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월가점령시위 연설 -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지 마라"

서구 사회의 우리는 금지가 필요 없다. 이미 지배체제가 우리가 꿈꿀 능력마저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 보는 영화를 생각해보라. 세상의 종말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종말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7

기억하라.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니다. 체제 그 자체가 문제다. 그것은 사람들을 부패하게 만든다. 적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위에 물타기를 하기 위해 행동에 돌입한 가짜 친구들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카페인 없는 커피, 알코올 없는 맥주, 지방 없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투쟁을 무해한 도덕적 저항으로 만들고자 할 것이다. .. 노동과 고문을 아웃소싱하고 결혼정보업체가 우리의 사랑을 아웃소싱하게 된 이후, 우리는 오랫동안 정치적 참여 역시 아웃소싱 되도록 내버려뒀다. 이제는 되찾아야 한다.  9

사람들은 종종 무언가를 갈망하지만 진정으로 원하지는 않는다. 갈망하는 것을 진정으로 추구하길 두려워하지 마라.  11

2011년 10월 9일 뉴욕 주코티 공원



감수의 글 - '로쟈' 이현우

현재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거스르며 맞서는 행위  15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이라는 게 철학에 대한 그의 정의.  15

왜 모든 문제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가? 그것은 오늘날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손쉬워진 만큼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15

2012년 초 슬라보예 지젝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달라는 주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사유를 시작하라. 단순한 호기심에 그치지 말고 전 생애에 대해 고민을 해야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을 시작해야 한다."  16




1 와 남 니하단 Wat Nam nihadan


페르시아어에는 '와 남 니하단'이라는 멋진 표현이 있다. "누군가를 살해하려면, 시체를 묻은 다음 그 위에 꽃을 심어 시체를 숨기라."  19

지배이데올로기의 일차적 과제는 이러한 사건들의 진정한 중요성을 무효화하는 것이었다. 언론의 지배적인 반응이야말로 정확히 '와 남 니하단'이 아니었던가?  20

(지젝이 말하는 '자본주의의 핵심 적대'는 크게 네 가지다. "다가오는 생태적 파국의 위협, 소위 '지적 재산권'과 관련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새로운 기술과학의 발전의 사회 윤리적함의, 새로운 장벽과 빈민가 등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의 생성"(<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창비 2010 p182)  20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결정적인 역사적 순간에는 대다수의 예술적 양식이나 이론적 주장이 모두 합쳐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경향으로 정리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0

현실이 우리의 생각에 부합하지 않으면, 현실은 그만큼 더 악화될 것이다. 반면 우리의 체계가 적합하다면, (불완전하게나마) 현실에 들어맞는 형식적 틀을 구축하게 된다. 마르크스가 이미 인지했듯이, 사회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규정은 곧 현실에 얽매인 주체들의 '주관적인' 생각, 규정이고, (우리 사고의 한계, 즉 사고의 교착상태와 모순이 곧 객관적인 사회 현실의 적대가 되는)이 구별 불가능한 지점에서는 "진단이 그 자체의 증상"이 된다. 우리의 진단(우리의 행동 범위를 규정하는 모든 가능한 입장들의 체계에 대한 '객관적' 해석)은 그 자체가 '주관적'이다. 진단은 우리가 실천하면서 맞닥뜨리는 교착상태에 대한 주관적인 반응 체계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 해결되지 않는 교착상태 자체의 증상을 나타낸다.  21-22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말했던 "이성의 공적인 사용"이다. 오늘날의 공산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성의 공적인 사용'과 평등주의적 보편적 사유로, 생각하면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칸트에게 '세계시민사회'의 공적 공간이란 보편적 단독성(unversal singularity)의 역설, 즉 일종의 단락(short-circuit)으로 특수성의 매개 없이 곧바로 보편성에 참여하는 단독적 주체의 역설을 가리킨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What is Enlightenment)?>의 그 유명한 구절에서 '사적'에 대립되는 '공적'이라는 표현으로 의미했던 바다. 여기서 '사적'이란 공동적 연대에 반대되는 개인적 유대가 아니라, 한 사람이 특별히 동일시하는 공동적 제도적 질서를 말한다. 이에 반해, '공적'이란 이성의 행사의 초국가적인 보편성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는 이러한 이분법은 좀더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이성의 공적 사용이 지닌 상징적 효능(또는 수행 능력)을 유보하는 데 의존한 것이 아닐까? 칸트는 "생각하지 말고 복종하라!"라는 복종의 일반적인 공식을 거부하지도 않았고, 이와는 '혁명적인' 대척점에 있는 "(남이 시키는 대로) 복종하지 말고 (스스로 머리를 써서) 생각하라!"라는 말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그의 공식은 차라리 "생각하고 복종하라!"였다. (이성을 자유롭게 사용하여)공적으로 생각하고 (권력의 위계 조직의 일부로서) 사적으로 복종하라는 말이다. 

요컨대,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공적 사용'을 통해 기존 질서의 약점과 불의를 목격하게 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통치자에게 개혁을 호소하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G. K. 체스터턴(G. K. Chesterton)처럼 능동적으로 생각하거나 의심할 수 있는 추상적 자유가 실질적 자유를 제한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우리는 대체로 자유사상이 자유를 방지하는 안전 장치 중에서 으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현대적인 예로 다시 표현하면, 노예의 정신적 해방이야말로 노예 해방을 막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의미다. 노예로 하여금 자신이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에 관해 고민하도록 가르쳐라. 그러면 그는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  23-25

'이성의 공적 사용'의 보편성과 참여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을 접목시킨 접근만이 우리가 처한 상항에 대한 '인식적 지도'를 제공할 수 있다. 레닌의 말처럼 "우리는 '사실만을 말해야 하고', 어떤 경향이 있다는 진실을 인정해야 한다."  26




2 지배에서 착취와 저항으로(From Domination to Exploitation and Revolt)


현대 자본주의의 세 가지 특징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이윤 추구에서 지대(rent)(주로 사유화된 '공유 지식'과 천연자원에 기초한 두 가지 형태) 추구로 전환되는 장기적 추세다. 둘째, 더 오랜 기간 '착취'당하는 일이 오히려 특권으로 인식되면서 실업의 구조적 역할이 한층 더 강화되는 현상이다. 그리고 마지막 특징은 장 클로드 밀네(Jean-Claude Milner)가 '봉급 부르주아(salaried bourgeoisie)라고 부른 새로운 계급의 부상이다.  29

