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란 살인의 우의(寓意, 다른 사물에 빗대어 의도한 뜻을 드러내거나 풍자함)에 불과하다. 성행위는 바로 살인이다. 남자는 사랑하기 때문에 여자의 몸을 쓰다듬고, 핥고, 깨물고, 때론 난폭하게 고통을 준다. 그리고 몸속 깊숙이 자신의 창을 찔러 넣는다. 남자는 모두 여자를 죽이고 탐하기 위해 태어났다.  51-52

우리 가족만은 자신의 사랑으로 굳게 뭉쳐 있다고 마사코는 믿었다.  150

열등감이야 많건 적건 누구나 있는 것이고, 그 뿌리의 깊이는 본인 이외에는 알 수 없다.  209

“.. 다른 의미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싶습니다. 죽음을 바라는 본능이 아니라 죽음을 가까이서 느끼고 싶은 욕망이란 의미에서요. 타나토스 콤플렉스. 프로이트의 타나토스 이론에 따르면 죽음을 향한 본능 때문에 스스로를 죽이지 않기 위해서는 그 공격 충동의 배출구를 외부에서 찾을 필요가 있고, 그 결과 남에게 해를 입히게 된다고 합니다. ..
제가 생각하는, 타나토스 콤플렉스라고나 불러야 할 현상은 전혀 다른 겁니다. 무덤에 흥미가 있는 아이. 벌레를 죽이는 아이. 죽음을 소재로 하는 농담 등등. 일반적으로 아이들은 죽음에 관심을 보입니다. 단순한 호기심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생명이 무엇인지 이해한다는 것은 죽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기는 왜 태어나는 걸까? 나는 어떨게 태어난 걸까? 할아버지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아이들에겐 참으로 많은 의문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핵가족화가 진행되고, 묘지는 멀리 밀려나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벌레가 없어서 곤충채집을 할 수 없고, 아파트에서는 애완동물을 기를 수도 없는 상황이 되다 보니 아이들은 죽응ㅁ이라는 것으로부터 격리되고 맙니다. 한편 매스미디어에는 죽음이 넘쳐납니다. 형사 드라마나 시대극 같은 텔레비전 드라마도 있지만 물론 실제 죽음인 살인이나 사고 뉴스도 있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이돌 스타들이 아주 가깝고도 먼 존재인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 또한 가깝고도 먼 존재죠. 어떤 의미에서는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유명한 아이돌 탤런트가 자살했을 때, 아이들이 다투어 그 뒤를 따랐던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본능이냐 아니냐는 별도의 문제로 하고, 타나토스, 즉 죽음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죠. “
“네크로필리아, 시체성애 또한 타나토스 콤플렉스의 한 형태라고 해도 좋을 겁니다  그들은, 네크로파일들은 죽음을 동경하죠. 그 충동이 자신을 향하면 자해 행위나 자살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감미로운 죽음을 맞이하는 걸로 만족하겠죠. 하지만 그들은 그 충동을 외부로 돌립니다. 시체를 만져보고 싶다, 시체와 하룻밤 지내고 싶다, 섹스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벌써 30년 전 일이지만 도쿄 나카노 구에서 일어난 소년 토막 살인 같은 게 그 전형적인 예입니다. 스물여섯 살 먹은 소년애자가 열두 살 사내아이를 유괴해 토막을 내서 유리 용기에 넣고 포르말린에 담아 진열해 두였죠. 범인은 비정상적으로 고양이를 좋아하기도 했는데 자기가 기르던 열 두 마리나 되는 고양이들을 토막 내고 먹기도 했다는 겁니다. 이해가 됩니까? 여기에는 상대방에게 업신여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열등감이 영향을 미칠 여지도 없습니다. 상대는 고양이니까요. 하지만 그는 사랑하는 고양이나 소년을 토막 내어 감상하지 않을 수 없었죠. 확고한 신념을 지닌 네크로파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파리에서 인육을 먹었다는 사람에게는 그런 경향이 희박합니다. 시간도 한 것 같지만 그를 지배하던 것은 명백하게 인육을 먹고 싶다는 욕망, 즉 카니발리즘 환상이었으니까요.”  231-233

