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근대(Modern times) 철학
- 정신적 변혁
근대 철학이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정확한 날짜와 그 시작의 출발점을 제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중세와 근대의 뚜렷한 구분은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카르트(1596~1650)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초는 스콜라철학을 비판한 이탈리아 인문주의와 유럽의 르네상스 철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근대적 사유의 출현은 17세기 초에야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15, 16세기의 아주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사건이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에 의한 인쇄술의 발명(1450년경), 터키의 콘스탄티노플 정복(1453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1492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1517년), 마젤란으 최초의 세계 일주(1519~1522년: 이 사건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입증했다), 중세의 초국가적인 정치 통일체에서 벗어나 유럽이 국민 국가를 형성한 것 등이다.
요켠대 근대으 근본 사상, 즉 근대 정신의 특징은 진보 사상이다. 무엇을 향한 진보인가? 근대가 진행되는 동안 두 개의 동인(動因)이 점차 인식이 가능하게 드러나고, 이 두 요소는 다양하게 서로 섞이거나 분리되기도 하며, 또 서로를 비판하기도 한다. 인간성의 완성으로서의 도덕적 진보와 자연에 대한 지배로서의 과학, 기술적인 진보가 바로 이 두 요소이다. 근대의 인간은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자신의 활동성에 힘입어 자신의 책임하에 새로운 정신적 집을 구축하고자 도전한다. 근대의 인간은 새롭게 발견되 무한한 현세에서 새로운 방향 설정의 토대가 마련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의 정신적인 표식(질서 있고 유한하며 조망 가능한 우주와의 조화)과 중세의 정신적인 표식(초월적인 구원)은 새롭게 해석되며, 창조적인 방식으로 다시 수용된다.
중세에는 지식의 대상이 인간이 아닌 인간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책-성경과 그에 상응하는 책들-이었다. 몇몇 예외가 있기는 했지만, 자연이 탐구된 것이 아니라 권위를 가진 텍스트들이 탐구의 대상이 되어 해석되었다. 주석들과 주석에 대한 주석들이 씌어졌다. 스콜라철학에서 지식은 대학에서 의무적으로 읽어야 했던 그런 텍스트 독해가 바탕이 되었다. 논란이 되는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나 공인된 다른 텍스트들보다 훌륭한 해석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었다.
이렇게 책의 권위에 대한 맹신과 단절하고 새롭게 실험적인 방식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갈릴레오 갈리레이였다. 그는 1632년에 종교 재판을 초래한 위대한 저서인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어느 날 베네치아에 있는 아주 유명한 의사의 집에 들렀다. 매우 박식하고 숙련된 그 해부학자의 손에서 어떻게 시체가 해부되는지를 보기 위해 연구자 혹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그 집에 들락거렸다. 이날은 신경의 근원과 그 철발점을 탐구하고 있었다. 사실 이 문제는 갈레노스(고대 그리스의 명의)를 따르는 의사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 사이에서 펼쳐진 유명한 논쟁거리였다. 그 의사는 신경의 주줄기가 뇌에서 출발하여 목을 거쳐 척추로 뻗어 있고, 몸 전체로 가지를 치고 있으며, 또 아주 가느다란 줄기만이 심장으로 뻗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 자리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로 알려진 한 신사가 있었다. 그 해부학자는 이 신사 때문에 이례적으로 그 모든 해부 과정을 아주 세밀하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신경의 근원이 심장이 아니라 뇌라는 사실을 이제는 확신할 수 있는지 물었다. 이 신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아주 명백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신경의 근원지가 심장이라고 분명하게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가 없었다면, 당신이 옳다는 것을 일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갈릴레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무시했다. 순수하게 근대의 자연과학을 양적이며, 측정 가능한 운동 관계로 규정한 그는 "자연과학에서는 추론이 참되고 필연적이어야 하며 1,000명의 데모스테네스와 1,000명의 아리스토텔레스도 사실과는 다르게 거짓된 것을 참된 것으로 만들 수 없다"고 했다, 갈릴레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은 가능한 자연 경험 전체를 이미 포함하고 있다'는 중세적인 확신에 따라 행동했다면, 이전 것보다 성능이 좋은 망원경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 망원경으로 어떤 책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목성은 행성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 행성들은 목성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1553년에 르네상스의 철학자 마리우스 니촐리우스는 스콜라철학의 경직된 자연과학 개념들에 대항하여 '스승의 말에 서약하는 의무'에서 벗어나, 온갖 종류의 '교조적 제사장들'과 '남의 의견만을 추종하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노예근성의 천민들'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도살장'에 끌려가지 않는 그런 참된 철학을 추구하겠다고 공언했다.
니촐리우스는 진리의 보편 원리들 중 하나는, 해당 대상의 진리와 그 본성이 요청하듯이 "모든 사물에 대해 사유하고 판단함에 있어서 자유롭고 선입관을 갖지 않는 것이다. 이는 참다운 철학을 위해 힘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든 철학적 분파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누구나 어떤 사태의 진리를 판단함에 있어서 그 판단 결과가 자신에게 긍정적으로 현상하건 부정적으로 현상하건 간에 그것을 최종적으로 자유롭게, 제약 없이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그가 어떤 명성에, 그것도 아주 유명한 사람의 가르침에 근거한 명성에 얽매이거나 제약될 경우, 그런 자유로운 판단이 방해받을 것이다. 중요한 사태에 대해 판단하고 입장 정리를 할 때, 권위나 이미 주어진 견해에 의지하기보다 합리적인 논증에 의지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일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진리 추구에 있어서나 숨겨진 연관성을 추적해 가는 데 있어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과거나 현대의 다른 어떤 저자들보다 자신의 오감, 지성, 사유, 기억, 사물 들과의 직접적인 교류와 경험 등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그가 죽은 해에 출간된 저서에서 고대로부터 내려온 중세의 세계상을 무너뜨렸다. 지구는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지구는 다른 행성들과 같이 하나의 행성에 불과하다.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돈다. 지구는 구형이며,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물리학과 프톨레마이오스적인 체계의 권위로 거의 2,000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지구 중심적인 세계상은 태양 중심적인 세계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코페르티쿠스적인 전황은 '세계의 무한성과 무한한 태양계들의 존재'라는 지오르다노 부르노의 세계상에 의해 다시 한번 첨예화된다. 이 무한한 세계에서는 지구나 태양이 중심일 수 없다. 이 세계는 도처에 세계의 중심이 잇으면서 동시에 그 중심이 어디에도 없다 이제 세계는 지금까지 신에게만 부여되었던 '무한성'이라는 속성을 갖게 된다. 열린 우주라는 관념은 고대와 중세의 폐쇄된 세계상을 완전히 파괴시켰다. 부르노는 이런 엄청난 도발 행위로 인해 1600년 로마에서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결국 산 채로 화형당해 정신의 자유를 위해 순교했다.
