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그리스인 조르바>(1946)를 읽고 있노라면 통풍이 안 되는 답답한 병실에 있다가 싱그러운 5월 훈풍이 부는 시골 들판으로 뛰쳐나온 기분이다. .. 카잔차키스의 작중 인물들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지만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신선한 해방감과 희열을 맛본다. 7


1 크레타섬의 이단아 니코스 카잔차키스

카잔차키스는 1922년 8월에 첫 번째 아내 갈라테아 알렉시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 내 내면에서는 두려운 투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라고 밝힌다. 그가 여행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내적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카잔차키스는 “한 장소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나는 그만 죽을 것만 같다.”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 카잔차키스 사후에 철간된 <그리스인에게 보내는 보고서>, 거기서 카잔차키스는 여행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이렇게 회고하였다.
‘평생 나의 가장 큰 욕망 중 하나는 여행하는 것 - 미지의 나라들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는 것, 미지의 바다에서 수영핳고, 지구를 한 바퀴 돌며 새로운 땅과 바다와 사람들과 여러 관념을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으로 관찰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천천히 바라보고 나서 두 눈을 감고 그 풍요로움을 기쁨에 따라 조용히 또는 격렬하게 내면에 저장되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마침내 시간은 그것들을 촘촘한 체로 걸러 모든 희로애락에서 에센스를 얻어 낸다.’
카잔차키스에게 여행은 단순히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으로” 낯선 땅을 관찰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는 그저 수동적으로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능동적으로 여행했다. “완벽한 여행자라면 하나같이 그가 여행하는 나라를 만들어 낸다.” 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다. 카잔차키스는 이렇게 능동적으로 경험한 것을 촘촘한 체로 걸러 그 정수만을 소재로 삼아 작품을 썼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의 작품에서 인공 감미료가 아니라 설탕이나 당밀 같은 천연의 감칠맛을 느끼게 된다. 11-12

젊었을 적부터 선원 생활로 잔뼈가 굵은 멜빌에게 드넓은 바다는 그의 말대로 “하버드 대학이요 예일 대학”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던 20세기 미국 문학의 거장 어니스트 헤밍웨이에게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교육장이었다. 카잔차키스의 교육장은 여행이었다. 그에게 여행은 단순히 지리적 여저잉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지적 모험이고 영적 순례였다. 그리고 그는 여행에서 보고 느낀 구체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썼다. 그의 작품에서 향수 냄새보다는 흙냄새와 땀 냄새가 물신 풍기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18



2 <그리스인 조르바>의 구상과 집필 그리고 출간

화자가 조르바에게 배우는 소중한 인생철학은 과연 무엇일까? 한마디로 ‘조르바주의(Zorbatism)’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조르바주의란 조르바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가리킨다. 화자는 조르바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르바의 학교에 입학해 위대하고 진실한 문자를 새로 배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된다면 내 삶은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라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문자’로 번역했지만 원문에는 ‘알파벳’으로 되어 있다. 아주 초보적인 것부터 차근차근 배워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화자가 ‘조르바학교’에서 교육을 받되 교사의 말과 행동이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취사선택하여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거부할 것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작품의 결말에 이르러 화자가 자신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완전히 버리고 조르바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제 우린 헤어지는 건가요?” 그가 중얼거렸다. “어디로 갈 작정이오, 보스 양반?”
“외국으로 나갈까 해요. 내 배 속에 들어 있는 염소라는 놈이 아직 종이를 더 씹어 먹어야 성이 차겠다네요.”
“보스, 그렇게 일렀는데도 아직 못 알아들었소?”
“많은 걸 배웠어요. 아저씨가 체리를 잔뜩 먹어 그렇게 했듯이 난 책으로 그렇게 할 참이에요. 종이 나부랭이를 잔뜩 먹으면 언젠가는 구역질이 날 테지요. 구역질이 나서 확 토해 버리고 나면 구원을 받게 될 테지요.”
화자는 조르바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고 고백하면서 고맙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이 갈 길은 조르바가 갈 길과는 다르다고 분명히 말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헤어지면서 가야할 길이 서로 다르다는 뜻보다는 인생행로, 즉 인생관이 서로 다르다는 뜻이다. 화자가 “배 속에 들어 있는 염소라는 놈이 아직 종이를 더 씹어 먹어야 성이 차겟다네요.”라고 말하는 것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지적인 삶을 아직은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이다. 화자가 인생관을 완전히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조르바가 잘 알고 있다. 헤어지기 직전 화자가 자신이 자유로운 몸이라고 말하자 조르바는 곧바로 “아뇨, 보스는 자유롭지 않아요.”라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한다. 그러면서 조르바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의 줄보다 좀 더 길어요. ……. 당신은 마음대로 오고 가니 자유롭다고 생각할지 모르죠. 하지만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라고 지적한다. 66-67

