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Σωκράτης, 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 5월 7일)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기원전 469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일생을 철학의 제 문제에 관한 토론으로 일관한 서양 철학의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흔히 4대성인으로 불린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기원전 399년에 고소되어 사형을 당했다.
생애
[편집] 소크라테스 문제
역사상의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적 관점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상당한 논쟁거리이다. 이 문제를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적인 글을 쓴 적이 없다. 소크라테스 자신과 생애, 철학에 대한 지식은 그의 제자들과 당대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플라톤의 기록이며, 그 밖에도 크세노폰,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파네스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런 저작들은 정확한 사실이 아닌 철학 또는 극적인 글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제" 소크라테스를 알기는 어렵다. 당대 고대 그리스에서 투퀴디데스(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나 철학자들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다)를 제외하고는, 소크라테스 시대를 사실에 입각해서 서술하는 사례가 없다. 이런 결과,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언급한 사료들은 역사적으로 정확성을 내세울 까닭이 없었으며, 때론 당파적이기까지도 하였다.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처형한 사람들은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사가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업적에 대하여 정확하고 일관성있는 역사를 쓰기 위해 당대 인물들이 쓴 여러 사료들을 일치시켜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반드시 사실적이지는 않으며 다만 일관성을 갖추었을 따름이다. 일반적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에 대해 가장 믿을 만하고 유용한 지식을 제공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동시에 일부 저작에서 플라톤은 자신이 저작속에서 구현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실제 소크라테스의 언행보다 더욱 미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저작이나 유물을 통해서 소크라테스가 단지 플라톤이 날조한 인물은 아님이 드러난다. 크세노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은 플라톤의 저작에 나오는 일반적인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확인하는 데 유용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조각가인 소프로니코스를 아버지로, 해산술을 업으로 하던 파이나레테를 어머니로 하여 아테네의 서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따라 조각을 하면서 다른 청년들처럼 기하학·철학·천문학 등을 배웠고, 중장보병에 편입되어 세 번이나 전투에 참가하였다. 기원전 406년, 500명 공회의 일원이 되어 1년간 정치에 참여한 일이 있고, 40세 이후에는 교육자로 청년들의 교화에 힘썼다.
그는 자연 철학을 배웠으나, 그 기계론적 세계관에 불만을 품었다. 그때는 아테네의 몰락기였으므로 보수적·귀족적인 정신과 진보적·개인주의적·비판적 정신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였다. 그도 이러한 경향을 지니게 되었으나 당시의 소피스트들처럼 궤변으로 진리를 상대적·주관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진리를 찾아서 이상주의적, 목적론적인 철학을 수립하려고 하였다.[1]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의·절제·용기·경건 등을 가르쳐 많은 청년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으나, 공포정치 시대의 참주였던 크리티아스 등의 출현이 그의 영향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어 '청년을 부패시키고 국가의 여러 신을 믿지 않는 자'라는 죄명으로 고소되고, 배심원들의 투표 결과 40표로 이 애국자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는 도주할 수도 있었으나 그의 투철한 준법 정신에 의해서 "악법도 법이다"라고 하며, 태연히 독배를 들어 마시면서 자신이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을 빚졌다며 자신 대신 갚아 달라고 친구에게 당부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 그의 신전에서 치료받은 사람은 닭을 대가로 바쳐야 했다고 한다.)
[편집] 사상
아무런 저서도 남긴 바 없는 소크라테스의 확실한 사상을 알기는 어려우나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 라이르티우스, 크세노폰, 특히 플라톤의 저서 등에 언급된 것을 보면 그는 델피의 신탁인 "만인 중에 소크라테스가 제일 현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스스로의 무지를 자처하던 소크라테스는 신의 신탁이 사실인가 확인 하기 위해 의아심을 품고 여러 현명한 사람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말을 확실히 알고 언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방법으로 제논의 변증법을 활용하여 논변을 진행시키는 사이에 잘못된 판단의 모순을 깨우치고 다시금 옳은 판단으로 유도시켰는데, 이것이 유명한 산파술이다. 그는 합리주의자였으나, 때로는 초경험적인 내심의 소리, 즉 다이몬의 소리를 경청하고, 때로는 깊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였다.
그가 다룬 문제는 종래의 철학이 대상으로 한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었으며 '정신의 배려'를 사명으로 삼았다. 덕은 인간에 내재한다고 믿고 사람들에게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온갖 계층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고 용기나 정의 등에 관한 윤리상의 개념을 설교하고 다녔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해 사약을 마시게 되었다. 그의 탁월한 지적·도덕적 성격에 의해 비단 철학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인류 최대의 교사'로 불리고 있다.
