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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4.05 취서만필(醉書漫筆) - 장석주 평단 2009 03810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재산이며 건물이며 토지와 같다 - 로자 룩셈부르크


'젊은 남자의 냄새에서 육체적 행복을 느낍니다.' - <감각의 박물학> 다이앤 애커먼 백영미 옮김 작가정신 2004

감각 지각이 없다면 이 세계는 무미건조한 회색빛 감옥이나 화산재로 뒤덮인 황무지나 다름없을 것이다.  14

눈과 귀와 혀와 살갗을 즐겁게 하는 이 모든 대상 세계의 물질들을 감각적으로 향유함으로써 사람은 비로소 개별 존재로 거듭나며 자기 삶을 산다.  15


'모든 성스러운 장소에는 침묵이 있다' - <침묵예찬> 마르크 드 스케트 김화영옮김 형대문학 2007

문명사회란 대체로 소란스럽다.

문명사회란 갖가지 소움들을 만드는 사회다.

사람들 대부분은 소움 속에서 태어나 그 속에서 살다가 죽는다.

소움은 선(腺), 내장, 심장, 혈관 같은 신체의 내부기관에 영향을 미친다. 지속적인 소움에 노출된 사람은 혈액순환, 심장체계, 선 분비에 장애를 겪는다. 초저주파음과 초음파들도 불안, 두통, 이명 등을 유발하며, 소음이 일으키는 피자극성, 공격서으 초조감을 오래 방치하면 정신분열증이나 편집증 환자가 될 수도 있다. 소움은 청각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집요하게 위협한다. 소음의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소움의 토대 위에 세워진 문명사회의 음모다.  17

소음고해에 무감각해진 그들은 텔레비전이 '기총소사하듯' 타타타타타 끝없이 쏟아내는 소음 속에서 휴식을 취한다. 어쩌면 도시인들은 항구적 난청자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소리의 부재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주위가 조용하면 그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심적 동요를 감추지 못한다.  18

문명사회에서 침묵은 오로지 소수자의 것이다.  19

말 속에도 침묵이 깃든다. 말들은 그 내부에 긴 침묵과 짧은 침묵을 갖고 있다. 건성으로 듣는 사람들은 소리만 듣지만, 깊이 경청하는 사람들은 말 속에 숨은 침묵에 귀를 기울인다.

책을 읽을 때 집중하면 할수록 주변의 소음을 잠재우는 힘은 강력해진다. 

무엇보다도 책 자체에 깃든 침묵, 문체상의 침묵을 눈여겨볼 수 있다. "생략법의 글쓰기, 불명확한 재현, 단속적인 대화체, 그리고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말없음표"등은 가장 흔한 침묵의 양태들이다. 말줄임표는 통사적 망설임, 판단유보의 기호다. 군데군데 배치되어 있는 그 침묵들은 독자들을 책 속으로 끌어들이고 능동적인 참여를 유도한다. "읽히는 침묵, 그것은 음향적 현실에 겹쳐지는 하나의 부ㅈ제., 자아에 대한 성찰과 세계 인식의 장소다."  20


'죽음은 죽은 자와 관련된 산 자의 문제다.' - <애도> 베레나 카스트 채기화옮김 궁리 2007

죽음이란 무엇인가? 철학자 레비나스는 죽음을 존재가 "할 수 있음을 더이상 할 수 없음"의 상태라고 말한다.  22

죽음은 개체적 현존을 잃는 생물학적 사건이다.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태어나는 순간에 이미 사람의 시간은 죽음을 향해 움직인다. 사람은 상하는 존재인데, 그 사유를 통해 원자와 무한한 것들을 분류한다.  23

죽음은 그 죽음을 겪은 당사자의 문제이기보다는 죽은 자와 관련된 자의 문제다. 

정당한 애도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해 빚어진 상실반응과 병적 슬픔, 그 위기들에서 벗어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애도자의 상실 반응은 일차적으로 삶과 운명의 불가해성에 부딪치며 일어난다. "애도자는 대부분 과거에 몰입하고, 그럼으로써 당연히 한층 더 현실세계에서 소외도니다." 특히나 죽은 자와 심리적, 실제적으로 깊은 공생 관계에 있었다면 그 상실은 '내면의 커다란 공동'과 '전체 인격의 분열'을 가져올 만큼 큰 충격을 불러일으킨다. 많은 애도자들은 의미 존재 신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의심에 빠지고, 더는 살아야 할 이유들을 찾지 못한 채 허우적이게 된다. 세상에서 저 혼자만 고립되었다는 느낌에 빠져들며 소외 속으로 표류하는 애도자들이 겪는 "자기감의 손상"은 매우 심각하다. 따라서 그들이 비정상적인 무의미함 불안 분노에서 벗어나 다시 세상과 조화를 이루며 삶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애도의 과정을 밟도록 이끌어야 한다.  25

