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하는 말 - 나는 ‘4.3’을 알지 못한다 (서경식, 도쿄 케이자이대학교 현대법학부 교수)
‘4.3’이라는 사건. .. 그것을 ‘알지 못한다.’라는 것 자체가 무섭고 부끄러운 그런 사건인 것이다. 우리들은 자신이 무엇을 알지 못하는가를 알아야만 한다. 평화와 사람다움을 위하여. 9



피살
“박재옥 여인은 젖먹이 아기를 안은 채 식산 은행 철문 앞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병원에 옮겨 온 후에도 몇 시간 동안 목숨이 붙어 있었습니다만 끝내 운명하고 말았지요. 총알은 그 여인의 오른족 옆구리를 관통, 왼쪽 둔부 쪽으로 빠져나갔습니다. 망루처럼 높은 곳에서 쏜 총탄에 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젖먹이 어깨에도 총알이 지나갔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하두용, 1994년 67세. 제주시 삼도1동, 당시 제주 도립 병원 경리 주임. 56




고문
“둘째 오빠가 행방불명되어 버리자 우리는 졸지에 ‘폭도 집안’으로 몰렸어요.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당시 열세 살이던 나까지도 서북청년회에 끌려가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옷을 모두 벗긴 채 고문을 했는데, 거꾸로 매달아 몽둥이로 때리거나 고춧가루 탄 물을 코와 입에 부어 댔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입을 다무니까 쇠붙이를 사용해 이빨 사이를 억지로 벌리는 바람에 이가 다 부러졌어요. 전기 고문을 받은 곳은 살이 썩어 갔어요. 토벌대는 우리가 오빠를 숨긴 채 밥을 날라주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며 윽박질렀습니다. 기절하면 물 뿌려 깨운 뒤에 또 고문했어요. 결국 서청은 도피자 가족이라며 어머니를 총살했습니다. 그때 언니랑 나도 함께 끌려갔는데 서청은 우리한테 ‘어머니가 죽는 것을 잘 구경하라.’고 하면서 총을 쏘았어요. 난 그때의 충격으로 성장이 멈춰, 다 자란 후에도 몸무게가 30킬로그램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쳐집니다.” - 정순희. 2007년 72세. 서귀포시 강정동. 64




약탈
“난 본래부터 우익 활동을 했어요. 그리고 사태 때에는 중문면 면사무소 산업계 서기적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북 청년회가 문제였어요. 서청은 무전취식하며 민폐를 심하게 끼쳤습니다. 돈을 갈취하기 위해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주민들에게 강매했습니다. 처음엔 오백 원에 팔다가 곧 천 원으로 올렸어요. 당시 천 원은 큰 돈이었습니다. 서청은 면사무솎가지 찾아와 행패를 부렸습니다. 면 회계원에게 돈을 요구하는가 하면, 나한테는 쌀을 강요했어요. 난 우익이라고 해서 매일 아침 담벼락에 날 숙청하라는 좌익 삐라가 나붙어 위험을 느끼던 터였는데, 이번엔 서북 청년회에게 밉보인 겁니다. 그래서 급히 경찰에 투신했습니다. 그 직후 사태가 악화되면서 서청에 의한 대대적인 학살이 있었습니다. 전에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을 사지 않은 사람, 그리고 면사무소 직원으로 서청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개 총살당했습니다. 아마 내가 그 직전에 경찰에 투신하지 않았다면 나도 서청한테 죽었을 겁니다.” - 이기호. 1997년 80세. 서귀포시 중문동. 66




겁간
“서북 청년회 단장 김재능은 여자들을 많이 괴롭혔습니다. 김재능이 양 아무개를 범했지만 그 여자는 죽을 위기에 놓인 남동생을 살리기 위해 감수할 수밖에 없었지요. ‘토벌대에게 누가 당했다더라.’는 소문이 퍼지면 우린 전전긍긍했습니다. 당시 멋쟁이 여성들도 많았지만 무서워서 가급적 바깥나들이를 삼갔고 일부러 바보처럼 꾸미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 강소희. 1997년 78세. 제주시 도평동. 당시 분 동맹 집행위원. 68



신촌 회의
“무장봉기가 결정된 것은 1948년 2월 그믐에서 3월 초 즈음의 일이다. 신촌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도당 책임자와 각 면당 책임자 등 19명이 신촌의 한 민가에 모였다. 참석자는 조몽구, 이종우, 강대석, 김달삼, 나(이삼룡), 김두봉, 고칠종, 김양근 등 19명이다. 이덕구는 없었다. 이 자리에서 김달삼이 봉기 문제를 제기했다. 감달삼이 앞장선 것은 그의 성격이 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경파와 신중파로 갈렸다. 신중파로는 조몽구와 성산포 사람 7명인데, 그들은 ‘우린 가진것도 없는데, 더 지켜보자.’고 했다. 강경파는 나와 이종우, 김달삼 등 12명이다. 당시 중앙당의 지령은 없었고, 제주도 자체에서 결정한 것이다. 오르그(조직원을 뜻하는 러시아어. 여기서는 당 정책이나 조직을 집행하기 위해서 파견되는 책임 있는 지도원을 뜻함)는 늘 왔으며, 김두봉의 집이 본거지였다. 해방 후 강문석은 한 번도 제주에 오지 않았다. 김달삼은 20대의 나이이지만 조직부장이라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장년파는 이미 징역살이를 하거나 피신한 상태였다. 안세후느 오대진, 강규찬, 김택수 등 장년파는 이미 제주를 떠난 뒤였다.
그런데 우린 당초 악질 경찰과 서청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지 경비대는 아니었다. 미군에게도 맞대응할 생각이 없었다. 미군에 대해 다소 감정이 있었지만 그들은 신종 무기가 많은데 …… 우리가 공격한 후 미군이 대응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우선 시위를 하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정도의 생각이었다. 장기전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익렬(9연대 연대장)과도 회담한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지식과 수준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가 정세 파악을 못하고 신중하지 못한채 김달삼의 바람에 휩쓸린 것이다. 그러나 봉기가 결정된 후,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니까 ‘우리의 결정이 정당한 거 아닌가.’하는 분위기였다.” - 이삼룡. 2002년 78세. 일본. 당시 대정면 모슬포. 76