[편집] 변론과 크리톤
'악법도 법이다'(라틴어: Dura lex, sed lex)라는 말이 회자되지만, 소크라테스가 직접 이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변론'에서 법정이 철학을 포기한다면 석방해주겠다는 제안을 하더라도 자신이 철학을 하는 이유는 하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 외에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법 이상의 철학적 원칙과 신념에 기초하여 의사결정을 했던 몇가지 사례들이 있다. 반면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독배를 내린 법률에 대해 자신이 국외 추방을 제의하지 않음으로써 소극적으로 동의한 절차적 정당성을 뒤늦게 훼손할 수 없다고 친구인 크리톤에게 밝힌다. 그러나 '크리톤'은 소크라테스가 평소의 냉정한 변증법적·이성적 논법을 구사하지 않고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모습으로 크리톤을 설득하고 있어서 전적으로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변론'과 '크리톤'의 이런 모순적인 모습 중 '크리톤'에 실린 모습이 과장되어 '변론'에 담긴 법령 불복종자로서의 모습을 누르고 지금까지 이어져왔으며 소크라테스의 일관된 삶과 철학에 비추어불 때 이런 말 자체가 결코 성립할 수없는 것이다. 진정한 철학자는 진리조차도 회의하고 가짜로 드러나는 순간 바로 폐기시키는 엄중함이 있는데, 기껏해야 인위적인 실정법을 무조건 옹호할 수없는 것이다.철학과 법의 기본 성격조차 모르는 무지의 소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어이없게도 독재치하에서 정치에 악용되는 방편으로 원전에 대한 확인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 말을 계속 악용하여 왔다. [2]
[편집] 미(美)
소크라테스는 미학적인 범주를 최소한 셋으로 나누었다. 그 세 범주는 부분의 조립을 통해 자연을 표현하는 '이상적인 미', 시선을 통해 영혼을 표현하는 '정신적인 미', 그리고 '유용한(혹은 기능적인) 미'이다.[3]
[편집] 영향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 전해져 메가라 학파, 퀴니코스 학파, 키레네 학파 등을 이루고, 특히 수제자인 플라톤의 관념주의로서 피어나, 그 후의 서양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4]
그는 일생을 통해 자신이 직접 책을 쓴 일이 없고 또한 문학적 흥미도 지닌 바 없으나 그가 철학의 방법으로 취한 대화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걸작 대화집을 낳게 했고, 그의 독창적 개성과 비극적인 죽음은 전기문학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소크라테스만큼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철학자도 없습니다. 그는 무척 뭇생긴 사람이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천하의 악처러 알려진 그의 아내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 만큼이나 유명한데 실제로 그녀가 그토록 지독한 악처였는지는 불확실합니다. 그는 많은 질문을 통해 스승들을 곤라하게 만들었고
마침내는 아테네 청년들의 스승이 되어 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는어떠한 저서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플라톤을 비롯한
제자들의 글에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그에 대해 알수 있을뿐입니다.그는 아테네에서 태어나 아테네에서 자신의 삶을 마감하엿는데 그가 태어날당시의
아테네는 에게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는 소피스트의 시대를 살았고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전하여 국력이 기울며 몰락하기
시작하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소피스트들에 반대하여 인간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일이었습니다. 소피스트들은 분명 철학의
관심을 인간으로 돌려 놓는 공헌을 했습니다.그러나 그들은 지나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를 설파함으로써 사회의 가치관을 무너 뜨렸고 정신적인 혼란을
던져 주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정신적 혼란기에 나타난 아테네의 스승입니다. 소크라테스는 텔포이 신탁을 계기로 자신이 길을 찾습니다. 어느날 카에로폰이라는 사람이 델포이 신에게 아테네에서 제일 현명한 사람은
소크라텟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신이 거짓말을 할리는 없다고 생각하고자신이 현명한 사람인 이유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한가지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무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소크라테스 자신은 스스로 아는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 때만 무엇을 알수있습니다.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스스로 아는것이 무지를 전제한 후 대화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잘못된 주장에