죽은 자가 떠난다고 혼자 남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는 이미 우리의 일부가 되고, 죽은 자의 애도도 새로운 삶을 만드는 기회다. 그러니 이별함을 넘어서서 상실과 변화를 견디는 내면의 힘을 키워야 한다. 그것은 '자신을 지지하고 수용하는 환경을 자기 인격을 절충하는 그 무엇으로 내재화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날마다 조금ㅆ기 죽는다. 오늘의 삶은 내일을 살기 위해 죽음에 지불하는 대가다. 그게 사실이라면 죽음이 넘실대는 세계 속에서 매일 '세상에 먹히고 낡아'지며 죽을 준비르 하고 사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26

'사람은 정말 혼자 살 수 있을까?' - <덧없는 행복> 츠베탕 토도로프 고봉만옮김 문학과지성사 2006

카프카는 말한다. "만약 우리가 읽고 있는 책이 정수리를 내려치는 타격으로 우리를 깨우지 않는다면, 그걸 무엇 때문에 읽어야 하겠어?" 그렇다.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책"만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부지런히 책을 구해 읽었으니, 이것은 책으로 유폐하는 것이요. 책으로 망명하는 것이고, 책속의 위리안치였다.  38

뼛속까지 파고드는 정한, 급하게 처리해야 할 아무 업무도 없는 그런 오롯한 자유, 손발을 부지런히 움직여 나를 조각조각 쪼개 분주함 속에 흩뿌리지 않아도 되는 오직 나만을 위해 쓸 수 있는 집중력 속에서 책을 읽는 일은 행복했다. 그 행복이 덧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다른 무엇과 바꾸고 싶지 않았다.  39

루소 철학에서 '현대성'을 엿보려는 프랑스의 구조주의 비평가 츠베탕 토도로프의 안내로 루소 철학의 ㄹ오솔길을 돌아 나왔다. 토도로프는 루소의 사상을 해석하고 재구성하면서 많은 것들을 버리고 오늘에 맞는 것만을 취한다.  41

루소는 늘 혼자이길 바라고, 오롯한 자기 속에서 세계 전체를 향유하길 바랐다. 재미있는 사실은 정작 루소는 은자로 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역시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으며 살고 싶어했던 것이다. 루소는 사람이 불완전하고, 그 불완전성 때문에 '나약한' 존재라고 보았다. 

우리가 누리는, 혹은 누리고 싶어하는 행복은 우리를 가깝고 먼 데서 동심원처럼 두르고 있는 타인들에게서 나온다. 나의 현존과 행복에는 전적으로 타인이 필요하고, 우연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에 덧없다.  42


'걷기는 산이 사람에게 내린 선물이다' - <걷기의 철학> 크리스토프 라무르 고아침옮김 개마고원 2007

걷는다는 것은 육체로 된 삶을 되돌려받는 것이다. 더 많이 자연과 접촉하며 자연과 닿은 감각의 접점에서 일어나는 기쁨과 쾌락들을 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걷기는 고독한 행위다.  44

걷기의 진정한 기쁨을 느끼려면 혼자 걸어야 한다. 혼자 걸으며 세계의 침묵을 음미해 보아야 한다.

혼자 걸을 때 자연은 우리에게 말하기보다 겨청하는 자질을 더 키우게 한다.  45

걷기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의 예기치 않은 만남들, 아울러 돌연한 기후 변화, 즉 돌풍, 폭풍우, 첫눈과의 만남을 예비한다. 

걷기는 우연의 경험들을 선물로 준다.  46

걷기에 태만해짐으로써 우리는 구체적인 세계와의 감각적인 교섭이 크게 줄어들었다.

