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이 책에 니체가 일한 곳들의 모습, 니체가 무언가를 기록하거나 원고를 준비하거나 교정을 본 지방과 장소의 풍경을 담았다.  4



서문

니체는 왕의 은혜로 목사 자리를 얻게 된 시골 루터교 목사의 아들, 귀족을 공경하고 서민을 경멸하는 아이로 남아 있었고, 어른이 되어서는 현대의 중요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 거의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유럽인(특히 독일인), 민족주의, 제국주의, 군국주의에 대한 주요 비평가 중 한 명이었다.  9


아주 일찍부터 니체는 자신이 '단지'독일인일 뿐 아니라 유럽인이라고 생각했다. 열다섯 살 때는 남부 이탈리아인, 스위스인, 북부 독일인 주인공들이 각자의 운명을 펼치는 [카프리와 헬골란트]라는 단편을 썼는데, 이야기 초반에 북부의 영웅인 폰 아델스베르크는 "우리는 이 세상의 순례자다. 우리의 조국은 어디에나 있고 아무 곳에도 없다. 우리 모두는 같은 태양이 비춘다. 우리는 이 세상의 시민들이다. 지구가 우리 왕국이다!"(니체 초기 작품집)라고 선언한다.  10


1880년대 중반에 니체는 자신을 "고국이 없는" 유럽인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FW, 377;3, 628~631)  11


니체는 글을 쓰기위해, 그만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즉 서구 문화(종교, 과학, 학문, 권력욕)를 종말로 몰아가고 있는 금욕주의의 계보와 그러한 금욕주의를 굴복시킬 수 있길 바라며 발전시킨 사상('같은 것의 영원회귀')을 쓰기 위해 유럽이 필요했다.  12


글을 잘 쓰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말을 잘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글을 더 잘 쓴다는 것은 더 나은 생각을 한다는 의미다. 전할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항상 생각해내고 실제로 그것을 전하는 법을 안다는 의미다.(MAM2, WS 87, 2, 592~593)  13


니체는 좋은 유럽인이 되려면 내면에 대한 순종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사람은 자신이 쓰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면의 소리를 들은 뒤 그것을 쓰는 데 도움이 되는 장소로 서둘러 가야 한다.  14


니체는 자연에 대해 박물학자라기보다 우주론자였고 도시에 대해서는 건툭가라기보다 문화비평가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 방대한 역사 지식, 고도의 문학 감수성, 고대 신화의 세계와 문화에 대한 친밀함, 이 모든 것이 니체와 자연, 도시의 유대를 풍요롭게 해주었다.  19




제1장 시작과 끝


'나는 어린 시절부터 혼자 있는 걸 좋아했고, 방해받지 않고 내 자신에게 몰두할 수 있을 때가 가장 기분이 좋았다...'(J1, 8)

열여섯 살 때 쓴 기록에서는 같은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려준다. "아주 일찍부터 내 안의 다양한 특성이 나타났다. 나는 사색적이고 과묵한 편이어서 다른 아이들과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가끔씩 나도 모르게 열정이 표출되기도 했지만."(J1, 279)  46


글쓰기와 작곡은 혼자 있기 좋아하는 사람이 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일들로 보인다. 열네 살 때 니체는 "나는 항상 혼자만을 위한 작은 책을 쓰고 싶었다. 나는 아직도 이 소박한 허영에 사로잡혀 있다"(J1, 11)라고 썼다. 니체는 마흔 살 때도 다시 같은 글을 썼을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 보면 니체는 항상 모든 사람에게 읽히기 위한 책을 썼지만 한편으로는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을 책을 쓴 것이다.  73


엄격한 질서를 내세운 학교에서 학생들을 동질화시키는 훈육이었다. 

이런 식의 훈육은 집단 전체의 효과를 노리고 짜여졌기 때문에 개인을 냉정하고 추상적으로 다룬다.  78


"..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할 수 있는 한 스스로 견딜 만한 존재로 자신을 위장하는 일일까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적당히 노력해서 할 수 있는 한 가장 좁은 테두리 안에서 사는 데 익숙해지는 겁니다. 정신이라는 초의 심지를 멋지게 잘라내고 부를 좇고 세상의 오락을 즐기며 사는 것이지요. 아니면 인생의 추잡한 면과 우리가 인생을 즐기려 할수록 오히려 더 인생의 노예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 인생의 좋은 것들을 단념하고 포기를 연습할 수도 있어요.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드에게는 우호적으로 대하면서도.(우리는 누추한 우리 동료들에게 동정심을 느끼니까요.) 한마디로 오늘날의 지나치게 달콤하고 모호한 기독교가 아니라 원래 기독교의 엄중한 요구에 따라 사는 것이지요. 기독교는 지나는 길에 "동행하거나", 유행이니까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인생은 견딜 만할까요? 예, 그렇고말고요. 인생의 짐이 계속 가벼워지고 어떤 끈도 더 이상 우리를 그 짐에 묶어놓지 않으니까요. 괴롭지 않게 포기할 수 있으니 인생은 견딜 만한 것이 됩니다."(B2, 95~96)  83-84


본에서 라이프치히로 옮겨갈 무렵 니체는 헤겔의 철학을 두루 섭렵했다...

