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태어날 당시 동네 사람들은 악마를 쫓는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용모는 대머리처럼 벗겨진 큰 이마에 크고 둥근 얼굴에는. 불거진 듯이 툭 튀어나온 두 눈과 사자코 같이
뭉퉁한 코가 두툼한 입술 위에 자리하고 있었고, 땅딸막한 키에 수박처럼 불룩한 올챙이배는 뒤뚱거리는 오리걸음을 그에게 걷게
하였다. 텁수룩하게 털이 나 있는 가슴과 팔 다리는 튼튼한 체격과 강인한 의지력을 소유하였다는 것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소년 시절에 부친의 직업을 이어받아 조각을 하기도 했으며, 당시 아테네 중류 시민의 자제들처럼 문학과 음악, 체육
등 일반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18세에서 24세까지는 당시의 청년들처럼 군대에 입대하여 복무했으며, 나중에도 여러
차례 종군하여 군 생활을 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인생의 참다운 지혜를 얻기 위해 알카라오스와 아나가고라스에게서 항상 배웠으며
진리 탐구열에 감화를 받았다. 또한 소피스트들에게도 배웠지만, 참다운 지혜를 얻을 수가 없어서 배움을 중단하고는 스스로 궁리하고
탐구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가 얼마나 사색과 탐구를 중시하며 진지한 사색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내용으로 알 수 있다. 종군 중이던 그는 어느
무더운 여름날, 아침부터 한 곳에 넋을 잃고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막사에서 이를 지켜보던 병사들은 밤이 깊어지자 하나둘
잠이 들었는데, 그는 이튿날 아침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꼬박 밤을 새웠다. 그리고는 아침해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그
자리를 떠나 평소처럼 일과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 "음미함이 없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
소크라테스가 40세가 될 무렵에 그의 정열적인 친구이자 제자였던 카이레폰이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으로 가서 아폴로신에게 여쭈어 보았다.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자, 신은 신전의 미녀를 통해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소포클레스는 현명하다. 유리피데스는 더욱 현명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만민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
그러나, 대단히 기뻐하던 친구에게 이 신탁을 전해들은 소크라테스는 크게 놀랐다. 그것은 그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자 자타가 현명하다고 공인하는 정치가들, 예술가들, 기술자들을 차례로
찾아가서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지혜를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것처럼 자만에 빠져 있었다. 그때서야 그는
비로소 자신의 사명을 자각하였다.
"그들은 모른다는 사실을 진짜로 모르고 있다"
그래서 아폴로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라는
금언을 좌우명으로 삼고 시민들의 부패하고 마비되고 타락한 양심을 일깨우고자 했다. 그 후 그는 70세 때까지 신탁을 통해
자신에게 부과된 사명인 아테네의 쇠파리 노릇을 하며 살았다.
소크라테스는 50대에 결혼을 했고 세 아들이 있었다. 그가 70세로 사형될 당시 큰 아들은 18세였다. 결혼 후에도
그는 시민들을 깨우치는 사명을 위해 무료로 가르치는 일만 했을 뿐 전혀 가사를 돌보지 않고 외면했다. 그래서 더욱 가난한 형편에
처하게 되었고, 그의 아내 크산티페로부터 심한 푸대접을 받았다.
어떤 이가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사모님의 잔소리를 어떻게 견디어 내십니까?"
그러자, 그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도 귀에 익으면 괴로울 것이 없지"
하루는 소크라테스가 부자 손님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예상대로 그의 아내인 크산티페가 투덜거렸다.
"대접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사람들에게 부끄럽기 짝이 없어요"
그러자,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염려 말아요. 그들이 이치를 아는 사나이들이라면 그걸 참아 줄 것이고, 만일 시시한 친구들이라면 그런 녀석들에게는 그렇게 신경 쓸 필요조차도 없으니까"
하루는 소크라테스가 집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때 그의 아내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강론을 계속하자, 그녀는 큰소리로 욕을 해대며 그에게 구정물 세례를 퍼부었다. 그런데도 그는 태연스레 말했다.
