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현대사가로의 여정

자유로운 독서토론 모임처럼 효율적인 지식축적방법은 없다. 특히 권위 있으면서도 개방적인 중심축이 있을 때는 그런 모임은 아름답게 효율적으로 굴러가게 마련이다. 18

현대사의 많은 난제들을 풀어낼 수 있는 시각을 갖지 못한 자는 사상을 구성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45


여순민중항쟁은 1948년 10월 19일 밤부터 시작하여 10월 27일, 그러니까 8일만에 여수시가 불타면서 일단 진압되었으나, 여수 제14연대 군인들을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이 지리산 등지로 피신하여 저항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우리는 그들을 “공비”니 “빨갱이”이 “빨치산”이니 “반란군”이니 하는 말로 불렀다. 따라서 지ㅣ리산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단지 큰 산 아래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80살 생일기념으로 지리산입산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6년 6개월 동안(정확하게는 1948. 10. 19. ~ 1955. 4. 1. 총 6년 5개월 13일) 쌩피를 보고 살아야만 했다. 낮에는 토벌군의 총에 죽고 밤에는 산사람의 위협에 시달리고 …… 106


제3장 해방정국의 이해


역사는 이중주로 읽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해방을 기뻐한 사람이 더 많았을까? 좆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았을까? 민중 대다수는 물론 기뻐했다 그러나 민중을 지배하고 살았던 지배계급 중에는 해방을 기뻐한 사람보다 해방을 저주한 사람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상기해야 한다. .. 해방을 저주한 사람들! 해방을 슬퍼한 사람들! 해방 때문에 좆됐다고, 패가망신했다고 통곡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역사가 진정 이 민족의 역사였고, 해방 후 오늘까지 진행되어온 불행한 역사를 야기시킨 주체세력이었다. 114

해방의 아이러니 .. 첫째는 "해방(Emancipation)"이 우리 민족에게 "독립(Independence)"을 선물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는 해방 그 자체가 불행하게도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량에 의하여 독자적으로 수행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
셋째로, 해방은 갑작스러운 "권력의 공백"을 초래하였고, 이 공백을 메워가는 세력들의 새로운 전쟁을 야기시켰다.
넷째로, 해방은 이념적인 주체가 확실치 않았기 때문에, 우리 민족에게 이념의 갈등과 혼란을 선물했다. 114-115

여운형을 알아야, "인민위원회"가 이해된다. 나의 친구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추구하면서 결론적으로 이런 말을 했다 : "한국전쟁의 기원은 결국 미군정의 인민위원회의 탄압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126

일제 강점기의 문헌에 거의 "빨갱이"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김득중이라는 사학자(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가 <빨갱이의 찬생 - 여순사건과 반공국가의 형성>이라는 사건의 추이를 상세히 보고한 좋은 책을 썼는데, 책제목이 말하고 있는 것은 결국 "빨갱이"라는 말 자체가 여순민중항쟁을 계기로 국민의 심상에 공포스럽고 저주스러운 그 무엇으로 박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지만 매우 중요한 인식론적 과제상황을 토축시킨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상당부분의 보캐블러리(vocabulary)(어휘, 용어)가 이미 국가 권력에 의하여 왜곡된 형태로 의미부여가 된 그인식체계 속에서 활용되고 있고, 그것이 마치 보편주의적 정론인 것처럼 과거사의 인식을 도배질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개념의 오염, 그리고 그 오염의 확산, 그것은 진정코 우리가 역사인식에 있어서 매우 조심해야 할 과제상황이다. 128

"개념의 오염"이라고 부르는 인식론적 편견에 관한 것이다. "빨갱이"라는 말처럼, "인민(人民)"이라는 말만 붙게 되면 우리는 "좌빨"이니 "좌익"이니 "공산주의자"니 하는 터무니없는 망념, 온갖 부정적인 의미규정을 부여하게 된다. 그러나 해방 후 공간에서 "인민(因民)"이라는 말은 전혀 그러한 색조를 가진 말이 아니었다. "인민"은 조선시대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장 흔한 일상적 개념에 불과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대한민국 헌법의 원조, 1919년 4월 11일에 제정)에도 제3조는 이렇게 되어 있다. :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급(及)빈부의 계급이 무(無)하고 일체 평등임." "인민"이라는 말이 계속 쓰였다. 130