맞닥뜨렸을대 그 잘못된 주장을 직접 비판하는것이 아니라 상대방이동의할 많안 다른 의견을 제시하며 대화를 이끌어 갑니다.대화 상대자는 소크라테스의
의견에 동의해 나가는 와중에 스스로 자신의 원래 주장을 부정하게 되거나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대화 상대자의 입장에서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것입니다. 그의질문은 집요합니다.그는 피상적인지식이나 독단적인 관념을거부하기 때문에 항상 정확한 대답을
요구합니다. 예를 들어 경건한것과불경한 것에 대해 에우티프론과 토론할때 소크라테스는 경건한 행동몇 가지가 아닌 모든 경건한 행동을 경건하게 하는 경건성
그자체가 무엇인지 말할것을 요구합니다. 마침내 에우티프론이 모든 신이 사랑하는것이 경건이고 싫어하는것이 불경이라고 대답하자 소크라테스는 '신들이
어떤 행동이 경건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들이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경건한 행동이되는 것인지'를 그에게 되묻습니다. 에우티프론은
피상적인 대답만을 반복하고 소크라테스는그 말을 듣고 더욱 구체적으로 되묻습니다. 에우티프론은 결국 그 자리를 떠나고맙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대화 방법은 그 자체로 인간 이성에 대한 믿으믈 표현합니다.그는 보편적인 진리의 존재를 부인할 수없으며 계속되는 대화를 통하여 진리의 길로
접어들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진리에 대한, 나아가 인간의 능력에 대한 회의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인간은 대화를 통하여 자신으 무지를
깨닫고 모든 사람이 공유할수있는 진리를 발견할수있다고 소크라테스는 믿었던 것입니다. ★ 악처가 철학자 남편을 만든다? 세계 4대 성인중의 한 사람인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행패가 대단히 심해서 악처라고
세상에 이름이 높았었다.
어느 날 그녀는 책을 읽고 있는 소크라테스에게 심한 욕설을
한참 동안이나 퍼붓다가 물이 가득 찬
물통을 들고 들어와
"이 못난 영감쟁이야...물벼락이나 한번 맞아봐라.." 하면서
소크라테스의 머리 위에다 물을 쏟아 부었다.
그제야 소크라테스는 책에서 눈을 떼며 털털한 웃음으로
심술궂은 아내와 맞싸우지 않고 유머로써
웃어 넘겼다. 이때 제자들이
몰려와서 남자는 꼭 결혼을 해야 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결혼은 반드시 해야지.
좋은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나쁜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테니까... 훌륭한 수부는 바다에서
사나운 파도와 싸워보아야
하는 것이고, 또 훌륭한 기수는 성질이 사나운 말을
택하는 법이니, 사나운 말을 잘 달래가며 탈수 있는 기수라면 다른 어떤
말 이라도 다 잘 탈수 있듯이 나 역시 성질 나쁜 아내를 잘 달랠 수 있다면
다른 어떤 사람이라도 훌륭하게 상대할 수가 있을 것
아니겠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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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죽음
지금으로부터 2400여 년 전에 죽은 소크라테스는 그의 삶과 죽음, 용모에서 언행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우리에게 던져 주었다.
기원전 469년.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태어났다. 그리고 70년 후, 시민 500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들 중 280명의 유죄 결정에 의해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 500명의 배심원들은 나이가 예순셋 이상인 노인과, 집에서 무료한 시간을 견디기 싫증난 사람들에게는 꽤 잡잘한 액수인 배심원 수당 3오블 -당시 그리스 화폐단위-을 받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소크라테스는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낸 철학자이다. 심하게 못 생긴 얼굴에, 오래 된 누더기옷. 악처로 이름 높은 아내 크산티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인용과,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언 아닌 유언.
아내 크산티페를 두고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그런 여자와 결혼한 이유를 물으면 " 말[마]을 훈련시키는 사람은 거친 말을 다룰 줄 알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식으로 대답하였다.
그의 죽음에 관한 그림은 쟈크루이 다비드, 샤를 알퐁스 뒤프레누아, 푸셍, 켕틴, 페이론 등 많은 화가들이 앞다투어 그려냈다고 한다. 동양에 공자가 있다면, 서양엔 소크라테스를 말한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직접 쓴 저서는 없다.
그런 그가 떠난지 2400여 년. 왜 그의 죽음을 생각하는가. 그는 이땅에 필로(philo,사랑 )과 소피아(sophia,지혜)를 전파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였기에 이땅의 최소한의 규칙을 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악법도 법이다" 라며 독미나리 잔을 받아들였다. 법은 이 사회, 이 세상 사람들을 잘 살게 하려고 만든 가장 작은 규칙이므로.