걷기와 사유하기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걷는 동안 우리는 주변의 사물과 풍경을 바라보고 저절로 사유에 빠져든다. 느리게 걸을 때 '나'와 세상은 사용과 소유의 관계가 아니라 평등한 관계 속에서 감각적 교섭을 한다. '나'의 시선이 자연 속으로 뻗어가고, 자연은 '나'의 안으로 들어온다. 이 상호교섭에서 사유의 씨앗들이 뿌려지고 이것들이 발아해서 싹을 내민다.  47

걷기는 신이 사람에게 내린 공짜 선물이다. 걷기는 근육을 강화시키고 무와 공허 속에서 헤매는 나약한 정신을 굳세게 세운다. 걷기는 생명의 근본됨을 깨닫게 하고, 세계를 몸의 범주 안으로 불러들인다. 걸을 때 불행과 두려움이 작아지고 기쁨과 뜻은 크고 굳세진다면 왜 굳이 걷지 않겠는가?  48


'옷과 함께 시작한 인생, 옷과 함께 끝난다' - <나를 벗겨줘> 카트란 주베르, 사라스탠 이승우 옮김 은행나무 2007

이 책은 옷이란 무엇인가라는 도발적인 물음에 대한 응답이다.  49

제 방에서 혼자 있을 때는 벌거벗고 있어도 괜찮지만 바깥(사회)으로 나올 때는 옷을 입어야 한다. 자연과 본능은 문명 세계 안에서는 숨기고 가려져야 하는 그 무엇이다. 사람을 사회적 존재로 규정할 때, 그 본질은 옷을 입은 존재들이라는 뜻이다.  50

속옷, 특히 팬티는 여성에게 옷차림의 시작이자 기본이다. 이것을 벗는다는 건 어떤의미가 있을까? 한 여성이 미술과에서 검정 정장 아래 감춰져 있는 제 팬티를 남몰래 벗고 돌아다닌다. 여자는 "모든(몸의) 감각(이)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이상한 흥분과 함께 마음이 심하게 동요하는 기분을 만끽한다. "이날 이후,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나는 같은 전략을 사용했다. 지루한 점심 약속, 너무도 심각한 모임, 길어지곤 하는 칵테일파티 등에서 슬쩍 팬티를 벗고 나를 둘러싼 세상이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남 몰래 팬티를 벗어던진 여자가 누리는 심리적 해방감에는 성적 판타지도 얼마간은 섞여 있을 터다. 저자들은 팬티를 벗는 것은 관습의 금기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 자아의 성장으로 나아간다는 것, 특히 "세상과의 관계를 형성시켜온 모성애적 금지사항"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51

사람들은 옷차림이 저마다 독특한 심미 취향이나 개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하지만 대개는 사회가 관습으로 혀용하는 한계 안에서 서로 모방하거나 그 모방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에 지나지 않느나.

인류의 복장사는 최초의 인류가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은 뒤 낙원에서 추방되자 마자 나뭇잎으로 제 몸을 가린 데서부터 시작한다. 몸은 수치스러운 것, 가려야 마땅한 무엇이라는 인식이 옷이라는 필요를 만든 것이다. 그 뒤로 옷은 수많은 금기와 위반 사이의 이항대립을 하며 끝없이 진화해온다.  52


'나는 쇠고기 앞에서 왜 구역질이 날까?' - <육식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신현승옮김 시공사 2002

나는 우리 식탁에 올라올 값싼 미국산 쇠고기가 얼마나 많은 호르몬과 살충제 따위의 화학물질로 오염되고, 그 운송과 도축 과정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자비하며 반생명적인지를, 그리고 미국산 쇠고기가 위생적인 검역을 거쳤을 것이란 믿음이 그릇된 환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리프킨은 축산업자들은 정상 사료에 톱밥, 닭장이나 돼지우리의 분뇨, 산업 오수와 기름 등을 섞고, 조만간 시멘트 가루도 사료첨가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면 비용을 줄이고, 소들의 체중으 ㄹ더 빨리 불려 비싸게 팔 수 있기때문이다. 또한 미국의 느슨해진 위생 검역기준은 질병으로 폐기되거나 가축용 사료로 쓰일 고기조차 소비자용으로 미국 농무부(USDA)의 승인 도장을 받게 한다. 그 결과 미국산 쇠고기는 디스토마, 농양, 낭충증 등 더러운 질병에 감염된 고깃덩이라도 겉 보기에 멀쩡하면 합법적으로 위생 포장육으로 가공된다.