"인민위원회"는 이념적 색깔을 가진 특별한 조직체가 아니라 자생적인 그래스루츠의 "보통사람위원회"였을 뿐이다. 이 인민위원회를 빨갱이들로 규정하 것은 "한민당"의 수구꼴통들이었다. 131

이승만은 누구인가?
젊은 날의 그는 외모가 멋이 있었고 영어를 잘했다. 이승만이 외교활동노선의 명분을 견지하면서도 실제적으로 독립운동이나 여하한 진실한 투쟁과 무관한 인간이 된 것은, 일차적으로 상해임시정부 인간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아니, 상해임정뿐이 아니었다. 3.1독립만세의거 이후에 사방에서 성립한 임시정부들이 모두 이승만을 국무총리, 국방총리, 집정관총재 등의 이름으로 추대하엿던 것이다. 이에 재빠르게 이승만은 미국 워싱턴D.C.에서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의 사무실으 열고, 남이 믿거나 말거나, "대한공화국"의 "대통령"이라는 이름을 마구사용한다. 영어로는 "Dr. Syngman Rhee, The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라고 했는데. 사실 그때 ㅇ모든 임시정부에는 대통령제가 없었고, 정부는 어디까지나 임시정부였으아 이미 "임시"라는 말을 떼어버리고 "대한공화국의 대통령"이라는 칭호로서 세계 국가원수들과 파리강화회담의 장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을 발송했다.(시카고 한인교포들이 만들어 유포시킨 홍보용 컬러우편엽서에는 그의 한성감옥 죄수사진과 박사학위 수여모를 쓴 두 개의 사진을 걸어놓고 그 사이에 간단한 이력을 써놓았다 : 1894년 투옥됨, 1904년 석방됨, 1905년 미국에 옴, 1909년 하바드에서 석사 받음, 1910년 프린스턴에서 박사 받음, 1919년 대통령에 당선됨(Elected President). 틀린 것은 없다 하겠으나 이승만의 교활성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 유물이라 할 것이다.) 133-134

상해에서 이승만의 여러 가지 행태를 분석하고 분개한 단재 신채호의 일갈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이는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 이놈은 아직 우리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 단재는 이승만의 외교노선이 아무런 진실성이 없는 방편주의에 불과한 장난임을 깨닫고 임정 자체를 포기하고 북경으로 고고하게 떠나가고 만다. 이승만은 실제로 독립이 아닌 “위임통치”를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134-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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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이승만을 “평생을 자유와 해방을 위해 싸운 조선인”이라 소개했고, 또 “위대한 조선의 지도자”라고 명명했다. 하지의 찬사를 받으며 무대에 오른 70살의 노인이 바로 이승만이었다.
“이번에 내가 매국에서 온 것은 한 시민으로, 한 평민으로 온 것입니다. 나는 한 평민의 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정부의 책임자가 되기를 원치 않으며, 높은 지위와 권세있는 자리보다는 자유를 나는 더 사랑합니다. ..”
진실로 이승만은 “거룩한 사기꾼(a holy impostor)”이다. 전혀 자기 마음에 없는 이야기를 방편에 따라 마구 뇌까리는 데 아무런 죄의식이 없다. 150-151

권력의 자리를 전혀 탐내지 않겠다고 공언의 첫 성을 발한 이승만처럼 권좌를 탐하여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인 자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 151


여운형은 해방 1년 전부터 건국동맹을 만들고 해방의 그날 건준을 만들었다. .. 통 크기로 유명하고 호쾌한 성품의 몽양은 미군이 이 땅의 주권자로서 입성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미군정이 시작되기 전에 그들을 맞이하는 민족주체가 정부형태(a gonernment form)로 있어야만 하겠다고 생각하여, 미군 도착 이틀 전인 1945년 9월 6일 서울 경기여고 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소집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해체하고 그것을 모태 삼아 “조선인민공화국”(빨갱이공화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조선사람공화국의 한문표기일 뿐이다)을 선포한다. 154-155

자생적으로 발전한 전국의 인민위원회는 “건준”과 연계되어 있었고, 여운형이라는 인물의 애국심, 사상적 포용성, 사심 없는 헌신, 기민한 대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따라서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 일시에 전국의 인민위원회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지방정부조직으로 승격되고, 보다 조직적으로 세련화된다. 바로 이 시점이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의 출발점이다. 155

건준을 인공으로 바꾼 것은 민족주체적 시각, 애국주의적,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매우 정당한 행동이다. 그러나 정치역학이나 현실적 프래그머티즘의 득실로 논하자면 그것은 몽양의 큰 실수였다. “준비위원회(Preparation Committee)”는 미군정 하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지만,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은 살아남을 수 없다.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할 수 없다. 156