망보는 소년들
5.10선거가 파탄나자 미군 함정이 해안을 봉쇄한 가운데 군(국방 경비대)이 본격 투입되어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 시작되었다. 소년들은 마을 동산 위에서 깃대를 세우고 망을 보았다. 멀리 토벌대가 출현하며 깃대를 눕혀 마을에 알리고, 군인이면 ‘노랑개 온다’ 경찰이면’검은개 온다’하고 하였다.

“청년들은 3.1 사건 이후 계속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고민에 빠진 어른들은 마을을 살리기 위해 양면 작전을 썼습니다. 즉 산 쪽에 협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찰의 요구도 잘 들어줘서 어느 쪽으로부터도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요. 그러나 토벌대가 마을에 오면 아무래도 피해가 생기니까 빗개(보초)를 서면서 토벌대가 오면 호각으로 신호를 보내 청년들이 피하도록 했습니다. 어린 우리들도 수신호를 배워 연락을 했지요. 그러나 북촌 대학살 때에는 마구 불을 지르고 죽였으니까. 그런것도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 신수교. 1998년 62세. 조천읍 북촌리. 92




부모들
젊은이를 둔 부모들은 도피 입산한 자식을 대신하여 추궁당한 끝에 죽임을 당했다.

“경찰은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먼저 한 부인을 끌어내더니 옷을 홀딱 벗겼습니다. 배가 많이 나온 임산부였습니다. 남편이 산에 오른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경찿ㄹ은 그 부인의 겨드랑이에 밧줄을 묶어 팽나무에 매달아 놓고 대검으로 마구 찔렀습니다. 이어 토벌대는 주민들을 선별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폭도 가족’을 가리는 것인데 우리는 아버지가 앞서 토벌대에게 총살당했다는 이유로 끌려 나오게 됐습니다. 우린 4형제였는데 열세 살이던 내가 장남이고 밑으로 열한 살, 일곱 살, 그리고 젖먹이 동생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호소로 동생들은 풀려났지만 나는 ‘눈망울이 둥글둥글한 게 폭도들에게 연락함직한 놈’이라며 풀어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13명이 인근 밭으로 끌려가게 됐는데, 경찰들은 ‘칼로 찔러 죽이자.’ ‘시간이 없으니 총으로 쏘자.’며 자기들끼리 잠시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그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칼에 찔리면 고통이 오랠 것이니 총에 맞는 게 낫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순간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어머니가 나를 덮치며 쓰러졌습니다. 총에 맞은 어머니의 몸이 요동치자 내 몸은 온통 어머니의 피로 범벅이 됐습니다. 난 경찰이 떠날 때까지 어머니 밑에 깔려 있어서 무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졸지에 고아가 됐는데 일곱 살 난 동생은 홍역으로, 젖먹이 막내는 젖을 못 먹어 곧 죽었습니다. 만일 영화나 연극으로 만든다면 난 그날의 모습들을 똑같이 재연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도 눈에 선합니다.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 안인행. 1999년 4세. 애월읍 장전리. 100




붉은 바다
“1948년 12월 14일 오후 5시쯤 갑자기 군인과 경찰이 마을에 들이닥쳐 한 사람도 빠짐없이 향사로 집결시켰습니다. 그들은 열여덟 살에서 마흔 살 사이의 남자들과 얼굴이 고운 처녀만을 골라 밧줄로 묶어 표선리로 끌고 갔습니다. 그 후 남자는 12월 18일과 19일 양일에 걸쳐 표선 백사장에서 학살당했고, 여자는 군인들의 노리갯감이 되다가 군대가 이동하게 되자 최종적으로 12월 27일에 표선 백사장에서 총에 맞은 후에 또 칼로 찔려 죽었습니다.” - 김양학. 1998년 58세. 표선면 토산1리. 113



젖먹이
“우리 마을 북촌리에 대학살이 벌어지던 그날, 아침부터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군인들이 마을 동쪽부터 불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연설이 있으니 학교 운동장으로 집합하라 했습니다. 군인들은 우선 경찰 가족, 군인 가족을 따로 분리시키더군요. 낌새가 이상하다 여긴 사람들은 사돈의 팔촌이라도 경찰이 있으면 경찰 가족 쪽으로 줄을 섰습니다. 군인은 우선 민보단 간부를 불러 내 바로 총살했습니다. 사람들이 동요해 흩어지기 시작하자, 군인들이 사람들 머리 위로 총을 난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댓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중엔 한 부인도 있었는데, 업혀 있던 아기가 그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더군요. 그날 그곳에 있었던 북촌리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겁니다.” - 김석보 1998년 63세. 조천읍 북촌리. 118