밀네의 표현에 따르면, 잉여급여의 필요성은 경제적 의미보다 정치적 의미가 더 강하다. 즉 사회적 안정을 위해 '중간계급'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사회적 위계질서의 자의성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핵심인데, 평가의 자의성이 시장 내 성공의 자의성과 유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폭력은 너무 많은 우연성이 존재할 때가 아니라 그 우연성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 폭발할 위험이 있다.  34

소설 <아틀라스 : 지구를 떠받치기를 거부한 신>에서 에인랜드(Ayn Rand)가 즐겨 쓰던 이데올로기적 환상, 즉 파업에 나선 ('창의적') 자본가의 환상을 떠올려보자. 특권을 누리던 '봉급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들의 특권(최저임금 이상의 잉여가치)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이는 오늘날의 수많은 파업에서도 이러한 환상이 도착적인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들의 시위는 프롤레타리아적 시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전락할 위험에 저항하는 시위다. 달리 말하면, 정규직을 얻는 것 자체가 특권인 요즘 상황에서 감히 시위를 벌일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는가? (사양 산업인) 섬유업 등에 종사하는 저임금 노동자가 아니라, (주로 경찰, 사법 관계자, 교사, 대중교통 근로자 등 주로 공무원직에 근무하여) 직업이 보장된 특권층 노동자일 것이다. 학생시위의 새로운 흐름도 동일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이들이 시위를 벌이는 주된 동기는 고등교육을 받아도 졸업 후 잉여급여를 보장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인 것이 틀림없다. 

물론 아랍권에서 서유럽까지, 월스트리트에서 중국까지, 스페인에서 그리스까지 번져간 대규모 시위의 부활을 단순한 봉급 부르주아 계급의 봉기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36

진행중인 경제 위기를 한 측면에 함몰되지 않고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  37

오늘날 우리는 생태자본주의(eco-capitalism)부터 기본소득자본주의(Basic Income capitalism)까지 자본주의를 순치하려는 수많은 공세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시도의 배후에는 다음과 같은 추론이 존재한다. 자본주의가 현재로서는 부를 창출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었지만, 동시에 이대로 방치될 경우 자본조의의 재생산 과정에서 착취, 천연자원의 파괴, 집단 고통, 불의, 전쟁 등이 수반된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이윤을 추구하는 재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기본 틀은 유지하되, 글로벌 복지와 사회 정의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자본주의를 조정하고 규제해나가는 것이다. 또 시장에는 그 나름의 수요가 있음을 존중하고, 시장 메커니즘을 직접적으로 교란시키면 대재앙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자본주의라는 짐승이 제 기능을 다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 짐승을 길들이는 일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는, 실용주의적 현실주의와 정의를 고수하는 원칙주의를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보통 그러하듯, 선의로 시작하여 조만간 두 가지 차원의 적대라는 실재(the Real)에 직면하게 된다. 자본주의라는 짐승이 자애로운 사회적 규제로부터 도망치는 일이 거듭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시점엔가 우리는 숙명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정말로 자본주의라는 짐승과 함께 가는 것만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방법일까? 아무리 자본주의가 생산적이라고 해도,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커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일 우리가 계속 이 질문을 회피한 채 자본주의를 길들인다면,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힘을 실어주는 꼴밖에 안 될 것이다.  43-44




3 정치적 대표의 꿈 작업(The 'Dream-Work' of Political Representation)


마르크스는 1848년 프랑스 혁명과 그 여파에 대해 분석한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사회적 대표(경제적 계급과 세력을 대표하는 정치적 행위주체(agent))의 논리를 정확히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복잡화(complicate)'했다.  49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줘야 하므로 공공사업에 착수한다. 그러나 공공사업은 국민의 조세 부담을 가중시킨다. 따라서 종래 5부 이자를 4부5리 이자의 공채로 전화하여 금리생활자를 공격함으로써 세금을 낮춘다. 그러나 중간계급에게도 떡고물이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술을 소매로 구입하는 인민에게는 주세를 배로 인상하고, 도매로 사는 중간계급에게는 주세를 반으로 인하한다. 또 현실의 노동자 조합은 해체하면서, 앞으로 꿈같은 조직을 만들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농민도 원조해줘야 한다. 저당은행들 때문에 농민의 부채가 급증하고 부의 편중이 가속화된다. 그러나 이 은행들은 오를레앙가에서 몰수한 영지를 현금화하는 데 이용되어야 한다. 법령에도 나와 있지 않은 이런 조건에 동의할 자본가는 아무도 없고, 그래서 저당은행은 단지 법령으로 남는다, 등.

한마디로 보나파르트는 모든 계급에게 가부장적 은인으로 비쳐지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느 한 계급을 착취하지 않고서는 그 어느 계급에게도 은혜를 베풀 수 없다.  52-53

스스로 대표하지 못하여 누군가에 의해 대표될 수밖에 없는 계급이란 당연히 분할지 소농 계급을 말한다.  54

모든 계급 위에 군림하고, 모든 계급 사이를 오가며, 모든 계급의 비천한 잔여물에 직접적인 기반을 두면서도, 아울러 스스로 정치적 대표를 요구하는 집단적 행위주체가 될 수 없는 계급을 궁극적으로 대표해야 한다. 이 역설이 의미하는 바는 순수한 대표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라캉 식으로 표현하자면, 계급 적대는 그러한 전체 대표가 실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게 만든다. 계급 적대는 결국 한 사회의 중립적인 '전체'란 없고, 모든 '전체'는 특정 계급에 은밀하게 특권을 부여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55

오늘날 대부분의 '전문가'와 정치가가 따르는 공리를 떠올려보자. 누누이 들어왔듯이, 우리는 적자와 부채로 점철된 위태로운 시대에 살고 있기에, 모두가 고통을 분담하며 생활수준의 저하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니까. (최고) 부유층을 제외한 모두가 말이다. 부유층에 대한 증세는 절대적인 금기사항이다. 세금이 늘면 그들의 투자 의욕이 꺾여 신규 고용 창출이 줄어들므로 우리 모두가 고통받게 된다는 논리다. 결국 이 힘든 시절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빈자는 더욱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부자들의 부가 조금이라도 상실될 위험에 처하면 사회가 나서서 막아줘야 한다. 금융 위기가 과도한 정부 차입과 지출에서 비롯되었다는 금융 위기에 대한 지배적인 시각은 아이슬란드에서 미국까지 위기의 궁극적인 책임이 대규모 민간은행들에 잇다는 사실과 노골적으로 배치된다. 그 은행들의 도산을 막기 위해 정부는 납세자의 엄청난 혈세를 투입하며 개입했던 것이다. 

