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될 경우에만 말해야 한다 ; 그리고 극복해낸 것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 - 다른 모든 것은 잡담이고 ‘문학’이며 교양의 부족이다. 내 저서들은 오직 나 자신이 극복해낸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 거기에는 다른 모든 것과 더불어 한때 나의 적이었던 나, 가장 나 자신과 똑같은 나, 아니 그뿐만 아니라 좀더 자랑스러운 표현이 허락된다면 가장 독자적인 존재인 ‘나’가 있다.  9


1장 혼합된 의견과 잠언들
철학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 만약 너희가 지금까지 삶의 최고 가치를 믿어왔지만 이제는 실망하게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면, 도대체 그것을 가장 헐값에 팔아치워야만 한다는 말인가?  23

공상가들에 반대해서 - 공상가는 자신 앞에서 진리를 부인하지만, 거짓말쟁이는 단지 다른 사람 앞에서만 진리를 부인한다.  25

경우에 따른 인식의 유해성 - 참된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탐구가 가져오는 효용성은 끊임없이 다양하고 새롭게 입증되고 있어서, 바로 그 효용성 때문에 개개의 탐구자는 좀더 섬세하며 드물게 나타나는 유해성 때문에 고통받지 않으면 안 된다. 화학자는 실험하면서 때로는 중독이 되고 어쩔 수 없이 화상을 입는다. - 화학자에게 타당성을 가지는 것은 우리의 문화 전체에 대해서도 타당성을 가진다. 덧붙여 말하면, 이러한 이유에서 화상을 입었을 경우를 대비해 문화는 항상 연고와 해독제를 마련해두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28-29

속된 사람의 필수품 - 속된 사람은 형이상학이라는 보라색 누더기의 추기경 외투나 터번을 착용하는 것이 가장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벗기를 원하지 않는다  ; 이러한 치장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훨씬 덜 우스꽝스러워 보일 것이다.  29

좋은 것은 삶을 유혹한다 - 모든 좋은 것들은 삶에 강한 자극제가 된다. 삶을 반박하는 것으로 씌어진 모든 좋은 책들마저도.  30

세 부류의 사상가들 - 광천 중에는 끓어오르는 광천, 흘러나오는 광천 그리고 뚝뚝 떨어지는 광천이 있다 ; 사상가도 이에 상응하는 세 부류가 있다.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물의 양에 따라 평가하고 전문가는 그 속에 있는 물이 아닌 것에 따라 평가한다.  30

무엇에 대해 침묵이 요구되는가 - 극도로 위험한 빙하와 빙해를 건너는 여행에 대해 설명하는 것처럼 자유정신 활동에 대해 설명한다면, 그 길을 가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마치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심함과 약한 무릎을 탓하기라도 한 것처럼 모욕감을 느낀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고 느끼는 곤란한 일들은 결코 우리 앞에서 언급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31

연극의 연속으로서의 박수 갈채 - 빛나는 눈과 호의적인 미소는 아주 훌륭한, 세상의 희극과 삶의 희극에 주어지는 일조으이 박수 갈채이다. -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야말로 다른 관객을 “박수 갈채를 보내주이소”라고 유혹하려는 희극 중의 희극이기도 하다.  32

지루함에 대한 용기 -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무료하다고 느낄 수 있는 용기를 지니지 않은 사람은, 그가 예술가이건 학자이건 최고의 정신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33

사상가의 가장 내적인 체험으로부터 - 인간에게 사물을 비인격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 ; 이는 사룸 속에서 그 사물만을 보고 인격을 보지 않는 것은 어렵다는 의미이다 ; 실로 인격을 형성하고 인격을 창조하는 충동의 시계 장치를 한순간만이라도 풀어놓는 일이 도대체 인간에게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사상과 관련된 경우조차도 그리고 그것이 추상적인 사상일지라도, 인간은 마치 그 사상이 자신들이 그것과 싸우고 관여하고 보호하고 돌봐주며 키워야만 하는 개인들이기나 한 것처럼 행동한다.  33

학문의 사막에서 - 때로는 사막을 여행하는 것과 다름없는 겸허하고 힘든 여정을 가는 학문적인 인간들에게 우리가 ‘철학적 체계’라고 부르는 저 찬란한 신기루가 나타난다 : 그것은 착각이라는 마력으로 모든 수수께끼의 해답을 보여주고 진정한 생명수인 가장 신선한 음료가 가까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그 지쳐 있는 사람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모든 학문적인 인내와 고통의 목표에 거의 입술이 닿을 정도로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물론 다른 본성을 가진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착각에 마치 마비된 것처럼 멈추어 서버리기도 한다 : 사막은 그들을 삼켜버리고 그들은 학문을 하기에는 이미 죽은 사람과 같다. 그러한 주관적인 위안을 이미 여러 번 체험했던 또 다른 본성을 가진 사람들은, 아마 그 어떤 샘에도 단 한 걸음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채 극도로 불쾌감을 느끼면서, 그 신기루 현상이 입 속에 남겨놓은 주체할 수 없는 갈증을 일으키는 짠맛을 저주하게 될 것이다.  38-39

헌신 - 너희는 도덕적 행위의 특징이 헌신이라고 생각하는가? - 그러나 숙고해서 행해지는 모든 행위에도, 즉 최선의 행위엣와 마찬가지로 최악의 행우에도 헌신이 존재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라.  43

윤리성을 철저하게 조사하는 사람들에 반대하여 - 한 인간이 자신의 윤리적 본성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강하게 만들어져 있는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가 생각하고 실천하면서 행할 수 있는 최선의 것과 최악의 것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을 체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43

사랑 속에 있는 기만 -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에서 오는 많은 것을 망각하기도 하고 그것을 의도적으로 생각에서 지워버리기도 한다. 즉 사람들은 과거로부터 미소 짓는 우리의 상이 우리를 기만해주고, 망상이 우리를 기분 좋게 해주기를 바란다. - 우리는 끊임없이 이렇게 자기를 기만하고 있다. - 그런데 ‘사랑 속에 잇는 자기 망각’과 ‘다른 인격 속에 있는 나의 자아의 출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칭송하는 너희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거울을 깨버리고 존경하는 인격 속에 자신을 창작해 넣어, 자신의 자아의 새로운 상을 즐기는 것과 같다. 비록 사람들은 그 상을 다른 인격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말이다. - 그리고 너희 유별난 자들은 이러한 과정 전체가 자기기만도 아니고 이기주의도 아니라고 말한다! - 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을 자신 앞에서 감추는 사람드로가 자신 전체를 자신 앞에서 감추는 사람들은 인식의 보고 속에서 도둑질을 한다는 점에서 똑같다고 생각한다 : 이것으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제가 어떤 잘못에 대하여 경고하는 것인지 명백해질 것이다.  43-44

자신의 허영심을 부인하는 사람에게 - 자신의 허영심을 부인하는 사람은 보통 자신을 경멸하지 않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그것에 대해서 눈 감아버릴 정도로 야만적인 허영심의 양상을 띠고 있다.  44

양심적인 사람들 - 자신의 양심에 따르는 것은, 자신의 오성에 따르는 것보다 더 편하다 : 왜냐하면 양심은 어떠한 실패에도 자기를 변호하고 기분을 전환해주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이성적인 사람은 항상 매우 적은 데 반하여 양심적인 사람은 매우 많다.  46

불쾌해지지 않기 위한 정반대의 방법 - 어떤 기질을 가진 사람은 말로 자신의 불만을 터뜨려버리는 것이 유익하다 : 말하면서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또 다른 ㄴ기질을 가진 사람은 말을 하면서 비로소 완전히 분노하게 된다 : 그러한 사람은 말할 어떤 것을 삼켜버리는 것이 유리하다 :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적이나 상상 앞에서 자제하는 것이 그들의 성격을 개선시키고 너무 날카롭고 불쾌해지는 것을 방지해주는 방법이다.  46

인간적인 ‘물자체’ - 가장 상처받기 쉬우면서도 가장 이겨내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허영심이다 : 게다가 그것의 힘은 상처받음으로써 자라나 결국에는 엄청나게 커질 수도 있다.  47

쾌감과 착각 - 어떤 사람은 자신의 본성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그의 친구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또 다른 사람은 의식적으로 개별적인 행위들을 통해 선행을 베푼다. 비록 전자가 더 고상한 것이라 할지라도, 거리낌 없는 양심과 쾌감, 즉 행위의 공적에 대한 쾌감과 연결되는 것은 후자일 뿐이다. - 그 쾌감은 우리가 자의적으로 우리의 선행과 악행을 행할 수 있다는 신념, 다시 말하면 착각에 근거한 것이다.  49

부정을 행하는 것은 어리석다 - 사람들에게 가했던 자기 자신의 부정은 낯선 사람이 그에게 가한 부정보다도 더 견디기 어렵다(이것은 도덕적 이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 행위자는 본래, 그가 양심의 가책에 좌우될 경우에도 또는 자신의 행위를 통해 사회를 자신에 반대하도록 무장시키고 자신을 고립시킨 것으로 통찰할 경우에도 항상 고통받는 자이다. 따라서 종교와 도덕이 명하는 것은 차치하고 자신의 내적인 행복 때문에라도, 즉 자신에 대한 만족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남에게 부정을 행하는 것을 주의해야 하며 나아가 부정한 행위를 당하는 것보다도 더 주의해야 한다 : 왜냐하면 후자는 거리낌 없는 양심, 복수를 향한 희망, 정의로운 사람들과 게다가 악인을 두려워하는 사회 전체의 동정과 박수의 기대라는 위로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부정을 자신에게 가해진 다른 사람의 부정으로 개조하여, 스스로 행한 일에 대한 변명으로 정당방위라는 비상권리를 보류해두는 불결한 자기 기만에 능통하다 :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부담을 더 가볍게 짊어지려고 한다.  49-50

위선적인 동정 - 사람들은 자신이 적개심에 대해서는 초연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을 경우, 동정을 가장하게 된다 : 그러나 그것은 보통 헛일이다. 이 사실을 알고서는 적개심이 더 커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52

너무 가까이하지 말 것 - 좋은 생각들이 너무 빨리 연속해서 떠오른다면, 그것은 좋은 생각에 단점이 된다 ; 생각들이 서로 전망을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 그래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와 저술가들은 평범한 것을 많이 사용했다.  83

가장 나쁜 독자들 - 가장 나쁜 독자들은 약탈하는 군인과 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 그들은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몇 가지는 꺼내고, 나머지는 더럽히고 엉클어버리며 전체를 비방한다.  91

훌륭한 저술가의 특징 - 훌륭한 저술가들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 그들은 경탄받는 것보다도 이해되는 것을 더 좋아하며 신랄하고 지나치게 예민한 독자를 위해서 글을 쓰지 않는다.  91

냉정한 책 - 훌륭한 사상가는 훌륭한 생각에 들어 있는 행복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독자를 기대한다 : 그래서 냉정하고 소박해 보이는 책도 올바른 안목을 가지고 보면 정신의 명랑함이라는 햇빛에 비춰져서 참다운 영혼의 위안으로 보일 수 있다.  92

정직한 책의 가치 - 정직한 책은, 그렇지 않다면 교활한 영리함이 가장 잘 은폐할 수도 있을 독자의 증오심과 적개심을 끌어내준다는 점에서는 적어도 독자를 정직하게 만든다. 인간에 대해서는 매우 소극적인 사람들이 책에 대해서는 마음대로 내버려둔다.  94-95

비평과 기쁨 - 타당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편파적이고 부당하기도 한 비평은 비평하는 사람에게는 큰 만족을 주는 것이어서 세상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비평하게 만드는 모든 작품과 모든 행위에 감사해야 할 정도이다 : 왜냐하면 그 비평 뒤에는 기쁨, 기지, 자기 찬미, 자긍심, 교훈, 개선책이라는 번쩍이는 옷자락이 끌려오기 때문이다. - 기쁨의 신은 그가 선을 창조한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 악과 중용을 창조했다.  96-97

글 쓰는 것과 승리를 원하는 것 - 글을 쓴다는 것은 항상 승리를 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단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도록 전달되어야만 할 자기 자신에 대한 극복을 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 그러나 그 무엇을 소화할 수 없을 경우에만, 나아가 그것이 이미 입에서 걸려버린 경우에만 글을 쓰는 소화불량증을 앓는 작가들도 있다 : 그들은 독자에게조차 무의식중에 노여움을 품은 채 불쾌한 기분을 털어놓고 폭력을 쓰려 한다. 즉 : 그들 역시 승리를 원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한 승리를 원한다.  98

‘훌륭한 책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 훌륭한 책들은 모두 세상에 나왔을 때 떫은맛을 낸다 : 그 책은 새로움이라는 결점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저자가 유명하고 그에 대해 많은 것들이 알려져 있을 경우에는 살아 있는 저자는 그 책에 해를 미치게 된다 :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저자와 그의 작품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 속에 영혼, 달콤함, 금빛 광채로 들어 있는 것은 커져가는 존경과 과거의 존경 그리고 마지막에는 전해 내려오는 존경에 의해 다듬어져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비로소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만 하고 많은 거미들이 그물을 쳐놓아야만 한다. 훌륭한 독자는 책을 점점 훌륭하게 만들고, 훌륭한 반박자는 책의 문제를 해결해준다.  98

표지에 오른 이름 - 저자의 이름이 책에 오르는 것은 오늘날에는 관례이며 거의 의무이기도 하다 ; 그러나 이것은 책의 효과를 감소시키는 주원인이다. 즉 만약 책이 훌륭하다면, 그 책은 인격보다 그리고 그의 핵심 사상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다 ; 그러나 표지를 통해 저자가 알려지게 되면 그 핵심 사상은 곧바로 독자에 의해 개인적인 것, 아니 가장 개인적인 것으로 희석되고, 그럼으로써 책의 목적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더 이상 개인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으려는 지성의 명예심이다.  99-100

애착이 있음과 없음 - 모든 좋은 책은 특정한 독자와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위해 씌어진 것이며, 바로 그 때문에 다른 모든 대다수의 독자들에게는 좋게 여겨지지 않는다 : 따라서 좋은 책의 명성은 좁은 토대에 기초하여 서서히 쌓아질 수 있을 뿐이다. 평범한 책과 저급한 책은 많은 사람의 마음에 들려고 하며 또 많은 사람의 마음에드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평번하고 저급한 것이다.  100

비판하는 사람들의 편에서 - 곤충들은 악의에서가 아니라 그들도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물게 된다 : 비판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 그들은 우리의 피를 원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고통을 원하지는 않는다.  102

격언과 성과 - 충분한 경험을 쌓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격언이 그들에게 자신들의 소박한 진리를 확실히 이해하게 해주면, 항상 그 격언은 진부하고 널리 알려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는 격언의 창시자를 마치 그가 모든 사람의 공동 재산을 훔치려 한 것처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 그들은 인위적인 어설픈 진리에서 기쁨을 느끼고 이 사실을 작가에게 인식시키려 한다. 작가는 그러한 눈짓의 의미를 평가하여 그것에게 쉽게 자신이 어떤 점에서 성공하고 실패했는지 알아차리게 된다.  103

자신을 위해서 글을 쓴다 - 이성적인 작가는 자신의 후세만을 위해 글을 쓰지 어떤 다른 후세를 위해 글을 쓰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신의 노년을 위해, 즉 자신에게서 기쁨을 느끼기 위하여 글을 쓴다.   103

예술 작품으로서의 예술에 반대해서 - 예술은 무엇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삶을 미화해야 하고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참아낼 수 있고 가능하다면 즐거운 존재로 만들어주어야 한다 : 이러한 과제에 주목하면서 예술은 완화시키는 작용을 하고 우리의 감정을 억누르게 하며, 교제의 형시들을 창조하게 할 뿐만 아니라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예의범정, 순수함, 정중함 그리고 때에 맞는 웅벼노가 침무그이 법칙에 구속받게 한다. 따라서 예술은, 어떠한 노력을 하더라도 인간 본성의 기원에 따라 되풀이해서 솟아 나오게 되는 저 고통스러운 것, 끔찍한 것, 혐오스러운 것과 같은 저 모든 추악한 것을 은폐하거나 새로 해석해야 한다 : 즉 예술은 정열과 정신적 고통과 불아느이 관점에서 꾸려나가야 하고, 피할 수 없거나 극복할 수 없는 추악한 것 속에서 의미 있는 것을 투명하게 비추어주어야 한다. 이 위대한, 아니 너무나 위대한 사명을 따르면 이른바 원래의 예술, 즉 예술 작품으로서의 예술은 하나의 부속물일 뿐이다.  113

교육은 왜곡하는 것이다 - 모든 교육 제도에 있는 이상한 불안정성 때문에 오늘날 어른들은 모두 자신의 유일한 교육자는 우연이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 교육 방법과 의도의 변동성은, 오늘날 가장 오래되고 새로운 문화의 힘들이 마치 어수선한 대중 집회에서 그러한 것처럼 이해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들리기를 원하며,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목소리와 외침을 통하여 자신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거나 혹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불쌍한 교사와 교육자들은 먼저 이러한 어리석은 소리들에 마비되어 버리고 그 다음에는 침묵을 지키며 마침내 무감각해져서 모든 것을 잠자코 참아내게 되며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학생들에게도 모든 것을 참아내게 한다. 교사 자신이 교육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들이 교육할 수 있겠는가? 그들 자신이 꼿꼿이 자라난 힘있고 싱싱한 나무줄기가 아닌데 그들과 연결되는 자가 어떻게 휘어지고 구부러지지 않을 수 없으며 마침내 왜곡되고 기형적인 모습이 되지 않을 수 없겠는가.  118-119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문화의 병사는 되지 말 것 - 사람들이 마지막에, 제일 마지막에 배우게 되는 사실은 젊은 시절에는 어떤 것을 알지 못해서 아주 많은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 즉 첫째 훌륭한 일을 할 것, 둘째 그것이 어디서 그리고 어떤 이름으로 발견된다 하더라도 훌륭한 일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 : 또한 모든 불량하고 평범한 것과는 싸우지 말고 곧 길을 비켜 가는 것 그리고 어떤 일의 이득에 대해 의심부터 하는 것 - 이러한 의심은 숙련된 취향이 있는 사람에게는 빨리 생긴다 - 은 그 일에 반대하는 논거로서 그리고 그 일을 완전히 회피하려는 동기로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 물론 그러한 일에서 오류를 범하게 될 위험과 접근하기 어려운 이득은 곧 불량하고 불완전한 것이라고 혼동하게 될 위험이 몇 번은 있을 것이다. 더 좋은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만 문화의 병사로서 세상의 나쁜 일들의 해결에 몰두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문화의 생산 계층과 성직자 계층이 무장을 하고 나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직업과 가정의 평화를 주의와 경계와 악몽을 통해 음산한 불안감으로 바꾸어놓는다면 그 계층은 파멸하고 말 것이다.  120

고대 세계와 기쁨 - 고대 세계의 사람들은 더 많이 기뻐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반면 우리는 덜 우울해지는 방ㅇ법을 알고 있다 ; 그들은 예민한 감각과 풍부한 통찰력으로 기쁨을 느끼고 축제를 누릴 새로운 동기를 발견해냈다 : 반면에 우리는 고통을 받지 않는 것과 불쾌감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에 주목하는 과제를 해결하는데만 정신을 몰두하고 있다. 고대인들은 고통스러운 삶에 관해서는 잊어버리거나 어떻게든 그 감정을 즐거운 것으로 돌려놓으려고 노력했다 : 그래서 그들은 그 속에서 고통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려고 애썼던 반면 우리는 오히려 고통의 원인을 해결하고 전체적으로 고통을 예방하는 쪽으로 행동한다. - 우리는 아마도 후세의 사람들이 다시 기쁨의 신전을 세우도록 기초를 닦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123

존재에 대한 차후의 변호 - 착오와 환상으로 세상에 나오긴 했지만 진리가 되어버린 많은 사상들이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차후에 그 사상들에 참된 기초를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124

유행의 원천과 이득 - 자신의 형식에 대한 개개인의 확실한 자기 만족은 다른 사람의 모방심을 자극하고 점차 다수의 사람들의 형식, 즉 유행을 창조하게 된다 : 이 다수의 사람들은 유행을 통해서 그 형식에 대해 매우 유쾌한 자기 만족감에 젖기를 원하며 또 실제로 그러한 즐거움을 얻게 된다. - 누구든지 불안을 느끼고 소심하게 자신을 은폐하고 싶은 이유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러한 이유로 인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와 선의의 4분의 3이 못쓰게 되고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는 유행에 감사해야만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유행이 이 4분의 3을 해방시켜, 서로 그 유행의 규칙에 매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 확신을 갖게 하고 서로에게 명랑한 친절을 베풀도록 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법칙이라 하더라도 다수의 사람들이 구속되어 있는 한, 그것은 마음의 자유와 안정을 준다.  131

자유로운 정신 - 만약 자유정신이라는 이름이, 자신의 어깨 위에 세상의 질투와 모욕이라는 짐을 일부분 짊어짐으로써 나름대로 자유정신이라는 이름을 욕설로 붙이고 다니는 부류의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중 누가 감히 자유정신으로 불리고자 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진지하게 (거만하거나 관대한 반항심을 가지지 않고) ‘자유로운 정신’ 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를 향한 경향을 우리 정신의 가장 강한 충동으로서 느끼기 때문이며, 또한 소극적이고 거의 경멸적인 표현을 쓰자면, 속박되고 뿌리를 깊이 내린 지성인들과는 반대로, 우리는 우리의 이상을 대부분 정신적인 유목 생활 속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131-132

진부한 것을 발견하는 사람들 - 진부한 것들과는 너무 거리가 먼 치밀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종종 모든 종류의 우회로와 오솔길을 지나온 후 그러한 진부한 것을 발견하고 크게 기뻐하며 치밀하지 않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133

어디로 여행해야 할 것인가 - 직접적인 자기 관찰도 자신을 알기에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 우리에게는 역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과거란 수많은 물결 속에서 우리에게 계속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 우리 자신은 이 흐름에 대하여 매 순간 느끼는 존재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 이 경우에도 역시, 만약 우리가 겉으로 보아 우리의 가장 고유하고 개인적인 본질로 보이는 흐름 속으로 내려가려고 한다면,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들여놓지 못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격언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 이것은 차츰 진부한 것으로 남아 있는 지혜이다 : 또 욕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역사적 시기의 잔해들을 찾아야만 하며, 늙은 헤로도토스가 여행한 바와 같이 우리는 여러 국가들을 - 이 국가들은 그 위에 우리가 설 수 있는 견고해진 오래된 문화 단계에 있다 - 즉 거기에서는 사람들이 유럽의 옷을 벗어버렸거나 아직 한 번도 입은 적이 없는 이른바 미개한 그리고 반쯤 미개한 민족을 향해 여행해야 한다는 것도 그러한 지혜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곳에서 저곳으로 몇천 마일을 걸어갈 필요가 없는 좀더 세련된 여행 기술과 여행 목표도 있다. 아마 지난 3백 년의 문화는 그 문화의 모든 색채와 굴절을 간직한 채 우리 가까이에서 아직도 살고 있음이 거의 확실하다 : 그것들은 발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 문화의 단층들은 여러 가족들 속에, 아니 개개인 속에 아름답고 선명하게 차곡차곡 쌓여 있다 : 물론 다른 곳에는 좀더 파악하기 어려운 암석 단층도 있을 것이다. 분명 외딴 지역과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에 둘러싸인 공동체속에는 훨씬 더 오래된 감정의 표본이 더 쉽게 보존될 수 있고 또 여기서 그것들을 찾아내야만 한다 : 예를 들어 인간이 피폐해지고 깃털이 뽑혀 세상에 나오게 되는 베를린에서는 아마 그러한 것을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여행 기술의 오랜 훈련을 거친 뒤 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Argos)가 된 사람은 마침내 자신의 이오(Io) - 에고(ego)를 의미한다 - 를 어느 곳에나 동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와 그리스, 비잔틴과 로마, 프랑스와 독일에서, 민족 이동의 시기와 정착기에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대에서, 고향과 타향에서, 나아가 바다, 숲, 식물과 산 속에서 생성하고 변화하는 에고의 모험의 여행 자취를 다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이렇게 자기 인식은 과거의 모든 것에 관한 총체적 인식이 되는 것이다 ; 여기서는 암시만이 가능한 다른 고찰 관계에 따르자면, 가장 자유롭고 가장 멀리 내다보는 정신의 자기 규저오가 자기 교육은 언젠가는 미래의 모든 인간적인 것에 관한 총체적인 규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41-143

여행자와 그 등급 - 사람들은 여행자를 다섯 등급으로 구분한다 : 가장 낮은 등급의 여행자는 여행하면서 오히려 관찰당하는 사람들이다. - 그들은 여행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며 동시에 눈먼 자들이다 ; 다음 등급의 여행자는 실제로 스스로 세상을 관찰하는 사람들이다 ; 세 번 째 등그브이 여행자는 관찰한 결과에서 그 무엇을 체험하는 사람들이다 ; 그 다음 등급의 여행자는 체험한 것을 자신 속에 가지고 살며 그것을 지속적으로 지니고 있다 ; 끝으로 최고의 능력을 가진 몇몇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관찰한 모든 것을 체험하고 동화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 그것을 여러 가지 행위와 작업 속에서 기필코 다시 되살려나가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 여행자에 대한 이 다섯 부류에 따라 대체로 모든 사람들은 삶의 모든 여정을 지나간다. 가장 낮은 등급의 여행자는 순전히 수동적인 사람들이고, 가장 높은 등급의 여행자는 남겨져 있는 내면적 과정들을 아낌없이 발휘해나가는 사람들이다.  149-150

깊이 있는 사람들 - 깊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교제할 때, 자신이 희극배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늘 먼저 겉모습을 가장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151

자만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것 - 모르는 사람이나 어느 정도만 아는 사람과 대화할 때 선별된 생각만을 말하는 것과 자신의 유명한 지인 관계, 중요한 체험과 여행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그가 긍지를 가잔 사람이 아니라는, 즉 적어도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표시이다. 자만심은 긍지를 가진 사람이 쓰는 겸양의 가면이다.  154

좋은 우정 - 좋은 우정은 상대방을 지극히 그리고 자신보다도 더 존중하고,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상대방을 사랑하는 경우에 성립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쉽게 교제하기 위하여 친밀성이라는 부드러운 겉모습과 솜털을 덧붙이는 법을 알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실제적이고 진정한 친밀성과 나와 네가 혼동되지 않도록 현명하게 유지해나갈 경우에만 성립한다.  154-155

정직함 속의 오산 - 우리가 지금까지 침묵해온 사실들은 때때로 우리가 최근에 사귄 친구들이 먼저 알게 된다 : 이때 우리는 어리석게도 이렇게 신뢰를 증명하는 것이 그들을 단단하게 붙들어 맬 수 있는 가장 강한 사슬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말한 것이 가져올 희생을 충분히 강하게 느낄 만큼 우리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배반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우리의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고 만다 : 그래서 아마 우리는 오랜 친구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158

너무 이르지 않게 - 너무 빨리 날카로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와 동시에 너무 가늘어져버리니까.  162

영원한 어린아이 - 우리 근시안들은 동화와 놀이는 유년 시절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마치 우리가 삶의 어떤 시기에는 동화와 놀이 없이 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물론 우리는 그것을 다르게 부르고 다르게 느끼게 되지만 바로 이 점이 그것을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 왜냐하면 어린아이 역시 놀이를 자신의 일로, 그리고 동화를 자신의 진리로 느끼기 때문이다. 짧은 삶이 우리로 하여금 - 마치 각 연령이 새로운 그 무엇을 가져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 지나치게 꼼꼼하게 연령을 구분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어떤 시인이 정말 동화와 노링 없이 살아가는 2백 살의 인간을 그려 보여주지 않을까.  163

때때로 - 그는 도시 성문 안쪽에 앉아 그곳을 지나는 사람에게 바로 이것이 도시의 성문이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은, 그것을 사실이지만 감사를 받고 싶다면 너무 당연한 것을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오, 나는 감사의 말을 원하지 않는다 ; 그러나 때때로 당연한 것을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당연한 것을 유지하는 것도 매우 유쾌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172

부의 위험 -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살마만이 소유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유는 공적으로 위험한 것이 된다. 즉, 소유가 그에게 보장할 수 있는 한가한 시간을 사용할 줄 모르는 소유자는 항상 소유하기 위해 나아갈 것이다 : 이 노력이 그의 즐거움이고, 권태와의 싸움에서의 그의 전략이다. 그래서 정신적인 사람에게 충분할 만큼의 적당한 소유에서 마침내 진정한 부, 더구나 정신적인 비자립성과 빈곤의 찬란한 결과로서 부가 생겨난다. 이제 부는 그의 궁색한 혈통에서 기대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부는 이제 교양과 예술로 가면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 즉 이제 가면을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는 항상 교양을 부러워하고 가면 속에서 가면을 보지 못하는 가난하고 교양이 없는 사람들의 질투심을 자극한다. - 그리고 서서히 사회적 변혁을 준비한다 : 왜냐하면 이른바 ‘문화의 향수’ 속에서 금도금된 저속함과 기만적인 부풀리기 양상은 ‘중요한 것은 오직 돈뿐이다’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물론 돈도 약간은 중요하지만, 정신이 훨씬 더 중요하다.  178

아테네로 향하는 올빼미 - 거대한 국가의 정부는 국민을 두려움과 복종 속에서 자신에게 구속해둘 수 있는 두 가지 수단을 장악하고 있다 : 비교적 조잡한 수단은 군대이며 좀더 세련된 수단은 학교이다. 양쪽 모두가 평범하고 빈약한 재능의 소유자인 활동적이고 건장한 남성들에게는 특유한 것에 불과하지만, 정부는 전자의 도움으로 상류층 국민의 명예욕과 하류층 국민의 힘을 그들 편으로 끌어당긴다 : 그리고 후자의 수단으로는 재능 있는 가난한 자들, 즉 정신적으로 요구하는 바가 많은 중산층의 사람들을 그들 편으로 끌어들인다. 정부는 특히 각 수준의 교사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위’를 우러러보는 정신적인 신하들로 만들어버린다 : 또한 사림학교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사교육을 철저하게 방해함으로써 매우 현저한 수에 달하는 교직을 마음대로 할 힘을 확보해간다. 이제는 만족할 수 있는 자리보다 분명 다섯 배는 많은 수의 굶주리고 굴욕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교직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이 직위는 자신들 편의 사람만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부양하기만 하면 된다 : 그러면 그들 속에는 승진을 바라는 열병 같은 갈망이 유지되어 그들을 정부의 의도에 더 긴밀하게 묶어두게 된다. 왜냐하면 적당한 불만감을 가지게 해두는 것은 용기의 어머니이자 자유로운 생각과 긍지의 할머니인 만족을 주는 것보다 항상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울타리 속에 가두어진 교사 계층을 매개로 하여, 이제 그 나라의 모든 청년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국가에 유용하고 합목적적으로 분류된 특정한 교육 수준까지 끌어올려진다 : 그러나 특히 국가에 의하여 승인되고 보증된 삶의 방향만이 곧 사회적인 우대를 가져온다는 생각이 모든 계층의 미숙하고 야심만만한 사람들에게 거의 보이지 않게 전염되어 간다. 국가 시험과 국가 자격 칭호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매우 광범위해서, 상업이나 수공업으로 성공하여 독립적이었던 사람들까지도, 자신들의 지위 역시 위계와 훈장이 너그럽게 수여됨으로써 위에서 인정받고 승인될 때까지는, 즉 ‘사람들에게 내보일 수’ 있게 되기까지는 가슴속에 불만의 가실르 가진 채 살아가야 할 정도이다. 마지막으로 국가는 국가에 속하는 수많은 관직과 영리직의 임명을, 이 문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국립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우수함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의우와 결부시킨다 : 사회에서의 명예. 자신을 위한 양식, 가족의 영위, 위로부터의 보호, 공동으로 교육을 받은 자들의 동질감, - 이 모든 것이 모든 청년이 달려들 희망의 그물을 만드는 것이다 : 도대체 어디서 그들에게 불신감이 생겨나겠는가! 몇 세기가 지나면 결국 모든 사람에게 몇 년 동안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관습과 전제가 되어버리고, 사람들은 그것에 맞추어 삶의 계획을 설계한다. 이렇게 국가는 학교와 군대, 즉 재능과 명예욕과 힘을 여러 가지 이익에 의하여 서로서로 짜맞추는 장인 기술을 발휘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더 높은 재능을 가진 자와 교양인들을 더 유리한 조건에 의해 군대로 끌어들여 기꺼이 복종하는 군인 정신으로 가득 채운다 : 그 겨로가 그는 아마 언제까지나 국기에 맹세하면서 자신의 재능으로 국각에 새로운 그리고 더 빛나는 명성르 가져오게 될 것이다. - 그러고 나면 거대한 전쟁을 위한 기회 외에는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 기회를 위해 직무상으로, 즉 아주 순수하게 신무노가 거랫 그리고 외교관들을 지원해준다 : 왜냐하면 즉, ‘국민’으로서, 아니 군인 민족으로서 전쟁 시에는 항상 떳떳한 양심을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군인 민족을 위해서 그러한 양심을 먼저 만들어줄 필요도 없겎지만 말이다.  182-184

주권 - 사람들은 나쁜 것도 그것이 마음에 들기만 하면 존경하고 편을 든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호의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이것이 크건 작건 주권이라는 것의 특징이다.  190

여러 의견들에 대한 마지막 의견 - 자신의 의견을 감추거나 그 의견 뒤에 숨어버리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의 이치를 모르거나, 아니면 무모함을 섬기는 경건한 수도회에 속하는 자이다.  193

칭찬을 받은 자에게 - 사람들이 너를 칭찬하는 한, 항상 너는 자신의 궤도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궤도 위에 있다고 믿어라.  193

결코 헛일이 아닌 - 네가 진리의 산을 오르는 것은 결코 헛일이 아니다 : 그것은 네가 오늘 더 높이 올라가거나, 아니면 내일 훨씬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기 위해 힘을 단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99

가능하면 편이 없이 사는 것 - 추종자가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 사람들은 추종자가 추종자이기를 그만두었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202

너무 비싸게 사지 말 것 - 너무 비싸게 산 물건은 역시 대체로 좋지 않게 사용된다. 왜냐하면 물건에 대한 애착이 없이, 씁쓸한 기억과 함께 사용하기 때문이다. - 이렇게 사람들은 이중으로 손해를 보게 된다.  210

창조자와 즐기는 자 - 즐기는 자는 누구나 나무에서 중요한 것은 열매라고 생각한다 ; 그런데 나무에서 중요한 것은 씨이다. - 이것이 모든 창조자와 즐기는 자 사이의 차이다.  213



2장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

현세의 무기력함과 주요 원인 - 주위를 둘러보면 평생 동안 계란을 먹어왔지만 길쭉한 계란이 가장 맛있다는 것, 뇌우가 아랫배에 효력이 있다는 것, 차고 맑은 공기 속에서 좋은 냄새는 가장 넓게 퍼진다는 것, 우리의 미각은 입 안의 여러 부위에서 다르다는 것, 식사 때 많이 이야기하거나 듣는 것이 위에 나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보게 된다. 관찰력의 결여를 나타내는 이러한 실례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하여 전적으로 잘못 간주되고, 거의 관찰되지도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은 일이란 말인가? - 개개인의 거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 무기력함은 이러한 결여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잘 생각해보라 : 생활 양식의 설정, 하루 일의 할당, 교제를 위한 시간과 선택, 직업과 여가, 명령과 복종, 자연과 예술에 대한 감각, 식사, 수면, 반성적 사색에서 무엇이 우리에게 바람직하며 무엇이 우리에게 해로운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 가장 사소한 것과 가장 일상적인 것에 무지하고 예리한 안목이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에게 이 땅을 ‘재앙의 초원’으로 만드는 것이다. 어디서나 그런 것처럼 여기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비이성이다라고 말하지 말라 :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 이성은 충분히, 지나치게 충분히 존재하고 있지만 그 이성은 잘못된 방향으로 돌려져 사소하고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에서 인위적으로 빗나가버린 것이라고, 신부와 교사들 그리고 조잡하건 섬세하건 간에 모든 부류의 이상주의자들의 미묘한 지배욕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중요한 것은 전혀 다른 그 무엇이라고 설득하고 있다 : 즉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구제, 국가에의 봉사, 학문의 발전, 또는 전 인류에 봉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명망과 재산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며, 반면에 개개인의 욕구, 24시간이라는 생활에서 대두되는 크고 작은 필요 등은 경멸스럽고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 이미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편에 서서 인간적인 것을 교만하게 등한시하는 것에 전력을 다해 저항했다. 그리고 배려하고 반성해야 할 모든 사항의 참된 범위와 본질에 대해 호메로스의 말을 빌려 경고하기를 좋아했다 : 소크라테스는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집안에서 부딪히는 일’ 이것이야말로 그리고 이것만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223-224

어떠한 새로운 사슬도 느끼지 않는 것 - 우리가 그 어떤 것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한, 우리는 자신을 독립적이라고 간주한다 : 이것은 인간이 얼마나 교만하고 지배욕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오류추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일상적으로 독립해서 살고 있고, 만약 그가 예외적으로 그 독립성을 잃게 되면 그 반대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전제에서 보면, 인간은 구속당하자마자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 반대가 진리라면 어떻게 될까? : 즉 인간은 항상 여러 가지 구속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오랜 습관으로 인해 사슬의 무게를 더 이상 느끼지 않을 때에만 자신을 자유롭다고 간주한다면 어떻게 될까? 다만 새로운 사슬에서만 인간은 여전히 구속감을 느낀다 : - 그렇다면 ‘의지의 자유’란 본래, 어떠한 새로운 사슬도 느끼지 않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228

근본 오류 - 인간이 어떤 정신적 쾌감이나 불쾌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환상 중 어느 하나에 지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 중 하나는, 특정한 사실들과 특정한 감정의 동일성을 믿어야만 한다 : 그러면 그는 현재의 상태를 과거의 상태와 비교함으로써, 또 그것들을 동일시하거나 차별함으로써(모든 기억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정신적인 쾌감이나 불쾌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 또 다른 하나는, 의지의 자유를 믿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이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것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도 있었는데”라고 생각하면 거기에서 마찬가지로 쾌감이나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 모든 정신적 쾌감과 불쾌감에 작용하고 있는 이러한 오류 없이, 인간적 본질은 결코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230

비도덕주의자들 - 도덕주의자들은 오늘날 비도덕주의자로 비난받는 것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도덕을 해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부하려는 사람은 먼저 죽여야만 한다 :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다지 더 잘 알고, 더 잘 판단하고, 더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지 세상 모두를 해루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여전히 모든 도덕주의자들이 그 모든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 그들은 도덕주의자를 도덕의 설교자와 혼동하고 있다. 과거의 도덕주의자들은 도덕을 충분히 해부해보지도 않고 설교하는 일이 너무나 흔했다 : 이 때문에 이러한 혼동뿐만 아니라 현재의 도덕주의자들에 대한 유쾌하지 않은 생각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237-238

균형의 원리 - 도둑과 도둑으로부터 지켜주겠다고 사회에 약속하는 권력잔느 아마 근본적으로는 매우 비슷한 존재일 것이다. 단 후자는 전자가 획득하는 것과는 다르게 자신의 이익을 획득할 뿐이다 : 즉 사회가 그에게 바치는 정기적인 세금에 의해서이지 약탈에 의해 이익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랜 동안 동일한 인물과 다름없는 무역상과 해적 사이의 관계와 같다 : 그들은 이쪽 역할이 불리하게 보이면 다른 쪽 역할을 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인 도덕은 모두 해적 도덕이 영리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 가능한 한 싸게 사서 - 사업비 이외에는 전혀 경비를 들이지 않고 - 가능한 한 비싸게 팔려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 저 권력자는 도둑과는 달리 균형을 유지할 것을 약속한다는 것이다 ; 약자들은 그 속에서 살아나갈 하나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왜냐하면 약자들은 균형을 유지하는 세력과 함께 일하거나 아니면 균형을 유지하는 자에게 종속되거나 (보수를 받는 대신 그에게 봉사한다)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자의 방법이 즐겨 선택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결국 두 가지 위험한 존재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즉 약자는 권력자에 의해서, 또 권력자는 이익의 관점에 의해서 ; 즉 권력자는 종속된 자들을 자비롭게 혹은 적당히 다루어서 그들이 자신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배자까지도 부양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실제로 이 경우는 여전히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대해질 수도 있지만,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파멸과 비교해보면 사람들은 이러한 상태에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다. - 공동사회란 처음에는 위험한 세력들과 균형을 이루기 위한 약자들의 조직이었다. 만약 그들이 적대 세력을 한 번에 파멸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진다면, 이 우월한 힘을 유지하기 위한 조직이 바람직 할 것이다 : 이러한 일은 개개의 강력한 가해자가 문제가 되었을 경우에 분명히 시도된다. 그러나 그 개개인이 족장이거나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다면, 신속하고 결정적인 파멸의 가능성이 희박할 것이므로 지속적인 불화를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 그러나 이것은 공동사회에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를 가져오게 된다. 왜냐하면 사회는 그 상태 때문에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반드시 규칙적으로 준비해야 할 시간을 잃게 되며, 모든 노동에 따른 수확이 매순간 위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공동사회는 방어와 공격을 위한 자신들의 힘을 위협적인 이웃의 힘과 같은 수준으로 올려놓고, 이제 저울 위에는 똑같은 쇳덩이가 올라가 있으니 서로 좋은 친구가 되어보지 않겠는가라는 입장을 이해시키려 한다. - 따라서 균형이라는 것은 가장 오래된 법 이론과 도덕론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 된다 ; 정의의 토대가 되는 것이 균형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야만적인 시대에 이 이론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말했을 경우, 이것은 이미 달성되어 있는 균형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그 균형을 보복에 의해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 그 결과 한쪽이 다른 쪽에 대하여 해를 가한다 하더라도, 다른 쪽은 더 이상 맹목적인 분노를 지닌 복수를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같은 형벌에 의해 흐트러진 세력 관계의 균형이 회복되는 것이다 : 왜냐하면 이러한 원시 상태에서는 한 눈과 한 팔이 더 많다는 것은 한 조각의 힘과 무게가 더 많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공동사회의 내부에서는 위반 행위, 즉 균형의 원리를 파괴하는 행위에는 수치와 형벌이 가해진다 : 수치는 부당한 가해로 이익을 얻은 가해자에게 부여되는 무게이며, 과거의 이익을 상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압도하는 손실을 수치로 다시 받게 하는 것이다. 형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 모든 범죄자가 자신에게 허락한 우월한 힘에 훨씬 더 우월한 힘을, 즉 폭행에 대해서는 투옥을, 도둑질에 대해서는 배상금과 벌금을 과하는 것이다. 이렇게 범죄자는 자신의 행동 때문에 공동 사회에서, 또 사회의 도덕적 이득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 이 때문에 형벌은 보복일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 자연 상태의 가혹함에 관한 그 무엇인 것이다 ; 형벌은 바로 이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239-241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에 대한 해석 -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은, 어느 누구든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관점에서 나쁜 상태에 처할 수 있다는 것과 걱정이나 후회나 고통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유래한다 : 즉 남에겍 닥쳐온 불행이 그를 자신과 똑같은 위치에 두게 되고 질투를 가라앉히기 때문이다. - 이와 반대로 그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낄 경우에도 자신에게  불행이 닥쳐올 때 적용시키기 위해 이웃의 불행을 의식 속에 자본으로 모아두게 된다 ; 이렇게 그는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즉 평등을 지향하는 마음은 행운과 우연의 영역에 자신의 척도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은 평등의 승리와 회복에 대한 가장 비열한 표현이고, 그리고 좀더 고상한 세계 질서를 가진 곳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인간이 다른 사람 속에서 자신과 같은 인간을 관찰하는 것을 배운 후에, 즉 사회가 건설된 후에 비로소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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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나의 치유와 자기 회복을 위해 언제나 내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고립되어 있고, 고립된 시선으로 보지 않으려는 신념이었다. 10

우리는 ‘자유정신’의 유형이 언젠가 완전해질 때까지 성숙하고 단 맛을 낼 수 있도록 정신이 어떤 위대한 해방 속에서 결정적인 사건을 겪었으며 그 사건이 전에는 얼마나 속박된 정신이었고 귀퉁이와 기둥에 영원히 묶여 있었을 것처럼 보였는지 추측할 수 있다. 무엇이 가장 단단하게 묶을까? 완전히 잘라버릴 수 없는 밧줄은 어떤 것일까? 고상하고 선택된 부류의 인간에게 그것은 의무가 될 것이다. 젊음에 어울리는 외경심, 오랫동안 숭배하고 가치를 부여해온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나약함, 자신들이 성장했던 땅, 자신들을 이끌어주었던 손길, 숭배를 배웠던 성전 등에 대한 감사, 바로 그들의 최고의 순간 그 자체가 그들을 가장 단단히 묶고 가장 지속적으로 의무를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위대한 해방은 이처럼 속박된 것에 마치 지진처럼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 그러면 젊은 영혼은 단 한번에 동요되고 분리되어 떨어져버리고 만다 - 그들 자신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충동과 혼란이 그 영혼을 지배하고 그에게 명령하는 주인이 되어 버린다 ; 의지와 소망은 어떻게든 그리고 어디로든 나아가려고 눈을 뜨게 된다 ; 미지의 세계를 향한 불굴의 모험적인 호기시이 그의 모든 감각에서 불타오르고 불꽃이 흔들거린다. “여시거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 이렇게 단호한 목소리와 유혹이 울려퍼진다. ‘여기’그리고 ‘집에’라는 말은 그가 지금껏 사랑해온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가 사랑해왔던 것에 대한 갑작스런 공포와 의심, 의무로 불렸던 것에 대한 섬광 같은 멸시 그리고 방랑, 타향, 소외, 냉각, 환멸, 냉담에 대한 선동적이고 의식적이며 화산처럼 솟구치는 욕망, 사랑을 향한 증오심, 아마도 자신이 지금까지 숭배했고 사랑했던 곳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신전모독과 같은 행동과 눈초리, 아마도 자신이 방금 한 일에 대한 불타오르는 수치심과 동시에 그 일을 해냈다는 기쁨 그리고 그 승리를 알림으로써 느끼는 더할 나위없는 내면적인 기쁨의 전율이다 - 승리라고? 무엇에 대한, 누구에 대한 승리란 말인가? 그것은 수수께끼 같이 의문스럽고 모호한 승리이긴 하지만 어쨌든 최초의 승리이다 : - 위대한 해방의 역사에는 이와 같은 아픔과 고통이 따른다. 해방은 동시에 인간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하나의 병이기도 하다. 스스로 정의하고 스스로 가치를 정립시키려는 힘과 의지가 만드는 이 최초의 폭발, 자유로운 의지를 향한 이 의지 : 그리고 풀려난 자, 해방된 자가 이제부터 자신이 사물을 지배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할때 그의 거침없는 시도와 기묘한 행동에는 얼마나 많은 질병이 나타날 것인가! 그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으로 무섭게 배회한다 ; 그의 긍지의 위태로운 긴장 상태는 그가 약탈하는 것으로 보상되어야만 한다. 그는 자신을 자극하는 것을 파괴해버린다. 그는 자신이 은폐하는 것, 부끄러움 때문에 간직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을 악의에 찬 미소로 뒤집어버린다 : 그는 만약 이러한 사물들을 뒤집어버리면 그것들이 어떻게 보일 것인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지금까지 좋지 못한 평판을 받아온 것에 자신의 명예를 되돌려놓으려고 한다면, 그리고 호기심으로 시험해보려는 듯이 가장 금지된 것의 주위로 몰래 기어 들어가려 한다면 거기에는 자의와 자의에서 나오는 쾌감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의 행동과 방황의 배후에는 더욱 위험한 호기심의 의문부호가 자리잡는다. 왜냐하면 그는 마치 황야에서처럼 불안하면서도 정처없는 행로의 중간에 있는 것이므로. ‘모든 가치를 뒤집을 수는 없는 것일까? 아마도 선은 악이 아닐까? 그리고 신은 악마의 발명품일 뿐이거나 악마를 더욱 고상하게 만들어놓은 것은 아닐까?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허위가 아닐까? 또 우리가 속았다면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동시에 속이는 자가 아닐까? 우리는 속이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 이런 생각이 그를 인도하고 더욱 멀리, 더욱 빗나가도록 그를 현혹한다. 고독이 그를 겹겹이 에워싼다. 저 무시무시한 여신이자 잔인한 정념의 어머니인 고독이 그를 더욱 위협하고 목을 조르고 심장을 짓누른다. - 그러나 고독이 무엇인지를 지금 어느 누가 알겠는가? ...

