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견진성사를 치루고 난, 과도한 공부에 시달려 몸이 몹시 야윈 소년들이 국비로 라틴어 학문의 여러 가지 분야를 서둘러 배우고 나서 8, 9년 후에는 인생 행로의 후반기(대개는 긴 세월이지만)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고 나서 국가에서 받은 은혜를 갚아 나가는 것이다.



“영혼을 더럽히는 것보다는 육체를 열 번 더럽히는 것이 더 나아!”(구두장이 플라크의 말) 



정부는 오래전부터 언덕과 숲에 감춰져 속세를 떠난 듯한 이 훌륭한 수도원을 프로테스탄트 신학교 학생들에게 내주었다. 아름답고 고요한 환경을 쉽게 감동하는 젊은 마음들에게 제공해주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있으면 젊은 학생들은 마음을 어지럽히는 도시와 가정의 영향에서 벗어나 유해한 환경에 노출되지 않도록 보호를 받았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은 몇 년간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연구를 다른 참고 과목과 함께 아주 성실하게 생활의 목표로 삼고, 젊은 영혼의 갈망을 순수하고 이상적인 학문에 집중시켰다. 기숙사 생활도 자아 교육을 촉진하고, 단체 생활의 정서를 길러주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신학교 학생들은 국비로 생활하고 공부했다, 그 대신 정부는 학생들이 특별한 정신을 갖도록 애쓰고 있다. 그 정신 때문에 나중에라도 그들이 신학교 학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교모하고 확실한 표지였다. 가끔 수도원을 탈출하는 거친 녀석들을 제외하면 슈바벤 신학교 학생은 한평생 그 면모를 확실히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이 한무리의 소년들이 주의 소년들 가운데서 선발된 대단한 인재들이라는 걸 인정할 수 있으리라. 주입식 교육을 받아왔음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소년들과 비범하고 슬기로운 소년들, 반발이 심하고 개성이 강한 소년들도 적지 않았다. 



“저것 봐! 너는 저 아름다움을 주의 깊게 본 적 있니?”

두 사람이 파라다이스 옆을 지날 때 하일러가 물었다.

“홀, 아치형 창문, 회당, 식당, 고딕식과 로마네스크식, 이 모든 풍부하고 정교한 건축물이 예술가들의 손끝에서 탄생했어. 하지만 이런 매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목사가 되려는 불쌍한 소년들 서른 여섯 명을 위해 존재할 뿐이지. 나라에 돈이 넉넉한 모양이야.”



너는 어떤 공부든지 좋아서 자진해서 하는 게 아니야. 단지 선생들이나 네 아버지가 무섭기 때문이지. 1등이나 2등이 되면 뭐하니? 나는 20등이지만 그래돋 너희 꽁생원들보다 어리석진 않아.”

하일러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들은 한 명의 천재보다 열 명의 얼간이를 원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선생의 역할은 정상을 벗어난 인간이 아니라 라틴어를 잘하고 수학을 잘하는 꼼꼼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 더한 피해자이며 어느 쪽이 더한 가해자인가. 그리고 상대방의 영혼과 인생을 망치고 더럽히는 것은 둘 중 어느 쪽인가. 그것을 생각한다면 누구나 부끄러운 기분으로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학교에서 학교로 규칙과 정신의 싸움은 언제나 반복된다. 국가와 학교가 매년 나타나는 몇몇 탁월하고 깊은 정신의 소유자를 뿌리째 뽑아버리려고 애쓰는 걸 우리는 목격하곤 한다. 언제나 다른 사람도 아닌 학교 선생들에게서 미움을 받는 자, 탈출에 성공한 자, 추방된 자들이 먼 훗날 우리 국민에게 보물을 안겨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내면의 방황 속에서 자신을 망치며 파멸하고 만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누가 알겠는가!



교장... 허영심.

“피곤하지 않도록 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수레바퀴에 깔리고 말 테니까.” ...

‘하나만 더 묻겠는데 기벤라트, 자네 하일러와 열심히 교제하는 것 같더군. 그렇지 않나?”

“네 좀 친하게 지냅니다.”

“다른 학생 이상으로 가까운 것 같던데?”

“그렇습니다. 그 애는 제 친구니까요.”

“대체 어떻게 친해졌지? 두 사람은 성격도 아주 다른데 말이야.”

“모르겠습니다. 제 친구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그 친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자네도 알고 있겠지. 그는 침착하지도 않은 데다 불만투성이야. 재능은 있을지 모르지만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자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도 못해. 자네가 그 친구를 멀리한다면 좋겠는데 어떻겠나?"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교장선생님."

"안 된다고? 도대체 왜?"

"왜냐하면 그 애는 제 친구인걸요.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음, 하지만 다른 학생들과 좀더 가까이 지낼 수도 있지 않나. 하일러에게 나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자네뿐이야. 그 결과가 벌써 눈에 보여, 대체 그 친구의 어떤 점에 끌리는 거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ㄴ서로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를 버린다면 저는 비겁한 사람이 됩니다."

"허어, 그래. 그러면 강요하지 않겠네. 그러나 차츰 그 친구한테서 멀어지면 좋겠네. 그렇게 되면 나로서도 좋은 일이야. 아주 기쁜 일이지."

교장의 마지막 말은 처음의 온화한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한스는 겨우 방을 나갈 수가 있었다.



하일러는 몇 마일이나 떨어진 어느 숲속에 누워 있었다. 추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으나 진심으로 자유로운 기분에 도취되어 깊은 숨을 내쉬며 좁은 새장에서 풀려난 새와 같이 손발을 뻗어보기도 했다. 그는 점심때부터 달음질을 쳐왔다. 그니틀링겐에서 산 빵을 씹으며 아직 봄빛이 남아 있는 나뭇가지 사이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칠흑 같은 어둠과 별과 빠르게 스쳐가는 구름이 있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는 문제가 되지 앟았다. 적어도 오늘 저녁만큼은 몸서리쳐지는 수도원을 뛰쳐나와 그의 의지가 명령이나 금지보다 강하다는 걸 교장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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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 ; 깊이 생각하기


사색은 주관적 깨달음이다 - 아무리 그 수가 많더라도 제대로 정리해놓지 않으면 장서의 효용가치는 기대할 수 없다. 반대로 그 수는 적더라도 완벽하게 정리해놓은 장서는 많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지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많은 지시을 섭렵해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면 그 가치는 불분명해지고, 양적으로는 조금 부족해 보여도 자신의 주관적인 이성을 통해 여러번 고찰한 결과라면 매우 소중한 지적 자신이 될 수 있다.

습득을 통해 얻어진 진리는 다른 여러 가지 지식과 결합시켜 비교할 필요가 있으며, 이 같은 절차를 거쳐야만 비로소 완전한 의미에서 자신의 것이 된다. 그리고 완전하게 내 것이된 지식을 원하는 사상에 맞게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사상은 주관적인 논리와 스스로 터득한 지식을 기초로 세워지는 건축물이다. 알기 위해서는 물론 배워야 한다. 그러나 안다는 것과 여러 조건을 통해 스스로 깨달은 것은 엄연히 다르다. 앎은 깨닫기 위한 조건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와 학습은 객관적인 앎이다. 그리고 독서와 학습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사색은 주관적인 깨달음이다.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고, 누구나 공부할 수 있지만, 누구나 이를 통해 사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색은 바람이 불면 더욱 거세지는 불길처럼 외부 조건에 의해 조성된다. 이 조건은 객관적인 형태와 주관적인 형태로 나뉘는데, 주관적인 조건은 개인적인 능력, 즉 타고난 두뇌를 뜻한다. 반면에 객관적인 조건은 사색의 호흡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공기처럼 인체의 호흡에 필요한 여러 물질들, 즉 학습이라든가 독서, 외국어 구사 능력 등이다. 11-12


사색적인 두뇌와 독서적인 두뇌 - 인간의 정신은 외부로부터 강압적으로 주입되는 강요에 쉽게 굴복될 만큼 나약한 면이 있다. 14


스스로 이해하는 힘 - 책을 통해 경험한 타인의 사상은 타인이 먹다 남은 찌꺼기, 즉 타인이 벗어 던진 헌옷에 지나지 않는다. 15


스스로 사색하는 사람 - 독서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사색의 대용품에 지나지 않는다. 독서는 사상을 유도하는 역할로 충분하다... 독서는 사상의 분출이 잠시 두절되었을 때 이를 만회하기 위한 휴식으로 사용해야 한다. ..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나만의 고유한 사색에 의해 어떤 진리에 도달했다면, 비록 그 내용이 앞서 다른 책에 기재되었을지라도 타인의 사상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체험이라는 점이다. ..

괴테가 남긴 다음과 같은 격언. ‘그대의 조상이 남긴 유물을 그대 스스로의 힘으로 획득하라.’ 16-18


사색하는 인생은 남다르다 - 독서로 삶을 허비하는 것은 여행 안내서를 통해 어떤 지방의 풍속에 정통해지는 여행 안내인의 삶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여행 안내인들은 그 지방의 풍물과 역사를 빠짐없이 알고 있지만 정작 그곳의 토지가 어떤 상태인지, 봄에는 어떤 꽃이 피는지, 겨울이 되면 눈은 얼마나 오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사색하는 인생은 이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이들은 자신의 두 발로 그 지역을 직접 여행한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이런 사람만이 지역의 진정한 특색에 대해 말할 수 있고, 환경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 22


책상머리 바보 - 우리가 어떤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누구나 이 문제를 타파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과연 어떻게 풀어야 할지 그 해답을 얻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결심은 의지의 역할이기에 누구나 가능하지만, 이 같은 결심을 인도하는 사색은 문제를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명령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억지로 생각한다고 해서 무조건 사색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같은 생각의 파편들이 자연스레 심오한 사색으로 발전하기를 조용히 기다릴 뿐이다. 더구나 이런 마음가짐은 뜻하지 않게 찾아오므로 항상 마음을 비우고, 되도록 의지에서 멀어질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쳤을 때 비로소 성숙한 사색이 잉태되고, 그 결과 고유한 사상이 결실을 맺게 된다. 25-26


스스로 결정하는 힘 - 진정한 사색자는 군주와 비슷하다. 그는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있으며, 자신의 위에 서려는 모든 자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판단을 군주가 결정하듯 자신의 절대적인 권력에 의해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은 오직 자기 자신만이 기준이 될 수 있다. 군주가 타인의 명령을 승인하지 않는 것처럼 사색자는 권윌르 인정하지 않으며, 스스로 참된 진리를 확인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결과도 승인하지 않는다. 31-32


권위를 앞세우는 사람 - 세상의 보통 사람들은 어려운 문제와 맞닥뜨리게 되면 권위 있는 말을 인용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자신의 이해력과 통찰력을 활요하는 대신 타인이 남긴 침전물을 동원하고, 이를 자기 생각보다 더욱 확신한다. 물론 동원하고 싶어도 최소한의 능력조차 부족해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짓눌리는 자들도 많다. 이런 자들의 수는 어마어마하다. 세네카의 말처럼 “사람들은 판단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믿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어떤 논쟁을 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주로 선택하는 무기는 권위이다. 그들은 수집한 여러 가지 권위를 무기로 선택한 후 서로 싸움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다가 이런 싸움에 말려든 자가 자신의 근거나 논리를 무기로 삼은 후 자력으로 대항하더라도 권위에 취한 그들을 일깨우지 못한다.

이 같은 자체적인 논증에 대항하는 그들은 비유컨대 죽지 않는 지그프리트(게르만 민족의 영웅전설 가운데서 가장 빛나는 영웅 중의 영웅)로서 사고불능, 판단불능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그들은 타인의 자발적인 논리를 인정하지 않으며, 오직 사라진 자들이 남겨둔 권위만을 유일한 논거로 여기게 된다. 34



글쓰기와 문체 ; 자신의 사색을 녹여서 쓰기



독서 ; 생각하며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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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그저 당신 자신에 대해서나 생각하라는 거요. 괜히 자신이 결백하니 뭐니 하며 소란을 떨지 말시오.  그래 봤자 그리 나쁘지 않은 당신 인상마저 망칠 뿐이니까. 그리고 말도 자제하는 편이 좋겠소. 비록 몇 마디밖에 하진 않았지만 당신이 방금 한 모든 말은 당신 ㅎ애동에서 다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이었소. 그런 말을 지껄여 봤자 당신한테 크게 이로울 것도 없소.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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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젖은 창백한 그녀의 얼굴에 분노가 일었다. 소리를 질러 가라앉힐 수 있는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꾹 누르며 견디어 온 분노, 내면을 향한 분노였다.  11


거울 앞에 서서 안경의 물기를 닦고, 얼굴도 닦았다. 이마에 적힌 숫자는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따뜻한 물에 수건 끝을 적셔 이마를 문지르려다 말고 멈칫했다 몇 시간 후 그날 일어난 일을 다시 떠올려보면서, 거울 앞에 서 있던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되었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수수께끼 같은 여자와 만난 흔적을 지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그 찰나에 들었던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마에 전화번호가 적힌 채 교실로 들어서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는 이 건물, 아니 이 학교가 세워진 이래 가장 믿을 만하고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사람이었다. 30년 이상 일을 해오는 동안 실수한 적도, 비난받을 일을 한 적도 없었다. 약간 지루한 선생일지는 몰라도 학교 제도의 기둥으로 존경받았고, 고전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 때문에 대학에서조차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새 학년이 시작되면 학생들로부터 사랑이 담긴 놀림을 받았다. 학생들은 그를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고문헌 중에서도 거의 읽지 않는 부분만 골라 해석을 묻곤 했다. 하지만 그는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다른 주석까지 곁들여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학생들은 건조하면서도 창조적인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짧게 줄여서 불러야 할 만큼 엄청나게 고루하고 고전적이었다. 그는 고전문헌학으로 세계 전체를 짊어지고 다니는 것 같았다. '문두스'는 이 같은 그의 본질을 강조하는 데 가장 적절한 단어였다.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뿐 아니라 헤브라이어에도 조예가 깊었다. 구약학 교수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러니 여러 개의 세계를 지고 다녔다고 표현하는 게 옳았다. "진짜 학자를 보고 싶다면 여기 있는 이분이 바로 그분입니다." 교장은 새로운 학급에 그레고리우스를 소개할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13-14


그레고리우스는 학생들을 한 명 한 명 살펴보았다. 그는 지금 학생들을 향한 자기감정이 어떤지 중간 점검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교실의 가운데쯤 왔을 때, 자기가 얼마나 자주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생각했는지 알게 됐다. 이 아이들에게는 아직 남아 있는 날들이 얼마나 많은가. 창창한 미래, 얼마나 많은 일이 생길 것인가. 무수히 많은 일을 경험하게 될 이 아이들!  19


천천히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가 옷걸이에 걸려 있던 젖은 외투를 내린 다음,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교실에서 나왔다.  20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남의 이목을 끌지 않고 하굑를 관찰할 수 있는 어떤 걸물의 모퉁이까지 갔다. 그곳에서 학교를 바라보며 그는 자신이 학교와 관련된 모든 것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앞으로 얼마나 그리워할 것인지를 절절하게 느꼈다. 상상하지 못햇던 격렬한 감정이었다.  20-21


그레고리우스가 졸업시험을 치른 이유는 오로지 아내 플로렌스의 강요 때문이었다. 박사 학위를 딸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중요한 것은 아주 단순했다. 문법이든 표현 양식이든 고전의 외진 구석까지 모두 알고 표현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역사를 아는 것, 다른 마롤 하면 자신의 일을 잘하느 ㄴ것이었다. 이것은 겸손함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요구가 많은 사람이었다. 변덕이나 뒤틀린 허영심도 아니었다. 나중에 그는 가끔, 자신의 이런 태도는 잘난 척하는 세상을 향한 조용한 분노, 허풍선이들을 향한 꺾이지 않는 고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레고리우스보다 훨씬 능력이 없던-정말 말도 안 되게 공부를 못하던-사람들도 졸업시험을 시험을 치르고 확실한 직장을 얻었다. 그러나 그에게 이런 사람들은 다른 세상, 견딜 수 없이 천박한 세상, 그가 경멸하는 기준을 지닌 세상에 속해 있었다. 그를 내보내고 대신 졸업장이 있는 교사를 채용할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학교에 아무도 없었다. 교장도 고전문헌학을 전공했지만, 그레고리우스가 자기보다 실력이 월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 그를 내보내면 학생들이 폭동을 일으키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21-22


<언어의 연금술사>  27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 관찰의 대상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고, 말은 경험한 것에서 미끄러져 결국 종이 위에서 모순만 가득하게 남는다. 나는 이것을 극복해야 할 단점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혼란스러움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익숙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경험들을 이해하기 위한 왕도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이상하고 묘하게 들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서야 깨어 있다는 느낌, 정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27-28



-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28



비행기에 올라타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완전히 다른 세상에 도착한다는 사실-그 중간에 놓인 개별적인 모습들을 받아들일 시간도 없이-은 그레고리우스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30


그레고리우스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벨이 울렸다. 학교로군. 벨 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그는 전화 옆에 서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오늘 오전부터 제 인생을 조금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문두스 노릇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이 어떤 모습일지 저도 모릅니다만, 미룰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전에게 주어진 시간은 흘러가 버릴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삶에서 남는 건 별로 없을 테니까요. 그레고리우스는 크게 소리 내어 이렇게 말해보았다. 이 말은 옳았다. 그는 자기 인생에서 이렇듯 옳고 의미 있는 말을 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전화기에 대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3



