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 라이프를 한다고 해서 갑자기 대단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건 아닐 겁니다. 하지만 비우는 삶 가운데 무엇을 남길 것인가 그리고 어렵게 얻은 여백을 무엇으로 채워나갈 것인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는 태도를 갖게 되었습니다.


심플한 삶에 대한 깊은 철학을 지닌 도미니크 로로 작가의 책 <심플한 정리법>의 한 문장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불행한 사람일수록 더 쌓아두려 한다.'


물건이 넘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은 단순히 정리정돈을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공허감을 물건으로 잊으려 하던 습관에서 벗어나려면 충분한 자정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불행은 곰팡이와 비슷하다고 여겨집니다. 곰팡이가 생긴 벽지 위에 액자를 달아 가린다면 당장은 안 보이겠지만 더 빠르게 벽지로 퍼져나갑니다. 가리기보다는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요기를 내어 오랜 시간 동안 숱한 물건에 가려진 혹은 외면해온 마음 속 얼룩을 드러내고 환시키시려 합니다.


'어떤 물건이 우리의 소유이건 아니건, 얼마든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더없는 풍요 속에 살고 있다.'

도미니크 로로는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 친구들, 대자연과 햇빛, 이것만으로 우리 삶은 충분히 풍요롭다 말합니다.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기 전후의 가장 큰 차이는 물건이 갖고 싶을 때 '내가 왜 이 물건을 소유하고 싶은 걸까?' 하고 질문을 던진다는 것입니다. 혹시 그 물건으로 대신 충족하려고 하는 내면의 결핍이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점검해보게 되었습니다.


미니멀 라이프를 알게 된 것은 제 삶의 큰 행운입니다. '결핍'을 '자발적 선택'으로 새악 자체를 변하게 해주었고, 물건이든 인맥이든 직업이든 모든 선택의 기준이 '남'이 아니라 '나'로 바뀌었으니까요. 내가 만족하면 그걸로 괜찮다고 스스로를 격려하고 싶어졌습니다. 볼펜이 '고작 한 자루밖에 없다는 것'과 '한 자루만으로 이미 충분한 것'이 다르듯이 말입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반성하고 더 노력은 할지언정 그 결핍 자체에 허탈하게 무너지지는 않을 자신이 조금은 생겼습니다.  


'가지고 있는 모습'보다는 '생활하는 모습'에 초점을 맞추면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가지고 있는 건 언젠가는 소멸하지만 충실하게 삶에 임하는 자세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단단해지고 빛날 테니까요.


강석경 소설가는 경주를 두고 '비어 있으면서 가득한 곳'이라 찬사를 했습니다.


민망하지만 본인 공간은 스스로 청소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삶의 자세임을 미니멀 라이프를 하면서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인테리어 스타일은 다양합니다. 건축 기법도 무궁무진하답니다. 하지만 정갈하게 청소를 마친집은 스타일을 떠나 아름답습니다.


청소를 할 때면 몸은 조금 힘들지 몰라도 마음이 편안하게 회복되는 것을 느낍니다. 아울러 우리가 직접 청소할 수 있는 만큼의 집 평수를 가졌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 

부담 없이 즐겁게 관리 할 수 있는 공감으로 충분합니다.


최고의 인테리어는 청소라 생각합니다.


미니멀 라이프를 마음에 두면서 동경하던 것이 있었습니다. 집안 이곳저곳 가구를 손쉽게 이동시키며 여행하듯 사는 거랍니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에서 사사키 후미오는 미니멀리스트란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소중한 것을 위해 줄이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의 저자 곤도 마리에는 물건을 비울 때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물건이란 언제든 가질 수 있고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상에 불과하다는 교만함을 버리게 됩니다. 무생물인 물건이어도 그 본분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배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비움을 위한 비움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으로 채움을 위한 비움이었다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업, 결혼, 직장 같은 미래에 대한 결정은 신중히 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하지만 물건은 능력이 된다면 많이 소유해도 문제 될게 엇다고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너무 성급하게 소유했을 경우엔 그 모든 것들이 미래를 불행하게 만드는 괴로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단순할수록 미래는 안전하다'는 도미니크 로로 작가의 말에 제 생각을 조금 덧붙여봅니다. 단순한 삶이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미래를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을 겁니다. 제게 있어 미니멀리스트로 산다는 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라 불행을 피해 가는 안전한 노선입니다.


