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가 칼 스트라이버트




"글을 쓸 때 혈관을 통해 뜨거운 피가 흐른다는 강렬한 의식이 없으면, 그 글에 어떤 중요한 의미가 담길 수 없다는 것이지요. 글쓰기란 곧 신체의 모든 부분을 다 동원해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겁니다. 스트라이버트 교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죠. '주전자의 물이 끓을 때 그 속에 모든 재료를 다 집어 넣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작가가 될 수 없습니다.'"  287


"만일 여려분이 각 인물들이 어떠한 감정에 휩싸여 있는지 상상도 못하고 또 그런 감정들과 자신의 감정을 일치시켜 어떤 공감도 이루어 내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작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대단히 가증스럽건, 고귀하건, 자기 희생적이건 혹은 대단히 속되건 간에, 여러분은 스스로를 고무하여 그 인물들의 상황 속에 자신을 위치시켜야 하며, 또 그 인물들의 가슴속에 파고들어야 하는 겁니다."

이 말이 끝나고 내 계보도를 소개하면서 나는 예의 그 의식을 치르기 시작했다. 즉, 사전에 아무런 설명이나 주의도 주지 않고 장차 작가가 되겠다고 모여든 학생들 가우넫 아무나 지목하여 자신을 무시무시한 곤경에 처한 계보도의 인물이라 가정하고 그럴 때 그 인물이 무슨 말을 했겠으며, 혹은 무슨 생각을 했겠는지 낭송해 보라고 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면 마치 고대 그리스 인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의 대사를 쓰듯 학생들은 그 인물들이 했을 법한 말이나 머릿속에 품었을 생각을 모두 말로 나타내야 했다.  288-289


"여러분이 의미 있는 서사의 비밀을 캐내기 원하신다면 단 네 명의 영국 소설가만 살펴보면 됩니다. 연대순, 그러니까 태어난 시간순으로 말하면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헨리 제임스, 그리고 조지프 콘래드입니다."  306


삶의 겉면망을 다룬 작가들이며, 그래서 훌륭한 작가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윌리엄 새커리, 찰스 디킨스, 토머스 하디, 존 골즈워드 이렇게 넷입니다. 이들 작가의 작품은 쉽게 읽을 수 있으며, 독자의 마음도 끌고, 또 재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어떤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내용을 제공해 주지는 못하는 소설가들입니다.  306-307


말하지 마라. 대신 글로 표현하라.  309


도시의 머리 위로 아침이 열릴 때쯤 나는 장차 교수로서의 나의 삶에 활기를 줄 진리들을 찾아 내었다. '예술가는 보통의 삶을 살 수도 없고, 살아서도 안 되는 창조적인 인간이다. 그는 자기 자신처럼 믿을 수 있는 자신의 친구들에게서 본질적인 것을 찾아내야 한다. 예술가의 임무란 사회에 신선한 충격과도 같은, 또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신랄한 그 사회의 초상을 그려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의 최고의 선, 즉 한 인간의 척도가 되는 행위란 친구에 대한 충직성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친구들에게 내보일 수 있는 신뢰감이 바로 선이다.' ...

내가 찾아낸 금싸라기와도 같은 진리를 잊어버리기 전에 기록해 둘 심산이었다. 그러나 종이에 적은 글을 다시 읽어 보았을 때 나는 뭔가 빠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몇 자를 더 적어 놓았다. '그리고 그 친구는 여성일 수도 있다'  323


데블런 교수님 "소설에서 역시 그 편지들을 차지하려 했던, 다소 역겨운 인물로 나오는 존 쿰너라는 영국인 말일세, 어쩌면 그자가 나일 수도 있겠고 젊은 미국인은 자네일 수도 있네." 곧 이어, 제임스의 소설에서 묘사된 것과 똑같은 집을 찾으려는 우리의 노력은 베네치아에 있는 실제 저택이 아니라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허구적인 삶이면서도 좁은 보도에서 우리 곁을 지나쳤던 살아 있는 이탈리아 인들의 실제 삶보다도 더 여실하게 보이는 소설적인 삶의 탐구로 바뀌었다. "그게 바로 소설이 해야 할 일일세." 데블런 교수님은 힘있게 말씀하셨다. "종이 위에 단어들을 연속해서 풀어헤쳐 놓는 것과 누구나 보통의 사전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그런 단어들을 풀어놓는 것은 바로 실제 환경 속에 있는 실제의 사람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일일세. 자, 우리가 이 쾨쾨한 냄새나는 운하와 마주하고 있는 저 낡은 집을 소설 속에서 묘사한다고 치세. 그렇다면, 가령 잠비아로 휴가를 떠나 그 소설을 읽는 어느 독자로 하여금 그 배경을 실제 육안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게 하고, 또 그 심리학적 중요성까지 음미할 수 있도록 하려면 우리는 과연 50만 내가 되는 영어 단어들 중에서 어떤 단어들을 골라 써야 할까? 이용 가능한 단어들을 다 쓰면 되네. 마구 뒤섞여 있는 단어들 중에서 그냥 고르기만 하면 되지.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그 단어들을 올바른 질서로 배열해야 한다는 점일세. 그래야 우리가 노리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네.

그다음 우리는 만의 소설로 넘어갔다. 콜레라가 만연된 베네치아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콜레라가 없지 않습니까?"

"아닐세, 있네. 무서운 콜레라가 모든 서구 사회에 창궐해 있지. 신문과 전파를 통해 토하듯 쏟아지는 대중문화라는 콜레라 말이네. 그것이 모든 것을 죽이고, 또 모든 것을 싸구려로 만들고 있다네. 언젠가는 우리 목까지 그 오물 같은 콜레라가 차 오라 우릴 질식시키고 말걸세."

데블런 교수님은 떨쳐 버릴 수 없는 문명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조심스럽게 설명하시더니 그 불행한 통속성으로의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서 창조적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셨다. "가장 큰 적은 대중들의 수용에 있네. 왜냐하면 대중들이 인정해야 어떤 예술가가 대중 욕구의 최소 공통분모 정도는 만족시켰다는 점이 입증되기 때문일세. 하지만 예술가의 임무는 그런 것이 아니에. 예술가는 연구와 통찰을 통해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수준으로 올라서야 하는 것이고, 그다음 동료들과 소통하고, 또 그들을 찾아내고, 그들과 사상을 교환해야 하네. 그러고 난 다음 그들을 찾아내고, 그들과 사상을 교환해야 하네. 그러고 난 다음 그들이 관심을 쏟고 잇는 문제가 무엇인지 밝혀 내기 위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드는 것일세. 진정한 예술이란 고양된 수준에서 동등한 사람들끼리 의사 소통하는 것이지. 그밖의 다른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야."

나는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알 수는 있었지만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하지만 저는 교수님이 컬럼비아 대학에서 저희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통해 모든 글쓰기의 최종점은 출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것도 별게 아니라고 말씀하시니 대체 어떤 의미인지.."

"자네 아직도 그 폭풍과도 같았던 강의를 기억하나? 그래, 조지 에리엇은 보물이고, 찰스 디킨스는 엉터리 약장수야. 그리고 조지프 콘래드는 고수하되 존 골즈워디는 버리게."

"하지만 그 작가들이 책으로 남겨 둔 것은 어떻게 하고요? 교수님이 폄하한 작가들이 무엇인가를 책을 통해 전파 시켰다면 그것 나름대로 어떤 건설적인 목적을 이룬 것을 아닐까요?"

"아닐세. 내가 무시하라고 한 작가들은 마취제와도 같은 존재들이지. 해도 없지만 아무런 득도 주지 못하는 작가들일세."

"그렇다면 출판의 존재 이유는요?"

"진정한 출판의 목적은 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대화를 수행하기 위해서라네. 책상에 앉아 자네의 청중이 누구인지, 자네의 독자가 누구인지 한번 상상해 보게. 자넨 분명 훌륭한 학자가 될 테지만, 지식인으로서 자네의 임무란 바로 자네 세대의 최고의 정신들, 즉 베를린, 레닌그라드, 소르본 혹은 버클리에 있는 생각 깊은 남녀들과 교류하는 것일세."

"그렇지만 출판업이란 교수님이 경멸하는 책들을 팔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아냐, 그렇지 않아! 자네가 틀렸네. 칼, 출판사는 위대한 작품을 출판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쓰레기 같은 글들을 파는 것일세. 자,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쿄, 마드리드. 모스크바, 더블린, 그리고 두 곳의 케임브리지, 이런 지성의 중심지를 차지하고 있는 뛰어난 정신들의 그물망을 한번 상상해 보게. 그런 곳은 이 세계를 한데 결집시키려는 보기 드문 지식인들이 모이는 곳이라네. 그들과 얘기하고 그들을 격려하게. 그리고 자네의 명석함으로 자네가 끌어 모은 광명을 그들에게도 나누어 주게. 그 밖의 나머지 것들은 다 필요 없어."  326-328


우린느 역사적인 북부 도시 테살로니키를 통해 그리스로 들어섰다. 꿈을 꾸듯 반도를 따라 내려가는 동안 고대의 이름들이 현실의 것으로 불쑥불쑥 떠오르자 하늘까지도 달리 보였다. 데블런 교수님은 그 옛 이름들을 어찌나 많이 아시는지 나는 내 무지에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다 고전을 공부한 결과라네. 고전을 배워야 해. 자네도 그렇게 배웠을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처럼 가볍게 지나치는 정도로는 안 되지." 아테네에 도착하기 전 데블런 교수님은 "여기가 스파르타로 가는 분기점이네"라고 하시면서 코린토스의고대 운하를 가리키셔따. 높은 도로에서 보니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제2의 반도로 들어서기 위해 그 유명한 수로를 가로지를 때는 노예들이 힘차게 노를 젓는 고대 그리스의 전함들이 깃발을 휘날리며 앞다퉈 수면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상상되기도 했다.

