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적 필요에 얽매였던 삶을 그리려고 할 때, 내겐 예술의 편을 들 권리도, 무언가 [굉장히 재미있다]거나 [감동적인]것을 만들 권리도 없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말과 행동과 취향, 그의 생애의 주요 사건들, 나도 함께한 바 있는 그 삶의 모든 객관적 표징을 모아 볼 것이다.

추억을 시적으로 꾸미는 일도, 내 행복에 들떠 그의 삶을 비웃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단순하고도 꾸밈없는 글이다.  21


그는 내가 온종일 책에 파묻혀 있다가, 그들에겐 딱딱한 얼굴로 신경질만 내는 모습을 보면서 몹시 답답해했다. 저녁마다 내 침실 문 아래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고 내가 건강을 망쳐 가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공부는 좋은 신분을 얻고, 직공과 결혼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고통이었다. 하지만 내가 머리를 쥐어짜는 공부를 좋아한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고 여겼다. 꽃다운 나이에 인생을 즐기지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가끔 그는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89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아무 할 말이 없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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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역할훈련
카테고리 인문 > 교육학
지은이 토마스 고든 (양철북,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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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역할 훈련을 읽으면서 아이들의 감정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심리학적인 요소로 접근하여 아이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것을 인정해 줌으로 지원한다는 감정을 전달하는 내용을 읽으면서, 비단 아이들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소통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할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당연한 말을 하는것일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이전까지만 해도 당연하게 치부한적이 있었다..그리고 나도 꽤나 심리학에대해서 알고 있으니 사람의 심리적인 요인들을잘 활용한다고 자만하기도 하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이것이 나만의 자만심일뿐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또한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내가 열린(적극적)듣기를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이 글을 올리면서 정리해 놓은 내용을 다시 보면서 그때의 감사를 다시금 떠올려 본다.

혹 이 책을 읽기를 준비하는 분이라면 아래의 내용을 먼저 읽어보고 책을 보라고 말하고 싶다(내용에 대해서 여기를 클릭) ..물론 아래의 내용은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정리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내가 정리한 것과 읽으면서 중요하게 보이는 것을 구분해 본다면 더욱 유용하게 이 책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는 때로는 이랬다저랬다 할 수밖에 없다. 늘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일 수 없다. 부모 양쪽이 아이에게 같은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엄마가 실제로는 수용하지 않으면서도 수용하는 것처럼 행동할 때 어떤 문제가 있을 수 있을까? 아이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행동으로는 자지 않고 있어도 좋다고 말하면서 표정을 보면 엄마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아이는 혼란에 빠졌다. 자고 싶지는 않지만, 또 한편으로 사랑도 받고 싶다. 아이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아이의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부모는 늘 말을 부드럽게 하고 너그럽고 잔소리를 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수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면서 수용하는 듯이 행동하는 부모이다. 거짓 수용을 할 때에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며, 길게보면 아이와 부모의 관계를 오히려 악화시킬 소지가 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친밀하고 오래 지속되는 관계에서 진짜 감정을 숨기기란 어려운 일이다. 실제 감정과 태도 이상으로 수용의 범위를 넓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부모는 솔직한 감정을 감출 수도 있지만 감추어서도 안된다. 
wn1 - 한국인 부모에게 가장 많은 것 중에 하나이지 않을까..!!
굳이 한국의 부모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국의 부모에게 사실 많은 편이다.
이것은 사회적인 요인들과 현상들로 인해 그럴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젠 변화될 수 있고 변화되어야 하기도 한다. 지금까지의 한국은 식민시절과 남북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나라안에서 전체의 어려움을 극복하는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그 부모님들을 통해 교육을 받기 어려운 시절을 겪어낸 50-60대의 부모 그리고 그 자녀들 역시도 안정을 찾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는 부모님에게서는 많은 부모역할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어린 자녀를 둔 30대 정도라고 보았을때 부모에 대한 역할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깊게 고찰해 보아야 할 시기이다.
혹 외국 영화를 보면서 우리내와는 다른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찾아 보았는가?
그들과 여러가지 다르긴 하지만 큰 한 가지는 자녀의 독립정신을 부모가 길러준다는 것이다. 그것이 생활에서 보이는 것은 .. 부모가 자녀를 어린자녀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것이다.
잘 관찰해 보면 볼 수 있다... 그들은 자녀를 복종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도 한 개인으로서 인정하고 그들의 생활을 인정해 줌으로 다원화된 사회에서 자녀들이 자신의 가치관을 확립시킬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다..
물론 유교의식이 아직도 자리잡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그것이 좋지 않아 보일 수도 있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녀들과의 대화에서도 부모로서 복종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서 생각하는 바를 말해주고 결정은 가능하면 자녀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물론 이러한 일은 가정만이 아니라 학교와 사회에서도 그러한 문화의 가치를 같이 교육하기에 가능해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의 부모 역할은 자녀가 가치관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하기에 ... 가정에서부터 그러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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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대학아버지학교를위한강의식교과서
카테고리 가정/생활 > 자녀교육
지은이 추이화팡 (휘닉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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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앞전의 올려놓은 내용이다.
이 글을 제일 먼저 올리는 것은 ..메이저 도서가 아니기에..
난 부모가 아니다.. 그럼에도 교육이란것에 관심이 많다..오래전에 노트에 적던것을 컴퓨터로 쓰기시작하며 제일 먼저 쓴 책이 부모대학이다.. 

