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과학



역사철학 3장 - 우금치의 하늘 같은 님들

다행스럽게도 1940년 간행된 오지영(1868~1950)의 <동학사(東學史)>가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
<동학사>는 열두 개 조로 구성된 개혁 강령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해치는 자는 목을 벤다.
둘째, 탐관오리는 제거한다
셋째, 포악스런 지주들은 엄징한다.
넷째, 유림과 양반들의 소굴을 공격해서 파괴한다.
다섯째, 가난한 백성들의 병역 문서를 불태운다.
여섯째, 종 문서를 불태운다.
일곱째, 백정의 머리에서 패랭이를 벗기고 갓을 쓰게 한다.
여덟째, 규정되지 않는 세금은 일절 걷지 않는다.
아홉째, 공사체는 물론하고 과거의 모든 부채는 무효로 한다.
열째, 외적과 연락하는 자는 목을 벤다.
열한째, 토지는 균등하게 나누어 경작한다.
열두째, 농민군의 두레법을 장려한다.  - <동학사> (초고본)  389-391

이 열두 개 강령이 중요한 이유는 집강소가 과거 억압적인 정부처럼 권위적인 정치기구가 아니라 오직 이 강령을 집행하려는 기구기 때문입니다. ‘집강소(執綱所)’란 글자를 보세요. ‘강령(綱)을 집행하는(執) 곳(所)’이라는 뜻입니다.  392

<프랑스내전>에서 마르크스가 파리코뮌을 분석하면서 말했던 “자유롭고 연합적인 노동”이 바로 집강소를 통해서 구체화된 겁니다.  393


정치철학 3장 - 유물론과 관념론을 넘어서

첫 번째 테제의 모든 문장은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들처럼 하나의 개념을 바라보고 있다. “대상적 활동(Genebstandliche Tatigkeit)!”  424

활동(Tatigkeit)이란 말은 사물이 아니라 생명체에만 적용되는 개념이다. 활동하는 고양이라는 말은 써도 활동하는 바위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활동은 모든 생명체가 가진 능동성을 가리키는 개념이라고 하겠다. 결국 핵심은 ‘대상적’이라는 형용사에 들어 있는 ‘대상(Genebstand)’이라는 말이다. 이 독일어는 ‘거스르다’, ‘반대하다’, ‘저항하다’는 뜻의 ‘게겐(Gegen)’이란 어근과 ‘서 있다’라는 뜻의 ‘슈탄트(stand)’라는 어근이 결합된 말이다. 게겐슈탄트는 “우리에게 맞서서 서 있는 타자”나 “우리의 뜻에 거스르는 외부의 무언가”를 의미하는 말이다.  424

우리의 뜻을 좌절시키고 우리의 삶을 불편하게 만들고 나아가 우리의 힘을 시험하는 그 무엇! 삶에서 만나는 회피할 수 없는 어떤 저항과도 같은 그 무엇! 삶에서 만나는 회피할 수 없는 어떤 저항과도 같은 그 무엇! “우리에게 맞서서 우리뜻에 거스르며 당당히 서 있는 것”, 바로 그것이 게겐슈탄트다. 결국 마르크스가 ‘대상적 활동’ 개념으로 포착하고자 했던 것은 이런 게겐슈탄트에 맞서 우리는 활동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425

우리는 우리에게 “나처럼 하라(fais comme mou)”고 말하는 사람에게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우리의 유일한 스승들은 우리에게 “나와 같이하자(fais avec moi)”라고 말하는 사람들, 우리에게 재생해야 할 몸짓들을 제시하는 대신 다질성안에 펼쳐질 기호들을 발산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차이와 반복>(1968)  430-431

들뢰즈는 수영 교사에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한 사람은 “나처럼 하라”고 말하는 수영 교사이고, 다른 유형은 “나와 같이하자”고 말하는 수영 교사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자가 “동일성의 반복”을 강조하는 수영 교사라면, 후자는 “차이의 반복”을 강조하는 수영 교사라고 하겠다. 동일성의 교사와 차이의 교사! 두 종류의 수영 교사는 모두 자기 “신체가 자신의 특이점들을 물결의 특이점들과 결합하는” 데 성공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동일성의 교사는 자기 신체와 학생들의 신체가 ‘차이’가 난다는 것, 그리고 자기가 헤엄쳤던 물결과 학생들이 헤엄칠 물결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니 이 교사는 “나처럼 하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 교사는 수영 교본을 출판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 교본은 수영을 배우려는 사람에게 수영을 잘하리라는 헛된 희망만을 줄 뿐 실제로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차이의 교사는 자기 신체와 학생들의 신체 사이에, 그리고 자신의 물결과 착생들의 물결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걸 안다. 그러니 차이의 교사는 “나와 같이하자”라고 학생들에게 말했던 것이다. 학생들의 신체와 자기 신체의 차이를 알려면, 혹은 그 차이를 학생들에게 알려주려면,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말이다. 물론 차이의 교사는 수용 교본을 집필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433-434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중 첫 번째 테제 첫 문잘을 보라. 마르크스는 “대상을 ...... 객관이란 형식으로만 생각하는” 사유의 맹점을 이야기한다. 마르크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상(Gegenstand)과 객관(Objekts)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객관이란 관조된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435

“비대상적 존재(ungegenstandliches Wesen)는 비존재(Unwesen)다!” 대상적 존재만이 존재한다는 마르크스의 선언이다. 여기서 핵심은 ‘비대상적’이나 ‘대상적’이라는 수식어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대상’ 개념이다. ... 우리 앞에 우리의 의지에 저항하는 무언가가 버티고 서 있다. 바로 이것이 게겐슈탄트, 즉 대상이다. 그 대상이 내 앞을 가로막는 급류일 수도 있고, 비바람일 수도 있고, 산길에거 만난 뱀일 수도 있고, 권위적인 직장 상사일 수도 있고, 달려오는 자동차일 수도 있고, 건물 위에서 떨어지는 물건일 수도 있다. 이렇게 대상과 마주칠 때, 우리는 ‘대상적 존재’가 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마르크스에게 대상과 객관은 완전히 다르다. 삶의 차원에서 마주치는 타자가 대상이고, 의식 차원에서 관조되는 대상이 바로 객관이니까. 달리 말해 대상은 우리 삶에 무언가 저항의 힘을 발휘한다면, 객관은 그저 관조하는 풍경일 뿐 우리에게 저항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440

마르크스의 입장은 분명하다. 대상과의 마주침이 먼저이고 주관과 객관은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대상과 마주치는 대상적 존재는 당연히 감성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보통 시각, 청각, 후각, 미각, 그리고 촉각을 다섯 가지 감각이라고 한다. 대상적 존재의 감성에는 이 오감이 마치 교향곡의 악기들처럼 함께 어울린다.  442

“감성적 존재는 겪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443


마르크스의 대상적 활동 개념이 출현한다. “인간은 자기외화를 통해 자신의 현실적이고 대상적인 존재의 힘들을 낮선 대상들로 정립한다.”
‘자기외화’란 육지에 익숙해진 자신을 포기하고 낯선 물에 들어가는 행위를 가리킨다. 물결의 신체와 인간의 신체가 결합되기를 반복하면서, 점점 그는 수영 달인이 되어간다. 그에게 “대상적 존재의 힘”, 즉 대상적 활동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449

수영 동영상을 아무리 반복해서 본다고 해도 수영하는 신체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수영 교본을 달달 외우고 교본 안의 사진을 숙지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혹은 강가에 앉아 물의 유속과 깊이, 그리고 부력을 과학적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 수영의 경우처럼 나뭄와 마주쳐 근사한 나무 인형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대상적인 존재의 힘을 가진 주체”, 즉 생각과 육체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인간 주체일 뿐이다.  450

마르크스는 자기 철학을 “자연주의(Naturalismus)”나 “인간주의(Humanismus)”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대상적 활동을 긍정하는 이념을 자연주의나 인간주의라고 부르자는 것이다. ... 자연주의의 반대에는 초자연적인 신이나 세계를 초월하는 원리를 긍정하는 초월주의(Transzendentalismus)가 놓여 있다.  ... 인간주의의 반대편에는 인간의 육체성을 부정하는 정신주의(Spiritismus) 전통이 놓여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마르크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자연주의나 인간주의는 “관념론 및 유물론과 구별되며 동시에 이 양자를 통합하는 진리”라고 말이다.  453

인간의 육체성, 수동성, 조건성, 비 자발성을 부저할 때 출현하는 것이 관념론이고, 반대로 인간의 정신성, 능동성, 자유, 혹은 자발성을 무시할 때 출현하는 것이 유물론이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철학은 우리에게 섬세한 사유를 요구한다.  454

마르크스는 인간의 자발성과 자유만을 강조하는 관념론자도 아니었고, 인간이 외적 환경이나 경제적 조건, 혹은 물질적 상황에 규정된다는 유물론자도 아니었다. 그는 철학사의 해묵은 대립, 즉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갈등을 ‘대상적 활동’ 개념으로 해소하는 데 성공하니까.  455

“지금까지 모든 유물론-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포함하여-의 주된 결함은 대상, 현실, 감성을 객관이란 형식이나 직관이란 형식으로만 생각했을 뿐 감성적인 인간 활동이나 실천으로,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활동의 측면은 유물론과 대비되어 관념론에 의해 발전되었지만, 관념론은 현실적이고 감성적인 활동 자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발전은 단지 추상적일 뿐이었다.”
... 마르크스의 입장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유물론은 ‘대상적 활동’에서 ‘대상’만 보았을 뿐 ‘활동’을 부정했고 관념론은 ‘대상적 활동’에서 ‘활동’만 보았을 뿐 ‘대상’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456

마트료시카(Matryoshka)라고 불리는 러시아 전통 인형이 있다. 똑같은 모양이지만 크기가 작은 인형들이 인형 안에 중첩해 들어 있다. 제일 겉 인형이 포이어바흐였고, 이 인형을 열어 만나는 두 번째 인형이 헤겔이었다. 헤겔 인형을 열면 그 안에는 유물론 인형이, 유물론 인형을 열면 그 안에는 관념론 인형이, 관념론 인형을 열면 서양철학 인형이 놓여 있었다. 모두 세계를 변화시키기보다는 세계를 관조하고 해석하는 사유 전통이다. 마르크스는 차곡차곡 작은 인형들을 포이어바흐 인형에 넣어 하나로 만든 다음, 이 인형을 발로 차버린 것이다. 그 빈자리에는 ‘대상적 활동’ 개념이 마르크스의 강건한 발과 함께 남아 있다.  458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중 여섯 번째 테제의 핵심이다. 이것은 사회적 관계가 변하면 인간의 본질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마르크스의 관계주의다. 한마디로 불변하는 본질 같은 것은 없다는 이야기다.  459

본질 혹은 본성의 계보학은 단순하다. 먼저 첫 번째, 자발적이든 타율적이든 관계가 지속된다. 두 번째, 그 관계는 관계에 들어간 개체들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게 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바로 이 사후적 흔적, 지속적으로 관찰되는 이 흔적을 우리는 본성이라고 혹은 본질이라고 부른다.  460

자신에게 어찌할 수 없는 본질이 있다고 믿는 순간 개개인은 주어진 사회적 관계를 극복할 수 없다. 나는 약한 여자니까 어쩔 수 없어, 나는 노예니까 어쩔 수 없어, 나는 노동자니까 어쩔 수 없어 등등. 본질은 없고 관계만이 있다는 관계주의 입장이 해방적 효과가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내가 여자의 본성이 있어서 공손한 여자가 된 것이 아니다. 억압구조가 나를 옴짝달싹 못ㅎ하게 규방에 감금하고 내가 순종적인 여자의 본성을 믿도록 훈육했을 뿐이다. 내가 노예의 본성이 있어서 노예가 된 것이 아니다. 억압구조가 나를 노예로 포획하고 내가 순종적인 노예의 본성을 믿도록 훈육했을 뿐이다. 내가 노동자의 본성이 있어 회사에 출근하는 것은 아니다. 억압구조가 나를 임금노동자로 만들었고 내가 노동을 파는 노동자의 본성을 믿도록 훈육했을 뿐이다. 본질이나 본성이 존재한다는 일체의 입장에 속지 말자! 본질이나 본성에 사로잡히는 순간, 그것을 강요했던 억압구조, 즉 특정한 사회적 관계가 우리 눈에 들어올 리 없으니 말이다.  460-461

고대사회든 중세사회든 아니면 부르주아사회든 다수 민중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소수 지배계급은 항상 자기 체제가 불변하기를 원했다. 노예가 있어야 귀족도 존재하고 농노가 있어야 영주도 존재하고 노동자가 있어야 자본가도 존재하는 법이다. 그러니 귀족은 노예를 계속 소유하려고 하고, 영주는 자기 영지를 지키려고 하고, 자본가는 생산수단과 생계수단을 독점하려고 한다. 한마디로 지배계급은 자신을 지배계급으로 만드는 ‘생산력’,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등 물질적 조건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문제는 억압되고 수탈당하는 다수 민중들의 저항이었다. 그들은 언제든지 억압적 관계를 문제 삼을 수 있으니 말이다. 지배계급이 본질주의를 유포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노예는 노예의 본질이 있어서 노예이고 귀족은 귀족의 본질이 있어 귀족이라는 식의 본질주의는 이렇게 탄생한다.  463

지금까지 모든 혁명은 ‘활동양식’을 변화시키지 않은 채, 단지 그 활동의 새로운 분배만을, 즉 다른 사람들에게 노동을 새롭게 분배하는 것만을 문제 삼았다. 이에 반해 ‘코뮌주의혁명’은 지금까지 존재하는 ‘활동양식’에 반대하며 ‘노동’을 없애버리고, 온갖 계급의 지배와 더불어 그 계급들 자체를 없애버린다. - <독일 이데올로기>

마르크스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명은 일어난 적이 없다. 노예가 농노가 된 것, 혹은 농노가 노동자가 된 것이 무슨 혁명이란 말인가? 주인집에 감금된 노예가 사라지고 출퇴근하는 노동자가 등장했다고 해서 진보를 이야기할 수 있는가? ... 혁명이랑 아무런 상관이 없고, 단지 지배양식과 수탈양식의 세련화에 지나지 않는다.  465-466

고대사회의 노예도, 중세사회의 농노도, 그 리고 부르주아사회의 노동자도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원하는 걸 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 노동을 분배하는”, 혹은 “노동을 강요하는” 것이 가능한 사회는 본질적으로 노예제사회일 뿐이다.  466

“지금까지 존재하는 활동양식에. 반대하고 ‘노동’을 없애”버려야 한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혁명이다. 정신노동을 담당하는 소수가 지배계급이 되고, 육체노동을 담당하는 다수가 피지배계급이 되는 활동양식을 극복해야 한다. 그래야 더 이상 ‘노동’, 즉 육체노동이 피지배계급을 상징하는 저주가 되기를 그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긍정하는 대상적 활동이라는 자기 자리를 찾게 된다.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고뮌주의혁명이다.  467

어떤 자가 폭력으로 지배하면, 다른 사람들은 다만 그 주먹에 굴복하여 한탄하면서 시달림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야생인들(des homme sauvages) 사잉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들에게 복종(servitude)과 지배(domination)가 무엇인지 이해시키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남이 따온 과일이나 잡아온 먹이 또는 은신처인 동굴을 빼앗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어떻게 나들을 복종시킬 수 있겠는가? 게다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어떤 의존적 사슬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한 나무에서 쫓겨났다면 그때는 다른 나무로 옮겨가면 그만이다. 또 만일 어떤 장소에서 고초를 당할 경우 내가 다른 장소로 옮겨가는 것을 그 누가 방해한다는 말인가? ...... 복종관계란 사람들의 상호의존과 그들을 결합시키는 상호욕구가 있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것은, 미리 그를 다른 사람이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상황(situation)에 두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황은 자연상태에서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거기에서는 누구나 구속을 벗어나 자유의 몸이며 강자의 법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1754  469-470