스파르타는 기대했었던 것보다는 실망스러웠다. 전투가 벌어졌던 평원 위에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는 쓸쓸한 잔해에 불과했다. 데블런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자, 보게. 한 사회가 군사 독재에 굴복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잘 보여 주는 곳일세. 스파르타의 어린아이들은 일곱 살 때부터 군사 훈련을 받았다네. 모든 결정을 군사 평의회에서 내렸지. 모든 것을 정복한 세계 최고의 군대. 그러나 결국엔 독재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꼴이 되고 말았지. 왜 그런지 아나? 자유인들은 항상 전제를 이겨내기 때문일세. 그렇지, 전제를 패퇴시키지는 못하지만 그것보다는 오래 살아남기 때문이지."

그 지역은 그리스의 웅장함이나 스파르타 군대의 승리를 보여 줄 만한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초라한 건물 몇 개가 애처로이 모여 있을 뿐이었다. 다시 데블런 교수님이 입을 여셨다. "미국에 있을 때 나는 슬픈 느낌이었다네. 만일 스파르타 독재 같은 것이 자네 나라의 학교를 개선해주고, 소수 인종을 통제해 주고, 여성들을 원래의 위치로 되돌려 보내고, 종교적 지상권을 회복시켜 주고, 또 권리선언의 어리석음을 다 끝장내 준다면 자네 국민의 80%가 그런 독재를 환영하리라는 것을 읽었기 때문일세. 내 눈엔 많은 현대 미국인들이 그런 제의라면 쌍수를 들고 기뼈 날뛸 것으로 보였지. 그래서 자넬 이곳 스파르타로 데려와 구경시키고 싶었던 것일세. 자, 보게. 지금 자네 눈에 보이는 것이 그런 선택의 결과라네."  329-330


우리는 마치 소설을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보물인 양 논의하면서 이미 알려진 어떠 ㄴ이야기를 어떻게 서술해야 최선인가, 즉 어떤 관점에서 이야기를 서술해야 최선의 효과를 가져올까 하는 문제를 두고 하루 온종일 씨름하였다. 그 주제에 대해서 데블런 교수님은 아주 확고한 생각을 지니고 계셨다. "가장 나쁜 것은 작가가 이따금씩 자신의 은밀한 논평을 끼워 넣는 형식이지. 작가의 그런 개입이 이야기의 흐름을 깰 땐 얼마나 불쾌한지 모른다네. 게다가 이야기의 끝이 엉성하게 건초 더미를 실은 짐마차처럼 삐걱거리면 정말 얼마나 혐오스러운지... 자넨 그러지 말게. 자네가 가르칠 어떤 학생이라도 그렇게 하도록 해서는 안 되네. 만일 그런 책을 평할 기회가 있으면 가차 없이 혹평하게.  331


우리는 소설의 주제로 어떤 것이 가장 좋은가에 대해 긴 토론을 하였으며, 데블련 교수님은 두 가지 점을 지적하셨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어떤 행위든 다 소설의 질료라네." 

"어떤 것이든 다 될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런 셈이지."

"근친상간도요?"

"그리스 비극을 뒤져보면 근친상간을 둘러싼 위대한 드라마가 무궁무진하다네. 불과 분노와 복수로 일관된 것들이 많지."

"전 그리스 비극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렇담 이번 여름이 자네가 못 보고 그냥 넘어간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군.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자네가 문학의 내적 의미를 파악하려 할 때 분명 장애가 될걸세."

그런 다음 소설 주제에 관한 두 번째 주의 사항을 그분은 아주 단호한 어조로 피력하셨다. "추상적 개념에 관한 소설은 단연코 좋은 소설이 못되네. 차라리 논문을 쓰는 게 나을 걸세. 소설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어야지 어떤 원형이나 전형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 그러나 만일 어떤 추상적인 워칙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그리고 것이라면 그것은 강한 인상을 주는 소설이 될 수 있다네."  333-334


사람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지혜를 터득한다. 하나는 이용 가능한 모든 증거를 끈기 있게 축적하고 분석함으로써 지혜를 얻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한 순간에 모든 대륙과 전 역사에 빛을 밝혀 주는 에피파니(epiphany, 일상의 경험 속에서 어느 한 순간 맞이하는 직관적 통찰이나 깨달음을 일컫는다. 흔히 현현(顯現 나타날현 나타날현)이라고 말한다.)를 통해 지혜를 얻는 것이다.  335


"우리가 하는 일이란 고작해야 문학이라는 커다란 관목을 흔들어 뭐 떨어지는 것이 없나 땅바닥을 뒤지는 꼴이라네. 문학의 근간인 실제의 삶은 모두 우리 주위에 드러나 잇는데 말일세."  341


나는 엄숙한 어조로 서두를 꺼냈다. " ... 아무튼 제 생각엔 무엇이 서사인가를 이해하고 또 책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네 명의 미국 작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연대순으로 이름을 들면 허먼 멜빌, 스티븐 크레인, 이디스 워튼, 윌리엄 포크너입니다."  343


" ... 어쨌건 그들에 반대되는, 상당한 대중적 인기를 얻었지만 미학적인 관저에서는 거의 형편없는 작품을 내놓은 네 작가를 언급할 차례입니다. 다시 연대순으로 말해 보면, 싱클레어 루이스, 펄 벅,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입니다..."  344


(편집자 마멜과의 대화, 문학 비평집 출간에 대한 내용) " .. 자기 현시적인 일화는 최소로 하시고 중요한 예는 많이 집어넣으세요."

"어떤 걸 말씀하십니까?"

"중요한 요점을 기술하시고, 그다음엔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본보기를 짧게 두 가지 정도 인용하시면 될 거예요."  355





독자 제인 갈런드


근본적인 것들을 고집하는 그들의 자세  550


루카스 요더가 아랫입술을 떨며 창백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요더 씨!" 내가 불렀다. "어디 아프세요?"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지금 펜스터마허 사람들은 잔인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고는 참던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의 비탄에 잠긴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다가 문득 그가 펜스터마허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는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살인자의 부모가 있는 그 놎아에 가 있었다. 그들의 감정이 그의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작품을 쓰는 비결인 모양이다. 그가 어떤 사람에 대해 글을 쓸 때면 그는 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등장인물의 입장 소에서 살고, 그들과 똑같은 고통을 느끼며 그들의 정신적 혼란을 똑같이 겪었다. 이 즐거운 크리스마스에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펜스터마허를 잊고 있었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그를 소설가이게끔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599







사람들이 사는 세상 - 소설의 세계


1. 왜 읽는가?


미국의 저명한 비평가인 헤럴드 블룸은 <어떻게 읽고 왜 읽을 것인가>의 프롤로그인 <왜 읽는가?>라는 글에서 '왜 글을 읽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뒤, 그 이유는 깊이 있는 지속적인 독서만이 '자율적인 자아'. 즉 주체적 자아를 온전하게 확립해 주고, 또 그 자아의 주체성을 증진시키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율적인 자아' 형성을 위해 어떤 글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블룸은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독서에는 논쟁적인 글보다는 상상력이 돋보이는 글이 더 적합하다는 전제 아래, 정치, 철학, 종교 등 이데올로기를 담은 글보다는 소설, 극, 단편, 시 등의 문학 작품이 그가 말하는 독서에 어울리는 대상이라고 말한다. 물론 블룸은 정치 경제학에 관한 글이나 철학에 관한 글이 그 글을 읽는 사람의 생에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율성>을 과거의 사고방식에서 해방되는 것, 구체적으로는 개인의 삶과 운명에 관해 우리가 인습적으로 생각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았던 블룸은, 어느 특정의 개인에 관한 우리의 판단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문학이 우리를 우리 자신의 과거에서 해방시키는 가장 중요한 실천의 도구가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브룸은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 박사의 말을 빌려 독서의 주요 목적이 [우리 정신에서 상투적인 것을 씻어 내는것]에 있다고 한다. 여기서 [상투적인 것]으로 옮긴 [cant]는 실상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일상적으로 던지는 말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의미를 확대하면 사람들이 으레 당연히 여기는 것, 인습적으로 그렇게 여겨 왔던 것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정신 속에서 그런 상투적인 것을 지워 낸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을 다시 새롭게 다시 보는 힘을 키우고, 기성(旣成 이미기 이룰성)의 것을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를 아무 생각 없이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에 만족한다면 우리는 그 사상이나 생각의 노예에 불과하며, 기존의 사고의 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편협한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우리 상상의 노력이 그 신선함을 상실하거나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의심의 능력을 상실할 때 우리느 ㄴ이미 [상투적인 것]의 그무렝 갖힌 꼴이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그런 [상투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과거에서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 해방은 우리 각자가 처해 있는 정치, 경제, 종교, 혹은 철학적 현상에 변화를 시도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현재의 제도를 정당화시키는 기성의 사상이나 생각과 단절을 도모하는 노력의 출발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노력의 바탕에 개인의 변화가 없으면 해방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실로 개인적인 차우너을 넘어선 공적인, 사회적인 차원의 변화는 그 구성원 각자의 질적인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며, 아무리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한다 해도 개인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굳이 그 예를 들지 않아도 우리가 익히 경험을 통해 확인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질적인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우리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혹은 상상의 경험을 통해 가능하다. 그런데 시간적인 제약과 공간적인 제약으로 인해, 우리가 몸으로 체득하는 직접적인 경험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 삶에서 더욱 중요한 것이 바로 상상의 경험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상상의 경험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독서이다. 우리는 독서를 통해 우리의 [과거]로 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그 해방을 통해 더 많은 감수성을 지니고 더 많은 통찰과 지혜를 지닌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은 바로 [반성(反省 되돌릴반 살필성)]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결과이며, 그 과정을 통해 우리가 더욱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곧 [자기 확대]로 나아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독서는 사회적인 차원의 행위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는 개인적인 차원의 행위에 속하는 것으로, 블룸은 이런 독서의 행위를 [고독한 실천(solitary praxis)]이라 부른다. 말하자면 독서는 자기반성과 자기 확대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그 공간 속에서 우리는 본연(本然 근본본 그러할연)의 [나]에 가까이 다가가는 질적인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블룸이 말하는 [자율성]의 획득이며, 이는 비록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실천의 과정이지만 실은 그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변화으 단초가 되는 과정인 셈이다.  619-622



