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전환시대의 논리>의 속편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8

진실을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 오랫동안 주입되고, 키워지고, 굳어진 신념체계와 가치관이 자신의 내부에서 무너져가는 괴로움의 고백이었다.  19



4
베트남 35년 전쟁의 총평가

베트남 사태는 그 긴 과정과 종결 형식에서 많은 ‘교훈’을 준다. 그러나 그 교훈을 올라르게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식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 평가와 판단의 토대가 되는 베트남 사태에 관한 편견과 선입관의 배제다. .. 베트남 사태에 관한 보도가 너무도 많앗다는 사실과 너무도 일방적으로 각색되어 전달되었다는 두 사실은 오히려 우리의 판단을 어렵게 한다. ..
둘째, 평가와 판단의 입장이다. 기본적으로 베트남 국민의 역사와 현실적 입장과 이해가 판단의 입장을 결정하는 조건이어야 할 것이다. .. 한국전쟁의 정전(停戰) 방식이나 전쟁 해결 및 한반도 정세에 대한 최종적 판단자는 우리 자신이어야 하는 것과 같다. ..
셋째는, 베트남전쟁의 현대적 성격을 규정하는 노력이다. 그 본질적 성격의 규정이 가능하면, 그 토대 위에서 전쟁의 전체 과정, 각 국면, 그 종합적 종결의 형태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세가 바로 세워질 수 있다.  238-239

제네바협정은 프랑스와 베트남 인민의 ‘적대행위’(전쟁)를 끝맺는 단순한 휴전 절차적 성격이었다.  241

휴전협정의 골격으로 내세운 쌍방의 기본적 해결안을 비교해보면 분명해진다.

사이공 정부 입장
① 북베트남과의 대등한 직접 협상
② 비무장지대의 복원, 남베트남의 영토보유, 남베트남의 불간섭.
③ 북베트남군과 파괴분자(민족해방전선을 가리킴-필자)의북베트남으로의 철수 및 효과적 국제감시.
④ 북베트남군의 철수 후, 그리고 무력활동이 저하한 연후에, 미국과 동맹국 군대의 남베트남 철수.
⑤ 평화 회복 후 남북 베트남 재통일을 위한 남북 베트남의 협의.
(1968.9.4, 사이공 정부가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낸 정치해결에 관한 입장)

민족해방전선의 입장
① 조국독립 · 민주평화·번영 및 궁극적 평화적 통일의 신성한 권리.
② 미국 침략전쟁의 정지, 모든 미국 군대와 그 위성국가 군대의 철수, 군사기지의 철거.
③ 외부 간섭 없는 남베트남 인민 자신에 의한 민족·민주연합정권의 수립과 자유선거를 통한 해결.
④ 외부 간섭 없이 평화적 수단에 의한 남베트남의 협의와 협정을 토대로 한 단계적 재통일의 실현.
⑤ 남베트남이 여하한 군사동맹에도 가입하지 않는다는 보장.(1968.11.3, 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회의 남베트남의 정치해결에 관한 성명」)  249-250

베트남 전쟁은 압도적으로 강대한 군사력과 보잘것없이 약한 인간집단의 싸움이었다. 세계 제1의 군사, 경제, 과학의 총력을 동원한 국까와 그 지원하에 세계 제4위의 군사력을 가진 현지 집단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패배를 당한 전쟁의 최초의 예로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것이다.  263

‘역대의 남베트남 정권은 그 어느 것이건 자발적인 민중의 가치를 못 받고 대중적 정치 토대가 없는 권력이었다. 사이공 정권은 과거에는 프랑스 식민지체제의 계승자였다. 미국의 개입 이후에는 시급히 필욯ㄴ 사회개력은 모두 민족해방전선이 실시했고, 베트남 사회에서 그 사회개혁은 정당ㅎ화될 수 있는 것들이다. 소위 ‘베트남 정부(govermeent og Vietnam)’는 민족해방전선과 도저히 정치적으로 경쟁할 수 없는 성격이었다. 이 사실은 사이공 정부 지도자들 자신이 자인하고 있다.
티우, 키, 키엠 등 남베트남군 최고의 사령관급은 모조리 자기 민족, 국가의 해방, 독립에 반대해서 식민지국가 프랑스 군대의 장교로 싸운 사람이다(노엄 촘스키 교수 증언, ‘베트남 사태의원인, 과정, 교훈에 관한 청문회’ 의사록 p82).’  264-265

