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고 비루해지기 쉬우며, 자칫하면 찌그러지고 찌질해지기 쉬운 일상적인 삶이야말로 무엇보다 '지혜'가 필요한 곳이고, 그곳이 '지혜에 대한 사랑'을 자처하는 철학이 달려들어야 세계라고 저는 믿습니다.  8


독재나 억압이 더욱 나쁜 것은 마치 그것이 사라지면 사람들이 자유로워질 것 같은 환상을 유포하기 때문이다. 동성애에 대한 금기가 더욱 나쁜 것은 마치 그것이 사라지면 동성애자들이 자유로워지리라는 안이한 발상을 배양하기 때문이다. 그믹와 거리가 먼 이성애자는 모두 자유롭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자유를 위해 모든 구소고가 억압이 사라져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이 때문이다.  13


제약이나 구속 대신 필연성과 대립되는 상태가 자유라고 믿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필연성이란 피할 수 없는 구속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필연성과 대비하여 '가능성'이,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자유의 폭으 ㄹ결정한다고들 한다.  13


돈이 많아 노동하지 않고 살아도 되는 사람은 자유로울까?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니 자유로울 거라고?

자유를 부러워하는 게 아니라 돈 쓰는 걸 부러워하는 것이다. 자유란 돈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것이지 돈을 실컷 쓰는 게 아니다.  13-15


자유란 이런저런 조건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발행되는 자판기 티켓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든 나 자신이 만들어가야 할 세공품이다.

자유란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갈 수 있는 '능력'과 결부된 것이다. 삶이나 행동의 방향과결부된 어떤 힘이나 능력이다. 

억압이나 구속은 그 자체로 자유와 반대되는 상태가 아니라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이 가동되는 출발선에 불과하다.  15


자유를 위해선 자신의 '자유의지'만이 아니라 자신을 벗어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자신의 생각만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는 게 필요하다.  16


한 줌의 용기가 없다면 사실 자유로운 살밍란 말해봐야 공허한 것이고, 들어봐야 '남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용기는 고통을, 자유를 위해 넘어서야 할 저항으로 바꾼다. 

용기는 모든 것을 거는 어떤 도박적인 내기가 아니라 단지 '한 줌'의 용기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17


단 한 번의 거대한 결단보다 더 어려운 것은 매 순간의 삶에서 자유로운 걸음을 걷는 것이다. 매 순간을 갈 만한 길로 가는 것이고, 매일매일 살 만한 삶을 사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매 순간 진행되는 삶 자체를, 매번 내딛는 발걸음을 자유로운 삶으로 스스로 믿고 가는 법. 그것이 철학을 통해 배워야 할 삶의 지혜다.  19


이런 의미에서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필로-소피아(philo-sophia)는 '삶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필로-비오스(philo-bios)의 다른 이름이라고 나는 믿는다.

옳다고 주어지는 것이 정말 옳은지 다시 생각하고, 자신이 정말 긍정할 수 있는 좋은 삶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하는 것은 이 한 줌의 용기로 시작한다.  20



사건과 자유 -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진" 사건에 대하여


가령 교통사고는 물리학이나 생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노래 한 곡 들은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신체적 변화를 야기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얼른 치료하여 이전의 삶으로 되돌리려 한다. 그것 이전의 삶으로 최대한 되돌아가려 한다. 반면 그로 인한 신체적 변화를 받아들이고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사고 아닌 사건이 될 것이다. 

따라서 '사고'란, 그것이 실제로 나를 애초에 바라던 거소가 다른 곳으로 밀고 가더라도, "없었으면 좋았을" 어떤 것이다. 그로 인해 발생한 두 지점 간 간극의 폭은 그가 느끼는 불행의 크기를 뜻한다. 사고란말에 부정적인 색채가 담겨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 그게 '사건'이 되는 것은 그로 인한 변화를 나의 새로운 삶으로 받아들이고 긍정함으로써다. 그것을 받아들인다 함은, 피할 수 없이 이미 내게 밀고 들어온 그것이 내 삶 안에 자리잡았음을 받아들임이며, 그것을 긍정한다 함은 그것으로 인한 변화를 새로운 삶의 기회로, 또다른 삶의 가능성으로 긍정함이다.

사건이란 어떤 일로 인해 발생한 곡절, 애초의 궤적에서 벗어난 이탈에 대한 긍정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에 사고가 많은 인생은 그 사고의 수와 크기만큼 안타깝고 불행하지만 , 사건이 많은 삶은 그 사건의 수와 크기만큼 풍요롭고 행복하다.  27



긍정과 자유 - 기적 같은 삶은 어디서 시작하는가?