니체는 랠프월도 에머슨의 독일어 번역본을 오랫동안 읽었다. 에머슨은 여러해 동안 니체의 충실하고 지속적인 동반자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헤겔은 곧 칸트와 쇼펜하우어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  87


'우리 학자 대부분이 학식을 너무 꽉 채우지만 않는다면 학자로서 더 가치가 높아질 거야.'(B2, 205~206)  90




제2장 나는 신이 되느니 바젤의 교수가 될 것입니다


니체는 대학에서 그리스 문학사, 플라톤 이전의 철학, 그리스와 로마의 수사학, 고대 그리스 종교, 플라톤의 생애와 가르침, 아이스킬로스의 <공양하는 여자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헤시오도스의 <노동과 나날>을 가르쳤다. 김나지움에서는 플라톤의 <변명>, <파이돈>, <파이드로스>, <향연>, <국가>, <프로타곻라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엄선된 책들, 아이스킬로스의 <포박된 프로메테우스>,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를 가르쳤다. 학생들은 에우리피데스의 <바카이>를 읽고 디오니소스 숭배에 대한 각자의 느낌을 보고서로 써야 했다.  139-140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를 준비하며 쓴 기록에서 니체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대충 가르치거나 애매하게 설명했다면 모든 학생이 내게 더 많은 설며오가 해석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교사는 모든 수준의 학생들을 이해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140


김나지움과 대학의 많은 학생이 니체의 능변과 탁월한 명석함에 대한 증언을 남겼지만 개인적인 면에 대한 묘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동료들은 니체에게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실제로 동료들은 1874년에 니체를 학과장으로 선출했는데, 니체와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어도 그를 신뢰했음을 알 수 있다. 니체는 지루한 디너파티에서 빠져나가려고 변명을 해야 하는 일이 불만스러웠다. 그는 혼자 바깥에서 산택하는 편을 훨씬 더 선호했다. 니체의 고독과 자기수양은 아마도 나중에 그가 금욕적인 이상이라고 분석한 것의 결실일 것이다.  142


니체는 학창 시절 초기에 존재의 균열을 느낀 적이 있었다. 특히 슐포르타에서는 예술과 음악에 대한 끌림이 비판을 받아 억제되었다. 보노가 라이프치히에서는 문헌학이 그를 신학으로부터 구해주었지만 '포기'와 '체념'의 삶을 선고받았다. 마지막으로 바젤에서는 일상의 고되고 단조로운 일이 그의 에너지를 빼앗아갔고 트립셴을 방문할 때도 지성과 취향에 있어서 많은 걸 타협해야 했다. 답답한 상태가 점점 더 심해지자 니체의 건강은 더 악화될 조짐을 보엿다... 이러한 위기에 대한 대응은 여행을 가는 것이엇다.(여행이 항상 니체의 첫 번째 대응 방법이었다).  165


니체는 루가노에서 <비극의 탄생>을 탈고하면서 이미 자신의 직업적 자아, 교수로서의 자아에 균열, 분열 혹은 정신분열의 압박감을 느꼈다. "나는 스스로 문헌학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예리하게 느끼고 있다. 그것도 완전히 심각한 상태다. 찬사와 비난, 내가 이쪽에서 받았던 실로 가장 고귀한 찬미가를 생각하면 몸이 떨린다. 그래서 나는 서서히 철학적 존재로 옮겨가고 있고 이미 자신에 대한 믿음도 생겼다. 뿐만 아니라 시인이 될 준비도 이미 되어 있다."(B3, 190)  171


니체는 유대인의 종교와 도덕률에 대해서는 계속 양면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유럽의 고급문화를 대체로 유대인들이 만들어냈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176


인간은 투병생활을 통해 자신의 삶과 한계를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 어떤 일에 집중하고 신중하게 계획을 세울 기회를 얻는다. 다른 한편 병이 들면 약해지고 낙담하여 어떤 진지한 계획을 세울 용기를 잃어버린 채 망성이고 위축되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니체는 한 음악가 친구에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의 이유를 잊은 채 사는 병든 생황이다"라고 써싿. 1875년 8월 11일에는 파리의 말비다 폰 마이젠부크에게 편지를 썼다.

".. 우리가 완전히 낫기 위한 비법은 둔감해지는 것입니다. 그 방법만이 우리 내면의 엄청난 연약함과 고통에 대한 유일한 해독제이지요. 적어도 외부의 어떤 것도 우리와 충돌하여 쉽게 해를 끼칠 수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튼 동시에 내부와 외부 양쪽의 불과 맞서야 하는 것보다 제게 더 힘든 일은 없습니다."(B5, 104)  191-192


'골똘히 생각하고 글을 끼적거리는 문제 많은 습성은 지금까지 내 건강을 해쳤을 뿐이다. 내가 단순히 학자 입장이었을 때에는 건강을 해쳤을 뿐이다. 내가 단순히 학자 입장이었을 때에는 건강했다. 하지만 그 뒤로 음악에 관한 것들로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난해하기 그지없는 철학과 별 의미도 없는 수만 가지 일이 나를 걱정으로 몰아넣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교사가 되고 싶다.'(B2, 250)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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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12월 3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출판용 제목과 내용이 준비되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심리학적 질문이 주를 이루고 형이상학적 질문이 부차적인 책으로, 어쩌면 형이상학과 윤리학의 계보를 탐구하는 니체의 성향이 마침내 꽅을 피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211-213


스위스 '시민권'을 포기하면서 그에게는 다시 집이 없어졌다. 니체는 새로운 아침을 찾아 더 멀리 산속으로 달아났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묘사했던 바로 그 방랑자가 된 것이다.