사실 누가 읽더라도 당연한 이야기처럼 느껴질것이라 생각 된다..하지만 그것을 다시금 생각해보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더욱 느낄 수 있다..
이 글의 제일 마지막을 보면 '
자녀를 교육하는 것은 부모의 직업이다.'라고 썼다..
사실 부모만이 아니지 않는가.. 어른이라면 누구나 '아이는 미래의 가치'라는 말에 동감한다..
그렇다면 내 아이만이 아니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이들이 나라의 대표들 일것이다..
그들에게 좋은 것을 알리기 위하는 마음이 필요할것이다.. 


 
횟수로 16년간 학생들을 만났고, 부모들을 만났다.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면 7년이 지나니 학생들을 만나서 20분정도 이야기를 해 보면 대략적인 생활방식을 알았고, 짐작한 내용의 95%는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리고 아이들의 입을 통해 직접 부모에 대해 듣지 않아도 부모의 생활방식을 예측할 수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자주 언급하는 내용이 있다.
'너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방식은 너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부모님의 잘못이 90%이상이다. 그렇기에 그것에 대해 불안하거나 죄스럽게  생각할 필요도 없고,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지금의 잘못된 생활방식이 20대 중반이후에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면 그것은 99% 너 자신의 잘못이다.'
부모는 자녀를 올바른 습관형성시키는데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학창시절에 아이들의 잘못된 습관은 90%이상이 부모의 책임이다.
사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100%가 부모의 책임이다. 지금 이 시대는 더욱더 그렇다고 생각한다.
가정을 벗어나면 많은 잘못된 경험을 할 수 있다. 그것마저도 가정 내에서 부모의 관심과 사랑과 배려와 올바른 애정으로 치유해야 한다.

물론 부모는 신 자유주의 시대에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돈을 벌기위해 더 바쁘다는 것은 모르는바가 아니다. 그렇기에 너무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부모이긴 하지만, 이것은 다른 누군가의 도움으로 해결되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기에 부모가 돈에대한 욕심보다는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라도 이 책은 부모 특히 아버지의 역할을 맡아야 하는 남자들에게 꼭 필요한 책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부모의 역할을 맡고 있는 두 사람의 공동의 몫이다.