네크로파일.
시체를 강간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많건 적건 사디즘 경향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폭력적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맙니다. 시체를 훼손시키죠. 또 거기서 쾌감을 얻고요. 이번 범인은 쾌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체의 일부를 도려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일부분이라도 괜찮으니 자기 곁에 두고 싶었기 때문일 겁니다. 페티시한 시체 애호자죠. 생명이 없어져서 단순한 살덩이가 되어도 사랑할 수 있는 남자입니다.
미국의 에드 게인이란 남자는 10년 남짓한 기간에 두 명의 여성을 살해하고, 또 아홉 명의 여성 시체를 무덤에서 파내 집으로 옮겨 성적 만족을 얻었습니다. 늘 보름달이 뜨는 밤에 저질렀다고 하죠. 그는 시체의 일부를 먹거나 목을 잘라냈을 뿐 아니라, 벗겨낸 피부로 조끼를 만들기도 하고, 가죽 의자를 수리하는 데 쓰기도 하고, 허리띠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1972년부터 모두 여덟 명의 여성을 살해하고 계속해서 시간한 에드먼드 켐퍼(1948~. 프로파일링 관련 책에서 사례로 자주 등장하는 인물. 마지막으로 살해한 사람이 어머니였고, 어머니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다고 진술했다.)라는 미국 남자도 있습니다 이 남자도 영국의 크리스티와 마찬가리조 살아 있는 여자를 상대로는 성교를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낀 모양이더군요. 피를 씻어낸 시체와 갖가지 성행위에 탐닉해, 목이 없는 시체와도 섹스를 했다고 합니다. 이번 범인이 도려낸 성기를 섹스 도구로 사용한다면 켐퍼를 능가하는 네크로파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234-235

2월 말이 되자 미노루는 당연하다는 듯이 거리로 나갔다. 사랑이 필요했다. 사랑이 없으면 그는 바싹 말라 주름투성이 노인이 되어버린다. 그녀의 …… 그녀들의 유방이 그렇게 된 것처럼.
나는 그 여자들로부터 사랑을 흡수해서 더 나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게 틀림없다. 에토 사치코를 사랑하기 전의 나를 떠올려보라. 얼마나 보잘것없는 인간이었던가. .. 사랑이 얼마나 훌륭한지 안 뒤에는 보다 깊이 그 사랑의 원천을 탐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생명의 근원도 더듬을 수 있었다. ..
나는 변태가 아니니까. 나는 그저 진실에 눈을 떴을 뿐이다.  244-245