한미 FTA의 체결이 미래 한국 경제의 살 길이라는 논리와 이것을 지지하는 자들이 제입맛에 맞는 것만 제시하는 통계자료들의 연막 아래에 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재앙이 되고 말 그 욕망의 추악함은 숨는다.  63

쇠고기는 우리 입맛을 바꾸어 놓을 것이고.. 그 대가들은 과도한 동물성 지방과 콜레스테롤을 지속적으로 삼켜 생긴 비만과 심장병, 유방암, 당뇨병, 뇌졸증과 같은 '풍요의 질병'들이다. 막대한 곡물 사료로 생산한 쇠고기는 "불에 찬 삼림, 침식된 방목지, 황폐해진 경작지, 말라붙은 강이나 개울을 희생시키고 수백만 톤의 이산화탄소, 아산화질소, 메탄을 허공에 배출시킨 결과"다.  64

육식의 중단은 고름 "비육자오가 도살장에서의 고통과 모욕"에서, 그리고 "뿔 제거, 거세, 발정 억제, 호르몬 주입, 항생제 가다 복용, 살충제 살포, 자동화된 도살장의 해체 공정에서의 무의미한 죽음"에서 해방시키는 "상징적 실천적의미를 지닌 인도적인 행위"다.  65


'우리는 브랜드 제품을 쓰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 닐 부어맨, 최기철 윤성호옮김 미래의 창 2007

로고가 말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우리가 자발적으로 기업의 로고를 달고 다니는 그 자리는 옛날 노예뜰이 누군가가 제 소유주임을 증명하는 기호나 글자 같은 것이 새겨져 있던 자리다. 노예 상인들은 노예의 이마나 가슴팍에 불로 달군 쇠로 낙인을 찍었다. 비싼 돈을 주고 사서 자랑스럽게 쓰는 브랜드는 그것이 곧 우리의 소유주임을 증명하는 우리 신체에 찍힌 낙인과 다르지 않다.

제품 광고는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의 욕망과 기호들의 내용을 결정하고, 결국은 우리의 의견과 관습을 지배한다. 광고들은 우리가 특정한 브랜드의 제품을 씀으로써 자아 성취와 성공과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설득한다.  69

닐 부어맨은 블내드 제품들을 공개적으로 불사른 뒤 브랜드가 없는 아주 값싼 제품들을 사 쓰며 불편하게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가 버린 것은 쇼핑의 쾌감과 명품 소유에서 오는 헛된 만족감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덜 쓰고 덜 일하라는 것, 그리고 소비주의에 굴종하지 말고, 온전한 자기 삶을 살리는 것이다.  71


'양심적 병역거부자 혹은 가혹한 편견' - <평화의 얼굴> 김두식 교양인 2007

<평화의 얼굴>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한 책이다. 이 놀랍도록 진지하고 감동적인 책을 서가에서 다시 꺼내 읽는다. 이 책은 총을 들지 않을 자유와 양심의 명령에 따를 수 있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에 대한 시종일관 뜨거운 옹호로 읽는 이의 가슴을 시리게 한다.  73

양심적 병역거부는 이미 일제시대 때인 1939년에 여호와의 증인인 옥응련과 최용원 등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해서 처벌을 받았다. 천황에 대한 충성서약을 거부하고, 전쟁에 나가 총으 ㄹ들고 싸우는 것을 거부하고 감옥으로 갔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 대부분은 안식교의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다.  74

미국과 영국은 징병제가 없지만, 헌법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있다. 아예 징병제를 실시하지 않는 나라들이 70여 개국이고, 독익, 덴마크, 오스트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노르웨이, 핀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에스토니아, 폴란드, 헝가리, 키프로스, 브라질 등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나라다. 그리스는 민간 대체복무를, 러시아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헌법으로 인정한다. 쿠바는 청소년 노동부대를 대안으로 따르게 하고, 타이완도 2000년도부터 대체복무를 허용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장 가혹하게, 가장 많은 병역거부자들을 감옥에 가둬 온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라고 말하는 김두식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아니다.  75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병역"문제만이 아니라 누구나 양심에 따라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기본권 확대에 대한 시금석이다. 

소수자의 인권을 지키고 그것을 키우는 일에 반대하고 불관용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권리에 대한 포기가 될 수 있다. 그것은 타자의 권리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누리고 지켜야 할 권리인 까닭이다.  77


'일본을 타자의 시선으로 분석하다' - <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김윤식오인석옮김 을유문화사 1974