미군정은 10월 10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정부로서 부정하고 불법단체로 규정해버렸다. .. 여운형의 영향력이 갑자기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존재감마저 하락한다. 해방정국에서 하락의 끝은 “죽음”이다. 승만 리는 정적에 대한 처리방법으로 “죽음”이 가장 완벽한 묘방이라는 것을 터득해 가고 있었다. 여운형의 혜화동로타리 피습은 12번째 테러였다. 여운형은 12번째의 테러를 피하지 못했다. 1947년 8월 3일, 여운형의 영결식에는 60만 명의 추모인파가 몰렸다. 광복 이후 최다인파였다. 157

여운형의 몰락은 궁극적으로 4.3, 여순과 관련되는데 그 인과관계를 우리는 명료히 알아야만 한다. 조선인민공화국의 불법화는 결국 그 지방조직이 되어버린 “인민위원회”의 불법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민위원회는 본시 자생적인 민중의 요구가 결집된 것이고, 운영도 민주적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그것이 하루아침에 불법단체가 된다는 것은 수긍하기 어려운 일이 뿐아니라, 해방의 기쁨에 도취되어 새로운 나라의 건설에 희망을 품었던 지방의 민중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좌절이었다. 더군 한 나라 이북에서는 인민위원회가 격려되고 발전되어 갔을 뿐 아니라, 1946년 2월에는 최고권력기관으로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결성되어 모든 지방 인민위원회가 힘차게 사회개혁을 주도해 나가고 있는 그 정황과 비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57-158

백범과 몽양이 합칠 수 없었던 가장 단순한 이유는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의 모습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요즘의 언어로 말하면 백범은 우편향이었고, 몽양은 좌편향이었다. 백범은 별다른 이론이 없이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라는 외형을 동경하였고, 몽양은 평등한 인민(사람)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이념이나 사회주의이념이나 다양한 종교적 신념을 포섭하는 보다 열린 생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도 확고한 정치철학이론의 체계를 구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백범은 실제로 요즈음 말로 하면 “우익꼴통”에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우리가 그를 “국부(國父)”로서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평생을 조선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하자 없이 헌신했기 때문이고, 연세대 총장 안세희의 사촌 형인 안두희에 의하여 암살될 때까지 오로지 남한과 북한의 분열, 즉 단독정부수립의 저지를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민족주의적 행동가로서의 그의 위상에는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맹목적인 “우파성향”은 “신탁통치”라고 하는 터무니없는 “가짜뉴스쇼”를 국민들이 받아들이게 만들고, 우리 역사의 진로를 혼탁하게 만든 죄업을 낳았다. 164

신탁통치와 관련하여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찬탁 반탁의 문제가 우리ㄴ라 이념적 갈등의 알파 포인트가 되었으며, 좌우라는 의시경태의 원형이 되었다는 데 있다. 찬탁이 곧 좌익을 의미했고, 반탁이 곧 우익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서 좌익 우익이 우리나라에서는 사상신념구조에 대한 상이점으로 생격난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신탁통치를 둘러싼 의견대립의 문제로써 형성된 관념이었다는 것이다. 166

166


“신탁(信託)”이란 문자 그대로는 “믿고 맡긴다”는 뜻이다.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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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삼상회의가 계속되고 있던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는 제1면 제목을 이와 같이 뽑았다.
“소련은 신탁통치주장
소련의 구실은 삼팔선분할점령
미국은 즉시독립주장”
이것은 이 자체만으로 분석해도 엄중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이 헤드라인은 마치 문제의 핵심이 “신탁통치안”이며, 이 신탁통치안의 실내용은38선 중심의 분할점령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문제의핵심인 남·북이단 "하나의” “임시조선민주정부"를 설립한다는 테제를완전히 빼버린 것이다. 그리고 마치 신탁통치안을 놓고 미국과 소련이대립하고 있는 인상을 주고있는 것이다. 소련이 신탁통치안을 제시했고,미국은 그러한 신탁통치안을 반대했으며 그 대신 "즉시독립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당시 미·소에게 조선의 "즉시독립"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있는 카드가 아니었다. 삼상회의에서 얘기된 적도 없는 내용이었다. 완벽한오보였다. 아니 “오보”라기보다는 의도된 대중선동이었다.
“신탁통치안”은 오히려 미국이 제시한 것이다. 소련은 본시 조선에 대하여 "직접통치"라는 발상을 근원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토지개혁이나 계급혁명을 통한 사회주의적 유대감을 더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따위 신탁통치라는 발상에 관심이 없었다. 소련은 신탁에 관한 미국의 제안에 대해 신탁이 빨리 종결될수록 좋으며, 최장 5년을 넘어서는아니 된다는 한도를 제시했다. 그러니까 『동아일보』의 보도는 외신의 오보에 의거했다고는 하나(외신 그 자체가 불확실한 것으로 판정되었다) 실상을완전히 반대로 전환시켜 국민들에게 반소 · 반공의 분위기를 조성하려는의도에서 선동적으로 1면에 등장시킨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동아일보가 한민당의 기관지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171-172