- 르네상스 철학에서 계몽으로
이탈리아 인문주의는 1350~1460년 사이에 중세 스콜라철학에 맞서기 시작했다. 영원한 진리를 주장하는 형이상학, 즉 존재의 보편적 구조에 대한 학성을 거부하며, 구전되거나 문자로 전승된 인간의 생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관심사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인문주의자들은 언어의 기능과 변화에 대해 통찰함으로써 인간이 역사적 존재임을 보이기 위해 고대의 텍스트에 다시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의 방법은 대상 혹은 존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서부터 출발했다(로렌초 발라). 박식하기보다는 더 훌륜하게 되는 것이 인문주의의 목표이다(페트라르카).
이탈리아 인문주의에 의해 처음 시작된 르네상스 철학은 통일적인 모습을 띠지 않았다. 이 철학은 전 유럽으로 전파되어 종교 개혁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형이상학에 다시 문호를 개방한 르네상스('고대의 부활'이라는 의미) 철학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전체 유산과 로마의 철학을 되살린다. 거의 1,000년이 지난 후 플라톤의 아카데미가 다시 부활하였다(1440년 플로렌츠에 생겨나 플라톤 저작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함). 인간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우주의 위계질서에서 인간은 동물과 신 사이의 어떤 중간 지점에 자리한다. 인간 존엄의 핵심은 자유이다. 인간에게 이러한 자유가 보장될 때, 예술적인 창조 행위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가고, 규정하며, 확고한 입지를 세워 나갈 수 있다. 행위가 존재를 규정한다(피코 델라 미란돌라).
16세기의 르네상스 철학은 다양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자연철학 : 주술, 연금술, 점성술과 같은 상징적 지식은 자연의 완성을 돕는다(파르셀수스 폰 호헨하임). 자연신비 : 자연은 질적인 특서들로 가득 차 있다. 즉 자연은 신의 징표로서, 수학적으로 측정되고 양화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이해의 방식으로만 판독 될 수 있는 '근원적인 정령들'로 가득 차 있다(야콥 뵈메). 회의주의 : 고대의 회의주의 전통에서 유래하는 자유로운 비판 정신이 나타난다(몽테뉴). 법철학 : 근대적인 자연법(인간의 본성에서 따르는 법)과 국제법의 토대가 마련되었다.(유고 그로티우스).
이와 병행하여 스콜라철학의 중세적 전통도 스페인에서 계승되었다(프란시스코 수아레즈).
세계 전체는 점차 인식하는 주체가 조종할 수 있는 객체로 되며, 인간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대상으로 파악된다. 진보적인 세계 인식과 세계 개발의 올바른 방법이 모색되었다. 갈릴레이는 자연을 측정할 수 있는 수학적인 프로그램을 이용함으로써 영향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혁명을 이뤄 낸다. "측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측정하고, 측정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측정할 수 있게 하라" 갈릴레이는 이미 바로크 시대에 17, 18세기의 역학적인 사유와 철학을 위한 기초를 세웠다.
두 개의 인식 방식, 합리론과 경험론은 17세기와 18세가 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합리론은 이성에, 경험론은 경험에 바탕을 둔다. 진리의 모델을 수학에서 취하는 합리론자들은 감각적 지각과는 무관하게, 이성이 독자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순수하게 개념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경험적 사실에서 출발하는 경험주의자들은 이 사실들이 감각적 지각을 통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현실성이 없거나 인식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어, 합리론자인 데카르트에 따르면 신(神) 관념과 같은 본유 관념들이 존재한다. 본유 관념에 기초한 순수한 합리적 인식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경험론자인 로크에게 있어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그에게 있어서 영혼은 우연적인 경험에 의해서 비로소 채워지는 백지(tabula reas)이며, 본유 관념이란 잘못도니 가정에 불과하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볼프 등은 이성의 보편적 지배라는 사상을 대변하는 합리주의의 위대한 형이상학적 체계의 대표자이다. 데카르트는 인식의 수학적 확실성을 원한다. 엄격한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진 그에 따르면, 순수하게 정신적인 사유의 세계와 순수하게 물질적인 외부 세계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 영혼이 없는 물질세계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거대한 기계 장치이다. 따라서 이 물질 세계는 정확하게 계산될 수 있고 지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동물은 영혼이 없는 유용한 기계이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범신론(자연 전체를 신의 형태로 간주하는 이론)을 합리주의적으로 기술할 때 유클리드의 기하학에 따른다. 그는 정의와 공리에서 출발하여 증명 방식에 따라 모든 명제들을 연역한다. 라이프니츠의 목표는 철학에 있어서 일종의 대수학을, 즉 모든 질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에도 타당한 보편 수학을 찾는 것이었다. 독일의 가장 영향력 있는 계몽주의 철학자인 볼프는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형이상학을 체계화한다. 이성과 덕 그리고 행복은 인간 세상에서 확대되어야 한다.