일본인은 처음부터 일본인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어린 시절의 훈육에 의해서 일본인으로 가공된다. 훈육은 본서을 억압하고 타자(사회)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자기 수련들로 채워진다. 그래서 본성(본마음)위에 여러 번 덧칠되어 만들어진 가공된 인격이 나타난다. 일본인의 예의바름은 옷칠과 같이 가공된 인격의 표현이다. 그드르이 이중적인 태도들은 본마음과 가공된 인격 사이의 균열에서 나온다 "그들은 그들 마음속에 숨을 죽이고 있는 반항심에 두려움을 품고, 궅으로 부드러운 태도를 가장하여 그것을 숨긴다. 그들은 때때로 그들의 진짜 감정을 의식하는 것으 방지하기 위하여 쓸데없는 일에 몰두한다. 그들은 훈련에 의해 매우게 된, 그들에게는 실제로 전혀 무의미한 일상적 일을 단지 기계적으로 수행한다." 일본인의 이중성은 비난받아야 할 패덕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을 명예로 알고 그에 따라 훈육된 결과물이고 시네으 표면에 각인된 관습이다.

'국화'와 '칼'이라는 비대칭적인 은유는 일본인의 이중적 인격을 잘 드러낸다.  80-81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의인 한 사람' - <스콧 니어린 자서전> 스콧 니어링 김라합옮김 실천문학사 2000

스콧 니어링은 타고난 비순응주의자로, 반자본주의, 친사회주의,ㅡ 반전, 친평화의 길을 걸어간 반전운동가, 평화주의자, 저술가, 채식주의자로 살았던 사람이다.

헬렌 니어링(스콧 니어링의 아내)이 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서 "간소하고 질서 있는 생활을 할 것, 미리 계획을 세울 것, 일관성을 유지할 것, 꼭 필요하지 않을 일을 멀리할 것, 되도록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할 것, 그날그날 자연과 사람 사이의 가치 있는 만남을 이루어가고, 노동으로 생계를 세울 것, 자료를 모으고 체계를 세울 것, 연구에 온 힘을 쏟고 접촉을 유지할 것, 원초적이고 우주적인 힘에 대한 이해를 넓힐 것, 계속해서 배우고 익혀 점차 통일되고 원만하며, 균형잡힌 인격체를 완성할 것"을 인생 목표로 삼고 자기 길을 걸어간다..."  86-87

우리에게 권고하는 삶의 방식은 

1.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

2.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라.

3.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

4. 집, 식사, 옷차림을 간소하게 하고 번잡스러움을 피하라.

5. 날마나 자연과 만나고 발 밑에 땅을 느껴라.

6. 농장일 또는 산책과 같이 힘든 일을 하면서 몸을 움직여라.

7. 근심을 떨치고, 하루하루씩 살아라.

8. 날마나 다른 사람과 무엇인가 나누라. 혼자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무엇인가를 주고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를 도와라.

9. 삶과 세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라. 할 수 있는 한 생활에서 유머를 찾아라.

10. 모든 것에 내재해 있는 하나의 생명을 관찰하라.

11. 모든 피조물에 애정을 가져라.  88-89


'눈물로 읽은 홀로코스트의 대서사시' -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이현경옮김 돌베개 2007

수용소에서 수인들의 평균 수명은 고작 3개월이었다고 한다. 이 책은 그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프리모 레비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다.  127

한 열차로 이송된 포로들은 분리작업을 거치는데, 유용한 노동력으로 분류된 100명 남짓의 사람은 살아남고, 다른 쪽으로 분류된 500여 명이 훨씬 넘은 사람들은 이틀 후까지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128

나치의 수용소는 절멸의 수용소요, 살아 있는 사람이 가는 연옥이다. 수백만의 유대인을 그 연옥에 가두고 죽인 히틀러와 그의 수하들은 말들을 바꿈으로써 저들이 하는 짓의 비열함을 가린다. 학살은 최종 해결책으로, 강제 이송느 이동으로, 가스실 살해는 특별처리로, 말 바꾸기는 그 행위의 더러움과 최악을 가리려는 상징 조작이다. 가족, 집, 자신의 오래된 습관, 옷, 신발, 이름, 심지어는 머리카락까지 다 빼앗긴 채 누더기를 걸치고 유령처럼 서 있는 사람들. 가혹한 노동과 굶주림과 질변과 피로, 그리고 학대와 수모에 지틴 그들은 이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존엄성이나 이성적인 판단력도 잃고 오로지 고통과 앙상한 생물학적 욕구만 남은 짐승이고 벌레들이다.  129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가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내일 살아남을 기약기 없기에 '내일 아침'이라는 말이 금기어가 된 이 연옥에서 청결엣 대한 ㅇㄱ구는 뜻없는 사치가 아닐까. 그는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몸 씻기는 사치가 아니라 사람다움을 말살하려는 자들의 음모에 저항하는 행위다.  130