방랑자. 조금이라도 이성의 자유를 얻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지상에서 스스로 방랑자라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가는 여행자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방랑장게는 그런 목표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반면 방랑자는 세상의 모든 일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유심히 관찰하고 살필 것이다. 그래서 방랑자는 어떤 특정한 일에 지나치게 애착을 가져서는 안된다. 오로지 변화와 무상함에서 기쁨을 찾는 자가 되어야 한다.  217




제3장 높은 산의 고독


니체의 유랑생활에는 주기가 있었다. 겨울은 지중해에서, 여름은 고지 엥가딘의 산에거 보냈다. 여름에는 먼저 제노바에 갔다가 니스로 향했고, 겨울에는 항상 질스마리아에서 지냈다.  24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1부에서 4부까지 모두 1883년과 1885년 사이에 쓰이고 출판되었다(4부는 자비로 출판했다). 니체의 편지들이나 철학적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사람을 보라>는 <차라투스트라>가 니체의 가장 위대한 성취이자 걸작임을 알려준다.  266


'이제 나는 <차라투스트라>가 나오게 된 내력에 대해 설명하겠다. 이 책의 기본 개념인 영원회귀 사상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긍정 형식이며, 1881년 8월에 떠오른 사상이다. 이것은 "인간과 시간의 6000피트(1830미터)저편"이라고 서명된 종이에 적혔다. 그날 나는 실바플라나 호수 근처의 숲을 산책하다가 주를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옆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곳에서 이 사사이 내게로 왔다.'(W6, 355)

영원회귀 사상의 고향이 질스의 산속이라면 <차라투스트라>는 이탈리아 리비에라에서 탄생했다.  267


<차라투스트라> 1부를 완성한 니체는 하인리히 쾨셀리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책을 "일종의 설교"이자 자신의 최고작, "자신의 영혼에서 굴러나온 보석 같은" 책이라고 불렀다. "내 손에서 나온 책 중에서 이보다 더 진지하거나 역동적인 것은 없네. 나는-다른 색과 섞어 사용할 필요가 없는-이 색이 지금부터 내 '본래의' 색이되길 진심으로 바라네."  268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1884년 2월 6일에는 오버베크에게 이렇게 열변을 토했다. 

'전반적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수십 년 동안 내 안에 쌓여온 힘이 폭발한 것일세. ...'(B6, 475)  272


니체는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악의 저편>을 "내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일종의 논평"이라고 말했다.(B7, 270) 나중에 게오르크 브란데스에게는 <선악의 저편>이 자신의 모든 저작의 "열쇠"이므로 자신의 철학을 전체적으로 공부하려면 그 책으로 시작하라고 권했다...

쾨셀리츠에게(B7, 166~167)쓴 편지다. "나는 책을 쓰면서 힘들게 지난 겨울을 보냈네. 용기, 그 책을 출판하는 데 필요한 용기가 때로 마구 흔들렸다네. 이 책에는 다음 제목을 붙였네."

<선악의 저편>

미래 철학의 서곡  278 


<선악의 저편>에서는 철학자들의 편견, 특히 분명하게 정의된 가치들의 대립에 대한 철학자들의 순진한 믿음, 신앙(특히 그리스도교)의 기원, 도덕의 '자연발생사', 학문과 학문적 훈련의 현 상태 및 함께 학문을 연마하는 사람들의 '덕',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귀함의 의미 등을 다루었다. 니체는 이 책에서 플라톤 이후 서구의 형이상학과 윤리학의 모든 전통을 수용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279


1887년 11월 <도덕의 계보>가 출판. 6월 10일에서 17일 사이에 <도덕의 계보>를 썼다. 이 책은 형식 면에서는 1880년대 초기의 아포리즘 작품들보다 1870년대에 쓴 <반시대적 고찰>과 더 유사하다. <도덕의 계보>의 세 논문은 각각 (1) '선과 악' '좋음과 나쁨' (2) '죄'와 '양심의 가책' (3) 서구의 종교, 도덕 체계, 학문, 철학에서의 '금욕적 이상'의 의미를 다룬 일관되고 세심하게 구성된 명상이다. 그러나 문체는 이전의 어떤 글보다 상당히 더 예리하고 심지어 신랄하기까지 했다.  282


니체는 <도덕의 계보>를 <선악의 저편>의 부록 혹은 보충서라고 불렀지만 이 책의 발단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흔한번째 생일인 1885년 10월 15일에 니체는 하인리히 폰 슈타인 남작에게 최근 '양심'에 관한 파울 레의 책을 읽었다고 쓰면서 "얼마나 공허하고 지루하며 오류가 많은지!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것들에 관해서만 이야기해야 합니다"라고 부르짖었다.(B7, 99) ...

20세기 들어 많은 사상가, 특히 미셸 푸코, 질 들뢰즈가 니체의 도덕의 계보 작업을 확장했다. 이들에게는 니체의 '논쟁'이 분명 그의 가장 중요한 성취 가운데 하나였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를 <선악의 저편>ㅗ가 비교하면서, 후자는 음조가 "중립적이고" 아주 천천히, 심지어 머뭇거리며 리듬이 발전한다고 묘사한 반면, <도덕의 계보>는 "노골적이고 가공되지 않은 파릇파릇한 열정"으로 알레그로 페로체(빠르고 거칠게)로 쓰였다고 말했다.(B8, 245)  283


니체 자신은 수월하게 술술 쓰였던 <우상의 황혼>이 자신의 사상을 잘 소개해준다고 생각했다. "그 책은 내 철학의 완벽하고 총체적인 입문서다."(B8, 414) ..

실제로 니체는 <우상의 황혼>이 특히 <안티크리스트> 입문서로서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291


<안티크리스트>

가장 유명한 장으로는 '소크라테스의 문제' '어떻게 참된 세계가 결국 한갓 꾸며낸 이야기가 되어버렸는지'등이 있고 가장 신랄한 장으로는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방법에 관한 다음의 충고가 포함된 '독일인에게 모자란 것'을 꼽을 수 있다.