사이공 정권과 미국이 남베트남에서 ‘공산주의’라고 단정한 민족해방전선에게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장기적으로 농민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베트남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의 속성은 바로 그 반대 방향을 치달은 것 같다.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그런대로 베트남 인민의 전통을 존중했다. 프랑스에 비해서 미국은 베트남 민족의 전통을 무시했다. 프랑스는 미국보다 가난했다. 미국의 경쟁력이 프랑스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강대할수록 그 물량적 중압과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눌려 베트남 사회의 고유 윤리는 붕괴해버렸다. 미국인은 동양인 특히 그들의 문화와 이질적인 베트남의 불교적 생활양식, 가치관을 멸시했다. 베트남의 불교도에게는 독재, 탄압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미국이 베트남의 파괴자로 비친 것이다(트리 쾅 僧, War, Crimes and the American Conscience, Erwin Knoll엮음. p133~134).’  277-278

네덜란드의 저명한 외과의사인 아르츠(Harold Arts) 붜의 남북 베트남 방문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1972년 8월 북베트남 방문과 73년 초의 남베트남 방문 기간중 의료 관계 사업과 지방을 조사한 결과 남베트남 정부는 국민의 의료복지에 대해서 북베트남 정부보다 훨씬 성의도 관심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북베트남에서는 인구 7,000명에 유자격 의사 1인꼴인데, 남베트남에서는 인구 5만 명에 1인꼴이다. 그나마 돈입 없는 사람은 혜택조차 받기 어렵다. 남베트남에서는 전쟁 그 자체로 인한 희생자 수보다 사이공 정부와 미국 정부의 민중의료 복지에 대한 무관심 탓으로 인해 생기는 환자 쪽이 더 많다는, 남베트남 근무 6년 경력의 미국 정부 파견 의사의 결론에 동의한다.’  282