다큐 영화 <서칭 포 슈가맨>

처음에 음반 제작자가 찾아왔을 때, 얼마나 기뻤을 것인가. 시를 쓰고 노래를 만들며 사는 멋진 삶이 다가왔다고 생각했을 게다. 대중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도, 혹은 그 이상도 가능할 것 같은 성공이 손을 내미는 것이리라 생각했을 게다. 그만큼 그것이 제작자도 놀랄 만한 실패로 끝났을 때 그가 느꼈을 실망은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참담했을 것이다. 그런데 실패 이후 로드리게스는 잠시 꿈꾸었던 무대 위의 화려함을 얼른 포기하고 어쩌면 남들보다 훨씬 어둡게 느껴졌을 무명의 일상 속으로 돌아간다. 좋아하던 음악을 접고 공장에서 노동을 하는 극히 평범한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공장에서 동료드로가 좀더 나은 삶을 위해 운동을 한다. 목소리를 내기 위해 반복해서 떨어지는 선거에 출마하고, 자식들을 책이 있는 삶으로 인도하는 그런 삶을 산다. 긴 시간이 흐른 뒤에 다가올 머나먼 타국에서의 기적 같은 부활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은 바로 그 삶을, 큰 기대를 안고 시작했던 노래가 어떤 인기나 성공도 주지 못할 때, 그런 행운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희소한 일인지를 안다면, 정말 이것이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기적이고 아무도 모르는 기적이다. '비밀의 기적'이다.  33-34


각자에겐 각자의 자유가 있다. 좋든 싫든 자신이 안고 살아가야 할 각자의 몸이 있고, 그 각각의 몸에 깃든 능력이 있고, 각자의 몸이 펼칠 각자의 삶이 있다. 그 삶마다 가능한 각자의 자유와 행복이 있다. 각자가 서 있는 곳마다 다를 게 분명한 자유와 행복의 길이 있다. 모든 자유와 행복은 자신의 현재, 지금의 모모가 지금의 조건을 출발점으로 한다. 그 몸과 조건을 자기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자유와 행복의 가능성은 시작된다.  39



고통과 자유 - 피할 수 없는 고토으 그 '운명적인' 만남에 대하여


고통이란 '유기체'의 부적절한 삶의 방식에 대한 기관이나 세포들의 호소와 항의의 목소리고, 질병이란 그 부적절한 삶의 방식에 잠식된 신체의 비명소리다. 이 비명이나 항의의 몫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의식으로 신체 전반의 움직임을 장악한 '유기체'가 자신의 세포나 기관에 대해 무대포의 일방적인 독재를 시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독재의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모든 억압된 것은 되돌아온다는 ㅍ로이트의 말처럼, 억압된 세포와 기관의 고통 역시 되돌아온다. 유기체의 생명과 분리된 채 오직 자기만의 생존을 전면에 내세우며 증식하는 세포들로, 그런 세포를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세상에선 '암세포'라고 명명한다.  43-44


삶이란 어떤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있는게 아니라, 과정 그 자체가 목적이기에, 삶 전체를 걸고 어떤 것을 할 수 있다 함은 삶 자체와 대면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47


고통이 삶을 심오하게 하는 것은 단지 고통에 익숙해지는 훈련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배우려 하지 않는 자에겐 위대한 스승이나 책이 아무것ㅅ도 가르쳐줄 수 없듯이, 고통을 직시하고 고통에서 배우려 하지 안흔 한, 고통은 삶의 깊이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 고통은 고통을 긍정할 수 있는 자에게만, 삶의 심오함을 가르쳐주는 스승으로 온다. 고통을 통해 삶에 물음을 던지며, 고통을 스승으로 삼아 다른 방식으로 살기 위한 길을 찾고자 할 때, 그때 비로소 고통은 지혜로운 삶의 안내자가 된다. 

삶에 던지는 그 물음과 더불어, 그때마다의 답을 들고 현재 속으로 반복하여 되돌아올 때마다, 나는 다른 나로 되돌아온다. 이전의 나와 다른 새로운 내가 탄생한다.  48


강자와 약자..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과 만나고 대면하는 방식의 차이가 그 둘을 갈라놓는다. 약자는 가지보다 강한 자들에게서도 약점이나 단점을 찾지만, 강자는 자기보다 약한 자들에게서도 강점이나 장점을 찾는다.  50


논평이나 비판을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약자들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자신의 약함을 알기에 항상 방어하려는 '본능'이 작동하기 때문이고, 또한 자신의 약함이 드러날까 두려워 날을 세워 듣기 때문이다. 반면 강자는 비판이나 비난에도 동요하지 않으며 칭찬 또한 가볍게 넘긴다.  51