인공의 성립 때문에 평소에 함께 할 수 없었던 모든 우파세력들이 광범위하게 연합하여 최대규모의 연합보수우익정당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민주당, 즉 한민당이었다. .. 한민당의 창당목표 그자체가 “조선인민공화국의 타도”였다.
그런데 한민당은 겉으로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지주와 친일파세력이 그 근본기층세력이었기 때문에 민중들로부터 지지기반이 거의 전무했다. 발기인들이 모여 장구 치고 성대한 척 한들 그것은 민초 위를 스치를 구름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이 고육지책으로 내건 또 하나의 행동 강령이 “중경임시정부의 적통성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한민당은 이로써 민족주의진영의 적통성을 부여받으려 했던 것이다. 본시 우파라는 것은 민족주의와 결합하여야만 그 존재성을 보장 받는다. 현재 대한민국의 우파들은 민족주의조차 없다.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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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제주 4.3




폭력은 국가폭력보다 더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고 처절한 것은 없다. 인간은 모여 살면서 결국 국가를 만들었고 국가에 일단 소속된 국민들은 끊임없이 국가의 폭력화의위험성에 시달린다. 결국 민주(Democracy)라는 것도 알고 보면 얼마나 국민들이 효율적으로 국가폭력을 방지할 수 있느냐에 관한 것이다. 복지라는 것은 코스메틱이고 더 본질적인 국가의 속성은 폭력이다. 이 폭력의 다양한 형태를 우리는 제주도라는 무대 위에서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201

제주사람들은 일제강점기로부터 “키미가요마루”라 부르지 않고 “군대환”이라고 불렀다 한다.
군대환은 그야말로 제주도 사람들에 새로운 코스모스(cosmos)를 선사한 레바이아탄(Leviathan, 거대한 것)이었다. 205

군대환의 정원은 36명이었는데, 항시 정원의 2배 가까이 탔다고 한다. 그리고 매달 2번 항해했으니 상당한 인구가 이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6

일본은 이미 19세기 말엽 “자유민권운동”이 발발하여 민주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각종의 민권의식이 조직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제주도민은 오오사카 지역에서 살면서 이러한 선진문명의 훈도를 받았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 정국에 있어서 가장 선진적 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가장 단합된 조직적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역사적 지정학적 조건을 갖춘 민중이 바로 제주민중이었다는 것이다ㅏ. 그런데 이쪽 대륙에서는 제주도를 외딴 섬으로, 문화의식이 낮은 곳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제주도는 일제강점기를 통하여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도 유족하며, 교육적으로도 선진문물을 흡수하여 깨어 있었고, 국제적 감각이 있는 문화를 유지했다. 209

해방 후 갑자기 외부에서 6만 명의 인구가 제주도로 유입되었는데, 일본에서 이미 조직적인 조합운동을 해본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을 “좌익”이라는 이름으로만 부를 수는 없다. 군정의 정보요원으로 근무했던 그랜트 미드(grant Meade)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제주도인민위원회는 모든 면에서 제주도에서의 유일한 당이었고 유일한 정부였다.”
..
미드는 또 이런 말을 했다. “양자간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화합이나 타협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지역의 공적인 평화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인민위원회의 모든 요구를 받아ㅏ들이거나, 강력하게 그들을 거부하고 모든 래디칼 분자들을 분쇄시키는 방법밖에는 없다. 중간의 어설픈 길은 없다.” 210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제주시 북국민학교에서 열렸다. 이날 제주 북국민학교에는 제주읍 애월면 조천면에서 주민 3만 명이 모임.. 새나라, 새세상, 새질서를 꿈꾸었던 사람들, 환희와 희망 속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에게 들이닥친 미군정이라는 전혀 이질적인 외재적 통치체계는 그들에게 절망감만 안겨주었던 것이다. 211

