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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2.17 불안(Status Anxiety) - 알랭 드 보통 이레 2005 03840


'불안'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하지 않음' , '분위기 따위가 안정되지 않고 뒤숭숭함'이다.
이 단어를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인간 존재의 밑 바닥에 자리잡은 허무(虛無)로부터 비롯하는 위기적 의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심리적인 것이다. 불안이라는 단어는 사람의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심리적 단어이다.

우리는 불안을 늘 가지고 살아간다. 사람은 자신이 해 보지 않은 것을 하려 할때 언제나 불안감이 언습한다. 또한 일상에서도 자신이 늘 하는 것과 거리가 있는것일 수록 불안감을 더 느끼게 된다.
아무런 이유없이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하거나, 가슴이 두근두근거리기도 한다.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면 우리는 불안이 엄습하는 느낌을 가진다. 이유를 모르기때문이다. 즉 우리는 이유를 모르는 것이 발생할 때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불안에 대한 저자의 원인 규명과 해법을 서술한 책이다.
'불안'이란 단어는 매우 포괄적이다. 
책의 제목은 단순하게 불안이란 표현을 하였지만, 원서의 제목은 <Status Anxiety> 즉, '지위에 대한 불안'이다. 
저자는 불안 중에도 인간이 많이 느끼는 것 중의 하나인 지위에 대한 인간적인 불안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위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원인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을 제안한다.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원인은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이며, 그에 대한 해법으로는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이다.
한국사람들에게도 꽤나 유명한 저자의 철학적 사색과 철학자들의 사색을 통해 우리는 위안과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세계화에 의한 발전과 압도적인 신자유주의자들의 등살에 대한민국은 죽을때까지 공부해야 하는 나라가 되어 있다. 
그것은 더 나은 직업과 더 나은 지위를 얻지 못하면 안 된다는 심리적인 분위기 때문이다.
실제 세계의 기득권층은 그렇게 만들어 가고 있다. 그들만의 즐거움과 권력을 위해 같은 세대간의 경쟁, 세대간의 경쟁, 진입장벽등을 통해 억누르고, 교육을 통해 이겨야만 한다는 세뇌를 시켜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신세계>에서 유전자 조작으로 이미 태어나고 무의식상태로 세뇌되어 태어날때부터 자신의 역할이 정해져 있다고 느끼는 그러한 상태가 지금의 이 시대에 우리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심리적인 무력감에 기인한다.

우리가 조금 떨어져서 세상을 바라보고 주입된 주관성이 아니라 좀더 넓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그것이 보이게 된다.
보통의 생각과 접근을 따라가면서 객관성에 조금더 가까이 가게 될 수 있을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많이 공감이 간 내용들은 철학과 보헤미안이며,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었던 부분은 예술과 기독교 였다.



정의 
지위 - 사회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 지위(status)는 신분이라는 뜻의 라틴어 statum('서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stare의 과거분사)에서 파생되었다.
        - 좁은 의미에서 이 말은 한 집단 내의 법적 또는 직업적 신분을 가리킨다(기혼자, 중위등). 그러나 더 넓은 의미에서는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을 가리키며, 이 책에서는 이 의미가 더 중요하다.

지위로 인한 불안 -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할 위험에 처했으며, 그 결과 존엄을 잃고 존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 우리가 사다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우리의 자아상(自我像)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 안타까운 것은 높은 지위를 얻기가 어려우며, 그것을 평생에 걸쳐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것이다. 지위는 자신의 실수와 실패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적의 때문에 실패할 수도 있다.
                         - 실패에서 굴욕감이 생긴다. 우리의 가치가 아니라 성공한 사람들을 씁쓸하게 바라보며 우리 자신을 부끄러워할 처지에 놓였다는 괴로운 인식에서 나온다.