'인간은 보는 법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세 가지가 지향하는 것은 고결한 문화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눈을 평온과 인내, 일들이 자신에게 다가오게 놔두는 데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판단을 미루고 특정한 경우를 모든 측면에서 탐색하고 검토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비철학적인 용어로 강한 의지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강한 의지에서 본질적인 것은 결정을 보류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보류할 수 있는 '능력'이다. (..) 춤을 배우려고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법도 배우려고 해야 한다. 생각은 일종의 춤이다. (..) 발로도 춤출 수 있지만 개념과 단어로도 춤을 출 수 있다. 펜으로도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는 말과 사람들이 글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을 꼭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W6, 108~110)  291-292


니체가 고지 엥가딘에서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 것은 고독이었다. 고독은 여행객들과 단절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부의 한 기록에서 여행객들을 이렇게 정의했다. '여행객-그들은 동물들처럼 말없이 땀에 젖어 산을 기어오른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길가에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고 말해주는 것을 잊어버렸다.'(W2, 641) 하지만 여기에는 가족과 친구들, 혹은 좀더 정확히 말하면 간헐적이고 주의 깊게 조정된 인맥과의 단절도 포함되었다. 니체는 고독과 외로움 사이의 악명 높은 가느다란 줄 위에 자리잡기 위해, 즉 사람이 아무도 없는 땅에서 살기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301


1884년 여름에 니체는 자신의 '문헌', 즉 <비극의 탄생>부터 <차라투스트라>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쓴 모든 책을 읽었다. 마흔 번째 생일을 앞두고 있던 니체는 자신의 30대를 평가하며 40대의 계획을 세우는 데 몰두했다.  308




제4장 바다와의 친밀한 대화


<아침놀>의 서문에서 니체는 독자들에게 옛 문헌학자, 즉 이성(logos)을 사랑하고 "천천히 읽는 법을 가르치는 교사"를 위해 이 책은 느린 박자로 천천히 읽으라고 당부했다.(W3, 17) 또한 <즐거운 학문>의 서문은 이 책을 즐거움, 즉 "되돌아온 힘, 다시 한번 열린 바다에 대한 갑작스런 느낌과 예감에 직면해 터져나오는 환호성"이라고 선언했다.(W3, 346)  360


라팔로와 니스, 즉 이탈리아 리비에라와 프랑스 리비에라는 모두 <차라투스트라>의 주요 집필 장소였다. 우리는 종종 차라투스트라를 산속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초인과 영원회귀에 관한 생각을 가르치기 위해 인간들에게 갔으며 산에서 내려갔을 때는 바다에서 가장 자주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367


니체는 유랑생활을 했던 10년 동안 실명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도 니체는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모든 학술서, 형이상학, 지식론, 종교와 도덕의 역사에 관한 책들뿐 아니라 시와 소설도 읽었다. 니스에 있을 때였기에 프랑스어 번역판으로 읽은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니체를 사로잡았다. 니체는 도스토옙스키가 스탕달 이후 자신과 재능과 통찰력을 공유한 유일한 심리학자라도 주장했다.  380


바닷가에서건, 높은 산에서건 1880뇬댜애 니체를 괴롭힌 풀리지 않는 딜레마는 고독과, 사람들과의 교류의 필요성이었다. 특히 1880년대 중반에 니스에서 지내면서 니체는 남을 가르치고 싶은 깊은 욕망에 시달렸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가르치고 전해야 했다. 그러나 니체에게 배우려는 사람들은 종종 "평번한 애호가들"로 판별되었고, 타렵적으로 교제하는니 완전한 고독이 나아 보였다. 따라서 니체의 편지들에서 우리는 심한 고독과 고독의 부재, 불충분한 교제와 과도한 교제에 대한 상충되는 불만이 공존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384


메타 폰 살리스는 니체가 이야기를 매우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고 "주변의 단순한 일도 무시하지 않았다"고 전한다.(N2, 529~530) 한 예로, 잔 두리쉬가 추수기 직전에 황소의 발굽과 입에 병이 났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자 니체는 진심으로 관심을 보였다. 아무리 체제 전복적인 일을 한다 해도 니체에게는 누군가와 자신의 열정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이 니체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폰 살리스는 "그는 상냥하고 상처입기 쉬운 사람이었다. 또한 화합할 준비가 되어 있고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고 말한다. "반면 그가 하는 작업은 준엄함을 요구하고 타협을 금했으며 그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과 비통함을 가져다주었다."(N2, 530)  386


'지금 저는 세계사에 남을 만큼 냉소적으로 제 자신에 관한 글을 썼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라는 제목의 이 책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최소한의 죄책감도 없이 암살합니다. 이 책은 기독교적인 모든 것, 혹은 기독교에 감염되어 청력과 시력을 잃어버릴 모두를 공격하는 천둥과 번개로 끝납니다. 궁극적으로 저는 그리스도교를 분석하는 최초의 심리학자입니다. 늙은 포병이 된 저는 어떤 그리스도교 반대자도 상상하지 못한 강력한 총을 꺼내들 수 있습니다. 이 책 전체는 완성된 채 제 앞에 놓여 있는 <모든 가치의 재평가>의 서문입니다...'(B8, 482~483)  412-413




옮긴이의 말

이 책은 단순한 전기가 아니라 니체의 삶, 니체가 머물렀던 공간, 인간관계를 니체가 쓴 글들과 교차시켜가며 엮어내고 있다.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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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기본적으로 <바가바드기타>의 해설서이다. 해설서이긴하되 일반적으로 알려진 해설을 되짚어보고 또 뒤집어보려 한다.