- 황금 같은 침묵 속의 언어. 신문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카페에 앉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다 보면 쓰인 글과 하는 말에서 보고 듣는 늘 똑같은 언어 때문에-어법이든 말장난이든 은유든- 혐오감과 구역질을  자주 느끼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보면 나 역시 끊임없이 똑같은 말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들은 소름이 끼치도록 낡았고 평번하며, 수백만 번 사용하여 닳고 닳은 것들이다. 이런 말들에도 과연 의미가 있을까? 무론 말은 나누는 기능을 한다. 사람들은 이 말에 따라 행동하고 웃고 울며,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가고, 종업원은 커피나 차를 가지고 온다. 하지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말이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이런 말이란 그저 쓸데없는 수다가 새겨진 흔적으로써 사람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효과음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그럴 때면 나는 해변으로 가서 목을 길게 늘여 바람에 머리를 맡기고, 우리에게 익숙한 것보다 훨씬 더 차가운 바람이 불기를 바란다. 낡은 단어들과 진부한 언어 습관을 내 머릿속에서 날아가게 하고, 늘 똑같은 잡담의 찌꺼기를 묻히고 사는 나를 씻겨 깨끗한 정신으로 돌아오게 해줄 바람. 그러나 그런 다음에도 뭔가 할 말이 생기면, 예전과 조금도 달라진 바 없는 나를 보게 된다. 내가 원하는 정화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난 이를 위해 무엇인가를, 언어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을? 내가 나의 언어에서 탈출하여 다른 언어로 가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언어에서 도피하는 게 아니다. 언어를 새로 발명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

난 아마 포르투갈어 단어들을 새로 만들고 싶은 모양이다. 새로운 문장들은 낡고 진부하다거나 흥분하여 기교를 부린다거나 의도적이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포르투갈어로 된 문장의 중심을 이루는 원형(原形 근원원 형상형)이라서, 에움길이나 오염이 없이 다이아몬드와 같은 투명한 본질에서 바로 나온다는 느낌을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 단어들은 윤을 낸 대리석처럼 흠이 없고,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은 모두 완벽한 침묵으로 변화시키는 바하의 변주곡 음색처럼 맑아야 한다. 가끔 언어의 진흙 구덩이와 타협하려는 마음이 내 안에 약간 남아 있다면, 그 마음은 화기애애한 거실의 부드러운 고요함이나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느긋한 평온함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끈적거리는 언어 습관에 대한 분노가 나를 에워싸면, 그 분노는 빛이 없는 우주의 맑고 서늘한 적막함 이상이어야 한다. 내가 포르투갈어로 말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 소리 없는 열차를 끌고 가는 우주.... 종업원이나 이발사나 승무원은 새로운 조어를 들으면서 그 문장의 빛나는 간결함, 그 아름다움에 놀랄 것이다. 내 생각에 이런 문장들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엄격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청렴하고 확고부동하게 서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신의 말과 비슷하고, 또한 과장이나 격정이 없이 정확하고 간결하여 단 하나의 단어나 쉼표도 뺄 수 없다는 점에서 언어의 연금술사가 엮은 시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38-40



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드는 잔인함이 그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45


오랫동안 외국-다른 대륙, 다른 기후, 다른 언어 환경-에 살다가돌아온 학생들을 만날 때면 마음의 평정을 더 많이 잃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셨어요?아직 키르헨펠트에 계세요?" 그들은 이렇게 묻고는 가던 발걸으을 재촉했다. 그런 날 밤이면 그레고리우스는 이 질문에 대한 변명거리를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변명을 해야 한다는 느낌조차 견디기 힘들어졌다.  46


무엇인가와 작별을 할 수 있으려면 내적인 거릳기가 선행되어야 했다.  47



-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이런 생각은 술 취한 저널리스트와 요란하게 눈길을 끌려는 영화제작자, 혹은 머리에 황색 기사 정도만 들어 있는 작가들이 만들어낸 유치한 동화일 뿐이다.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이런 경험은 폭음이나 불꽃이나 화산 폭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경험을 하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안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무음(無音 없을무 소리음)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55



-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60



"아무 때나 전화하세요. 낮이든 밤이든." 독시아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둘이 처음 만났던 20년 전을 떠올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의사는 외국인임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는 독특한 억양으로 말했다. 

"눈이 먼다고요? 아닙니다. 그냥 운이 나빴던 거예요. 정기적으로 망막을 검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레이저도 있는걸요.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는 그레고리우스를 문까지 배웅하다가 멈춰 서더니 눈을 깊게 들여다보며 물었다.

"무슨 다른 걱정거리라도?"

그레고리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플로렌스와의 이혼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말은 몇 달이 지난 후에야 할 수 있었다. 그리스 의사는 별로 놀라지 않은 듯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가끔 정말 두려워하는 어떤 것 때문에 다른 무엇인가에 두려움을 갖기도 하지요." 그때 그가 한 말이었다.  62-63


그때 형태가 잡히지 않은 채 우리 앞에 놓여 있던 그 열린 시간에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무엇을 해야 했을까. 자유로워 깃털처럼 가벼웠고, 불확실하여 납처럼 무거웠던 그 시간에.  75


지나온 시간이 괴롭지 않은 사람도 돌아가려고 할까?  77


낯선 사람의 삶을 산다는 게 어떤 것일까 생각하며 남의 뒤를 밟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금 전 그의 마음속에서 터져 나온 감정은 아주 새로운 호기심이었다. 그 호기심은 기차를 타고 오면서 경험했고, 파리 리용 역에 내리면서도-어제였든 아니면 언제였든- 느꼈던 새로운 종류의 각정과 어울릴 만한 것이었다.  80


그레고리우스는 뭘 해야 좋을지 모를 때마다 독서를 하곤 했다. 베른 근처 산간 마을 농부의 딸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책을 읽는 일이 드물었다. 가끔 읽는다고 해도 루트비히 강호퍼(1855~1920, 향토 소설로 유명한 독일 작가)의 향토소설 정도만 읽었는데, 그것조차도 몇 주씩 걸렸다. 아버지는 텅빈 박물관 전시실의 무료함을 잊는 수단으로 독서를 시작했고, 읽는 데 취미를 붙이고부터는 손에 잡히는 책은 무엇이든 읽었다. "이제 너도 책 속으로 도망치는구나." 독서의 기쁨을 발견한 아들에게 어머니가 한 말이었다. 책에 대한 어머니의 이런 생각, 좋은 글이 지닌 마술과 같은 힘이나 광채를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는 그를 슬프게 했다. 

그는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 즉 책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독서를 하는지 하지 않는지는 금방 알 수 있으며, 사람 사이에 이보다 더 큰 구별은 없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들으면 놀랐고, 그의 괴상한 성격에 머리를 가로젖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레고리우스는 알고 있었다. 정말 알고 있었다.  101-102


담배를 피우는 이방인이 유리에 비친 나의 모습에서 일그러진 상(像 형상상)을 만들어 내리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고, 내 관념 세계에 관한 그의 공상은 일그러진 채 점점 쌓여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이중으로 이방인이 된다. 우리 사이에는 허위적인 외부세계뿐 아니라 외부세계가 각자의 내부세계에 만드는 망상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106-107


우리는 서로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108


모든 사람이 똑같은 그를 보았지만, 프라두가 말하듯 사람드링 보는 외부세계의 한 부분은 내면세계의 한 부분이기도 하므로 모두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프라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 그대로였던 때는 자기 인생에서 단 일 분도 없다고 확신했다.  108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110


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레고리우스는 깃털처럼 가벼운 새 안경을 벗고 눈을 문지른 다음, 다시 한 번 썼다. 그런데 사실이었다. 예전 그 어느 때보다 잘 보였다.  114


새 안경으로 세상은 더 넓어졌고, 공간은 실제로 3차원이 되어 사물들이 마음껏 몸을 펼 수 있었다. 전혀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115



-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인함과 자비심과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가득한 감독.  116



- 사람들의 만남이란 한밤중에 아무런 생각 없이 달려가는 두 기차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우리는 뿌연 창문 저편의 흐릿한 불빛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시야에서 바로 사라져서 알아볼 시간도 없는 사람들에게 빠르고 덧없는 시선을 던진다. 무(無)에서 나와 아무런 의미나 목적 없이 텅빈 어둠 속에서 조각처럼 빛나던 창틀, 그 창틀에 들어 있는 유령들처럼 스쳐간 것이 정말 한 남자와 여자였던가? 두 사람은 아는 사이였을까? 둘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가? 웃었던가, 울었던가? 사람들은 이런 광경이란 서로 모르는 타인이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날 산책하면서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말할지 모른다. 이 경우에는 그런 비교가 어느 정도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우리는 많은 살마들과 오랫동안 마주보고 앉아 있다. 함께 먹고 일하며 옆 자리에서 잠을 자고, 한 지붕 아래서 산다. 스쳐 지나가는 덧없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속성과 신뢰감과 친밀한 이해심을 보이는 이 모든 것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속임수는 아닐까? 매순간 견딜 수 없으므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이 덧없음을 은폐하고 없애려는 시도... 다른 사람을 향한 눈빛이나 시선 교환은, 모든 것을 흔들고 덜컹거리게 만드는 엄청난 속도와 기압에 마비된 기차 승객들이 서로 스쳐 지나가며 던지는 지극히 짧은 시선의 만남과 같은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스치며 지나가는 밤의 만남처럼 언제나 서로에게서 벗어나고, 추측과 생각의 단상과 날조된 특성들만 우리에게 남겨두는 건 아닌지. 만나는 게 사실은 사람들이 아니라, 상상이 던지는 그림자들은 아닌지.  122-123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과거로 돌아가 그를 새롭게 아는 것..

자기 삶과는 완전히 달랐고 자기와는 다른 논리를 지녔던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까.  127


'글을 쓰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깨어 있다고 할 수 없어.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 자기가 어떤 사람이 아닌지는 더욱 알지 못하지고.'(아드리아나의 증언 중)  141


(에사)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1952년 가을, 영국에서였소. 런던에서 브라이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였지...

내가 탄 기차 칸의 문이 열리더니 머리카락이 헬멧처럼 반짝이는 그 사람이 들어오더군. 차가우면서도 부드럽고, 우울해 보이는 눈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그는 신부 파치마와 함께 장거리 여행을 하는 중이었소. 그때든 그 후로든, 그 사람에게 돈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소. 난 그가 의사라는 것, 그리고 특히 뇌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리고 원래 사제가 되려고 했지만, 철저한 유물론자라는 것도. 아주 많은 일에 역설적인 견해를 지녔던 사람이었지. 모순적이 아니라 역설적인 견해 말이오."  150-151


".. 의사들은 믿지 않았거든. 의사들을 믿지 않는 의사라.. 그 사람은 그랬고. 아마데우는."  152


그는 저항운동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소. 성격도 맞지 않았지. 저항운동가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꿈꾸는 사람의 감수성 예민한 영혼이 아니라 나처럼 투박한 두개골이 필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너무 위험 부담이 크고 실수도 하게 되어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어버린다오. 그는 만용에 가까운 행동을 할 수 있을 만큼 아주 냉혹했지만, 인내심이나 우직함은 없었소.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어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은 없었지.  153


(멜로디) ".. 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무자비하고 타협하지 않는 오빠의 비판을 좋아했어요..."

"..오빠는 벌써 네 살 때 글을 읽기 시작해서 손에 잡히는 건 뭐든 읽었다고 해요. 초등학교에서는 지루해서 죽을 정도였고, 중등학교에서도 두 번이나 월반을 했어요. 스무 살 때는 온갖 것들을 모두 알게 됐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스스로에게 묻기에 이르렀어요. 그러느라 공놀이 같은 건 잊은 거지요."  179


"그레고리우스, 그건 글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말하는 건 글이 아니라고요. 그냥 말을 하는 거예요."

그레고리우스가 사람들이 서로 연관이 없고 모순된 말을 한다고, 그리고 말한 것도 금방 잊어버린다고 불평했을 때 한 대답이었다. 독시아데스는 그의 말에 마음이 많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자기처럼 택시 운전, 그것도 테살로니키엣 택시 운전을 해본 경험이 있다면 사람들이 하는 말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주 확실하게-이렇게 확실하게 아는건 인생에서 몇 개 안 될 정도로-안다고 했다. 그냥 말하기 위해 말을 할 뿐이라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없다면, 그럼 말로는 도대체 뭘 해야 하느냐고 그레고리우스가 물었다. 독시아데스는 껄껄 웃었다. 

"스스로 말을 하는 계기로 삼아야지요! 그래서 말이 계속 이어지도록."  180-181



- 영혼의 그림자.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다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말처럼 확실한가? 스스로의 말이라는 것이 맞기는 할까?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람들은 신빙성이 있을까? 그러나 내가 고민하는 진짜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정말고민스러운 문제는 이런 이야기에 도대체 진실과 거짓의 차이가 있기나 할까라는 것. 외모에 관한 이야기에는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이 여행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183



- ... 지금의 내가 안니,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그 시절로 다시 가고 싶은-꿈과 같이 격정적인 -갈망.... 다시 한 번 손에 모자를 쥐고 따뜻한 이끼 위에 앉아 있고 싶은 것, 이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길 원하면서 그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겪은 나를 이 여행에 끌고 가려고 하는 것, 이는 모순되는 갈망이 아닌가.  184-185



(바르톨로메우 신부) "..아마데우는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앉아 있었소. 그 아인 기억력이 엄청나게 뛰어났지. 검은 눈은 옆에서 아무리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 해도 흔들리지 않는 달관한 시선과 굉장한 집중력으로 두꺼운 책들을 한 줄씩, 한 쪽씩 모두 빨아들였소. 어떤 선생이 이렇게 말하더군. '아마데우가 책을 읽고나면 그 책에는 더 이상 글씨가 들어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아마데우는 책의 의미만 삼키는 게 아니라 잉크까지 먹는다니까요.'.."  193


"..재능이 많았던 아마데우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소. 하지만 못하는 게 한 가지 있었지. 놀고 즐기고 절제 없이 행동하는 거였소. 엄청난 각성과 통찰과 자제를 향한 열정적인 욕구는 자기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지..."  195


"..아마데우는 천박한 허영심을 대하면 잔인해졌소. 아주 심하게...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드는 듯했지. '천박한 허영심은 우둔함의 다른 형태죠. 우리의 모든 행위가 우주 전체로 봤을 때 얼마나 무의미한지 몰라야 천박한 허영심에 빠질 수 있어요. 그건 어리석음이 조야한 형태로 나타난 거예요.' 그는 늘 이렇게 말했소.."  202


아마데우가 졸업식에 낭독한 글..

첫 문장을  들은 직후부터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았소. 시간이 지날수록 정적은 더 심해졌지. 이미 인생을 다 산 듯한 열일곱살짜리 우상파괴자의 펜 끝에서 나온 문장은 마치 채찍질과도 같았소...

나중에 선생도 보게 되겠지만, 마지막 문장은 감동적이면서도 겁을 주는 협박이오..

아마데우는 그 문장을 크게 말하지도, 주먹을 불끈 쥐고 말하지도 않았소. 차분하고 거의 부드럽기까지 한 목소리였소.  209


그레고리우스는 대강당으로 가서 코르테스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프라두의 연설을 듣던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책방 봉지에서 바르톨로메우 신부의 서류철을 꺼내 끈을 풀고, 아마데우가 연설을 끝내고 교탁에 선 채 놀란 청중의 침묵 속에서 정리했던 종이뭉치를 꺼냈다..


- 신의 말씀에 대한 경외와 혐오.

난 대성당이 없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이 세상의 범속함에 맞설 대성당의 아름다움과 고상함이 필요하니까. 반짝이는 교회의 유리창을 올려다보며 그 천상의 색에 눈이 부시고 싶다. 더러운 제복의 단조로운 색깔에 맞설 광채가 필요하니까. 교회의 혹독한 냉기로 내 몸을 감싸고 싶다. 병영의 단조로운 고함 소리와 들러리 정치인의재기 넘치는 수다네 맞설, 명령을 내리는 듯한 그 정적이 필요하니까. 행진곡의 새된 천박함에 대항할 물 흐르는 듯한 오르간의 울림이, 흘러넘치는 그 숭고한 음색이 듣고 싶다. 난 기도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천박함과 경솔함이라는 치명적인 독에 대항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필요하니까. 난 성서의 강력한 말씀을 읽고 싶다. 언어의 황폐함과 구호의 독재에 맞설, 그 시(詩)가 지닌 비현실적인 힘이 필요하니까. 이런 것들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가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이 또 하나 있다. 우리 몸과 독자적인 생각에 악마의 낙인을 찍고 우리의 경험 가운데 최고의 것들을 죄로 낙인찍는 세상, 우리에게 독재자와 압제자와 자객을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세상. 마비시킬 듯한 그들의 잔혹한 군화 소리가 골목에서 울려도, 그들이 고양이나 비겁한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거리로 숨어들어 번쩍이는 칼날로 등 뒤에서 희생자의 가슴까지 꿰뚫어도... 설교단에서 이런 무뢰한을 용서하고 더구나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일 가운데 하낟. 설사 누군가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이는 유례가 없는 허구이며 완벽한 불구하는 값을 치러야 하는 무자비한 자기기만이다. 적을 사랑하라는 이 괴상하고도 비상식적인 명령은 사람들의 의지를 꺾고 용기와 자신감을 빼앗아, 필요하다면 무기까지도 들고 독재자에게 대항하여 일어나야 할 힘을 얻지 못하도록, 그들의 손아귀에서 나긋나긋해 지도록 하기에 적합해 보인다.  