이러한 병적인 고립 상태와 황량하기만 한 시험기에서 벗어나, 저 흘러 넘치는 섬뜩한 확실성과 가히 질병마저도 포괄하는 건강성에 이르는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질병은 인식의 수단이며 인식을 낚는 낚싯바늘로서 반드시 필요하다. 자기 통제와 심정의 수양이며, 수없이 많은 대립적인 사유방시에 이르는 여러 길을 허용하는 그 성숙한 정신의 자유에까지 이르는 길은 멀다 - 정신이 자신의 길에서도 자신을 잃고 방탕하며 어느 한 구석에 취한 듯 주저앉아 버리게 될 위험을 몰아낼 수 있는 저 넘치는 풍요함의 내면적인 광대함과 자유분방함에 이르게 될 때까지의 길은 멀다. 그리고 위대한 건강의 표시인 저 유연하고 병을 완치하며 모조해내고 재건하는 힘이 넘쳐흐르기까지의 길도 아직 멀다. 그렇게 넘쳐흐르는 힘은 자유정신으로 하여금 시험에 삶을 걸고 모험에 몸을 내맡겨도 된다는 위험스런 특권을 부여한다. 그것은 자유정신의 거장다운 특권이다! 그 사이에는 긴 회복기가 놓여 있다. 그 시간은 고통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이고 다체로운 변화가 가득하여, 벌써 건강이라는 옷을 입고 위장을 한 강이한 건강을 향한 의지에 지배되고 규제되는 시간들이다. 거기에는 나중에 이러한 운명을 가진 한 인간을 감동 없이는 회상할 수 없는 중간 상태가 있다 : 거기에는 창백하고 섬세한 빛과 태양의 행복이 속해 있다. 즉 새의 자유, 새의 조망, 새의 오만에서 나온 감정과 호기심과 갸날픈 멸시의 감정이 얽힌 제3의 감정이 있다. ‘자유정신’ - 이 차가운 단어는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편안하며 따뜻하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랑과 증오의 속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마음대로 가까이 가고 멀어지며, 기꺼이 도주하고 피해다니며 날아다니고 다시 사라지거나 또다시 높이 날아오르며 사는 것이다 ; 사람들은 언젠가 자신 가운데에서 엄청난 다양성을 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변하게 된다. - 그러고는 자신과 무관한 사물을 걱정하는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자유정신을 괴롭히지 않는 그런 것과 관계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

한 단계 더 회복되면, 자유정신은 다시 삶에 천천히, 거의 반항적으로, 거의 의심스러운 듯 가까이 다가간다. 그의 주위는 다시 점점 따뜻해지고 마치 노란색 같은 빛을 띠게 된다 ; 감정과 공감은 깊어지고, 눈을 녹이는 듯한 온갖 바람이 그 위로 지나간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주위에 처음으로 눈을 뜬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그는 놀란 채 조용히 앉아 있다 : 도대체 그는 어디에 있었던가? 이 친근하고 가장 가까운 사물들 : 그 사물들이 그에게 얼마나 달라 보이는가! 그것들은 그 사이에 어떤 솜털과 매력을 얻었는가! 그는 감사하며 뒤를 돌아본다 - 자신의 방랑과 고집, 자기소외, 자신이 차가운 하늘을 새처럼 날며 멀리 보았던 것에 감사하며. 그가 나약하고 우둔한 게으름뱅이처럼 언제나 ‘집에’, 언제나 ‘제정신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던 것은 얼마나 잘한 일인가! 그는 자신을 잊고 있었다 :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서야 그는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 그때 그는 거기서 얼마나 놀라운 것을 발견하는가! 미지의 전율! 회복기에 있는 사람이 느끼는 피로감과 오랜 질병 그리고 병이 재발한 가운데 느끼는 행복! 고통에 쌍 조용히 앉아 인내심을 키우는 일과 햇빛 아래 누워 있는 일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누가 겨울의 행복과 벽에 드리워진 햇빛의 얼룩을 그만큼 잘 알 수 있단 말인가! 삶을 향하여 다시 몸을 반쯤 돌린 이 회복기에 있는 자, 즉 도마뱀이야말로 세사에서 가장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가장 겸손한 동물인 것이다 : - 그들 중에는 질질 끌리는 옷자락에 작은 찬가를 달고 다니지 않으면 하루도 못 견디는 자도 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 이러한 자유정신의 기질을 가지고 병에 걸려 한동안 앓고 나서, 그 후에 더 오랫동안 건강하게, ‘더욱 건강하게’ 되는 것이 모든 염세주의(알려진 것처럼 염세주의는 낡은 이상주의자와 거짓말쟁이의 암이다)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법이다. 그 속에 있는 지혜, 즉 삶의 지혜는 오랜 기간 동안 소량의 약만으로 건강 자체를 처방한다는 것이다. 12-17


제1장 최초와 최후의 사물들에 대하여

인류는 유래와 기원에 관한 질문을 의식에서 몰아내고 싶어한다. 그 반대의 경향을 자기 속에서 느끼게 되려며 ㄴ우리는 거의 탈인간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24

철학자들의 유전적 결함 - 철학자가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두 근본적으로 극히 제한된 시기의 인간에 대한 증언에 불과하다. 여갓적 감각의 결여는 모든 철학자가 지닌 유전적 결함이다. .. 절대적 진리가 없는 거소가 마찬가지로 영원한 사실도 없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역사적으로 철학하는 일이 필요하며, 그와 동시에 겸양의 덕이 필요하다. 24-25

현상과 물 자체 - 수천 년 전부터 우리는 도덕적, 미학적, 종교적 요청과 맹목적인 애착, 정열 또는 경외감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았으며 비논리적인 사고의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세계는 점차 이처럼 이상할 정도로 다채롭고, 끔찍하게 의미심장하고 감정이 넘치게 되었다. 세계가 색채를 띠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색을 칠한 사람은 우리였던 것이다. 인간의 지성이 현상을 나타나게 했으며, 근본적인 자신의 해석을 사물 속으로 끌어들였다. 38

회의(懷疑 품을회 의심의)의 추정적 승리 - 한 번쯤은 회의적인 출발점을 인정해보라. 만약 다른 형이상학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고 우리에게 알려진 유일한 세계에 대한 모든 형이상학에서 나온 설명들이 전적으로 소용없는 것이라면, 그때 우리는 어떤 눈길로 인간과 사물들을 보게 될 것인가? 44

비교하는 시대 - 사람들이 관습에 묶이지 않을수록 그만큼 동기의 내면적 운동은 활발해지며, 그에 상응하여 외적 불안정, 인간의 뒤얽힌 혼란, 노력의 다성음악도 그만큼 커진다. 자기 자시이 있는 곳에 자신과 후손을 묶어두는 엄격한 강제성이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 존재하는가? 도대체 누구에게 아직도 무엇인가 엄격하게 속박하는 것이 존재하는가? 모든 종류의 예술양식이 나란히 모조되고 있다. 모든 단계나 모든 종류의 도덕, 관습, 문화 또한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시대는 서로 다른 세계관, 도덕, 문화가 비교될 수 있고 나란히 체험될 수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 고뇌를 두려워하지 말자! 오히려 시대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과제를 우리는 가능한 한 크게 생각하도록 하자. 46-47

꽃잎의 향기에 취해서 - 종교와 예술은 세계의 꽃이지만, 그것이 줄기보다 세계의 뿌리에 더 가까운 것은 결코 아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종교와 예술로 사물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는 없다. 오류는 종교와 예술과 같은 꽃을 피우게 할 만큼 인간을 깊고 섬세하며 상상력이 풍부하게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53

추리할 때의 나쁜 습관들 - 사람들이 가장 흔히 범하는 오류 추리는, 어떤 사항이 실재하므로 그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53

비논리적인 것은 불가피하다 - 비논리적인 것이 인간세계에 필요하며 비논리적인 것에서 좋은 것이 많이 생겨난다는 인식은 사상가를 절망에 빠뜨릴 수도 있는 것 중 하나다. 비논리적인 것은 정열, 언어, 예술, 종교 등에 그리고 대체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에 상당히 깊이 파고들어 가 있어서, 이들 아름다운 것들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주지 않고는 비논리적인 것을 퇴치할 수 없다. 54

불공정함은 불가피하다 - 어떤 사람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 대해 우리가 겪은 경험은 총체적 평가를 위한 논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할만큼 완전할 수는 없다. 모든 평가는 성급하며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재는 척도, 즉 우리의 본질이라는 것은 결코 불변의 크기를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분위기와 동요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에 대한 어떤 사항의 관계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확실한 척도라고 믿어야만 한다. 아마 이상의 모든 면에서 본다면 사람은 전혀 판단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평가하지 않고, 혐오와 애착 없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든 혐오는 모든 애착과 마찬가지로 역시 평가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처음부터 비논리적인, 따라서 불공정한 존재이며,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현존재의 가장 크고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부조화 중의 하나이다. 55-56



제2장 도덕적 감각의 역사에 대하여

매우 진지한 개인과 민족에게 가벼움이 필요하듯, 마찬가지로 다른 부류에 속하는 매우 자극받기 쉬운 자와 동요하기 쉬운 자에게는 자신들의 건강을 위해 가끔 무겁게 짓누르는 짐이 필요하다. 점점 불길에 휩싸여가는 시대의 우리 더욱 정신적인 인간들은 우리가 적어도 지금처럼 부단히 악의 없고 절도를 지키녀 살아갈 수 있도록, 또한 이 시대에 거울과 자기반성으로서 이바지할 수 있도록, 불을 끄고 식히는 존재하는 모든 수단들을 잡기 위해 손을 뻗어야만 하지 않을까? 68

예지적 자유에 대한 우화 - 소위 도덕적 감각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주요 단계를 거친다. 첫째, 사람들은 동기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개별 행위를 단지 이롭거나 해로운 결과들에 의해 선 또는 악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 이런 명칭의 유래를 잊고, 그것의 결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행위 자체에 ‘선’ 또는 ‘악’의 특징이 내재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한다. 언어가 돌 자체를 단단하다고, 나무 자체를 푸르다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오류다. 즉 그렇게 함으로써 결과를 원인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선함 또는 악함을 동기 속에 집어 넣고, 행동 자체가 도덕적으로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사람들은 선하다, 악하다는 술어를 개별 동기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 전체에 부여한다. 식물이 흙에서 자라는 것처럼, 인간의 본질에서 동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은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 다음에는 행위에 대해서, 다음에는 동기에 대해서,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차례차례 책임을 묻는다. 결과적으로 인간들은 이 본질 역시 필연적인 결과이며, 과거와 현재의 사건들의 여러 요소와 영향으로 결합되어 있는 이상, 그것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곧 인간은 어떤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본질, 동기, 행위, 나아가서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로써 도덕적 감각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이자 책임성에 관한 오류의 역사이며, 그것은 의지의 자유에 관한 오류에서 나오고 있다는 인식에 이른다. ... 불만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만은 행동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필요는 없다는 잘못된 전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므로 후회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불만은 인간이 고칠 수 있는 습관이다. 69-70

친절의 경제학 - 인간의 교제에서 가장 효험 있는 약초이며 힘으로 간주되는 친절과 사랑은 대단히 가치 있는 발견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마 이 향기로운 약을 가능한 한 경제적으로 사용하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친절의 경제학이란 가장 무모한 몽상가의 꿈이다. 76

동정을 유발시키려고 하는 것 - 로슈푸코의 (그리고 플라톤의)판단에 의하면 동정이란 영혼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동정을 입증해야 하지만, 동정을 갖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낟. 왜냐하면 불행한 사람들은 어쨌든 동정을 보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큰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여길 정도로 어리석기 때문이다. ... 동정에 대한 열망은 자기 만족을 향한 열망이며, 더욱이 이웃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동정심은 지극히 자기애에 빠져 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라 로슈푸코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음"때문은 아니다. 78

진리의 명목상의 단계들 - 흔히 있는 잘못된 추리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누군가가 우리에 대해서 진실하고 솔직하기 때문에 그는 진리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부모의 판단을 믿고 그리스도교도는 교회 창설자의 주장을 믿는다. 이처럼 사람들은 지난 몇 세기 동안 행복과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옹호해온것이 모두 오류에 불과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것이 진리의 단계였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무엇인가를 믿고 자신의 믿음을 위해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을 경우에, 사실은 단지 오류가 그를 부추겼을 뿐이었다면, 이것은 너무나 부당한 일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이런 과정은 영원한 정의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민감한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정신과는 반대로 다음의 명제를 명령한다. 즉 도덕적 행위와 예지적 통찰 사이에는 철저하게 필연적이 ㄴ유대가 이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영원한 정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81

거짓말 -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신이 거짓말을 금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거짓말에는 날조, 위장, 기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위프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짓말을 하는자는 자신이 져야 할 무거운 짐에 관해서는 거의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즉 그는 하나의 거짓말을 주장하기 위해서 또 다른 스무 개의 거짓말을 생각해내야 한다.) 다음으로 단순한 상황에서는 나는 이것을 원한다, 내가 이것을 했다 등으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유리하며, 따라서 강제와 권위를 택하는 편이 교활한 방법보다 훨씬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한 어린이가 복잡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면 그는 이와 같이 자연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언제나 자기에게 이익이 되게끔 말한다. 82

자기분할로서의 인간의 도덕 - 진정으로 자신의 일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작가는 누군가가 찾아와서 그 일을 더 명확하게 표현해주고, 여기에 포함된 문제에 대해 남김없이 대답함으로써 자신을 파괴해주기를 원한다. 사랑을 하고 있는 소녀는 연인이 저지른 부정에서 자신이 사랑이 헌신적이며 충실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군인은 조국의 승리를 위해 전쟁터에서 쓰러지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최고 소원도 조국의 승리를 통해 승리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 즉 수면과 가장 좋은 음식을, 사정에 따라서는 자신의 건강과 재산을 자식에게 주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비이기적인 상황들일까? 쇼펜하우어의 말에 따라 이런 도덕적 행위들은 "불가능하면서도 현실적"이기 때문에 기적일까? 이들의 경우에는 인간은 자신의 그 무엇을, 하나의 사상, 하나의 욕망, 하나의 작품 등을 자신의 다른 것보다 한층 더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분할해서 한쪽을 다른 한쪽의 희생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이 명확하지 않은가? 어느 고집 센 사람이 "내가 이 인간에게 한 걸음이라도 길을 양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총에 맞는 편이 낫다"고 할 때,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일까? 어떤 것에 대한 애착(소원, 충동, 욕망)은 앞서 말한 모든 경우에 존재하고 있다. 애착을 가지는 것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비이기적"이지 않다. 도덕에서 인간은 자신을 분할할 수 없는 것, 개체(individuum)로서가 아니라 분할할 수 있는 것(dividuum)으로서 다룬다. 85

약속할 수 있는 것 - 행동은 약속할 수 있으나 감정은 약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감정은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항상 사랑하겠다거나 미워하겠다거나, 항상 그에게 충실하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은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행동은 약속할 수 있다. 이런 행동은 대체로 사랑, 증오, 충실함의 결과이지만, 한편 다른 동기에서 나올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여러 방법과 동기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익르어주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언제까지나 사랑하겠다는 약속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한 나는 너에게 사랑의 행위를 입증할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ㅇ낳게 되더라도, 다른 동기에 의해서일지라도 나는 똑같은 행동을 너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변하지 않으며 언제까지나 똑같은 것이라고 하는 가상이 상대방의 머리 속에는 존속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기만 없이 누군가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경우, 그것은 사랑의 가상에 대한 외관상의 지속을 약속하는 것이다. 86

지성과 도덕 - 주어진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좋은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 동정심을 가지려면 강력한 상상력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도덕은 지성의 우수함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86

복수하기를 원하는 것과 복수하는 것 - 복수심을 품는 것과 복수를 실행하는 것은 격렬한 열병의 발작에 걸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지나가버린다. 그러나 복수를 실행할 힘과 용기가 없는데도 복수심을 품는 것은 만성병, 육체와 영혼의 중동증을 안고 있는 것과 같다. 의도만을 중시하는 도덕은 두 경우를 양이 같은 것으로 평가하고, 통상적으로 전자의 경우를 더 나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아마도 복수의 행동이 수반할지도 모르는 나쁜 결과 때문일것이다). 두 가지 평가 모두 근시안적이다. 87

사랑과 정의 - 왜 인간은 정의를 손상시켜가면서 사랑을 과대평가하고, 마치 정의보다 사랑이 더 고상한 본질들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랑을 향해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분명히 사랑은 정의보다 훨씬 더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틀림없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그만큼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것이다. 사랑은 어리석은 것이며, 풍부한 풍요의 뿐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이 뿔에서 자기의 선물을 누구에게나 나누어준다. 그가 그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 번도 그것을 감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성서와 경험에 의하면 사랑은 정의롭지 못한 사람뿐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는 정의로운 사람에게도 피부 속까지 흠뻑 젖게 하는 비처럼 공평하다. 91

피해자와 가해자의 착각들 -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서 어떤 소유물을 (예를 들면 영주가 서민한테서 연인을) 빼앗을 경우, 가난한 자는 착각을 한다. 자신이 소유한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빼앗아갈 정도로 그 사람은 참으로 흉악한 사람임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자느 ㄴ개개의 소유물의 가치를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사람의 입장을 생각할 줄 모르며, 가난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심하 ㄴ부정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양자 모두 서로에 대하여 잘못된 표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분갷살 만한 권력자의 부정도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엄청난 것은아니다. 이미 물려받은 감각은 더 높은 것이 요구되는 더 고귀한 존재가 되기 위해 그들을 매우 냉정하게 만들고, 양심을 무디게 한다. 만약 우리와 다른 존재의 차이가 아주 크면, 우리는 모두 부정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어, 예를들어 모기 한 마리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죽이게 된다. 그래서 크세르크세스(Xerxes, 그리스 사람들조차 모두 그를 특별히 고귀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의 경우, 전체 원정군에게 불안하고 불길한 불신감을 조성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몸을 토막내게 한 것은, 그의 사악함의 표시가 아니다. 이런 경우에 한 개인은 마치 불쾌한 곤충처럼 제거된다. 세계의 지배자가 오래 느끼도록 자극하기에는 그는 너무나 무가치한 존재다. 그뿐 아니라 어떠 ㄴ잔인한 자도 학대받은 자가 믿고 잇는 그런 정도로 잔인하지 않다. 고통을 상상하는 것은 고통당하는 괴로우모가는 같지 않다. 공정하지 못한 재판간과 사소한 부정직함으로 인해 세상의 여론을 오도하는 저널리스트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원인과 결과는 이런 모든 경우에 잔혀 다른 감정과 사상들로 둘러싸여 있다. 반면 사람들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똑같이 생각하며 느낀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이 전제에 입각하여 한 사람의 죄를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특정한다 96-98

수치심의 예민함 - 사람들은 부정한 것을 생각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이런 부정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짐작하고 있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브끄러워할 것이다. 98

개개인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평을 통하여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자신 앞에서 입증하고 싶어 한다. .. 그들은 다른 살마의 판단력을 자신의 판단력보다 신뢰하고 있다. 100

성숙한 개인의 도덕 - 자신에게서 완전한 개인을 만들어내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최고의 행복을 주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동정적인 감동과 행위보다 그를 훨씬 더 진보시켜준다. 물론 우리 모두는 여전히 개인적인 것을 너무 사소하게 여기는 병을 앓고 있다. 그것은 잘못 교육되어온 것이다. 우리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자. 우리의 감각은 오히려 강제적으로 개인적인 것에서 분리되었으며, 마치 개인적인 것이란 희생되어야만 하는 나쁜 것이기라도 한 듯 국가, 학문,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희생물로 제공되었다. 104-105

인륜과 윤리적인 것 - 도덕적, 윤리적, 윤리학적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확립되어온 규범이나 관습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억지로 복종하는지 또는 기꺼이 복종하는지의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앟으며 그것을 실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사람들로 하여금 윤리적인 것과 비윤리적인 것, 선한 것과 악한 것의 구별을 가능하게 한 근본적 대립은 '이기적인 것'과 '비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관습과 규범에 구속되어 있는가 아니면 해방되어 있는가에 있다. 여기서 어떻게 관습이 성립된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쨌든 관습은 선과 악 또는 어떤 내재적 정언 명법을 고려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한 공동체, 한 민족을 유지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잘못 해석된 우연을 근거로 하여 성립된 모든 미신적 관례는, 그것을 따르는 것이 윤리적이라는 관습을 강요한다. 즉 관습에서 해방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공동사회에서는 개인의 경우보다 훨씬 더 해롭다. 모든 관습은 근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많이 잊혀질수록, 계속 더 존중할 만한 것이 된다. 그리고 관습에 바쳐지는 존중은 세대가 지남에 따라 쌓여, 관습은 마침내 신성한 것이 되며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어떤 경우든 경건의 도덕은 비이기적인 행위들을 요구하는 도덕보다 훨씬 더 오래된 도덕이다. 105-106

인륜 안에서의 쾌감 - 쾌감과 도덕성의 근원에 대한 중요한 부분은 습관에서 생겨난다. ... 인륜이란 쾌적한 것과 유익한 것의 결합체이며, 게다가 그것은 심사숙고할 필요가 없다. 106-107

소위 악한 행위에서의 무죄함 - 모든 '악한' 행위들의 동기는 보존 본능, 더 정확히 말해서 개인은 쾌감을 지향하고 불쾌감을 회피한다는 사실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그렇게 동기 규정된 것이라면 그것은 악한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고통을 주는 것'은 철학자들의 두뇌 속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쾌감을 가져다주는 것'(쇼펜하우어적인 의미에서 동정심)도 이와 마찬가지다. 국가 형성 이전의 상태에서 우리는,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나무로 모여들때 우리보다 먼저 그 나무의 열매를 빼앗으려는 자가 있으면 그가 원숭이든 인간이든 죽였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는 불모의 땅에서 방랑하게 될 경우 동물에 대해 그런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를 가장 분노하게 만드는 악한 행위들은, 그런 행위를 우리에게 가하는 상대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그의 의향에 따라 이런 나쁜 행동을 우리에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착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의향이라는 것에 대한 이 믿음은 증오, 복수심, 악의를 야기하고 상상력을 완전히 손상시킨다. 반면 우리는 동물에 대해서는 그렇게 격노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들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보존본능에서가 아니라 보복하기 위해 해를 가하는 것. 그것은 잘못된 판단의 결과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뵈가 없다. 개인은 국가 이전의 상태에서는 위협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가혹하고 잔인하게 다룰 수 있었다. 그것은 자기 힘을 위협적으로 시험해 보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 약한 자를 자신에게 굴복시키는 폭력을 행사하는 자, 권력자, 최초의 국가 설립자는 그렇게 행동한다. 오늘날에도 국가가 여전히 그렇게 행하고 있는 것처럼 거기에는 그럴 권리가 있다. 오히려 그것을 방해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예를 들어 사회, 국가와 같은 더 큰 개체와 집단적 개체가 개인을 굴복시켜서 그들의 개별성에서 그들을 이끌어내어 집단으로 흡수하게 되면, 비로소 모든 도덕성을 위한 토대가 제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도덕성에는 강제가 선행한다. 또한 도덕성 그 자체는 잠시 동안은 여전히 불쾌감을 피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순응하는 상제일 것이다. 나중에 그것은 인륜이 되고 훨씬 후에느 ㄴ자유로운 복종이 되며, 마침내는 거의 본느에 가까워지고 만다. 그때 그 도덕성은, 오랫동안 익숙해지고 자연적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쾌감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덕이라고 불린다. 109-110

판단하지 말라 - 앞서 간 시대들을 고찰할 때 우리는 부당한 비방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노예제도의 불공정함, 인간가 민족들을 정복하는 과정에서의 잔인성은 우리의 척도로 측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는 정의의 본능이 아직 충분히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기주의는 악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웃' (이 말은 그리스도교적 기우너을 가진 것으로 진실에 일치하지 않느다)에 대한 표성이 우리에게는 극히 미약히기 때문이며,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 마치 식물과 돌을 대하느 ㄴ것처럼 자유롭고 책임이 없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고통받는다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결코 그것을 완전히 배울 수는 없다. 111-112

'인간은 항상 선하게 행동한다' - 자연이 뇌우를 내려 우리를 젖게 했다고 해서 자연을 비도덕적이라고 탓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해를 끼치는 사람을 비도덕적이라고 부르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후자의 경우에는 자의적으로 타나타는 자유의지를, 전자의 경우에는 필연성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구별은 오류이다. 또한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는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는 것에 대해 비도덕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인간은 모기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모기를 아무 거리낌없이 의도적으로 죽이고, 우리 자신과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 범죄자를 의도적으로 처벌하고 그에게 고통을 준다. 첫번째의 경우는 개인이 자기 보존을 위해서 또는 자신이 불쾌해지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자가 되며, 두번째 경우에는 국가가 그러하다. 모든 도덕은 의도적으로 해를 가하는 것을 정당방위로 인정한다. 단 그것이 자기 보존의 문제가 되는 경우라면!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가하는 모든 악행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관점만으로도 충분하다. 인간은 자신으 ㄹ위해서 쾌감을 원하고 불쾌감을 없애고자 한다.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자기 보존의 문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말은 타당하다. 인간은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선을 행한다. 즉 인간은 지성의 정도와 이성의 갖가지 척도에 따라 언제나 자신에게 선하게(유리하게) 보이는것을 행한다. 113

만약 인간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개별적인 모든 행위는 미리 계산될 것이다. 인식의 모든 진보, 모든 오류, 모든 악의도 말이다. 118

많은 행위가 악하다고 말하지만 그 행위들은 단지 어리석은 행위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를 선택했던 지성의 정도가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한 의미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모든 행위는 어리석다. 왜냐하면 현재 이를 수 있는 최고의 인간 지성은 반드시 또 추월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120




제4장 예술가와 저술가의 영혼으로부터

완전한 것은 생성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 - 우리는 완전한 것에 대해서는 모두 그것의 생성에 의문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현존하는 것이 마치 마술에 의해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즐기는 데 익숙해 있다. ...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즉흥적인 것이라는, 기적처럼 갑자기 생긴 것이라는 믿음을 불러일으킬 때 완전한 효과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예술의 학문은 이런 착각을 가장 분명하게 거부해야 하고, 예술가의 그물에 걸리느 한, 지성의 그릇된 추론과 악습들을 적발해내야 한다. 그것은 자명한 일이다. 167

예술가는 일생 동안 어린아이와 젊은이인 채로 있으며 자신에게 예술 충동이 엄습했던 지점에 머물러 있다. 169

손으로 하는 작업의 성실성 - 재능과 타고난 능력에 대해서만 말하지 말라! 타고난 재능이 거의 없이도 위대해진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위대한 사람이 되었고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천재'가 되었다. 그런한 자질을 의식하고 있는 살마이라면 아무도 그것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커다란 전체를 만드는 일을 감행하기 전에, 우서 부분을 완전히 만든는 것을 배우는 숙련된 장인의 성실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부분을 완성하기 ㅏ여 시간을 부여했다. 왜냐하며 그들은 현혹시키는 전체의 효과보다 작은 것, 지엽적인것을 잘 만드는 일에 더 많은 즐거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떻게 하여 훌륭한 소설가가 될 수 있을 까 하는 방법은 쉽게 제공할 수 있으나, '나에게느 재능이 충분치 않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질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느 그 자질을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2페이지를 넘지는 않지만 거기에 포함된 모든 단어가 필연적이라고 할 만큼 명확한 소설을 백 개 이상 습작해보라. 가장 함축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일화의 형식을 배울 때까지 매일 일화를 쓰도록 하라. 인간의 유형과 성격을 수집하거나 윤색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라. 특히 주위의 다른 사람드에게 미치는 효과를 유심히 바라보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에게 말을 자주 하고 남이 말하는 것을 귀를 쫑긋 세워 듣도록 하라. 풍경화가와 의상 디자이너처럼 여행하도록 하라. 잘 표현되면 예술적 효과를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개개의 학문에서 발췌하도록 하라. 끝으로 인간 행위의 동기에 대해서 잘 생각하고 이 점에서 가르침을 주게 될 어떤 지침도 냉대하지 말고 밤낮으로 이런 것들의 수집가가 돼라. 이와 같은 다양한 훈련으로 2,30년을 내라. 그 후에는 작업실에서 창작된 것이 거리의 빛 속으로 나가도 좋다. 그런데 대부부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그들은 부분에서가 아니라 전체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마 한 번은 선택이 적절하여 주목을 끌게 되지만 그때부터 항상 실패할 것이다. 그것은 충분히 당연한 근거에서 나오는 일이다. 때때로 이러한 예술적 삶의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이성과 성격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에는 운명과 필욕 그 자리를 물려받아 미래의 거장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여 그의 손으로 하는 작업의 모든 조건을 거쳐 단계적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181-182

대중의 예술적 교육 - 동일한 주제가 서로 다르 거장에 의해서 수많은 방식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대중은 소재에 관심을 갖는것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작업들에 의해 그 주제르 알게 되고 새로운 것이 주는 매력과 긴장감의 매력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되며느 결국에는 이 주제를 취급할 때의 어떤 뉘앙스, 섬세하고 새로운 발명도 파악하고 즐기게 될 것이다. 185

예술가와 그의 추종자는 보조를 맞춰야 한다 - 양식이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진행하는 것은, 예술가뿐 아니라 청중과 관중도 이 진행에 참여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아주 느리게 진행되어야 한다. ... 왜냐하면 예술가가 대중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이미 대중은 급속히 낮은 곳으로 가라앉기 때문이다. 186

집단정신 - 훌륭한 저술가는 자신의 정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친구들의 정신까지도 가지고 있다. 192

학문에 대한 관계 - 학문 속에서 그들 스스로 어떤 것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학문을 흥미롭게 여기기 시작했던 사람은 모두 학문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193

작가의 역설들 - 소위 독자가 불쾌하게 느끼는 작가의 역설들은 그 자각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흔히 독자의 머리 속에 있다. 193

기지 - 가장 기지에 넘치 작가들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미소를 거의 만들어내지 않는다. 194

문장가로서의 사상가 - 사상가는 대부분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의 사상뿐만 아니라 그 사상을 사유하는 것까지 우리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194

독자의 정신을 거역하는 죄 - 단지 독자와 같아지기 위해서 저자가 자신의 재능을 부인한다면, 그는 독자가 결코 용서하지 않을 치명적이 죄를 범하는 것이다. 즈 독자가 그것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눈치채는 경우에 말이다. 인간은 인간에게 모든 나쁜 욕을 해도 좋다. 그러나 어떻게 그 말을 하는지의 양식에서는 인간의 허영심을 다시 바로 세워줄 방법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194-195

글쓰기와 가르치기에서의 주의점 - 처음으로 글으 써보았거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글쓰기에 대한 정열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이 시도하고 체험하는 모든 것에서 문체상으로 전달할 수있느 것만을 배운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저술가와 독자들만을 생각한다. 통찰을 원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기 일을 하는 데는 무능력하다. 그는 언제나 자기 학생의 행복을 생각하고, 그가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인 한 모든 인식은 그를 기쁘게 하낟. 결국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열의를 잃어버리고, 지식의 한 통로, 흔히 수단으로 자신을 파악한다. 199

아킬레우스와 호메로스 - 언제나 아킬레우스와 호메로스의 관계 같은 것이 존재한다. 한족은 체허모가 감각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쪽은 그것들을 기술하는 것이다. 참다운 저술가는 남의 격정과 체험에 다만 단어들을 부여할 뿐이며, 자기가 경험했던 적은 것들에서 많은 것을 추측해내는 예술가이다. 예술가들으 결코 대단한 열정을 가진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흔히 열정을 가진 인간으로 무의식적인 감정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 즉 그들의 삶이 예술의 영역에서 체험을 말하게 될 때, 사람들은 그들이 그렸더 열정을 더욱 신뢰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을 자유롭게 내버려두고 자제하지 않으며 자신의 분노와 욕구를 위해 넓은 자리만 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곧 세상 사람은 저 사람은 얼마나 열정적인가! 하고 외친다. 그러나 깊이 파고드는, 개인을 소모시키며 때로는 잠식해 들어가는 열정인 경우에는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 이러한 열정을 체험하는 사람은 분명히 그것을 극이나 음악 또는 소설에서 묘사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예술가가 아니라면 흔히 방종한 개인이다. 그러나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205



제5장 좀 더 높은 문화와 좀 더 낮은 문화의 징후

퇴화를 통해 고상해짐 - 우리는 한 민족의 혈통은, 사람들이 대부분 자신들의 일상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근본 법칙들의 동일성에 따라, 즉 그들의 공동 믿음에 따라 살아 있는 공동심(共同心 함께공 한가지동 마음심)을 가지고 있을 때 가장 잘 존속한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여기서 훌륭하고 탄탄한 풍습이 강화되고, 개체의 종속성을 배우며 품성에는 이미 강인함이 생일 선물로 주어져서, 그 후에는 그것이 습관하된다. 강하고 동질적이며 특징적인 개체들을 기반으로하는 이런 공동체가 가지는 위험은 세습에 의해 점차 강화되는 우둔화이다. 이것은 한번 정착되면 그림자같이 뒤따라다닌다. 그와 같은 공동체의 정신적 진보는 속박받지 않고 더 불안정하며 도덕적으로 더 약한 개체들에게 따라다닌다. 대개 새로운 것과 다양한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종류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약함 때문에 별 뚜렷한 영향도 보이지 않고 소멸해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들이 후손을 가지게 되면, 긴장이 완화되어 때로는 공동체의 안정된 요소에 상처를 초래한다. 새로운 그 무엇은 바로 이 상처로 인해 약화된 자리에서부터 전체로 접종되는 것이다. 그러나 것의 전체적인 힘은 이 새로운 것을 그의 피 속으로 받아들여 동화시킬 수 있을 만큼 강해야 한다. 퇴화해가는 본성들은 진보가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대개 모든 진보에는 어떤 부분적 약화가 성행되어야 한다. 가장 강한 본성들은 유형을 계속 지켜나가고 좀더 약한 본성은 유형을 계속 형성해나가는 것을 돕는다. 비슷한 일이 개별적인 인간들에게도 일어난다. 일종의 퇴화, 불구, 나아가서는 악덕 그리고 신체적 또는 도덕적 결손까지도 다르 한편으로는 때때로 하나의 장점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더 심하게 병든 인간들은 아마 호전적이고 침착하지 못한 종족 속에서 혼자 있으 계기를 더 많이 가지게 됨으로써 더욱 침착하고 현명해지며, 외눈을 가진 사람은 더욱 강한 한쪽 눈을 가지게 될 것이고, 눈먼 사람은 한층 더 깊이 내부를 보고 어쨌든 더욱 날카롭게 듣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저 유명한 생존 경쟁이 한 인간과 종족의 진보와 강화가 해명될 수 있는 유일한 관점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두 가지 것이 한데 합쳐져야 한다 그 하나는 신앙과 공통된 감정 안에서 정신들을 결합함으로써 정착된 힘을 증대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퇴화해가는 본성들을 그리고 그 정착된 힘을 부분적으로 약화시키고 손상시킴으로써 더 높은 목표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이다. 좀더 여리고 섬세한 것으로서의 더 약한 이 본성들이 대체로 모든 진보를 가능하게 한다. 어디에서인가 부패하고 약해져가는, 그러나 전체로서는 아직 강하고 건강한 민족은 새로운 것의 감염을 받아들여 장점으로 동화시킬 수가 있다. 개별적인 인간의 경우, 교육의 과제는 전체적인 인간으로서의 그가 더 이상 자신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를 확고하고 확실하게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그러나 그 후에 교육자느 그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아니면 운명이 그에게 입힌 상처를 이용해야 한다. 그리하여 고통과 욕구가 생겨나면, 그 상처 입은 부분에 새롭고 고상한 그 어떤 것이 접종될 수 있는 것이다. 교육자의 전체적 본성은 그것을 받아들여, 나중에 그 열매들 속에서 고상해지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국가에 관해서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설프게 교육받은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통치의 형식은 아주 사소한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정치의 최대 목표는 영속성이며, 이것은 자유보다도 훨씬 가치가 있어 다른 모든 것을 능가 한다." 대체로 지속적인 발전과 고상하게 하는 접종은 확실하게 기초가 마련되고 영속성이 최대한 보증될 때에만 가능하다. 물론 모든 영속성의 위험한 동료인 권위라는 것이 통상적으로 그 일을 방해하게 될 것이지만 말이다. 225-227

자유정신은 상대적 개념이다 - 어떤 혈통과 환경, 신분과 지위 또는 지배적인 시대의 견해를 근거로 그에게서 예살할 수 있는 거소가 다르게 사유하는 사람을 자유정신이라고 부른다. 자유정신은 예외이며 속박된 정신은 상례이다. 속박된 정신은 자유정신의 자유로운 기본 원칙이란 눈에 띄고 싶은 병적인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거나 또는 속박된 도덕과는 전혀 화해할 수 없는 순전히 자유로운 행위에 불과한 것이라고 단정짓고 자유정신을 비난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자유로운 기본 원칙들이 머리의 괴팍하모가 엉뚱함에서 나온다고 추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말을 하면서 자신의 말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함으로써 단지 상처를 입히려는 악의를 가지고 잇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자유정신의 얼굴에는 보통 속박된 정신도 충분히 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지성의 비범한 우수성과 예리함이 증거로서 역력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정신 활동의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기원은 공정하게 평가된 것이다. 사실상 많은 자유정신이 이러한 또는 저러한 양식으로 성립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자유정신이 그런 방법으로 성취한 원칙들은 속박된 정신의 원칙들보다도 더 진실하며 신뢰할 수 있다. 진리의 인식에서는, 어떤 충동에서 그것을 추구했으며,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발견했는지가 아니라 그 진리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자유정신이 정당하다면 따라서 속박된 정신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다. 전자가 부도덕에서 진리에 이르렀는가 그리고 후자가 지금까지 도덕에서 비진리를 고집했는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자유정신이 정당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에 관계 없이 그가 관습적이 ㄴ것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이 자유정신의본질에 속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유정신은 역시 진리를, 또는 적어도 진리탐구의 정신을 자기 편으로 삼게 될 것이다. 자유정신은 근거를 요구하고 다른 정신들은 신앙을 요구한다. 227-228