재해설서이기도 하다.  17


<기타>가 인도와 힌두교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힌두교의 전형적인 신학자가 알려주는 다음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베다(Veda)>는 히말라야 설산의 정상과 같습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순백(純白)의 정상은 마치 신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장소와 같습니다. '앎'을 뜻하는 베다란 곧 계시입니다. 여러 <우파니샤드>는 그 정상의 백설이 녹아 흐르는 실개천들과 같스비낟. 눈의 결정(結晶)과 같은 계시의 말씀을 인간이 이해하고 체험하면 그 눈이 녹아 인간의 마음에 흐르는 지혜가 될 것입니다. '우파니샤드'라는 말의 뜻처럼 '가까이 내려 앉아' 겸손하게 그 말씀의 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타>는 그 여러 실개천이 모여서 이루어진 산정호수와 같습니다. 인간이 경험한 가지각색의 지혜는 흐르고 흘러 결국 하나의 진리로 수렴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여러 실개천이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모습과 같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기타(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진리의 기타는 하나뿐이랍니다. 진리는 하나인데 시인들이 여러 방식으로 노래를 부른다고 <베다>에서도 말하지 않습니까.'

<베다>라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 가운데 하나이고, <우파니샤드>라는 것은 <베다>의 끝부분을 형성하는 문헌이다.

<기타>는 이 두 문헌의 위대한 지혜를 모아 보다 대중적인 목소리로 재현한 작품이다.  27-28


호수로 강물이 흘러들어오고 흘러나가듯이 <기타>는 그 이전에 나타난 사고체계의 종착역이요, 그 이후에 등장하는 사고체계의 출발점이다.  29


<기타>를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 많다면(실제로 매우 많을 것이다.), 다음의 세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기타>는 본래 누구든지 이해하기 어렵다.

<기타>가 불가해(不可解)하거나 난해(難解)하다는 점이다.

둘째, <기타>는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지만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이해가 불가능하다.

<기타>를 탓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탓하라는 것이다.

셋째, <기타>는 읽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 이해의 폭이 천차만별이다.

자기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만큼 <기타>를 이해할 수 잇다는 현실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32-33


<기타>를 향한 맹목적인 숭배는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이분법적 견해와도 관련이 있다.

동도서기는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동양을 정신문명으로, 서양을 물질문명으로 나누면서 동양의 정신문명이 더 우월하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믿는 사상이다.

진정 동양은 정신문명이고 성양은 물질문명인지 묻지 않은 채 동양의 어떤 정신문명이 구체적으로 더 우월한지 찾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아울러 진정 동양의 정신문명이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지와 구호만 있는 곳에는 내용이 빈약하다.  35


무작정 <기타>의 위대함조차 식민지 시대의 통치 전략으로 조작된 것일 수 있으니 그 위대함을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찾아보자는 것이 포함된다.  39


<기타>를 읽을 때는 무엇보다 역사적 배경을 충분히 숙지해야 한다.

<마하바라타>와 이 서사시의 0.7%를 차지하는 <기타>.  40


<기타>의 특징을 말하면

첫째, <마하바라타>의 주인공은 왕족이지만 이 서사시가 '민중의 베다'(민중을 위해 민중의 삶을 녹여서 만든 마치 계시와도 같은 앎)라고 불리듯이 대부분의 가르침은 민중을 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타>의 주인공도 왕족이지만 신의 노래(가르침)는 민중을 위한 것이다. <베다>는 인도에 본래 살고 있던 토착민의 사상, 종교, 신화, 전설, 제도, 풍습 등이 반영되고 종합된 문헌이다.

둘째, <마하바라타>에는 고대 인도를 좌지우지하던 여러 사유체계가 절묘하게 혼합되어 있다. <기타>도 여러 상반된 사상과 사고 방식이 잘 반죽된 채 다양성의 통일을 보여준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 반죽이 너무 성급해서인지 서로 다른 사유 체계 간의 관계를 그려내는 것이 고르지 않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 때문에 <기타>를 읽기가 쉽지 않다.

셋째, <마하바라타>는 근본적으로 인도 또는 힌두의 영웅 이야기이고 이 영웅을 중심으로 인도의 민족 정체성과 힌두의 종교 정체성을 은연중에 강화한다. <기타>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넷째, <마하바라타>는 고대 인도에 힌두교 식의 사회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시키기 위해 힌두교 방식의 도덕을 곳곳에 담고 있다. <기타>는 드러내놓고 그러한 도덕을 강력하게 설파한다.

<마하바라타>가 성립한 시기는 불교가 융성한 시기와 겹친다. 당시 불교의 확산에 두려움을 느낀 힌두교의 지배층은 민중을 힌두교에 단단히 붗들어놓기 위해 민중의 삶을 <마하바라타>로 끌어들였다.  41-42


<기타>를 신비화하는 나쁜 사례들이다.  

첫째, <기타>를 깨달은 사람의 전유물로 간주한다.

둘째, <기타>의 모든 가르침을 영적인 것으로 만든다.

셋째, <기타>의 문제를 독자의 문제로 돌린다.

넷째, <기타>에 대한 파격적인 해석을 깔본다.  45-46


역사적 배경을 짚어가면서 <기타>에 접근하는 것도 왕도는 아니다. 그래도 이 접근이 중요한 이유는 균형감가 때문이다. <기타>를 신비화하는 쪽으로 지나치게 평행저울이 기울어 있어서 그 반대쪽에 무게를 더해주기 위해서다.  47


이 책의 중요한 목적은 <기타>에 대해 새로운 읽기가 지속적으로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데 있다.  48


마하트마 간디의 해석.. 기본적으로 그는 <마하바라타>의 전쟁 자체를 육신의 싸움이 아닌 정신의 싸움으로 보며, 정신의 싸움 중에서도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 사이의 싸움으로 본다.  58


아르주나와 크리슈나의 대화는 명상에 비유되기도 한다.