꽤 긴 시간동안 교육이라는 것에 대해 연구하고 경험하면서 생각하는 한 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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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우연히 제목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제목 아래에 사진을 보았다. 내가 아는 사람이 둘이 있었다.
물론 그들이 나를 아는 것은 아니다.
벌써 10여년쯤 전에 이 동영상은 나에게 많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그리고 나는 내 강의중에 두 개의 주제에서 니 내용이 거론 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은 감동의 눈물을 닦아내기도 하였다.
아직도 그 주제의 강의에서는 이 내용과 동영상이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의 대략적인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보는 순간.. 왜 이제야 이 책이 출판되었을까..하며 책을 이미 읽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책을 읽었다. 읽으면서 내가 알고 있던 사실들은 정말 개략적인 내용들이었구나. 이들이 극복해 내야 했던 것들이 너무 많았구나.. 
엄청난 장애물과 시련들을 이들이 넘어야 하는 상황에서 이들의 내면의 생각과 행동들을 알게 되면서 나는 다시금 감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검색창에 '팀 호이트', '아버지와 아들', '딕 호이트', '릭 호이트'... 등으로 검색하면 이들의 동영상을 볼 수 있다. 예전의 유튜브 동영상인데, 아직도 인터넷 상에서 그 동영상은 계속 조회되고 있는듯하다.

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 ... 지금 이 시대 '아버지의 존재감은 많이 위축되어 있다. 아버지는 가족 밖 타인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추천사를 쓴 박원순 변호사는 말하고 있다.
시대의 현상일지도 모르지만 속도전쟁을 벌이고 있는 세계의 흐름에 아버지들은 참 힘들게 살아간다. 그에 비해 그들의 자리가 너무 좁아지는 시대이다.
개인적으로 그래서 이 제목은 참 마음에 와 닿는다.

마라톤 42.195km
보스톤 마라톤 대회 26차례(1982~2005년까지 24년 연속 완주, 보스턴 대회 최고 기록 2시간 40분 47초)
세계 철인 3종경기 6차례
단축 철인 3종경기 206차례 완주
미국 대륙 4,000km 횡단
이들 부자가 이룬 업적이다. 책의 뒷 표지에 쓰여 있는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버지 딕 호이트는 1940년생으로 한국 나이 현재 72세 이다. 그는 1977년 당시 37세의 나이에 달리기를 시작하였다.
아들 릭 호이트는 1962년생으로 한국 나이 현재 50세 이다.
그런데 이 글을 올리고 있는 지금도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인 딕 호이트는 글의 마무리에서 '나는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30년 동안 아들과 함께 달려왔다. 물론 우리는 앞으로도 달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니 지금도 달리고 있을 것이다.

책은 아버지 딕 호이트가 전개해 나간다. 자신의 어린시절 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경험들, 어린시절부터 청소년시절 성인시절 부인 러스와의 만남에서부터 결혼까지의 과정 첫 아들 릭과 둘째 셋째인 롭과 러스를 통해 이루어진 가족 그의 업무 그리고 그와 릭의 팀형성과 가족들의 지지들에 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다. 어려운 상황이 닥칠때 마다의 그들의 심리상태가 더 절실히 나에게 전달되었다.

개인적인 느낌은 이들의 역경을 헤쳐나가는 인간적인 모습과 부모로서의 모습에서 강인함이 어떻게 나오게 될 수 있는지를 배웠다.
그리고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희생에는 댓가가 따른다. 하지만 그것은 지불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면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진리이다.
예스 유 캔(Yes You Can).. 그들은 나에게 말하였다. 나도 할 수 있다고 그리고 원하라고.. 희망이라는 것이 나에게도 존재하는것이니 어려울때 희망의 의심하기 보다는 숨어있는 희망을 찾으라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유명한 표현을 빌려 쓰지 않더라도 우리는 사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누구나 행동에서는 자신의 현실에서는 부정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라는 표현은 당황하고 황당할때 생각나지 않는 표현이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할때 보이게 되며 거기서 부터 찾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이루어지게 된다. 
믿어 의심치 말자.... 믿어 의심치 않고 장애물을 장애물이라 생각지 않고 뛰어넘어버린 인물이 있지 않는가..!!

"아버지가 없었다면 할 수 없었을 거예요."  "네가 없었다면 아버지는 하지 않았다."
이 두 문장의 표현으로 우리는 만감이 교차한다는 표현을 이해할 수도 있으고, 그들의 교감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의 감동적인 삶에 감히 '아름답다'는 표현을 쓰고 싶다. 
우리의 인생에서 돈 뿐이라는 시대에 휩쓸리지 않는 모습을 찾아보게 되어 즐거웠다.