신앙의 기원 - 속박된 정신은 자신의 입장을 근거에서가 아니라 습관에서 받아들인다. 228

모든 국가와 신분, 결혼, 교육, 법률과 같은 사회질서, 이 모두는 그것들에 대한 속박된정신의 믿음 속에서만 힘과 영속성을 가지게 된다. 229

속박된 정신에서의 사항의 척도 - 속박된 정신들은 네 가지 종류의 사항에 대하여 그것들이 옳다고 말한다. 첫째, 영속성이 있는 모든 사항은 옳다. 둘째, 우리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모든 사항은 옳다. 셋째, 우리에게 이득을 가져오는 모든 사항은 옳다. 넷째, 그것을 위해 우리가 희생을 치른 모든 사항은 옳다. 예를 들어 이 마지막 것은, 왜 국민의 의지를 거역하여 시작된 전쟁이 우선 희생이 치러지면 곧바로 열광적으로 게속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232

강한 정신 - 관습을 자기 편에 두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떤 근거도 필요하지 ㅇ낳는 사람과 비교하면, 자유정신은 항상 약한 쪽이다. 특히 행동에서 그렇다. 왜냐하면 자유정신은 너무나 많은 동기와 관점들을 알고 있고, 그 때문에 확신이 없으며 미숙한 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가 적어도 자신으 관철시키며 아무 성과도 없이 파멸하지 않을 정도로, 그를 비교적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 있는 것일까? 강한 정신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이것은 개별적인 경우에는 천재의 생산에 대한 문제이다. 한 개인이 관습에 맞서 완전히 개인적인 세계 인식을 지향하는 그 활력, 그 불굴의 힘, 그 인내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232-233

기적적 교육 - 사람들이 신과 신의 배려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바로 그곳에서 교육의 관심은 비로소 크게 성장할 것이다. 마치 기적의 치료에 대한 믿음이 끝났을 때 비로소 치료술이 발전할 수 ㅇ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모두 기적적인 교육을 여전히 믿고 있다. 사람들은 실제로 엄청난 무질서, 목표의 혼란, 상황의 불리한 조건에서 가장 창작력이 풍부하고 가장 강한 사람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러한 것이 당연한 일로 일어날 수 있었던가? 이제 사람들은 앞으로 이런 경우들을 좀더 상세히 관찰하고 세심하게 조사하게 될 것이다. 그때 기적은 결코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같은 상황 아래에서 많은 살맏르이 계속 멸망해간다. 대신 구제된 각 개인들은 대체로 훨씬 더 강력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타고난 강인한 힘으로 이 역경을 타개하고 이 힘을 더욱 훈련하여 키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적은 설명될 수가 있다. 기적을 이미 믿지 않는 교육은 세 가지 사항에 대하여 유의해야 한다. 첫째, 얼마나 많은 활력이 유전되는가? 둘째, 무엇을 통하여 새로운 활력이 점화될 수 있는가? 셋째, 어떻게하면 개인이 불안에 빠져 그 고유성을 파괴당하지 ㅇ낳고 문화의 다양한 요구들에 적응할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하면, 어떻게 한 개인이 사적 문화와 공적 문화의 대위법 속에 참가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가 곡조를 지휘하면서 동시에 그 곡조를 연주할 수 있을까? 242-243

학문의 미래 - 학문은 노력하고 탐구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만족을 주고, 그 성과를 배우는 사람에게는 극히 적은 만족밖에 주지 않는다. 그러나 학문의 모든 중요한 진리는 조금씩 평번하고 저속해지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 조금밖에 없는 만족도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그 경탄할 만한 구구단을 일단 배우게 되면 이미 더 이상 기쁨을 느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학문이 스스로를 통하여 점점 더 작은 기쁨밖에 주지 못하게 되면, 그리고 위로를 주는 형이상학, 종교, 예술을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더 많은 기쁨을 빼앗게 되면, 인류의 거의 전부가 혜택을 입고 있는 쾌감의 가장 큰 샘이 고갈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좀더 높은 문화는 인간에게 우선 학문을, 그 다음에 비학문을 느낄 수 있는 두 개의 뇌실 즉 이중 두뇌를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두뇌는 혼란 없이 병행하고 분리할 수도 있고 폐쇄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것은 건강상의 요구 사항이다. 한 영역에는 동력원이 있고 다른 영역에는 조절기가 있어서 환상, 편협, 정열로 가열되어야 하며 인식하는 학문의 도움으로 과열된 것의 나쁘고 위험한 결과들이 예방되어야 한다. 만약 좀 더 높은 문화의 이런 요구가 채워지지 않는다면, 아픙로의 인간 발전의 경과는 거의 확실히 예언될 수 있다. 쾌감을 적게 제공하게 되면 참된 것에 대한 관심은 사라져 버린다. 환상, 오류, 공상은 쾌감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과거에 자신들이 주장했던 땅을 단계적으로 쟁취해간다. 그 다음의 학문의 쇠퇴이며 야만으로의 역전이다. 250-251

흥미로운 것의 증가 - 좀더 높은 교양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흥미로워진다. 그는 자신의 사고의 빈 틈이 교양으로 채워질 수 있거나 사상이 교양으로 인해서 확인될 수 있는 곳에서는 재빨리 그 문제의 교훈적인 측면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지적할 줄 안다. 거기서 권태는 점점 더 사라지고, 그와 함께 지나친 감정의 흔분도 사라진다. 그는 마침내 식물 사이를 지나다니는 자연 연구자처럼 인간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자기 자신을 단지 그의 인식 충동을 강하게 자극하느 ㄴ데 불과한 하나의 현상으로 인지한다. 253

학문을 통해서 훈련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능력이다 - 인간이 어느 일정한 시간 동안 엄밀한 학문을 철저히 해왔다는 것의 가치는 그 성과들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성과들은 알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로 이루어진 바다에 비교한다면 사라져 없어질 만큼 작은 물방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활력, 추진력, 인내력의 강인함을 증대시킨다. 인간은 어떤 목적을 합목적적으로 달성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한 한에서, 언젠가 학문적인 인간이었다는 사실은 그 뒤에 하게 될 모든 일에서 볼 때 대단히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254

거대한 것에 호의적인 편견 - 사람들은 분명히 모든 거대한 것과 뚜렷한 것을 과대 평가한다. 이는, 만약 어떤 사람이 한 가지 분야에 전력투구하여 자신을 흡사 하나의 거대한 기관으로 만들 때, 이 일이 대단히 유익하다고 느끼게 되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통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확실히 인간 스스로에게는 자신의능력을 균형 있게 훈련하는 것이 더 유익하고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 왜냐하면 모든 재능은 다른 힘들에서 피와 힘을 빨아먹는 흡혈귀이며, 지나친 생산은 가장 재능 있는 사람까지도 거의 미치게 만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술 안에서도 역시 극단적인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 매우 주의를 끈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는 훨씬 낮은 문화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힘을 가지기를 원하는 모든 것에 굴복한다. 256-257

학교에서의 이성 - 학교는 엄밀한 사고, 신중한 판단, 일관성 있는 추론을 가르치는 것 외의 다른 과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학교는 이 작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것, 예를 들어 종교를 무시해야 한다. 물론 학교는 인간적인 불투명함, 습관 그리고 욕망이 아주 팽팽하게 당겨진 사고의 활을 나중에 다시 느슨하게 만들게 되리라는 것을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학교는 그 영향력이 미치는 한, 인간에게 있는 본질적인 것과 탁월한 것을 강요해야 한다. 그것은 적어도 괴테가 판단하듯이, '인간의 이성과 학문은 최상의 힘'이다. 위대한 자연 탐구자 폰 베어(von Bear)는 동양인에 비해서 모든 유럽인이 뛰어난 점을,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근거들을 말할 수 있는, 훈련된 능력에서 찾고 있다. 동양인들은 이런 능력이 전혀 없다. 유럽은 일관성 있고 비판적인 사고의 학교로 나아갔고, 동양은 여전히 진리와 허구 사이에서 구별할 줄을 모르고, 자신의 호가신이 자신의 관찰과 규칙에 따른 사고에서 유래하는 것인지, 또는 상상력에서 유래하는 것인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서의 이성은 유럽을 유럽으로 만들었다. 중세에 유럽은 다시 동양의 한 부분과 부속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즉 그리스인에게 감사해야 했던 학문적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263-264

좀더 높은 문화는 필연적으로 오해된다 - 지적 충동 외에는 단지 습관이 된 종교적 충동만을 하나 더 가지고 있는 학자들처럼, 자신의악기에 줄을 두 개만 매어놓고 있는 사람은, 더 많은 현으로 연주할 수 있는 사람드을 이해하지 못한다. 더 낮은 사람들에 의하여 항상 잘못 해석되는 것은 많은 현을 가진 더 높은 문화의 본질에 속한다. 잘못된 해석은 예를 들어 예술이 종교적인 것의 가장된 형식으로 간주되는 경우에 일어나게 된다. 오로지 종교적이기만 한 사람들은, 마치 노아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닌 음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문조차도 종교적 감정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275-276

활동적인 사람들의 주요 결점 - 활동적인 사람들에게는 흔히 더 높은 활동이 결여되어 있다. 여기서는 개인적인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관리, 상인, 학자들로서 즉 유적 존재로서는 활동적이지만 아주 특정한 한 개인, 유일무이한 인간으로서는 활동적이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태만하다. 활동적인 사람들의 불행은 그들의 활동이 거의 언제나 약간은 비이성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돈을 모으고 있는 은행가에게 그가 쉬지 않고 일하는 활동의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서는 안 된다. 이 활동은 비이성적인 것이다. 활동적이 ㄴ사람들은 돌이 굴러가듯 기계적인 성격의 우둔함에 따라 굴러간다. 모든 인간은 모든 시대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노예와 자유인으로 나뉘어 있다. 왜냐하면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은 노예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그는 자신이 원하는 그 누구, 즉 정치가, 상인, 관리, 학자이다. 277-278

활동적인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태만한가 - 나는 다양한 의견이 가능한 모든 것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 개인은 스스로 다른 모든 사물에 대해서 하나의 새로운,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위치를 차지하는 자기만의 그리고 일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활동적인 사람의 마음속에 근본적으로 들어 있는 태만함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샘에서 물을 깆는 것을 방해한다. 의견의 자유는 건강과 마찬가지다. 양쪽이 모두 개인적인것이며, 양쪽 모두에게서 인정되는 보편 타당한 개념은 세워질 수 없다. 한 개인의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것이 다른 한 개인에게는 이미 질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정신의 자유를 향한 많은 수단과 방법이 더 높이 발달한 본성은 지닌 사람들에게는 부자유로 향하는 방법들과 수단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279-280

부수 효과 - 진정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런 억압이 없어도 결점과 악덕의 경향들을 버리게 될 것이다. 분노와 불쾌함이 그를 엄습하는 일도 좀더 드물어질 것이다. 즉 그의 의지는 인식하는 것과 인식하기 위한 수단, 즉 그 안에서 그가 인식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속적인 상태 외의 아무것도 더 절실히 원하지 않게 될 것이다. 280

앞으로 나아가라 - 그러면 확실한 발걸음과 신뢰를 가지고 지혜의 길로 나아가라! 네가 어떤 존재이든 스스로 경험의 샘이 되어 너 자신으 도우라! 너의 본질에 대한 불만을 던져버리고 네 자신의 자아를 용서하라. 왜냐하면 어쨌든 너는 인식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백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사다리를 가지고 잇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종교와 예술을 어머니와 유모처럼 사랑해봤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명해질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서 바라보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그 마력속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너는 역사에 정통해야 하고, '이쪽-저쪽'의 조심스러운 저울접시 놀이에도 정통해 있어야 한다. 과거의 황야를 통해 그 고통에 찬 위대한 걸음을 걸었던 인류의 발자취를 밟아서 거꾸로 거닐어보라. 그러면 인류가 결코 다시 갈 수 없고 가서는 안 되는 곳을 너는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미래의 매듭이 또 맺어질 것인지를 전력을 다하여 미리 탐색함으로써, 네 자신의 삶은 인식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얻게 된다. 네가 체험한 모든 것, 모든 시도, 오류, 실수, 착각, 정열, 너의 사랑과 희망이 너의 목표속에서 남기없이 꽃을 피우도록 성취하는 것은 네 손에 달려 있다. 이 목표란, 스스로 문화의 고리의 필연적인 하나의 사슬이 되는 것이며, 이 필연성에서 보편적인 문화의 진행 속에 있는 필연성을 추론하는 일이다. 283-284



제6장 교제하는 인간

호의적인 위장 - 사람들과 교제할 때에는 흔히 우리가 마치 그들의 행위의 동기를 간파하지 못한 듯 호의적으로 위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287

평등의 두 가지 방식 - 평등의 욕구는 다른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까지 끌어내리려고 하거나(헐뜯거나 비밀로 하거나 다리를 걸어서) 또는 자신으 모든 사람과 함께 끌어올리려는(인정하거나 도와주거나 남의 성공을 기뻐함으로써)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288-289

신뢰와 친밀함 - 다른 사람과 의도적으로 친밀해지려고 애쓰는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상대방의 신뢰를 얻고 있는지에 대하여 확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뢰를 확신하는 사람은 친밀함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289-290

사려 깊은 - 아무도 기분 상하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정의로운 기질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두려움이 많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292

논쟁하는 데 필요한 것 - 자신의 사상을 얼음 위에 놓는 법을 이해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논쟁의 열기 속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292

교제와 자만심 - 사람들은 자신이 항상 공로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만심을 잊어버리게 된다. 혼자 잇다는 것은 교만을 심는 결과가 된다. 젊은 사람들은 자만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많은 것을 의미하려는 그들 자신과 똑같은 사람과 사귀고 있기 때문이다. 292-293

공격의 동기 - 사람들은 단지 누구에게 아픔을 주고 그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마 자신의 힘을 의식하기 위해 공격하기도 한다. 293

아첨 - 교제할 때 아첨을 통하여 우리의 조심성을 무디게 하려는 사람들은, 위험한 수단 즉 수면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수면제가 잠이 들게 하지 못하면, 오히려 더 깨어 있게 만들 것이다. 293

침묵 - 양편 모두에게 가장 불쾌한 논쟁의 응수 방법은 화를 내고 침묵을 지키는 일이다. 왜냐하면 공격하는 편은 흔히 침묵을 경멸의 표시로 표명하기 때문이다. 295

대화를 하면서 -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정당함이나 부당함을 인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습관의 문제다. 전자를 인정하는 것도 후자를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가 있다. 297

설명하는 사람 - 그 무엇을 설명하는 사람은 그 사실이 그의 관심을 끌기 때문에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설명하는 것을 통해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싶기 때문에 말하는 것인지를 쉽게 알아차리게 만든다. 후자의 경우에 그는 과정을 하고, 최상급도 사용하며 그와 비슷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는 일반적으로 더 서툴게 말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실에 대하여 잘 생각하고 있지 못하지 때문이다. 300-301

모욕하는 것과 모욕당하는 것 - 모욕하고 나중에 용서를 비는 것이 모욕당하고 용서해주는 것보다 훨씬 기분 좋은 일이다. 전자를 행하는 사람은 힘을 과시하고 그 뒤에 성격이 호의적임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후자는, 만약 그가 비인간적이라고 인정받지 않으려면, 이미 용서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강박관념 때문에 상대방을 굴복시킨 데 대한 즐거움도 적어진다. 303

사교 모임 후의 양심의 꺼림직함 - 왜 우리는 일반적인 사교 모임 후에 꺼림칙함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우리가 중대한 사실을 가볍게 받아들였기 때문이거나, 인물들에 대하여 논의할 때 완전히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는 말을 해야 했을 때 침묵했기 때문이며, 적당한 시기에 일어나서 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사교 모임에서 마치 우리가 거기에 속하는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304

잘못 평가된다 - 자신이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가에 언제나 귀 기울이고 있는 사람은 항상 화가 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우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이미 잘못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들ㄷ조차고 자신들의 언짢음을 때로는 시기하는 말들로 표출한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우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그들이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의 판단은 많은 아픔을 준다. 왜냐하면 그 판단들은 아주 솔직하고 거의 사실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대자인 어떤 사람이 우리가 비밀로 하고 있는 점을 우리 자신처럼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처음에 그 불쾌한 기분은 얼마나 크겠는가! 304

오해된 정직함 - 대화를 하면서 자기 자신을 인용하는 것은("나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자만하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된다. 반면 그것은 자주 이와는 정반대의 근원에서 나온다. 그것은 적어도 그 순간을 과거의 어떤 순간에 속하는 묘안들로 장식하고 꾸미지 않으려는 정직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305

자만심의 징후로서 동정심의 요구 -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을 모욕하면서 처음에는 자신을 나쁘게 여기지 않기를, 두 번째에는 자신이 극심한 발작에 지배당하고 있으므로 동정해주기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의 자만심은 이렇게 멀리 나아간다. 306

소크라테스의 경험 - 인간은 한 가지 일에 대가가 되고 나면, 통상적으로 바로 그 때문에 대부분의 다른 일들에서는 완전히 무능해진다. 그러나 이미 소크라테스가 경험한 것처럼, 사람들은 정반대로 판단하고 있다. 이것이 대가들과의 교제를 즐겁지 않게 만드는 나쁜 상태다. 307-308

고귀함과 감사하는 마음 - 고귀한 사람은 감사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즐겁게 느끼고, 의무를 가질 기회들을 소심하게 피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후에 감사함을 표현하는 데에도 태연하다. 반면에 천박한 살마은 모든 의무를 지는 것에 대해 저항하거나, 후에 그 감사를 표현하는 데도 과장된 행동을 하거나 너무 고의적으로 애를 쓴다. 그런데 후자의 행동은 더 낮은 혈통 또는 억압된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들에게 보여진 호의가 그들에게는 은혜의 기적을 의미하는 것이다. 309-310

우정을 위한 재능 - 우정에 대해서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는 두 가지 유형이 드러난다. 한 가지 유형은 끊임없는 상승 속에서 어떤 발전 단계에서도 잘 어울리는 친구를 발견한다. 그가 이런 방법으로 얻은 일련의 친구들은 그들끼리 관계를 가지는일이 드물고 때로는 알력과 대립 상태에 빠진다. 이것은 나중의 발전 단계가 앞의 단계들을 지양하거나 해를 입히는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런 사람은 농담으로 사다리라고 불려도 좋을 것이다.
또 다른 유형은 전혀 다른 성격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매력을 발휘하여 하나의오나전한 동아리를 이룰 정도의 친구들을 얻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이 친구들은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들끼리 서로 친구가 된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으 ㄹ원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전혀 다른 성향과 본성들의 일체성이 어떻게든 이미 형성되어 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친구를 가지는 재능이 좋은 친구가 되는 재능보다 훨씬 가치 있다. 311

불만의 해소 - 어떤 일에서 실패한 사람은 실패의 원인을 우연으로 돌리기보다 차라리 다른 사람의 나쁜 의지로 돌리낟. 그의 화난 감정은 그가 실패한 게 사물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함으로써 가벼워진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복수를 할 수 있지만 우연에 의한 고통스러움은 억지로 삼ㅌ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주의 측근은 어떤 일에서 실패하면, 어떤 한 사람을 명목상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모든 궁신의 이익을 위하여 그를 희생시키곤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영주는 운명의 여신 자체에게는 복수를 할수가 없으므로 그의 불쾌감이 그들 모두에게 표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312

자만심 - 우리의 모든 좋은 수확을 망치는, 자만심이라 불리는 저 잡초가 자라나는 것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마우것도 없다. 왜냐하면 자만심은 진실한 마음에, 경의의 표현에, 호의적인 친근감에, 연애에, 친절한 충고에, 실수의 고백에, 남을 위한 동정에 들어 있기 때문이며, 그 잡초가 그 사이에서 자라나면 이 모든 아름다운 것이 반감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자만하는 사람, 즉 있는 대로 또는 인정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항상 계산을 잘 한다. 물론 그는 자신의 자만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보통 두려움 또는 편리함 때문에 그가 요구하는 정도의 존경을 그에게 표시하는 한, 순간적인 성과만은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나쁜 보복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그에게 주었던 가치에서 그가 정도를 넘어서 요구한 만큼을 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자만심을 꺾는 일보다 더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는 일은 없다. 자만하는 사람은 자신의 참으로 위대한 업적도 다른 사람의 눈에 의심스럽고 사소하게 보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흙 묻은 발로 그것을 짓밟기도 한다. 자랑스러운 행동이라 할지라도 오해받지 ㅇ낳고 자만으로 보이지 않을 가장 확실한 곳에서만, 예를 들어 친구와 아내 앞에서만 허용될 것이다. 왜냐하면 살마들과의 관계에서 자만심이라는 평판을 초래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손히 거짓말하는 것을 배우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나쁘다. 314-315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ㅇ벗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고 ㄷ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인 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ㅇ벗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고 ㄷ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ㅇ낳앗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이 ㄴ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없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곧 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인 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자유정신과 결혼 - 자유정신이 여성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나는, 자유정신이 고대의 예언하는 새처럼, 현재의 진정으로 생각하는 자 그리고 진리를 말하는 자로 혼자 나는 것을 선호할 것임이 틀림없다고 믿는다. 342

두 화음의 부조화 - 여성들은 봉사하고 싶어하고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자유정신은 봉사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 345



제8장 국가에 대한 조망

문화와 사회계층 - 더 높은 문화는 사회의 서로 다른 두 계층, 노동하는 계층과 여가를 지닌 계층, 즉 참된 여가를 가질 자격을 지닌 계층이 있는 곳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또는 좀더 강하게 표현하면 강제노동 게급과 자유노동 계급이 있는 곳에서만 성립할 수있다. 좀더 높은 문화를 생산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경우에는 행복의 분배에 대한 관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경우도 여가를 가진 계층이 고통을 더 잘 견뎌낼 수 있는 계층이며 고통을 받는 계층이고 현존에 대한 그들의 즐거움은 더 적으며 그들의 과제는 훨씬 더 크다. 353

전복하려는 사람들 중에서 위험한 사람들 - 사회 전복에 대해 숙고하는 사람들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자식들과 손자를 위해서 그 무엇을 달성하려는 사람들로 나누어보면, 후자가 훨씬 더 위험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욕이 없다는 믿음과 거리낌없는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들은 적당히 물리칠 수가 있다. 지배적인 사회는 그렇게 하기에 아직 충분할 정도로 부유하고 영리하다. 목표들이 비개인적인 것일 때, 위험은 즉시 시작된다. 비개인적인 관심을 가진 혁명가들은, 현존하는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모두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하며 따라서 그들보다 스스로가 우월하다고 느낄 수 있다. 363

대중의 위대한 사람 - 대중에게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리기 위한 방법은 간단하게 주어져 있다. 모든 상황에서 대중에게 아주 즐거운 그 무엇을 마련해주거나 또는 먼저 머리 속에 이것저것이 아주 즐거울 것이라는 생각을 넣어주고 그 다음 그것을 제공하면 된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곧바로 제공해서는 안 되며 최대한의 노력으로 그것을 쟁취하거나 아니면 쟁취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좋다. 강력하고 게다가 정복하기 어려운 하나의 의지력이 거기에 있다는 인사을 대중이 받아야만 한다. 적어도 그러한 의지력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라도 해야 한다. ㄱ상한 의지에는 누구나 다 감탄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모든 사람은 만약 자신이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과 자신의 이기주의에 더 이상 아무러 ㄴ한계가 없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강한 의지가 자신의 열망이 원하는 것에 귀 기울이는 대신 대중에게 아주 즐거운 그 무엇을 얻게 해준다는 것이 보이면, 사람들은 다시 한번 감탄하고 그들 자신의 행복을 원한다. 그 밖에도 그는 대중의 모든 특성을 가지고 잇다 .그래서 대중은 그의 앞에서 그만큼 수치심을 덜 느끼게 되고, 그는 그만큼 더 대중의 인기를 얻는다. 따라서 그는 난폭하고 질투하고 착취를 즐겨하며 음모를 좋아하고 아첨을 잘하고 비굴하고 교만하며 사정에 따라서는 이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다. 367-368

전복에 대한 이론에서의 망상 - 가장 자랑스럽고 훌륭한 인류의 신전이 저절로 드러나리라는 믿음 속에서 모든 질서의 전복을 열렬히 그리고 웅변적으로 촉구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공상가들이 있다. 이러한 위험한 꿈속에는 루소의 미신이 아직도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 미신은 기적적이고 근원적이지만 묻혀진 채 있는 인간 본성의 장점을 믿고, 그 묻혀진 채 있는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을 사회, 국가, 교육에 나타나는 문화의 여러 제도에 돌리낟.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그러한 모든 전복이 오래 전에 파묻혀버린 아득한 옛 시대의 처참함과 무절제 같은 가장 난폭한 에너지를 새로운 것으로 부활시킨다는 사실을 역사적 체험으로 잘 알고 있다. 즉 전복은 아마 지쳐버린 인류에게는 일종의 힘의 원천일 수는 있겠지만, 결코 인간 본성을 정리하는 자, 건축가, 예술가, 완성자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정리하고 정화하며 개조하는 경향이 있는 볼테르의 절도 있는 본서잉 아니라, 루소의 정열적인 어리석음과 반쯤의 거짓말들이 혁명의 낙관주의적 정신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 정신에 대하여 "그 비열한 자를 굴복시켜라!"고 외친다. 그 정신 때문에 계몽 정신과 진보적 발전의 벙신은 오랫동안 축출되었다. 우리는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서 그 정신을 다시 불러오게 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주시하자! 368-369

학교 제도 - 큰 국가들의 학교제도는 항상 기껏해야 평범한 수준일 뿐이다. 그것은 큰 부엌에서 기껏해야 평범한 정도의 음식이 만들어지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이다. 370

행복의 시간들 - 행복한 시대가 전혀 불가능한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단순히 원하기만 할 뿐, 가지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개인은 그에게 조흔 날들이 찾아오면 틀림없이 불안과 비참함을 기원하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운명은 행복한 순간을 맏을 준비가 되어 있다. 모든 삶에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러나 행복한 시대를 맞을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대는 '산의 저편'으로 그리고 조상들의 유산으로 인간의 상상속에 존속해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한 시대라는 개념은 아마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간이 사냥과 전쟁으로 심하게 긴장한 후, 휴식에 몸을 맡기고 팔다리를 뻗으며 잠의 날개가 자신의 주위에서 소리내는 것을 듣는 그런 상태에서 추측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 오랜 습관에 따라서 그가 이제 고통과 수고의 모든 시간 후에도 역시 거기에 상응하는 상승과 지속 속에서 그 행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추론이다. 371-372

종교와 정부 - 국가 또는 좀더 명백히 말해서 정부가 미성숙한 많은 사람들의 후견인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을 위해서 종교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폐지할 것인지를 숙고해보는 한, 정부는 항상 거의 확실히 종교를 유지하는 쪽으로 결정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상실, 결핍, 두려움, 불신의 시간들, 즉 정부가 개인의 마음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하여 직접적으로 그 무엇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바로 그곳에서 개별적인 심정을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편적이고 피할 수 없으며 우선은 불가항력적인 재난(식량난, 금융위기, 전쟁들)에서까지도 종교는 진정시키고 기다리며 신뢰하는 태도를 대중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국가 정부의 필연적 또는 우연적 결함들이나 왕조의 관심사들이 낳은 위험한 결과들이 통찰력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서 그를 반항적으로 만드는 모든 곳에서, 통찰력이 없는 사람들은 신의 손가락을 보게 될 것으로 믿고 위의(이 개념에는 보통 신적 통치 양식과 인간적 통치 양식이 융합되어 있다) 지시들에 인내하면서 복종하게 될 것이다. .. 대체로 국가는 사제들을 끌어들이는 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사제들을 끌어들이는 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사제들의 가장 개인적이고 은밀한 영혼의 교육이 필요하고, 겉으로 보아 외면적으로는 전혀 다른 관심을 대표하고 있는 시종들을 존중하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국가가 종교에서 더 이상 아무 이익도 스스로 끌어내서는 안 될 경우나, 종교적 조치를 취하느 ㄴ데 정부에게 같은 종류의 통일적인 방법이 허용되어서는 안 될 정도로 국민이 종교적 사실들에 대하여 너무 다양하게 생각하고 있을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종교를 사적인 일로 취급하고 각 개인의 양심과 습관에 넘겨야 하는 타개책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제일 먼저 종교감각이 강화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국가가 무심코 또는 고의적으로 생명의 공기를 기꺼이 허락하지 않았던 은폐되고 억압된 종교감정의 동요가 이제 터져나와 극단적으로까지 무절제해진다. 나중에는 종교가 종파들로 뒤덮이게 되고, 종교가 개인적인 문제가 된 그 순간에 용의 이빨이 뿌려졌다는 많은 사실이 입증된다. 싸움의 광경과 종교적 신조가 지닌 모든 약점에 대해 적개심에 차 폭로하는 것은 결국 더 뛰어난 자와 재능이 있는 자로 하여금 비종교성을 개인적인 무넺로 삼게 하는 타개책만을 허용할 뿐이다. 이러한 의향은 통치하는 사람들의 정신에서도 역시 만연하게 되고, 거의 자신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그들이 하는 조처들에 반종교적인 성격을 주게 된다. 이 현상이 나타나면 곧 과거에는 국가를 반쯤 또는 완전히 신성한 그 무엇을 우러러보았던, 여전히 종교적으로 감동되어 있던 사람들의 분위기는 결정적으로 반국가적인 분위기로 변한다. 그들은 정부의 조치에 대해 동정을 살피고 있다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많이 방해하고 충돌하며 교란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반대파와 비종교적인 사람들을 그들의 항의의 열기를 통하여 국가에 대한 거의 광적인 감격으로 몰아넣는다. ...
모든 통치자들에 대한 불신, 단기간의 투쟁들이 보여주는 무익하고 소모적인 것에 대한 통찰은 사람들로 하여금 와전히 새로운 결심들, 즉 국가 개념의 폐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대립하는 것을 지양하도록 몰라갈 것이 분명하다. 사적인 단체들이 한 단계씩 국가의 업무들을 자신 속으로 끌어들인다. 결국 낡은 통치 활동에서 남아 있는 가장 끈질긴 잔여물(예를 들면 사적인 인간들이 사적인 인간들을 확실히 지켜야 하는 저 활동)까지도 언젠가는 사적인 기업가에 의해 처리될 것이다. 국각의 경시와 붕괴, 국가의 죽음 그리고 사적인 인간(모든 인간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합리성과 불합리성을 잉태하고 있는)를 달성하고 오래된 병이 재발하는 것을 모두 극복하고 나면 인류의 이야기책에는 새로운 한 장이 펼쳐지고 거기서 사람들은 온갖 종료의 기이한 역사들과 아마 몇 개의 좋은 이야기도 읽게 될 것이다. 372-376

수단의 관점에서 본 사회주의 - 사회주의는 거의 노쇠해버린 전제주의의 뒤를 이르려는 공상적인 동생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노력들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반동적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전제주의만이 가졌던 것과 같은 국가 권력의 충만함을 갈망하기 때문이며, 개인의 진정한 파멸을 추구함으로써 과거의 모든 것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사회주의에게는 자연의 부당한 사치로 나타나며 사회주의에 의해서 하나의 합목적적인 공동체의 기관으로 개조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유사성 때문에 사회주의는 항상 고대의 전형적인 사회주의자 플라톤이 시칠리아의 전제군주의 궁정에 나타났던 것처럼, 모든 권력 발전의 과도기적인 주변에서 나타난다. 사회주의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저넺주의의 후계자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 세기의 독재 권력국가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촉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유산조차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사회주의에는 아직 한 번도 그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가장 겸손한 복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국가에 대한 진부한 종교적 경건함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현존하는 국가들을 제거하는 데 힘써야 하므로 그러한 경건함을 제거하기 위하여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 때문에 사회주의는 단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극단적인 테러리즘을 통하여 여기저기에 한 번씩 존재하기를 희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은밀히 공포정치의 조짐을 보이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대중에게 머리에 못을 박듯이 '정의'라는 단어를 머리 속에 박아둔다. 그것은 그들의 오성을 오나전히 빼앗아버리고 (오성이 이미 이 얼치기 교양으로 인해 심하게 손상을 입은 뒤에), 그들이 해야 하느 ㄴ나쁜 장난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이다. 사회주의는 국가 권력의 모든 축적의 위험을 실로 난폭하고 적나라하게 가르치고, 그러한 한 국가 그 자체에 대한 불신삼을 품게 할 수가 있다. 만약 사회주의의 거친 목소리가 '가능한 한 많은 국가를' 이라는 함성으로 다가오면, 그 함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시끄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곧 그것과 반대되는 '가능한 한 적은 국가를' 이라는 함성이 더 큰 힘으로 터져나올 것이다. 378-379



제9장 혼자 있는 사람

진리의 적들 - 신념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391

너무 집착하지 않도록 - 어떤 일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그 일에 충실한 것은 드문 일이다. 그들은 단지 그 깊이를 밝혔을 뿐이다. 항상 그곳에는 매우 불쾌한 것이 보인다. 392

의도하지 않은 고결함 -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들에게 항상 베푸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고결한 행동을 하게 된다. 394

친구 - 동정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기쁨이 친구를 만든다. 395

가장 고귀한 위선자 -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고귀한 위선이다. 396

인간의 운명 -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위하고 판단하더라도, 좀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부당함을 알고 있다. 399

위대함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 어떤 강물도 자기 자신에 의해 크고 풍부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주 많은 지류들을 받아들이며 계속 흘러가는 것, 그것이 강물을 그렇게 만든느 것이다. 모든 정신의 위대함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그 많은 지류들이 뒤따라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다. 그가 처음부터 재능이 없는지 재능이 풍부한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400

너무 큰 목표들 - 공개적으로 큰 목표들을 세우고 그 후 비밀리에 자신은 그것을 하기에 너무나 약하다는 사실을 통찰하게 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그 목표들을 공개적으로 철회하기에 충분한 힘도 가지고 있지 않고 그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위선자가 되어버린다. 405

강물의 흐름 속에서 - 세차게 흐르는 물은 많은 암석과 관목숲을 휩쓸고 가며, 강한 정신은 수많으 ㄴ어리석은 사람들과 명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휩쓸고 간다. 405

정신의 육체화 - 한 사람이 많이 그리고 현명하게 사고하면 그의 얼굴뿐만 아니라 현명한 모습을 얻게 된다. 406

잘 보지 못하고 잘 듣지 못하는 것 -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은 점점 더 적게 보게 되고, 잘 듣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몇 가지를 더 듣게 된다. 406

허영심의 자기만족 - 허영심에 차 있는 사람은 탁월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탁월하다고 느끼기를 원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기만과 자기계략의 수단을 거부하지 못한다. 그에게 잊혀지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다. 406

예외적으로 허영심에 차 있는 - 보통 자기를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육체적으로 병에 걸리게 되면, 예외적으로 허영심에 차게 되며 평판과 칭찬에 대해 민감해진다. 그가 자신을 상실해가는 정도 만큼 그는 다른 사람의 의견 즉 외부에서 다시 자신을 되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406-407

유일한 인간의 권리 - 관습적인 것에서 벗어난 사람은 비범한 것에 바쳐진 제물이다. 관습적인 것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관습적인 것의 노예이다. 어떤 경우든 사람들은 파멸하게 되어 있다. 408

얼치기 지식 - 외국어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은 외국어를 훌륭하게 말하는 살마보다 외국어에 대해 더 큰 즐거움을 가지고 있다. 얼치기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만족이 있다. 408

의심을 품는 것 - 사람들은 좋아할 수 없는 인간들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으려고 한다. 409

친구가 없는 것 - 친구가 없는 것은 질투와 자만심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그가 질투할 아무런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다행스러운 상황 덕으로 친구를 가지고 있다. 410

참회 -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나면 그 죄를 잊어버린다. 그러나 대개 다른 사람은 그의 죄를 잊지 않는다. 412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 인간은 사랑하는 것과 호의를 베푸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젊어서부터 배워야 한다. 만약 교육과 우연이 우리에게 이런 감각을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을 때 우리의 영혼은 메마르고 친절한 사람들의 섬세한 감각을 이해하는 데도 적합하지 못하게 된다. 424

다른 사람과 세상에 대한 불만 - 우리가 원래는 자신에게 불만을 느끼고 있으면서, 흔히 그러듯이 다른 사람에게 불만을 터뜨린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판단들을 흐리게 만들고 기만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후에 다른 사람의 실수와 결점을 통해 이 불만에 동기를 부여하려 하고, 자기 자신을 보려 하지는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 가차없는 재판관이기도 한 종교적으로 엄격한 사람들은 동시에 인간성 일반에 대해 가장 많이 나쁜 욕을 해왔다. 자신에게는 죄를, 다른 사람에게는 덕을 남겨주는 성자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부처의 법도에 따라 자신의 선을 사람들 앞에서 숨기고, 자신의 악만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사람도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426

고독한 사람들 -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함께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져서 자신을 다른 사람과 전혀 비교하지 않고 조용하고 즐거운 기분으로 자기 자신과 좋은 대화를 나누며, 게다가 웃음을 지으며 독자적인 삶을 엮어 나간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하면 자기 자신을 구차하게 과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 관한 유익하고 정당한 의견을 남에게서 비로소 다시 배우도록 강요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그들은 배워 익힌 이 의견에서도 되풀이해서 조금 빼거나 값을 깎으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혼자 있음을 기꺼이 허락해야만 하지만 흔히 일어나는 일처럼 그 때문에 불쌍히 여기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아야만 한다. 436

방랑자 - 어느 정도 이성의 자유에 이른 사람은 지상에서는 스스로를 방랑자로 느낄 수밖에 없다. 비록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하여 여행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왜냐하면 이와 같은 목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세상에서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주시하고 그것에 대하여 눈을 크게 뜨고 보려 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개별적인 것에 너무 강하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 변화와 무상함에 대한 기쁨을 가진 방랑하는 그 무엇이 그 자신 속에 존재함이 틀림없다.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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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나의 치유와 자기 회복을 위해 언제나 내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고립되어 있고, 고립된 시선으로 보지 않으려는 신념이었다.  10


우리는 ‘자유정신’의 유형이 언젠가 완전해질 때까지 성숙하고 단 맛을 낼 수 있도록 정신이 어떤 위대한 해방 속에서 결정적인 사건을 겪었으며 그 사건이 전에는 얼마나 속박된 정신이었고 귀퉁이와 기둥에 영원히 묶여 있었을 것처럼 보였는지 추측할 수 있다. 무엇이 가장 단단하게 묶을까? 완전히 잘라버릴 수 없는 밧줄은 어떤 것일까? 고상하고 선택된 부류의 인간에게 그것은 의무가 될 것이다. 젊음에 어울리는 외경심, 오랫동안 숭배하고 가치를 부여해온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나약함, 자신들이 성장했던 땅, 자신들을 이끌어주었던 손길, 숭배를 배웠던 성전 등에 대한 감사, 바로 그들의 최고의 순간 그 자체가 그들을 가장 단단히 묶고 가장 지속적으로 의무를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위대한 해방은 이처럼 속박된 것에 마치 지진처럼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 그러면 젊은 영혼은 단 한번에 동요되고 분리되어 떨어져버리고 만다 - 그들 자신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충동과 혼란이 그 영혼을 지배하고 그에게 명령하는 주인이 되어 버린다 ; 의지와 소망은 어떻게든 그리고 어디로든 나아가려고 눈을 뜨게 된다 ; 미지의 세계를 향한 불굴의 모험적인 호기시이 그의 모든 감각에서 불타오르고 불꽃이 흔들거린다. “여시거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 이렇게 단호한 목소리와 유혹이 울려퍼진다. ‘여기’그리고 ‘집에’라는 말은 그가 지금껏 사랑해온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가 사랑해왔던 것에 대한 갑작스런 공포와 의심, 의무로 불렸던 것에 대한 섬광 같은 멸시 그리고 방랑, 타향, 소외, 냉각, 환멸, 냉담에 대한 선동적이고 의식적이며 화산처럼 솟구치는 욕망, 사랑을 향한 증오심, 아마도 자신이 지금까지 숭배했고 사랑했던 곳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신전모독과 같은 행동과 눈초리, 아마도 자신이 방금 한 일에 대한 불타오르는 수치심과 동시에 그 일을 해냈다는 기쁨 그리고 그 승리를 알림으로써 느끼는 더할 나위없는 내면적인 기쁨의 전율이다 - 승리라고? 무엇에 대한, 누구에 대한 승리란 말인가? 그것은 수수께끼 같이 의문스럽고 모호한 승리이긴 하지만 어쨌든 최초의 승리이다 : - 위대한 해방의 역사에는 이와 같은 아픔과 고통이 따른다. 해방은 동시에 인간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하나의 병이기도 하다. 스스로 정의하고 스스로 가치를 정립시키려는 힘과 의지가 만드는 이 최초의 폭발, 자유로운 의지를 향한 이 의지 : 그리고 풀려난 자, 해방된 자가 이제부터 자신이 사물을 지배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할때 그의 거침없는 시도와 기묘한 행동에는 얼마나 많은 질병이 나타날 것인가! 그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으로 무섭게 배회한다 ; 그의 긍지의 위태로운 긴장 상태는 그가 약탈하는 것으로 보상되어야만 한다. 그는 자신을 자극하는 것을 파괴해버린다. 그는 자신이 은폐하는 것, 부끄러움 때문에 간직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을 악의에 찬 미소로 뒤집어버린다 : 그는 만약 이러한 사물들을 뒤집어버리면 그것들이 어떻게 보일 것인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지금까지 좋지 못한 평판을 받아온 것에 자신의 명예를 되돌려놓으려고 한다면, 그리고 호기심으로 시험해보려는 듯이 가장 금지된 것의 주위로 몰래 기어 들어가려 한다면 거기에는 자의와 자의에서 나오는 쾌감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의 행동과 방황의 배후에는 더욱 위험한 호기심의 의문부호가 자리잡는다. 왜냐하면 그는 마치 황야에서처럼 불안하면서도 정처없는 행로의 중간에 있는 것이므로. ‘모든 가치를 뒤집을 수는 없는 것일까? 아마도 선은 악이 아닐까? 그리고 신은 악마의 발명품일 뿐이거나 악마를 더욱 고상하게 만들어놓은 것은 아닐까?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허위가 아닐까? 또 우리가 속았다면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동시에 속이는 자가 아닐까? 우리는 속이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 이런 생각이 그를 인도하고 더욱 멀리, 더욱 빗나가도록 그를 현혹한다. 고독이 그를 겹겹이 에워싼다. 저 무시무시한 여신이자 잔인한 정념의 어머니인 고독이 그를 더욱 위협하고 목을 조르고 심장을 짓누른다. - 그러나 고독이 무엇인지를 지금 어느 누가 알겠는가? ...