계급 적대를 부인하고 전체를 대표한다는 입장을 내세우는 전형적인 방법은, 그 적대의 원인을 그 자체로 사회를 위협하는 반사회적 요인이자 사회에서 배설된 과잉의 상징인 외국인 불청객들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유대주의는 단지 수많은 이데올로기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자체로 본원적인 이데올로기다. 반유대주의는 기본 좌표를 설정하는 영도(zero-lenel)(또는 순수한 형태)의 이데올로기를 구현한다. 이로써 사회적 적대('곅,ㅂ투쟁')는 신비화되거나 전치되어 그 원인을 외부 침입자에게 투영할 수 있게 된다. 라캉의 '1+1+a'의 공식의 가장 좋은 예가 이러한 계급투쟁이다. 두 개의 계급에 '유대인'이라는 과잉, 대상a(object), 대립쌍의 보충물이 덧붙는 것이다. 이 보충적 요소의 기능은 이중적이다. 계급투쟁에 대한 물신주의적 부인(fetishistic disavowal)인 동시에, 바로 그 자체가 '계급 평화'를 영원히 가로막는 이 적대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 만약 보충물없이 '1+1' 상태로 두 계급만 존재했다면, '순수한' 계급 적대 대신 두 계급이 상호 보완하여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는 계급 평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계급투쟁의 '순수성'을 흐리거나 전치하는 요인이 바로 계급 투쟁의 원동력이라는 데 역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현실 세계에서 적대적인 두 계급만 존재하는 경우는 절대 없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 비판자들은 핵심을 놓치고 있다. 바로 그러헥 적대적인 두 계급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계급투쟁이 존속하는 것이다.  55-57

소농은 오늘날 악명 높은 중간계급이 되었다. .. 중간계급은 정치화에 반대한다. 이들은 그저 자신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면서 간섭 없이 일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사회의 광적이 ㄴ정치적 동원을 종식시켜 모두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겠다고 약속하는 독재 쿠데타를 지지하는 성향을 보인다.  58

주인 담론에서 대학담론으로 바뀌는 전 세계적 추세의 일환으로 새로운 집단이 등장했다. 특정한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않고 중립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으로 상황을 지배(또는 차라리 '관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기술, 금융) 전문가 집단이다.  58

문화 전쟁이 곧 전치된 양식의 계급 전쟁이라는 뜻이다.  69

모든 이데올로기 체계는 연쇄적인 등가물을 정립하거나 부여하려는 헤게모니 투쟁의 산물이자, '객관적인 사회경제적 입장'등 외재적 참조점으로는 결코 보장되지 않는 철저히 우연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투쟁의 산물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답변에서 이 수수께끼는 간단히 자취를 감춘다.

여기서 첫 번째로 주목할 것은 일단 문화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양 진영이 있어야 하고, 문화는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근본주의에 저항하고 다문화적 관용을 옹호하는 데 정치를 집중하는 '계몽된'자유주의자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주제라는 점이다. 핵심 질문은 이렇다. 왜 '문화'가 우리 생활의 중심 영역으로 등장했는가? 종교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실제로 믿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속한 공동사회의 '생활양식'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일부) 종교 의식과 관습에 따를 뿐이다. '전통에 대한 존중심'으로 코셔(kosher-유대인의 율법을 따르는 정결한 음식) 원칙을 지키는 비신도 유대인 등이 그런 예다. "실제로 그것을 믿지는 않아. 그냥 내 문화의 일부일 뿐이야."라는 말이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거부되거나 전치된 신앙의 두드러진 양식인 듯하다. 이렇듯 '실제' 종교, 예술 등과는 구별되는 '문화'의 '비근본주의적' 개념이야말로 버려지거나 특정 개인과 무관해진 신앙의 영역을 보여주는 핵심일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믿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키는 '문화' 말이다.

두번째로 주목할 점은 자유주의자들이 가난한 자와의 연대를 주장하는 한편, 대립적인 계급 메시지로 문화 전쟁을 코드화하는 방식이다. 다문화적 관용과 여성의권리를 지지하는 이들의 싸움은 '하층계급'의 이른 바 비관용, 근본주의, 가부장적 성차별주의와 대척점에 설 때가 많다. 이 혼란을 해소하는 한 가지 방법은 진정한 구분선을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 중재적인 용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최근 이데올로기적 공세에서 '현대화'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방식이 그러한 예다. 우선 '현대화주의자'(경제부터 문화까지 모든 측면에서 글로벌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와 '전통주의자(세계화를 반대하는 사람)' 사이에는 추상적인 대립관계가 형성된다. 그러고 나면 전통적 보수주의자와 포퓰리스트에서 '구좌파(복지국가, 노동조합 등을 계속 지지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전부 이 세계화에 반대하는 사람의 범주로 분류된다. 이러한 범주와는 분명히 사회적 현실의 일면을 포착한다. 2003년 초반에 독일에서 교회와 노동조합이 연대를 통해 상점들의 일요일 영업 법제활르 막았던 일을 떠올려보라. 그러나 이 '문화적 차이'가 다양한 계층과 계급을 아우르는 전반적인 사회적 장을 가로지른다고 말하기엔 충분하지 않다. 또 다른 대립관계와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될(그래서 글로벌 자본주의의 '현대화'에 저항하는 보수주의의 '전통적 가치'나 자본주의적 세계화를 완전히 지지하는 도덕적 보수주의자가 나올)수 있다는 말도 부적절하다. 요컨대 이러한 '문화적 차이'가 현대 사회적 과정에서 작동하는 일련의 적대 중 하나라고 주장해봐야 별 소요이 없다.  70-72

세번째로 주목할 것은 페미니스트, 반인종차별주의자, 반성차별주의자 등의 투쟁과 계급투쟁 간의 근본적 차이다. 다른 투쟁의 목적은 적대를 차이로 변화하는 것(다양한 성, 종교, 민족 집단의 평화로운 공존)이지만, 계급투쟁의 목적은 정반대로 차이를 계급 적대로 바꾸는 것이다. '빼기'의 요지는 전체적으로 복잡한 구조를 그 적대적인 극호한 차이로 환원하는 것이다. 인종, 성, 계급의 연쇄는 계급의 경우 정치적 입장에 대한 논리가 다르다는 점을 모호하게 만든다. 반인종차별주의자와 반성차별주의자의 투쟁은 상대를 충분히 인정하려는 노력을 지향하지만, 계급투쟁은 서로를 극복하고 진압하며 심지어 근절하는 데 목표를 둔다. 직접적인 물리적 전멸은 아니더라도, 상대의 사회경제적 역할과 기능을 말살하는 것이 목표다. 다시 말해, 반인종차별주의자가 모든 인종이 저마다의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입장을 자유롭게 주장하고 깨닫기 바란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이 되어도,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목표가 부르주아 계급이 그 정체성을 충분히 주장하고 목적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전자의 경우에는 다양한 정체성을 인정하는 수평적 논리가 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적과의 투쟁이라는 논리가 존재한다.  73-74




4 사악한 민족주의의 귀환(The Return of the Evil Ethnic Thing)


중동 협상 역시 평화의 문제가 관건이 아니다. '평화협상'이라는 명칭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점령을 기정사실화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인 사라들의 손을 들어주는 셈이다.  80

반유대주의는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동성애반대주의 드오가 같은 연장선상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82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는 노골적인 암시인 것이다. 

