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 설령 천하는 얻었다 하더라도

학생들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열심히 공부하며 온갖 능력을 쌓고 있는데, 대부분 아는 건 많은데 다룰 줄 아는 것은 없는상태로 후퇴하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이 수많은 지식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렇게 무기력하고 무능력할까? 이 무기력과 무능력을 극복하기 위해 노오력하며 자기를 계발하고 있는데, 우리는 왜 퇴행하고 있을까? 왜 우리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기쁘기는 커녕 자기 자신을 고통의 나락으로 밀어 넣고 있을까? 13-14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라는 철학자는 소크라테스를 인용해, “사람이 천하와 반목하더라도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편을 택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상황은 정확히 정반대다. 14-15


이미 한국 사회는 세상을 돌보느라자기를 망각하고 망친 사람으로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자기를 망각하고 망친 채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이들이 자기 자신을 돌보는 법을 모르는 세상을 만들었다. 18


훌륭함이 무엇인지 모르고, 훌륭해지기 위해 자기를 돌보지도 않은 자가 다른 사람이 훌륭해지도록 돕는 것은 불가능하다. ...

역사 속의 현명한 사람들은, 자신이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했다. 지혜로운 자는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을 의미하지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경지에 이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공부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 공부의 본질은 지혜에 대한 사랑에 있다. ...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을 망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공부를 통해 양성해야 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모르는 게 뭔지 알기 때문에 알고자 노력하고, 알고자 하는 그 노력이 바로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20-21


철학자 존 듀이는 배움의 근본적인 특징이 의존성이라고 말하며 섣부른 독립을 경계했다. 그의 철학에 따르면, 살아간다는 게 곧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은 이미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의착하며 배우고 있다. 따라서 홀로 배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가 이미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의착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했을 뿐이다. 이게 배움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교만이다. 공부는 홀로라는 교만에 저항한다.

그렇기에 공부(工夫) 공부(共扶)가 된다. 더불어 돕는 게 공부다. 22


공부와, 공부를 통한 성장의 기쁨을 망가뜨린 현실에 저항해야 한다. 이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공부를 통한 성장의 기쁨을 다시는 누리지 못할 것이다....

이런 세상에 저항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공부가 어떤 기쁨을 주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24


나는 이 책을 통해 공부가 어떤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말하려 한다. 그것을 한계, 능수능란함, 자유, 탁월함, 멋짐, 향유라는 말로 설명할 것이다. 25




01 공부할 이유가 사라지다

01-1 신분 상승과 반학교 문화

상당수 학생은 자기가 잘하는 것에 대해 잘한다는 평가를 공적으로 받아본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자기가 잘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하고 싶은 것이 뭐냐?”라는 말에 하나를 꼽아야 한다는 강박을 갖는다. 그런데 그 가장 긍정적이고 확정적인 하나를 찾고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

이 경우에는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뭐냐?”, “‘어떻게는 살기 싫은가?”라는 질문이 좀더 합리적이다. 하고 싶은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나 할 수 없는 것은 이미 지난 경험 속에서 알게 되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것이다. .. 적어도,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알면 그것을 피해 다른 것을 시도할 수 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의 범위를 좁혀가다 보면 마침내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부정성에 기초한 합리적 사유의 방식이다. 37-38


가르치는 사람이 학교 안에 갇히면, 그는 학교에 적응하고 최적화된 학생들에게만 다가설 수 있다. 39


예측 가능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계산을 하고 미래를 기획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예측 가능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과거를 보며 성찰하고 미래를 보며 기획한다. 성찰과 기획, 이것이 근대 사회에서 사유라고 불리는 것의 핵심을 차지한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성찰하여 그 과거로부터 나에게 주어진 것과 남은 것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돌아보고, 그것을 밑천 삼아 내 삶을 설계하는 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유. ...

기획은 늘 미래를 생각하게 해 사람을 허황되게 만들 수 있기에 기획 중심의 사유는 경할 필요가 잇다. 기획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의 삶을 나쁜 의미에서 공학적으로 바라보며 현재를 억압하거나 차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점을 경계한다면 기획 역시 성찰과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교훈을 주고 배움을 촉진할 수 있다. 40


존 듀이의 경험론. 듀이는 인간의 경험은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봤다. 우리가 불에 손을 집어넣는 것은 능동적인 경험이다. 반면 불에 손을 데는 것은 수동적인 경험이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통해 불에 손을 넣으면 화상을 입는다. 그러니 다시는 불에 손을 넣지 말아야지.’라는 교훈을 얻는다. 듀이는 이때 얻는 교훈이, 손을 데는 수동적인 겪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각이란 능동적인 이 아니라 수동적인 겪음에서 촉발되기 때문이다. 바지런히 무엇인가를 하는 동안에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가 대상에 힘을 가하는 게 아니라 대상이 나에게 힘을 돌려줄 때, 그 반발력을 느끼는 것이 바로 겪음이다. 무엇인가를 한 것이 튕겨 나올 때, 이 대상에 부딪쳐 반발되는 것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 이게 왜 이러지?’하며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한다.

대상의 현존을 인식하며 그 대상의 힘에 관해 생각할 때, 우리는 골똘히생각하게 된다. 그 힘의 실체를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다른 것에 정신을 팔지 않고 오롯이 나에게 벌어진 일에 집중한다. 이 집중이 다름 아닌 생각이다. 이렇게 집중하기 위해서는 다른 일을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겨우 가능한 게 신체를 최소한으로 활성화하는 산책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통해 교훈을 얻기 위해서, 가만히 있을 줄 아는 몸이 만들어져야 한다. 생각하기 위해 멈출 줄 하는 몸, 이 몸이 공부하는 몸이다. 43-44


폴 윌리스는 <학교와 계급 재생산>에서 영국 노동계급의 자식들이 왜 역시 노동계급이 되는지 연구했다. 그 책에서 윌리스는 노동계급의 자식들은 일찌감치 교육의 이데올로기를 간파한다고 말한다. , 학교 공부는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그들이 학교 권윙 순응하게 만드는 지배의 도구다. 그 약속은 개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을지언정 전체 노동계급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학생들은 꿰둟어 본다.

학교의 체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간파한 학생들은 학교에 반항(counter)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저항은 학교를 떠나는 것과 같은 전면적인 거부는 아니다. 대신, 학교 안에 머무르며 학교의 권위에 저항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수업 시간에 깐죽거리고 개긴다거나, 짓궂은 질문을 하다거나, 수업을 교란한다거나 무단 조퇴를 하거나 땡땡이를 치는 것 등이 반학교 문화의 특징이다. 학교의 권위에 도전함으로써 사회의 약속을 승인하기를 거부한다.

일차적으로 이들이 학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 권위의 원천인 지식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53


반학교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학생들의 교복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교복은 학교의 권위에 대한 순응을 상징한다. 그렇기에 교복을 주어진 그대로 입는 것은 찐따같은 일이다. .. 교복을 얼마나 훼손하는지에 따라 자신이 학교의 권위에 얼마나 저항하는지가 드러난다. 55


반학교 문화가 가진 역설이 있다. 반학교 문화는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학생들의 문화적 현상이다. 따라서 반학교 문화에서는 학교가 학생들에게 세계의 전부다. 학교 바깥에는 학생들을 위한 공간이 없다. 56



01-2 자아 실현과 탈학교 문화

저항 담론이 형태로 공부의 새로운 목적을 제시하는 흐름이 제도교육 안팎에서 나타났다. 제도교육 안에서는 전국 교직원노동조합과 참교육 학부모회로 대표되는 교육운동이 등장했다. 바깥에서는 공동육아, 대안학교와 같은 흐름이 만들어졌다. ..

이들은 교육이 신분 상승의 도구가 아니라 삶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공부가 좀 더 자유롭고 즐거운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공부가 절대다수의 학생이 자신의 꿈을 탐색하고 발견하고 준비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59


신분 상승이 목적이던 시대에 욕망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었다. 개인의 욕망을 드러내고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윤리적/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행동이었다. .. 단적으로, 의대나 법대에 갈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부모의 바람과 달리 인기 없는 철학이나 문학을 전공하겠다고 하면 부모로부터 이런 말이 돌아왔다. “너는 네 생각만 하냐?”

따라서 그 시대에 개인이 어떤 행동을 선택하고 추구하는 기준은 욕망이 아니라 책임이었다. 62


나는 OO가 되고 싶은데라는 말로 교육의 권위와 정당성에 도전한 것은 이런 욕망의 주체로서 개인이 탄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64


국가의 일원 가족의 일원이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게 행복의 원천이라며, 사람을 개인으로 해방하자는 강력한 요구가 바로 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65


학교 자체가 무의미했지만 어른들의 강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왔다. 그러다보니 학교에 오는 것이 일이고, 학교에 오는 것으로 자기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 교사들 역시 이들을 보며 오는 것만으로도수고했다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학교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교사나 부모가 보기에 이들은 완전히 무기력했다. .. 학교를 벗어나면 이들은 살아났다. 71


학생들은 본격적으로 자기 표현의 욕망을 드러냈지만, 학교는 여전히 획일주의적 군대 문화였으며 수업은 입시 위주의 암기식 공부였다. 학교와 교실이라는 공간에 몸을 어거지로 끼워 맞추고 있으니 교실에서 아무리 잠을 자고 팬클럽 활동을 한다고 해도, 학교는 기본적으로 폭력적이고 무의미하면서 고통만 유발하는 공간이었다. 학생들의 몸은 이 공간을 견디지 못했다.

이때부터 학교는 내부로부터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제도교육은 학교 붕괴, 교실 붕괴 담론에 시달렸다. 72-73


의사소통을 통해 공유하고 있는 문제를 함께 알아내고 해결해가는 경험이 필요했지만 여전히 학교 안에서의 의사소통은 일방적인 의사 전달이었다. 서로를 준중해가며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니 학교내의 관계가 폭력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74


학교 폭력에 관한 담론도 폭증했다. 물론 이 말이 학생 간의 폭력이 이 시기에 급증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전과는 달리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74-75


폭력에 관한 한 학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도고 있었다. 욕망이 분출되는 시기에 욕망을 억누르기만 하는 곳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이 있는 학생들에게, 학교는 나중을 위해 지금 당장은 참으라는 말만 반복했다. 75


1990년대 후반부터, 저항과 해방의 언어였던 꿈을 위한 교육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 인상을 찌푸리며 꿈이 없다고 말하거나 꼭 꿈을 가져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학생이 생겼다.

꿈이 해방의 언어가 아닌 새로운 억압의 언어가 된 이유는 꿈을 묻는 교육이 간과한 질문이 있기 때문이다. 꿈을 묻는 이들은, 이 꿈이라는 게 긴 인생 중 어느 시기에 묻고 찾고 발견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인지 질문하기 않았다. 진보적인 사람도 보수적인 사람도 그것은 당연히 청소년 시기에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대학 가기 전에 꿈을 발견하고 준비까지 맟쳐야 한다는 것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을 비판했지만, 생애사적 기획의 관점에서 보면 꿈을 묻는 교육을 말한 사람들조차 이 모든 것을 열여덟살, 즉 대학에 들어가는 나이 이전에 해내야 한다고 자기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75-76


나는 내 아이가 학교 공부를 잘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라며 항변하는 부모가 있다 그러나 이 부모들 역시 다른 방면에서 자녀가 폭풍 성장하리라 기대한다. 기타를 치면 기타에서, 농사를 지으면 농사에서, ‘두각을 나타내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대가 되어서도 자기 자녀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발견하지 못했거나, 하고 싶다고 말한 그 무엇을 잘하지 못하면, 부모와 자녀의 갈등이 정점에 이른다. 자녀가 고등학교 2학년 정도 되었을때 부모가 집중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이 잘하는 것이 하나는 있어야지, 너는 도대체 잘하는 게 뭐냐?”

이런 부모에게, 자녀가 어느 정도 잘하기를 바라느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이 비슷하다. “일등 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해야지요.”라는 답이다. 어느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다시 물어보면 최소 중간 이상이다. 이 정도는 되어야 어느 정도하는 것이 된다 영역이 학교 공부에서 다른 분야로 옮겨간 것일 뿐, 명시적으로 일등을 바라는 것은 아니라 해도 사실상 중상위권 안에 들기를 바라는 일둥주의자들인 것이다.

그 결과, 탈학교 시대의 후반기로 갈수록 어린이/청소년을 해방하고자 한 언어인 은 본의 아니게 억압의 언어가 되었다. 꿈을 가지지 못하면 지질한사림이 되고, 꿈을 가지면 그 모든 준비를 열여덟 살 이전에 완수해야 하는 강압의 언어가 된 것이다. 오히려 입시에 의한 압박보다 꿈에 의한 압박이 사람을 더 궁지로 몰아넣고 비참하게 만든다. 78-79



01-3 교육 불가능과 즐거운 학교

경제 성장은 1997년의 IMF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했다. .. 이른바 생존주의의 시대가 도래했다. 82


아이도 부모도 신분 상승이 가능하지 않다는것을 분명이 알고 있었다.

신분 상승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 생존과 계급 재생산이다. 자식이 부모보다 잘살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다. 83


학벌이 아래로부터 붕괴했다. 상위권 대학 중심의 대학 서열은 여전히 강고한 듯 보였지만 그 아래의 학벌은 무의미해졌다. ..

서울데 있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취직을 통해 경제자본이 될 수 있는 교육자본이다. 그 이하의 교육자본은 자본으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다시피 했다. 교육이 생존의 도구가 되었다는 증거다. 84

생존이 지상명령이 된 사회에서 중산층은 더욱더 교육에 올인했다. ..

부모가 변호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이라 해도, 그 정도의 생활수준을 자식이 유지하려면 자식 역시 그런 전문직이어야 한다 그래서 한국의 중산층은 자식의 교육에 모든 것을 건다. 거기에 그 가족의 계급적 사활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교육 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전문직 중산층도 그 비용을 대느라 허리가 휘는 지경에 이르렀다. 85


이들은 사교육비가 이 정도 비싼 것이 교육에 대한 진입장벽을 높여 시골의 못살지만 공부를 잘하는학생들을 아예 배제하는 좋은 전략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살인적인 사교육비를 기꺼이 지출한다.

이 상태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오로지 공부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것도 대학 입시에 유리한 공부에만 투자하도록 강요한다. 이전의 부모 사대와 달리 이들은 자녀가 책을 읽는다고 마냥 좋아하지 않는다. 그 책이 대학에 들어가는 데 유리할 때만 환영한다. ...

진보적인 부모가 바라는 것은 학교 공부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은 입시와는 거리를 두지만, 그럼에도 자녀가 읽는 책이 자신이 알고 있는 발달 단계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두고 평가하고 검열한다. “아직은 네가 볼 책이 아니야.”라거나 그거보다는 이 책이 나아.”라며 자녀가 읽을 책을 부모가 고르고 정한다. 86-87


정신의학자들은 사람의 성장이란 좌절을 경험하면서 좌절을 다루는 능력이 커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능감은 어렸을 때 안정감을 갖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지만 인간의 성장과 더불어 깨진다. 자신을 만능의 존재로 바라보다 좌절을 다룰 줄 아는 존재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좌절은 사람의 성장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공부 이외의 것을 부모가 다 알아서 해주고 자기는 온전히 공부에만 집중하며 늘 성과를 내다 보니, 만능감이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되며 좌절을 다루는 역량은 커지지 않는 불상사가 벌어진 것이다. 93


<아이들의 숨겨진 삶>에서 저자는 또래집단을 통해 어린이/청소년이 추구하는 것은 인기와 우정이라고 말한다. 인기와 우정은 다른 것이다. 인기가 많다고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있다고 인기가 많은 것도 아니다. 저자는, 어린이/청소년의 세계에서 인기가 고속도로와 같은 것이라면 우정은 이면도로라고 말한다. 고속도로에서 서로 빨리 가기위해 질주하는 것처럼, 인기를 얻기 위해 서로 우열을 가르고 경쟁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우정은 경쟁적이지 않다. 사람의 삶에 신뢰와 안정감을 주는 것은 우정이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또래 집단에서 우정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인기 역시 중요하다. 인기를 얻기 위해 경쟁함으로써 정치를 배우기도 하고 타협과 협력을 이끌어내는 기술도 배운다. 1장에서 말한, 삶을 통해 배우는 과정 중 하나가 또래집단 내부의 위세 경쟁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야합이나 배제, 그리고 폭력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사람은 자기 성향을 알게 되고 그 성향에 따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기도 한다. 94


다른 학생들이 있다. 이들은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아니다 내가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에서 딱 중간이라고 불렀던 학생들이다. 과거에는 이들이야말로 학교에서 가장 고통받던 학생들이었다. ...

학교에서 이들은 존재감도 없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학교에서 사물함보다도 더 존재감이 없었다고 말한다. 교사들이 자기 이름을 외우는 경우는 초등학교 이후로 거의 없었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사고를 치는 것도 아니니 교사들이 이들을 주목할 이유가 없었다. ..10년 전부터 재미있는 변화가 나타났다. “학교에서 공부하느라 고통스럽지 않냐?”고 물어보면, 당황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학생들이 늘었다. 이렇게 답하는 학생들에 관해, 다른 학생이나 교사는 그들이 전형적으로 딱 중간에 속하는 이들이하고 설명했다. 이들은 공부는 싫지만 그래도 학교 오는 것은 재미있다고 말했다. 학교에 와서 친구들과 노는 게 재미있다고, 지루한 수업 시간에는 자면 된다고 말했다. 게다가 학교는 밥도 주는데 엄마가 해주는 밥보다 맛있다고 말하는 학생도 있었다. ...

이 학생들에게 학교가 천국이 된 이유가 있었다. 학생이 사고를 치지 않으면, 학교는 어지간한 일에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했다. .. 교장이나 관리자들도 굳이 문제 삼으려고 하지 않았다. 교사들도 학생들의 반발을 사면서까지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통제한다고 해서 통제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 '공부하는 학생'들이 서울대데 가서 학교를 빛낸다면, 이들은 자기가 다치거나 남을 다치게 하지만 않아도 학교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르치고 배우는 게 중심이 아니라 서로 가급적 덜 건드리고 덜 괴롭혀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심이 되었다. 104-106


억지로 공부를 시키려 하는 대신 모른 척하면서 내버려두다 보니 '딱 중간'에 속하는 학생들에게 학교가 '재미있는' 공간이 되었다. 먹고 자고 노는 총체적인 삶의 공간이 된 것이다. 자조적으로 말하면, 진보적인 교육계 일각에서 학교는 공부하는 곳을 넘어 삶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것이 전혀 의도하지 앟게 뒤에서 만들어진 셈이다. 107





02 자기계발의 공부에서 자기 배려의 공부로

02-4 폐기나 보완이 아니라 전환이 필요한 이유

더 이상 과거처럼 성장이 가능한 사회가 아니라면, 우리 살밍 전환되어야 한다. 공부가 그 전환을 슬기롭게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삶을 어떤 방향으로 전환해야 하며, 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탐색하고 준비할 수 있는 공부로 전환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내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삶의 전환을 위한 공부의 전환이다. 116


모든 것을 바꾸자면서 아무것도 안 바꾸는게 바로 폐기의 니리다. 116


쓸모를 지금 당장’ ‘이라는 말에 종속싴버리는 순간, 공부를 하는 사람은 시간의 노예가 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준비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며, 지금 나의 수준에서 그것을 어느 정도의 속력으로 얻을 수 있는지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 대신, 지금 당장의 평가에서 성과, 스펙이 될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 117-118


이게 공부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들이 하는 것은 일단 다 해놓고 봐야 한다는 초조함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

실제적이라는 명목으로 공부의 목적을 이처럼 단기화하는 것이 당장은 학생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여 어느 정도 공부로 유인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긴 호흡의 공부를 통해서만 만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만들지 못한다. 공부를 지속할 힘이 있는 몸 말이다. 공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견디고 즐기는 몸을 만드는 것이다. 118


우리가 교육을 통해 양성해야 하는 것은 배울줄 아는 사람, 즉 배움을 지속할 수 있는 배움의 주체다. 121


답을 스스로 찾는 것이 아니라 정답이 제시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하고 어쩔 줄 모른다. ‘지금 당장 쓸모 있는 것을 요구하는 제자에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스승은 똑같은 말을 한다. “너는 배울 준비가 안 되어 있다. 당장 돌아가거라.”