세상에 오직 두 가지 길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필경 거짓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번에는 어떤 방식으로 대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53



기쁨과 자유 - 기쁨의 윤리학과 웃음의 비행술


스피노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양태(mode)'라고 부른다. 사람도 양태, 개도 양태, 컴퓨터도 양태, 물도 양태다. 세상사란 모두 양태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56


신체와 영혼에 발생하는 변화는 어떤 경우든 이 두 가지 방향뿐이다. 수많은 감정들은 강도나 양산을 달리하며 나타나는 이 기쁨과 슬픔의 다른 표현들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감정이나 정서를 크게 둘로 나눈 것이다.  57



꿈과 자유 - 꿈꾸는 영혼의 감옥


돈을 잘 벌면서도 돈 버는 것 말고는 꿈꿀 줄 모른다면 우리의 영혼은 돈에 갇혀 있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만나도 가족밖에는 꿈꿀 줄 모른다면, 우리의 영혼은 가족에 갇혀 있는 것이다.  77



매혹과 자유 - 술병 속의 연인이 내미는 매혹의 손


사물을 인간의 이 목적성 안에서 본다는 것은, 사물이 갖고 있는 힘과 생명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사물이 내미는 손을 감지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며, 사물과 만나는 어떤 사건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뜻대로 쓰다가 맘에 안 들면 주저 없이 내버리는 이들에게서 사물의 '주인'으로서 행사하는 능력이 아니라, 다가오 ㄴ이의 매력으 ㄹ알아보지 못하는 안목 없는 이의 무능력을 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89



선물과 자유 - 아, 존재 자체만으로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수 있다면...


의무가 된 선물, 답례의 의무를 통해 '교환'되는 선물은 과연 선물일까? 데리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답례가 의무가 되는 순간, 선물은 되갚아야 할 채무가 되기 때문이다.  124


  

돈과 자유 - 헝그리 정신과 궁상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려면, 돈을 적게 벌어야 하고, 그러러면 돈을 적게 써야 한다.  133


자본주의와 부에 대해 속속들이 연구했던 맑스는 이런 '경제적 부' 개념과 대비하여, '실질적인 부'란 필요노동시간(먹고사는 데 필요한 비용을 버는 데 사용되는 시간) 이외의 가처분시간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정치경제학 비판요강2>). 쉽게 말하면, 돈을 버는 데 투여되는 시간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부'라는 것이고, 그런 시간이 많은 이들이 '부유한 자'라는 것이다.  135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선 시간만 필요한 게 아니라 돈도 필요하고 그걸 할 수 있는 조건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136


부유함에 대한 이런 관념은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가처분시간을 대개 뻔한 방식으로 패턴화된 소비를 위해 사용하게 한다. 밀리는 자동차 안에서 시간을 보낼 게 뻔함에도 주말이면 자동차를 끌고 나서는 것은, 다른 돈 있는 이들처럼 여가나 레저를 즐기고 있다는 관념을 향유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잘 알려진 관광지를 돌며,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 거기 있음을 확인하고, 이미 익숙한 방식의 소비와 향유 바익을 반복하는 그 패턴화된 소비는 이제 일종의 의무가 된 것 같다. 모두가 하고 있기에 나 또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핍감과 불안함을 느끼게 되어 어떻게든 동참해야 할 것 같은, 또다른 '일'이 된 듯하다.

나는 실질적 부를 돈을 비롯한 '가처분자원'이나 맑스가 말한 가처분시간보다는 오히려 그런 것을 자신의 삶을 위해 '처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가처분능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시간이 있고 돈이 있어도, 능력이 없다면 그것들은 자유를 위한 자원이 아니라 단순한 소비와 소모의 대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139


헝그리 정신은 돈을 쓰지 않는 법이 아니라 돈을 쓰는 법이다. 돈을 잘 쓰기 위한 삶의 원칙이고 이념 내지 철학이다.  142


헝그리 정신은 무엇보다 돈에 대해 '능동적'임을 뜻한다. 돈에 대해 능동적이라 함은 돈을 자기 뜻대로 부리며 산다는 뜻이다...

궁상을 떠는 것은 '대타적으로는' 남들 앞에서 없는 티를 내는 것이고, '대자적으로는' 궁핍 앞에서 사고나 행동이 위축되거나 빈약해지는 것이다...