난 신의 말씀을 경외한다. 시적인 그 힘을 사랑하므로, 난 신의 말씀을 혐오한다. 그 잔인함을 증오하므로, 이 사랑은 아주 힘든 사랑이다. 말씀의 광채와 자만하는 신이 만드는 엄청난 예속을 끝없이 구분해야 하니까. 이 증오도 아주 힘든 증오다. 이 세상의 멜로디인 말씀을, 우리가 어릴 때부터 경외하라고 배운 말씀을 어떻게 증오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다음부터 우리를 봉화처럼 비추던 말씀을, 우리로 하여금 지금의 존재가 되도록 이끌어준 그 말씀을?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친자식을 동물처럼 도살하라고 요구했음을. 이런 말씀을 읽을 때 느끼는 분노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자신과 논쟁하려 한다고 욥을 비난하는 신은 도대체 어떤 신인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자기가 겪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욥을? 욥을 그렇게 만든 게 누구던가? 신이 아무런 이유 없이 어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이, 평범한 사람이 그러는 것보다 덜 부당할 이유는 뭔가? 욥이 불평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았던가?

신의 말씀이 지닌 시적 분위기는 너무나 대단해서 모든 것을 침묵하게 하고, 모든 저항을 하잘것없는 불만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선포된 요구와 굴종이 너무 심하여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는 성서를 옆에 밀어놓는 정도가 아니라 던져버려야 한다. 성서에서는 생활과 동떨어져 있으며 즐거움이라고는 없는 신이, 자유로워야 묘사할 수 있는 인생의 그 큰 범위를 복종이라는 단 한 가지 영역으로, 꼼짝할 수 없는 영역으로 한정하려 한다. 우리는 죄를 짊어져 꼬부라지고, 품위를 잃게 하는 예속과 고해성사로 위축되어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긋고, 그의 품 안에서 더 나은 인생을 누리기 위해 수천가지 희망을 거부한 채 무덤을 향해 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서 모든 기쁨과 자유를 빼앗은 그의 품 안에서 어떻게 인생이 더 나아진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에게서 나오고 그를 향해 가는 말씀은 현혹적으로 아름답다. 복사(服事 옷복 일사) 때 난 그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제단의 촛불 속에서 그 말씀은 얼마나 나를 취하게 했던가! 이 말씀이 온갖 일들의 척도임을 얼마나 당연하게 생각했던가! 사람들이 다른 말-혐오스러운 산란함과 본질의 상실을 의미하는 말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또 얼마나 이해할수 없는 일이었던가! 난 지금도 그레고리오 성가를 들으면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예전의 그 심취가 이제 반란에 돌이킬 수 없이 자리를 내준 사실에 잠시 슬픔에 젖는다. '지성의 희생(sacrificium intellectus)'이라는 두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화염처럼 내 안에서 솟구쳤던 반란...

호기심과 질문, 의혹과 논거, 생각하는 즐거움 없이 우리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우리의 목을 치는 칼날과 같은 두 단어는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느끼고 행동하며 살라는 요구이자 광대한 분열을 향한 선동이며, 우리 삶의 내적인 통일과 조화라는 행복의 정수를 희생하라는 명령이다. 갤리선의 노예는 쇠사슬에 묶여 있지만 원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신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행위를 가슴 깊은 곳에서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 그것도 기쁨으로 행하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큰 경멸이 있을까?

신은 그 편재함으로 낮이나 밤이나 우리를 관찰하고 매시간, 매분, 매초마다 우리의 행위와 생각을 장부에 기록하며, 온전하게 우리 자신일 수 있는 시간을 단 한순간도 주지 않는다. 비밀이 없는 사람은, 오직 그 자신만이 알고 있는 생각과 소망이 없는 사람은 과연 어떠한가? 종교재판 때와 현재의 고문 기술자들은 알고 있다. "피의자가 내부로 후퇴할 길을 차단하라, 불을 절대 끄지 마라, 절대 혼자 두지 마라, 그에게서 잠과 평온함을 빼앗으라, 그러면 곧 자백할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훔쳐가는 고문은 호흡하는 데 필요한 공기와도 같은 외로움, 우리가 스스로와 마주 설 수 있는 그 외로움을 파괴한다. 우리의 구주, 우리의 신은 자신의 방종한 호기심과 반감을 일으키는 그 궁금증으로 불멸이어야 할 우리의 영혼을 훔치고 있다는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

영원히 죽지 않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이 과연 있으랴? 누가 영원히 살고 싶어할까? 말 그대로 끝없이 많은 날과 달라 해가 앞으로 오므로, 오늘과 이 달과 올해에 일어나는 일이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지루하고 공허한가? 정말 영원히 산다면, 의미가 있는 일이 하나라도 있을까 우리는 시간을 계산하지 않아도 되고, 놓치는 것도 없으며, 서두를 필요도 없다. 우리가 어떤 일을 오늘 하든 내일 하든 아무런 상관이, 정말 완벽하게 아무런 상관이 없다. 회복할 시간이 얼마든지 있으므로 수없이 많은 실수도 영원 앞에서는 무(無)가 되고, 뭔가 후회한다는 것도 무의미해진다. 하루하루 태평하고 편안하게 느낄 수도 없다. 이러한 행복은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자각을 먹고 살기 때문에, 그리고 게으름뱅이는 죽음과 마주한 모험가요 성급이라는 명령과 싸우는 십자군이므로, 언제 어디든 누구에게든 시간이 한없이 많다면 시간을 낭비하면서 얻는 기쁨이 설 자리가 어디에 있으랴?

두 번째로 오는 느낌은 처음과 같지 않다. 그것은 반복을 의식함으로써 퇴색된다. 너무 자주 오고 오래 지속되는 감정은 우리를 지치고 싫증나게 한다. 불멸하는 우리의 영혼 속에는 이런것들이 결코,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아는 데서 오는 어마어마한 권태감과 절규하는 절망감이 자랄 것이다. 우리도 변화하는 감정과 함께 변하기를 원한다. 감정은 바로 예전의 자신을 떨쳐버리기 때문에, 그리고 스스로 다시 사라질 미래를 향해가기 때문에 감정이다. 이러한 감정의 물결이 영원으로 흐른다면, 조망이 가능한 시간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가 전혀 상살할 수 없는 수천 가지 감정이 마음속에 생겨날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에게 어떤 약속이 주어지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우리가 영원토록 우리여야 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우리인 이 강요된 상황에서 언젠가 벗어난다는 위안은 결코 없다는 뜻인가? 우린 여기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하며 또 영원히 알 수 없을 터인데, 이런 무지는 축복이다. 불멸이라는 이 낙원은 바로 지옥임을, 그 한 가지 사실은 알고 있으므로.

현재에 아름다움과 두려움을 부여하는 것은 죽음이다. 시간은 죽음을 통해서만 살아 있는 시간이 된다. 모든 것을 안다는 신이 왜 이것은 모르는가? 견딜 수 없는 단조로움을 의미하는 무한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난 대성당이 없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유리창의 반짝임과 서늘한 고요함과 명령을 내리는 듯한 정적이, 오르간의 물결과 기도하는 사람들의 성스러운 미사가, 말씀의 신성함과 위대한 시의 숭고함이 필요하니까. 나는 이 모든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자유와 모든 잔혹함에 대항할 적대감도 필요하다.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무의미하다. 아무도 나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말기를.  215-221


글을 세번 읽는 동안 그레고리우스의 놀라움은 점점 커갔다.  211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가 쓴 글을 숨도 쉬지 않고 읽었다.  248



- 난 그를 위해 그랬던가? 살아남는다는 그의 관점에서 내가 행한 일인가? 그게 내 의지였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까? 환자들을 대할 때면 물론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일지라도 난 그렇게 행동한다. 어쨌든 그랬길 바란다. 내 행동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자신의 의지였다고 알고 있는 동기 외에 완전히 다른 어떤 동기에 영향을 받는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는?

내 손은 자신만의 고유한 기억을 지닌 듯하고, 이 기억은 자기 관찰을 위한 다른 어떤 원천보다도 더 신뢰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멩지스의 심장에 바늘을 찌르던 이 손의 기억. 이 손은 폭군살해자의 손, 그러나 역설적인 행위로 이미 죽은 폭군을 다시 살린 손이었다. (늘 새롭게 경험하는 일이지만, 내 원래 생각과 반대되는 현상은 여기서도 증명된다. 육체가 정신보다 매수되기 어렵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정신은 스스로에 대한 확실한 신뢰와 스스로에게 더 이상 놀라지 않는 인식의 친근함을 우리에게 그럴듯하게 꾸며대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단어들로 엮여 있는 자기기만의 매력적인 활동 무대다. 이렇듯 수월한 자기 확신 속에서 사는 인생은 얼마나 지루한가!)

그러니 사실은 내가 날 위해 그 일을 한 건가? 내가 훌륭한 의사요 증오를 억누를 수 있는 힘을 지닌 용감한 인간임을 나 스스로에게 보이기 위해? 승리를 거둔 극기를 칭찬하고 자기 통제의 기쁨을 즐기기 위해? 그러니까 도덕적인 허영심, 아니 그것보다 더 나쁜 지극히 일상적인 허영심에서? 그러나 그 몇 초 동안의 경험은 결코 향락적인 허영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확실하다. 오히려 나 자신의 뜻과 반대로 행동하고, 끓어오르는 보복과 심술이라는 감정을 눌러야 했던 경험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허영심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허영심, 반대 감정 뒤에 숨어 있는 허영심도 있지 않을까?

'난 의사요.' 흥분한 군중 앞엣 내가 했던 말이다. '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사람이오, 그건 신성한 선서요. 그 선서를 어기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요. 무슨 일이 있어도...'가로 말할 수도 있었겠지. 난 이런 말을 좋아하고, 또 사랑한다. 이런 말은 나를 감동시키고 황홀하게 한다. 사제의 서약처럼 들리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내가 인간백정에게, 그에게 잃어버린 목숨을 돌려준 것은 일종의 종교적인 행위였을까? 더 이상 교조와 예배를 통해 우월감을 느낄 수 없음을 마음속으로 아쉬워하는, 제단 촛불이 지닌 천상의 광채를 아직도 그리워하는 사람의 행위? 다시 말해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행위? 나 스스로도 느끼지 못했지만, 내 영혼 속에서는 예전에 신부님의 귀여움을 받던 제자와 아직 한 번도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않은 폭군살해자 사이에 짧고도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던가? 생명을 구하는 '독'이 든 주사바늘을 심자엥 꽂은 것은 사제와 살인자가 함께한, 각자가 원하던 것을 얻은 행위였나? 

나에게 침을 뱉은 사람이 이네스 살루마옹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면, 난 나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우리가 너에게 요구한 건 살인이 아니었다."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었겠지.

"법적이나 도덕적인 의미에서나 그건 범죄가 아니었어. 그가 그냥 죽게 내버려두었더라도 너에게 판결을 내릴 판사도 없었고, '살인하지 말라'는 모세의 십계명을 어겼다고 말할 사람도 없었다. 우리가 원했던 건 아주 단순명료하고 간단한 일이었어. 우리에게 불행과 고무노가 죽음을 불러온 사람의 목숨, 우리를 불쌍히 여긴 하늘이 이제 드디어 없애려고 하던 목숨을 그렇게 온 힘을 다해, 그가 앞으로도 계속 유혈 체제를 유지하도록 붙잡지는 않는 거였다."

난 무슨 말로 나를 변호했을까?

"어떤 사람이든, 무슨 짓을 저질렀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할 권리가 있다. 우리에겐 다른 사람의 생사 여부를 판단하거나 주관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그게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의미한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총을 쏘는 누군가를 발견한다면, 그 사람을 쏘지 않는가? 당신이 살인을 저지르는 멩지스를 눈앞에서 본다면 필요한 경우 살인을 해서라도 그의 살인을 막지 않을까? 당신이 했어야 할 일,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것과 비교하면 별것 아니지 않은가?"

그를 죽게 그냥 내버려두었더라면 내 기분은 지금 어떨까? 사람들이 나에게 침을 뱉는 대신 치명적인 나의 방임을 칭송 했더라면? 분노를 뿜어내는 실망 대신 느긋한 안도의 숨소리가 골목에서 들렸더라면? 난 분명 악몽을 꿀 정도로 시달렸을 것이다. 이유가 뭘까? 내가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수 있어서? 아니면 그를 죽게 내버려두는 냉혹한 행위는 내가 나 자신에게 낯설어짐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의 나도 그저 우연의 산물일 뿐이 아닌가.

이네스에게 가서 초인종을 누르고, 이렇게 말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어쩔 수 없었어요. 난 원래 그래요. 사정이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됐어요. 내가 생긴 게 워낙 그러니, 달리 어떻게 할 수 없었어요."

그러면 그녀는 아마 이렇게 대답하겠지.

"당신 기분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건 정말 하찮은 거니까. 하지만 멩지스가 건강해져서 제복을 다시 입고, 살해 명령을 계속 내린다고 생각해봐요. 아주 자세하게 상상해보라고요. 자, 이제 자기 자신을 판단해보시죠."

내가 그녀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어떻게, 무슨 말을?  248-252



멩지스가 눈앞에 누워 있을 때, 프라두가 본 것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특정한 개인이었다. 오직 그라는 개별적인 한 인간, 프라두는 멩지스의 삶을 다른 사람들과 연관지어, 더 큰 범위 속의 한 요소로 계산할 수 없었다. 프라두의 혼잣말에 등장하는 여자는 바로 이 점을 비난했다. 그가 개별적인 다른 사람들의 목숨과도 똑같이 관련된, 그것도 여러 사람들의 목숨과 관련된 결과를 생각하지 않은 것. 한 사람의 개별적인 목숨을 여러 사람의 개별적인 목숨을 위해 희생하지 않은 것.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가 이런 일을 배우려고 저항운동에 참여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의도는 실패로 끝났다. "한 사람 대 여러 사람의 목숨. 이런 식으로 계산할 수는 없지 않나요?" 몇 년 뒤에 프라두는 바르톨로메우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253



- "그래, 하지만 왜 불안하지? 고통이나 실망이나 슬픔 또는 분노가 아니라 왜 불안일까? 불안은 이제 앞으로 올 일, 일어날 일에 대해 갖는 감정 아닌가? 네가 피아노를 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늘 알고 있었고, 우린 그걸 '현재'로 다퉜잖아. 이 불행은 지속될지는 몰라도, 불안하다는 느낌이 타당할 만큼 커질 수는 없지 않을까? 연주를 할 수 없을 거라는 뚜렷한 인식은 네 기운을 빠지게 하고 답답하게 만들지는 몰라도, 공포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야."

"그건 오해야."

조르지가 반박했다.

"공포는 새로운 인식 때문이 아니야. 무엇에 대한 인식인지가 문제야. 미래의 것이긴 하지만 현재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내 인생의 불완전함, 지금 이미 결핍이라고 느끼는 이 불완전함이지. 이 결핍이 너무 커서 늘 알고 있었던 사실이 내 안에서 공포로 변해."  266



- 인생이 가볍든 힘들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상관없이 더 많은 삶을 원한다. 끝나고 나면 모자라는 인생을 더 이상 그리워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들은 삶이 끝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복잡하고 분석적인 사유는 직관적인 인식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린 둘 중에 어떤 것을 더 신뢰해야 하나?  269



조르지는.. 왜 이 일에 관심이 있는지 물었다...

"제가 그였더라면 어땠을지 알고 싶어서요."

그레고리우스가 대답했다...

"그게 가능할까요?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 '그'가 된다는 것이?"

그레고리우스는 적어도 그라고 상상하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있지는 않느냐고 대답했다.  280


책은 훔쳤소. 책을 읽는 데는 돈이 들지 말아야 한다는 게 당시 내 생각이었는데,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소.  288


둘은 차를 마시며 체스를 두었다. 말을 움직이는 에사의 손이 떨렸다. 말을 새로 놓을 때마다 딱 소리가 났다. 그레고리우스는 에사의 손등에 난 화상 자국에 번번이 놀랐다. 

"끔찍한 건 고통이나 상처가 아니오."

에사가 말했다. 

"가장 끔찍한 건 굴욕이지. 바지에 오줌을 쌌다는 걸 알았을 때의 굴욕감... 석방되고 나서 난 복수심에 불탔소. 고문기술자들이 퇴근하여 나올 때까지 숨어서 기다렸지. 그들은 사무실에 다니는 사람들처럼 뻣뻣한 외투 차림에 서류가방을 들고 나왔소. 난  그들의 뒤를 밟아 집까지 갔지. 눈에는 누, 이에는 이로 보복하기 위해. 내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을 만지는 게 구역질이 났기 때문이었소. 보복을 하려면 어차피 손을 댈 수밖에 없었소. 총을 사용하는 건 그들에겐 너무 관대한 처벌이었을 테니까. 마리아나는 내가 도덕적인 성숙의 과정을 겪은 줄 알아. 그건 전혀 아니었소. 난 언제나 이른바 '성숙'이라는 걸 거부하던 사람이오. 싫어해. 난 사람들이 말하는 성숙이란 걸 낙관주의나 완벽한 권태라고 생각하오."  290-291



- 실망이라는 향유. 실망은 불행이라고 간주되지만, 이는 분별없는 선입견일 뿐이다. 실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했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으랴? 또한 이런 발견없이 자기 인식의 근본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그러니 실망이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함을 어떻게 얻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우리는 실망을, 없으면 우리 인생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한숨을 지으며 할 수 없이 견뎌야 하는 그 무엇이라고 취급해서는 안 된다. 우린 실망을 찾고 추적하며 수집해야 한다. 젊은 시절에 숭배했던 영화배우가 이제 노화와 쇠락의 징후를 보이는 것에 나는 왜 실망하는가? 성공의 가치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에 대한 실망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부모님에 대한 실망을 평생 동안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 사람들에게서 우린 뭘 기대했던가? 무자비하게 고통스러운 통치 아래서 평생 시달려야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고통을 주고 경제적인 도움도 주는 사람들-행동에서 실망을 느낀다. 그들의 행동이나 말이나 감각은 너무나도 미미하다. 