이러한 병적인 고립 상태와 황량하기만 한 시험기에서 벗어나, 저 흘러 넘치는 섬뜩한 확실성과 가히 질병마저도 포괄하는 건강성에 이르는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질병은 인식의 수단이며 인식을 낚는 낚싯바늘로서 반드시 필요하다. 자기 통제와 심정의 수양이며, 수없이 많은 대립적인 사유방시에 이르는 여러 길을 허용하는 그 성숙한 정신의 자유에까지 이르는 길은 멀다 - 정신이 자신의 길에서도 자신을 잃고 방탕하며 어느 한 구석에 취한 듯 주저앉아 버리게 될 위험을 몰아낼 수 있는 저 넘치는 풍요함의 내면적인 광대함과 자유분방함에 이르게 될 때까지의 길은 멀다. 그리고 위대한 건강의 표시인 저 유연하고 병을 완치하며 모조해내고 재건하는 힘이 넘쳐흐르기까지의 길도 아직 멀다. 그렇게 넘쳐흐르는 힘은 자유정신으로 하여금 시험에 삶을 걸고 모험에 몸을 내맡겨도 된다는 위험스런 특권을 부여한다. 그것은 자유정신의 거장다운 특권이다! 그 사이에는 긴 회복기가 놓여 있다. 그 시간은 고통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이고 다체로운 변화가 가득하여, 벌써 건강이라는 옷을 입고 위장을 한 강이한 건강을 향한 의지에 지배되고 규제되는 시간들이다. 거기에는 나중에 이러한 운명을 가진 한 인간을 감동 없이는 회상할 수 없는 중간 상태가 있다 : 거기에는 창백하고 섬세한 빛과 태양의 행복이 속해 있다. 즉 새의 자유, 새의 조망, 새의 오만에서 나온 감정과 호기심과 갸날픈 멸시의 감정이 얽힌 제3의 감정이 있다. ‘자유정신’ - 이 차가운 단어는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편안하며 따뜻하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랑과 증오의 속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마음대로 가까이 가고 멀어지며, 기꺼이 도주하고 피해다니며 날아다니고 다시 사라지거나 또다시 높이 날아오르며 사는 것이다 ; 사람들은 언젠가 자신 가운데에서 엄청난 다양성을 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변하게 된다. - 그러고는 자신과 무관한 사물을 걱정하는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자유정신을 괴롭히지 않는 그런 것과 관계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


한 단계 더 회복되면, 자유정신은 다시 삶에 천천히, 거의 반항적으로, 거의 의심스러운 듯 가까이 다가간다. 그의 주위는 다시 점점 따뜻해지고 마치 노란색 같은 빛을 띠게 된다 ; 감정과 공감은 깊어지고, 눈을 녹이는 듯한 온갖 바람이 그 위로 지나간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주위에 처음으로 눈을 뜬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그는 놀란 채 조용히 앉아 있다 : 도대체 그는 어디에 있었던가? 이 친근하고 가장 가까운 사물들 : 그 사물들이 그에게 얼마나 달라 보이는가! 그것들은 그 사이에 어떤 솜털과 매력을 얻었는가! 그는 감사하며 뒤를 돌아본다 - 자신의 방랑과 고집, 자기소외, 자신이 차가운 하늘을 새처럼 날며 멀리 보았던 것에 감사하며. 그가 나약하고 우둔한 게으름뱅이처럼 언제나 ‘집에’, 언제나 ‘제정신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던 것은 얼마나 잘한 일인가! 그는 자신을 잊고 있었다 :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서야 그는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 그때 그는 거기서 얼마나 놀라운 것을 발견하는가! 미지의 전율! 회복기에 있는 사람이 느끼는 피로감과 오랜 질병 그리고 병이 재발한 가운데 느끼는 행복! 고통에 쌍 조용히 앉아 인내심을 키우는 일과 햇빛 아래 누워 있는 일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누가 겨울의 행복과 벽에 드리워진 햇빛의 얼룩을 그만큼 잘 알 수 있단 말인가! 삶을 향하여 다시 몸을 반쯤 돌린 이 회복기에 있는 자, 즉 도마뱀이야말로 세사에서 가장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가장 겸손한 동물인 것이다 : - 그들 중에는 질질 끌리는 옷자락에 작은 찬가를 달고 다니지 않으면 하루도 못 견디는 자도 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 이러한 자유정신의 기질을 가지고 병에 걸려 한동안 앓고 나서, 그 후에 더 오랫동안 건강하게, ‘더욱 건강하게’ 되는 것이 모든 염세주의(알려진 것처럼 염세주의는 낡은 이상주의자와 거짓말쟁이의 암이다)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법이다. 그 속에 있는 지혜, 즉 삶의 지혜는 오랜 기간 동안 소량의 약만으로 건강 자체를 처방한다는 것이다.  12-17



제1장 최초와 최후의 사물들에 대하여


인류는 유래와 기원에 관한 질문을 의식에서 몰아내고 싶어한다. 그 반대의 경향을 자기 속에서 느끼게 되려며 ㄴ우리는 거의 탈인간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24


철학자들의 유전적 결함 - 철학자가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두 근본적으로 극히 제한된 시기의 인간에 대한 증언에 불과하다. 여갓적 감각의 결여는 모든 철학자가 지닌 유전적 결함이다.  .. 절대적 진리가 없는 거소가 마찬가지로 영원한 사실도 없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역사적으로 철학하는 일이 필요하며, 그와 동시에 겸양의 덕이 필요하다.  24-25


현상과 물 자체 - 수천 년 전부터 우리는 도덕적, 미학적, 종교적 요청과 맹목적인 애착, 정열 또는 경외감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았으며 비논리적인 사고의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세계는 점차 이처럼 이상할 정도로 다채롭고, 끔찍하게 의미심장하고 감정이 넘치게 되었다. 세계가 색채를 띠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색을 칠한 사람은 우리였던 것이다. 인간의 지성이 현상을 나타나게 했으며, 근본적인 자신의 해석을 사물 속으로 끌어들였다.  38


회의(懷疑 품을회 의심의)의 추정적 승리 - 한 번쯤은 회의적인 출발점을 인정해보라. 만약 다른 형이상학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고 우리에게 알려진 유일한 세계에 대한 모든 형이상학에서 나온 설명들이 전적으로 소용없는 것이라면, 그때 우리는 어떤 눈길로 인간과 사물들을 보게 될 것인가?  44


비교하는 시대 - 사람들이 관습에 묶이지 않을수록 그만큼 동기의 내면적 운동은 활발해지며, 그에 상응하여 외적 불안정, 인간의 뒤얽힌 혼란, 노력의 다성음악도 그만큼 커진다. 자기 자시이 있는 곳에 자신과 후손을 묶어두는 엄격한 강제성이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 존재하는가? 도대체 누구에게 아직도 무엇인가 엄격하게 속박하는 것이 존재하는가? 모든 종류의 예술양식이 나란히 모조되고 있다. 모든 단계나 모든 종류의 도덕, 관습, 문화 또한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시대는 서로 다른 세계관, 도덕, 문화가 비교될 수 있고 나란히 체험될 수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 고뇌를 두려워하지 말자! 오히려 시대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과제를 우리는 가능한 한 크게 생각하도록 하자.  46-47


꽃잎의 향기에 취해서 - 종교와 예술은 세계의 꽃이지만, 그것이 줄기보다 세계의 뿌리에 더 가까운 것은 결코 아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종교와 예술로 사물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는 없다. 오류는 종교와 예술과 같은 꽃을 피우게 할 만큼 인간을 깊고 섬세하며 상상력이 풍부하게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53


추리할 때의 나쁜 습관들 - 사람들이 가장 흔히 범하는 오류 추리는, 어떤 사항이 실재하므로 그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53


비논리적인 것은 불가피하다 - 비논리적인 것이 인간세계에 필요하며 비논리적인 것에서 좋은 것이 많이 생겨난다는 인식은 사상가를 절망에 빠뜨릴 수도 있는 것 중 하나다. 비논리적인 것은 정열, 언어, 예술, 종교 등에 그리고 대체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에 상당히 깊이 파고들어 가 있어서, 이들 아름다운 것들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주지 않고는 비논리적인 것을 퇴치할 수 없다.  54


불공정함은 불가피하다 - 어떤 사람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 대해 우리가 겪은 경험은 총체적 평가를 위한 논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할만큼 완전할 수는 없다. 모든 평가는 성급하며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재는 척도, 즉 우리의 본질이라는 것은 결코 불변의 크기를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분위기와 동요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에 대한 어떤 사항의 관계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확실한 척도라고 믿어야만 한다. 아마 이상의 모든 면에서 본다면 사람은 전혀 판단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평가하지 않고, 혐오와 애착 없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든 혐오는 모든 애착과 마찬가지로 역시 평가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처음부터 비논리적인, 따라서 불공정한 존재이며,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현존재의 가장 크고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부조화 중의 하나이다.  55-56




제2장 도덕적 감각의 역사에 대하여


매우 진지한 개인과 민족에게 가벼움이 필요하듯, 마찬가지로 다른 부류에 속하는 매우 자극받기 쉬운 자와 동요하기 쉬운 자에게는 자신들의 건강을 위해 가끔 무겁게 짓누르는 짐이 필요하다. 점점 불길에 휩싸여가는 시대의 우리 더욱 정신적인 인간들은 우리가 적어도 지금처럼 부단히 악의 없고 절도를 지키녀 살아갈 수 있도록, 또한 이 시대에 거울과 자기반성으로서 이바지할 수 있도록, 불을 끄고 식히는 존재하는 모든 수단들을 잡기 위해 손을 뻗어야만 하지 않을까?  68


예지적 자유에 대한 우화 - 소위 도덕적 감각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주요 단계를 거친다. 첫째, 사람들은 동기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개별 행위를 단지 이롭거나 해로운 결과들에 의해 선 또는 악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 이런 명칭의 유래를 잊고, 그것의 결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행위 자체에 ‘선’ 또는 ‘악’의 특징이 내재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한다. 언어가 돌 자체를 단단하다고, 나무 자체를 푸르다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오류다. 즉 그렇게 함으로써 결과를 원인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선함 또는 악함을 동기 속에 집어 넣고, 행동 자체가 도덕적으로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사람들은 선하다, 악하다는 술어를 개별 동기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 전체에 부여한다. 식물이 흙에서 자라는 것처럼, 인간의 본질에서 동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은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 다음에는 행위에 대해서, 다음에는 동기에 대해서,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차례차례 책임을 묻는다. 결과적으로 인간들은 이 본질 역시 필연적인 결과이며, 과거와 현재의 사건들의 여러 요소와 영향으로 결합되어 있는 이상, 그것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곧 인간은 어떤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본질, 동기, 행위, 나아가서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로써 도덕적 감각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이자 책임성에 관한 오류의 역사이며, 그것은 의지의 자유에 관한 오류에서 나오고 있다는 인식에 이른다. ... 불만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만은 행동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필요는 없다는 잘못된 전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므로 후회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불만은 인간이 고칠 수 있는 습관이다.   69-70


친절의 경제학 - 인간의 교제에서 가장 효험 있는 약초이며 힘으로 간주되는 친절과 사랑은 대단히 가치 있는 발견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마 이 향기로운 약을 가능한 한 경제적으로 사용하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친절의 경제학이란 가장 무모한 몽상가의 꿈이다.  76


동정을 유발시키려고 하는 것 - 로슈푸코의 (그리고 플라톤의)판단에 의하면 동정이란 영혼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동정을 입증해야 하지만, 동정을 갖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낟. 왜냐하면 불행한 사람들은 어쨌든 동정을 보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큰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여길 정도로 어리석기 때문이다. ... 동정에 대한 열망은 자기 만족을 향한 열망이며, 더욱이 이웃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동정심은 지극히 자기애에 빠져 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라 로슈푸코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음"때문은 아니다.  78


진리의 명목상의 단계들 - 흔히 있는 잘못된 추리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누군가가 우리에 대해서 진실하고 솔직하기 때문에 그는 진리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부모의 판단을 믿고 그리스도교도는 교회 창설자의 주장을 믿는다. 이처럼 사람들은 지난 몇 세기 동안 행복과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옹호해온것이 모두 오류에 불과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것이 진리의 단계였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무엇인가를 믿고 자신의 믿음을 위해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을 경우에, 사실은 단지 오류가 그를 부추겼을 뿐이었다면, 이것은 너무나 부당한 일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이런 과정은 영원한 정의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민감한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정신과는 반대로 다음의 명제를 명령한다. 즉 도덕적 행위와 예지적 통찰 사이에는 철저하게 필연적이 ㄴ유대가 이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영원한 정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81


거짓말 -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신이 거짓말을 금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거짓말에는 날조, 위장, 기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위프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짓말을 하는자는 자신이 져야 할 무거운 짐에 관해서는 거의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즉 그는 하나의 거짓말을 주장하기 위해서 또 다른 스무 개의 거짓말을 생각해내야 한다.) 다음으로 단순한 상황에서는 나는 이것을 원한다, 내가 이것을 했다 등으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유리하며, 따라서 강제와 권위를 택하는 편이 교활한 방법보다 훨씬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한 어린이가 복잡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면 그는 이와 같이 자연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언제나 자기에게 이익이 되게끔 말한다.  82


자기분할로서의 인간의 도덕 - 진정으로 자신의 일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작가는 누군가가 찾아와서 그 일을 더 명확하게 표현해주고, 여기에 포함된 문제에 대해 남김없이 대답함으로써 자신을 파괴해주기를 원한다. 사랑을 하고 있는 소녀는 연인이 저지른 부정에서 자신이 사랑이 헌신적이며 충실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군인은 조국의 승리를 위해 전쟁터에서 쓰러지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최고 소원도 조국의 승리를 통해 승리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 즉 수면과 가장 좋은 음식을, 사정에 따라서는 자신의 건강과 재산을 자식에게 주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비이기적인 상황들일까? 쇼펜하우어의 말에 따라 이런 도덕적 행위들은 "불가능하면서도 현실적"이기 때문에 기적일까? 이들의 경우에는 인간은 자신의 그 무엇을, 하나의 사상, 하나의 욕망, 하나의 작품 등을 자신의 다른 것보다 한층 더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분할해서 한쪽을 다른 한쪽의 희생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이 명확하지 않은가? 어느 고집 센 사람이 "내가 이 인간에게 한 걸음이라도 길을 양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총에 맞는 편이 낫다"고 할 때,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일까? 어떤 것에 대한 애착(소원, 충동, 욕망)은 앞서 말한 모든 경우에 존재하고 있다. 애착을 가지는 것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비이기적"이지 않다. 도덕에서 인간은 자신을 분할할 수 없는 것, 개체(individuum)로서가 아니라 분할할 수 있는 것(dividuum)으로서 다룬다.  85


약속할 수 있는 것 - 행동은 약속할 수 있으나 감정은 약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감정은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항상 사랑하겠다거나 미워하겠다거나, 항상 그에게 충실하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은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행동은 약속할 수 있다. 이런 행동은 대체로 사랑, 증오, 충실함의 결과이지만, 한편 다른 동기에서 나올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여러 방법과 동기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익르어주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언제까지나 사랑하겠다는 약속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한 나는 너에게 사랑의 행위를 입증할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ㅇ낳게 되더라도, 다른 동기에 의해서일지라도 나는 똑같은 행동을 너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변하지 않으며 언제까지나 똑같은 것이라고 하는 가상이 상대방의 머리 속에는 존속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기만 없이 누군가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경우, 그것은 사랑의 가상에 대한 외관상의 지속을 약속하는 것이다.  86


지성과 도덕 - 주어진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좋은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 동정심을 가지려면 강력한 상상력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도덕은 지성의 우수함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86


복수하기를 원하는 것과 복수하는 것 - 복수심을 품는 것과 복수를 실행하는 것은 격렬한 열병의 발작에 걸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지나가버린다. 그러나 복수를 실행할 힘과 용기가 없는데도 복수심을 품는 것은 만성병, 육체와 영혼의 중동증을 안고 있는 것과 같다. 의도만을 중시하는 도덕은 두 경우를 양이 같은 것으로 평가하고, 통상적으로 전자의 경우를 더 나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아마도 복수의 행동이 수반할지도 모르는 나쁜 결과 때문일것이다). 두 가지 평가 모두 근시안적이다.  87


사랑과 정의 - 왜 인간은 정의를 손상시켜가면서 사랑을 과대평가하고, 마치 정의보다 사랑이 더 고상한 본질들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랑을 향해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분명히 사랑은 정의보다 훨씬 더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틀림없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그만큼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것이다. 사랑은 어리석은 것이며, 풍부한 풍요의 뿐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이 뿔에서 자기의 선물을 누구에게나 나누어준다. 그가 그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 번도 그것을 감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성서와 경험에 의하면 사랑은 정의롭지 못한 사람뿐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는 정의로운 사람에게도 피부 속까지 흠뻑 젖게 하는 비처럼 공평하다.  91


피해자와 가해자의 착각들 -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서 어떤 소유물을 (예를 들면 영주가 서민한테서 연인을) 빼앗을 경우, 가난한 자는 착각을 한다. 자신이 소유한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빼앗아갈 정도로 그 사람은 참으로 흉악한 사람임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자느 ㄴ개개의 소유물의 가치를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사람의 입장을 생각할 줄 모르며, 가난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심하 ㄴ부정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양자 모두 서로에 대하여 잘못된 표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분갷살 만한 권력자의 부정도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엄청난 것은아니다. 이미 물려받은 감각은 더 높은 것이 요구되는 더 고귀한 존재가 되기 위해 그들을 매우 냉정하게 만들고, 양심을 무디게 한다. 만약 우리와 다른 존재의 차이가 아주 크면, 우리는 모두 부정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어, 예를들어 모기 한 마리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죽이게 된다. 그래서 크세르크세스(Xerxes, 그리스 사람들조차 모두 그를 특별히 고귀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의 경우, 전체 원정군에게 불안하고 불길한 불신감을 조성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몸을 토막내게 한 것은, 그의 사악함의 표시가 아니다. 이런 경우에 한 개인은 마치 불쾌한 곤충처럼 제거된다. 세계의 지배자가 오래 느끼도록 자극하기에는 그는 너무나 무가치한 존재다. 그뿐 아니라 어떠 ㄴ잔인한 자도 학대받은 자가 믿고 잇는 그런 정도로 잔인하지 않다. 고통을 상상하는 것은 고통당하는 괴로우모가는 같지 않다. 공정하지 못한 재판간과 사소한 부정직함으로 인해 세상의 여론을 오도하는 저널리스트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원인과 결과는 이런 모든 경우에 잔혀 다른 감정과 사상들로 둘러싸여 있다. 반면 사람들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똑같이 생각하며 느낀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이 전제에 입각하여 한 사람의 죄를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특정한다  96-98


수치심의 예민함 - 사람들은 부정한 것을 생각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이런 부정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짐작하고 있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브끄러워할 것이다.  98


개개인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평을 통하여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자신 앞에서 입증하고 싶어 한다. .. 그들은 다른 살마의 판단력을 자신의 판단력보다 신뢰하고 있다.  100


성숙한 개인의 도덕 - 자신에게서 완전한 개인을 만들어내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최고의 행복을 주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동정적인 감동과 행위보다 그를 훨씬 더 진보시켜준다. 물론 우리 모두는 여전히 개인적인 것을 너무 사소하게 여기는 병을 앓고 있다. 그것은 잘못 교육되어온 것이다. 우리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자. 우리의 감각은 오히려 강제적으로 개인적인 것에서 분리되었으며, 마치 개인적인 것이란 희생되어야만 하는 나쁜 것이기라도 한 듯 국가, 학문,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희생물로 제공되었다.  104-105


인륜과 윤리적인 것 - 도덕적, 윤리적, 윤리학적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확립되어온 규범이나 관습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억지로 복종하는지 또는 기꺼이 복종하는지의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앟으며 그것을 실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사람들로 하여금 윤리적인 것과 비윤리적인 것, 선한 것과 악한 것의 구별을 가능하게 한 근본적 대립은 '이기적인 것'과 '비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관습과 규범에 구속되어 있는가 아니면 해방되어 있는가에 있다. 여기서 어떻게 관습이 성립된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쨌든 관습은 선과 악 또는 어떤 내재적 정언 명법을 고려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한 공동체, 한 민족을 유지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잘못 해석된 우연을 근거로 하여 성립된 모든 미신적 관례는, 그것을 따르는 것이 윤리적이라는 관습을 강요한다. 즉 관습에서 해방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공동사회에서는 개인의 경우보다 훨씬 더 해롭다. 모든 관습은 근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많이 잊혀질수록, 계속 더 존중할 만한 것이 된다. 그리고 관습에 바쳐지는 존중은 세대가 지남에 따라 쌓여, 관습은 마침내 신성한 것이 되며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어떤 경우든 경건의 도덕은 비이기적인 행위들을 요구하는 도덕보다 훨씬 더 오래된 도덕이다.  105-106


인륜 안에서의 쾌감 - 쾌감과 도덕성의 근원에 대한 중요한 부분은 습관에서 생겨난다. ... 인륜이란 쾌적한 것과 유익한 것의 결합체이며, 게다가 그것은 심사숙고할 필요가 없다.  106-107


소위 악한 행위에서의 무죄함 - 모든 '악한' 행위들의 동기는 보존 본능, 더 정확히 말해서 개인은 쾌감을 지향하고 불쾌감을 회피한다는 사실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그렇게 동기 규정된 것이라면 그것은 악한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고통을 주는 것'은 철학자들의 두뇌 속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쾌감을 가져다주는 것'(쇼펜하우어적인 의미에서 동정심)도 이와 마찬가지다. 국가 형성 이전의 상태에서 우리는,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나무로 모여들때 우리보다 먼저 그 나무의 열매를 빼앗으려는 자가 있으면 그가 원숭이든 인간이든 죽였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는 불모의 땅에서 방랑하게 될 경우 동물에 대해 그런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를 가장 분노하게 만드는 악한 행위들은, 그런 행위를 우리에게 가하는 상대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그의 의향에 따라 이런 나쁜 행동을 우리에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착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의향이라는 것에 대한 이 믿음은 증오, 복수심, 악의를 야기하고 상상력을 완전히 손상시킨다. 반면 우리는 동물에 대해서는 그렇게 격노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들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보존본능에서가 아니라 보복하기 위해 해를 가하는 것. 그것은 잘못된 판단의 결과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뵈가 없다. 개인은 국가 이전의 상태에서는 위협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가혹하고 잔인하게 다룰 수 있었다. 그것은 자기 힘을 위협적으로 시험해 보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 약한 자를 자신에게 굴복시키는 폭력을 행사하는 자, 권력자, 최초의 국가 설립자는 그렇게 행동한다. 오늘날에도 국가가 여전히 그렇게 행하고 있는 것처럼 거기에는 그럴 권리가 있다. 오히려 그것을 방해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예를 들어 사회, 국가와 같은 더 큰 개체와 집단적 개체가 개인을 굴복시켜서 그들의 개별성에서 그들을 이끌어내어 집단으로 흡수하게 되면, 비로소 모든 도덕성을 위한 토대가 제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도덕성에는 강제가 선행한다. 또한 도덕성 그 자체는 잠시 동안은 여전히 불쾌감을 피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순응하는 상제일 것이다. 나중에 그것은 인륜이 되고 훨씬 후에느 ㄴ자유로운 복종이 되며, 마침내는 거의 본느에 가까워지고 만다. 그때 그 도덕성은, 오랫동안 익숙해지고 자연적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쾌감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덕이라고 불린다.  109-110


판단하지 말라 - 앞서 간 시대들을 고찰할 때 우리는 부당한 비방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노예제도의 불공정함, 인간가 민족들을 정복하는 과정에서의 잔인성은 우리의 척도로 측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는 정의의 본능이 아직 충분히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기주의는 악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웃' (이 말은 그리스도교적 기우너을 가진 것으로 진실에 일치하지 않느다)에 대한 표성이 우리에게는 극히 미약히기 때문이며,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 마치 식물과 돌을 대하느 ㄴ것처럼 자유롭고 책임이 없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고통받는다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결코 그것을 완전히 배울 수는 없다.  111-112


'인간은 항상 선하게 행동한다' - 자연이 뇌우를 내려 우리를 젖게 했다고 해서 자연을 비도덕적이라고 탓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해를 끼치는 사람을 비도덕적이라고 부르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후자의 경우에는 자의적으로 타나타는 자유의지를, 전자의 경우에는 필연성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구별은 오류이다. 또한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는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는 것에 대해 비도덕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인간은 모기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모기를 아무 거리낌없이 의도적으로 죽이고, 우리 자신과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 범죄자를 의도적으로 처벌하고 그에게 고통을 준다. 첫번째의 경우는 개인이 자기 보존을 위해서 또는 자신이 불쾌해지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자가 되며, 두번째 경우에는 국가가 그러하다. 모든 도덕은 의도적으로 해를 가하는 것을 정당방위로 인정한다. 단 그것이 자기 보존의 문제가 되는 경우라면!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가하는 모든 악행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관점만으로도 충분하다. 인간은 자신으 ㄹ위해서 쾌감을 원하고 불쾌감을 없애고자 한다.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자기 보존의 문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말은 타당하다. 인간은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선을 행한다. 즉 인간은 지성의 정도와 이성의 갖가지 척도에 따라 언제나 자신에게 선하게(유리하게) 보이는것을 행한다.  113


만약 인간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개별적인 모든 행위는 미리 계산될 것이다. 인식의 모든 진보, 모든 오류, 모든 악의도 말이다.  118


많은 행위가 악하다고 말하지만 그 행위들은 단지 어리석은 행위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를 선택했던 지성의 정도가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한 의미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모든 행위는 어리석다. 왜냐하면 현재 이를 수 있는 최고의 인간 지성은 반드시 또 추월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120





제4장 예술가와 저술가의 영혼으로부터


완전한 것은 생성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 - 우리는 완전한 것에 대해서는 모두 그것의 생성에 의문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현존하는 것이 마치 마술에 의해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즐기는 데 익숙해 있다. ...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즉흥적인 것이라는, 기적처럼 갑자기 생긴 것이라는 믿음을 불러일으킬 때 완전한 효과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예술의 학문은 이런 착각을 가장 분명하게 거부해야 하고, 예술가의 그물에 걸리느 한, 지성의 그릇된 추론과 악습들을 적발해내야 한다. 그것은 자명한 일이다.  167


예술가는 일생 동안 어린아이와 젊은이인 채로 있으며 자신에게 예술 충동이 엄습했던  지점에 머물러 있다.  169


손으로 하는 작업의 성실성 - 재능과 타고난 능력에 대해서만 말하지 말라! 타고난 재능이 거의 없이도 위대해진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위대한 사람이 되었고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천재'가 되었다. 그런한 자질을 의식하고 있는 살마이라면 아무도 그것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커다란 전체를 만드는 일을 감행하기 전에, 우서 부분을 완전히 만든는 것을 배우는 숙련된 장인의 성실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부분을 완성하기 ㅏ여 시간을 부여했다. 왜냐하며 그들은 현혹시키는 전체의 효과보다 작은 것, 지엽적인것을 잘 만드는 일에 더 많은 즐거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떻게 하여 훌륭한 소설가가 될 수 있을 까 하는 방법은 쉽게 제공할 수 있으나, '나에게느 재능이 충분치 않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질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느 그 자질을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2페이지를 넘지는 않지만 거기에 포함된 모든 단어가 필연적이라고 할 만큼 명확한 소설을 백 개 이상 습작해보라. 가장 함축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일화의 형식을 배울 때까지 매일 일화를 쓰도록 하라. 인간의 유형과 성격을 수집하거나 윤색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라. 특히 주위의 다른 사람드에게 미치는 효과를 유심히 바라보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에게 말을 자주 하고 남이 말하는 것을 귀를 쫑긋 세워 듣도록 하라. 풍경화가와 의상 디자이너처럼 여행하도록 하라. 잘 표현되면 예술적 효과를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개개의 학문에서 발췌하도록 하라. 끝으로 인간 행위의 동기에 대해서 잘 생각하고 이 점에서 가르침을 주게 될 어떤 지침도 냉대하지 말고 밤낮으로 이런 것들의 수집가가 돼라. 이와 같은 다양한 훈련으로 2,30년을 내라. 그 후에는 작업실에서 창작된 것이 거리의 빛 속으로 나가도 좋다. 그런데 대부부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그들은 부분에서가 아니라 전체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마 한 번은 선택이 적절하여 주목을 끌게 되지만 그때부터 항상 실패할 것이다. 그것은 충분히 당연한 근거에서 나오는 일이다. 때때로 이러한 예술적 삶의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이성과 성격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에는 운명과 필욕 그 자리를 물려받아 미래의 거장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여 그의 손으로 하는 작업의 모든 조건을 거쳐 단계적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181-182


대중의 예술적 교육 - 동일한 주제가 서로 다르 거장에 의해서 수많은 방식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대중은 소재에 관심을 갖는것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작업들에 의해 그 주제르 알게 되고 새로운 것이 주는 매력과 긴장감의 매력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되며느 결국에는 이 주제를 취급할 때의 어떤 뉘앙스, 섬세하고 새로운 발명도 파악하고 즐기게 될 것이다.  185


예술가와 그의 추종자는 보조를 맞춰야 한다 - 양식이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진행하는 것은, 예술가뿐 아니라 청중과 관중도 이 진행에 참여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아주 느리게 진행되어야 한다. ... 왜냐하면 예술가가 대중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이미 대중은 급속히 낮은 곳으로 가라앉기 때문이다.  186


집단정신 - 훌륭한 저술가는 자신의 정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친구들의 정신까지도 가지고 있다.  192


학문에 대한 관계 - 학문 속에서 그들 스스로 어떤 것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학문을 흥미롭게 여기기 시작했던 사람은 모두 학문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193


작가의 역설들 - 소위 독자가 불쾌하게 느끼는 작가의 역설들은 그 자각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흔히 독자의 머리 속에 있다.  193


기지 - 가장 기지에 넘치 작가들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미소를 거의 만들어내지 않는다.  194


문장가로서의 사상가 - 사상가는 대부분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의 사상뿐만 아니라 그 사상을 사유하는 것까지 우리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194


독자의 정신을 거역하는 죄 - 단지 독자와 같아지기 위해서 저자가 자신의 재능을 부인한다면, 그는 독자가 결코 용서하지 않을 치명적이 죄를 범하는 것이다. 즈 독자가 그것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눈치채는 경우에 말이다. 인간은 인간에게 모든 나쁜 욕을 해도 좋다. 그러나 어떻게 그 말을 하는지의 양식에서는 인간의 허영심을 다시 바로 세워줄 방법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194-195


글쓰기와 가르치기에서의 주의점 - 처음으로 글으 써보았거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글쓰기에 대한 정열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이 시도하고 체험하는 모든 것에서 문체상으로 전달할 수있느 것만을 배운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저술가와 독자들만을 생각한다. 통찰을 원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기 일을 하는 데는 무능력하다. 그는 언제나 자기 학생의 행복을 생각하고, 그가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인 한 모든 인식은 그를 기쁘게 하낟. 결국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열의를 잃어버리고, 지식의 한 통로, 흔히 수단으로 자신을 파악한다.  199


아킬레우스와 호메로스 - 언제나 아킬레우스와 호메로스의 관계 같은 것이 존재한다. 한족은 체허모가 감각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쪽은 그것들을 기술하는 것이다. 참다운 저술가는 남의 격정과 체험에 다만 단어들을 부여할 뿐이며, 자기가 경험했던 적은 것들에서 많은 것을 추측해내는 예술가이다. 예술가들으 결코 대단한 열정을 가진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흔히 열정을 가진 인간으로 무의식적인 감정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 즉 그들의 삶이 예술의 영역에서 체험을 말하게 될 때, 사람들은 그들이 그렸더 열정을 더욱 신뢰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을 자유롭게 내버려두고 자제하지 않으며 자신의 분노와 욕구를 위해 넓은 자리만 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곧 세상 사람은 저 사람은 얼마나 열정적인가! 하고 외친다. 그러나 깊이 파고드는, 개인을 소모시키며 때로는 잠식해 들어가는 열정인 경우에는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 이러한 열정을 체험하는 사람은 분명히 그것을 극이나 음악 또는 소설에서 묘사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예술가가 아니라면 흔히 방종한 개인이다. 그러나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205




제5장 좀 더 높은 문화와 좀 더 낮은 문화의 징후


퇴화를 통해 고상해짐 - 우리는 한 민족의 혈통은, 사람들이 대부분 자신들의 일상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근본  법칙들의 동일성에 따라, 즉 그들의 공동 믿음에 따라 살아 있는 공동심(共同心 함께공 한가지동 마음심)을 가지고 있을 때 가장 잘 존속한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여기서 훌륭하고 탄탄한 풍습이 강화되고, 개체의 종속성을 배우며 품성에는 이미 강인함이 생일 선물로 주어져서, 그 후에는 그것이 습관하된다. 강하고 동질적이며 특징적인 개체들을 기반으로하는 이런 공동체가 가지는 위험은 세습에 의해 점차 강화되는 우둔화이다. 이것은 한번 정착되면 그림자같이 뒤따라다닌다. 그와 같은 공동체의 정신적 진보는 속박받지 않고 더 불안정하며 도덕적으로 더 약한 개체들에게 따라다닌다. 대개 새로운 것과 다양한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종류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약함 때문에 별 뚜렷한 영향도 보이지 않고 소멸해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들이 후손을 가지게 되면, 긴장이 완화되어 때로는 공동체의 안정된 요소에 상처를 초래한다. 새로운 그 무엇은 바로 이 상처로 인해 약화된 자리에서부터 전체로 접종되는 것이다. 그러나 것의 전체적인 힘은 이 새로운 것을 그의 피 속으로 받아들여 동화시킬 수 있을 만큼 강해야 한다. 퇴화해가는 본성들은 진보가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대개 모든 진보에는 어떤 부분적 약화가 성행되어야 한다. 가장 강한 본성들은 유형을 계속 지켜나가고 좀더 약한 본성은 유형을 계속 형성해나가는 것을 돕는다. 비슷한 일이 개별적인 인간들에게도 일어난다. 일종의 퇴화, 불구, 나아가서는 악덕 그리고 신체적 또는 도덕적 결손까지도 다르 한편으로는 때때로 하나의 장점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더 심하게 병든 인간들은 아마 호전적이고 침착하지 못한 종족 속에서 혼자 있으 계기를 더 많이 가지게 됨으로써 더욱 침착하고 현명해지며, 외눈을 가진 사람은 더욱 강한 한쪽 눈을 가지게 될 것이고, 눈먼 사람은 한층 더 깊이 내부를 보고 어쨌든 더욱 날카롭게 듣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저 유명한 생존 경쟁이 한 인간과 종족의 진보와 강화가 해명될 수 있는 유일한 관점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두 가지 것이 한데 합쳐져야 한다 그 하나는 신앙과 공통된 감정 안에서 정신들을 결합함으로써 정착된 힘을 증대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퇴화해가는 본성들을 그리고 그 정착된 힘을 부분적으로 약화시키고 손상시킴으로써 더 높은 목표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이다. 좀더 여리고 섬세한 것으로서의 더 약한 이 본성들이 대체로 모든 진보를 가능하게 한다. 어디에서인가 부패하고 약해져가는, 그러나 전체로서는 아직 강하고 건강한 민족은 새로운 것의 감염을 받아들여 장점으로 동화시킬 수가 있다. 개별적인 인간의 경우, 교육의 과제는 전체적인 인간으로서의 그가 더 이상 자신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를 확고하고 확실하게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그러나 그 후에 교육자느 그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아니면 운명이 그에게 입힌 상처를 이용해야 한다. 그리하여 고통과 욕구가 생겨나면, 그 상처 입은 부분에 새롭고 고상한 그 어떤 것이 접종될 수 있는 것이다. 교육자의 전체적 본성은 그것을 받아들여, 나중에 그 열매들 속에서 고상해지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국가에 관해서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설프게 교육받은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통치의 형식은 아주 사소한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정치의 최대 목표는 영속성이며, 이것은 자유보다도 훨씬 가치가 있어 다른 모든 것을 능가 한다." 대체로 지속적인 발전과 고상하게 하는 접종은 확실하게 기초가 마련되고 영속성이 최대한 보증될 때에만 가능하다. 물론 모든 영속성의 위험한 동료인 권위라는 것이 통상적으로 그 일을 방해하게 될 것이지만 말이다.  225-227


자유정신은 상대적 개념이다 - 어떤 혈통과 환경, 신분과 지위 또는 지배적인 시대의 견해를 근거로 그에게서 예살할 수 있는 거소가 다르게 사유하는 사람을 자유정신이라고 부른다. 자유정신은 예외이며 속박된 정신은 상례이다. 속박된 정신은 자유정신의 자유로운 기본 원칙이란 눈에 띄고 싶은 병적인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거나 또는 속박된 도덕과는 전혀 화해할 수 없는 순전히 자유로운 행위에 불과한 것이라고 단정짓고 자유정신을 비난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자유로운 기본 원칙들이 머리의 괴팍하모가 엉뚱함에서 나온다고 추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말을 하면서 자신의 말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함으로써 단지 상처를 입히려는 악의를 가지고 잇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자유정신의 얼굴에는 보통 속박된 정신도 충분히 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지성의 비범한 우수성과 예리함이 증거로서 역력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정신 활동의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기원은 공정하게 평가된 것이다. 사실상 많은 자유정신이 이러한 또는 저러한 양식으로 성립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자유정신이 그런 방법으로 성취한 원칙들은 속박된 정신의 원칙들보다도 더 진실하며 신뢰할 수 있다. 진리의 인식에서는, 어떤 충동에서 그것을 추구했으며,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발견했는지가 아니라 그 진리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자유정신이 정당하다면 따라서 속박된 정신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다. 전자가 부도덕에서 진리에 이르렀는가 그리고 후자가 지금까지 도덕에서 비진리를 고집했는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자유정신이 정당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에 관계 없이 그가 관습적이 ㄴ것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이 자유정신의본질에 속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유정신은 역시 진리를, 또는 적어도 진리탐구의 정신을 자기 편으로 삼게 될 것이다. 자유정신은 근거를 요구하고 다른 정신들은 신앙을 요구한다.  227-228

 

신앙의 기원 - 속박된 정신은 자신의 입장을 근거에서가 아니라 습관에서 받아들인다.  228


모든 국가와 신분, 결혼, 교육, 법률과 같은 사회질서, 이 모두는 그것들에 대한 속박된정신의 믿음 속에서만 힘과 영속성을 가지게 된다.  229


속박된 정신에서의 사항의 척도 - 속박된 정신들은 네 가지 종류의 사항에 대하여 그것들이 옳다고 말한다. 첫째, 영속성이 있는 모든 사항은 옳다. 둘째, 우리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모든 사항은 옳다. 셋째, 우리에게 이득을 가져오는 모든 사항은 옳다. 넷째, 그것을 위해 우리가 희생을 치른 모든 사항은 옳다. 예를 들어 이 마지막 것은, 왜 국민의 의지를 거역하여 시작된 전쟁이 우선 희생이 치러지면 곧바로 열광적으로 게속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232


강한 정신 - 관습을 자기 편에 두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떤 근거도 필요하지 ㅇ낳는 사람과 비교하면, 자유정신은 항상 약한 쪽이다. 특히 행동에서 그렇다. 왜냐하면 자유정신은 너무나 많은 동기와 관점들을 알고 있고, 그 때문에 확신이 없으며 미숙한 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가 적어도 자신으 관철시키며 아무 성과도 없이 파멸하지 않을 정도로, 그를 비교적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 있는 것일까? 강한 정신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이것은 개별적인 경우에는 천재의 생산에 대한 문제이다. 한 개인이 관습에 맞서 완전히 개인적인 세계 인식을 지향하는 그 활력, 그 불굴의 힘, 그 인내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232-233


기적적 교육 - 사람들이 신과 신의 배려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바로 그곳에서 교육의 관심은 비로소 크게 성장할 것이다. 마치 기적의 치료에 대한 믿음이 끝났을 때 비로소 치료술이 발전할 수 ㅇ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모두 기적적인 교육을 여전히 믿고 있다. 사람들은 실제로 엄청난 무질서, 목표의 혼란, 상황의 불리한 조건에서 가장 창작력이 풍부하고 가장 강한 사람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러한 것이 당연한 일로 일어날 수 있었던가? 이제 사람들은 앞으로 이런 경우들을 좀더 상세히 관찰하고 세심하게 조사하게 될 것이다. 그때 기적은 결코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같은 상황 아래에서 많은 살맏르이 계속 멸망해간다. 대신 구제된 각 개인들은 대체로 훨씬 더 강력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타고난 강인한 힘으로 이 역경을 타개하고 이 힘을 더욱 훈련하여 키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적은 설명될 수가 있다. 기적을 이미 믿지 않는 교육은 세 가지 사항에 대하여 유의해야 한다. 첫째, 얼마나 많은 활력이 유전되는가? 둘째, 무엇을 통하여 새로운 활력이 점화될 수 있는가? 셋째, 어떻게하면 개인이 불안에 빠져 그 고유성을 파괴당하지 ㅇ낳고 문화의 다양한 요구들에 적응할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하면, 어떻게 한 개인이 사적 문화와 공적 문화의 대위법 속에 참가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가 곡조를 지휘하면서 동시에 그 곡조를 연주할 수 있을까?  242-243


학문의 미래 - 학문은 노력하고 탐구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만족을 주고, 그 성과를 배우는 사람에게는 극히 적은 만족밖에 주지 않는다. 그러나 학문의 모든 중요한 진리는 조금씩 평번하고 저속해지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 조금밖에 없는 만족도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그 경탄할 만한 구구단을 일단 배우게 되면 이미 더 이상 기쁨을 느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학문이 스스로를 통하여 점점 더 작은 기쁨밖에 주지 못하게 되면, 그리고 위로를 주는 형이상학, 종교, 예술을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더 많은 기쁨을 빼앗게 되면, 인류의 거의 전부가 혜택을 입고 있는 쾌감의 가장 큰 샘이 고갈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좀더 높은 문화는 인간에게 우선 학문을, 그 다음에 비학문을 느낄 수 있는 두 개의 뇌실 즉 이중 두뇌를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두뇌는 혼란 없이 병행하고 분리할 수도 있고 폐쇄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것은 건강상의 요구 사항이다. 한 영역에는 동력원이 있고 다른 영역에는 조절기가 있어서 환상, 편협, 정열로 가열되어야 하며 인식하는 학문의 도움으로 과열된 것의 나쁘고 위험한 결과들이 예방되어야 한다. 만약 좀 더 높은 문화의 이런 요구가 채워지지 않는다면, 아픙로의 인간 발전의 경과는 거의 확실히 예언될 수 있다. 쾌감을 적게 제공하게 되면 참된 것에 대한 관심은 사라져 버린다. 환상, 오류, 공상은 쾌감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과거에 자신들이 주장했던 땅을 단계적으로 쟁취해간다. 그 다음의 학문의 쇠퇴이며 야만으로의 역전이다.  250-251


흥미로운 것의 증가 - 좀더 높은 교양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흥미로워진다. 그는 자신의 사고의 빈 틈이 교양으로 채워질 수 있거나 사상이 교양으로 인해서 확인될 수 있는 곳에서는 재빨리 그 문제의 교훈적인 측면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지적할 줄 안다. 거기서 권태는 점점 더 사라지고, 그와 함께 지나친 감정의 흔분도 사라진다. 그는 마침내 식물 사이를 지나다니는 자연 연구자처럼 인간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자기 자신을 단지 그의 인식 충동을 강하게 자극하느 ㄴ데 불과한 하나의 현상으로 인지한다.  253


학문을 통해서 훈련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능력이다 - 인간이 어느 일정한 시간 동안 엄밀한 학문을 철저히 해왔다는 것의 가치는 그 성과들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성과들은 알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로 이루어진 바다에 비교한다면 사라져 없어질 만큼 작은 물방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활력, 추진력, 인내력의 강인함을 증대시킨다. 인간은 어떤 목적을 합목적적으로 달성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한 한에서, 언젠가 학문적인 인간이었다는 사실은 그 뒤에 하게 될 모든 일에서 볼 때 대단히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254