십자가
“제주 출신 재일 동포 중에는 자신이 마치 4.3 사건 때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런 말하는 사람에게 반감을 갖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당신이 진정으로 투쟁을 했다면 제주도에서 죽었어야지, 어떻게 지금 살아 있는가? 불만 질러 놓고 떠난 것은 무책임한 것 아닌가?’ 라고 반박합니다. 또한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나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 선생처럼 끝까지 제주도에 남아 있던 분을 존경합니다. 내가 산을 올라 보니 ‘이덕구 노래’가 있을 정도로 선생은 신망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노래는 소련의 소년단 노래에 가사를 붙인 것입니다.”
‘머리에 쓴 것은 도리구치로구나.
손에다 권총 쥐고서 싸움을 나가네.
누구냐 그 이름 무섭다고
박박 얽은 그 얼굴
이- 이- 이덕구!’ - 김민주. 1994년 63세. 일본. 당시 조천 중학교 학생. 126




빌레못굴의 유골
“토벌대는 마구잡이로 청년들을 죽였습니다. 난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순 없었기에 도망쳤습니다. 그 무렵 알게 된 빌레못굴로 숨어들었는데 그곳에는 남읍리 주민 28명이 있었고, 우리 마을 사람으로는 강규남의 가족 5명(어머니, 아내, 아들, 딸, 누이), 송시영과 그의 처, 양신하 등이 있었습니다. 입구가 좁고 은밀한 곳이라 모두들 안심했지만 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여차하면 숨을 만한 곳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요. 결국 굴이 발각됐습니다. 겨울철이라 온도 차이로 인해 굴 밖에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김 때문인 것 같습니다. 군경 토벌대와 민보단원들이 굴 안으로 들어오자 급히 숨었지요. 그런데 토벌대가 ‘살려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고 유혹을 하자 대부분 나갔습니다. 굴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의 신원을 파악한 토벌대는 붙잡은 사람을 통해 내 이름을 부름 나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난 끝까지 버티며 나가지 않았어요. 토벌대는 사람들이 굴 밖으로 나가자마자 굴 입구에서 바로 학살했습니다. 강규남의 아내는 두어 살 난 딸을 업은 채 도망쳤는데, 나처럼 인근에 숨지 않고 더 깊숙이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 빠져나오지 못한 채 굶어 죽었습니다. 굴이 너무나 크고 복잡해 길을 잃은 겁니다. 모녀의 유골은 나중에 굴 탐사팀에 의해 발굴되었습니다.” - 양태병. 1998년 71세. 애월읍 어음리. 134






자료1 제주 4.3 항쟁의 역사적 의미 -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위원

2000년 1월 공포된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주4·3특별법)에 의해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 (제주 4·3 위원회)가 설치되었는데, 이 '제주4·3 위원회'에 2001년 5월까지 신고된 4·3 관련 피해자는 사망 10,715명, 행방불명 3,171명, 후유 장애 142명 등 총 14,028명이었다. 이들 중 20세 미만이 3,840명이고, 60세 이상이 860명이었다. 피해자 중 여자는 2,875명이었다. 제주도 마을마다 피해자들이 있었다. 4백 명 이상 희생된 것으로 신고된 마을만 3곳이고, 1백 명 이상신고된 마을은 무려 45곳이었다.
2003년에 통과된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진상 조사 보고서)에서는 인구 감소같은 여러 가지 근거를 통해, 신고된 피해자의 두 배쯤 되는 2만 5천 명에서 3만 명이 4·3 때 희생된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제주도 주민이 약 30만 명이었으니까 10분의 1정도가 희생된 것이다.
제주도에서의 희생은 우리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임진왜란(1592~1598) 때나병자호란(1636년) 때도 한 지역에서 그렇게 많은 민간인 희생이 나지는 않았다. 그 점은 주민 집단 학살이 몇 차례 있었던 일제 강점기 때도 마찬가지다. 한국 전쟁(1950~1953) 때도 많은 주민 집단 학살이 있었고, 전쟁이 시작된 직후 군경이 저지른 '보도 연맹원 대량 학살'은 제주도에서의 희생보다도 규모가 컸지만, 그것은 남한 지역 전체에서 저질러진 것이었다.
..
제주도를 온전히 느끼려면 빼어난 풍경과 함께 젲 4.3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48-149

남로당 제주 도당의 무장봉기는 제주 도민이 가세하여 항쟁으로 변모하였다. 제주 4.3 사건을 연구한 미국 정치학자 존 메릴(John Merril)은 “2차 세계 대전(1939~1945) 후 점령군에 대항하여 이처럼 치열한 민중 반란이 분출된 곳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었다.”라고 기술 했다. 149

4·3 사태는 꼭 유혈 참극을 빚어야 했을까? 4·3 사건이 경찰의 탄압과 서청단원의 빈번한 불법 행위로 일어났다고 판단한 연대 연대장 김익렬은, 이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그리하여 제주 군정장관 맨스필드(John S. Mansfield) 중령의 승인하에 4월28일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 평화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는 72시간 안에 전투를 중지하고, 무장은 점차로 해제하며, 무장 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루어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김달삼이 진심으로 평화적 해결을 원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김익렬이 한 것처럼 그 뒤로도 사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선무 공작을 벌였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왔을 것이고 당국을 신뢰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4.28 평화 회담 직후의 도민 반응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5월 1일 '오라리 방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경찰은 이 사건을 무장대 소행으로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우익청년단체에서 평화를 깨기 위해 일부러 저지른 짓이었다. 미군은 이 오라리 방화 사건'을 입체적으로 촬영해 무장대의 폭력성을 알리는 선전용으로 써먹었다. 강경 진압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였다. 1948년 5월 3일, 미군은 무장대 총공격을 지시했다. 9연대 연대장은 김익렬에서 박진경으로 바뀌었다. 154