동물농장의 동물 가축들을 고삐로 통제했다면, 인간농장의 인간 가축들을 통제하는 데에는 고삐 외에 언어가 필요하다. 바로 이것을 간파했던 것이 루소의 후배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 1908~2009)였다. 선배 루소가 다양한 책들을 접하면서 ‘자연상태’와 ‘인간농장’을 구분했지만, 후배 레비스트로스는 프랑스라는 인간농장을 떠나 몸소 자연상태를 해매고 다녔다. 그 결과 그는 선배가 주목하지 않았던 놀라운 사실, 인간농장을 유지하는 비밀을 발견한다. 그것은 문자와 관련된 교육의 문제였다. 그가 최초의 인간농장을 상징하는 기념물 피라미드에서 보았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문자의 출현과 문명의 어떤 다른 특징들을 관련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른 곳에서 그 관련성을 찾아야만 한다. 여기서 항상 수반되는 한 가지 현상은 도시와 제국의 형성이다. 이것은 상당수 개인들을 하나의 정치체제 속으로 병합하는 것이자 이 개인들을 카스트와 계급으로 위계화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현상이 문자가 처음으로 등장했을 순간에 이집트에서 중국에까지 발견되는 발달이다. 이 현상은 인간의 계몽(illumination)보다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수탈(exploitation)을 조장하는 듯하다. 이 수탈은 노동자를 수천 명씩이나 모아서 그들의 체력이 닿는 데까지 강제로 일을 시킬 수 있었다. 이 점과 관련해 우리가 알고 있는 건축의 탄생은 이런 수탈에 의존해 있었음을 알아야만 한다. 만약 나의 가설이 옳다면 의사소통의 한 수단으로서 문자의 일차적 기능은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한) 노예화를 촉진하는 데 있다. 공정한 목적을 위한 문자의 사용, 그리고 지적이거나 미적인 만족을 위한 문자의 사용은 문자 발명의 이차적 결과물에 지나지 않으며, 심지어 문자의 일차적 기능을 강화하고 정당화하거나(justifier) 혹은 은폐하는(dissimuler) 방식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 문자는 인간의 인식(connaissances)을 공고하게 만들지는 않았고, 지배(les dominations)를 영속화하기 위해 불가결한 존재가 되어왔던 것 같다. 우리와 더 가까운 상황을 고려해보자. 19세기 의무교육을 지향했던 유럽 국가들의 체계적 조치는 군복무의 확장과 (민중들의) 프롤레타리아와와 그 맥을 같이한다. 문맹과의 투쟁은 때때로 권력에 의한 시민 통제 강화와 구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을 때에만, “누구도 법을 모른다고 여길 수 없다”고 선포할 수 있으니까. - <슬픈 열대> (1955)
BC 8000년의 농업혁명은 막대한 잉여 생산물을 남기게 되는데, 이것이 무위도식하는 지배자와 지배계급을 탄생시킬 물질적 조건이 된다. 마침내 BC 3000년쯤 ㅇ이집트에 파라오(Pharaoh)라는 최고 지배자가 군림했던 최초의 제국이 세워진다. 정확히는 BC 3150년경 이집트 제1왕조가 탄생한 것이다. 90%의 피지배계급이 육체노동으로 10%의 지배계급을 먹여 살렸던 억압사회다. BC 2613년에서 BC 2494년까지 지속되었던 이집트 제4왕조는 매우 상징적이다. 제4왕조는 피라미드(pyramid)의 왕조였기 때문이다. 피라미드는 왕조의 최고 지배자 파라오의 무덤이지만, 동시에 이집트왕조의 복잡한 위계질서를 그대로 구현한 상징이기도 했다. 피라미드의 제일 하단은 이집트왕조의 피지배계급을 상징한다면 피라미드 상단은 파라오를 정점으로 하는 지배계급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피라미드가 위계구조를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제4왕조는 어느 전투에서 1만 1000명의 포로와 13만 100마리의 양을 전리품으로 얻었다고 하니, 당시 이집트 제4왕조의 인구는 못해도 500만 명 이상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통제하고 수탈하려면 문자와 숫자 체계가 완비되어야 하며, 동시에 피지배계급도 이런 문자와 숫자 체계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포고문만으로 혹은 통지서만으로 지배와 복종 관계가 원활해질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노예 등 최하 지배계급은 문자와 숫자를 배울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노예는 반드시 주인의 음성언어는 이해할 수 있도록 훈육되어야 한다. 그래야 주인이 노예를 부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문자체계의 발달이 억압체제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면, 제4왕조 시절 기자(giza)에 건설된 피라미드를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듯하다. 이 피라미드는 높이 146.5미터와 밑변 230.4미터의 규모로 전체 5900만 톤에 달하는 약 230만 개의 석회암과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 피라미드는 약 10만 명의 인력이 매일 일해 20년 정도 걸려서 완공되었다고 추정된다. 10만 명이다. 일사불란한 언어체계가 없으면 공사장은 그저 난장판이 되기 십상이다. 한 두 명의 노예를 부리는 것이라면 말로도 충분하겠지만, 10만 명의 인력을 부리려면 문자와 숫자에 대한 명료한 체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가장 하급 관리자는 상부에서 받은 명령문을 이해할 수 있어야하고, 직접 돌을 운반하는 노예들도 최소한 하급 관리자의 구두 명령 정도는 알아들어야 한다. <구약>의 첫 장인 <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 이야기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오만하게도 인간이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고 하자 신은 인간의 그 공사를 좌절시키려고 한다. 그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통일되어 있던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해 그들이 상대방의 말을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드는” 방법이었다.
통일되고 체계적인 문자가 없다면, 거대한 피라미드도 만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왕조도 유지될 수 없었다. 그러니 문자와 숫자, 나아가 음성언어에 대한 교육은 억압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조치였다. 레비스트로스가 “문자”, “수탈”, “위계화”, “건축”, “노예화”를 인간논ㅇ장의 최초 징후라고 독해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인간을 가축으로 부릴 때 언어는 가장 효과적이고 결정적인 고삐가 된다. ..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 때, 가장 먼저 한 조치가 일본어 교육이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457-478

인간을 가축화할 때 재갈과 고삐보다 말과 문자가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지배계급은 알았던 것이다.  478

레비스트로스는 노예화와 관련된 일차적 기능 이외에 언어에 다른 기능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표면적으로 문자가 노예화와 무관하게 사용된 사례로 그는 세 가지를 든다. 하나는 “공정한 목적”을 위한 문자 사용, 두 번째는 “지적인 만족”을 위한 문자 사용, 그리고 세 번째는 “미적인 만족”을 위한 문자 사용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란 근본적 위계구조가 전제된 이상, 언어 사용의 이차적 기능은 언어의 노예화 기능을 강화하고 정당화하거나 아니면 은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레비스트로스의 냉정한 판단이다. 479-480


고대문명은 인간 가축화의 서막에 지나지 않고, 그 가축화에는 문자가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이것이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이다. 거대 건축물이 인류 문명의 보고라는 편견에 대한 조롱이기도 하다. BC 3000년 전후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세계 4대 문명은 문명이라기보다 문명의 탈을 쓴 야만의 시작을, 혹은 인간이 동료 인간을 가축화하는 비극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482

피라미드의 인부들 중 그 누구도 피라미드에 묻힐 수 없었던 것처럼, 안전띠를 매고 아찔한 철골 구조에 몸을 맡긴 노동자들 중 그 누구도 피라미드에 묻힐 수 없었던 것처럼, 안전띠를 매고 아찔한 철골 구조에 몸을 맡긴 노동자들 중 그 누구도 이 거대한 건물에 입주할 수 없다. 폭력수단을 독점해 노예와 민중을 지배했던 파라오나 생산수단과 생계수단을 독점해 노동자들을 지배했던 자본가들은 여전히 정신노동이란 미명하에 육체노동자들을 착취했던 것이다.  483

파라오 시대와 자본계급 시대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폭발적인 인구 증가에서도 찾을 수 있다.  483

이제는 정말 음성만으로 노동계급을 통제하기에는 역부족이 된 것이다. 바로 여기서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의무교육의 필요성이 대두한다. 물론 의무교육의 핵심은 문자 해독 능력, 다시 말해 문자로 쓰인 주인의 명령을 정확히 이해하고 시행할 수 있는 능력의 함양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말한다. “19세기 의무교육을 지향했던 유럽 국가들의 체계적 조치는 군복무의 확장과 (민중들의) 프롤레타리아화와 그 맥을 같이한다”고.
19세기 이후 본격화한 유럽의 국민국가들을 상징하는 것은 식민지 쟁탈 경쟁이었다. 패권주의로 무장한 국가들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우월한 군사력과 압도적인 생산력을 먼저 확보해야 했다. 군사력과 생산력의 기원은 결국 국민들, 혹은 민중들의 노동력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럽 국가들은 전체 국민을 효과적으로 동원하고 조직하고 운용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고, 그 결과물이 당시 유럽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시행했던 의무교육이었다. 이제 피지배계급은 구두 명령이든 문서 명령이든 지배계급의 명령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능력을 기르도록 강제된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노예화가 제도화된 셈이다. 당연히 의무교육에서 복종의식을 함양하는 작업은 필수적이다. 아무리 명려을 이해하는 문자 해독 능력을 갖추어도 이해된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자유인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굴욕이지만 의무교육이란 미명으로 이 복종 교육은 별다른 무리 없이 진행된다. 의무교육의 대상은 어린아이들이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 때도 일제 시절에도 체제에 대한 충성 맹세가 어린아이들의 입에서 울려 퍼졌다. 1892년 국기 페티시즘을 처음으로 드러냈던 미국은 1953년 생전체제 때 국기에 대해 맹세를 읊도록 했고, 그 맹세는 21세기 지금도 다양한 피부색의 미국 아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우리의 경우 박정희(1917~1979) 군사독재정권이 지배하던 1972년부터 아이들은 조회 때마다 국기를 보며 충성을 맹세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외위고 있는 충성 맹세문은 2007년 참여정부를 자처하며 진정한 민주주의를 표방했던 노무현(1946~2009) 정권 때 개정된 것이다. 1972년 <국기에 대한 맹세>가 일본제국이 우리 아이들을 훈육했던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의 정신과 미국의 국기 페티시즘이 결합된 형태였다면, 2007년부터 우리 아이들이 동요라도 되는 듯 외우고 있는 버전은 그냥 노골적으로 1953년부터 지금까지 미국 아이들이 외우는 <충성의 맹세(Pledge of Allegiance)>의 짝퉁 버전이다. 19세기 이후 지금까지 국민들을 노예화하려는 부르주아국가들의 속내를, 그들이 만들어 강요했던 낯부끄러운 충성 맹세문의 파노라마를 통해 확인해보자.
나는 성스러운 맹세를 신에게 바칩니다.
나는 독일제국과 민중의 지도자이자 군대 최고사령관 아돌프 히틀러에게 무조건 충성을 바칠 겁니다.
나는 용감한 병사로서 항상 이 맹세에 나의 생명을 바칠 준비를 할 겁니다. - <아돌프 히틀러에게 바치는 충성 서약> (1934)
1.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3. 우리는 인고 단련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황국신민서사>(1937)
나는 미합중국의 국기에 대해, 그리고 이것이 표상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자유와 정의가 함께하고 (기독교의) 신 아래에서 갈라질 수 없는 하나의 국가, 공화국에 대해 충성을 맹세합니다. - <충성의 맹세> (1953)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자유롭게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 <국기에 대한 맹세> (1972)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구그이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 <국기에 대한 맹세> (2007)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말이 얼마나 허황된 미사여구인지 분명해진다. 국기도, 국가도, 관료도 국민의 위에 있는 것이 아닐 때에만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말이 의미를 가진다. 국가가 내용에나 형식에서 국민들, 즉 사회의 하부에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니까, 그렇지만 나치 때도, 일본제국주의 시절에도, 독재 시절에도 심지어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 당연히 이것은 국가의 최고 실권자에 대한 충성일 수밖에 없다. 2007년 개정된 <국기에 대한 맹세>를 읽어보라. 부르주아체제에서 자유는 사유재산을 가질 수 있는 자유와 그것을 처분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부르주아체제에서 정의는 토지를 가진 사람, 돈을 가진 사람, 그리고 노동력만을 가진 사람 사이에 생산물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정의를 의미한다. 결국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은 우리 국가가 민주주의국가가 아니라 부르주아극가라는 것을 명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484-487

<국기에 대한 맹세>가 울려 퍼지는 국가에서 의무교육의 일차적 목적은 너무나 자명하지 않은가. 지배계급의 명령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문자 교육과 그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제2의 천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체제의 유지와 발전에 도움이 되는 실무교육도 아울러 병행된다. .. 물론 부르주아체제는 기회 균등을 이야기하면서 자기 속내를 효과적으로 은폐한다. 다시 말해 교육은 민중들 자신을 위한 것이지 국가나 지배계급을 위해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생각해 보라. 정말로 민중들을 위하는 것이라면 교육을 ‘의무’의 형태로 강요하는 일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487

1987년 10월 29일 마지막으로 개정된 우리 헌법을 보라.
제31조 (교육을 받을 권리 의무, 평생교육 진흥)
1항.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2항. 모든 국민은 그 보호하는 자녀에게 적어도 초등교육과 법률이 정하는 교육을 받게 할 의무를 진다.
…..
제32조 (근로의 권리 의무, 최저임금제, 여자 연소자 보호, 국가유공자에 대한 기회 우선)
1항.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지닌다. 국가는 사회적 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 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
2항. 모든 국민은 근로의 의무를 지닌다. 국가는 근로의 의무의 내용과 조건을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법률로 정한다.  - 대한민국 헌법
권리는 힘이다. 개인에게 어떤 것에 대해 권리가 있다는 것은 그걸 할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교육이 권리라면, 그것은 교육을 받지 않을 권리도 함축해야 한다. .. 그렇지만 우리 헌법은 얼마나 모순되는가? 교육이든 노동이든 권리라고 말하자마자, 입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바로 교육과 노동을 의무로 규정하니까. 구조도 똑같다. 31조나 32조 모두 1항은 권리를 이야기하고, 2항은 의무를 이야기한다. 바보가 아닌 이상 1항은 2항에 의해 강제된다는 사실, 나아가 1항은 2항을 은폐하는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일이다. 결국 교육은 강제되고 노동도 강제된다. 물론 그 주체는 국가이고 그 객체는 민중들이다.  488-489

바로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의무교육이 민중들을 프롤레타리아로 만드는 과정과 같이한다는 레비스트로스의 지적이다. 프롤레타리아화! 이것은 민중들에게서 노동력을 제외하고 모든 생산수단과 생계수단을 박탈하는 과정이다.  4899

이렇게 시간이 갈수록 노동자들에게 교육은 타율적 강요가 아니라 점점 자발적 복종의 중요한 매커니즘으로 변질된다.
일본제국주의 시절을 생각해보라. 일본어를 하는 우리 노동자는 그렇지 않은 동료를 지도하는 십장이 되어 있을 것이다. 더 많이 배울수록 직접적이고 힘든 육체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식민지 시대 불행한 우리 선조들은 일본제국주의가 원하는 걸 더 많이 습득하려고 애썼다. 489–490

내가 원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국가나 자본이 원하는 것을 배운다! 국가나 자본의 간택을 받아야 생계를 도모할 수 있고 나아가 풍요로운 삶도 누릴 수 있다!  490-491

중요한 것은 의무교육이 타율적 훈육이 아니라 자발적 학습, 즉 타율적 복종이 아니라 자발적 복종으로 타들어가는 도화선의 불꽃이었다는 사실이다.  491

“자발적인 학습은 교육이란 제도 발명의 이차적 결과물에 지나지 않으며, 심지어 교육의 일차적 기능을 강화하고 정당화하거나 은폐한다.” 레비스트로스  492

만약 모든 사람이 문자를 모른다면, 강자는 몸소 벽을 감시하거나 꿀병을 지키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문맹을 없애는 순간, 이제 강자 대신 경고문이 사람들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  492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관계, 즉 억압구조의 핵심은 생산수단 독점의 문제로 귀결된다. 생산수단을 탈취한 자는 생산수단을 빼앗긴 자를 지배하는 법이다. .. 지주와 농민 사이의 사회적 관계, 혹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사회적 관계는 이렇게 출현한 것이다. <독일 이데올로기>엣 마르크스는 이것을 “다른 인간과의 관계”나 “사회적 교류형식”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간단히 “환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 마르크스가 말한 환경은 자연환경이 아니라 억압적 사회구조, 즉 인위적 환경을 의미했던 것이다. 바로 이 환경을, 사회의 억압적 교류양식을 원활하게 기능하도록 하는 목적으로 만든 것이 19세기부터 발달했던 교육제도다. 표면적으로 체제는 교육이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기에 민중들에게 유리한 제도라고 역설한다. 기회 균등의 논리는 단순하다. 교육의 기회는 모두에게 주어지니, 성적으로 교육을 잘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만약 증명에 성공한다면 노동자에게는 부르주아에 가까운 삶이 제공될 것이고, 실패한다면 고단한 육체노동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부와 가난, 혹은 성공과 실패는 주어진 교육의 기회를 잡지 못한 개개인들의 탓이지 사회구조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19세기 이후 의무교육이란 이름으로 강조되었던 교육은 부르주아사회의 새로운 노예, 즉 노동자들을 상호 경쟁으로 내모는 미끼였을 뿐이다. 치려한 경쟁은 억압적 환경 전체를 구조적으로 성찰할 여유를 노동자들에게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본 계급이 아니라 동료 노동자들을 적대시하는 잘못된 감성을 노동자들의 내면에 각인한다. “입사 경쟁률이 왜 이리 높아. 저들이 원서만 내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자, 이제 우리에게 심각한 결단의 순간이 찾아왔다. 노예화를 강요하는 억압적 구조에 맞서 싸우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 아니면 주어진 환경에 순응해 그나마 안정된 삶을 확보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  495-496

마르크스에게는 .. 주인과 노예라는 억압적 환경, 그리고 이 환경을 강요하는 노예화 교육! 그에게 이것은 적응과 순응의 대상이 아니라 파괴와 극복의 대상일 뿐이다.  497

노예제를 극복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햇던 스파르타쿠스 자유군단, 농노제에 도전에 농노 신분을 털어내려고 했던 뭔스터코뮌, 노동자제를 무너뜨리고 임금노동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파리코뮌을 생각해보라. 길들여진 개는 주인을 물지 않고, 길들여진 소는 뿔로 주인을 들이받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간은 완전히 가축화할 수 없는 존재다. .. 인간은 대상적 활동의 힘을 가지고 있다. .. 인간은 주어진 조건에 지배를 받는 수동적인 존재지만 동시에 그걸 넘어서려는 주체적 의지를 가진 능동적 존재이기도 하다. 수동적인 능동자!  498-499

20세기 내내 억압받는 자들은 자신들을 억압이 없는 미래로 이끌어나갈 정당이나 정권의 인도나 지도를 받는다. 사이비 사회주의나 사이비 코뮌주의가 마침내 탄생한 것이다. 소수 지배계급이 다수 인간들에게서 대상적 활동을 박탈할 때, 억압사회는 등장하는 법이다. 그래서 억압사회에서는 소수 지배계급만이 대상적 활동의 힘을 향유한다. 당연히 억압받는 다수는 지배자의 명령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대상, 혹은 사물과도 같은 상태에 처하게 된다. 아무리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다고 해도 정치적 엘리트주의로 무장한 사이비 사회주의나 사이비 코뮌주의가 새로운 억압체제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억압받는 자들에게 대상적 활동이 허락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501

“환경이 인간에 의해 변화되고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 한다!” 환경이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맞지만, 바로 이 인간이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근본 입장이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그가 “인간이 환경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환경도 인간을 만든다”고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도. 억압을 받는 것도 인간이지만 억압을 극복하는 것도 바로 그 동일한 인간이니까. 여기에는 포이어바흐도, 엥겔스도, 스탈린도, 마오쩌둥도, 김일성도 필요가 없다. 그래서 마르크스에게 사회는 두 부분으로 나뉠 필요가 없다. 아니 나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속내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할, 혹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분할 자체가 바로 억압의 가장 분명한 힘을 절단하는 데서 찾아온다. 대상의 측면만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피지배계급이라면, 활동의 측면을 독점하는 사람들이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지배계급이니 말이다. 502-503