경험론의 대표자이자 부분적으로 반형이상학적인 입장을 취하는 철학자로는 베이컨, 로크, 버클리, 흄 등을 들 수 있다. 베이컨은 모든 학문들을 방법론적으로, 포괄적으로 개선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편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로크는 경험 개념을 탐구한다. 그의 으뜸가는 경험주의적인 명제는 다음과 같다. "감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오성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버클리에게는 경험만 존재한다. 그는 경험 외부에 있는 물질세계의 존재나, 경험과 무관한 물질세계의 존재를 무의미한 중복으로 거부한다. 회의주의자 흄은 일상 경험의 기본 구조, 즉 인과율의 근본 구조가 불확실한 믿음이나 사변적 해석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사건들의 시간적 전후 관계만 지각할 수 있을 뿐, 그 원인을 지각할 수 없다. 우리는 관찰된 시간적 전후 관계를 따져 곧바로 그 이유를 추론하는 잘못을 범한다. 인과율을 경험에 의해서 더 이상 검증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사태에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17세기, 특히 18세기는 계몽주의시기이다. 계몽주의는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에서 1789년 프랑스대혁명에 이르는 기간이며, 또 바로크시대에서 로코코시대로의 발전기이다. 18세기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합리주의적 사유 양식과 경험주의 적인 사유 양식으로 특징지어지는 계몽주의에 어느 정도 동참하고 있다. 물론 비판적인 거리를 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시대에 세상의 표정은 밝다. 이성은 세상을 밝혀 준다. 태양은 밤을 정복한다(모차르트의 '마술 피리'). 칸트는 다음과 같은 모토를 들고 나온다. "네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몽이란 인간이 자신의 과오로 인한 미성숙 상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국가와 교회의 권위와 제도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커지고, 권력 분립과 소수자의 권리가 요청된다(로크, 몽테스키외). 볼테르는 "파렴치를 없애라!"는 구호와 함께 교회의 폐지를 외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성 종교(이신론)는 정중하게 신을 세계 밖으로 내몰아 홀로 머물러 있게 한다. 이 시기에는 보편적인 국민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계몽주의 시대는 자연에 대한 인식과 지배를 통한 인류의 진보라는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과학을 통한 해방!'은 프랑스 백과사전파(디드로)의 모토이다. 스스로를 자연의 지배자이자 소유자로 삼는 낙관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진보 사상은 도덕적 진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레싱은 자신의 저서<인류의 교육>에서 계몽이 주도하는 시대가 왔으며, 계시 진리(신약과 구약) 대신에 생동적인 이성 진리가 자리 잡는 시대가 왔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런 시대에 인간은 "선한 것을 행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의적인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가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경제 발전을 주도하는 부르주아 계급에서는 유용성(보상)의 관점이 팽배해졌으며, 돈이 아주 중요한 가치를 지니기 시작한다.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며, 실용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대중 철학이 관심을 끌게 되었다.
계몽의 최고봉에 위치한 칸트의 윤리학은 인간의 존엄을 강조한다. 윤리적 행위에는 "스스로에게 부여한 법 이외에는 어떤 다른 법에도 복종하지 않는 이성적 존재의 존엄이라는 이념이 바탕이 된다" 유용성을 중시하는 관점에서는 인간의 존엄이 도외시된다. 인간의 존엄은 어떤 것에도 유용하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엄은 도구화될 수 없으며,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히려 목적 그 자체이다. 즉, 인간의 존엄은 다른 어떤 높은 목적에 의해 상대화되거나, 배제될 수 없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로서 존엄을 지킬 의무가 있다. 이는 인간이 존엄성을 가지고 잇기 때문이라기보다 인간에게 존엄성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단순히 수단이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해서는 안 되고, 언제나 목적으로 존중해야 한다.
칸트는 수학과 자연과학에 방향을 맞춘 자신의 인식 이론에서 영혼, 전체로서의 세계, 신(예를 들어 신의 존재 증명) 등에 관한 초경험적인 지식을 다루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의 종언을 고한다. 이제 이러한 형이상학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형이상학의 대상들은 인식의 한계를 초월한다. 이제 남은 것은 언제나 단편적일 수밖에 없는 경험 과학적인 탐구이고, 자신의 무지에 대한 겸손한 인식이며, 철학적인 세분화이다.
- 독일 관념론의 시기
19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독일철학은 전성기를 구가한다. 문학과 철학은 상호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양자 사이에 엄격한 구분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는 개인의 운명을 통해 철학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중요한 철학서로 읽힐 수 있다. 마찬가지로 헤겔의 <정신현상학>도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수준 높은 문학 작품이다. 신인문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 그리고 독일 관념론은 대개의 경우 문학과 철학에서 동시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다양한 발전 단계를 거쳤다.
신인문주의는 세 번째 인문주의로서 고대 연구에 몰두한다(인문주의의역사는 고대의 인문주의, 르네상스 인문주의, 신인문주의로 구분될 수 있다). 신인문주의의 목표는 이상적인 인간성을 장려하는 것이다. 신인문주의의 개척자인 빙켈만은 이성을 강조하는 합리주의적 계몽의 비판가로서 그리스의 조형 예술에서 아름다운 인간의 영원한 이상을 이끌어 낸다. 모든 열정은 억제되고, 육체와 정신의 완전한 조화가 현실에서 실현된다("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대성"). 헤르더는 역사를 인간성이 진보해 가는 과정으로 생각한다. 문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성을 갖도록 하는 교육"이다. 훔볼트 역시 인간의 세계 연관성을 본다. 그는 전문화된 교육 대신 인문주의적인 교양을 강조한다. 또한 그는 계산적인 오성적 인간 대신 윤리적이고 감성적인 인간을 강조한다.
독일 고전주의에서 괴테와 실러는 장차 실현될 자유롭고 아름다운 인간성에 관한 진보적 이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고귀하다 인간이여,
자비심 많고 선하게 도리지니!
이것만이
인간을 구별한다네,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모든 존재들과." (괴테)
실현 가능한 인간성의 이상에는 자연성과 정신성도 포함된다. 실러는 경향성과 의무가 통일되어 있는 도덕성의 이상을 대변한다(칸트는 경향성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실러와 다르다). 감성적인 것이란 감각적이고 정신적인 힘들을 조화롭게 형성하는 것이다. "감각적인 인간을 합리적으로 만들기 위해 우선 감각적인 인간을 감성적으로 만드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감성적이라는 말은 '이상적인(관념적인)' '고전적인'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내 자신을 내가 현존하고 있듯이 형성함" 이라는 괴테의 교양 이념은 인간의 완서을 추구하는 창조적 행위를 강조한다.
"인간은 주변 여건을 가능한 한 많이 규정하고, 주변 여건에 의해 가능한 한 적게 규정될 때 최대의 공적을 쌓을 수 있다. 전체 세계는 건툭 기사 앞에 놓인 거대한 석재처럼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건축 기사는 우연으로 주어진 이 자연물을 가지고 아주 경제적이고 합목적적으로, 의연하게 자신의 정신에서 나오는 원형상을 만들어 나간다. 우리 밖에 있는 모든 것은 구성 요소일 뿐이며,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만들어져야 하는 것을 만들 수 있게 하는 창조적인 힘은 우리 내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이 힘은 우리의 외부, 혹은 내부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을 만들어 낼 때까지 우리를 쉬게 하지 않고 끊임없이 활동하게 한다."