이게 한국에서 스승은 찾지 않고 자기계발서만 범람하는 가장 큰 이유다. 124


이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초조함이다, 단기간에 실제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으로 지금 배운 것이 시간나이비면 어쩌나 하는 초조함에 사로잡혀 있다. 좀처럼 여유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이 초조함이야말로 지금 사람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초조해서 긴 호흡으로 자기 자신과 사회를 돌아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구조적인 문제에 관한 고민과 토론을 관념적인 탁상공론으로 여기게 한다. 여기서는 해법을 찾을 수가 없다. 125


지금의 교육이 학생들이 자기 미래를 발견하고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도울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게 이 실제적 도움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여기에서 역설이 벌러진다. 실제적 도움을 강조하며 현재의 교육과정이나 교육 내용의 전면적 폐기 혹은 대대적 보완을 주장하는 입장은,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삶의 전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현재를 강화하는 공부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현재의 미완의 무엇이지 극복해야 할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것을 바꾸자고 하지만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결과를 낳는다. 126


교육의 관점에서 노오력이라는 말을 들여다보자. ‘노오력이라는 말은 청년들이 사용하는 말이다. 청년들이 취직하지 못하거나 성공하지 못했을 때 그건 다 너의 잘못이라는 이 사회의 비난을 자조적으로 비판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130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물으면 네가 성과를 내지 못한 게 증거라고 말한다. 따라서 성과를 내야만 내가 노력을 다한 것이 된다. .. ‘성과주의. 성과주의 사회에서는 노력해서 안 되면 더 노력해야 나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노력의 사이에 자만 늘리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노오력이다. ...

황당하겠지만, 를 무한대로 늘리면서 실패를 그 사람의문제로 돌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교육의 이상이다. ..

교육이 만든 말이 무한한 잠재력이다. 131


사람을 포기하지 않게 하려는 이 교육적 배려의 마링 성과주의와 결합하면 지옥을 만들어 낸다. 사람이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고, 노력을 하지 낞은 것은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 서오과를 못 내고 그만둔다는 것은 바로 가장 포기해서는 안 되는 자기 자신을 포기한 것이므로, 이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쓰레기가 되어 버린다. 132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교육적 언어였던 무한한 잠재력, 이처럼 사람의 성장을 도모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파괴하는 말로 돌변해 버렸다. 133


관건은 이 해도 안 된다는 것에 기초해 우리가 어떤 성장을 꿈꿀 수 있고 어떤 사회를 설계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나는, 지금 교육의 폐기나 보완이 아니라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발견하는 진로 교육보다 내가 어허게 살아야 내 삶을 돌볼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발견할 수 있는 전환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이것을 자아실현에서 자기에 대한 배려/돌봄으로의 전환이라고 제안한다. 134



02-5 자신의 한계를 안다는 것

자기 배려를 위한 공부이 중요한 두 측면. 첫 번째는 당연하게도 자기의 한계를 아는 것이다. .. 자기에 관한 앎이 있어야 자기를 보호하고 배려할 수 있다. 자기에 관한 앎 없이는 자기에 대한 배려도 불가능하다.

두 번째로 .. ‘정신이다. 이것을 자기에 대한 집중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에 대한 망각이야말로 자기 배려의 적이다. 137


자기 재능의 한계가 어디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조금 허탈하겠지만, 잡은 충분히 햅았을 때. 내 한계까지 왔다는 것은 스스로 느낄 때까지 해보았을 경우에만 알 수 있다. 여기에 충분히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그게 충분한지 아닌지를 자기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만이 그것이 충분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157


스승의 역할은 제자의 재능을 알아보고 제자가 재능의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동행하며 그것을 깨우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제자가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야말로 스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158


현명한 이들은 하고 싶은 것을 이루기 위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삶을 노예의 삶이라고 불렀다. ‘하고 싶은것에 끌려다니는 삶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대의 현자들은 욕망의 주인이 되라고 가르쳤다. 욕망의 주인이 되는 길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언제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언제든 그것을 그만 둘 수 있는 것이다. 주인의 힘은 이루게 하는 힘이 아니라 그만 둘 수 있는 힘이다. 161


최고가 아니라 해도 각자의 재능 역시 이런 선물처럼 주어진 측면이 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각자 하늘로부터 얼마나 풍성한 선물을 받았는지 비교하는 게 아니다. 관건은 그렇게 선물로 받은 재능을 각자 얼마나 잘 쓰고 있는가다. 이렇되면 주어진 것 자체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가, 그 선용의 정도가 탁월함의 기준이 되니다. 이것이 인간이 추구할 수 있고 추구해야 하는 탁월함이다. 162



02-6 자기를 배려하는 법

소크라테스는 자기에 관한 앎자기에 대한 배려를 강보하면서 자기/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자기/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나에게 속한 것이며, 마지막이 자기/나에게 속한 것에 손한 것이다. 이를테면 내 몸은 나에게 속한 것이다. 그리고 구두는 낭에게 속한 것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나에게 속한 것이지 자체가 아니다.

그렇기에 자기 배려를 위해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나에 속한 것을 분별하는 것이다. 그럼 배려의 대상인 는 무엇인가? 이것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대신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이 있다. 바로 나에게 속한 것이다. .. 나에게 속한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첫째, 무엇보다 우선 재산, 즉 소유가 잇다. .. 내가 나를 대하는 법은 배려. 반면, 나이게 속한 것이나 내가 가진 것은 배려가 아니라 활용의 대상이다. .. ‘는 나의 목적이지만 나에게 속한 것은 나를 돌본다는 목적으 위해 활용하는 수단이다. .. 소유에 넋이 나가는 순간 내가 노예가 된다.

둘째, 육체가 있다. .. 육체를 잘 돌보는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 보다는 역시 육체로는 환원되지 않는 를 위한 것이다. 육체 자체가 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육체 역시 배려의 대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셋째, 지위나 정체성 같은 것이 있다... 지위나 정체성 같은 것은 사회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거이다. 이것 역시 나 자체일 수는 없다. 이런 것들은 나의 속성에 불과하다. ..

이런 것들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면 자신을 도구화하게 된다. ..

마지막으로, 욕망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가장 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나의 욕망이다. .

나를 곧 나의 욕망이라고 생각하면서 욕망을 실현하려는 삶은 욕망의 노예가 된 삶에 불과하다. .. 모두가 바라는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며 사는 삶은 역설적이게도 자기가 아니라 자기 욕망이 주체인 삶이다. .. 이런 점에서 욕망은 배려가 아니라 다스림의 대상이다. 165-169


나에게 속한 것의 경계에 있는 것이 있다. 이름이다. ...

이름은 활용이 아니라 돌보아야 할 대상이다. .. 이름은 그 사람의 개체성과 그 개체성의 존엄을 보증한다. 나아가 이름에는 자기 자신의 뿌리와 터전의 존엄과 명예가 걸려 있다. 이런 점에서 이름이야말로 그 이름이 가리키는 사람의 사회적 생명 전체라고 할 수 있다. 170-171


우리는 나 자신에 관해 생각하면 할수록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 이는 자기에 관해 생각해본 살맘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게 무엇인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고 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숭산 큰스님은 오직 모를 뿐이라고 말했다. .. 따라서 자기에 관해 안다는 착각이 자기를 망친다. 자기 아닌 것을 자기라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 반대로, 내가 나에 관해 모른다는 자각이 자기를 배려하게 한다. 여기서 자기 배려의 중요한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 ‘모른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177-178


자기 배려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존재로 대하는 것이다. 모르는 존재, 알 수 없는 존재, 즉 철학에서 하는 타자다. 사르트르는 타자의 가장 큰 특징이 도대체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다. 그의 말을 듣는 것을 제외하면 내가 그를 대할 다른 방법이 없다. .. 모를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이기, 자기 말을 듣기, 이것이 자기 배려의 출발인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원래 이 말은 너 자신이 모르는 게 무엇인지를 알라는 말이었다. 그 모르는 것 중의 모르는 게 자기 자신이라면, 이 말은 이렇게 된다. 너 자신이 스스로에 관해 모른다는 것을 알라. ..

모르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아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오직 그 아는 것을 활용하고 다룰 수 있다. .. ‘모름은 무지가 아니라 지혜의 원천이다. 자신이 모르는 게 뭔지 알고 다룰 수 있는 것의 한계가 아디인지 아는 자가 지혜로운 자다. 178-179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모르며 모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낯선 자기와의 만남은 기쁜 일이 된다. 내가 나에 관해 알고 있다는 착각과 미망에서 깨어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180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은 자기를 모른다는 사실, 모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모르는 자기를 만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기를 안다는 것을 배움의 과정의 문제로 전환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배움의 과정에서 자기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아니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자기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 그 중에서도 자기가 언제 세상을 배움의 자세로 대하는지에 관한 앎이다.

이를 이해하는 데는 존 듀이가 말한 성장과 배움에 관한 이론이 유효하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살아 있는 한 배운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사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이미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대처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적응과 변용을 위해 현재의 상태와 변화를 읽어내고 적절한 대처법을 찾아내는 능력, 이것이 배움의 능력이다. 이런 점에서 사람, 아니 더 넓게 말해 생명체라면 모두 배움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배우는 능력 자체는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선물(gifted)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배우는 방식은 다른 사람이 배우는 방식과 다르다. 각자가 살아오는 과정에서 사물을 관찰하고 파악하고 그 원리를 이해한 후 그것에 맞추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배우는 방법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사람이 자기를 안다는 것은 자기가 배우는 방법이 무엇인지 안다는 뜻이다. 내가 어떻게 배우는지 모른다면 모르는 것을 중심에 놓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기가 어떻게 배우는지 아는 사람만이 배움을 중심에 놓는 삶으로 전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배우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배우는 법을 알기 위해서는,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것처럼, 무엇보다 자기에게 집중해야 한다. 대상의 아름다움, 혹은 변화를 주고 싶은 대상에 넋이 나가버리면 자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배움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배움의 과정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지식과 기술에 집중해 그것을 습득하는 속도에만 신경 쓰면, 그 속도가 기대보다 느릴 때 곧 흥미를 잃고 짜증을 내게 된다.

그게 아니다. 목적의식적인 배움의 과정에서는 자기가 어떻게 배우는지를 깨닫기가 좋다. 배움의 과정에서 자기에 집중한다는 것은 내 배움의 기술을 관찰하고 파악한다는 뜻이다. 어떤 것을 배우는 과정에서 지금 배우고 있는 그 지식과 기술의 기량만 느는 것이 아니다. 배움의 기술 자체를 동원하고 배우면서, 배움의 기량이 향상된다. 그렇기 때문에 배움의 과정에서는 내 배움의 기술을 관찰하고 파악하기가 좋다. , 배움의 과정에서 자기에 집중한다는 것은, 자신이 배움에서 어떤 기술과 방식을 사용하는지 관찰하고 파악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탁월한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어려서부터 사물과 사태를 관찰하는 힘을 키우는 게 매우 중요한 이유다. 전통 사회는 어린이들이 자신의 배우는 방법과 힘을 알게 하기 위해 다양한 놀이를 만들어 권장했다. 예를 들어, 남자 어린이들이 주로 하던 전쟁놀이는 지형지물과 변화를 관찰하고 파악하고 이용하는 기예를 늘리는 데 탁월한 놀이였다. 어떤 놀이는 균형감각을 키워주고, 어떤 놀이는 협력의 기예를 키워줄 수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놀이를 해보는 과정에서, 어린이들은 자기가 어떤 놀이를 특히 선호하고 선호하지 않는지 구분하게 된다. 이 선호는 놀이 자체의 재미에서 기인하기도 했지만, 어린이가 자기 배움의 태도를 파악하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반면, 어린이가 좋아하지 않는 놀이는 적응하고 파악하고 기예를 늘리는 데 서투른 놀이였다. 좋아하는 놀이는 재미를 넘어서 자신이 가진 배움의 힘과 방법을 잘 발휘할 수 있는 놀이였다. 이렇듯 놀이의 역할은 자기가 배우는 태도와 힘을 파악하고, 그 힘과 태도를 선용하게 하는 것이었다. 놀이는 재미뿐만 아니라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182-185


스스의 역할이 중요하고 결정적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스스로를 자 안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의외로 내가 나를 잘 알기는 힘들다. 내 얼굴을 내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스승은 제자의 기량과 그 한계뿐만 아니라 제자가 배워나가는 태도를 관찰하고 파악하는 게 전문인 사람이다. 185


세상을 대하고 집중하고 그 집중을 지속시키는 나의 태도를 알아가는 것이 바로 자신에 관한 앎이다. 자신을 알아간다는 것은 곧 자기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알아간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듀이가 공부의 과정을 통해 사람은 학습하는 방법을 학습한다고 말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승산 큰 스님의 화두인 오직 모를 뿐’ ... 스님의 화두를 디딤돌 삼아 궁리하다 발견한 내 배움의 힘이자 방법, 태도는 오직 물을 뿐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묻는 사람이었다. 질문이 주어지면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 질문이 타당한 질문인지, 의미 있는 질문인지, 질문에 관해 질문을 할 정도로 끊임없이 묻는 것이 내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였다. 185-186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은 자기의 성장을 돌보고 지속적으로 도모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래야 나의 삶이 서사적인 것이 되고, 그런 서사적인 삶이 되어야 그걸 자기 삶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삶에 이미 자기가 없는데 자기에 대한 배려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

자기를 안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과 세상을 대하는 자기 태도를 안다는 말이 된다. 그래야 자신의 성장을 목적의식적으로 도모하며 성장을 방해하는 것을 회피하여 무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189


자기를 배려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타자에게 넋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를 배려할 수 있다. 190


부모들에게, 자식이 공부를 잘하지 못해서괴롭지 않냐고 묻는다. 그러면 다들 괴롭다고 대답한다. 그럼 그 괴로운 마음을 잘 다스리고 있는가를 물어본다. 그 무엇보다 어렵다고 대답한다. .. 그래서 다시 아니, 자기 마음도 못 다스리는 분이 어떻게 남의 마음을 바꾸겠다고 말씀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말문이 막힌다. 190-191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나쳐 자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식에게 넋을 놓는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자기도 배려하지 못하고 자식과의 관계도 망친다. 자기 자신이 성장해야 하는 문제를 자식의 공부 문제로 돌려버린다. 191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타자라고 하며, 타자의 ‘3대 마왕이 있다. 그 첫째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둘째가 자기가 가르치는 사람이며, 셋째가 이 둘을 합쳐놓은 존재인 자식이다. 이들을 만날 때 깨닫게 된다.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걸 말이다. .. 완전히 깨닫게 된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말이다. .

이 순간 사람은 타자의 끝판왕을 만난다. 3대 마왕의 뒤편에 숨어 있던 끝판왕 말이다. 그게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야말로 내 마음대로 안 되는 타자의 끝판왕이다. 내가 나를 다스리는 기예의 한계에 부딪치고 나서야 내가 내 마음 다스리는 법을 모른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은 자명하다. 내 마음을 다스리는 법이다. 나에게 집중할 때 이 문제를 다룸의 기예, 즉 자식이 아닌 내 배움의 문제로 전환할 수 있다.

이것이 관건이다. 우리는 문제를 나 자신의 배움의 문제로 전환할 수 있는가. 이렇게 전환해야만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재능의 문제를 기예의 문제로 전환하고, 다른 사람의 문제를 내 기예의 문제로 전환할 때,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문제를 배움의 문제로 전환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으며 해결할 수도 없다. 이것이 자기 배려의 초점이다. 전환의 배움은 문제를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192-193




03 공부, 재미에서 기쁨으로

03-7 공부, 성장의 기쁨

해치우는 것으로서의 공부에는 해보는 것만 넘쳐난다. 더구나 이 해치우는 것에는 해보고 난 뒤 결과가 돌아와 나에게 교훔을 주는, 그런 겪음이 없다. ..

이런 공부에는 연속성이 없다. 앞에 한 공부와 뒤에 하는 공부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과 연속성이 없다. 197


삶에서 배움은 필연적인 것(necessity)이다. 듀이가 쓴 <민주주의와 교육>의 옮긴이인 이홍우가 주석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necessity는 필요성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필연성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필요성으로 번역한다면, 이 말은 공부는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인간은 살아 갈 수 없다.한편 필연성으로 번역한다면, 이것은 사람은 살아 있는 한 의식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공부가 함께한다는 뜻이 된다. 전자는 살아가기 위해 목적의식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이 되고, 후자는 살아가는 한 자연발생적으로 사람은 배우고 있다는 말이 된다. ..

성장의 핵심은 연속성이다. 경험의 갱신을 통해 삶이 연속적으로 진행될 때, 우리는 그것을 성장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삶에서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바로 삶의 연속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삶의 연속성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목적의식적인 과정이 바로 좁은 의미에서의 교육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교육이란 자기 경험을 연속적으로 바라볼 줄 알고 만들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성장의 기쁨은 연속성에 있다. 198-199


생각의 핵심은 연관 짓는 것에 있다. 지금 일어나는/하는 일과 뒤에 벌어질 일을 관계 지어 생각하는 것이 지적 활동이다. ...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것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 즉 연관성을 알게 될 때 무질서해 보이던 것의 질서가 보인다. 분별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질서가보이면 내가 그 사이 어디에 개입해야 하는지 보여서 통재할 수 있다. 개입을 통해 바꿀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힘이 지적 쾌감을 준다. ..

지적 쾌감은, 내가 알지 못했다면 연관 짓지 못할 것을 연관 지음으로써,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기량이 늘어나는 데서 온다. 따라서 지적인 흥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결과에 관한 관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한 사람만이 왜 그런 결과가 나오는지에 지적인 흥미를 가질 수 있다. 결과에 관심이 있어야 결과를 예상하거나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현재의 조건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또한 가능한 대안들 사이에서 적절한 수단을 고른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머릿속에서 계속 시뮬레이션을 하고 궁리를 한다. 이것이 지적인 활동이다.