경제적 조건들은 우선 그 나라의 민중들을 노동자들로 변형시킨다. 자본의 지배는 이 민중들에게 공통된 상황, 공통된 이해를 만들어 준다. 따라서 이 대중은 이미 자본에 반하는 하나의 계급이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이미 몇몇 구절로 지적했던 투쟁속에서 이 민중은 결합하고 스스로를 대자적 계급으로 구성한다. 이에 따라 민중들이 옹호하는 이해는 계급이해가 된다. 계급에 대한 계급의 투쟁이 바로 정치투쟁이다. - <철학의 빈곤> (1847)
.. 헤겔<정신현상학>의 핵심 개념 ‘즉자(卽自)’와 ‘대자(對自)’를 사용하면서 마르크스는 억압받는 자들이 대상적 활동의 주체로 변하는 과정, 다시 말해 억압에 순응했던 자들이 억압에 저항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주체로 변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글자 그대로 즉자는 자신에게 매몰되어 있는 상태, 그리고 대자는 자신을 반성하거나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자신을 반성하거나 타인을 의식할 수 없는 상태가 즉자이고, 자신을 반성하고 타인을 의식하는 상태가 대자라고 정리해두면 좋다. 문제는 사람도 사물처럼 즉자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503-503

완벽한 노예는 사물화된 노예, 다시 말해 즉자적 노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사물처럼 박제가 되었다고 해도 인간은 인간일 수밖에 없다. 어느 순간 수치심과 모욕감이 찾아올 때, 완벽한 모예는 사라지고 만다. 자신의 신세를 돌아보고 한숨을 쉬거나 분노하고 자신의 삶을 굴욕적으로 생각하는 노예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대자적 노예의 탄생이다. ..
대자적 노예는 노예라는 신분을 넘어서려고 할 것이다. 이제 귀족과의 목숨을 건 투쟁, 혹은 노예제사회에 대한 전면적 투쟁만이 남는다. .. 환경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바꾸려는 대상적 활동의 주체는 바로 이렇게 탄생한다. 모세가 나타나 노예를 귀족의 수중에서, 농노를 영주의 수중에서, 노동자를 자본가의 수중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노예가, 농노가,  노동자가 새로운 주인으로 모세를 섬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스스로 모세가, 혹은 메시아가 되어야 한다. 대상적 활동의 힘을 회복해야만 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말했던 것이다. “환경의 변화 그리고 인간의 활동 혹은 자기변화 사이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505

인간이 환경과 교육의 산물이라는 말은, 즉 인간이 즉자적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인간은 자신의 삶을 당연시하는 것이 아니라 회으하게 된다. 대자적 삶이 찾아온 것이다. 마르크스는 바로 이것을 ‘자기변화’라고 개념화한다. .. 불행히도 역사를 통해 우리가 확인하는 것처럼 대자적 줓체로 변형된 억압받는 사람들이 억압적 환경 자체를 바꾸는 데 성공한 적은 없다. “인간의 활동”, 즉 “자기 변화”가 “환경의 변화”를 낳는 데 역부족이었던 탓이다. 즉자적 인간이 대자적 주체가 되었지만, 다시 말해 억압받는 자들이 대상적 활동의 주체가 되었지만, 불행히도 그들의 저항은 환경을 바꾸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506

교육은 선생이 원하는 것을 학생들도 원하도록 훈육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찾아내도록 하는 데 있다. 마르크스는 말했다. “선생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만큼이나 학생들에게 배워야 한다”고.  선생은 학생들의 잠재적 차이를 아직 모르고, 동시에 학생들도 자기의 차이를 모르기에,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다양한 경험을 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학생들에게 제공한 다양한 경험의 기회들은 선생 입장에서 아이들이 꽃필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선생은 자신의 확신을 항상 접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선생이 학생들에게 배워야 한다”는 말의 의미다.  509

아이들의 차이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선생은 체제의 명령을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동일성의 교사가 될 수밖에 없다.  510


‘대상적 활동’이란 개념이 마르크스 철학의 심장이라면, ‘인간 사회’라는 이념은 마르크스 철학의 머리라고 할 수 있다.  513


1852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는 말했던 적이 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자신이 바라는 꼭 그대로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는 못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 스스로 선택한 환경 아래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곧바로 맞닥뜨리게 되거나 그로부터 조건지어지고 넘겨받은 환경하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거”이라고.
마르크스는 억압체제 전체 차원에서 꿋꿋하게 진행되는 인간의 대상적 활동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사소한 개인들의 일상에서도 그래도 관찰될 수 있다. 직장생활에 투여되는 에어지를 줄여 가족과 애인에게 정성을 기울이는 직장인, 오른손에 가짜 붕대를 감고 원치 않은 모임에 참여하는 여성, 돈이 떨어져도 히치하이킨을 해서 여정을 계속하는 젊은이, 예비군 훈련장에서 만화책을 가져와 들키지 않고 보는 젊은이, 지도교수가 건넨 술잔을 교묘히 딴 그릇에 버리는 대학원생, 혹은 추울 때 따뜻한 물을 담은 물병을 껴안고 잠을 청하는 사람, 이런 모든 사람이 대상적 활동의 작은 촛불들이다. 그렇지만 이런 작은 불꽃들이 모이지 않으면 어떻게 전체 억압사회를 불태울 수 있는 거대한 산불이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
어떤 경우든 인간은 주어진 대상적 조건에 순응하지 않고 그것에 능동적으로 개입해 자기만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고 인간의 삶이다. .. 유물론적 사유 전통이 인간의 삶에 강하게 영향을 끼치는 대상적 조건만을 강조한다면, 반대로 관념론적 사유 전통은 인간의 자발성과 능동성만을 중시해왔다. 이런 해묵은 철학사적 대립은 마르크스의 ‘대상적 활동’ 개념으로 해소되고 만다. 대상적 활동 개념은 인간의 삶이 비자발적 자발성, 수동적인 능동성, 혹은 조건적인 자유라는 걸 해명했기 때문이다.  516-517

개체의 삶이 대상적 활동이라면,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도 대상적 활동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정신적인 차원에서도 수동성과 능동성이 동시에 있고, 육체적인 차원에서도 수동성과 능동성이 동시에 있다는 것이다.  519

정신적인 것이 전면에 부각되었다고 해도 육체적인 것이 자기 기능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신적인 것이 나가도록 버팀목이 될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 어느 정도 나가야 할지 그 한계도 정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육체적인 것이 전면에 부각될 때도 마찬가지다. 변증법, 그것 벌거 아니다. 정신과 육체, 이론과 실천, 그리고 인식과 경험을 각각 두 다리로 생각하고 대범하게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가는 것, 바로 그것이 변증법이니까.
마르크스가 “의식을 살아 있는 개인으로 간주하는 접근 방식”, 즉 헤겔식 사유를 비판했던 이유는 이제 분명해진다. 이것은 마치 육체라는 오른발을 간과한 채 의식이란 왼발만을 움직이겠다는 생각과 같기 때문이다. 헤겔은 절름발이의 인간만을 봤을 뿐, 살아가는 개인 혹은 삶을 살아내야 하는 개인을 보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잘해야 헤겔식 인간은 세상을 관조하는 인간일 뿐이다.  521-522

마르크스의 인간은 의식이 움직이면 몸이 움직이고 몸이 움직이면 의식도 이어서 움직이는 인간이다.  522

마르크스는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 생성 과정에 있는 인간”을 강조한다. 특정한 대상과 마주치고 관계해야 하나의 특정한 조건이 만들어진다. 결국 ‘특정한 조건’이란 대상과 관계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처한 조건이나 상황을 가리킨다. 대상적 조건이 어떤 것이든 간에 인간은 여기에 전적으로 함몰되지 않고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존재다. 그 결과는 과거와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생성이다.  522-523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중 두 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말한다. “대상의 진리가 인간 사유로 귀속될 수 있는지의 문제는 이론의 묹2ㅔ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라고.. 대상의 진리가 .. 인간이 마주친 대상에 대한 진리, 혹은 인간과 관계하는 대상에 대한 진리다. 결국 대상의 진리에는 대상과 마주친 인간의 모든 역사와 경험, 그리고 힘을 전제한다. 그러니 정확히 말해 마르크스가 말한 대상의 진리는 대상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의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525

명심해야 한다. 대상적 활동을 영위하는 모든 주체는 자기 사유의 진리를 증명해야만 한다. 마르크스에게 육체적인 것도 대상에 대한 육체적인 것이고, 정신적인 것도 대상에 대한 정신적인 것이다. 당연히 사유도 대상에 대한 사유이고, 실천도 대상에 대한 실천일 뿐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말한다.  “실천으로부터 유리된 사유가 현실적인 가 비현실적인가를 논하는 것은 순전히 스콜라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실천으로부터 유리된 사유는 관저적인 사유일 수밖에 없으니까.  ..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당신은 대상적 활동의 주체인가? 그렇다면 당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다시 말해 당신의 생각이 현실적이라는 것을, 당신의 생각이 힘이 있다는 사실을, 당신의 생각이 공회전하는 사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천을 통해 증명하라!  527

어떤 시대에서도 지배적 사상(herrschenden Gedanken)은 곧 지배계급의 사상(Die Gedanken der herrschenden Klasse)이다. 즉 사회의 물질적 힘을 지배하는 계급은 동시에 사회의 정신적인 힘도 지배한다. …… 따라서 그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지배하고 한 역사 시대의 범위와 한계를 결정하는 한, 당연히 그들은 모든 영역에 걸쳐 그 지배를 행할 것이며, 따라서 무엇보다도 사고하는 자로서, 사상의 생산자로서 지배하고, 그래서 그 시대의 사상의 생산과 분배를 규제할 것이다. …… 만약 우리가 역사 과정을 파악할 때 지배계급의 사상을 지배계급 그 자체에서 분리시켜 독자적인 존재라고 간주한다면, 혹은 그 어떤 시대에는 이러저러한 사상이 지배했다고 말하기만 하고 그 사상들이 만들어지게 되는 조건 및 그 생산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면, 혹은 그 사상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각 개인들과 세계상태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예를 들어 귀족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명예’, ‘충성’ 등의 개념이 찌배적이었고, 부르주아가 지배하던 시대에는 ‘자유’, ‘평등’ 등의 개념이 지배적이었다고만 말해도 될 것이다. - <독일 이데올로기>
… 정확히 말해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거나 같은 말이지만 피지배계급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피하기 위해 지배계급이 만든 것이 바로 특정 시대의 지배적 사상이라는 것이다.  529-530

여성을 모성의 화신으로 찬양하는 인문학자들, 신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종교인들, 인간 사유의 고유성과 우월성을 강조하는 철학자들, 배려와 공존 등 공동체적 윤리를 역설하는 설교자들, 모두 좋은 사회를 꿈꾸고 있지만 그들은 자신이 억압사회를 지속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걸 모른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란 구분법이 통용되는 억압적 구조를 정면으로 응시해서 돌파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534

어떻게 하면 이데올로기적 거울상이나 메아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인간이 누구도 지배하지 않고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 사회,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중 열 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가 말한 ‘인간사회’다. .. 귀족이나 영주나 자본가를 위한 물질적 생산과 물질적 교류가 아니다. 노동하는 사람들 자신의 물질적 생산과 물질적 교류다. 주인들의 생산이자 주인들의 교류다.  538-539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 <포이어하브에 관한 테제들> 11  539

포이어바흐의 생각은 기독교가 지배적이었던 독일사회에 단순한 지적 센세이션을 넘어 충격을 안겨준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성 일반, 혹은 인간 본질을 투사해서 만든 것이 신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퐆이어바흐가 말한 인간 일반이란 지배계급으로부터 추상된 것이라는 데 있다. .. 결국 신은 최상의 지배자나 초치선의 지배자로 상상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왜 가난한 민중들이 신의 궁전에 찾아가 그에게 무릎을 꿇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현실의 군주에게 억압받고 수탈당하자, 그들은 천상의 군주에게 사랑받는 노예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543

Posted by WN1
,


마르크스주의에 사람들이 매혹당한 가장 큰 동기는 '가난한 사람들, 배를 곯는 사람들, 수탈당하는 사람들, 사회적인 불의를 견디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 자신의 '양심'입니다.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버젓이 곁에 있는데 자기는 '편하게' 지내고 있다는 불공평함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게 되고, 거기에서 '공정한 사회를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한 사명감이 자라나지요.  10


아마도 마지막으로 일본인에게 '양심의 고통'을 느끼게 한 것은 베트남 전쟁 때 불에 타 죽은 베트남 농민이었을 겁니다. 일본이 베트남 전쟁의 후방 지원 기지로서 그들의 학살에 간접적으로 가담했고, 그 덕분에 일본인은 전쟁 특수로 인한 경제적 풍요를 누린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이지요.

하지만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자, 일본인은 '양심의 고통'을 느낄 만한 상대를 더 이상 찾을 수 없었어요. 그 후 처음에는 다소 미안한 듯 조심스러웠지만 나중에는 여봐란듯이, '우리는 이렇게 잘 살고 있다! 이렇게 풍요를 누리고 있다! 이렇게 쾌적한 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자랑스럽게 떠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누가 마르크스를 읽겠어요?  11


단적으로 말해 돈을 갖는 것,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 호화로운 집에 사는 것, 비싼 옷을 입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능력 있는 인간이 우아하게 살고, 무능하고 힘없는 인간이 길거리에서 굶어 죽는 것을 자기 책임이라고 합니다. 능력 있는 인간이 높은 품격을 인정받고, 무능한 인간이 경멸당하거나 모욕을 받는 것을 매우 적절한 결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회적인 정의(fairness)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오피니언 리더가 된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고방식은 별로 '좋지 않다'고 봅니다.

공동체는, 가장 연약하고 가장 힘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전체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자존감을 갖고 각각의 입장에서 책무를 다할 수 있게 하는 제도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혈연이나 지연으로 엮인 소규모의 공동체든, 국민 국가나 국제 사회 같은 거대한 공동체든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힘없고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 운용해나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어느 정도의 '성숙한 어른'이 꼭 필요하지요. 충분한 능력도 있고, 지혜도 갖추고 있고, 주위에서 모두들 존경과 신뢰를 보내는 사람, 나아가 자신이 갖고 있는 자원을 자기만의 이익이 아니라 주변의 힘엇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성숙한 어른'말입니다.  12


마르크스를 읽고,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은, '어린애가 어른이 되는' 방법으로서 가장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마르크스를 읽지 않게 되고 나서부터 눈에 띄게 '성숙한 어른'이 줄었습니다. 나는 이 두가 현상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 봅니다.  13




마르크스 수사학의 결정체 <공산당 선언>

                                                                  (공산당 선언 전문 참고 하기 클릭)


초판 책자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라는 저자의 이름도 실려 있지 않았고, 저자를 밝힌 것은 1850년이었다고 합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7년 모스라는 인물의 추천을 받아 이동맹에 가입했습니다. 동맹에서는 그해 6월에 열림 제 1회 대회(엥겔스참석)와 11월에 열린 제2회 대회(마르크스와 엥겔스 참석)-둘다 런던에서 개최-에서 강령 내용에 대해 상당히 오랫동안 논의를 거듭했습니다. 그리하여 제 2회 대회에서는 논의의 결과를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문서로 작성할 임무를 맡기기로 결정하죠. 다만, 당시 마르크스는 브뤼셀에, 엥겔스는 파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대표로 집필하기로 했어요. 마르크스는 그 전에 엥겔스가 집필한 <공산주의의 제 원리>(1847)등을 참조하면서 독일어로 이 글을 써냈습니다.  25-26


이 책은 네 개의 절로 이루어져 있다.

I. 부르주오와 프롤레타리아 - 부르주아는 자본가, 프롤레타리아는 노동자를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양자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중심으로 '근대 부르주아 사회'(당시 마르크스는 아직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어요)의 체제나 역사, 또 프롤레타리아 혁면(공산주의 혁명)의 필연성 등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II.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들 - 여기에서는 '공산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 일반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서 시작하여 공산주의 운동의 목적이나 공산주의 사회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III. 사회주의 문헌 및 공산주의 문헌 - 이 부분에서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고 불리는 다양한 조류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본격적으로 논단이나 운동의 세계에 등장하기 이전에도 이미 수많은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은 너무나 많은 얼굴을 한 정체불명의 '유령'으로 취급받았습니다. 

IV. 각종 반정부당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 - 여기에서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반정부당이나 혁명당에 대해 공산주의자의 당이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논합니다.  27


마르크스는 현대 경제나 정치, 여성의 지위나 가족, 저출산 문제 같은 사회적 문제를 생각하는 데 중요한 힌트를 제공해주지요...

마르크스의 유물론 철학에서는 이론을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것으로 파악하는 사고를 신랄하게 비판하고있으니까요.  28


실은 만년의 엥겔스는(<1883년 독일어판 서문>) "<공산당 선언>을 관통하는 기본 사상, 즉 역사의 어느 시대라도 경제적 생산 및 거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편성이 그 시대의 정치적 및 정신적 역사의 기초를 이룬다는 것, 따라서 (태곳적 토지 공유가 붕괴한 이후)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 즉 사회 발전의 여러 단계에서 착취당하는 계급과 착취하는 계급, 지배당하는 계급과 지배하는 계급 사이의 투쟁의 역사라는 것, 그러나 이 투쟁은 지금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 착취와 억압 및 계급투쟁으로부터 사회 전체를 영국적으로 해방하지 않고서는 착취하고 억압하는 계급(부르주아지)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 이 기본 사상은 단 한 사람, 오로지 마르크스에게서 나왔다."  29-30


공산주의 혁명론을 몇 가지 소개하면.

1. 노동자의 정치권력 획득 - '공산주의자의 당면 목적'은 우선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프롤레타리아트(노동자 계급)가 정치권력을 쥐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는 <공산당 선언>의 사상은 매우 독창적이었죠.

2. 정치 혁명과 사회 혁명 - 혁명의 '첫걸음'으로서 정치권력을 획득한 공산주의자는 그 다음 사회의 개혁으로 나아가야 해요.

3. 공산주의 사회란 무엇인가. - 사회를 계급으로 분열시키는 경제적인 기반이 사라진다는 뜻이에요.."계급 및 계급 대립이 있는 낡은 부르주아 사회를 대신하여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나타난다." 공산주의 사회라고 하면, 소수의 엘리트(계급) 혹은 공산당이 국가를 장악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국민 전체를 계획적으로 관리하는 사회라는 이미지를 떠올릴지도 모르겟어요. 하지만 마르크스가 말하는 공산주의는 그러한 사회와 전혀 달랐어요.

4. 혁명의 방법에 대해 - 당시 유렵의 역사적 사정을 생각해볼 때. 겨우 스위스 정도만 국민 다수의 선거를 통해 권한을 가진 의회를 선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해요. 실제로 <공산당 선언>을 발행한 직후 각지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아닌 왕정 타도나 민족 독립을 요구하는 혁명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모두 '강제력'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한편,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6년 노동자 계급의 선거원을 요구한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에 격려의 메시지를 보냈고, 그 후에도 마르크스는 만년에 이르기까지 의회를 통해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방법을 쉬지 않고 탐구했어요.

