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우연적이고 단편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날 뿐이며 사고체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인생을 얼마쯤 살다 보면 완벽한 행복이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거소가 정반대되는 측면을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드물다. 즉 완벽한 불행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말이다. 이 양 극단의 실현에 걸림돌이 되는 인생의 순간들은 서로 똑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모든 영원불멸의 것들과 대립하는 우리의 인간적 조건에 기인한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늘 모자란 인식도 그중 하나다. 그것은 어떤 때에는 희망이라 불리고 어떤 때에는 불확실한 내일이라 불린다. 모든 기쁨과 고통에 한계를 지우는 죽음의 필연성도 그중 하나다. 어쩔 수 없는 물질적 근심들도, 이것들이 지속적인 모든 행복을 오염시키듯, 이것들은 또 우리를 압도하는 불행으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돌려놓음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파편화하고, 그만큼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18
위엄 있게 죽음을 맞을 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종종 그 소수는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이다. 침묵할 줄 아는 사람, 다른 사람의 침묵을 존중해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20
우리는 모두 그 문 안에 갇힌다. 머리를 박박 깎인 채 알몸으로 서 있다. 발이 물에 잠긴다. 샤워실이다. 29
아우슈비츠 근처 모노비츠에 와 있다.포로들은 일종의 고무인 부나(부나는 원래 부타젠과 나트륨의 첫 글자를 딴 것. 모노비츠에 있는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는 이 합성고무를 만들기 위한 공장이 있었는데 이를 부나 공장이라 불렀다)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한다. 그래서 수용소 이름도 부나다. 31
종이 울리자 여전히 깜깜한 수용소가 깨어나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진다. 5분 동안의 축복이다. ..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뭔지 알 수 없는 넝마 조각들을 우리에게 던졌고 밑창이 나무로 된 신발 한 켤레 속에 우리의 두 손을 쑤셔넣었다. 상황을 이해할 시간도 없이 우리는 바깥에, 새벽녘의 푸르스름한 눈 위에 나와 있다. 맨발에 알몸으로, 손에는 옷과 신발을 든 채 우리는 1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다른 막사까지 달려가야만 한다. 우리는 그 막사에서 옷을 입을 수 있다. 33
우리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옷, 신발,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빼앗아갔다. ..그들은 우리의 이름마저 빼앗아갈 것이다. 34
해프틀링(포로). 나는 내가 해프틀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이름은 174517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고 죽을 때까지 왼쪽 팔뚝에 문신을 지니고 살게 될 터였다...
"숫자를 보여줘야만" 빵과 죽을 받을 수 있었다. 35
수용소의 고참들은 수인번호로 모든 것을 알았다. 수용소에 들어온 시기, 타고 온 기차, 국적이 수인번호에 나타났다. 3만에서 8만 대의 번호를 지닌 사람들을 보면 누구나 존경을 표하곤 했다. 이제 겨우 수백 명에 불과한 이들은 바로 폴란드 게토의(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 14세기 초부터 19세기까지 유럽 곳곳에 존재했다. 독일군은 1940년부터 동유럽의 주요 도시에 게토를 재건했는데, 그곳은 곧 기아와 질병 수용소로의 강제연행 등으로 비극적인 죽음의 무대가 되었다. 바르샤바의 게토에서는 1943년 봄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결국 그곳에 있던 거의 모든 유대인이 학살됨으로써 진압되었다.) 생존자들이었다. 36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수용소가 그런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빨리 그리고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38
막사마다 200~250명씩 수용되는 일반 해프틀링이 사는 곳이다...
공동 침실의 바닥 면적이 얼마나 좁냐 하면, 같은 B블록에 사는 사람들은 반 정도가 침대에 누워 있지 않는다면 전체가 동시에 그 공간에 있기도 힘들다. .
우리는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이 세 부류로 나뉜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범죄자, 정치범, 그리고 유대인이었다. 모두 줄무늬 옷을 입고 있고 모두 해프틀링이지만, 범죄자들은 상의에 박힌 숫자 옆에 초록색 삼각형을 달고 다닌다. 정치범들은 빨간색이다.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빨간색과 노란색의 유대인 별을 단다. 44
우리는 음식물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다. 이제 우리도 식사를 마친 뒤 반합의 바닥을 열심히 긁어내고 빵을 먹을 때는 부스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턱 밑에 반합을 댄다. 이제 우리는 죽통의 윗부분에서 푼 죽과 밑에서 푼 죽이 같지 않다는 것도 안다. 우리는 죽통의 크기에 따라 줄을 설 때 어느 죽통 앞에 서는 게 제일 유리한지 계산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다 쓸모가 있음을 배웠다. 철사는 신발을 묶는 데, 천 조각은 발을 감싸는 데 필요하고 종이는 추위를 막기 위해(불법으로) 상의에 대는 데 필요하다. 우리는 모든 물건을 도둑맞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만 방심하면 반드시 도둑맞는다는 것을 배운다. 도둑맞지 않기 위해 반합부터 신발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모두 강의에 집어넣어 보따리를 만들어 베개로 베고 자는 기술을 익힌다. 45
자신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 이성적일 수 있는 인간은 매우 드물다. 운명이 위태로울 때 사람들은 극단적인 태도를 취한다. 성격에 따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잃었고 여기서는 살 수 없으며 종말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금방 확신하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우리를 기다리는 삶이 힘겹기는 하지만 구원의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이 멀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믿음과 힘이 있다면 우리집으로 다시 돌아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인 이 두 부류가 그렇게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불가지론자들이 많아서라기보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화 상대와 상황에 따라, 기억도 일관성도 없이 두 극단적인 입장 사이에서 동요하기 때문이다. 50
나는 수레를 밀었고, 삽질을 했고, 비에 젖었고, 바람에 몸을 떨었다. 내 육체는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배는 볼록하게 나왔고 팔다리는 장작개비 같았으며 얼굴은 아침이면 부었다가 저녁이면 홀쭉해졌다. ..