미군은 이미 김익렬에게 초토화 작전을 지시한 바 있었다. 5.10 선거가 무효화된 후에 제주 지구 미군 사령관으로 온 브라운 대령 (Rothwell H. Brown)은 "사건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고 공공연히 강경 일변도의 발언을 했다. 9연대가 11연대로 재편되어 11연대장이 된 박진경은 무자비한 강공 작전을 폈다. 무장대가 5백 명 안팎이었는데도, 정부는 5월 27일까지 3,126명을 잡았다고 발표했고, 6월 12일 <조선일보>는 체포된 자가 약 6천 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155

1948년 10월 17일, 새로 재편된 9연대 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의 지점과 산악 지대를 허가 없이 통행하는 자는 총살에 처하겠다는 포고를 발표했다. 초토화작전이 임박했음을 말해 주는 포고였다.
다음날인 10월 18일, 제주 해안이 봉쇄되었다. 유일한 지역 언론사인 <제주신보> 사장이끌려가고 편집국장은 총살되었다. <경향신문>과 <서울신문> 지사장도 끌려가 총살되었다.초토화 작전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철저히 제거되었다.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정부는 아무런 법적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때부터 다음 해 3월까지 어린아이부터 70, 80대 노인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주민들이 집단으로 학살되는 참극이 벌어졌다.
곳곳에서 주민 집단 학살을 불러온 초토화 작전은 1차적으로는 9연대(연대장 송요찬)와1948년 12월 29일, 9연대와 교체되어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2연대(연대장 합병선)에 있다.그렇지만 최고 책임은 1948년 12월 서청 총회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제주도에 내려온 한 서청 단원이 "이 대통령의 허락 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 라고 증언한 바가 시사하듯, 이승만 대통령한테 있다.이 대통령은 1948년 늦가을에 서청 단원을 대거 제주도에 투입해 섬을 초긴장 상태에 몰아넣었고, 1949년 4월 9일 제주도를 방문해 잔존 폭도들을 완전히 소탕하라고 지시했다.
주민 집단 학살은 국제적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이 제주도에서는 작전의일환으로 버젓이 자행되었다. 1948년 12월 14일, 중산간 마을에서 옮겨 온 표선면 토산리주민 157 명이 9연대 병력에 의해 포박당한 채 표선 백사장으로 끌려가 집단 학살되었다. 또1949년 1월 17일에는 군인들이 조천면 북촌 마을을 포위한 채 4백여 채의 집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 천여 명을 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그중 약 3백 명을 인근 밭에서 학살하였고, 다음날에는 함덕 해수욕장으로 끌고 가 약 1백 명 정도를 학살했다. 이러한 주민 집단 학살로 1백 명 이상 희생된 마을이 45곳이나 된다는 것은 맨 앞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많든 적든 150곳이 넘는 마을에서 이와 같은 희생자가 나왔다.
인간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일도 버젓이 저질러졌다. 토벌 작전을 펴면서 13명의 목을 잘라서 시내를 두루 다니며 구경시키기도 하고, 서북청년회에서 주민들을 모아 놓고 서로 뺨을 때리게 했는데, 할아버지와 손자 간에도 이런 짓을 하게 했다. 토벌대가 주민들을 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놓고 발가벗긴 채 매질을 하고, 남녀를 지목하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하게 했다. 또 자식을 맨 앞줄에 세워 놓고 부모가 총살당할 때 손뼉을 치고 만세를 부르게 했다.
잔혹 행위는 끝이 없었다. 과거 나치나 일본군이 저질렀던 '살도 빈번히 발생했다. 남편이 산에 올라갔다고 아내를 죽이고 자식이 입산자라고 부모를 죽였다. 도피자 가족으로 여자나 노인, 어린아이 같은 주로 노약자들이 끌려가 살해되었다. 1948년 12월 10일 개수동에서는 도피자 가족과 외지인 36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이곳에서는 1949년 1월 24일에도 한 여인이 세 살 난 아이와 함께 총살당한 것을 비롯해 8명이 남편 또는 자식이 피신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학살은 무장대에 의해서도 저질러졌다. 4·3 초기,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 단원 같은 우익 청년 단체 소속원, 그리고 토벌대에 협조한 우익 인사와 그 가족들을 살해했다. 그러다 토벌대의 진압으로 곤경에 빠지게 되자, 토벌대 편이라고 생각한 마을들을 덮쳐 주민들을 집단으로 학살했으며, 어린아이와 여자, 노인도 살해했다. 제주 4·3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중 78.1%는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었지만, 12.6%인 1.764 명은 무장대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나타났다.
주민 집단 학살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일어났다. 제주도도 육지와 마찬가지로 보도연맹원과 요시찰 대상자를 예비검속해 살해했다. 제주의 경우 첫 번째 학살은 1950년 8월 4일 일어났다. 이날 예비검속자 수백 명이 해군 경비정에 실려 바다에 수장되었다. 또 8월 19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수백 명이 현재의 제주 비행장에서 총살당해 암매장되었다. 서귀포에서는 7월 29일에 150명 정도가 살해되었고, 8월 12일에도 학살이 있었다.
모슬포 경찰서 관할 지역에서는 1950년 8월 20일에 집단 학살이 있었다. 이때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던 한림 지역 주민들은 1956년에 몰래 61구의 시신을 수습해 안장했다. 모슬포절간고구마 창고에 수감되었다가 희생된 사람들의 유족들도 같은 해 당국의 허가를 받아 132구의 시신을 거두어 한 자리에 묻고, 그곳을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의 땅'이라는 뜻으로 '백조일손지지'라고 이름 붙였다. 155-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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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에는 다음과 같은 작자 미상의 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삶에서 두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다고 합니다. 건물을 세우거나, 혹은 정원을 일구거나. 건물을 세우는 사람들은 그 일에 몇 년이라는 세월을 바치기도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그 일을 끝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을 마치는 순간, 그는 자신이 쌓아올린 벽 안에 갇히게 됩니다. 건물을 세우는 일이 끝나면, 그 삶은 의미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원을 일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몰아치는폭풍우와 쓶임없이 변화하는 계절에 맞서 늘 고생하고 쉴 틈이 없습니다. 하지만 건물과는 달리 정원은 결코 성장을 멈추지 않습니다. 또한 정원은 그것을 일구는 사람의 관심을 요구하는 동시에 그의 삶에 위대한 모험이 함께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정원을 일구는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봅니다.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식물 한 포기 한 포기의 역사 속에 온 세상의 성장이 깃들어 있음을.  16-17