우리는 이 논리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제는 서로 독립적일 뿐 아니라, 현재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중립적'이고 비정치적인 테크노크라시의 경제 정책에 대한 대중의 반대 속에서 진정한 민주 정치가 표출된다.  89

지금 단계의 우리는 당연히 충분히 관용적이지 못하거나, 아니면 이미 너무 지나치제 관용적이어서 여성권 등을 방치하고 있다.  94

우리의 과제는 단지 타인에 대한 관용을 넘어 진정한 공존과 다양한 문화의 혼합을 영속시킬 수 있는 적극저깅고 해방적인 지배문화를 추구하는 것이고, 그 지배 문화를 위한 다가올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다. 단순히 타인을 존중하지 말고, 그들에게 공동의 투쟁을 제안하자. 오늘날 우리를 가장 크게 압박하는 문제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문제이니 말이다.  95




5 탈이데올로기의 사막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Desert of Post-Ideology)


최근 캘리포니아를 방문한 동안, 나는 어떤 교수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슬로베니아인 친구 한 명과 함께 참석했다. 이 친구는 골초였다. 늦은 저녁, 담배 생각이 간절해진 친구는 집주인에게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피워도 되는지 정중히 물엇다. (그에 못지않게) 정중한 태도로 주인이 안 된다고 말하자 친구는 집밖으로 나가서 피우겠다고 말했지만, 그조차도 안 된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이면, 이웃들에게 자기 평판이 떨어진다는 것이 주인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 놀란 것은 저녁식사가 끝나고 집주인이 우리에게 가벼운 마약을 권했을 때였다. 이러한 종류의 흡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마치 마약이 담배보다 훨씬 덜 위험하기라도 한 듯이.96-97

라캉이 말하는 '향락(jouissance)'(주이상스)은 치며억인 과잉의 쾌락으로, 쾌락원칙(pleasure principle) 너머에 위치한다. ...

한쪽은 즐거움을 연장시키고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피하기 위해 쾌락을 신중히 계산하는 계몽된 쾌락주의자이고, 다른 한쪽은 치명적으로 과도한 향락 속에서 존재의 절정에 도달하려는 향락주의자(jouisseur)다.  97

계몽된 소비주의적 쾌락주의는 기본적으로 향락에서 그 과잉의 차원, 불온한 잉여, 그리고 아무데도 도움이 안 되는 측면을 박탈하는 기능이 있다. 향락은 용인되고 심지어 권유되지만, 우리의 정신적, 생물학적 안정성을 위협하지 않고 건전해야 한다는 단서조항이 붙는다.  98

예카테리나 대제(Catherine the Grest)의 일화. 그녀는 노예들이 뒤에서 술과 음식을 훔치고 심지어 자신을 조롱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그저 미소만 지었다. 가끔씩 향락의 부스러기를 떨어뜨려줘야 그들이 계속 노예 자리를 지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00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선택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부르짖지만 강요된 민주주의적 합의의 대안이라곤 맹목적인 실력행사뿐인 이 사회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우주인가? .. 유일한 선택이라곤 규칙에 따르는 것과 (자기)파괴적인 폭력 사이 중 하나뿐일 때, 우리가 그토록 찬양하는 선택의 자유란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우리가 점점 더 "세계 없음(Worldless)"으로 경험되는 사회적 공간에 살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러한 공간에서 저항이 취할 수 유일한 형식은 의미 없는 폭력뿐이다.  108-109

영국 폭동이 안고 있는 문제는 폭력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진정한 자기주장이 없었다는 것이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능동적이지 않고 반동적인, 무력한 분노이자 무력(武力 굳셀무 힘력)의 탈을 쓴 절망이었고, 승리의 카니발의 가면을 쓴 질투였다.  120




6 아랍의 겨울, 봄, 여름, 가을(The Arab Winter, Spring, Summer, and Fall)


도하(Doha)의 이슬람미술관(Museum of Islamic Art)의 PO24.1999번 소장품. 

10세기의 단순한 원형 토기접시로, 직경 42센티미터의 매끄러운 흰색 바탕에는 검은색 글씨로 야히아 이븐 지야드(Yahya ibon Ziyad)가 말했다는 속담이 새겨져 있다. "어리석은 자는 기회를 놓치고 나중에 운명을 탓한다."  122

중앙부의 그림. 자기 꼬리를 먹고있는 유명한 뱀 그림과 유사하다.  124

이 말을 뒤집어 보자. "어리석은 자는 기회를 놓치고도 자신의 실패가 운명의 조화임을 알지 못한다." 이것은 세상에 우연이란 없고 모든 것은 불가해한 운명으로 결정된다는 진부한 종교적 문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접시의 속담을 곰곰이 되씹어보면, 이러한 상투적 문구의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다시 한 번 이 접시를 사용하는 시간적 차원을 고려해보자. 저녁 식사가 시작될 때 손님은 음식이 가득 담긴 접시의 가장자리에 새겨진 글귀를 처음 보고 기회를 붙잡으라는 기회주의에 관란 교훈 정도로 일축해버린다. 그러나 음식을 다 먹은 후 접시 밑에 숨어 있던 진짜 메시지가 상투적 상징임을 알고 나면, 처음 본 글귀에 숨어 있던 진실을 놓쳤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 문구로 되돌아가 다시 읽어본 후에야 그것이 기회와 운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하고 흥미로운 이야기, 즉 운명을 선택하는 것은 그들의 소관이라는 메시지임을 알게 된다.  125-126

독재정권이 최후의 위기에 다다를 때 보통 그 붕괴는 두 단계를 거친다. 실제 무너지기 전에 불가사의한 파열이 생긴다. 어느날 문득 사람들은 이미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깯다고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130




7 월가점령시위, 또는 새로운 시작을 부르는 폭력적 침묵(Occupy Wall Street, or The Violent Silence of a New Beginning)