오후2시에 관덕정 뒤편에 위치한 북국민학교에서는 식이 끝나자 가두 시위로 연결되었다. 시위대가 관덕정 서쪽으로 빠져나갈 즈음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어 다치는 사태가 발생했다. ..
다친 어린애에게 사과하는 제스쳐라도 하기는 커녕, 몰려드는 사람들을 짓밟을 듯이 말 위에서 거만하게 거동하는 꼬라지를 본 민중은 성이났다. 흥분한 관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자 관덕정 광장 앞에 있던 제주경찰서 망루에서 미군정경찰(당시는 대한민국 수립 전이다)이 관중들을 향해 총을 쏜것이다. 212

순식간에 민간인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당했다. 이들 가운데는 15세 국민학생과 젖먹이 아이를 가슴에 안은 채 피살된 여인도 있었는데, 더욱 가슴 아픈 사실은 죽은 이들이 모두 등에 총을 맞았다는 사실읻. 항의하는 군중이 아니라 도망가는 군중을 향해 등뒤에서 고의적인 “살인”을 한 것이다. 213

조선경비대 제 9연대는 제주도의 독자적인 연대로서 도로 승격된 후 3개월여 만에 대정면 모슬포에 창설된다(1946년 11월 16일) 214

어떠한 흑막이 내재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3.1절발포야말로 6명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한라산금족령이 해제되기까지(1954. 9.21.) 7년 7개월 동안, 인류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제노사이드, 제주 인구의 10분의 1을 넘는 3만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그 참혹한 드라마의 효종(曉鐘, 새벽에 치는 종)이요 조종(弔鐘, 애도의 종)이었다. 215

사람을 죽이는 사태에 이르렀는데도 공권력이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시위주동자를 검거하는 일에 주력하자. 제주도는 3월 10일 제주도청을 시발로 총파업에 돌입한다. .. 도청, 관공서는 물론, 은행, 회사, 학교, 운수업체(제주도는 철도가 없었다), 통신기관 등 도내 156개 단체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현직 경찰관까지 파업에 동참했다.
당시 우리나라사람으로서 경찰의 총대빵이었던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이, 1947년 3월 14일 제주도에 온다. ..
경찰통수권자로서 친일파경찰을 대거 다시 기용하는 것을 애국의 길로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이승만, 장택상과 더불어 극우반공주의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그는 일제강점기 경찰을 프로잽(pro-jap, 친일)이 아닌 프로잡(pro-job, 전문가집단)이라고 찬양했다. 그리고 그는 철저하게 미군정의 권익을 보호하는 주구 노릇을 기쁘게 했다. 220-221

조병옥은 총파업을 경기도 응원경찰 99명을 새롭게 동원하여 강경히 대응, 분쇄해 나간다. 그리고 3월 19일 담화문을 발표하고 경찰의 발포는 “정당방위”였다고 항변하고, 북조선과의 통모로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쌩거짓말로 포장하면서, 제줃도를 “빨갱이섬”으로 규정한다. .. 조병옥은 제주도민은 이미 70%가 좌익정당에 동저적이거나 가입되어 있다고 선전하면서, 제주도는 “좌익의 본거지”라고 규정했다. 222

당시 도지사 박경훈은 모든 사태의 책임을 지겠다며 항의성 사직서를 제출한다. 222

미군정청 안재홍 민정장관은 박경훈을 해임시키고, 아주 극우파의 또라이 같은 인물 유해진을 후임으로 부임시킨다. 유해진의 부임과 더불어 제주도에 부임한 거대한 새로운 세력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세칭 서청, 서북청년단(본명은 서북청년회이지만 깡패단체 같은 악랄한 성격의 것이라 조선의 민중은 서북청년단이라 불렀지 서북청년회라 부르지 않았다)이라는 것이다. 223