"그러기에는 아직 어리다고 생각지 않나?"

"저는 스물한 살이에요." 브리다가 대답했다. "지금 발레를 배우겠다고 나서면, 한물간 취급을 받을 나이일걸요."  24

"일단 길을 발견하게 되면 두려워해선 안 되네. 실수를 감당할 용기도 필요해. 실망과 패배감, 좌절은 신께서 길을 드러내 보이는 데 사용하는 도구일세."  33

"밤은 하루의 일부에 불과하단다."

빛의 보호를 받고 있음을 느끼듯이, 어둠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41

믿음은 오로지 사람들이 믿기 때문에 존재한다. 기적이, 설명이 불가능함에도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처럼.  42

놀라운 일도 아니죠. 인간의 하루하루가 어두운 밤인걸요. 일분 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잖아요. 신뢰하기 때문이에요.

아니 어쩌면, 일 분 후의 다음 순간이 품고 있는 비의를 지각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걸 깨달았음을 아는 것이었다.

인생의 매 순간이 믿음의 행위임을 아는 것.  44

지혜의 길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거라고요.  49


재능은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히 않다.  55

"모든 사람은 한 가지씩 재능을 갖고 있어. 하지만 어떤 이들은 재능을 개발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애초부터 현격히 발달된 재능을 지니고 태어나지.  84

인간은 생의 어느 순간, 짧은 순간이나마 자신의 소울메이트와 함께 해야 신과의 합일에 도달할 수 있어.  89

당신이 경험한 감정을 설명하려고 애쓰지 마. 모든 감정을 강렬하게 살아봐. 그리고 당신이 느끼는 감정을 신께서 주신 선물처럼 고이 간직하는 거야.  121

뭔가를 알고 싶으면 그 안에 푹 빠져보도록 해  134

제일 나쁜 것은 자신이 그 길을 제대로 선택했는지 평생 의심하며 그 길을 가는 것이었다.  135

"얘야, 이 세상에 완전히 잘못된 것 없단다." 아버지는 말했다. "멈춰서 잇는 시계조차 하루에 두 번은 시간이 맞잖니."  137

그녀는 무언가를 바라보며 가만있을 때마다. 해야 할 일과 만나야 할 사람을 내동댕이텨준 채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언제나 좀더 효과적으로 시간을 쓸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아직도 배울 게 너무 많았다.  140

옷은 항상 감정을 물질로 변화시키지. 옷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잇는 다리 중 하나야.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만들었는데 결국 당신에게 와서 해를 입히는 옷들도 있지.

당신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은 옷들은 갖다버려. 나머지 옷들은 돌아가면서 입도록 하고, 지속적으로 토양을 갈아엎고, 물결에 거품이 일게 하고, 감정을 움직임 속에 두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야. 온 우주는 움직이고 있어. 그러니 우리도 가만히 정체되어 있으면 안 되는 거야.  183

변화가 없는 지식은 지혜가 아니야.

"이 힘은 대부분의 마녀들과 몇몇 특별한 여자들 사이에서 늘 저주받은 힘이었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은 이 힘에 대해 아고 있지. 그리고 우리 여자들은 우리 자신이 이 비밀의 위대한 수호자임을 알고 있고, 이 힘 때문에 우리는 위험하고 험난한 세상을 헤매며 살아가는 벌을 받았어. 왜냐하면 우리가 붇돋운 이 힘은, 어떤 곳에서는 혐오스럽게 여겨지거든. 부지불식간이라도 일단 그 힘을 접하게 되면 평생 그것에 결속되어 살게 되지. 그 힘의 주인이 되거나 노예로 사는거야. 그것을 신비로운 힘으로 변형시키거나, 혹은 그 엄청남을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사용하게 되는 거지. 그 힘은 우리를 둘러싼 만물에 깃들어 있고, 평범한 사람들의 누넹 보이는 세계와 신비주의자들의 보이지 않는 세계 모두에 존재하고 있어. 그 힘은 학살될 수도, 모욕당할 수도, 숨겨질 수도, 심지어 부정될 수도 있어. 수년간 잠들어 있을 수도, 어느 구석엔가 처박혀 잊힐 수도 있어. 인류는 그 힘을 가지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지. 오직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그것은 이 힘을 깨닫게 되는 순간, 인간은 평생 그것을 절대로 잊을 수 없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 힘이 뭔데요?"