축제를 즐기기는 쉽다. 그러나 그 진정한 가치는 축제 다음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의 일상생활이 어떻게 바뀌었고 또 바뀔 것인지에 달려 있다. 여기에는 힘들고 끈질긴 노력이 요구되며, 시위는 그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시위의 기본 메시지는 이 정도다. "금기는 깨졌다. 우리는 실현 가능한 최선의 세계에 살지 않는다. 고로 우리는 대안을 생각해볼 수 있고, 또 생각해봐야만 한다."  146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식 모티프 - <최악을 향하여>에 나오는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를 의미한다 - 의 이러한 변주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실패 뒤에 남은 결과에 집중해야 한다.  147

시위대는 적뿐 아니라 가짜 친구들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시위대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시위를 무해한 도덕적 저항으로 바꾸어 그 의미를 희석시키고자 갖은 애를 쓴다. 복싱에서 '클린치(clinch)'란 상대방의 펀치를 막거나 방해하기 위해 한 팔이나 양 팔로 상대방의 몸을 붙잡는 행위다 월가점령시위에 대한 빌 클린턴의 대응은 정치적 클린치의 완벽한 사례다. 그는 시위가 "종합적으로 볼 때 긍정적인 일"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대의 모호함에 대해 우려는 표했다. "어떤 일에 반대만 하다 보면 우리가 만든 이 진공을 다른 사람이 채우게 될 테니, 그저 반대만 하지 말고 특정한 어떤 것을 지지해야 한다." 그러면서 클린턴은 "1년 6개월 안에 일자리 200만 개"를 창출하겠다고 주장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일자리 정책을 지지하라고 시위대에 제안했다. 그러나 시위대가 거리로 뛰쳐나온 것은 콜라 캔을 재활용하고, 자선단체에 푼돈을 기부하며, 스타벅스 카푸치노를 구매하여 가격의 1%를 제3세계로 보내는 것마능로 만족하는 세계에 질릴 만큼 질렸기 때문이다.  155-156

민주주의는 법치주의에 기반을 둔다.  158

마르크스는 자유의 문제를 고유의 정치적 영역에서 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국가에서 자유선거가 실시되는가? 사법부가 독립적인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가? 인권이 존중되는가? 등). 실제 자유의 핵심은 오히려 시장에서 가족에 이르는 사회적 관계들의 그물망에 있고, 이 영역을 진정으로 개선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정치적 개혁이 아니라 '비정치적'인 사회적 생산 관계의 변혁이다.  161-162

민주주의 기제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자본주의 재생산의 원활한 가동을 보장하는 '부르주아' 국가 장치의 일부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적은 제국이나 자본이 아니라 민주주의라고 불린다."라는 알랭 바디우의 언뜻 의아하게 들리는 주장은 정곡을 찌른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관계의 모든 급진적 변화를 가로막는 주범은 민주주의적 절차 내에서만 모든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민주주의적 환상'인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구체적 강령을 만들어내기 어려운 데는 이처럼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162

월가점령시위의 수많은 (종종 혼란스런) 발언들 기저에는 두 가지 기본적 통찰이 깔려 있다. 첫째, 현재 대중의 불만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대한 것이다. 문제는 시스템 자체이지 그 특정한 부폐 사례가 아니다. 둘째, 현재와 같은 다당제 형태의 대의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해결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는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월가점령시위의 가장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경제생활의 파괴적 결과 앞에서 속수무책임이 입증된 현행 정치형태를 벗어나 민주주의를 어떻게 확장해 나갈 것인가? 다당제 대의민주주의를 뛰어넘어 이렇게 재발명된 민주주의에 과연 이름이 있을까? 있다.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163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어떻게 민주적 다당제 체계를 넘어 집단적 의사결정을 제도화할 수 있을까? 또 누가 이 재발명이 주역이 될 것인가? 잔인하게 말하자면, 당장 오늘 무엇을 해야할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지식인이든 일반인이든 그것을 아는 주체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은 장님이 장님에게 길을 안내하는, 좀 더 정확히는 장님끼리 길을 안내하면ㅅ 서로 상대방은 볼 수 있다고 믿는 교착상태인 것일까? 아니다. 각자 모르는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중은 답을 가지고 있다. 다만 자신들이 답을 가진(혹은 스스로가 답인) 질문을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존 버거(John Berger)는 내부인과 외부인을 가르는 벽의 잘못된 쪽에 서있는 '대중(multitude)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대중은 아직 제기되지 않은 질문의 답을 알고 있고 벽보다 오래 살아남을 능력이 있다. 질문이 아직 제기되지 않은 것은, 그러자면 진심으로 와닿는 용어와 개념이 필요한데 민주주의, 자유, 생산성 등 현재 사건드을 명명할 때 사용되는 용어와 개념은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곧 새로운 개념과 더불어 새로운 질문이 대두할 것이다. 역사는 바로 그러한 질문의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니까. '곧'이라면 언제? 한 세대 내에.'165-166




8 <더 와이어>, 이 아무 일 없는 시대에 해야 할일(The Wire, or What to Do in non-Evental Times)


-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허위적인 종언 이후의 '그저 그런 삶(mere life)'과 '진정한 삶(real life)'을 대비시킨다. '그저 그런 삶'은 자신의 삶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삶이고, 자신의 기득권이 아무 탈 없이 그대로 대대손손 보존되기를 매일 기도하는 삶이다. 그것의 정치적 버전이 자유민주주의다. 지젝이 보기에 자유 민주주의의 최대 관심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마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자유민주주의는 무사건의 당(party of non-party)이다."(이현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자음과 모음 2011 p72, 슬라보예 지젝,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자음과 모음 2011 p210 참조  167

금기어를 사용하여 금기를 깨는 효과.  169

'와이어(wire)'에는 다양한 함의가 있지만(철조망을 따라 걷는다거나 도청장치를 착용하는 등) 사이먼에 따르면 이 제목은 주로 "두 개의 미국 사이의 거의 가상적이지만 침범 할 수 없는 경계", 즉 아메리칸 드림에 동참한 사람들과 낙오된 사람들 사이의 경계를 가리킨다. 따라서 <더 와이어>의 주제는 한마디로 계급투쟁이자 그 문화적 결과를 포함한 우리 시대의 실재다.  170

사이먼은 이 급진적인 분열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 매우 명료하게 설명한다. 