낭만주의에서 나타나는 철학적, 종교적인 감정 세계와 영혼의 심연에 대한 낭만주의의 탐구는 실플라톤주의와 뵈메의 신비주의 그리고 경건주의와 유사하다. 예술은 고전주의가 추구했던 완성과 조화를 목표로 하지 않고, 오히려 전체 세계를 낭만화하는 과제, 즉 전체 세계를 무한자의 표현이자 의미로 파악하고, 알려진 것에 알려지지 않은 것의 위엄을 부여하는 끝없는 과제를 떠맡고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무한자에 대한 의미와 기호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나는 무한한 세계의 가슴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이 순간에는 세계의 영혼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세계의 모든 힘들과 그 무한한 삶을 마치 나의 삶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는 이 순간에는 나의 육체입니다."
우주는 생동적인 전체이며, 영원한 생성이고, 무한한 영혼이다. 노발리스는 시적인 상상력을 통해 보다 고차원적인 현실을 펼친다. 동경 어린 사랑을 하는 시인에게서는 자연의 가장 내적인 정신이 축제를 펼치며 춤을 춘다. 이에 반해 합리주의적인 자연 탐구자의 손에서 "다정다감한 자연은 생명력을 잃고, 경령만 일으키는 찌꺼기만 남긴다." "내가 바위에 말을 걸면 그 바위는 독특한 너(Du)가 되지 않겠는가?
독일 관념론은 형이상학에 대한 칸트의 거부를 극복하고자 하며, 전체 철학사와 자기 시대의 과학적 지식을 모두 다루며 신인문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 등이 함께 만들어 놓은 지평안에서 근대의 가장 위대한 최후의 체계를 만든다. 가장 위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철학적 개념성과 개념화된 대상성의 완벽한 체계로 완성되어야 한다. 칸트로부터 시작된 독일 관념론의 대표자는 피히테, 셸링, 헤겔이다
피히테는 다음과 같이 결심한다. "나는 자연이 아니라 내 자신의 작품이고자 한다." 노예적 본성(자연)을 지닌 사람은 사물들과 기존의 질서로 이루어진 세계, 즉 유물론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자유로운 사람은 어떤 창조적 정신을 세계의 토대로 간주하는 관념론(이상주의)을 선택하며 비합리적으로 휘둘리는 현상을 자신의 행위를 통해 극복하고자 한다. 활동적이고 자유로우며 자기 자신과 동일한 자아로부터 철학은 출발해야 한다. 자유를 향한 사유 안에서 자신을 규정해야 한다.
셸링은 조기 저서에서 정신과 물질적 자연은 근원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예술을 탐구한다. 예술은 철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정신과 자연의 동일성의 원리를 직관적으로 보여 준다. 예술은 철학을 돕는다. 예술을 통해 자연을 보는 새로운 시각이 가능해진다. "자연은 볼 수 있는 정신이고, 정신은 볼 수 없는 자연이다."
셸링은 후기에 이르러 피히테처럼 순수하게 이성을 수단으로하여 철학적인 자기 정당화와 철학적인 세계 연관성을 추구하려 함으로써 점차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근대적 이성의 전능성 요청이 힘을 잃는 데 기여한다.
헤겔은 '우주의 이성적인 상'을 제시한다. 세계에는 아직 의식되지는 않지만 활동하고 있는 이성이 있다. 이성은 스스로를 인식하는 데 온 힘을 다하며 절대적인 지식을 추구한다. "하늘과 땅 위에서 영원히 발생하는 모든 것, 즉 신의 삶과 시간적으로 행해진 모든 것이 추구하는 것은 정신이 스스로를 인식해 자신을 대상화하고, 자신을 발견해 독자성을 띠며 자신과 통합하는 것이다."
1830년대에 이르러 독일 관념론은 붕괴된다. 베토벤(1827), 헤겔(1831), 괴테(1932) 등이 사망한 해는 독일 관념론이 종말을 고한 해이기도 하다. 괴테는 1825년에 새로운 것이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슬픈 기분으로 과거를 회고한다.
"누구도 스스로를 더 이상 알지 못한다. 누구도 자신의 활동 분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누구도 자신이 가공한 질료를 파악하지 못한다. 이제 더 이상 순수한 단순성이라는 말을 꺼낼 수 없다. 천박한 언행이 범람한다. 젊은이들은 너무 수비게 흥분하며,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든다. 세상 사람들이 경탄하며 추구하는 것은 부와 빠름이다. 철도, 빠른 우편 제도, 증기선, 그리고 의사소통의 모든 가능한 수단들이 바로 교양인드이 원하는 것이며, 이것들은 서로 경쟁함으로써 결국 평범한 수준에 머물고 만다. [...] 우리들은, 아마도 우리들 중의 소수는 그렇게 빨리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대의 마지막 사람들이 될 것이다."
4. 현대(Century) 철학
- 전통과의 단절
19세기와 20세기에는 철학의 세속화 과정이 일어난다. 산업 혁명과 더불어 독일에서는 약 1830년부터 헤겔의 죽음(1831)과 시기적으로 동일하게 사유의 급진적인 현세화가 시작되었다. 세계에 대한 분명하고 총체적인 해석을 제시하고자 한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요구는 점차 의문시되고, 결국 완전히 포기된다. 과학은 철학의 권위로부터 해방되었고, 기술의 성공으로 승리를 더 견고히 했다. 거대한 철학 체계의 시대는 지나갔다.
새로운 과학적인 이론들이 세계상과 인간상에 신기원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진화론과 정신 분석학은 사유를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프로이트(1856~1939)이후 인간의 자기도취적 자기애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과학적인 연구에 의해 세 가지 거대한 모욕을 당해야했다. "나르시스적 자기애가 경험한 첫 번째 모욕은 우리의 지구가 만물의 중심이 아니라 그 크기를 상상할 수 없는 우주의 미미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과학이 이미 이와 비슷한 주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선 이러한 사실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름과 연관되어 있다. 두 번째 모욕은 생물학적인 연구에 의해 인간의 창조적 특권이 무화되고, 인간의 동물적 기원과 본성이 제거 불가능하다고 선언되었을 때이다. 이러한 가치 전도는 우리 시대에 다윈(1823~1913), 월리스와 같은 선구자들의 영향으로 동시대인들의 격렬한 반발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인간의 위대함의 추구는 오늘날의 심리학적인 연구를 통해서 세 번째, 가장 견디기 힘든 모욕을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아는 결코 자기 집의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적인 삶에서 무의식적으로 지나간 정보들에 의존해 있음을 오늘날의 심리학적인 연구를 통해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의 세계 대전, 관청에서 계획되어 공장 일처럼 수행된 대량 학살, 원자폭탄 투하 등은 20세기 진보에 대한 낙관을 중단시켰다. 게다가 20세기 후반부터 환경 위기에 대한 불안이 점점 고조되었다. 20세기의 거대 범죄를 통해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방향설정인 인간의 불가침적 존엄성이 상대화되거나 구속력을 상실하게 되면, 과학과 기술이 야만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경우 모든 기술적인 개선은 그 도덕적 결과가 어떠하든 진보로 간주된다. 윤리적으로 맹목적인 진보 사상의 관점에서 아우슈비츠의 한 사령관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말한다. "트레블린카 수용소보다 더 개선된 수용소가 구축되엇다. 트레블린카 수용소의 10개의 가스실이 200명만을 수용할 수 잇는데 우리는 한 번에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가스실을 지었다."
