 내려 앉혔다는 역설적인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라면서 로마에 대해 많이 접할 기회가 있다. 학교에서 뿐아니라 책이나 영화, 그리고TV에서도 접한다. 유행이되고 있는 미드(미국드라마)에서도 로마에 대한 내용을 많이 다루고 있다. 롬이나 스파프타쿠스나...등등

이 책에서는 역사라는 주제로 로마의 흥륭과 쇠망의 과정을 통해서 서론에서 언급한것처럼 여러 연결고리들이 맞추어 지면서 흥하게 되고, 그로인해 여러고리들이 생겨나면서 쇠망의 길을 걷게 됨을 알리고 있다.

이처럼 우리역시 마찬가지로 그러한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흥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들을 한다. 하지만 유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이 놓치기에 이책의 내용은 생각을 자극해 주기에 좋은 책이라 생각된다.



...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를 읽고 많은 생각을 할 수있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정리를 해봄으로 다시금 좀더 깊이있게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생각들을 모두 글로 적지는 않았지만..
읽는 시간은 4시간정도 걸린것 같은데, 다시 글로 적어보는데는 10시간이 넘게 걸렸다. 
하지만 그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물론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기에 다른것들을 희생시키기는 했지만...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다.

지금의 생각으로는 이 책으로 확장의 시간을 가져나갈 생각이다..
물론 모두 하기에는 시간이 꽤나 많이 필요할 것이기에 다 할것이란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확장하여 내것으로 만드는 시간은 분명히 가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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