2. 세상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사는 땅의 이야기


앞에서 <왜 읽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독서어ㅔ 관한 이야기를 한 것은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소설이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독서를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자율성이고 진정한 자기 자신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마 존재의 진정성과 관련한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이 자율성과 진정성을 달성하는 길은 [진리는 무엇인가?]와 같은 철학적, 형이상학적 물음이기보다 오히려 더없이 세속적일 수 있는, 더없이 평범한 것일 수 있는, [세상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다. 진부한 물음일 수도 있는 이 후자의 물음을 통해 우리는 아집과 편견과 과거에서 해방되어, 세상살이가 혼자가 아닌 관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 관계를 실천할 수 있는 보다 넓은 지평의 삶 속에 진입할 수 있는 열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622-623


제임스 미치너는 바로 [이 세상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땅]에 가장 정직하게 다가간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세상은 나의 집>이라는 그의 자서전 제목이 보여주듯, 미치너는 실제로 세계의 많은 곳을 여행하며 곳곳의 색다른 지리적 공간과 그 공간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직접 관찰한 작가다.  623


미치너가 세상의 낯선 지형과 낯선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서로 다른 기후와 민족성과 종교와 피부색을 지닌 사람들이라도 모두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사람들이며, 마치 우리의 이웃처럼 우리와 어울려 살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의 지경(地境 땅지 지경경)과는 다른 곳의 먼 역사를 이해하고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자 했던 미치너가 스스로를 [정신적으로 혼혈인]이라고 부른 것도 그러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거꾸로, 자신이 유대인일 수도 있고 러시아인일 수도 있고 흑인일 수도 있다는 정신의 개방성으로 인해, 사람에 대한 믿음과 그 사람들의 삶에 대한 솔직한 이해로 나아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땅(land)이 존재의 근본적인 한 부분]이라고 언급한 미치너는 그 땅 위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차별 없는 존재의 평등성을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삶의 질의 차이, 혹은 문명의 차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사는 지형(地形 땅지 형상형)의 다름에 따라 혹은 좋든 나쁘든 문명의 개입에 따라 불가피하게 형성된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런 차이는 어느 지형 밖에서 관찰한 상대적인 차이일 뿐이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 좋고 나쁜의 차이는 아니다. 다만 그런 차이에 따라 생겨난 부산물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명일 테고, 그 문명의 높고 낮음의 구분은 역사적 시간의 지연(遲延 더딜지 끌연)에 따른 차이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땅과 사람들의 삶의 차이 혹은 다름에 대한 관찰이 차별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해로 나아가는 미치너의 태도가 아닌가 싶다.  624-625


[다른 사람들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훌륭한 이야기꾼이 될 수 없다]고 한 미치너의 말에서 우리는 그가 낯선 땅과 낯선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눈을 뜨고 어떻게 귀를 기울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스스로가 한 사람의 지리학자, 한 사람의 나그네가 되어 자신이 지나온 길의 경허모가 그 속에서 터득한 지식을 재구성하여 독자들과 나누고자 했던 작가인 미치너는 어떤 면에서는 사물이나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과 이해와 관심이 아주 단순하면서 소박한 이야기꾼이다. 그는 뛰어난 유머가도 아니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읶르어 내고 환상적인 구도 속에 이야기를 전재시키는 뛰어난 문장가도 아니다. 그렇다고 인물의 심리 분석에 뛰어난 작가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다단한 삶의 구도는 취급하지 않는다. 자신이 다룰 수 없는 부분이 많다고 인정하는 그는 다만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에 지나치지도 모라자지도 않은 소박한 관심을 지닌 작가다. 그런 관심으로 한 편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할 수 있으며. 한 인물을 솔직하게 그릴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시킬까에 과도한 신경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 이야기가 그 스스로 풀려나가기를 원하는 작가다. 그는 사람들에게 교훈적인 이야기나 설교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누구를 계몽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그러면서 자신의 삶의 경계를 넓히는 그런 보통의 사람이었다.  625-626



3. 왜 이야기가 필요한가?


굳이 그는 자신의 작풉에 대한 평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반박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는 정직한 작가로 기억되길 원했을 뿐이다 그런에도 미치너오 같은 작가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우리의 과거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이해의 광장으로 나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방에서 벗어나 광장으로 나가야 비로소 본연의 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또한 그래야 나의 이야기가 의미 있는 울림으로 상대방에게 퍼져 나가는 것이다.  627


이 소설에서 미치너는 자신을 모델로 한 루카스 요더의 입을 통해 작가가 독자들에게 전해 주는 것은 재미보다는 이야기의 호소력이라고 하며, 자신의 토지와 물리적 환겨엥 초점을 맞춘 자신의 이야기가 하나의 구성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인물과 플롯의 전개에 더 많은 관심이 있는 편집자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 미치너는 전통적인 이야기꾼인 자각와는 다른 예술관을 지닌 비평가의 시선을 통해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으며, 또한 문학이란 대중의 정서에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독자를 통해서는 비평가와는 다른 시각을 지닌 대중들이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런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는 이처럼 생각의 차이, 판단의 차이를 그대로 노출시킴으로써 그의 <소설>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또 다른 층위의 생각의 단계로 올라서게 해주는 것이다.  628


움베르토 에코는 한 신문에 기고한 글을 통해, 오늘날처럼 물질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근원적인 진정성을 회복하려면 [우리 삶의 의미를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확인시킬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야기가 필요한것이 아닐까 싶다. 혼자만의 독백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재구성하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보다 근본적인 자기 존재에 가까이 다가가는 방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리처드 로티가 말했던 [궁극의 어휘]가 필요하다.


모든 인간은 그들의 행동과 믿음과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름의 언어들을 지니고 다닌다. 그 언어를 통해 우리는 친구를 찬양하고 적을 경멸하기도 하며, 우리의 원대한 구상을 말하기도 하고 우리 자신의 가슴 아픈 자기회의를 드러내기도 하고 우리 자신의 가슴 아픈 자기회의를 드러내기도 하고 드높은 희망을 펼치기도 한다. 그 언어들이 바로 우리가 때로는 앞을 내다보며, 때로는 뒤를 돌아다보며 우리 삶의 이야기를 말하는 바로 그 언어인 것이다.  628-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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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외로운 존재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외롭고 혼자 있어도 외롭다. 그래서 사람들은 게임, 무협지, 만화, 드라마, 페이스북에 빠지거나 심지어 마약을 찾기도 하는 것 같다. '철학'은 외로운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유수현)  6


새로운 해석은 언제나 처음에는 이단이 된다.  9


고전을 읽는 것은 늘 어렵다. 기존의 시각을 도그마처럼 따르면, 오히려 쉬워진다. 고전은 어렵게 읽어야 한다. 또 인문 고전 독법에는 따로 왕도가 없다. 늘 새로운 해석을 찾아 읽는 게 최선이다.  10


보원이덕(報怨以德) - 원한을 갚되 은혜로 하라.

<노자> 63장 입니다. 거기보면 "위무위(爲無爲)" 즉 무위를 행하고, "사무사(事無事)", 즉 일삼음이 없음을 일삼아라. 그리고 "보원이덕(報怨以德)", 원한을 갚되 은혜로 하라. 이렇게 나옵니다.  24


공자가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은혜를 갚겠는가?" 먼저 당신이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는 무엇으로 어떻게 갚겠는가? 당연히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는 은혜를 갚는 것이 맞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원수를 은혜로 갚는다면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는 무엇으로 갚느냐는 거죠. 공자의 답은 이렇습니다. "곧음"으로 원한을 갚고 은혜로 은혜를 갚아야 한다." 아주 단순한 말이지만, 이런 방식이라면 제가 충분히 따라서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아요.  25


<한시외전(韓詩外傳)>이란 책에는 공자의 제자 수제자 세 사람이 등장. "당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이 있고 당신에게 잘 대해 주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당신들은 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대하겠느냐?" 하니까.

자로(子路, 기원전 543~480년경-말보다주먹, 반란에 연루되 갓끈을 다시묶고 앉은채로 죽어감)는 "남이 나를 잘 대해 주면 나도 잘 대해 줄 것이고, 남이 나를 잘 대해 주지 않으면 나도 잘 대해 주지 않을 것이다."  26


자공(子貢, 기원전 520~456년경-현실수완이 뛰어나 공자학단의 재정 문제 실질해결자)은 "남이 나를 잘 대해 주면 나도 잘 대해 줄 것이고, 남이 나를 잘 대해 주지 앟으면 나는 그와 함께 상황에 따라서 잘해 줄 만하면 잘해 주고 잘해 줄 만하지 못하면 나도 잘해 주지 못한다."

안회(顔回, 기원전 521년경~?)는 "남이 나를 잘 대해 주면 나도 잘 대해 줄 것이고, 남이 나를 잘 대해 주지 않아도 나는 잘 대해 줄 것이다."

이 말은 일단 해석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 말은,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살겠느냐를 묻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논어> 의 어떤 구절이 나온다로 할 때에, 그 말의 객관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의미를 당신은 어떤 삶의 원리로 받아들여서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겠는가를 포함한 물음들입니다.  27


공자는 이 세 사람의 대답을 듣고서 어떻게 말했을까요?

"자로의 주장은 야만인들의 주장이다. 자공의 말은 친구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말이고, 안회의 말은 가족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말이다."

이 가운데 객관적인 해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삶을 바라보는 동일한 두 눈이 분명이 힜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그 일들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눈의 깊이가 다를 뿐이죠. 