"뭘 기대하는 겁니까?"

내가 묻는다. 그들은 대답하지 못한다. 이들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기대, 실망할 수도 있는 기대를 오랫동안 품고 다녔다는 사실에 놀란다.

자신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말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 실망스러운 경험의 수집이란 그에게 중독과도 같을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독. 그에게는 실망이 뜨겁게 파괴하는 독이 아니라 서늘하게 긴장을 풀어주는 향유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의 진정한 윤곽이 무엇인지 눈을 뜨게 해주는 향유...

그에게는 다른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실망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실망이 스스로를 향한 길잡이라고 인식한 사람은, 없는 용기와 모자라는 성실함 또는 자신의 감각과 행동과 말에서 끔찍하도록 좁은 한계 등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내기 위해 온갖 힘을 쏟는다. 우리가 우리에게서 바라고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우리에게 한계가 없다는 것? 아니면 우리가 사실은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

기대를 줄임으로써 더 현실적이 되고, 단단하고 신뢰할 만한 본질만 남아 실망의 고통에 맞서는 저항력을 지니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포괄적이고 원대한 기대를 금지하고, 버스의 도착 여부와 같은 무의미한 기대만이 존재하는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292-294



"난 아마데우처럼 거리낌 없이 몽상에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소."

에사가 말했다.

"그리고 실망을 그토록 싫어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소. 아마데우의 이 글은 스스로에게 맞서서 쓴 거요. 자주 자신의 뜻에 거스르며 살아야 했던 그의 삶과 마찬가지로..."  294



- 우스꽝스러운 무대. 우리가 중요하고 슬프고 우습고 아무 의미도 없는 드라마를 상연하기를 기다리는 무대로서의 세계. 이런 생각은 얼마나 감동적이고 매혹적인가, 그리고 올마나 불가피한가!  307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를 잊을 수 있을까?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의 드라마를 상연하는 무대 역할을 한다고 해도? 망각이 아니었다면 그건 무엇이었을까?  309



- 내적인 넓이. 우리는 지금 여기서 산다. 예전에 다른 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과거다. 대부분은 잊어버렸고, 남아 있는 작은 부분들도 무질서한 기억의 파편들일 뿐이다. 단편적인 우연 속에서만 빛을 내다 사라지는 기억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습관적으로 이렇게 생각하곤 한다. 우리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 다른 사람인 경우에도 이는 가장 자연스러운 사유 방식이다. 이 사람들은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가 아니라 정말 지금 여기 우리 눈앞에 있으므로, 기억의 내적인 일화-그 기억의 현실성이 전적으로 그 사건의 현재성에만 있는-라는 형태를 통해서가 아니면, 이들이 과거와 갖는 관계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나 자신의 내부라는 관점에서 보면 상황은 아주 달라진다. 이 경우 우리는 현재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과거로 깊숙이 들어간다. 이런 일은 깊은 감각, 다시 말해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라는 느낌은 어떤 것인지를 결정하는 감각이 누구만 가능하다. 이 감각은 시간을 초월하고, 시간을 인정하지도 안흔다. 내가 지금도 여전히 손에 모자를 들고 학교 계단에 앉아 혹시 마리아 주앙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여학교로 눈길을 보내는 소년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물론 잘못된 주장이다. 30년도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실이기도 하다. 어려운 과제를 앞두고 두근거리는 내 가슴은, 수학을 담당했던 랑송이스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올 때 뛰던 그 가슴이다. 온갖 권위에 직면했을 때 답답해지는 가슴속에서는, 허리를 굽힌 아버지의 호령이 함께 울려 퍼진다. 모르는 여자의 반짝이는 눈빛과 마주칠 때마다, 그 옛날 학교 유리창에서 마리아 주앙의 시선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고 느꼈을 때처럼 숨이 멎는다. 난 늘 그곳에, 먼 시간의 저편에 있다. 결코 그곳을 떠난 적이 없다. 과거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거나, 그곳에서 출발하며 산다. 이 과거는 단순하고 짧은 일화 형태로 반짝이는 기억이 아니라 현재다. 시간이 몰고 온 수천 가지 변화는, 시간을 초월하는 현재의 이 감각과 비교하면 꿈처럼 덧없고 비현실적이며 환영처럼 기만이 심하다. 이 변화들은, 고통과 걱정거리를 안고 나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내가 마치 완벽한 자신감과 용기를 지닌 의사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불안에 떨며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신뢰감은, 그들이 내 앞에 있는 한 나 스스로 이것을 사실로 믿도록 강요한다. 하지만 환자들이 나가자마자 난 그들에게 소리치고 싶다. 난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학교 계단에 앉아 있는 소년일 뿐이라고, 내가 하얀 가운을 입고 이렇게 거대한 책상 앞에 앉아 환자들에게 충고를 하는 것은 정말 하찮은 일이고 사실은 거짓이라고, 우리가 같잖은 천박함으로 현재라고 부르는 현상에 속지 말라고...

우리는 시간상으로만 광범위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공간적으로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훨씬 넘어서 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장소를 떠나면서 우리의 일부분을 남긴다. 떠나더라도 우리는 그곳에 남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그곳으로 돌아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단조로운 바퀴 소리가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그 여정이 아무리 짧더라도-장소로 우리를 데리고 가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가까이 가고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을 떠난다. 우리가 낯선 정거장의 플랫폼에 두 번째로 발을 디디면, 그래서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다른 곳과 확연히 구별되는 냄새를 맡으면 우리는 외형상으로만 먼 곳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 먼 곳에도 이른 것이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에게서 아주 외딴 구석, 우리가 다른 곳에 있을 때면 무척 어두워 보이지 않았던 곳에... 그렇지 않고서야 승무원이 지명을 크게 외치고 기차가 멈추느라고 내는 끼익 소리를 들으면, 역 건물의 그림자가 우리는 삼키기 시작하면, 왜 그렇게 가슴이 뛰고 숨이 차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왜 우리는 기차가 마지막으로 덜컥이며 완전히 멈추는 순간을 마술적이고 소리 없는 드라마라고 생각하는가?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플랫폼에 첫 발자국을 디딘 순간부터, 그 옛날 기차의 첫 덜컥임을 느꼈을 때 중단하고 떠났던 삶이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중단된 삶, 온갖 약속으로 가득한 그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 더 흥분되는 일이 또 어디에 있으랴? '지금'과 '여기'가 본질적이라는 확신으로 이것에 집중하는 행위는 오류이며, 또한 불합리한 폭력이다. 중요한 것은 확실하고 느긋하게, 알맞은 유머와 멜랑콜리로 '우리'라는 시간과 공간상의 내적인 경치 속에서 움직이는 일이다. 여행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이유는 뭔가? 그들이 외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면서 내적으로도 뻗어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계발할 수 없고, 스스로를 향한 먼 여행을 떠나 지금의 자기가 아닌 누구 또는 무엇이 될 수 있었는지 발견할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살아간다.  315-318



"체스는 그렇게 잘 두면서, 왜 인생에서 싸울 줄은 몰라요?" 프롤렌스는 이런 말을 여러 번 했다. 인생에서 싸우는 건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자기 자신과 싸울 일만 해도 얼마나 많은데, 그가 했던 대답이었다.  324



- 계획된 것도 아니고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지만,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남기는 불가피하고도 쉴 새 없는 부담의 흔적-절대 없애지 못하는 화상의 흉터처럼-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려, 부모들이 지닌 의도나 불안의 윤곽은, 완벽하게 무기려하고 자기가 어떻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아이들의 영혼에 달군 철필로 쓴 글씨처럼 새겨지지, 우리는 낙인찍힌 글을 착고 해석하기 위해 평생을 보내면서도, 우리가 그걸 정말 이해했는지 결코 확신할 수 없어.  356



내가 아빠의 상상에 대해 아는 게 있던가? 왜 우리는 부모의 상상에 대해 이다지도 모를까? 어떤 사람이 상상을 통해 받는 이미지에 대해 알지 못하면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과연 무엇을 알 수 있을까?  363



- 그러나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이 여행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384



이따금 나는 인가의 약점보다 '생각 없음'이 더 많은 잔인함을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387


그레고리우스는 고통을 겪는 엄한 판사 아버지와 공명심이 강한 어머니-신처럼 떠받드는 아들을 통해 자기 인생을 살았던-아래에서 자랐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410


(아드리아나)"말을 하지 못하는 것. 오빠는 '감정 교육'이 무엇보다도 느낌을 드러내는 기술, 말을 통해 느낌을 풍요롭게 하는 경험을 우리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곤 했어요. 아버지는 그걸 얼마나 못하셧던지!"  415-416


"마지막 해에 오빠는, 우리 모두가 두려워하는 외로움의 본질이 도무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우리는 외로움이라고 말하는 그게 도대체 뭐지? 단순하게 다른 사람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아. 혼자 있으면서도 전혀 외롭지 않을 수도 있고,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외로울 때가 있으니까. 그러니 그게 뭘까? 오빠는 사람드이 온갖 소란 가운데서도 외로울 때가 있다는 생각에 골몰했어요. '좋아. 다른 사람들이 옆에 있다는 것, 내 옆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상황만 말하려는 건 아니야. 함께 파티를 하거나 친근한 분위기 속에서 감정이 이입된 현명한 조언을 할 때도 그래. 그럴 때도 우린 외로움을 느끼지. 그러니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의 존재 여부는 물론, 함께하는 행위와도 상관이 없어. 그러면 도대체, 도대체 무엇과 관련이 있을까?'.."

'경멸에서 오는 외로움'이라는 메모가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존경과 인정을 거두어가면, 왜 우린 그들에게 '그런 건 필요 없소. 나 자신만으로도 충분하니까'라고 말하지 못하나? 이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건, 소름끼치는 속박의 한 형태가 아닐까?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는 건 아닌가? 이런 일을 견디는 댐이나 보루로 어떤 감정을 세워야 하나? 내적인 견실함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그레고리우스는 책상 위로 몸을 굽히고, 벽에 붙은 메모지의 빛바랜 글씨를 읽었다.

신뢰에서 오는 협박.

"환자들은 오빠에게 아주 사적인 일이나 위험한 일들도 이야기 했어요."

아드리아나가 말했다.

"정치적으로 위험한 일들 말이에요. 그런 다음에 그 사람들은, 자기가 벌거벗었다는 느낌을 갖지 않으려고 오빠도 뭔가 고백하기를 기다렸어요. 오빠는 그걸 이루 말할 수 없이 증오했지요. '난 다른 사람들이 내게서 뭔가 기대하는 게 싫다.' 오빠는 발을 구르며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도대체 경계선을 긋는 일이 왜 이렇게 힘드니?' '어머니와 경계선을 긋는 일은?'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어요. '어머니와 말이야.' 하지만 하지 않았어요. 오빠 스스로 알고 있었으니까."

인내라는 위험한 덕목.

"오빠는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인내라는 단어에 지독한 거부 반응을 보였어요. 인내심을 지닌 누군가를 보면 오빠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어요. '잘못을 저지르는 기괴한 방식일 뿐'이라고 짜증스러운 얼굴로 말했어요. '우리 안에서 솟구치는 분수에 대한 불안이지.' 난 동맥류를 알고 난 뒤에야 이 말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었어요."  417-419


"난 오빠를 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요. 오빠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믿었어요. 몇 년 동안 매일 오빠를 보아왔고, 자기 느낌과 생각과 더구나 꿈에 대해서도 말하는 걸 들어왔으니까요..."  420


'경멸에서 오는 외로움' 프라두가 생의 마지막에 골몰하던 주제였다. 우리가 타인의 존경과 관심에 의지하고, 그것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  431



- 유치함은 모든 감옥 가운데 가장 악질적이다. 창살은 단순하고 비현실적인 감정으로 도금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를 궁전의 기둥으로 착각한다.  434-



(마리아 주앙)".. 그런 일이 있지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없는지 알지 못해요. 그게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그러다가 그게 나타나면 단 한순간에 확실해지지요..."  455


(마리아 주앙)'상상력은 우리의 마지막 성소다.' 그가 늘 했던 말이지요. '상상력과 친근함은 언어 외에 그가 인정한 유일한 성스러움이었으니까요.  462



(마리아 주앙)".. 조르지를 나쁘게 말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를 향한 아마데우의 비판 없는 경탄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난 농부의 딸이라 농부의 아들들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어요. 낭만적이 아니지요. 큰일이 벌어지면 조르지는 일단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할 사람이었어요. 

아마데우를 매혹했던 것, 거의 취하도록 그를 끌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과 스스로의 경계를 지슨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던 조르지의 성격이었어요. 그는 간단하게 '싫어'라고 말하고는, 그 큰 코를 벌쭉이며 웃으면 그만이었으니까요. 그에 비해 아마데우는, 경계를 지으려면 그게 마치 구원의 문제라도 되는 듯 싸워야 했어요."  464


실우베이라가 말했다. "우리가 인생을 조망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앞으로든 뒤로든. 뭔가 일이 잘 풀렸다면 그건 그냥 운이 좋았던 것이겠지요."  471



- 배신적인 언어. 자기 자신이 다른 누군가에 대해 또는 단순히 어떤 일에 대해 말을 할 때 우리는 말을 통해 스스로를 열어 보이려 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 타인에게 알리고, 타인에게 우리의 영혼을 잠깐 엿보기를 허용하는 것이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우리 마음의 한 조각을 타인에게 준다라는 뜻이다. 배 난간에 서 있을 때 어떤 영국인이 나에게 한 말이었는데, 새빨간 축구공을 가지고 있던 올소울의 아일랜드 학생에 대한 추억을 제외하면 그 낯선 나라에서 가지고 온 것들 가운데 좋은 거라고는 그 말이 유일하다.)

이런 상화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여는 문제에 관한 한 독자적인 감독이요 결정권을 지닌 극작가다. 하지만 어쩌면 이건 완벽하게 잘못된 생각, 자기기만이 아닐까? 우리는 말을 통해 자기를 드러낼 뿐 아니라 스스로를 배신하기도 한다. 표현하려던 것보다 훨씬 더 심하게 속내를 드러내어 원래 의도했던 바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타인은 우리의 말을 우리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에 대한 증상으로 해석한다. 우리라는 질병에 대한 증상, 타인을 이렇게 관찰하는 일은 흥미로우며 또한 우리를 매우 관대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우리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기도 한다. 타인도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똑같이 본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 입을 열려던 순간 말이 목에 걸린다. 그 충격은 우리를 영원히 침묵하게 만들 수도 있다.  476-477



- 분노라는 들끊는 독. 타인 때문에-그들의 뻔뻔함과 부당함,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우리가 화를 낸다면 우리는 그들의 권력 아래에 놓인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고 자란다. 분노는 들끓는 독과 같아서, 부드럽고 우아하며 평화로운 감정들을 파괴하고 우리에게서 잠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불을 켜고, 우리를 빨아먹고 기운을 빼는 기생충처럼 우리 안에 자리를 잡은 분노를 터뜨린다. 우리가 입은 피해에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오로지 우리 안에만 퍼져간다는 사실에도 분노한다. 우리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감싸며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는 동안, 우리를 희생자로 만든 원인 제공자는 분노의 파괴력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있으니까. 번쩍이는 조명이 무언의 분노에 쏟아지는 내부의 무대, 관객이 없는 그 무대에서 우리는 비현실적인 인물과 비현실적인 언어로 비현실적인 적들에게 효과라고는 전혀 없는 분노-우리가 내부에서 차갑게 들끓는 화염으로 인식하는-를 터뜨리며 우리를 위한 드라마를 홀로 상연한다. 이 모든 것이 상상 속의 드라마일 뿐, 타인에게 해를 입히고 번민의 균형을 만들어낼 실제 논쟁이 아니라는 인식을 우리가 확실하게 하면 할수록 유독한 그림자들은 더 사납게 춤추며 악몽의 가장 어두운 지하무덤까지 우리를 쫓아온다. (잔인하게 역습을 하리라고 생각하며, 상대방에게 소이탄과 같은 효력을 발휘할 만한 말을 밤새도록 궁리한다. 그래서 화창한 평화로움 속에서 우리가 커피를 마실 동안, 분노의 불길이 이번에는 그에게서 타오르도록.)

분노를 올바르게 다스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만나도 상관없는 무정한 존재, 차갑고 냉철한 판단만 내리는 존재, 진정으로 신경을 쓰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그 무엇도 흔들어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분노라는 경험을 전혀 알지 못하고, 메마른 무감각과 구별할 수 없는 태연함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기를 진심으로 원할 리는 없다. 분노도 우리가 누구인가에 관해서 어느 정도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우리가 분노를 인식했을 때 그 독에 빠지지 않으며 분노가 우리에게 득이 되도록 하려면 우리 자신을 어떻게 교육하고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이다.

이것이 임종 순간에 마지막 대차대조표의 한 부분으로 남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분노에, 그리고 효과가 없는 상상 속의 드라마-쓰러질 정도로 번민하는 우리만 알고 있는 드라마-에서 타인에게 복수하는 데 너무나 많은 것을, 너무 많은 힘과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이 대차대조표는 청산염처럼 쓴맛이 나리라. 이 표를 개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 부모님이나 선생님, 다른 교육자들은 왜 이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을까? 이 엄청난 의미에 대해 왜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을까? 스스로를 파괴하는 분노 때문에 영혼을 낭비하지 않게 도와줄 나침반은 왜 주지 않은 걸까?  496-498



당신 내가 지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네? 문두스,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에요!" 왜 이런 모든 일이 지금까지도 이렇게 아플까? 왜 20년, 30년이 지나도록 이 기억들은 털어내지 못할까?  503


"문두스,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에요!" 플로렌스는 왜 그냥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까. "당신이 지루한 사람이냐고요? 세상에, 절대로 아니에요!"라고.