명제 - 지위에 대한 갈망은 다른 모든 욕구와 마찬가지로 쓸모가 잇다. 이것은 자신의 재능을 공정하게 평가하도록 자극하며, 남들보자 나아지도록 고무하며, 남에게 해를 주는 괴팍한 행동을 못하게 억제하며, 공동의 가치 체계를 중심으로 사회 구성원들을 결합한다. 그러나 모든 욕구가 그렇듯이, 이 갈망도 지나치면 사람을 잡는다.
       -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가장 유익한 방법은 이 상황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7-10


원인
I. 사랑결핍
지위와 관련된 사랑을 받는 사람 역시 낭만적인 사랑을 받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호의적인 눈길을 받으며 편안함을 느낀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16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The Theory og Moral Sentiment)>에서 "인간 삶의 위대한 목적이라고 하는 이른바 삶의 조건의 개선에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이 주목을 하고, 관심을 쏟고, 공감 어린 표정으로 사근사근하게 맞장구를 치면서 알은체를 해주는 것이 우리가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자가 자신의 부를 즐거워하는 것은 부를 통해 자연스럽게 세상의 관심을 끌어 모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부끄러워한다. 가난 때문에 사람들의 시야게서 사라졌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아무도 우리에게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가장 열렬한 욕구의 충족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18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  21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  22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자신의 인겨겨을 신뢰할 수도 없고 그 인격을 따라 살 수도 없다.  23




II.속물근성
'속물근성(snobbery)'이라는 말은 영국에서 1820년대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많은 대학의 시험 명단에서 일반 학생을 귀족 자제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옆에 sine nobilitate(이것을 줄인 말이 's.nob.'이다), 즉 작위가 없다고 적어놓는 관례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 말은 처음에는 높은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을 가리켰으나, 곧 근대적인 의미, 즉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28
신문 때문에 문제는 더 복잡해 진다. 속물은 독립적 판단을 할 능력이 없는 데다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갈망한다.  33
두려움은 세대를 따라 전해진다.. 속물도 속물을 낳는다.  35
젊은 시절에 속물근성에 분개했다고 해서 그 뒤에 스스로 속물이 되어가지 말란 법도 없다. 거만한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36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38

III. 기대
18세기 초 영국에서 서양의 위대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농경 기술 덕분에 생산이 급격히 늘어나고, 산업과 교역이 늘게된다.
증기기관과 면 역직기로 사회적 기대가 바뀌었다. 도시 규모가 급격히 팽창했다. 
사치품은 일반용품이 되었으며 일반용품은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46
유럽과 미국 전역에 거대 백화점이 문을 열고, 과학기술 발명품이 속속등장한다. 
전역에 쇼핑몰의 발전은 새로운 갈망들이 생겨났다. 1970년대에 이르자 미국인들은 일터와 쇼핑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55
어떤 것의 적절한 수준은 결코 독립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준거집단(準據集團), 즉 우리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조건과 우리의 조건을 비교하여 결정된다.
설사 웃풍이 심하고 비위생적인 오두막에 살면서 크고 따뜻한 성에 사는 귀족의 지배에 시달린다 해도, 우리와 동등한 사람들이 우리와 똑같이 사는 것을 본다면 우리의 조건은 정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57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겨 우리 자신과 비교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질투할 사람도 늘어난다.  60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1835)의 '왜 미국인은 번영 속에서도 그렇게 불안을 느끼는가'라는 제목의 장에서 불만과 높은 기대, 선망과 평등의 관계를 끈질기게 분석한다.
".. 불평등이 사회의 일반 법칙일 때는 아무리 불평등한 측면이라도 사람들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대체로 평등해지면 약간의차이라도 눈에 띄고 만다... 그래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이 종종 묘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평온하고 느긋한 환경에서도 삶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자살률 증가를 걱정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자살은 드문 대신 광증이 다른 어느 곳보다 흔하다고 한다."  67
하버드 심리학 교수인 제임스는 '시도가 없으면 실패도 없고, 실패가 없으면 수모도 없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자존심은 전적으로 자신이 무엇이 되도록 또 무슨 일을 하도록 스스로를 밀어붙이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실체 성취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  자존심 = 성공/잠재력'
제임스의 방정식은 우리의 기대 수준이 높아지면 수모를 당할 위험도 높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무엇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이 결정된다.  71
장-자크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4)에서 다들 야만인과 근대의 노동자 가운데 노동자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과연 정말일까 하고 물었다.
루소의 주장은 부에 대한 명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근대 사회는 첫 번째 방법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욕망에 줄기차게 부채질을 하여 자신의 가장 뛰어난 성취의 한 부분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부유하다고 느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와 같다고 여겼지만 우리보다 더 큰 부자가 된 사람과 실제로나 감정적으로나 거리를 두면 된다. 더 큰 물고기가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옆에 있어도 우리 자신의 크기를 의식하며 괴로울 일이 없는 작은 벗들을 주위에 모으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면 된다.
발전하는 사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전보다 높아진 소득을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를 더 부유하게 해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볼 때 우리를 더 궁핍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80-81