처음에는 어처구니없는 망상이라고까지 여겼던 모든 것이 한 방향을 가리킨다.
그 애가, 바로 그 애가 살인마. 우연히 만난 여자를 호텔로 데리고 가 관계를 갖고, 목 졸라 죽인 뒤에 유방을 도려내는 살인마. 믿고 싶지는 않지만 이제는 믿지 않을 수 없다.
병이다. 단순한 범죄와는 다르다. 정신이상은 병이니 그런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는 죄를 묻지 않는 것이 이 나라의 법이다. 하지만 만약에 경찰에 체포되어, 그 여자 어린이 살인범처럼 세상 사람들의 호기심과 분노 앞에 내던져진다면 그 애는 물론이고 우리도 살아갈 수 없다. 체포되자마자 사형보다 더 무서운 형벌이 가족 모두에게 내려진다. 판사보다 언론과 국민들이 먼저 우리의 숨통을 죈다.
견뎌낼 수 없다. 그런 일은 도저히 견딜 수 없다. 딸은 평생 결혼도 못 하리라. 남편은 직장을 잃게 될 테고 이 집에서도 살 수 없다. 다른 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결국 거기서도 소문이 나서 또 다른 곳으로……
살아가기 힘들어질 뿐만이 아니다. 산산조각이 나버린다. 지금까지 죽을힘을 다해 이루어온 모든 것이, 애정으로 맺어진 가족의 끈이 시기와 증오로 변해버린다.
살 수 없다. 나는 그렇게 되어서까지 살아갈 수는 없다.
병이 죄가 되지 않는 거라면 우리도 그런 벌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말하자면 그 애가 병이 나아 더는 사람을 죽이지만 않는다면 문제없다. 법의 정신에서 이야기하자면 이게 훨씬 더 이치에 맞지 않을까?
그야 모든 게 병 때문이니까. 나쁜 것은 그 애가 아니니까.  
..
무슨 수든 써야 한다. .. 병세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치료를 받을 길이 없다. ..
살인만 그만두게 할 수 있다면, 감금? 그러려면 가족의 협력이 필요한데, 이야기하면 식구들이 이해해줄까?
증거다. 증거를 보이면 다들 잡득을 하겠지. 그리고 그 애를 집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식구들이 힘을 모아 돌봐주자. 가족의 단결도 가능하고, 모두가 애정을 기울이면 마음의 병이야 금방 낫는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전보다 더 훌륭한 가족이 될 수도 있다.
그 애가 외출하면 방을 철저하게 뒤져보자. 갖고 나가지 않는 한 비디오테이프는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 다른 뭔가가 발견되지도 모른다.
마사코는 마음을 굳히고 이부자리에 누웠지만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남편이다. 남편 탓이다. 아버지의 부재. 동일화의 대상으로서의 아버지가 부재했기 때문에 그 애가 이상해지고 말았다. 임포텐츠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정상적인 이성과 교제를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은 틀림없다.
여자를 목 졸라 죽이고, 몸의 일부를 잘라내다니. 너무 착하고, 너무 섬세한 아이라 살벌한 입시 전쟁 속에서 그 애의 마음이 병들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책임은 사회에 있는 게 아닐까. 살해된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애도 피해자가 아닐까.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은 사회이지 내 아들이 아니다.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두려워하고, 화를 내면서 마사코는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285-287




참고문헌
시모카와 고시 <살인평론>
콜린 윌슨 <살인백과> <살인 케이스 북> <현대 살인백과>
A 스토 <성의 일탈>
<IMAGO(지금은 폐간된 일본의 정신분석학 전문지)> 1992년 3월호  345







작품해설 - 가사이 기요시(추리소설가, 추리소설 평론가)
<살육에 이르는 병>은 현재 아비코 다케마루의 최고작이다. 동시에 현대 본격 추리문학의 서술 트릭 작품 가운데 최고봉이기도 하다.  347

현대 본격이란 1970년대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는 본격 탐정소설을 의미한다. 일본 미스터리 문학사의 흐름에서 이야기만다면 <환영성(1975년부터 1979년에 걸쳐 발행된 일본 추리문학 전문지)> 이후다. 잡지 <환영성>은 오랜 기간 사회파 미스터리에 눌려 미스터리 무대의 변두리로 밀려나 있던 본격 탐정소설을 새로운 테마와 모티브로 현대에 되살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환영성>출신 작가 중에서 대표적인 작가가 렌조 미키히코인데, 텍스트 트릭을 자주 쓰는 작풍이라는 점에서도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에서부터 오리하라 이치까지, 현대 본격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 초반의 침체기를 거친 뒤, 현대 본격은 아야츠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1987)으로 획기적으로 비약한다. 아야츠지 이후의 현대 본격 작가는 저널리스틱하게 신본격이라고도 불렸다. 아비코 다케마루 또한 신본격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데뷔했다.
<환영성> 작가 가운데서도 연장자인 렌조 미키히코나 아와사카 쓰마오(<그늘의 도라지>, 대표작<아 아이이치로의 낭패>)의 작품에는 희박했던 요소가, 연배가 아래인 다케모토겐지의 <상자 안의 실락>이나 구리모토 가오루의 <우리들의 시대>에서는 중심에 위치한다. 비좁은 공간에 갇혀 브로일러(broiler, 여기서는 대량 살육되는 닭의 의미)처럼 강제적으로 사육되는 삶에 대한 결핍감, 공허감, 질식감, 말하자면 대량생(大量生, 20세기 소설의 특징을 논할 때 언급되는 가사이 기요시 나름의 철학 개념) 시대의 병리적인 현상이다. 그것이 다케모토의 작품이나 구리모토의 작품에서는 범죄의 동기가 되는 등, 작품 공간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환영성> 시대에는 분리되어 있던, 다케모토=구리모토적인 주제성과 렌조적인 방법 의식을 신세대의 발상으로 결합했다는 점에서 <십각관의 살인>의 참신함이 있다.
대량생 시대의 병리는 1980년대 10여 년 동안 대부분의 일본 사회 전체를 집어삼켰다. 예를 들어 아야츠지는 <십각관의 살인>에서 학생들의 집단 음주에 의한 중독사 사고를 다뤘다. 또한 노리즈키 린타로는 <밀폐교실>을 통해 학교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망 사건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모두 1980년대에 빈발해, 현대 사회의 병리적 징후로 주목받은 형태의 사건이다. 물론 상황은 1990년대인 오늘까지 기본적인 변화가 없다. 이지메 자살사건의 증가에서 볼 수 있듯이, 오히려 악화 되고 있다.   347-349


