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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5 현제

생각/내용 2010. 9. 18. 10:26


로마는 원로원이 66세의 네르바를 제위(帝位)에 추대하면서부터 원로원과 황제의 현명한 타협의 정치체제가 확립되어, 영국의 역사가 E.기번이 ‘인류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라고 절찬한 5현제의 시대가 열렸다. 사회복지 정책의 네르바(재위 96∼98), 최초의 속주(屬州) 출신(에스파냐) 황제로서 적극적인 대외정책과 자선사업을 추진한 트라야누스(재위 98∼117), 반평생을 속주순행(屬州巡幸)에 바친 그리스 문화의 애호가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 경건한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 동분서주하며 외적과 맞선 철인(哲人)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는 각각 전(前) 황제의 양자가 되어, 원로원의 ! 승인을 얻어 제위에 올랐다.

  이 시대의 특징은 제국의 영토가 확대되고 비교적 평화가 계속된 데에 있다. 특히 트라야누스는 동방 나바타이왕국을 합병한 데 이어 파르티아왕국의 수도 크테시폰을 공략하고, 다키아(현재의 루마니아) ·아라비아(나바타이) ·메소포타미아 ·아시리아 등의 속주를 추가하여 제국의 판도가 가장 넓은 시기를 이루었다. 북쪽은 라인 ·도나우 두 강을 자연적 국경으로 하고, 도나우강 하류에서는 다키아까지를 영역으로 하였으며, 동쪽은 유프라테스강과 아라비아사막, 남쪽은 사하라사막에까지 판도가 미쳤다.

  다음의 하드리아누스 때에는 수세(守勢)로 바뀌어 제국 각지를 순수(巡狩)하면서 국경방위 강화에 힘쓰는 한편, 속주의 통치조직 ·제국행정제도 ·관료제도 ·군제(軍制) 등을 개선 ·정비하였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때에 들어와 동부 국경에서는 파르티아군의 침입을 받고, 제국 각지에 전염병이 만연하여 인구는 현저하게 감소하였다. 황제는 동분서주하면서, 특히 북쪽 변경 수비에 몰두하였다. 더구나 다뉴브강 중류 유역에서 밀려온 게르만인의 침입을 끝내 저지하지 못하고 그들 일부에게 제국 내의 토지를 주어 소작농으로 만들고 그들에게 제국 방위를 맡길 수 밖에 없었다

네르바(재위 96∼98), 트라야누스(재위 98∼117),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의 5제(帝)를 말한다. 이 시대에는 제위(帝位)는 세습(世襲)이 아니라 원로원의원(元老院議員)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을 황제로 지명하였기 때문에, 훌륭한 황제가 속출하여 이 호칭이 생겼다.
이 시대에는 로마 제국의 정치가 안정되었으며, 경제도 번영하고 영토 또한 최대의 판도에 이르렀고, 그 문화는 속주(屬州) 각지에 파급되어 제국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었다.

각 황제의 업적


네르바(재위 96∼98).
로마의 5현제 시대를 연 황제이다. 71년과 90년에 집정관(執政官)에 취임하였다. 96년 9월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자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의 추대로 황제에 즉위하여 원로원과 협조하여 선정을 폈고, 반란의 주모자와 그리스도교도에 대해서도 관대하였다.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하여 후계자로 삼았다.

트라야누스(재위 98∼117)

트라야누스 초상


바이티카 이탈리카 출생. 오현제(五賢帝) 중 제2대 황제이다. 에스파냐 출신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특히 군인으로서 명망이 높아 군대의 신망을 얻었으며, 네르바제(帝)의 양자가 되어 제위를 계승하였다. 원로원과의 협조 자세를 유지하고, 빈민 자녀의 부양정책, 이탈리아의 도시 ·농촌 회복시책을 추진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로마제국 판도의 확장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도나우강을 건너 다키아를 정복하여 속주로 하였으며, 또 남쪽으로는 사하라사막의 경계까지 진출하여 요소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다시 동방으로는 나바타이왕국을 병합하여 속주 아라비아로 하였으며,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파르티아군을 몰아내고 아시리아까지도 속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후 파르티아의 반격, 이집트 ·유대의 반란을 당하여 아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포기하였다. 동방으로부터 로마로 귀환 도중 병사하였다. 로마제국 최대의 판도를 과시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