20, 21세기의 철학은 조망이 불가능할 정도로 입장이 다원화되었다. 고대, 중세, 근대의 사유에는 어떤 연결점들이 있었으며, 그때그때 선호되는 수학, 물리학, 사회학, 생물학, 등이 철학의 모범으로 선호되었다. 넓은 철학적 스펙트럼은 새로운 방법들과 높은 수준의 비판적 반성들, 그리고 세련되고 분화된 이론들을 포함하고 있다. 사실적인 대화이든 가상적인 대화이든 간에 대화 속에서 논증적인 상호 이해를 불가치하게 수용하는 '철학'이라는 개념은 또 다른 의미도 추가하고 있다. '철학' 개념은 온갖 형태의 정치적인 세계관으로부터 광고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한 극단적인 예로, 1980년대에 어떤 자동차 회사는 자동차의 액세서리를 파는 광고를 '철학은 팝니다'로 내보낸 바 있다.
- 19세기 철학
쇼펜하우어(1788~1860)는 정신적인 전복, 곧 형이상학적인 가치 전도를 수행한 철학자이다. 그는 의지를 인식에서 분리시킴으로써 세계가 '의지의 전능한 힘에 의해 움직인다'고 설명하며 '철학의 토대 변화'를 시도한다. 인간과 세계의 가장 내밀한 존재는 비이성적인 무엇, 곧 어두운 충동, 맹목적인 의지이다. 경험적으로 고찰해 볼 때, 인간은 신의 창조물이 아니고, 쇼펜하우어가 추정하는 것처럼 침팬지로부터 유래한다. 세계의 근본 특성은 고통, 부정성, 무의미이다. 보편적으로 의지에 지배받는 것은-특히 성(性)이 그렇다-예술, 연민, 체념 등을 통해서 벗어날 수 있다.
실증주의는 모든 사변이 극복되었다고 생각하며 자연과학적인 사실들을 종합하는 데만 자신의임무를 국한하였다. 출발점은 '실증적인 것'인데, 이것은 실제로 주어진 것, 경험적으로 증명 가능한 것을 가리킨다. 인간의 정신적인 발전은 세 단계, 즉 신학-형이상학-실증주의적인 단계로 진행한다.(콩트, 1798~1857)
영국의 공리주의는 어떤 유용한 것이 최대 다수의 행복을 촉진시키는 한, 이 유용한 것 속에서 인륜적 삶의 계산 가능한 토대를 본다. 행위의 목적은 '더 큰 행복'이다. 낙관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모든 중요한 인간 고통의 원인들은 인간의 노력과 수고에 의해 현저히, 심지어 거의 전적으로 제거될 수 있다,"(밀, 1806~1873)
유물론은 물질적인 것, 즉 정신과 마주하고 있는 자연이 보다 더 근원적이라고 주장한다. 유물론은 '종교 대신에 과학'을, '신에 대한 봉사 대신에 인간에 대한 봉사'를, '인간의 행복을 위한 노력'을 요구한다.(L. 뷔히너, 1824~1899)
사적 유물론은 프롤레타리아 역시 자본가와 동등한 정도로(물론 그 쓰임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자본의 산물, 즉 자본의 '부속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 이유는 이들 둘 다 불변하는 자연법칙처럼 진행하고 있는 경제적인 법칙성에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정신적으로도 의존해 있기 때문이다. 이제 현실의 해석 대신 현실의 변혁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마르크스. 1818~1883)
미국의 실용주의는 사물에 고유한 존재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한다. 현사오가 실재의 구별은 '세계와 인간에 유익을 가져오는 서술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 서술인가'의 구별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론은 도구가 도니다."(제임스, 1842~1910) 영원성에서 미래로 관심이 옮겨 져야 하고, 안정적인 확실성에서 대한 추구는 환상과 개방적인 대안에 대한 요구로 바뀌어야 한다. 따라서 정치적인 관점에서 민주주의는 소유로서가 아니라 과제로서 이해된다.(듀이, 1859~1952)
정신과학의 토대는 생(生)철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정신과학의 과제는 생을 형이상학적인 설정 없이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 출발점은 일방적이고 냉정한 이성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 자신의 정신적인 '대상화'도 포함하는 훼손되지 않은 '온전한 생'이다. 그 목표는 인간의 정신적이고 역사적이며 개별적인 세계에 걸맞는 이해의 기술, 즉 과학적 해석학이다. 자연과학은 자연을 설명하고, 정신과학은 의미 연관을 이해한다. "인간이 활동하는 가운데 자신을 각인시킨 모든 것이 정신과학의 대상이 된다."(딜타이, 1833~1911)
19세기의 후반, 철학사에 이미 등장한 입장들을 새롭게 이해하는 철학 운동들이 나타난다. 그 한 예가 1870년과 1920년 사이에 유물론과 싸우면서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의 인식론적인 해명을 시도하는 신칸트학파이다. 그들의 표어는 다음과 같다. "따라서 칸트로 되돌아가야 한다."(립만, 1840~1912), "칸트로의 복귀는 진실로 진보를 존중하는 것이다. 과학과 철학을 서로에게 도움이 되도록 연결하는 실타래가 다시 연결되었다."(릴, 1844~1924), "칸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를 넘어서는 것이다."(빈델반트, 1848~1915) 두 번째 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세 철학을 혁신한 신토마스주의(신스콜라학파)이다. 교황 레오 13세의 교서 "아에테르니 파트리스(Aeterni Patris)"는 1879년 성토마스의 철학을 카톨릭 교회의 기준으로 발표한다.