예전엔 건강관리를 한다고 몸에 좋은 걸 최대한 많이 찾아 먹고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이것저것 시도해보느라 분주했다면 지금은 '몸에 안 좋은 것을 멀리하자'라는 주의랍니다. 또한 과거에는 잘나가는 인맥들을 최대한 많이 알고 지내려 했다면 이젠 최소한의 인맥이지만 진실된 마음의 교류를 하는 게 편안합니다.


도미니크 로로 작가의 <심플한 정리법>을 읽다가 '그 값어치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자아까지 나누어주는 것처럼 그 나눔의 행위에 완전히 몰입해야 합니다.'


미니멀 라이프가 던지는 물음은 무엇을 비우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남기느냐에 있다고 합니다. 그건 단순히 물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최종적으로 어떤 것을 남기느냐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물을 먹지 않지만 바다 고기는 좋아해요.

개는 사랑하지만 가죽 구두를 신죠. 

우유는 마시지 않지만 아이스크림은 좋아해요.

반딧불이는 아름답지만 모기는 잡아죽여요.

숲을 사랑하지만 집을 지어요.

돼지고기는 먹지 않지만 고사 때 돼지머리 앞에선 절을 하죠.

유명하지만 조용히 살고 싶고

조용히 살지만 잊혀지긴 싫죠.

소박하지만 부유하고

부유하지만 다를 것도 없네요.

모순덩어리 제 삶을 고백합니다.

- 이효리, [모순]

미니멀 라이프를 시작하면서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많이 비웠지만, 취향에 맞는 새로운 물건을 사기도 했어요. 환경을 생각하겠다 말했지만 비닐 포장된 즉석식품을 먹고 플라스틱 일회용 잔에 잠긴 음료를 마시죠. 허세만 부리던 SNS를 안 한다 하지만 블로그에 실제보다 더 그럴싸하게 나온 집사진 올리는 건 좋아해요. 광고에 현혹되지 않으려 하지만 '미니멀리즘 스타일'이라 추천되는 물건에는 눈길이 가요. 간소한 삶을 사랑하지만 지금보다 더 많은 부를 쌓길 원해요.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길 바라지만 백 퍼센트 그렇지 못하는 나의 속마음을 나는 알죠. 평번하길 원하지만 내가 가지 ㄴ조그만 자랑거리라도 돋보이길 바라고 소수의 인맥으로 살고 싶어 하지만 내 글이 많은 사람에게 읽히기 원하지요. 미니멀 라이프를 원하지만 마음 그릇만 미니멀하다는 걸 느끼고 타고난 게으름은 크게 다랄진 게 없네요.


사사키 후미오는 미니멀리스트가 되어서 '왜 저런 걸 샀을까?'하는 비난은 '왜 이런 것도 없을까'와 다를 바 없는 그릇된 태도라고 말합니다. 미니멀리스트로서 추구해야 할 것은 단순히 물건의 개수를 줄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 삶에 집중하는 태도라는 점을 알면서도 타인의 소중한 삶에 이렇다 저렇다 참견을 하고 평가를 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습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삶의 모습이 있고 물건에 나름의 이야기가 잠재되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미니멀리스트의 정의가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것이라면 또 다른 정의는 '타인의 삶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제 마음속 쓸모없는 '교만'이라는 이름의 덩어리를 버리려 합니다.


미니멀 라이프란 편리함 과잉의 시대에 자발적으로 불편을 택함으로 균형을 잡아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편리라는 일방통행만 있던 삶에 불편함이라는 새로운 노선이 생겨 쌍방 통행으로 순환되는 기분입니다.


친구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에는 친구 없이 홀로 살 것을 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친구와의 만남은 축복이지만 그보다 타인이 아닌 자신의 취향과 평온한 일상으로 삶의 기초 틀을 단단히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미니멀 라이프 역시 물건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거나 최대한 물건 없이 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삶의 질서에서 물건이 우선이 되지 않고, 제 영혼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소중하게 지켜지도록 우선순위를 정렬하라는 것입니다.


도미니크 로로는 <심플한 정리법>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이 남기는 유품이 너무 많다면 그건 고통을 남기는 것이며 추억만 남기는 것이 이별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도미니크 로로의 <심플한 정리법>에는 '문제는 우리가 소유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소유하는 방법과 이유에 있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소유하는 것 자체가 아닌, 소유하는 방법과 이유를 괸하라.


