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가 인생 최고의 쾌락으로 인정받는 가운데, 여행은 그중에서 가장 값비싸면서도 가치 잇는 소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4


현대인이 소비를 통해 유토피아로 초대된다면, 그 유토피아의 최정상에는 여행의 장소가 있다.  5


아마 현대사회에서 여행 정도의 지위를 부여받고 있는 것은 돈과 사랑 외에는 없을 것이다.  6


이전까지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적 탈출구는 '섹스'라 말해져 왔다. 자유주의, 여권 신장, 자본의 확장은 정확히 섹스 산업의 번성과 맞물렸다. 이제 이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여행이 되어가고 있다.  7

 

사랑이나 여행은 모두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 그것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기 시작하면, 즉 모든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처럼 권유되고 심지어 '강요'되기까지 할 때는 반드시 왜곡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제대로 사랑하고 제대로 여행하려면, 먼저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사랑과 여행을 분명히 보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맹목적으로 요구되는 것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어느덧 자기도 모르게 '욕망'하게 된 것들에 대해 의심해야 한다.  8



나는 여행을 다녀왔다거나 여행을 좋아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꼭 질문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여행에서 무엇을 얻으셨나요? 여행이 왜 가치 있다고 생각하세요? 여행이 왜 좋으세요? 여행을 다니며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19



현대인에게 권태는 일상이 되었다. 그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쾌락도 일상이 되었다. 도시는 권태를 조장하고, 그것을 잊게 만드는 일시적 향락을 제공한다. 

어느 시점이 되면 우리는 깨닫는다. 내가 이 회색의 도시 한가운데에서 탈색되고 있다는 것을, 색채 없는 무미건조한 도시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21



도시는 우리에게 삶의 형식과 안전망을 제공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삶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완벽함 때문에 우리는 도시에서, 그 도시 속에 붙박인 우리의 현시에서 떠나고 싶어진다. 그 이유는 저 태곳적의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모순적이게도, 변덕스럽게도, 용납하고 싶지 않게도 자유와 안락이라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을 모두 원한다.  22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이러한 '이미지를 향한 갈망'을 인간의 중요한 특성으로 지적한다. 라캉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상상계와 상징계로 뒤덮여 있다. 여기에서 상상계란 이미지의 세계이며, 상징계는 언어적 질서의 세계이다. 우리 머릿속은 늘 이미지와 언어로 뒤얽혀 있으며, 영원히 그 두 가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이미지나 언어가 우리를 '완벽하게 만족시켜 주리라' 믿으며 욕망하고 나아가지만, 실제로는 무한한 욕망의 연쇄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면, 뒤이어 다른 이미지를 욕망한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언어(의미)를 획득하더라도, 곧 욕망해야 할 다른 언어(의미)가 생긴다.

여행에 대한 갈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특정한 여행지에, 정확히 말해 그 '여행지의 이미지'에 완벽한 만족이 있을 거라는 환상을 가진다. 그 이미지에는 자유, 낭만, 쾌락, 꿈, 희망, 관능, 행복, 열정, 성장, 드라마, 성공, 여유, 휴식, 모험과 같은 온갖 언어가 덧씌워진다. 이렇게 이미지와 언어가 결합한 '그곳'은 우리에게 뜨거운 갈마의 대상이 되지만, 정작 그곳에 도착하더라도 우리가 꿈꾸던 완벽한 향락은 존재하지 않느다. 우리는 다시 다른 여행을, 여행의 이미지를, 여행이 줄 어떤 언어(의미)를 꿈꾼다.  26



'여행은 단순히 여해이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에 대한 열망들이 집약되어 있다.  27



우리는 자신의 삶에 좀 더 엄밀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욕망, 우리가 선택한 삶의 방식, 결국 우리를 규정하게 되는 존재 방식에 대해 더 엄격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삶은 짧고,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은 지나가고 나서야 후회로 되돌아오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넘쳐나는 가짜 여행들 속에서, 혹은 온갖 욕망으로 점철된 환영들 속에서 '진짜 여행'을 가려내야 한다.  28



'자유'는 모든 조건과 억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어떤 '순수한 상태'라고 오해되곤 한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한계 속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런 자유를 누리는 건 불가능하다. 오히려 자유는 자기가 어떤 현실에 속해 있는지를 아는 것이며, 그러한 현실적 조건들을 어떻게 수정할 수 있는지에 관여하는 것이다. ..

여행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자유는 나를 조건 지어 왔던 수많은 요소들과 의무들에 대해 다시 생각할 최선의 기회를 제공한다. 자유롭다는 것은 뭐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재정립하고 새롭게 장악하며 수정할 수 있는 기회와 힘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31



여행에는 우리가 살아온 현실, 앞으로도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의 논리가 아니라 다른 논리로 살아 보고자 하는 욕망이 들어 있다. 특히 배낭여행객의 마음은 이 한 번뿐인 인생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방식의 삶을 체험해 보고자 하는 욕망으로 움직인다. 그 이후에는 다시 이 현실로 돌아올지라도, 조금은 다른 마음으로, 조금은 다른 형태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미한 희망을 가지고 저 '다른 삶'으로 떠나 보는 것이다.  33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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