5. 민주적 개혁과 공산주의 혁명 - 마르크스는 역사를 향해 언제 어디서든 공산주의 혁명을 밀어붙이는 것이 가능하다는 태도를 취하지 않아요. 우선은 "눈앞에 닥친 목적이나 이익의 달성"을 소중하게 여기고, 부르주아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부르주아와 '공동으로' 싸워나간다고 하지요. 각각의 사회에 대해 각각의 역사적 단계가 필요로 하는 '현재의 운동'을 통해 야무지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운동의 미래', 즉 공산주의 혁명에 접근해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죠. 냉철한 자세를 유지했어요.  31-36


마르크스의 경제 이론이나 정치 이론은 현실 정치에서 이미 '유효 기간이 지났다'고 여겨지고 있어요

만일 마르크스의 이론을 그대로 가져와서 적용하기만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이런 기준으로 마르크스를 평가한다면, 마르크스의 '유효 기간은 지났다'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마르크스를 읽음으로써 지적인 활기를 얻고, 자신의 지성을 가두고 있는 '우리'의 구조를 깨달으며, 거기에서 빠져 나오려는 노력에 시동을 거는 사람드에게 마르크스의 유효기간 따위는 없을 거예요.  44




청년 마르크스를 만나다 <유대인 문제>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두 사람이 실제로 처음 맞대면한 것은 1842년 2월, 그러니까 엥겔스가 맨체스터로 가는 도중에 <라인신문> 편집부에 들렸던 때 라고 하는군요. 그러나 이 만남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거기서 나는 마르크스를 만났지요. 당시 우리는 지극히 냉랭한 분위기에서 인사를 했어요. 마르크스는 그때 바우어 형제를 반대하는 입장이었거든요.... 나는 바우어 형제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인지라 그들의 동맹자로 여겨졌고, 한편 마르크스는 그들에게 수상하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던 것 같아요."(<엥겔스가 프란츠 메링에게 보낸 편지> 1895년 4월말)

이 시기 <라인신문>의 주필이던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정부의 검열과 투쟁하는 등 구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구체적으로 벌이는 논전을 중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탁상공론으로 보이는 추상적인 논의만 되풀이하는 청년헤겔학파와 심하게 대립하고 있었어요. 브루노와 에드가 바우어 형제가 대표적인 논자였죠.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 형제와 친하게 보이는 엥겔스에게 경계심을 가졌던 모양이에요.  66


두 사람 관계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독불연감>에 게재한 엥겔스의 논문 <국민경제학 비판 대강>에 마르크스가 강렬한 충격을 받고 나서부터입니다. 두 사람이 평생 변치 않는 교류를 나누며 공동의 역사를 이룩한 것은 그때부터라고 봐야겠죠.  67


<유대인 문제>

바우어의 논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어요. '유대교도의 해방은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하지만, 독일에서 억압받는 이들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인민이다. 따라서 유대인 문제는 모든 독일인의 해방을 둘러싼 문제로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독일인의 해방을 달성하려면 독일 국가가 기독교의 굴레를 버리고 근대 국가가 될 필요가 있으며, 아울러 독일의 인민 스스로 기독교나 유대교 같은 특정한 종교로부터 빠져나와 자유로운 자기 의식을 획득해야만 한다. 

이러한 논지에 대하여 마르크스는 '정치적 해방'과 '인간적 해방'이라는 두 가지를 구분하는 시각과 관련된 시각을 제기해요.

1 "독일의 유대인은 해방을 열망하고 있다. 어떤 해방을 열망하는가? 공민(公民)으로서의 해방, 정치적인 해방이다."(<전집>, 제1권, 384쪽)

2 하지만 "정치적 해방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비로소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비판이 가능하며, 유대인 문제를 '시대의 일반적 문제'의 하나로 진정 해소시킬 수 있다."(앞의 책. 388쪽)

3 그런데 바우어는 "다만 '기독교 국가'만을 비판할 뿐 '국가자체'를 비판하지 않는다", "정치적 해방이 인간적 해방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연구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단지 정치적 해방과 일반적인 해방을 무비판적으로 혼동"하고 있다.(앞의 책 388쪽)  68-69


마르크스는 헤겔을 본받아 '시민사회'를 "욕망과 노동과 사리(私利)와 사적 권리의 세계"(앞의 책 406쪽)라고 불렀는데요. 그는 나중에 이것을 '자본주의 경제'라는 문제 영역으로 정리하고 이해해갔어요. 마르크스는 이 단계에서 근대 사회가 초래한 법적 평등과 경제적 불평등을 구별하고, 이 사회의 중심이 경제 활동의 새로운 주체가 된 부르주아로 옮겨 간 점이 일찍부터 착목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독일인의 '인간적 해방'을 위해서는 '이기적인 정신'으로 가득 찬 시민사회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70-71


기독교가 유대교의 '분파'로서 등장.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모두 유대교에서 파생한 종교이기 때문에 애초의 시발점부터 반유대교적이라는 것은 논리적인 필연인 것입니다.  81


마르크스가 역점을 둔 것은 유대인 해방 '그 자체'가 아니에요. '해방'의 전 단계에 포함되며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은 것. 다시 말해 누구의 해방이며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지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에요...

상상해보면.. 인종 차별이 있는 어떤 나라에서 자유우의 성향의 정치가와 사회 활동가의 노력으로 '인종차별쳘폐법'을 제정했다고요. 의회는 법안을 가결하고 정부는 그 법을 엄숙하게 실행했어요. 자, 이런 경우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차별이 없어진 것 아니야?'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예, 차별이 철폐되었어요. 그뿐입니다. 하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사시에 또 하나의 국민적 합의가 성립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어요. 그것은 "우리 나라의 통치 시스쳄은 참 잘 돌아가고 있구나"라는 합의예요.

바꾸어 말하면, '그게 뭐 잘못인가? 합법적인 수순을 밟아서 차별을 철혜햇드면, 꽤 괜찮은 사호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니야? 그런 정치 시스템이라면 충분히 건전하게 기능하고 있는 것 같은데...'하는 것이죠.

마르크스는 그러한 무언의 동의가 성립되어버리는 것에 대해 강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86


바우어는 '정치적 해방이 인간적 해방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연구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단지 정치적 해방과 일반적인 해방을 무비판적으로 혼동'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이렇게 쓴 것은 곧, "이봐, '정치적 해방'과 '인간적 해방'은 다르단 말이야" 하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죠.

'정치적 해방', 즉 법률에 의해 '인종 차별을 하면 안 됩니다'라고 정하는 것은 물론 '일보 진보'겠지요.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렇게 마랳요. "그건 하나의 '진보'일 뿐 종점은 아니야. 이야기를 거기에서 끝내버리면 안 된다고, 유대인은 정치적으로는 해방되었어도 인간적으로는 아직 해방이 안 되어 있거든."  87


모든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가 인간 해방이 실현된 이상 사회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시민 사회에서 시민들이 누리고 있는 것은 '고립의 자유'예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대신 누구도 폐를 끼치지 못하게 할 권리. '고립되어 자기 안에 콕 틀어밖혀 잇는 모나드(단자)로서 누리는 인간의 자유'(앞의 책 43쪽)라고나 할까요. 인간과 인간이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거리를 두는 것에서 더욱 커다란 가치를 찾는 것이 근대 시민이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어요. 시민사회의 기초는 "'자신의 재산, 자신의 소득, 자신의 노동 및 노무의 성과를 임의대로 향수하고 처분할' 권리"(앞의 책 44쪽)에 있다고 말이죠.  90


물론 시민사회에서도 시민들은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은 아니에요. 정부에 자신의 권리 일부를 맡기고 법률을 제장하거나 법을 준수하며,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 세금을 내고, 징병령이 떨어지면 무기를 들고 조국을 위해 싸우기도 해요. 이런 시민의 모습을 마르크스는 '공민'이라고 부르지요. 이는 공적인 기능이란 측면에서 규정한 시민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시민을 '속마음에 충실한 시민'이라고 한다면, 공민은 규칙에 따라 의무를 다하는 '원칙에 충실한 시민'이라고 하겠지요. 요컨대 시민은 '사인(私人)'과 '공민'이라는 두 얼굴을 갖게 되지요. 사인으로서는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 공민으로서는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식으로...  91


마르크스의 정의에 따르면 '유적 존재'란 "현실의 개체적 인간이 추상적인 공민을 자기 안에서 되찾은" 상태를 가리켜요. 시민사회에서는 '공사의 혼동'이 어디까지나 '공보다 사는 우선한다'는 것임에 비해, 유적 존재는 공과 사를 문자 그대로 일치시킨 상태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93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행복과 이익에 신경 쓰는 만큼의 열의로 이웃의 행복과 이익에 신경을 쓰는 '유적 존재'가 되는 것을 '인간 해방의 완수'라고 봤어요.  94


마르크스는 사회 전체를 '특별한 의미에서 해방하는 입장'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이 텍스트를 통해 끄집어내려고 해요. 프롤레타리아론은 마르크스의 사회 이론을 뒷받침하는 근간과 관련있는 테제인데요...

마르크스는 스스로를 '족쇄밖에 잃을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라고는 여기지 않았으니까요.(마르크스에게는 족쇄 이외에도 가족이나 친구, 동지 같은 '좋은 것'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에게 모든 권리를!' 같은 테제를 증여의 구문으로 썼어요. 이 테제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마르크스가 '자신의 소유물'을 선물로 내주면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윤리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나는 프롤레타리아'라고 자칭하는 인간이 '프롤레타리아에게 모든 권리를!'하고 주장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어요. 논리적으로는 옳지만 윤리적으로는 옳지 않거든요. 인간은 자기가 손에 넣고 싶다고 바라는 것을 우선 다른 사람에게 증여함으로써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 이것도 내가 오랜 시간 살아오면서 확신하게 된 교훈의 하나예요.  102-103




인간에 대한 연민, 그 위대한 시작 <경제학-철학 수고>


'소외된 노동'

"노동자는 자신의 생명을 대상에 쏟아붓는다. 그러나 대상에 쏟아부은 생명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라 대상의 것이다... 그의 노동이 들어간 생산물은 그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생산물이 커지면 커질수록 노동자 자신은 그만큼 가난해진다.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물을 외화한다는 것은 그의 노동이 하나의 대상에, 하나의 외적인 현실 존재가 된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노동이 그의 외부에, 그에게서 독립한 소원한 형태로 존재하며 그에 대해서 자립적인 힘이 되는바, 그가 대상에 부여한 생명이 그에 대해 적대적이고 소원하게 대립한다는 의미이다.  147


마르크스 자신은 부르주아였으니 그가 인용한 가혹한 노동의 경험 같은 것은 안 해봤을 테지요. 하지만 강렬한 공감려고가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148


소외론의 출발점이 '자신의 비참함'이 아니라 '타인의 비참함'을 목도한 경험이었어요. 마르크스는 "우리를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랍니다. "그들을 소외된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우리의 임무"라고 주장한 것이지요.  149


'유적존재'

'나만 좋으면 나머지는 상관없다'는 본심만 내세우며 살아간다면,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도구로 이용하고 수탈할 수밖에 없어요....

"어떻게 인간을 바꿀 것인가, '유적 존재'를 지향하면 바뀐다." 이것은 제3초고의 제2장 [사적 재산과 코뮌주의]의 중심논점이에요.

지금 내가 인용하고 있는 책에서는 보통 '공산주의'라고 번역하는 Kommunismus를 '코뮌주의'라고 옮겨놓았어요. '코뮌(Kommune)'이란 공동체를 가리키는데요. 나라나 지방 정부 같은 상명하달 시스템과 달리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범위, 목소리가 들리는 범위 안에서 합의를 통해 제도를 만들고 규정을 정리하며 자치를 행하는 단위예요. 비교적 규모가 작고 중앙 집권적이지 않은 통치 기구를 말하지요. 이러한 조건을 정치 제도의 기본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 '코뮌주의'인데요. 이것을 '공산주의'라고 해버리면 역사적으로 현존했던 '공산당'이나 '국제 공산주의 운동' 같은 것과 어쩔 수 없이 연관시켜 이해하게 되지요. 그래서 그러한 구체적인 역사적 존재가 등장하기 이전에 아직 막연한 관점에 지나지 않았던 시기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굳이 '코뮌주의'라는 번역어를 갖다 쓴 것 같아요.(혼자만의 추측에 부로가하지만)  150-151


마르크스가 지향하는 것은, 가장 인간적이고 훨씬 문명적인 코뮌주의입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적인 본질의 현실적 획득으로서의 코뮌주의(앞의 책 349쪽)"  152





'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 <독일 이데올로기>


<독일 이데올로기>의 구선은 제1권 <최근의 독일 철학 비판>, 제2권 <독일 사회주의 비판>으로 되어 있어요.

제1권에서는 포이어바흐, 브루노 바우어, 막스 슈티르너를 검토하고 있지요. 이 세 사람은 모두 청년헤겔학파의 멤버로 한동안 마르크스와 헤겔이 높이 평가했었지요. '헤겔 좌익'이라고도 부르는 청년헤겔학파는 헤겔의 철학을 계승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자 ㅇ혁신적인 흐름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헤겔의 철학에는 '변증법'이라 부르는 변혁의 정신이 내재해 있는데, 현실 세계에 대해 헤겔은 정치도 그렇고, 종교도 그렇고, 현재 세계의 모습을 훌륭하다고 옹호하는 보수적-현상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어요. 청년헤겔학파는 이른바 헤겔의 언행 불일치에 불만을 품고, 특히 종교 분야에서 낡은 체제에 도전했어요.

그러나 그들도 대부분 자유나 민주주의 문제 같은 것을 당시 독일의 구체적인 정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로지 관념의 세계에서 벌이는 투쟁(공중전)으로 현실의 개혁 문제를 풀어나가려 한 약점을 갖고 있었어요.

이런 대목이 의견의 차이를 낳게 되어 마르크스는 <라인신문>의 편집을 둘러싸고 바우어 형제와 심하게 맞붙었고, 엥겔스와 함께 쓴 <신성 가족>에서 브루노 바우어를 집중적으로 비판하게 되지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우선 문제를 관념의 세계에서 인간이 매일 생활하는 현실 세계로 끌어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제2권에서는 당시 독일에서 유행하던 진정한 사회주의라는 사상적 조류를 비판하고 있어요. 프랑스나 영국에서 이러한 조류는 자기 나름대로 현실 세계를 직시한 결과 생겨난 사회주의 사상이었지만, 독일로 수입되면서 독일의 독특한 관념 세계와 결부되어 버린 것이지요.  172-173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야기하는 '이데올로기'에는 처음부터 비판적인 의미가 들어 있었어요. 

"이데올로기는 분명 이른바 사상가가 의식적으로 행하는 과정이지만, 그 의식은 잘못된 의식입니다. 사상가를 움직이는 본래의 추진력을 그 자신은 모르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이데올로기적 과정이 아닐 것입니다."(<엥겔스가 메링에게 보맨 편지> 1893년 7월 14일)  174


"그들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그들의 생산, 즉 그들이 무엇을 생산하고 또 어떻게 생산하는가 하는 것과 일치한다."(<신판 독일 이데올로기> 31쪽)

사적유물론을 '한마디'로 설명하라고 하면(무리한 주문이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만큼 유명한 구절이죠.  211


예를들어 '근본부터 사악한 인간'이 있다고 쳐봐요. 그런데 이놈이 어쩌다가 '선행'을 했어요(전철에서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했다든가, 뭐... 이런 일은 엄밀히 말해서 '생산'은 아니지만요). 사적유물론의 견지에서 말하면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에요. 마르크스는 이 사람이 '사실은 어떤 놈인가' 같은 한쪽으로 치우친 이야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아무리 근본이 돼먹지 않았다고 해도 선행을 하면 선인이고 아무리 근본이 선량하다해도 나쁜 짓을 하면 악인이라는 것이죠.  212


마르크스는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인간'이야말로 인간의 본바탕이어야 한다고 말해요. '현실적이고 역사적으로' 변변치 못한 일을 한 인간은 '변변치 못한 인간'이라고 말이에요.

나는 이치의 옳고 그름보다도 윤리적으로 마르크스가 우월하다고 생각했어요.  213


"인간들이 이야기하는 것, 상상하는 것, 표상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또한 이야기하고 사유하고 상상하고 표상하는 대상이 되는 인간들로부터 출발하여, 거기에서 생겨난 진정한 인간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인간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또 그들의 현실적인 생활 과정으로부터 이 생활 과정의 이데올로기적 반영과 반향이 어떻게 발전하는지도 해명할 수 있는 것이다."(앞의 책 42쪽)  216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요약하면, '인간들이 이야기하는 것, 상상하는 것, 표상하는 것'이 적절한가 아닌가는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인간들'에 따라 '그들의 현실적인 생활 과정으로부터' 검증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217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앞의 책 42쪽)

멋진 말 아닌가요? 'A는 B가 아니라 B가 A다'라는 수사법은 마르크스의 십팔번이었어요. 논리학적으로는 무리를 범하는 일도 가끔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런 수사를 애용했어요. 마치 입버릇인 것처럼 말이죠. 아마도 이런 표현이 '자연물처럼 보이는 조작물'의 정체를 폭로하는 데 지극히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마르크스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218


"공산주의 사회에서 각자는 그런 까닭에 고정된 어떤 활동 범위에 갇히지 앟고, 어디라도 좋아하는 분야에서 자신의 기량을 갈고 닦을 수 있도록 사회가 생산 전반을 통제하고 잇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오늘은 이것, 내일은 저것을 하며, 아침에는 사냥하고 낮에는 낚시하며, 저녁에는 가축을 돌보며, 저녁 밥을 먹은 뒤에는 비평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게다가 반드시 사냥꾼, 어부, 목동, 비평가가 되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신판 독일 이데올로기> 67-68쪽)

분업에 의해 인간이 '어떤 특정한 범위에만 머무르는 것'을 강요받고, 특정한 직업에 속박당할 때, 그 노동은 '그에게 소원하고 적대하는 힘'이 된다. 마르크스는 이런 표현을 동원하여 분업을 비판했어요. 동시에 사냥꾼이자 어부이자 목동이자 비평가(이것은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사람, 즉 내가 앞에서 한 이야기에 따르면 '액자를 대는 사람'= 지식은을 가리킵니다)이기도 한 인간을 이상으로 삼은 대목은 아마도 내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가장 감동 받은 부분이 아닐까해요.

