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위한 도서이다.
간결하고 입문서로서 출간된것같다.
그렇지만 생각해야 할 것들에 대한 핵심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깊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일까. 우리에게 생각의 깊이를 더하게 하는 것은 책에서 말하고 있듯이 '철학은 대답이기 전에 물음이다.(9)' 바로 물음즉 질문이다. 스스로 질문들을 해 나갈 때 의문점과 미심쩍은 것들이 해소되면서 하나의 깊은 생각이 나오게 된다.
이 책은 청소년에게 뿐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생각하고 고민해 볼 점을 시사하고 있다.
책은 서양 철학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철학자 5명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핵심적인 사유거리를 지적해주고 있다.
매우 짧은 내용의 책이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핵심을 말한다.
1. 플라톤 할아버지의 이데아
플라톤
진정한 존재는 이 세상 너머에 있다는 이데아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이데아는 서양 철학에
서 생각의 기본이 되었습니다.할아버지는 지금으로부터 약2,400년 전에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입니다.
어험, 안녕한가. 내가 플라톤이라네.
이데아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제부터 여기에 도형을 몇 개 그려 볼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게.
자, 어느 것이 삼각형인가?
물론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네.
그렇지만 사실 이것은 삼각현이 아니라네.
삼각현은 내각의 합이 180도여야 하거든.
그런데 이것은 그렇지 않지. 살짝 일그러져 있으니까 말이네.
그래도 우리는 삼각형을 원이나 사각형과 구별할 수 있다네.
전부 지워 버렸네.
좀 전까지 있었던 삼각형, 원, 사각형은 인간의 역사에서 아니,
우주의 역사에서 사라졌다네.
두 번 다시 똑같은 것은 그릴 수 없지.
다시 한 번 삼각형을 그리겠네.
아까의 삼각형과는 상당히 다르지.
게다가 이것도 정확히는 삼각형이 아니라네.
그래도 역시 이것은 원이 아니라 삼각형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왜 아까 전의 그림도 이 그림도 삼각형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지 알겠나?
그 이유는 우리가 삼각형이란 무엇인지, 원이란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네.
우리가 알고 있는 진정한 삼각형의 모습, 그것이 이데아라네.
아까 그렸던 삼각형이나 원이 이제는 어디에도 없듯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은 언젠가는 없어진다네.
그래도 이데아는 없어지지 않지.
그래서 이데아야말로,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라네.
2. 데카르트 아저씨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 아저씨는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까지 살았던 프랑스의 철학자입니다.
무엇이든 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던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벗어나 새로운 철학의 출발점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원리를 찾았습니다.
안녕? 침대에서 인사해서 미안. 나는 데카르트란다.
잠꾸러기로 보일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어.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은 무엇일까? ...
그래! 의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되겠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의심하고 의심스러운 것들을 자꾸자꾸 없애 나가면 돼.
그럼 의심스럽지 않은 것, 확실한 것만 남을 테니까.
먼저 인간의 감각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오해나 착각을 잘하지.
물이 든 컵에 넣은 빨대는 꺽어져 보이지만 사실은 꺾어진 것이 아니야. 먼 곳에 있는 것은 작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작지 않아.
인간의 감각이란 참으로 신기하네!
우리 주변의 세상은 어떨까?
이 세상이 만약 꿈이라고 친다면 역시 신기하지.
왜냐하면 꿈이란 것은 깨어난 다음에야 비로소 꿈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니까.
나는 지금 침대 위에서 이것저것 헤아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쟁터에서 잠을 자고 있는지도 몰라.
그럼 수학은 어떨까?
나는 수학이야말로 학문의 기본이라고 생각해ㅐ.
왜냐하면 정말 확실한 답을 알 수 있기 때문이지.
1 더하기 1은 2. 정확히 맞잖아.
그런데 어쩌면 전지전능한 신이 인간을 속여서
1 더하기 1이 사실은 3인데 2라고 생각하게끔 한 것은 아닐까?
아니, 물론 신은 그런 일을 하지 않으리라고 믿지만....
그래도 의심해 볼 수는 없겠지.
아, 모든 것이 다 불확실하군. 완벽하게 확실한 것은 없을까?
그런데....
모든 것이 다 불확실한 이유는 내가 의심하기 때문이지.