IV. 능력주의 
예수가 전도를 시작한 서기 약 30년부터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회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처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미에 대하여 세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들은 그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듣는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불안을 덜어주었을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 -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 책임이 아니며 가난한 사람은 사회에서 가장 쓸모가 크다.
두 번째 이야기 - 낮은 지위에 도덕적 의미는 없다.
세 번째 이야기 - 부자는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강탈하여 부를 쌓았다.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서기 30년부터 1989년까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인 가장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그것들이었다. 이 이야기들은 좋은 운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기운을 북돋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86-95
안타깝게도 18세기 중반 무렵부터 괴로운 이야기 세 가지가 생겨나 꾸준히 영향력을 늘여가면서 앞의 이야기들에 도전하게 되었다.
첫 번째 이야기 - 빈자가 아니라 부자가 쓸모있다.
버나드 맨드빌은 운문으로 쓴 소채자 <벌의 우화>를 발표했고, 이것이 부자와 빈자를 바라보는 방법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  97
두 번째 이야기 - 지위에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
세 번째 이야기 - 가난한 사람들은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어리석음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
새뮤얼 스마일스는 <자조>(1859)에서 궁핍한 젊은이드에게 높은 목표를 세우고, 공부하고, 신중하게 돈을 쓰라고 권한 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돕는 정부는 비난했다. '사람들 대신 일을 해주면 그들에게서 스스로 그 일을 할 동기와 필요를 빼앗게 된다. 법을 인간 발전의 동인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과대평가다. 아무리 엄중한 법이라도 게으른 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들 수 없고, 낭비벽이 심한 살마을 검소하게 만들 수 없고, 주정뱅이가 술을 끊게 만들 수 없다.'  116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  119

V. 불확실성
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다. 생계를 우지하고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면 적어도 다섯 가지 예측 불가능한 요인이 뜻대로 따라주어야 하는데, 이것은 사회적 위계 내에서 자신이 바라는 자리를 얻거나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다섯 가지 이유가 되기도 한다.
① 변덕스러운 재능
지위가 성취에 의존한다면 성공에 일반적으로 필요한 것은 재능과 그 재능을 믿을 만하게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다.  124
② 운
우리의 지위는 '운'이라는 말로 느슨하게 얽어 넣을 수 있는 어떤 범위의 우호적 조건들에 의존하고 있다.  125
승자는 운을 만든다. 이것이 현대의 주문(呪文)이다.  127
③ 고용주
삶의 조건의 예측 불가능성은 우리의 지위 문제가 고용주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더욱 심각해진다.  127
④ 고용주의 이익
고용의 안정성은 조직 내의 정치만이 아니라 회사가 시장에서 계속 이윤으 ㄹ내는 능력에도 달려 있다.  132
⑤ 세계 경제
회사와 종업원들의 생존은 경제 전체의 성적 때문에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기도 한다.  134

우리가 실패에 대한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성공을 해야만 세상이 우리에게 호의를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136
인간은 웃어줄 만한 확실한 이유가 없으면 좀처럼 웃엊지 않는 법이다.  137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에 어떤 동지애가 이룩된다 해도, 노동자가 어떤 선의를 보여주고 아무리 오랜 세월 일에 헌신한다 해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지위가 평생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그 지위가 자신의 성과와 자신이 속한 조직의 경제적 성공에 의존한다느 것, 따라서 자신은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감정적인 수준에서 변함없이 갈망하는 바와는 달리 결코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늘 불안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142-143