 하드리아누스 초상


오현제(五賢帝)의 한 사람. 로마 출생. 트라야누스 황제의 조카. 군사 ·정치의 요직을 거쳐,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때는 시리아 지사(知事)로 있었는데, 트라야누스가 임종시에 그를 양자로 삼자, 현지에서 즉위하였다. 선제(先帝)의 대외 적극정책에서 수세(守勢)로 전환하여, 방위를 강화하는 한편, 국력의 충실에 힘썼다.
치세의 반쯤을 속주(屬州)의 순유(巡遊)시찰에 소비하고, 브리타니아에는 장성(長城)을 구축(하드리아누스 성벽), 게르마니아의 방벽(防壁)을 강화하였으며, 파르티아와 화의를 체결, 아르메니아를 보호국 지위로 되돌려놓았다. 또한, 속주 여러 도시의 건설 ·육성, 공공시설의 충실에도 진력하고, 아테네와 로마에 각종 신전을 건조하였다.
이렇듯 속주통치조직, 제국 행정제도, 관료제도, 군사제도의 정비에 힘써, 이후 제국 제반 제도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로마법의 학문연구도 촉진시키고, 문예 ·회화 ·산술을 애호하고, 학자들을 우대하였다. 안토니누스피우스를 양자로 삼았는데, 사후에는 그에 의하여 신격화(神格化)되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

안토니누스의 두상


정식 이름은 Titus Aurelius Fulvus Boionius Antoninus Pius. 피우스란 경건(敬虔)한 자를 뜻한다. 120년에 콘술(집정관)이 되고 또 이탈리아의 사법행정을 지배하였으며, 뒤에 아시아주 총독을 지냈다.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양자가 되고 그가 죽은 뒤 즉위하였고, 원로원으로부터 피우스의 칭호를 받았다. 관대하고 인자하며 온건하여 거의 대부분 로마를 떠나지 않고 정치를 하여, 대체적으로 평화로운 치세를 누렸다. 관리의 지위를 안정시키고 속주(屬州)의 부담을 줄이며 재정을 건전하게 하여 번영을 구가하였다. 사회정책도 추진하여 그리스도교 박해를 금지시켰고, 원로원과의 협조도 잘되어 중앙집권화의 실적을 올렸다. 대지진으로 파괴된 그리스 ·소아시아 ·로도스의 도시들을 재건하는 등 속주의 번영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 법학자를 등용하였고, 황후 파우스티나의 죽음을 기념하여 대규모의 자녀부양시설로 여자고아원을 설립하였다. 외부에 대하여는 방어적이어서 브리타니아에 안토니누스 장성(長城)을 구축하여 변경의 경비를 굳게 하였다. 그러나 변경도 차차 시끄러워졌고, 그가 죽은 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후계자로 즉위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초상
한자명 안돈(安敦). 121년 로마에서 출생하였다. 5현제(賢帝)의 마지막 황제로, 후기 스토아파(派)의 철학자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양자가 된 후 140년 로마의 콘술(집정관)이 되었고, 145년 안토니누스의 딸(사촌누이)과 결혼, 161년 안토니누스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로 즉위하였다.
당시의 로마제국은 경제적·군사적으로 어려운 시기여서 변방에는 외적의 침입이 잦았으며, 특히 도나우강(江) 쪽에서는 마르코만니족 및 쿠아디족이 자주 침입하여 그 방비에 힘썼다. 그동안 페스트가 유행하여 제국은 피폐하고, 게르만족과의 전쟁에 시달리면서 발칸 북방의 시리아 및 이집트 등의 진영(陣營)에서 병을 얻어 도나우 강변의 진중에서 죽었다.
유명한 《명상록(冥想錄)》은 이 진중에서 쓴 것으로 스토아적 철인의 정관(靜觀)과 황제의 격무라는 모순에 고민하는 인간의 애조(哀調)가 담겨 있다. 여기서 그의 철학은 본질적으로는 반 세기 전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한층 내면적으로 침잠해 들어오는 철학을 이루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것은 불이며, 신적(神的)인 세계 영혼으로 관통되고 살려지게 되고 지배받고 있으며, 인간의 영혼도 세계 영혼의 한 유출물에 불과하여 죽으면 자연히 세계 영혼에 귀일하게 된다.
물질적·육체적인 세계의 모든 것은 이 신적인 이성에 의하여 운명적·자연필연적으로, 그러면서도 신적·합법칙적으로 끊임없이 생멸변화(生滅變化)하고 있다. 따라서 개물(個物)·개인(個人)은 그 이름도 기억도 이 필연의 운동 속에서 소멸되고, 망각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자연필연의 이법(理法)을 확인하여 이를 신의 섭리라 믿고, 외적인 어느 것에도 마음을 괴롭히는 일이 없이 주어진 운명을 감수하며, 내적으로 자유롭고 명랑하고 조용하고 경건하게 그의 죽음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있어서는 철학자와 황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그가 죽은 후 로마제국은 쇠퇴하였다. 로마시에는 ‘마르코만니전쟁’을 부조(浮彫)한 기념주(記念柱)와 그의 기마상(騎馬像)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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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누스의 제정 시작과 5현제 시대