반면 헝그리 정신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의 삶을 위해 능동적으로 가난을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가난 앞에서 당당하다.  143


항상 검소하게 살고자 하고 엔간하면 돈 쓸 일을 안 만들지만, 써야 할 일이 있을 때 머뭇거리면 안 된다.  145



감각의 자유 - 감각의 자유, 혹은 피 냄새가 나지 않는 비상의 방법에 대하여


감각의 갑옷만큼 우리의 일상적 삶을 구속하고 자유로움을 제한하는 것도 찾기 힘들다. 감각의 구속은 종종 너무 자연스러워서 때로 우리는 구속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기 어렵다. 그 구속은 우리에게 편안함을 준다.  150


철학자 들뢰즈는 진정한 '넘어섬의 경험', '초월의 경험'이란 지각 불가능한 것과의 피할 수 없는 만남엣 온다고 말한 적이 있다(<차이와 반복>). 감각적으로 피할 수 없게 닥쳐왔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없는 어떤 것과의 만남, 그것이 지각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지금의 나의 감각이나 지각능력을 벗어나 있어서일 것이다. 그 지각될 수 없는 것을 향해, 그 알 수 없는 것의 지각을 향해 나의 감각을 밀고 나아갈 때, 나는 나의 감각능력을, 나의 경험능력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을 경험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예컨대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예술작품이나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알기 어려운 책들은, 그것을 피하고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감각능력이나 사고능력을 확장해준다. "문제는 감각의 착란을 통해서 미지의 것에 도달하는 것이다."(랭보)  155-156


자유란 비장한 결단을 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혀용된 영웅들의 문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이들 각자에게 주어진 각자의 문이다. 그런데도 그리 들어가는 이가 적은 것은, 카프카의 유명한 우화 [법 앞에서]의 농부처럼, 그게 자신을 위한 문임에도 평생 그 앞에서 들어갈 수 있을지 찔러보고 그게 정말 나를 위한 문인지 물어볼 뿐, 밀치고 들어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농부처럼 다들 그 앞에서 늙어죽기 때문이다. 

감각의 자유란 익숙하지 않은 것, 새롭고 이질적인 것들 안에 깃들어 있는 어떤 것을 감지하는 능력이다. 처음에는 불편하기에 피하고 싶은 어떤 것을 향해 귀를 여는 작은 용기면 누구나 올라가기 시작하 수 있는 평번한 계단이다. 따라서 어떤 것 앞에서 그저 편안하다면 그것은 혹시 구속의 징표는 아닌지 한번쯤 의심해야 한다.   156-157



감정과 자유 - 이 은밀한 복수의 드라마를 어떻게 정지시킬 것인가?


'능동적인 것'은 먼저 자극하느냐 나중에 반응하느냐의 문제만은 아니다.

능동적 감정은 반동적 감정의 자극에 다르게 '반응'하는 방식으로 시작하기도 한다.   166


'능동적인' 의미의 사랑이란 상대방의 반응과 상관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고, 능동적인 우정이란 친구의 행동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믿고 좋아하는 것 아닐까? 결코 쉬운인은 아니겠지만.  168



지성과 자유 - 누구에게나 주어진, 누구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선물에 대하여 


'유식한' 스승은 자신이 아는 것을 학생들에게 알려주는 데 그치지만, 무지한 스승은 학생 스스로 자신이 모르는 것을 배우게 한다.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가르친다.  173



욕망과 자유 - 언제까지 우리는 '그들의 삶'을 살 것인가?


나는 10년 이상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거의 모든 강의엣 학생들에게 이 질문을 던졌다. 첫째 질문에 '저는 이러저러한 것을 잘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답한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었다. 둘째 질문에서는 약간의 단서를 단다. 지금 밥 먹고 싶다, 요즘 연애하고 싶다, 장래에 돈을 많이 벌고 싶다 식의 대답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인데, 그걸 물으려는 게 아니라고. 무언가를 진정 하고 싶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걸고 하고 싶은 게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지, 최소한 10년이나 20년 정도는 '아, 이거 하고 살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게 있을 때 그렇다고 답해야 한다고, 이 질문은 앞의 것보다 좀더 쉬운 편인지, 지금까지 다섯 명 정도가 답을 했다. 하지만 10년 넘게 수많은 학생들 가운데 다섯 명 정도라니, 정말 놀라운 숫자 아닌가! 