인간이 상처를 떨어낼 수 있기는 한 걸까? 우리는 과거로 깊숙이 들어간다. 프라두가 남긴 글이었다. 이런 일은 깊은 감각, 다시 말해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라는 느낌은 어떤 것인지를 결정하는 감각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 감각은 시간을 초월하고, 시간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507


그리고리우스는 그들에게 삶이 만족스러운지 물었다. 베른의 고전문헌학자인 문두스가 세상의 끝에서 가릴시아의 어부들에게 삶에 대한 견해를 묻고 있었다.  508


한 명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만족하냐고? 다른 삶은 모르는 걸!"

어부들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나중에는 그칠 줄 모르는 웃음바다로 변했다. 그레고리우스도 얼마나 흥겹게 따라 웃었던지 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509


친근함, 그것은 신기루처럼 헛되고 변하기 쉽다. 프라두가 쓴 말이었다.  516


덧없음. 프라두가 좋아하던 단어 가운데 하나라고 마리아 주앙이 말해주었다.  519



- 독재적인 친근함. 우리는 친근함 속에서 서로 뒤엉켜 있다. 보이지 않는 끈들은 '자유롭게 하는 사슬'이다. 이 뒤엉킴은 독재적이라, 독점을 요구한다. 나눔은 배반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사람만 좋아하고 사랑하고 접촉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다양한 친근함을 연출하고, 주제와 말과 몸짓과 함께 나눈 지식과 비밀에 관해 옹졸하리만큼 꼼꼼한 장부를 써야 하는가? 이런 친근함은 소리 없이 떨어지는 독이다.  530



타인을 자기 삶의 건축용 석재로, 자기 구원의 경주를 위한 일벌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536


사람의 정체성은 언제 유지되는가. 늘 그래왔던 그 모습일 때? 스스로를 바라보았을 때처럼? 아니면 들끓는 생각과 감정의 용암이 온갖 거짓과 가면과 자기기만을 묻어버릴 때? 달라졌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사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원하는 그 모습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러니까 타인의 안녕에 대한 걱정과 염려라는 가면을 썼을 뿐, 결국 익숙한 것이 흔들릴까봐 대항하는 투쟁 문구의 일종인가?  537


그레고리우스는 여행안내 책자를 사서 수도원을 하나씩 차례로 구경했다. 그는 명소를 찾아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뭔가에 몰리면 그는 고집스럽게 바깥에 머물러 있었다. 베스트셀러라는 책들을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읽는 것도 이런 성격 때문이었다. 지금 그는 관광객의 호기심으로 명소를 찾아다니는 게 아니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그레고리우스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프라두의 흔적을 찾아다닌 그동안의 시간이 성당과 수도원에 대한 그의 느낌을 바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544


두 사람이 피니스테레 해변에 앉아 있을 때 배 한 척이 지나갔다. 

"아마테우가 배를 타자고 하더군요. '브라질 밸렘이나 마나우스로, 아마존으로 가는 게 제일 좋겠어. 덥고 습기가 많은 곳으로. 색깔과 냄새와 끈적거리는 식물들과 열대우림과 동물들 이야기를 쓰고 싶어. 난 지금까지 언제나 정신에 관한 글만 썼어.' 그가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 오빠가, 그렇게도 현실적이던 우리 오빠가..." 아드리아나의 말이 떠올랐다.

"사춘기 소년의 낭만이나 중년 남성의 유치함이 아니었어요. 그건 현실이었고, 진정이었어요. 하지만 그것 역시 저와는 상관이 없었지요. 그는 오로지 자신만의 여행, 자기 영혼의 억압된 분노를 향한 여행에 제가 동행하기를 원했던 거예요. 저는 아마데우에게 당신은 너무 허기졌다고, 그 여행에 동행할 수 없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어요.

그가 개선문 아래로 끌어당기던 날 밤, 저는 이 세상 끝까지 그를 따라가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그의 무서운 허기를 알지 못했지요.  553


에스테파니아가 그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오후 내내 책을 읽었어요. 처음에는 놀랐지요. 아마데우가 아니라 저 때문에.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는 생각에 몹시 놀랐어요. 그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깨어 있던 살마인지, 자신에게 얼마나 무자비할 만큼 공정했는지, 거기에 문장력도.. 이런 살마에게 '당신, 너무 허기졌어요'라고 말했던 제가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렇게 말햇던 게 옳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의 글을 예전에 알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554



- 많은 여자들 가운데 당신인 이유는? 어느 순간엔가 모든 살마이 하는 질문이다. 속으로만 내뱉어도 이 질문이 위험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 임의성이나 대체 가능성과 똑같지는 않지만 우연이라는 생각, 우연이라고 발음하는 생각이 그토록 소름 끼치는 이유는? 왜 우리는 이러한 우연을 인정하고 웃음으로 넘기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우연이 사랑의 의미를 축소한다고, 우연을 당연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왜 사랑을 폐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556



'우리가 서로 운명적으로 정해진 사이라고 생각해요?'

서로 운명적으로 정해진 사람은 없소. 그런 섭리도 없을 뿐더러 서로의 운명이 맺어지도록 해주는 그 누군가도 없으니까. 우연한 욕구와 습관의 엄청난 힘을 넘어서는 필연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소...

난 완벽하게 우연히 이곳에, 당신은 완벽하게 우연히 그곳에 있었소. 그 사이에는 샴페인 잔들... 그래요. 그랬던 거요. 필연은 없었소.  557



열린 시선이 이렇게 어려운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게으른 존재다.  559

그레고리우스는 사진을 다시 훑어보고, 또 한 번 보았다. 과거가 그의 시선 아래에서 얼어붙기 시작했다. 기억은 과거를 고르고, 조절하고, 수정하고 속일 것이다. 기억 말고는 다른 근거가 없으므로, 누락과 비틀기와 거짓을 나중에 인식할 수 없다는 점이 소름 끼쳤다.  565





작가와의 대담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건가?"

대담자 " 실리야 우케나


우케나 : .. 우리 모두 삶의 일부분밖에 경험할 수 없는 거라면, 우리 안에 있는 나머지들 즉 경험하지 못한 나머지 대다수 부분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비에리 : 남아 있는 부분은 의미가 아주 큽니다.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해도 우리 삶에 색깔을 입혀주고 멜로디를 주는 건 바로 그 부분입니다. 그 나머지 부분이 어떻게 구현되는가에 따라 자기 삶이 만족스럽거나 진실하게 흘러가겠지요. 하지만 한번 규정한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을 관통할 수도 없고 그만큼 실망할 일도 드물지요. 뭔가를 막연히 기다리면서도 입 밖에 내지 못할 수도 있고요. 이것들은 간혹 그들의 인생에서 극적인 형태로 돌출됩니다. 그때 우리는 도망치거나 파멸하거나 생의 위기를 겪게 되죠. 예기치 못했던 파국은 지극히 사소한 일로 시작합니다. 사실 오랫동안 축적되었던 게 드러나는 경우지만요.  572-573


우케나 : 그냥 떠나는 것, 누구에게나 가능할까요?

비에리 : 무엇보다 자기 인식, 즉 깨달음이 절대적이죠.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구별해주는 인식작용 말입니다. 자기 앞에 놓인 생을 그대로 살아갈 것인지, 그게 정말 원하는 것인지 자문하는 거요. 오직 우리 인간만이 자기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고, 진실한 자아를 탐구하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어떤 동물도 내 삶이 옳은 것인지, 지금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것인지 질문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그럴 가능성이 열려 있는 셈이지요. 

우케나 :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삶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떠나는 건 아니잖아요?

비에리 : 아니죠. 누구든 자기 삶이 총체적으로 잘못 진행된다 느끼고 지금 상황이 가망 없다고 판단하면 떠날 수 있습니다... "이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야"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규범을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아정체성을 확립할 수도 없고요. 그러니까 '불가피한 떠남'이란 다시 말해 나의 어떤 부분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고 싶은 목적이 있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새롭게 도달하고 싶어하는 그 상태도 결국은 의무, 가능성, 불가능성의 경계를 지닙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요.  574-575


우케나 : 결단이 어려운 경우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까요? 

비에리 : 정해진 것은 없어요. 경우마다 다르기 때문에 해결책도 개별적이지요. .. 

의무감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허덕이면서 다른 사람의 생에 좋은 영향을 줄 수는 없습니다...  576


우케나 : 자유를 향한 인간의 욕구는 과연 얼마나 강력한가요? 

비에리 : 현실에서 떠난다고 해서 모두 자유로워지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어요. 자유를 향한 진일보도 되지만 잘못된 길일 수도 있으니까요. 자신의 경우가 어느 쪽에 해당하는지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 판타지는 그래서 중요해요. 판타지를 통해 일탈을 시도해볼 수 있으니까요. 친구들과 나누는 이야기도 아주 중요하지요. 우리 인간의 불행은 대개 감정과 판타지를 언어로 잘 다루지 못하거나 그것들을 말로 표현할 용기를 갖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우케나 : 그런 상황에 처한 친구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을까요?

비에리 " 가장 좋은 길은, 우리가 상상력이 풍부하고 용감한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인정받고 즐겁고 재미있는 환경은 이루지 못한 판타지가 좀 있어도 훨씬 자유롭습니다. 우리는 내면에서 요구하는 모든 삶을 다 살아낼 수 없습니다. 누군가, 그렇다면 경험하지 못한 나머지는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머지 부분은 당신의 판타지를 놓아두는 공간이다"라고 대답할 도리밖에 없습니다. 감당해야 했던 소망의 무게가 극치에 이른 때가 언제인지, 또 이런 소망을 드러내야 한다면 어떤 사람에게 보여 주어야 하는지 등을 정확하게 아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과연 이것을 인식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예견해 줄 수 없고,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알아내야만 합니다. 행여 그렇게 된다면 대단한 행운이지요.  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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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헤르만 헤세가 들려주는 진정한 여행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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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최초로 여행 열기가 고조된 시기는 18세기였다.  5


로마를 '세계의 대학'이라고 칭한 빙켈만의 저서 <고대 예술사>(1764)가 오래 전부터 이탈리아 여행을 꿈꾸던 괴테에게 좋은 참고자료가 되었다. 빙켈만의 글에는 자신의 로마 탐구를 토대로 다른 여행자들의 안목을 틔워주려는 의도가 강했다. 그가 중시한 것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닌 "깊은 체험을 통한 변화의 힘"이었다. ...

괴테의 경우 여행의 첫 번재 목표는 인간과 예술가로서의 자기수양이었다. 새로운 세계와 만나 새로운 자연과 문화, 새로운 인간상을 천착해 감으로써 자신의 생각과 삶을 확산 심화 고양시키는 것이었다.  6


젊은 시절 많은 여행을 하고 여행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한 헤세의 글이 우리에게 바람직한 여행에 대한 하나의 지침이 될 수도 있겠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 되어야 하니까.  7



2

토마스 만의 장편 <마의 산>에는 여행에 대한 유명한 글귀가 나온다. "여행을 떠나고 이틀만 지나면 사람, 특히 삶에 아직 굳건히 뿌리박지 않은 젊은이는 자신의 의무, 이해관계, 걱정 및 전망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 즉 일상생활로부터 아련히 멀어지게 된다. 그것도 마차를 타고 역으로 가면서, 어쩌면 자신이 꿈꾸었을지도 모르는 것보다 훨씬 더 멀어지게 도니다. 여행자와 고향 사이에서 구르고 돌며 도피하듯 멀어져 가는 공간에는 보통 시간에만 있다고 생각되는 힘이 깃들어 있다.

공간도 시간과 꼭 마찬가지로 시시각각 내적 변화를 일으킨다. 공간도 시간과 마찬가지로 망각을 낳는다. 공간은 인간을 여러 관계로부터 해방시켜주며, 인간을 원래 그대로의 자유로운 상태로 옮겨놓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 공간은 고루한 사람이나 속물조차도 순식간에 방랑자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걳이다. 시간은 망각의 강이라고 하지만, 여행 중의 공기도 그러한 음료수인 셈이다. 그런데 그 효력은 시간만큼 철저하지 못한 반면 더욱 신속히 나타난다" 이처럼 여행을 통한 공간의 변화는 우리의 정신에 활력을 준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행을 통해 장소가 아닌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식을 얻게 된다.

한편 소설도 나름대로 여행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루카치에 따르면, 소설은 '자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누가 자신을 찾아 떠나는가? 바로 근대적인 개인이다. 홀로 남겨진 근대적인 개인이 자신을 찾아 떠나는 모험의 형식이 소설이다. 그러므로 이 여행은 길이 없는 '길 찾기'다. 

"여행이 끝나자 길이 시작되었다." 혹은 "길이 시작되자 여행이 끝났다." 루카치는 이를 '아이러니'라 칭한다. 모든 근대 소설은 아이러니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7-8


헤르만 헤세 소설의 거의 모든 주인공은 현재의 안일한 상황에서 탈피해 방랑과 여행을 통한 자아의 길 찾기를 하고 있다.

헤세의 여행은 속인 내지는 속물로부터의 탈출이다.  9



4

오늘날 사람들이 여행하는 주된 이유는 무엇인가? 자기의 친척과 친구, 이웃도 여해을 가는데다, 또 여행을 갔다 와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남들에게 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이 유행이고,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다시 매우 쾌적하고 안락한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헤세의 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가치 있는 여행이 되려면 어떻게 여행해야 할까? 헤세의 말은 음미해볼 만하다. "여행은 언제나 체험을 의미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정신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환경에서만 뭔가 가치 있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가는 즐거운 소풍, 어떤 음식점 정원에서의 유쾌한 저녁, 멋진 호수 위에서의 증기 기선 여해은 그 자체로 체험이 아니고,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지 못하며, 계속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자극이 아니다." 이처럼 제대로 된 여행을 해야 하고 그나마 여행하지 않는 자는 책의 한 페이지만 계속 보는 사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여행은 즐거운 것이 되고 좀 더 깊은 의미에서 하나의 체험이 되려면 확고하고 특정한 내용과 의미를 지녀야 한다. 지루한 나머지 또 김빠진 호기심 때문에 내적 본질에 진정한 관심을 느낄 수 없는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는 것은 잘못되고 우스꽝스런 일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성껏 가꾸거나 희생의 제물이 되기도 하는 우정이나 사랑처럼, 신중하게 고르고 사서 읽는 책처럼 모든 유람여행이나 연구여행은 좋아하기, 배우려고하기, 몰두하기를 의미해야 한다. 여행은 어떤 나라와 민족, 어떤 도시나 풍경을 여행자의 정신적 소유물로 만들려는 목적을 지녀야 한다. 여행자는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낯선 것에 귀 기울여야 하고, 낯선 것에 담긴 본질의 비밀을 끈기 있게 알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자연'가까이에서 자연의 힘과 위안을 맛보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장소로 여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널리 만연한 오류다. 번잡하고 숨 막히는 거리를 피해 달아난 도시민에게 바닷가나 산속의 시원하고 깨끗한 공기가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도시민의 그것으로 만족해한다. 그는 더 신선한 기분을 느끼고, 더 심호흡을 하며, 잠을 더 잘 잔다. 그리고 '자연'을 이제 제대로 즐기고 내부에 흡수했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그는 그 자연으로부터 가장 피상적인 것, 가장 비본질적인 것만 받아들이고 이해했으며, 가장 좋은 것은 발견하지 못하고 길가에 놓아두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런 자는 보고 찾아내며 여행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한다. 가만히 앉아서가 아니라 움직이면서 사고할 것을 주장하는 니체는 <인간적인 것, 너무나 인간적인 것>에서 여행자의 등급을 다섯 등급으로 나누고 있다. 그 역시 쥘스 지방을 여행하는 도중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여행자에게는 다섯 단계의 등급이 있다. 가장 낮은 등급은 여행하면서 관찰의 대상이 되는 자들이다. 그들은 본래 여행의 대상이며 흡사 장님과 같다. 다음 등급은 실제로 세상을 구경하는 자들이다. 세 번째 등급의 여행자는 관찰한 결과로 무언가를 체험하는 자이다. 네 번째 등급의 여행자는 체험한 것을 체득해서 몸에 지니고 다닌다.

마지막으로 최고의 능력을 지닌 몇몇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관찰한 것을 모두 체험하고 체득한 뒤 집에 돌아온 즉시, 또한 체험하고 체득한 것을 행동이나 일에서 반드시 실천해 나간다. 

인생의 여로(旅路 나그네여 길로)를 걷는 모든 인간은 이 다섯 종류의 여행자와 같다. 가장 낮은 등급의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으로 살아가고, 가장 높은 등급의 인간ㅇ느 내적으로 체득한 것을 남김없이 실천하며 행동하는 자로 살아간다."