해법
I. 철학
명예의 문제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사람들을(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예를 위해 결투하는 관습)  비난하는 눈으로 바라볼지 모르지만, 그러는 우리도 그런 사람들의 정신구조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공휴하고 있을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의 경멸에 매우 약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자존심 역시 다른 사람들이 부여하는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우리도 성질 급하게 결투에 나서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을지 모른다.  152
'다른 사람들의 머리는 진정한 행복이 자리를 잡기에는 너무 초라한 곳이다.' -쇼펜하우어 <소품과 단편집>(1851)
'자연은 나에게 '가난해지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 또 '부자가 되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자연은 나에게 '독립적으로 살라'고 간청할 뿐이다. -샹포르 <격언집>(1795)
'나를 부유하게 하는 것은 사회에서 내가 차지하는 자라기 아니라 나의 판단이다. 판단은 내가 가지고 다닐 수 있다... 판단만이 나의 것이며, 누구도 나에게서 떼어낼 수 없다.' -에픽테토스 <어록>(100년경)  154
철학은 외부의 의견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한다. 상자를 하나 떠올리면 좋을 것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른 살마들의 인식은 모두 이 상자에 먼저 들어가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만일 그것이 참이면 더 강한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만일 거짓이면, 웃음을 터뜨리거나 어깨를 으쓱하고 털어버리는 것으로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주지 못하고 사라져버린다. 철학자들은 이 상자를 '이성'이라고 불렀다.  


철학은 성공과 실패의 위계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 과정을 재구성할 뿐이다.  159
감정은 과녁을 넘어가거나 못 미치기 십상이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이성을 이용하여 감정을 적절한 목표로 이끌라고 충고해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자문해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데미아 윤리학>(기원전 3590년경)에서 인간 행동은 제어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보통 극단으로 흐르는 오류를 범한다고 예를 들어 설명한 뒤, 지혜로우면서도 침착한 중도(中道)를 이상으로 제시하면서, 이성의도움을 받아 중도에 이르는 것을 행동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160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서글픈 동시에 묘하게 위안이 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고 이야기해왔다. 어떤 문제이든 다수의 의견에는 혼란과 오류가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샹포르는 '여론은 모든 의견 가운데 최악의 의견이다.' 
아첨을 하듯이 상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개 언어도단에 가깝다고 덧붙인다. 단순화와 비논리, 편견과 천박함으로 얼룩뎌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나 가장 터무니없는 관습과 가장 어처구니없는 의식들이 '하지만 그것이 전통이야'라는 말로 용인되고 있다.'  163
철학적인 접근 방법의 장점은 심리적인 면에서 드러난다. 누가 우리에게 번대하거나 우리를 무시할 때마다 상처를 입는 대신 먼저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이 정당한지 검토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비난 가운데도 오직 진실한 비난만이 우리의 자존심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  164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피상적이고 하찮다는 것, 그들의 시야가 편협하다는것, 그들의 감정이 지질하다는것, 그들의 의견이 빙퉁그러졌다는 것, 그들의 잘못이 수도 없이 많다느 것을 알게 되면 점차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철학적 연세주의의 중요한 모범을 보여준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165
쇼펜하우어는 묻는다. 정말로 그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할까?
'만일 청중 한두 사람만 빼고 모두 귀머거리라면 그들의 우렁찬 박수 갈채를 받는다 해서 연주가가 기분이 좋을까?'  166
이렇게 인간성을 통창력 있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유용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불리한 점은 이런 관점을 따를 경우 친구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166
쇼펜하우어는 '이 세상에서는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는 곧이어 모든 젊은이들이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충고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만날 일이 줄어 들수록 더 낫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167
철학자들은 함께 모여 연구를 한 것도 아닌데 입을 모아 외부의 인정이나 비난의 표시보다는 우리 내부의 양심을 따르라고 권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하는 것이다.  168

II. 예술
예술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많은 논평자들이 이런 답을 내 놓았다. 별 쓸모가 없다.  171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보라. 영국 문단에서 시인이자 비평가인 매슈 아널드는 제안한다. '인간의 잘못을 없애고, 인간의 혼돈을 정리하고, 인간의 곤궁을 줄이고자 하는 욕망'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세상을 자신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낫고 더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갈망'에 사로잡혀 있다. 예술가들이 이런 갈망을 늘 노골적인 정치적 메시지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스스로 그런 갈망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항의가 나타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고, 아름다움을 인식하도록 교육하고, 고통을 이해하거나 감수성에 다시 불을 붙이도록 돕고, 감정이입 능력을 길러주고, 슬픔이나 웃음을 통하여 도덕적인 균형을 다시 잡아주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174