보원이덕, 원한을 갚되 은혜로 하라. 공자의 말씀은, 측별히 그렇게 하는 거는 불가능하다. 쉽지 않으니, 직(直곧을직), 다시말해 내 마음이 원하는 바대로 가라. 그런 뜻입니다. 즉 정직하다는 말은 '자기의 마음이 명령'하는 대로 , '자기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서 행하라는 뜻입니다.  29


'보원이덕' 이말에 대해서 하상공은 이렇게 처방을 제시합니다. "재앙이 생겨나기 전에 미리 싹수부터 끊어 놓는다." 이 말은 조금 더 쉽게 풀면 이런 뜻입니다. "평소, 천하에 두루 행할 만한 도를 닦고 백성들을 위해서 선을 행하라. 그러나 너에게 반역하는자, 황제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일을 행하였거나 행하려는 자. 그런 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천하의 안녕을 위해서 재앙이 생겨나기 전에 미리 끊어버려라."  34-35


유학자 왕필은 보원이덕에 관해 "작은 원한의 경우에는 보복하고 말 것이 없다. 그러나 큰 원한의 경우에는 천하 모든 사람들이 죽이고 싶어하므로 모두 똑같이 생각하는바, 그것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덕이다."

작은 원한이라고 하는 것은 '사적'인 원한이라고 할 수 있어요.  36


작은 원한(小怨)의 경우 사적인 것이므로, 공적인 일을 처리할 때 개입시킬 여지가 없는 거다. 그런 거 하지 말라는 겁니다.  37


왕필의 해석은... 철저하게 유가의 정신이지 '노자'의 사상에서 나올 수 있는 논리가 아닙니다.  38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고전 속에 원하는 진리가 있어서 그것을 우리가 해석하거나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가치, 그 가치를 고전에 새겨 넣는 작업, 그것이 바로 고전을 읽는 방법일 것 같습니다.  46



루소의 자유개념이 칸트의 자유 개념으로 발전하고 더 나아가서 헤겔과 마르크스의 자유 개념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52


니체는 "우리의 살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술작품을 만드는 태도로 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죠. 이게 바로 푸코가 말한 실존의 미학이고, 이게 루소가 몸소 보여준 자유의 정신을 이해하기 위한 첫 출발점입니다.  63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유와 반대가 되는 단어, 즉 '지배'와의 대조부터 출발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델1은 '지배를 간섭으로 해석할 것인가?'에 관해서입니다. 이때, 자유는 '선택'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지상)주의 모델입니다. 모델2는 '지배를 강제로 해석할 것인가?'입니다. 이때, 자유는 '자율'이 되죠. 자유는 도덕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을 하게 되어 자율적인 인간드링 서로의 인권을 존중하는 모델입니다. 모델3은 '지배를 예속으로 해석할 것인가?'입니다. 이때, 자유는 '해방'이 될 것입니다. 이 모델은 자유가 단순히 개인적인 추상적 차원이 아니라 좋은 사회를 통해 실현될 가치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65


자유주의라는 단어. '리버테어리언(libertarian)'같은 단어들은 '진보적'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는 단어였어요. 지금은 자유지상주의자로 알고 있는데요. 원래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최초로 썼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자유라는 단어의 원초적이 ㄴ의미는 바로 무정부주의죠. 모든 지배를 거부하는 것이비니다. 지배 없는 삶, 이게 무정부주의자들의 꿈입니다. 자유주의의 두 가지 의미도 이로부터 출발합니다.

첫 번째, 조지 부시 미국 전 대통령과 MB를 대표로 하는 주유주의가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그 주제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애덤스므스류 혹은 신자유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개인을 '이기적'이라고 합니다.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는 심지어 유전자까지도 이기적(selfish gene)이라고 했지요. 개인의 '이기심'이 사회를 구성해 나가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들은 협력이나 이타심마저도 어떻게 이기심으로 환원해서 설명할지를 많이 고민합니다. 또, 게임이론을 가지고 정교하게 수리적으로 분석해서 겉보기에는 이타적이고 협조적인 행위들이 어떻게 이기심으로부터 출발하는지를 보여주려고 무지 애를 씁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시장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로 등장한 겁니다. 이게 극단적인 보수적 자유주의죠. 

그런데, 자유주의를 도덕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루소를 이어받은 칸트와 롤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개인을 이기적 존재나 욕망의 존재가 아니라, 선의지가 있는 '도덕적 개인'으로 봅니다. 이 점이 대단히 중요한데, 도덕적 개인이라고 해서 남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도 인간이기 때문에 나의 권리와 마찬가지로 그의 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그런 태도입니다. 이게 자유주의의 도덕화이고, 이것이 오늘날 복지자유주의 곧 복지국가의 모델이 됩니다.

자. '이기적 개인'을 근대 용어로 말하면, 바로 부르주아지입니다. 부르주아지는 오늘날 (사적인) 시민계급이라고 얘기하는데 현대의 자본가로 발전하게 됩니다. 여기서 잘 구분하셔야 할 것은, 부르주아지를 의미하는 '사적인 시민'과 루소가 말하는 '공적인 시민' 입니다.  65-67



'인륜'은 독일어에서는 원래 'Sitte'에서 유래하는데, 관습이나 습관을 뜻합니다.

법을 안 지키면 처벌을 받지만, 관습을 안 지킨다고 해서 감옥에 가거나 하진 않아요. 그냥 비난을 받을 뿐이죠. 어쨌든 공동체는 각기 그 나름대로 관습이 있고, 그 속에서 사는 나는 나도 모르게 그 관습이 몸에 배어서 따라가게 되지요.  122


상호의존... 내가 상대방의 인질이 되면, 자기중심적, 이기적 태도를 바꾸는 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북한도 남한의 인질이 되어야 하지요. '상호 인질'이 되는 것이지요.  133


우리말로 '성(性)'이라고 번역되는 말은 섹스(sex), 젠더(gender), 섹슈얼리티(sexuality), 이렇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섹스와 젠더, 많이 들어보셨죠? 섹스는 생물학적인 성입니다. 젠더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길러진 성이죠. 그래서, '여성답다' , '여성스럽다' , '여자가 재수 없게...' 할 때의 성이 젠더이고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저 여자(sex)는 남자(gender)같애"나 "저 남자는 여자 같애."라고 말할 때, 앞의 여자(혹은 남자)는 섹스, 즉 생물학적 성이죠. 젠더는, '여자 같아' , '여성성' , 

여자로 길러짐' , '여자로 길러짐', 이런 얘기고요. 역시 "저 여자는 남자 같애"라고 할 때에, 뒤에 나오는 남자의 의미는 젠더로 사용된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섹스나 젠더 이외에 섹슈얼리티(성을 사회적으로 논의하기 위해서 대두. 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의 필요성. 성적 욕망이나 정서, 판타지, 성적 매력, 성 정체성 등을 의미하고, 신체적 영역을 넘어서 정서, 심리, 무의식 차우너의 심층적 의미구조들로 성의 범위를 확대시킨다.)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한국어로 성(性), 성성(性性)이라고 번역하는 이 말에 담겨 있는 의미는 굉장히 커요. 우리가 성관계라고 하는 것을 섹스가 아니라 섹슈얼리티라는 새로운 용어로 부르기로 한 이유가 있어요. 해부학적인 성, 생물학적인 성을 일컫는 개념인 섹스를 성관계의 의미로 사용하게 되면 성기 삽입이라는 점에만 초점을 두어서 이야기하게 되죠. 그래서 성행위, 성관계 등을 사회적인 문제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적인 문제로만 남겨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섹슈얼리티라는 개념을 창출하게 된 데에는 성적 욕망이나, 성적인 정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환상, 성적 매력, 성 정체성, 의미 등등, 이런 것들을 모두 포괄하는 굉장히 큰 의미로 사용해야 된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성기 삽입 차원의 성관계에만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고, 어떤 친밀한 행위들, 어떤 친밀한 정서까지도 우리는 포괄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차원이죠.  143-144


차별이 '다르기 때문에...'라면, 차이는 '다르지만...'을 전제한다.  150


평등, 공평함이란 단지 동일한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특수성, 차이, 경험, 맥락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화장실과 남자화장실이 ㄸ고같이 세 개여서, 차별이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개별적인 특성, 경험, 다양성 등을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차이가 아닌 차별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151


음양의 특성... 음양에 대한 초기의 생각은 주나라 때 생겨났는데요. 이 때에는 햇볕의 있고 없음에 따른 단순한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이었습니다.

춘추 시대의 음양 개념의 특징은 음양이 독립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춘추 시대에는 음(陰), 양(陽), 풍(風), 우(雨), 회(晦), 명(明) 등의 여섯 가지 기 개념으로 셜명되었습니다. 풍은 바람이고요, 우는 비, 회는 어두움, 명은 밝음입니다. 하지만 이 여섯개의 기운 중에 풍, 우, 회, 명은 음양의 개념으로 포섭이 되었습니다. 풍은 바람이니까 건조함이죠? 건조함은 어디에 배속될까요? 양이겠지요. 비는 음에, 어두움은 음에, 밝음은 양에 배속이 되겠지요?

이렇게 되니 음양 두 기만으로도 다른 네 개의 기를 설명할 수 있으므로 음양을 제외한 네 개의 기는 점차 사라지고 음양 두 기만 남게 되었습니다.  154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이 과연 명쾌하게 설명 가능할까요? 오히려 애매함, 모호함을 통해서 더 잘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요?  165


<계몽의 변증법>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왜 인간은 진정 인간적 상태로 진입하지 못하고 새로운 야만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177

이에 대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계몽의 방향을 잘못 설정했다는 것입니다. 걔몽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에 얘기하겠지만, 동일성 사유에 기초한 계몽을 부정하는 것이고, 자기 유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자기의 체계에 꿰맞추는 자기 유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지요. 타자를 부정하는 자기 유지는 역설적으로 자기 유지에 실패할 운명에 처한다는 거죠. 체계의 틀을 맞추느라 놓쳐버린 자신의 본능, 감성, 개성, 인간성 등을 잃게 된다는 거예요.  179



시푸 : 사부님, 아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대사부 : 시푸, 그냥 소식이 있을 뿐일세, 좋고 나쁜 것이란 없어.

....

대사부 : 이 나무를 보게, 내가 원하지 않아도 복숭아씨는 복숭아 나무가 돼.

시푸 : 하지만 복숭아로는 타이렁을 물리칠 수는 없어요.