'우리는 마약에 대해 전쟁을 벌이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단지 더이상 노동공급원으로 필요가 없어진 도시 최하층계급을 짐승 취급하며 인간성을 말살하고 있을 뿐이다. (중략) <더 와이어>는 미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낙오된 미국에 대한 이야기다. (중략) 마약 전쟁은 현재 최하층계급이 벌이는 전쟁이다. 그것이 전부다. 다른 의미는 없다.'  170-171

운명이 어떻게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승리를 거두는지에 대해 <더 와이어>는 체계적으로, 이어지는 각 시즌마다 한 단계씩 분석을 진행해 나간다.

시즌1은 마약상 대 경찰이라는 갈등을 제시하고, 시즌2는 노동 계급의 붕괴라는 갈등의 궁극적인 원인을 파해치며, 시즌3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치 전략 및 경찰과 그 실패를 다룬다. 시즌4는 왜(흑인 노동계급 청소년의) 교육만으로는 불충분한지를 보여주고, 마지막 시즌5는 언론의 역할, 즉 일반 대중이 이 문제의 실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유에 초점을 맞춘다.  173

핵심은 그들 모두 어떤 식으로든 법을 위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178

마르크스도 비록 한정된 주관적 입장에서는 생산의 목적이 생산물, 즉 사람들의 (가상적 또는 현실적) 수요를 충족시킬 물건이고, 다른 말로는 사용 가치지만, 이 시스템 전체라는 '절대적 관점'에서 보자면, 개인의 수요의 충족은 단지 자본주의적 (재)생산 지게를 계속 유지시키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일 뿐이라 말한다.  183

제임슨이 말한 대로 <더 와이어>는 범인이 일개 번죄자(나 범되 단체)가 아니라 사회 전체이자 전체 시스템인 탐정물이다.  183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실재가 추사적이고, 자본의 추상적 가상적 운동이며, 실재와 현실의 라캉식 차이를 동원하자면, 현실이 실재를 가린다는 것이다. '실재의 사막'은 자본의 추상적인 움직임이고, 마르크스가 말한 '실재적 추상(real abstraction)'도 같은 맥락이다.  183

마르크스는 자본의 광포한 자기 증식적 순환을 묘사했고, 자본의 유아론적인 자기 수태적 행보는 오늘날 메타 반영적인 선물 투기에서 절정에 이른다. 아무런 인간적, 환경적 고려 없이 자기 갈 길만 추구하며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는 이 괴물의 유령이란 이데올로기적 추상성에 불과하고, 그 뒤에는 거대한 기생동물 같은 자본적 순환의 토대가 되는 생산력과 자원을 제공하는 실제 사람들과 자연물이 있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문제는 그 이데올로기적 추상성이 금융 투기자의 사회 현실에 대한 오해의 일부일 뿐 아니라, 물질적 사회 과정의 구조를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정확히 실재라는 것이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때로는 모든 국가의 운명이 자본의 유아ㅇ론적이고 투기적인 춤사위에 따라 결정되는 판국에, 정작 자본은 자신의 운동이 사회 현실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전혀 무관심한 채 수익성이라는 목표만 추구한다.  183-184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체계적 폭력.

이 폭력은 더 이상 개인이나 그들의 '사악한' 의도에 책임을 물을 수 없이 순수하게 '객관적이고' 체계적이며 익명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reality)과 실재(the real)에 대한 라캉식 구분과 마주하게 된다. 현실은 실제 인간들이 상호작용과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사회 현실인 반면, 실재는 사회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결정하는 자본의 냉혹하고 '추상적'이며 유령 같은 논리다. 이 간극은 생태적 파괴나 인간의 고통으로 얼룩져 생활이 분명 혼란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경제 보고서상으로는 '재정적으로 건전한'국가로 발표되는 어떤 국가를 방문해 보면 실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자본의 상황인 것이다.  185

마르크스도 <자본론>의 유명한 구절에서 상품의 교환과 순환으 감춰진 논리를 끄집어내기 위해 의인법에 의존한다. "만약 상품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의 사용가치는 인간들에게 관심사일지는 몰라도 물적 존재로서의 우리에게는 속하지 않는 것이다. 물적 존재로서 우리에게 속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다. 상품으로서 우리가 교환되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단지 교환가치로서만 서로 관계를 맺는다.  187

<더 와이어>는 종종 권력과 저항, 또는 법과 그 위반 사이의 관계에 대한 푸코식 주제(topos)의 관점에서 해석된다. 순응을 요구하는 규제 과정이 오히려 '억압'하고 규제하려는 대상을 낳는다.  192

주변부의 주관적 입장에서 지배적인 장치에 '저항'하는 식의 전략을 확산하고자 애쓸 것이 아니라 지배적인 장치 자체 내에서 가능한 파열 양상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저항의 현장'에 대한 모든 이야기에서, 비록 당장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때로는 우리가 저항하는 장치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193-194

삶은 거대한 순환이고, 우리는 기린을 먹고, 기린은 풀을 먹는다. 그러나 그 후 우리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풀에게 먹혀 순환이 종료된다. 이것이 가장 꼭대기에 있는 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메시지다. 결정적인 것은 우리가 이러한 '지혜'에 부여하는 정치적 해석이다. 이것은 단순한 철수의 문제일까, 아니면 급진적 행동 조건으로서 철수의 문제일까? 다시 말해, 삶은 항상 원을 이루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 위계질서를 오르내릴 뿐 아니라 원 자체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199-200

운명에 저항하는 (그래서 운명의 실현을 돕는, 마치 오이디푸스(Oedipus)의 부모나 바그다드에서 사마라로 도주했던 하인처럼) 것이 아니라, 운명 자체, 그 기본 좌표를 바꾸는 것이다.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는 "무엇인가를 바꾸어야만 모든 것이 그대로 남는다."라는 말을 뒤집어 언젠가 "아무것도 바꾸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이 달라지게 하자."는 의견을 제안했다.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 혁명화가 요구되는 후기 자본주의의 역동성 같은 일부 정치적 성좌에서는, 어떤 것도 바꾸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오히려 진정한 변화의 주체다. 변화의 원리 자체의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00

우리는 오늘날 '전면적인 경제 불황'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전망이 진정한 집단적인 반체제주의를 야기할까? 결과가 어떻든 간에, 한 가지는 분명하다. 사이먼의 비극적인 비관주의를 오나전히 수용하고 (시스템 내에서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1-202




9 시기와 분노를 넘어서(Beyond Envy and Resentment)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가 이른바 '복지 국가의 이율배반'이란 문제에 대해 해법으로 제시하는, 단순한 시장 교환을 넘어서는 '기부의 윤리학(ethics of gift-giving)'.  203