1. 옥타비아누스의 원수정

악티온 해전에서 승리한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실제적으로 로마의 모든 지배권을 갖고, 로마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는 과거 다른 군인지배자들이 로마를 지배한 방식인 <군사독재관>이라는 형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로마를 다스립니다. 그것이 앞서 설명한 <원수정>의 형태입니다.

<원수정>이란, 집정관, 호민관 등이 존재하는 공화정 형태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정치형태를 만들어가는 과도기의 체제를 말합니다.

실제 옥타비아누스가 <원수정>이라는 정치체제에서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했는지 볼까요?

일단 옥타비아누스는 대외적으로는 속주의 모든 통제권을 장악한 <총독>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대내적으로는 호민관이면서, 집정관이였습니다. 옥타비아누스의 군사력을 두려워한 원로원 의원들은 옥타비아누스를 원로원 명부의 1번째에 기록해 두었는데, 이 것은 옥타비아누스가 공화정이라는 정치체제에서 <제 1의 시민>임을 의미합니다. 제 1의 시민이라는 의미로 옥타비아누스를 <프린캡스>라고 부릅니다. 로마가 공화정이기 때문에 왕이 아니라 <시민>으로 부른 것이지요. 그러나 실제 왕과 다를 바 없는 독재권력입니다.

이렇게 총독, 호민관, 집정관이라는 3가지 통치권력을 독점한 공화정은 이미 공화정이 아닙니다. 공화정처럼 보일 뿐이지요. 이러한 독재적인 옥타비아누스의 공화정을 <원수정>이라고 합니다.

2. 로마 제정이 시작되다.

<원수정>을 완성한 옥타비아누스 앞에 원로원은 무력했습니다. 원로원은 최후 권한인 <국가 비상시 원로원의 총책임권 ; 비상대권>마저 옥타비아누스에게 바칩니다. 원로원은 군사지휘권, 속주관리권을 모두 옥타비아누스에게 넘기면서, 그에게 존엄자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내립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리게 되면서 이제 로마는 황제가 다스리는 <제정>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즉, 공화정을 유지한 채 군사권, 재정권 등 통치실권을 장악한 <원수정>의 단계가 있었기 때문에 피를 흘리거나,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바로 평화로운 <제정>단계가 시작된 것이지요.

제 1의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황제 즉위 후 바로 군사, 재정권을 황제 직속으로 장악합니다.

로마와 속주의 로마시민은 정규군으로 편제하고, 속주의 원주민은 보조군으로 편제합니다. 이들은 각각 재산정도에 따라 기병, 보병으로 편제되었습니다. 특히 속주원주민들도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데, 그 이유는 제대 후에 시민권을 보장하거나, 노후보장을 완벽하게 처리해주는 과거 마리우스나 카이사르의 <사병화>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고급지휘관은 원로원 계급에서 황제가 직접 임명하되, 임기는 1년으로 딱 제한해버리고, 실제 군권은 황제의 친위대나 황제의 친속에게 두었습니다. 상설해군을 창설하여 군대를 강하게 만들어, 해외 개척의 기반도 만들죠.

이러한 모든 군권은 로마 황제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원로원은 군권에 있어 아무런 힘이 없죠.