(저자는 소설 그림 비극 희극 유머를 예로들며 예술작품이 인간의 균형을 위한 어떤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비극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실패에 평소보다 훨씬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 잡품을 통해 실패의 유래를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더 많이 아는 것은 곧 더 많이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211
프로이트는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1905)에서 '우리는 농담을 통해 장애 때문에 공개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적의 우스꽝스러운 부분을 활용할 수 있다.'
'농담의 형태가 아니라면 결코 듣지 않을 사람의 귀에도 들어가게 할 수 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비판할 때 농담을 특별히 애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23
만화가들의 밑바닥에 깔린 무의식적 목표는 유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그런 식으로 조롱할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세상을 만들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234

III. 정치
지위를 분배하는 원칙은 무엇인가?  244
이상적인 지위는 오래전부터 계속 바뀌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 이런 변화 과정을 묘사하는 데 정치라는 말을 사용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246
부를 축적한 사람은 일단 주요한 미덕이 적어도 네 가지는 있다고 칭송을 받는다. 그 네 가지란 창의성, 용기 지능 ,체력이다. 
돈에는 윤리적 가치가 부여된다. 돈은 그 소유자의 미덕의 증거다.  248
이런 이상이 아무리 자연스러워 보인다 해도.. 이것은 단지 인간이 만든 것일 뿐이다.
소스틴 베블런의 <유한계급론>(1899)에서 한 말에 따르면, 상업 사회에서는 덕은 잇지만 가난한 사람은 존재하기 어렵다. 따라서 아무리 물질주의적인 태도와 거리가 먼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부를 축적하여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불명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요구를 느낄 것이며, 그렇게 하지 못하면 불안한 마음과 책임감에 시달릴 것이다.  249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필수품'으로 꼽히게 되었다. 그것들을 소유하지 않으면 아무도 품위 있는 살마이라고 여기기 않으며, 따라서 심리적으로 편안한 생활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250
근대으 성공적 삶이라는 이상은 돈과 선(善)을 연결시킬 뿐 아니라, 또 하나의 연결도 시도한다. 즉 돈과 행복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런 관념은 세 가지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첫째는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확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로 근대 문명에서 접할 수 있는 엄청나게 다양한 직업과 소비재가 우리의 행복과 별 관계없이 욕망만 부추기는 번지르르한 소모적 전시품이 아니라, 실제로의 가장 중요한 요구 몇 가지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쓸 수 있는 돈이 많을 수록 제품과 용욕도 더 많이 이용할 수 있고, 따라서 우리가 행복해질 가능성도 커진다는 것이다.  258
이런 가정들에 반박하는 가장 강력하면서도 읽기 쉬운 책은 여전히 장-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다.  259
선사시대에는 인간이 루소가 말하는 자연 상태에서 살았는데, 이때는 사람들이 숲에 살면서 장을 보지도 신문을 읽지도 않았다. 루소는 이 시기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더 수비게 이해했으며, 만족스러운 삶의 핵심적인 특징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고 상상한다.  260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268
우리는 어떤 직업이 주는 매력도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만 눈에 보이는 것이다.
선망을 멈추지 못한다면, 엉뚱한 것을 선망하느라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인가.  269
존 러스킨은 <이 최후의 사람에게>에서 부에 대한 일반적인 금전적 관점을 버리고 '삶'에 기초한 관점을 채택하라고 호소했다.  271
토머스 칼라일도 <미다스(Midas)>에서 '우리는 삶의 호화로운 장식은 소유하게 되었지만 그 와중에 사는 것은 잊어버렸다... 우리는 현금 지불이 인간들의 유일한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273-274