니체(1844~1900)의 저서는 서양 형이상학 비판과 도덕 비판의 한 정점을 보여 준다. 그는 형이상학을 있는 그대로의 생을 완성하지 못한 이들의 무능력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본다. "모든 지하 세계(Hinterwelten, 생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들, 예컨대 도덕, 종교와 같은 것들을 니체는 '지하세계' '배후의 세계'등으로 말한다-역자 주)를 창조한 것은 고통과 무능력이었다." 니체는 자신의 현재를 형이상학이 붕괴하는 시기로 진단한다. 최고의 가치였던 것이 평가 절하되었고, 목표는 없으며 신은 죽었다. 무(無)가 신의 자리에 들어선다. '허무주의의 도래'가 앞으로 200년 동안의 역사이다. "코페르니쿠스 이후로 인간은 왜곡된 길로 들어서 있는 것 같다. 인간은 점점 더 빠르게 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그런데 어디로? 무로?" 모든 것은 생명력 넘치는 '미래 인간' '초인' '신과 무를 이겨 낸 사람'에게 달려 있다.
- 20, 21세기의 철학
현상학은 20세기 초반 '세계관 철학'에 대항해서 철학을 엄격한 '순수 현사들에 관한 학문'으로 근거 삼으려 했다. 현상학은 '사태 그 차제로'라는 준칙에 따라 의식 내용의 객관적 본질을 절대적이고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직관하고, 편견 없이 정확하고 완전하게 기술하기 위해 방법론을 발전시킨다.(후설, 1859~1938) 현상학은 현상(Phaenomen)과 본질(Noumenon)간의 전통적인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한다. 현상들 배후에는 형이상학적으로 초감각적인 것들, 즉 초월적인 제2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현상학의 현상들 배후에는 이 현상과 본질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 숨어 있다. 그리고 현상은 처음에 대부분이 이미 주어져 있는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상학을 필요로 한다. 감춰져 있음이 '현상'의 대립 개념이다."(하이데거, 1889~1976)
존재 사유. 딜타이와 후설을 이어 받고 있는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재발견하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는 '존재하고 있음'이라는 말로 우리가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존재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새롭게 제기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의식, 자아, 주체 등으로 말하지 않고 '현존재'로 말한다. 인간적인 현존재는 자기의 고유한 존재와 관계를 맺는 특징이 있으며, 이를 통해 자기 존재는 '실존'으로 규정된다. 초기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1927)에서 존재에 관한 질문을 현존재로부터 제기한다. 이 때문에 현존재와 그 구조 분석이 전면에 등장한다. 현존재는 '세계 안의 존재'이고,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이며, 세계와 관계 맺는 '이해하는 현존재'이다.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 안에서 이 존재에 대해 이해하면서 관계를 맺는 존재자이다." 현존재는 시간 관련성 때문에 '염려'로 특징 지워진다. 후기 하이데거는 우리 시대를 진단하면서 원자 시대라는 말을 한다. 인간은 지배하고 계산하고 싶어 하는 사유 속에 모든 것을 예속시킨다. 현대 기술은 세계 지배를 이루려는 이러한 권력 의지의 승리이다. 기술은 존재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존재가 모든 역사를 가느하게 하는 근거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인간은 이러한 존재 망각을 이야기하는 경우에만 비로소 그는 존재를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존중하게 되고 스스로 근본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 따라서 존재 물음은 사유라는 '세계에 대한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답하는 가운데 땅에서 나오는 것과 이 땅의 인간 현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이 결정된다." 이 질문에는 우리를 마법에 걸린 것처럼 만드는 계산적 사유의 광기와는 다른 사유가 자리한다. 그 대안적 사유는 '의식하는 사유'이다. 이 대안은 더 이상 자의적으로 도출될 수 없다. "여전히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실존철학은 키르케고르(1813~1855)뿐만 아니라 후설과 아이데거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았는데, 더 이상 단순히 사유된 철학에 만족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것은 현실에 낯선 체계 대신 인격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유를, 철학의 현존재 대신 철학적 현존재를 요구한다. 문제는 야스퍼스(1883~1969)의 말처럼, 인간이 자신의 '한계 상황(죽음, 불운, 범죄)' 속에서 타자와의 의사소통을 통해 자기 자신이 되며, 초월적 존재에 이르는 자신만의 고유한 실존적인 도정을 위해 결단한다는 것이다. "실존으로서 우리는 신(초월자)과 관계하며, 이러한 사실은 사물을 암호와 상징으로 만드는 언어를 통해 가능하다." 이와 달라 사르트르는 인간의 완전한 자유에서 출발한다. "나는 무한한 가능성이다." 개별자는 자신을 구상하는 대로 그렇게 존재한다. "인간은 자신이 특정한 목적으로 스스로를 만든 것, 바로 그것이다." 드라마 <악마와 사랑스러운 신>에서 신을 부정하는 실존주의자로 바뀐 괴츠는 신을 찾아다니며 "신은 존재하지 ... 않는다"고 말한다. "이 땅 바깥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인간을 벗어나 있을 가능성은 없다. 거대하고 성스러운 것은 끝났다. 자만심도 끝이다. 인간만이 현존할 뿐이다."
철학적 인간학. 셸러(1874~1928)는 개별 과학의 연구 결과를 활용해 우주에서의 인간의 '특별한 지위'에 대해 여러 분야를 망라하여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무한히 세계 개방적으로 처신할 수 있는 미지수 X 이다." 예를 들면, 겔렌(1904~1976)에게 인간은 동물과 비교해 볼 때 본능이 완전히 발전하지 않은 '결핍의 존재'이다.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인위적인 자연, 즉 문화를 건설한다. 지속적인 사회 제도들이 부족한 본능의 필수적인 보완으로 역할을 한다. 겔렌은 "민족의 제도가 파괴되면 인간에게는 아주 근본적인 불안정, 변종 그리고 혼란이 발생할 것이다"고 했다.