"천둥이 친 다음에 소나기가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알키비아데스가 참다 못해 말했다.
"부인의 잔소리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달래듯이 제자에게 말했다.
"나는 이젠 완전히 단련이 되어 있지. 우물에서 도르레가 언제나 가랑가랑 소리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야. 자네도 거위가 꽥꽥 우는 건 참아 낼 수 있을 거야"
그러자, 제자도 지지 않고 말대꾸를 했다.
"허지만 거위는 알을 낳아 주고 새끼를 까 길러주고..."
이에 스승도 한마디 했다.
"크산티페도 아이를 낳아 준다네"
하루는 크산티페가 시장 바닥에서 소크라테스의 옷을 잡아 벗기려 하자, 친구들이 손으로 막아 말리면서
"왜 그럽니까?" 하고 그녀에게 충고조로 말했다.
이때 소크라테스가 크산티페를 대신해서 말했다.
"결단코 그래야만 하겠지! 여러분이 우리가. 싸우는 걸 보고, '소크라테스, 힘을 내라!', '야아, 잘한다, 크산티페!' 하고 응원하기 때문에..."
어느 날 소크라테스는 한 사람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잔소리쟁이와 함께 사시는 이유가 이유가 뭡니까?"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내가 잔소리쟁이와 함께 사는 건, 기수가 준마를 좋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기수는 그 녀석을 잘 길들이고 나면 그 다음은 누워서 떡먹기거든. 내가 내가 크산티페를 잘 길들이게 되면 내가 제어하지 못할
사람도 없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하고 잘해 나갈 수 있을 거니까".
한 제자가 소크라테스에게 질문했다.
"선생님!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까,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까?"
그러자, 그가 답변했다.
"결혼하게나! 온순한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사나운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테니까!"
소크라테스의 아들 람프인클레스는 어머니 크산티페를 향해 소리쳤다.
"어머니의 잔소리는 어느 누구도 참을 수 없을 거예요"
훗날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스(디오게네스의 스승)도 그 여인에 대해 한마디 언급한 바 있다.
"그녀는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여자들 가운데서 가장 시끄러운 여자일 것이다"
부자요 명문 출신인 알키비아데스는 스승인 소크라테스에게 집을 지으라고 넓은 땅을 제공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나는 신발이 필요하나 만일 자네가 이것으로 신발을 만드십시오 하고 가죽을 준다고 하여 내가 그걸 받았다면 참으로 이상할 거야"
한번은 그의 제자 카르미데스가 스승의 가난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몇 명의 노예를 헌납하면서 간청했다.
"제발, 이 노예들을 부려 수입을 올리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제의를 굳이 물리쳤다.
제자인 아이스키네스가 스승에게 말했다.
"선생님, 저는 가난해서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으니까 이 몸을 바칩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다정히 말했다.
"아니, 어째서? 너는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있는데 그걸 모르느냐?"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소크라테스의 강연을 들으면서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눈물이 쏟아지며 노예 상태와도 같은 경험을 했던 알키비아데스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페리클레스의 웅변을 들어도 감동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지만 소크라테스의 강연을 듣는 사람이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에우크레이데스는 메가라인으로 일찍이 철학 공부를 했으며, 소크라테스의 강연을 듣고는 열렬한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런데
아테네와 메가라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그리하여 메가라인이 아테네에 들어오면 종신형에 처한다는 법령이 만들어졌다. 그런데도 그는
여자로 변장하고 몰래 들어와 소크라테스의 강연을 열심히 들었다.
안티스테네스는 고르기아스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다가 소크라테스의 명성을 듣고는 자기 제자들과 함께 소크라테스의 문하로 들어가 겸허히 가르침을 받았다.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은 '건강한 힘'이라는 뜻이다. 그는 철학 이외에도 신체 건강을 위해 체력 단련을 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강조했다. 그는 몸소 아침 산책, 체조, 무도를 즐기면서, 절제 있는 생활을 꾸려 나갔다. 그러나, 제자들이 초대하여
대접하면 사양하지 않고 참석하여 즐겼다.
