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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3.28 밤이 선생이다 - 황현산 문학동네 2013 03810



유신시대. 그 시절에 우리는 모두 괴물이었다. 불의를 불의라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시대에 사람들은 분노를 내장에 쌓아두고 살았다. ...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12

책을 읽는 사람과 모자를 쓴 사람과 낚시질을 하는 사람을 함께 그린 그림이 있다. 문제는 “이 그림에서 모자를 쓴 사람은 누구인가?”를 알아내는 것. ...  
그러나 아이는 매우 난감한 얼굴을 하더니 이렇게 되물었다. “내가 어떻게 모자 쓴 사람의 이름을 알겠어요?” ...
학교가 요구하는 학습 능력은 모자 쓴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수준의 능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학교 교육의 코드를 알아차리는 ‘눈치’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학생의 생각이나 의문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문제와 대답의 각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토론식 수업의 중용성을 역설하고, 학생이 질문을 많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코드는 토론되는 것이 아니라 규정되는 것이고, 각본에는 질문이 끼어들 틈이 없다. ...
방문교사는 “모자를 쓴 사람은 누구인가요?”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어느 사람이 모자를 쓰고 있나요?”라거나, 최소한 “누가 모자를 쓰고 있나요?”라고 물었어야 한다. 코등의 바탕을 자체가 문제라는 이야기다. 잘못된 코드는 잘못된 그만큼 더 강압적이다. 삶의 진실과 따로 노는 코드는 결코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14-15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도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죽음을 견지디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 살아 있는 삶, 다시 말해서 죽음이 함께 깃들어 있는 삶을 고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21

인간이 수수 천년 사용해온 말 속에는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리고 희망이 들어 있다.  39

우리에게 과거의 상처는 너무 악착스럽고, 미래에의 걱정은 갈수록 두터워질 뿐이다. 그래서 현재는 그만큼 줄어들고 눈앞의 삶을 깊이 있는게 누리는 것이 용서되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가 미래의 걱정거리로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학은 지금 이 자리의 살에 자신을 자유롭게 바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하려고 오랫동안 노력해왔다. 대학의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자유의 시간과 공간이 없이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구실 아래 그 자유는 줄어들었으며 이제는 거의 폐기되기까지 했다.  42

이런저런 사건들이 늘 ‘어느 날 갑자기’의 형식으로 찾아오는 곳에서, 사람들의 생각이 변덕스럽지 않기는 어렵다. ‘어느 날 갑지기’앞에서 놀라지 않게 하는 일은 인문학이 늘 내세우는 일이고, 사실 내세워야 할 일이다.  ... 생각을 생산하는 일이 아니라 생각을 소비하는 일에만 매달릴 때 그 위기는 피할 수 없다.  57

판단하고 선택하기전에 모든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가려놓은 채, 생명에 삽질을 하고 시멘트를 발라 둑을 쌓아둔다면, 거기 고이는 것은 창조하는 자의 사랑이 아니라 굴종하는 자의 증오일 것이다.  100

우리는 너무나 많은 폭력 속에 살고 있고, 그 폭력에 의지하여 살기까지 한다. 긴급한 이유도 없이 강의 물줄기를 바꿔 시멘트를 처바르고, 수수만년 세월이 만든 바닷가의 아름다운 바위를 한 시절의 이득을 위해 깨부수는 것이 폭력이고, 복잡한 거리에서 꼬리물기를 하는 것도 폭력이다. 저 높은 크레인 위에 한 인간을 1년이 다 되도록 세워둔 것이나, 그 일에 항의하는 사람을 감옥에 가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아이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너는 앞자리에 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다. 의심스러운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며,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도 따리고 보면 폭력이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폭력이 폭력인 것을 깨닫고, 깨닫게 하는 것이 학교 폭력에 대한 지속적인 처방이다.  115

경영이 교육과 학문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이루어지지 않고, 거꾸로 교육과 학문이 학교 경영을 위한 수단이 될 때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123

우리의 삶이 아무리 비천해도 그 고통까지 마비시키지는 못한다.  124

권태롭다는 것은 삶이 그 의미의 줄기를 얻지 못해 사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감수성을 잃었다는 것이다. 유행에 기민한 감각은 사물에 대한 진정한 감수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거기에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온갖 것들에 대한 싫증이 있을 뿐이며, 새로운 것의 번쩍거리는 빛으로 시선의 깊이를 대신하려는 나태함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며 마음의 깊은 곳에 그 기억을 간직할 때에만 사물도 그 깊은 내면을 열어 보인다. 그래서 사물에 대한 감수성이란 자아의 내면에서 그 깊이를 끌어내는 능력이며, 그것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 나와 세상을 함께 길들이려는 관대한 마음이다. 제 깊이를 지니고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은 세상을 살지 않는 것이나 같다.  192

삶을 깊이 있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은 우리가 마음을 쏟기만 한다면 우리의 주변 어디에나 숨어 있다.  매우 하찮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 삶을 구성하는 것 하나하나에 깊이를 뚫어 마음을 쌓지 않는다면 저 바깥에 대한 지식도 쌓일 자리가 없다. 정신이 부지런한 자에게는 어디에나 희망이 있다고 새삼스럽게 말해야겠다.  212

나로 말하면, 에르노의 소설에서처럼 희생이란 이름 아래 착취당했던 아버지의 아들이며, 줌파 라히리의 소설에서처럼 아들 앞에 해결해야 할 문젯거리로 서 있는 아버지이다. 그런데 우리 세대 작가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그렸던가,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어떤 기호이거나 험난한 역사의 곡절에 안표가 되는 정도의 추상적 형식을 넘어선 적이 있던가. 지금 2, 30대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 아버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 죄는 우리 세대에서 비롯된 것이 확실하다.  227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폭력이 폭력인 줄을 알지 못한다.  231

한 시대에 어떤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덕성과 학식으로 어떤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의견을 공공장소에 영원히, 그것도 토론이 가능하지 않은 형식으로, 내세울 권리는 없다. 겸손하지 않은 도덕은 그 자체가 폭력이다.  233

코드에는 소비가 있을 뿐 생산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 코드는 간편한 데 생산은 어렵고 복잡하다.  279

나는 누구나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시간을, 다시 말해서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남이 모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281

컴퓨터나 핸드폰 같은 물건들은 삶을 투명하게 만든다. 내가 어느 구석에 들어가 있어도 그것들은 나를 추적한다. 아니, 그것들이 나를 추적하기 전에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다는 표적을 내 스스로 남겨놓도록 유도한다. ...  이런 투명성에는 사회적으로 유용한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사람살이란 묘한 것이어서 우리는 투명한 것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불투명한 것을 획책한다. 산중에 수도하러 들어간 사람은 자신을 물처럼 투명하게 만들려 하면서도 세상이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이 되려 한다. 대도시에 나와 간결하고 명료한 삶을 살려는 젊은이의 욕망에는 또한 자신을 군중 속에 감추려는 열망이 함께 따라붙는다. 인터넷은 인간들의 모든 삶을 한꺼번에 끌어안기 위해 그 그물을 더욱 넓고 더욱 촘촘하게 짜겠지만, 사람들은 또 어디로 피해 달아나 은근한 사이트를 구성할 것이다. 그래서 그 그물이 더 커진다. 불투명한 것들이 투명한 것의 힘을 만든다. 인간의 미래는 여전히 저 불투명한 것들과 그것들의 근거지인 은밀한 시간에 달려 있다.  283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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