그러면 자연과 풍경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헤세는 이렇게 답한다. 금빛으로 물드느 여름저녁을 한가로이 바라보고, 가볍고 순수한 산악 공기를 느긋하고 기분 좋게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는 아직 크게 부족하다. 양지바른 따스한 초원에 드러누워 한가하게 휴식시간을 보내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그러나 산과 시냇물, 오리나무 숲과 멀리 우뚝 솟은 산봉우리와 함께 이 초원에 친숙하고 그것을 잘 아는 자만이 자연과 풍경을 완전하게, 백배는 더 깊고 고상하게 즐길 수 있다. 그러한 조그만 땅에서 그 땅의 법칙을 읽고, 그것의 형성과 식생의 필연성을 꿰뚫어보고, 그 필연성을 역사, 건축 양식, 그곳 주민의 기질이나 말투, 의상과 관련해서 느끼려면 사랑과 헌신, 연습리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할 만한 보람이 있다. 여행자가 열성과 사랑으로 친숙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든 나라의 모든 초원과 암석은 온갖 비밀을 여행자에게 알려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베풀어주지 않는 힘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름을 아는 일이 아니라 느끼는 일이다. 학문적 지식은 아무에게도 축복을 안겨주지 않는다.  12-15



5

헤세는 끊임없이 여행과 여행의 의미에 대해 질묺나다. 우리 같은 사람에게 여행을 떠나게 하고, 특히 예술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해마다 여행을 떠나는가? 무엇 때문에 좀 더 풍요로웠던 시대의 건축물과 그림들 앞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거워하는가? 무엇 때문에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낯선 민족들의 삶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지켜보며 흡족해하는가? 무엇 때문에 기차와 배 안에서 낯선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고, 낯선 대도시의 번잡한 거리에 귀 기울이는가? 헤세는 한때 그런 것을 일종의 배움 욕구이자 교양 열기로 여겼다. 여행하면서 그는 옛 교회의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진 벽 위에서 수첩 가득 감상을 적어 넣었고, 식사에서 아낀 돈을 옛 조각품들의 사진을 찍는 데 썼다. 그 후 그런 일에 다시 싫증나게 되었고, 풍경과 낯선 민족성만이 그의 관심을 끄는 좀 더 못사는 나라를 여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그에게 그러한 수수께끼 같은 여행 욕구는 일종의 모험심으로 생각되었다.  17



헤세도 처음에는 다른 여행객과 마찬가지로 이국적인 민족의 살마과 도시를 그냥 신기한 대상으로서만 바라보았고, 무척 재미있지만 기본적으로 자기와 아무 관계없는 동물 곡예단을 바라보듯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입장을 버리고 말레이인, 인도인, 중국인, 일본인을 인간이자 가까운 친척으로 본 시점부터 비로소 그 여행에 가치와 의의를 부여하는 체험이 시작되었다. 헤세는 여행의 체험으로 서양인과 동양인의 영혼이 같고, 아시아인의 영혼도 유럽인의 영혼처럼 온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런 의미에서 "여행이란 우리가 사는 장소를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편견을 바꾸어주는 것이다."는 아나톨 프랑스의 말이 우리의 공감을 얻는다.  19-20



7

이 책은 24세부터 50세까지 헤세가 쓴 여행과 소풍에 대한 에세이와 여러 여행 기록을 엮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여행과 소풍에 대한 에세이 외에 1901년과 1911년, 1913년의 이탈리아 여행, 1904년의 보덴 호 산책, 1911년의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등지의 아시아 여행, 1919년에서 1924년까지 테신 지역 소풍, 1920년 남쪽 지역으로의 방랑, 1927년의 뉘른베르크 등지의 낭송 여행에 대한 소회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21






여행의 노래


태양이 내 마음속 비춰주었네. 

바람이여, 내 걱정과 무거운 마음일랑 날려버리렴!

이 세상을 두루돌아다니는 것보다

더 큰 희열은 없다네.


평지를 향해 서둘러 발걸음 옮기다 보면

햇볕에 몸 그을리고, 바다는 시원하게 해주네.

난 온갖 감각을 활짝 열고

지상에서의 삶을 함께 느끼지.


새날이 올 때마다 

새 친구, 새 형제를 사귀며

온갖 별의 손님이자 친구일지도 모르는 

온갖 힘을 기어코 찬미할 때까지.



누군가가 유람 여행을 계획하고 잇다면 먼저 무엇을 할 것인지, 왜 그 여행을 하는지 아는 것이 좋다. 오늘날 도시에 사는 여행자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도시인이 여행하는 것은 여름에 도시가 너무 덥기 땜ㄴ이다. 그가 여행하는 것은 공기를 바꾸고, 다른 환경과 사람들을 봄으로써 일에 지친 피로를 풀고 푹 쉴 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그가 산으로 여행하는 것은 자연과 땅, 식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이해되지 않는 갈망으로 그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그가 로마로 여행하는 것은 그것이 교양 여행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여행하는 주된 이유는 그의 모든 사촌과 이웃도 여행을 가는데다, 또 여행을 갔다 와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하는 것이 유행이고,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다시 무척 쾌적하고 안락한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이해할 만한 정직한 동기이다.  32


여행은 언제나 체험을 의미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정신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환경에서만 뭔가 가치 있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기회 있을때마다 가는 즐거운 소풍, 어느 음식점 정원에서의 유쾌한 저녁, 임의의 호수 위에서의 증기기선 여행은 그 자체로 체험이 아니고,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지 못하며, 계속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자극이 아니다.  33

여행의 시학은 일상적인 단조로움, 일과 분노로부터 휴식을 취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우연히 함께 하고, 다른 광경을 관찰하는 데에 있다. 여행의 시학은 호기심의 충족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체험에, 다시 말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데에, 새로 획득한 것의 유기적인 편입에, 다양성 속의 통일성과 지구와 인류라는 큰 조직에 대한 우리의 이해 증진에, 옛 진리와 법칙을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에서 재발견하는 데에 있다.

내가 특별히 여행의 낭만주의라고 부르고 싶은 것, 다시 말해 인상의 다양성, 명랑하거나 불안한 심정으로 깜짝 놀랄 일을 계속 기다리기,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새롭고 낯선 사람들과의 소중한 교제가 그것에 첨가된다.  36


우연적인 것에 대해 본질적인 것이, 낭만주의에 대해 시학이 망각되어서는 안 된다. 도중에 흘러가는 대로 자신을 맡기고, 우연을 신뢰하는 것은 확실히 좋은 방식이다. 그러나 모든 여행이 즐거운 것이 되고 좀 더 깊은 의미에서 하나의 체험이 되려면 확고하고 특정한 내용과 의미를 지녀야 한다. 지루한 나머지 또 김빠진 호기심 때문에 내적 본질에 진정한 관심을 느낄 수 없는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는 것은 잘못되고 우스꽝스런 일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성껏 가꾸거나 희생의 제물이 되기도 하는 우정이나 사랑처럼, 신중하게 고르고 사서 읽는 책처럼 모든 유람여행이나 연구여행은 스스로 좋아하고, 찾아서 배우려고 하면서, 몰두하는 데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여행은 어떤 나라와 민족, 어떤 도시나 풍경을 여행자의 정신적 소유물로 만들려는 목적을 지녀야 한다. 여행자는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낯선 것에 귀 기울여야 하고, 낯선 것에 담긴 본질의 비밀을 끈기 있게 알아내려 노력해야 한다.  40-41


돈과 시간을 아낄 필요가 없고 여행에서 즐거움을 얻는 자는 눈과 마음으로 탐낼 만한 여러 나라를 하나하나 자기 것으로 만들고, 천천히 배우고 향유하는 중에 세계의 일부를 정복하고, 많은 나라에 뿌리를 내리고, 지구와 지구의 생명체를 폭넓게 이해하는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기 위해 동과 서에서 수석을 수집하려는 욕구를 지니게 될 것이다.  41-42


'자연' 가까이에서 자연의 힘과 위안을 맛보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장소로 여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널리 만연한 오류다. 뜨거운 거리를 피해 달아난 도시인에게 바닷가나 산속의 시원하고 깨끗한 공기가 도움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그것으로 만족해한다. 그는 더 신선한 기분을 느끼고, 더 심호흡을 하며, 잠을 더 잘 잔다. 그리고 '자연'을 이제 제대로 즐기고 내부에 흡수했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귀향한다. 그런데 그는 그 자연으로부터 가장 피상적인 것, 가장 비본질적인 것만 받아들이고 이해했으며, 가장 좋은 것은 발견하지 못하고 길가에 놓아두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그런 자는 보고 찾아내며 여행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한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영혼이 빈곤해질 것이다.  42-43


여행자는 모든 것을 보거나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스위스 알프스의 두 개의 산과 골짜기를 돌아다니며 철저히 둘러본 자는 같은 시간에 일주 여행 차표로 전 국토를 여행한 자보다 스위스를 더 잘 알게 된다.  44


양지바른 따스한 초원에 드러누워 한가하게 휴식시간을 보내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그러나 산과 시냇물, 오리나무 숲과 멀리 우뚝 솟은 산봉우리와 함께 이 초원에 친숙하고 그것을 잘 아는 자만이 자연과 풍경을 완전하게, 백배는 더 깊고 고상하게 즐길 수 있다. 그러한 조그만 땅에서 그 땅의 법칙을 읽고, 그것의 형성과 식생의 필연성을 꿰뚫어보고, 그 필연성을 역사, 건축 양식, 그곳 주민의 기질이나 말투, 의상과 관련해서 느끼려면 사랑과 헌신, 연습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할 만한 보람이 있다.  45-46


중요한 것은 이름을 아는 일이 아니라 느끼는 일이다.  46



익숙해지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가치있는 것의 광채도 떨어지는 법이다.  49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어떻게든 고유한 시학이 있는 법이다.  50



낡은 모자를 쓰고 배낭을 짊어지기 위해 나의 조그만 집, 행복함과 안락을 기꺼이 희생하리라.  74



날이 어두워졌다. 창 앞 골목은 벌써 한 시간 전부터 쥐죽은 듯 고요하다. 높다란 분수만이 꿈꾸며 지치지 않고 계속 재잘거린다. 걸려 있는 놋쇠 등불이 흐릿한 판자벽이 있는 낡은 거실과 벽의 좁은 걸상, 튼튼한 참나무 책상과 벽 가의 희미한 목판화를 비춰준다. 나는 꿈꾸듯 내 집과 내 방의 고요와 정적,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나의 은둔을 즐긴다. 우리는 저녁에 쓸데 없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적에 귀 기울이고 엿듣는 것은 정말 멋지고 놀랍다. 대지는 잠들어 있다. 우물가에 마지막 남은 양동이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호수 저 건너편에선 멀리 마지막 기차가 조용히 기적을 울리며 사라진다.  79


불현듯 비눗방울처럼 마음속에 질문이 떠오른다. 넌 정말 행복한가?

그렇다. 물론이다. 하지만 좀 기다려라. 아니, 그리 행복하지는 않다. 아니, 먼저 곰곰 생각해봐야겠다. 곰곰 생각해보니 행복에 관해선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행복은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의 단어이자 무의미한 것에 불과하다.  82


향유의 힘과 추억의 힘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 향유란 어떤 열매의 단맛을 남김없이 짜내는 것을 뜻한다. 추억이란 한번 향유한 것을 꽉 쥐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점점 순수하게 완성하는 기술을 뜻한다. 우리 각자는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유년 시절을 생각하고, 그러면서 혼란스런 조그만 사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환상이 된 추억이 자기 위의 복된 푸른 하늘을 펼치며 천 가지 아름다운 기억을 단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쾌감과 섞는다. 

이처럼 최고는 멀리 떨어진 날들의 즐거움을 다시 향유할 뿐만 아니라 매일을 행복의 상징이자 동경의 목표이며 천국으로 드높이면서, 자꾸만 새로 향유할 것을 가르친다. 짧은 시간 내에 얼마만큼의 생활감정, 온기와 광채를 짜낼 수 있는지 아는 자는 이제 모든 새날의 선물도 되도록 순수하게 받아들이려 할 것이다. 그러면 그는 고통도 더 공정하게 평가할 것이다. 그는 큰 아픔 역시 큰 소리로 진지하게 맛보려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어두운 날들의 기억도 아름답고 신성한 소유물임을 알기 때문이다.  87-88



우리가 모든 아름다운 것 중 한 봉지 가득 보관해서 필요한 시절을 위해 저축할 수 있다면! 물론 그러려면 인공적인 향기를 지닌 인공적인 꽃이라야 되겠다. 날마다 세계의 충만함이 우리 옆을 서둘러 지나간다. 날마다 꽃이 피어나고, 불빛이 반짝이며, 기쁨이 웃음 짓는다. 때로 우리는 그것에 감사하며 실컷 마시고, 때로 우리는 피곤하고 짜증나서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늘 아름다운 것이 넘쳐난다. 모든 기쁨의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점은 그것이 과분하게 오고 결코 돈을 주고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기쁨은 바람에 흩날리는 보리수꽃의 향내처럼 구속을 받지 않고 누구에게나 신의 선물이다. 가지들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보리수꽃을 열심히따는 여자들은 나중에 그것으로 호흡 곤란과 고열에 좋은 차를 만든다. 하지만 그들은 최상의 것과 진정으로 좋은 것은 얻지 못한다. 열므날 저녁 데이트하면서 달콤하고 몽롱한 도취 상태에 있는 한 쌍의 연인들조차 그런 것을 갖지 못한다. 하지만 지나가며 좀 더 깊이 호흡하는 방랑자는 그런 것을 갖는다. 방랑자가 모든 즐거움 중 최상의 것과 가장 좋은 것을 갖는 이유는 그가 맛을 보는 것 외에 모든 기쁨의 덧없음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방랑자는 어떤 샘에서든 물을 마실 수 있으니 걱정할 일이 별로 없다. 그는 과잉에 익숙해져 있다.

반면 그는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도 그다지 개의치 않으며, 한 번 좋았던 곳이라 햇 곧장 뿌리내리려 하지 않는다. 해마다 같은 장소에 가는 행락객들이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곧 다시 오겠다는 결심을 하는 행락객들이 많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일지는 모르나 좋은 방랑자는 아니다. 그들은 사랑에 빠진 남녀의 몽롱하게 취한 상태에 있다. 보리수꽅을 따는 여인들이 조심스럽게 꽃을 따는 심정과 같다. 하지만 그들은 조용하고 진지하게 기뻐하며 늘 떠나려는 방랑자의 마음은 갖고 있지 않다.  101-103


나는 방랑과 외지의 맛이 어떤지 알고 있다. 그 맛은 아주 달콤하다. 향수와 결핍,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103


또 한 번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이로 구속 없이 뻔뻔하고 호기심어린 눈으로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다! 허기지면 길가의 버찌로 식사하고, 네거리가 나오면 상의 단추로 '좌우'를 결정하는 생활을 하고 싶다! 또 한 번 짧고 미지근한 향태 나는 여름밤을 방랑 중 건초 더미 속에서 잠자면서 보내고 싶다! 또 한 번 방랑 시절을 숲의 새들, 도마뱀이나 풍뎅이와 사이좋게 지내며 보내고 싶다! 한 여름이나 한 켤레의 새 신발엔 그것이 가치 있으리라.  104


우리 같은 사람을 여행떠나게 하고, 특히 예술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해바다 여행을 떠나는가? 무엇 때문에 좀 더 풍요로웠던 시대의 건축물과 그림들 앞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거워하는가? 무엇 때문에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낯선 민족들의 삶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지켜보며 흡족해하는가? 무엇 때문에 기차와 배 안에서 낯선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고, 이상하게도 낯선 대도시의 번잡한 거리에 귀 기울이는가? 한대 내게는 그런 것이 배움에 대한 일종의 욕구이자 교양에 대한 열기로 여겨졌다. 당시네 나는 옛 교회의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진 벽 위에서 수첩 가득 적어 넣었고, 식사에서 아낀 돈을 옛 조각품들의 사진을 찍는 데 썼다. 그 후 나는 그런 일에 다시 싫증나게 되었고, 풍경과 낯선 민족성만이 내 관심을 끄는 좀 더 가난한 나라들을 여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내게 이러한 수수께끼 같은 여행 욕구는 일종의 모험심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엄밀히 따져보면 여행 중에 겪는 모험이 아니다. 잘못된 곳으로 가버린 트렁크, 도난당한 외투, 뱀이 나오는 방, 모기가 있는 침대를 모험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물론 그런 것 역시 제대로 된 것은 아니었다. 내게는 지금 교양에 대한 갈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전체 도시와 교회, 대형 박물관을 어슬렁거리며 지나가는 것으로는 지금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면 그러한 사물들에서 발견하고 보는 것을 옛날보다 더 심도 있고 섬세하게 향유하는 지금, 여행에서 모험적이 ㄴ체험을 하게 되리라는 신뢰 역시 내게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나는 15년 전이나 10년 전, 또는 5년 전보다 드물지 않게 여행을 다니고, 여행에 대한 충동과 욕구도 그때보다 줄어들지 않았다.

내 생각에 여행하며 밖으로 돌아다니는 생활은 좀 더 지적으로 된 우리 같은 사람이 더욱 창백하게 체험하는 삶의 한 조각을 일반적으로 대체하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그 생활은 우리 여러 민족들에게 거의 완전히 사라진 순전히 미적인 충동에 의한 활동도 대체하는 것 같다. 위대한 시기의 그리스인이나 독일인, 이탈리아인에겐 그런 미적인 충동이 있었다. 아시아에서도 어디서나 아직 그런 충동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일본에서는 유치하지 않고 현명한 사람들은 목판화, 나무나 암석, 정원이나 하나하나의 꽃을 관찰하면서 우리에겐 흔치 않고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어떤 감각의 훈련, 원숙함과 전문적 지식을 향유하는 법을 터득하고 있는 것 같다. 순수한 직관, 어떤 목적 추구나 의욕에 의해 흐려지지 않은 관찰, 자체적으로 흡족한 눈과 귀, 코와 촉각의 훈련, 그것은 우리들 중 좀 더 섬세한 사람들이 짙은 향수를 느끼는 하나의 천국인 셈이다. 우리가 여행할 때 가장 잘 또는 가장 순수하게 추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그러한 천국이다. 미적으로 훈련된 사람은 언제나 그러한 집중을 할 수 있지만, 우리 같은 불쌍한 사람들은 적어도 숙박에서 벗어난 이런 날과 순간에나 그것이 가능하다.