"계속 그렇게 어리석은 질문 하지 마." 위카가 대답했다. "나는 당신이 그게 무너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브리다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섹스였다.  189-190

"남자든 여자든 섹스의 힘에는 지극히 위약해. 왜냐하면, 섹스에서는 쾌락이나 두려움이나 모두 똑같이 중요 하거든."

"왜 쾌락과 두려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걸까요?

드디어 브리다는 대답할 가치가 있는 질문을 한 것이었다. 

"섹스를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거든. 자신이 통제력을 잃어야만 그 절정에 이를 수 있는 경이로운 현상을 앞에 두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누군가와 한 침대에 들어갈 때, 우리는 육체뿐 아니라 우리의 전 존재와 교감하도록 허락하는 거야. 우리와는 별개로 생명의 그 순수한 힘들은 서로 소통을 하고, 그리고나면 우리가 누구인지 숨길 수가 없게 되지.

자기 자신에 대해 품고 있는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 아무리 멋진 가면을 쓰든, 제아무리 똑똑한 대답을 하든, 그럴싸한 변명을 하든,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섹스를 할때는 상대를 속이기가 어려워, 각자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주게 되기 때문이지."  191-192

감정은 야생마와도 같아,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달라고 떼를 썼다. 브리다는 그것이 제풀에 지칠 때까지 한참동안 제멋대로 날뛰도록 내버려두었다. 감정은 그녀가 그와 사랑에 빠진다면 그날 오후가 얼마나 근사해질지 이야기했다. 사랑에 빠지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고, 감히 생각지 못한 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197

섹스를 위해 침대로 향할 때는 오직 사랑, 그리고 제대로 작동하는 오감만 가지도록 하게. 그래야만 신과의 소통을 경험할 수 있어.  208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답을 찾는 것이 아니야. 받아들이는 거지. 그러면 삶은 훨씬 강렬해지고 환희로 가득 차게 돼. 삶의 매 순간순간에, 우리가 내디디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우리 개인을 넘어서는 훨씬 커다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이해하기 때문이지. 우리는 시간과 공간 어딘가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그것으로 족해.

우리는 믿음을 갖고 어두운 밤 속으로 침잠하고, 고대 연금술사들이 '자아의 신화'라 부르는 것을 완수하고, 우리가 받아들이든 말든 늘 우리를 이끌어주는 손이 있음을 믿고 매 순간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거지."  232


감정이란 야수와 같아서, 그것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했다.  247


살아가면서 중요한 한 가지를 찾았다고 해서 그 때문에 다른 중요한 것들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  278


저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하지만 삶을 낭비하는 것은 더욱 두렵습니다.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들을 담고 있기에 저는 사랑이 두렵습니다. 사랑은 그토록 밝게 빛나지만, 그것이 던지는 그림자가 저를 두렵게 합니다.  284


한동안 브리다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표지도 발견할 수 없었다. 대답은 그곳에, 그녀 앞에 있었다. 대답은 십자가에 못 박힌 남자였다. 그는 자기 역할을 다했고, 각자가 자기 역할을 다하면 아무도 더는 고통받지 않으리라는 것을 몸소 세상에 보여주고 있었다.

꿈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모든 인간을 위해, 그가 이미 고통받았기 때문이었다.  285


계속 하나가 되려면, 가끔은 상대방의 현에 발을 내디뎌야 했다.  291


"인간은 동굴에 거주하던 시절부터 축제를 열었네." 마스터가 대답했다. "축제는 우리가 아는 최초의 집단 제의야. 그리고 태양 전승은 오늘날까지 그것이 생생하게 이어져내려오게 하는 책임을 맡았어. 좋은 파티는 참석한 이들의 부정적인 파동을 정화해주지. 하지만 그렇게 되게 하는 건 쉽제 않은 일이야. 불청객 몇 사람만 있어도 즐거운 분위기는 쉽사리 깨지니까. 그런 이들은 자신들이 다른 이들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쉽사리 만족하지도 않아. 다른 이드로가 하나가 되지 못하니까 그곳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여기지. 결국 그들은 대개 다른 이들과 교감을 이루는 데 성공한 이들로부터 내몰린 나쁜 영(靈)의 찌꺼기를 짊어진 채 자리를 뜨게 되지.

명심하게. 신께 이르는 으뜸가는 길은 기도이고, 그 다음은 즐거움이라는 것을."  301


"그대는 그대의 길과 마주하고 있잖나. 그런 용기를 지닌 사람은 극히 드물지. 사람들은 자신의 길이 아닌 길을 걷길 더 좋아하거든.

모든 이들은 자기 재능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보려고 하지 않아. 그대는 자신의 재능을 받아들였네. 자신의 재능을 만난다는 것은 세상과 만난다는 의미인 게야."  332


"삶이란 이런 것일세." 마스터가 말했다. "실수의 연속이지. 수백만년 동안 세포는 정확히 똑같은 방법으로 번식해왔어. 그런데 그중 딱 하나가 실수를 저질러서 그 끝없는 반복 속에 변화가 생겨난 것이야."