여기서 내가 의심한다는 사실만은 틀림없어.
그렇다면 의심하는 나는 분명히 존재하는 거야.
나는 의심한다.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칸트 선생님은 200년쯤 전에 살았던 독일의 철학자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비판 철학을 내놓았습니다.
나아가 인간이 도덕적 행동을 할 때 자유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했습니다.
처음뵙겠습니다. 제가 칸트입니다.
아! 5시입니다. 일을 마쳐야겠습니다.
저의 좌우명은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것이랍니다.
제가 살던 마을의 사람들은 제가 딱딱 시간 맞춰 산책하는 모습을 보고 몇 시인지 알았을 정도입니다.
오늘은 버스 안에 사람이 참 많습니다.
경우 앉았습니다. 휴우.
아! 할머니 한 분이 오십니다. 자리를 양보해야겠습니다.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승객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제발 발을 밟지 말아 주.... 아야야야!
휴, 겨우 도착했습니다. 완전히 녹초가 되었습니다. 만약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면 앉아서 올 수 있었을 텐데...
그래요, 그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양보했습니다.
제가 자리를 양보한 까닭은 '자리를 양보하시오.'라는 소리가 드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귀로 들은 것이 아닙니다.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그 소리는 '... 하다면 ... 하시오.'처럼 조건이 붙어서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면 자리를 양보하시오.'라고 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리를 양보하시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대꾸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저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명령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는 스스로에게 명령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욕망과 감정에 지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참아야만 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유입니다.
4. 마르크스 선배의 노동의 소외
마르크스 선배는 19세기 독일의 철학자입니다.
이제까지 다른 철학자들은 세상이 이렇다 저렇다 해석만 했는데 마르크스 선배는 세상을 바꾸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확신했습니다.
노동은 사람의 본질을 표현하는 창조적인 과정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노동을 하고도 자신이 생산한 것을 갖지 못합니다. 즉,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 선배는 노동자가 노동의 소외를 겪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안녕. 내가 바로 마르크스야.
오늘 나는 일하러 왔어.
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네. 슬슬 일을 시작해야 겠다. 상품을 진열하자. 부지런히 부지런히.
"어서 오십시오." 돈도 받아야 해. "고맙습니다. 또 오십시오."
일한 대가로 돈을 받았다.
시간당 4,000원이고 여덟 시간 일했으니 32,000원이야.
자, 이제야 비로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응? 뭔가 이상하다.
일을 하는 동안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니었던가?
그래도 일을 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중요한 문제잖아.
알았다!
내가 일을 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나의 본질을 조금 잘라서 파는 거야.
그래서 일을 하면 싫증이 나고, 일을 마치면 나 자신을 되찾는 이런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지.
이런 사회는 반드시 바꿔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더 공부해야겠다. 자, 힘내자!
5. 사르트르 형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사르트르 형은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은 현대에 사르트르 형은 지금까지의 철학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질이 똑같다고 보는 시각을 버렸습니다.
사르트르 형은 인간의 본질보다도 실존, 즉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되찾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생각했습니다.
이야, 반가워요. 제가 사르트르예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드리지요.
여기 연필 한 자루 있어요. 연필은 무엇을 쓰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졌지요. 이것이 연필의 본질이에요.
쓰기 위한 도구로 길이와 굵기와 무게와 재질이 정해졌어요.
그리고 그와 같은 종류의 연필이 많이 만들어져서 그중 하나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만약 이 연필이 초콜릿으로 만들어졌다면 어떨까요?
먹으면 맛있기야 하겠지만 쓰기 위한 도구로는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음, 역시 맛있네요.
연필의 크기가 이렇게나 거대하다면 쓰기 위한 도구로는 역시 도움이 되지 않지요.
만약 신이 있어서 이러저러한 존재라고 본질을 미리 정해 놓았다면 인간도 연필과 다를 바 없겠지요.
하지만 신은 어디에도 없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태어난 의미는 없는 것일까요?
그래요. 우리는 아무 의미도 없이 태어나 버렸어요.
태어난 의미가 없다면 스스로 만들면 돼요.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어요. 먼저 나 자신이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있지요.
그 다음에 우리는 날마다 여러 가지를 결정하고 선택함으로써 스스로를 만들어 가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신존 자체가 의미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이제 이해가 되나요? 그렇다면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