거대한 것에 호의적인 편견 - 사람들은 분명히 모든 거대한 것과 뚜렷한 것을 과대 평가한다. 이는, 만약 어떤 사람이 한 가지 분야에 전력투구하여 자신을 흡사 하나의 거대한 기관으로 만들 때, 이 일이 대단히 유익하다고 느끼게 되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통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확실히 인간 스스로에게는 자신의능력을 균형 있게 훈련하는 것이 더 유익하고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 왜냐하면 모든 재능은 다른 힘들에서 피와 힘을 빨아먹는 흡혈귀이며, 지나친 생산은 가장 재능 있는 사람까지도 거의 미치게 만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술 안에서도 역시 극단적인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 매우 주의를 끈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는 훨씬 낮은 문화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힘을 가지기를 원하는 모든 것에 굴복한다.  256-257


학교에서의 이성 - 학교는 엄밀한 사고, 신중한 판단, 일관성 있는 추론을 가르치는 것 외의 다른 과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학교는 이 작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것, 예를 들어 종교를 무시해야 한다. 물론 학교는 인간적인 불투명함, 습관 그리고 욕망이 아주 팽팽하게 당겨진 사고의 활을 나중에 다시 느슨하게 만들게 되리라는 것을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학교는 그 영향력이 미치는 한, 인간에게 있는 본질적인 것과 탁월한 것을 강요해야 한다. 그것은 적어도 괴테가 판단하듯이, '인간의 이성과 학문은 최상의 힘'이다. 위대한 자연 탐구자 폰 베어(von Bear)는 동양인에 비해서 모든 유럽인이 뛰어난 점을,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근거들을 말할 수 있는, 훈련된 능력에서 찾고 있다. 동양인들은 이런 능력이 전혀 없다. 유럽은 일관성 있고 비판적인 사고의 학교로 나아갔고, 동양은 여전히 진리와 허구 사이에서 구별할 줄을 모르고, 자신의 호가신이 자신의 관찰과 규칙에 따른 사고에서 유래하는 것인지, 또는 상상력에서 유래하는 것인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서의 이성은 유럽을 유럽으로 만들었다. 중세에 유럽은 다시 동양의 한 부분과 부속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즉 그리스인에게 감사해야 했던 학문적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263-264


좀더 높은 문화는 필연적으로 오해된다 - 지적 충동 외에는 단지 습관이 된 종교적 충동만을 하나 더 가지고 있는 학자들처럼, 자신의악기에 줄을 두 개만 매어놓고 있는 사람은, 더 많은 현으로 연주할 수 있는 사람드을 이해하지 못한다. 더 낮은 사람들에 의하여 항상 잘못 해석되는 것은 많은 현을 가진 더 높은 문화의 본질에 속한다. 잘못된 해석은 예를 들어 예술이 종교적인 것의 가장된 형식으로 간주되는 경우에 일어나게 된다. 오로지 종교적이기만 한 사람들은, 마치 노아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닌 음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문조차도 종교적 감정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275-276


활동적인 사람들의 주요 결점 - 활동적인 사람들에게는 흔히 더 높은 활동이 결여되어 있다. 여기서는 개인적인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관리, 상인, 학자들로서 즉 유적 존재로서는 활동적이지만 아주 특정한 한 개인, 유일무이한 인간으로서는 활동적이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태만하다. 활동적인 사람들의 불행은 그들의 활동이 거의 언제나 약간은 비이성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돈을 모으고 있는 은행가에게 그가 쉬지 않고 일하는 활동의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서는 안 된다. 이 활동은 비이성적인 것이다. 활동적이 ㄴ사람들은 돌이 굴러가듯 기계적인 성격의 우둔함에 따라 굴러간다. 모든 인간은 모든 시대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노예와 자유인으로 나뉘어 있다. 왜냐하면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은 노예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그는 자신이 원하는 그 누구, 즉 정치가, 상인, 관리, 학자이다.  277-278


활동적인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태만한가 - 나는 다양한 의견이 가능한 모든 것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 개인은 스스로 다른 모든 사물에 대해서 하나의 새로운,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위치를 차지하는 자기만의 그리고 일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활동적인 사람의 마음속에 근본적으로 들어 있는 태만함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샘에서 물을 깆는 것을 방해한다. 의견의 자유는 건강과 마찬가지다. 양쪽이 모두 개인적인것이며, 양쪽 모두에게서 인정되는 보편 타당한 개념은 세워질 수 없다. 한 개인의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것이 다른 한 개인에게는 이미 질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정신의 자유를 향한 많은 수단과 방법이 더 높이 발달한 본성은 지닌 사람들에게는 부자유로 향하는 방법들과 수단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279-280


부수 효과 - 진정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런 억압이 없어도 결점과 악덕의 경향들을 버리게 될 것이다. 분노와 불쾌함이 그를 엄습하는 일도 좀더 드물어질 것이다. 즉 그의 의지는 인식하는 것과 인식하기 위한 수단, 즉 그 안에서 그가 인식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속적인 상태 외의 아무것도 더 절실히 원하지 않게 될 것이다.  280


앞으로 나아가라 - 그러면 확실한 발걸음과 신뢰를 가지고 지혜의 길로 나아가라! 네가 어떤 존재이든 스스로 경험의 샘이 되어 너 자신으 도우라! 너의 본질에 대한 불만을 던져버리고 네 자신의 자아를 용서하라. 왜냐하면 어쨌든 너는 인식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백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사다리를 가지고 잇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종교와 예술을 어머니와 유모처럼 사랑해봤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명해질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서 바라보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그 마력속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너는 역사에 정통해야 하고, '이쪽-저쪽'의 조심스러운 저울접시 놀이에도 정통해 있어야 한다. 과거의 황야를 통해 그 고통에 찬 위대한 걸음을 걸었던 인류의 발자취를 밟아서 거꾸로 거닐어보라. 그러면 인류가 결코 다시 갈 수 없고 가서는 안 되는 곳을 너는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미래의 매듭이 또 맺어질 것인지를 전력을 다하여 미리 탐색함으로써, 네 자신의 삶은 인식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얻게 된다. 네가 체험한 모든 것, 모든 시도, 오류, 실수, 착각, 정열, 너의 사랑과 희망이 너의 목표속에서 남기없이 꽃을 피우도록 성취하는 것은 네 손에 달려 있다. 이 목표란, 스스로 문화의 고리의 필연적인 하나의 사슬이 되는 것이며, 이 필연성에서 보편적인 문화의 진행 속에 있는 필연성을 추론하는 일이다.  283-284




제6장 교제하는 인간 


호의적인 위장 - 사람들과 교제할 때에는 흔히 우리가 마치 그들의 행위의 동기를 간파하지 못한 듯 호의적으로 위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287


평등의 두 가지 방식 - 평등의 욕구는 다른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까지 끌어내리려고 하거나(헐뜯거나 비밀로 하거나 다리를 걸어서) 또는 자신으 모든 사람과 함께 끌어올리려는(인정하거나 도와주거나 남의 성공을 기뻐함으로써)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288-289


신뢰와 친밀함 - 다른 사람과 의도적으로 친밀해지려고 애쓰는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상대방의 신뢰를 얻고 있는지에 대하여 확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뢰를 확신하는 사람은 친밀함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289-290


사려 깊은 - 아무도 기분 상하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정의로운 기질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두려움이 많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292


논쟁하는 데 필요한 것 - 자신의 사상을 얼음 위에 놓는 법을 이해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논쟁의 열기 속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292


교제와 자만심 - 사람들은 자신이 항상 공로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만심을 잊어버리게 된다. 혼자 잇다는 것은 교만을 심는 결과가 된다. 젊은 사람들은 자만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많은 것을 의미하려는 그들 자신과 똑같은 사람과 사귀고 있기 때문이다.  292-293


공격의 동기 - 사람들은 단지 누구에게 아픔을 주고 그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마 자신의 힘을 의식하기 위해 공격하기도 한다.  293


아첨 - 교제할 때 아첨을 통하여 우리의 조심성을 무디게 하려는 사람들은, 위험한 수단 즉 수면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수면제가 잠이 들게 하지 못하면, 오히려 더 깨어 있게 만들 것이다.  293


침묵 - 양편 모두에게 가장 불쾌한 논쟁의 응수 방법은 화를 내고 침묵을 지키는 일이다. 왜냐하면 공격하는 편은 흔히 침묵을 경멸의 표시로 표명하기 때문이다.  295


대화를 하면서 -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정당함이나 부당함을 인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습관의 문제다. 전자를 인정하는 것도 후자를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가 있다.  297


설명하는 사람 - 그 무엇을 설명하는 사람은 그 사실이 그의 관심을 끌기 때문에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설명하는 것을 통해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싶기 때문에 말하는 것인지를 쉽게 알아차리게 만든다. 후자의 경우에 그는 과정을 하고, 최상급도 사용하며 그와 비슷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는 일반적으로 더 서툴게 말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실에 대하여 잘 생각하고 있지 못하지 때문이다.  300-301


모욕하는 것과 모욕당하는 것 - 모욕하고 나중에 용서를 비는 것이 모욕당하고 용서해주는 것보다 훨씬 기분 좋은 일이다. 전자를 행하는 사람은 힘을 과시하고 그 뒤에 성격이 호의적임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후자는, 만약 그가 비인간적이라고 인정받지 않으려면, 이미 용서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강박관념 때문에 상대방을 굴복시킨 데 대한 즐거움도 적어진다.  303


사교 모임 후의 양심의 꺼림직함 - 왜 우리는 일반적인 사교 모임 후에 꺼림칙함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우리가 중대한 사실을 가볍게 받아들였기 때문이거나, 인물들에 대하여 논의할 때 완전히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는 말을 해야 했을 때 침묵했기 때문이며, 적당한 시기에 일어나서 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사교 모임에서 마치 우리가 거기에 속하는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304


잘못 평가된다 - 자신이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가에 언제나 귀 기울이고 있는 사람은 항상 화가 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우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이미 잘못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들ㄷ조차고 자신들의 언짢음을 때로는 시기하는 말들로 표출한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우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그들이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의 판단은 많은 아픔을 준다. 왜냐하면 그 판단들은 아주 솔직하고 거의 사실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대자인 어떤 사람이 우리가 비밀로 하고 있는 점을 우리 자신처럼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처음에 그 불쾌한 기분은 얼마나 크겠는가!  304


오해된 정직함 - 대화를 하면서 자기 자신을 인용하는 것은("나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자만하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된다. 반면 그것은 자주 이와는 정반대의 근원에서 나온다. 그것은 적어도 그 순간을 과거의 어떤 순간에 속하는 묘안들로 장식하고 꾸미지 않으려는 정직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305


자만심의 징후로서 동정심의 요구 -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을 모욕하면서 처음에는 자신을 나쁘게 여기지 않기를, 두 번째에는 자신이 극심한 발작에 지배당하고 있으므로 동정해주기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의 자만심은 이렇게 멀리 나아간다.  306


소크라테스의 경험 - 인간은 한 가지 일에 대가가 되고 나면, 통상적으로 바로 그 때문에 대부분의 다른 일들에서는 완전히 무능해진다. 그러나 이미 소크라테스가 경험한 것처럼, 사람들은 정반대로 판단하고 있다. 이것이 대가들과의 교제를 즐겁지 않게 만드는 나쁜 상태다.  307-308


고귀함과 감사하는 마음 - 고귀한 사람은 감사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즐겁게 느끼고, 의무를 가질 기회들을 소심하게 피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후에 감사함을 표현하는 데에도 태연하다. 반면에 천박한 살마은 모든 의무를 지는 것에 대해 저항하거나, 후에 그 감사를 표현하는 데도 과장된 행동을 하거나 너무 고의적으로 애를 쓴다. 그런데 후자의 행동은 더 낮은 혈통 또는 억압된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들에게 보여진 호의가 그들에게는 은혜의 기적을 의미하는 것이다.  309-310


우정을 위한 재능 - 우정에 대해서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는 두 가지 유형이 드러난다. 한 가지 유형은 끊임없는 상승 속에서 어떤 발전 단계에서도 잘 어울리는 친구를 발견한다. 그가 이런 방법으로 얻은 일련의 친구들은 그들끼리 관계를 가지는일이 드물고 때로는 알력과 대립 상태에 빠진다. 이것은 나중의 발전 단계가 앞의 단계들을 지양하거나 해를 입히는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런 사람은 농담으로 사다리라고 불려도 좋을 것이다. 

또 다른 유형은 전혀 다른 성격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매력을 발휘하여 하나의오나전한 동아리를 이룰 정도의 친구들을 얻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이 친구들은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들끼리 서로 친구가 된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으 ㄹ원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전혀 다른 성향과 본성들의 일체성이 어떻게든 이미 형성되어 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친구를 가지는 재능이 좋은 친구가 되는 재능보다 훨씬 가치 있다.  311


불만의 해소 - 어떤 일에서 실패한 사람은 실패의 원인을 우연으로 돌리기보다 차라리 다른 사람의 나쁜 의지로 돌리낟. 그의 화난 감정은 그가 실패한 게 사물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함으로써 가벼워진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복수를 할 수 있지만 우연에 의한 고통스러움은 억지로 삼ㅌ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주의 측근은 어떤 일에서 실패하면, 어떤 한 사람을 명목상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모든 궁신의 이익을 위하여 그를 희생시키곤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영주느 ㄴ운명의 여신 자체에게는 복수를 할수가 없으므로 그의 불쾌감이 그들 모두에게 표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312


자만심 - 우리의 모든 좋은 수확을 망치는, 자만심이라 불리는 저 잡초가 자라나는 것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마우것도 없다. 왜냐하면 자만심은 진실한 마음에, 경의의 표현에, 호의적인 친근감에, 연애에, 친절한 충고에, 실수의 고백에, 남을 위한 동정에 들어 있기 때문이며, 그 잡초가 그 사이에서 자라나면 이 모든 아름다운 것이 반감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자만하는 사람, 즉 있는 대로 또는 인정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항상 계산을 잘 한다. 물론 그는 자신의 자만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보통 두려움 또는 편리함 때문에 그가 요구하는 정도의 존경을 그에게 표시하는 한, 순간적인 성과만은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나쁜 보복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그에게 주었던 가치에서 그가 정도를 넘어서 요구한 만큼을 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자만심을 꺾는 일보다 더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는 일은 없다. 자만하는 사람은 자신의 참으로 위대한 업적도 다른 사람의 눈에 의심스럽고 사소하게 보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흙 묻은 발로 그것을 짓밟기도 한다. 자랑스러운 행동이라 할지라도 오해받지 ㅇ낳고 자만으로 보이지 않을 가장 확실한 곳에서만, 예를 들어 친구와 아내 앞에서만 허용될 것이다. 왜냐하면 살마들과의 관계에서 자만심이라는 평판을 초래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손히 거짓말하는 것을 배우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나쁘다.  314-315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ㅇ벗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고 ㄷ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인 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ㅇ벗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고 ㄷ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ㅇ낳앗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이 ㄴ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없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곧 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인 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자유정신과 결혼 - 자유정신이 여성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나는, 자유정신이 고대의 예언하는 새처럼, 현재의 진정으로 생각하는 자 그리고 진리를 말하는 자로 혼자 나는 것을 선호할 것임이 틀림없다고 믿는다.  342


두 화음의 부조화 - 여성들은 봉사하고 싶어하고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자유정신은 봉사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  345




제8장 국가에 대한 조망


문화와 사회계층 - 더 높은 문화는 사회의 서로 다른 두 계층, 노동하는 계층과 여가를 지닌 계층, 즉 참된 여가를 가질 자격을 지닌 계층이 있는 곳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또는 좀더 강하게 표현하면 강제노동 게급과 자유노동 계급이 있는 곳에서만 성립할 수있다. 좀더 높은 문화를 생산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경우에는 행복의 분배에 대한 관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경우도 여가를 가진 계층이 고통을 더 잘 견뎌낼 수 있는 계층이며 고통을 받는 계층이고 현존에 대한 그들의 즐거움은 더 적으며 그들의 과제는 훨씬 더 크다.  353


전복하려는 사람들 중에서 위험한 사람들 - 사회 전복에 대해 숙고하는 사람들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자식들과 손자를 위해서 그 무엇을 달성하려는 사람들로 나누어보면, 후자가 훨씬 더 위험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욕이 없다는 믿음과 거리낌없는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들은 적당히 물리칠 수가 있다. 지배적인 사회는 그렇게 하기에 아직 충분할 정도로 부유하고 영리하다. 목표들이 비개인적인 것일 때, 위험은 즉시 시작된다. 비개인적인 관심을 가진 혁명가들은, 현존하는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모두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하며 따라서 그들보다 스스로가 우월하다고 느낄 수 있다.  363


대중의 위대한 사람 - 대중에게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리기 위한 방법은 간단하게 주어져 있다. 모든 상황에서 대중에게 아주 즐거운 그 무엇을 마련해주거나 또는 먼저 머리 속에 이것저것이 아주 즐거울 것이라는 생각을 넣어주고 그 다음 그것을 제공하면 된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곧바로 제공해서는 안 되며 최대한의 노력으로 그것을 쟁취하거나 아니면 쟁취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좋다. 강력하고 게다가 정복하기 어려운 하나의 의지력이 거기에 있다는 인사을 대중이 받아야만 한다. 적어도 그러한 의지력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라도 해야 한다. ㄱ상한 의지에는 누구나 다 감탄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모든 사람은 만약 자신이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과 자신의 이기주의에 더 이상 아무러 ㄴ한계가 없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강한 의지가 자신의 열망이 원하는 것에 귀 기울이는 대신 대중에게 아주 즐거운 그 무엇을 얻게 해준다는 것이 보이면, 사람들은 다시 한번 감탄하고 그들 자신의 행복을 원한다. 그 밖에도 그는 대중의 모든 특성을 가지고 잇다 .그래서 대중은 그의 앞에서 그만큼 수치심을 덜 느끼게 되고, 그는 그만큼 더 대중의 인기를 얻는다. 따라서 그는 난폭하고 질투하고 착취를 즐겨하며 음모를 좋아하고 아첨을 잘하고 비굴하고 교만하며 사정에 따라서는 이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다.  367-368


전복에 대한 이론에서의 망상 - 가장 자랑스럽고 훌륭한 인류의 신전이 저절로 드러나리라는 믿음 속에서 모든 질서의 전복을 열렬히 그리고 웅변적으로 촉구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공상가들이 있다. 이러한 위험한 꿈속에는 루소의 미신이 아직도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 미신은 기적적이고 근원적이지만 묻혀진 채 있는 인간 본성의 장점을 믿고, 그 묻혀진 채 있는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을 사회, 국가, 교육에 나타나는 문화의 여러 제도에 돌리낟.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그러한 모든 전복이 오래 전에 파묻혀버린 아득한 옛 시대의 처참함과 무절제 같은 가장 난폭한 에너지를 새로운 것으로 부활시킨다는 사실을 역사적 체험으로 잘 알고 있다. 즉 전복은 아마 지쳐버린 인류에게는 일종의 힘의 원천일 수는 있겠지만, 결코 인간 본성을 정리하는 자, 건축가, 예술가, 완성자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정리하고 정화하며 개조하는 경향이 있는 볼테르의 절도 있는 본서잉 아니라, 루소의 정열적인 어리석음과 반쯤의 거짓말들이 혁명의 낙관주의적 정신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 정신에 대하여 "그 비열한 자를 굴복시켜라!"고 외친다. 그 정신 때문에 계몽 정신과 진보적 발전의 벙신은 오랫동안 축출되었다. 우리는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서 그 정신을 다시 불러오게 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주시하자!  368-369


학교 제도 - 큰 국가들의 학교제도는 항상 기껏해야 평범한 수준일 뿐이다. 그것은 큰 부엌에서 기껏해야 평범한 정도의 음식이 만들어지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이다.  370


행복의 시간들 - 행복한 시대가 전혀 불가능한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단순히 원하기만 할 뿐, 가지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개인은 그에게 조흔 날들이 찾아오면 틀림없이 불안과 비참함을 기원하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운명은 행복한 순간을 맏을 준비가 되어 있다. 모든 삶에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러나 행복한 시대를 맞을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대는 '산의 저편'으로 그리고 조상들의 유산으로 인간의 상상속에 존속해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한 시대라는 개념은 아마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간이 사냥과 전쟁으로 심하게 긴장한 후, 휴식에 몸을 맡기고 팔다리를 뻗으며 잠의 날개가 자신의 주위에서 소리내는 것을 듣는 그런 상태에서 추측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 오랜 습관에 따라서 그가 이제 고통과 수고의 모든 시간 후에도 역시 거기에 상응하는 상승과 지속 속에서 그 행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추론이다.  371-372


종교와 정부 - 국가 또는 좀더 명백히 말해서 정부가 미성숙한 많은 사람들의 후견인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을 위해서 종교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폐지할 것인지를 숙고해보는 한, 정부는 항상 거의 확실히 종교를 유지하는 쪽으로 결정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상실, 결핍, 두려움, 불신의 시간들, 즉 정부가 개인의 마음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하여 직접적으로 그 무엇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바로 그곳에서 개별적인 심정을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편적이고 피할 수 없으며 우선은 불가항력적인 재난(식량난, 금융위기, 전쟁들)에서까지도 종교는 진정시키고 기다리며 신뢰하는 태도를 대중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국가 정부의 필연적 또는 우연적 결함들이나 왕조의 관심사들이 낳은 위험한 결과들이 통찰력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서 그를 반항적으로 만드는 모든 곳에서, 통찰력이 없는 사람들은 신의 손가락을 보게 될 것으로 믿고 위의(이 개념에는 보통 신적 통치 양식과 인간적 통치 양식이 융합되어 있다) 지시들에 인내하면서 복종하게 될 것이다. .. 대체로 국가는 사제들을 끌어들이는 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사제들을 끌어들이는 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사제들의 가장 개인적이고 은밀한 영혼의 교육이 필요하고, 겉으로 보아 외면적으로는 전혀 다른 관심을 대표하고 있는 시종들을 존중하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국가가 종교에서 더 이상 아무 이익도 스스로 끌어내서는 안 될 경우나, 종교적 조치를 취하느 ㄴ데 정부에게 같은 종류의 통일적인 방법이 허용되어서는 안 될 정도로 국민이 종교적 사실들에 대하여 너무 다양하게 생각하고 있을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종교를 사적인 일로 취급하고 각 개인의 양심과 습관에 넘겨야 하는 타개책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제일 먼저 종교감각이 강화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국가가 무심코 또는 고의적으로 생명의 공기를 기꺼이 허락하지 않았던 은폐되고 억압된 종교감정의 동요가 이제 터져나와 극단적으로까지 무절제해진다. 나중에는 종교가 종파들로 뒤덮이게 되고, 종교가 개인적인 문제가 된 그 순간에 용의 이빨이 뿌려졌다는 많은 사실이 입증된다. 싸움의 광경과 종교적 신조가 지닌 모든 약점에 대해 적개심에 차 폭로하는 것은 결국 더 뛰어난 자와 재능이 있는 자로 하여금 비종교성을 개인적인 무넺로 삼게 하는 타개책만을 허용할 뿐이다. 이러한 의향은 통치하는 사람들의 정신에서도 역시 만연하게 되고, 거의 자신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그들이 하는 조처들에 반종교적인 성격을 주게 된다. 이 현상이 나타나면 곧 과거에는 국가를 반쯤 또는 완전히 신성한 그 무엇을 우러러보았던, 여전히 종교적으로 감동되어 있던 사람들의 분위기는 결정적으로 반국가적인 분위기로 변한다. 그들은 정부의 조치에 대해 동정을 살피고 있다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많이 방해하고 충돌하며 교란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반대파와 비종교적인 사람들을 그들의 항의의 열기를 통하여 국가에 대한 거의 광적인 감격으로 몰아넣는다. ...

모든 통치자들에 대한 불신, 단기간의 투쟁들이 보여주는 무익하고 소모적인 것에 대한 통찰은 사람들로 하여금 와전히 새로운 결심들, 즉 국가 개념의 폐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대립하는 것을 지양하도록 몰라갈 것이 분명하다. 사적인 단체들이 한 단계씩 국가의 업무들을 자신 속으로 끌어들인다. 결국 낡은 통치 활동에서 남아 있는 가장 끈질긴 잔여물(예를 들면 사적인 인간들이 사적인 인간들을 확실히 지켜야 하는 저 활동)까지도 언젠가는 사적인 기업가에 의해 처리될 것이다. 국각의 경시와 붕괴, 국가의 죽음 그리고 사적인 인간(모든 인간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합리성과 불합리성을 잉태하고 있는)를 달성하고 오래된 병이 재발하는 것을 모두 극복하고 나면 인류의 이야기책에는 새로운 한 장이 펼쳐지고 거기서 사람들은 온갖 종료의 기이한 역사들과 아마 몇 개의 좋은 이야기도 읽게 될 것이다.  372-376


수단의 관점에서 본 사회주의 - 사회주의는 거의 노쇠해버린 전제주의의 뒤를 이르려는 공상적인 동생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노력들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반동적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전제주의만이 가졌던 것과 같은 국가 권력의 충만함을 갈망하기 때문이며, 개인의 진정한 파멸을 추구함으로써 과거의 모든 것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사회주의에게는 자연의 부당한 사치로 나타나며 사회주의에 의해서 하나의 합목적적인 공동체의 기관으로 개조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유사성 때문에 사회주의는 항상 고대의 전형적인 사회주의자 플라톤이 시칠리아의 전제군주의 궁정에 나타났던 것처럼, 모든 권력 발전의 과도기적인 주변에서 나타난다. 사회주의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저넺주의의 후계자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 세기의 독재 권력국가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촉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유산조차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사회주의에는 아직 한 번도 그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가장 겸손한 복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국가에 대한 진부한 종교적 경건함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현존하는 국가들을 제거하는 데 힘써야 하므로 그러한 경건함을 제거하기 위하여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 때문에 사회주의는 단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극단적인 테러리즘을 통하여 여기저기에 한 번씩 존재하기를 희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은밀히 공포정치의 조짐을 보이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대중에게 머리에 못을 박듯이 '정의'라는 단어를 머리 속에 박아둔다. 그것은 그들의 오성을 오나전히 빼앗아버리고 (오성이 이미 이 얼치기 교양으로 인해 심하게 손상을 입은 뒤에), 그들이 해야 하느 ㄴ나쁜 장난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이다. 사회주의는 국가 권력의 모든 축적의 위험을 실로 난폭하고 적나라하게 가르치고, 그러한 한 국가 그 자체에 대한 불신삼을 품게 할 수가 있다. 만약 사회주의의 거친 목소리가 '가능한 한 많은 국가를' 이라는 함성으로 다가오면, 그 함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시끄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곧 그것과 반대되는 '가능한 한 적은 국가를' 이라는 함성이 더 큰 힘으로 터져나올 것이다.  378-379




제9장 혼자 있는 사람


진리의 적들 - 신념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391


너무 집착하지 않도록 - 어떤 일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그 일에 충실한 것은 드문 일이다. 그들은 단지 그 깊이를 밝혔을 뿐이다. 항상 그곳에는 매우 불쾌한 것이 보인다.  392


의도하지 않은 고결함 -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들에게 항상 베푸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고결한 행동을 하게 된다.  394


친구 - 동정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기쁨이 친구를 만든다.  395


가장 고귀한 위선자 -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고귀한 위선이다.  396


인간의 운명 -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위하고 판단하더라도, 좀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부당함을 알고 있다.  399


위대함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 어떤 강물도 자기 자신에 의해 크고 풍부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주 많은 지류들을 받아들이며 계속 흘러가는 것, 그것이 강물을 그렇게 만든느 것이다. 모든 정신의 위대함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그 많은 지류들이 뒤따라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다. 그가 처음부터 재능이 없는지 재능이 풍부한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400


너무 큰 목표들 - 공개적으로 큰 목표들을 세우고 그 후 비밀리에 자신은 그것을 하기에 너무나 약하다는 사실을 통찰하게 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그 목표들을 공개적으로 철회하기에 충분한 힘도 가지고 있지 않고 그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위선자가 되어버린다.  405


강물의 흐름 속에서 - 세차게 흐르는 물은 많은 암석과 관목숲을 휩쓸고 가며, 강한 정신은 수많으 ㄴ어리석은 사람들과 명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휩쓸고 간다.  405


정신의 육체화 - 한 사람이 많이 그리고 현명하게 사고하면 그의 얼굴뿐만 아니라 현명한 모습을 얻게 된다.  406


잘 보지 못하고 잘 듣지 못하는 것 -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은 점점 더 적게 보게 되고, 잘 듣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몇 가지를 더 듣게 된다.  406


허영심의 자기만족 - 허영심에 차 있는 사람은 탁월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탁월하다고 느끼기를 원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기만과 자기계략의 수단을 거부하지 못한다. 그에게 잊혀지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다.  406


예외적으로 허영심에 차 있는 - 보통 자기를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육체적으로 병에 걸리게 되면, 예외적으로 허영심에 차게 되며 평판과 칭찬에 대해 민감해진다. 그가 자신을 상실해가는 정도 만큼 그는 다른 사람의 의견 즉 외부에서 다시 자신을 되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406-407


유일한 인간의 권리 - 관습적인 것에서 벗어난 사람은 비범한 것에 바쳐진 제물이다. 관습적인 것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관습적인 것의 노예이다. 어떤 경우든 사람들은 파멸하게 되어 있다.  408


얼치기 지식 - 외국어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은 외국어를 훌륭하게 말하는 살마보다 외국어에 대해 더 큰 즐거움을 가지고 있다. 얼치기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만족이 있다.  408


의심을 품는 것 - 사람들은 좋아할 수 없는 인간들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으려고 한다.  409


친구가 없는 것 - 친구가 없는 것은 질투와 자만심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그가 질투할 아무런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다행스러운 상황 덕으로 친구를 가지고 있다.  410


참회 -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나면 그 죄를 잊어버린다. 그러나 대개 다른 사람은 그의 죄를 잊지 않는다.  412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 인간은 사랑하는 것과 호의를 베푸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젊어서부터 배워야 한다. 만약 교육과 우연이 우리에게 이런 감각을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을 때 우리의 영혼은 메마르고 친절한 사람들의 섬세한 감각을 이해하는 데도 적합하지 못하게 된다.  424


다른 사람과 세상에 대한 불만 - 우리가 원래는 자신에게 불만을 느끼고 있으면서, 흔히 그러듯이 다른 사람에게 불만을 터뜨린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판단들을 흐리게 만들고 기만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후에 다른 사람의 실수와 결점을 통해 이 불만에 동기를 부여하려 하고, 자기 자신을 보려 하지는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 가차없는 재판관이기도 한 종교적으로 엄격한 사람들은 동시에 인간성 일반에 대해 가장 많이 나쁜 욕을 해왔다. 자신에게는 죄를, 다른 사람에게는 덕을 남겨주는 성자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부처의 법도에 따라 자신의 선을 사람들 앞에서 숨기고, 자신의 악만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사람도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426


고독한 사람들 -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함께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져서 자신을 다른 사람과 전혀 비교하지 않고 조용하고 즐거운 기분으로 자기 자신과 좋은 대화를 나누며, 게다가 웃음을 지으며 독자적인 삶을 엮어 나간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하면 자기 자신을 구차하게 과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 관한 유익하고 정당한 의견을 남에게서 비로소 다시 배우도록 강요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그들은 배워 익힌 이 의견에서도 되풀이해서 조금 빼거나 값을 깎으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혼자 있음을 기꺼이 허락해야만 하지만 흔히 일어나는 일처럼 그 때문에 불쌍히 여기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아야만 한다.  436


방랑자 - 어느 정도 이성의 자유에 이른 사람은 지상에서는 스스로를 방랑자로 느낄 수밖에 없다. 비록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하여 여행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왜냐하면 이와 같은 목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세상에서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주시하고 그것에 대하여 눈을 크게 뜨고 보려 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개별적인 것에 너무 강하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 변화와 무상함에 대한 기쁨을 가진 방랑하는 그 무엇이 그 자신 속에 존재함이 틀림없다.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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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 오늘 우리는 왜 니체를 읽는가


근대의 '철학적 다이너마이트'였던 니체 철학은 현대라는 시점에서 '토대학으로서의 철학'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14


니체가 보여준 현대성의 길은 다방면에서 확인된다. 먼저 철학 영역에서 그가 제시했던 탈형이상학적 전환, 이성중심주의 모델과 절대주의 모델의 파기, 실체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의 전환, 다원주의 모델을 통한 일원론 극복 프로그램 등은 서양 철학에서 지각변동을 일으켜, 근대적 패러다임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것은 곧 현대 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변동이었다. 니체 철학의 현대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또 다른 영역은 예술이다. 이성적 경험과 심미적 경험 사이에 놓여 있던 경계를 파기해버리고, 예술의 '탈미메시스'를 감행했던 니체에게서 예술가들은 다양한 꽅을 피울 수 있는 씨앗을 찾아냈다. 음악, 회화, 건축, 무용, 조각 등의 넓은 영역에서 그 씨앗들은 예술의 현대성이라는 아우라를 피워냇다고 할 수 있다. 문학 영역 또한 예외는 아니다. 언어에 대한 회의, 문학과 역사의 관계, 예술과 실제의 관계, 심리 현상과 글쓰기의 관계에 대한 니체의 질문들은 현대 문학이 주목할 만한 소재를 제공했으며, 니체 작품 자체가 문학적 찬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외에도 신의 죽음에 대한 니체의 선언을 둘러싼 신학담론들, 스스로를 철학적 심리학자로 자화자찬할 정도로 예리하게 세공된 심리분석의 내용을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에서 눈여겨본 것은 이미 오래되었으며, 근대 사회의 허무적 요소에 대한 통찰이나 권력국가와 법률국가에 대한 니체의 신랄한 비판은 사회학, 정치학을 넘어 이제는 법학 영역에서도 문제해결 과정에 영감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듯 니체 철학은 현대를 종횡무진 누비는 철학이 되었다.

하지만 니체의 철학은 미래에도 여전히 고전일 것이다. 철학의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을 철학 자신의 수단인 비판을 통해 보여준 모범으로서, 철학이 삶의 창조적 가능성을 고취시켜야 하고 늘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으 보여준 모범으로서,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정신의 높이를 자랑스러워하는, 거리의 파토스가 깃든 자유정신의 모범으로서, 삶을 사랑하고 세계를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적 영혼의 모범으로서... 무엇보다도 인간과 사회의 건강성을 염려하고 그것의 확보를 과제로 삼는, 철학자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모범으로서...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 우리는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될 것이다.  15-16




니체는 어떤 사상가인가 - 니체의 철학적 실존과 자화상


철학자들의 글과 삶은 어느 정도 관계가 있을까?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은 그들의 삶에 대한 지식이 없이도 글을 읽는 것만으로 그들의 사유를 이해하기에 충분한 경우다. 글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철학자들은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홉스, 루소 등이 있다. 그런데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삶을 꼭 들여다보아야 하는 철학자들도 있다. 소크라테스, 파스칼, 키르케고르, 비트겐슈타인이 그러하고, 니체 역시 여기에 속하며 그 전형적인 경우다.  21


"일체의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쓰려면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읽기와 쓰기에 관하여]  22


삶과 철학의 통일적 관계를 보여준 니체에게서 철학은 인식적 차원의 지혜를 찾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철학은 이제 삶의 지혜를 찾는 실존적 행위가 된다. 그 지혜는 바로 디오니소스적 지혜다. 즉 건강한 삶의 본능에서 나오고 건강한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혜, 파괴와 창조라는 두 계기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생명성 자체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아는 지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거대한 관계세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깨닫는 지혜, 그 속에서 모든 것이 의미 잇고 모든 것이 필연적이어서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통찰하는 지혜다.  25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며,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었을까? 

(1) 예술가-철학자, 니체 : 문헌학 교수였던 니체가 <비극의 탄생>이라는 철학적 저술을 집필할 때부터 이미 그는 자신을 예술가-철학자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의 예술가는 그림을 그리거나 곡을 짓는 예술가적 실천을 하는, 좁은 의미의 예술가를 넘어서는 개념이다. '철학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철학적 예술가는 '위대하고도 고귀한 목표'를, 즉 위대한 문화와 위대한 인간과 위대한 미래를 '창조'해내려는 '과제'를 지니고, 그 과제를 건강성 회복을 수단으로 실제로 수행하는 존재다.  26


(2) 계몽가와 교육자, 니체 : 니체는 19세기 당대를 총체적으로 진단하고 치료하고자 했던 시대진단가이자 계몽가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살던 시대를 총체적인 의미 상실과 목표 상실의 시대, 인간의 생명력이 퇴화되어 병들어 있는 시대, 철학과 문화와 정신이 방황하는 시대로 진단한다.

시대와 인간과 문화가 앓고 있는 병증을 인간과 사회의 '건강성' 회복의 길을 제공하면서 치유하는 것이다.  28


(3) 자유정신, 니체 : 자유정신은 말 그대로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다시 소유하는, 자유롭게 된 정신"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자유정신을 위한 책]으로 이해하는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자유정신은 단순히 이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삶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도 니체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유정신은 여러 가지 덕목을 갖추어야 한다. 지적 성실성과 정직성, 비판의 힘과 새로운 대안 제시의 힘,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자기 자신을 믿는 '용기', 자신에 대한 '긍지' 등 수많은 덕목들이 거기에 속한다.  29-30


(4) 철학적 심리학자, 니체 : 니체는 자신을 '타고난 심리학자' 혹은 '영혼의 분석가'로 이해하기도 한다. 실제로 아들러나 융 등의 정신분석학자들이 프로이트보다 한 수 위라고 찬탄할 정도로.  30


니체 철학은 낭만적 시기(<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실증적 시기(<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즐거운학문>), 창조적 시기(<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후)로 구분될 수 있다.  31


1881년을 기점으로 니체의 철학이 변모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생성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 프로그램이 본격화됨.  31-32




1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라는 실험철학의 과제


실험철학은 몇 가지 측면에서 실험적이다. 첫째, '지금까지의 철학의 주체'를 '새로운 척도와 새로운 방식'을 사용하여 해명한다. 새로운 척도는 바로 '건강한 삶'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세계를 긍정하는 삶으로, 오로지 이 척도에 의해 모든 것이 재평가된다. 이때 실험철학은 둘재, 질문의 방식을 변경한다. 평가대상 '그 자체'에 대해 묻지 않고, 평가대상의 '가치'에 대해 묻는다. 즉 그것이 갖고 있는 의미와 기능을 점검한다. 그래서 실험철학의 질문방식은 '그것은 무엇인가?'가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삶을 위해 그것은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가?'이다. 평가척도와 질문방식을 변경하여 실험철학은 셋째, 기존의 자명성의 '토대'를 점검하는 실험을 시작한다. 서양의 온갖 자명성의 토대가 될 정도로 가치 있다고 여겨졌던 것들의 '가치'를 의문시한다. 그런데 그 실험적 이문은 매우 부정적인 답변을 듣게 된다. 그 가치들이 삶에 대한 부정의식에서 출발했고 삶의 건강성을 해치고 있는 실상이 목격된 것이다. 그래서 실험철학은 '기존 가치의 탈가치화(Entwertung)를 수행하는, 파괴와 해체의 망치를 든다. 여기서 실험철학의 네 번째 실험적 성격이 확보된다. 기존 가치의 탈가치화가 심리적 공황 상태를 발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즉 토대의 상실은 곧 의미근거와 가치근거의 상실이며, 이것은 다시 '왜?'. '무슨 목적으로?'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실험을 두고 위 인용문에서의 '부정의 말에, 부정에, 부정에의 의지'에 머무르는 '허무주의의 가능성을 선취'한 것으로 표현한다. 결국 실험철학 스스로 망치를 들어 기존 가치들을 탈가치화시키면서 허무주의라는 장을 시험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하지만 실험철학은 다섯째, 그런 허무적 상태를 넘어서는 또 한 번의 실험을 한다. 새로운 의미근거와 가치의 토대를 제공하게 만드는 실험을, 그것은 인용문이 말하듯 '정시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견뎌내는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감행하는가?'를 척도로 진행되는 실험이다. 그것은 곧 '인간이 얼마나 건강한가?'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건강한 인간은 진리를 수없이 감행하고, 수많은 진리를 견뎌낸다. 정확히 말하면 그 스스로 건강한 삶을 위해 진리들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을 다시 건강한 삶의 조건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는 삶의 건강성을 척도로 새로운 가치체계를 구성해낼 수 있다. 그럴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의 힘이 강하다. 결국 허무적 상태를 넘어서게 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건강한 디오니소스적 인간'을 창출해내는 것이며, 이것이 실험철학이 감행하는 '가치의 척도(Umwertung)라는 실험의 목적이다.  41-42


자기 삶에 대한 사랑을 니체는 운명애라고 부른다. 운명애는 이미 결정되어 주어져 있는 삶에 대한 숙명적 체념과는 다르다. 오히려 운명애는 자신이 창조적 주체로서 구성해가는 삶에 대한, 스스로 구성해가는 운명에 대한 그야말로 운명적인 필연성을 지닌 사랑이다.  45


디오니소스적으로 삶을 마주한다는 것,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니체 자신의 해명을 들어보자.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가혹한 문제들에 직면해서도 삶 자체를 긍정한다 ; 자신의 최상의 모습을 희생시키면서 제 고유의 무한성에 환희를 느끼는 삶에의 의지-이것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다." -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46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첫째, 창조와 파괴, 대립과 싸움을 통해 형성되고, 그 어떤 계기라도 불필요하지 않으며, 그런 것으로서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성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생명은 매순간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파괴가 일어나는 과정이다. 생명은 즉 파괴와 창조라는 모순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모순성은 생명의 생성적 성격을 보증해준다. 그런데 니체는 생명의 이런 모순성을 삶에의 의지에 의한 것으로 생각한다. 즉(힘에의 의지로서의) 삶에의 의지가 매순간 자신이 구현해놓은 '최상의 모습'을 스스로 파괴하고, 삶에의 의지의 파괴작용은 곧 삶에의 의지의 새로운 창조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생명의 지속은 곧 삶에의 의지의 무한성 및 영원성에 대한 증거가 된다. 이렇게 해서 니체는 생명 그 자체의 모순성 및 모순적 생명의 무한서오가 영원성을 각각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생명은 모순적이기에 디오니소스적이며, 모순으로서 무한하고 영원하기에 디오니소스적이다...

둘째, 디오니소소즉인 것은 기쁨과 환희로 전환된 고통을 의미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고통에서 발생한 환희"다. '자신이 구현해놓은 최상의 모습'을 파괴해야만 하는 생명은 파괴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니체는 생며을 가능하게 하는 삶에의 의지는 파괴의 고통을 피해야 할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오히려 기쁨이다. 생명의 모순적 구조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셋째, 디오니소스적인 것은-수사적 표현이기는 하지만-"넘쳐흐르는 살모가 힘의 느낌"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생명의 모순성과 지속은 생명력(삶에의 의지)이 결여되거나 결핍 상태에 있을 때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것이 계속 유지되고 고갈되지 않고 풍요로워야 가능하다...