소크라테스가 인용하였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곰곰 되씹어 본다. 이 말은 현대에 와서 다른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에 의해 "우리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부정하여야 한다"라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우리는 이 두 철인의 말을 모두 되새겨야 할 것이다. 부단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부족한 우리 자신을 더욱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도 작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10%의 희망을 가지고 90%의 불가능을 이겨낸 사람들도 있고, 90%의 사람들을 위한답시고 소외된 10% 의 가녀린 외침을 무시했다가 낭패를 당한 자도 있었다. 이에 대하여 일찌기 성경에서는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위하여---"라는 말을 하였다.
시대의 투철한 시인정신을 지닌 김수영 시인은 "모래야 나는 얼마나 작으냐"라고 반어법적으로 노래하였다.
소수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 주는 사회를 기대하며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을 다시 중얼거려본다.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백발의 노인. 무리의 중앙에 사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군중에게 설파하고있다.
" 모든 것은 자신이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 " 자! 예를 들어볼까요?
여기에 큰돌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돌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요? 이돌에 대한 사람들의 느낌이 모두 다를 것입니다. " 어떤이는 석상을 만들려할 것이고, 어떤이는 주춧돌을, 또 어떤이는 징검다리로, 마당의 의자로 ... 이처럼 사람들은 같은 사물일지라도 자신의 입장과 느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드립니다. 하지만 각 개인의 느낌이 바로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지배합니다. 이러한 느낌은 진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제 각기 진리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견해대로 행동방향을 결정합니다. 이말은 곧 모두에게 한결같이 적용되는 절대적 진리가 없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 진리는 개인의 잣대를 통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연설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고, 그사람은 자신이 가르칠 제자들을 모집중에 있었다.
- 그때 군중을 비집고 들어와 맨 앞쪽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노인이 일어서서 나옴.
군중이 외친다, " 소크라테스 잖아! " 제자(학생)들을 모집하는 강사는 그를 천적으로
인식하는데, 강사는 적지아니 당황한 기색이다.
" 존경하는 강사 선생, 이 무지한 늙은이가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소? " 강사는 마지못해 " 좋습니다. " 라고 말한다. " 선생, 저것이 무엇입니까? " 강사가 답한다. " 돌입니다." 소크라테스 "여러분 중에 저것이 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은 나오십시요.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소크라테스, " 선생, 저것으로 만약 제우스 신상을 만들어 놓는다면 선생은 그것을 신이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돌이라고 하겠습니까? "
강사 " 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돌이라고,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 소크라테스 " 그래요? 그러면 하나 더 물어봅시다." " 저 돌로 만든 제우스 신상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저돌은 더 이상 돌이 아닙니까? "
강사, 얼굴이 더 붉어지며 머뭇거린다. " 강사선생, 저것으로 무엇을 만들든 저것은 언제까지나 돌입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저돌을 신으로 생각한다해도 저돌은 여전히 돌일 뿐입니다. " " 따라서 사람의 생각에 따라 사물이 달라진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 사물은 사람의 생각과 관계없이 사물자체의 고유한 성질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만약 저들이 사람의 생각에 따라, 개, 말도 되고 - 사람의 느낌에 따라 변할 수 있다면 개나 말도 사람의 느낌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
강사는 뒷걸음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더 이상 강사를 몰아칠 생각이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군중들을 향해 몸을 돌리는 사이, 강사는 군중들 속을 빠져나간다.
소크라테스, " 돌로 무엇을 만들든 여전히 그것이 돌이듯, 진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느낌에 관계없이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 " 이 변하지 않는 진리에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군중속의 한 젊은이, 묻는다. " 선생님, 그러면 도대체 그 변하지 않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 소크라테스 " 진리를 묻는 그대는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청년, " 저 말입니까? " " 저는 귀족이고, 남자이며 젊고, 영리합니다. 진리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사실 지금 생각해 보니, 저는 제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아는게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린다. " 웃지 마십시요!" " 이 청년은 지금 아주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 "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는게 있는데 " " 그것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 " 진리를 알기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닳아야 합니다."
" 인간은 모든 동물중 유일하게 자기속에 들어있는 진리를 알아 낼 수 있는 힘을 가졌습니다., 그 일의 시작이 바로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함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자기 뿐 아니라 모든 사람 속에 똑같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보편적인 진리에 따라 행동하면 여러분은 가치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곤 소크라테스는 "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을 남기곤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러면 " 나는 누구인가? " 네델란드의 시인, 극작가, 철학가 - 존 쉘라(1759 - 1801)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합니다.
" 누구나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자신이 매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요구하는 가격은 타인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서 위대하고도 또 미약하게도 된다. "
즉, 우리 모두는 환경이나 운명의 꼭두각시로 창조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고 친구를 선택하고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고 우리의 할 일을 결정하는 힘과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