조르바는 원기 왕성하고 호색적이며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 또한 비도덕적이거나 비윤리적인 일을 서슴지 않고 신성 모독에 가까울 만큼 반기독교적인 말과 행동을 일삼는다. 지식인이요 작가인 화자는 조르바의 이러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뿐더러 그러한 성격을 닮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다. 그러면서도 화자는 조르바를 만나 이제껏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맛보며 희열을 느낀다.
화자가 조르바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배운다기보다는 배우고 싶은 것만을 선별적으로 배운다고 말하는 쪽이 옳다. 작품 첫머리에서 화자는 단테의 <신곡>이 자신의 “길동무”라고 밝힌다. 그의 또 다른 길동무는 그동안 그를 사로잡고 있던 붓다였다. 그러나 조르바와 생활하는 동안 화자는 단테와 붓다를 멀리한 ㅊ채 조금씩 조르바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인다. 화자는 크레타섬 해변에서 조르바와 함께 지낸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파산했을지언정 자기 정신의 갱도에서는 삶의 지혜라는 값진 광석을 챙취했기 때문이다. 68-69

화자가 조르바에게서 발견하는 값진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를 붙잡아라(Seize the day.)’ 로 흔히 번역되는 이 구절은 서양의 해시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 구절은 고대 로바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송가] 속 한 구절, “현재를 붙잡아라. 가급적 내일이라는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라는 시구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구절에 쓰인 ‘카르페’라는 라틴어 동사는 사실 ‘붙잡다’보다는 ‘즐기다’로 옮기는 쪽이 더 어울린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의 현재 삶에 충실할 것을 부르짖는 것이다. 호라티우스가 에피쿠로스학파에 속한 시인이기 때문에 이 구절은 흔히 이 학파와 연계하여 이해해 왔다. 이 구절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맡은 한 고등학교 교사의 대사로 더욱 유명해졌다. 그는 학생들에게 “카르페 디엠. 오늘을 즐겨라, 소년들이여. 삶을 비상(飛翔)하게 하라.”라고 말했다. 이 대사는 아직도 할리우드 영화의 명대사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카잔차키스는 이 ‘카르페 디엠’의 생활 태도를 에피쿠로스보다는 프리드리히 니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평생 니체에 심취한 카잔차키스는 니체의 핵심적 사상 중 하나인 영원 회귀에 사상은 역설적으로 최선을 다하여 현재의 순간을 즐기라는 ‘카르페 디엠’과 맞닿아 있다. 신이 사망하여 인간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런 무의미한 순간들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인간은 현세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르바는 지나간 가거의 삶도, 다가올. 미래의 삶도 믿지 않고 오직 현재의 삶만을 굳게 믿는다. 적어도 현재의 삶에 충실하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그는 카르페 디엠의 인생관을 받아들이는 호라티우스의 애제자요 에피쿠로스학파의 멤버라고 할 만하다. 69-70

‘조르바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세상은 다시 숫처녀처럼 순결해지는 것 같았다. 광채를 잃어버렷던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손으로 처음 빚어졌을 때처럼 그 찬란한 빛을 되찾았다. 물도, 여자도, 별도, 빵도 신비스럽고 원시적인 근원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신성한 바퀴에 회전의 탄력이 붙었다.’
이 인용문을 읽고 있노라면 조르바의 현세주의가 단순히 관능적인 감각주의나 쾌락주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삼라만상을 신선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그만큼 현세의 삶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만끽한다는 것을 뜻한다. ..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일수록 주위에 있는 단순하고 소박한 것에서 기적을 발견하기 어려워진다. 그런데도 조르바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 74