베트남 정전협정의 음미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조인된 베트남전쟁 정전협정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기본적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 첫째는, 협정의 내용 검토와 소위 ‘성패’의 평가는, 기본적으로는 베트남 인민의 입장과 이해의 토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 모든 발표와 보도와 견해가 미국의 그것으로 편향해 있는 우리나라에서 이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
둘째의 인식은, 이 협정으로 끝맺은 전쟁이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 베트남전쟁은 본질적으로 식민지 민족의 해방, 독립투쟁이라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이 기본적 사실의 인식을 거부하거나 고의적으로 왜곡해서 반공 이데올로기에 뜯어맞춘 결과가 베트남 민족 자체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국제전쟁으로 만들어버린 비극화의 원인이다. 이 인식의 결여는 우리에게 가장 위험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에 관해서도 정확한 판단을 그르치게 한 주요한 원인임을 늘 다짐해야 한다.
셋째의 인식은, 베트남전쟁의 역사적 파악이다. .. 이 협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30년전쟁’이라고 하는 베트남 인민과 외세와의 관계와 그 성격을 인식의 바탕에 깔아야 한다.
베트남 인민은 제2차 대전이 끝나자 식민지 재정복을 위해서 되돌아온 프랑스의 40만 대군과 만10년간의 민족해방 독립전쟁을 계속해 승리했다. 이것이 1954년의 제네바정전협정으로 끝맺어지는 독립전쟁이다.
식민지 민족의 염원을 이해하지 못한 미국은 베트남 인민의 승리를 원치 않고 50년 1월에 이미 프랑스 베트남군에 대한 군사지원을 시작했다. 이유는 베트남 인민(당시는 북도 남도 없었다)의 해방 · 독립운동 지도자가 호치민이라는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제네바협정 체결 이전에 미국이 프랑스에 제공한 군사·경제원조는 30억 달러에 달했다. 뿐만 아니라 반공 이데올로기밖에 없던 덜레스 미국무장관이 이끄는 미국 정부는 프랑스가 베트남 인민과 정전을 맺는 것을 방해했다. 하지만 이에 실패한 미국은 제네바협정의 수락을 거부하고, 협정 조인 2년 후인 1956년 7월로 규정한 남북 베트남 총선거 실시를 유산시켰다. 제네바협정은 전쟁행위를 끝내기 위한 방법으로서'일시적인 군사분계선을 설치했다. 이 17도선을 항구적인 국경선으로 베트남의 분할을 고정화하는 데 미국은 큰 역할을 했다.
베트남 인민의 대불(佛) 식민지전 승리의 결과로 획득한 통일총선거가 미국과 그 후견을 받은 고딘 디엠 정권에 의해서 거부되고 국토 분할이 항구화함으로써 세 가지 사태가 생겨났다. 첫째는, 통일이 거부된 베트남인의 미국에 대한 증오감이 조성되고, 둘째, 미국에 의해서 반공만을 명분으로 하는 정권이 세워지고, 셋째, 탄압·부패와 봉건적 사회제도에 항거하는 민중반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미국 군부는 이 단계에서, 1965년 2월 5일 통킹만 사건이라는 것을 조작해 소극적 개입에서 전면적 군사개입을 개시했다. 남베트남의 모든 문제가 북베트남의 침략에 의한 것이라는 선전과 함께 통킹만 사건과 미국 군사개입 이후의 베트남전쟁 8년사의 진상은 1971년 봄에 이르러 세계에 폭로된 이름바 ‘미국 국방성 베트남전쟁 관계 비밀문서’가 밝혀준 그대로다.  284-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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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는 실감이 나질 않아."  9


여행할 때, 배낭을 메고 길 위에 섰을 때, 낯선 것들과 조우할 때, 그 설렘. 아무래도 그것이 내게는 '살아 있는 실감'에 가장 가까운 감각이었다.  10


'생활인'인 나에게 충실하기 위해서는 내 방식의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많이 온다. 그리고 나이를 먹을 수록, 현실에 대한 내 책임이 더 늘어날수록 그 순간은 더 자주 찾아올 터였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현실과 꿈이 공존하는 방법을, 핏줄에 부는 바람을 안고 생활인으로 사는 방법을, 먹고사니즘과 '내 방식의 행복'이 함께 손잡고 이인삼각으로 비틀거리며 걷는 방법을.  14


여행과 일상의 중간.  21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마흔이 되고 싶다.  37


"평범하게 사는 게 어떤 건데? 먹을 것, 잠잘 곳, 놀 곳, 섹스 상대. 이거 말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뭐가 더 필요한데?"  111


"한국 사람들 늘 그러잖아. 뭐하지? 뭐해야 되지? 안절부절."

왜 시비냐고 버럭 하려다가 참았다. 저날 밤 톰과의 대화에서도 느꼈듯, '인생'이라는 마라톤 경기에 대한 한국 사람들과 빠이 사람들의 태도 차이가 너무도 극명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구간 내내 전력 질주를 한다. 빠이 사람들은 경주에 아예 관심이 없어 보인다. 트랙 근처 나무에 해먹 매달아놓고 낮잠 자는 모습이다.

과연 삶이라는 마라톤은 어떻게 달려야 할까. 가장 좋은 건 적당히 속도안배를 하면서 달리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건 반드시 사회 시스템이 받쳐줘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구간마다 물컵이 달리는 사람 수만큼 놓여 있어야 할 거고, 어떤 출발점이나 환경에서 시작하더라도 불이익을 겪지 않도록 규칙과 트랙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아예 중간에 트랙에서 내리는 방법도 있을 거다. 조기 은퇴나 조기 퇴직 같은 것. 그러나 그러려면, 달리는 동안은 얼마나 치열하게 달려야 하는 것일까.  113-114


"속 터져요, 한국 같으면 벌써 다 지었어. 진짜 태국 애들 일 못하는 거 상상 초월이야."