결론은? <기타>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최고의 영적인 스승이 인도하는 가운데 삶의 길을 잃은 듯한 어두운 영혼의 제자가 내면의 명상을 통해 기쁨의 빛이 충만한 경지를 체험하는 과정이다.

결국 모든 문제는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발생하고 또 마음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기타>의 숨은 가르침이다.  60


흑백 논리를 거부한다면 그 대척점에 회색 논리가 있다.  61

높은 품격의 회색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극단적이고 극성스런 흑백 논리를 물리치는 회색이다. 세상의 모든 일을 선과 악으로 확실히 나눌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 회색의 임무이다 회색은 흑백을 나누는 기준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63


<마하바라타>는 10만여 편의 시가 얽히고 설키면서 무수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만 이야기의 종착역은 그저 삶의 덧없음이다.  65


아르주나가 누구인가? 

그는 판다바의 다섯 형제 가운데 셋째로서 왕자의 신분이었고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대단한 장수였다. 특히 활에 관하여 그 어떤 적수도 없는 신궁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무사의 의무인 싸움을 철저하게 수행했으며 모든 왕자 가운데 가장 정의롭다고 알려졌다. 고귀한 신분인 데다 자신의 의무에 늘 충설하며 균형 잡힌 정의감을 가진, 한마디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아르주나 "우리가 이기든 저들이 우리를 이기든 어느 쪽이 우리에게 더 좋은지 우리는 그점을 알지 못합니다. 바로 저들을 죽이고서는 우리가 살고 싶지 않은데 저 드리타라슈트라(백부님)의 아들들이 반대편에 정렬해 있습니다. 연민이라는 해악으로 말미암아 제 본성이 뒤흔들리고 정의(의무)에 대한 제 생각이 혼란스러우니 당신께 여쭙니다...."(2.6~2.8)

여태껏 자신이 굳건하게 올바르다고 믿던 것들이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정의로운 것과 정의롭지 않은 것을 나름대로 확실히 구분하면서 잘 살아왔는데 전쟁을 앞두고 머릿속이 새까맣게 변하면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 고백은 그가 철처하게 회색의 인간으로 서 있음을 암시한다.  71-73

"크리슈나여 양 군대 사이에 저의 마차를 세워주십시오. 싸우기를 원하여 정렬된 저들을 제가 관찰하는 데까지, 시작되려는 전쟁에서 누가 저와 더불어 싸워야만 하는가를 제가 관찰하는 데까지..."(1.20~1.23)  75


아르주나가 그 사이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굳건한 기준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으리라. (양 군대 사이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적군으로 진열해 있는 친족들을 가까이서 보지 못했을 것이다. 친족들을 가까이서 보지 못했다면 아마도 그는 동요되지 않았을 것이다.)  76


요점은 이거예요. 언제든지 우리 삶은 회색의 현실감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거예요. 음, 물론 출발점이 그렇다는 거고 도착점이 그래서는 안 되겠죠. 회색의 현실감을 인정하되 항상 그 회색에서 빠져 나오도록 애써야 한다는 거예요. 회색에서는 도통 의지할 게 없으니 보통 사람이 계속 회색으로 살아가기는 힘들어요. 빠져나와야 하죠.  80


하나, 크리슈나는 고통에 빠져 있는 아르주나의 마음에 커다란 충격을 던지는 말을 한다. 매우 당혹스러운 조언의 요점은 이러하다. '전쟁터에서 육신을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을 죽일 수는 없다. 육신과 달리 영혼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둘, 아르주나는 최후에 크리슈나의 가르침을 다 듣고서 자신의 모든 미혹이 사라졌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잘못된 생각들이 사라졌고 올바른 생각들로 채워졋다는 것이다. 생각이 바뀌면서 난제가 다 해결되엇다면 그것이 마음의 ㅣ문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애초에 아르주나는 스스로 자신의 어리석음과 혼란을 고백한다. 크리슈나 역시 첫 가르침에서 아르주나더러 지혜로운 척하지 말라고 하낟. 이처럼 모든 것은 어리석은 생각 때문이다.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기타>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셋, 아르주나가 고통을 겪는 큰 이유는 너무 많은 생각 때문이므로 키리슈나는 내내 그것을 버리라고 충고한다. 생각을 넘어선 상상이고 상상을 넘어선 망상이다. 그래서 크리슈나는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 행동의 결과를 미리 생각하면서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89-90


<기타>에서 아르주나는 정의롭지 못한 적군에 대비하여 자신의 정의로움에 자부심을 가져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고 있다. 아르주나는 자신의 본성에 맞게 전쟁터에서 진실하게 행동해야 함에도 자신을 속이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크리슈나가 '싸우라!'고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너 자신과 싸우라'고 하는 뜻이다. 자신 안에 놓여 있는 유약함과 거짓됨을 물리치기 위해 그렇게 만든 원인을 찾아 당당하게 대면하고 싸우라는 뜻이다. 따라서 싸우라는 가르침은 폭력의 가르침이 아니다. 도리어 자신과 싸워 이김으로써 진리에 도달하게 만드는 가혹하고 냉철한 비폭력의 가르침이다.  116