고향과 일상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어떠한 걱정도 하지 않고 일에서도 완전히 해방된다. 이러한 여행 분위기에서 우리는 평소에는 하지 못하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몇 개의 훌륭한 그림 앞에서 조용히 감사하며 아무 목적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고, 고귀한 건축물에서 울리는 아름다운 음을 열린 마음으로 황홀하게 들을 수 있으며, 어느 풍경의 선을 진심으로 즐기며 따라갈 수 있다. 그때 평소 단지 우리의 의욕과 관계, 소망의 흐릿한 그물 속에서만 생각되던 것이 우리에게는 그림이 된다. 다시 말해 골목과 시장의 삶, 태양의 유희와 물이나 땅 위 그림자의 유희, 수관(樹冠 나무수 갓관)의 형태, 동물의 외침이나 움직임, 인간의 걸음걸이와 태도 같은 것이, 목적을 추구하는 삶으로부터의 이러한 해방을 마음속으로 추구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는 자는 아무런 결실 없이 빈손으로 돌아오고, 기껏해야 자신의 교양이라는 주머니를 약간 묵직하게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질 뿐이다.

하지만 순수하게 바라보고 사심 없이 받아들이려는 이런 미적 충동은 더 넓고 높은 관계를 갖지 않는가? 그 충동이 막연한 쾌감에 대한 동경에 불과한 걸까? 그 충동이 단지 소홀히 한 힘과 욕구의 복수하고 경고하는 고통에 불과한 걸까? 은폐된 배고픔과 은폐된 에로틱, 은폐된 분노와 은폐된 약함에 불과한 걸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만테냐의 그림을 보는 것이 멋진 도마뱀을 보는 것보다 내게 더 많은 것을 주는 건 무엇 때문일까? 조토나 시뇨렐리의 그림이 그려진 예배당에서 보내는 한 시간이 해변에서 뒹굴면서 보내는 한 시간보다 더 많은 의미가 있는 것은 결국 무엇 때문일까? 

그렇다. 요컨대 우리는 어디서나 인간적인 것을 추구하고 갈망한다. 내가 어떤 아름다운 산에서 즐기는 것은 우연한 현실이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확인한다. 나는 보고 선을 느끼는 능력을 즐긴다. 나는 어느 낯선 아름다운 경치에서 결코 문화로부터 달아나버리지 않고, 경치에서 나의 감각과 사고를 시험해 보면서 순전히 문화를 익히고 사랑하며 즐긴다. 따라서 나는 언제나 다시 감사하며 순순히 예술로 되돌아간다. 따라서 어느 대담한 건축물, 어느 아름답게 그려진 벽, 어느 좋은 음악, 어느 가치 있는 그림은 결국 제어되지 않은 자연을 관찰하는 것보다 더 많은 향유, 막연한 탐색이라는 더 많은 만족을 내게 허용해준다. 내 생각에 미적 충동이 지향하는 바는 가령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나쁜 본능과 습관에서 벗어나 우리 내부의 가장 좋은 것을 확인하고, 인간 정신에 대한 우리의 은밀한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바다에서의 기분 좋은 미역 감기, 즐거운 공놀이, 대담한 눈 속 방랑이 나의 신체적인 자아를 확인해주고, 최상의 욕구와 예감 속에서 자아의 옳음을 인정하며, 별 탈 없는 삶을 통해 자아의 갈망에 답하듯이, 인간 문화와 지적 성과라는 위대한 보물을 순수한 직관으로 인간성 일반에 대한 우리의 강력한 믿음에 답하기 때문이다. 티치아노의 그림들이 내 예감을 실현시켜 주지 않는다면 그의 그림을 보는 즐거움은 무엇 때문에 나의 충동을 확인하고 나의 꿈을 정당화해주겠는가?

그러므로 내 생각에 우리는 깊디깊은 근저에서 인간성의 이상에 대한 구도자로서 외지를 여행하고 바라보며 체험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미켈란젤로라는 인물, 모차르트의 음악, 투스카니아 지방의 성당이나 그리스의 신전이 우리의 생각을 확인하고 굳군하게 해준다. 어떤 감각, 심오한 통일, 인간 문화의 불멸성에 대한 우리의 갈망의 강화와 정당화는 그런 것을 굳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여행하면서 특히 진심으로 향유하는 바로 그것이다.  130-134



저녁이다. 난 호텔 방에 누워 있다. 며칠 전부터 적포도주와 아편으로 살아간다. 장이 형편없이 좋지 않다. 오늘 저녁은 서 있거나 걸어가기에도 용기와 힘이 달린다. 또한 지금은 우기다. 이제 겨우 저녁인데도 바깥은 비에 흥건히 젖어 있고 칠흑같이 캄캄한 밤 같다.  240


지난 몇 달간 받은 무수한 인상들은 나의 젊은 감각을 신선하게 에워싸고 있는 반면 나의 소망과 생각은 벌써 모두 고향에 가 있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아직 아득히 먼 곳에서 반쯤은 비현실적인 상태에 있다. 그 인상들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면 진정으로 '이국적'인 것은 얼마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대부분의 인상은 순전히 인간적인 종류의 것이고, 낯선 의상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과 모든 인간 존재와의 친근성에 의해 중요하고 사랑스럽게 되었다.  251


모든 아름다운 광경들보다 훨씬 기억에 남는 광경은 인간의 수많은 소소한 일들이다.  253


모든 것보다 더 멋진 것은 언제나 우리가 인간에 관해서 본 것이었다. 어느 힌두인의 꿈결 같은 걸음걸이, 얌전한 스리랑카인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노루 같은 부드러운 눈초리, 검은색을 띤 구릿빛의 타밀족 노동자의 새하얀 눈동자, 고상한 중국인의 미소, 낯선 방언으로 중얼거리는 거지의 더듬는 말, 열 개의 상이한 언어를 지닌 민족들의 사람들끼리 말하지 않고도 이해되는 현상,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 우쭐대는 압제자에 대한 조소, 그리고 이들 모두가 우리와 같은 인간이자 형제이며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이라는 독특하게 행복한 감정! 낯선 외모를 지니고 본성과 인종이 약간 은폐된 이들이 우리 곁을 지나갔다. 남인도의 이슬람교도는 도도하고 자의식이 있었고, 의젓하게 걸어가는 중국인은 위엄 있고 명랑했고, 작고 날씬한 스리랑카인은 수줍어하는 소녀 같았고, 아담한 말에이인은 영리하고 부지런했고, 근면한 일본인은 작고 현명했다. 그들 모두는 피부색과 외모는 무척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베를린 출신이든 스톡홀름 출신이든, 취리히나 파리 또는 맨체스터 출신이든 상관없이 우리 외국인이 모두 신비롭지만 아주 명백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속하고 유럽인인 것처럼, 그들 모두는 아시아인이었다. 

이것만 해도 멋지고 때로는 놀랍게 보일 수 있었다. 유럽인과 아시아인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시하긴 하지만, 모든 유럽인에게 뭔가 공통되고 서로를 묶어주는 요소가 있듯이, 모든 아시아인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내게 더 멋지고 엄청나게 더욱 중요한 것은 때때로 온갖 감각 속에서 선명하게 되풀이되는 경험이었다. 그것은 동양과 서양, 즉 유럽과 아시아가 단일체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인류라는 하나의 소속이자 공동체가 있다는 경험이었다. 누구나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사실을 책에서 읽는 것이 아니라 전혀 낯선 민족과 서로 눈을 맞대로 체험하면 그것은 누구에게나 무한히 새롭고 소중하게 된다.  268-269



흰구름


오, 보렴, 다시 두둘실 떠가고 있구나,

잊힌 아름다운 노래들의 

나지막한 선율처럼

푸른 하늘 저쪽으로!


오랫동안 떠돌아다니지 않고

온갖 시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구름을 이해할 수 없지,

방랑의 기쁨을.


해님과 바다와 바람처럼 

난 흰 구름을 사랑하지,

집 없는 사람에겐 

누이이자 천사이기 때문에.



방랑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원시인이다. 유목민이 농부보다 원시적이듯이 말이다. 하지만 정주(定住 정할정 살주)의 극복과 경계의 무시는 그럼에도 나 같은 유형의 사람들을 미래로 향하는 이정표로 만들 것이다. 나처럼 국경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이 많다면 더 이상 전쟁도 봉쇄도 없을 텐데. 경계만큼 보기 싫고 어리석은 것도 없다. 경계는 대포나 장군과 같다. 이성, 인간성과 평화가 지배하는 한 경계에 대해 아무것도 못 느끼고 그것에 대해 비웃는다. 하지만 전쟁과 광기가 발발하자마자 경계는 중요하고 성스러워진다. 전시에는 경계가 우리 같은 방랑자에게 얼마나 고통과 감옥이 되었던가! 그런것은 악마나 잡아 가라지!  281-282


내 눈은 지금있는 것에 만족한다. 그도 그럴 것이 보는 법을 배웠으니까. 세상은 그 이휴로 더 아름다워졌다.

세상은 더 아름다워졌다. 난 혼자지만, 혼자 있는 것에 고통받지는 않는다. 다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햇볕에 푹 삶아질 용의가 있다. 나는 푹 숙성되기를 갈망한다. 죽을 용의도 있고, 다시 태어날 용의도 있다. 

세상은 더 아름다워졌다.  288



밤길


먼지 덮인 밤길을 걷는다. 

담벼락엔 그림자 비스듬히 떨어지고

포도덩굴 사이로

개천과 길 위의 달빛이 보인다.


한때 불렀던 노래를

나직이 다시 읊조린다.

숱한 방랑의 그림자가

내 앞길을 가로막는다.


여러 해 동안의 바람과 눈, 뙤약볕이

내 귀에 울려온다.

여름밤과 푸른 빛 번개,

폭풍우와 여행의 괴로움이.


갈색으로 그을리고

이 세상의 풍요로움을 흠뻑 마시며

계속 이끌려가는 기분이 든다.

내 오솔길이 어둠에 잠길 때까지.  



배낭족으로 살아가고 너덜너덜한 바지를 입고 다니는 게 무척 좋다.  290


나는 여자가 아닌 사랑만을 사랑하는 바람둥이에 속한다.

우리 같은 방랑자는 모두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방랑벽과 나그네 생활 자체가 대부분 사랑이자 에로틱이다. 여행의 낭만이란 절반은 다름 아닌 모험에 대한 기대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에로틱한 것을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켜 해소하려는 모의식적 충동이다. 우리 같은 방랑자는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랑의 소망을 가슴에 품고 다니는 데 익숙하다. 또 원래는 여자에게 향했던 그 사랑을 놀이하듯 마을과 산, 호수와 협곡, 길가의 아이들, 다리 밑의 거지, 목초지의 소, 새와 나비에게 나누어주는 데 익숙하다. 우리의 사랑을 그 대상으로부터 떼어낸다. 우리는 사랑 그 자체로 충분하다. 마치 우리가 방랑 중에 목적지를 찾지 않고 단지 방랑 자체의 즐거움과 길 위의 생활을 추구하듯이.  291-292


나무는 내게 언제나 가장 감동적인 설교자였다...

나무는 쉬면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온 힘을 다해 하나만을 얻으려 애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내부에 깃들어 있는 고유한 법칙을 실현하고 자신의 형상을 완성하며 자기 자신을 표현하려 애쓴다. 아름답고 튼튼한 나무보다 더 신성하고 모범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307


나무는 신성한 존재다. 나무와 대화를 나누고, 나무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자는 진리를 알게 된다. 

나무는 개별적인 것은 개의치 않고 삶의 근본 법칙을 설교한다.  308


비 오는 날씨다. 그런 날씨에 나는 생기가 돌고 명랑해진다. 짙은 대기 속에 습기가 오르락내리락 한다. 구름은 끊임없이 아래로 떨어지고, 새로운 구름이 계속 나타난다. 우유부단과 언짢은 분위기가 하늘을 지배하고 있다.  312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과 사물은 변하게 마련이다. 그 흐름은 어떤 것도 거스를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 몇 십 년 동안 이 몬타뇰라에서 클링조어의 가물거리며 타오르는 열므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좋은 것, 그러니까 놀라운 많은 체험을 했다. 나는 마을과 마을 풍경에 무척 감사해야 한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을 번번이 글로 표현하려고 했다. 나는 산과 숲, 포도밭 언덕과 호수 골짜기를 몇 번이고 시로 노래했다. 또한 클링조어의 거처가 있는 조그만 발코니와 높은 유다나무도 묘사하고 찬미했다.  377


나는 오늘 테신을 떠나 뉘른베르크로 가을 여행을 떠난다. 두달이나 걸리는 여행이다. 그런데 그 여행의 이유가 무엇인지 자문해보자니 무척 당혹스런 기분이 든다. 자세히 살펴볼수록 이유와 동인은 더욱 갈라지고 쪼개지며 나누어져서 결국은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그것들은 단선적인 인과성의 열(列 벌일열)이 아니라 그런 열이 얽히고 설킨 그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결국은 그 자체로 사소하고 우연한 이 여행이 내 이전 삶의 무수한 점들에 의해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그 직물에서 가장 거친 몇 개의 매듭뿐이다.  383



나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며칠 정도나 귀향을 지연시킬 수 있을 것인가? 추측건대 아직도 오랫동안 여행할 것이다. 아마 겨울 내내, 어쩌면 평생 동안, 결국은 곳곳에서 이런저런 친구를 만나 저녁이면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때로는 나의 천사가 어느 어스름한 시간에 다시 내 앞에 나타나리라. 또 내 청춘의 성소(聖所 성스러울성 바소)들이. 그리고 어디서나 내 자유의지로, 차가운 바람을 맞거나 흩날리는 나뭇잎을 보고 단지 슬퍼하지만 않고 웃으리라. 내가 가끔 그렇게 생각했듯이, 아마 내 안에 어떤 해학가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러면 나는 잘 해나갈 것이다. 그 해학가가 아직은 오나전히 발전된 것은 아니지만, 아직은 내가 보기에 완전히 나빠진 것도 아니었다.  47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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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

꽤 이른 아침이었다. 거리는 깨끗했고 텅 비어 이었다. 나는 역으로 갔다. 시계탑의 시곗바늘과 내 시계를 비교해보고 이미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늦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급히 서둘러야만 했다. 늦었다는 사실에 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길에 대한 확신을 잃게 되었고, 게다가 아직 이 도시에 대해 썩 잘 알고 있지도 않았다. 다행히도 근처에 결찰관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그에게 달려가 급히 길을 물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서 길을 알고 싶은가?"

"네." 나는 말했다. "혼자서는 길을 찾을 수가 없어서요."

"포기해, 포기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몸을 홱 돌려 나를 외면했다.

마치 웃으면서 혼자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처럼.  49-50



인디언이 되고 싶은 소망

내가 인디언이라면, 즉시 채비를 갖추고, 달리는 말 위에 올라, 허공에서 몸을 비스듬히 젖히고, 짧은 전율을 느끼고 또 느끼며 진동하는 대지 위를 내달리리라. 박차를 잃어버릴 때까지. 사실 박차는 애당초 없었다. 고삐를 내던져 버릴 때까지. 사실 고삐도 애당초 없었다. 눈앞에 매끄럽게 풀이 깎인 황야가 펼쳐진 순간, 말의 목도 말의 머리도 이미 흔적이 없었다.  87



여행자 예찬 

열차 안에 앉는다. 신경 쓸 것이 없다. 마치 집에 있는 것처럼 시간을 보낸다. 갑자기 기억들이 떠오른다. 출발하는 열차의 잡아태는 힘이 몸에 느껴진다. 이제 여행자가 되는 것이다. 가방에서 모자를 꺼낸다.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더 자유분방하게, 더 많은 인정을 베풀며, 더 간절하게 대한다. 열차는 공치사 하나없이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것이다. 이런 점을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느낀다. 여인들의 애인이 된다. 창문이 보여주는 끊임없는 매력에 이끌리며, 언제나 최소한 한 손이라도 쭉 뻗어서 창문턱에 올려놓은 채 그대로 둔다. 조금 더 주의 깊게 상황을 보자면, 사람들은 단 한 번의 충격으로 섬광 같은 열차 안에서 혼자 여행하는 아이가 되고, 그 아이 주변에서는 조급함에 몸을 떠는 객차가 마치 요술쟁이의 손에서 튀어나오는 것처럼 놀라울 정도로 너무나도 아주 가볍게 생겨나고 출발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잊고 있었고, 더 심한 것은 자신들이 잊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88-89



골목길 창문

고독하게 살고 있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어딘가에 연결되고 싶어 하는 남자, 낮 동안의 시간의 변화들, 날씨의 변화들, 직업 상태에 따른 변화들과 그와 같은 것을 고려하면서 자신이 의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임의의 힘을 당장 보고 싶어 하는 남자-그 남자는 골목길 창문이 없다면 그것을 아마 오래 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골목길 창문은 그와 그런 사이라서, 그는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친 남자같이 겨우 눈만 관객과 하늘 사이에서 아래위로 움직이며 자신의 창문턱 쪽으로 갔다. 그리고 그는 원하지 않으면서도 머리를 뒤쪽으로 조금 젖히고 창문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아래에서 마차의 수행원과 소음 속에 있는 말들이 역시 그를 감동시키고 마침매 그럼으로써 인간적인 융화가 되었다.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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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놈베코)는 어머니의 바통을 이어받아아, 무서운 현실에 대한 화학적 방패를 만드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려해 보았다. 하지만 장례식 후에 봉급을 받게 되었을 때, 그녀는 일단 먹을 것을 샀다. 배고픔이 가라앉자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자문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 일상이 힘들고, 먹을것이 궁하면, 먹기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먹고나면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자본주의는 먹고나면 다시 먹을것을 걱정하게, 먹을것이 풍부해지면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생각을 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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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점에서 나온 숙모는 한스에게 넓적한 초콜릿을 한 개 주었다. 그는 초콜릿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예의 바르게 했다  27


"아니, 왜 안 먹으려고 하는 거니? 그러지 말고 어서 먹으려무나, 먹으라니까!"