사회적 위계 때문에 아무리 기분이 상하거나 난처해지더라도 우리는 그런 위계가 너무 뿌리가 깊고 너무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그 위계를 지탱하는 공동체나 신념들을 바꾸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이런 위계가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하여 체념을 하고 그냥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275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들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
이런 과념들은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면 결코 지배를 할 수가 없다.
이데올로기적인 진술의 핵심은 높은 수준의 정치적 감각이 없으면 그 편파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무색무취의 가스처럼 사회에 방출된다. 그것은 신문, 광고, 텔레비전 프로그램, 교과서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이데올로기느 ㄴ자신이 편파적인, 어쩌면 비논리적이고 부당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세상에 접근한다는 사실을 감추면서, 자신은 그저 오래된 진실을 이야기할 뿐이며, 오직 바보나 미치광이만이 여기에 반대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278
'꼭 이래야 하는가?'
억압적 상황은 영원한 고통을 겪으라는 자연의 심판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변화 가능한 어떤 사회 세력들 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잇다. 이렇게 되면 죄책감과 수치감은 이해로, 지위의 더 평등한 분배 방식에 대한 탐구로 바뀔 수도 있다.  279
관념이나 제도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때는 고통의 책임을 아무에게도 묻지 못하거나 고통을 겪은 당시자에게 묻게 된다.  281
정치적 관점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다. 분석을 통하여 이데올로기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밝혀 그 뇌관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어리둥절한 채 우울한 표정으로 대응하던 태도를 버리고, 눈을 똑똑히 뜨고 그 원인과 결과를 계보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284
정치적 어려움을 이해하는 것은 기후 위성으로 기상 상태의 위기를 파악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늘 문제를 막어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거기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유용한 것을 가르쳐 준다. 그 결과 피해의식, 수동적 태도, 혼란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288

IV. 기독교
죽음을 생각하는 관점에서 의미있는 활동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기독교적인 생각과 세속적인 생각은 차이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 진정한 사회관계, 자선에 대한 강조는 공통되는 것 같다. 또 권력, 군사적인 힘, 금전적인 야욕, 명예에 대한 관심을 비판하는 것도 공통되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한 생각 옆에 갖디 놓으면 어떤 행동들은 하찮아 보일 수밖에 없다.  301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전도서>의 저자는 그렇게 탄식한다(1장 2절)
'한 세대가 가면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이 땅은 영원히 그대로이다'(1장 4절)  303
기독교 도덕가들은 불안을 달래려면 낙관적인 사람들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모든 것이 최악으로 흘러간다고 강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천장은 무너져 내리고, 은행은 폐허가 되고, 우리는 죽고,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사라지고, 우리가 이룬 것들, 심지어 우리의 이름마저 땅에 짓밟힐 것이다. 이런 생각이 위로가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지위에 대한 우리으 ㅣ하찮은 걱정을 천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미미함을 바라보며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된다.  320
우리 자신이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느낌은 우리 자신을 더 중요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321

(그림1과 2는 58페이지에 언급된 내용이며, 그림3과 4는 321페이지에 있다.)


물론 기독교는 세속 도시와 그 가치를 없애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도 서양에서 사람들이 부와 미덕을 구분한다면, 또 중요한 사람이냐 아니냐만 따지지 않고 선한 사람이냐 아니냐도 따진다면, 그것은 많은 부분 수백 년 동안 자신의 자원과 위신을 이용하여 지위의 의로운 분배에 대한 몇 가지 특별한 관념을 옹호해온 기독교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342

V. 보헤미아
19세기 초 서구와 미국에서 새로운 집단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들은 소박한 옷을 입었고, 도시의 싼 지역에 살았고, 책을 많이 읽었고, 돈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고, 다수는 우울한 기질이었고, 사업이나 물질적 성공보다는 예술과 감정에 충실했고, 가끔 단발이 유행하기 오래전에 단발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들을 '보헤미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앙리 뮈르제가 파리의 다락방과 카페의 생활을 그린 <보헤미안의 생활>(1851)을 써서 성공을 거둔 뒤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품위라는 부르주아적 개념에 들어맞지 않는 광범위한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351
아서 랜섬은 <런던의 보헤미아>(1907)에서 '보헤미아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태도다'라고 말했다.  352