안타깝게도 프리모 레비는 1987년 4월 11일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프리모 레비는 죽기 한 해 전에 '우리는 어떤 근본적인 뜻밖의 사건을 집단적으로 목격했다. 뜻밖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예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근본적인 것이다... 과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러므로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131


'질서, 균형, 비율, 우아함이 한데 어우러진 건축은 교향악이다' - <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정영목옮김 이레 2007

보통의 책을 읽을 때 오는 기쁨과 보람들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독창성, 해석의 도발성과 신랄함, 문학적 수사의 뛰어남, 핵심을 찌르는 점잖은 유머들에서 비롯된다.  140

보톤은 집이 기억과 이상의 저장소라고 말한다. 삶이 피할 수 없는 고난이며 저주받은 시간이라면 집은 그 고난에 대한 따뜻한 보상이며 저주받은 시간들에 대한 위로다.  141


'작고 단순한 클립도 사색의 대상으로 부족함이 없다' - <사물들과 철학하기> 로제 폴 드루아 박선주옮김 동문선 2005

사람들은 사물들 속에서 태어나고 이것들 사이에서 살다가 죽는다. 사람은 평생을 사물 사용자로 산다. 사물에 대한 사유는 어느 순간 그것의 사용자에 대한 사유로 이동한다. 그 이동은 기발하면서도 유쾌하다. 산다는 것은 사물 사용자로 산다는 뜻이다. 사람은 사물을 만들고, 그것들과 함께 살아간다. 사물들의 소리없는 혼합속에서 우리는 숨쉬며 살아간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사물 사용자로서 그 의무를 다했다는 뜻이다.  199


'공항과 기차역에서 이방인을 만나다' - <다른곳에서 사유하자> 니콜 라피에르 이세진옮김 푸른숲 2007

낯익은 것들은 편안하다. 그 편함에 길들여지면 편한 것을 규준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화는 편협함게 빠지기 십상이다. 편협함에 사로잡힌 자는 자기 지역의 관습과 체험을 우상으로 섬긴다. 그러면 차이에 대한 열린 마음을 잃고 폐쇄적인 지역주의자가 될 수 있다. 몽테뉴는 그런 사람을 이렇게 꼬집는다. "저마다 자기의 관습이 아닌 것을 야만이라 부른다. 우리는 자기가 사는 고장의 풍습이나 견해에서 얻은 사례나 관념만이 오로지 진리나 이성의 규볌인 것처럼 생각한다." 모험과 변화를 거부하는 정주(定住)는 폐쇄, 범주, 분류, 위계, 배열의 관념 속에 자기를 가둔다. 어차피 현대사회는 안주를 쉽게 허락하지 않느다. 세계는 점점 더 이곳저곳을 떠돌며 사는 운명으로 우리를 밀고 나간다. 이미 정주의 역학보다는 이동, 이주, 이산, 망명, 유배 들에서 비롯된 전환적 사고가 오늘의 삶을 만드는 더 중요한 조건이다.  206


'삶의 무게, 그것은 무거울까 가벼울까?' - <무거움과 가벼움에 관한 철학> 베르트랑 베르줄리 백선희옮김 개마고원 2008

예술의 가치를 판단할 때 그 척도의 하나가 깊이의 있음과 없음이다. 무엇이 깊이인지에 대해 한 마디로 정의내리기는 어렵다. "모든 것이 깊이를 통해 정의되기에 그 무엇도 깊이를 정의내릴 수 없다. 따라서 깊이는 정의 내리는 것이 불가능하며, 삶이 품은 무한의 내면에서 말을 한다."

무거움과 가벼움은 어느 한쪽만으로 완전하지 않다. 둘은 조화와 균형 속에서 빛난다. 무거움이 사물의 깊이와 정신의 진지함이라는 미덕으로 찬미된다면, 가벼움은 사물의 높이와 정신의 자유라는 미덕으로 찬미되어야 한다. 슬픔은 무겁고 웃음은 가볍다. 땅은 무겁고 하늘은 가볍다. 몸은 무겁고 영혼은 가볍다.  212

가벼움은 세상의 균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가벼움을 잃을 때 마음은 침울해지고 세상은 칙칙해진다.  213

마냥 가벼운 것이 아니고 무거움을 이상으로 품은 가벼움, 혹은 마냥 무거운 것이 아니고 가벼움을 이상으로 품은 무거움, 경쾌하게 진지해지기. 현실은 그 모순형용이 아타나는 지점이다.  214