20세기는 언어철학의 세기이다. 언어를 사유의 중심 대상으로 끌어올린 것은 정신과학만이 아니다. 언어 분석철학 역시 '언어적 전환'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언어) 분석철학은 19세기의 실증주의 논쟁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자연과학뿐 아니라 논리학, 수학에 경도되어 있다. 다수의 옹호자들을 가지고 있는 이 철학 운동은 형대철학의 한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 운동은 일종의 언어 비판으로 시작했다.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개념들 간의 관계에서 불가피하게 주자 오류들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이 운동은 "이 오류들을 발견함으로써 인간 정신에 대한 언어의 지배를 깨뜨리고자 한다."(프레게, 1848~1925) 철학의 모든 영역에서 나오는 문제들은 언어 분석이라는 방식으로 해결된다고 한다. 어떤 조건하에서 진술들이 학문적으로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가 제기된다. 초기 카르납(1891~1970)에게 있어서 어떤 명제 안에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무의미한 단어들(절대자, 존재자의 존재, 무)이 들어 있지 않을 때, 또한 그 명제가 문법이나 구문적으로 올바르게 만들어져 있을 때 그 명제는 의미가 있다.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분석철학의 대표자로 간주된다. 초기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논리철학 논고>(192!)에서 철학적인 문제들에 대한 질문이 "우리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그는 의미 있는 언어가 가능하기 위해 만족되어야만 하는 조건들이 무엇인지 묻는다. "철학의 올바른 방법은 원래 말해질 수 있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 즉 자연과학적인 명제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 따라서 철학과 관계가 없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이 형이상학적인 것을 말하고자 할 때 그의 명제들 속에 있는 특정한 기호에는 그가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유고로 출판된 그의 저서<철학적 탐구>(1953)에서 이상적으로 구성된 세계를 모사하는 단위 언어라는 사상을 포기하고, 일상 언어(ordinary language)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단어의 의미는 이 단어의 일상적이고 다양한 사용과 분리될 수 없다. 언어 사용은 언어 공동체 삶의 형식 중 하나이고, 항상 구체적인 행위와의 연관 속에 서 있다. 일상 언어는 단일성, 곧 통일된 세계 기투(企投)로서가 아니라 서로 교차하는 무수히 많은 '언어 놀이'의 다수성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언어 놀이'라는 핵심 개념은 언어를 언어이면서 활동으로 파악한다. 예를 들면 명령하는 것,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 연극 놀이하는 것, 부탁하는 것, 감사하는 것 등이 언어 놀이다. 한 단어의 의미는 더 이상 <논리철학 논고>에서 처럼 대상의 모사로 이해되지 않고, 놀이의 경우처럼 실용적으로 특정한 행위 맥락에서 그때그때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특정한 언어적 행위 맥락에서 이해된다. "언어에서 한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의 사용이다." 언어는 일상적인 '삶의 형식들'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단지 그것들과의 연관, 즉 문맥 속에서만 명시적인 의미를 가진다. 형이상학적으로 보편적인, 맥락을 초월한 이론은 배제된다. "삶의 강물 속에서만 언어는 그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단어들을 그 형이상학적인 사용으로부터 다시금 일상적인 사용으로 되돌린다." 또한 언어 비판은 치료적인 과제를 가진다. "철삭은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오성을 마법에 빠뜨리는 것에 대항하는 투쟁이다" "철학의 결과는 오성이 언어의 한계로 돌진하는 경우 가지게 되는, 어떤 단순한 무의미함과 종양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 분석철학의 가장 활발한 옹호자는 콰인(1908~2000)이다. "감각 자료로부터 필요 이상으로 멀리 떨아지려 하지 말라."
비판적 합리주의. 포퍼(1902~1994)는 모든 종류의 교조주의를 배제하고자 하는 과학 이론을 주장한다. 경험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은 잠정적인 이론이며, 비판을 통해서만 개선된다. 이론은 결코 증명될 수 없지만 사실을 통해 반박될 수 있다. 궁극적인 이론, 예를 들면 역사 법칙 이론은 상상에 의해 산출된 지식이다. 역사는 예측할 수 없는 개방된 과정이다. '거짓도니 예언자', 즉 역사철학의 역사주의자들은 미시에 빠져 있다. "역사주의자는 역사의 사실들을 고르고 정렬하는 자가 바로 우리임을 보지 못한다. 그는 반대로 '역사 그 자체' 혹은 '인류의 역사'가 그 내재적인 법칙을 통해 우리, 우리의 문제, 우리의 미래,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의 관점까지도 규정한다고 믿는다." 잘못된 근본주의적인 역사 이론과 사회 이론에 근거해 있는 혁명적인 세계 개선이 거부되며, 개별 문제들에 대한 겸손한 개혁, 즉 항상 수정 가능한 '불완전함의 기술'이 권유된다. 따라서 서구 민주주의는 이미 실현된 자유로운 인간 공동체이지만 여전히 단계적으로 개선될 여지가 있다.
현재 영향력이 막강한 비판 이론(프랑크푸르트학파)은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여러 운동 중 하나이다. 대표적인 두 사상가 호르크하이머(1895~1973)와 아도르노(1903~1969)는 '합리적인 사회' '노예적인 관계로부터의 인간 해방'이라는 그들의 근원적인 목표에 점차 회의적이고 체념적인 태도를 보인다. 유럽의 문명 과정은 그들에게 깊은 양면성과 자기 파괴성을 보여 준다. 그들의 공동 저서이기도 한 이러한 '계몽의 변증법'의 뿌리는 인간의 이성과 이에 근거하는 실천에 있다. 동일화, 계측화, 유용성으로 환원되는 특정한 형태의 이성은 역사적으로 형성되었고, 수천 년 동안 인간의 본성뿐 아니라 자연에 대한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인간은 자신이 힘을 행사하는 대상으로 소외됨으로써 자신의 힘을 증가시킨다." 과학, 기술, 후기 자본주의, 문화 산업 등을 통해 강화도니 이러한 이성의 파괴성은 20세기에 야만으로 변화한다. "완전히 계몽도니 지구는 의기양양한 파멸의 조짐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계몽은 자기 자신을 의식해야만 한다." 철학은 "이성의 자기비판"이 되어야 한다.