"학비는 받나요?"

"아니, 기숙사까지 전액무료."

"학교 다 지으시면 교장선생님 되시는 거예요?"

"아니, 애들이랑 선생님한테 줄 거야. 나는 다시 딴 거 해야지. 여행 가든가. 내가 건물만 올려 주ㄴ면 그담엔 자기들이 지지고 볶고 만들어 나가야지. 밥도 해먹고, 농사도 지으면서."

"그럼 이 건물을 짓는 특별한 이유라도..."

"놀이."  128


난 그냥 내 고산족 친구들한테 해줄 게 없을까 하다 한번 만들어 보는 거예요. 아, 재미있잖아. 일 잘 안 풀리면 홧술도 한잔씩 마셔가며."

"살아 있다는 실감은 제대로 느끼고 사시겠네요."

도인 아저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129


차가 읍내로 들어서자 기분이 복잡해졌다. 온천이나 폭포 같은 곳은 갈 생각 없다. 그것은 내게 그저 빠이라는 동네의 장식에 불과 했다. 나는 그냥 좁은 타운 안에서도 충분히 행복했고, 만족했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몸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좁은 타운 안에서 한 발짝 나각자, 내가 몸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왼쪽 겨드랑이나 허릿살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보였다. 빠이에 좀더 머무르고 싶어졌다. 좀 더 머무르며, 속속들이 이곳을 느끼고 싶어졌다.

"저 며칠 있다가 방비엥 가는 표 끊었거든요. 이거 찢을까요?"

아저씨는 느릿느릿 대답했다. "빠이, 블랙홀이야. 한번 빠지면 나가기 힘들어. 그래서 바람 불었을 때 얼른 떠야 돼요. 여기가 바람이 잘 부는 데가 아니거든."  130


나이가 먹을수록 설레는 일이 줄어간다. '그런 거 예전에도 봤어.' , '다 아는 거야.' 같은 허세와 교만은 조금씩 느는 것 같은데 새로운 것에 대한 발견과 깨달음의 설렘은 나날이 줄어간다. 나는 돈 뎃의 노을 앞에서 너무도 설레었다. 노을 겉은 거 보고 설렐 줄은 나도 몰랐다. 다시 한 번 그 처음 본 붉은 빛을 보고 싶었다. 한 번쯤 더 설레 보고 싶었다.  216


라오스에서 필요한 것은 '비움'이다.  231


누군가 '라오스에서 뭘 하셨어요?'라고 물으면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다. '기다렸어요.' 내가 기억하는 라오스 여행의 절반 이상은 기다림이다. 그것도 확실치 않은 기다림.  237


지금까지 나 자신을, 특히 여행할 때의 나 자신을 돌이켜 보고 얻은 결론인데, 나는 고생을 싫어하지 않는다. 내 몸과 내 예금계좌와 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히지 않는 한도 내어ㅔ서의 고생이나 소동은 오히려 좋아한다. 무탈하고, 평온하고, 고요한 나날이 계속되면, 재미없다. 나이를 먹고 많은 상황에 익숙해져 갈수록 실수할 일도 잘못될 일도 줄지만, 그만큼 흥분하고 떨리고 가슴 졸일 일도 줄어든다. 그러고 보니 마흔은 '불혹'이했지, 흔들리지 않는 나이. 그 나이에 대해, 하나만 소박하게 바란다. 나는 흔들리지 말고, 내 주위의 공기를 조금씩 흔들려주기를,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을 때는 나 스스로 흔들 수 있는 자유를 잃지 않기를.  264