라즈니쉬의 <기타> 해석은 간디보다도 한발 더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일단 제가 주목한 부분은 이 구절입니다. <기타>에서 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가치한 자신의 의무가 잘 실행된 타인의 의무보다 낫다오. 자신의 의무 속에서 죽는 것이 낫다오. 타이느이 의무는 두려움을 초래한다오"(3.35) 여기서 자신의 의무와 타인의 의무가 나옵니다. 타인의 의무가 아무리 좋다 한들 초라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아르주나는 무사이기 때문에 무사로서의 자기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조언인 셈이지요. 아르주나가 누굽니까? 천하에 둘도 없는 장수입니다. 장수면 장수답게 전쟁에서 싸워야지 자기가 마치 승려인 양 이상한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117


아르주나에게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라고 조언한 것은 자기 본성에 충실하라고 조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을 왜곡해서 보지 말고 제대로 보라는 것이지요.  118


<기타>에서 비폭력주의를 이끌어낸 것은 언제부터일까?  '비폭력'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아힘사'에서 기원한다. 이 단어는 불살생 즉 살생하지 않음을 뜻한다. 

<기타>에서 요가란 정신을 수련하여 보다 더 잘 살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삶의 길을 가리킨다.

인도인이 따르는 가장 전형적인 세 가지 좋은 삶의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 잘 살기 위한 세 가지 길을 뜻하는 그 세 가지 요가는 주로 지혜(지식)의 요가, 행위의 요가, 사랑(신애, 헌신)의 요가로 불린다.

이런 큰 츨 아래 이 세상에서 세 유형의 인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유형은 앎을 좋아하고 둘째 유형은 행동을 좋아하고 셋째 유형은 감정을 좋아한다. 첫째는 머리로 살고 둘째는 팔과 다리로 살며 셋째는 심장으로 산다. 이 세 유형이 각각 차례대로 지혜, 행위, 사랑의 요가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왜 <기타>의 크리슈나는 세 가지 요가를 가르칠까? 이유는 꽤 분명하다. 전쟁에서 싸우지 않으려는 아르주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다.  144

 

지혜의 요가 - 지혜의 요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는 우리의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보지요. 이 무지를 없애기 위해서 지혜의 길을 내세우는 거예요.

지혜란 뭘까요?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을 구별해서 아는 힘을 가리키지요.

불변하는 것을 그 누구도 소멸시킬 수는 없다오. 이 유한한 육신들이란 영원하고 불멸하며 불가사의한 영혼의 것이라고 말해진다오. 육신은 영원하지 않은 반면 영혼은 영원한 것이라는 가르침이죠.

행위의 요가 - 크리슈나는 행위를 탁월하게 잘하는 것이 행위의 요가라고 말해요. 크리슈나는 '행위에 대해서도 깨달아야만 하고 그릇된 행위에 대해서도 깨달아야만 하며 행위를 하지 않음에 대해서도 깨달아야만 하기 때문이오. 행위의 길은 심오하다오'(4.17)

행위의 요가란 행위를 하되 행위의 결과에 신경쓰지 말고 행위 자체에 몰두하라는 거예요. 

사랑의 요가 - '나에게 모든 행위를 바치고서 나를 지고한 자로 여기며 오로지 전념하는 요가로써 나를 명상하면서 숭배하는 자들에게, 나에게 마음이 몰입된 자들에게, 머지않아 나는 죽음과 윤회의 바다로부터 구해주는 구세주가 된다오. 아르주나여, 바로 나에게 마음을 고정하시오. 나에게 생각을 고정하시오. 그 결과로부터 그대는 의심 없이 바로 나에게 머물 것이오.'(12.6~12.8)

어떤 행위를 하든지 마치 신의 행위인 양 항상 조심스럽게 하라는 거니까요.  177-180


<기타>에서 크리슈나의 모든 설교는 어김없이 이 세가지 요가로 분류된다.  181


각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길이 어떤 모습으로 얽히고설켜 있는지 <기타>는 광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상상의 최고 정점에서의 대답은 이것이다. '얽히고 설켜 있는 모양새가 어떠하든지 모든 요가가 하나고 모든 길이 하나다.'  183


행위의 방법, 행위의 본성, 행위의 근거를 죄다 탐구해야만 보다 성공적인 행위가 나온다는 거지요. 그리고 행위의 방법은 행위의 요가이고 행위의 본성은 지혜의 요가이고 행위의 근거는 사랑의 요가.  197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욕망도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욕망이 없으면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이 없으면 욕망이 없다.' 이것은 <우파니샤드>의 가르침과도 흡사하다. 두려움이 없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자유이다.  201


작은 것과 큰 것, 작은 결과와 큰 결과, 작은 행복과 큰 행복, 이것은 인도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이층의 사유이다. 일틍은 작운 것의 공간이고 이층은 큰 것의 공간이다. 일층은 시간이 흐르는 무상한 공간이고 이층은 시간이 멈춘 영원한 공간이다. 보통 사람들은 일층에서 살지만 가끔 이층에 도달하는 경우도 있다.  218


'왜냐하면 태어난 것은 명백하게 죽고 죽은 것은 명백하게 태어나기 때문이라오.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그대는 슬퍼하지 않아야 하오.'(2.27)


제어할 수 없는 것은 제어할 수 없고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제어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둘을 뒤 섞는다. 제어할 수 없는 것을 제어하려고 하고, 제어할 수 있는것을 제어하지 않으려고 한다. 즉 운명을 제어하려고 하고 욕망을 제어하지 않으려고 한다. 즉 운명을 제어하려고 하고 욕망을 제어하지 않으려고 한다.