프롤로그
나는 릭을 볼 때마다 감동한다. 릭은 나보다 더 긍정적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야도 나보다 더 넓다.
우리는 단순히 달려야 하기 때문에 달리는 게 아니다. 달리고 싶기 때문에 달리는 것이다.
의사소통을 하는 방법을 찾은 것이든, 교육을 받은 것이든, 이 모든 것은 간절히 원하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9

나는 항상 도전을 하기를 좋아했다.
아홉살에 외양간을 치우거나 건초를 쌓는 일, 열두 살 무렵에 농부 밑에서 일하기, 고등학교 갈 즈음에는 농장과 동네 주유소, 청소와 답역부 일들을 했다.  23-24
운동할 때가 가장 즐거웠다. 그런 만큼 운동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노스리딩 고등학교에서 나는 미식 축구와 야구부 주장이었다.  27
치어리더 주장이던 '주디 라니턴'과 사귀고 결국은 그녀와 결혼함.

"아들이 태어났다!"
나는 18년 뒤의 일을 상상했다. 그때쯤 아들과 나는 캐치볼을 하거나 미식축구를 할 터였다. 마을 진입로에서 하키도 할 것이다.  36
그런데 출산 직전에 아기가 몸을 뒤집어 엉뚱한 방향으로 향한 바람에 탯줄이 목에 감겨서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았다고 했다. 사실상 아기는 질식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런 터에 의사들이 탯줄을 푸는 단 몇 분 동안 돌이킬 수 없는 뇌 손상이 일어나고 말았다.  40
우리 부부는 그 점을 인정하기로 했다. 아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대로 주자앉을 수는 없었다.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42

릭은 전혀 울지 않았다. 얌전한 아이라서가 아니었다. 릭은 울 줄도 모르고 소릭도 거의 낼 줄 몰랐다. 음식을 먹는 데도 문제가 있었다. 간신히 먹이면 금방 게워내곤 했다.  48-49
가끔 동네 아주머니들이 아기를 데리고 우리 집에 와서는 릭을 데리고 함께 산책을 하자고 말했다. 그럴 때 주디는 무척 힘들어 했다. 나중에는 릭에 대해 말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까 봐 불안한 나머지 외출을 하거나 초인종 소리에 대답하는 것조차 겁냈다.  50
생후 8개월이 되었을 무렵 마친내 공식적인 진단 결과가 나왔다. '뇌성마비'  51
당시 뇌성마비에 대해 알려진 치료법이 거의 없었다.  52
의학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릭은 경련성 사지 마비였다.
의사들은 릭을 시설에 보내라고 권했다.
"아이를 시설에 보내고 잊으려고 노력해 봐요. 찾아가 볼 생각도 말아요. 아이에 대해 아예 생각도 하지 말고 당신들 인생을 살아요. 당신들보다 먼저 이런 상황에 처했던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했답니다."  53-54
주디와 나는 릭을 시설에 보내라는 의사들의 말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런 문제는 의논할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의사들은 의외로 집요했다. 그들은 우리가 집에서 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며 릭이 시설에서 지내는 게 더 편할 거라고 말했다.  54
집으로 차를 몰고 오는 길에 나와 아내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시야가 가려져서 눈물을 멈추려고 했지만 멈춰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20분 동안 나는 분노, 슬픔, 절망 등 온갖 감정에 휩싸였다.  55
우리는 릭을... 정상적인 아이처럼 대했다.
의사들은 굳은 의지를 확인하고 자원봉사할 사람들을 연결해 주었다. 자원봉사자들은 우리 집에 와서 릭의 팔과 다리를 마사지하는 등 정성껏 돌봐 주었다.
학습 장애를 겪는 다는사실을 알고 난 뒤 릭이 어떤 증상을 보일까 싶어 걱정을 했다. 우리가 릭에게 말을 걸거나 눈을 바라보면 릭은 곧바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릭이 영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스스로 누끼는 감정이나 생각을 다른 방법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57
보스턴 소아전문 병원에 다니던 중 로버트 피츠럴드 박사를 만났는데,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는 바람에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심리학자 였다.  58
또 다시 장애가 있는 아이가 태어난다면 우리는 심리적으로 무너질 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파산할 터였다.
피츠럴드 박사는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박사는 아이가 더 있으면 가정에 균형이 잡힐 것이고, 우리가 릭을 지나치게 애지중지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다. 확실히 우리는 첫째 아이인 릭을 너무 애지중지했다. 게다가 사사건건 과잉보호까지 하고 있었다.  59