소크라테스와 함께 전쟁에 참전했다가 그에게 구조되었던 알키아비아데스가 훗날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실제로
전쟁에서 흔히 있듯이 어딘가에서 차단을 당해 굶기를 강요당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인내심이 없는 다른 병사들과는 달랐다. 그러나
잘 먹게 되었을 때에는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 특히 그는 주량이 컸다. 자진해서 마시는 일은 없었지만 강요당했을 때는
누구보다도 많이 마셨다. 그럼에도 그는 한번도 술에 취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겨울의 추위에 대한 인내심도 대단하였다. 언젠가
그는 혹독한 추위가 닥쳐왔을 때, 모든 병사들이 진영 안에 있는 옷을 모두 껴 입고 구두를 신고 발을 담요와 양가죽으로 감싼 채
꼼짝도 않고 있었는데, 오직 그만이 평상시처럼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서 외출을 하는 것이었다. 구두를 신지 않고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쉽게 얼음 위를 걸었다. 병사들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데리온 전투, 암피폴리스 전투, 데리온 전투에 출정해서 침착하고도 용감하게 싸운 소크라테스에 대해 용장 라케스는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그때 다른 사람들도 소크라테스처럼만 행동 했었더라면 결코 패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국의 명성을 드날렸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추첨 결과 본의 아니게 500인 평의원에 뽑혔을 때였다. 그 무렵 아르기누사이 섬 앞바다의 해전에서 패전한
장군들을 모두 국회에서 재판하자는 안이 평의원회에서 의결되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협박을 받으면서도 최후까지 이에 반대하였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다른 생물에 비해 인간이 다른 점은 무엇인지요?"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다음과 같이 인간에 대해서 찬미하였다.
"신은 인간을 바로 서게 하고,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손을 주었으며, 다른 생물에게는 일정한 시기에만 한정 시킨 쾌락을 인간에게는 아무 때나 즐기도록 허용하였으며, 거기다가 또 영혼을 심어 주었다"
소크라테스는 평소에 '인간의 참된 삶이란 잘 사는 것이요, 잘 사는 것이란 아름답게 사는 것이요, 올바르게 사는 것이다'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하였다. 어느 날 한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인간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에 그는 이렇게 답변했다.
"그건 사람의 마음을 잘 보살피는 것, 즉 행복한 기분이 되게 해주는 것이야.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또 만나고 싶고, 만나면 몸을 만지고 싶고, 만지면 이번에는 소유하고 싶어지는 것이지"
그러자, 다른 제자가 곁에 있다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하고나 잠자리를 같이 하는 아테네 제일의 미녀 모델이 지금 어느 화가의 화실에서 지금 나체가 되어 있습니다"
제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승이 대꾸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진실한 아름다움은 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지. 가보자! 그러나, 미인의 포로가 되어 인간다움을 잃어버릴 자는 따라오지 말라"
어느날 소크라테스는 한 청년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청년의 덕은 무엇인지요?"
그러자, 그는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그건 지나치지 않는 것이지"
그러면서 그는 청년 앞에 시종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며 말을 이었다.
"장래가 넉넉해서 미지수인 자여!"
소크라테스는 어느날 꿈을 꾸었다. 자기 무릎 위에 앉아 있던 백조 새끼 한 마리가 금방 날개가 돋더니 예쁜 소리를 내어
울고는 순식간에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는 꿈이었다. 그 다음날 플라톤이 그의 제자로 입문해 왔다 소크라테스는 그를 보고 말했다.
"자네는 어젯밤 내가 꿈에 본 그 백조가 틀림없어"(당시 백조는 아폴론 신전에 바쳐졌던 '싱싱한 새'였다. 그것은 마치 아테네 여신의 사자인 올빼미를 아테네 신전에 바치는 것과 같았다)
소크라테스는 노년에 리라 악기의 연주를 배우려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은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그래서 어린이들과 함께 늙은 소크라테스를 제자로 삼고 가르친 음악 교사인 콘노스는 '할아버지 교육자'라는 별명을 하나 얻게 되었다.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아테네는 패배하였다. 그래서 아테네는 친 스팔르타 인사와 반민주주의자 30인으로 구성된 과두
체제를 수립하여 공포정치(참주정치)를 시작하였다. 이 공포 정치의 수령인 크리티아스는 어느 날 소크라테스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관청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레온이라는 사나이를 사형에 처하기 위해 구인해 올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를
위법이라고 여겨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의 강연은 자연히 제재를 받게 되었다.