마오쩌둥은 힘들고 고된 연안 장정 시기에 홍군 병사들을 향해 동시에 군인이자 농부이자 기술자이자 정치사상가이자 교사가 되라고 요구했겠지요. 그는 '공(工)농(農)상(商)학(學)병(兵)'이 한 사람 안에 통합되어 있는 모습을 인간의 이상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219-220




'지성을 단련하는' 일은 물론 마르크스를 달달 외우거나 옳다고 믿는 것이 아니에요. 마르크스는 도대체 현실 세계-그것은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잇는 자본주의 사회의 초기 단계였어요-의 어디를 보고 무엇을 찾아내려고 했을까? 성장하고 변화해가는 마르크스이 언어를 따라가면서 그 점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그 결과 마르크스가 도달한 지점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이 잡히면 그것이 진정 옳은 것이었는가를 자신의 머리로 판단해가는 일, 그런 훈련을 해나가기 위해서 마르크스를 재료로 활용하는 것이 바로 '지성의 단련'이겠죠.

어찌 된 일인지 마르크스한테는 '벼락치기'가 통하지 않아요.

상대가 마르크스든 아니든, 글을 읽을 때는 거기에 쓰여 있는 내용을 수동적으로 그냥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두뇌를 단련시킬 수 없어요.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말한 마르크스 자신이야말로 항상 그런 자세로 비판적인 정신을 가지고 선배 사상가들의 지적 성과와 씨름하고자 한 사람이었어요.

한편, 이 책을 훑어봤다면 느꼈을 테지만, 마르크스는 글을 쓰면 쓸수록 그 내용이 확확 변해가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내용이 변화하고 탐구의 깊이가 심화되어 갈수록 더욱 사안을 정교하고 치밀하게 파악할 뿐 아니라 이전의 사고 방식을 과감하게 전환시키기도 하고, 과거에 도달한 지점을 가차없이 내던져버리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어요.  222-223



마르크스의 저작 나이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유대인 문제> 25세

<경제학-철학 수고> 26세

<독일 이데올로기> 28세

<공산당 선언> 29세

<프랑스의 계급투쟁> 32세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33세

<임금, 가격, 이윤> 47세

<자본론> 제1권 48세

<프랑스 내전> 53세     224-225

Posted by WN1
,

 

 

공산당 선언문(마르크스-엥겔스) -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공산당선언 (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

 

- K. marx, F. Engels

 

하나의 유령이 지금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A spectre is haunting Europe)--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교황과 짜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의 첩보경찰 등 구유럽의 모든 열강은 이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었다.

집권당으로부터 공산당이라는 비난을 받아보지 않은 반대당이 있는가? 또한 그 공산주의라는 비난의 낙인을 오히려 자기의 반동적 적들에게, 뿐만 아니라 보다 진보적인 다른 반대당에게 되돌려지지 않는 반대당이 있는가?

이 사실로부터 두 가지 점이 도출된다.

1. 모든 유럽의 열강은 이미 공산주의를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했다.

2. 지금은 공산주의자들이 당 자체의 선언을 통하여 전세계에 대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견해, 목적, 경향성을 발표하고 공산주의의 유령이라는 그 옛날이야기에 대처할 수 있는 가장 알맞는 시기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여러 국적을 가진 공산주의자들은 런던에 모여 다음과 같은 선언을 초안하고 이를 영어, 불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플랑드르어, 덴마크어로 출판하게 된 것이다.

 

 

I.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길드장인과 직인, 한 마디로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항상 서로 대립하면서 때로는 숨겨진, 때로는 공공연한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각각의 싸움은 그때마다 대대적인 사회의 혁명적 재편 또는 경쟁하는 계급들의 공동파멸로 끝났다.

이전의 역사적 시대에서는 거의 모든 곳에서 사회가 다양한 질서, 잡다한 사회적 서열의 등급으로 복잡하게 배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대 로마에는 귀족, 기사, 평민, 노예가 있었고, 중세에는 봉건영주, 가신(家臣), 길드장인, 직인, 도제, 농노가 있었다. 이들 계급의 거의 대부분은 또 부수적인 등급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봉건사회의 폐허로부터 싹튼 현대 부르주아사회는 계급적대를 없애지 못했다. 단지 낡은 것들 대신 새로운 계급, 새로운 억압의 조건, 새로운 투쟁형태들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 부르주아지의 시대는 명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계급적대를 단순화시킨 것이다. 전체 사회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양대 적대적 진영으로, 서로 직면하고 있는 양대 계급으로 점점 더 분열되어 가고 있다.

중세 농노로부터 초기 도시의 시민이 생겨났으며, 이 시민으로부터 부르주아지의 최초 분자들이 발전해 나왔다.

아메리카의 발견, 케이프 항로의 발견은 떠오르는 부르주아지를 위한 신선한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동인도와 중국의 시장, 아메리카의 식민지화, 식민지와의 무역, 교환수단의 상품의 전반적인 증가는 상업과 해운업 및 공업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충격을 가하였으며, 또 그럼으로써 비틀거리는 봉건사회내의 혁명적 요소에게는 급속한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폐쇄적 길드가 산업생산을 독점하고 있던 봉건적 산업체계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시장이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를 대신한 것이 곧 매뉴팩처 체계였다. 길드장인은 매뉴팩처 중간계급에 의해 밀려났으며, 서로 다른 자치적 길드들 간의 분업은 사라지고 각 공장 내에서의 분업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시장은 꾸준히 성장했으며, 수요 또한 계속 상승하고 있었다. 그래서 매뉴팩처조차도 이제 불충분한 것이 되었다. 또한 증기와 기계가 산업생산을 혁명적으로 발전시켰다. 매뉴팩처의 위치는 거대한 현대산업으로 대체되고 산업 중간계급의 위치는 산업 백만장자, 전체 산업부대의 지휘관, 현대 부르주아지가 차지하게 되었다.

현대산업은 아메리카의 발견으로 길이 트인 세계시장을 확립했다. 세계시장은 상업, 해운업, 육상교통의 엄청난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발전은 거꾸로 산업의 확장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즉 공업, 상업, 해운업, 철도가 확장되는 것과 똑같은 비율로 부르주아지는 발전했으며 자신의 자본을 증가시켰고, 중세시대로부터 이어 내려온 모든 계급을 뒷전으로 밀어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현대 부르주아지 자체가 긴 발전과정의 산물이며, 생산양식과 교환양식에서의 일련의 혁명이 낳은 산물임을 알 수 있다.

부르주아지의 각 발전단계에는 그에 상응하는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진보가 뒤따랐다. 봉건귀족의 지배하에서는 피억압계급으로, 중세 코뮨에서는 무장자치단체--어느 곳에서는 자립적 도시공화국(이탈리아와 독일), 또 어느 곳에서는 군주의 과세대상인 것제3신분겄(프랑스)--로 있던 부르주아지는 이후 메뉴팩처 시기에는 귀족에 대한 대항세력으로서, 사실상 일반적으로는 대군주들의 초석으로서 반(半)봉건군주 또는 절대군주에 봉사했으며, 현대산업과 세계시장이 확립되면서부터는 마침내 스스로의 힘으로 현대의 대의제국가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현대국가의 집행기구는 단지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동사를 관리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부르주아지는 매우 혁명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지배를 확립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든 봉건적, 가부장적, 전원적 관계를 종식시켜 왔다. 부르주아지는 인간을 것타고난 상하관계겄에 묶어 놓는 잡다한 봉건적 끈을 가차없이 끊어버렸으며, 그 외의 모든 인간의 관계를 적나라한 이기심, 냉혹한 것현금지불관계겄로만 만들어 놓았다. 또한, 가장 신성한 종교적 정열의 환희, 기사도적 열정의 환희, 세속적 감상주의의 환희를 자기중심적 타산이라는 얼음같이 차디찬 물 속에 빠뜨려버렸다. 또, 개인의 존엄성을 교환가치로 용해시켜 버렸으며, 결코 무효화될 수 없이 공인된 무수한 자유 대신 저 자유무역이라는 단 하나의 파렴치한 자유를 세워 놓았다. 한 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정치적 환상으로 가려진 착취를 적나라하고 후안무치하고 노골적이고 야수 같은 착취로 대체한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지금까지 존경과 경건한 경외심으로 받들어졌던 모든 직업으로부터 그 후광을 걷어냈다.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과학자를 자신이 보수를 주는 임금노동자로 전환시켜 버린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가족으로부터 그 감정의 장막을 찢어내고 가족관계를 단순한 돈의 관계로 만들었다.

부르주아지는 복고주의자들이 그토록 경애해마지 않는 중세시대의 야수같은 힘의 과시가 어떻게 하여 가장 게으른 나태로써 훌륭히 보완되는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가 과연 무엇을 낳을 수 있는가를 처음으로 보여준 예였다. 부르주아지는 이집트 피라밋이나 로마의 수도(水道), 고딕 성당을 훨씬 능가하는 기적을 이룩했다. 이전의 모든 민족대이동이나 십자군 따위의 견주지도 못할 원정들을 감행한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끊임없이 생산도구를 혁명적으로 개조하고, 그럼으로써 생산관계를 개조하며, 또 그와 더불어 사회관계 전체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 반면, 이전의 모든 산업 계급들에게는 낡은 생산양식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자신의 1차 존재조건이었다. 끊임없는 생산의 혁명적 발전, 모든 사회적 조건들의 부단한 교란, 항구적인 불안과 동요는 부르주아 시대의 이전의 모든 시대를 구분 짓는 특징이다. 모든 고정되고 꽁꽁 얼어붙은 관계들, 이와 더불어 고색창연한 편견과 견해들은 사라지고, 새로이 형성된 모든 것들은 골격을 갖추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딱딱한 것은 모두 녹아 사라지고, 거룩한 것은 모두 더럽혀지며, 마침내 인간은 냉정을 되찾고 자신의 실제 생활조건, 자신과 인류의 관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생산물을 팔 수 있는 시장을 끊임없이 확장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으로 인해 지구상의 모든 구석구석을 누벼야 한다. 부르주아지는 가는 곳마다 둥지 틀고 자리잡고 연고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세계시장의 착취를 통하여 각 나라의 생산과 소비에 범세계적인 성격을 부여해왔다. 복고주의자들에게는 매우 유감이겠으나 부르주아지는 산업의 발 밑으로부터 산업이 딛고 서 있는 일국적 기반을 빼앗아냈다. 기존에 확립된 모든 일국적 산업들은 이미 파괴되었거나 나날이 파괴되어 가고 있다. 모든 문명민족들이 생사를 걸고 도입하려 하는 새로운 산업, 이제 더 이상 토착 원료자원을 가공하지 않고 가장 먼데서 온 원료자원을 가공하면서도 그 생산물은 국내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구석에서 소비되는 새로운 산업이 그 낡은 산업들을 몰아내고 있다. 그 나라의 생산물로 충족되던 낡은 욕구 대신에, 먼 나라 먼 토양의 생산물로 충족될 수 있는 새로운 욕구가 생겨난다. 낡은 지역적, 민족적, 단절과 자급자족 대신 모든 방면에서의 상호교류 민족들간의 보편적 상호의존이 나타난다. 이는 물질적 생산뿐 아니라 정신적 생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개별 민족의 지적 창조물은 공동의 재산이 된다. 민족적 편향성과 편협성은 점차 불가능해지며, 수많은 민족적, 지역적 문학들로부터 하나의 세계문학이 생겨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생산도구가 급속히 향상되고 교통수단이 엄청나게 개선됨으로써, 가장 미개한 민족을 포함하여 모든 민족을 문명화시킨다. 상품의 저렴한 가격은 모든 만리장성을 무너뜨리고 외국인에 대한 미개인의 매우 고집스런 증오를 굴복시키는 대포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에게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을 채택할 것이냐 죽을 것이냐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며, 가지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도입할 것 즉, 부르주아 자체가 될 것을 강요한다. 한 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기자신의 모습 그대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시골을 도시의 지배에 복속시켰다. 부르주아지는 거대도시들을 만들었고, 농촌에 비해 도시인구를 엄청나게 증가시켰으며, 이를 통해 상당 부분의 인구를 농촌생활의 백치상태로부터 구출해냈다 .또한 시골이 도시에 종속되도록 만든 것과 똑같이 미개국과 반미개국들이 문명국들에게, 농민의 나라가 부르주아의 나라에게, 동양이 서양에게 종속되도록 만들었다.

부르주아지는 인구, 생산수단, 재산의 분산된 상태를 점차 제거하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인구를 한데뭉치고, 생산수단을 집중시켰으며, 재산을 소수의 손에 집적시켰다. 이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로 정치적 집중이 이루어졌다. 개별적 이해관계와 법률, 정부, 조세제도를 갖고 있던 독립적 지역 또는 그것들과 대충 관련된 지역들은 하나의 정부, 하나의 법조문, 하나의 일국적 계급이해, 하나의 국경, 하나의 관세를 지닌 하나의 나라로 뭉치게 되었다.

부르주아지는 백년 남짓한 자신의 지배기간 동안 이전의 모든 세대들이 이루어낸 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거대하고 엄청난 생산력을 창출했다.

인간에 대한 자연력의 복속, 기계, 공업과 농업에서의 화학의 응용, 기선, 철도, 전기통신, 경작을 위한 전 토지의 개간, 운하 건설, 땅에서 솟아난 듯한 거대한 인구--이전세기에 그러한 생산력이 사회적 노동의 품속에 잠자고 있으리라고 예감이나마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할 수 있다. 부르주아지가 딛고 서 있는 토대인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은 봉건사회속에서 생성된 것이다. 이들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이 특정한 발전단계에 이르자, 봉건사회가 생산하고 교환하는 조건, 농업과 제조업의 봉건적 조직, 한마디로 말해, 봉건적 소유관계는 이미 발전되어 있는 생산력과 더 이상 양립할 수 없게 되었으며 오히려 그만큼의 질곡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것들은 산산이 부서져야 했으며, 실제로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그 자리에는 자유경쟁이 대신 들어섰으며, 또 자유 경쟁에 맞는 사회적, 정치적 구조가 뒤따랐고, 부르주아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지배가 뒤따랐다.

지금 우리 눈앞에도 비슷한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 자신의 생산관계, 교환관계, 소유관계를 가지고 있는 현대 부르주아사회, 엄청난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을 출현시킨 이 사회는 자기가 주술로 불러낸 명부(冥府)세계의 힘을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하게 된 마법사와도 같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산업과 상업의 역사는 오직 현대적 생산조건에 대한, 또 부르주아지와 그 지배의 존재조건인 소유관계에 대한 현대적 생산력의 반란의 역사일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주기적으로 일어나면서 갈수록 더 한층 위협적으로 전체 부르주아사회의 존망을 시험대에 올려놓는 상업공황만을 언급해도 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공황에서는 기존 생산물뿐 아니라 이전에 창조된 생산력의 거의 대부분이 주기적으로 파괴된다. 또한 이전의 모든 시대에는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졌을 전염병, 즉 과잉 생산의 전염병이 번지게 된다. 사회는 갑자기 순간적인 야만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 마치 기근이나 전면전의 황폐로 인해 모든 생존수단의 공급이 차단된 것처럼 된다. 산업과 상업은 파괴된 듯이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과도한 문명화, 과도한 생존수단, 과도한 산업, 과도한 상업 때문이다. 사회의 수중에 있는 생산력은 더 이상 부르주아적 소유조건을 더 한층 발전시키는 데로 향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생산력은 소유조건에 비해 너무 강력해져서 오히려 그것에 의해 질곡당하며, 질곡을 극복하자마자 생산력은 부르조아사회 전체를 무질서하게 만들고 부르주아적 소유의 존재를 위태롭게 만든다. 부르주아사회의 여러 조건은 생산력이 만들어낸 부를 포괄하기에는 너무 협소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부르주아지는 어떻게 이러한 공황을 극복하는가? 한편으로는 생산력의 대향 파괴를 강화함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을 정복하고 기존의 시장을 더욱 철저하게 착취함으로써 극복한다. 달리 말해 그것은 보다 범위가 넓고 보다 파괴적인 공황을 위한 길을 닦으며, 공황을 예방하는 수단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봉건제를 무너뜨렸던 무기가 이제 부르주아지 자신을 겨냥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자신을 죽이는 무기를 주조했을 뿐 아니라 이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인 현대 노동계급, 곧 프롤레타리아들도 탄생시켰다.

부르주아지, 즉 자본이 발전하는 것과 똑같은 정도로 프롤레타리아트, 즉 현대 노동계급도 발전한다. 이들은 일거리가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으며, 그들의 노동이 자본을 증대시키는 한에서만 일거리를 찾을 수 있다. 이들 노동자는 다른 보통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자기자신을 조금씩 팔아야 하는 하나의 상품이며, 따라서 경쟁의 성패 여하에, 시장의 동요 여하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기계의 광범위한 활용과 분업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은 모든 개인적 성격을 잃었으며, 그 결과 노동자에 대한 매력도 사라졌다. 노동자는 이제 기계의 부속물이며,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가장 단순하고 가장 단조로우며 가장 쉽게 획득한 기술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의 생산비용은 거의 전적으로 그가 자신을 유지하고 종족을 번식시키는데 필요한 생존수단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상품의 가격, 곧 노동의 가격은 그 생산비용과 같다. 그러므로 노동에 대해 느끼는 반발심이 강할수록 임금은 감소한다. 그뿐 아니라 기계의 사용과 분업이 증가할수록, 노동시간이 연장되거나 주어진 시간 내에 강제된 노동량이 증대하거나 기계 속도가 빨라지거나 하는 등으로 인해 고통스런 짐 또한 증가한다.

현대산업은 가부장적 장인의 작은 작업장을 산업자본가의 거대한 공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공장으로 결집된 노동자대중은 군대식으로 편성된다. 그들은 산업군대의 사병(私兵)으로써 장교, 하사관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위계의 지휘하에 있다. 그들은 부르주아적 계급, 부르주아국가의 노예일 뿐 아니라, 날이 갈수록 시간이 갈수록 기계에 의해, 관리자에 의해, 무엇보다도 개별 부르주아적 공장주 자신에 의해 노예화되고 있다. 이러한 전횡은 영리가 그 목표이자 목적임을 노골적으로 선언하면 할수록 더 한층 인색해지고 증오스러워지고 쓰라린 것이 된다.