결국 지적 활동이란 원인과 결과, 자기 행동과 영향의 연속성을 가늠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적 활동은 연속성에서 중간 과정을 발견한다. 사람이 지식에 흥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작 단계의 조건과 예상되는 결과 사이에 무엇인가있다는 것을 알 때다. 그 무엇을 알면 시작과 결과를 연결할 수 있다. ‘현재의 힘도달해야 할 목적사이를 연결하는 수단을 듀이는 중간 조건이라고 말한다. 듀이는 사람들이 중간 조건에 흥미를 가지는 이유는 바로 현재 진행 중인 활동이 장차 예견되는 소망의 결과에 도달하는가의 여부가 그것에 달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중간 조건을 알아야 과정을 통제하면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지적 활동이란 중간 조건을 계속해서 알아가는 과정이다. 201-202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을 그저 경험의 수준으로 내버려두지 낞고 그 이치와 원리를 파악하게 되는 것이 바로 지적 과정인 것이다. 203


초심자일수록 배움의 과정에서 그 배움의 결과가 자기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 예상되는 결과에 자신이 영향력을 가지고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204


배우는 이의 기량으로 시작과 결과를 파악할 수 있게 하려면, 현재 배우는 이의 삶/수준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것을 시작점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중간 조건을 발견하는 것 또한 배우는 자의 기량에 맞춰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가르치기 위해서는 배우는 자의 한계와 기량을 파악하고 아는 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205


학교와 가튼 교육현장이 배우는 곳이고 배움을 장려하는 곳이라면, 모르는 자의 용기를 환대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배우는 사람이 자신의 무능과 무지를 드러내는 것을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칭찬하는 곳이 배움의 공간이다. 따라서 배우는 사람이 모른다고 말할 때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보다 환대하며 기뻐해야 한다. 그 모르는 자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자신이 가르치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7


미래가 예측되지 않거나, 미래를 안다 해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결코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214


진지하다는 건 재미를 파괴하는 짓이고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되는 세상이다 바로 이런 현상이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는 것을 방해한다. 생각이 깊어지면 설명충’, ‘진지충’, 나아가 씹선비라는 욕망 먹는다. 굳이 말을 하려면 세 줄 요약이 가능한 사이다같은 말만 해야 한다. 길게 이야기해서는 절대 안 되고 복잡하게 말해서도 안 된다. 이 때문에 더더욱 사람들이 서사적인 삶을 추구하기가 힘들어진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외면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가 횡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따라서 이 시대에 성장의 기쁨을 느끼는 것은 괴로움을 감수할때만 가능하다. 자칫하면 고립되고 외로워질 수 있다. .. 공연히 어려운 이야기를 해서 좋은 자리를 망친다는 핀잔을 듣기 쉽다. ‘프로 불편러라는 욕을 먹을 수도 있다. 베스트셀러가 된 제목처럼, 이 시대에 성장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는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215-216


나는 앞으로 두 가지 기쁨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하나는 자유와 창조의 기쁨이고, 다른 하나는 향유의 기쁨이다. 사람은 배움으로써 이 두 가지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세상의 법칙을 알고 목적에 맞게 잘 사용하는 선용을 넘어, 그것을 변용함으로써 사람은 자유로워지고 창조의 기쁨을 누린다. 창조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능수능란한 기예를 배우고 익히며 연마하는 과정이 바로 공부다. 한편, 인간은 창조하지는 못할지라도 여전히 공부를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누릴 수 있다. 창조하고 향유하는 삶, 이것이 멋진 삶이며, 멋지게 사는 것은 삶의 목표이자. 공부의 쓸모다.

창조와 향유, 이 모두에서 인간이 누리는 기쁨이 바로 성장의 기쁨이다. 216-217



03-8 공부, 자유와 창조의 기쁨

기예란 나에게 주어진 것을 내가 얼마나 잘 다루는가의 문제다. 기예에서 탁월함은 다룸의 정도가 된다. 다룸에서 관건은 5분의 숨과 1분의 숨을 비교하는 게 아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인 1분의 숨을 얼마나 잘 다루고 그 숨으로 무엇을 하는지다. ...

그러므로 다룸은 능수능란함을 지향한다. 내게 주어진 것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을 때 기적이 일어난다. ... 능수능란함이 주어진 것을 변용할 수 있게 하고, 그 변용을 통해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219


새로운 것의 탄생을 보는 것만큼 기뿐 일은 없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왕자든 거지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220


사람이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

이 말이 가진 의미는 지대하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직면한 근원적인 한계를 지적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존재가 아니므로, 이미 잇는 것, 주어진 것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 인간이 무엇인가를 선용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앎은 활용의 전제다. 221


우리는 주어진 것을 세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첫째 나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다. 육체적 한계나 재능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 사회적으로 주어진 것이 있다. 신분이나 재산 같은 것이다. 이것은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정의를 요구해야 할 문제다. 개인의 역량 문제가 아니다. 셋째, 인간을. 넘어서 존재 전체에 공통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자연법칙이 있다. 자연법칙은 모든 존재에게 근원적인 한계로 주어진다. 221-222


앎은 활용의 출발점이다. 안다는 것은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주어지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출발점이 될 수 없다. ...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의 경계를 아는 것, 그게 바로 자기 한계를 아는 것이다. 한계를 아는 사람만이 무리수를 두지 않고 자기를 배려할 수 있다. 223-224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난 다음에 구분해야 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주어질 수 있는 것과 주어질 수 없는 것의 구분이다. 만일 우리가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만을 구분한다면, 사람의 삶에 성장이란 있을 수 없다. ..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결코 주어질 수 없는 것과 어떤 경우에는 주어질 수 있는 것으로 구분된다. 전자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만 후자를 포기하는 것 역시 어리석다. 224


노력도 안 해보고 어떻게 아느냐, 지레 포기한 것 아니냐고 말할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중요한 것이 충분히 시도해보는 것이다. 내가 충분히, 원 없이 시도해보고 난 다음에는 알 수 있다. ...

충분히 해보면서 자신에게 재능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재능을 발견하기도 한다. 225


중요한 것은 재능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라는 점. 226


재능과 같이 개인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것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 주어진 것을 활용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사회가 있다. 이런 경우 사회적으로 주어진 것사이의 불평등 문제를 반드시 제기해야 한다. 227


사회적으로 주어진 것에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바로 활용의 불평등이며 이 불평등을 시정하는 것이다. 228


좋은 사회란 주어질 수 있는데 주어지지 않은 것을 평등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보정하는 사회다. 좋은 사회란, 사회만 훌륭하고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별 볼일 없는 사회가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 하나하나가 훌륭해지는 것을 공공선으로 삼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228


앎은 활용의 전제다. 문제는, 안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곧바로 활용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공부를 해본 사람은 안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걸 해보려고 하면 생각대로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 이때 만나는 것이 서투른 자기.

이 서투른 자기는, 알기는 하되 활용할 줄은 모르는 상태다. ... 이때 그가 처하는 상태가 바로 부자유.. 자신이 전혀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것이다.

능수능란하게 도구를 다루고 싶다는 갈망이다. 이게 바로 자유다... 자유란 멋대로 하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란 내가 다루는 도구들의 결을 알고 흐름을 타면서 내몸의 일부처럼 이질감 없이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것이다. 229-230


미국의 인류학자인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은 이것을 생각하는 손이라고 불렀다. .. 배움은 머리-앎을 넘어 손-다룸으로 옮겨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배움이 사변적인 것이라면 익힘은 그 배움을 육화, 즉 물질로 만드는 과정이다. 육화되지 않는 배움은 쓸 수 없는, 그렇기에 쓸모없는 배움이다. 그렇기에 배움은 앎의 문제에서 다룸의 문제로 전환된다. 230


도구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생각하는 손은 자유로운 손이다. 그 자유가 단지 자유자재와 동의어로서 능수능란함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자유가 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에 갇힌 존재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한계다. 자신의 육체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도구를 통해 자신의 육체라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다. 그 도구를 자유자재로 다룸으로써 도구와 사람이 하나가 될 때, 그 사람은 인간의 근원적. 한게를 넘어서는 존재가 된다. 인간의 근원적 한계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231


능수능란함의 방법론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손을 다루는 기본에 관해서 말할 수는 있지만 손의 힘을 조절하는 것은 자기가 해보면서 깨닫는 수밖에 업사다. 다룸은 익힘의 문제다. 익힘을 통해 알아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익혀가는 경험 없이 다룰 줄 알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어떻게라는 질문은 다룰 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던지는 질문이다...

익힘의 과정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스승이다. 스승이라고 방법에 관해 가르쳐줄 수는 없지만 제자가 익혀가는 과정을 관찰하면서 그가 주의해야 할 것과 좀 더 연마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 보지 않고서는 가르쳐줄 수가 없는 것이 익힘의 과정이다. 232-233


자연법칙에 관한 ... 법칙은 지키되 그 법칙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유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내가 법칙을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활용할 수 있는지가 자유의 척도가 된다. 234


생각하는 손이 매혹적이며 아름다운 이유는 이 자유가 새로운 양식을 만들기 때문이다.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자유란 뻐칙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활용하여 새로운 양식을 만드는 것이라고했다. 법칙이 주어진 것이라면, 자유는 주어진 것의 바깥으로 탈출하는 게 아니라 그 주어진 것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여 걸림거침없이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양식이 된다. 이런 활용을 변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기예(技藝)라고 부른다. 이렇게 자유로운 손을 만나 매혹되었을 때, 사람들은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 욕망은 성공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예술적 완성에 대한 욕망이다. 이런 매혹 없이 사람이 공부의 길로 들어서기란 불가능하다. 236-237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유를 성공으로 전도시킨 사회에서 살아간다. 한계를 인정하고 자기를 배려하며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꼭 묻는다. 한계를 인정함년 자기 꿈과 이상을 포기해야 하느냐고 말이다. 꿈이 뭐냐고 물으면 요리사와 같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을 든다. 그러면 동네 중국집 요리사가 되는 것도 요리사이니 꿈을 이루는 것 아니겠냐고 말하면, 그건 아니라고 한다. 동네 중국집 요리사도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는 자장면을 만드는데 그건 왜 아니냐고 물으면, 성공한 삶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답한다. 7성급 호텔 요리사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해야 한다. 꿈과 이상이라고 말하지만 그 실체는 사실 성공이다. 자유에 대한 매혹이 아니라 성공에 대한 매혹일 때 그건 자기를 파괴하는 지름길이 된다. 237-238


매혹은 또한 자유로워지는 과정을 견디게 한다. 자유로워지려면 능수능란해져야 하고, 능수능란해지려면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익힘의 과정은 고단하고 지루하다.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고, 그 반복에서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기쁨을 누리기 힘들다. 창조를 기대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변용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생각하는 손의 능수능란함에 대한 매혹 없이는 이런 익힘의 과정을 견딜 수 없다. 배움은 미적 매혹에서 시작하고, 이 매혹이 배움을 견디게 한다. ...

배움에 이어 익힘이 있지 않으면 사람은 절대 자유러워지지 않는다. 238


창조는 앎의 문제에서 다룸의 문제로 공부의 초점을 이동시킨다.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룰 수 있을 때그것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을 때 새로운 양식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다룸이 바로 그 사람의 탁월함의 척도가 된다. 239


한국의 교육이 가진 문제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배우는 것은 많은 데 다룰 수 있는 것이 없다. 배우기만 할 뿐 익히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 정답만 외우는 공부를 하다 보니 익힘의 과정이 없어지고, 익히는 게 없다 보니 할 줄 아는 게 없는 무능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참혹한 것은, 이렇게 익힘이 생략된 채 배우는 것만 많은 상태가 10년 넘게 이어진 결과, 익힘의 과정을 견디지 못하는 학생이 속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240-241


사실 익힘의 과정은 지루하다. .. 익히려고 할 때마다 좌절하게 된다. ..

익힘의 시작 단계에서 이 지루함을 견디게 하는 것은 매혹이다. 그러나 매혹의 힘이 끝까지 가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익힘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익히는 과정에서 또 한 번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은 익힘의 결과에서 과정으로의 전환이다. .. 익힘의 과정에서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어떤 기량이 생기는지 알기 위해 다시 한번 자기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익힐 때, 많은 경우 우리는 익힘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고 익힘의 결과에 집중한다. 그러다 보니 익힘의 과정에서 배우고 익히게 되는 차원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넘어간다. 익힘 자체의 기예가 향상되는 것 말이다. 243


익힘의 과정에 있는 이는 익힘의 결과에 넋을 놓지 말고 익힘의 과정에 있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 .. 익힘의 기예에서 가장 중요한 견디는 힘이 생긴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루함을 견디는 힘이다. ..

물론 여기서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우리는 이 견디는 과정에서 다시 자기 한계를 생각해야 한다... 견딜 수 없는 지점, 견뎌서는 안 디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는 견딜 수 없다는것을 명확히 해야 한다. 무작정 견디는 것은 우매한 짓이다. ..

무작정 견디라고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고 착취다... 많은 회사나 기관이 배우고 익히게 한다는 핑계로 사람이 견딜 수 없는 모욕과 무시, 그리고 착취를 일삼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반드시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기에 대한 배려다. 244-245


배움을 통해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배우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다. 배우는 습관이 생긴 사람만이 계속 배움을 이어나갈 수 있다. 245



03-9 공부, 지적 쾌감과 향유의 기쁨

멋진 작품을 만났을 때 우리는 경탄한다. 그것이 예술 작품이든 자연 작품이든 말이다. .. 그거 아름답다, 멋지다고 느끼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작품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작품 너머에 있는 기예를 고민하게 된다. 사람의 기예가 아니더라도 도대체 무엇이, 어떤 과정으로 이런 멋진 것을 만들어냈는지 궁금하고 알고 싶다. .. 이 기예에 눈이 가야 사람은 순간적인 경탄을 넘어 기예에 관한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이처럼 경탄은 기예에 호기심을 가지게 하는 출발점이다... 공부를 시작하게 하는 첫걸음은 바로 경탄이다. 249


먼저 경탄에 관해 알 필요가 있다. 250


너무 아름다워 위협감을 느끼게 하는 이 감정은 유쾌하지 않다. 미학에서 이야기하는 바로는 숭고미에 가깝다. 칸트는 인간의 미적 체험을 숭고미와 아름다움으로 나눈다. 아름다움은 사람이 질서정연한 것을 보았을 때 나오는 쾌()의 감정이다. 쾌락의 캐다. 즐거운 감정이다. 반면 단적으로 큰 것을 만났을 때 느끼는 것이 경악이다. 내가 이전에 경험하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만나면 사람은 경악하게 된다. 이 경악을 쾌가 아니라 불쾌의 감정이다....

그 괴로움은 그저 괴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한 것을 만났다는 흥분에 넘치는 괴로움이었다. 칸트가 말하는 숭고미라고 볼 수 있다.

경탄 중에서도 이런 경악이 가장 강렬한 체험이며, 사람을 공부의 길로 이끄는 경탄이다. 공부라는 게 뭔가? 왜 그런지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대상을 보고 경악하는 것은 그걸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지식이나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 경악은 내가 모르는 것, 절대적으로 모르는 것과 만나는 경험이다. 251-252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이어서 놀랍긴 하지만 위협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에 관련되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

경악이나 경탄의 실체는 바로 경이(驚異).(이 책에서 나는 경탄과 경악, 그리고 경이를 구분해서 사용하지만, 이 셋의 공통점은 말을 잊을 정도로 놀라는 것이다) 전적으로 이질적인 경험이다. 그것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알지 못하던 존재 타자이다. 254


이름이 있다는 것은 분별의 결과다.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각각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 255


지식의 가장 큰 힘이 바로 분별력이다. 경이롭지만 아직 분별하지 못하던 것을 분별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지식이 힘이다. 공부는 이 힘을 키우는 과정이다. 255


부는 분별의 힘을 키워가는 과정이다. 분별의 힘이 있을 때 비로소, 대상에 압도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불쾌에서 쾌로 나아갈 수 있다. ...

알면 향유할 수 있다. 향유하는 과정에 앎이 배치되어야 한다. 256


모르는 자에게는 무질서해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는 자에게는 그렇게 질서정연한 것이었다. .. 지식의 힘은 사물과 사리를 분별하는 것이고, 분별하는 자만이 경탄을 너어 향유할 수 있다. 257-258


무지하니 자유롭고 능수능란하게 향유하지 못한다. 충분히 즐길 수 없다. 그러니 무지하면 아름다움 앞에서 기쁨을 느끼는 게 아니라 답답한 , 즉 슬픔을 느낀다. 이런 답답함이 공부를 시작할 마음을 먹게 한다. 258


자연은 경탄을 통해 향유로 나가게 하는 좋은 대상이며 향유의 언어는 수학적이다. 무질서에서 질서를 분별하고 그 움직임이 만드는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언어가 바로 수학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를 들면, 기하학을 모른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이라 말하는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의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없다. 알람브라궁전에 흐르는 물의 배치와 흐름, 그리고 궁전의 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과 빛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은 기하학을 모른다면 결코 향유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아름다움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기하학이라는 지식이 필요하다. 258-259


경이로움을 느낀다고 해서 모두가 그 경이로움을 배움으로 이어가는 것은 아니며,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260


듀이는 인간의 경험을 해보는 것겪는 것으로 구분했대 무엇을 할 때마다 우리는 무엇을 겪는다. .. 그러나 겪는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이 인지되는 것은 아니다. 겪는 것들 중에서 대다수는 그저 지나간다. 이렇게 지나가는 겪음으로는 배움이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겪음을 통해 사람이 배운다고 할 때 그 겪음은 내가 예기치 못한 것, 알지 못하는 것과 만나는 순간이다. 나를 압도할 정도로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261


이런 경험이 사람을 배움으로 이끈다.

겪는다고 바로 배움이 일어나는 게 아니다. 중간에 또 다른 과정이 있다. 그것을 하나씩 들여다보자. 첫째, 내가 예기치 못한 것을 겪었을 때 사람에게 반드시 떠오르는 것이 질문이다. “, 이게 뭐지?” “이게 왜 이렇지?” “어떻게 이렇게 되지?” 예상 하지 못한 것을 만나게 되는 순간 깨닫는 것은, 지금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는 사실이다.