정적을 사정없이 탄압하던 과두 체제인 참주정치가 8개월만에 무너져 버렸다. 그래서 아테네는 다시 민주체제로 환원되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이번에는 민주파 인사들로부터 오해를 받게 되었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 "구름" 때문에 더욱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구름"의 개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선량한 시민인 스토렙시아제스는 승마에 미친 아들 때문에 많은 빚을 지게 된다. 그 빚을 갚아야 하는 날이 점점
다가오자 안절부절 못한 그는 소크라테스를 찾아가서 '빚을 갚지 않아도 되는 방법'에 대한 자문을 구하면서 만약 가르쳐 주면
은혜를 꼭 갚겠다고 신의 이름을 빌어 맹세한다. 그때 소크라테스는 '신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것을 기르고 또 여러 가지 모습을
하는 구름일 수밖에 없다'고 해석을 해준다. 그 후 그와 그의 아들은 소크라테스에게 변론술을 배워와 빚쟁이를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아들과 말다툼을 벌이게 되고 폭행을 당한다. 그러나, 아들은 배운 변론술로 그 폭행을 정당화한다. 이런
지경에 이른 그는 이 모든 책임을 '신을 믿지 않는 소크라테스'에게로 돌린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집에 불을 질러 버린다.
소크라테스와 제자들이 연기 속을 헤치고 뛰어나온다. 막이 내린다"
이 극이 초연되던 날, 소크라테스는 무대 위에 서서 싱글벙글거리면서 자기 배역을 맡은 배우가 자기와 닮았는지 어떤지를 관람객들에게 비교하게 했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소크라테스에게 큰 피해를 줄 줄이야!
소크라테스가 고소를 당하게 된 때는 그의 나이 70세 되던 봄이었다. 고소인은 젊은 시인 메레토스였고, 유력한 민주정치가이자 실업가인 아뉴토스와 변론가인 리콘은 고소인의 변호인이었다. 그 고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핏토스 구의 메레토스의 아들 메레토스는 아로페케구의 소프로니스코스의 아들 소크라테스를 상대로 다음의 고소장을
제출하고 그 사실에 상위가 없다는 선서를 했다. 곧 소크라테스는 나라가 인정하는 신들을 믿지 않고 괴이한 신(Dimonion,
신적인 것, 즉 양심)을 끌어들여 청소년들을 부패 타락케 하였다. 그 죄는 모름지기 사형에 해당된다"
고소를 당한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 앞에서 조금도 굽힘 없이 자신의 소신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아테네 시민들이여! 만일 나에게 지금까지의 진리 탐구의 생활을 그만둔다면 석방해 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느
때처럼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복종하기보다는
오히려 신에게 복종하겠습니다. 그리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힘이 미치는 한, 지혜를 사랑하라고 여러분에게 권하겠습니다"
당시는 30세 이상으로서 국가 채무가 깨끗한 아테네 시민이면 누구나 배심원에 지망 할 수가 있었다. 단, 그 지망자가
많을 경우에는 당일 추첨하여 500명을 뽑았는데, 소크라테스의 변론 후 치뤄진 투표 결과 60표 차이로 유죄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때 자신의 형량에 대한 발언권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이 사람에게는 영빈관에서 평생 무료 식사를 하는 대접을 받게 해주십시오 여러분은 올림픽
경기의 우승자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만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경기에 이기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러분을
즐겁게 할 뿐이지만 나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다가 나는 가난하므로 부양을 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잘못하면 사형 선고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재판관들 앞에서 조금도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소신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이번 사건은 나에게 매우 유익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죽는 것을 옳지 않다고 봅니다. 죽음이란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이 완전한 허무로서 모든 감각이 없어진다면 꿈도 꾸지 않을 정도로 깊이 잠든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죽음이란 벌이 아니라 굉장한 소득일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죽음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서 저승으로 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즐거운 여행을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우리는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기 위하여 이곳을 떠납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 누가 더 행복할 것인가 하는 것은 오직 신만이 알
것입니다"
재판이 진행되고 있을 때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변호할 양으로 단상으로 뛰어 올라 가서 소리쳤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일찍이 이 단상에 올라온 자 중에서 가장 젊지만..."