대사부 : 가능할지도 몰라, 자네가 포를 이끌어주고 믿어만 준다면.

시푸 : 도와주세요, 사부님.

대사부 : 아니야, 그냥 믿는 수밖에. 약속해줘, 시푸. 그 아이를 믿겠다고...     <쿵푸팬더> 중에서  249


(시푸가 용의 전사로 포를 받아들이고 훈련시키기 시작하면서)

시푸 : 쿵푸는 수련할 때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필요한데 너는 꽝이야. 그런데 그건 내 잘못이었어. 너를 5인방과 같은 방법으로 가르치려고 했으니까.                        <쿵푸팬더>중에서  258


적어도 자신의 옳음이 다른 사람에게도 옳음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했죠.  259


수영을 시작할 때 물에 뜨기 어려운 것처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거나 관계를 맺기 어려운 것은 그 이전의 익숙함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몸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인 것이죠. 여기서 필요한 것은 과거의 경험이나 지식이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작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266


(용의 전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의기소침해 있는 포에게)

대사부 : 국수냐 쿵푸냐? 너는 과거와 미래에 대해 너무 집착하고 있구나. 이런 말이 있어. 어제는 역사고 내일은 아무도 모르지, 그러나 오늘은 선물이지. 그 선물을 소중하게 다루렴.    <쿵푸팬더> 중에서  267


나의 경험과 생각의 한계를 인식하고, 나를 둘러싼 것들을 하나씩 비워나가는 과정을 통하여 세상 속의 내가 아닌 진정한 나에 이르게 되고, 이를 통해 나는 세상의 길, 세상의 결을 따라 '노닐 듯'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나도 타인에게, 타인도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으며,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소요유(逍遙遊 거닐소 멀요 놀유)' 입니다.  270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의 생각과 가치를 비판하고 그것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자유롭고자 하는 장자의 철학.  271


Kritik'(비판)과 'Krisis'(위기)의 어원이 똑같더군요. 'Krise'에서 나온 말이랍니다.

철학과 철학함은 차이가 있습니다. 사상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철학이며 그 사상의 힘을 현실의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사고하는 것은 철학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77


마키아벨리즘이 일반적으로 이해되듯이 기만과 위선을 의미한다면, 마키아벨리는 마키아벨리주의자기 아니었습니다.

"책의 운명은 그 독자들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웃지 않고, 슬퍼하지도 저주하지도 않고, 오직 이해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오직 그를 '이해하기'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281


그는 '현실 정치학'을 만들어낸 최초의 사람이라고 평가받는데요.

마키아벨리는 현실주의 정치사상을 주장하지요. 즉 <군주론>은 정치적 현실에 대한 기술의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저작은 사실판단이지 도적, 윤리가 개입하는 가치판단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봅니다.  286


당시 이탈리아는 다섯 개 국가로 분열돼 있었습니다. 마키아벨리가 고민했던 것, 그가 꿈꾸었던 것은 국가의 통일이었죠. 그래서 책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이 군대예요. 마키아벨리가 제일 싫어하는 군대는 외국 군대입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인민의 군대를 주장합니다.  287


마키아벨리는 소위 중세적 위계질서를 깨려고 합니다.  288



'던바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회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원 수는 150여명이며, 강도 높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핵심 친구 관계는 12명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죠.  319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자신의 생명이 말하는 욕망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자기 밖의 것들에 눈을 팔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왜 내 삶은 공허하지' , '왜 나는 열심히 사는데 안 되지'라고 자꾸만 자신을 닦달합니다.  322


'네가 트루먼을 아느냐? 뭐가 옳은지 안다고 생각하나? 나는 트루먼에게 특별한 삶(normal life)을 살 기회를 줬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역겨운(sick) 곳이야. 시헤이븐(seahaven)은 천국이지. 트루먼은 언제나 떠날 수 있지만 그러려고 하지 않았어. 마음만 먹으면 진실을 알 수 있는데, 시도하지도 않았지. 자네가 괴로운 건 트루먼이 그런 세상에 익숙하기 때문이야.'  <트루먼 쇼> 중에서  363


진실을 향해 나간다는 것은 대단히 큰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366


복지제도가 잘 되어 있는 나라는 세금이 높다고 하지요. 수입의 50% 이상을 세금으로 낸다고 하잖아요. '네가 번 돈은 다 네 것이 아니다. 반 이상 내놔'하면서 이런저런 정책을 펼치는데 쓰겠죠. 개인의 수입을 사회로 완원시키는 것인데, 이런 것도 사회주의입니다. 사실 내 것이 온전히 내 것인 것은 아닙니다. 내가 수입을 많이 올려 부자가 되었다고 했을 때, 그건 내가 누군가와 관계를 맺었지 때문이고,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혔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금을 많이 내게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데 있습니다. 그리고 걷은 세금이 투명하고도 적절하게 잘 쓰이고 있다고 믿으면 세금 저항이 크지 않겠죠. 믿지 못하겠으면 어떻게든 세금을 안 내려고 할 거고요.  386


저는 얼마 전에 한 학술 발표회에서 우리나라를 아류제국주의 국가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제국주의 국가의 대외 정책에 합류하면서 또 그들의 요구를 잘 들어주면서, 현실에 안주하는 피지배 계급을 양산하는 거죠.  388


강자는 현실에 안주하려 하고 약자는 현실을 변화시키려 합니다. 따라서 미래는 약자에게 있습니다. 위로가 되나요?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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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며

아침이 서서히 깨어나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꽃들이 노래하는 계절의 아름다움도 자칫 놓치고, 속도의 원리에만 몸을 맡기며 주마간산(走馬看山)의 경험에 만족하고 마는 현실이 되었어요. 보다 정밀해진 액정화면에 고정시킨 시선으로 세상의 정보를 모두 알았다고 착각하는 기술사회의 우화가 우리의 머리를 녹슬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9



<미운 오리 새끼> - 미운 오리 새끼의 자존감 회복을 위하여


"아, 이런 저기 가장 큰 알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구나. 도대체 얼마나 걸려야 되는 거지? 다시 알을 품는 건 너무 지쳐."

마침 그곳에 들른 어느 읅은 오리가 "잘 되가나?"하고 물었습니다.

"한 녀석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도대체가 알에서 깨어 나오질 않네요...."

오리보다 큰 존재는 오리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려야 알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세상에 대한 풍자죠.  20


"이거 아무래도 칠면조 알 같지 않아? 나도 예전에 한번 속은적 있지. 알에서 깨어 나온 뒤, 물속에 들어가질 못하더라고. 이거, 이거 칠면조 알 확실히 맞아. 이 알은 그냥 내버려 두고 다른 오리 새끼들 헤엄이나 가르치는 게 낫지. 쯧쯧."

출생 이전부터 미운 오리 새끼는 세상의 편견과 몰이해의 시선에 놓여 있는 겁니다. 살기도 더 오래 살고 경험도 많은 늙은 오리가 아직 깨지 않은 알을 칠면조 알이라고 단정한 것은 잘못이지만 오리 알이 아니라고 본 것은 결국 맞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이 늙은 오리가 알고 있는 큰 알은 칠면조 알 외에는 없군요. 자기가 알고 있는 경험만이 답입니다. 오리들의 세계에서 제 아무리 노련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넘지 못하고 있는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21-22


"야, 이게 뭐야? 형편없이 못생긴 녀석이잖아. 이거 참을 수가 없군."

"그만 둬! 이 애를 좀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어? 남들에게 어떤 짓도 하지 않았잖아?"

"무슨 소리야? 이 녀석은 오리치고는 너무 크잖아? 게다가 괴상하게 생겼고 말이야. 그러니까 혼 좀 나봐야 해."

"다른 오리 새끼들은 참 예쁘더군, 그런데 저 녀석은 영 틀렸어. 아예 다시 좀 제대로 만들어 낳아 보지 그래."

마침내 미운 오리 새끼에 대한 집단적인 따돌림과 괴롭힘이 시작된 것이지요. 생긴 모습이 다르다는 거시 하나로 내몰릴 지경이 된 것인데, 오리 공동체에서 가장 권위 있다는 늙은 오리마저도 미운 오리 새끼의 존재를 정면으로 부인합니다. 오리 세계에서 오리라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된 데에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핍박의 대상이 된 거예요.  26


"다른 오리 새끼들이 더 예뻐. 그냥 집에나 잘 가시게. 그리고 가다가 혹시 뱀장어 머리라도 보거든 내게로 가져와."

이 늙은 오리가 권위를 독점하고 있는 오리 세계는 앍은 생각에 사로잡힌 노욕에 빠진 자들이 지배하는 현실을 상징하는 거죠. 낡고 욕심 많은 자들이 기존질서를 움켜쥐고 있는 겁니다. 이런 곳이 스스로 변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듭니다.  27


애초에 백조로 태어난 것을 몰랐고, 세상 또한 알아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시골 농장에서만 지냈다면 미운 오리 새끼는 계속 그 좁은 세계에 갇혀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농장을 감연힌 탈출햇씁니다.

수많은 위기의 순간을 통과하면서 미운 오리 새끼는 어느새 훌륭한 백조로 성장해 있었던 겁니다. 

안데르센은 우리에게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고 내면의 백조를 떠올리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뭐라던 자신이 백조임을 발견하라고 응원합니다.  49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에는 몇 가지 짚고 넘어갔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오리와 백조에게 신분차이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자기와 다르게 생긴 오리를 못살게 구는 오리드의 고정관념이 가한 폭력과 배타의식을 분명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백조의 특권적 위상을 설정해놓은 거예요.

이는 백조로 태어나지 못한 존재에게 본질적 절망과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백조의 세계에서 환영받는 것 외에는 행복한 길이 없다는 식의 결론은 승자 위주의 논리이자, 자칫 오리들에게는 제 아무리 노력해도 영원한 패배가 있을 뿐이라는 판결을 내리는 셈이됩니다.  