모르기 때문에, 그 반응은 일단 질문의 형태로 떠오른다. 다른 말로 하면, 질문이 발생하지 않는 겪음은 겪음이라고 할 수 없다. 겪자마자 그게 무엇인지 알면, 해결하면 그만이다. 프랑스의 유명한 속담처럼, 사람은 아는 것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질문이 없다는 말이다. 질문을 거치지 않고 바로 해답으로 직행하게 된다. 262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생각이다. 질문을 하고 답을 찾기 위해 생가가하는 것은 이 과정 자체에 매혹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리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질문하고 답을 찾기 위해 씨름하는 이 지적인 과정이 주는 쾌감, 즉 분별의 힘이 커지는 걸 경험한 사람만이 이 과정을 견딜 수 있다. 263

경이로움에 충분히 젖고 난 다음에, 그 경이로움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알때 호기심을 갖는다... 경험을 통해 무엇인가를 느끼고 질문이 떠오르면, 그것에 관해 생각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264


경탄이 공부의 춟라점이라고 할 때, 경탄은 감수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감수성이 좋은 이는, 다른 사람은 그저 그런 일로 넘어가는 것도 새롭고 경탄할 만한 일로 경험한다. .. 자극에 지나치게 많이 노출되는 바람에 역치가 높아져서, 어지간한 자극으로는 경탄하지 않게 된 것이다. 모든 게 시시해져버려 경탄할 만한 것을 만나기가 힘들어진다. 이런 경우에도 배움은 잘 발생하지 않는다. 265-266


기 드보르(Guy Ernest Debord)라는 프랑스의 철학자는 우리가 스펙터클, 즉 구경거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스펙터클은 시시하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를 압도한다. 더 큰 크기로, 더 바른 속도로, 더 짜릿한 것으로 사람을 압도한다. 이런 식으로 스펙터클에 압도당하고 나면 다른 모든 것은 시시해지지 않을 수 없다.

스펙터클 사회의 더 큰 문제는 모든 것을 스펫터클, 즉 구경거리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이다. 아무리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 해도, 구경거리가 되면 더 이상배우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지 않는다. 스펙터클은 구경, 즉 소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배움도 마찬가지로 소비가 되고 있다. 지금은 대가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것이 귀하고 드문 일이 아니다. ...

이처럼 스펙터클 사회에서는 배움의 과정이 구경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266


배우는 사람과 공부를 구경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지점에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배우는 사람은 자기에게 집중한다. 공부를 통해 나에게 늘어나는 것이 있는지, 그것이 잘 늘어나고 있는지 관찰한다. 배움의 목적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로부터 배우든,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에게 집중하는 게 배우는 사람이다. 자기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배우는 것이 없다. 반대로, 구경하는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에게 집중한다. 특히 그가 잘 가르치는지 못 가르치는지에 집중하며, 그가 가르치는 것을 즐기고자할 뿐이다. 따라서 놀랍게도, 구경하는 사람은 자기의 성장에 관심이 없다. 자기에게서 무엇이 성장하는지 보는 게 아니라 상대가 나를 잘 접대(entertain)’ 하는지 아닌지에만 관심이 있다. 서비스가 좋으면 만족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만을 제기한다. 그래서 구경하는 사람의 말은 언제나 품평이다. 말하는/가르치는 사람에게 집중하니 그 사람에 대한품평만 있지 자기 성장에 관한 말은 없다. ...

품평을 통해 마치 내가 그것을 알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

이것이 많은 배움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성인의 경우, 배우는 사람 스스로가 자기 배움의 현장을 구경거리로 만든다. 여기저기에서 인문학 강좌니 뭐니 듣고 배우는 자리는 많아졌지만, 그런 자리의 상당수는 공부를 구경거리로 만들어서 소비하고 품평하는 자리다.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그것이 뭘 배웠는지에 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고 강의에 관한 말만 넘쳐나는 게 그것이 구경이었다는 증거다. 267-268


우리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기예로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270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이 있다. 향유와 문화자본의 관계다. 향유와 문화자본의 관계에 대한 긴장이 없으면 먹방이나 보고 있는 사람들을 속물이라고 경멸하게 된다. 대신, 문화자본이 많은 이들만 향유의 기예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층 계급에 대한 경멸과 혐오는 대부분 이 문화자본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학교에서도 옷을 촌스럽게 입거나 친구들의 문화끼지 못하는 학생이 소외되고 따돌림당할 가능성이 크다. 271


나는 학교가 해야 하는 일이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 전체를 통해 강조한 것처럼, 배우는 이를 잘 관찰하고 그가 가진 향유의 기예를 발견해 같이 언어화하는 일이다. 그가 좋아하는 것, 혹은 흔히 취향이라고 부르는 것을 아름다움의 향유라는 관점에서 보고 그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같이 찾아보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배우는 이 스스로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위에서 축구를 좋아하는 학생의 말을 통해 수학의 아름다움, 협력하는 기예의 아름다움, 윤리적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언어로 자기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 가르치는 일 아니겠는가.

다른 하나는, 학교가 학생들의 경제적/사회적 차이와 상관없이 모두 여러 가지 문화적인 것을 즐기고 그 향유의 기예를 키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의 제도교육은 교육이다. 공교육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이를 걔급과 상관없이 보편적인 시민으로 양성한다는 점이다. 귀족만 데려다가 귀족 취향으로 키우는 게 아니라, 이 나라의 보편적인 시민으로서 누구나 어느 수준의 교양을 가지고 세상을 향유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문학이며 음악을 가르치는 게 이런 이치 아니겠는가

이것은 학교만의 문제나 사명이 아니다. 사실 학교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제 역학을 해야 하는 것은 국가라고 할 수 있다. 274


세상은 아름다움을 향유한 사람들이 바꾼다.’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을 불러오는 도심 재개발에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여행을 다니면서 슬럼화한 동네를 재생하는 곳에 가보고 그 아름다움에 반한 사람들이다. 도시 재생이 재개발이나 그럴듯한 벽화 몇 개 그린 후 관광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나고 교류하며 그 만나을 가꾸는 것이며 그게 아름답다는 걸 느끼고 돌아온 사람들이다.

아름다움을 알기 때문에 이들은 눈에는 추한 것이 바로 들어온다. 사람의 삶을 파괴하고 흩어지게 하는 것이 추하다. 벽화 몇 개 그려놓고 사람들의 삶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키는 것이 추하다. 이들에게는 지금 곳곳에서 벌어지는 재개발이 정화’, ‘미관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추하게 진행되는지가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 추함에 맞서는 일도 할 수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안목이 없었다면 이런 저항이 가꿈, 돌봄, 재생의 방식으로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공부의 목적으로 실제적으로 쓸모 있는 것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로 교육이니 실용 교육이니 하는 말로 공부의 쓸모를 직업과 돈벌이 수단으로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공부의 의미와 목적을 너무나 도구화한다. 신분 상승이나 성공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목적이다. 275-276


공부의 쓸모를 획기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276




나가며

설령 자기를 얻는다 하더라도 : 사회를 만드는 기예를 향하여

푸코는 훌륭한 삶이란 주어진 규칙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형식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 공부는 자유롭기 위해 하는 것이다. 교육은 사람을 해방하는 과정이다.

문제는현대 사회에서 자유가 처한 운명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흔히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자유/해방을 통해 사람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시대다. 자유를 억압함으로써만이 아니라 사람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통치한다. 각자에게 표준적인 삶을 획일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개성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권장한다. 그렇지 못한 삶은 지질하다고 비난하고 조롱한다. 그래서 우리는 개성을 가진 존재가 되기 위해 각자 자기계발 하느라 노오력하며 살아야 한다.

여기에 이 시대의 자유의 딜레마가 있다. 한편에서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해방이 사람들의 삶을 위험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본문에서 누차 강조했듯이,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노오력하며 사람의 삶을 파괴하고 잇느 것도 자유/해방이다. 마르크스가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농노들이 얻은 자유는 굶어 죽을 자유라고 말한 거서럼, 이 자유는 곳곳에서 사람들의 삶을 일회용으로 착취하고 폐기하며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다. 파탄에 몰린 이 자유로운사람들은 자기를 탓하는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자기 노력과 능력의 부족을, 나중에는 많은 것을 물려주지 못한 부모를,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이 모든 것을 이번 생에서의 운명 탓으로 돌리며 죽어간다.

우리는, ‘사회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처한 이런 공통의 운명에 관해 알아야 하고, 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281-282


이 시대의 교의인 신자유주의는 자유를 통해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렸지만 동시에 자유 자체를 위험에 빠뜨렸다고도 할 수 있다. 사람이 알고 다루며 스스로의 양식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과정을 통치로 흡수함으로써, 자유를 추구하는 게 자유를 위협하는 것이 되는 딜레마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사회를 외면한 자기 배려, 타인의 해방을 저버린 자유란 또 다른 자기계발이 되고 말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282-283


한 사람 한 사람이 해방되고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공동선(共同善)이 되는 사회를 도모할 때 자유는 위험한 것도 아니고, 자유가 위험해지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자유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285

Posted by WN1
,


이책을 읽는 당신에게


교육은 원래 힘들고 어려운 일일까?  4

교육은 새로움을 추구합니다.  6

교육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회를 돌볼 아는 사람을 만드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교육으로 인해 비로소 사람다움을 갖추어 갑니다. 교육으로 모난 부분이 다듬어지고 부족함이 메워집니다. 거친 부분이 부드러워지고 사나운 부분이 온순해집니다. 얇았던 것이 두터워지고 흐릿했던 것이 진해집니다. 사람은 교육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타인의 존재를 지각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인식합니다. 자신만 바라보던 눈이 타인으로 확대되어 세상으로 놃어집니다.  7

교육은 결코 무엇을 위한 도구적 존재를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스튜어트 밀은 교육은 기술자가 아닌 인간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교육은 정의로울 교육이 됩니다. 정의는 교육의 다른 이름입니다.  7


교육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항상 이루어지는 겁니다. , 내가 있는 곳이 학교고 그곳에서 내가 듣고 보는 것이 교육인 거지요. 이때 내가 무엇을 보고 듣느냐하는 것이 나를 변화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모든 환경이 자신의 감각기관을 통해 자신을 자극하고 자신을 가르치고 자신을 변화시키게 되는데 그것이 교육입니다.  17


학교가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학교가 다양한 환경을 접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겁니다. ..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환경의 모습을 갖가지 형태로 제공합니다.

다른 하나는 학교가 환경을 선택하고 활용하는 능력을 길러줍니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킬 수는 없어요...

다른 하나는 학교 자체가 좋은 환경을 제공해준다는 겁니다. ..

그리고 학교는 환경이 변화할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합니다.  19


삶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야 환경에 눈을 뜨게 되거든요. 삶에 관심 없으면 환경에 신경 이유가 없어요. ...좋은 환경은 자신을 새로운 존재로 창조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의미합니다. .. 

좋은 환경이란 먼저, 자신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있는 볼거리, 들을 거리, 만질 거리 체험 요소를 많이 제공해주는 환경입니다. 그리고 번째는 인간적 환경이라고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있는 것은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21


좋은 환경 여부는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 건가요?

판단하는 사람은 자신입니다.  22


환경을 판단하는 기준에 대해... 먼저, 교육적 환경의 여부를 가르는 기준은 타인과의 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하고, 자신의 개성과 느역을 찾아 신장시키고, 지식과 기능 그리고 이치를 깨닫고 익히고,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는 것이 가능한가입니다. 번째로 인간적 환경의 여부를 나누는 기준은 인간이 서로를 목적으로 대하고, 존엄한 인격으로 만날 있는 환경인가입니다. 그리고 윤리적 환경 여부를 구분하는 기준은 사람다운 공동체 형성에 기여하고아름다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넓혀주어 사람들의 행복 증진에 기여할 있는 환경인가입니다. ... 

우리는 급격하게 변하는 환경을 냉철하게 관찰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22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를 위해 인간이 갖추어야 조건 가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는 주체성입니다. 자신의 일을 외부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처리할 있는 주인으로서의 당당한 능력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세상을 바꾸고 변화를 주도할 있는 창조적 힘입니다. 이미 만들어진 세상에 머무는 삶이 아닌 새로운 세상을 고민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의지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윤리적 능력입니다. 윤리적 능력은 자신보다 타인을 앞세울 아는 따뜻함을 말합니다.  28





하나 - 아이들의 능력을 자체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사회는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있는 으력만을 능력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을 평가하는 사회적 시선이 학교에까지 침투하여 학생의 능력평가의 기준으로 작용할 아이들은 졸지에 능력 있는 아이와 능력 없는 아이로 나뉘게 됩니다.  42


아이가 지닌 모든 느역을 인정해줄 아이의 능력은 성장합니다. 능력의 성장은 삶의 성장입니다.  43


묻는다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 관심은 애저을 낳고 애정은 변화로 이어집니다. .. 

물음과 교육은 하나의 다른 표현입니다. 물음은 교육이고 교육은 물음이에요.  45


교육은 의문을 품게 만드는 일이에요. 그리고 스스로 답할 있도록 힘으 북돋우는 일입니다.  47


묻지 않을때 사물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물을때 자신은 태어납니다. 물음이 멈추면 자신도 멈춥니다. 물음은 자신을 새롭게 만듭니다. .. 없던 자신이 발견됩니다.  48


물음은 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일입니다. 언제나 물음을 만드는 아이, 씨앗을 뿌리는 아이를 만들어야 합니다.  49


'내일을 위해 오늘은 참아라!'라는 말은 오늘을 즐기려는 아이에게 어른이 흔히 하는 말입니다. 어른들에게 오늘은 없는 날이 같아요.  49


내일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 나쁘다거나 불필요하다고 수는 없지요. 다만 오늘을 몽땅 내일을 위한 날로 치부하여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는 겁니다.  51


믿는 것과 수용하는 것이 학생 자신의 판단에 의한 경우라면 문제 삼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새악은 묻어둔 어른의 생각에 의존해서 믿고 수용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겁니다... 위대하고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사상가와 그의 사상에 대해서 딴지를 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위대하다는 평이 옳아서라기보다 평가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 이미 내려진 평가에 대해 소신 있는 평가를 한다는 것은 많은 비판과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나름의 생각을 피력할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교육이 사고라는 무형의 가치를 키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4-55


어린 아이의 생각을 인정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55


생각은 멈추면 힘을 잃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생각을 멈추지 않도록 도와야 해요.  56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혹은 ' 사람 생각은 이렇다'라는 식으로 제시되는 어른의 판단과 새악은 아이가 생각하고 판단할 참고자료로 활용할 있습니다. '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이런 생각도 가능하겠구나'라는 식이지요.  57


잘못된 생각이나 판단이 죄를 짓는 것은 아니잖아요. 생각도 연습이 필요한 일입니다. 많은 경험이 쌓여야 거칠고 험한 생각들이 다듬어집니다. 그러므로 행여 잘못된 판단일지라도 스스로 느끼고 수정할 있도록 기회를 주고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58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에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눈치를 이유가 없는 거지요. 자신 있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낼 있어야 해요.  60


판단의 기회를 주고 아이의 판단을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육입니다... 어른의 판단을 무조건 수용하도록 하는 것은 비굴한 삶을 살아가도록 부추기는 일입니다.  61


독일의 교육자 잘츠만은 교육자는 아이들이 세운 삶의 목표를 이루는 유용한 것들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62


다른 사람에게 같은 내용을 가르치는 것은 아이의 삶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는, 순전히 어른 중심의 교육인 겁니다... 아이의 필요를 살펴야 합니다... 교재 선택은 교육 내용의 선택입니다 교육 내용은 교사들을 위한 것이 아니지요. 전적으로 아이들의 몫이지요. 따라서 아이들의 삶과 관련해서 선택해야 합니다.  63


바제도는 가르치는 양보다 얼마나 유용한가에 관심을 기울인 학자. 그는 생활에 유용한 지식을 질적으로 정선하여 가르칠 것을 권했어요. .. 방대한 양의 지식을 짧은 시간에 가르쳐야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을 바라볼 시간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시간도 없게 돼요.  63-64


지금 순간에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필요를 알고 필요한 지식을 선별하는 능력은 부모로부터 배우지 시작해서 서서히 능력을 쌓아가고, 학교에서도 교사와 학생 필요의 교류를 통해 배움과 가르침의 내용에 대한 탐구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65


배움이 즐거워야지요... 배워야 하는 지도 모른 책을 펼쳐야 하고, 들어야 하고, 외워야 하는 비극을 끝내야 합니다. .. 삶에 도움 없는 내용을 이상 강요해서는 됩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폭력이에요.  66


아이들의 삶은 그들만의 영역이에요. 누구도 침범할 없습니다.  67


배울 내용의 중요도는 어른이 매기는 것이 아니에요. 아이의 꿈이 정하는 겁니다.  69


다양한 경험은 다양한 능력을 자극해요. 경험이 다양할수록 넓은 능력이 자극받게 됩니다.  75


자극은 보고 듣는 겁니다. 만져보고 맛보는 것이지요.  76


가르치는 자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하나, 경험의 내용과 양을 정해놓고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 특별한 분야의 능력만을 인정하고 능력을 지니도록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 지니고 있는 능력에 따라 아이를 차별하는 것은 아닌가?  77


어른이 판단하고 결정한 길을 아이들에게 무조건 걷도록 요구하는 것은 아이들을 생각 없는 로봇으로 만들겠다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79


교육의 역사를 돌아보면 인간을 도구로 만들기 위해 교육을 악용해온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있습니다. 교육에 목적으로서의 인간은 없고 수단으로서의 인간만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리하여 교육은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힘센 자들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를 만들기 이해 학교를 세우고, 그곳에서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갖가지 위협과 협박과 폭력을 통해 그들의 입맛에 맞는 도구로서의 인간을 만들어왔던 것입니다.  82


삶의 길은 다양하거든요. 어른들은 많은 사람들이 오고간 길을 옳은 길로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다른 이들이 수없이 걸어간 , 포기, 작은 하나 없는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도 걸을 있는 길만을 올바른 길로 생각하고 그길을 걷도록 유도하는 거지요. 그것이 어른이 아이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길은 개척하는 것입니다.  85


없는 능력을 억지로 만드는 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폭력입니다.  86


교과성적, 논리력, 설득력, 창의력, 문제해결 능력, 인성, 잠재력, 넓은 지식과 교양, 적극성, 공동체 의식, 협동심, 리더십, 자기 주도력, 성실성 등은 상급학교 진학 자격 조건 일부입니다. 학교가 원하는 아이들의 조건인 거지요.... 이처럼 완벽에 가까운 조건을 갖춘 아이들에게 굳이 학교가 필요할까요?  89-90


가진 것이 적고 약하고 볼일 없다고 외면하는 것은 가르치는 자의 도리가 아니지요. 오히려 그들에게 손을 뻗치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교육자의 도리입니다. 배움을 요청하는 아이의 요청을 외면해서는 됩니다. 배움의 요청을 거부하는 것은 배움의 기회를 빼앗는 겁니다.  91


배움의 요구는 권리예요... 배움의 기회는 모든 아이들에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91


교육은 어른들이 자신의 의지나 생각을 아이를 통해 표출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92


아이의 성장을 돕기 위한 교육으로 권하고 싶은 교육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요?

가장 좋은 것은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아이들 성장을 아이들에게 맡기라는 겁니다.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일 있겠지만 어른의 역할을 최소화할 아이는 성장합니다

그러면 어른이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요?

무엇보다 아이의 생각이나 행위 하나하나를 격려하고 지지하는 것이 어른이 해야 일입니다... 교육을 어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회로 이용할 교육 정책은 복잡해집니다.  94


아이들은 어른의 욕심이 바뀔 때마다 휘청댑니다...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무엇을 위한 정책인지, 그리고 결과는 어떻게 될지에 대해 다각도에서 정직하게 평가해 보아야 합니다... 어른은 아이를 위한 존재임을 잊어서는 됩니다... 어른은 아이의 성장을 도울때 비로소 어른이 됩니다.  97


어른은 자신이 지닌 지식이 다른 어떤 지식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다른 분야의 지식보다 자신이 속한 분야의 지식을 먼저 확산시켜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작용하는 모양이에요.  100


'먹이는 것과 먹는 혹은

만들어져 있는 것과 자신이 만드는

사람은

입맛에 맞춰 음식을 만들어 먹지만 

가축은 

싫든 좋든 이미 배합된 재료의 음식만을 

먹어야 한다.