물건을 적게 소유한다 해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삶과 물건을 많이 소유해도 감사가 넘치는 삶이 있다면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미니멀 라이프는 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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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길은 내게 잃은 만큼 얻고 버린 만큼 채워진다는 것을, 늘 선택을 강요받고 올바른 선택인지 아닌지 조바심 냈던 삶에 '정답'이란 없음을 가르쳐 주었다. 


작은 배낭 하나로 충분했던 그나르이 여행은 내게 사는 데 필요한 것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제일 먼저 일깨워주었다. 여행을 하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앟았던 생각은 '너무 많이 가졌다'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살아가는지, 그리고 집과 방을 채우고 있는 대다수의 물건들이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지를 말이다. 내 몸의 일부마냥 끌어안고 다녔던 배낭도, 그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수많은 물건들도 사실은 전혀 쓸모없는, 지금 당장 버려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물건이었음을 깨달으며 적지 않은 충격에 휩싸이기도 했다. 없으면 큰 일 날 줄 알았던 전기, 물 같은 것들도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졌다.

그런 생활이 익숙해지니 자연적으로 행복의 기준도 바뀌었다. 여행 전에는지는 대개 갖고 싶었던 물건을 손에 쥐게 되었을 때 행복했었다. 행복의 유효기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사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은 넘쳐났으므로 돈만 있으면 언제든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러니 행복은 자연스럽게 돈과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는 것은 돈이 많았으면 좋게싿는 얘기였고,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행복해지고 싶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여행을 마치고 난 후의 나는 더 이상 돈과 물질에 얽매이지 않았다. 나 스스로에게서 행복을 찾는 법, 무언가를 굳이 소유하지 앟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고 돌아오니 그런 것들이 얼마나 하찮고 쓸데없는 시간 낭비엿는지 수도 없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31-32


여행은 내게.. 비워내지 못하면 새로운 것을 채워 넣을 수 없다는 것, 나는 비우고 버리는 연습이 많이 필요한 어리석고 나약한 인간이었다는 것도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법, 어딘가로 떠나지 않아도 여행할 수 있는 법, 삶에 대한 의지, 좋은 친구들, 가족의 소중함, 사랑, 삶의 가치 등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아직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이 시간이 흘러 어떤 형태로 내게 가르침을 줄는지도 기대된다. 

여행 중엔 많은 것을 잃고 또 많은 것을 얻는다. 잃는 것 중에 절반 이상이 살면서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지만 얻는 것 중에 거의 대부분은 살면서 힘이 될 만한 것들이다.  33


Q. 하던 일을 접고 훌쩍 떠났을 때 두려움은 없었나요? 돌아온 뒤의 불안함 같은 거?

A. 있었죠. 그러나 그때는 떠나고 싶다는 목마름이 더 커서 두려움이나 불안함이 그리 크게 느껴지진 않앗어요.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긍정의 자기합리화였을 수도 있겠지요.

Q. 후회하지 않아요? 그때 떠나지 않으면 포기하지 않아도 될 것들에 대해.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똑같은 결정을 할 수 있을까요?

A. 그다지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포기하로 할 만한 게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포기했다고 한다면,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왔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아요.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저는 똑같은 결정을 할 것 같아요.

Q. 스물아홉은 긴 여행을 떠나기엔 너무 늦은 나이 아닐까요?

A. 하고 싶은 때가 할 수 있는 때라고 생각해요. 떠나지 못하는 건 아마 떠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요? 이것 때문에 안 되고 저것 때문에 안 되는 건 순전히 자기가 만든 룰이잖아요.  39


이제 여행을 시작한 지 겨우 3일이 지났다. '어디서 잘지, 무엇을 먹을지, 어디로 갈지'만을 생각하며 정신없이 돌아다니니 정작 내가 왜 이곳으로 떠나왔는지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떠남의 갈증이 해소되고 나니 또 다른 허무함이 찾아왔다. 그저 '떠나라'는 마음속의 외침에 충실하고 싶었지만 여행으로 인해 많은 것들을 놓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은 항상 나를 괴롭혔다. 게다가 이곳 인도는 자꾸만 나를 지치고 힘들게 만들어싿. 맘 편하자고 여행을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상식조차 통하지 않는 답답한 생활을 도저히 즐길 수가 없었다.  63


바쉬쉿(vashisht)은 마날리에서 4km정도 떨어진 유황 온천으로 유명한 작은 마을이다.