이 질문을 받으면, 많은 경우 대답 이전에 자신이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없다는 사실에 놀란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이고, 자신의 능력과 욕망에 대한 질문인데, 그것조차 자신이 알고 있지 못하고 있는 셈이니까.  207


어떤 것을 해보지 않고선 내가 그걸 좋아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해본다는 것도 그렇다. 잠시 맛이나 보듯, 혹은 며칠짜리 캠프에 들어가보듯, 찔러보듯이 잠시 해보는 것으로는 그걸 정말 좋아할 수 있을지 아닌지 알기 어렵다. 처음엔 재미있어 보여도, 제대로 하기 위해선 어떤 것도 때론 단조로울 수도 있고 때론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힘겨운 터널을 필경 하나는 지나가야 한다. 즉 어떤 일을 정말 잘할 수 있을지, 좋아할 수 있을지 알기 위해선, 특별한 재능이나 인연이 있는 게 아니면, 필경 고통이나 지루함을 수반하는 어려움의 문턱과 대면하고 그것을 넘어선 깊이까지 들어가보아야 한다.  211


프란츠 카프카는 아버지로 대변되는 '그들'의 욕망에 의해, 또한 스스로 먹고살기 위해 보험회사 직원이 되어 일을 했지만, 자신이 정말 하고자 했던 것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했다. 밤, '그들'의 욕망이 잠드는 시간에, 그는 자신이 하고 싶던 것을 했다. <아동의 탄생>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역사가 필리프 아리에스는 '일요 역사가'를 자칭했다. 돈을 벌어야 했기에 대학원에 가지못하고 출판사에서 일을 해야 했지만, '일요일'로 표현된느, 노동이 중단되는 시간에 자신이 정작 하고 싶었던 역사 연구를 계속했다. 카프카도 아리에스도, '그들'이 말하는 삶을 피할 순 없었지만, 그 사이에서, 그들의 욕망 사이에 있는 빈틈에서 자신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216


나의 삶을 시작하기에 '이미 늦었어'의 시제란 없는 것이라고, 아무리 늦었다고 해도 시작하지 않고 끝낼 순 없는 거 아니냐고.  219



인정욕망과 자유 - 날 선 자존심과 '그저 웃는' 자긍심의 차이에 대하여


'나의 욕망'이라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은 사실상 엄마, 아버지, 사회 등 '타자'의 욕망이란 것이다. 인정욕망이 ㅡㄱ 타자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삼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무의식이라는 심층의 깊이에까지 침투한 타자의 욕망이다. 라캉이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224


인간의 본질로까지 소급해서 보면, 칭찬이나 직접적인 인정을 구하는 경우는 물론, 그렇지 않은 욕망까지 모두 인정욕망이 된다. 사실일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우리는 필경 남의 인정을 구하는 삶을 사는 존재가 되고 만다. 이는 그들의 삶, 그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아닐까?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행동과, 남의 시선을 의식해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하는 행동을, 둘 다 어차피 그게 그거라고 말해도 좋을까? 실은 그걸 구별하는 것이야말로 단지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결정적인 것 아닐까?  225


자긍심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긍지의 표현이다. 그것은 남이 아닌 자신의 시선, 자신의 척도에 스스로를 비추어 본다. 남의 인정을 구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확신하는 것,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에 비추어 자신이 잘했는지, 잘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기 삶에 자긍심을 가진 이라면, 가난을 감추고자 하지도 않을 것이며, 가난이 드러난다고 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자신이 선택한 것의 일부고, 자신이 긍정하려는 것이니까. 왜 그런 식으로 사느냐고 누가 물으면, 굳이 해명할 필요도 느끼지 못할 것이고, 누가 오해할까 걱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잘 알려진 김상용의 시에서처럼 "왜 사냐건 웃지요" 식으로 여유 있는 웃음 한 번이면 충분할 것이다. 오직 자기가 세운 기준만이 자기를 흔들 것이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자 그럼 다시 한번'하며 자신이 긍정할 수 있는 곳을 향해 스스로를 일으켜세우고 새로 시작하도록 촉발할 것이다.

자존심은 약한 자들이 자신의 약함을 가리기 위한 방어기제고, 자긍심은 강한 자들이 스스로 갖고 있는 힘에 대한 긍정이다. 전자는 남을 향한 것이라면, 후자는 자기를 향한 것이다.  232


긍정의 긍정.

첫번째 긍정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 잘할 수 있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라면, 두번째 긍정은 그렇게 자신이 긍정하여 선택한 삶으로인해 야기되는 어떤 결과도 긍정하는 것이다.  233


자유로운 삶, 그것은 두 번의 긍정에서 온다.  234



속도와 자유 - 속도의 강박증과 춤추는 신체의 시간


함께 산다는 것은 속도를 맞추어 사는 것이다. 걸음걸이의 속도를 맞추지 않고선 함께 걸을 수 없는 것처럼, 속도를 맞추지 않고선 함께 행동할 수 없고, 함께 대화할 수 없으며, 함께 생활할 수 없다. 물론 속도를 맞춘단느 것은 숫자로 표시되는 어떤 크기를 같은 값이 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신체와 영혼마다 각기 다른 속도가 있기에, 그것을 어느 하나에 일치시키려 한다면 '일치'는 자기 속도에 대한 억압이 된다. 속도를 맞춘다는 것은, 가령 걸음이 빠른 이가 같이 가는 느린 이의 속도에 자기 속도를 '맞추려고'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완급을 조절하는 것이며, 앞서 갔다면 기다려주는 것이다. 느린이도 평소보다는 빨리 걸으며 속도를 '맞추려고'할 것이다.  240



공부와 자유 - 공부와 학인, 혹은 학생부군손오공신위


학습은 머리로 하는 것이라면, 공부는 몸으로 하는 것이다.