넷째,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최고의 긍정 양식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니체는 이 점을 "디오니소스적 상징 안에는 긍정이 그 궁극적인 지점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긍정의 여러 양식 중에서 최고의 긍정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성이 보여주는 모든 계기에 대한 조건 없고 유보 없고 예외 없는 긍정을 하기 때문이다.  47-50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개념이 갖는 의미는 힘에의 의지를 방법적 개념으로 삼은 니체의 후기 사유에서도 여전히 지속된다. 이제 그것은 힘에의 의지와 동의어가 된다. 힘에의 의지의 복수(plural)적-상승적-관계적 수행은 영원히 지속되는 모순적 생명성, 그 과정이 보여주는 고통의 기쁨으로의 전환, 생명력의 지속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63


후기 사유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그것이 갖는 긍정의 함의다... 디오니소스적 인간이야말로 '고통 자체와 삶 자체의 모든 의문스럽고도 낯선 것들에 대한 아무런 유보 없는 긍정'의 전제인 것이다. 긍정의 철학은 그래서 '긍정하는 인간'에 대한 철학이 된다. 니체가 그런 인간을 육성하는 과제를 절실한 철학적 과제로 상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후기 사유 전체는 바로 그런 '긍저하는 인간'을 어떻게 육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라고도 할 수 있다.  64




2 '신의 죽음에 대한 선언'은 '신의 죽음에 대한 고발'


<즐거운 학문>에서 미친 사람의 입을 빌려 처음 고지된 신의 죽음은 니체의 그리스도교 비판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보여주는 방향타 역할을 한다. '인간이 신을 죽게 한 장본인이라는 것, 그리스도교 교회는 살아 있는 신의 집이 아니라, 죽어버린 신의 무덤과 묘비에 불과하다는 것'.  69


사제들의 권력추구 욕망 때문...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사랑하지 못할 때, 그리스도교가 제시한 신 개념은 전략적으로 인간에 의해 부정될 수밖에 없다는 고백을 듣게 된다.  70


인간이 태양을 잃은 세계에서 헤매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 스스로 신의 '역할'을 대신하여 존재와 의미와 가치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그럴 정도로 강해져야 하고, 그럴 수 있는 자신의 힘을 긍정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자시을 건강한-디오니소스적 인간으로, 위버멘쉬로 고양시켜야 한다.  7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4부 [나귀의 축제]에서 재등장하는 더없이 추악한 자는 '신을 다시 믿는 자'로 설정되어 있다. 물론 그가 믿는 신은 옛 신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신의 '나귀'를 섬긴다. 이것은 최악으로 뒤틀린 심사에서 나온, 신에게 보내는 비웃음이자 신엑 최대의 모욕을 안겨주는 방식이다. 그러면서 그는 신을 '철저히' 살해한다. '나귀'는 이제 그가 찾아낸 새로운, 지상에 있는-국가든, 돈이든, 과학이든-우상이다. 이것을 그는 다시 신격화한다. 병리적 인간인 그가 자기부정이라는 병리적 상태를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형하고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창조적 주체로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지도, 자신에 대한 긍지를 갖지도 못한다.  76-77




4 건강한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대명사, 위버멘쉬


인간을 '우연과 사제'의 손에서 해방시키고, 인간이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을 사랑하고 긍정하는 길을 철학적으로 확보한다. 니체의 철학적 야심은 이것이었다. ..

'누가 있어 긍정의 노래를 함께 부를 것인가?' 니체의 눈에 비친 사람들은 하나같이 방황하는 정신을 지닌 무기력한 "인간 말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I [머리말]  133


위버멘쉬는 오로지 인간이기 때문에, 오로지 인간만이 획득할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134


위버멘쉬는 기본적이면서도 일차적인 의미의 항상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인간이다. 즉 자신의 현 상태를 늘 넘어서는 '자기극복'의 노력을 의식적-의지적으로 기울이는 인간이다.  135


인간존재의 의미이자 이상적인 실존의 모습인 위버멘쉬, 그것의 의미는 먼저 '자유정신'이라는 개념으로부터 획득된다. 자유정신은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파토스를 지니고 가치의 새로운 중심을 제시할 수 있는 정신의 자유로운 상태를 말한다.  136


자유정신은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고 획득할 수 있는 자다...

"..평가라는 것을 통하여 비로소 가치가 존재하게 된다. 귀담아듣도록 하여라. 창조하는 자들이여! 가치의 변천, 그것은 곧 창조하는 자들의 변천이기도 하다. 창조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자는 끊임없이 파괴를 하게 마련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I [천개의 목표와 하나의 목표에 대하여]  137


여기서 창조는 가치평가작용 혹은 의미창조작용, 즉 '해석(Interpretation)'을 말한다.  138


인간이 '그의 세계'를 더 이상 구성하지 않는 경우는, 다으모가 같은 경우들일 것이다. 그의 창조력이 무기력해졌을 경우, 혹은 자신이 구성해낸 세계를 세계 그 자체와 동일시하여 절대화시켜버리는 경우,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구성된 가치와 의미의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여버리는 경우. 이 경우들이 모두 '크나큰 피로'의 증후이며, 그것은 삶의 지속적인 창조를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반면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고,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인간, 니체가 '해석자'라고도 부르는 그가 자신의 삶의 상승을 위해 해석을 할 때, 그는 이제 위버멘쉬의 조건 하나를 갖춘 것이다.  139


도대체 이성활동과 지각활동, 그리고 의식층은 어느 정도로 관계적이며, 어느 정도로 힘에의 의지의 규제를 받는 '도구'인 것인가? ..

니체는 이것에 대한 전통철학의 논의가 형이상학적으로만 진행되어 왔으며, 그래서 매우 제한적이면서도 비과학적이었다고 비난한다. 의식이나 정신은 신체의 특수한 기능에 대한 명칭이며, 신체는 육체성과 심리성의 구분 자체가 어려운 '관계적 유기체'다. 그래서 의식과 정신에 대한 물음은 곧 인간 유기체 전체에 대한 물음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철학적-생물학적-생리학적-심리학적 등 개별적 탐구방식이 모두 동원되어야 한다. 그런 총체적인 탐구에 의해서도 완전한 파악으ㄴ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형이상학적의식 탐구의 결과가 "정신과 의식을 과대평가"하는 "엄청난 실책"에 불과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경험성과 육체성을 무시하고 간과하는 "반과학적 정신"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신경계와 세포와 혈행과 근육계 등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모든 기관과 기능과 현상 전체를 고려해보면, 의식이라고 불리는 것은 첫째, 단일체가 아닌 흐름이고, 둘째, 그 과정은 우리에게 의식디는 부분과 의식되지 못하는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잇지만, 셋째, 그 구분은 고정되거나 확정된 불리가 아니라, 우리에게 의식되지 못하는 부분들이 의식되는 부분들로 이행하는 것이고, 그것도 경우에 따라 달리 진행된다는 것 등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의식과 의식 이전의 층은 진행의 정도에 따른 구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의식되는 부분을 '의식-이라는 명사형으로 이해한다. 마치 의식이 단일한 어떤 것처럼, 의식 이전적 현상과 분리 가능한 어떤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필요에 의해 그렇게 사용하는 언어적 표현방식일 뿐이다.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익숙해져 '생각행위와 느끼는 행위와 욕구행위의 담지자'로서의 의식, '정신적 원인'으로서의 의식이라는 생각을 도출시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언어적 표현에 불과할 뿐, 사실은 아니다.  143-144


창조자이자 해석자이며 신체적 존재라는 자의식의 소유자, 삶의 창조적 구현을 매순간 이루어내는 존재, 파괴와 창조를 하는 자유정신의 눈, 이성의 수단적 성격 및 의식의 기호적 속성과 한계를 인지하는 인간, 그러면서 자기극복의 과정을 이어가는 인간.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위버멘쉬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음 장들에서 추가될 위버멘쉬의 다른 특징들-주권성, 귀족성, 주인의식, 책임과 자유 등-을 부가하지 않아도, 이미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렵고도 고단하다. 도대체 왜 이런 쉽지 않은 일을 니체는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일까? 그래야 비로소 인간이 인간일 수 있다고, 인간의 존재의미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그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147-148


위버멘쉬적 삶을 사는 것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고단함과 어려움은 어느 순간 위버멘쉬로의 노력을 중단하게 할 수 있다. 니체도 그런 위험을 잘 알고 있다. 그가 우리에게 실존적 결단을 내리라고, 온전한 의미에서의 실존적 결단을 내리라고 강요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148




5 관점주의라는 인식 모델 : 절대적 진리? 해석적 진리!


니체는 '같지 않은 것을 같게 만드는' 작용이라고 부른다. 영원한 흐름 속에 있는 생성세계를 포착해내고 파악해내고 붙잡아내어 한 가지 면으로 고정시키는 것, 여러 경험들 중에서 특정한 것만 받아들이는 것, 비교하고 도식화하고 예속시키고 범주화하고 일반화하는 것, 그래서 특수성과 개별성보다는 범주성과 일반성에 주목하는 것, 이런 모든 일들이 지성뿐만 아니라 감각기관을 포함한 우리 신체 전체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알고 싶은 것만 안다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고 친숙한 형태의 것으로 포섭시켜 유형화해서 말이다. 그래야 우리가 낯설고 친밀하지 않은 새로운것들 속에서 생기는 불안감과 공포를 떨치고 삶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같지 않은 것을 같게 만드는 일'은 그 자체로 삶을 위한 전략적 행위다. 우리 인식이 이런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치기에, 해석은 대상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묘사나 기술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주관적 필요에 의해, 우리에게 이해 가능한 형태로 구조조정되어 있다. 그것은 결국 삶의 상승이라는 우리의 실천적 욕구들이 반영된 오류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오류들을 통해서만 세계와 소통하고, 이런 오류들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 결국 삶에 대한 유용성 전략은 해석의 필연적 오류성을 이미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65




6 자유와 평등을 원하는가? 먼주 주권적 존재가 되어라


니체는 .. '인간은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

'오로지 주권적 존재만이 약속도 할 수 있고, 책임도 질 수 있다. 따라서 오로지 주권적 개인만이 자유와 평등을 요구할 수 있다. 약속과 책임과 자유와 평등이라는 것은 이렇듯 주권적 개인만이 획득 가능한 특권이다.'  177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조건이 바로 약속권리에 있다고 니체가 생각.  178


기억은 앞으로의 자신의 사고와 행위를 산정하고, 그것을 규칙적인 것으로 만들며, 그것을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만드는 인간의 능력이다. 이 능력에 의해서 약속도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렇기에 기억은 약속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려는 인간의 (망각보다) 고급한 기능일 수 있는 것이다. 기억능력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에게 보증할 수 있다. 그런데 니체는 이런 기억을 '의지'의 능력으로 이해한다. 

"일단 의욕한 것을 계속하려는 의욕, 즉 본래적인 의지의 기억인 것이다." - <도덕의 계보>  180


누구나 다 자신의 해위와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책임질 수 있음은 그래서 특권이다.  183





맺음말


그는 인간과 세계의 병증을 진단하고 치유하는의사, 건강하게 살기를 가르치고 권유하는 교육자이자 계몽가다. 

먼저 네 자신을 창조할 수 있어야, 세계가 네 작품이 된다. 네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세계도 지배할 수 있다. 네 자신을 사랑하고 긍정할 줄 알아야, 세계가 너의 화원이 된다. 네 자신에 대한 긍지를 지녀야, 세계도 경외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 먼저 네 자신이 되어라!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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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이 책에 니체가 일한 곳들의 모습, 니체가 무언가를 기록하거나 원고를 준비하거나 교정을 본 지방과 장소의 풍경을 담았다.  4



서문

니체는 왕의 은혜로 목사 자리를 얻게 된 시골 루터교 목사의 아들, 귀족을 공경하고 서민을 경멸하는 아이로 남아 있었고, 어른이 되어서는 현대의 중요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 거의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유럽인(특히 독일인), 민족주의, 제국주의, 군국주의에 대한 주요 비평가 중 한 명이었다.  9


아주 일찍부터 니체는 자신이 '단지'독일인일 뿐 아니라 유럽인이라고 생각했다. 열다섯 살 때는 남부 이탈리아인, 스위스인, 북부 독일인 주인공들이 각자의 운명을 펼치는 [카프리와 헬골란트]라는 단편을 썼는데, 이야기 초반에 북부의 영웅인 폰 아델스베르크는 "우리는 이 세상의 순례자다. 우리의 조국은 어디에나 있고 아무 곳에도 없다. 우리 모두는 같은 태양이 비춘다. 우리는 이 세상의 시민들이다. 지구가 우리 왕국이다!"(니체 초기 작품집)라고 선언한다.  10


1880년대 중반에 니체는 자신을 "고국이 없는" 유럽인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FW, 377;3, 628~631)  11


니체는 글을 쓰기위해, 그만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즉 서구 문화(종교, 과학, 학문, 권력욕)를 종말로 몰아가고 있는 금욕주의의 계보와 그러한 금욕주의를 굴복시킬 수 있길 바라며 발전시킨 사상('같은 것의 영원회귀')을 쓰기 위해 유럽이 필요했다.  12


글을 잘 쓰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말을 잘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글을 더 잘 쓴다는 것은 더 나은 생각을 한다는 의미다. 전할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항상 생각해내고 실제로 그것을 전하는 법을 안다는 의미다.(MAM2, WS 87, 2, 592~593)  13


니체는 좋은 유럽인이 되려면 내면에 대한 순종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사람은 자신이 쓰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면의 소리를 들은 뒤 그것을 쓰는 데 도움이 되는 장소로 서둘러 가야 한다.  14


니체는 자연에 대해 박물학자라기보다 우주론자였고 도시에 대해서는 건툭가라기보다 문화비평가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 방대한 역사 지식, 고도의 문학 감수성, 고대 신화의 세계와 문화에 대한 친밀함, 이 모든 것이 니체와 자연, 도시의 유대를 풍요롭게 해주었다.  19




제1장 시작과 끝


'나는 어린 시절부터 혼자 있는 걸 좋아했고, 방해받지 않고 내 자신에게 몰두할 수 있을 때가 가장 기분이 좋았다...'(J1, 8)

열여섯 살 때 쓴 기록에서는 같은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려준다. "아주 일찍부터 내 안의 다양한 특성이 나타났다. 나는 사색적이고 과묵한 편이어서 다른 아이들과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가끔씩 나도 모르게 열정이 표출되기도 했지만."(J1, 279)  46


글쓰기와 작곡은 혼자 있기 좋아하는 사람이 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일들로 보인다. 열네 살 때 니체는 "나는 항상 혼자만을 위한 작은 책을 쓰고 싶었다. 나는 아직도 이 소박한 허영에 사로잡혀 있다"(J1, 11)라고 썼다. 니체는 마흔 살 때도 다시 같은 글을 썼을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 보면 니체는 항상 모든 사람에게 읽히기 위한 책을 썼지만 한편으로는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을 책을 쓴 것이다.  73


엄격한 질서를 내세운 학교에서 학생들을 동질화시키는 훈육이었다. 

이런 식의 훈육은 집단 전체의 효과를 노리고 짜여졌기 때문에 개인을 냉정하고 추상적으로 다룬다.  78


"..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할 수 있는 한 스스로 견딜 만한 존재로 자신을 위장하는 일일까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적당히 노력해서 할 수 있는 한 가장 좁은 테두리 안에서 사는 데 익숙해지는 겁니다. 정신이라는 초의 심지를 멋지게 잘라내고 부를 좇고 세상의 오락을 즐기며 사는 것이지요. 아니면 인생의 추잡한 면과 우리가 인생을 즐기려 할수록 오히려 더 인생의 노예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 인생의 좋은 것들을 단념하고 포기를 연습할 수도 있어요.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드에게는 우호적으로 대하면서도.(우리는 누추한 우리 동료들에게 동정심을 느끼니까요.) 한마디로 오늘날의 지나치게 달콤하고 모호한 기독교가 아니라 원래 기독교의 엄중한 요구에 따라 사는 것이지요. 기독교는 지나는 길에 "동행하거나", 유행이니까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인생은 견딜 만할까요? 예, 그렇고말고요. 인생의 짐이 계속 가벼워지고 어떤 끈도 더 이상 우리를 그 짐에 묶어놓지 않으니까요. 괴롭지 않게 포기할 수 있으니 인생은 견딜 만한 것이 됩니다."(B2, 95~96)  83-84


본에서 라이프치히로 옮겨갈 무렵 니체는 헤겔의 철학을 두루 섭렵했다...

니체는 랠프월도 에머슨의 독일어 번역본을 오랫동안 읽었다. 에머슨은 여러해 동안 니체의 충실하고 지속적인 동반자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헤겔은 곧 칸트와 쇼펜하우어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  87


'우리 학자 대부분이 학식을 너무 꽉 채우지만 않는다면 학자로서 더 가치가 높아질 거야.'(B2, 205~206)  90




제2장 나는 신이 되느니 바젤의 교수가 될 것입니다


니체는 대학에서 그리스 문학사, 플라톤 이전의 철학, 그리스와 로마의 수사학, 고대 그리스 종교, 플라톤의 생애와 가르침, 아이스킬로스의 <공양하는 여자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헤시오도스의 <노동과 나날>을 가르쳤다. 김나지움에서는 플라톤의 <변명>, <파이돈>, <파이드로스>, <향연>, <국가>, <프로타곻라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엄선된 책들, 아이스킬로스의 <포박된 프로메테우스>,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를 가르쳤다. 학생들은 에우리피데스의 <바카이>를 읽고 디오니소스 숭배에 대한 각자의 느낌을 보고서로 써야 했다.  139-140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를 준비하며 쓴 기록에서 니체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대충 가르치거나 애매하게 설명했다면 모든 학생이 내게 더 많은 설며오가 해석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교사는 모든 수준의 학생들을 이해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140


김나지움과 대학의 많은 학생이 니체의 능변과 탁월한 명석함에 대한 증언을 남겼지만 개인적인 면에 대한 묘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동료들은 니체에게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실제로 동료들은 1874년에 니체를 학과장으로 선출했는데, 니체와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어도 그를 신뢰했음을 알 수 있다. 니체는 지루한 디너파티에서 빠져나가려고 변명을 해야 하는 일이 불만스러웠다. 그는 혼자 바깥에서 산택하는 편을 훨씬 더 선호했다. 니체의 고독과 자기수양은 아마도 나중에 그가 금욕적인 이상이라고 분석한 것의 결실일 것이다.  142


니체는 학창 시절 초기에 존재의 균열을 느낀 적이 있었다. 특히 슐포르타에서는 예술과 음악에 대한 끌림이 비판을 받아 억제되었다. 보노가 라이프치히에서는 문헌학이 그를 신학으로부터 구해주었지만 '포기'와 '체념'의 삶을 선고받았다. 마지막으로 바젤에서는 일상의 고되고 단조로운 일이 그의 에너지를 빼앗아갔고 트립셴을 방문할 때도 지성과 취향에 있어서 많은 걸 타협해야 했다. 답답한 상태가 점점 더 심해지자 니체의 건강은 더 악화될 조짐을 보엿다... 이러한 위기에 대한 대응은 여행을 가는 것이엇다.(여행이 항상 니체의 첫 번째 대응 방법이었다).  165


니체는 루가노에서 <비극의 탄생>을 탈고하면서 이미 자신의 직업적 자아, 교수로서의 자아에 균열, 분열 혹은 정신분열의 압박감을 느꼈다. "나는 스스로 문헌학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예리하게 느끼고 있다. 그것도 완전히 심각한 상태다. 찬사와 비난, 내가 이쪽에서 받았던 실로 가장 고귀한 찬미가를 생각하면 몸이 떨린다. 그래서 나는 서서히 철학적 존재로 옮겨가고 있고 이미 자신에 대한 믿음도 생겼다. 뿐만 아니라 시인이 될 준비도 이미 되어 있다."(B3, 190)  171


니체는 유대인의 종교와 도덕률에 대해서는 계속 양면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유럽의 고급문화를 대체로 유대인들이 만들어냈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176


인간은 투병생활을 통해 자신의 삶과 한계를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 어떤 일에 집중하고 신중하게 계획을 세울 기회를 얻는다. 다른 한편 병이 들면 약해지고 낙담하여 어떤 진지한 계획을 세울 용기를 잃어버린 채 망성이고 위축되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니체는 한 음악가 친구에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의 이유를 잊은 채 사는 병든 생황이다"라고 써싿. 1875년 8월 11일에는 파리의 말비다 폰 마이젠부크에게 편지를 썼다.

".. 우리가 완전히 낫기 위한 비법은 둔감해지는 것입니다. 그 방법만이 우리 내면의 엄청난 연약함과 고통에 대한 유일한 해독제이지요. 적어도 외부의 어떤 것도 우리와 충돌하여 쉽게 해를 끼칠 수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튼 동시에 내부와 외부 양쪽의 불과 맞서야 하는 것보다 제게 더 힘든 일은 없습니다."(B5, 104)  191-192


'골똘히 생각하고 글을 끼적거리는 문제 많은 습성은 지금까지 내 건강을 해쳤을 뿐이다. 내가 단순히 학자 입장이었을 때에는 건강을 해쳤을 뿐이다. 내가 단순히 학자 입장이었을 때에는 건강했다. 하지만 그 뒤로 음악에 관한 것들로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난해하기 그지없는 철학과 별 의미도 없는 수만 가지 일이 나를 걱정으로 몰아넣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교사가 되고 싶다.'(B2, 250)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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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12월 3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출판용 제목과 내용이 준비되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심리학적 질문이 주를 이루고 형이상학적 질문이 부차적인 책으로, 어쩌면 형이상학과 윤리학의 계보를 탐구하는 니체의 성향이 마침내 꽅을 피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211-213


스위스 '시민권'을 포기하면서 그에게는 다시 집이 없어졌다. 니체는 새로운 아침을 찾아 더 멀리 산속으로 달아났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묘사했던 바로 그 방랑자가 된 것이다.

방랑자. 조금이라도 이성의 자유를 얻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지상에서 스스로 방랑자라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가는 여행자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방랑장게는 그런 목표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반면 방랑자는 세상의 모든 일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유심히 관찰하고 살필 것이다. 그래서 방랑자는 어떤 특정한 일에 지나치게 애착을 가져서는 안된다. 오로지 변화와 무상함에서 기쁨을 찾는 자가 되어야 한다.  217




제3장 높은 산의 고독


니체의 유랑생활에는 주기가 있었다. 겨울은 지중해에서, 여름은 고지 엥가딘의 산에거 보냈다. 여름에는 먼저 제노바에 갔다가 니스로 향했고, 겨울에는 항상 질스마리아에서 지냈다.  24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1부에서 4부까지 모두 1883년과 1885년 사이에 쓰이고 출판되었다(4부는 자비로 출판했다). 니체의 편지들이나 철학적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사람을 보라>는 <차라투스트라>가 니체의 가장 위대한 성취이자 걸작임을 알려준다.  266


'이제 나는 <차라투스트라>가 나오게 된 내력에 대해 설명하겠다. 이 책의 기본 개념인 영원회귀 사상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긍정 형식이며, 1881년 8월에 떠오른 사상이다. 이것은 "인간과 시간의 6000피트(1830미터)저편"이라고 서명된 종이에 적혔다. 그날 나는 실바플라나 호수 근처의 숲을 산책하다가 주를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옆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곳에서 이 사사이 내게로 왔다.'(W6, 355)

영원회귀 사상의 고향이 질스의 산속이라면 <차라투스트라>는 이탈리아 리비에라에서 탄생했다.  267


<차라투스트라> 1부를 완성한 니체는 하인리히 쾨셀리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책을 "일종의 설교"이자 자신의 최고작, "자신의 영혼에서 굴러나온 보석 같은" 책이라고 불렀다. "내 손에서 나온 책 중에서 이보다 더 진지하거나 역동적인 것은 없네. 나는-다른 색과 섞어 사용할 필요가 없는-이 색이 지금부터 내 '본래의' 색이되길 진심으로 바라네."  268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1884년 2월 6일에는 오버베크에게 이렇게 열변을 토했다. 

'전반적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수십 년 동안 내 안에 쌓여온 힘이 폭발한 것일세. ...'(B6, 475)  272


니체는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악의 저편>을 "내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일종의 논평"이라고 말했다.(B7, 270) 나중에 게오르크 브란데스에게는 <선악의 저편>이 자신의 모든 저작의 "열쇠"이므로 자신의 철학을 전체적으로 공부하려면 그 책으로 시작하라고 권했다...

쾨셀리츠에게(B7, 166~167)쓴 편지다. "나는 책을 쓰면서 힘들게 지난 겨울을 보냈네. 용기, 그 책을 출판하는 데 필요한 용기가 때로 마구 흔들렸다네. 이 책에는 다음 제목을 붙였네."

<선악의 저편>

미래 철학의 서곡  278 


<선악의 저편>에서는 철학자들의 편견, 특히 분명하게 정의된 가치들의 대립에 대한 철학자들의 순진한 믿음, 신앙(특히 그리스도교)의 기원, 도덕의 '자연발생사', 학문과 학문적 훈련의 현 상태 및 함께 학문을 연마하는 사람들의 '덕',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귀함의 의미 등을 다루었다. 니체는 이 책에서 플라톤 이후 서구의 형이상학과 윤리학의 모든 전통을 수용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279


1887년 11월 <도덕의 계보>가 출판. 6월 10일에서 17일 사이에 <도덕의 계보>를 썼다. 이 책은 형식 면에서는 1880년대 초기의 아포리즘 작품들보다 1870년대에 쓴 <반시대적 고찰>과 더 유사하다. <도덕의 계보>의 세 논문은 각각 (1) '선과 악' '좋음과 나쁨' (2) '죄'와 '양심의 가책' (3) 서구의 종교, 도덕 체계, 학문, 철학에서의 '금욕적 이상'의 의미를 다룬 일관되고 세심하게 구성된 명상이다. 그러나 문체는 이전의 어떤 글보다 상당히 더 예리하고 심지어 신랄하기까지 했다.  282


니체는 <도덕의 계보>를 <선악의 저편>의 부록 혹은 보충서라고 불렀지만 이 책의 발단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흔한번째 생일인 1885년 10월 15일에 니체는 하인리히 폰 슈타인 남작에게 최근 '양심'에 관한 파울 레의 책을 읽었다고 쓰면서 "얼마나 공허하고 지루하며 오류가 많은지!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것들에 관해서만 이야기해야 합니다"라고 부르짖었다.(B7, 99) ...

20세기 들어 많은 사상가, 특히 미셸 푸코, 질 들뢰즈가 니체의 도덕의 계보 작업을 확장했다. 이들에게는 니체의 '논쟁'이 분명 그의 가장 중요한 성취 가운데 하나였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를 <선악의 저편>ㅗ가 비교하면서, 후자는 음조가 "중립적이고" 아주 천천히, 심지어 머뭇거리며 리듬이 발전한다고 묘사한 반면, <도덕의 계보>는 "노골적이고 가공되지 않은 파릇파릇한 열정"으로 알레그로 페로체(빠르고 거칠게)로 쓰였다고 말했다.(B8, 245)  283


니체 자신은 수월하게 술술 쓰였던 <우상의 황혼>이 자신의 사상을 잘 소개해준다고 생각했다. "그 책은 내 철학의 완벽하고 총체적인 입문서다."(B8, 414) ..

실제로 니체는 <우상의 황혼>이 특히 <안티크리스트> 입문서로서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291


<안티크리스트>

가장 유명한 장으로는 '소크라테스의 문제' '어떻게 참된 세계가 결국 한갓 꾸며낸 이야기가 되어버렸는지'등이 있고 가장 신랄한 장으로는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방법에 관한 다음의 충고가 포함된 '독일인에게 모자란 것'을 꼽을 수 있다.

'인간은 보는 법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세 가지가 지향하는 것은 고결한 문화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눈을 평온과 인내, 일들이 자신에게 다가오게 놔두는 데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판단을 미루고 특정한 경우를 모든 측면에서 탐색하고 검토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비철학적인 용어로 강한 의지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강한 의지에서 본질적인 것은 결정을 보류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보류할 수 있는 '능력'이다. (..) 춤을 배우려고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법도 배우려고 해야 한다. 생각은 일종의 춤이다. (..) 발로도 춤출 수 있지만 개념과 단어로도 춤을 출 수 있다. 펜으로도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는 말과 사람들이 글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을 꼭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W6, 108~110)  291-292


니체가 고지 엥가딘에서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 것은 고독이었다. 고독은 여행객들과 단절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부의 한 기록에서 여행객들을 이렇게 정의했다. '여행객-그들은 동물들처럼 말없이 땀에 젖어 산을 기어오른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길가에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고 말해주는 것을 잊어버렸다.'(W2, 641) 하지만 여기에는 가족과 친구들, 혹은 좀더 정확히 말하면 간헐적이고 주의 깊게 조정된 인맥과의 단절도 포함되었다. 니체는 고독과 외로움 사이의 악명 높은 가느다란 줄 위에 자리잡기 위해, 즉 사람이 아무도 없는 땅에서 살기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301


1884년 여름에 니체는 자신의 '문헌', 즉 <비극의 탄생>부터 <차라투스트라>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쓴 모든 책을 읽었다. 마흔 번째 생일을 앞두고 있던 니체는 자신의 30대를 평가하며 40대의 계획을 세우는 데 몰두했다.  308




제4장 바다와의 친밀한 대화


<아침놀>의 서문에서 니체는 독자들에게 옛 문헌학자, 즉 이성(logos)을 사랑하고 "천천히 읽는 법을 가르치는 교사"를 위해 이 책은 느린 박자로 천천히 읽으라고 당부했다.(W3, 17) 또한 <즐거운 학문>의 서문은 이 책을 즐거움, 즉 "되돌아온 힘, 다시 한번 열린 바다에 대한 갑작스런 느낌과 예감에 직면해 터져나오는 환호성"이라고 선언했다.(W3, 346)  360


라팔로와 니스, 즉 이탈리아 리비에라와 프랑스 리비에라는 모두 <차라투스트라>의 주요 집필 장소였다. 우리는 종종 차라투스트라를 산속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초인과 영원회귀에 관한 생각을 가르치기 위해 인간들에게 갔으며 산에서 내려갔을 때는 바다에서 가장 자주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367


니체는 유랑생활을 했던 10년 동안 실명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도 니체는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모든 학술서, 형이상학, 지식론, 종교와 도덕의 역사에 관한 책들뿐 아니라 시와 소설도 읽었다. 니스에 있을 때였기에 프랑스어 번역판으로 읽은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니체를 사로잡았다. 니체는 도스토옙스키가 스탕달 이후 자신과 재능과 통찰력을 공유한 유일한 심리학자라도 주장했다.  380


바닷가에서건, 높은 산에서건 1880뇬댜애 니체를 괴롭힌 풀리지 않는 딜레마는 고독과, 사람들과의 교류의 필요성이었다. 특히 1880년대 중반에 니스에서 지내면서 니체는 남을 가르치고 싶은 깊은 욕망에 시달렸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가르치고 전해야 했다. 그러나 니체에게 배우려는 사람들은 종종 "평번한 애호가들"로 판별되었고, 타렵적으로 교제하는니 완전한 고독이 나아 보였다. 따라서 니체의 편지들에서 우리는 심한 고독과 고독의 부재, 불충분한 교제와 과도한 교제에 대한 상충되는 불만이 공존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384


메타 폰 살리스는 니체가 이야기를 매우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고 "주변의 단순한 일도 무시하지 않았다"고 전한다.(N2, 529~530) 한 예로, 잔 두리쉬가 추수기 직전에 황소의 발굽과 입에 병이 났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자 니체는 진심으로 관심을 보였다. 아무리 체제 전복적인 일을 한다 해도 니체에게는 누군가와 자신의 열정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이 니체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폰 살리스는 "그는 상냥하고 상처입기 쉬운 사람이었다. 또한 화합할 준비가 되어 있고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고 말한다. "반면 그가 하는 작업은 준엄함을 요구하고 타협을 금했으며 그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과 비통함을 가져다주었다."(N2, 530)  386


'지금 저는 세계사에 남을 만큼 냉소적으로 제 자신에 관한 글을 썼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라는 제목의 이 책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최소한의 죄책감도 없이 암살합니다. 이 책은 기독교적인 모든 것, 혹은 기독교에 감염되어 청력과 시력을 잃어버릴 모두를 공격하는 천둥과 번개로 끝납니다. 궁극적으로 저는 그리스도교를 분석하는 최초의 심리학자입니다. 늙은 포병이 된 저는 어떤 그리스도교 반대자도 상상하지 못한 강력한 총을 꺼내들 수 있습니다. 이 책 전체는 완성된 채 제 앞에 놓여 있는 <모든 가치의 재평가>의 서문입니다...'(B8, 482~483)  412-413




옮긴이의 말

이 책은 단순한 전기가 아니라 니체의 삶, 니체가 머물렀던 공간, 인간관계를 니체가 쓴 글들과 교차시켜가며 엮어내고 있다.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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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위험하게 살아라.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 너의 도시를 세워라"라고 외칩니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평온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베수비오 화산처럼 가혹해지기를 바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과 대결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다 강하고 깊은 존재로 고양시킬 수 있습니다.  12


근대는 사람들이 겪어야만 하는 운명의 부담을 가능한 한 줄여 주려는 시대입니다. 자연마저도 과학과 기술을 통해서 인간을 위한것으로 길들이고, 사회도 빈곤과 불평등을 줄여서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안락한 삶을 보장하려는 것이 근대의 경향입니다. 또한 근대는 사람들이 투쟁하지 않고 서로를 동정하고 도우면서 평온하게 사는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라고 여깁니다.  13


장영희씨는 <노인과 바다>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정신을 상기시킵니다. 스스로 위험한 투쟁을 택하기보다는 남의 전리품을 약탈하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는 상어 떼의 정신입니다. 상어 떼는 노인이 힘겹게 잡은 대어에 달려들어 수비게 그 고기를 뜯어 먹습니다.... 니체는 이렇게 쉽고 안락하게만 인생을 살려는 정신을 '말세인들의 정신'이라고 일컫습니다.  16


저는 이 책에서 니체라면 우리가 사는 것을 버겁게 느끼면서 던질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질문들에 어떻게 답했을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많은 살마들은 니체가 주창하는 정신을 예수나 부처가 설파하는 사랑과 자비의 정신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또한 헝가리의 철학자 루카치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니체가 주창하는 정신을 약한 자들에 대한 지배와 정복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의 정신으로 해석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저는 니체가 주창하는 정신은 예수나 부처식의 사랑이나 자비의 정신도 아니고 제국주의적인 정신 역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약한 자들에 대한 사랑과 동정을 주창하는 근대인들이 망각하고 있는 강건한 정신으로, 고통과 험난한 운명을 자신의 고양과 강화를 위해 오히려 요청하는 패기에 찬 정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초인(超人 뛰어넘을초 사람인)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



첫 번째 질문 -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할까?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을 경멸하라


초조가 세상을 뒤엎고 있다. 

현대인들은 너나없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20


쇼펜하우어,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22


과학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를 알려줍니다. 

이에 반해 철학은 우리가 이미 삶 속에서 체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고 있는 것을 확실하게 개념화해서 우리 눈앞에 보여줍니다.  27


'아름다움이란 우리 인간이 자신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세계에 나눠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40


우리는 흔히 고난과 고통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고통스럽게하는 고난이 일어나지 않고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이와 함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통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한 인간'은 고난과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 않고, 그런 것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평정과 충일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입니다.  43



두 번째 질문 -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 무엇일 필요합니까?

인생, 의미를 찾지 않을 때 의미 있는 삶이 된다


니체는 '인간의 정신은 낙타의 정신에서 사자의 정신으로, 그리고 사자의 정신에서 ㅇ라이의 정신으로 발전해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47


니체가 말하는 낙타의 정신은 사회의 가치와 규범을 절대적인 진리로 알면서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정신을 뜻합니다.  48


니체는 '사자의 정신은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는 못한다'라고 이야기했지요. 기존의 가치와 의미가 붕괴된 자리에 남아 있는 가치와 의미의 공백 상태는 정말이지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기존의 가치와 의미가 무너지고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결여된 상태를 두고 니체는 니힐리즘(nihilism, 허무주의)이라 명명.  50-51


아이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말은 곧 인생을 유희처럼 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어떤 재미있는 놀이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왜 이 놀이를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놀이가 재미잇어서 놀 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 '왜 이 놀이를 해야 하지?'라며 놀이의 의미를 묻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놀이의 재미가 사라졌는데도 계속해서 그 놀이를 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 하나의 재미있는 놀이로 여겨지는 사람은 '이 놀이를 계속해야 하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저 삶이라는 놀이에 빠져서 그것을 즐길 뿐이지요. 우리가 삶의 의미를 묻게 되는 것은 삶이 더 이상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으로 느껴질 때입니다.  60


중력의 정신이란 우리를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두려움과 걱정, 시기와 원한과 같은 부정적인 정신을 뜻합니다.  70



세 번째 질문 - 내 맘대로 되는 일은 왜 하나도 없을까?

위험하게 사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운명에 대해서 우리가 취할 수 이쓴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운명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인간이 노력하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극단적인 자유의지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면 된다'는 철학이지요. 

그런데 니체는 이러한 극단적인 자유의지의 철학을 '단죄(斷罪 끊을단 허물죄)의 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자유의지의 철학은 사회적으로 실패한 사람을 단죄합니다. '그대가 실패한 것은 그대의 노력 부족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공부 재능이 없다면 아이에게 주어진 다른 운명적 소질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계발시켜줘야 하고, 이렇다 할 아무런 재능도 없으면 평범하게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있는 자세를 키워줘야 하겠지요.  77-80


두 번째 태도는 숙명론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패배주의로서 모든 것을 운명 타승로 돌리는 태도에 해당합니다. 자유의지의 철학은 사람들을 단죄하지만 숙명론은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80


세 번째 태도는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역경을 오히려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면서 험난한 운명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운명애(運命愛 옮길운 목숨명 사랑애)의 철학은 언뜻 보면 자유의지의 철학과 동일한 것 같지만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런 철학은 힘든 운명을 하나의 기회로 승화시키려고 합니다.  81


운명애의 사상에 엄습되었을 때 니체는 그의 책이 거의 팔리지 않을 정도로 전혀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런 자신의 인생에 만족했고 그것을 긍정했습니다.  85



네 번째 질문 -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어떻게 풀 수 있을까? 

당신의 적을 경외하라


적과 대등하다는 것 - 이것이 대개 성실한 결투의 첫째 전제다. 상대방을 얕보고 있는 경우, 전쟁은 할 수 없다.  103


니체는 강간 등 여러 가지 사회악을 만들어낸다고 해서 성욕을 제거하려 하거나, 경쟁심이 인간들 간의 갈등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경쟁심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치통을 막기 위해 치아를 빼버리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위라고 말합니다.  111



다섯 번째 질문 - 신을 믿지 않으면 불행해지는 걸까?

당신을 위한 신은 어디에도 없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다! 그리고 신을 죽인 자는 바로 우리다! 살해자들 중의 살해자인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위호할 것인가?' 

'신은 죽었다' 니체의 이 말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신이 인간과 달리 신일 수 있는 이유는 죽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이 죽었다'라는 니체의 말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것은 근대에 들어와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게 되엇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서양의 중세 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부딪힌 문제들을 신에 의지하여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와서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은 보통 자연 또는 사회에서 오는 것이지요. 폭우나 가뭄처럼 자연으로부터 오는 재해가 있는가 하면 전쟁이나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고통이 있습니다. 

근대인들은 자연에서 비롯되는 재해에 대해서는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또 잘못된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대해서는 사회구조의 개혁을 통해서 극복하려 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부딪힌 문제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많은 부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고 이에 따라 인간은 신보다는 잣니의 힘을 더 믿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근대에 들어와 과학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굳이 신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도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벼락을 신의 진노라고 해석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것을 자연법치겡 따라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 인류학이나 민속학 같은 사회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굳이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민족들도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에 따라 그리스도교가 서양 사회에서 갖는 영향력은 중세 시대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두고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119-121


니체는 종교를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죄책감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의 힘을 강화시키고 고양시키는 종교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종교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이 만들어낸 그리스도교처럼 지상의 힘이나 쾌락을 죄악시하고 끊임없는 회개를 강요하는 종교입니다. 

니체는 종교란 결국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생각합니다.  135



여섯 번째 질문 - 살아가는 데 신념은 꼭 필요한 걸까? 

신념은 삶을 짓누르는 짐이다


변화하는 세계를 하나의 이론 체계로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니체는 체계를 만들려는 의지는 모두 불성실하다고 보았습니다.  166


확신이란 감옥이다. 

가치와 무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자격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아래에 - 그리고 자기 뒤에 - 오백 가지나 되는 확신들을 봐야 한다.  167


인류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것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특정한 종교적 혹은 정치적 이념에 대한 독단적인 확신이 아닌가 합니다.  173


확신은 확신에 사로잡힌 인간을 지탱해주는 기둥이다. 여러 가지 사물들을 보지 않는다는 것, 어떤 점에서도 공평하지 않다는 것, 철저하게 편파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것, 모든 가치를 하나의 엄격하고 필연적인 관점에서 본다는 것 - 이것만이 확신에 사로잡힌 인간이 존속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는 진실한 인간과 진리에 반대하고 그것에 적대하는 자가 된다.  174-175


어떤 독단적인 이념을 확신하는 사람은 자신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이념이 자신의 삶에 확고한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습니다.

어떤 이념을 독단적으로 신봉하는 것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에게 삶의 위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175


니체가 말하는 자유로운 정신은 곧 독단적인 이념이 우리에게 주는 삶의 위안을 값싼 위안으로 간주하여 거부하면서 세계와 사물을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176



일곱 번째 질문 - 예술이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예술은 삶의 위대한 자극제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오래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짧게 살더라도 충만하게 사는 것입니다.  187


'인간은 근본적으로는 사물에 자기 자신을 반영시키며, 자신의 모습을 되비추어주는 모든 것을 아름답다고 여긴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오직 인간만이 아름답다'라고, 이것이야말로 모든 미학의 제1의 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상응하여 제2의 진리에 해당되는 것은 '퇴락한 인간 이외에는 아무것도 추하지 않다'라고 니체는 이야기합니다.  193


니체는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느끼는 기쁨과 분리될 수 없다고 봅니다.  195


그는 예술이 삶의 위대한 자극제라고 생각했습니다.  196



여덟 번째 질문 - 죽는다는 것은 두렵기만 한 일일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절정이다


니체는 삶을 사랑하는 자라면 우연하거나 돌연하게가 아니라 자유로우면서도 의식적으로 죽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129



아홉 번재 질문 - 나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너만의 꽃을 피워라


니체는 우리의 타고난 성격과 소질에 남들이 흉내낼 수 없는 스타일을 부여할 것을 요구합니다.  229


사람들은 틀에 맞추어지지 않는 자신을 악한으로 간주했고 되책감에 시달렸습니다.  

'도덕이 삶에 대한 고려나 배려 그리고 삶의 의도에서 비롯되지 않고 그 자체로 단죄하는 한, 도덕은 동정할 여지가 없는 특수한 오류이며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해를 끼친 퇴락한 자들의 특이체질이다.'  233


'우리 다른 사람들, 비도덕주의자들은 정반대로 모든 종류의 이해와 파악 그리고 긍정에 우리의 가슴을 활짝 열어 놓았다. 우리는 쉽게 부정하지 앟으며 긍정하는 자라는 점에서 명예를 찾는다. 우리는 성직자와 성직자의 병든 이성의 거룩한 무지가 배격하는 그 모든 것을 필요로 하며 이용할 줄 아는 경지에 갈수록 더 눈이 열리게 되었다.'