보헤미안들은 부르주아지가 대표하는 거의 모든 것을 지독하게 싫어했으며, 그들을 무절제하게 모욕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353
보헤미아와 부르주아지를 궁극적으로 갈라놓는 것은 대화의 화제나 후식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누가 높은 지위를 얻을 자격이 있고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하는 문제엿다.  354
부르주아지는 상업적 성공과 공적인 평판에 기초하여 지위를 부여한 반면, 보헤미안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 우아한 집이나 옷을 살 수 있는 능력보다 당연히 더 중요했던 것은 세상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감정의 주요한 저장소인 예술에 관람자나 창조자로서 헌실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보헤미안의 가치 체계에서 순교자적 인물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만들기 위해, 또는 여행이나 친구와 가족에게 헌신하기 위해 안정된 정규 직장과 사회의 존경을 희생한 사람들이었다.  355
보헤미안의 가치 체계에서는 돈으로 명예를 얻지 못하듯이 소유로도 명예를 얻지 못한다. 그것은 오만과 천박의 상징이다.  360
1845년 7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보헤미안 가운데 한 사람인 헨리 소로는 메사추세츠 주 콩코드 시 근처 월든 호수에 자신이 손으로 지은 통나무집으로 이사했다. 
소로는 '사람은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행복해진다.'
'영혼에 필요한 것을 사는 데 돈은 필요하지 않다.'  364
주류 문화와 갈등하면서도 자신 있게 살아가려면 우리의 직접적인 환경에서 작동하는 가치 체계. 우리가 사교적으로 어울리는 사람들, 우리가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보헤미안들의 통찰이다. 
보헤미안들은 대도시에 살면서 지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을 피하고 대신 진정한 친구들과 매일 접촉할 수 있는 동네에 모여 살았다.  364
보헤미안들은 또 실패라는 말도 조심스럽게 재규정했다.
보헤미안들은 세상이 어리석음과 편견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여 외적인 실패를 버로 해석하지 않았다.  366
오해를 받고 거부를 당하며 살지만 그럼에도 인사이더보다 우월한 아웃사이더라는 신화는 보헤미아의 가장 위대한 인물들 다수의 삶을 반영하거나 그 삶을 규정한다.  367
집단과 그 전통은 열등하다는 보헤미아의 믿음과 더불어 개인의 우월성에 대한 강조가 나타났으며, 이와 더불어 관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나타났다.
빅토르 위고는 <에르나나>(1830)의 서문에서 '이제 규칙은 없다. 재능 잇는 사람이 개인적 독창성을 포기한다는 것은 신이 하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에세이 <자립>(1840)에서도 '인간은 모름지기 순응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결코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지 말자... 이 시대의 매끈한 평범함과 비열한 만족을 모욕하고 질책하자.'  372

보헤미아의 과도한 점을 지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많은 보헤미안들이 영적인 관심을 삶의 전면에 내세우는 데 몰두한 나머지 실제적인 문제를 태만히 햇다. 이 대문에 그들은 생존할 만한 일을 찾는 데 안간힘을 써야 했으며, 이렇게 되자 영을 생각할 시간은 줄어들고 몸 생각을 해야 하는 시간은 늘어났다. 심지어 물질주의적이라고 욕하던 바쁜 판사나 약사보다 나을 것이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380


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책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 부터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산업가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보헤미안으로부터 인정 받을 수도 있으며,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철학자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다.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이 아무리 불쾌하다 해도 그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좋은 인생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실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창피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야심을 품고, 어떤 결과들을 선호하고, 자신 외의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데서 나오는성공적인 삶과 성공적이지 못한 삶 사이의 공적인 차이를 인정할 경우 치를 수밖에 없는 대가다.
그러나 지위에 대한 요구는 불변이라 해도, 어디에서 그 요구를 채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창피를 당할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은 어떤 집단의 판단 방식을 우리가 이해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결국 우리가 따르는 가치와 관련이 되는 경우에만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따르는 것은 두려움을 느껴 나도 모르게 복종을 하기 때문이다. 마취를 당해 그 가치가 자연스럽다고, 어쩌면 신이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거기에 노예처럼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너무 조심스러워 대안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다. 이 다섯 집단은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수치와 명예의 구분 자체는 유지하면서, 무엇이 각 항복에 속해야 하는지를 재규정하려 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각 세대마다 높은 지위에 대한 지배적인 관념들을 충실하게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럼에도 패자나 이름 없는 사람이라는 잔인한 규정과는 다른 규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정당성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 판사나 약사의 결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384-385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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