우리에게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우리 자신도 달라졌지만 이웃들의 인식도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나는 이웃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릭에 대해 자랑했다.  63
어렸을 때 릭은 호기심이 많고 명랑한 아이였다. 참을성도 많았다. 그런데 장난치기를 좋아하는데다 누군가를 골탕 먹여서라도 웃음을 유발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자신도 잘 웃었다.  72
언젠가 롭이 이렇게 말했다. 
"현은 걸핏 하면 웃어요.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그 어떤 고통이나 슬픔이나 어려움을 겪어도 늘 웃어야겠다고 작정한 사람 같아요."
어느날 롭이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삶이 제게 어떤 역경을 주든 형이 날마다 맞닥뜨리는 어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위 사람들은 릭을 처음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장애아로만 보았다. 그러다 릭이 보통 아이 못지않게 할 줄 아는 게 많자 차츰 호감을 나타냈다.  77
우리는 릭을 공립학교에 보내기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다. 터프츠 대학의 공학도 팀과 의사소통용 컴퓨터를 개발하고, 장애아를 공립학교에 보낼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되도록 노력한 것도 계획을 세우고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얻은 수확이었다.  88

지금까지 우리 가족은 주어진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쌓여 있는 문제들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가족 중 한사람이 우스갯소리를 하면 릭이 즉시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릭의 웃는 모습을 보면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은 우리의 앞길을 막는 바리케이드가 아니라 단지 인생이라는 도로에 놓인 과속 방지턱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92
'터프츠 쌍방향 의사소통 장치'를 릭이 처음 받고, 모두 일제히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릭이 난생 처음으로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했다. 나는 당연히 "안녕, 아빠"라고 할거라 생각했다. 주디는 보나마나 "안녕, 엄마"라고 말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릭의 동생들도 기대에 차 있었다. 녀석들은 형이 자기들에게 먼저 인사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릭의 표정으로 보아 우리 가족 모두를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또는 단순히 "고마워요"라고 말할 것 같기도 했다.
마침내 릭이 머리를 움직여 글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맨 먼저 'G'가 모니터 화면에 뜨더니 조금 뒤에 'O'가 떴다. 'GO'라고? 순간 나는 당황했다. 
릭의 머리가 또 움직였다. 'B'에 이어 'R'이 떴고, 그 다음에 'U'가 떴다. 
잠시 후 릭이 모니터 화면에 집중하면서 머리로 금속 바를 또다시 툭툭쳤다. 'U'에 이어 'I', 'N', 'S'가 차례로 떴다.
"'GOBRUINS'가 뭐야?"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 Go, Bruins(힘내라, 브루인스)!"
나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펄쩍펄쩍 뛰면서 외쳤다. 
다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가슴이 벅찼다. 
그 무렵 보스턴 브루인스는 북미아이스하키리그인 스탠리컵 대회의 결승전에 올라 있었다.  97-98
나중에 릭은 의사소통 장치를 통해 이렇게 고백했다.
"걷지 못하고 팔을 쓸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98
릭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길이길이 빛날 승리이자 쾌거였다. 
또한 헌신적으로 애쓴 터프츠 기술 팀의 승리이자 쾌거였다.  99