니체는 인간을 교육하는 방법을 길들이는 방식과 길러내는 방식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누고 있습니다. 길들이는 방식은 인간을 특정한 틀에 맞추도록 강요하는 것인데, 이런 방식을 인간을 병들게 만들고 위축되게 합니다. 이에 반해 길러내는 방식은 인간의 타고난 소질과 성향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는 방식입니다.  234-235


니체는 '그대 자신이 되어라'라고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는 주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235



열 번째 질문 - 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감정을 다스리는 것을 넘어 몸을 다스려라


우리는 보통의 경우 초인이 아니라 안일을 탐하는 말세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극복을 하려면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 필요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권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승리다... 전쟁을 일으키는 삶을 살도록 하라! 오래 연명하는 삶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그는 '모든 위대한 것과 충일한 힘은 끊임없는 자기극복을 통해서 형성된다'라고 말합니다.  250


니체는 자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감정과 생각을 다스리는 것을 넘어서 신체를 다스려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힘들다고 해서 함부로 눕지 말고 그때마다의 상황에서 요구되는 적절한 자세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단순히 감정과 사상을 훈련하는 것으로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 가장 먼저 설득시켜야만 하는 것은 바로 신체다.'  255


신체를 완전히 우리의 지배 아래 둘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본능까지 건강하고 기품 있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본능이 건강한 사람은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도 건강하게 만드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건강한 본능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경쾌하고 가벼우며 필연적이고 자유롭게 건강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257


그는 우리가 고귀한 인간이 되려면 보는 법과 생각하는 법 그리고 말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에 대해서 니체는 '눈에 평정과 인내의 습관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성급하게 속단하지 않고 판단을 유보하면서 하나하나의 경우를 모든 측면에서 검토하고 조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258-259


보는 법을 배우게 되면 사람들은 대체로 서두르지 않게 되고, 쉽게 믿지 않게 되며, 낯설고 새로운 것을 접하더라도 우선을 적의를 품은 평정과 함께 그것을 대하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생각하고 쓰는 법인데, 니체는 이것을 '무용을 배우듯'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탁월한 무용수는 섬세하고 우아한 몸짓으로 춤을 춥니다. 그런 몸짓 하나하나를 언어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하지요. 그런에도 우리가 사유하고 글을 쓸 때에는 사물들이 갖는 섬세한 뉘앙스를 느끼면서 그것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259




에필로그

니체의 시각에서 보면 오늘날의 사회는 거대화되고 있는 반면 그 안의 각 개인은 갈수록 왜소해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사회가 잘 굴러가는 데 필요한 나사 부품이 되는 대가로 안락과 향락을 누릴 수 있는 물자를 받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아무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기 바라는 소심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오늘날의 현실을 니체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대지는 작아졌고, 모든 것을 작게 만드는 '말세인'이 그 위에서 날뛰고 있다.   26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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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심리학 책이나 계발서로 오인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부제를 보면 더 이해가 잘 되는 것 같다.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문학자 네 사람과 철학자 네 사람의 직관과 이성, 혹은 문학과 철학으로 서로를 비추어가면서 이해를 시킨다. 
그러면서 저자의 철학적 견지와 그들의 견지의 조합과 조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가 시대를 살면서 피할 수 없는 유혹, 그로인해 생기는 욕망 책의 표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도시, 돈, 유행, 망상, 불안, 허영 도박, 매춘.. 이러한 욕망에 대한 보고서이다. 우리는 왜 그러한 욕망을 가지게 되었는지 왜 그렇게 유지하면서도 빠져 나오기 힘든것인지, 과연 우리가 가진 욕망에 자신의 욕망인지 아니면 타인의 욕망인지... 드에 대한 고민과 통찰을 가져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고 있다. 
라캉의 말처럼 '지금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이 욕망하는 것인가?'
우리는 냉정하게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

얼마전 여러명의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다시금 마음 아픈 표현을 들었다.
"삶이 바빠 사회현상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것이 맞는건지 아닌지에대해 생각해볼 겨를이 없다. 그것은 삶이 바빠서가 아니라 세상의 달콤한 유혹과 바빠야 한다는 세뇌에 의한 것은 아닐까..

저자는 책에서 그러한 부면에 대해 문학과 철학을 결합하여 설명해 나가고 있다. 지금 우리가 당연시 하는 것들이 정말 당연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짐으로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의 다양성이 필요함을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생활들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과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자세로써 무엇이 있는지에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이 시대의 젊은 철학자인 저자는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인문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것으로 우리는 생각의 빌미를 가지고 그것을 확장해 나가는 시간이 된다면 정말 우리는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지 않을까...






머리말 - 자본주의적 삶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친숙하다는 거스 그것은 무엇인가에 길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친숙한 삶을 낯설게 성찰하는 일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의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집어등(集魚燈)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물고기(魚)를 모으는(集) 등불(燈)이란 뜻입니다.  5
자본주의의 집어등은 어선의 집어등보다 더 큰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를 끊임없는 노동의 현장으로 다시 내몰기 때문입니다.  6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지금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이 욕망하는 것인가?" 그는 우리 욕망의 대부분이 자신의 욕망이라기보다 타자의 욕망익라고 냉정하게 진단했던 것입니다.  7

프롤로그
우리 스스로 일상의 모습을 성찰하지 못하고 있다.  14
자본주의는 각자의 노동을 통해서 살아가고 유지되는 체계입니다. 
자본주의는 우리를 노동으로 계속 내몰기 위해 지속적으로 돈을 쓰도록 유혹하는 장치를 함께 고안했습니다. 끊임없이 화폐를 소비하게 하려면 유혹의 장치는 그만큼 강력할 수밖에 없겠지요.  19
자본주의의 진정한 목적은 또 다른 소비를 위해 다시 노동하게 하는 데 있지요.  21
자본주의적 삶은 너무나 친숙하고 평범해서 우리 삶이 얼마나 자본주의에 길들어 있고, 그로부터 상처 받는지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22

I. 무의식의 트라우마를 찾아서 - 이상 vs 짐멜
1. 돈, 내 것이 아닌 욕망의 분열
화페경제가 바꾼 우리 정신세계 

마르트스 이후 가장 철저하게 돈의 논리를 성찰햇던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1918).  35
그의 작품은 대부분 돈 유행 감각 장신구 등 대도시의 사소한 것들에 대한 에세이 풀의 글입니다.  37
짐멜이 "화폐경제는 개인과 소유 사이의 관계를 일종의 매개된 관계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이 둘 사이에 거리가 생기도록 만든다."라고 지적.  29
화폐경제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 이루어졌던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와해시키고, 오직 돈으로만 개인들이 서로 연결되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짐멜은 개인주의의 진정한 기원을 엿봅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인격적 관계가 단절된 이러한 물질적 조건에서만 개인주의의발로가 가능했다고 판단했지요.  43
화폐경제가 낳은 개인주의가 얼마만큼 우리 삶을 지배하는지 다음 사례.
나는 담배를 사러 편의점에 들릅니다. 편의점 점원은 아르바이트로 임시 취업한 나이든 아저씨였지요. 그런데 이 점원이 점잖은 말투로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면 해롭다고 충고합니다. 이때 나는 매우 불쾌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이 든 점원의 충고는 나를 하나의 인격으로, 혹은 자기보다 미성숙한 인격으로 대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지요. 만약 그가 삼촌이라면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이므로 충고를 받아도 그리 불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나이 든 점원과 나는 상품 판매자와 구매자라는 관계, 즉 비인격적 관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경우 우월한 것은 점원이 아니라 구매자인 나입니다. 나는 돈이라는 화폐를 가졌고 반면 그는 상품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달리 말해 나는 이곳에서 담배 사기를 그만두고 다른 편의점으로 갈 수 있는 '독립성'과 '자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때 불리한 입장은 내가 아니라 나이 든 점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개인주의로 무장한 젊은 손님의 내면을, 마치 잔소리 많은 어머니처럼 간섭해 상처를 주었지요. 만일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면 결국 이 상점에 젊은 손님들은 발길을 끊겠지요. 그리고 그 나이 든 점원 역시 해고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불쌍한 점원은 왜 해고되었는지 끝내 모를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것을 알았다면, 다시 말해 돈이 가진 힘과 그것을 가능케 한 개인주의의 위력을 이해했다면, 그는 젊은 손님에게 어른스런 충고를 하지 않았겠지요. 화폐경제에서 중요한 사실은 누가 돈을 가지고, 누가 상품을 가지는자라는 문제일 뿐입니다.  45
내가 종교적 안식을 주리라!
과거의 초월 종교는 신이라는 초월자가 인간에게 닥친 무든 난제를 해결할 만능열쇠라고 선전했습니다. 하지만 초월 종교는 현실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관념적 해법만을 신도들에게 제안했을 뿐입니다. 대부분 초월 종교는 마음의평정을 되찾으라고 하지요.  47
현실적으로 돈을 사용해버리는 순간, 우리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해버립니다.  50
돈이라는 신의 지배에 빠진 현대인들을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짐멜은 과연 어떤 방법을 제안했을까요? 아쉽게도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자본주의를 일종의 세속종교로 규정했던 마르크스를 통해 궁금증을 해소할 실마리 하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서의 그대의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대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자신을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것이요 하나의 불행일 뿐이다.' 51-52
마르크스가 꿈꾼 인간의 삶은 "사랑을 사랑으로서만, 신뢰를 신뢰로서만 교환할 수 있는" 것이었다.  52
타자의 타자의 타자의 ..... 욕망
화폐 그 자체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적응된 우리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만 원짜리 식사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54
구두쇠는 축적한 화폐를 통해 실질적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오히려 관념적 행복에 빠지기를 더 좋아합니다. 그것은 구두쇠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가진 자만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경험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입니다. 유년 시절의 경제적 트라우마로부터 구두쇠는 돈이야말로 절대적 힘이 있음을 체득합니다. 돈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떠나는 순간, 그에게는 유년 시절에 각인된 경제적 트라우마, 즉 경제적 공포가 다시 찾아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행한 구두쇠와는 완전히 다른 합리적인 사람들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 또한 구두쇠와 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 학자 오사와 마사치는 '사랆들의 일상적 관념 속에서 화폐는 사회적 산물의 일정 부분에 대한 청구권을 표시하는 기호에 불과하고, 완전히 편의상의 물건일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 그럼에도 상품의 물신성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55
마르크스는 '화폐퇴장자는 얼빠진 자본가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자본가는 합리적인 화폐퇴장자이다.'  56
구두쇠는 신념이나 행동에서 일관되게 화폐를 물신숭배합니다 반면 평범한 우리는 신념으로는 화폐에 대한 물신숭배를 부정하지만, 행동으로는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화폐에 대한 물신숭배를 수행하지요. 이 점에서 보면 평범한 우리가 오히려 구두쇠보다 더 무지한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본인의 생각과 다르게 자신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59
모든 타자가 내가 가진 화폐를 욕망한다고 맹목적으로 믿기 때문에 나는 화폐를 욕망합니다. 오사와 마사치는 이것이 바로 화폐에 대한 물신숭배, 혹은 화폐의 물신성의 기원이라고 주장합니다.  60

2. 도시, 즐거운 지옥의 현기증
공간과 일상의 관계
공간은 단순히 우리가 살아가는 물리적 배경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공간에는 인간을 길들여서 그에 맞는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공간의 지배력은 거대한 자연적 공간과 공간을 분할하여 만든 건축물과 같은 인공적 공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공간이 지닌 지배력을 성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상의 '권태'가 지닌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77
짐멜은 "인간은 차이를 본질로 하는 존재이다. 즉 그의 의식은 그때그때의 인상이 선행하는 인상과 구분되는 차이에 의해 촉발된다." 만약 새로운 인상이 이전의 인상보다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인상에 대해 별로 의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행하는 인상과 뒤따르는 인상의 차이가 클때 발생합니다. 이 경우 우리는 새로운 인상을 강하게 의식할 수밖에 없겠지요. 물론 이 새로운 인상은 우리 삶에 '부담'으로 인식됩니다.  80
해외여행, 시골과 도시..
우리가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에 대해 일일이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시골이나 소도시 사람은 정서적인 반면 대도시 사람은 지적일 수박에 없다는 짐멜의 다음과 같은 견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분이나 정서적 관계에 더 의존하는 소도시적 삶에 비해 대도시의 정신적 삶이 어떻게 해서 지적 성격을 더 강하게 띠게 되는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소도시의 정서적 관계들이 정신의 더 무의식적인 층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단절되지 앟은 지속적인 습관화 과정을 통해서 가장 잘 발전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우리의 지성(intellect)은 우리 정신에서도 가장 투명하고 의식적인 상층에 자리를 잡고 있다. 지성은 우리의 내적인 힘들 중 가장 적응력이 탁원한 것이다. 자신 앞에 펼쳐진 다양한 현상들의 현저한 차이점들과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지성은 어떤 충격이나 내적인 동요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도시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의 리듬에 적응하기 위해서 훨씬 더 보수적인 사람들만이 외적 충격이나 내적인 동요를 겪게 된다. 물론 수펀 가지의 개별적 경우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전형적인 대도시인은 자신의 삶을 뿌리째 위협하는 외부 환경의 흐름이나 그 모순들을 방어할 수 있는 기관(=지성)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대도시인은 급변하는 외부 환경에 대해 심장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머리로 반응하게 된다.'  81-82
시골에서의 단조로운 삶의 환경과는 현격히 구별되는 이런 자극적이고 복잡한 도시의 사건들에 일일이 반응하면, 우리는 대도시에서 하루도 견딜 수 없습니다. 자신과 무관한 모든 일은 그저 냉담히 남의 일로 간주해야 합니다.  85
예외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날지라도 신속히 그 원인을 지적으로 파악하여 그 사건으로부터 받게 될 정서적 충격을 원천적으로 봉쇄해야만 합니다. 대도시에 적응한 도시인들이 짐멜의 표현처럼 "급변하는 외부 환경에 대해 심장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머리로 반응하게 된"셈입니다. 도시인들이 자신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전략이지요.  86
자유로움의 빛과 그림자
짐멜 '... 오늘날에도 대도시인은 소도시에 가면 적어도 비슷한 종류의 답답함(restriction)에도 대도시인은 소도시에 가면 적어도 비슷한 종류의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소속되어 살고 있는 집단의 크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그래서 타인들과의 관계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 잡단은 더욱더 쉽게 개인의 업적들, 생활양식 및 사고들을 감시하게 되며, 어떤 양적 질적 변종도 전체의 틀을 깨뜨리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87
도시인이 시골이란 공간 속에서 느끼는 '답답함'의 감정 이면에는 도시라는 공간이 만들어준 '자유'의 감정이 전제되어 있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88
짐멜 '... 대도시의 우글거리는 군중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가장 잘 느끼게 마련이다. 이것은 자유의 이면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대도시만큼 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반드시 그의 정서적 안정으로 나타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가장 달 드러내주는 곳도 없기 때문이다.'  89
비록 거리에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더라도, 그것은 영화 속의 풍경처럼 나의 배후에 소리 없니 펼쳐져 있을 뿐입니다.
신경과민을 피하기 위한 이런 거리두기라는 도시인 특유의 삶의 태도가 바로 '자유'라는 감정의 중요한 기초가 됩니다.
서로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한, 다른 이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바로 도시의 암묵적 윤리라고 봅니다.
자유로움의 감정은 사람들을 원치 않는 고독에 빠지게 하기도 합니다.
가끔 도시인들은 가족을 통해서 자신드르이 고독을 치유하려고 합니다.  90
도시인들에게 가족이란, 도시의 삶 속에 관념으로 존재하는 시골과도 같은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골과 마찬가지로 가족도 자시의 속내를 모두 드러내는 인격적인 관계가 가능한 공간입니다. 그렇다면 도시생활과 가정 생활은 미묘한 긴장관계와 보완관계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짐멜, 질적 개인주의를 말하다
소극적 자유를 특징으로 하는 개인주의가 칸트를 대표로 하는 '양적 개인주의'의 입장이라면, 적그적 자유를 표방하는 개인주의는 니체를 대표로 하는 '질적 개인주의'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양적 개인주의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비록 수적으로는 구분되지만 동일한 인간성을 보편적으로 공유한 존재가 됩니다.
칸트의 정언명령(Kategorische Imperativ), 무조건적인 도덕명령이 가능했습니다.  94
니체에게 모든 개인은 타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단독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니체가 말한 '본성'이나 '본능'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진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마다 가진 고유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니체가 볼 때 이런 개인의 고유한 본성과 욕망르 부정한다는 것은, 개인의 삶 자체를 범죄적으로 매도하는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짐멜은 칸트나 니체의 사례를 언급하며 대도시가 인간에게 두 종류의 자유, 즉 두 종류의 개인주의를 가능하게 했다고 지적합니다.  96
짐멜의 논의를 역사적 순서로 정리하면, 산업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이전 그러나까 대도시가 형성되기 이전에 인간은 '공동체주의'에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산업 자본주의와 대도시가 점차 발달하자 사람들은 비로소 '양적 개인주의'에 입각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상호 불간섭으로 규정되는 소극적 의미의 자유가 도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소극적 의미의 자유라는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고, 이에 따라 서서히 자신만이 가진 단독성(singularity)을 깨닫게 됩니다. 이로 인해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표현하려는 욕망이 이전시대보다 더욱 강해집니다. 짐멜은 이것이 바로 '질적 개인주의'의 기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가 명확하게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만의 특이성 혹은 질적 고유성을 표현하려는 욕망은 사실 도시적 삶이 가져다주는 고독을 극복하려는 데서 작동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97



II. 화려한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을까? - 보들레르 vs 벤야민
3. 유행, 돌고 도는 뫼비우스의 강박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보들레르는 19세기 파리를 상징하는 대표 시인입니다.
보들레르를 통해서 우리는 자본주의가 인간의 내면에 남긴 원형적 트라우마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114
보들레르에게 파리가 매춘부로 느껴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매춘부는 돈을 가지고 오는 손님이라면 그가 누구든 관계없이 자신의 치마를 걷어 올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보들레르에게 파리는 고혹적인 여인처럼 사랑스러운 곳입니다. 둘째, 파리라는 곳을 향유하려면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합쳐지면서 결국 보들레르에게 파리는 매춘부와 같은 존재로 묘사됩니다.  116
산업자본은 필요이상으로 상품들을 사들일 만큼 소비자들을 끊임없이 유혹해야만 합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새로운 상품'을 계속해서 시장에 내놓는 것입니다. '새로운 상품'이 아케이드에 들어오면, 기존 상품들은 '낡은 상품'이 되어버리고 결국 아케이드에서 추방되고 말지요. 바로 여기서 '유행(fashion)'이 가능해졌습니다.  119
벤야민, 미완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벤야민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찰을 인정한 철학자입니다.  124
저급한 수준의 마르므스주의는 문화와 같은 상부구조가 경제라는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합니다. 문화를 별도로 연구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셈입니다. 경제 운동이나 경제 관계를 알면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나 벤야민은 문화와 같은 상부구조가 나름대로 독자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비록 경제가 문화를 결정할 수도 있지만, 경제가 표현되는 문법과 문화가 표현되는 문법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고 본 것이지요.  125
19세가 자본주의의 수도 파리를 연구함으로써, 벤야민은 진정한 자본주의의 기워노가 역사를 복원하려 했습니다.  126
벤야민에 따르면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역사는 전혀 진보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억압하는 자들만이 진보를 주장해왔습니다. 이것은 당시 독일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벤야민의 경험과 성찰로부터 유래했습니다. 파시즘이 강하게 등장했을 때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했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파시즘의 경향에 대해 강ㄺ하게 저항했지만 그들의 저항은 도리어 무기력해지고 말았습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무기력함은 그들이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진보라는 이념을 신봉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나중에는 결국 해결된다고 보는 진보에 대한 맹신은 현재 우리가 당면한 억압적 상태, 즉 '비상 상태'를 도리어 은폐시켜버립니다.  129
백화점 혹은 욕망과 허영의 각축장
벤야민은 아케이드를 통해서 백화점이란 제도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그리고 그 제도가 어떤 방식으로 패션에 대한 욕망을 우리에게 각인시켰는지 보여줍니다.  130
팔레 우아얄(Palais-Royal)은 19세기 파리에 있던 아케이드들 가운데 한곳입니다. 초창기 아케이드에는 창녀들과 노숙자들이 더 많았지만, 부르주아 사회가 발달하자 경제적 부를 소비하는 실제 걔층으로서 부르주아 가정의 여성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이 때문에 창녀들과 노숙자들은 아케이드로부터 점점 추방당하지요. 
처음에는 민중적 요소도 지녔던 아케이드가 이제 부르주아 여성들의 과시욕의 전시장이 되면서, 서서히 백화점의 형태로 탈바꿈했습니다.  131
당시 파리 상점들은 눈부실 만큼 화려한 장식들로 매우 유명했습니다. 이것은 상품의 교환가치를 높이려는 미적 전략입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남자 종업원들이 대거 채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당시 파리에서의 소비 행위가 주로 부르주아 여성들이 주도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정찰제 판매와 정가 판매도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것은 아케이드가 스스로 고급 이미지로 포장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32
자신이 남보다 두드러진다는 의식은 명품 매장에 들어서는 여성을 보면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은 결국 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백화점은 고가의 상품을 사는 사람과 그것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공존하는 공간입니다. 그런 이유로 자본주의적 욕망을 휸련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주목받는다는 도취감, 그리고 주목받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겟다는의지가 암묵적으로 교차하는 공간이 바로 백화점입니다.  134
벤야민이 백화점을 종교적 도취에 바쳐딘 사원이라고 이야기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필요해서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유함과 허영을 과시하기 위해서 고가의 상품들을 구입합니다.  135
예링(Rudolf von Jhering 1818~1892)은 <법의 목적>에서 '오늘날의 의미에서 패션은 개인적인 동기가 아니라 사회적 동기를 갖고 있으며, 이를 올바로 인식하지 않고서는 패션의 본질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패션에는 어떤 사람이 상류사회에 속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외적인 기준이 포함되어 잇다. 이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 사람은 설령 ... 새롭게 유행하고 있는 패션이 아무리 싫더라도 그런 유행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136-137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기보다 오히려 탐욕스럽고 잔인할 뿐만 아니라 질투심으로 가득 찬 허영의 존재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많은 철학자가 인간이 평화스럽고 인자하며 합리적이기를 꿈꾸었습니다.  137
예링에 따르면 인간은 합리적이기는 커녕 오히려 "변화욕, 미적 감각, 겉치레를 좋아하는 것, 모방본능"을 특징으로 하는 존재입니다.  138
패션의 소멸은 중간계급이 삶의 주체로서 "자신의 존엄에 눈을 뜨고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을" 때나 가능한 일이겟지요. 그러나 예링은 상황이 그렇게 되도록 산업자본이 인간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습니다.  139
패션의 에로티시즘
벤야민은 에두라르트 푹스(Eduard Fuchs 1870~?) 인용 '예링의 패션론에 대한 푹스의 견해. "반복해서 말하는 부분이지만 패션이 빈번하게 변화하는 것은 계급적인 구별을 두고자 하는 관심에 의한 것이라고는 해도 그것은 몇 가지 이유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두 번째 이유로서는 이익률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매출을 향상시켜야 하는 사유재산제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을 들 수 있는데 이것도 ...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이 두 번째 이유를 예링은 완전히 무시했다. 세 번째 이유도 그는 간과했다. 즉 패션이 에로틱한 자극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신 유행하는옷을 입은 남자 혹은 여자의 에로틱한 자극이 그때까지와는 다른 형태로 떠오를 때 그런 목적은 보다 효과적을 달성될 수 있다.'
푹스에 딸면 패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햇다. 상류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해 걔급적인 구별을 두려는 욕망이 있기에 가능했다. 다음으로 패션은 계속 매출을 올려야만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패션은 인간에게 에로티시즘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140-141
옷은 분명 성교와 관련된 직접적인 성적욕구의 충족에는 도리어 방해가 되는 물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옷은 성적 욕망을 위한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지요. 성적 욕구의 단순한 충족을 뒤로 미루고 더욱 강한 욕망을 발산하도록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옷이 이런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옷은 아예 성적 욕구, 즉 성적 결핍감을 전혀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패션과 관련된 산업자본이 우리에게 개입하는 결정적 대목입니다.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옷을 만든다면, 그것은 곧바로 매출로 이어지겠지요.  145
무기적 존재인 옷에서 사람들이 성적 어필을 느끼는 일종의 물신숭배 현상이야말로 벤야민이 보기에 패션이 유지되는 근본 조건이었습니다.  146
보들레르의 충족되지 않는 갈망
우리는 매혹적인 상품 앞에서 강력한 구매 욕구를 느낍니다. 그러나 막상 그것을 구매해서 소유하게 되면 예전의 그 강렬했던 욕망은 곧 사라져버립니다. 구매욕은 구매가 실제로 이루어지면 동시에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나를 흥분하게 하는 구매욕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실제로 구매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매혹적인 상품을 관음증적으로 주시하기만 하면 됩니다.  151
벤야민의 연구물을 보관했던 조르주 바타유, 그의 생각은 "금지된 것은 인간에게 강력한 욕망을 부여한다"는 통찰을 전제로 해서 전개됩니다. 
경제 사정으로 지금 당장 구매할 수 없는 상품이 더욱 강렬한 구매욕을 느끼게 하듯이 가질 수 없는 존재는 인간에게 도리어 강렬한 소유 열망을 심어주게 마련입니다. 이런 금지와 금기의 대상이 성적 대상에 적용될 때 우리가 품는 열망을 에로티시즘이라고 부릅니다.  154-155
이런 우리의 욕망 구조를 가장 잘 포착한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바로 산업자본주의의 시선이었습니다.  155

4. 도박과 매춘, 명멸하는 망상
보편적 도박장으로서의 사회
대부분 자신이 가진 가치, 예를 들어 학점 토익점수 대화술 미모 지식등을 팔아서 취업을 해야만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보편적 매춘의 시대라고 지적하기도 했지요.  167
신의 주사위, 우연성의 경이로움
이제 종교의 자유를 얻은 대신 자본주의 사회에 편입된 모든 인간은 돈이라는 새로운 신을 믿고 그것에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돈은 기독교의 신과는 다르게 매우 세속적입니다.  173
기독교의 신이 '초월적(transcendent)'이라고 정의된다면 자본주의의 신은 '내재적(immanent)이며 동시에 초월적'입니다.
기독교의 신은 내세에서 그 존재 여부를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는 반면 돈은 현세에서 가장 확실하게 그 전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돈은 더 강하게 우리를 지배합니다.  174
매춘에서 사랑을 꿈꾸다!
매춘부는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를 따라가 보면 매춘부의 탄생이라는 문제 역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있습니다. 매춘부는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수중에 돈이 별로 없는 존재입니다.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매춘부나 노동자는 자신의 육체, 혹은 자신의 능력을 팔아야 합니다.  184
벤야민은 '파리의 많은 젊은 여성의 미덕에 위기가 닥치는 시기가, 연중 특정한 시기가 있다.... 새해 공현제(1월 6일), 성모와 관련된 축일이 다가오면 소녀들은 선물을 주거나 받고, 아름다운 꽃다발을 보내고 싶어 한다. 또 새로운 드레스나 유행하는 모자를 갖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금전적인 수단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 며칠간 매춘에 종사해서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특정한 시기나 특정한 축제일에 즈음하여 방탕한 행동이 증가하는 이유이다.'  184-185
주목할 점은 파리의 젊은 여성들이 몸을 팔아 번 그 돈이 어디로 흘러들어가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선물, 옷이나 모자 등을 만들어 파는 산업자본입니다.  186
과거 아케이드나 백화점이 여성들의 허영심을 증폭시키고 과소비를 부추겼듯이 당시의 산업자본은 기념일 드을 이용하여 파리의 젊은 소녀들이 몸을 팔도록 부축겼습니다.  187
매춘이란 결국 사랑이 자본주의에 지배될 때 파생되는 현상입니다. 우리 자시의 인격이 아니라 내가 가진 돈으로 사랑을 사는 행위이니까요. 매춘부는 그녀를 안고 잇는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가 가진 돈을 사라합니다. 
매춘부가 사랑을 통해서 매춘부로서 수명을 다한다는 사실. 벤야민은 왜 이 사실에 주목했을까요? 그것은 자본주의가 사랑을 아무리 자본의 논리로 포섭하려고 할지라도, 사랑은 자본의 한계를 돌파할 어떤 힘이 있음을 알아본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해피엔딩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이 자본을 영속적으로 압도하는 일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191
지금은 배우자의 조건 중 경제 능력이 가장 중요한 시대입니다. 나에게 돈을 많이 가져다주는 사람을 남편으로 사랑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표현은 그럴듯하지만 사실 이것이야말로 매춘의 논리에 가장 가깝습니다. 상대에게 자신을 허락하는 첫 번째 조건이 돈 문제라면 누구도 이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사랑이 찾아들면 더는 매춘 행위를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벤야민이 사랑과 매춘 사이의 비극, 그리고 이 사이에 개입되는 자본주의의 문제에 관심을 두었던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벤야민은 사랑이 자본주의와 결합되면 결국 매춘으로 변질된다는 점을 고발하고자 했습니다.  192-193



III. 매트릭스는 우리 내면에 있다 - 투르니에 vs 부르디외
5. 불안, 가난한 이웃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
로빈스 크루소와 타자의 발견
현대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차이'라는 개념을 철학적으로 가장 정교하게 사유했다는 데 있습니다. 들뢰즈 이전까지 서양철학에서 '차이'는 '동일성(identity)'이라는 개념과 짝으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동일성'의 지배를 받는 개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고등학교 동창을 우연히 길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전에 알던 모습과 '차이'가 나 보입니다. 외모도 이전과 다르게 몹시 호리호리해졌고, 생각도 무척 냉소적으로 변한 듯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그 친구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그 친구에게 변하지 않은 측면, 즉 동일성의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내가 알던 친구의 모습이 먼저 전제되어 있지 않는 한, 지금 변한 친구의 모습을 간파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동일성을 우위에 두는 사고의 한 가지 전형입니다. 만약 그 친구가 예전에 내가 알던 모습과 완전히 달라졌다면, 우리는 그 친구를 알아볼 수조차 없었겠지요.
그런데 들뢰즈는 이와 다르게 생각합니다. 동일성보다 차이가 먼저 라고 주장합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그 친구의 모습은 수많은 타자 그리고 수많은 사건과 마주치고 그로부터 영향을 주고받아 형성된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겟지요. 그런데 만약 그 친구가 당시에 자신이 마주쳤던 것과는 다른 타자 및 사건들을 조우했다면, 아마도 그는 무척이나 다른 모습이지 ㅇ낳았을까요. 그렇다면 오늘 우연히 길에서 만난 친구가 왜 이전과 모습이 달라 보일까요? 그것은 서로 보지 못한 사이에 그 친구가 수많은 차이를 겪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변형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동일성이란 다양한 타자 그리고 사건들과의 우발적 마주침으로 형성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동일성이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효과일 뿐입니다.  206
들뢰즈가 중시했던 차이라는 개념은 타자와의 마주침으로만 경험되는 것입니다.  207
무엇인가 모아둔다는 것은 곧 미래에 대한 염려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일종의 자본주의적 시간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수중에 있는 돈을 무도 사용해버린다면,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필요한 무엇인가를 구매할 수 없습니다. 어떤 상품으로든 교환 가능한 잠재적 돈을 모두 소비한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미래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자신의 손 안에 두기 위해 돈을 비축하려고 합니다. 비축해둔 돈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무한한 미래의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13
구조화된 구조이자 구조화하는 구조
부르디외는 <자본주의의 아비투스>에서 '미래에 대해 행위자가 가지는 행위의 성향은 특정한 물질적 존재 조건 하에서 만들어지며, 특정한 객관적 기회의 구조 -하나의 객관적인 미래- 라는 형태로 파악된다. 구조화된 구조(structures structurees)라고 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성향은 구조화하는 구조(structures structurantes)처럼 작동한다.'
'습관(Habit)'의 어원인 라틴어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부르디외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로서, 그는 아비투스를 '구조화된 구조이자 동시에 구조화하는 구조'라고 설명합니다. 행위자의 내면에 만들어진 습관적 구조로서의 아비투스가 '구조화된 구조'인 이유는 그의 말대로 그것이 '특정한 물질적 존재 조건'에서 형성되고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217
아비투스가 '구조화된 구조'일 뿐만 아니라 '구조화하는 구조'이기도 한 이유는 이것이 세계에 대한 행위자의 실천을 낳는 능동적 힘으로서도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두 종류의 아비투스가 있다. 
하나는 '미래가 있는 사람'의 아비투스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가 없는 사람'의 아비투스입니다. '미래가 잇는 사람'의 아비투스란 자본주의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이 가지는 아비투스입니다. 반대로 '미래가 없는 사람'의 아비투스는 전자본주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아비투스를 의미합니다.  219
부르디외에 따르면 전자본주의적 인간과 자본주의적 인간 사이의 결정적 차이점은 '미래'와 관련된 시간의식에 있습니다.  220
미래란 자본주의적 인간의 내면에서는 '가능성의 장'으로서 이해됩니다. 이에 반해 미래는 전자본주의적 인간의 경우에는 '잠재적으로 올 것'으로서 표상됩니다.
'가능성의 장'으로서 미래란 다양한 경우의 수들 가운데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잠재적으로 올 것'으로서의 미래는 이전에도 왔던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올 것입니다.  221
전자본조의적 인간 vs 자본주의적 인간
자본주의적 아비투스와 전자본주의적 아비투스가 서로 유사해 보이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바슐라르(Gaxton Bachelard 1884~1962)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자본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 사이에는 건널 수없는 인식론적 단절(rupture epistemologique)이 있는 샘입니다.  226
전자본주의적 아비투스의 특성을 파악하다 보면, 그와는 구별되는 우리 내면의 자본주의적 아비투스 또한 명료하게 부각시킬 수 있다.  227
농민들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증여의 논리로 사유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유는 결국 인간과 자연을 한 가족이나 혈족 혹은 공동체의 하나로 간주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증여란 기본적으로 가족이나 공동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230
마치 신과 같은 존재로 자연이 표상되기 때문에, 농민들의 노동은 강박적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농부들은 만약 자신들이 끊임없이 공물을 바치지 않는다면, 신이 어김없이 분노를 드러내리라고 믿습니다.
전자본주의 촌락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쉬지 않고 일합니다.
'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이란 구별이나 '수익성이 있는 노동'과 '수익성이 없는 노동'이란 구별도 부차적 차원으로 물러나게 된다.'  232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혹은 수익성 있는 노동과 그렇지 않은 노도으이 구별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중요한 것입니다. 
전자본주의 사회의 사람들에게 노동은 그 자체로서 수단이며 목적이기도 합니다. 단지 수익을 올리려는 목적으로 그드르이 노동이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 어떤 해에 수확량이 증가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부지런한 노동에 대한 자연의 선물, 혹은 자연이 내린 보답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자신의 재주와 능력으로 수익을 올린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았지요.  233
이런 이유로 과거 전통 공동체에서 가장 비난받았던 행위는 다름 아닌 무위도식이었습니다.  234
지금은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한 가지 대안으로, 동양의 전통 사유가 각광을 받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산업자본이 일으킨 환경 파괴의 대안으로 생태철학이 강조되는 것과 거의 동일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는 동양철학이나 생태철학이 기본적으로 전자본주의적 삶과 사유 형식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237
혁명의 최소조건
<세계의 비참>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들을 진단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그는 이 사회를 어떻게 극복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물론 부르디외는 성급하게 자신의 전마을 내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부분 사람드르이 환상, 즉 진보와 번영을 약속한다는 장밋빛 전망을 산산이 부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습니다.  238
부르디외는 "미래를 가능성으로서 가지지 않는 사람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미래를 계획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  239
그가 보기에 알제리 사람들이 혁명을 꿈꿀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가능성으로 가지지 않았기"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미래를 잠재성으로만 간주한 전자본주의적 아비투스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셈이지요.  241
전자본주의 시대의 알제리 농민들은 노동을 통해 자연을 겁탈하지만,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연의 복수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노동을 자연에 대한 능동적 조작이 아니라 주어진 의무를 수행하는 수동적 태도로 간주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노동은 자연이라는 신에게 바치는 공물이 의미가 됩니다. 결과적으로 농민들은 자연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노동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응시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자연이 자신들의 생명을 앗아갈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겠지요. 그런데 이러한 농민들의 태도와 매우 유사하게, 자본주의 사회에 속하는 실업자들 또한 실업과 실업의 문제가 항상 내재하는 자본주의 체계를 직시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혁명의 주체나 능동적 주체가 되기보다는 몽상으로 도피하거나 운명론적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농민들이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자연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만큼 경제적 여력을 확보해야만 합니다. 그럴 경우 그들은 자신의 노동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직시하겠지요. 마찬가지로 도시 실업자들의 경우에도 자본주의 체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만큼 최소한의 생계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이때 비로소 그들은 자신의 실업 문제와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를 직시할 여유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243
"미래의 현실주의적인 전망은 실제로 현재에 직면할 수단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접근 가능한 것이다." 라는 부르디외의 지적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를 영속적으로 유지하려는 기득권자들이 '현재에 직면할 수단'을 프롤레타리아로부터 박탈하려고 지속적으로 시도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244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병을 정확히 진단하고 직시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웃들을 보십시오. 아니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부모님을 한번 살펴보세요. 그들은 병원에 가기를 두려워합니다. 병이 있음을 짐작하지만 치료할 여윳돈이 없어서 걱정만 할 뿐입니다. 의사의 냉정한 진단은 그들에게 절망을 안겨주겠지요. 가족이 짊어질 부담이 그들에게는 더 큰 부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웃들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며 자신의 병을 키우지요. 마침내 말기 암과 같은 치명적 병으로 판명되고서야, 그들은 부르디외가 말했듯이 '자기포기'나 아니면 종교에서 치유를 구하는 '마술적 조급함'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우리 이웃들 가운데는 마치 말기 암을 선고받은 가난한 자들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들은 생계의 어려움이나 실직의 고통이라는 문제를 자본주의 체계와 관련해 정면으로 직시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취하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245
<자본주의의 아비투스>에서 '우리는 계급의식 속에서, 경제적 필연성의 압력이나 사회체계의 모든 객관적 결정에 반하여, 스스로 결정할 자유를 갖춘 주체의 성찰적 행위를 볼 수 있어야만 한다. 현재 상황에 대한 반란은 다으모가 같은 경우에만 합리적이고 명시적인 목적으로 지향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런 목적에 대한 합리적 의식의 구성을 위한 경제적 조건이 주어질 경우, 다시 말해 현재의 질서가 그 자체의 소멸 가능성을 포함하며 동시에 이 사실로 인해 그 질서의 소멸을 기도할 수 있는 행위자를 생산하는 경우에만 반란은 혁명으로 전환도리 수 있을 것이다.'  246
아비투스의 대결
어느 곳에 갔을 때 자신의 아비투스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아비투스가 그곳에서 별다른 문제없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아비투스를 의식했다면, 이것은 새로운 환경이 자신의 아비투스와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환원할 수 없는 외부, 혹은 타자를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254

6. 허영, 내면 깊숙한 소외의 논리
판단력 비판 vs 판단에 대한 사회적 비판
칸트는 매우 규칙적으로 자기 삶의 규율을 준수했던 인물로 이미 당시에도 유명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대목에서 칸트의 유명한 정언명령, 즉 무조건적 도덕명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는 너 자신의 인격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266
내가 타인을 목적으로 대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타인도 나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자유를 가진 존재로 대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연 이것이 자본주의하에서 가능할까요?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최종 목적이고 인간은 언제든 수단으로 전락하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인간을 최고의 목적으로 간주한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붕괴되겠지요.  267
연구자들은 칸트의 철학적 위대함을 그가 진(眞), 선(善), 미(美) 세 영역을 구별했다는 데서 찾았습니다. 칸트로부터 우리는 동일한 대상이라도 최소한 세 가지 영역으로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점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북한산 백운대에 올라가서 서울이라는 메트로폴리탄을 내려다보면, 두터운 스모그 층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해가 질 무렵 서울은 휘황한 보라색 아우라를 띤 도시가 됩니다. 그런데 만약 '이론적 관심'을 두고 바라본다면, 스모그가 보라색을 띠는 이유를 대기에 섞인 오염물질 그리고 석양의 태양광선의 파장이 가진 특징 등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요. 이것이 바로 진리(眞)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보라색의 스모그를 진리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실천적 관심' 혹은 '윤리적 관심'을 통해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경우 우리는 사리사욕을 위해서 매연을 배출하는 인간의 비윤리성을 탓하지요. 이것이 바로 윤리(善)의 영역입니다. 한편 '이론적 관심'이나 '실천적 관심'을 포함한 일체의 관심을 배제하고, 다시 말해 시종일관 '무관심'으로 보라색 스모그를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보라색으로 뒤덮인 서울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겠지요. 이것이 아름다움(美)의 영역입니다.  269
분별력이 있는 사람, 혹은 배운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칸트에 따르면 동일한 대상이나 사건을 필요에 따라 이론적 관심으로, 실천적 관심으로, 혹은 무관심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270
취향, 분별하기와 구별짓기
칸트의 미학, 혹은 상류계급의 미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무관심하게 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가겠지요.  276
가라타니 고진은 영화나 소설을 미적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은 문화적 학습 덕분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무관심'하게 보는 능력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학습되어야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78
<이솝우화>에는 포도를 먹고 싶었던 여우 이야기가 나옵니다. 포도가 손에 닿지 않자, 여우는 그 자리르 떠나며 말합니다. "흥! 저 포도는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 어떤 것을 가지고 싶지만 가질 수 없을 때 인간은 그것의 가치를 폄하함으로써 자신을 위로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신포도 이야기는 이런 인간의 특징을 잘 보여주지요.  282
허영의 뿌리
<구별짓기>에서 부르디외는 경제적 자본 이외에 최소한 다음과 같은 세 종류의 자본을 더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첫째가 문화자본(capital culturel)입니다. 이것은 문화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미적 감각 그리고 사람들이 소장한 작품들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학력자본(capital scolaire)입니다. 이것은 명문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장을 따거나 국가고시와 같은 시험제도를 통과해 얻는 자격 혹은 지위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사회관계자본(capital de relation social)입니다. 이것은 문화자본과 학력자본을 얻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인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르디외가 주목하는 세 가지 자본들은 모두 경제적 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세 가지 자본들은 지속적인 시간과 여유가 있어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세 가지 자본들은 하류계층에서 상류계층으로 직접 진입하려는 벼락부자들을 막는 방어막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84-285
경제적 자본은 상류사회와 비교해볼 때 결코 뒤지지 않았지만, 신흥 부자들은 상류사회가 가지는 아비투스, 특히 미적 취향을 함께 공유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자식 교육에 열을 올리게 되고, 자식들을 명문 대학에 보낼 수만 있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재력을 투입합니다. 
그렇다면 하류계급의 사람들이나 벼락부자들이 왜 상류사회에 편입되려고 할까요? 그것은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허영(vanity)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인간은 본성이 선하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들조차 인간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등장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286
독재자도 훌륭한 통치자라는 칭찬을 듣고 싶어하고, 바람을 피우는 사람도 지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도둑도 정직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행복을 느끼겠지요. 이것이 바로 사람의 허영입니다. 허영(虛榮)이란 한자는 '비어 있다'라는 의미의 '허(虛)'라는 글자와 '꽃이 화려하게 핀다'는 의미의 '영(榮)'이란 글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내실은 비어 있지만 겉은 매우 화려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찬양하고 칭찬해주는 특성을 자신들의 본성이라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영혼의 특성이라고 믿어버립니다.  287
인간은 자신이나 남들이 부정하고 싫어하는 특성들을 단지 우연적인 것 혹은 외적인 것으로 애써 폄하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288
허영심이란 모든 인간이 가진 것입니다. 따라서 '성적=칭찬'의 도식만을 강요한 사회 구조에 여학생 개인보다 더 큰 책임이 있음을 우리는 통감해야 할 것입니다.  289
산업자본주의는 상류계급의 구별짓기의 욕망 혹은 허영의 논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전자본주의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 시대가 신분사회엿다는 점입니다. 신분에 따라 옷도 다르게 입고 집도 다르게 지었습니다. 물론 미적 감상을 포함한 여가 생활도 확연히 구분되었겠지요. 이미 사회 곳곳에서 신분에 따른 확연한 구별이 이루어졌기에 사람들이 소비를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를 드러낼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본 주의 사회가 도래하면서 상황은 이전과 달라집니다. 이제는 주어진 선천적 신분이 아니라 경제적 자본을 확보해야 존경받을 수 있는 사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경제적 자본이 있다는것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행위가 별도로 필요했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틈을 파고들면서 산업자본주의는 화려한 소비사회를 만듭니다. 경제적 자본을 확보한 부르주아 계급은 소비라는 과시 행위로 자신들이 남보다 훨씬 많은 돈이 있음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지요.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지금 우리 사회의 상류계급이 미적으로 선호하는 모든 아이콘은 사실 19세기 산업자본을 상품화한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292
타자의 힘, 혹은 인간의 진정한 빛
노동의 세계, 즉 자본주의 세계에서 미래란 가장 중요한 시간이자 동시에 가장 불명확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월급이 제대로 나오면 여러분은 무한한 교환 가능성으로서의 화폐를 얻겠지요. 동시에 회사가 부도나서 월급을 받을 수 없는 가능성도 병존합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걱정에 시달리며 여러분의 의식은 항상 불안한 미래를 향해 있고, 현재는 미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괴로운 순간쯤으로 억누릅니다.  300
자본주의와 기독교는 미래의 좋은 삶, 장밋빛 삶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고된 노동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각자의 삶을 경건하게 검열할 것을 요구합니다. 자본주의나 기독교가 제공하는 달콤한 미끼를 덥석 무는 순간, 우리의 현재와 삶은 깊은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현재의 순간이란 있을 수 없게 되지요.
자신의 삶이 초월적 목적이 아니라 내재적 목적이 있다는 것, 삶은 놀이의 주체이지 결코 노동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 나아가 오직 현재만이 긍정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삶의 철학자 니체라면 놀이의 아비투스를 획득한 로빈슨을 초인, 즉 위버멘쉬라고 불렀을 테지요.
'보라, 나는 너희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위버멘쉬가 이 대지의 뜻이다. 너희들의 의지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라. 위버멘쉬가 대지의 뜻이 되어야 한다고! 형제들이여, 맹세코 이 대지에 충실하라.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설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그런 자들은 스스로가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독을 타 사람들에게 화를 입히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생명을 경멸하는 자들이요, 소멸해가는 자들이며, 이미 독에 중독된 자들인바, 이 대지는 그런 자들에게 지쳐 있다.'
니체는 현재라는 시간 그리고 내재적 삶을 부정하는 모든 초월주의를 허무주의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말한 초인은 바로 이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데 성공한 인간입니다.  303-304
그것은 자기 삶 자체를 수단이자 나아가 목적 그 자체로 보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그는 모든 초월적 가치나 목적에 현혹되지 않는 삶, 그 자체로 긍정적인 삶을 되찾습니다.  304