인도 여인들은 탕 안에서 머리를 감고 때를 밀고 세수를 하고 이를 닦았다. 탕속의 물로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탕 속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몸을 꿈쩍할 수가 없었다.

'겨우 며칠 안 씻는다고 죽지는 않는다.'고 위로하며...

탕속의 풍경은 며친 전과 다르지 않았다. 달라져 잇는건 오로지 나 자신뿐이었다.

옷을 벗고 탕 속에 들어갔다.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던 이 낯선 풍경이 몸에 찬기가 덜어질수록 서서히 익숙해져갔다.

이제는 물에 뭐가 섞여 있는지, 깨끗한지 아닌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저 따뜻한 물이 끊임없이 나온다는 사실이 고맙고 또 고마웠다.  68-73


'아, 드디어 서른이다.'

뭔가 달라진 공기를 느껴보려 폐 깊숙이 숨을 들이켜 봤지만 별다를 게 없었다. 어제도 그제도 똑같앗던 공기였고 일상적인 아침이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다자고짜 서른이 주는 의미에만 매달려 있던 내가 아무런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왜 그렇게 그 나이에 집착했던 걸까. 무작정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걸까, 특별한 서른을 맞이하겠다며 떠나온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서른이 되면 무언가가, 정말 막연히 그 무언가가 달라져 있을 거란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졌다.

스스로가 변하거나 노력하지 않으면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85


평범한 일상들이 길 위에선 조금 더 특별해지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여행을 좋아하는 걸까? 지티고 힘들기만 했던 일상을 떠나 그것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일이였는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일, 그것 또한 여행의 몫이리라.  90


푸쉬카르에서 머문 3일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걷고, 카트에 앉아 책을 읽고, 공연을 보고 일몰을 본 게 전부다. 무언가에 쫓기듯 이동했던 인도에서 처음 맛보는 휴식다운 휴식이었다. 급할 게 뭐가 있다고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그렇게 떠돌았던 걸까. 인도가 싫고 인도사람이 싫다며 투덜거리기만 했던 내게 '생각했던 것처럼 행복한 여행이 아니어서 싫고, 좋은 것만 기대했던 네가 싫었던 것은 아니었나?' 되물었다.  97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나의 일상에서 다른 사람들의 일상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굳이 남의 일상에 들어와서 무언가를 느끼고 감동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닐 테다. 다시 내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그들과 함께 했던 또 다른 일상을 추억하며 행복에 젖는 것, 여행자의 몫은 여기까지가 아닐까.  125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매한가지다. 단지 생김새가 다르고 풍습과 문화가 다르다며 신기하게만 생각하고, 특이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 막연하게 기대했던 내 바보 같은 생각이 문제였다.  186


햇살이 눈부셔 눈을 감고 있던 그때, 바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곧이어 발끝을 간질이는 바다 소리가 들리고 자갈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멀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이파리 소리와 풀벌레 소리도 들려왔다.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소리들에 놀라 눈을 번쩍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소음에 익숙했던 내 귀가 처음으로 자연의 소리를 감지했던 것이다.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었다. 여전히 작은 해변에 누워 있는 내가 전부였다. 이렇게 큰 소리를 지금껏 왜 듣지 못했던 것일까. 

나는 다시 누워 눈을 감앗다. 그리고 자연이 내는 경이로운 소리들을 마음으로 끌어당겼다. 파도를 생각하면 그 소리만 크게 들렸고, 바람을 생각하면 파도 소리가 페이드아웃 되고 바람 소리만 다가왔다. 신기하고 놀라운 경험이었다. 내가 무언가를 듣고자 하면 들렸고 듣길 원하지 않으면 또 들리지 않게 됐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텅 빈 상태가 됐다. 무중력 공간을 자유롭게 떠다니는 기분, 이런 게 자유가 아닐까 싶은 편안함을 느꼈다.  200-203


자연이 주는 넉넉한 풍요로움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다음 세대도 이 축복을 공유할 수 있도록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 어쩌면 그것은 여행자로서 제일 먼저 깨닫고 실천해야 할 일일는지 모른다.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여행자는 물론, 인생이라는 여행길을 걸으며 지구에 잠시 머물다 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212