브리다는 경이로움에 넋을 잃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지는 묻지도 않았다. 들리는 것은 마스터의 목소리뿐이었고, 떠오르는 것은 밀밭에서 시작했던 그 여행과 아주 비슷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실수가 세상이 움직이도록 추동한 거야." 마스터가 말했다. "실수를 결코 두려워하지 말게."  333


"절대 부끄러워하지 마시게."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생이 그대에게 주는 것은 모두 받아들이고, 그대 앞에 놓인 잔은 모두 마시게. 포도주란 모두 맛보아야 하는 것이지. 어떤 것은 한모금만 마시고, 또 어떤 것은 병째 마셔야 하네." 

"그걸 제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맛으로. 나쁜 와인을 맛본 사람만이 좋은 와인의 맛을 아는 법이지."  336


"그대는 받아들여졌네. 그대의 길이 평화의 순간에는 평화롭게를, 전투의 순간에는 전투가 되기를. 그리고 절대로 두 순간을 혼동하지 말기를."  337


당신은 내가 고독했던 시절에는 희망이었고, 의심했던 순간들에는 고통이었고, 믿음의 순간에는 확신이었어.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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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남들보다 재미있게 살아라
    
    마음껏 웃음을 터뜨리면서 최상의 시간을 가지는 것보다 기분을 들뜨게 
    하고 기운을 솟구치게 하는 것이 없다. 
    가능한 이런 웃음을 생활화한다면 사는 동안 즐거움과 활력이 넘칠 
    것이다.
    wn1 - 재미있게 산다는 건 ..??
    누구나 재미있게 살고자 하지 않을까.. 
    그러나 현실의 벽은 즐거움을 잊어버리게 만들기도 하는것 같다.
    때론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살 수 있을지 생각을 해 본다.
    그때마다 늘 답이 나오는것도 아니고 비슷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상황이나 여건에 따라 감정 상태에 따라 재미있는 것이 다를 수 있으리라.
    다시말하면 어떠한 상황이든 재미있게 살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것 아니겠는가.!!
    늘 즐거울 수 없을지 모르지만 문득 재미에 대해 생각이 들때 지금 바로 
    재미있는것이 어떤것인지 찾아보는 것 부터 해 나가보자.
    
    2. 통찰력을 얻어라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며 자기 만족조차 얻지 
    못하는 공허하고 초라한 삶을 살게된다. 
    통찰력은 우리가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그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렴풋이나마 깨달을때 얻어진다.
    wn1 - 통찰력이란건 직관도 필요하다..그러기에 지식도 필요하다 거기에 지혜가 함께하면
    꿰뚫어 볼 수 있는 힘이 생기는데... 통찰력을 그리 해석하고 싶다.
    물론 통찰력에 대한 의미로는 지식이나 지혜가 필요 없어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사유의 깊이가 있는 사람이 가능할 것이고, 
    일반적이라면 어느정도 이상의 직관 지식 지혜들이 필요하다.
    쉽게 말해 어떠한 일에 오랜기간의 경험과 결과가 있는 사람은 경험없이 접하는 사람의 
    말을 듣는것만으로도 문제점이나 과정...그리고 결과까지도 그려볼 수 있게 된다.
    통찰력이란건 ..꼭 경험이 많아야 할 필요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것들이 모여 자신에게
    통찰력을 가지게 할 것이다.

 
    3.깊이를 얻어라
    
    통찰력으로 최선의 나를 발견한다면 깊이로는 최고의 신을 발견한다.
    궁극적으로는 지혜가 다가와 우리를 껴안으며
    통찰력과 깊이가 하나임을 보여준다.
    wn1 - 깊이는 '사유'에 의해 깊게 만들 수 있다.
    고대 철학자들은 이런 사유를 통해 많은 것들을 깨달을 수 있었고, 
    스스로 내린 좋은 결론에대해 스스로 비판까지 해가면서 정말 옳은지에 대해서도 고찰하였다.
    그렇기에 자신의 신념을 위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고 스스로도 부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역시도 그들까지는 아니어도 그들처럼은 하려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깊이는 점점더 깊어 질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근래 인문학과 철학 책을 보면서 책을 읽엉낸 권수가 아닌 문장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들을 가짐으로 더 나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4. 도피처를 마련하라
    
    혼란스럽거나 부담스런 상황에 이르면 도피의 문을 연다.
    한계에 부딪혔다는 생각이들면 과감하게 떠나라. 
    그리고 돌아와도 괜찮을때까지 자신만이 즐겨찾는 도피처에서
    돌아오지마라. 
    자신의 영혼을 달래주고 채워주는 곳으로 멀리...
    wn1 - 여기서의 도피처는 문제가 생겼을때 해결을 하는것보다 도피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리라.
    여러가지 것들로 스트레스등을 받을 때 정리해 볼 수 있는 도피처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5.매일 밤 글을 써라
    
    하루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위대한 침묵을 통해 자기 반성을 하고 그 느낌을 글로 쓴다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wn1 - 아무리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글로 표현하라고 하면 당황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다시 말하면 말은 하겠는데, 그걸 정리해서 쓰는 것은 매우 어렵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말을 한다는 것은 쓸 수 있다는 것인데.. 막상 써보라는 말을 들으면 스스로 
    정리가 안된다고 단정지어버리게 되어 쓸 수 없게 되는것이다.
    이것은 쓰는 연습을 해보지 않아서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형식없이 무엇이든 써보는것만 으로도 정리하여 쓰는것에 어려움을 덜 가질 수 있으며,
    써봄으로 더 생각을 체계적으로 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나 역시도 이렇게 쓰고 있다..
    솔직히 정리해서 쓰지 않는다. 생각나는대로 쓰고 있다...
    시간이 지나 글을 보면 매우 부끄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때보다 지금쓰는것은 더 나아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너무 막연해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스스로 봐도 조금씩은 나아지는것을 느낀다.