3 프리드리히 니체와 앙리 베르그송 그리고 동양 사상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프리드리히 니체에게서 받은 영향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하느님에 관한 견해, 둘째, 아모르 파티 (amor fati), 셋째,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관한 이론, 니체의 이 세 가지 이론은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집필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카잔차키스 전문가 안드레아스 풀라키다스는 “만약 카잔차키스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잘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리스인 조르바>를 쓸 수 없었을지 모른다.”라고까지 주장하였다. 78-79

초인을 뜻하는 ‘위버멘쉬’란 단어는 그대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여 그것을 ‘뛰어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니체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에게 확신은 의심보다 훨씬 더 위험스럽다. 81

프리드리히 니체가 부르짖은 신의 ㅈㄱ음은 자연스럽게 ‘아모르 파티’ 개념으로 이어진다. .. “네 운명을 사랑하라!” 83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의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사랑하고 받아들인다면 너의 삶은 오늘 이 순간부터 새로운 가능성의 바다로 열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내 공식은 아모르 파티’라고.” 84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인간이 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세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세 비유란 낙타, 사자, 어린아이가 겪는 세 유형의 변신 과정을 말한다. 첫 단계인 낙타는 등에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견디는 수동적인 태도다. 사자는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는 두 번째 단계로, 자유정신을 상징한다. 마지막 단계인 어린아이 상태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어린아이는 주어진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운명론적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츼미를 찾아 초인처럼 끊임없는 변신을 꾀하는 단계다. 이렇게 무한한 긍정 정신을 상징하는 세 번째 단계가 바로 니체가 말하는 ‘아모르 파티’다. 84

조르바는 자신의 운명에 온몸으로 부딪치고 온몸으로 껴안으려는 능동적 인물이다. 니체의 말대로 조르바는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사랑하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에게 삶은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의 바다’로 활짝 열려 있다. 84-85

조르바는 언어로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기 힘들 때 춤으로 표현하곤 한다. 그에게 춤을 단순히 흥에 겨워 몸을 움직이는 행위가 아니라 감정과 생각을 효율적으로 표현하는 편리한 도구이자 매체다. 86

프리드리히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삶을 움직이고 예술을 이끄는 두 가지 원칙으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들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아폴론은 그리스 신화에서 태양과 빛의 신이다. 아폴론은 빛뿐만 아니라 형식, 질서, 조화, 균형, 절제, 완전성, 이성 등을 상징한다. 87

아폴론적인 것을 대표하는 예술은 조형 예술, 특히 조각이다.
그러나 니체는 인간이 아폴론적인 것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아폴론적인 것은 어떤 것을 다른 것과 구별 짓는 개별화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 인간에게는 도취와 망각이 필요할 때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때로는 술을 마시고 잔치를 벌여 흥을 돋우기도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디오니소스는 주신(酒神), 즉 포도주의 신이다. 포도주의 신일 뿐만 아니라 광기, 축제, 황홀경, 풍요, 야생, 본능, 자연, 다산 등을 상징하는 신이기도 하다. 87

니체는 이 두 가지 요소가 결합한 이상적 예술 충동을 ‘쿤스트리에벤(Kunsttrieben)’이라고 불렀다. 88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아폴론적인 인물과 디오니소스적인 인물을 뚜렷이 대비시킨다. 이 소설의 1인칭 화자인 ‘나’는 전자를 상징하고, 조르바는 후자를 상징한다. 88

조르바의 삶은 음식과 포도주, 산투리와 춤을 떠나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디오니소스적 삶이다. 92