둘째, 엄마 오리에 대해서. 미운 오리 새끼를 알에서 깨어나게 해주고 세상에 대한 첫 가르침을 주었으며, 나중에야 결국 손을 놓아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남들의 비난과 공격 앞에서 자신을 강력하게 엄호해준 엄마 오리 아니었나요?

자신이 백조라는 것을 깨우치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렸어야 할 존재는 이 엄마 오리가 아니었을까요?

셋째, 자신이 백조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그저 행복합니다. 그간의 고생을 떠올려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그가 백조가 되었다 해도 뱀장어 머리를 놓고 싸움 박질하는 닭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고루한 사고방식에 매여 자기와 조금 다르다 싶으면 배타적으로 대하는 집단들이 아직도 누군가를 괴롭히고 있으며, 사냥꾼의 총과 사냥개는 늘 겨냥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 대해 미운 오리 새끼는 자신이 겪었던 일들이 다른 누구에게도 더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하게 열망되면 좋았을 텐데, 자기가 백조인 것을 확인한 것으로 이런 문제들은 모두 다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넷째, 성장과정에는 의식의 발전이 어느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관심 갖는 것은 오직 하나, 자기가 못생긴 오리라는 낙인에서 벗어나는 일뿐입니다. 도망나올때 그는 깊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상태였습니다.

이 피해의식은 나중에도 지속되면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가운데 극복되기보다는 사실상 더욱 예민해 지고 말앗습니다.  50-54



<솔로몬의 지혜> - 솔로몬의 지혜가 생명의 정치로이어지기 위해


솔로몬은 "이 아이는 저 여자의 아이다."라고 하지 않았스니다. 누구의 아아인가가 초점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속하는 소유권인가의 차원에서 접근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저 여자의 아이다."라는 말 속에는 여자가 중심이 되고 아이는 그 소유물이 되는 관계가 만들어지기 때문이에요.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했던 걸 떠올리면 솔로몬은 이러한 논리를 깨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대신 솔로몬은 "저 여자가 그 아이의 어머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가 과연 누구인가각 초점입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엄마에 대한 아이의 소유권을 확정짓는 어법이 아니지요. '그 아이의 어머니'라는 말은, 그 아이에게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는 의미입니다.

여자들은 애초에 아이에 대한 소유권의 문제를 들고 나왔는데 솔로몬은 생명의 문제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 겁니다. 이는 소유와 생명이 댈힙하는 상황에서, 생명을 선택하는 이에게 소유가 저절로 따라붙게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 사건의 진상을 놓고 추리로 현장을 재구성해서 진상을 밝힘으로써 최종 판결을 내릴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설사 아이가 친엄마가 아닌 여인에게 돌아간다 하더라도 생명의 가치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여인이 엄마가 되는 쪽이 그렇지 않은 쪽보다 당연히 낫다는 것은 달리 거론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겠지요.

그래서 솔로몬이 그의 법정에 등장시킨 칼은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려내기 위한 수단으로 변모한 것입니다. 칼은 사용하기에 따라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니, 칼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칼의 주인이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인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 이 사건의 결정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솔로몬 체제의 전격적인 변화가 이 사건을 통해 예고된 것이었고, 이제 사람들은 창녀처럼 신분이 미천한 존재의 문제조차도 생명의 원리에 의해 해결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이 재판은 신분이 무엇이든 간에 상관없이 최고 권력자에게 하소연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해결의 기준도 '생명'임을 말해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 지금까지 칼로 피를 흘리며 권력을 잡앗던 솔로몬의 과거와 결별하는 이정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솔로몬 체제가 무엇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고 어떻게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인 겁니다.  107-109


거울은 단지 유리로 만든 거울만 있지 않습니다. 진짜 거울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있답니다. 자기만이 볼 수 있는 거울이죠. 그래서 그건 깨지지 않는 거울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바로 이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투명하게 보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생명의 가치를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지혜 말이지요.  117



<인어공주> - 인어공주여, 공기의 딸로 태어나라


인어공주가 두 다리를 억기 위해 마녀를 찾아갔다고 할 때 이 '다리'는 남자의 다리와는 달리 여성의 '바기나(vagina, 질)'에 대한 대체어입니다. 그런데 이런 단어를 여성이 이야기하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고 불순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여자로서 언급하기 부끄러운 단어이고 음탕한 것으로 오인되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인어공주>의 작가 안데르센은 그 단어를 마녀가 먼저 꺼내도록 합니다. 인어공주 자신이 바라는 것을 스스로 말하지 않도록 해준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두 다리가 합쳐 만들어지는 중심에 존재하는 '바기나'에 대해 적극성을 보이는 것은 자칫 '마녀'로 지탄받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헤어나올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뛰어드는 것이며 물뱀으로 상징되는 악과 두꺼비로 상징되는 저주를 온몸으로 받아 살아야 하는 고통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건 지옥인 거지요.

실제 역사에서 무수한 여성들이 그런 마녀사냥의 지옥 같은 화염에 희생당했습니다. 뛰어난 미모의 여성들은 그 미 자체가 악마의 유혹이라고 지목받아 불태우지기도 했어요. 남자들이 집중하는 욕망의 대상을 제거함으로써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잔혹한 일이었지요.  158-159


인어공주의 내면을 더듬어 내려가보면 당대의 종교관, 성에 대한 인식, 여성의 주체성 등 여러 가지 주제와 만나게 됩니다. 자신의 성적 생명력에 충실한 여성이 되려면 마치 마녀의 문을 통과하는 것 같은 공포와 고통을 이겨내는 용기가 요구되었던 것이지요.  160


이웃나라 공주에게...

'아, 당신이군요! 내가 해안가에서 죽은 시체처럼 누워 있을 때 나를 구해준 사람이!'

바닷가에 왕자가 쓰러져 있었을 때 한 무리의 소녀들이 나왔던 장소를 '교회인지 수도원인지 확실하지 않은 건물'이라고 표현했던 까닭을 이제 여기서 알게 됩니다. 교회인지 수도원인지 구체적으로 지목하지 않고 성전까지 추가해서 작가는 인어공주의 사랑을 빼앗아가는 여인과 그 여인을 길러낸 질서를 언급햇던 것이죠. 그것이 <인어공주> 이야기에 교회나 성전, 수도원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에로스적 생명력에 대한 교회 또는 종교의 억압 또는 엄격한 기준으로 말미암아 그걸 내놓고 표현할 수 있는 목소리를 잃은 존재들에 대한 작가의 공감과 동정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거지요.  171


'자신의 생명이 끝나는 마지막 날 밤을 생각했습니다. 지상의 인간 세계에 와 살면서 자신이 잃어버린 많은 것들이 하나씩 둘 씩 마음을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

성숙한 여인으로서 사랑하는 남자와 하나가 되어 기쁨을 느끼려 했던 그녀는 자신의 사랑에 목숨까지 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시도는 당대의 종교와 관념에서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사랑과 성의 욕망을 표현하는 목소리는 여자로서 내면 안 되는 것이었어요. 그건 침묵해야 할 것이었지요. 아니 침묵 당했습니다. 더군다가 나살ㅇ하는 상대는 눈동자로 말하는 진실의 목소리는 들을 줄 몰랐습니다. 이런 현실의 거대한 벽 앞에서 인어공주의 사랑은 좌절당합니다. 

왕자는 결국 이웃나라의 권력과 동맹을 맺었고 동일한 계급과 결혼했으며 바로 자기 눈앞에 있는 사랑의 진실보다는 잘못된 자기 기준을 고집하고 말았습니다.  174


이야기는 결혼에 대한 당시 기득권 질서의 위선과 기만을 폭로하고 있기도 합니다. 말로는 사랑한다면서 정작 결혼은 다른 기준을 세워 선택해버리는 현실에 대한 분노도 드러내고 있습니다.  175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고 여겼을 때, 그래서 울며 슬퍼하는 일에 몰두해버릴 때 우리가 바라는 변화의 시간은 더 연장된답니다. 그런 때일지라도 미소로 기쁨을 만들어내는 노력을 기울이면 '그날'은 속히 온다는군요. 300년에서 1년씩 빠지면서 말이지요.

진정한 사랑, 지고한 사랑,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은 결코 물거품이 되지 않습니다. 소리 없는 소리를 알아듣는 우리의 귀가 열리는 날, 사랑의 눈빛을 알아보는 우리 눈이 뜨이는 날, 대지에 차오른 공기 방울들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환히 보게 될 것입니다. 늘 행복한 기운과 선한 미소로 마음을 채워 가노라면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된다고...  187



<토끼전> - 간을 놓고 다녀야 하는 토끼들을 위하여


여기서 동해 용왕은 누굴 빗대고 있는 걸까요? 동쪽 나라는 조선이라는 걸 알기 어렵지 않고, 그에 더해 왕이 불치의 병석에 있는 것은 조선이 깊은 병에 걸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토끼전>은 용을 상징으로 삼는 당대 최고 권력자를 처음부터 조롱하는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지요. 다른 나라드에 비해 혼자 뒤쳐져 있는 것입니다.  193-194


'나 같은 미력한 자를 좋은 곳에 천거하니 감격이 이루 말할 데가 없으나 수궁에 들어가서 벼슬이 그리 쉽겠소이까?'

토끼는 아무것도 모르는 산간의 힘없는 민초가 아니라, 세상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 출세하지 못한 초라한 서생(書生)입니다.   208-209


''요놈 인제야 속았구나,' 하고 흔쾌히 대답하기를... 밝은 임금이 신하를 가리고 어진 신하가 임금을 가리나니 우리 대왕께서는 마음이 성실하시고 문무를 겸비하셨는데 한 가지 능력과 한 가지 재주가 있는 선비라도 벼슬직책을 맡기시고 닭처럼 울고 개처럼 도적질 하는 자라도 버리지 않으시니 나처럼 재주 없는 인물도 벼슬이 주부 일품 자링 외람되게 있거늘, 하물며 그대같이 고명한 자격이야 들어가면 수군절도사는 떼놓은 당상(堂上)이지 어디 가겠나? 토끼 가문에 중시조 되기는 염려가 조금도 없을 터라.'  209


토끼는 용궁의 안락과 권세에 취해 제 간을 내주는 줄도 모르고 사는 자드로가 구별되는 존재입니다. 의식의 각성이 있는 거지요. 그래서 그는 이 모든 욕망과 허세와 권력에 줄을 대고 있는 대열에서 과감히 이탈해 버립니다. 그렇게 되자 용궁은 자기 간이라도 내놓을 자를 모아들이는 일에 실패하고 맙니다.