    
    6. 자신의 직업에 대해 생각하라
    
    내 직업에 영향을 준 고마운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자신의 직업에 감사하는 마음을가져야 한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다른 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각해 본다.
    wn1 - 정말 지금의 내 직업이 즐거움을 주나?
    난 아직 모르겠다..??????
    감사한가? 그건 감사하다... 하지만 즐거운지는 모르겠다. 
    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쩝 아니.. 그러네..



 
    7.재미있는 사람이 되어라
    
    다양한 친구들과 교제를 통해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여야 한다. 
    그리고 최고의 자아를 실현할수 있는 길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는 
    일이다. 죽는 날까지 자신을 교육시키자.
     wn1 - 재미있게 사는것과 재미있는 사람이 되는것은 어느정도의 연관성이 있지만 다르기도 한것 같다.
    재미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여러가지 준비도 필요한듯하다..
    물론 원래부터 재미있는 사람이라면 관계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재미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자신을 교육시키는 것도 필요한듯하다.
    우리는 누구나 평생 공부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재미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공부가 어느정도는 필요한듯하다.
    솔직히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재미없는 사람이며 재미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공부해 보자..!!

    8. 잠시동안 혼자 살아라
    
    혼자 사는 생활은 일상의 끊임없는 욕구에서 
    한발 물러서는 여유를 가짐으로 평화와 고요의만족을 느낄수 있다. 
    제안이나 경계없이 우리의 인생에 접근할수 있도록하며 자아와 새로운 
    인생을 발견하게 한다. 
    그러나 혼자 사는 외로움과 스트레스 등도 알아야 함을..
    wn1 - 현재 혼자 살고 있다. 혼자사는 것에 장단점은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다.
    시간이 갈 수록 게을러져서 더 힘들기도 하지만..때론 더 즐겁기도 하다..
    무엇을 하든 즐거울 수 있다고 말한 1번에서 처럼.. 혼자서의 생활에서
    보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기도 한듯하다.

 
    9. 자신을 소중히 대하라
    
    자신을 소중히 대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 역시 소중히 대할 줄을 안다.
    wn1 - 절대적으로 공감된다.
    자신이 소중하면 타인이 그 누구라도 소중한 사람이어야 한다.
    물론 자신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느끼지 않겠지만..
    우리는 모두가 자기의 인생에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조연이 받쳐주지 않으면 빛을 발하기 어렵다.
    잠시 발할 수 있을지모르지만 길게 가기 힘들다.
    예전엔 TV를 봐도 주연만이 부각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주연만큼 빛나는 조연들이 부각되고 있다.
    그러 더해 그러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필하는 사람들까지도 인정받고 존중받고 있다.
    그처럼 지금 나의 인생의 조연들에게 그들이 있어 자신이 더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움을 갖자
    그렇게 한다면 누구도 무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겸손하게 되는 길이기도 한듯하다
    
    10. 아무것도 잃을게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라
    
    무언가를 잃는것보다 더 나쁜 것은 인생에 없다. 
    그러나 잃어야할 것을 잃고 나면 신비스런
    죽음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생으로의 비밀스런 준비도 
    있음을 알아야한다. 그리될때 인생을 보는 시각은 더크고 넓어지며 
    삶의 모든 부분이 전보다 더 신성하게, 더 재미있게 드러나고 사는 
    법을 알게 되지 않을까...
    
    wn1 - 내 사유로서는 아직 따라가지 못하는 것들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잃을게 없다.. 
    근데 아직도 때때로는 잃는것에 대한 두렴움을 가지고 있는 나를 발견할때가 있다.
    그렇다면 잃는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정상일까?
    솔직히 그건 아니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아직 잃는것에 대한 두려움은 존재한다.
    깊이가 필요할 듯 한것 같다..



wn1 - 지금 당신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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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소리를 들어라

삶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마음의 평화에 대한 문제다.

우리는 곧잘 삶의 고통에 대해
외부의 것들에 그 원인을 돌리지만


사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다.
틱낫한은 우리의 마음을 "밭"에 비유한다

그 밭에는 기쁨. 사랑. 이해. 즐거움. 희망과 같은
긍정적인 씨앗이 있는가 하면



두려움과 분노. 미움. 절망. 시기. 외로움.
그리고 건강치 못한 집착 등과 같은


부정적인 씨앗이 있다.


과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길 원하는가?

그렇다면 조용히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고
일기를 쓰는 것도 좋다.



평소에 무엇인가에
마음이 자꾸 끌리거나 관심이 있다면


무시하지 말고 잘 관찰하고
당신과의 연관성을 찾아보아라.



그것은 당신이
한 평생을 바쳐 간절히 원하는


무엇인가를 찾기 위한
열쇠일 가능성이 높다.


wn1 - 자신이 자신을 위한 시간을 투자하는 것 만큼 중요하면서도 필수적인것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삶이 바빠서 ...무엇에 그리바쁜지 그것들 때문에 자신을 위한 것은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것이다..

그러지 말자.,

자신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것 부터..하자..

사람만나는것..영화보기..차마시지..수다떨기..TV 보기.. 인터넷 열어보기..게임하기 ..등등...이런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정말 자신에게 중요한것은 무엇인가?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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