육체 노동에 필요한 기술과 발휘되는 힘이 줄어들수록, 바꿔 말해서 현대산업이 발전할수록 더 한층 남성의 노동은 여성의 노동으로 대체된다. 연령과 성별의 차이는 더 이상 노동계급에게 사회적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 연령의 성별에 따라 사용하는 값이 다르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노동의 도구인 것이다.

지금까지 노동자에 대해 공장주의 착취가 끝나고 노동자가 임금을 현금으로 받게 되자마자 부르주아적의 기타 부분, 즉 집 주인, 상점 주인, 전당포 주인등이 노동자에게 달려든다.

도매상, 상업주, 일반적으로 은퇴한 상인들, 수공업자와 농민 등 중간계급의 하층은 점차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그들의 영세자본으로는 현대산업이 움직이는 규모를 감당할 수 없고, 대자본가와의 경쟁에서 뒤쳐지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생산방식으로 인해 그들의 전문화된 기술이 쓸모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계급의 인구로부터 충원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다양한 발전단계를 거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생겨나자마자 부르주아지와의 투쟁도 시작된다. 처음에는 개별 노동자들이 싸움을 시작했으나 다음에는 한 공장의 근로자들이, 그 다음에는 한 직종, 한 지역의 직공들이 자신들을 직접 착취하는 개별 부르주아를 상대로 싸우게 된다. 그들은 부르주아적 생산조건에 대해서가 아니라 생산도구 자체에 대해서 공격을 가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노동과 경쟁하는 수입품을 쳐부수며, 기계를 산산조각내고, 공장을 불지르며, 사라져버린 중세시대 근로자의 지위를 무력으로 회복하고자 한다.

이 단계에서 노동자는 아직 전국에 흩어져 있고 자기들 간의 상호경쟁으로 분열되어 있는 지리멸렬한 대중에 머물러 있다. 설사 그들이 모여 보다 긴밀한 결합체를 이룬다 해도 그것은 아직 그들 자신이 연합한 결과가 아니라 부르주아지가 연합한 결과이다. 부르주아계급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프롤레타리아트를 동원하지 않을 수 없으며, 게다가 아직 당분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적의 적, 즉 절대군주제의 잔재인 지주, 비산업부르주아, 쁘띠부르주아지와 싸우는 것이다. 이리하여 전체 역사적 운동은 부르주아적 수중에 집중된다. 그렇게 얻어진 승리는 모두 부르주아지를 위한 승리인 것이다. 그러나 산업이 발전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숫자가 증가할 뿐 아니라 보다 큰 무리로 집중되어 힘이 더욱 성장하며, 그 힘을 더욱 자각하게 된다. 기계가 노동의 모든 차이들을 소멸시키고 거의 모든 곳에서 임금을 동일하게 낮은 수준으로 감축시키는 것과 비례하여 프롤레타리아트 대열 내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생활조건은 더욱 더 평준화된다. 부르주아들 간의 경쟁이 격화되고 그 결과 상업공황이 일어나면서 노동자의 임금은 갈수록 동요하게 된다. 기계가 급속히 발전하고 끊임없이 개선되면서 노동자의 생활은 갈수록 불안정해진다. 따라서 개별 근로자와 개별 부르주아 간의 충돌은 갈수록 두 계급간의 충돌이라는 성격을 띠게 된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에 반대하는 결사체(노동조합)를 결성하기 시작하며, 임금율을 높이기 위해 한데 뭉치고, 때때로 일어날 충돌에 미리 대비하기 위해 단체를 창건한다. 여기저기에서 싸움은 폭동으로 터지게 된다.

때때로 노동자는 승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다. 싸움의 실제적 결실은 직접적인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팽창하는 노동자들의 단결에 있다 .현대산업이 만들어낸 전달 수단으로 인해 여러 지역의 노동자들이 서로 접촉할 수 있게 됨으로써 단결은 한층 확대된다. 바로 이 접촉이야말로 같은 성격을 지니는 수많은 지역적 투쟁을 계급들간의 하나의 전국적 투쟁으로 집중시키는 데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다. 중세 시대의 시민이 옹색한 도로를 가지고 수백 년의 기간을 거쳐 달성한 그 단결을 한 대 프롤레타리아는 철도에 힘입어 수 년간 이룩한다.

이렇게 프롤레타리아를 하나의 계급으로, 나아가 하나의 정당으로 조직하는 일은 노동자 자신들 간의 경쟁으로 인해 계속 저해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럴수록 항상 다시 솟아오르며, 강해지며, 굳어지며, 거세지고 있다. 그 조직은 부르조아지 자체의 분열을 이용하여 노동자의 특정한 이해에 대한 입법적 승인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영국에서는 10시간 노동법안이 통과되었다.

기존 사회의 계급들 간에 일어나는 모든 충돌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과정을 촉진시킨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항상적인 싸움속에 있음을 깨닫는다. 부르주아지는 처음에는 귀족과, 이후에는 부르주아지 가운데 산업의 진보에 대해 적대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게 된 일부분과, 그리고 외국의 부르주아지와는 항상, 싸움을 벌여왔다. 이 모든 싸움에서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호소하고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으며, 그리하여 그들을 정치무대로 끌어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결국 부르주아지는 스스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기자신의 정치교육과 일반교육의 요소들을 공급하게 된다. 달리 말해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신과 맞서 싸울 무기를 주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본 대로 지배계급의 모든 분파들은 산업의 진보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하거나, 적어도 자신의 존재조건을 위협당하게 된다. 이들 역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계몽과 진보의 새로운 요소를 공급한다.

마지막으로, 계급투쟁이 결정적인 순간에 다다르게될 때 지배계급 내부에서, 아니 사실상 기존 사회 전체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붕괴과정은 매우 격렬하고 강렬한 성격을 띠게 되므로 지배계급의 일부가 떨어져나와 미래를 자기 수중에 장악하고 있는 혁명적 계급의 편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찍이 귀족의 일부가 부르주아지 편으로 넘어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부르주아적 한 부분, 특히 역사적 운동 전반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으로 스스로를 끌어올린 부르주아적 사상가들의 부분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으로 넘어온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대립하고 있는 모든 계급들 가운데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진정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다. 다른 계급들은 현대산업이 전진함에 따라 몰락하며 결국 사라져가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현대 산업의 특수하고도 본질적인 산물이다.

중간계급 하층, 소규모 공장주, 상점주, 기능공, 농민 등 이들 모두는 중간계급의 각 부분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키지 않기 위해서 부르주아지에 맞서 싸운다. 그러므로 그들은 혁명적이 아니고 보수적이다. 게다가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후진시키려 하기 때문에 반동적이기도 하다. 간혹 그들이 혁명적인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로의 전락이 임박했음을 예감했을 경우에만 그러하다. 그때 그들은 자신의 현재 이익이 아닌 미래 이익을 수호하며, 자신의 입장을 버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낡은 사회의 최하층에서도 내팽개쳐진, 수동적으로 썩어가는 대중인 것위험한 계급겄, 사회적 쓰레기는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인해 곳곳에서 운동 속에 휩쓸릴 수 있으나, 그 생활조건 때문에 그들은 거의가 반동적 음모에 의해 매수되는 도구의 일부가 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조건들 가운데 낡은 사회의 조건들은 대부분 이미 사실상 곤궁에 처해있다. 프롤레타리아는 재산도 없고, 처자와의 관계도 이제 더 이상 부르주아적 가족관계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으며, 영국에서나 프랑스에서나 미국에서나 독일에서나 현대적 산업노동, 자본에 대한 현대적 종속으로 인해 그는 일체의 민족적 성격을 잃어버렸다. 그에게 법, 도덕, 종교 따위는 바로 그만큼의 부르조아적 편견과 똑같으며, 그 뒤에는 그만큼의 부르조아적 이익이 매복해 있을 뿐이다.

선행했던 모든 지배계급들은 사회의 대부분을 자신의 전유(專有)조건하에 종속시킴으로써 기존의 지위를 강화하고자 했다. 프롤레타리아는 자기자신의 이전의 전유양식을 폐지하지 않고서는, 또 그럼으로써 다른 모든 전유양식을 폐지하지 않고서는, 또 그럼으로써 다른 모든 전유양식까지 폐지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생산력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들은 획득하고 강화시킬 그 무엇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의 사명은 지금까지 개인재산을 보호하고 보장해 온 모든 것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이전의 역사적 운동은 모두 소수의 운동이며 소수의 이익을 위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거대한 다수의 자의식적이고 자주적인 운동이며, 거대한 다수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우리 현 사회의 최하층인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적 사회의 모든 상위층들이 사라지지 않고서는 움직일 수도 일어설 수도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의 투쟁은 처음에, 내용에서는 아니더라도 형식에서는 일국적인 투쟁이다. 따라서 각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당연히 무엇보다 먼저 자국 부르조아지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일반적인 발전국면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기존 사회 내에서 벌어지는 어느 정도 은폐된 내전을 추적하여, 그 내전이 공개적인 혁명으로 터져나오고 부르조아지를 폭력적으로 타도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를 위한 토대를 놓는 지점에까지 이르렀다.

이미 보았듯이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형태는 억압계급과 피억압계급간의 적대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한 계급을 억압하려면 그 계급이 적어도 자신의 노예적 존재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일정한 조건이 보장되어야 한다. 농노제시대의 농노가 코뮨의 구성원으로 발전해 나갔듯이, 봉건적 절대주의의 멍에 속에 있던 쁘띠부르조아는 부르조아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 노동자는 산업의 진보에 따라 떠오르기는커녕 자기 계급이 존재조건 아래로 더욱 가라앉는다. 노동자는 빈민이 되며, 빈곤은 인구나 부의 증가보다 더 빨리 발전한다. 여기서, 부르조아지가 사회의 지배계급이 되거나 자신의 존재조건을 고압적인 법률로 사회에 강제하는 따위는 이제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즉, 부르조아지는 자신의 노예제 내에서 노예의 생존을 보장해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즉 노예가 자기를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노예를 먹여 살려야 하는 상황으로 노예를 빠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지배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사회는 이제 이 부르조아지 아래에서 살 수 없다. 달리 말해 부르조아지의 존재는 더 이상 사회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부르조아계급의 존재와 지배를 위한 본질적 조건은 자본의 형성과 증대이며, 자본의 조건은 임금노동이다. 임금노동은 오직 노동자들 간의 경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타의적이기는 하지만 부르조아지가 촉진시키는 산업의 진보는 경쟁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고립 대신 결사로 인한 혁명적 결합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현대산업의 발전은 부르조아지가 생산물을 생산하고 전유하는 바로 그 토대를 그 발 밑에서 무너뜨리는 셈이다. 결국 부르조아지가 생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무덤을 파는 자일뿐이다. 부르조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양자 모두 불가피한 것이다.

 



II.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공산주의자는 전체 프롤레타리아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공산주의자는 노동계급의 당들과 대립하는 별도의 당을 결성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지는 이해와 별도로 분리된 이해를 가지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자신만의 분파적 원칙을 세워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이 원칙에 뜯어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서만 다른 노동계급의 당들과 구별된다. (1) 각국 프롤레타리아의 일국적 투쟁에서, 일체의 국적으로부터 독립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 이해를 제기하고 전면에 내세운다. (2) 부르조아지에 반대하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거치는 다양한 발전단계에서, 언제 어디서나 그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는 한편으로 실천적인 면에서는 모든 나라 노동계급 당들 가운데 가장 선진적이고 결의에 찬 부분으로서 다른 모든 당들을 밀고 나아가며, 다른 한편으로 이론적인 면에서는 거대한 프롤레타리아 대중에 비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행노선, 조건, 궁극적인 전반적 결과들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공산주의자의 당면 목적은 다른 모든 프롤레타리아 당들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를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시키고, 부르조아 지배를 타도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도록 하는데 있다.

공산주의자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지는 이해와 별도로 분리된 이해를 가지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자신만의 분파적 원칙을 세워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이 원칙에 뜯어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서만 다른 노동계급의 당들과 구별된다. (1) 각국 프롤레타리아의 일국적 투쟁에서, 일체의 국적으로부터 독립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이해를 제기하고 전면에 내세운다. (2) 부르조아지에 반대하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거치는 다양한 발전단계에서, 언제 어디서나 그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는 한편으로 실천적인 면에서는 모든 나라 노동계급 당들 가운데 가장 선진적이고 결의에 찬 부분으로서 이론적인 면에서는 거대한 프롤레타리아 대중에 비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행노선, 조건, 궁극적인 전반적 결과들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공산주의자의 당면 목적은 다른 모든 프롤레타리아 당들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를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시키고, 부르조아 지배를 타도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도록 하는데 있다.

공산주의자의 이론적 명제들은 결코 이러저러한 자칭 보편적 개혁가가 발명 또는 발견한 사상이나 원칙들에 기초하지 않는다.

그 명제들은 단지 일반적인 견지에서 현존하는 계급투쟁으로부터, 바로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운동으로부터 솟아나오는 실제적 관계들을 표현할 뿐이다. 현존하는 소유관계의 폐지는 결코 공산주의의 명백한 특질이 아니다.

과거의 모든 소유관계는 역사적 조건의 변화에 따른 역사적 변화에 항상 종속되어 왔다.

예를 들어 프랑스혁명은 부르조아적 소유의 편에서 봉건적 소유를 폐지했다.

공산주의의 명백한 특질은 소유 일반의 폐기가 아니라 부르조아적 소유의 폐지이다. 그런데 현대 부르조아적 사유재산은 게급적대에 기초한, 소수에 의한 다수의 착취에 기초한 생산물의 생산, 전유 체제의 최종적이고도 가장 완벽한 표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산주의자의 이론은 사유재산의 폐지라는 단 하나의 문구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공산주의자는 한 사람이 자기 노동의 결실로서 사적으로 얻은 재산, 이른바 모든 사적 자유, 행동, 자주성의 기반이라고 일컬어지는 재산에 대한 권리를 폐지하려 한다고 비난받아 왔다.

자기가, 자신의 힘으로, 애써 벌어들인 재산이라니!

그것은 부르조아 재산형태에 선행하는 소기능공이나 소농민의 재산을 뜻하는가? 그것이라면 폐지할 필요도 없다. 산업의 발전이 이미 상당히 파괴해 왔고 지금도 나날이 파괴하고 있으므로.

그렇다면 현대 부르조아적 사유재산을 뜻하는가?

그러나 임금노동을 착취하는 재산, 새로운 착취를 위한 임금노동이 새로운 공급을 창출하는 조건이 없이는 증가될 수 없는 재산이다. 현재의 소유형태는 자본과 임금노동의 적대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제 이러한 적대의 양 측면을 검토해 보자.

자본가가 된다는 것은 생산에서 순수히 사적인 지위뿐 아니라 사회적인 지위도 갖는다는 것이다. 자본은 집단적 산물이며, 오직 많은 구성원들의 공동 행동에 의해서만, 아니 궁극적으로는 전사회 구성원들의 공동행동에 의해서만 운동할 수 있다.

요컨대 자본은 사적인 힘이 아니라 사회적인 힘이다.

그러므로 자본이 공동재산, 전 사회 구성원의 소유로 바뀐다고 해서 개인적 소유가 사회적 소유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변화되는 것은 단지 소유의 사회적 성격뿐이다. 소유는 그 계급적 성격을 잃는다.

이제 임금노동을 보자.

임금노동의 평균가격은 최저임금, 즉 노동자를 노동자로서 겨우 생존하게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존수단의 양이다. 그러므로 임금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전유하는 것으로는 단지 그 생존의 연장과 재생산만을 충족시킬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결코 그러한 노동생산물의 사적 전유를 폐지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생활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한 것일 뿐, 다른 사람의 노동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잉여를 남기지 낳는다. 우리는 오로지 그러한 전유의 비참한 성격을 제거하고자 할뿐이다. 그러한 전유하에서 노동자는 단지 자본을 증대시키기 위해 살아가며, 지배 계급의 이익이 요구하는 한에서만 살아갈 것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부르조아사회에서 산 노동은 축적된 노동을 증가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반면 공산주의사회에서 축적된 노동은 노동자의 생존을 넓히고 풍요롭게 하며 촉진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르조아사회에서는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지만, 공산주의사회에서는 현재가 과거를 지배한다. 부르조아사회에서 자본은 독립적이고 개성을 갖는 반면, 살아 있는 사람은 종속적이고 개성을 갖지 못한다.

부르조아는 이러한 상태의 폐지를 개성과 자유의 폐지라고 말한다! 그것은 옳다. 그것은 바로 부르조아적 개성, 부르조아적 독립성, 부르조아적 자유의 폐지를 목표로 하는 것이므로.

현재의 부르조아적 생산조건하에서 자유라 할 때 그것은 자유거래, 자유매매를 뜻할 뿐이다.

그러나 매매가 사라진다면 자유매매 역시 사라진다. 자유매매에 관한 이야기, 그 밖의 자유 일반에 관한 우리 부르조아지의 것호언장담겄 따위는 모두,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다면 단지 중세시대 속박된 상인들의 제한된 매매와 대비에서만 그러할 뿐, 매매, 부르조아적 생산 조건, 그리고 부르조아지 자체에 대한 공산주의적 폐지와 대비될 때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당신은 우리가 사유재산을 폐지하려 하는데 대해 경악한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9./10의 인구에게 사유재산은 이미 제거되었다. 소수에게 사유재산이 있는 이유는 순전히 그 9/10의 수중에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사회의 광범한 대다수에게 일체의 재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바로 그 존재의 필요조건으로 하는 재산형태를 제거하려 한다고 우리를 비난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당신은 우리가 당신의 재산을 제거하려한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다. 우리는 그것을 하려 한다.

노동이 더 이상 자본이나, 화폐, 지대로, 독점 가능한 사회적 힘으로 전화될 수 없게 되는 순간부터, 다시 말해 개인소유가 더 이상 부르조아적 소유로, 자본으로 전환될 수 없게 되는 그 순간부터 개성은 사라진다고 당신은 말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것개인겄이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부르조아적 소유자, 중간계급 소유자를 뜻하는 것임을 고백해야 한다. 사실 그런 개인은 깨끗이 일소되어야 한다.

공산주의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사회의 생산물을 전유할 힘을 박탈하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전유를 통하여 다른 사람의 노동을 종속시키는 힘을 박탈할 뿐이다.