몸에 붙지 않은 것, 몸으로 실철한 수 없는 것은, 절대적 진리라도 '죽은 문구(死句)'에 지나지 않는다.  254


공부는 학습보다 훨씬 어렵다. 알아도 아는 게 아니니 말이다. 항상 자신의 물음을 던지고, 자신의 감각과 생각으로 따져보고 몸에 붙여야 그 일부라도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는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하기 어렵다'는 걸 이유로 배우고 알려는 노력을 냉소해선 안 도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그대로 실행하며 사느냐고 누가 물었을 때, "그렇진 못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애쓰며 산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공부하는 학인의 삶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앴는 마음을 흔히 향상심(向上心 향하다 향, 윗 상, 마음 심)이라 한다. 그 향상심이, 옳다고 아는 것을 조금식 몸에 붙여가는 힘일 것이다.  255


공부를 몸으로 하는 것이지만, '뜻한 대로' 몸을 움직여 원하는 것을 이루는 능력이나 기술에 머문다면, 그것은 아직 공부를 시작한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몸을 움직이는 자신의 '뜻'을 주시하면서 그것을 다스리고 연마하지 못한다면, 몸에 붙은 기예는 재앙의 원천이 될 것이다...

공부는 몸의 연마, 기술의 연마에서 마음의 연마로 넘어갈 때, 밖을 향하던 시선이 자신을 향할 때 시작된다.  257


밖을 향해 있던 선이 안을 향한다 함은 대상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향해 돌리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몸은 관성적이고 습관적인 지금까지의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향하게 된다. 장인적인 기술이나 술법의 숙련은 필요한 동작을 아무생각 없이 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습관적인 움직임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익숙해진 순간, 습관적으로 행하게 한다. 습관이 되고 나면 생각 없이 행하게 하고, 관성의 선을 따라가게 한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것은 그 습관적 관성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이런 것을 '행(行)을 닦는다(修)'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부는 '수(修)-행(行)'이다. 그것은 삶에 던진 시선을 통해 길어올린 다른 삶의 가능성, 아직 살아보지 않은 삶의 가능성을 향해 가는 것이다. 공부란 그런 식으로 다른 삶을, 도래할 삶을 만들어 낸다.  259


도래할 삶을 만드는 것은 이전의 삶에 기대어 그것을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은 난감한 딜레마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습관이나 기억에 기대면서 동시에 그것에 의해 유지되는 동일성을 벗어나야 한다.  261



무아와 자유 - 나 없는 자유의 유쾌한 웃음을 위하여


차이의 철학이란 차이의 긍정을 주장하는 철학이다. 이것의 가장 단순하고 통속적인 버전은 나와 다른 차이를 인정하자는 주장이다. 자기가 옳다는 믿음이 강하면 나와 다른 차이를 인정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269


좀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차이의 긍정이란, 나와 다른 어떤 것과의 만남을 긍정하는 것이다. 나와 다른 차이를, 나를 바꿀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이다. 

나를 내려놓을 때,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척도로서의 나를, 아상(我相 나 아, 서로 상)을 내려놓을 때, 차이의 철학은 비로소 가능하게 될 것이다.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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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디지털이란 주제를 시작하면서 '감각의 유혹'으로 글을 시작한다. 
이유는 0과 1만으로 이루어진 디지털이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감각의 융합이 있지 않다면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감각의 세계는 몇가지 특지을 가진다.
1. 감각은 섞인다(fusion). 감각은 섞임 속에서 진짜 묘미를 가진다. 예로서 맛은 미각과 시각과 후각이 혼합된 것이다.
2. 감각은 움직인다(mobile). 끊임없이 움직이지 않는 감각은 결국 퇴화한다. 우리는 모두 감각의 유목민이고 감각의 보헤미안이다.
3. 감각은 느낌이다(sense). 우리는 만지며, 들으며, 맛보며, 맡으며, 보면서 느낀다. '느낌(sense)-공감(sympathy)-시너지(synergy)'의 연쇄 고리로서 진정한 감각의 파워가 생겨난다.