잘 살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고, 끝없이 성찰해야 한다.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 안에 빠져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바로 거기에 가벼움의 힘이 있다. 무거움과 단절할 줄 아는 힘이다. 가벼움이 가벼울 때 무거움도 깊어진다." 무거움의 반동은 가벼움을 , 가벼움의 반동은 무거움을 부른다. 존재의 위대함에 다가가는 길은 가벼움도 아니요 모거움도 아니고, 깊이와 높이 사이에 걸쳐져 있는, 무거운 가벼움, 혹은 가벼운 무거움의 길이다.  215


'정주민이 아니라 유목민으로 살아라!' - <천개의 고원>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김재인옮김 새물결 2001

세계는 거대한 사막이고 책은 오아시스다. 나는 오아시스를 찾아 사막을 횡단하는 여행자다. "책에는 대상도 두체도 없다. 책은 갖가지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들과 매우 다양한 날짜와 속도들로 이루어져 있다. 책이 어떤 주체의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 질료의 구실과 이 질료의 관계들의 외부성을 무시하게 된다. 지질학적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선한 신을 꾸며낸다. 다른 모든 것들처럼 책에도 분절선, 분할선, 지층, 영토성 등이 있다. 하지만 책에는 도주선, 탈영토화운동, 지각변동 운동들도 있다. 이 선들을 좇는 흐름이 갖는 서로 다른 속도들 때문에, 책은 상대적으로 느려지고 엉겨 붙거나 아니면 반대로 가속되거나 단절된다. 이 모든 것들. 즉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물을 구성한다. 책은 그러한 배치물이며, 그렇기에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 될 수 없다. 책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책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의 들판으로 나가게 만들며, 있음을 넘어서서 생성으로 나를 이끈다. 책은 혈통 모델이 아니라 이질성의 집합체인 반(反)계보로 나를 이끌어 나의 내면 형질을 바꾸고 새로운 세계와 접속하게 하고 끊임없이 재배치한다. "책은 세계의 탈영토화를 확실하게 해주지만 세계는 책을 재영토화하며, 다시 책은 스스로 세계 안에서 탈영토화된다." 나는 하나의 지층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책과 더불어 탈영토화하고, 세계에 의해 재영토화했다가, 다시 책과 더불어 탈영토화하는 존재다.  217


''앎의 거인'으로 추앙받는 다치바나 다카시' - <피가 되고 살이되는 500권,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 다치바나 다카시 박성관옮김 청어람미디어 2008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이유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왜 시간이 없을까?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많은 시간을 별 소용이 없는 걱정을 하는 데 써버린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늘 시간이 없다.

사람들은 제 삶의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낸다. 그러고는 항상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더 단순하게 살라. 삶을 단순화시키면 자기를 위해 쓸 수 있는 더 많은 시간들을 찾아낼 것이다.  272

책은 인류 문화사 안에서 최고의 발명품이다. 문화는 그 본질에서 놀이다. 책을 미친듯이 읽는 행위가 앎에 대한 욕구와 상관이 있다면, 책에 몰입하는 행위는 놀이의 즐거움 속에서 자아를 구속하는 현실의 모든 제약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해방과 자유에 대한 꿈과 상관이 있을 것이다.  274

그 역시 젊은 시절 미혹과 방황을 거듭하다가 책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275


'글쓰기는 지도 없이 떠나는 새로운 여행'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권진욱옮김 한문화 2000 

나탈리 골드버그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글쓰기를 "매번 지도 없이 떠나는 새로운 여행"이라고 한다. 팔다리가 튼튼한 사람이면 누구나 걸을 수 있듯이 몸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글을 쓸 수가 있다. "언어가 배꼽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을 느끼라. 머리를 위 속으로 끌어내리고 소화시키라. 당신 육체가 양분을 빨아들이도록 내버려두라. 인내심을 가지고 한결같은 균형을 유지하라. 생각이라는 단계 밑에 있는 무의식의 세계속으로 당신의 핏줄 속으로 글쓰기를 삼키라."  283

글쓰기는 자기를 표현하는 일이자 수행이다.

"만약 당신 몸이 진정으로 글쓰기에 실려 있다면, 거기에는 글을 쓰는 사람도 없고, 펜도 없고, 생각도 없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오직 글 쓰는 행위만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글이 글을 쓰도록 하라. 당신은 사라진다."