....

재료를 넣고 수도 

젓가락을 수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도 없이

맨손으로 덥석 물어야 하는

음식의 독재'

오세영 시인의 <햄버거를 먹으며>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마음대로 선택할 없이 주어진 대로 무조건 먹어야 하는 상황을 독재라고 말합니다. 어른이 제시한 지식을 선택할 없다면, 그래서 무조건 익혀야 하는 것이라면 또한 '교육 독재' 있습니다. ... 자신이 살아갈 삶의 방식에 필요한 지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식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는 거지요.  101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어렵고 힘들더라도 배워야 이유가 충분합니다. .. 불필요한 지식임에도 필요를 가장해 강요한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102


목재의 쓸모는 나무의 성질이 정하는 겁니다. 목수가 임의로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수는 나무의 성질을 파악하여 성질에 맞는 쓸모를 찾는 겁니다.  106


목수는 나무의 성질을 꿰뚫어볼 있는 안목이 필요.  106


어른의 욕심은 아이의 특성을 나눕니다. 쓸모 있는 특성과 쓸모없는 특성으로 말입니다.  108


배움은 부족함을 깨닫는 거예요. 그리고 채우는 거지요. 결핍된 부분을 보완하는 것이 새로운 존재가 되는 일입니다.  110


자신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있는 배움의 욕구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 누구든 새로운 자신을 원하거든요.  111


배움은 타협이에요. 일방적 강요가 아닙니다. 배우는 자의 의지의 작용인 거지요. 교육은 무엇인가를 익히도록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세계에 관심ㅇ을 기울일 잇도록 시야를 넓혀주는 일이에요... 삶의 방식은 간섭의 대상이 아닙니다. 강요의 문제는 더더욱 아닌 거지요. 교육은 삶의 방식일 뿐이에요.  112


교육을 꺼리는 것은 교육의 필요성을 몰라서입니다. ... 교육을 접한 적이 없기에 교육의 으미를 모르고 교육의 필요를 모를 수밖에 없는 겁니다. 교육의 필요는 교육이 가르쳐주는 거지요. 배움의 필요는 배움이 가르쳐줍니다.  112-113


교육은 가르치고 기르는 일입니다.... 사물들을 통해 나를 깨닫고 인간을 알고 세상을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사물들에 대한 깨달음을 강조한 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종교 개혁자이자 교육 사상가인 코메니우스 입니다. 그는 사물을 깨닫게 하는 순서도 정해두었습니다. 그는 사물을 개닫는 순서를 이목구비(耳目口鼻) 중 눈부터 시작할 것을 권합니다. 들려주기 전에 보여주라는 것이지요. 즉, 코메니우스의 교육은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13-114


아이에게 직접 사물을 보여주고 대화하게 하라는 겁니다. 직접 보고 판단하게 하고 느끼게 하라는 거지요. 그 과정에서 사물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자신과 세상을 배우는 기회가 주어지는 거라는 겁니다. 사물에 대한 가르침을 사물로부터 직접 받으라는 거예요. 어른을 통해 배우는 것은 사물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어른의 생각과 느낌을 배우는 것이 될 테니까요. 어른은 다만 사물과의 만남을 주선하면 되는 겁니다.  116




둘 - 명예와 자존심을 존중하겠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하고, 저것은 저렇게 하라'라는 식의 지시와 명령이 그득한 교실에서는 아이들의 당당함은 숨 쉴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늘 불안한 가운데서 생활하게 되지요. 아이들의 눈은 불안을 안은 채 부모나 교사의 입에 집중됩니다.  121


어른의 자리를 옮겨야 해요. 아이의 앞에서 뒤로 가야 합니다.  123


어른은 단지 아이의 요구를 듣고 지원하는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른은 지휘자가 아니라 지원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124


명예를 존중하는 것은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

명예는 존엄함에 대한 인정입니다. 아이가 지니고 잇는 모든 것, 즉 아이의 흥미와 능력, 가치관, 사상, 견해 등 그들의 모든 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해주는 겁니다.  125


인정받는 아이는 스스로를 더욱 나은 모습으로 만들려는 의지를 갖게 됩니다.  126


당당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비굴함이 자라게 마련이에요. 그리고 눈치를 보게 합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포장해 아이 앞에 던져놓은 어른의 생각은 없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127


체벌을 사용하는 것은 교육자에게 결함이 잇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133


공론도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주장은 비교육적일 아니라,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비인간적인 일이에요.  138


말은 듣는 이를 위한 겁니다. .. 말하는 이의 입장만을 내세울 말은 가치를 잃게 됩니다.  140


이것은 이렇게 하고 저것은 저렇게 해라가 아니고, 이런 일은 이렇게 돕고 저런 일은 저렇게 돕겠다는 선언이어야 합니다. .. 네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도록 이런 혹은 저런 도움을 주겠노라는 약속이 담겨야 합니다.  141


언론인이며 소설가인 이병주가 그의 소설 <행복어 사전>에서 행복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구호아래, 전체를 노예로 만들고, 노예들에게 주인이라는 명패만 달아주는 사술(詐術 속일사 재주술) 이야기했듯, 학교에서 아이들의 행복을 보장한다는 구호 아래 아이를 노예로 만들고 못하는 아이로 만들고 손발을 묶어두는 교육을 한다면 노예에게 주인이라는 명패만 달아주는 꼴이 되는 겁니다.  142


루소가 생각하는 교육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인위적 힘을 최소화시킬 것을 권합니다. 인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것이 가장 바람직한 교육이라는 의미입니다. 아이들의 자연성이 자연스럽게 성장할 있도록 돕는 것이 최선의 교육이라는 것이지요... 

루소의 입장에서 좋은 교사는 아이들의 자연적 능력이 성장하는 방해되는 요소를 제거하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145


관찰하는 일부터 출발합니다.  146


교육은 개성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개성을 존중하는 것으로부터 교육은 시작됩니다... 중국 고대 도가 사상가인 장자는 "물오리는 비록 다리가 짧지만 길게 이어주면 걱정하게 것이고, 학의 다리는 비록 길지만 그것을 짧게 잘라주면 슬퍼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개성을 해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개성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47


개성 존중과 관련해서 생각할 있는 교육은 소극 교육입니다. 소극 교육은 아이들의 보호를 우선하는 교육이에요. 어른들의 말이나 기교 그리고 힘이 소극적으로 작용하는 교육을 말합니다. 어른이 적극적으로 다가서지 않는 것은 어른이나 어른의 힘으로 형성된 사회는 악하고, 그릇된 정신이 만연되어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147-148


아이의 삶을 인정하고 허용한다면 어른이 요구할 것이 그다지 많지 않겠지요.  153


개성을 중시하는 교육을 하려면 개성을 알아야 텐데 어떻게 있을까요?

어려운 과제입니다. 중요한 아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소리에, 걸음걸이와 손놈림에, 행동 하나하나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해요. 개성의 발견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관심을 기울이려면 만나야 합니다. 자주 만나 이야기해야 해요. 아이들의 이야기에 기울여 그들의 생각을 들어야 합니다. .. 세밀히 살펴야 해요. 기쁨과 슬픔까지 함께해야 합니다. 함께 웃고 울어야 그들의 개성과 만날 있습니다

개성 발견을 위한 다른 노력으로 세상과의 접촉을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세상과 직접 만날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다양한 것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직접 체험할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오랜 시간이 소요됩니다. 지속적인 관심과 끈질긴 노력만이 개성을 만날 있는 길입니다. 많은 정성이 필요한 일입니다. 오랜 시간 아이와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55-156


간섭 그리고 강제는 마음의 문을 닫게 하는 주문이에요.  159


아무리 많은 지원과 훌륭한 환경을 조성해준다해도 자유로운 교육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성장과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160


미국의 철학자이자 교육사상가인 듀이를 포함한 진보주의자들의 생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아이가 필요한 것을 아이 스스로 계획하고, 조직하고, 평가하게 하는 아이의 자발적 활동 내지 자율 학습을 교육 방법의 기본 원리로 채택합니다. 핛브은 강요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입니다.  161


노력 없는 결실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간섭을 배제하는 일입니다. 간섭 배제는 교육적 환경조성 작업 1순위예요. 간섭은 자연성을 움츠리게 하거든요. 뿐만 아니라 간섭은 시야를 좁게 만들고 세상을 보는 눈을 제한합니다.  163


어른들의 입맛에 길들이는 , 그건 이미 교육이 아닙니다. 아이를 어른의 욕구를 대신하는 욕구의 대리인을 만드는 일에 불과한 겁니다. 어른은 아이들을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164


교육 과정의 획일화는 교육을 가로막는 가장 장애예요. 획일적 교육은 마치 고추, , 배추, 시금치, 토마토 다양한 농작물을 같은 방식으로 재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같은 시기에 심고, 같은 시기에 같은 거름을 주고, 같은 약품을 뿌리고, 같은 시기에 거두기까지 한다면 그것은 효과적이지 못할 아니라 오히려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일입니다.  166-167


선택하지 않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예요. 아이의 동의 절차는 애당초 생각지도 않잖아요. 학교 교육은 대부분 그냥 맡기는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171


잘못된 알면서도 방치하는 것은 교육의 포기고 아이들을 포기하는 겁니다.  173


교재는 많은 경우 배우는 내용이나 방법을 결정하고 교육의 결과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교재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175


베이컨은 교재에 특별히 경험을 담을 것을 요구합니다. 교재는 사물을 관찰하고 실험하고 평가하고 기록한 사물에 대한 경험의 산물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 어른의 경험을 정답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경험이 전통이나 권위자의 권위의 산물이어서는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교재는 자연이 녹아 있고 다양한 사람들의 사회적 경험이 농축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178






------ 여행은 참교육  -------

180-189 내용은 따로 보기 클릭







"... 하지 마라."

"... 해라."

금하는 것도 필요하다. 무엇인가 요구해야 필요도 분명 있다. 모든 욕구를 허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금해야 , 그리고 싫어도 해야 일이 분명 있다. 그러나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유는 합리적이고, 인간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교육적이어야 한다.

이유가 없거나 비합리적인 요구는 학대입니다.  189


생각을 제한하는 것은 생각이 자랄 기회를 빼앗는 . 아이의 생각은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에너지입니다. .. 생각없는 아이는 성장을 멈추게 도지요. 그리고 아이의 생각이 멈춘 자리에는 어른의 생각이 자리하게 마련입니다... 책임 있는 주체로서의 자리를 잃고 말해주지 않으면 알아서 없는 자기 삶의 () 되는 겁니다.  190


어른들은 아이의 생각을 인정해주고 각자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것을 허용해야 합니다.  191


시끄러움 속에서 아이는 영글어 갑니다. 봄이 조용하면 가을에 거두어들일 것이없어요. 봄은 시끄러워야 해요. 바빠야지요. 봄이 되면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잖아요. 조용했던 겨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됩니다. 나무의 색깔과 향이 달라지고요. 벌을 유혹하고 나비를 끌어들입니다. 성장을 위해 감당해야 당연한 수고입니다. 그리고 주변의 자연은 나무 변화를 수용하고 허용합니다 누구도 무엇도 시비를 걸지 않지요. 행여 변화를 두려워하여 색깔을 숨기고 향을 감춘다면 성장은 더뎌집니다. 결국 생존이 어려워질 겁니다. 새들도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에 열심이지요. 독특한 소리로 시선을 낄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둥지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하고요. 이는 짝을 찾고 종족을 번식하기 위한 부산한 노력입니다. 다른 수컷보다 마음을 표현하고 자신을 드러내야 마음에 드는 암컷의 마음을 움직일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러 ㅁ모든 생물들은 자신의 특성을 아낌없이 세상에 드러냅니다, 그들이 풍기는 향과 색깔은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들의 생존은 가능하지 않아요. 자신을 세상이 드러낼 그들은 비로소 존재하게 됩니다. 자신을 표현하지 않으면 존재하되 존재하지 앟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192-193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은 표현의 경험을 통해 형성됩니다. 표현의 내용이나 방식이 무엇이든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말아야 해요. 금할 것이 아니라 허용해야 합니다. 어떤 방식이든 아이가 표현할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 무엇이든 자신의 생각을 삶을 통해 드러낼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해요. 그리고 격려와 칭찬을 해주어야 합니다. 아이가 자신을 표현할 때는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허투루 생각하거나 넘어가서는 됩니다. 작은 일까지도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여주어야 합니다.  193-194


아이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어른은 아이들을 어른 생각대로 이끄는 것을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아이의 능력을 인정하는 어른이라면 아이의 생각과 가치관, 삶의 다양한 모습을 격려하고 지지할 겁니다... 아이의 삶이지만 삶을 위한 에너지는 어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까요.  207


아이가 세상과 접촉하는 통로는 아이 자신이어야 해요. 아이가 아닌 어른을 통해 세상으로 나오고 어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어른의 입으로 세상을 이야기하면 아이의 삶은 어디에 있나요?  209


서로의 생각과 삶의 태도를 허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아이는 어른의 존재를 인정하고 어른은 아이의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210





- 세상의 주인공은 너야


교사는 규정된 교육을 받고 제도적 검증 절차를 밟아 국가로부터 임명됩니다... 교사는 아이에게 존경을 받을 비로소 교사로서 자격을 갖게 됩니다.  219


역사 스승 중에는 그리스 최대의 철학자로, 백과(百科) 시조로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습니다. 그는 최고의 스승이었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걸었고, 학생들과 이야기하기를 즐겼습니다. 아이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었습니다. 학생 위에 서지도 않았고, 그들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지도 않았습니다. 통제하거나 억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하지도 않았고요. 오로지 학생들의 필요와 요구에 순종했고,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그들과 함께 웃었습니다. 그리고 식사도 함께했습니다.  223-224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이 무엇이고 누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교육에 대한 철학이 분명하면, 결코 억압적일 필요도 강요할 이유도 엄하게 대하고 아이 위에 군림할 이유도 없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224


아이가 따라야 삶의 규범을 제정해놓고 따르도록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발짝 비켜서서 아이가 자신의 시선으로 세사을 바라보고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226


아이의 삶은 지켜봄의 대상일 뿐입니다. 간섭하는 것은 삶을 훼방 놓는 일이에요.  227


교육은 자기 변화를 추구해요. 자리에 머무르는 삶을 거부합니다.  236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은 삶에 의미와 가치를 쌓아가는 일이에요. 자신을 새롭게 하려는 노력 없이 의미 있는 변화를 모색하기는 어렵습니다.  237


교육은 어른의 의무입니다... 교육은 아이들의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고 새로운 자신과 만날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239


안전을 추구하는 곳에서는 지적 발전이 이루어지기 어렵기에 위험하게 살라고 조언한 니체의 말처럼 위험함과 두려움은 지체(遲滯 늦을지 막힐체) 딛고 일어서 발전적 삶을 위해 거쳐야 의식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 아이들이 나아갈 세계는 아무도 모르는 세계입니다.  241-242


세계는 보는 이의 것입니다. 듣는 이가 주인이에요.  243


삶을 펼치는 다른 사람의 삶을 참고하는 것은 있을 있습니다. 그러나 통째로 베끼는 삶을 경계하는 겁니다.  245


어른들은 아이들 가슴에 다른 누군가를 심어놓는 버릇이 있습니다. 어른이 바라는 이상적 인간이지요.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가슴에 품고 살게 되는 겁니다.  247-248


어른은 아이의 삶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바람대로 아이의 뜻대로 아이의 욕망대로 살아가도록 아이의 뜻과 욕망을 인정하고 허용해야 해요. 아이가 꿈꾸고 아이가 펼치는 삶이, 윤리를 해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휏손하지 않는 어떤 형태의 삶이든 인정해야 하는 겁니다.  248


아이가 누군가를 닮아갈수록 아이의 정체성은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교육은 정체성을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일이에요. .. 아이의 삶은 아이의 몫입니다. 누가 대신할 수도 대신 해서도 되는 아이의 고유 영역입니다. 삶은 오직 자신이 만들어가는 자신의 작품이에요. 그들이 살아가는 삶과 그들이 살아갈 사회에 대해 어른이 이러쿵저러쿵 간섭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249


영국의 교육자인 알렉산더 닐은 아이의 자유를 말합니다. 닐에게 있어 아이는 자유로운 존재이고, 자유로운 존재여야 합니다. 물론 방종과는 다릅니다. 상대를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 하에서 주어지는 자유거든요.  250


아이들도 어리다는 이유로 교사들을 괴롭히거나 귀찮게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이의 자유뿐 아니라 어른의 자유 또한 중요하거든요. .. 교사와 아이 혹은 어른과 아이는 서로의 자유를 존중해야 합니다. ...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기의 생각을 펼치는 것이 닐이 말하는 자유입니다.  251-252


자유주의 교육 사상가인 엘렌 케이는 아이들의 해방을 이야기합니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을 이야기하는 걸까요? 부모요, 교사요, 가정이요, 사회입니다.  256


교육은 자신을 옥죄는 일체의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에게 자신의 의지를 심고 성장시키는 일입니다. 교육은 해방운동인 셈입니다.  258


어른이 있어야 곳은 아이의 뒤입니다.  261


교사의 가르침은 적을수록 좋은 거예요. 가르침이 많으면 많을수록 아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많은 가르침은 아이들의 자연성 성장을 가로막고 자연적인 힘을 약화시킵니다. 교사가 활동 범위를 넓히면 넓힐수록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이끌어가야 아이들의 활동의 폭은 줄고 아이의 역시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262-263


'교육의 비결은 교육하지 않는 있다' 엘렌 케이의 가르침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이 강압적이고 억압적이지는 않는지, 억지를 부리고 강제가 횡행하지는 않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264-265


쓸모는 관심으로부터 생겨납니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이 있을까요? 쓸모는 쓸모를 찾으려는 노력으로 생겨납니다. 아이들의 쓸모는 아이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찾아집니다. 어른은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쓸모를 발견하고 쓸모를 실현할 있는 여건을 제공해야 합니다.  265


교육의 전제는 '쓸모없는 능력은 없다'라는 겁니다.  269


어른은 말로 미끼를 던지고, 시선으로 겁박하면서 아이를 높이 그리고 빨리 뛰게 재촉합니다.

어른의 미끼는 무언가?

아이의 미래 모습이지요.  273


아이의 시간을 아이에게 돌려주어야 해요. 자유롭게 사용할 있는 시간을 아이에게 돌려주어야 해요. 자유롭게 사용할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아이는 행복합니다. 그들 마음대로 활용할 있는 시간이 필요해요. 시간은 순전히 아이만의 시간인 겁니다. ...