공립학교에서의 거부를 이겨내기 위해 
주디의 눈물겨운 노력은 주위사람들을 감동시켰고, 1972년 7월 12일 프랜시스 사전트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제766조로 더 잘 알려진 바틀리데일리 법안에 서명했다. '특수 교육 개혁법 제766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장애아를 키우는 매사추세츠 주 전역의 가족들 노력도 뒷받침되었다.
제766조는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세 살에서 스물한 살의 모든 장애인이 일반 학생들로부터 격리될 걱정 없이 무료로 공립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한다는 취지에서 입안되었다.  103
1975년, 의사들이 식물인간에 불과하다고 말했던 릭이 드디어 공립학교에 입학했다. 릭을 공립학교에 넣어 정규 교육을 받게 하려는 우리의 오랜 싸움이 마침내 끝났다.  108

체육 교사인 스티브 사토리 씨
주디는 릭의 신체 조건으로는 다른 아이들가 함께 체육 수업에 참가할 수 없으므로 양해해 달라고 부탁했다.
뜻밖에 그는 약간 화난 목소리로 장애는 결석의 핑계가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사토리 선생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라고 요구했다. 릭을 체육 시간에 나오게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주디가 릭 대신 나오라는 것이었다.
사토리 선생은 체육 수업의 중심에 릭을 두었다. 그는 릭을 위해 새로운 수업 방식을 고안해 냈다. 그것은 릭이 참가한 가운데 아이들이 운동을 즐기는 방식이었다.  114
사토리 선생은 릭에게 조언자이자 친구였다.  115
릭이 그토록 빨리 성장하는 데 대해 유감스러웠던 점은 단 한 가지였다. 그것은 내가 릭의 동생들과 함께했던 일들을 릭과는 마음껏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116
웨스트필드 주립대학의 운동선수였던 지미 바나코스는 1977년 라크로스 경기도중 다른 선수와 부딪쳐 목이 부러졌고 목 아래 몸이 마비되었다. 
대학측은 지미의 병원비를 보태기 위해 마련하는 8킬로미터 자선 달리기 대회를 열었고, 릭은 "아빠, 달리기 대회에 나가고 싶어요."라고 했다. 그리고 "전 아빠와 달리고 싶어요." 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말해준 아들이 더 없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릭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약속은 했지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휠체어에 매인 릭은 뇌성마비 장애인이고 나는 서른일곱 살의 아저씨였다.
달리기는 내 분야가 아니었다.
릭은 새로운 변화를 원했고나는 아버지로서 릭에게서 그 기회를 빼앗을 순 없었다.
그 달리기는 그때까지 함께했던 그 어떤 일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리 사이를 더욱 끈끈하게 맺어 주었다.  117-119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 오래 뛰지 못하고 지레 포기할 거라는 듯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사실 우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영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도주에 그만두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125
중간 지점쯤 도달했을 때 점점 고통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발뒤꿈치에 물집이 잡혔는지 무척 쓰라렸다. 다리도 젤리처럼 흐느적 흐느적 맥이 풀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나마 휠체어를 잡고 있어 몸을 지탱할 수 있는 게 다행이다 싶었다.  128
그러나 우리는 기어코 완주했다. 
"우리가 해냈다, 릭!"  129
나는 아들이 쓴 글을 읽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아빠, 달리고 있을 때 저는 장애인이 아닌 것 같았어요."
"릭, 사랑한다." 이어서.. "릭,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함께 달릴 수 있을 거야."  130
지미 바나코스 자선 달리기 대회 이후 우리 나름대로 훈련을 하고 릭에게 맞는 휠체어를 마련하는 데 꼬박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때쯤 되자 대회에 나갈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33

첫번째 달리기 대회의 참가를 계기로 나 딕 호이트와 아들 릭 호이트는 '팀 호이트'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 근교에서 매년 열리는 10K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주최 측으로부터 다른 참가자들에 이르기까지, 스프링필드 10K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우리가 달리는걸 원치 않는 것 같았다.  139
참가자들 사이에서 우리를 못마땅해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릭이 레이스에 참가하는 걸 찬성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140
우리는 38분 30초로 300명 중에서 150명을 제치고 결승선을 통과했다.  142
우리는 마라톤 중의 마라톤이라고 할 수 있는 대회를 떠올렸다. 
1980년의 늦은 가을, 나느 보스턴육상협회(BAA)에 참가 신청서를 보냈다. 신청서는 거절되었다.  144
나는 첫 번째 신청서를 보낸 뒤부터 대회가 열리는 4월까지 열두번도 넘게 전화를 걸고 편지를 보냈다. 대답은 항상 같았다.
하지만 담당자는 한반 물러서, 우리가 뛸 수는 있지만 번호 없이 휠체어 참가자들 뒤에서 달려야 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비공식으로, 참가비를 안내고 그냥 뛰는 '도둑 마라톤'을 하라는 것이었다.  145