인도에서도 네팔에서도 태국에서도 보았고 우리의 시골에서도 본 풍경들이지만 캄보디아의 풍경은 유독 슬퍼 보였다. 유난히 붉은 길, 그 길 위에 맥없이 떨어지던 붉은 태양. 마른 먼저를 피워내며 달리는 차에서 바라 본 불투명한 풍경들이 마치 오래된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아주 슬프고 가슴 아픈 영화의 한 장면. 가끔씩 울컥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아 내느라 여러 번 거친 호흡을 걸러 냈지만 주책없게 한두 방울이 흘러 나왔다.

여행을 시작하고 나서는 부쩍 눈물이 잦아졌다. 절대로 남들 앞에선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내가 인도사람들과 싸웠다고, 파도소리가 너무 아름답다고, 붉은 흙길이 슬프다고 사람들이 보거나 멀거나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으니 나도 내가 어색해 죽을 지경이었다. 약해 보이면 안된다고 그래서 남의 입에 오르내리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옭아매던 동아줄이 여행을 하는 동안 어느샌가 느슨하게 풀어져버린 것 같았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참고 견디고 다지며 살아왔던가. 힘들고 냉정한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하나씩 쌓아올린 벽, 그것이 나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보호가 아니라 고립, 스스로를 가둬놓은 꼴이 되어버렸다.  222-22


세상 어디에도 슬픔만 존재하는 곳은 없다. 행복만 존재하는 곳도, 눈물만 존재하는 곳도 없다. 이렇게 적당히 고통과 상처가 눈물과 환희로 얼기설기 어우러지며 둥글게 굴러가는 것이다. 사람 사는 건 어디건 닮아 있다. 다시 한 번 그 모습을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놓여진다.  241-242


집에 도착해 내 방에 들어섰을 때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와 깨끗한 이불을 보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매일 같이 잠자리를 구하느라 힘들게 걸었던 시간들과 더러운 시트에 우비를 깔고 자던 기억, 벼룩이 옮아 고생했던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이제 더 이상 고생스럽게 잠자리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이번엔 단정하게 접힌 깨끗한 수건들과 커다란 통으로 가득 채워 잇는 샴푸와 린스를 보고 또 가슴이 먹먹해져 버렸다. 매일 빨아 써야 하고 가끔 물이 안 나와 그냥 냄새나는 채로 말려서 써야했던 한 개의 수건, 불량식품처럼 줄줄이 매달려 있어 하나씩 잘라 썼던 일회용 샴푸, 돈 아끼느라 8개월 동안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린스, 이 모든 것이 너무 감격스러우면서 한편으로는 사치인 듯 느껴져 불편한 마음마저 들었다. 

물론 편리하기는 했다. 전기는 항상 연결되어 잇었고 언제든지 수도꼭지를 틀면 시원한 물이 쏟아져 내렸다. 수건은 넉넉했고 샴푸와 린스도 항상 가득차 있었다. 그런 일차원적인 문제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마냥 고맙기는 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당장 없어진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나는 엄마에게 그리고 가족들, 친구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엄마, 우린 너무 많은 것을 가졌어. 우리가 살면서 필요한 건 이렇게 많지가 않다고!" "동생아, 양치할 땐 물을 잠가라. 지구 반대편에선 물이 부족해 죽어가는 어린이들도 있다." "친구야, 또 뭘 산거야? 너 죽을 때 그거 다 짊어지고 갈래?"

그러나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물을 틀어놓고 양치를 하고 린스를 듬뿍 짜서 머리를 헹궜다. 다 먹지도 않은 찌개를 지겹다며 다른 것을 끊여 달라 잔소리를 하고 옷을 사야 된다고, 상한 머리칼을 다듬어야 된다고 엄마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편리한 생활은 그렇지 않은 생활보다 적응하기가 더 쉽고 빨랐다.  301-302


물질과의 여행이 아니었다. 마음과의 여행에 필요한 물건은 그리 많지가 않다. 나는 여행을 떠나고서야 그것들을 느낀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꽤 많은 곳을 여행했고 가볍게 짐 꾸리는 데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장기 여행을 준비하며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잊고 있었다.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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