지금까지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사실 그것들이 알고 보니 내게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었던 거다. 적어도 '행복'을 위해서는 말이다. 그렇다면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들은 과연 무엇일까? 언제 어디서나 나다운 행복을 느끼기 위한 최소공약수는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그렇다. 세상을 삼십 년도 넘게 살아왔건만, 나는 단 한 번도 '행복해지는 법'에 대해 배워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모두들 주변에서 '잘살아야 한다'라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잘산다'는 것은 경제적인 안정과 풍요, 그리고 남들 보기에 번듯한 외적 조건을 갖추는 것. 잘 사는 거, 좋지. 그렇게 살면 참 편할 거다. 거칠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을 거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했을 때 기억과 마음에 남는 건 잘살았던 것보다는 행복했던 것들 쪽인 거 같다.  275


호수를 빙 둘러싸고 울창한 열대 밀림이 우거져 있었다. 날이 흐린데도 물에서는 불쾌한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지독하게 맑은 공기 위로 축축한 밀림의 향기가 가득했다. 아이들은 외국인인 나를 보고 쑥스럽게 웃음을 지어 주었다. 

자, 이제 돌아가자. 어차피 호수에서 굳이 뭘 하겠다고 온 것은 아니니까. 그저 남아도는 한나절과 매너리즘을 쓰임새 있게 버릴 곳이 호수였을 뿐이다.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시간은 자주 버리잖아. 만화책으로, 게임으로, 트위터로, 메신저 수다로. 다만 이번 땡땡이에는 동그란 물, 붉은 진창, 울창한 밀림과 낯선 풀 냄새, 그리고 애물단지 같은 자전거가 하나 있는 거다. 라따나끼리에서 땡땡이는 이런 식으로 치는 거다.  287-288


내가 사는 나라, 얼마 전까지 변두리였다가 신도시가 된 우리 동네에서는 로스(스위스인)의 동네가 꽤나 행복해 보인다고 말한다. 더이상 바랄 것이 없어 보이는 그 부티와 안정감, 우리는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오늘도 그토록 치열하고 시끄럽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막상 그런 '행복'을 손에 넣은 것처럼 보이는 동네 주민은 정작 자기들이 행복을 잃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 땅, 인도차이나의 사람들은 정작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정말 그렇게 마냥 행복할까? 저 부유한 나라에서 온 친구의 말뜻은 결국 이건데, 행복과 소유는 그다지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까 결국 행복은 마음의 문제라는 것, 적어도 인도차이나 사람들은 그 '행복'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것 같다. 낙천적이고, 여유롭다. 정확성이니 효율성 따위에 집착하지 않고 좋은 게 좋은 대로 살아간다. 불교라는 사상적 배경 때문에 현세의 괴로움에 너그럽다. 게다가 최소한의 의식주도 해결하지 쉽다. 밖에서 자도 얼어 죽을 일 없고, 바나나며 망고스틴 같은 과일이 지천이니 굶어 죽을 일도 없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땅의 곳곳에서 욕망의 냄새를 맡는다. 생존과 생리에 대한 기본적인 욕망이 아닌, '소유'를 향한 자본주의적 욕망 말이다. 이런 욕망은 아주 쉽게 부도덕 및 몰양심과 결합한다. 나는 그것을 내 나라에서 징그럽게 많이도 보아왔다. 그리고 불행히도, 나는 이 땅에서 그런 '징후'를 몇 차례나 보고 말았다.  297-298


욕망을 가진 자에게는 그 욕망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와 장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좀더 노동과 대가의 의미를 제대로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착취당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저 얻는 것도 아닌 제대로 된 대가.  298


솔직히, 도시는 편하다. 나는 도시의 그 컵라면 같은 편리함이 그리웠던 거다. 오지에서 그렇게 행복하다고 느꼈으면서도 말이다.  318


미인이란 상대적 희소성에 대한 동경의 산물이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거 참 허무한 건데.  364


만일 한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아마 물이 넘칠 기미가 보이는즉시 동네 사람들과 애꿏은 군인들이 총동원되어 물을 퍼내고 둑을 쌓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달랐다. 세계적인 유산 앙코르와트 해자의 물이 불자, 씨엠립 주민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곳에서 뜰채와 어망과 낚싯대를 들고 고기를 잡고 계셨다. 