우리가 보스턴 대회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바로 우리 고향의 대회이기 때문이다.  153
한 기자가 "경기에 혼자 나와 달리면 아주 좋은 기록을 낼 것 같은데요. 혹시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요?"
아들 없이 달리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릭이 없다면 나는 달리기는 커녕 두 팔을 어디에 둘어야 할지도 몰라 쩔쩔맸을 것이다. 내가 달리기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들 릭 때문이었다.  156-157

1983년 8월에 열린 대회에서 한 선수가 다가와 우리에게 인사했다. 그는 데이브 맥길리브레이라는 사람으로 그때의 만남으로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당시 그는 철인3종경기 선수였는데 미국 북동부에서 그 종목의 선구자로 통했다. 
그는 철인3종경기 선수가 될 수 있다고 제안 했다. 167
나는 시험 삼아 호수에 들어가 보앗다. 그런데 물에 뛰어들자마자 가라앉아 보렸다. 시험 삼아 해본 것치고는 가혹했다.  170
자꾸 연습을 하자 몸이 조금씩 뜨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5초도 못 참던 숨도 조금 오래 참아졌다.  171
나는 시상식 무대에서 몇 마디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팀 호이트의 진정한 승자인 내 아들 릭에게 공개적으로 영광을 돌릴 수 잇는 최초의 기회였다. 나는 당당하게 마이크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릭이 없었다면 저는 지금쯤 140킬로그램이나 되는 육중한 몸을 이끌고 어딘가의 술집을 어슬렁대고 있었을 겁니다."  178

1986년 캐나다 철인 연맹에서 풀코스 캐나다 철인3종경기에 우리를 초청했다.  181
수영 3.9km, 사이클 180.2km, 마라톤 42.195km를 요구하는 철인 3종경기 풀코스.
1989년 하와이 코나에서 열린 '아이언맨 월드챔피언십' 해설을 맡은 아나운서는 열렬히 응원하는 관중과 우리를 향해 던져진 화환과 꽃다발, 그리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갖고과  그 앞의 결승선을 넘는 우리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27년 전, 호이트 부자는 오늘 이 순간까지 이어진 기다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이 길을 걸으며 두 사람은 현실에 당당히 맞서 싸웠습니다. 이들은 지극한 사랑으로 질곡의 삶을 가능성의 삶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194

참가한 경기가 너무 많아서 언제부터인가 일일이 기억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우리에게는 여러 곳에서 행한 수없이 많은 경기 기록이 있다. 우리는 시간을 들여 그것을 공식화하고 또 다른 도전에 나설 계획을 세웠다.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일이다.  201
결국 우리는 대륙 횡단에 나섰다. 1992년 여름, 러스와 아내 주디는 캠핑카를 타고 우리의 뒤를 따랐다. 릭과 나는 산타모니카에서 보스턴까지 6070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리를 한 달 보름 동안 달렸다.  202
우리는 45일 동안 6070킬로미터를 달린 뒤 보스턴으로 돌아왔다.  203
장거리 달리기 선수들과 자전거 선수들이 우리가 여행을 떠날 경우,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매주 하루나 이틀씩 쉬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계속 달리면 20일쯤 지났을 때 힘이 다 빠져 실패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하루도 쉬지 않고 달릴 작정이었고, 그렇게 하다 보면 45일 만에 미국 대륙을 완벽하게 횡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45일을 쉬지 않고 달려 횡단 여행을 마치려 했던 무모한 발상은 현실이 되었다.  204-205
릭과 나를 연결한 끈은 우리가 달리는 동안에 더욱 질겨졌다. 
2008년 10월 11일, 하와이 코나의 '2008 포드 아이언맨 월드챔피언십'에서 우리는 철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207
2009년에 릭과 나는 우리의 1000번째 경기인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했다. 우리는 보스턴 마라톤이 1000번째 경기가 되기를 기대하며 기다렸기 때문에 그 어느 대보다도 단단히 준비해 놓았다.  208