베르그송은 생명체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숙하는 힘을 ‘엘랑 비탈(elan vital)’이라고 불렀다. 그는 <창조적 진화>에서 “모든 생명예와 인간의 삶은 진화한다. 이 진화는 내적 충동력인 엘랑 비탈, 곧 생명의 비약으로 이루어지는 창조적 진화다.”라고 주장하였다. ‘약동하는 생명’을 뜻한는 엘랑 비탈은 진화를 추진하는 근본적인 힘을 말한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세계의 본질은 바로 생명의 창조적 진화에 있다. 그는 이 개념을 통해 그동안 수동적인 위치에 놓여 있던 생명체의 위상을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위치로 바꾸어 놓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94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주인공 알렉시스 조르바는 여러모로 베르그송이 말하는 ‘엘랑 비탈’의 정수이자 화신이라고 할 수 있다. 조르바는 아무리 큰 시련과 고통이 닥쳐와도 좀처럼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진화해’ 나가는 인물이다. 95

화자에게 조르바는 책을 무더기로 쌓아 놓고 불을 질러 버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화자는 바보가 아니니 그러고 나면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조르바의 관점에서 보면남의 생각과 사상을 기록해 놓은 책이야말로 개인의 창조적 진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95-96

카잔차키스는 일찍이 1914년에 칯ㄴ구요 시인인 안젤로스 시켈리아노스와 함께 아토스산에 산재한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이미 폐쇄적인 종교가 사회에 어떠한 악영향을 끼치는지 깨달았다. 작가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이 경험을 살려 닫힌 종교의 폐해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조르바는 화자에게 그동안 자신이 겪은 일들을 들려주면서 아토스산의 수도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다. 조르바는 흔히 ‘성산(聖山)’ 또는 ‘거룩한 산’으로 일컫는 아토스산에는 무려 스무 개가 넘는 수도원이 있고, 그 수도원에는 “엉덩이에 뒤룩뒤룩 살이 찐 기생충 같은 수도사들”이 살고 있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속에서 벗어나 정신 수양과 영혼의 고양에 힘써야 할 수도승들이 기생충처럼 뒤룩뒤룩 살이 쪘다는 것은 그만큼 타락했다는 의미다. 99

“왜? 우린 서로 동의하지 않았던가? 벌써 몇 해째 이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않았냐 말이야? 자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일본인들이 그걸 뭐라 부르지? 후도신! 평정심, 냉정, 가면은 방긋 웃고 있지만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얼굴 표정 말이야. 가면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던 그건 각자의 몱이지.”
‘후도신’이란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그냥 글자 그대로 ‘부동심’의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일본 문화에서는 좀 더 특별한 의미로 사용한다. 평정심에 가까운 이 개념은 어떤 것에도 흔들리거나 마음이 흐트러지지 안흔 평온한 정신 상태를 가리킬 수도 있고, 온갖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하는 유연한 정신 상태를 가리킬 수도 있다. 103-104

카잔차키스가 말하는 후도신은 여러모로 그리스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아타락시아(ataraxia)’ 개념과 비슷하다. 이 개념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론이 처음 사용한 뒤 그 뒤를 이어 에피쿠로스가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론은 모든 판단을 보류하여 무심한 마음의 평정을 얻어야 한다는 이론의 바탕 위에 회의주의 철학의 집을 세웠다. 에피쿠로스는 흔히 알려진 대로 쾌락주의나 향락주의를 설파한 철학이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에게 철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쾌락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얻는 데 있었다. 그가 말하는 행복하고 펴온한 삶은 평정, 평화, 무통( 無痛), 공포로부터의 자유에서 오는 것이었다. 104-105



4 <그리스인 조르바>와 실존주의

카잔차키스는 대부분의 실존주의자들처럼 인간의 삶이 오직 한 번밖에는 살 수 없는 일회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첨예하게 깨닫는다. 신분이 높고 부유한 사람이든 신분이 낮고 가난한 사람이든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 ‘오직 한 번 밖에’ 살지 못한다. .. 조르바는 화자에게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라고 잘라 말한다. .. 내세나 피안을 전혀 믿지 않는 태도다. 125

조르바는 자리에 앉기만 하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생각하는 화자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조르바는 그에게 “행동! 행동! 그밖에 다른 구원 따위는 없어. 태초에 행동이 있었노라, 그리고 종말에도 역시.”라고 일갈한다. 134