같은 지구, 같은 아시아인데도 이드로가 우리는 삶의 속도와 리듬이 달라도 많이 다르다. 우리는 내일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둑을 쌓는데, 이들은 오늘의 만복과 행복을 위해 고기를 잡는다. 왜냐고? 우리는 내일의 행복을 대비하지 않으면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수 있다. 이들은 그냥 살아가도 먹을 것, 잘 자리는 생긴다. 우리는 죽어라 쉴 새 없이 손을 놀려야 겨우 1년에 한 번 추수하는 쌀, 이들은 두 번도 거두고 세 번도 거둔다. 당연히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는것 아닐까. '저러고 사니까 이렇게 못살지'도, '아, 왜 우리는 이렇게 찌들고 각박하게 살아야 하나'도 아닌 거다. 그녕, 다른 거다. 틀린게 아니라, 다른 거. 게다가 이들은 윤회를 믿는다. 이들에게 진짜 미래란 10년 뒤, 20년 뒤 따위가 아니라 다음 세상일지도 모른다. 하루하루를 착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어쩌면 이들에게 진자 미래를 대비하는 방식일 수도 있는 거다. 

그러나 이 '다름'에 조금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정말 그것으로 족하냐고, 그래도 되는 거냐고. 아이들을 보았을 때였다. 현실의 언저리만을 맴돌며 '썸말로이'를 외치는 씨엠립의 아이들을 말이다.  403-405


이 영악하기 짝이 없는 꼬마 사업가들은 과연 어떤 배경으로 탄생하게 되었을까? 이런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킬링필드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어요. 그 당시에 가장 먼저 숙청당한 사람들이 바로 지식인이랑 자산가였거든요. 캄보디아 사람들 아직 은행 잘 안 믿어요. 은행에 저축하는 대신 금을 사서 집에다가 묻어두죠. 그러니까 아이들 학교 보낼 필요성도 못 느끼는 거죠. 가르쳐 봐야 잡혀가서 죽기나 할 테니까요. 그냥 돈이나 버는 게 훨씬 낫다는 거예요. 게다가 애들이 좀 잘 버나요. 그래서 애들 내보내서 돈 벌어오라고 시킨 다음에 부모들이 도박이나 술로 탕진하는 경우도 많아요."  411


장기 여행자들을 보면 두 종류다.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나온 사람들, 아예 처음부터 안정된 생활 같은 게 없는 사람들, 카오산에서도 두 종류로 보인다. 처음부터 안정된 생활 같은 게 없는 사람, 또는 카오산에서만큼은 안정이고 나발이고 버리고 싶어 보이는 사람.  425


시간은 유한한데 지구는 너무 넓다. 그리고 갈 데가 너무 많다.  429


서른다섯, 인생에서 가장 뜨겁고 치열한 나이의 한여름, 그해의 여름, 나는 행복해지겠다며 조금은 억지를 섞어 이렇게 뛰쳐나왔고, 그렇게 긴 여름을 보내며 많이 행복했으며, 몰랐던 것 한 가지를 배웠다. 자잘한 불편과 결핍은 사실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 세상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최소 공약수가 존재한다는 것. 그것을 찾아내고 실천할 수 있는 한,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이 최소 공약수들이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것이 덧없고 시시해지고, 무언가에 구속당하고 싶고, 낯익고 좁은 것들 사이에 있고 싶어질 때가, 언젠가는 올지도 모른다. 그날이 올 때를 나는 꿈꾸려 한다. 좀 더 나이가 들고 성숙한 내가, 세상의 한 구석에 정착하여 그곳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 모습을. 씨엠립에서 꿈꾸었던 모습일 수도 있고, 다른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냥 아줌마가 되어 가정에서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 사람 앞일이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어쨌든, 내 인생의 가을은 그런 모습으로 찾아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나는 열심히 행복하려 한다.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더 많은 여행을 다니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책을 읽을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욕망을 '성취'라는 이름으로 풀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행복하게, 내 인생의 남은 여름을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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