감각의 힘을 극대화 시키려면
1. 열어라(Let's open). 여는 만큼 느낄 수 있다.
2. 느껴라(Let's sense). 총체적으로 느낄 때, 현상을 입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3. 상상하라(Let's imagine). 상상력은 곧 생산력이다.
4. 내버려 두어라(Let it be). 오감을 억압하지 말고 자유롭게 하라.
5. 놀아라(Let's play). 뛰어 놀수 있을 때 감각도 일상에 변화를 일으키는 진원지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말로 우리의 오감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더불어 공감각적인 능력에 대해서도 설명하면서 촉각은 태아에게 가장 먼저 발달하는 감각이며 신체적 접촉을 많이 가진 아이들의 심리적, 정신적 발달이 상대적으로 뛰어남을 강조한다. 다른 감각들은 특정 부위이지만 촉각은 몸전체에 퍼져 있는 것처럼 하이테크 시대의 하이터치를 강조한다.
후각은 추억을 기억하게 하는 요소로서 매우 큰 자리를 차지한다. 사람은 누구나 추억을 가지고 있는데, 많은 부분에서 후각을 통해 추억을 떠올린다고 한다.
청각은 자궁속의 태아에서 부터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평안을 느낀다.
시각은 인체의 감각중 7할이라 할 정도의 자리르 차지하는데, 구별하는 감각이기도 한데 여기서는 존버거의 <보는법>을 인용하면서 본다는 행위는 객관화 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본다는 행위 자체가 이성적인 작업임을 강조한다. 즉, 진정으로 시각을 키우려면 때로는 눈을 감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각은 맛을 느끼듯이, 디지털 시대는 맛과 미각의 스토리가 미디어를 휘덧고 있는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공감각(synesthesia)은 그리스어의 'syn(함께)'과 'aisthanesthai(지각하다)'를 합성어 이듯이 우리는 총체적이고 동시적으로 여러가지 감각들을 동시에 느끼며 자극을 받는 다는 것이다. 
이것은 디지털시대에 모든 감각들을 아울러 자극을 할 수 있어야 함과 연결시키고 있는 듯하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자신의 감각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는데, 저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감각훈련법'을 소개한다.
1. 시각훈련 = 내면의 극장만들기
벽에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걸고 일주일간 하루 최소 5분씩 찬찬히 살피고는, 잠자리에 들때 그 그림을 세밀한 부분까지 떠올린다.
2. 청각훈련 = 고요에 귀 기울이기
가볍게 스쳐가는 바람 소리를 듣기위해 침묵과 고요가 필요하다.
3. 후각훈련 = 아로마테라피
인간은 500만 개의 후각 세포로 하루에 23,000번 이상 호흡을 하면서도 냄새에는 둔감하다. 그렇기에 아로마테라피를 즐기며 후각을 정화할 필요가 있다.
4. 미각훈련 = 맛 음미하기
천천히 먹으면서 제대로 맛을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5. 촉각훈련 = 상상하며 더듬기
뇌는 50만 개 이상의 촉각 센서와 20만 개 이상의 온도 센서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인다. 촉각을 최대화 하려면 상상하며 만져야 한다. 