공산주의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사회의 생산물을 전유할 힘을 박탈하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전유를 통하여 다른 사람의 노동을 종속시키는 힘을 박탈할 뿐이다.

사유재산이 폐지되면 모든 노동이 중단되고 곳곳에서 나태가 우리를 덮칠 것이라는 반대가 있어왔다.

그러나 그에 따른다면 이미 오래 전에 부르조아사회는 순전히 게으름으로 인해 파멸해 버려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하는 사회 구성원들은 아무것도 갖지 못하며,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은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반대는 모두 자본이 없다면 임금노도도 있을 수 없다는 동어반복의 또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물질적 생산물의 공산주의적 생산, 전유양식에 대해서 제기된 모든 반대는 똑같은 방식으로 정신적 생산물의 공산주의적 생산, 전유양식에 대해서도 제기되어 왔다. 부르조아지에게는, 계급적 소유의 소멸이 곧 생산 자체의 소명이듯이, 계급문화의 소명은 모든 문화의 소멸과 같다.

부르조아지가 잃고서 애통해하는 바로 그 문화란 실상 엄청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단지 하나의 가계로서 행동하기 위한 훈련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부르조아적 소유의 폐지를 주장하는 데 대해 당신이 자유, 문화, 법 따위 당신의 부르조아적 개념 기준을 적용하려 하는 한 당신은 우리와 말다툼할 필요가 없다. 당신의 법이란 것이 실상은 당신의 계급의지, 즉 당신 계급의 경제적 존재 조건에 의해 그 본질적 성격과 방향이 규정되는 의지가 법제화된 것에 지나지 않듯이, 당신의 바로 그 사상 역시 당신의 부르조아적 생산조건과 부르조아적 소유조건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현재 생산양식과 소유형태--생산의 진보 속에서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역사적 관계--로부터 나오는 사회적인 형태들이 자연과 이성의 영원한 법칙인 것처럼 여기는 이기적이고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당신에 선행했던 모든 지배계급들도 가지고 있었다. 고대적 소유에서 당신이 똑똑히 본 것, 봉건적 소유에서 당신이 인정한 것을 물론 당신은 당신 자신의 부르조아적 소유형태의 경우에는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가족의 폐지라니! 공산주의자의 이 파렴치한 주장에는 가장 급진적인 사람들까지도 분노하고 있다.

지금의 가족, 부르조아적 가족이 서 있는 토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이며 사적 이익이다. 따라서 이 가족이 완전히 발전한 형태는 단지 부르조아지에게만 존재할 뿐이다. 반면 이러한 상태가 진행되면 결국 프롤레타리아에게는 가족이 실제로 사라질 것이며, 공창(公娼)만이 남을 것이다.

당신은 우리가 부모에 의한 자식의 착취를 중지시키려 한다고 해서 비난하는가? 그것도 죄라면 우리는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가 가정교육을 사회교육으로 바꾸려는 것을 모든 관계 중에 가장 성스러운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이 말하는 교육이란 뭔가! 당신의 교육 역시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에 의해, 학교 등을 통한 사회의 직, 간접적 개입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적인 것이 아닌가? 공산주의자는 교육에 대한 성격을 바꾸고, 지배계급의 영향으로부터 교육을 구출하려 할뿐이다.

가족과 교육에 관한, 부모와 자식의 성스런 관계에 관한 부르조아적 말장난은 현대산업의 활동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적인 것이 아닌가? 공산주의자는 교육에 대한 사회의 개입을 발명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개입의 성격을 바꾸고, 지배계급의 영향으로부터 교육을 구출하려 할뿐이다.

가족과 교육에 관한, 부모와 자식의 성스런 관계 관한 부르조아적 말장난은 현대산업의 활동에 의해 프롤레타리아들 간의 모든 가족적 유대가 끊어질수록, 그리고 그들이 자식들이 단순한 상품이나 노동도구로 바뀌어갈수록 더욱 혐오스러워진다.

그렇지만 너희 공산주의자들은 여성공유제를 도입하려는 게 아니냐고 전체 부르조아지는 소리 맞춰 악을 쓴다.

부르조아는 자기아내를 단지 생산도구로만 본다. 그는 생산도구는 공동으로 이용되어야 한다고 들었으므로 자연히 모든 것을 공유한다는 운명이 여성에게도 닥치리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목적하는 바는 단순한 생산도구로서의 여성의 지위를 없애버리려는 데 있다는 것을 그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공산주의자들이 이른바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건설하려 한다는 여성공유제에 대해 우리의 부르조아가 실제로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정말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거의 기억할 수 없을 정도의 먼 옛날부터 존재해 온 것이므로.

우리의 부르조아는 공창은 물론 자기 휘하에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아내와 딸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만족하지 않고 다른 부르조아의 아내를 유혹하는데 커다란 쾌락을 느낀다.

부르조아의 결혼은 사실상 부인공유제이다. 그러므로 설령 공산주의자가 비난받는다 하더라도 그 비난은 위선적으로 은폐된 여성공유제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합법화된 여성공유제를 도입하려 한다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현 생산제도의 폐지와 더불어 이 제도에서 생겨난 여성공유제, 즉 공창과 사창이 모두 폐지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나아가, 공산주의자는 나라와 국적을 폐지하려 한다고 비난받는다.

노동자에게는 나라가 없다.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빼앗을 수는 없는 일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지배권을 획득해야 하므로, 해당 민족의 영도적 계급으로 떠올라야 하므로, 자신이 스스로 그 민족을 구성해야 하므로, 비록 부르조아적 의미는 아니지만 그 자체가 민족인 것이다.

민족들 간의 민족적 차이와 적대는 부르조아지의 발전, 상업의 자유, 세계시장, 생사양식과 그에 따른 생활조건에서의 제일성 등으로 인해 날이 갈수록 사라져가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는 그것들을 한층 더 빨리 사라지게 할 것이다. 선진문명국의 통일행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방을 위한 1차 조건 가운데 하나이다.

개인에 의한 개인의 착취가 종식되는 것과 비례하여 민족에 의한 민족의 착취도 종식될 것이다. 민족 내에서 계급간의 적대가 사라질수록 민족간의 증오 또한 사질 것이다.

종교, 철학의 견지에서 또는 일반적으로는 이데올로기적 견지에서 나오는 공산주의에 대한 비난은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도 없다.

인간의 관념, 견해, 생각, 한 마디로 인간의 의식이 그의 물질적 존재조건, 사회관계, 사회생활이 변함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그리 깊은 직관을 필요하는가?

사상의 역사는 바로 물질적 생산이 변화하는 정도에 따라 정신적 생산이 그 성격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시대의 지배적 사상은 항상 지배계급의 사상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사회를 변혁하는 사상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곧 낡은사회 내에서 새로운 사회의 요소들이 창조된다는 사실, 낡은 사상의 해체는 항상 낡은 존재조건의 해체와 보조를 같이 한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고대세계가 마지막 진통을 겪고 있을 때 고대종교는 기독교에 의해 정복되었다. 또 기독교 사상이 18세기에 이르러 합리주의 사상에 굴복했을 때 봉건사회는 당시의 혁명적 부르조아지와 목숨을 걸고 싸웠다. 종교적 자유와 양심의 자유라는 사상은 단지 지식의 영역에서도 자유경쟁이 지배한다는 것을 표현할 뿐이었다.

흔히 이렇게들 말한다. 겁의심할 바 없이 종교적, 도덕적, 철학적, 법적 사상은 역사발전과정에서 변형되어 왔다. 그러나 종교, 도덕, 철학, 정치학, 법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항상 살아남았다.겂

겁그밖에도 자유, 정의 등 어떠한 상회에도 공통적인 영원한 진리들이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영원한 진리, 모든 종교나 도덕을 새로운 토대 위에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폐지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는 과거의 모든 역사적 경험과 모순적으로 움직인다.겂

이러한 비난은 어디로 귀결되는가? 모든 과거 사회의 역사는 계급적대, 각 시대마다 각기 다른 형태를 취했던 적대의 발전사였다.

그러나 그 형태야 어떠하든 과거 모든 시대에 공통적인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곧 사회의 어느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착취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다종다양하다 하더라도 과거 시대의 사회적 의식은, 계급적대가 모두 없어지지 않으면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일정한 공동형태 또는 일반관념의 범위 내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은 극히 당연한 것이다.

공산주의혁명은 전통적 소유관계와의 가장 근본적인 결별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혁명의 발전은 전통적 사상과의 가장 근본적인 결별을 포함한다.

하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부르조아적 반론에 대해서는 이쯤 해두자.

우리는 앞에서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것, 민주주의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임을 보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조아지에게서 점차로 일체의 자본을 빼앗고, 모든 생산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총생산력을 가능한 한 빨리 증대시키게 될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소유권과 부르조아적 생산조건에 대한 전제적(專制的) 침해를 통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경제적으로는 불충분하고 무리한 듯이 보이지만 발전해 가는 가운데 스스로를 뛰어넘어 낡은 사회질서에 대한 더 이상의 침해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조치, 생산양식을 전면적으로 혁명화하는 수단으로서 불가피한 조치가 없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은 물론 나라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선진적인 나라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매우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1. 토지소유를 폐지하고 모든 지대를 공공의 목적으로 활용한다.

2. 소득에 대해 높은 누진과세를 적용한다.

3. 모든 상속권을 폐지한다.

4. 모든 망명자와 반역자의 재산을 몰수한다.

5. 국가자본과 배타적 독점을 가진 국립은행을 통하여 신용을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한다.

6. 전달, 운송수단을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한다.

7. 국가소유의 공장과 생산도구를 증대한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공동의 계획에 따라 토질을 개선한다.

8. 모두가 똑같이 노동의 의무를 진다. 특히 농업을 위한 산업군을 편성한다.

9. 농업과 제조업을 결합한다. 인구를 전국적으로보다 균등하게 분배함으로써 도시와 농촌간의 차별을 점차 폐지한다.

10. 공립학교에서 모든 어린이를 위한 무상교육을 실시한다. 현존하는 어린이의 공장노동을 폐지한다. 교육과 산업적 생산을 결합한다, 등등.

발전과정에서 계급적 파별이 없어지고 모든 생산이 광범위한 전국적 단체의 손에 집적되면, 공권력은 정치적 성격을 읽게 된다. 이른바 정치권력이란 본래 단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는 조직된 힘일 뿐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조아지와의 싸움에서 상황의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계급으로서 조직하게 되면, 또 혁명을 통해 지배계급으로 자라나고, 그 자체로 낡은 생산조건을 무력으로 없애버리게되면, 그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들 생산조건과 더불어 계급적대와 계급 일반의 존재조건을 없애버리게 되면, 그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들 생산조건과 더불어 계급적대와 계급 일반의 존재조건을 없애버리게 될 것이며, 또 그럼으로써 한 계급으로서 가지는 자신의 지배권도 폐지하게 될 것이다.

계급과 계급적대의 낡은 부르조아사회 대신 우리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단체를 가지게 될 것이다.

 


III. 사회주의, 공산주의 문헌

 

1. 반동적 사회주의

 

A. 봉건적 사회주의

 

프랑스와 영국의 귀족들은 그들이 가진 역사적 지위로 인해 현대 부르조아사회를 반대하는 소책자를 쓰는 것을 소명으로 하게 되었다. 1830년 프랑스 7월혁명과 영국의 개혁운동에서 이들 귀족은 다시 한 번 혐오스런 벼락부자에게 굴복했다. 그로부터, 중대한 정치투쟁은 매우 명약관화한 일이 되었다. 이들에게는 문헌투쟁만이 가능했지만 문헌의 영역에서조차 복고시기의 낡은 외침은 불가능해져 버렸다.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귀족들은 겉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피착취 노동계급의 이익만을 쫓아 부르조아지를 고발해야 했다. 이와 같이 귀족은 그들의 새로운 주인을 풍자하는 노래를 부르고 주인의 귀에 다가올 재난의 대한 불길한 예언을 속삭임으로써 보복을 꾀했다.

이렇게 하여 봉건적 사회주의는 생겨났다. 반쯤은 비탄으로 반쯤은 풍자로, 또 반쯤은 과거의 메아리로 반쯤은 미래의 위협으로, 때로는 신랄하고 재치 있는 가시 돋친 비판을 통해 부르조아지에게 철두철미 충격을 가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현대 역사의 행진을 전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결과는 항상 우스꽝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귀족은 사람들을 자기 주위로 결집시키기 위하여 기치를 들고 프롤레타리아 자선함을 흔들어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과 어울릴 때마다 그들의 엉덩이에 봉건 문장(紋章)이 찍힌 것을 보고는 불경스럽게 큰 웃음을 터뜨리며 돌아섰다.

프랑스 정통주의자와 것영국청년단겄의 일파도 이러한 희극을 연출했다.

봉건주의자는 그들의 착취양식이 부르조아지의 착취양식과는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그들 역시 이제는 낡아빠졌지만 전혀 다른 상황과 조건에서 착취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지배하에서는 현대 프롤레타리아트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면서도, 현대 부르조아지가 그들 자신의 사회형태에서 나온 필연적 후예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그들의 비판이 가진 반동적 성격을 거의 감추지 않기 때문에, 부르조아지에 대한 그들의 주된 비난은 부르조아 체제하에서 낡은 사회질서를 철저히 분쇄해 버릴 운명을 진 한 계급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까지 지적하고 있다.

그들이 부르조아지를 호되게 비판하는 이유는 부르조아지가 단지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들었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정치적 실천에서 그들은 노동계급에 반대하는 모든 강압조치에 동참하며, 일상생활에서는 온갖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산업의 나무에서 떨어진 황금사과를 줍기 위해, 그리고 진리, 사랑, 명예를 양모, 사탕무우, 주정(酒精)과 맞바꾸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것이다.

목사가 영주와 손잡고 나아갔듯이 성직자 사회주의는 봉건적 사회주의와 손잡았다.

기독교적 금욕주의에 사회주의 색채를 가미하는 것만큼 쉬운 일도 없다. 기독교는 원래 사유재산, 결혼, 국가를 비난해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대신 박애와 빈곤, 독신과 신체적 금욕, 수도원 생활과 교회를 설교해 오지 않았던가? 기독교적 사회주의는 단지 성직자가 귀족의 불만에 대해 봉헌하는 성수(聖水)에 지나지 않는다.

 

B. 쁘띠부르조아 사회주의

 

부르조아지가 파멸시킨 계급, 현대 부르조아사회의 대기 속에서 그 존재조건이 취약해지고 사멸한 계급은 봉건귀족만이 아니다. 중세의 시민이나 소농경영자는 현대 부르조아지의 선구자였다. 산업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거의 발전하지 못한 나라들에서 이들 두계급은 떠오르는 부르조아지와 더불어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현대 문명이 충분히 발달한 나라들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 사이에서 동요하며 부르조아사회의 보완물로서 자신을 계속 쇄신하는 쁘띠부르조아의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이 계급의 개별 구성원들은 자유경쟁으로 인해 끊임없이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한다. 현대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그들은 현대 사회의 독립적 부분으로서는 완전히 사라지고 제조업, 농업, 상업에서의 관리자, 토지관리인, 상점주로 거의 바뀌는 순간까지 눈 앞에 두게된다.

농민이 인구의 절반을 훨씬 넘는 프랑스 같은 나라들에서는, 부르조아지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에 서는 저술가들은 당연히 부르조아체제를 비판하는 데서 농민과 쁘띠부르조아의 기준을 사용해야 했으며, 이들 매개적 계급의 입장에서 노동계급을 위해 곤봉을 들어야 했다. 이리하여 쁘띠부르조아 사회주의가 생겨났다.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에서도 이 학파의 지도자는 시스몽디였다.

이 사회주의 학파는 현대 생산조건의 모순을 매우 날카롭게 분석했으며, 경제학자들의 위선에 찬 변명을 낱낱이 폭로했다. 그리고 기계와 분업의 파멸적 결과, 소수에게로의 자본과 토지 집적, 과잉생산과 공황을 논쟁의 여지없이 입증했다. 또한 그들은 쁘띠부르조아와 농민의 불가피한 몰락, 프롤레타리아트의 고통, 생산의 무정부성, 방치할 수 없는 부의 불평등한 분배, 국가들간의 파멸적 산업전쟁, 낡은 도덕적 유대의 해체, 낡은 가족관계, 낡은 국적 등을 지적했다.

그러나 설사 그 긍정적인 목적에서 보더라도 이 사회주의 형태는 낡은 생산수단과 교환수단 및 이와 더불어 낡은 소유관계와 낡은 사회로 되돌아가고자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현대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에 의해 파괴되어 왔고 또 파괴될 수밖에 없는 낡은 소유관계의 틀 내에 현대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을 가두고자 한다. 양자 어느 경우이거나 반동적이며 공상적이다.

그 최후의 주장은 제조업에서의 법인길드, 농업에서의 가부장적 관계이다.

결국 완강한 역사적 사실이 자기기만의 도취상태를 흩어버렸을 때 이러한 형태의 사회주의는 우울증의 비참한 발작으로 끝나버렸다.

 

C. 독일 사회주의 또는 것진정한겄사회주의

 

* 여기서 진정한의 뜻은 말뿐임을 말함.

 

프랑스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문헌은 권력을 갖고있는 부르조아지의 억압하에서 생겨났으며 그 권력에 대항하는 투쟁의 표현이었다. 이 문헌들은 독일에서 부르조아지가 봉건 절대주의와의 경쟁을 막 시작했을 무렵 독일로 유입되었다.

독일 철학자, 자칭 철학자, 그리고 재담꾼들은 이 문헌들을 열심히 읽어댔지만 이 저작들이 프랑스에서 독일로 옮겨올 때 프랑스의 사회적 조건이 같이 옮겨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잊고 말았다. 독일의 사회적 조건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이들 프랑스 문헌은 직접적인 실천적 의의를 모두 일었으며 순수히 문헌적인 의미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18세기 독일 철학자에게 제 1차 프랑스 혁명에서 나온 요구들은 것실천이성겄 일반의 요구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혁명적인 프랑스 부르조아지의 의지의 발현 또한 그들의 눈에는 순수의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의지, 일반적으로는 진정한 인간의지의 법칙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독일 저술가의 저작은 오로지 그들의 고대철학적 양심에 새로운 프랑스 사상을 조화시키는 것, 아니 그보다는 그들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버리지 않으면서 프랑스 사상을 접목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접목은 외국어가 사용되는, 즉 번역되는 것과 똑같은 식으로 이루어져있다.