매일, 매주 아이들이 스스로 꾸미고, 만들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274


에라스무스의 사상을 토대로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선량한 행위 양식에 익숙하게 하는 ', '경건한 마음을 깊게 기르는 ', 이것이 에라스무스가 제시하는 교육의 목적 일부입니다.  279


에라스무스의 교육도 승리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겨룸의 대상이 달라요. 에라스무스는 자신과의 겨룸에서 이기고 승리를 쟁취할 있기를 원합니다. 자만심이나 교만한 마음을, 이기적이고 쓸데없는 욕심을, 탐심과 탐욕스러움을 극복할 있는 경건한 마음을 기를 있도록 노력하라는 거지요. 개개인이 노력해야 하고 그것을 돕는 것이 교육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 교육은 겸손하고 서로 조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서로 정중하게 대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라는 겁니다. 말이나 태도도 위엄이 있고, 정중해야 하고, 점잖고 엄숙해야 한다는 것이 에라스무스의 생각입니다.  283-284


가정환경은 교육환경이기도 겁니다. 인간은 환경적 존재예요. 인간은 환경에 대한 의존도가 높습니다. 환경에 의해 길러진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지요.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교육은 시작되는 겁니다... 환경의 중요도를 평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같은 환경이라도 사람에 따라 영향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 '자녀의 인격과 지성을 발달시키기 위하여 적절한 환경을 준비시키는 것은 시노가 사회에 대한 부모의 빚이다.'라는 말은 에라스무스의 생각입니다.  285


함부로, 아무나 부모가 없는 겁니다. 부모는 자체가 교과서로서의 기능을 해요. 부모의 삶은 자체로 아이의 본보기가 됩니다.  286


아이가 필요로 부모는 비로소 부모가 됩니다. 아이가 있으니 부모이고 아이를 낳았으니 부모가 아니라, 아이가 부모로서의 역할을 부여하고 부모로 인정하고 허용할 비로소 부모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필요와 요구에 맞는 역할을 하고 아이의 기대에 부응할 부모로서의 자격은 계속 유지될 있습니다. 이처럼 부모는 자녀로부터 자격이 주어집니다.  288


부모 교육이 필요해요. .. 평생 계속되어야 해요. 아이의 성장에 따라 부모의 역할도 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 변한느 아이의 요구와 필요에 맞는 맞춤식 부모 교육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289


부모는 행복해야 합니다. 기쁘고 즐거운 생활은 부모의 의무예요. 그것이 아이들의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290



Posted by WN1
,



1. 지부티의 쓰레기통


나의 미래는 아주 일찍부터 너무 위태로웠던지라 엄마는 나의 현재에 대해 결코 마음을 놓지 못했다.  13


그러니까 나는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었다. 어렸을 때, 나는 날마나 학교에서 들볶이다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왔다. 내 공책에는 선생님들의 꾸지람이 적혀 있었다. 반에서 꼴찌가 아닐 때는 꼴찌 바로 앞이었다. (축배를 들어야 할 일이었다!) 처음엔 계산, 그다음엔 수학에서 꽉 막혔고, 심각한 철자 습득 장애에다, 역사의 연대 암기와 지리의 장소 파악에도 먹통이었고, 외국어 습득 불능에다 (수업은 듣지 않고 숙제도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라는 명성이 자자했으며, 음악이나 체육 혹은 그 외의 어떤 과목으로도 벌충하지 못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성적표를 집으로 가져오곤 했다.  16


"그러니까 학교에 관한 책이 또하나 나오는 거네? 그런 책은 꽤 많지 않아?"

"학교에 관한 책이 아냐! 모두들 하굑를 다루고 있고, 신구 논쟁은 끝없이 계속되고 있어. 학교의 프로그램, 학교의 사회적인 역할, 그 궁극적인 목표, 과거의 학교와 오늘의 학교... 그런데 열등생에 관한 책은 없거든!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에 대해 그리고 그로부터 겪게 되는 정신적인 충격을 다루는 책..."

"그게 그렇게 힘들었어?"  22-23


"요컨대 넌 핑계를 만들어냈던 거야,"

그렇다. 그게 바로 열등생의 속성이다. 그들은 자신의 열등함에 대해 굽이굽이 반복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난 한심해, 난 정대 할 수 없어, 그러니 노력해볼 필요도 없어. 이미 다 망했어. 내가 그랬잖아요, 학교는 나한테 맞지 않는다고... 열등생에게 학교는 출입이 금지된 몹시 폐쇄적인 집단으로 보인다.  25


두려움은 분명 학창 시절 내내 나의 가장 큰 문제였고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교사가 된 뒤, 나의 급선무는 공부 못하는 학생들의 두려움을 치료하고 방해물을 치워버려 앎이 스며들 기회를 갖게 해주는 일이었다.  30





2. 되다


어머니들 모두가 조금은 창피해하고, 모두가 자기 아들의 미래를 걱정한다. "대체 이애가 뭐가 될까요?" 대부분의 어머니는 미래라는 강박적인 화폭에 현재를 투영해 그려놓은 것을 아이의 미래로 생각한다. 희망 없는 현재의 이미지가 터무니없이 비대하게 투영된 벽을 미래라고 생각하는 것, 바로 여기에 모든 어머니의 거대한 공포가 있다.  61


나는 우스운 이야기를 시도해본다.

"신을 웃기는 유일한 방법을 아세요?"

전화 저편의 머뭇거림.

"신에게 당신의 계획을 맗는 겁니다."

다시 말해 놀랄 것 없다는 것, 그 어떤 일도 예상대로 이렁나지 않는다는 것, 바로 그것이 미래가 과거가 되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유일한 사실이다.

물론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 쉽게 아물지 않을 상처에 반창고나 붙여주는 격일 테니까. 하지만 나는 전화로는 그렇게 하고 있다.  62-63


어떤 미래도 없다. 

뭔가 되지 못할 아이들.

절망적인 아이들.

초등학생, 다음에는 중학생, 그다음에는 고등학생이 된 나 역시 그렇게 앞날이 없는 삶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것은 바로 공부 못하는 학생이 스스로를 설득하는 최초의 사실이다. 

"이런 성적으로 뭘 기대해?"

"중1이나 마칠 수 있을 것 같니?(중2, 중3, 중4, 고1, 고2는...?)"

"대학에 들어갈 가능성이 얼마나 될 거 같아? 퍼센트로 따져 얼마나 될지 계산 좀 해볼래?"

혹은 정말로 즐거운 비명까지 질러가며 호언장담하던 중학교때 교장 선생님 같은 사람도 있다.

"페나키오니, 네가 중학교를 졸업하겠다고? 절대 그럴 수 없을 거다. 알겠니? 절대로!"

그 여자는 몸까지 부르르 떨었다.  69-70


나는 학교생활을 따라가지 못했고 언제나 그런 모습뿐이었다. 물론 시간은 지나갈 것이었고, 물론 성장할 것이었고, 물론 사건들도 일어날 것이었고, 물론 삶도 계속될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 결과에도 결코 이르지 못할 그런 실존을 횡단할 것이었다. 그것은 확신보다 더한 것이었고, 그게 나였다.

어떤 아이들은 이러한 사실에 재빨리 설득당한다. 그리하여 자신을 각성시켜줄 누군가를 찾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실패에 열정을 쏟게 된다. 열정 없이는 살 수 없으므로.  72


겨울 저녁. 나탈리가 흐느껴 울며 학교 계단을 급히 내려간다. 누군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슬픔...

선생은 생각한다. 이런, 학교의 슬픔이로군.. 

"선생님 ... 흑흑... 흑흑... 선생님... 저는 ... 저는 이해를... 이해를 못하겠어요."

"뭘 이해해? 뭘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야?"

"양... 양보..."

그리고 갑자기 병마개가 쑥 뽑히듯 단번에 답이 나온다.

"양보와 대립의 종속 접속절요."

침묵.

웃어선 안 된다.

절대 웃으면 안 된다.

"양보와 대립의 종속 접속절? 그것 때문에 그렇게 울고 있는거야?"

안도감. 선생은 재빨리. 아주 진지하게 문제의 그 접속절을 생각한다. 이 아이에게 그건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 잘 몰라도 그 절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생각한다...

".. 이건 아주 쉬운 거야. 자, 봐. 됐지, 알겠니? 그래, 예문을 하나 만들어봐. 아이는 정확한 문장을 만들어낸다. 이해한 것이다. 자, 이제 좀 괜찮니? 어! 그런데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다. 아이는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다시금 눈물을 흘리고 크게 울먹이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선생님은 아무것도 몰라요. 제 나이 열두 살하고도 반년이 지났는데, 암것도 한 일이 없어요." ...

다음날 저녁이 되어서야 나는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나탈리의 아버지는 어느 회사 간부였는데 십 년간의 성실한 직장생활 끝에 얼마 전 해고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간부직 해고 사태의 첫 사례였다. 때는 80년대 중반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실직이란 말하자면 노동직 문화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회사에서의 자기 역학을 의심하지 않았던 모범적이고 세심한(작년에 나는 나탈리의 아버지를 자주 보았다. 그는 소심하고 자신감이 너무 부족한 딸 때문에 근심이 많았다) 젊은 간부가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는 결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러고는 가족들이 모인 식탁에서 끊임없이 되뇌었다. "내 나이 서른다섯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  73-76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자살하는 일이 일어날 정도로 말이다. 이것이, 적어도 모든 면에서 나타나는 우리 교육의 균열이다.  86


들통난 거짓말, 선생님들의 분노, 부모의 슬픔, 비난, 처벌, 아마도 퇴학, 자아로의 복귀, 무기력한 죄의식, 모욕, 우울한 희열, 그들 말이 옳아, 나는 한심해, 한심해, 한심해.

난 한신한 놈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자신이 한심하다는 확신에 빠져 잇는 청소년은-이게 바로 체험이 우리에게 가르쳐줄 최소한의 사실인데-하나의 멋잇감이다.  94-95


아이의 거짓말에 동조한 어른들에 관한 이야기 중에 가장 기억할 만한 것은 내 친구 B의 동생에게 일어난 일이다. 당시 B의 동생은 열두세 살쯤이었을 것이다. 그애는 수학 시험이 겁나서 단짝 친구에게 맹장의 정확한 위치를 짚어달라고 했다. 그러더니 끔찍한 발작이 일어난 시늉을 하며 쓰러졌다. 학교 지도부는 그애의 말을 믿는 척하며 집으로 돌려보냈는지데. 어쩌면 그애를 치워버리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자 부모는-그애는 부모에게 다른 거짓말도 했다-별생각 없이 아이를 인근 병원으로 데려갔는데, 병원에서는 깜짝 놀라며 당장 수술을 했다! 수술 후, 핏빛의 기다란 뭔가가 담긴 병을 들고 나타난 외과의사는 순진하고 환한 얼굴로 이렇게 외쳤다. "수술하기를 잘했습니다. 하마터면 복막염이 될 뻔했어요!"

사회란 공유하는 거짓말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100


가장 좋은 기숙학교는 선생님들도 함께 기숙하는 학교다.  102


열등생이 선생님으로 변신한 것은 무엇에서 기인한 걸까?

덧붙여, 알파벳도 깨치지 못하던 애가 소설가로 변신한 것은?

나는 어떻게 해서 뭔가가 되었을까?  108


아이에게 장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한을 센티미터로 재라고 요구하는 꼴이다. '되다'라는 동사가 아이를 주눅들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어른들의 걱정이나 질책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게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조금도 생각해내지 못했고, 그냥 순진하게 영원히, 언제나 바보일 거라는 그들의 말을 믿었다. '영원히'와 '언제나'는 상처받은 자존심이 열등생에게 시간을 헤아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단위였다.  111


최고 권력자들이 이미 파산선고를 내렸는데 죽어라 공부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보다시피 나는 궤변론자의 태도 같은 걸 키워가고 있었다. 이것은 선생이 된 내가 열등생 제자들에게서 한눈에 구별해내는 기질이다.

그 뒤에 나의 첫번째 구원자가 나타났다.

국어 선생님. 

중4 때.

당시의 나를 있는 그대로 알아보았던 분. 즉 명랑하게 자멸해가는 진지한 망상가로 말이다.

틀림없이 그 선생님은 가르쳐준 것은 배우지 않고, 숙제 못한 핑계를 어떻게 둘러댈까 늘 잔머리를 굴리는 나의 적성에 대경 실색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 소설 한 편을 쓰라고 명령하고 대신 논술을 면제해주기로 작정한 것이다. 일주일에 한 장(章 글장)씩 써서, 한 학기에 소설 한 편을 끝내야 했다. 주제는 자유지만, 틀린 글자 하나 없는 소설을 내야 했다. 선생님은 "비평의 수준을 고양시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소설 자체는 까맣게 잊어버렸는데도 그 표현만큼은 기억난다.) 그분은 교직 말년을 우리에게 바친 노교사였다. 더이상 궁핍할 수 없는 파리 북쪽 변두리 중학교에서 당신의 은퇴를 연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 낡아빠진 기품을 지닌 노선생이 내 안의 이야기꾼 기질을 알아본 것이다. 그는 내게 철자 습득 장애가 있든 말든 학교 공부를 따라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면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주 열정적으로 소설을 썼다. 사전(그날 이후 사전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의 도움을 받아가며 조심스레 단어 하나하나를 고치고, 신문에 연재하는 전업 작가처럼 날짜를 지켜가며 매주의 분량을 갖다 냈다. 지금 떠올려보면, 아주 슬픈 이야기였고, 당시 내가 큰 영향을 받았던 토머스 하디풍의 글이었다. 토머스 하디의 소설들은 오해에서 재난으로, 재난에서 어찌할 수 없는 비극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운명에 대한 나의 취향을 매혹 했다. 출발선부터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 내 생각이 바로 그거였다.

그해 내가 뭔가에서 중요한 발전을 이루어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학창 시절 처음으로 어떤 선생님이 나에게 하나의 지위를 부여했고, 나는 계속 따라가야 할 노선이 있는 개인으로, 지속적으로 견뎌내고 있는 한 사람으로, 누군가의 눈에 학생으로 존재했다. 물론 나의 후원자인 노선생님이 미치도록 고마워쏘, 그가 꽤 거리를 두고 있었음에도 내 비밀스러운 독서를 털어놓을 만큼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래, 페나키오니, 요즘은 뭘 읽고 있니?"

나에겐 독서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게 나를 구원해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때의 독서는 요즘처럼 터무니없는 자랑거리가 아니었다. 시간 낭비이자 학업을 망치는 일로 평판이 난 소설 읽기는 수업 시간에 금지되었다. 책을 몰래 숨어서 읽는 내 취향은 거기서 비롯했다. 소설책을 교과서로 씌워 읽고, 되도록 모든 곳에 책을 숨겨두고 읽고, 야밤에 손전등을 켜고 읽고, 체육 시간을 면제받아 읽고, 혼자서 책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이든 좋았다. 이런 취미를 길러준 곳이 바로 기숙사다. 나만의 세계가 필요했는데, 그게 책들의 세계였다. 집에 있을 때는 무엇보다 식구들이 책을 읽는 모습을 관찰했다. 아버지는 파이프를 물고 안락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무릎에 책을 올려놓고 둥근 램프 아래, 나무랄 데 없는 가르마를 약지로 무심히 쓰다듬으며 읽었다. 베르나르 형은 방에서 다리를 구부린 채 옆으로 길게 누워 오른손으로 머리를 괴고 읽었다... 이런 태도들에는 행복 같은 게 있었다. 따져보면 나를 독서로 밀어붙였던 것은 책 읽는 사람의 이런 자태였다. 처음에는 오로지 그런 자세들을 따라해보려고, 그리고 다른 자세를 개발해보려고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언제나 지속되는 행복 속에 신체적으로 정착했다. 무엇을 읽었나? <미운 오리 새끼>를 나로 여겨 안데르센의 동화책들을 읽었다. 하지만 검과 말 그리고 마음의 움직임에 대한 동경으로 알렉상드르 뒤마도 읽었다. 그리고 셀마 라겔뢰프의 멋진 <예스타 베를링>, 주교에게 추방당한 그 훌륭한 술주정뱅이 사제는 에세뷔의 다른 기사들과 더불어 내 모험의 지치지 않는 동반자였다. 중3으로 올라갈 때 베르나르 형이 준 <전쟁과 평화>는 맨처음 나타냐와 안드레이 공작의 사랑 이야기로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사랑 이야기에만 집중하면 소설은 100페이지쯤으로 줄어든다. 중4 때 두번째로 그 책을 읽었을 때는 나폴레옹식의 서시시로 읽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보로디노 전투, 모스크바의 화재, 러시아군의 퇴각(나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거대한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수업 시간에 몰래 그렸던 그 작은 인간들을 학살당하게 했다). 이것은 기껏해야 200~300페이지로 압축된다. 고1 때 다시 읽었을 때는 피에르 베주호프의 우정이 눈에 들어왔다(이자는 또다른 미운 오리 새끼이긴 해도 생각보단 많은 걸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3 때 소설의 전체가, 그러니까 러시아와 쿠투조프, 클라우제비츠 같은 인물이, 토지개혁이 그리고 톨스토이가 눈에 들어왔다. 물론 디킨스-올리버 트위스트는 나를 필요로 했다-도 읽고 에밀리 브론테도 읽었다. 브론테의 모럴은 내게 구조를 요청했다. 또한 스티븐슨, 잭 런던, 오스카 와일드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을 처음으로 읽었다. 당연히 <노름꾼>이 있었다(왜 그런지는 알아봐야 하는데, 도스토옙스키는 항상 이 <노름꾼>으로 시작된다). 나의 독서는 이런 식으로 우리집 서재에서 찾아낸 책들로 이루어졌고, 물론 <탱탱> <스피루> 그리고 당시를 휩쓸었던 <흔적의 표시들> 혹은 <봅 모란> 같은 만화도 읽었다. 내가 학교로 가져가는 책들이 첫째 조건은 학교 독서 프로그램에 없는 것이어야 했다. 아무도 내게 묻지 않았다. 누구도 내 어깨 너머로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책의 저자와 나는 우리끼리 오롯이 머물렀다. 책들을 읽으면서 내가 교양을 쌓아가고 있었다는 것, 그 책들이 내 안에 어떤 욕구를 일깨웠소 그 욕구는 책들이 잊히더라도 살아남을 거라는 걸 나는 몰랐다. 청소년기이 이러한 독서는 세상의 기호들을 향해 사방의 문을 열어놓으며 완수되었고, 그중에서도 네 권의 책이 서로 구별되지 않은 채,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이유로 내 안에서 밀접한 친족관계를 직조해냈다.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 위스망스의 <거꾸로>, 롤랑 바르트의 <신화지> 그리고 페렉의 <사물들>이 바로 그 책들이다.