몽매한 평자로부터 자주 몰사회적이란 비난을 받은 아야츠지 이후의 현대 본격 작품에, 실제로는 80년대라는 시대의 병리적 징후가 필연적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아야츠지, 노리즈키에 이어 등장한 아비코 다케마루가 금속 배트사건(1980년 11월에 가나가와 현에서 20세의 재수생이 금속 야구방망이로 부모를 때려죽인 사건)으로 막을 열고 미야자키 사건(1988년에서 1989년에 걸쳐 일어난 사건으로 이 작품 내에서 여자 어린이 연쇄 살인사건으로 표현되고 있다)으로 막을 내린 1980년대의 평범한 가정을 잠식하는 병리를 도려내려 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살육에 이르는 병>이란 작품 이면에는 이와 같은 시대 배경이 있다.
현대 가정의 황폐화와 공동화는 미국에서는 스티븐 킹의 모던 호러나 조너선 캘러먼(미국의 임상병리학자 겸 추리소설가)등의 사이코 서스펜스를 크게 유행시켰다. 그러나 <살육에 이르는 병>은 호러도 서스펜스도 아니다. 현대의 본격 탐정소설로 쓴 작품이다. 게다가 본격 탐정소설에서는 주제성을 주인공의 관념이나 행동을 빌어 그린다고 하는, 근대소설에서는 일반적인 창작 방법이 아예 금지외어 있기도 하다. 소설 작품으로서 시대성이나 사회성과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본격 작품으로서도 탁월하다는 이중성은 쉽게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의 경우에는 그러한 매우 어려운 과제에 도전하는 결정적인 무기로서 서술 트릭을 활용하고 있다. 서술 트릭에서는 작중 인물이나 시간 혹은 공간을 의도적으로 혼란시키는 방법이 자주 사용된다. 고이즈미 기미코(1934~1985, 번역가 추리소설가, 대표작 <변호 측 증인>)의 대표작은 인물 트릭, 오리하라 이치의 대표작은 시간 트릭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궁극의 텍스트 트릭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선구로 하는 서술 트릭이다. 이 트릭은 독자 앞에 놓인 텍스트의 성격에 의도적인 혼란을 집어넣어 만들어진다. 예를 들면 다케모토 겐지의 주요 작품에는 텍스트 트릭의 요소가 농후하다. 서술 트릭이 철저해졌을 때, 본격 탐정 소설은 20세기의 전위문학 세계에 접근하게 된다.  349-351