이러한 감각들이 디지털 시대에 더욱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디지털은 모든것을 원형 그대로 복구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예로써 아날로그 휴대폰은 말하고 듣는 기능 뿐이었지만, 디지털 휴대폰은 느낌, 감성, 감각 즉 오감을 섞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아날로그 미디어는 '감각의 분할'에 기초하지만, 디지털 미디어는 '감각의 융합'을 토대로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느끼며 상상할 수 있어야 하며, 들지지 않고 보이지 않고 맡을 수 없던 경험할 수 없던 촉각들이 모두 '감각의 제국'앞에서는 가능하기에 감각의 제국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이제 감각의 제국의 지배자, 감성의 리더가 될 수 있는 덕목을 살펴보자.
1. 느림을 확보하라.
빌 게이츠틑 <생각의속도>에서 속도의 시대로 규정한다. 이렇게 속도를 내는 진짜 이유는 바로 '느림'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느림을 확보하지 못하는 속도는 진정한 속도가 아니다.
2. 상상력으로 승부하라.
히말라야 8000미터를 오르려면, 최소 5500~6000미터 사이에 베이스캠프를 친다. 백두산의 높이는 2744미터이다. 즉, 8000미터 높이라는 것은 한반도 안에 갇혀 사는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높이다. 
그렇듯이 우리는 남들이 상상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위치에 상상의 베이스캠프를 쳐야한다.
3. 차이를 드러내라.
아날로그 시대는 일사분란이 최고의 가치였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는 차이를 드러내지 못하면 도태되며, 인정받을 수 없다. 차이란 그저 튀는 것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가능한한 일률적인 요소를 없애고, 규격과 틀을 과감히 깨고, 차이를 용인하며 즐기는 일이 필요하다. 
차이의 근원은 가지 지문, 자기 정체성에 기인한다. 
4. 느낌을 존중하라.
이제는 돈이 되냐 안되냐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차이를 드러내는 시장이 느낌을 끌어들일 때 결정되는 것이다.
느낌을 존중하는 조직은 결국 생존하고 승리한다. 
지금은 고 감성, 하이터치가 고 부가가치를 낳는 감성 시장의 시대다 느낌을 존중하라.
5. 낯선 것과의 마주침을 즐겨라.
나와는 다른 것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나를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인간은 본래 만남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낯선 이들, 낯선 곳, 낯선 것이 내게 질문을 던지게 하고, 동시에 그 낯섦 속에서 문제의 해답을 찾는 일은 언제나 중요하다. 
6. 감각의 레퍼런스를 키워라.
내가 가진 레퍼런스의 두께는 곧 나의 두께다. 우리는 자신의 레퍼런스만큼 이 세상을 보고 느끼며 살아간다. 레퍼런스가 두춤한 사람은 세상을 다면적으로, 또 입체적으로 맛보고 느낀다.
레퍼런스를 키운다는 것은 책을 보고, 영화를 관람하고, 음악을 듣고, 공연을 보고, 여행하는 것들로 축적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올바른 선택이란 것이 필요하기도 하다.
(여기서 저자는 자신이 직접 경험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책을 보는것으로도 자신이 직접 읽고 곱씹어야 진짜가 된다고 말한다.)
7. 감각의 놀이터에서 변화와 놀자.
변화는 쫓아가야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어울려 놀아야 할 대상이다. 진짜 논다는 것은 자신의 감각에 솔직해지고, 오감을 옥죄지 않는 것이다. 자기 느낌, 감성, 감각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삶의 재미를 찾고 자기 감각에 솔직해 지자.

저자는 마지막으로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을 인용하는데, 헬렌 켈러는 말하지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녀의 표현을 보면 " 들로 산으로..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잎사귀들, 들에 핀 예쁜 꽃들과 석야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노을을 보고 싶다. 새벽에는 먼동이 트는 웅장한 광경을, ... 저녁에는 보석 같은 밤 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 그녀는 우기가 눈뜨고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그녀는 눈을 감고도 느꼈음을 알수가 있다. 즉 그녀는 '감각의 달인'이라는 것이다.



디지털... 우리는 디지털로 인해 실제 경험의 폭이 점점 줄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디지털로 인해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기도 하다.
전략적으로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 점에서 이 챕터는 디지털 시대의 감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느낌'에 대한 정확한 설명과 함께 우리가 어째서 느껴야 하는 지, 감각을 키워야 하는지에 대해 잘 강조해 주고 있다.
디지털은 단순하지만 매우 복잡하며 감각적인 것이다.
통섭의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 역시 디지털의 힘에 의해서이다.

하지만 우리는 디지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더욱 감각을 죽여 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하철에서 한번씩 둘러보면 가장많은 것이 폰으로 자기만의 것을 하고 있다. 또한 길을 가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귀에 이어폰을 꽂고 들으며 간다.
물론 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하기도 하겠지만...
그것때문에 우리는 길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기도 하고, 더욱 중요한 자신만의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없기도 하다.
혹자는 어차피 다니면서 중요한 생각을 하지 않는거 음악이라도 듣는것이 낫다고 하긴 하지만..

우리는 감각이 그 어떤 때보다 중요한 시대에 살면서도 감각을 키우지 못하고 죽이는 경험들을 많이 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는 상상의 힘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이 자기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어 줄것이다.
그 상상이 통섭을 만들었고 지금 누구나 편하게 생활하는 도구들을 만들어 내었다는 것이다.
개인이 상상의 동력을 발전시키고 생각의 샘을 계속 파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자신의 환경에서 할 수 있는것이 무엇인지 파악해 보라.
없다는 핑계는 대지말고, 찾아보면 분명 있다. 피상적으로 찾지 말고 곰곰히 찾아보라..
상상력은 아무것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 당신이 좋아하는것이 무엇이든 그것에서 부터 출발하면 되는 것이다.
정답이 있는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정답이라고 생각하는것은 '지금까지'이다. 앞으로는 새로운 정답이 속출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당신이 만들 수 있는것이다.
'과연?'이라는 생각이 되는가?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말자. 

앞선 챕터2에서 창의성을 발현시키려면 마음, 머리, 손, 발이 다 움직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들을 못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내가..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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