토끼처럼 이탈하는 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래서 용궁의 실패가 쌓이면 쌓일수록 세상은 좋아집니다. 병든 권력이 스스로 그렇게 병들다가 무너지면 민초들의 삶은 희망을 얻게 될 테니까요. 토끼전은 그런 사대부 지식인들의 용궁 이탈을 촉구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가 토끼를 살린 것에는 바로 그 탈출의 길을 여는 시나리오가 깔려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215


용궁으로부터 토끼가 생환(生還)해온 것만으로 이 <토끼전>의 이야기가 막을 내리지 않는 점에 <토끼전>의 의미가 주목됩니다. 생환은 새로운 시작의 조건일 뿐이지요. 그가 돌아온 현실에서 다시 마주할 새로운 도전 역시 이겨내야, 살아 돌아온 것이 비로소 가치를 갖게 될 겁니다. 

험난한 세상입니다. 하지만 바위 틈 하나 정도만 있으면 됩니다. 포기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면 되는 거지요. 아무것도 아닌 듯해도 '조금씩' 밀고 나가면 그 바위틈은 어느새 난공불락(難攻不落)의 견고한 요새가 될 수 있습니다.  225



<이솝우화>

'우화'는 듣는 사람이 그 뜻을 바로 다 알게 하지 않습니다. 말하고 싶은 걸 슬쩍 돌려 표현하지요. 이야기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드는 겁니다. 대체 뭘 이야기하려는 거야? 하는 궁금증을 품게 해서 추리와 상상력을 자극하니 재미도 있고, 그러는 가운데 교묘하게 풍자하고 비판합니다. 

그런 까닭에 우화는 다양한 해석의 문을 열어놓지요.  229-230


우선 이솝에 대해 잠시 살펴보지요. 그는 기원전 620년경에 그리스의 어느 도시 국가, 또는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230


우리는 이솝이 노예로 팔려 다니느라 본의 아니게 많은 여행을 했고 그런 경험으로 인해 여러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풍부하게 접할 수 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솝에 대해서는 역사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헤로도토스가 기원전 425년경에 저술한 <역사>라는 책을 통해 거론할 정도였으니, 그는 이미 고대 문명 세계에서 유명세를 떨친 존재였다고 하겠습니다.  231


[개미와 베짱이]

'개미와 베짱이' 개인적인 성실과 게으름의 대조하는 주제 이전에 일하는 자들의 권리를 엄호하는 내용이 될 수 있습니다.  235


'일에 몰두하고 있던 개미들은 '원칙적으로는 이러면 안 되는데..'하면서 잠시 일손을 멈추고는 베짱이에게 물었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합니다. '중단 없는 노동'이지요. 이 중단 할 수 없는 노동이 강제화된 것이어도, 자발적인 의지가 작용한 것이어도 문제입니다. 휴식의 가치나 타인의 호소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회인 거지요.  236


이곳은 누군가의 빈궁한 사정에 대해 눈을 돌릴 겨를이 없는 사회입니다. 원칙이 이렇게 정해진 곳에서는 아무리 사정이 딱해도 인정이라는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일에만 미쳐서 사랑, 관심, 동정 같은 영혼의 힘을 잃어버리고 만 사회인 거예요.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걸 멈춘 곳입니다. 이런 데서 살면 기쁠 것 같은가요?

오늘날 자본주의가 치닫고 있는 현실을 이 우화와 대조해서 읽어나가면,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어느새 우리 모두 일개미로 변해 있지는 않은지요.  237


[양치기 소년과 늑대]

만일 이 이야기의 적용 범위를 넓혀 본다면 어떨까요? 양들을 돌보는 책임, 즉 그 국가나 사회 구성원의 안전을 책임진 권력자들이 하는 거짓말의 경우말이지요. 

그러면 이 이야기는 권력자가, 있지도 않은 늑대의 출몰과 같이 적의 공격이 임박했다면서 공포를 조장해 사람들의 충성심을 시험한다든지 자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비상체제를 가동시키려 들면 결국 실패한다는 경고로 읽힐 수 있습니다. 처음 몇 차례는 거짓말에 속을 수 있지만, 정작 위기가 왔을 때에는 더 큰 문제가 생기고 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요?  246


이 우화는 권력의 거짓말이 공동체 내부의 신뢰와 결속을 붕괴시키고 권력 자체에 대한 민심의 이반과 함께, 결과적으로 늑대에 의한 양들의 희생을 마을이 황폐해지는 것을 무섭게 보여줍니다.

공포를 꾸며 기존의 권력을 강화하고 유지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한 조롱과 경고입니다.  247


양치기 소년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네, 양을 잘 지키고 돌보는 것입니다. 

사태가 다급해서 어쩔 수 없다면 모르겠지만, 어른도 상대하기 힘든 늑대를 소년 혼자서 물리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248


늑대와 관련해서 이 소년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그렇지요. 양치기 소년은 일종의 경보장치입니다. 경보가 울리면 그 다음 행동은 마을사람들의 몫입니다. 그렇다면 소년이 두 번째 거짓말을 했을 때, 마을사람들은 무엇을 알게 되었을까요? 소년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 양들은 여전히 안전하다는 것, 자기들이 속았다는 것 등등이겠지요. 그런데 아까 소년의 역할은 경보장치라고 했으니, 이 점을 주목한다면 마을 사람들은 무엇을 알아차렸어야 했을까요? 당연히 경보장치가 고장났다는 사실이겠지요. 

말하자면 들판의 양들에게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그 상황을 인지할 수 있는 방법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이건 매우 심각한 사태입니다. 늑대가 정말 나타났을 때, 경보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 양들의 희생은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했나요? '뭐야, 저 녀석'하고 소년의 거짓말만 문제 삼고 다들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뭐가 해결되지요? '아무 일도 안 일어났잖아? 에잇. 저 녀석, 나쁜 놈이로구나, 어디 두 번 다시 우리가 속나봐라.' 이러면서 욕하고 끝낼 일이냐는 겁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경보장치가 작동하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것입니다. 소년의 거짓말이 두 번째 확인됐을 때, 무슨 일이 이루어져야 했나요? 마을의 공동 대책이 숙외되고, 구체적인 방법이 준비되어야 하는 거지요. 그래야만 양들을 지켜낼 수 있는 겁니다. '경보 장치 작동+마을의 대응=양들의 안전'. 이런 공식이 성립해야 하는 것이예요. 그러니 경보장치 작동에 문제가 생긴 걸 알았다면 그 다음엔 마응ㄹ 사람들의 판단과 대응이 보다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늑대가 나타났을 때 이를 퇴치하는 것은 소년이 아니라 결국 마을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화 속의 마을 사람들은 아무런 논의도 하지 않았습니다. 경보장치 작동 이상에 대한 대응책 마련이 전혀 없었어요. 왜 그랬을까요? 양들의 생명에 최우선의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관심이 있었다면, 모두 모여 '이거 어떻게 해야하지?' 하고 회의를 하고 결론을 내렸을 겁니다. 따라서 양들의 비극에는 양치기 소년의 책임이 분명하게 있지만, 마을 사람들도 책임에서 완전히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했던 겁니까?

적어도 마을사람들은 망가진 경보장치를 고치든지 아니면 다른 것으로 바꾸든지 또는 갈아치운다고 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니까,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제3의 대안을 마련해야지요. 이른바 '플랜B'라는 것 말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 대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해석에는 마을 공동체의 책임을 묻는 질문이 빠져 있습니다. 그저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만 비난하고 나면 '상황종료!'되는 식입니다. 늑대에게 죽임을 당하고 있던 양들은 피를 흘리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양치기 소년만 문제냐? 그럼 마을사람들아, 당신들은 뭐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뭔가 조처를 미리 취해놓았더라면, 양치기 소년의 입 하나에 양들의 운명이 좌우되진 않았을 거예요.

양치기 소년 한 명에게 늑대의 출현에 대한 정보가 독점되는 것도 매우 취약한 구조입니다. 한 사람 또는 소수에 의존하느 체제는 위기관리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공동체 전체의 감시, 견제, 또는 대안 마련이 없으면, 소수가 쥐고 있는 정보에 마을 전체가 휘둘릴 수 있는 겁니다. 소년이 늑대야 하고 외치니까 온 마을이 소동에 휩싸였잖아요. 정보의 정확도를 점검할 수 있는 장치가 없는 거예요. 따라서 마을 전체의 자발적이고도 주체적인 논의와 대응책 강구가 양들의 생명을 지키는 일에 근본입니다. 

소년의 거짓말이 드러나고 양들의 안전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게 된 바로 그 시점은 정치사회적으로 보자면, 이 마을의 참여 민주주의가 바로 서고, 마을 주민 각자가 모두 책임 있는 주체로 나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늑대에 의한 양들의 희생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생각과 의지가 있는 마을과 없는 마을에서의 양들의 운명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이 차이를 제대로만 파악하면, 반복되는 기만에 맞서 대책 마련에 나서는 마을 공동체가 시작될 수 있을 겁니다. '양치기 소년과 늑대'가 바로 이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우화로 읽힌다면, 마을사람들이 책임 있는 주인으로 나서는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 권력은 이 우화를 금서 목록에 집어넣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는 고장 난 경보장치를 고치는 것을 개혁이라 하고, 교체하거나 제3의 대안을 실현하는 것을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마을 주민들의 주체적인 각성이 그런 변화르 가져오지요. 늑대로부터 힘없는 양들을 지켜내는 근본은 그로써 이루어집니다. 