1946년 초부터 최고의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은 사회주의개혁의 맹렬한 드라이브에 열을 올렸고, 이러한 개혁드라이브는 남한의 민중이 억압과 부조리와 억울함과 기아에 시달리는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북한민중의 열렬한 환영과 지지를 받았다. 제일 먼저 그는 토지개혁에 착수했다. 해방이 되자마자, 자체적으로 조직된 인민위원회는 소작제의 비율을 3.7제로 바꾸었다. 이것만 해도 농민들에게는 더없는 축복이었다. 김일성은 1946년 3월 5일, "북조선토지개혁에 관한 법령" 17개조를 발표했다: “토지는 밭갈이 하는 농민에게!" 조준이나 정도전이 꿈꾸었던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이상, 그들 신진유생들이 끝내 이루지 못했던 그 꿈을 공산당과 인민위원회의 힘으로 단숨에 해결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1 가호 당 평균 15마지기의 땅이 골고루 배분되었다. 그리고 5 정보(50마지기 정도) 이상의 땅을 지닌 자는 부농으로 간주되며, 부농은 땅을 뺏기는 것은 물론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후 꼭 타지로 이주되어야만 했다. 종교단체, 교회나 절, 모두 5정보 이상의 토지는 다 몰수되었다. 대지주들을 타지로 이주시키는 것은 소작농들과의 분쟁을 피하기 위한 당연한 시책이었다.
노동법이 새로 제정되고 8시간노동제가 확립되는가하면, 임신여성은 해산 전 35일, 해산 후 42일간의 휴가가 보장되었다. 남녀평등법이 제정되어, 첩, 성차별, 매춘, 유아살해가 엄금되었다. 친일파, 일본인기업 등 중요산업시설이 조직적으로 국유화되어 남한에서 보여지는 적산가옥 거저 처먹기 식의 혼란은 없었다. 문맹퇴치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국가예산 17%가 교육비에 투입되었다. 불과 1년 만에 1,110개의 6년제 인민학교가 새로 세워졌으며, 1946년에는 2,482개의 인민학교에서 118만 3천 명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46년에 이미 중앙당교, 평양학원(군 사관학교에 해당), 김일성종합대학(1946. 10. 1.개교), 만경대혁명학원(지도자 양성기관)등이 창립되었다. 226-227

1946년 1년 동안에 약 48만 명이 남하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228

공산당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대체로 서북지역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제일 먼저 모이는 곳이 교회였다. 우리나라 해방 후 대형교회문화가 생겨나는 현상도 이러한 분단현실 속에서 잘 설명된다. 영락교회는 서북지역사람들의 집결지였다.(한경직 1903~2000 목사는 평안남도 평원사람이다. 월남하여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 후에 영락교회로 개명)
기실 서북청년단은 영락교회 청년조직으로부터 발전하였다. .. 공식적인 사무실은 한민당본부가 있었던 동아일보 사옥의 한 귀퉁이를 썼다. 서북청년단은 이승만, 김구, 한민당의 재정지원을 받았다. 김구가 서북청년단을 적극 지원한 것만 보아도 김구의 정치적 이념의 한계를 잘 말해주고 있다. ..
서북청년단의 특징은 반공정신의 맹렬성과 맹목성에 있다. 북한에서 당한 저주를 풀기 위해 “빨갱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무조건 폭력과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228-229

이승만은 이 서북청년단의 인력을 남한사회의 반공화를 위한 프론티어로 활용했다. 며칠간의 훈련만 받으면 곧바로 경찰과 군인의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겉으로 보면, 버젓한 군인이고 경찰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월급이 지급되질 않았다. 마음대로 약탈하고 겁탈하고 죽이고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다. 서북청년단에 관한 한, 아무런 룰이 없었다. 이 서북청년단의 아버지가 바로 조병옥이고, 장택상이었다. .. 이들은 대체로 반공의 투사들이었고, 열렬한 에수쟁이였고, 인간평등관을 거부하는 서북의 지주자제들이었다. 오늘날까지도 “기독교인=반공투사=반북반통일=우익승미”의 정서가 우리사회의 저류를 흐르고 있는 현실은, 소수정객의 탐욕에서 비롯된 그릇된 역사인식이 보정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1948년 4월 3일 전까지 제주도에는 서청경찰 760명이 투입되었고, 조선경비대 옷을 입은 서청 1,700명이 추가 투입된다. 이들의 만행은 너무도 끔찍했다. 47년 1년 동안에 2,500명의 무고한 제주도민들이 검속되었고, 1948년 3월 6일 조천지서에서는 어린 조천중학생 김용철 군이, 14일에는 모슬포지서에서 청년 양은하가 고문치사 당하는 비극이 벌어진다. 230

결사항쟁이다! “탄압이면 항쟁이다!”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민위원회 비밀회의에서 무장투쟁이 12:7로 가결되었다. 공격은 경찰과 서청으로 한정되었고, 다가오는 남한만의 5.10단독선거반대는 봉기결행의 주요명분이 되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4.3민중항쟁은 시작되었다. 230-231