글쓰기를 방해하는 첫 번째 장벽은 망설임과 근거없는 두려움이다. 사람들은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로 재능이 없다거나 시간이 없다고 변명하지만 그 본질은 두려움이다. 그 장벽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결코 글을 쓸 수가 없다. 이 두려움은 얕은 앎과 이성에서 나온다. 

망설임과 두려움을 넘어서서 곧바로 글쓰기의 심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게 용기다. 글을 쓰는 데 필요한 것은 지식이나 영감이 아니라 제 자신의 실체를 똑바로 볼 수 있는 용기다.

두번째 장벽은 게으름이다. 글을 쓰려면 해야 될 일들이 마구 떠올라 마음을 흐트러뜨린다. 진실은 내 앞에 널린 일들이란 진짜 해야 될 일들이 아니고, 글쓰기에서 도망가려는 마음이 만든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골드버그는 "바보가 되어 시작하라. 고통에 울부짖는 짐승처럼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시작하라." 

글쓰기의 또 다른 장벽은 내면의 검열관이다. 이 검열관은 끊임없이 글쓰기에 끼어들어 온갖 잔소리를 하고 간섭을 한다. 이 검열관은 결국 글쓰기의 의욕을 꺾고 글쓰기를 포기하게 만든다. 그 장벽을 넘어서는 방법은 내면의 검열관이 가진 눈과 입을 막아버리는 일이다. 이 내면의 검열관이 간섭하게 놔두지 마라. 그를 내면에서 쫓아내버려라. 너무 잘 쓰려고 하지도 마라. 뭔가를 쓰려고 하면 마음에 길이 열린다. 두려움을 버리고 그 길을 걸어가면 된다. 멈추지 말아야 한다.

"뼛속까지 내려가 자기 마음의 본질적인 외침을 적어내라!"  285-286


'햄릿을 읽지 않고도 그 잡품을 말할 수 있는가' -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 김병욱옮김 여름언덕 2008

문명사회에서 책을 읽지 않는 일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며, 타인에게 어떤 책들을 읽지 않았다는 고백은 마치 고해성사에 견줄 만한 무의식적 죄책감을 수반한다.  287

이 책은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해 말하는 사술을 가르치거나 비독서를 권장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바잘적 책읽기를 장려하고, 독서와 비독서 사이의 불확실한 경계, 책을 읽는다는 것의 진정한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준다.

한 권 한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책에 관한 총체적 시각을 갖고, 책과 책 사이의 소통과 연결선들을 하는 것이다. 교양은 책을 읽어내는 능력과 책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전체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 줄 안다는 것, 즉 그것들이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각각의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 놓을 수 있다는 것"에서 길러진다.  288


'먼 나라, 아름다운 도시와 사랑에 빠지다' - <도시의 기억> 고종석 개마고원 2008

나라 밖 도시들을 스치면서 그 영혼과 눈이 맞아 나눈 연애의 기억들, 그 소통과 교감의 기억들, 종종 자유를 넘어 방종으로 치닫는 향연들 속에서 이루어진 여러 겹의 이야기들을 풀어놓은 에세이다.  349

거기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 그 시간의 두께는 아무문제가 아니다. 사랑은 단 한순간, 하루만에도 싹트고 열매를 맺는다.  351


'우리 삶은 가보지 않은 길이 이끌고 간다' - <열대 오지에서 보낸 한 달 안식월> 김수영글 박병혁사진 황소자리 2008

이 책은 필리핀 오지에서 보낸 한 달의 기록이다.

이 책은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여정의 기록이며, '나'를 묶고 있는 것들에서 자유를 찾으려는 분투기, 상처받은 내면을 치유하고 회복으로 나아가는 자기고백서다.  360



- 나의 독서편력기

책과 친해지고, 책을 잘 읽을 수 있는 나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먼저 책에 몰입한다. 몸과 마음을 이완하고 책에 흠뻑 빠져든다. 몰입을 통해서 마침내 책과 하나가 되면 마치 무릉도원에 든 듯 행복해진다.

둘째, 책읽는 즐거움 그 자체를 소중하게 여긴다. 책읽기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한다면 지속하기 어렵다. 

셋째, 책 사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 읽어야 할 책들을 꼼꼼하게 고르고 그것들을 사들인다. 책들을 고르는 과정에서 이미 책읽기는 시작한다. 

넷째, 읽은 책들을 다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읽은 것들을 다 기억할 수도 없을뿐더러 기억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기억은 상상력을 한정하지만, 망각은 무한상상력의 텃밭을 일구는 쟁기다. 그런 까닭에 망각은 풍요화로 나아가는 길이다.  379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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