IV. 건강한 노동을 선물하기 - 유하 vs 보드리야르
7. 쇼퍼홀릭과 워커홀릭, 금단의 무기력 너머 
바람부는 압구정동의 불빛
1980년대는 산업자봅눚의가 우리에게 발전과 번영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점을 서서히 깨닫게 된 시대입니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첨예한 갈등이 표면화되었고, 그것이 곧바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하는 지성계의 화두가 되었으니까요. 당시의 지성계가 극복해야 할 화두는 다음의 두 가지 문제 였습니다. 그 한 가지는 민주주의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던 당시 전두환 군부독재의 철권통치였다면, 다른 한 가지는 노동자와 도시 빈민 그리고 농민들의 척박한 삶을 초래한 자본주의의 모순이라는 문제였습니다. 물론 대학생들은 이 두가지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고, 그러한 고민은 시위의 형식으로 표출되었습니다.  311-312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청각의 시대는 지나고 화려한 영상을 자랑하는 시각의 시대가 열립니다. 이것은 매혹적인 소비문화에 물들게 하여 비판적 감각을 무디게 하려는 정부의 정책과도 맞물렸습니다. 
1980년대 대학생들은 낮에는 정치와 경제 문제로 격렬한 시위에 참여했고, 밤에는 화려한 시각 문화의 세계에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지성계는 사회참여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부르디외가 이야기 했듯이 취업 걱정이 전혀 없었던 당시의 대학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312
당시의 대학생들은 상당히 사변적이고 이념 지향적이기도 했습니다.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몽환적인 유흥문화, 네온사인, 백화점 그리고 칼라 텔레비전의 시각적 화려함과 현란함 등이 자신의 주머니를 열도록 고안된 못된 장치들이라는 사실을 그들도 모리로는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각적 말초신경은 냉철한 머리와는 반대로 그 화려한 욕망의 집어등을 은밀히 더듬고 있었지요.
바로 이때 소비문화에 대해 매우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본 한 명의 시인이 바로 유하입니다.  313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오징어]
오징어들은 화려한 불빝, 즉 어선의 집어등이 뿜어내는 '찬란한 빛'에 포획되어 죽어갑니다. 유하는 우리의 신세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314
유하는 소비문화의 폐단을 모조리 산업자본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았습니다. 산업자본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가장 잘 파악하고, 그것을 집요하게 이용했을 뿐입니다.  320
낡은 것은 폐기하고 새로운 것을 소비하라
자본주의 역사에 대해..
서양에서는 절대왕조와 함께 발전햇던 상업자본의 황금기가 있었지요. 17세기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이끌었던 대항해의 시대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18세기말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한 산업자본주의의 힘이 상업자본주의 시대에 막을 고하게 됩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상업자본과 산업자본이 이윤을 획득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점입니다.
상업자본은 공간의 차이, 다시 말해서 가격의 차이가 나는 서로 다른 두 공간에서 이윤을 획득합니다. 가령 동해에 위치한 강릉에서는 오징어 가격이 서울보다 쌉니다. 만약 강릉에서 오징어 가격이 1000원이라면, 서울에서는 오징어가 가격 2000원에 팔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인은 강릉에서 오징어를 1000원에 사서, 서울에서는 2000원에 팝니다. 결국 그에게는 1000원의 이윤이 남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상업자본이 항상 각양 각종의 신기한 특산물이 나는곳, 다시말해 가격 차이가 나는 곳을 찾아서 멀리 나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17세기와 18세기 초까지 영국과 네덜란드가 경쟁적으로 동인도 회사를 세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도를 포함한 아시아에는 유럽에 없는 진귀한 특산물들, 다시 말해서 엄청난 가격 차이를 보이는 상품들이 많았습니다. 
반면 산업자본은 상업자본과는 다르게 시간의 차이를 이용해서 이윤을 남깁니다. 예를 들어 MP3를 만드는 산업자본은 계속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여 기존 제품들이 유행에 뒤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소비자들에게 기존 제품을 버리고 계속 새로운 제품을 사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존에 구입한 제품과 새로운 제품 사이에는 시간 차이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공간의 차이처럼 시간의 차이가 원래부터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행위, 다시 말해 새로운 유행을 만드는 산업자본의 행위 자체가 시간 차이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327-328
유행은 소비자들이 아니라 산업자본에 의해 우선적으로 창출되는 것입니다.
산업자본이 창출하는 유행은 대중매체의 발달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대중매체는 대가로 제공되는 산업자본의 광고료를 통해서 유지됩니다.  328
구독률, 시청류르 그리고 조회 수가 높을수록 대중매체는 산업자본으로 부터 광고비를 더 많이 받아낼 수 있다.
보드리야르는 "객관적 기능의 영역 안에서 사물들은 교환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이런 명시적 의미의 영역 밖에서 어떤 사물이라도 무제약적인 방식으로 대체 가능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객관적 기능의 영역이란 구체적 사용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사람들의 이동을 편하게 하는 객관적 기능이 있으며, 아파트는 사람들의 주거를 편하게 해주는 객관적 기능이 있습니다. 객관적 기능의 영역에서 자동차는 아파트를 대신할 수 없겠지요. 
반면 객관적 기능의 영역을 넘어서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329
현재 산업자본은 광고를 통해서 우리가 가진 '낡은'것을 폐기하고 '새로운'것을 구매하도록 유혹합니다.
광고에서 소개되는 새로운 세탁기에는 보드리야르가 이야기한 에로틱함, 새로움, 행복함이란 '기호가치'가 강하게 부여된 것입니다.  331
여러분 집 안이 사용하지 않는 상품들로 가득 차 있다면, 이것은 이미 산업자본주의가 열어놓은 소비사회의 유혹에 포획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타인으로부터 주목과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과 허영 같은 감정이 있기에 산업자본의 기호가치가 작동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소비사회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통찰이 중요한 이유도 그가 인간에게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려는 욕망 혹은 허영이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333
금욕은 어떻게 사치가 되었나
근대사회란 산업자본 주의에 입각해 새롭게 구성된 사회, 그러니까 18세기의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으로 시작되어 19세기에 거의 완전한 모습을 갖춘 사회를 말합니다.  334
좀바르트는 '어떤 시대라도 사치가 일단 존재하면, 사치를 더욱 증대시키는 그 밖의 동기들 역시 활기를 띠게 된다. 즉 명예욕, 화려함을 좋아하는 것, 뽐내기, 권력욕, 한마디로 말해서 남보다 뛰어나려고 하는 충동이 중요한 동기로서 등장한다.... 그렇지만 사치가 개인적이며 물질주의적인 사치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감각적인 향락이 확기를 띠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에로티시즘이 생활양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우리가 논의하는 시대에 적용해보자. 거대한 사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다. 즉 부(富)도 있고, 사랑의 생활도 자유로운 상태였고, 다른 집단을 압도하려고 하는 몇몇 집단의 시도도 있었으며, 또한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19세기 이전에는 전적으로 향락의 중심지였던 대도시에서의 생활도 있었다.'  340-341
좀바르트에게 사치란 특정 시대만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본성에 가까운 것으로 사유되었습니다.
좀바르트는 사치가 인간이 가진 허영이라는 욕망, 즉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으려는 욕망에서 기원한다고 보았습니다. 스스로를 화려하게 꾸밈으로써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구별하려는 욕망에서 사치가 발생했다고 본 것입니다.
좀바르트는 <사치과 자본주의>에서 '부(富)가 축적되고 성생활이 자연스럽게 또 자유스럽게 혹은 대담하게 표현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사치도 함께 유행한다.'  341
소비, 자본주의 생산성의 비밀
소비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의 욕망과 개성을 자유롭게 분출하고, 그래서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다는 일종의 환각을 갖습니다. 그렇지만 보드리야르는 냉정하게 지적합니다. 우리가 가진 '욕구와 그 (욕구의) 충족은 오늘날에는 다른 생산력(노동력 등)과 마찬가지로 강요되고 합리화된 생산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349
산업자본주의에서 자유란 분명 소비의 자유입니다. 돈이 부족하거나 아예 돈이 없을 경우 우리가 부자유의 느낌, 심지어는 심각한 우울증을 느끼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자신을 타인과 구별해줄 수 있다고 믿는 상품들을 구매하지 못할 때 우리는 우울증을 겪습니다.
돈이 없으면 우울하고, 돈이 있으면 명랑해진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산업자본이 우리의 욕망을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는 분명한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자유와 부자유의 느낌을 자신만의 고유한 느낌이라고 믿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자신이 산업자본에 길들어 그런 자유 혹은 부자유의 느낌을 가진다는 사실을 또한 망각하기 쉽습니다.  350
수족관에 갇힌 낙지의 삶
노동자가 동시에 소비자라는 너무도 자명한 사실,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물건을 자신의 임금 가치보다 훨씬 더 비싸게 소비한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멈추지 않고 작동하는 핵심 비밀이자 신비입니다.  362
자본가로부터 주어지는 임금은 더 큰 자본의 형태로 다시 회수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제공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본가가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주는 이유는 노동자들의 윤택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노동자가 다시금 소비자가 되어서 자본가의 상품을 구매해주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결코 잉여가치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잉여가치를 남기기 위해서라도 자본주의는 반드시 이러한 메커니즘을 거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63

8. 교환, 대가 없는 나눔의 마법
문명의 빛 반대편에 서려는 시인의 의지
만약 돈이 없다면, 우리가 소망하는 자유로운 욕망의 실현은 불가능해질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사회에 사는 셈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우리 삶은 분열될 수밖에 없습니다. 상품과의 관계에서는 주인으로서 자유를 만끽하지만, 그 이면의 돈과의 관계에서는 무기력한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가니까요.  367
사랑이란 아무런 대가 없이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감정을 말합니다. 이 때문에 사랑이란 감정은 자본주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소망스러운 감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자본주의는 늘 인간의 무한한 진보와 변영을 약속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곧바로 정면에서 거부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인간의 노쇠함과 그에 이어지는 필연적 죽음입니다.  375
'공산당 선언'에서 '생산의 거울'까지
베버 역시 생산중심주의에 입각해서 사유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바르트나 보드리야르는 산업자본의 잉여가치가 오직 유통과정에서만, 다시 말해 한때 노동자였던 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하는 경우에만 획득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베버와 달리 이들 후자의 견해는 소비중심주의라고 부릅니다. 보드리야르가 생산중심주의를 비판했던 이유도, 노동자가 동시에 소비자라는 자본조의 현실을 보지 못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377
보드리야르는 아직까지도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생산중심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오래된 사유의 관행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378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다면 그 누구도 마르크스의 사유를 피해갈 수 없지요. 그렇지만 보드리야르는 마르크스를 배신하려고 합니다. 그는 마르크스 역시 생산중심주의라는 거울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았습니다.  379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는 어떠한 억압이라도 감당해야 했지만, 유통과정에서 노동자는 곧 소비자로 바뀝니다. 소비자라느 ㄴ위치에 있을 때에만, 노동자는 산업자본에 대해 나름대로 자율성을 얻지요.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유통과정, 혹은 소비의 영역을 중시했던 것입니다.
소비 영역은 소비자가 노동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산업자본의 음모, 나아가 소비자의 허영을 부추겨 소비를 촉진하려는 산업자본의 전략이 관철되는 매우 중요한 공간입니다. 소비 영역에서 전개되는 이 같은 산업자본의 음모와 전략을 폭로하는 것, 바로 이것이 보드리야르의 평생 숙원 사업이었습니다. 그 일환으로 그는 사물이 가진 서로 다른 네 가지 차원의 논리를 해명합니다.  381
'기호와 차이의 논리라고 할 수 있는 소비의 논리를, 그 논리에 얽혀 있는 여러 가지 다른 논리로부터 구별해낼 필요가 있다. 네 가지 논리가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①사용가치(use value)라는 기능적 논리, ②교환가치(exchange value)라는 경제적 논리, ③상징적 교환(symbolic exchange)의 논리, ④가치(value)/기호(sign)의 논리. 첫 번째는 실제적인 작용의 논리이다. 두 번째는 등가(equivalence)의 논리이다. 세 번째는 애매성(ambivalence)의 논리이다. 네 번째는 차이의 논리이다. 또한 유용성의 논리, 거래의 논리, 증여의 논리, 신분의 논리. 물건은 이 가운데 어느 하나에 입각하여 정돈됨에 따라 각각 '도구' , '상품' , '상징' 또는 '기호'의 지위를 취하게 된다. 그런데 마지막 것만이 소비라는 측수한 영역을 규정짓는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가 하나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다이아몬드는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도구'일 수도 있고, '상품'일 수도 있고, '상징'일 수도 잇고, 아니면 '기호'일 수도 있습니다. 먼저 '도구'의 측면에서 바라본 다이아몬드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이 경우 다이아몬드는 가장 견도한 광물이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자르거나 부술 때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때 도구로서의 다이아몬드는 '사용하기'라는 기능적 논리를 따르게 됩니다. 하지만 아름답기만 할 뿐 무엇인가르 자를 때 사용하기가 불편하다면 이것은 결국 사용가치가 별로 없는 다이아몬드에 불과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드리야르는 '사용가치의 기능적 논리'를 '실제적 작용의 논리' 혹은 '유용성의 논리'라고 설명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다이아몬드는 '상품'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다이아몬드는 1억 원으로 구매하거나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이 됩니다. 이때 상품으로서의 다이아몬드는 '교환가치'라는 경제적 논리를 따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 한 개는 자동차 5ㄷ개가 컴퓨터 100대와 바꿀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이아몬드 한개의 교환가치는 자동차의 5배, 혹은 컴퓨터의 100배라고 할 수 있겠지요. 화폐는 바로 이런 다이아몬드의 교환가치를 가장 편리하게 수량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이아몬드 한 개의 교환가치는 현재 1억 원으로 매겨진 것입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가 너무 많이 채굴되거나 혹은 소비자의 구매가 별로 없다면, 다이아몬드의 교환가치는 1억 원 아래로 다시 떨어지겠지요. 이 때문에 보드리야르는 '교환가치라는 경제적 논리'를 '등가의 논리'나 '거래의 논리'에 딸느 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세 번째로 다이아몬드는 '상징'의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는 사랑하는 딸의 결혼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상품으로서의 다이아몬드를 살 수 있는 1억 원으로 다른 것을 살 수도 있겠지요. 혹은 1억 원 상당의 다른 상품과 다이아몬드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물로서의 교환은 앞서 말한 등가 교환과는 다릅니다. 내가 다이아몬드 하나를 선물받았다고 하더라도, 나느 ㄴ상대방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선물로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징적 교환'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선물로서의 다이아몬드는 '양면성의 논리'나 '증여의 논리'를 따른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애매성으로 번역된 'ambivalence'라는 단어는 가치가 애매하다는 뜻입니다. 기존 등가교환에서 본다면, 다이아몬드 한 개와 장미꽃 한 송이 사이의 교환이란 매우 애매하겠지요.
마지막으로 다이아몬드는 '기호'의 측면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보드리야르가 <소비의 사회>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한 것도 바로 이 네 번째 측면입니다. 다이아몬드는 상류계층에 속하므로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을 나타내는 기호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다이아몬드는 보드리야르가 말했듯이 '신분의 논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기호'의 측면이 앞서 말한 '상품'의 측면과 그 의미가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교환가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다시 말해 구입한 상품이 고가일수록 그것은 구매자의 더 높은 사회적 위상과 신분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상류계급은 고가의 제품일수록 더 적극적으로 구매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는 고가의 제품을 아무나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몸소 과시하려는 허영심으로부터 나온 결과입니다.  382-384
   도구 상품  상징 기호 
 가치 사용가치 교환가치 상징가치 기호가치 
 작동 논리 작용성  등가성  애매성  차이성 
 적용 영역 유용성의 차원  거래의 차원  증여의 차원  신분의 차원 

생산중심주의에서 살펴본다면,, 인간의 노동력을 중여주거나 아니면 확장 시켜준다는 측면에서 보면 첫 번째 '도구'로서의 사물이란 개념은 샌상중심주의에 잘 부합됩니다. 또 '상품'으로서의 사물도 당연히 생산에 도움이 됩니다. 높은 교환가치에 상품이 팔리면, 그만큼 산업자본은 생산력을 좀 더 확장할 수 있는 자본력을 갖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기호'로서의 사물도 생산중심주의에 잘 부합됩니다. 인간이 가진 허영심과 욕망을 증폭시켜서 당장 필요하지 않은 상품이라ㅗ 고가에 사들이게 한다면, 산업자본은 막대한 잉여 가치를 남길 수 있겠지요.
보드리야르는 생산의 거울을 깨고자 했던 철학자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도구', '상품', '기호'라는 세 가지 사물의 측면을 부정ㅎ적으로 생각했으리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측면들은 모두 생산 중심주의와 직접 관련 있기 때문ㅇ입니다. 이제 그에게는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한 가지 관점만 남은 셈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물이 가진 '상징'으로서의 측면입니다. 어떤 대가도 없이 어떤 교환도 기대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증여의 논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385
보드리야르는 '상징'으로서 사물이 가진 측면이 사물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산업자본주의의 마수로부터 구원해줄 유일한 희망이라고 보았습니다.  386
불가능한 교환을 꿈꾸며!
모스(Marcel Mauss 1872~1950)가 1925년 발표한 <증여론(Essai sur le don)>.
모스의 연구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가 부의 축적을 제일의 목적으로 간주하는 사회인데 반해, 증여의 사회에서는 부의 축적이 아니라 오히려 부의 지출이나 베풀기를 가장 중요한 덕목 혹은 가치로 믿는 사회였습니다. 모스는 증여의 사회에서 무엇인가를 증여하는 사람이 지출이나 베풀기를 통해 얻는 것, 즉 증여가 대가로 얻는 것은 위신이나 명예라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증여는 결국 이 사회에서 위신이나 명예와 대등하게 교환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타유가 강조한 것은 증여의 핵심이 교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증여 자체가 함축하는 과잉 및 그로부터 이어지는 손실이란 논리엿습니다.  396
보드리야르는 뇌물은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사용가치나 교환가치, 혹은 기호가치로 드러납니다. 그렇지만 선물에는 사용가치, 교환가치 그리고 기호가치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사랑이나 애정의 표시,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는 가치, 즉 '상징적(교환)가치'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398
<암호>에서 말년의 보드리야르는 자신이 바타유의 충실한 제자였음을 시인합니다. 바타유는 생산중심주의가 종국에는 파국을 낳을 것이라고 지적했지요. 하지만 그는 유리가 '불유쾌한 파멸'보다는 '유쾌한 파멸' 즉 선물의 놀리를 선택할 가능성을 강조했습니다. 
산업자본주의의 집어등에 걸려 있는 우리에게는 바타유와 보드리야르의 이야기가 언뜻 보아서는 이해되기 어려운 주장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단적으로 말해 하나의 고유한 선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산업자본은 생산력의 증가, 다시 말해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서 심지어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일종의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 역시 어떤 면에서는 산업자본이 설치해놓은 집어등에 사로잡혀 스스로 교환 가능한 존재라고 받아들이며 체념합니다.  403
자전거로 달리는 영원회귀의 길
교환에서 우리가 잊기 쉬운 것은 장미와 와인에 교환될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교환을 하면, 장미가 가진 고유성과 와인이 가진 고유성을 부정해야만 합니다. 만약 부정하지 않는다면 교환이 이루어질 수 없겠지요. 무엇이든 서로 교환되려면 그것이 가진 생생한 질들을 추상해야 합니다. 이 점을 가장 잘 부여준 것이 바로 '돈' 입니다. 장미는 1만 5000원의 가치가 있고, 와인도 1만 5000원의 가치가 있으므로 서로 바꿔도 된다는 논리를 가능케 한 것이 돈입니다.
그런데 만약 교환만을 염두에 둔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향유할 수가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오직 교환 가치의 측면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이지요.  404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니체의 영원회귀가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실천적 명령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에 따르면 니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 "네가 무엇을 의지하든 그것의 영원회귀를 의지하는 그런 방식으로 그것을 의지하라."
니체는 미래의 목적을 위해 현재의 삶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기독교를 허무주의라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니체는 이 순간의 삶과 현재의 절대적인 것으로 긍정할 필요를 느낍니다. 이 대목에서 영원회귀라는 니체의 주장이 출현했습니다. 바로 지금 그리고 이곳의 삶, 그리고 이 속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선택은 영원히 반복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논리에 따라 만약 현재 사니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면, 이 행복하지 않은 삶이 어떤 주기를 가지고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 순간 현재의 삶 속에서 자신의 선택과 행위가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심사숙고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411
니체가 제안한 영원회귀의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세속적 형태의 염세주의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 또한 심각한 타격을 받습니다. 자본주의 논리를 신봉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현재의 고된 노동을 참고 견디면 언젠가 그 대가로 큰돈을 벌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오로지 돈을 목적으로 삼아 자신의 삶을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버리지요.  412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사실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것은 현재 우리 삶이 다른 어떤 시간의 삶으로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들뢰즈, 그러니까 니체 자신이 말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413
유하와 보드리야르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두 사람은 자본주의에 의해 포획된 우리 삶이 얼마나 우울하고 초라해졌는지 잘 보여줍니다.
부르디외는 자본주의적 아비투스와는 분명 다르지만 전자본주의적 아비투스는 자본주의를 극복할 어떠한 힘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414
우리는 후손들이 자본주의로부터 상처받지 않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사회를 꿈꾸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후손들을 위한 앞 세대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겠지요. 물론 그런 사회가 가능해진다면, 미래에 도래할 인간들은 매 순간 펼쳐지는 자신들의 삶을 단순한 수단으로 생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그 자체로 향유되는 영원한 현재가 되겠지요.  415

에필로그
자본주의 사회는 피상적으로 보면 이전 사회보다 더 자유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보장하는 자유란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닙니다. 자본주의에서 자유는 돈을 가진 자의 자유, 소비의 자유에 불과할 뿐입니다. 소비의 자유란 결국 돈에 대한 복종의 이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비의 자유를 위새서 돈의 노예가 된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한 번 되돌아보세요. 수중에 돈이 없을 때 얼마나 갑갑하고 부자유스럽다고 느끼는지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향유하는 자유가 돈이 있을 때만 가능한 그런 성격의 것이라면, 그것은 돈의 자유이지 우리 삶의 자유일 수는 없습니다.  423
자본주의로부터 자신의 자유를 회복하려면 여기에서 다룬 인문학자 여덟 명의 사유 또한 곰곰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날개옷과 같은 역할을 해줄 것입니다. 그들의 사유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자본주의에 길들어왔으며, 또한 진정한 자유를 얼마나 오랫동안 잃고 살아왔는지 자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424
"선생님, 그렇다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선생님 말씀대로 취업은 자본주의에 포획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느 ㄴ취업을 해서는 안 되는 건가요? 취업을 하지 않고 우리는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나요?"
이것은 무척 심각하고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 좋은 성적, 좋은 영어 점수. 지금까지 그들의 삶은 모두 자본주의가 내세운 기준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에 입각한 이 같은 삶의 원칙을 직접 심어준 것은 바로 그들의 부모입니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다른 동물들보다 인간은 훨씬 더 사랑과 관심을 받으려고 합니다.
독립하기 전까지 인간은 주위의 절대적 보살핌에 의존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유아 시절에 필요한 사랑과 관심은 단순한 허영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생존과 결부된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아 시절부터 인간은 자신을 돌보는 사람, 이 가운데 특히 어머니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노력합니다. 좋은 성적을 받아올 때 어머니가 기뻐한다면, 아이들은 가능한 한 성적을 올리려고 애쓸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공부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어머니로부터 지속적인 애정과 관심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우리의 욕망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인 셈입니다.  425
정신분석학은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욕망이란 단지 부모의 욕망이 내면화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이 점에서 보면 젊은 학생들이 자본주의 논리에 의구심과 회의를 품을 수 있다는 점은 무척 소중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회의는 그들이 이제 부모의 절대적 영향으로부터 구성된 욕망이 아닌 자신만의 욕망을 꿈꾼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취업을 하지 않고 우리는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나요?" 라는 그들의 질문 이면에는 생황의 절박함과 불안감이 숨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426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품은 상처의 심각함을 뼈저리게 자각하면, 우리 실천도 그만큼 치열하고 집요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이 책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이상적인 대안이나 구체적인 해법들을 제안하기보다, 우선 자본주의에 의해 상처받은 삶을 묘사하려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누구보다 예민하게 상처를 감지한 문학가들 그리고 누구보다 치밀하게 상처를 해부한 사상가들의 시건을 빌린 것도 이 때문이지요.
상처를 상처로서 제대로 느낄 수 있을 때, 상처를 치유하려는 우리의 의지와 노력 또한 새롭게 싹틀 수 있을 겁니다. 간정히 소망해 봅니다. 더이상 상처가 깊어지기 전에, 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들이 치료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떠안기전에, 치유의 노력이 곧 시작될 수 있기를 말입니다.  43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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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나온 결론으로 제시된 '공동체'에 대해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러한 공동체는 결국 공동체의 규범과 규율이 필요하게 된다.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 양산의 계기가 될 수 있기에 해결책이라 보기 어렵다. 시도는 좋으나 이것이 '동물농장'이 되지 않는다고 보장 할 수 없다.
미시적으로 볼 때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큰 문제 양산이 될 것이다.
어쩌면 유지하기 위해 '멋진신세계'로 변형되어야 할지도 모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손쉬운 대답은 종교에 의지하는것으로 가게 될지 모른다. 책에서 말하는것 처럼 이것 역시 대안이 되기에는 힘들다.
인간은 절대적 불변이 있다. 바로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 하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답이 존재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은 확실하다.
어렵다. 어렵고도 답이 없다. 그렇기에 변화의 과정들을 겪으면서 우리는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
끝없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이 무기력하게 하긴 하지만, 지금 보다 더 나은 시대를 만들기 위해 변화를 하고, 그것이 병이 될 때 아니 병이되려할 때 또 다른 대안의 변화가 이루어져 나가는 것만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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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언(名言)이나 격언(格言), 잠언(箴言)은 어떤 교훈이나 가르침을 주는 말 또는 학문 등의 핵심을 간략하게 외우고 말하기 쉽게 그 내용을 간결하고 짧은 문장으로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 속담과도 비슷한 말이며 보통 속담은 일반 서민들의 생활 속에서 나와 그 작자가 분명하지 않은 것을 가리키고 명언은 저명한 사람의 발언 또는 문장이나, 작자는 불명하나 널리 알려진 고전에서 유래한 것을 가리킨다.


아포리즘에 대한 정의 (모리와 함께  화요일)

 

Aphorism: An aphorism is a short witty sentence which expresses a general truth or comment.

아포리즘은 일반적인 사실이나 의견에 대한 짧은 재치있는 문장을 말한다

- 출처: Collins Cobuild Advanced Learner’s English Dictionary


아포리즘깊은 진리를 간결하며 압축된 형식으로 표현한 짧은  (금언격언잠언경구 )

- 출처민중서림 엣센스 국어사전

 

아포리즘이란 위의 사전적 정의와 같이 짧은 형식으로  금언을 말합니다

아포리즘이란 단어를 처음 접하게  책은

바로 모리와 함께  화요일인데요 (Tuesday with Morrie)

노교수와 제자사이의 대화에서

노교수의 아포리즘을 제자가 경청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모리의 대표적인 아포리즘을 보기로 할까요?

 

Accept what you are able to do and what you are not able to do.

Accept the past as past, without denying it or discarding it.

Learn to forgive yourself and to forgive others.

Don’t assume that’s its too late to get involved.

 

너가 할수 있는 것들과 할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여라

과거는 과거로써 받아들이되 그것을 부정하거나 버리려 하지 말아라

너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남을 용서하라

무엇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었다고 단정하지 말아라

- 출처: Tuesday with Morrie

 

위의 아포리즘을 사랑에 대해 제가 재해석 하자면 이렇습니다

 

사랑에 대해서 너가   있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받아들여라

남을 사랑할 수는 있지만남이 너를 사랑하게  수는 없다

지나간 사랑은 과거로써 받아들이되

그것을 애써 지우려하지말고버리려 하지 말아라

과거는 과거로써 아름다울 뿐이지다만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의 끝에는 당신 그리고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자신의 과오를 돌아보고 나를 용서하고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남을 용서하라

 

사랑이 끝났다고 다시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라

네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때다

지금 행동하라





“내가 누구인지 밝혀두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사실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을 수 있다…. 나는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이다. 나는 성인이 되느니 차라리 사티로스이고 싶다.”

 

그는 책의 서문을 그렇게 썼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제자로 규정했다. 그리고 반인반수의 사티로스(Satyros)가 되기를 원했다. 사티로스는 얼굴은 사람이지만 몸은 염소이며, 머리에 작은 뿔이 난 디오니소스의 시종이다. 주신을 모시는 시종답게 술과 여자를 좋아하며, 과장된 표현과 몸짓으로 우스꽝스러움을 자아내는 급이 뚝 떨어지는 잡신이다.




디오니소스의 제자이며 디오니소스의 시종을 희망한 이 사람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그리고 이 책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제목과 서문도 파격이지만, 본문은 한 술 더 뜬다. 이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네 개의 질문을 던지고 차례로 응답한다.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   

 

세상에! 21세기 오늘을 살아가는 깜찍한 소녀들도 “난 너무 예뻐요”를 노래할 때는 살짝 부끄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콧수염을 기른 근엄한 얼굴의 19세기 철학자가 정색을 하고 “난 왜 이렇게 현명한가”라니!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니체는 도발적으로 글을 썼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글을 물고기를 낚기 위한 낚싯바늘로 표현하기도 했다. 독자를 유혹하기 위한 글이라는 것이다. 요즈음 인터넷 용어로 말하면, 그는 ‘낚시질’의 원조인 셈이다. 그의 낚시질은 다양하다. 예를 들어 그는 [선악의 저편]에서 “진리가 여성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떠한가”는 질문을 던지고, [도덕의 계보]에서는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고 단정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우상의 황혼]에는 ‘망치를 들고 철학 하는 법’이라는 부제를 달았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모두를 위한 책이면서 그 누구도 위한 것이 아닌 책’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개인적으로 니체는 공손한 사람이었다는 게 니체 전기 작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그러나 글로 보는 니체는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거만하고, 무례하며, 위악적이다. 그는 굳이 그 점을 감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과장한다. 그는 왜 존경 받는 성인이 되기보다 지탄 받는 사티로스가 되기를 희망했을까?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교과서적인 정답을 안다.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면서 기독교적 세계관에 도전을 한 무신론자이며, 객관적 진리를 향한 형이상학적 전통에 반기를 든 반형이상학자이고, 보편적 도덕 가치를 정초하는 시도 자체가 무망하다고 본 비도덕주의자다. 그러한 도발적 주장 때문에 니체 철학은 한편으로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비합리적인 철학의 전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 용감한 철학으로 상반되는 평가를 받아왔다.


잠깐! 여기서 짚어보자. 니체는 신을 믿지 않은 최초의 무신론자인가? 아니다. 역사의 시계를 멀리 돌릴 필요도 없다. 니체가 철학의 스승으로 삼았던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도 신을 믿지 않았다. 니체는 형이상학에 반기를 든 최초의 반 형이상학자인가? 아니다. 형이상학을 반대한 근대 철학자는 너

무 많아서 거론하기조차 힘들다. 대체로 근대 경험론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에 반대한다. (David Hume)은 형이상학 책은 불태워버리라고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또 물어보자. 니체는 도덕적 가치의 보편성을 의심한 최초의 인물인가? 아니다. 도덕적 회의주의의 흐름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 이후 도덕적 보편주의를 주장한 철학적 흐름만큼이나 뿌리가 깊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니체 철학은 뜨거운 감자가 되었는가?

 

그 비밀의 열쇠는 니체가 주장한 내용에서 찾지 말고 니체가 주장한 방식에서 찾아야 한다. 니체 철학은 아포리즘(aphorism)의 철학이다. 그가 쓴 글은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경구에서부터 하나의 주제에 대한 비교적 긴 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의 아포리즘이다. 아포리즘은 간결하지만 다의적이다. 쉽게 전달되지만 모호하다. 누구나 쉽게 니체를 읽지만, 니체 철학의 이해가 쉽지 않은 이유다. 그는 왜 이렇게 글을 썼을까? [차라

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피와 아포리즘으로 쓰는 사람은 읽혀지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산과 산 사이를 가장 빨리 가는 길은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긴 다리를 가져야만 한다. 아포리즘은 봉우리들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듣게 된 자들은 키가 크고 높이 솟은 자여야 한다”


단순히 눈으로 읽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기억되어야 하는 아포리즘은 천천히 음미해 가면서 읽어야 한다. 아포리즘은 사물과 직접적으로 관계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포리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물을 낯설게 제시한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지각 경계를 흔든다.












니체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신은 죽었다”는 말도 그렇다. 이 말은 관찰에서 나온 주장이 아니다. 신의 죽음은 ‘소식’의 형태로 전달된다. 그 소식을 전하는 자는 ‘광인’이다. 1인칭 시점으로 즐겨 글을 쓰는 니체가 이 대목에서는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광인을 등장시켜 그 소식을 전한다. 그런데 그게 묘하다. 광인은 이 소식을 기쁘게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광인은 시장 바닥에서 신을 찾다가 마침내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를 죽였다”고 외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절규한다. 그리고 또 말한다. “어떻게 우리는 모든 살해자 중에서 살해자인 우리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가?”라고. “세상에서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존재가 우리의 칼 아래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다”며, 이제 누가 우리를 위해 속죄를 해줄 수 있는가 묻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도 신의 죽음이라는 놀라운 소식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니체는 이 광인이 전하는 신의 죽음을 이렇게 맺는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날 광인은 몇몇 교회에 뛰어들어 신의 진혼곡(requiem aeternam deo)을 불렀다고 한다”.     

 

[즐거운 학문]에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 광인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인물로 바꾸어 무덤덤하게 한 마디 한다. “저 사람들은 아직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모양이지”.

 

니체는 신이 죽었다는 사건을 ‘근래의 최대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이 사건을 극화해서 전한다. 영어권 세계에 니체 철학을 소개한 카우프만(Walter Kaufmann)은 이 극화된 장면이 성가에서 차용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신의 죽음은 과학적 관찰이 아니고, 형이상학적 고찰도 아니며, 19세기 유럽문화에 대한 니체의 상황 진단이다. 이 극화를 통해서 니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 주장처럼 신은 원래 없었으며 단지 인간의 속성이 외화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이 우화적 표현은 광인이 전하는 신의 죽음이라는 사건보다는 오히려 그 사건을 조롱하고 비웃은 당대 유럽 문화에 대한 고발에 초점을 맞춘다. 신의 죽음을 조롱하는 사람들은 신의 죽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신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신의 죽음 이후에 또 하나의 신을 만들어 그것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신을 죽이고 난 후, 그 신이 남긴 흔적은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새로운 신을 만들어 죽은 신의 자리를 메웠다.      

 

그렇다면 새로운 신은 누구인가? 니체는 그것을 콕 짚어서 주장하지 않는다. 아포리즘을 통해서 기독교 신의 죽음과 새로운 신의 조짐을 경고했을 뿐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새로운 신을 과학으로 읽는다. 종교적 미신이 사라진 자리를 과학적 미신이 차지했다고 바라본다. 어떤 이는 새로운 신을 근대(modernity)로 읽는다. 종교적 신화는 죽었지만, 이성과 계몽을 축으로 하는 근대 신화가 새롭게 생겨났다고 본다.

 

니체는 신이 남긴 유산을 완전히 털어버리기를 원한다. 신의 흔적을 지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이 죽었다는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또 다시 아포리즘을 동원한다. 그 아포리즘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때로는 차라투스트라라는 초인을 통해서, 때로는 디오니소스라는 그리스 주신을 통해서, 때로는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라는 한때 그가 숭상했던 인물에 대한 혹독한 실명 비판을 통해서 그 효과를 극대화한다.





이 아포리즘이 궁극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과 예술의 장에서 주로 논의되던 니체를 철학의 장으로 이동한 20세기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그것을 니힐리즘(nihilism)으로 읽는다. 니체는 그의 초기 작품 [비극의 탄생]에서 세계의 근저는 그가 스승으로 삼은 디오니소스적인 심연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 심연을 덮기 위한 인간의 처절한 노력이 영원한 세계를 만들어냈다. 플라톤이 세운 이데아의 왕국은 그런 영원한 세계를 지향한 것이며, 기독교가 만들어낸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니체는 기독교를 플라톤 철학을 대중화한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는 세계는 없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나 플라톤 철학이 말하는 이데아는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감내하지 못하는 인간이 자기 보존을 위해 만든 조건일 따름이다. 삶의 자기 보존을 위해 만든 것을 니체는 ‘가치’라고 부른다. 따라서 모든 가치는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곧 ‘니힐’(nihil)이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의 역사는 디오니소스적 심연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들이 의미를 부여하는 니힐리즘의 역사다.


이런 틀에서 보면 기독교는 니힐리즘이고, 플라톤 이후 지금까지 서양 형이상학도 니힐리즘이며, 도덕의 보편 가치를 주장하는 도덕주의자도 니힐리즘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적 세계와 형이상학적 세계, 그리고 도덕적 세계를 최초로 부정한 철학자도 아닌 니체가 왜 그렇게 위험한 철학자로 취급되었는가 하는 단서를 하나 움켜잡는다. 니체는 지금까지 인류가 세운 모든 가치 체계가 니힐리즘이라는 점을 통찰한 철학자다.

 

니힐리즘은 지금까지 인류가 세운 고귀한 가치를 집어 던진다. 그래서 니체는 고귀한 성인이 되기 보다는 차라리 저속한 사티로스가 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풍자(satire)는 그 어원이 바로 사티로스에서 온 말이다. 니체는 우리가 듣기 싫어하는 독한 말을 내뱉기 위해 사티로스를 희망한 것은 아닐까?

 

지난 세기 후반기에 니체 읽기, 또는 니체 식으로 세상 읽기는 하나의 사조로 퍼져나갔다. 그 불을 지핀 것은 프랑스어권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다원화된 세계를 해석하는 틀로 니체의 아포리즘을 이용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단 하나의 니체 철학이 있다는 점에 반대한다. 니체 철학은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푸코는 니체 철학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고 니체 철학이 우리 삶에 어떤 효용성을 줄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니체 철학이 본질적으로 복수주의(pluralisme)라는 점에 동의하지만, 니체를 니힐리즘이라는 틀 안에 가두지 않고 창조적인 생성의 철학자로 적극 해석한다. 생성과 다원성, 그리고 얼핏 보기에 무질서하고 엉뚱해 보이는 우연성이 니체가 제시한 아포리즘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하고 무례한 질문을 던진 니체를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로 니체만큼이나 오만했고, 니체처럼 음울했던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를 떠올린다.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히브리스(hybris)라는 위험한 단어는 모든 헤라클레이토스주의자의 시금석이다. 바로 거기서 그가 자신의 스승을 이해했는지 또는 오해했는지 드러내 보일 수 있다”.

 

히브리스는 무례하고 거만함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술 마시고 방자한 행동을 하는 것도 히브리스 범주에 들어간다. 타인을 모욕하고 수치심을 주는 행위, 자신을 과시하면서 잘난 체 하는 행동도 모두 히브리스다. 그리스인들은 히브리스를 잘 다스리는 데서 미덕이 나오고, 히브리스가 날뛰는 데서 악덕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비극은 히브리스가 날뛰는 데서 오는 불행을 소재로 한다. 그러나 니체 철학에 따르면, 히브리스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발현이기도 하다. 그것은 삶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나오는 것이다.



결국 니체가 꿈꾸는 미래의 철학이 성공하는가 실패하는가 하는 여부는 히브리스가 가진 이중성을 이해하는 데 달려있는 셈이다. 물론 니체와 니체주의자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반면 니체에 반대하는 이들은 니체 철학 자체가 히브리스이며 니체의 철학적 사유가 정지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러셀이 니체 철학을 일종의 낭만주의적 흐름으로 보는 이유다. 어원적으로 보면, 니체 철학이 크게 의존하는 아포리즘이라는 말에는 이미 경계를 확정 짓는 지평선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여러분은 니체의 기획이 히브리스의 위험성을 뛰어넘는 생각의 새 지평으로 보는가, 아니면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철학적 히브리스라고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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