'목동의 거짓을 알았으니 이제 우리는 양들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바로 이 질문을 던질 때 이 우화는 우리에게 보다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을까요?  249-254


[사자 가죽을 쓴 당나귀]

'그렇게 하고 돌아다니니 사람들이나 동물들 모두가 다 사자인 줄로 알고 벌벌 떨었어요. 멀리서 나타나기만 해도 줄행랑을 치기에 바빴습니다.'  262


예상대로, 속은 당나귀인데도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두 다 사자의 겉가죽만 보고 공포에 질려 죽자 살자 도망했습니다. 살아있을 때 사자가 준 그 정신적 충격과 상처가 이리도 큰 것입니다. 살았느닞 죽었는지 분간을 못하는 거지요. 그 움직임이 사자인지 당나귀인지조차 구별하지 못하잖아요. 사자 가죽을 뒤집어 썼다고 당나귀가 사자 걸음을 하기란 쉽지 않았겠지요? 

그런데도 모두가 이 허위를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사자가 통치했던 시대의 공포와 사유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은 이리도 간단치 않습니다. 껍데기와 진실이 분명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사자가 죽어 그 가죽이 길에 떨어진 상황은 사자의 폭력이 모든 것을 결정했던 시대가 이제 사라졌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도 동물들과 사람들은 여전히 그 시대의 그림자 안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폭력의 트라우마입니다. 걸핏하면 사자 밥이었던 자가 사자 행세를 해도 그걸 알아보지 못하는 현실이 이 우화에서 가감 없이 드러나는 거지요. 

사자 가죽을 쓴 당나귀를 사자로 여기는 시대는 진실에 눈멀어 있습니다. 역사는 이미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는데오, 여전히 과거의 잔상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빈다. 당나귀의 정체를 대뜸 알아보고, '아니 요놈이!'하고 통찰해내는 시대야말로 제대로 된 시대입니다. 그렇지 않았기이ㅔ 당나귀는 위장술의 위력을 알게 됩니다.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263-264


'"이런 이런, 이거 나제 아닌가? 당나귀 친구, 방금 그 소리를 못들었다면 나도 깜빡 속아 자네를 무서워했겠는걸?" 

당나귀가 여우의 말에 흠칫 놀라서 아차!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당나귀는 여우를 보고 히죽 웃었습니다. 민망하고 겸연쩍었던 거지요. 눈치빠른 여우가 당나귀는 잽싸게 한눈을 찡긋 감아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손을 내밀어 여우와 당나귀는 손뼉을 짝! 소리나게 마주쳤습니다. 하이 파이브!

그러자 둘이는 이내 허리를 부여잡고 함께 껄껄 거렸습니다. 그 바람에 뒤집어쓰고 있던 사자가죽이 훌렁 뒤로 벗겨지면서 당나귀 머리가 불쑥, 하고 튀어나오지 않았겠어요.

지나가던 다람쥐가 깜짝 놀란 눈으로 이 광경을 쳐다보다가 하도 우스워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다음날 아침, 사자 가죽을 쓴 당나귀 등에는 여우와 다람쥐가 올라타고 숲 속으로 행차했습니다. 모든 동물들이 여우와 다람쥐에게도 머리를 조아리며 벌벌 떨었답니다.'  265-266



<헨젤과 그레텔> - 인생의 숲에서 실종당한 헬젤과 그레텔을 위해


그림 형제는 나무꾼의 아내를 아이들의 친엄마라고 했다가 판본을 바꾸면서 새엄마로 수정합니다.  275


이는 중세 유럽의 민중들이 겪었던 절박한 현실이었습니다. 친부모가 먹고 살 길이 없어 자기 아이들을 내다버리는 것은 그다지 예외적인 일은 아니었던 거지요.  276


'일어나, 이 뼛속까지 게으른 것들아, 이제 우리는 나무하러 숲에 갈 거다.'(꼭두새벽에..)

그 시간에 깨우면서 게으르다는 말도 안 되는 비난을 쏟아내는군요. 강자들의 논리입니다.  280


'오리야, 오리야, 작고 귀여운 오리야.

여기 그레텔과 헨젤이 있단다.

강을 건너갈 쪽배도 없고 다리도 없어.

여기 와서 우리를 태워주지 않을래?'

그러자 놀랍게도 오리가 반응을 보입니다. 그레텔은 '너 이리 와!;가 아니라, 오리의 주체적 판단과 선택방식을 존중합니다. 그레텔은 정신적 교감을 우선시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오리를 타고 강을 건너는 과정엣 두남매가 사뭇 차이를 보입니다.

'헨젤은 오리 등에 올라타고는 그레텔에게 자기 뒤에 타라고 손짓 합니다.'  

말하자면, '야, 타!' 한 거죠. 이에 그레텔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아냐, 오빠. 그렇게 하면 오리에게는 너무 힘겨워, 오리가 우리를 한 번에 한 사람씩 태워 강을 건너게 해.'

그토록 위급하고 험한 상황을 겪었는데도 그레텔의 마음은 거칠어지지 않았습니다. 상대의 처지를 먼저 생각하는 거죠. 상대를 도구화하거나 이용하는 데 익숙한 이에게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한 사려 깊음입니다.

그레텔은 위기를 이겨낸 지혜와 용기만이 아니라, 공감의 능력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공감'이란 상대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 마음을 함께 느끼고 나누는 정신적 광채라고 할 수 있어요.

오늘날 이 공감 능력은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자기 잘난 척하고 똑똑한 척 하는 세상에서 다른 존재의 마음과 만날 수 있는 사람만이 세사으이 희망이 되기 때문이지요. 만사에 남을 이용하려 들기만 하는 시대에 이런 공감 능력은 우리의 인간성을 회복시켜주는 바탕입니다.  299-300




<바보 이반> - 땀 흘려 일한 자, 손에 물집 잡힌 자의 우선적 권리


원래는 '바보 이반과 그의 두 형인 무사 세묜, 배불뚝이 타라스 그리고 벙어리 누이 말라니야, 그리고 늙은 악마와 세 새끼 마귀이야기'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요. 

첫 대목은 이반의 집안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옛날 어느 왕국에 부유한 농부가 살 고 있었는데 세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무사 세묜은 황제에 충성하러 전쟁에 나갔고 배불뚝이 타라스는 장사하러 도시로 상인을 찾아갔습니다. 바보 이반은 누이와 함께 집에 남아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 있었지요.'  310


세묜과 타라스는 각기 푸념합니다.

'"난 왕국을 얻어 잘 살고 있다. 다만 문제는 병사들을 먹일 돈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나는 돈은 산더미처럼 벌어요. 걱정거리 하나는 돈을 지킥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사실 이들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넘쳐나서 문제였던 것이지요. 그 넘쳐나는 것을 감당하려면 더 많은 군사와 더 많은 자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국가는 이런 과정을 거쳐 군사력과 재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킵니다. 약한 나라를 짓밟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논리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323


세묜이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 이렇게 하자. 넌 내게 병사들을 먹일 돈을 줘. 그러면 네게 왕국의 반과 네 돈을 지킬 병사들을 줄게."'

타라스가 동의했습니다. 그리하여 둘은 왕국과 돈, 병사를 나눠 갖고 둘 다 부유한 황제가 되었답니다. 

한낱 무사였던 세묜과 배불뚝이 장사꾼이엇던 타라스는 모두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권력과 재력이 동맹을 맺고 거대한 제국이 된 거죠. 인류의 역사에서는 바로 이러한 제국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약한 나라들을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런 제국의 폭력과 탐욕에 평생 반대했던 것입니다.  325-326


이반은 병에 걸려 아픈 사람을 신분이나 계급으로 분류하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이반은 아픈 현실 그 자체에 마음을 쏟았던 것.  328


'"폐하는 황제이십니다!" 라고 했더니 이반은 "그래서? 황제도 먹고 살아야 해."라고 딱 부러지게 말했더랍니다.'

이반의 나라는 자신이 먹을 것을 자신이 일해서 만들어내는 노동의 가치가 존귀하게 여겨지는 사회입니다.  331


노동하는 이의 권리가 우선으로 보장되는 나라인 거지요. 이 작품을 쓴 톨스토이는 성서에서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고백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고린도 전서 1:27-28)  341




<심청전> -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를 돌려보내노라


심청의 아버지, 봉사 심학규는 '본래는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집안 '잠영거족(簪纓巨族)' 출신으로...'

'잠영거족'이란 여자는 머리에 단정하게 비녀를 꽂고(비녀 잠 簪) 남자는 갓을 쓴(갓끈 영 纓) 그럴 듯한 양반집을 말합니다.  408


심청이가 한 말을 다시 주목해봅시다.

'"내 과연 물에 빠진 청이오. 청이 살았으니 어서 눈을 뜨시고 딸의 얼굴을 보옵소서."'

심청이는 자기가 다름 아닌 심봉사의 딸이라는 것만 알린 것이 아닙니다. 물에 빠졌던 자기가 살아 있으니 어서 눈을 뜨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그 얼굴을 보라 합니다. 오랜 세월 감겨 있던, 또는 감고 있던 눈을 똑ㄸ고히 뜨고 마주하라는 것입니다.

뭘 마주하라는 거지요? 자기 이득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현실, 그리고 그 현실에 얽혀 희생당했던 목숨, 그 목숨이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났음을 똑똑히 보라는 것 아닙니까?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세상은 결코 하늘의 뜻이 아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는 지금 아버지 앞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희생의 악순환이 멈춘 놀라운 현실에 눈뜨라는 겁니다.  439




에필로그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에 담겨 있을지 모를 고정관념을 교정해보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고정관념은 때로 폭력이 되어, 세상을 공평하고 따뜻하게 만드는 일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함석헌 선생님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나라가 산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언제나 옳다고 여겨집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갖지 못하면 그런 사회와 나라는 편견과 선입견 또는 세뇌된 지식으로 가득차, 자신의 진정한 발전을 위한 길을 모색하고 선택하는 일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하고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들 속에서도 새로운 생각의 단서를 발견하는 것은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사유의 촛대"에 불을 켜는 일입니다.  447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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