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베트남전쟁’을 회고하면서
베트남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베트남인의 싸움은 미국 정부가 선전하고 우리 정부가 주장했던 그와 같은 소위 ‘반공 성전’도 아니었고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의 대결도 아니었다. 미국이 베트남인의 내전을 ‘미국의 전쟁’으로 만들기 위해서 정당화의 이론으로 내세웠던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이 허구 논리임은 그 당시 웬만한 지식인에게는 분명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전체 아시아 국가도 도미노 패가 쓰러지듯이 차례차례로 쓰러지고 공산화된다.” 이것이 미국이 작은 베트남 사태를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확대한 전쟁논리였다. .. 사회와 국민을 계몽해야 할 나라의 소위 ‘언론기관’들과 ‘언론인’들이 앞다투어 ‘도미노 이론’의 나팔수가 되었다. 278
1966년 한 해동안에 미국은 미국식 자유와 민주주의의 축복을 “미개한” 베트남인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 폭탄 63만 8,000톤, 야포탄 50만 톤, 합계 113만 8,000톤의 불덩이로 세례를 주었다. 이것은 미국이 태평양전쟁 전체 기간에 막강한 일본군을 상대로 사용한 65만 6,000톤의 거의 두 배에 해당한다. 한국전쟁 38개월 동안에 미국이 한반도(주로 북한)에서 사용한 폭탄과 포탄이 49만 5,000톤이니까 연평군으로 쳐서 약 17만 톤, 그러니까 베트남에서는 이 해에 한국전쟁에서보다 6.5배의 ‘초토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
이 기간 동안 미국은 베트남전쟁(라오스와 캄보디아 전선 포함)에서 약 800만 톤의 폭탄을 투하하고 약 700만 톤의 각종 포탄과 로켓탄을 발사했다. 1,500만 톤의 이 폭탄과 포탄은 일본을 굴복시키기 위해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폭탄의 700발 분량에 해당한다. 278-279
1966년 3월 20일 국회가 한국군 파병을 결의했을 때, 두 사람의 국회의원이나마 반대표를 던진 것이 나에게는 한가닥 위안이었다. ..
1966년에서 67년 사이에 국방부는 언론기관의 각부 부장들을 번갈아 사이공에 모셔다가 융숭한 대접을 했다. 국군 파월의 ‘영광’을 현장에서 확인케 하고, “베트남인들이 한국군 파병을 환영하고 한국군인을 사랑한다”는 국내 여론을 만들기 위한 행사였다. 281
뒤늦게 외신 부장들의 차례가 왔다. 1967년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82
또 한 차례 전국 신문의 다른 부의 부장단의 행차 뒤에 외신부장단의 “국비시찰” 여행이 제공되었으나, 그때도 마찬가지로 나의 태도를 전달했다. 이보다 앞서 중앙정보부가 나에게 한 달 정도 사이공 주재 특파원으로 가라고 제의해왔다. 베트남전쟁에 비판적인 내가 “베트남인들이 한국군을 좋아한다”라고 써주면 독자들이 모두 믿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 결국 나는 베트남 땅을 밟지 않았다. 282
1954년 7월,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인민이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승리함으로써 체결된 제네바협정에는 2년 후에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을 통틀어 통일선거를 실시해 통일국가를 건설한다는 합의조항이 있었다. 그러나 2년이 지나갈 무렵, 남베트남 주민들까지도 철저하게 부패한 남베트남 정권을 버리고 호치민과 베트남 공산당에 투표할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1956년 영국 수상 이든에게 보낸 서한에서 “제네바 휴전협정대로 지금 베트남에서 선거를 실시하면 베트남인의 80퍼센트가 호치민에게 투표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프랑스와 미국은 제네바 휴전협정을 파기했고, 약속된 베트남 통일은 백지화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군대 대신 미국 군대가 들어갔다. 인민은 분노했고 휴전협정 준수와 통일선거를 요구하는 대중적 반란이 일어났다. 이것이 이른바 "베트남 사태"의 발단이다. 이 사실을 아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미국정부, 특히 군부는 프랑스를 대신하여 남베트남을 지배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정부와 군부는 물론 '반공성전'의 국군 파병을 부추겼던 언론은 “6·25전쟁의 미국 참전에 대한 보답"을 강조했다. 동양적 윤리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 주장은 수긍할 만했다. 그런데 미국 덕택으로 나치 히틀러의 침공, 점령, 국가 파멸의 위기에서 살아난 가장 큰 수혜자인 영국은 미국의 끈질긴 압력에도 불구하고 전투병력을 단 한 명도 보내지 않았다. 영국 국민과 정부는 미국의 파병 요구를 끝까지 거부했다. 베트남전쟁은 '반공성전'도 아니었고 정의의 전쟁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282-283
여기까지 쓰고 있는데, 베트남전쟁을 주도했던 당시의 '천재 국방장관 맥나마라가 방금 출판된 자서전에서 미국은 "베트남 사태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전쟁 정책은 전적으로 잘못이었다"는 취지의 고백을 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그리고 얼마나 야만적인 '미국식 기독교적 양심' 인가!
베트남 정부는 지난해 6월 22일 베트남전쟁에서 100만 명의 옛 월맹(북베트남) 군인이 전사하고 200만 명의 민간인이 죽었다고 처음으로 공식 통계를 발표했다. 미국의 고엽제 등 화학무기로 200만 명의 불구자가 생겼다고도 밝혔다. 베트남 인민의 이 고통을 누가 보상할 수 있는가?
20년간의 전쟁의 한 책임자가 전쟁이 끝난 20년 뒤에 미국과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는 보도를 들으면서 나는 더욱 마음이 무거워진다. 맥나마라는 베트남전쟁 중 '걸어다니는 전자 계산기'(Walking Computer) 니 면도날 두뇌'니 '천재 전략가니, 그야말로 전지전능하다는 찬사와 아부를 한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사실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베트남전쟁의 세 당사자 중 하나인 북베트남 공산당의 지도부는 차치하고라도, 미국인과 한국인이 '베트콩'이라고 멸시하고 엄청난 폭탄세례를 퍼부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최고 지도부 중앙위원 39명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프랑스와 일본의 지배에 항거해서 총을 들고 싸웠거나, 제국주의, 식민지 권력하에서 형무소를 자기 집처럼 드나든 경력이 있는 베트남의 애국자들이었다. 반면, 우리가 '자유 베트남'이니, '반공주의 사이공 정부'니, '민주주의 방패'니 하면서 미국인 전사자 5만 8,002 명 한국군을 포함한 '반공 동맹군 전사자 5,221명의 목숨과 피로써 도와주려고 했던 남베트남 정부의 100만 군대에는 반불·반일 항쟁의 경력자가 육군중령 단 1명뿐이었다. 대통령 구엔 반 티우는 프랑스 식민지 육군의 중위였고, 수상 구엔 카오키는 프랑스 식민지 공군의 소위였다. 말하자면 베트남 민족을 배반한 베트남판 '친일파'였다. 우리는 베트남의 반민족 분자들을 도왔던 것이다. 이 사실을 전쟁의 천재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몰랐던 것이다. 슬픈 일이다. 미국인과 한국인은 아마 지금도 이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이것이 '베트남 시대' 이고 '베트남전쟁'이다. •『한겨레 21』, 1995.5.4 284-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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