그럼 이렇게 모든 군권에 로마국가가 아닌 황제권에 속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옥타비아누스가 군권 장악과 함께 재정권 장악을 동시에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속주의 재정을 철저하게 감시합니다. 징세청부업자를 확실하게 감독하여, 국가가 속주의 모든 징세제도를 통제하였습니다. 속주의 인구조사, 호적정리, 재산평가 등이 확실하게 이루어진 것이죠. 그 바탕에서 로마의 재정 대부분은 황제의 재정이 된 것입니다. 또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친 악티온 해전 이후 이집트는 옥타비아누스의 사적 재산이였습니다. 그 방대한 아프리카 대륙의 재산만 가지고도 황제는 군권을 쉽게 장악할 수 있었고, 원로원을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군사 재정은 황제의 사적 재정이 투입되는 형식이였습니다. 이로서 황제는 모든 군권을 장악하게 되어 200년간의 로마 평화 시대(Pax Romana)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 무렵 모라의 북방 한계선인 라인강-다뉴브강 경계가 완성됩니다.

3. 아우구스투스 사후의 양자제도와 혼란

로마의 평화 시대는 5현재로 대표되는 로마 제국의 강성기를 말합니다.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황제가 자신의 후계자를 가장 적합한 인물 중에서 선별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양자상속제도가 확립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럼 아우구스투스 사후부터 로마의 평화 시대까지를 간략하게 볼까요?

아우구스투스는 자식복이 없어서 양자인 티베리우스에게 제국을 물려주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55세에 황제에 올랐으나, 곧 조카 아들인 가이우스에게 왕위를 양보합니다. 그러나 가이우스는 친위대장에게 살해되고, 숙부인 클라우디우스가 황제가 됩니다.

클라우디우스는 황제의 행정권을 독식하기 위하여 자신의 노예들을 해방시켜 정치에 참여시키는 <해방노예>정치를 합니다. 이 해방노예들은 황제직속의 관리로서 유능한자는 부자가 될 수 있었으며, 일부는 에퀴테스 계급으로 신분 상승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 황제도 자식복이 없었습니다. 당시 황제들이 자식복이 없는 건 특이한 일이지요.

클라우디우스는 3번이나 결혼 경력이 있는 부인 아그리피나에게 암살당합니다.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를 암살한 것은 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네로>를 황제에 올리기 위해서죠. 네로가 16세에 황제가 되자, 아그리피나의 섭정시대가 시작됩니다. 당시, 로마에는 큰 화재가 발생했는데, 네로는 그 화제의 원인을 그리스도교의 소행으로 꾸며 그들을 대학살합니다. 유명한 소설 <퀴어바디스>에서 베드로가 순교했다는 이야기도 이 화재와 관련이 있습니다. 네로는 자신을 도운 재상 세네카도 반역죄를 조작하여 죽여버립니다. 또, 자신의 어머니 아그리피나가 자신을 유혹하여 결혼하려고 하자 어머니를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아그리피나는 아들이 자신의 뜻대로 안되자, 클라우디우스의 다른 어린 왕자를 왕으로 삼으려는 음모를 꾸미다 <네로>에게 비참하게 죽습니다. 일설에는 네로가 어머니까지 죽이려고 자작극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느 쪽이든 이 두 모자가 독한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네로의 이러한 폭정은 로마인의 반란을 초래하여 네로는 자결하고 맙니다.

4. Pax Romana : 로마의 평화 시대가 시작되다.

이러한 로마의 혼란 속에서 원로원 의원 네르바가 원로원의 추대로 황제에 올랐습니다. 네로 이후 궁중의 암투와 처절한 권력싸움에 이골이 난 원로원은 이제 황제라는 자리를 무능한 자식이나 친족에게 물려주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이 네르바 황제 이후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5황제 시대에는 모두 현명한 자를 양자로 삼아 황제를 잇게하는 정통이 생겼는데, 이것을 <양자상속제>라고 하며, 이 시대를 <5현제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현명한 5황제의 시대가 바로 팍스 로마나라고 불리는 로마 제국의 전성기 시대입니다.

5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학파의 철인황제로서 <명상록>과 같은 명저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부터 게르만족의 침입 및 파르티아의 침입이 늘어나는 시기였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일부 이민족이 로마 영내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하고 로마군대에 입대하는 것도 허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으로 로마는 사회체제가 변하기 시작합니다. 강력한 로마인의 군대는 이 시대를 기점으로 사라져가고, 로마 변경을 수비하기 위해 <야만인>이라 불리는 게르만과 이민족이 로마를 지키기 시작했으니까요.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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