여기까지 말했을 때 재판관들로부터 꾸짖음을 당했다.
"내려와! 내려와!"
할 수 없이 단상을 내려와야 했던 플라톤의 당시 나이는 29세였다.
유죄 판결 후, 소크라테스는 고소인이 요구한 사형 형벌에 대해 의의를 제시했다.
"본인은 아테네를 위해 신이 제시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고 믿는다. 따라서 본인에게 알맞은 형벌은, 국가의 다른 공로자들처럼 앞으로 국비로 향응해 줄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그러나, 최후로 친구들의 간절한 권유에 따라 30므나의 벌금을 제시했다(이때 플라톤이 보증인들 중 한 사람이
되어 주었다) 그런 다음, 투표를 실시한 결과, 360표 대 140표가 나와 220표 차이로 그에게 사형이 결정되었다. 당시
법률에 의하면 사형 선고를 받게 되면 24시간 이내에 처형을 받게 되는데, 그때 마침 델로스 섬으로 아폴로 신과 아르테미스
신(아폴론의 쌍동이인 여동생)에게 생일의 감사 재물을 바치러 배가 떠나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배가 돌아올 때까지 그
집행이 연기되었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생일은 소크라테스의 생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옥중에서 다음과 같은 찬가를 지어 읊었다.
어서 오소서, 델로스의 주인 아폴론이여!
어서 오소서, 아르테미스여! 품격 높은 아들들이여!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가장 열렬한 숭배자인 아폴로도로스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선생님! 당신께서 아무 죄도 없이 사형에 처해지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제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면서 미소를 짓는 얼굴로 말했다.
"사랑하는 아폴로도로스여! 너는 내가 죄없이 사형에 처해지는 것보다도 오히려 죄가 있어서 사형에 처해지는 것을 보기를 희망하고 있었던가?"
사형 선고가 구형된 지 한 달 후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그에게 면회를 가서 탈출을 권유하면서 말했다.
"당신은 부당하게 사형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러면 당신은 내가 정당하게 사형되기를 원하오?"
소크라테스가 옥중에 있을 동안 그의 친구들은 비밀리에 탈옥 준비를 갖추어서 그에게 몇 번이나 권면해 보았다. 제선이
항구로 들어오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는 그의 친구 클리톤이 밤중에 그를 몰래 찾아가 다시 한번 탈옥을 간곡히 권했다.
"이 재판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자네의 죽음은 자신은 물론 친지와 제자들 모두의 불행이야! 돈은 얼마나 들더라도 관리들을 매수 할 테니 제발 탈출하게나"
그러나, 그는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들며 말했다.
"내가 재판을 받을 때에는 그 결과가 내게 이롭건
해롭건 그 재판의 결과에 복종할 것을 서약한 것이네. 이제 나에게 사형이라는 불리한 판결이 내렸다고 해서 이에 응하지 않고 탈옥
도주한다는 것은 부정이요, 배신이야. 우리는 국법의 보호를 받고 살아가고 있네. 국가의 법률이 지금 나를 향해서 죽으라고
명령하였다면, 설사 국법이 옳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를 배반할 수는 없는 것이네.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일세. 우리는 절제할 줄 알아야 하네. 절제는 무절제 보다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일세. 우리는
중용을 지켜야 하네. 과장은 자기를 손상시키고 또 자기의 치욕이기 때문일세. 우리는 공사를 버려서는 안 되네. 사회의 안녕이
동시에 개인의 안녕이기 때문일세. 우리는 국법에 복종해야 하네. 준법은 우리 자신과 국가에 대해서 최대의 이익을 낳기 때문일세.