구조주의(신구조주의)는 많은 과학적, 철학적인 분파를 가지고 있다. 구조화된 질서로서의 언어는 구조주의(신구조주의)의 중심 연구 대상이다. 구조적인 분석은 근원적으로 언어학(소쉬르, 1857~1913)에서 뿐만 아니라 민속하겡서도 시도된다. "다양한 현실을 드러내 주는 질서의 형성과 기능 방식이 어떤 구조적인 요소들로 구성되었는지 정확히 알 때에만 우리는 바로 그 질서의 형성과 기능 방식을 파악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나는 출발한다."(레비스트로스, 1908) 구조주의자들에 따르면 비가시적이고 비의식적인,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 구조들, 즉 객관적인 법칙성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프랑스의 몇몇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1960년대 후반에 프로이트의 '무의식' 또는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를 동기로 삼아, 자율적인 주체인 인간을 내쫓는 권력의 선구조들을 탐구한다. "모든 인간적 인식, 모든 인간적 실존, 모든 인간적 삶, 그리고 아마도 인간의 생물학적인 유전 역시 구조들 속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 즉 서술 가능한 관계들에 예속되어 있는 요수들의 형식적인 전체 속에 얽혀 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나느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주체가 아니며, 또한 주체이면서 객체가 아니다. 구조주의자들은 인간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구조들의 집합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구조들에 대해 인간은 사유하고 기술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그것의 주체, 그것의 지배적인 의식은 아니다."(푸코, 1926~1984) 인간은 익명적인 규칙들의 산물이다. 그는 더 이상 중심에 서 있지 않다. 주체는 '탈중심화'된다. '인간과의 결별'(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에 비유한) '인간의 죽음'은 신구조주의에서 전통적인 형이상학, 역사, 주체, 의미의 표상 등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낳았다. "인간은 해변의 모래에 그린 얼굴처럼 사라졌다.
" (푸코) 데리다의 언어 비판(1930~2005) 역시 새로운 시도를 옹호한다. 글자에 대한 구어, 즉 로고스의 전통적인우위가 역전된다. '로고스 중심주의'를 '해체(Dekonstruktion)'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언어, 문자, 진리가 새롭게 사유된다. 또한 철학적, 문헌학적 실험의 '놀이'에서 텍스트들은 병렬적으로 놓이며(철학, 과학, 문학 작품 등 모든 텍스트가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 없이 동등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는 뜻- 역자 주),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어떤 확고한 의미도 부여받지 못했던 그런 다른 방식의 '글 일기'를 실험한다. "우리가 듣게 될 죽음의 종소리는 의미와 뜻과 지시체의 종말을 알린다(데리다, Derrida)." 텍스트들은 난공불락이다. "나는 내가 말하지 않는 것을 대략적으로 만들고, 내가 만든 것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데리다, Derrida)
포스트모던의 철학적인 특성은 니체와 하이데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신구조주의와도 연결되어 있다. 포스트모던은 정치적인 압제와 테러에 연결되는 형이상학, 즉 역사적인 총체적 해석과 비전으로부터 결별한다. 포스트모던은 이성의 거대한 통일적인 진보의 프로그램, 인간성의 추상적인 해방과 행복, 진보에 낙관적인 계몽의 유혹, 혹은 구원을 약속하는 마르크스 주의의 유혹 등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포스트모던'이란 메타 차원의 설명에 더 이상 어떤 믿음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리요타르, 1924~1998) 포스트모던의 근본 태도는 다원주의인데, 이 다원주의에서 이질성, 논쟁, 차이, 심미적 경험 등의 의미가 산출된다고 한다. "우리는 전체와 일자에 대한 열망, 개념과 감성의 화해에 대한 열망, 투명하고 소통 가능한 경험에 대한 열망을 위해 비싼 대가를 지불했다. ... 이에 대한 대답은 전체(총체성)에 대한 전쟁이다. 우리는 묘사할 수 없는 것을 위해 증언하고, 논쟁을 활성화시킨다."(리요타르) 이성은 퇴각하고, 무장 해제되어 '허약한 사유'(바티모, 1935~)로, 폭력 없이 숙고하는 사유로 바뀐다. 놀이적이고 비구속적인 것은 '작은 이야기들'로의 입구를 발견한다. 누락, 이탈, 역설뿐만 아니라 작은 무의미와 큰 기지, 그리고 조롱도 이 범주에 속한다.
새로운 해석학. 가다머(1900~2002)는 딜타이와 하이데거에 의지하여 이해 이론을 발전시킨다. "이해는 인간적인 삶 자체의 근원적인 존재 특성이다." 언어성은 인간의 세계 경험의 특징이다. 왜냐하면 세계의 현존은 언어적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언어 속에서 세계가 묘사된다." 그런데 언어의본성은 가장 어두운 것에 속한다. "철학적 해석학의 최고 원칙은 내 생각에 따르면, (그리고 그 때문에 그것이 해석학적 철학인데), 우리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가다머)
새로운 비판 이론. 하버마스(1929~)는 이전의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보여 준 비판 이론의 부정적이고 탈출구 없는 역사철학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탈형이상학적 사유에 기대어 '근대의 기획'을 동시대의 공격과 상대주의로부터 변호한다. "내 말은 근대와 그 기획 자체가 상실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근대의 기획이 가져왔던 혼란, 과장된 지양의 프로그램의 오류로부터 배운다는 것이다." 계몽의 이념은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이성의 척도, 확신을 주는 보편적인 담론은 새로운 문맥이 형성되었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 "인권은 그 올바른 해석을 위한 문화들 사이의 지속적인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견을 가진 이들이 자신이 겪은 것과 그들이 억압적인 정부에 대해 요구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언어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뿐 아니라 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과 열악한 삶의 상황으로부터의 인간 해방은 아직 그 힘을 상실하지 않았다."(하버마스).
신실용주의. 로티(1931~)는 미국의 실용주의적이고 분석적인 전통을 유럽의 해석학적인 전통과 연결시킨다. 그는 듀이,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등과 관련이 있지만, 또한 세계 문학의 위대한 소설들과도 관계한다. 이러한 소설에서 그는 다른 인간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라는 세련된 감정을 기대하낟. 실용주의에 대한 그의 새로운 해석은 덜 무자비하고, 연대가 더 많은 개선 가능한 민주주의 사회를 위해 실천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감수성 있는 태도를 추구한다. 인식과 지식이 아니라 교육과 대화가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탈형이상학적인 사유가 여기서 성찰된다. "형성되고 있는 철학은 객관적인 진리를 찾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가동시키고자 한다."(로티)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이 시대의 사상에서 잊을 수 없는 인물에 속한다. 그녀의 삶에는 20세기의 가장 어두웠던 현실이 짓누르고 있다. 그녀는 전체주의 시대에 독일계 유대인으로 태어나 1941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극단적 악의 문제를 다루면서 정치적이고 사회비판적인 참여 사상가로 활동한다. 1951년 3월 4일, 그녀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용기를 보여 준 자신의 친구 야스퍼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극단적인 악이 실제로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인간을 잉여적으로 만드는 현상과 관련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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