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데뷔 
 
37년 전에 당신이 만약 파리로  둔갑하여 마이에미 비치에 있는 한 라디오 방송국의 스튜디오 벽에 붙어 앉아서
내 방송 경력의 시작을 목격할 수 있었다면, 전문 방송인으로 성공할 내 모습보다 밥벌이하기도 힘들 모습의 나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1957년 5월 1일 아침,  워싱턴가와 1번가의 교차로 근처, 경찰서 맞은편에 자리한 조그만 방송국의 한  스튜디오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나는 그때 라디오의 세계로 진출해 보려는  꿈만 가지고 3주째 일거리도 없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 방송국의 사장  시몬즈가 내 목소리는(이 역시 운이 좋아서 타고난 것 가운데 또  한 가지다) 좋지만 빈자리가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 말에 나는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나는 당시 기회를 잡을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좋다, 빈자리가 나면 너를 쓰겠다'고 했던 것이다.

마이애미에는 잭 삼촌  부부가 그 방송국 근처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는데, 브루클린을 떠나올 때 확실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돈은 한 푼도 없었고, 삼촌의 아파트 덕분에 다락방이라고 잘 곳은 마련된 셈이었다.
거기서 내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매일 방송국에 갔다.
방송 진행중인 디스크 자키들, 뉴스를  방송하는 아나운서들, 스포츠 뉴스의 진행자들을 구경했다.

거기서 나는 뉴스거리들이 AP나 UPI전송망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을 처음으로 보고 조용한 황홀경에 빠지곤 했다.
짤막한 기사 몇 개를 혼자 써 보기도 했는데, 그 때마다 내가 작성한 기사가 누군가에 의해 실제 방송에서 사용되는 날을 꿈꾸곤  했다.
그렇게 3주가 지났는데  갑자기 아침 방송을 맡아 오던 디제이 한 사람이 그만 두었다.
AKTIF이 나를 자기 사무실로 불러 일거리를 준 날은 금요일이었는데,  월요일 아침 9시 방송부터 내가 맡게 된  것이다.
주급 55달러,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9시부터 정오까지, 오후에는 뉴스와 스포츠 뉴스를 이것저것 하고 퇴근은 5시.

마침내 꿈이 이루어졌다.
라디오에  나가게 된 것만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 고정 프로그램을 맡은 데다가 매일 오후에도 대여섯 번 출연이라!
당시 CBS의 수퍼스타였던 아더 고드프리만큼 자주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주말에 나는 한숨도 못  잤다.
방송에 나가서 할 말을 준비하고 반복해서 연습했다.
첫날  아침 8시 30분이 되었을  때, 나는 살짝만 건드려도 무너질 정도로 바짝  긴장해 있었다.
입과 목이  말라 붙어서 커피와 물을 계속해서 마셔댔다.
스튜디오에 들어가자마자 턴테이블에 걸려고 프로그램의 주제곡, 레스  엘가트의 '스윙잉 다운 더  레인'의 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일 분, 일 초가 지나면서 점점 더 초조해졌다.

마샬 시몬즈가 내게 행운을 빌어 주기 위하여 사무실로 불렀다.
내가 고맙다고 인사를 하자 '이름은 어떻게 할까요?'하고 물어 왔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이거 원, 래리  자이거라는 이름을 쓸 수는  없어, 소수 민족의 냄새가 물씬 풍기거든.
사람들은 그 이름을 발음하지도 못할 테고 기억할 수도 없을 거야.
좀더  나은 이름을 써야 해. 래리  자이거라는 이름은 절대 아니야."

그 때 그의 책상 위에는 '마이애미 헤럴드'가 펼쳐진 채 놓여 있었다.
그리고 펼쳐진  면에는 마침  킹 주류 도매상의  전면 광고가  실려 있었다.
AKTIF의 눈길이 그 곳으로 향하더니  이내 짤막하게 '래리 킹이 어때?' 하고 물어 왔다.
"괜찮은데요."
"했어. 그게 이제부터 자네 이름이야--래리 킹. 자네는 이제부터 (더 래리 킹 쇼)를 주재하는 거야."
그렇게 해서 나는 일자리,  프로그램, 주제곡, 게다가 이름가지 새로 얻게 되었다.
9시가 되어 마침내 뉴스가 나갈 시간이 되었다.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스윙잉 다운 더  레인'을 턴테이블에 걸어 놓고, 뉴스가 나오기를 기다릴 청취자에게 방송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내 입안은 솜뭉치라도 물고 있는 것처럼 침이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작은 방송국에서는 으레 그렇듯이  아나운서가 기사의 역할을 같이 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손수 주제곡을 틀어야 했다. 음악이 흘러 나왔다.
이어서 방송을 시작하기 위하여  음악의 볼륨을 낮추었다.
여기까지는 잘 나갔는데 그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음악 대신 나와야 할 것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음악의 볼륨을  다시 높이고, 잠시 후에  다시 낮추었다.
그런데 여전히 내 입에서는 한 마디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볼륨을 높였다 낮추는 일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해야 했다.
그 사이에 청취자들이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주제곡의 볼륨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뿐이었다.
그 사이에 사람의 목소리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내가 그 때 머리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동네의 길거리에서 떠들어댈 수는 있겠지만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할 능력은 내게 없어."
나는 자조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되뇌이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일을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지만 그 일을 막상 맡아서 할 태세가  갖추어지지 않은 점 역시  분명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 일에 필요한 베짱이 내게는 없었다.

결국 내게 그토록 친절을 베풀고  커다란 기회를 제공해 주었던 바로 그 사람, AKTIF 시몬즈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야 말았다.
방송국의 총책임자로서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통제 구역의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와 다음 네 마디를 크게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이건 말로하는 사업이야!"
그리고 그는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그가 그런 바람에 나는 마이크를 향해 몸을 숙이고 방송인으로서 첫마디를 겨우 토해 낼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지금 저는 라디오  방송을 처음 해 봅니다. 나는 언제나 방송계에서 일하게 되기를 갈망해  왔습니다.
지난 주말 내내 연습을 했습니다. 15분 전에 저는 새 이름을 지었습니다. 주제곡을 틀 수 있도록 줄곧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입  안이 자꾸 말라 붙었습니다. 제가 초조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사장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이건 말로 하는 사업'이라고 소리쳤습니다."
일단 말문을 열자 조금 자신이 생겨서 계속해 나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날 나머지 방송은 그런대로  괜찮게 진행되었다.
전문 말꾼으로서 내 첫걸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뒤로는 다시 라디오 방송에 관하여 초조해진 적이 없다.
Posted by WN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