4.3은 남로당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4.3의 경찰서습격사던은 남로당에서 지시한 것도 아니고, 중앙당과 조직적인 연계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233

미군정은 4월 17일, 모슬포 주둔 국방 경비대 9연대에게 사태진압을 명령한다. 그러나 당시 9연대 연대장을 맡고 있던 김익렬(1921~1988)은 도덕성을 갖춘 정통적 군인이었고(경남하동 출신), 활달한 성격에, 불교도였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이념적 편견이 없었다. 친일잔존세력이었던 경찰에 비해 민족적인 성향이 강했던 제주9연대는 이 사건을 경찰 및 서청 같은 극우세력의 횡포로 인해 야기된 것으로 판단하여 “선선무 후토벌”의 원칙을 정하고, 무장대와의 평화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이 결과 1948년 4월 28일(최근 발굴된 사료에 의하면 이들이 만난 것은 30일로 간주됨), 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연대 정보참모 이윤락 중위, 그리고 무장대측 군사총책 김달삼(1923~1950, 제주인. 본명 이승진. 오오사카 성봉중학교, 도쿄 중앙대학에서 수학. 이본 후쿠찌야마 육군예비사관학교를 나와 소위 임관.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등이 만나, “72시간 안의 전투중지, 무장해제와 하산이 이루어지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평화협상을 성사시켰다. 234

5월 5일, 미군정 수뇌부가 참석한 가운데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미 군정장관인 딘(William Frishe Dean, 1899~1981)소장(군정장관은 하지 총독 다음의 제2인자. 아놀드, 러치에 이어 제3대 군정장관. 1947. 10. 30.~1948.8. 15. 까지 근무. 6.25전쟁 때 대전 부근에서 부하들과 같이 싸우다가 북한군에게 포로가 되고 전쟁 내내 평양 부근 감옥에 머물렀다. 1953년 9월 4일 판문점에서 귀환)이 소집한 것인데,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군정 하의 경찰수장이며 미국의 앞잡이 노릇에 열심이던 조병옥, 당시 미군정청 내 한국인 최고끗발이었던 민정장관 안재홍(1891~1965), 당시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1889~1959, 광복군 지대장 출신. 만주군관학교 출신들과는 계보가 다르다), 제주도 경찰국장 최천(1900~1967, 통영사람), 도지사 유해진, 그리고 김익렬 연대장, 그리고 딘 장군 전속통역관, 모두 9명이 참석했다. 김익렬은 이 자리에서 딘 소장을 설득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자리는 이미 평화협정을 묵살시키고 대대적인 무력진압을 강행하기로 결의한 사람들의 자리였다. 235-236

김익렬은 이후에도 한국전쟁에서 많은 군공을 세웠다. 제1.2군단장, 국방대학 원장을 역임하고 1969년 1월 중장으로 예편하였ㄷ. 김익렬 중령은 다음날(5월 6일)로 9연대장 자리에서 전격 해임된다. 후임으로 박진경(1920~1948)중령이라는 문제아가 뒤를 잇는다. 그의 취임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237

박진경이 국방경비대 사령부의 인사부에서 일하다가 9연대장으로 임명된 이유는 일제시대 일본군으로서 제주도에 복뭄한 경험이 있어 섬의 지형과 산악요새에 관해 많은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
박진경은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강력한 “초토화진압작전”을 수행하였는데 중산간 마을을 누비고 다니면서 마구잡이식으로 주민을 잡아들였다. 5월 27일까지 포로의 수비는 3,126명에 달했고 6월 중순에는 6,000여 명에 달했다. 박 중령의 무자비한 토벌작전을 말해주는 손선호(후술)하사의 진술이 있다. “박 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공격은 전 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선무작전에 비해 대원들의 불만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그릇된 결과로 다음과 같은 사태가 빚어졌다. 우리가 화북이란 부락을 갔을 때 15세 가량 되는 아이가 그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도 무조건 사살해야 했다.”
불과 27일 만에 초토화진압작전의 성공적 추진을 인정받은 박진경은 1948년 6월 1일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한다(딘이 직접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1948년 6월 17일, 박진경의 대령승진 축하연이 요정 옥성정에서 차려졌고, 미군장교와 11연대(박 중령 부임 후 9연대는 11연대로 개편된다. 제주도 향토 연대의 성격을 해체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참모들이 동석하였다. 박진경은 6월 18일 새벽 1시에 귀가하여 부대숙소에서 잠이 들었다. 새벽 3시 15분 단 한 방의 M1 소총 총성이 울렸다.
박진경의 도민학살을 견디다 못해 그의 암살을 기획한 것은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였다. 238-239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군정장관인 딘 장군의 총애를 받던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사람들로써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해서는 공감을 가질 줄로 안다. 우리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는 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 때문에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이하 모든 사람들도 저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세상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239-240