<살육에 이르는 병>의 기본은 인물 트릭이다. 그것도 아버지를 아들로, 아들을 아버지로 오해하게 만드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 트릭이 장치된다. 현대 본격의 서술 트릭 작품으로서는 심플한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물이나 시간, 공간에 각각 이중 삼중의 서술 트릭을 장치한다면 마지막까지 독자를 기만하기는 비교적 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구성이 너무 복잡해지고, 수수께끼 풀이의 카타르시스가 희석될 위험성이 있다. <살육에 이르는 병>은 인물 트릭이라는 한 가지에 쏟아부은 작가의 기백이 독자를 압도하는 걸작이다.
미국에서나 일본에서나 가정 폭력은 현대 가정의 황폐화를 상징하는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두 나라는 기본적인 경향으로서 가정 폭력의 성격이 다르다. 미국에서는 아버지가 모자에게, 혹은 어머니가 자녀에게 행사하는 폭력이 문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자식이 어머니에게 행사하는 폭력이 매우 잦다. 핵가족화의 진행에 따른 지나치게 밀착된 모자 관계가 일본적 가족 병리 현상의 배경에 잠복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금속 배트 사건 같은 가정 폭력 사건과 동시에 미야자키 사건으로 대표되는 성범죄에도, 일본 고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농밀한 모자 관계의 밀착을 중심으로 하는 가정에 있어서 아버지의 존재감은 필연적으로 희박하다. 거꾸로 아버지의 부재가 지나친 모자 밀착을 가져온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과 같은 것은 여러 계몽적인 심리학 서적에서도 지적될 만큼 매우 일반적인 인식에 불과하다. 이러한 심리적 도식을 그대로 소설화해본들 읽을 만한 작품이 되지는 않는다.
<살육에 이르는 병>의 결말에서는 목 졸라 죽인 나이 든 여자를 시간(屍姦, 시체를 간음함)하는 남자를 목격하고, 아내인 마사코가 다음과 같이 울부짖는다. “아아, 아아, 무슨짓이야! 여보! 어머님께 무슨 짓을!” 이 절규를 통해 비로소 가모우 미노루의 정체가 독자들 앞에 폭로된다. 작가가 장치한 인물 트릭이 완성되고, 마지막까지 기만당한 독자는 그저 어안이 벙벙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독자의 멍한 느낌에는 또 하나의 이면이 있다. 지은이의 서술 트릭에 넘어가 미노루=아들이라고 믿어온 독자는 미노루=아버지라는 예상 밖의 진상을 접하고 경악한다. 동기에 결말에서 자시고가 아버지의 역할 교환은 아들=아버지라는 기분 나쁜 등식을 부정할 수 없으 ㄹ만큼 선명하게 독자의 인상에 남긴다.
아들=아버지의 등식. 그것은 현대 일본에 있어서 가정 황폐화의 배경으로서, 여러 심리학자가 지적하는 바이기도 하다. 바로 연쇄 엽기 범죄자인 미노루가 그렇듯이 현대 일본의 아버지란 아버리로서의 성숙을 거부한 영원한 아들이다. 그것이 가정에 있어서 아버지의 부재를, 지나친 모자 관계의 밀착을 필연적으로 초래한다.
<살육에 이르는 병>은 서술 트릭에 성공한 덕분에 자체로는 평범했을 심리학적 인식에 선명한 소설적 발견을 가져다 준다. 독자는 결말에서 작가가 장치한 서술 트릭에 놀라고 동시에 아들=아버지의 도식으로 상징되는 현대 일본의 가족병리에 직면한다. 읽은 뒤의 멍한 느낌은 이 두 가지가 중첩된 것 아닐까?
아비코 다케마루는 서술 트릭 시론에서 서술 트릭에는 단순히 독자를 속일 뿐만 아니라, 때때로 세계가 붕괴하는 듯한 착각을 가져다주는 효과가 있다. 독자는 내내 등장인물이나 무대의 속성에 대해 오인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속임수와 작품의 테마가 일치했을 때,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 걸작이 태어난다고 이야기한다. 이 말은 아비코 자신이 쓴 <살육에 이르는 병>에도 충분히 해당된다 할 수 있다.  351-354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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