우리는 유덕한 생활을 해야 하네. 덕은 신과 인간으로부터 최대의 보수를 받기 때문일세"
최후 날, 그 전날 밤부터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베는 자식들과 함께 남편 곁에서 보냈다. 아침 일찍 찾아온 그의 친구들을 보자마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여보, 드디어 이것이 마지막이로군요! 친구들이 당신에게, 당신이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제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울먹이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게 하고는, 그는 친구들과 오랜 시간에 걸쳐 '영혼의 불멸'에 관해서 변함없이 문답을 주고 받았다.
드디어 해가 서산으로 기울 무렵 간수들이 독인삼을 담은 그릇을 가지고 들어왔다. 사형 집행 시간이 일몰로 정해져
있는데, 대개의 사형수들은 음식을 원대로 먹거나 여자를 불러 욕정을 채우기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들어오는
간수를 보자마자 이야기를 마치고는 목욕을 하고 독배를 들이킬 준비를 하였다. 이때 아폴로도로스가 훌륭한 죽음의 나들이 옷을
선물하면서 마지막 부탁을 드렸다.
"선생님 부디 이걸 입고 돌아가십시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나무랐다.
"뭐야? 내가 입은 옷이 입고 살기에는 지장이 없었는데, 입고 죽기에는 너무 허름하다는 말인가?"
그러고 나서, 그는 간수가 건네준 독인삼 잔을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자, 이를 지켜 보고 있던 친구들과
제자들은 눈물만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 중에는 소리내어 우는 자도 있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꾸짖었다.
"이 무슨 망측한 꼴인고? 그러길래, 내가 부인들은 돌려보낸 게 아닌가?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말일세. 사람은 조용히 죽어야 한다고 나는 들어왔네. 그러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참게나!"
독배를 마신 후, 소크라테스는 옥리의 지시로 잠시 동안 감옥 안을 거닐다가 다리가 점점 무거워지자 침대에 가서
드러눕더니 덮개로 얼굴을 가렸다. 독 기운은 발끝에서부터 위로위로 서서히 기어올라왔다. 그러다가 배 부분까지 차가워졌을 때였다.
그는 잠깐 얼굴 덮개를 벗기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친구에게 말했다.
"클라톤! 내가 아스클레피오스(의약의 신)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갚아 주겠나?"
그러자, 크리톤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반듯이 갚아 주겠네! 다른 부탁은 없는가?"
그러나, 침대에서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결국 운명한 것이다. 이 날이 기원전 399년 4월 27일이었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한 편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저술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의 제자였던 크세노픈이 쓴 "소크라테스의 추억"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그는 언제나 신의 명령에 따라서 행동할 만큼 경건하였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을 정도로 극기심이 강하였고, 선악의 결정에
있어서 한번도 그릇됨이 없을 정도로 현명하였고, 또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선량하고 가장 행복한 인간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죽자, 한 비극 시인은 아테네인들을 책망하며 이렇게 탄식했다.
"너희들은 뮤즈(시의 신)의 매우 현명한 휘파람새(봄이 옴을 알리는 새)를 죽여 버렸어, 죽여 버렸다고"
소크라테스를 사형시킨 아테네 시민들은 곧 이를 후회하여, 소크라테스가 생전에 곧 잘 젊은이나 소피스트들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곤 하던 씨름판이나 체육관을 폐쇄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고 고소인 메레토스는 사형에 처해졌고, 그밖의
고소인들도 추방당했다. 추방당한 아뉴토스는 헬라클레이아로 도망쳤으나 그곳에서도 추방당하고 말았다. 또한 아테네 시민들은 조각가인
리시포스로 하여금 소크라테스의 동상을 만들게 하고 이를 폼페이언(보물상자)에 장식하여 그 공을 길이 기렸다.
소크라테스의 사후에 그의 가르침을 밑바탕으로 한 여러 학파가 생겨났는데, 플라톤 학파, 키니코스 학파, 키니크 학파, 메가라 학파, 엘리스 학파가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