난 고급 독자는 아니었다. 플로베르에게는 실례가 되겠지만, 열다섯 살에 에마 보바리처럼 오로지 감각의 만족을 위해 책을 읽었고, 다행히 그 감각은 지칠 줄 모르고 나타났다. 나는 이러한 독서로부터 학교생활에 도움이 될 어떤 이득도 끌어내지 못했다. 모든 선입관과는 반대로 이처럼 삼키듯 읽은-그리고 아주 빨리 잊힌-수천 페이지의 글은 나의 철자법을 개선해주지 않았고, 철자법은 요즘도 내게 불분명한 채로 남아 언제 어디서든 사전을 찾아봐야 한다. 아니다. 내 철자법의 실수들이 일시적으로나마(하지만 이 일시적인 것이 결정적으로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극복되었던 것은 노선생님이 주문한 소설에서였다. 철자법에 신경쓰느라 독서 수준을 낮추고 싶지 않다는 선생님의 요구에 나는 틀린 글자 없는 원고를 갖다드려야만 했다. 요컨대 대단히 천재적인 교수법이었다. 아마도 오로지 나에게만 통했을, 그리고 오로지 그런 상황에서만 통했을 방법이지만, 어쨌든 천재적이다!

나는 이렇게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선생님을 중4와 고3 사이에 세 분 더 만났다.

한 분은 수학 자체였던 수학 선생님이고, 또 한 분은 역사 구현력이 누구보다 뛰어난 놀라운 재능의 역사 선생님, 그리고 나머지 한 분은 철학 선생님이다...

네 분의 선생님은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구원했다.  112-118


요컨대 우리는 뭔가가 된다.

하지만 사람은 그리 많이 변하지 않는다. 생긴 대로 된다.  123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뭔가가 된다.

예상대로 되는 일은 드물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뭔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때로 계획이 이루어지고 적성이 실현되고 밀래가 약속을 지키기도 한다.  130


우리는 뭔가가 되어간다. 살아가는 한 모두 뭔가가 되고, 때로는 뭔가를 이루어낸 사람들이 되어 서로 마주친다.  131





3. 거기 혹은 '구현의 현재'


자기불만에 휩싸인 선생은 누구보다 재빨리 학생을 야단친다.  158


수업에 완전하게 몰두하는 선생님의 현존은 단번에 감지된다. 아이들은 학기 첫 순간부터 그것을 느끼며, 우리 모두가 그것을 경험했다. 선생님이 막 들어선다. 그는 절대적으로 여기 있다. 그것은 그가 바라보는 방식, 학생들에게 인사하는 방식, 자리에 앉아 자기 책상을 차지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그는 아이들의 반응을 걱정하며 두리번거리지 않으며,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지도 않는다. 그는 처음부터 바로 자기 일에 빨려들어가 그 자리에 현존하고, 아이들 각자의 얼굴을 구별해내며, 학급은 즉시 그의 눈앞에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현존감을 얼마 전 블랑메닐의 어느 학교 교실에서 새롭게 체험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토록 생기 넘치는 아이들의 에어니를 제어하기 위해 어떻게 처신하는지 물었다.

"절대 아이들보다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아요. 그게 요령이죠." ...

"아이들과 함께 있거나 숙제를 검토할 때 나는 딴 데 가 있지 않아요."

"내가 다른 곳에 있으면 절대로 아이들과 함께할 수 없죠." ...

"아이들 각자는 자기 악기로 소리를 내고 있는 건데, 그걸 거스를 필요가 없어요. 까다로운 일은 우리의 음악가들을 잘 꿰뚫어 보고 조화를 찾아내는 거죠. 좋은 학급이란 발맞춰 행진하는 군대가 아니라 모두 함께 같은 교향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예요. 만일 그들이 땡땡거리기만 하는 작은 트라이앵글이나 브롱브롱 소리만 나는 갱바르드(말굽자석처럼 생긴 조그만 악기로, 하모니카처럼 입으로 물고 손가락을 튕겨서 소리를 낸다)를 물려받았다면, 적절한 순간에 최선을 다해 내는 그 모든 소리, 그들이 훌륭한 트라이앵글과 나무랄 데 없는 갱바르드가 되는 일, 그래서 각자의 기여가 전체에 부여한 음악의 질에 자랑스러워하는 일이죠. 조화에 대한 감각은 그들 모두를 발전시키고, 조그만 트라이앵글은 마침내 음악을 알게 되는 겁니다. 아마도 제1바이올린만큼 화려하지는 않겠지만 그 역시 똑같은 음악을 체험하는 거지요." ...

문제는 사람들이 그 아이들에게 제1바이올린 주자만 중시하는 세상을 믿게 한다는 거예요." ...

"어떤 동료들은 자신이 카라얀인 줄 알고 시골의 마을 합창단 지휘를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그들은 모두 베를린 필을 꿈꾸죠. 이해가 가는 일이에요..."  159-162


받아쓰기 - 우리의 받아쓰기가 맞춤법에 치중하여 초등 저학년에 한정된 것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철자와 문법 그리고 구문의 이해력까지 포함하며 성인들의 여가에까지 널리 활용되는 문학적 훈련을 의미한다.  170


나는 언제나 받아쓰기를 언어와의 완전한 만남으로 생각해왔다. 소리나는 대로의 언어, 이야기하는 대로의 언어, 사유하는 대로의 언어, 글로 쓰고 만드는 대로의 언어, 세심한 교정 훈련을 통해 분명해지는 의미. 왜냐하면 받아쓰기의 교정에는 텍스트의 정확한 의미에, 문법 정신에, 말들의 풍부함에 다가가고자 하는 목표 말고 다른 것은 없기 때문이다.  172


아이들이 스스로를 형편없다고 고백한 것에 대한 즉각적인 반향으로, 즉석에서 생각해낸 돌발 받아쓰기였다.

니콜라는 철자법에서 항상 빵점일 거라고 주장하는데, 그 유일한 이유는 한 번도 다른 점수를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ㅍ레데리크, 사미, 베로니크도 같은 생각입니다. 맨 처음 받아쓰기 때부터 그들은 쫓아다니던 빵점이 그들을 뒤따라와 삼켜버린 것입니다. 그애들 말로는 저마다 빵점 속에 살고 있고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자기들 주머니에 열쇠가 들었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문장을 만들어내는 도안, 아이들의 호기심을 흥겹게 일깨우려는 생각으로 각자에게 역할을 나눠주면서 문법적으로 설명할 것들을 고려했다. 동사 변화와 목적어의 위치, 보어의 위치, 보어 인칭댐ㅇ사의 위치, 주격 관계대명사 등등을.

받아쓰기가 끝나자 우리는 즉각 교정을 시작했다.

"좋아, 니콜라. 맨 첫 문장을 읽어봐라."

"'니콜라는 철자법에서 항상 빵점일 거라고 주장하는데.'"

"그게 첫 문장이야? 거기서 끝나? 확실해?"

"....."

"주의해서 읽어봐."

"아! 아니에요. '그 유일한 이유는 한 번도 다른 점수를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맨 처음 나오는 활용 동사는 뭐지?"

"'주장하는데'?"

"그래. 원형은?"

"'주장하다'요."

"몇 군 동사지?"

"어..."

"3군 동사지. 그건 좀 있다가 설명해주마. 시제는 뭐지?"

"형재형이요."

"주어는?"

"저요. 그러니까 '니콜라'요."

"인칭은?"

"3인칭 단수요."

"그래. '주장하다' 동사의 현재형 3인칭 단수지. 동사의 어미를 주의해라. 자, 이제 베로니크 차례다. 이 문장의 두번째 동사는 뭐지?"

"'못하다'요!"

"'못하다'? 확실해? 다시 읽어봐!"

"..."

"..."

"아, 아니에요, 선생님. 죄송합니다. '받아보지'예요. 그러니까 '받다' 동사요."

"어떤 시제지?"

교정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174-176


체계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은 암기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런 정신의 소유자는 작품의 진수를 이용할 줄 안다는 것이다.  187


"저는 앵무새가 아니에요!"

그들은 마지막까지 항의했고, 그건 정당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건 그런 말을 들어왔기 때문이다. 부모들, 아! 그들은 어찌나 변했는지 부모들 스스로 때로 이렇게 말한다. "페나키오니 선생님, 아이들에게 텍스트를 외우게 한다면서요? 세사에, 제 아들은 이제 어린애가 아니랍니다!" 어머님, 언어에 잇어서 만큼은 아드님은 영원히 어린애일 것이고, 어머님 자신도 아주 어린 아기이며, 저는 우스꽝스러운 어린애입니다. 우리 모두가 문학의 구어적이 ㄴ원천이 넘쳐흐르는 거대한 강에 실려가는 잔챙이 물고 기인 한은 말입니다. 아드님은 언어 안에서 헤엄치는 걸 좋아하게 될 테고, 언어에 실려 목을 축이고 젖을 취하며,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자랑스럽게 말입니다. 아이를 믿으세요. 아이는 자기 입속의 말맛, 머릿속 생각의 빛나는 불꽃을 아주 좋아하게 될 것이고, 자신의 대단한 기억력, 그 무한한 유연성, 그 울림통,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노래하게 하고 가장 분명한 생각을 울려퍼지게 하는 놀라운 음량을 발견하게 도리 것입니다. 언젠가 기억 속의 그 끝없는 동굴을 발견할 때는 언어 속에 잠겨 헤엄치며 깊숙이 잠수해 텍스트들을 건져올리는 일을 좋아할 것입니다. 평생 그것들이 그곳에서 자기 존재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즉흥적으로 그것들을 외울 수도 있고, 말들의 묘미를 위해 입 밖으로 소리내볼 수도 있다는 걸 좋아하게 될 겁니다. 그 덕분에 아이는 다시 입말이 된 문학의 전통을 아마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게 될 것입니다. 공유하기 위해서든 유혹의 유희를 위해서든 잘난 척하기 위해서든 그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는문자 이전의 시간, 생각의 존속이 오직 우리의 목소리에만 의존하던 그 시간과 다시 연결될 겁니다. 어머님은 그것을 퇴행이라고 말씀하기지만, 저는 재회라고 말하겟습니다! 앎이란 무엇보다 육체적인 것입니다. 앎을 포착하는 것은 우리의 귀와 눈이고, 그것을 옮기는 것은 우리의 입입니다. 물론 앎은 책으로부터 우리에게 오지만, 책은 우리를 벗어납니다. 생각이란 소란스러우며, 읽고자 하는 의욕은 말하려는 욕구의 유산입니다.  189-190


나는 아이들을 텍스트 속에 방치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들과 함께 그 속에 빠져든다.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아이들의 텍스트 분석을 따라가면서, 가장 어려운 글을 함께 배우기도 했다... 아이들은 읽은 내용을 이해하게 되자 기억의 능력을 찾아냈고, ...아이들은 나열된 단어를 암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단지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라 언어의 지성, 즉 타자의 언어, 타자의 사유 안에서 소리를 낸 것이다. 단순히 <에밀>을 암기한 것이 아니라 루소의 추론을 복원한 것이다.  196


지식을 가지고 유희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유희란 노력의 숨고르기이고, 심장의 또다른 박동이며, 학습에 심각한 해를 끼치기는 커녕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리고 교과를 가지고 노는 일은 그것을 제어하는 훈련이 됩니다.  200


1969년부터 1995년까지, 엄선해서 정원을 뽑은 한 학교에서 보낸 이 년을 제외하면, 내가 맡은 학생들 대둡분이 옛날의 나처럼 학교생활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었다. 가장 심한 상태에 이른 아이들은 그맘때의 나와 거의 같은 증상을 보였다. 자신감 상실, 모든 노력의 포기, 집중 불가, 산만, 과대망상, 불량배 패거리 조직. 가끔은 술도 마시고 마약도 했는데, 자기들 말로는 약한 거라고 했지만 아침에 보면 눈에 축축이 젖어 있곤 했다.  205


노력이라는 말의 개념을 다시 가르쳐주고, 결과적으로 고독과 침묵의 맛을 되찾아주고, 무엇보다 시간을, 즉 권태를 제어하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때로는 아이들을 지속되는 시간 속에 앉혀 놓기 위해 권태를 연습하라고 충고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놀리도 말고, 먹지도 말고, 대화도 하지 말고, 공부도 하지 말고, 요컨대 진짜로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 저녁 이십 분간 권태 연습을 하는 거다. 공부 시작 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야."

"음악 듣는 것도 안 돼요."

"그거야말로 안 돼."

"이십 분이요?"

"그래, 이십 분. 시계를 손에 쥐고. 오후 5시 20분부터 5시 40분까지. 곧장 집으로 돌아가 아무에게도 말을 건네지 말고, 도중에 딴 데로 새지도 말고, 게임기도 무시하고, 친구들도 못 본 체하고, 너희들 방으로 곧장 들어가 침대 옆 구석에 앉아 책가방도 열지 말고, 워크맨도 끼지 말고 게임기도 들여다보지 말고, 허공에 눈을 박고 이십 분을 기다려봐."

"뭐하러 그래요?"

"어떻게 되나 보게. 흘러가는 시간에 집중하고, 일 분도 놓치지 말고 어땠는지 내일 얘기하는 거야."

"우리가 했는지 어떻게 검사하실 거죠?"

"나야 할 수 없지."

"그리고 이십 분이 지난 다음에는요?"

"허기진 사람처럼 각자의 일에 달려드는 거야."  206-207


세상 누구도 무능함의 사과를 영원히 깨물고 있진 않는다!

가르친다는 일은 아마도 그런 것일 게다.  208


가르치든 교사가 질문을 던질 때마다 학생들이 내놓을 수 있는 답변은 세 가지다. 정답과 오답과 터무니없는 답.  213


터무니없는 대답이 오답과 다른 점은 어떤 추론의 시도도 거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흔히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터무니없는 대답은 반사적인 행위일 뿐이다.

던져진 질문에 대답한 게 아니라 자기한테 질문이 던져졌다는 사실에 대답한 것이다.  215


선생님이 던진 질문을 겨우 이해만 할 뿐이다. 그걸 고백할 수 있나? 침묵을 선택할까? 아니다. 차라리 아무 대답이나 하는 게 낫다. 가능하면 천진난만하게. 제가 엉뚱하게 빗나갔나요, 선생님? 후회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저 운을 한번 걸어봤고, 그게 실패한 것뿐이다. 저한테 빵점을 주시고 사이좋게 지냅시다. 터무니없는 대답은 무지에 대한 외교적인 고백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어떤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물론 전형적인 반항 행위를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선생님이 나를 귀찮게 굴고 나를 꼼짝 못하게 해. 선생님한테 왜 그러느냐고 물어볼까?

이 모든 경우 이런 대답에 점수를 주는 것-일테면 답안지를 교정하면서-은 아무 대답에나 점수를 주기로 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 자체가 터무니없는 교육 행위를 저지르는 일이 된다.  215-216





4.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사실 가족과 선생님들이 공부 못하는 학생에게 가장 흔히 하는 비난 중 하나가 바로 그 불가피한 지적인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다. 직접적인 비난이든("핑계 대지 마.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수많은 설명에 뒤이은 분노든("세상에, 이럴 수는 없어.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제삼자에게 건네진 정보, 즉 혐의자가 부모의 방문 앞에서 듣고 놀라게 될 말이든("분명 그 녀석이 일부러 그러는 거야!") 간에 말이다.  233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어쨌거나 이 문장의 주인공은 일부러라는 부사다. 문법을 무시하고 그 부사를 대명사 너에 직접 연결하면, '너 일부러!'가 된다. 거야는 부차적이고 그러는은 완전히 무색무취다. 중요한 것, 즉 비난받는 사람의 귀에 울려대는 말은 누가 뭐래도 너 일부러라는 말이고, 이것은 꼿꼿이 세워진 검지를 떠오르게 한다.

죄인은 바로 너야.

유일한 죄인,

그것은 고의로 그런 죄인이지!

이것이 메시지다. 

어른들의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라는 말은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 아이의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라는 말과 쌍을 이룬다.

격렬하지만 별 기대 없이 맞받아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는 거의 자동적으로 다음과 같은 대꾸를 끌어들인다.

"그러길 바란다!"

"그나마 다행이네!"

"설상가상이군!"

이 반사적인 대화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며 세상의 모든 어른은 적어도 처음에는 자신들의 반격이 정신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거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에서 일부러는 그 위력을 조금 잃고, 그런은 어떤 힘도 얻어내지 못한 채 일종의 보조 역할로 남고, 그거는 여전히 벼로 중요하지 않다. 죄지은 자가 여기서 우리 귀에 울려주려고 애쓰는 말은 아니에요라는 부정어에 연결된 대명사 나다.

너 일부러라는 어른의 말에 아이의 나 아니에요가 대응하는 것이다. 

부사도, 목적어도 없이 나만 있고, 그 안에서 아니다에 들러붙은 이 나는, 이 경우, 나는 나에게 속해 있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다. 

"아니, 분명코 넌 일부러 그랬어!"

"아니, 난 일부러 그러지 않았어요!"

"너 일부러!"

"나 아니에요!"

귀머거리들의 대화, 문제를 회피하고 파국을 연장할 필요. 우리는 해결책도 환상도 없이, 한쪽은 복종하지 않는다고, 다른 쪽은 이해받지 못했다고 확신하고는 헤어져버린다.

여기서는 문법이 여전히 유용해 보일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이 불화의 영역에 버려진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말, 즉 우리 대화의 모든 끈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던 그거라는 말에 관심을 갖기로 동의한다면 말이다.

자, 예전의 문법 연습을 조금 해보자. 내가 '개량'반 아이들과 했던 것처럼, 그냥 한번 보자는 거다.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원어는 Tu le fais expres)'라는 표현에서 그거(le)가 어떤 품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

"저요, 저요! 관사예요. 선생님!"

"관사? 어째서 관사지?"

"그거를 표현하는 le, la, les가 관사잖아요! 정관사요!"

의기양양한 어조. 뭔가 안다는 것을 선생에게 보여주었다는 표정... un, une, des는 부정관사이고, le, la, les는 정관사, 자, 봐요, 맞잖아요!

"그래? 정관사라고? 그러면 그 관사가 한정하는 명사는 도대체 어디 있지?"

"......"

찾아보지만, 명사는 없다. 난처함.

관사가 아니다. 

그럼 이 그거(le)는 뭔가?

"......"

"......"

"그건 대명사예요, 선생님!"

"브라보! 어떤 종류의 대명사지?"

"인칭대명사요!"

"그래?"

"보어대명사요!"

"그래. 아주 잘했다! 바로 그거다."

이제 교실을 떠나 우리 얘기로 다시 돌아와 어른들 사이에서 이 보어대명사를 분석해보자. 신중하게, 이 보어대명사들은 위험한 말이고, 분명한 의미 아래 깊이 숨어 있는 반(反 되돌릴반)인칭적인 폭약이라 뇌관을 잘 제거하지 않으면 여러분 얼굴로 폭발해버린다. 예를 들어 이 그거(le)..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라는 비난의 말을 하면서 그때의 그거라는 말이 그 상황에서 무엇을 표현하는지 우리는 몇 번이나 자문해보았던가? 일부러 뭘 그런다는 것일까? 가장 최근의 바보짓? 아니다. 이 비난을 던졌을 때의 우리 어조(어조 또한 있기 때문이다!)는 그 죄인이 언제나 일부러 그런다는 사실과, 매번 일부러 그러는데 최근의 바보짓은 그런 고집의 확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암시한다. 그렇다면 일부러 뭘 그런다는 것일까?

복종하지 않는다?

공부하지 않는다?

집중하지 않는다?

이해하지 않는다?