1993년 5월 16일 보스턴 대학 제120회 졸업식장. 릭은 특수교육 분야의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것은 9년 만에 맺은 결실이자 릭이 온전히 혼자 힘으로 이루어 낸 승리였다.  216
릭은 편균 B학점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누구이 덕을 보거나 특별대우를 받지도 않았다. 순전히 자기 혼자의 힘으로 이룬 성적이고 졸업이었다.  217
졸업식이 끝날 때까지 나는 연단 위 휠체어에 앉은 아들을 계속 바라보았다. 릭은 그 어느때보다 당당해 보였다. 누가 저 아이를 가리켜 가망이 없다고 했던가? 누가 저 아이더러 식물인간이라고 했던가? 연단 위의 릭은 눈부실 정도로 빛나 보였다. 그지없이 자랑스러웠다.  229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이들이 관련된 각종 행사에 참석해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특히 릭의 동생인 롭과 러스에게 제대로 아버지 노릇을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물론 아내 주디가 내 몫까지 맡아 훌륭하게 키웠지만 솔직히 나로서는 두 아들보다 릭에게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릭은 성장할수록 점점 더 어려운 문제와 맞닥뜨려야 하는 장애아이기 때문이다.  242

'Yes You Can(그래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을 우리의 슬로건으로 삼았다.  256
많은 사람이 외모로 상대방을 판단하는 것 같다. 그러나 무엇을 하려는 의지나 신념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서 비롯된다. 릭은 그 사실을 분명하게 입증한 아이다.  266

2003년, 나는 예순셋의 나이로 주말마다 마라톤과 철인 3종 경기에 출전했다.
목구멍과 가슴 부위에서 간지러움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증상이 느껴졌다. 한 달 동안 간지러움이 사라지지 않아 진료를 받았다.
조엘 고어 박사는 내게 이미 몇 차례 경미한 심장마비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심장에 연결된 동맥의 95%가 막혀 있다고 했다. 그나마 달리기를 통해 건강을 유지해서 망정이지 그 렇지 않았다면 이미 15년 전에 세상을 떴을 거라는 말도 했다.그러고 보면 릭이 내 목숨을 구한 셈이었다.  
심장 수술을 했다고 멈추지는 않을 작정이엇다. 우리는 역경의 베테랑이었기 때문이다.  274-275
우리는 우승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완주하는 것에 행복을 느낄 뿐이다. 요즘 들어 계속 느려지긴 하지만 기록이 좋으면 금상첨화지, 그 이상의 의미는 두지 않는다.  277
2007년 6월, 릭은 남성 잡지 <멘스헬스>에 '아버지는 내게 어떤 존재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릭이 우리 관계에 대해 그처럼 공개적으로글을 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단지 내 팔과 다리 역할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내 영감의 원천이고 내가 인생을 충만하게 살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 또한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사람이다."  279
나는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30년 동안 아들과 함께 달려왔다. 물론 우리는 앞으로도 달릴 것이다.  281
우리는 여전히 만족스럽게 잘 지내고 있다.
미국에 사는 여느 남자들과 다를 것이 없다. 나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내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 게다가 장애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달리는 아들이 있다. 그동안 멀고 먼 길을 달려왔지만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영웅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한 사람의 아버지일 뿐이다. 내가 그동안 한 일도 그다지 대단하지 않다. 나는 그저 러닝화 끈을 동여매고 휠체어에 앉은 아들을 밀려 앞을 향해 달렸을 뿐이다.  282

에필로그 
한계를 규정짓는 어떤 말에도 귀 기울이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말도 하고 싶어요. 
사람들 모두가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는게 하나 있어요. 그것은 바로 "Yes You 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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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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