<기타>의 결론은 이 둘을 뒤섞지 말라는 것이다. 제어할 수 없는것과 제어할 수 있는 것을 분명하게 구별하면서 사는 지혜를 가지라는 말이다.  245


힌두교 연구자를 만난다면 그는 업 이론의 기원과 내용을 다름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해 주리라.

"업 이론이라는 건 쉽게 생각해서 '뿌린 대로 거둔다'는 내용이죠. 사실 굉장히 합리적인 이론이에요. 이 이론은 세 가지 이유에서 만들어졌어요. 첫째는 이 세계가 우연적이지 않고 뭔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제시하기 위해서예요. 콩 심은 대는 콩이 나야지 팥이 나면 안 되잖아요. 둘째는 이 세상의불공평함을 설명하기 위해서예요. 누구는 부자로 태어나고 누구는 가난뱅이로 태어나는 그러한 차별을 설명하고 싶은 거죠. 셋째는 숙명이 아닌 자유의지로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확인시키기 위해서예요.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죠. 연재의 삶이 과거에 뿌린 것 때문에 결정된다면 그건 숙명론이에요. 하지만 현재에 무엇을 뿌리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면 이건 자유의지잖아요. 그래요. 업 이론은 확정된 운명을 조금은 받아들이되 자유의지로써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가기 위해 처음 창안된 건데 어쩌다 보니 운명에 순종하는 이론으로만 잘못 알려지고 말았어요."


애당초 업 이론은 숙명론적인 사고방식보다 운명을 개척하는 사고방식에 더 가까웠다. 새로운 씨앗을 잘 뿌리기만 하면 언젠가 훨씬 나은 열매를 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점차 두 가지 특면에서 숙명론이 되었다. 하나는 현재의 고통을 참으면 그 결과로 더 좋은 세상이 오므로 현재의 고통을 숙명인 양 여기면서 인내하라는 것. 다른 하나는 현재의 모든 삶은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고 가치가 있으므로 현재의 위치를 숙명인 듯 수용한 채 만족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매우 적극적으로 운명에 도전하던 인생관은 사라지고 그 운명에 대해 체념하는 인생관이 나타난다. 업은 반드시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 된다. 업은 굴레가 되고 속박이 된다. 자우의 반대말이 되는 것이다. 급기야 업 자체가 고통이다.  246-248


어쩌면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자유를 외치는 목소리가 크면 클수록 그만큼 구속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을 가능성도 더 높아지요. 더 강하게 구속하기 위해서는 자유의 달콤함을 담은 희망의 찬가를 계속 틀어주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기타>는 자유의 창문을 열어놓고 잇는 듯하지만 좁은 창문으로 빠져나가려는 사람을 열심히 다시 불러들이죠. 그를 운명의 하수인으로 만들고 순응적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예요.'  248-249


"법전의 명령(가르침)을 내버린 채 욕망에 따라 행하는 자는 완성에 도달하지 못하고 행복이나 지고한 목적지에도 도달하지 못한다오."(16.23)

크리슈나의 이 말은 다음의 두 가지를 암시한다. 하나, 반드시 행해야만 하는 행위 이외에 다른 행위들을 결코 행해서는 안 된다. 둘, 반드시 행해야만 하는 행위를 하는 자는 행복이나 지고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250


<기타>는 힌두교의 최고신이 인간에게 들려주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노래이다. <기타>는 많은 사람이 귀 기울여 들을 만한 가르침을 담은 지혜서이다. 

어렵지 않게 실행할 수 있는 방법들로 다음 몇 가지를 제시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생명력 있는 내용을 구하기 위한 방법들이다.

첫째, 과대평가와 과소평가를 하지 않도록 한다. <기타>를 신비주의나 영성주의의 시각에서 접근할 때 주로 과대평가에 빠진다. 또 <기타>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지혜를 담고 있다거나 인류에게 가장 보편적인 지혜를 담고 있다고 여기는 것도 엉성한 과대평가이다.

인도인이 <기타>를 과대평가하는 간접적인 예가 있다. 조금만 가방끈이 긴 사람이라면 <기타>의 어느 한 구절을 암송하면서 삶에서 대면하는 이런 저런 문제에 관해 그 구절로써 평가하거나 적용하려는 태도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는 <기타>를 인용하기 위한 인용일 뿐 거의 설득력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은 것처럼 우스꽝스럽다. <기타> 만능주의에 빠진 듯한 사람은 <기타>를 경외하기만 할 뿐 이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른다.

과소평가는 어쩌면 더 위험할 수 있다. 이성과 합리성의 시대에 어찌 미개한 인도의 고대 문헌을 가져와서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바탕 난잡한 말들을 풀어놓느냐, 하는 그런태도다. 눈이 있어도 읽으려 하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오나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서구적인 생각의 틀에 인도의 <기타>가 끼어드는 것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밀어내고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타>에 익숙한 사람조차도 종종 과소평가에 가담하곤 한다. 하지만 과대평가에 적절한 근거를 내세우는 경우가 매우 드문 것처럼 과소평가에도 그런 경우가 매우 드물다. 대부분이 신념과 정서와 감정을 앞세운 채 <기타>를 거부하거나 폄하한다.

둘째, 전후좌우로 종횡무진하며 읽어보도록 한다. 전후라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가리키고 좌우라는 것은 저곳과 이곳을 가리킨다. 그러니 전후좌우란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종횡무진이란 거침없이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기타>를 과거의 유산으로만 여기지 않고 <기타>를 인도만의 문화적 틀에 한정시키지 않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횡성수설하며 함께 더들도록 한다.

넷째, 해석과 체험을 끝없이 순환시키도록 한다.  316-319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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