사나흘 만나지 못하면 서로를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우리 이탈리아인들은 매주 일요일 저녁 수용소 한쪽 귀퉁이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곧 그만두어야 했다 숫자를 세는 게 너무 슬펐기 때문이다. 우리의 수는 매번 줄어들었고 매번 몰골이 더 사납고 더 비참해졌다. 모임에 나가려고 몇 발짝 떼어놓는 것도 힘이 들었다. 게다가 다시 만나게 되면 필연적으로 기억을 떠올리고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51
솔직히 고백하면, 수용소 생활 일주일 만에 나는 청결의 욕구를 잃어버렸다. 내가 세면장을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거기에 쉰 살이 다 된 내 친구 슈타인라우프가 웃통을 벗고 서 있었다. 그는 몸을 문지르고 있으나 별 효과가 없다(비누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 목과 어깨를 씻는다. 슈타인라우프는 나를 보자 인사를 한다. 그러다 곧바로 정색을 하며 다짜고짜 내가 왜 안 씻는지 묻는다. 내가 왜 씻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면 내게 도움이라도 된다는 건가? 내가 누구의 마음에 더 들게 되기라도 한다는 건가? 하루, 아니 한 시간이라도 더 오래 살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 반대다. 오히려 수명이 더 짧아질 것이다. 씻는 일도 노동이고 에너지와 칼로리의 낭비니까. 슈타인라우프는 우리가 석탄 자루밑에서 30분만 낑낑대노라면 자기와 내가 구분조차 안 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런 생활환경에서 얼굴을 씻는다는 것은 어리석고 심지어 무례하기조차 한 것 같다. 이것은 기계적인 습관일 뿐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절멸의 의례를 처량하게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아니, 이미 죽기 시작했다. 기상과 노동 사이에 여우 시간이 10분밖에 없다면, 나는 그 시간을 다른 데 쓰고 싶다. 나 자신 속으로 침잠하여 결산을 하거나, 이것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늘이나 바라보고 싶다. 아니면 아주 잠시나마 한가로움이라는 사치를 즐기도록, 그냥 그렇게 살아 있도록 내버려두고 싶다.
하지만 슈타인라우프가 내 생각을 가로막는다. 그는 세수를 다 했고, 무릎 사이에 끼워두었던, 나중에 걸칠 아마포 상의로 몸의 물기를 닥는다. 그러고는 나에게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는데, 그 와중에도 자기가 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56-57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도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이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 우리는 나막신을 질질 끌지 말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
이것이 바로 마음씨 좋은 사람 슈타인라우프가 나에게 말해준 것이다. 57-58
카베는 크랑켄바우, 즉 위무실의 약자다. ..
회복의 기미를 보이는 사람은 카베에서 치료를 받고, 병이 점점 심해지는 사람은 가스실로 보내진다.
이 모든 게 우리가 다행히 '경제적으로 유용한 유대인'으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 65
카베의 삶은 림보(<신곡>의 지옥을 구성하는 아홉 개의 원 중 가장 형벌이 가벼운 제1원을 말한다.)의 삶이다. 굶주림과 질병 본래의 아픔 말고는 불편함이 상대적으로 적다. 춤지도 않고 일도 안 한다.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구타를 당하지도 않는다. 72
11시 30분에 오늘 죽은 어느 정도일지, 맛은 어떨지, 죽통의 윗부분 혹은 아랫부분 중 어느 것이 우리 차지가 될지 하는 판에 박은 질문들이 시작된다. 난 이런 질문들을 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그래도 그 대답에 탐욕스럽게 귀를 기울이고 부엌에서 실려오는 연기에 코를 킁킁거리지 않을 수 없다. 103
삶의 의미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모든 힘줄 속에 뿌리 박혀 있다. 이것이 인간 본질이 지닌 속성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이러한 목적에 많은 이름을 부여하며 그 성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토론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문제는 훨씬 더 단순하다.
오늘 그리고 여기서 우리의 목표는 봄에 도달하는 것이다. 지금은 다른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제 이런 목표 뒤에 다른 목표는 아무것도 없다. 106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이 애초에 완전한 행복의 상태를 누릴 수 없어서라기보다 불행의 상태가 지니는 복잡한 성질을 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없이, 차례대로 늘어선 그 불행의 이유들이 단 하나의 이름을, 가장 큰 이유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 이유가 힘을 잃어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 때 우리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비탄에 잠길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뒤로 또 다른 이유들이 줄을 서 있다. 110-111
민간 관리국은 부나에서 도둑질하는 것을 벌주지만, SS는 오히려 허용하고 조장한다. SS가 엄금하는 수용소 안에서의 도둑질이 민간인들에게는 정상적인 교환 행위로 간주된다. 해프틀링들 간의 도둑질은 일반적으로 처벌을 받으며, 도둑과 피해자가 동일한 강도의 벌을 받는다. 나는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이라는 단어가 수용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지 한번 생각해보라고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다. 130
우리는 명백하고 손쉬운 추론을 믿지 않는다. 모든 문명적 상부구조가 제거되면 인간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잔인하고 이기적이고 우둔하다는 추론 말이다. 이러한 추론에 따르면, '해프틀링'은 거리낌이 없는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생각에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궁핌과 지속적인 육체적 고통 앞에서 수많은 사회적 습관과 본능이 침묵에 빠진다는 것뿐이다.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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