니체가 <차루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언급하는 새를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니체는 “사람은 대지와 삶이 무겁다고 말한다. 중력의 악령이 바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가벼워지기를 바라고 새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밝힌다. .. 화자는 자신이 가벼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새가 된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양심 대신에 창백한 지식인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새가 된 것이다. 134-135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주인과 같소. 계속 계산하면서 장부에 이렇게 씁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고, 이 액수는 손실이고, 저 액수는 이익이다.’ 똑똑한 머리는 뛰어난 지배인과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 이성과 합리성이 지난 2000여 년동안 쌓아 온 문명의 성을 하루아침에 깡그리 무너뜨리지 않았던가. 그래서 조르바는 차가운 머미로 사물을 바라보는 대신 뱀처럼 뜨거운 가슴으로 맞부딪쳐 이해하려고 애쓴다. 135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인간이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나 사회적 규범을 따르지 말고 오직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려야 한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누가 언제 만들어 놓았는지도 잘 모르는 사회적 규범에 얽매여 노예처럼 살아간다. .. 하이데거는 이러한 사회적 규범이나 가치를 만들어 낸 사람들을 ‘그들(Das Mann)’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정체성을 지닌 특정한 개인들이 아니라 익명의 불특정 다수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본질적 삶에서 벗어난 일조으이 허구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그들’이 있었고,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도 ‘그들’이 있다. 특정한 개인은 아니지만 ‘그들’은 우리의 삶에 직접 간접으로 큰 영향을 끼친다.
사르트르는 불특정 다수가 만들어 놓은 사회적 규범에 얽매여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중고품 인생’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사람들은 남이 쓰다 버린 물건을 주워다가 사용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 기존의 질서나 사회적 규범에 맹목적으로 따르다 보면 개인은 자칫 자신의 정체성과 자유를 상실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질서나 규범은 법ㅊ처럼 강합적인 외부의 힘에 이끌려 강제로 지텨야 할 때도 있지만, 도덕이나 윤리처럼 개인이 어렸을 적부터 자신도 모르게 내면화한 나머지 인식하지도 못한 채 기계적으로 따를 때도 있다. 매 양들이 목자의 지팡이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과 같다. 136-137

실존주의자들은 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개인의 정체성과 자유를 지켜야 한다고 지적한다. 138

실존주의는 크게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나뉜다. 쇠렌 키르케고르는 전자를 대표하는 철학자인 반면, 장폴 사르트와 알베르 카뮈는 후자를 대표하는 찰학자들이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이 비극적 인간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초월적 존재자인 신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전통적인 신을 부정하는 사르트르와 카뮈는 신이 없는 우주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고민했다. 실존주의라고 하면 유신론적 실존주의보다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다. 146

알베르 카뮈는 언젠가 “내세에 희망을 두는 것은 이 아름다운 현세를 배반하는 행위”라고 말한 적이 있다. 조르바도 카뮈처럼 기약 없는 내세에 소망을 걸기보다는 아름다운 현세의 삶에 훨씬 더 무게를 싣는다. 조르바의 세계에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거나 비록 존재한다 해도 이렇다 할 힘을 행세하지 못한다. 아니,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하느님과 악마가 함께 존재한다고 말하는 쪽이 더 옳을 지도 모른다. 147

조르바는 여성이나 섹스에 대한 태도에서도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경향을 보여준다. 153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지난 몇 세기 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기독교의 가치관과 신념을 반성하고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한 것이다. 이 작품이 뭇 독자에게 그토록 신선한 충격을 주는 까닭은 작가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용기 있게 그 대안을 찾기 때문이다. 화자의 영적 지도자라고 할 알렉시스 조르바는 작가가 입버릇처럼 말하듯이 ‘자유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
카잔차키스는 처음에는 불교에 심취에 있던 화자가 조르바와 함게 생활하면서 조금씩 불교의 정적주의나 신비주의에서 벗어나 예술가로 변모하는 과정에 무게를 싣는다. 154



5 녹색 소설로서의 <그리스인 조르바>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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