한스는 초콜릿을 끄집어내 잠시 은박지를 만지작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자그맣게 한 조각을 떼어물었다. 초콜릿을 좋아히자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숙모에게 바른 대로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28


신학교에서도 다른 학우들보다 앞서기 위해서는 야망과 인내심으로 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스는 꼭 그렇게 되고 싶었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 걸까? 그것은 한스 자신도 알 수 없었다.  64


원래 몹시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은 살림을 꾸려가거나 돈을 아끼는 방법을 전혀 터득하지 못한다. 그들은 가진 만큼 다 써버리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는 미래를 위해 저축한다는 것이 낯설게 여겨질 뿐이다.  97


교장 선생으로부터 아버지, 그리고 교사들과 복습 교사들에게 이르기까지, 어린 소년들을 키우는 의무에 충실한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바람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한스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이 오기와 타성에 젖은 성향을 억지로라도 다시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그 동정심 많은 복습 교사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야윈 소년의 얼굴에 비치는 당혹스러운 미소 뒤로 꺼져가는 한 영혼이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불안과 절망에 싸인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학교와 아버지, 그리고 몇몇 선생들이 야비스러운 명예심이 연약한 어린 생명을 이처럼 무참하게 짓밟고 말앗다는 사실을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왜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 시절에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는가? 왜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아버리고, 라틴어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는가? 왜 낚시하러 가거나 시내를 거닐어보는 것조차 금지했는가? 왜 심신을 피곤하게 만들 뿐인 하찮은 명예심을 부추겨 그에게 저속하고 공허한 이상을 심어주었는가? 왜 시험이 끝난 뒤에도 응당 쉬어야 할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았는가? 이제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길가에 쓰러진 이 망아지는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172-173


교장 선생은 헤어지면서 한스의 힘을 붇돋아주기 위하여 "또 만나세."라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헬라스 방에 들어가 텅 빈 세개의 책상을 볼 때마다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던 두 소년과의 이별에 대한 책임의 일부가 혹시라도 자신에게 있지나 않은지, 자못 우울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교장 선생은 담력이 세고 도덕적으로 강인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전혀 이롭지 않은 암울한 의구심을 마음속으로부터 떨쳐버릴 수 있었다.  174


한스의 마음은 실망스럽게도 아버지의 바람을 저버렸다는 죄책감 때문에 우울하고 어두워졌다.  175


줄기를 잘라낸 나무는 뿌리 근처에서 다시 새로운 싹이 움터 나온다. 이처럼 왕성한 시기에 병들어 상처입은 영혼 또한 꿈으로 가득 찬 봄날 같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마치 거기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어 끊어진 생명의 끈을 다시금 이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뿌리에서 옴튼 새싹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나지만,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생명에 불과할 뿐, 결코 다시 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187


아, 그대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아우구스틴, 아우구스틴,

오, 그대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모든게 끝나버렸네.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에 가슴이 저리도록 아파왔다. 어렴풋한 상념과 추억들, 수치심과 자책감이 음울하게 물결치며 한스를 뒤덮었다.

한스는 큰 소리로 흐느끼며 풀밭에 쓰러졌다.  259


교장 선생은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그래요, 선생님. 저 아이는 훌륭하게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뛰어난 아이들이 도리어 불운을 맞게 된다는 건 정말이지 슬픈 일이지요!"  262



작품소개

서양의 기독교적인 경건주의 전통과 더불어 자라면서도 인도와 중국의 동양적인 분위기에서 자신의 <정신적인 고향>을 발견하였다. 그가 추구한 문학의 과제는 동양 정신과 서양 정신의 접목, 지성과 감성의 결속, 현실과 이상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다.  265


독일 낭만주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헤세는 특히 고독과 허무를 주제로 한 서정시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세의 자서전이다. 한스 기벤라트는 그의 분신이다. 젊은이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어쩌면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는 한스처럼 '수레바퀴 아래서' 힘든 삶의 여정을 밟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266


한스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난 반면에 어린 시절의 헤세에게는 어머니가 곁에 있었다. 또한 작가로서의 헤세가 자신의 고뇌와 시련을 글로써 승화시킬 수 있었던 반면, 한스는 그런 출구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267


왜 한스는 스스로 죽음을 택해야만 했는가! 어째서 그는 힘겨운 파멸의 길을 걸어가야만 했는가! 무엇 때문에 그는 <수레바퀴 아래서> 신음해야만 했는가! 과연 한스가 짊어졌던 수레바퀴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쩌면 우리는 수레를 끌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운명을 짊어진 수레바퀴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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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 보기


헤르만 헤세의 기고 내용들을 통해 헤세가  생각하는 독서와 독서를 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나는 그의 표현중에 여러가지들에서 나를 돌아보았고, 다시금 생각해보고, 격려받았다. 
즐겁게 읽었다.
기분좋게 읽었다.








사업에 바치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독서에 들이는 시간에 대해서도 모종의 이득을 기대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또한 자신의 경험과 인식을 조금이라도 더 확장시켜주지 못하고, 한치라도 더 건강하게 하루라도 더 젊어지게 만들어주지 못하는 책이라면 감명을 받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8
너무 많이 읽는다. 전혀 감동이 없으면서도 다른 일에 비해 시간과 노력을 지나치게 바친다.  9
책은 오직 삶으로 이끌어주고 삶에 이바지하고 소용이 될 때에만 가치가 있다.  10
인생은 짧고, 저세상에 갔을 때 책을 몇 권이나 읽고 왔느냐고 묻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무가치한 독서로 시간을 허비한다면 미련하고 안타까운 일 아니겠는가?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책의 수준이 아니라 독서의 질이다.  11

오늘날 읽기는 누구나 다 배우지만, 얼마나 강력한 보물을 손에 넣었는지를 진정으로 깨닫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소수만은 철자와 단어의 그 특별한 경이에 여전히 매료당한 채 살아간다. 바로 이들이 진정한 독자가 된다.  21
진정한 독자가 울창한 책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압도될지, 제대로 길을 찾아 자신의 독서체험이 진정으로 스스로의 경험과 삶에 소용되게끔 만들지는 각자의 지혜나 운에 달려 있다.  23
책의 세계에는 나름의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이 위험성이 과연 풍성한 책의 세계를 결여한 삶이 갖는 위험성보다 더 큰 것일까?  23
진정한 독자라면 누구나, 설령 책이 단 한 권도 새로 나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존의 보물을 수십년 수백 년 이라도 더 붙들고 계속 씨름하고 향휴할 수 있을 것이다.  24
우리가 좀더 세심하고 예민한 감각으로 더 직접적인 연관 속에서 읽을 줄 알게 되면, 그만큼 더 모든 사상과 문학을 그 일회성과 개별성, 엄밀한 제한성 속에서 파악하게 된다.  25

우리의 원칙은, '가치가 없는 건 가급적 장서로 들여놓지 말고 일단 검증된 것은 절대 내버리지 않기!'다  33

독자는 작품에 대해 그리고 작가의 전문성에 대해 경의를 품어야 하며, 소재와 무관하게 작업의 질에 따라 작품을 평가해야 한다.  37

맥주를 마시거나 흥청망청하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으면서 책에는 그 10분의 1 조차도 쓰기를 꺼려하는 사람이 수두룩한가 하면, 생각이 좀 구식인 사람들은 책을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호사스럽게 꾸민 방에 꽂아놓고 먼지가 뽀얗도록 놔둔다.
기본적으로 올바른 독자라면 장서가(藏書家)이기도 하다.
올바른 독자들에게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존재와 사고방식을 접해 그것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그를 친구로 삼는 것을 뜻한다.  107
훌륭한 장서란 '주문'으로 갖출 수 없으며, 각자 애착과 필요를 좇아 차츰차츰 모으게 되는 것이니, 이는 친구를 사귀는 이치와 똑같다. 그렇게 모은 장서라면 아무리 남보기에 변변치 않더라도 본인에게는 어쩌면 온 세상을 의미할 수도 있으리라.  108
책을 통해 스스로를 도야하고 정신적으로 성장해 나가고자 하는 데는 오직 하나의 원칙과 길이 있다. 그것은 읽는 글에 대한 경의, 이해하고자 하는 인내, 수용하고 경청하려는 겸손함이다. 
친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듯 책을 읽는 사람에게 책들은 자신을 활짝 열어 온전히 그의 것이 될 것이다.  109

어째서 사람들은 신체단련이나 이성의 연마에는 돈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퍼부으면서 유독 영혼의 도야를 위한 노력에 대해서는 성마른 태도와 조소를 보낼 뿐인가?  114

진정한 교양이란 완성을 추구하는 모든 노력이 그러하듯 어떤 목적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117
교양으로 인도하는 길 중 으뜸이 되는 하나가 '세계문학의 탐구'다.
온 인류의 문학에 통달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 다만 수준 높은 사상가나 작가의 작품 하나라도 속 깊이 이해한다면, 이는 죽은 지식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의식과 이해를 접하는 하나의 성취이자 행복한 경험이리라.
좋은 작품들을 자유롭게 택해 틈날 때마다 읽으면서 타인들이 생각하고 추구했던 그 깊고 넓은 세계를 감지하고 인류의 삶과 맥, 아니 그 총체와 더불어 활발하게 공명하는 관계를 맺는 일이 중요하다. 
독서로 정신을 '풀어놓기' 보다는 오히려 집중해야 하며 허탄한 삶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거짓 위로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독서는 우리 삶에 더 높고 풍부한 의미를 부여하는 데 일조할 수 있어야 한다.  118
어떤 작품이 너무나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래서 그걸 모른다는 게 챙피해서 억지로 부득부득 읽는다는 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일이다.  120
애정이 결여된 독서, 경외심 없는 지식, 가슴이 텅 빈 교양이란 정신에게 저지르는 가장 고약한 범죄 중 하나다.  121

우리에게 주어진 작은 문들을 하나씩 통과하여 정신이라는 성역 안으로 들어가고자 할 뿐이다. 누구든 자기가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자!
수준 높은 '독서훈련'은 신문이나 떠도는 유행문학들이 아닌, 오직 양서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158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사람들은 유행에 떠밀리기 전에는 책에 관해 흔히 미술작품들을 대할 때와 같은 그런 터무니없는 두려움을 가진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같은 생각에 본인 나름대로 판단할 엄두를 못 내고, 책을 사거나 읽겠다고 책방 문을 밀고 들어갈 자신이 없다.
그러다가 더러 그렇듯, 어느날 끈덕진 방문판매인의 손에 딱 걸리면 거금을 들여 멋진 금박 외장의 호화판 전집을 사들이게 되고, 그걸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나중엔 쳐다보기만 해도 울화가 치미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항상 그렇듯이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의지이며 완전무결한 판단이 아닌 수용성과 진솔함, 선입견없는 마음자세이다.  161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 행복과 교양을 위한 필독 도서목록 따위는 없다. 단지 각자 나름대로 만족과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일정량의 책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책들을 서서히 찾아가는 것, 이 책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것, 가급적 이 책들을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늘 소유하여 조금씩 완전히 제 것으로 삼는 것, 그것이 각자에게 주어진 과제다. 이일을 소홀히 한다면 교양과 기쁨은 물론 자기 존재의 가치까지도 손실이 막심하리라.  163
어쩌면 문학지식이 전혀 없더라도 민감하고 주의 깊은 독자라면, 매일 읽는 신문을 통해 ㅇ러마든지 괴테에 이르는 길을 스스로 찾을 수 있다.  164
책이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책은 진지하고 고요히 음미하고 아껴야 할 존재다. 그럴때에야 비로소 책은 그 내면의 아름다움과 힘을 활짝 열어 보여준다.  166
의무감이나 호기심으로 딱 한 번 읽은 것만으로는 결코 진정한 기쁨과 깊은 만족을 맛볼 수 없으며, 기껏해야 일시적인 흥분을 야기할 뿐 금세 잊혀지고 만다. 하지만 혹시 어떤 책을 처음 읽으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거든 얼마쯤 지난 후에 꼭 다시 읽어보라. 두번째 읽을 때 비로소 그 책의 진수를 발견하게 되고, 표면적이 것에 불과했던 긴장감이 사라지면서 글 고유의 힘과 아름다움이라 할 내면의 가치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얼마나 경이로운 경험인지 모른다.  167
어떤 책을 읽고 구입해야 할지에 대해 정해진 조언이란 없다. 각자 자신의 생각과 취향에 따르면 된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독자가 꼭 갖추어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편견이나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169
자신의 취향에 대한 불안과 불신, 소위 전문가와 권위자들이 내리는 판단에 대한 터무니없는 존중은 대개 잘못된 것이다. 
절대적으로 정확한 비평이란 것도 없다.   171
문학과 예술 방면에 그다지 조예가 깊지 못한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소박하되 넘치는 애정으로 독서생활을 가꾸어 나가며 삶의 기쁨과 내면의 가치를 키울 줄 아는 지지함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172
독서도 다른 취미와 마찬가지여서, 우리가 애정을 기울여 몰두할수록 점점 더 깊어지고 오래간다. 책은 친구나 연인을 대할 때처럼 각각의 고유성을 존중해주며, 그의 본선에 맞지 않는 다른 어떤 것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무분별하게 후닥닥 해치우듯 읽어서도 안 되며, 받아들이기 좋은 시간에 여유를 갖고 천천히 읽어야 한다.  173
머릿속 가득 수천 권의 책제목과 작가의 이름을공호하게 떠올리는 것보다 몇 권 안되는 책일망정 속속들이 알아 그 책들을 손에 집어드는 순간 그것을 읽던 수많은 시간들의 감동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편이 더 귀하고 만족스러우리라.  174

독서의 세 가지 유형이랄까 단계를 말할텐데, 그렇다고 해서 독자층을 세 등급으로 나눈다거나 어떤 사람은 어느 단계에 또 누구는 다른 단계에 속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 각자가 어떤 때는 이쪽에, 또 어떤 때는 저쪽에 속한다는 얘기다.
먼저 순진한 독자.
이들에게 책이란 응당 충실하고 주의 깊게 읽으면서 그 내용 혹은 형식을 음미하라고 있는 것이지 다른 목적은 없다고 확고히 믿는다. 마치 빵은 먹으라고 있는 것이고 침대는 잠자라고 있듯이 말이다.
둘째 유형의 독자는 천진난만함과 탁월한 유희본능을 보여주는 경우이다.
무엇이든 열 가지, 백 가지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어린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듯이, 이 독자들 역시 그러하다. 작가나 철학자의 저작을 읽는다면, 그가 여러 가지 해석과 평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관망하며 미소 지을 줄 안다.  
이런 유형의 독자는 마부를 따르는 말이 아니라 마치 사냥꾼이 짐승의 자취를 더듬듯 작가를 추적한다. 
마지막 독자의 스타일은 너무나 개성적이고 자신에게 충실해서, 무엇을 읽든 완전히 자유로운 태도로 대한다. 
그가 책을 읽는 이유는 책은 세상의 모든 대상들과 다름없이 다만 출발점이요 단초일 뿐이다. 
그는 모든 것과 더불어 유희하는 것이야말로 더없이 생산적이고 창조적이다. 어떤 책에 나온 멋진 구절이나 지혜와 진실이 담긴 말을 보면, 시험 삼아 한 번쯤 뒤집어본다. 모든 진리는역도 참임을 이미 터득한 사람이다.  
셋째 단계의 독자는 더 이상 독자가 아니다. 만약 지속적으로 이 단계에만 머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곧 아예 아무것도 읽지 않을 것이다.  
온 세계가 자기 내면에 들어와 있는데 무엇 때문에 책을 읽겠는가?
하지만 지속적으로 이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없다.  185-191

화가는 그림을 볼 때면 조명을 잘 밝히고 다가섰다 물러났다 해가면서 여러 각도에서 관찰한다. 그림을 한 바퀴 돌려보기도 하고 위 아래를 뒤집어 거꾸로 걸어보기도 한다. 그런 갖가지 시험을 통과하고 색상들이 마술처럼 조화를 이루며 함께 어우러질 때, 그때야 비로소 화가는 그 그림에 만족한다.
나는 내가 진정한 마음의 벗으로 삼는 '진리'들을 가지고 곧잘 그렇게 해 본다. 참되고 올바른 진리라면 뒤집어놓더라도 끄떡없어야 할것 같다.  225
"작가의 소임이란 단순한 것을 중대하게 말하는 일이 아닌, 중대한 것을 단순하게 말하는 일이다."  226
진심으로 생각하건대, 작가의 직분이란 세상에서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판별하는 일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의미라는 것이 그저 단어에 불과함을,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없으면서 또한 모든 것에 있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과 그러지 않아도 될 일이 따로 있지 않음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그런 소임, 그런 고결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작가다.  228
만일 내가 교사여서 수업을 해야 한다면 "얘들아, 우리가 너희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물론 좋은 거란다. 하지만 가끔은 우리가 정한 원칙과 진리를 한번쯤 시험 삼아 뒤집어 보려무나!"라고 말할 것이다.  230

나이가 들면 요즘 젊은이들은 건방지다고 타박하기 일쑤다. 하지만 그러는 어른들 역시 늘 젊은이의 몸짓과 방식을 따라하고, 똑같이 열광하며, 똑같이 공정하지 못하며, 똑같이 독선적이고 또 쉽게 상처받는다.  노자가 부처보다. 파랑이 빨강보다 못하지 않듯, 노인이 청춘보다 못한 것은 아니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노인네가 청춘인 척하려 들면 우스워질 뿐이다.  247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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