그가 말하는 변화를 달성하려면, 민주주의 시대에 이상하게 살아남은 전제정치의 잔재인 국가주의(etatisme)를 탈피해야 한다. 전통 좌파조차 놀랄 만큼 강한 이 개념은 국가가 국민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필요시) 그들의 생산물 일부를 법적 강제력을 동원해 몰수 및 결정할 수 있는 명백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것이다. 시민은 자신의 소득 일부를 국가에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날 때부터 국가에 빚을 진 존재처럼 취급받는다.  204

첫 번째 단계는 납세 의무자에서 자원자로의 변경이다. 부자에게 과중한 세금을 매기는 대신, 자발적으로 자신의 부를 어느 정도나 공공복지에 기부할 지 결정할 (법적) 권한을 제공해야 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세금을 급격히 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기부자가 스스로 어디에 얼마를 기부할지 결정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작은 여지라도 열어놓아야 한다는 뜻이다.이러한 시작은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점차 사회 결속력의 근간이 되는 사회 전체의 윤리를 변화시킬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상화이야 어째됐든 결국 해야만 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게 된다는 오랜 역석레 빠지는 것은 아닐까? 선택의 자유가 실은 강요된 선택에 기초하는 거짓 자유가 아닐까?  205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에서 실시된 연구에 대한 보고 내용.

'... 일정 수준이 충족되면, 사람들은 돈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일에 대해 생각한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을 기꺼이 무료로 하거나 일주일에 20시간, 때로는 30시간을 자원 봉사하는 살마도 대단히 많다. 그들은 자신이 만든 것을 팔지 않고 그냥 나눠준다. 대부분 고도의 전문 기술을 보유하고 직업도 있는 이들이 왜 회사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무료로, 때로는 업무시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일하는 것일까? 참으로 이상한 경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 '이상한 행동'은 마르크스의 유명한 구호인 '능력에 따른 노동과 필요에 따른 분배'를 좇는 공산주의자의 행동이다. 이것암ㄴ이 진정한 유토피아적 차원을 갖는 유일한 기부의 윤리학이다.  210

MIT 실험에 어떠한 문제가 있든 간에, 자본주의적 경쟁과 이익 극대화가 전혀 '천성적'이지 않다는 점만은 분명히 입증된다. 기본적 욕구가 일정 수준 이상 충족되면, 사람들은 금전적 보수가 아닌 능력에 따라 사회에 기부해가며 '공산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212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건 힘겨운 투쟁을 통해 쟁취하는 것이다. 스파르타인의 가혹한 군사적 규율은 아테네인의 '자유민주주의'와 외적으로 대립하는 동시에 그것의 근간을 이루는 내적 조건이다. 이성이 있는 자유로운 주체는 오로지 혹독한 자기 규율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진정한 자유는 딸기 케이크와 초코 게이크 중 하나를 고르듯이, 안전한 거리를 두고 행해지는 선택의 자유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필연성과 겹쳐진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걸 때에만,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때에만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 조국이 다른 나라에 점령당했을 때 맞서 싸우는 것은 '선택할 자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존엄을 지키고 싶다면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219




10 미래가 보내는 징후(Signs From the Future)


꿈이 사라져버린 듯한 이 우울한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열정이 넘치던 숭고한 순간을 회상하며 향수와 자아도취에 빠지거나,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이러한 시도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냉소적이고 현실적으로 설명하는 것 외에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가장 먼저 언급할 것은 수면 아래에서 여전히 불만이 들끓고 있다는 사실이다. 분노가 계속 쌓여가고 있으니 새로운 저항의 물결이 뒤따를 것이다. .. 확실한 돌파구가 없는데다, 지배 엘리트는 명백히 통치력을 상실하고 있다. 더욱 불안한 것은 민주주의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228

월가점령시위, 아랍의 봄, 그리스와 스페인에서의 시위 같은 사건들은 그렇게 미래에서 보내온 징후로 읽어야 한다. 바꿔 말하자면, 맥락과 기원을 바탕으로 사건을 이해하는 일반적인 역사주의적 관점을 뒤집어야 한다.  229

우리는 공간상으로는 여기에 위치하고 있지만 시간상으로는 공산주의 사상의 미래, 즉 해방된 미래에 위치한 요소를 적극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에서 인식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징후를 포착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한편, 현재 우리의 행동도 미래가 되어야 온전히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오늘날의 사회에서 '공산주의의 싹'을 필사적으로 찾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허비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가설상 공산주의의) 미래에서 오는 징후를 읽는 이과 그 미래의 근본적인 개방성을 유지하는 일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잡는 일이다. ..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그 균형은 양 극단을 핗는 일종의 현명한 '중도(中道)'와는 무관하다.  229-230

칸트의 이성과 직관의 관계 도식 (-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233

오늘날 공산주의자를 규정짓는 특성은 (현대식 버전의) '기적', 즉 타흐리르 광자의 시위와 같은 예상치 못한 사건 속에서 공산주의적 요소를 찾아내고, 그것을 (공산주의적) 미래에서 온 징후로 읽어내게 해주는 '독트린(이론)'이다.  234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미래는 '객관적'이지 않다. 그 미래를 지탱하는 주관적 참여를 통해서만 현실이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비난을 되돌아봐야 한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적어도 장기적으로는)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원하지 않는 것, 즉 현재 누리는 '자유' 중에서 포기할 각오가 된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을까? 우리는 커피를 원하지만, 우유나 크림이 없는 커피를 원할까? (국가가 없는 자유? 사유재산이 없는 자유? 등)  235

우리에게 위기가 임박했다고 설득하려는 생태학자에 대한 유일하게 적잘한 답변은 그의 필사적인 설득의 진짜 타깃은 자신의 비(非)신념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대답은 이것이다. "걱정 마, 재앙은 반드시 닥칠 거야! 불가능한 일이 이미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어. 하지마 인내심을 가고 지켜봐. 성급한 추측에 굴복하지도 말고, '지금이야! 두려운 순간이 다가왔어!'라고 생각하며 도착적인 기쁨에 빠지지도 마." 생태학에서 이런 종말론적 환상은 다양한 형태를 띤다. 예를 들어, 지구 온난화로 수십 년 내에 모두 물에 잠길 것이라거나, 유전자공학이 인간의 윤리와 책임의식의 종말을 의미한다거나, 벌들이 곧 멸종하고 전 세계적인 기아가 뒤따를 것이라는 등. 물론 이 모든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이러한 주장에 현혹되거나 거짓된 죄책감과 정의감("우리가 만물의 어머니인 대지를 노하게 했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다!")에 빠져서는 안 된다. 대신 냉정한 상태를 유지한 채 '지켜보자.'