수도사들이 어떻게 고대 이단(異端)의 저작들이 쓰여 있는 원고 위에 가톨릭 성자들의 따분한 생애를 덧썼던가는 잘 알려져 있는 일이다. 그러나 독일 저술가들은 세 속의 프랑스 문헌을 가지고 이러한 과정을 거꾸로 밟았다. 그들은 프랑스 원본 아래 자신들의 철학적 헛소리를 써넣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그들은 화폐의 경제적 기능에 대한 프랑스 비판서 아래에는 것인간의 소외겄를 써넣었고, 부르조아 국가에 대한 프랑스 비판서 아래에는 것추상적 보편자의 예위겄를 써넣는 식이었다.

프랑스의 역사비판서에 이러한 철학적 문구들을 삽입하는 것에 대해 그들은 것행동의 철학겄, 것진정한 사회주의겄, 것 독일의 사회주의 과학겄, 것사회주의의 철학적 토대겄 따위의 작위를 수여했다.

이리하여 프랑스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문헌은 완전히 알맹이가 빠져버렸다. 또한 독일인의 손에서 이미 그 문헌은 한 계급과 다른 계급의 투쟁을 표현하지 않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독일인은 것프랑스의 편향겄을 극복했다고 보았으며, 진정한 요구가 아니라 진리의 요구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이 아니라 인간본질의 이익을, 즉 아무 계급에도 속하지 않고 실체도 없으며 단지 철학적 환상의 모호한 영역에만 존재하는 인간 일반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이 독일 사회주의는 국민학교 숙제를 상당히 심각하고 근엄하게 받아들이며 그 빈약한 재고품을 협잡에 가득한 양태로 격찬하는 가운데 점차 그 현학적인 무지를 잃어갔다.

봉건귀족과 절대군주에 대항하는 독일인의 투쟁, 특히 프러시아 부르조아지의 투쟁, 달리 말하면 자유주의 운동은 더욱 격화되었다. 그로써 것진정한겄사회주의가 오랫동안 갈망해 오던 기회, 즉 정치적 운동을 사회주의적 요구와 대결시키며, 자유주의에 대해, 대의정부에 대해, 부르조아적 경쟁, 부르조아적 언론의 자유, 부르조아적 입법, 부르조아적 자유와 평등에 대해 전통적인 파문(破門)을 명하고, 대중에게 부르조아 운동으로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읽은 것은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설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독일 사회주의는 프랑스 비판의 단조로운 모방이면서도 프랑스 비판이, 바로 독일에서의 임박한 투쟁이 이루려는 목적인 부르조아사회의 경제적 존재조건과 이에 적합한 정치구조를 가진 현대 부르조아사회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은 때마침 잊어버렸다.

절대주의 정부 및 이에 딸린 목사, 교수, 지방 유지와 관리들에게 것진정한겄사회주의는 부르조아지의 협박에 대항하는 안성맞춤의 허수아비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 정부가 바로 그 당시에 독일 노동계급의 봉기에 대해 투약했던 채찍과 총탄이라는 쓰디쓴 약을 달래주는 달콤한 마무리였다.

이와 같이 것진정한겄사회주의는 정부를 위해 독일 부르조아지와 싸우는 무기로서 역할 하는 동시에, 반동적인 이익, 독일 속물들의 이익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독일에서, 16세기 의 유물이자 그때부터 계속 다양한 형태로 다시 나타나곤 했던 쁘띠부르조아계급은 현 상황의 현실적인 사회적 토대이다. 독일에서 이 계급의 존속은 곧 기존 상황의 존속을 뜻한다 .부르조아지의 산업적, 정치적 지배는 한편으로는 자본의 집적으로 인해,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으로 인해 쁘띠부르조아지에게 일정한 파멸의 위협을 가한다. 이들에게 것진정한겄 사회주의는 이 두 마리 새를 하나의 돌로 잡을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그것은 전염병처럼 번졌다.

화려한 수사(修辭)의 꽃으로 수놓아지고 창백한 감상의 이슬에 함빡젖은 사색의 거미줄 같은 의상, 독일 사회주의자들이 것영원한 진리겄라는 말라빠진 그들의 육신을 감추기 위한 이 선험의 의상은 대중 속에서 그들의 상품 판매량을 놀랄 만큼 증대시키는데 기여했다.

또한 한편으로 독일 사회주의는 점점 더 쁘띠부르조아 속물의 허풍스런 대변인으로서의 자기 소명을 인식해 갔다. 독일 사회주의는 독일 민족을 모범 민족으로, 그리고 독일 속물들을 전형적인 인간으로 주장했다. 이 모범 인간이 가진 약간의 야비한 구석이라도 보이면 독일 사회주의는 그것을 실제 성격과는 정 반대로, 은폐되고 고상한 사회주의적 해석을 가했다. 또한 장황하리만치 공산주의의 것야수같은 파괴적겄 경향을 정면으로 반대했으며, 모든 계급투쟁에 대해 고상하고 공평한 경멸을 표했다. 몇 가지 극히 드문 예외를 제외한다면 지금(1847) 독일에서 돌아다니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출판물들은 모두 이러한 비열하고 무기력한 문헌의 범주에 속한다.

 

2. 보수적 사회주의 또는 부르조아 사회주의

 

부르조아지의 일부는 부르조아사회의 지속적 생존을 도모하기 위하여 사회적 불만요인을 개선하고자 한다.

이 부분에 속하는 이들로는 경제학자, 자선가, 인도주의자, 노동계급의 상태를 개선하려는 자, 자선의 조직자, 기타 온갖 종류의 하찮은 개혁가들이 있다. 나아가, 이러한 형태의 사회주의는 완전한 체계로 발전되어 왔다.

프루동의 겁빈곤의 철학겂을 이러한 형태로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타자맨 主: 맑스는 프루동의 겁빈곤의 철학겂을 혹독하게 비판한 겁철학의 빈곤겂이라는 저작을 남긴바 있다.)

사회주의적 부르조아는 현대 사회적 조건의 모든 장점을 원하지만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투쟁과 위험은 배제하고자 한다. 그들은 사회의 현 상태에서 그 혁명적이고 붕괴적인 요소를 뺀 것을 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없는 부르조아지를 원한다. 부르조아지는 당연히 자신이 패권을 쥐고 있는 세계가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부르조아지 사회주의는 이 안락한 생각을 어느 정도 완전한 여러 체계들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부르조아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그러한 체계에 따를 것, 그리하여 사회적 신(新)예루살렘으로 곧장 행진할 것을 요구하지만, 사실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기존 사회의 테두리 내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부르조아지에 대한 그들의 모든 증오에 찬 생각을 떨쳐버려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보다 실천적이지만 보다 덜 체계적인 이 사회주의의 또 다른 형태는 정치적 개혁이 아니라 물질적 존재조건, 경제 관계의 변화만이 노동계급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노동계급의 눈앞에서 일체의 혁명운동을 평가절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 존재조건의 변화라고 할 때, 이러한 사회주의 형태는 그것을 오직 혁명에 의해서만 있을 수 있는 부르조아 생산관계의 폐지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산관계의 지속적 유지에 기초한 행정개혁으로만, 따라서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고, 기껏해야 부르조아 정부의 비용을 줄이고 행정업무를 단순화하는 정도의 개혁으로만 이해할 뿐이다.

부르조아 사회주의는 단지 하나의 비유가 될 때, 오직 그때에만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있다.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자유무역,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보호관세,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감옥 개량, 이것이 부르조아 사회주의의 마지막 말이자 유일하게 진지한 말이다.

그것은 다시 다음의 한 문구로 요약된다. 부르조아는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부르조아이다.

 

3.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 공산주의

 

여기서 우리는 현대의 모든 대혁명마다 항상 프롤레타리아트의 요구를 소리높여 외쳐왔던 바뵈프 등의 저작과 같은 문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처음으로 직접 시도한 것은 봉건사회가 불과하고 있던 전반적 격동기였다. 하지만 당시 프롤레타리아트는 미발전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행방을 위한 경제적 조건--당시 아직 생성되지 않았으며, 임박한 부르조아 시대에 의해서만 생성될 수 있는 조건-도 없었기 때문에 그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 프롤레타리아트의 초기 운동들을 추종했던 혁명적 문헌들도 반동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들은 극히 조잡한 형태로 보편적 금욕주의와 사회평준화를 가르쳤다.

본래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계인 생시몽, 푸리에, 오웬 등의 체계는 앞서 말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 간의 투쟁이 발전되지 않은 초기 시기에 생겨난다(I절 부르조아지와 프롤레타리아를 보라).

이들 체계의 설립자들도 사실 지배적인 사회형태속에서 와해요소의 활동뿐 아니라 계급적대까지 보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아직 유아기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떠한 역사적 창의성도, 어떠한 독자적 정치운동도 갖지 못한 계급의 모습으로 보인다.

계급적대의 발전은 항상 산업의 발전과 보조를 함께 하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는 경제상황은 아직 그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을 위한 물질적 조건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조건을 창출할 새로운 사회과학, 새로운 사회법칙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 행동은 그들의 사적인 창의적 행동으로 대체되고,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해방의 조건은 환상적 조건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점진적이고 자연발생적인 계급조직은 그 발명가들에 의해 특수하게 고안된 사회조직으로 바뀐다. 그들이 보기에 미래 역사는 결국 그들의 사회적 계획의 실천이자 그 실천적 실행일 뿐이다.

계획을 구성하는 데서 그들은 의식적으로 가장 고통 당하는 계급인 노동계급의 이익에 주된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란 오직 가장 고통 당하는 계급이라는 관점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계급투쟁과 그들 자신의 환경의 미발전된 상태로 인해 그러한 종류의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모든 계급적대를 초월해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들은 사회 모든 구성원들, 심지어 가장 형편이 좋은 사람들의 조건조차 개선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습관적으로 계급구분 없이 사회전체에게, 아니 우선적으로는 지배계급에게 호소한다. 하기야 일단 그들의 체계를 이해하고 난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가장 가능한 사회상태의 가장 가능한 계획임을 알지 못하겠는가?(타이핑맨 主 : 이 문장은 마르크스와 앵겔스의 풍자적 독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정치적 행동, 특히 혁명적 행동을 거부한다. 그들은 평화적인 수단으로 그들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며,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잘한 실험들이나 사례의 힘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복음으로 나아가는 길을 닦으려고 애쓴다.

그렇듯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매우 미발전된 상태에서 오직 자신의 입장에 대한 환상적인 생각마을 가지고 있을 무렵에 그려진 미래 사회의 상상화는 산회의 전반적 재건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번째 본능적 기지개에 상당한다.

그러나 이 사회주의, 공산주의 출판물들은 또한 중요한 요소를 담고 있다. 그것들은 기존 사회의 모든 원칙을 공격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노동계급의 계몽을 위한 극히 중요한 자료들로 가득차 있다. 도시와 농촌간의 구별 폐지, 가족의 폐지, 개인의 사적 이익을 위한 산업경영의 폐지, 임금제도의 폐지, 사회적 조화의 주창, 국가기능의 단순한 생산감독 기능으로의 전화등 거기서 제기되는 실천적 조치들은, 당시에 겨우 나타나고 있었으므로 이들 출판물에서는 초기적이고 불명확한 형태로만 인식되었던 계급적대의 소명을 지적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제안들은 순수히 공상적인 성격을 띤다.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중요성은 역사발전과 역관계를 취한다. 현대 계급투쟁이 발전되고 특정한 형태를 취해갈수록, 투쟁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는 이 환상적인 입장, 투쟁에 대한 이 환상적인 공격은 모든 실천적 가치와 모든 이론적 정당성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비록 이들 체계의 창시자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혁명적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진보적 역사발전에 반대하여 스승들의 원래 견해를 굳게 고수한다. 따라서 그들은 계급투쟁을 약화시키고 계급적대를 해소시키기 위해 철저하게 노력하는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사회적 이상향을 실험적으로 실현하는 것을 꿈꾸며, 고립된 것팔랑스떼르겄,것공동부락겄,것작은 이카리아겄--신예루살렘의 축소판--를 건설할 것을 꿈꾼다. 그들은 공중누각을 실현하기 위하여 부르조아의 자비와 지갑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점차로 그들은 앞서 서술한 반동적인 보수적 사회주의자들과는 단지 보다 체계적인 현학을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자기들 사회과학의 기적적인 효과에 대한 미신적인 광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만 다를 뿐 그들과 같은 범주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노동계급의 편에 선 모든 정치적 행동을 격렬히 반대한다. 그들이 보기에 그러한 행동은 새로운 복음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영국의 오웬주의자, 프랑스의 푸리에주의자들은 각각 차티스트와 개혁파를 반대한다.

 


IV. 기존의 여러 반대파에 관한 공산주의자에 입장

 

II절에서 이미 영국의 차티스트나 미국의 농업개혁가들과 같은 기존의 노동계급 당들에 관한 공산주의자의 관계는 명확히 밝혀졌다.

공산주의자는 당면 목표의 달성을 위해, 노동계급의 당면한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싸우는 동시에, 현재의 운동 속에서 이 운동의 미래를 보여주고 이에 관심을 기울인다. 프랑스에서 공산주의자는 보수적 부르조아지와 급진적 부르조아지에 대항하여 사회민주주의자와 동맹을 맺었지만, 대혁명으로부터 전통적으로 물려받은 문구나 환상적인 생각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권리는 남겨두고 있다.

스위스에서 공산주의자는 급진주의자를 지지하지만, 이 당의 일부는 프랑스적인 의미에서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자로, 일부는 급진적 부르조아라는 적대적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놓치지 않는다.

폴란드에서 공산주의자는 농업혁명을 민족해방의 첫째 선결조건으로 주장하며, 1846년 크라쿠프 봉기를 주도했던 당을 지지한다.

독일에서 공산주의자는 부르조아지가 절대군주, 봉건지주, 쁘띠뿌르조아지에 반대하여 혁명적으로 행동할 경우 이들과 함께 싸운다.

그러나, 부르조아지가 자신의 지배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도입하게 되는 사회, 정치적 조건을 독일 노동자들이 오히려 부르조아지에 대항하는 무기로써 곧바로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독일 반동계급의 몰락 이후 부르조아지에 대항하는 무기로써 곧바로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독일 반동계급의 몰락 이후 부르조아지에 반대하는 투쟁 자체가 즉시 시작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는 부르조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간의 적대관계에 가장 명확한 인식을 노동계급에 주입시키려 끊임없이 노력한다.

공산주의자는 독일에 주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왜냐하면 독일은 부르조아혁명의 전야에 있으며, 17세기 영국이나 18세기 프랑스에 비해 유럽문명의 보다 선진적인 조건과 보다 발전된 프롤레타리아트를 가지고 부르조아혁명은 곧이어 뒤따를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서곡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공산주의자는 모든 곳에서 기존의 사회, 정치적 질서를 반대하는 모든 혁명을 지지한다.

그 모든 혁명에서 공산주의자는 각국의 발전정도와 관계없이 소유문제를 핵심적인 문제로서 전면에 내세운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자는 어디서나 모든 나라 민주적 정당들의 통일과 합의를 위해 노력한다.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견해와 목적을 감추는 것을 경멸한다.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목적이 오직 기존의 모든 사회적 조건을 힘으로 타도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선포한다. 모든 지배계급을 공산주의혁명 앞에 떨게하라.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세상이다.(Let the ruling classes tremble at a Communistic revolution. The proletarians have nothing to lose but their chains. They have a world to win.)

 


전 세 계 노 동 자 여, 단 결 하 라 !

WORKING MEN OF ALL COUNTRIES, UNITE!

Posted by WN1
,


◆코뮌이란?=수유+너머에서 주장하는 코뮌이란 ‘비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모임’이다. 

최근 논문과 책을 통해 활발히 코뮌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이진경씨는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이유를 분석하던 도중 현실사회주의가 ‘근대적 주체’를 만들려 했기 때문에 몰락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며 “근대적 주체에서 벗어난다면, 자본주의적 삶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근대적 주체에 대해 권용선씨는 “특정 정체성에 고정돼 있는 존재”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이라는 고정된 정체성을 가지면 그 정체성이라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외국인들을 배척하고 미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권씨는 “반면 ‘비근대적 주체’는 관계맺음에 따라 변화하는 주체이며 정해진 틀이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더 좋은 자신을 찾아 변화·탈주하는 주체”라고 설명했다. 

이렇듯 코뮌주의는 코뮌 공동체 이외의 정해진 틀에 갇히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회·구조적 비전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단 한·미FTA, 평택 미군기지 이전 등의 사안에 대해서는 소수자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에 대해 이진경씨는 “코뮌주의는 비근대성에 대한 사유의 결론이 아니라 비근대성을 사유하기 위한 출발점”이라며 “코뮌주의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기존의 사회·구조적 이론들을 새롭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코뮌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가?=권용선씨는 “나 자신도 책 소유에 집착하는 등 근대적인 삶을 살았지만 수유+너머에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동안의 삶이 과욕적이었고, 비생명적이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진경씨도 “자신의 몸에 배어있는 근대적인 습속과 무의식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선물을 주고받듯 대가 없이 베푸는 관계를 ‘경험’해야 그런 변화가 생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코뮌이 소모임에서는 가능하지만 국가수준의 큰 공동체에서까지도 가능하겠느냐는 비판이 있다. 이에 대해 이진경씨는 “코뮌들의 코뮌, 코뮌들의 네트워크로 더 큰 공동체에서도 가능할 것”이라고 답했다. 


◆코뮌의 한계는?=코뮌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강신준 교수(동아대 경제학과)는 “자본주의적이고 근대적인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하려는 코뮌주의의 정신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강 교수는 “소수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코뮌주의가 다수 대중의 사회운동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다수 대중을 참여시키느냐’하는 문제는 등한시 했다”고 말했다.

들뢰즈 연구자인 김재인씨(서울여대 강사) 역시 “실체가 없다”며 코뮌주의를 비판했다. 주장하는 바가 추상적이며 명확하지 않다는 뜻이다. 또 그는 “대표적 코뮌이라는 수유+너머만 해도 자본의 후원과 이진경씨, 고병권씨로 대표되는 상징권력 없이는 존속하지 못하는 비독립적인 공동체”라고 지적했다. 김재인씨는 이어 “사람들이 근대성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는 없다”며 “코뮌주의는 근대성을 안고 좀 더 현실적인 면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Posted by WN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