이해하려고 노력조차 않는다?

반항한다?

몹시 화가 나게 한다?

선생들을 화나게 한다?

부모들을 절망시킨다?

최악의 결점에 굴복한다?

현재를 망쳐 미래를 침몰시킨다?

세상을 조롱한다?

어, 그런 거야? 세상을 조롱하는 거야? 우리를 선동하는 거야?

그래, 말하자면 이 모든 거라고 하자.

그러면 부사의 문제가 떠오른다. 왜 일부러인가? 무슨 목적으로? 무슨 이유로? 그가 일부러 그런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목표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뭐하러 일부러 그러는가?

순간을 즐기려고? 단지 그 순간을 즐기기 위해? 하지만 불가피한 다음 순간, 즉 그가 나와 함께 보내는 다음의 십오 분은 내가 야단을 치기 때문에 아주 고약한 시간이다! 그는 야단맞는 일에 무심한 채로 게으름의 상태를 평온히 살고 싶은 걸까? 쾌락주의 같은 것? 하지만 그는 무위도식의 행복이 경멸적인 시선의 대가, 자기혐오를 낳는 결정적인 지탄의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면?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그러는가?

다른 열등생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열중하는 게 배신이라서? 젊은이가 노인에게 반항하듯, 일부러 선한 것에 대항하며 악을 즐기는 걸까? 자기 나름의 사회화 방식일까?

아무려나. 어쨌든 그것은 모더니티에 관한 가장 인기 있는 명제다. 무능한 이들의 소집단화 현상.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너나없이 불량배가 우글거리는 거대한 저지대로 도피하는 것. 이런 설명은 사회학적인 진실에 어느 정도 근거한다는 편리한 점이 있으며, 그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어떤 의구심도 없다. 하지만 이 설명은 무리의 현상이건 아니건 간에 언제나 독자적인 그 아이라는 개인을 몰아낸다. 아이는 이러저러한 순간 혼자 있게 되며, 자신의 실패를 홀로 마주하고, 자신의 미래를 홀로 마주하고, 밤에 잠들기 전에도 자기 자신과 홀로 마주한다. 이제 아이를 살펴보자. 잘 바라보자. 그 아이가 행복할 거라는 데 단돈 한푼이라도 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 아이가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사실을 말하자면 이러한 설명 중 어느 것도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 모든 설명이 다시간 그럴듯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문법 규칙 같은 것은 접어두고, 그 대명사가 문장 외부의 어떤 대상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을까? 예컨대 우리 자신으... 우리 자신의 눈에 비친 우리 이미지의 하강. 우리의 이미지 또한 바람직한 거울을 많이 필요로 한다.

무능하고 초조한 어른, 이해할 수 없는 거절의 희생자인 어른의 이미지를 타인-여기서는 한심한 학생-이 나에게 되돌려 준다고 비난하는 듯한 그것. 그렇지만 내가 그 아이에게 주입시키려는 원칙들이 건전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흩뿌려준 앎이 정당하다는 것도! 

그 아이의 고독에 어른인 나 자신의 고독이 대답한다.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그리고 그것이 반 전체의 문제가 될 때, 서른 명의 학생이 일부러 그러기 시작할 때, 교사인 나는 문화적 린치의 대사이 되고 있음을 확실히 체감한다. 그리고 그 대명사가 한 세대 전체-"우리 때는 그런 건 상상할 수도 없었어!"-에 영향을 미친다면, 연이은 세대들이 일부러 그런다면, 그때 우리는 멸종 위기에 처한 종족의 마지막 대표들로, 젊은이들(그 시절의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던 전(前 앞전) 시대의 생존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노년의 삶에서 외로움을 절감한다. 물론 여전히 명석하고, 아주 세심하고, 얼마나 유능한데! 요컨대 우리들 사이에서는 말이다. 젊었을 때는 문명화된 세대의 얼마 안 되는 증인이었던 우리가 생각은 여전히 제대로 하고 있는데도 현실로부터 어쩔 수 없이 소외된 것처럼.

소외된...

소외감은 단지 순환하는 수많은 원 밖으로 내던져진 사람들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들, 즉 힘 있는 다수인 우리 역시 위협한다. 우리를 둘러싼 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엉뚱한 분위기가 시류를 타는 순간, 소외감은 우리 역시 위협한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당혹스러운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들을 지목하도록 밀어붙인다.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고작 대명사 하나가 그토록 엄청난 고독을 말하다니!  234-241





6. 사랑한다는 말이 뜻하는 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해내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을 모두 잊게 하는 데는 한 분-단 한반!-의 선생님이면 충분하다. 

어쨌든 그것이 내가발 선생님네 대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다. 

그분은 내가 고2였을 때의 수학 선생님이다. 몸짓의 관점에서 보자면 키팅 선생과 정반대였다. 영화적인 구석이라곤 거의 없는 선생님이었으니까. 타원형 얼굴에 날카로운 목소리, 그리고 시선을 잡아끄는 특징이 전혀 없었다. 당신 책상에 앉아 우리를 기다렸고 다정하게 인사하고는 첫마디부터 우리를 수학에 들어서게 했다. 그렇게 우리를 잡아둔 시간을 무엇으로 메웠느냐고? 무엇보다 발 선생님이 가르치는 과목이자 그분이 자로잡혀 있는 듯 보였던 수학으로 메워졌다. 수학은 묘하게도 그분을 활기차고 차분하고 선량하게 만들었다. 지식 자체에서 탄생한 그 이상한 선량함, 자신의 정신을 매혹했던 '과목'을 우리와 고유하고 싶다는 그 자연스러운 욕망. 그분은 그 과목이 우리에게 혐오스러울 수 있다거나 단지 낯설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발 선생님은 자신의 과목과 제자들로 빚어진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수학의 요람에 사로잡힌 듯한 무언가가, 믿을 수 없는 순수함 같은 게 있었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한번도 스치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 또한 그분을 놀려대고 싶은 마음이 한 번도 들지 않았다. 그만큼 가르침에 대한 그의 행복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온순한 청중이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이 지부티의 쓰레기통 출신이었던 우리는 전혀 흥미로운 학생들이 아니었다. 나만 해도 야밤의 싸움질, 애정과는 거리가 먼 내면의 원한 청산에 몰두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발 선생님의 문턱을 넘어서면 우리는 마치 수학에 몰입하여 성스러워진 듯했고,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테마티코스('수학'을 뜻하는 그리스어)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어느 날, 우리 중 가장 형편없는 아이드이 자기들 낙제 점수를 자랑삼아 떠벌리고 있을 때 선생님이 미소 띤 얼굴로 자신은 '공(空)집합'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공집합에 대해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던졌고 그에 대한 우리의 단순한 대답을 아주 귀한 원석처럼 여겼는데, 이런 일이 우리를 아주 즐겁게 했다. 그러더니 칠판에 12라는 숫자를 쓰고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었다.

영악한 아이들이 대답을 시도했다.

"손가락 열두 개요!"

"모세의 12계요!"

하지만 순진무구한 그의 미소는 정말이지 우리의 기를 꺾었다. 

"너희가 바칼로레아에서 받아야 하는 최소 점수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너희가 겁을 먹지 않는다면."

그러고는

"이런 얘기는 다시 하지 않으마. 우리가 여기서 몰두해야 할것은 바칼로레아가 아니라 수학이니까.

정말로 그분은 다시는 바칼로레아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한 해동안 우리를 무지의 심연에서 조금씩 끌어올리는 일에 주력했고, 그런 우리를 매우 박식한 사람으로 여기면서 즐거워했다. 우리 자신이 아무리 부정해도, 그분은 우리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늘 경이로워했다.

"너희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엄청나게 많이 알고 있거든! 봐라, 페나키오니, 너는 네가 그걸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니?"

물론 이러한 산파술만으로 우리 모두가 수학의 귀재가 되지는 못했지만, 발 선생님은 우리를 너무도 깊던 우물에서 그 우룸의 가장자리까지, 즉 바칼로레아의 평균 점수까지 끌어올려주었다. 

다른 많은 선생님들 말에 따르면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다는 우리의 그 비참한 앞날에 대해서는 털끝만한 암시도 하지 않고서 말이다.  318-321


그분은 위대한 수학자였을까? 그리고 이듬해에 만난 지(Gi) 선생님은 대단한 역사가였을까? 재수 때 나를 가르친 S선생님은 유례없는 철학자였나? 그러리라 추측하지만 솔직히 나는 모른다. 단지 이 세 선생님이 자기 과목을 전해주려는 열정에 빠져 있었다는 것만 알 뿐이다. 선생님들은 그런 열정으로 무장하고서 낙담의 구렁텅이에 있는 나를 찾아왔고, 일단 내 두 발을 자신들의 수업에 굳건히 딛게 하고서야 나를 놓아주었다. 그들의 수업은 내 인생의 전(前)단계가 되었다. 그분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나에게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분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나 못하는 아이들이나 공평하게 대했고, 단지 공부 못하는 아이들에게 이해하려는 욕망을 되살려줄줄 알았던 것뿐이다. 그분들은 내 노력을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해주었고, 우리의 진전을 기뻐했으며, 우리의 느림에 조바심내지 않았고, 우리의 실패를 결코 개인적인 모욕으로 치부하지 않았으며, 가르치는 일의 특성과 일관성과 관대함에 근거한 더없이 엄격한 까다로움을 우리와 함께하는 가운데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점을 제외하면 달라도 너무 다른 선생님들이었다. 발 선생님은 굉장히 차분하고 잘 웃는 상이라 수학 부처님 같았고, 지 선생님은 반대로 회오리바람처럼, 태풍처럼 게으름의 외피로부터 우리를 떼어내 자신과 함께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이끌어갔다. 회의적이고 날카로운(뾰족 코, 뾰족 모자, 뽈롭 배) 철학자인 S 선생님은 잔잔한 얼굴의 통찰력으로 저녁마다 나를소란스러운 질문 속에 남겨두었고,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고 싶어 안달했다. 나는 장황한 논술문을 제출해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선생님은 교정자의 편의를 위해 좀더 간결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넌지시 덧붙였다. 

모든 점을 잘 따져보면 이 세 분의 선생님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은 모른다고 하는 우리의 고백에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철자법의 결함을 이유로 내세우며 지 선생님은 내게 얼마나 여러 번 논술문을 다시 쓰게 했던가? 발 선생님은 내가 복도에 멍하니 있거나 자습실에서 몽상에 잠겨 있었다는 이유로 얼마나 여러 번 보충수업을 시켰던가? "시간이 있으니까 우리 한 십오 분만 더 수학을 해보면 어떨까, 페나키오니? 자, 십오 분만 해보자...) 익사 위기에서 구해내려는 그 몸짓의 이미지, 자살하려는 몸짓을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저 위로 나를 끌어올리려는 그 손목, 내 옷자락을 단단히 움켜쥔 살아 있는 손의 생생한 이미지, 이런 것들이 바로 그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맨  처음 떠오르는 모습이다. 그들의 현존 안에서-그들의 과목 안에서-나는 나 자신의 모습에 눈을 떴다. 수학자인 나, 역사가인 나, 철학자인 나로. 그러한 나는 이 스승들을 만날 때까지 진정으로 여기 있다는 느낌을 방해했던 나를 한 시간 동안 잠시 잊고, 나를 괄호 속에 집어넣고, 나로부터 나를 치워버렸다.

또하나, 그분들에게는 하나의 스타일이 있었던 듯하다. 자신의 과목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그들은 예술가였다. 수업은 물론 소통 행위였지만, 그것은 거의 자발적인 창조로 통할 만큼 숙달된 지식의 소통이었다. 어찌나 편안하게 수업을 했던지 우리는 매시간의 수업 자체를 하나의 사건처럼 기억할 수 있었다. 지 선생님은 역사를 부활시켰고, 발 선생님은 수학을 재발견했으며, 소크라테스는 S선생님의 입을 통해 표현되었다! 수학공식, 평화조약, 철학개념 같은 것들이 마치 바로 그날 만들어진 것처럼 기념비적인 수업을 해주었다. 그분들은 가르치면서 사건을 창조했던 것이다.

그분들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력은 거기서 멈추었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영향력은 그랬다. 교과목을 벗어나서는 우리에게 어떤 인상을 주려 하지 않았다. 부성(父性) 이미지의 부재로 고심하는 청소년에게 유효한 영향력을 끼치는 걸 영광으로 삼는 그런 선생님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구조하는 스승이라는 의식만 가졌던 걸까? 우리는 그저 수학과 역사와 철학 과목에서 그들의 제자였고, 그게 다였다. 물론 우리는 폐쇄적인 클럽의 회원들처럼 그들의 제자라는 사실에서 약간은 속물적인 자만심을 끌어내긴 했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사십오 년 뒤, 그들 덕에 선생이 된 제자 하나가 동상을 세워줄 정도로 후계자를 자처하려 든다는 사실을 알면 누구보다 먼저 놀라워할 것이다! 그분들은 블랑메닐의 첼로 연주자처럼, 일단 집으로 돌아가면 답안지를 교정하거나 수업 준비를 하는 것 말고는 우리에 대해서는 더이상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들에게는 확실히 다른 관심사, 열린 호기심 같은 게 있었고, 그것이 그들의 힘을 키워냈을 것이고, 이것은 무엇보다 교실 안에서의 그분들의 밀도 있는 존재감을 설명해주었다.(특히 지 선생님은 내가 보기에 세상사와 도서관들을 탐식한 것 같았다.) 이 선생님들이 우리와 공유했던 것은 단지 앎만이 아니라, 앎에 대한 욕망 자체였다! 그리고 나에게 나누어준 것은 그 앎을 전달하고픈 의욕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뱃속의 허기를 느끼며 그들의 수업에 들어가곤 했다. 우리가 그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분명 관심(요즘 젊은이들 말로 하자면 존중)을 받았고, 그 관심은 우리의 숙제에 써놓은 교정 문구들, 우리들 각자에게 일일이 건네주었던 그 코멘트에도 나타나 있었다. 그 분야의 본보기는 고등사범학교 준비반에서 역사를 담당하던 봄 선생님이었는데, 그분은 우리가 제출하는 논술문의 마지막 페이지를 백지로 내게 해 각자의 글에 대한 자세한 교정 내용을-붉은색으로 빽빽하게-타이핑해 돌려주었다.

학창 시절 막바지에 만났던 이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일관성없는 공공의 군집으로 축소시키고 '그런 학급'을 극히 열등하다고 말하던 모든 선생님들에 대한 내 생각을 크게 변화시켰다.  322-326


오늘날 지구상에는 다섯 종류의 아이들이 존재한다. 제 나라안에서 고객이 된 아이, 다른 하늘 아래서 생산자가 된 아이, 다른 곳에서 군인이 된 아이, 매춘부가 된 아이, 그리고 지하철 관고판의 죽어가는 아이. 굶주리고 체념한 그 아이의 모습이 정기적으로 우리의 권태로운 시선에 걸려든다.

다섯 모두 아이들이다.

다섯 모두 도구화된 아이들.  348

고객이 된 아이들 중에는 부모의 수단을 이용하는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있다. 부모에게 돈을 받아 물건을 사거나 어떻게든 돈을 마련햇 사거나. 이 두 경우에 쓰이는 돈이 개인적인 노동의 산물인 경우는 드물 테니 어린 구매자는 대가 없이 소유권을 얻는 것이다. 아이 고객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수많은 소비에서 부모나 선생과 동일한 영역(의복, 음식, 통신기. 음악, 전자기기, 교통수단, 여가...)을 가진 아이는 아무 어려움 없이 사적인 소유권을 얻는다. 그럼으로써 아이는 자신의 교양과 교육을 담당한 어른들과 똑같은 경제적 역할을 하게 된다. 어른들처럼 시장의 거대한 한 부분을 구성하고, 어른들처럼 외화를 유통시킨다(그 외화가 아이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아이의 욕망은 부모의 욕망처럼 기계를 계속 돌리기 위해 늘 자극받고 새러워져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이는 완전한 권리를 가진 중요한 인물이다. 어른들처럼. 

자율적인 소비자.

아이의 최초 욕망에서부터.

그 만족감은 아이가 받는 사랑의 측정치로 간주된다. 

어른들이 막아보려 한들 별수없다. 시장경제사회라는 게 그렇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자기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너무도 바라던 아이였기 때문에 아이의 탄생은 부모에게 끝없는 사랑의 빚 구덩이를 파게 한다)은 아이의 욕망을 사랑하는 일이며, 그 욕망은 대단히 중대한 욕구로 재빨리 표현된다. 사랑의 욕구와 물건에 대한 욕망이 거의 마찬가지인 까닭은 사랑의 징표가 물건의 구매로 통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욕망이란...  349-350


각각의 시대는 가족간의 사랑에 자신의 언어를 강요한다. 우리 시대의 언어는 사물들의 언어를 규정한다.  352


"너희 선생들은 하나같이 똑같아! 너희에게 결핍된 건 무지한 상태에 대한 강의야! 모든 시험을 통화하고 온갖 지식의 경연대회를 통과했을 때, 그때 너희가 갖춰야 할 최초의 자질은 너희는 알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파악해내는 능력이어야 해!.."  361


요컨대 가르치겠다고 나선 자들은 자신의 학창 시절에 대해 분명한 시각을 가져야만 해. 우리를 무지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최소한의 기회라도 얻으려면 무지의 상태를 조금이라도 느껴야 하거든!"  362-363


"감정이입 하지 마! 당신들의 감정이입 따위 관심 없거든! 당신들의 그 감정이입이 우리를 침몰시켜! 누구도 당신들에게 우리 입장이 되어달라고 요구하지 않거든. 도움조차 요청할 수 없는 아이들을 구해달라는 것뿐이야, 이해할 수 있겠어? 당신들의 모든 지식에다 무지에 대한 직관을 보태달라고, 그리고 열등생을 건져내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그게 당신들 일이야! 스스로 헤쳐나가는 법을 가르쳐주면 공부 못하는 학생도 스스로 헤쳐나갈거라고! 당신들한테 요구하는 건 그게 다야!"  364


"감정이입을 치워버리면, '그것'은 어떻게 치유하지?"

여기서 그는 엄청 주저한다.

다그쳐야 한다.

"말해봐,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어도 모든 걸 다 안다며? '그것'에 대해 준비되어 있지 않고서도 가르치는 수간이 뭐야? 방법이 잇기는 한 거야?"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있는 건 방법들뿐이지! 당신들은 언제나 방법들 속으로 숨느라 시간을 보내잖아. 그 방법들만으론 충분하지 않다는 걸 마음속 깊이 잘 알면서 말이야. 뭔가가 빠져 있어."

"뭐가 빠져 있지?"

"말 못해."

"왜?"

"엄청난 말이거든."

"'감정 이입'보다 더해?"

"비교도 안 되지. 네가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아니 대학이나 그 비슷한 곳에서는 절대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이야."

"뭔데? 해봐."

"아니, 정말이지 못하겠어..."

"자, 어서!"

"난 못한다니까! 교육을 말하면서 이 말을 내뱉었다간 넌 린치당할 거야."

"......"

"......"

"......"

"사랑."  366-367


Posted by WN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