'그러나 지켜보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하모가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3:33~37)

계속 깨어 있으면서 무엇을 지켜보라는 걸까?  236-238

프랑스어에는 영어로 정확히 옮기기 힘든, '미래'를 뜻하는 두 단어가 있다. '퓌뛰흐(futur, 미래)'와 '아브니흐(avenir, 장래)'다. '퓌뛰흐'는 현재의 연속선상으 미래로, 이미 존재하는 경향성이 완전히 실현된 것을 나타낸다. 반면 '아브니흐'는 보다 급진적인 중단, 현재와의 단절을 가리킨다. 단순히 '앞으로 될 것(hwat will be'이 아니라 '앞으로 닥칠 것(what to come)'을 의미한다.  240

파국에 맞서 싸우는 방법은 파국적인 '고정점'으로 치닫는 이 표류를 중단시키고, '도래할' 급진적 타자성(Otherness)을 야기할 위험을 스스로 떠안는 것이다. 여기서 "미래가 없다(no future)"는 슬로건이 얼마나 모호한지를 알 수 있다. 좀더 깊이 파고들면, 이 슬로건은 종결 혹은 변화의 불가능성을 의미하기보다, 우리가 쟁취해야 할 것, 즉 파국적 '미래'의 영향을 중단시키고 이로써 '다가올' 새로운 것을 위한 공간을 여는 일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분에 기초하면, 마르크스(와 20세기 좌파)의 문제를 알 수 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너무 이상적인 꿈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미래적'이어서 문제였다. 마르크스가 플라톤에 대해 썼던 말(플라톤의 <국가>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기존 고대 그리스 사회의 이상적 이미지였다)은 그대로 본인에게 적용된다. 마르크스가 구상했던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이상화된 이미지, 자본주의 없는 자본주의, 즉 이익과 착취가 없는 확대 재생산으로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르크스에서 헤겔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를 인도하는 어떠한 숨은 목적론도 없고, 모든 개입이 곧 미지의 세계로의 도약이며, 따라서 결과가 언제나 우리 기대를 좌절시키는 그러한 사회적 과정에 대한 '비관적' 견해로 말이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기존 체계의 무한한 재생산은 불가능하다는 사실뿐이다. .. 중동의 새로운 전쟁이나 경제적 혼란, 이례적인 환경 참사는 우리 곤경의 기본 좌표를 순식간에 바꿔놓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열린 가능성을 충분히 수용하면서, 미래가 보내는 모호한 징후에 의거하여 스스로를 익르어가야 한다.  24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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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멕시코 치아파스주(州)의 마야계 원주민들에 대한 토지분배와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봉기한 반정부 투쟁단체

1994년 멕시코 정부와 기업인·농장주 등이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원유·천연가스·목재 등 남부의 풍부한 자원을 착취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자, 이에 반발해 치아파스주()의 마야계 원주민들에 대한 토지분배와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봉기한 반정부 투쟁단체를 말한다. 스페인어 'Ejército Zapatista de Liberación Nacional'의  머리글자를 따서 'EZLN'으로도 통한다.

이들의 지도자는 프랑스 파리대학교에서 공부한 인텔리이자 동화책을 집필하는 등 멕시코의 체 게바라로 평가받는 인물로, 이름은 마르코스(Marcos)이다. 그는 민족해방군의 부사령관을 맡아 1994년부터 밀림을 거점으로 반정부 투쟁을 지휘하고 있다.

1997년 12월, 세디요(Ernesto Zedillo) 정부 당시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45명의 원주민 농부들이 학살되면서 사태가 악화되어 정부군과 이들 반군 사이에 긴장이 감돌았으나, 2000년 비센테 폭스(Vicento Fox)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반군과의 평화협상 방침을 천명함으로써 사태는 진정 국면에 들어섰다.

그러다 2001년 3월, 이탈리아의 인권단체 회원 등 500여 명의 외국인과 함께 멕시코 전역을 순회하며 15일 동안의 평화행진을 한 뒤 수도인 멕시코시티에 입성함으로써 7년여를 끌어 온 내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는데, 멕시코 정부도 수천 명의 연방경찰과 군 병력을 동원해 이들을 보호함으로써 우려할 만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평화행진을 마친 뒤 민족해방군은 원주민 권익보장촉구대회를 열어 원주민 권리보호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산 안드레스 협정'의 의회 비준과 치아파스주에 있는 정부군의 전면 철수, 수감 중인 반군 포로 및 동조자 전원 석방을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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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파스는 '사파티스타'라는 정부에 대항하는 반군의 지배 지역이다.

 

우리나라와 경제순위가 비슷한 멕시코의 일부이면서

가난하고 빈곤한 삶속에서도 전혀 정부의 복지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치아파스를 지배하는 사파티스타가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반군처럼 봉기 이유가 특정 이데올로기와 같은 사상,이념에 있지 않다는 것에서

사파티스타는 조금 다르다.

 

커피, 옥수수를 재배하던 깊은 산속 마야인들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강대국 산자유주의의 거대한 물결로 인해 이들이 당할 수 밖에 없던 현실적인 고통은

이들을 마스크와 총을 든 반군으로 만들어 버렸다.

표현하자면 이른바 '생계현 반군'인 것이다.

스페인어 'Ejército Zapatista de Liberación Naciona'의 약자를 따서 EZLN이라고 통하는 사파티스타의

시작은 1992년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부터 시작된다.

 

NAFTA는 미국,캐나다,멕시코 3국이 맺은 자유무역협정이고,

이로 인해 미국의 자본과 기술, 캐나다의 자원, 멕시코의 값싼 노동력이 결합되어

지역경제를 발전시키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치아파스

의 입장에서 보면

수자원, 목재, 목축 커피 옥수수등 풍부한 자연자원을 가진 시골마을은

NAFTA에 가입하면서 옥수수 수입제한, 커피 보조금등의 정책의 폐지를 불러왔고,

이 지역의 주를 이루는 마야 후손들의 취약한 경제 기반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말았다.

삶의 터전을 버리고 농사짓기를 그쳐야 했던, 아이들을 더이상 학교로 보낼 여유조차 가질수 없던 마야인들은

스키마스크와 붉은 마스크를 얼굴에 두르고 총을 들기 시작했다.

한미FTA로 생존권을 위협받는 우리 농민들과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시위가

사파티스타의 봉기와 매우 닮아 있다.

 

그들은 강대국, 다국적기업의 이윤추구 앞에서 처절하게 생존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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