문상길의 나이 불과 22세였다. 총살형집행장이 낭독되고 마지막 유연의 기회가 주어진다.
“스물두 살의 나이를 마지막으로 나 문상길은 저세상으로 떠나갑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하에 한국민족을 학살하는 한국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이제 여러부노가 헤어져 떠나갈 사람의 마지맘ㄱ 바람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240

손선호는 이와 같이 진술했다.
“박 대령을 암살하고 도망갈 기회도 있었으나, 30만 도민을 위한 일이므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 하나의 생명이 30만 도민을 위한 것이며 3천만 민족을 위한 것인만큼 달게 처벌을 받겠다.”
손선호의 나이는 당시 20세였다. 241

4.3 바로 한 달 후 이승만의 꿈인 단선(단독선거)의 실현, 즉 5.10제헌국회의원선거가 이루어진다. 241

제주도민은 이 선거를 보이콧해버렸다. 2개의 선거구가 근원적으로 투표율미달로 무효처리 된 것이다. .. 이승만이 택한 길은 “민중학살”이었다. 대규모 학살을 통하여 국민에게 국가권력의 가증스러운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242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런데 박진경 대령은 이승만에 의하여 준장으로 추서되었고, 박진경의 장례식은 대한민국육군장 제1호로 기록되었다. 242




제5장 여순민중항쟁



1개의 연대는 3개의 대대로 구성되고, 1개의 대대는 4개의 중대로, 1개의 중대는 4개의 소대로, 1개의 소대는 4개의 분대로 구성되었다. 14연대는 3개대대, 12개 중대, 48개 소대와 192개 분대로 구성되었다. 당시 1개 분대의 병력은 12명이었다. 248

여순민중항쟁 당시 1개 중대 병력은 순천에 파견되어 있었으며, 보성에 터널경비로 5중대(중대장 박윤민)의 일부 병력도 파견되어 있었다. 그리고 제주도로 출항하는 수송준비로 300명 정도의 병력이 여수신항에서 연대장 지휘 아래 있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부대에 남아 있었던 14연대의 병력은 1,700~2,000명 정도였다. 249

내가 어렸을 때 “여순반란”이라고 들은 것은,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의 군인들이 지창수 상사등의 빨갱이 선동으로 반란을 일으켜 양민을 학살한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대학교 때 현대사에 대한 의식이 생기면서, 그것은 반란이 아니고, 제주에서 서청과 경찰이 양민을 학살하는데 힘이 모자라 여수에 있는 군대까지 동원하여 제주도로 가라고 국가에서 명령하니까 지창수 등 14연대의 의식 잇는 군인들이 그 명령에 불복하고 일어나서 시가전을 감행하다가 결국 쫓기어 지리산으로 들엉가게 된 사건 정도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는 여순반란이 아니고, “여순항명사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요즈음에나 와서, 독립운동사 공부를 마치고 해방정국을 치밀하게 공부하면서 그것은 “항명”이 아니라 반드시 “민중항쟁”으로서 인식되고 명명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역사는 사건의 객관적 기술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어떠한 해프닝이 “사건”이 되려면 반드시 그 사건이 역사적 의미(historical significance)를 갖는 것으로서 해석되어야 한다. 249-250

250




동일한 사건사태가 반란으로도, 항명으로도, 민중의거로도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해석의 차이는 인식의 차이이며, 그 인식의 변화를 가능케 하려면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시각의 변화는 근인(近姻)과 동시에 모든 원인(遠因)을 밝혀야만 달성케 되는 것이다. 250-251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포괄적으로 역사를 이해하게 되면 완벽하게 단절된 우연이라는 것은 성립하기 어렵다. 255

사실 내가 이 원고를 쓰게 된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여순민중항쟁을 널리 알려서 “여순민중항쟁특별법”을 국회에 통과시킴으로써 여순민중항쟁으로 당한 사람들을 신원해주기 위한 것이다. .. 이 책은 사상이 아니라 운동이다. 이 책은 역사서술이 아니라 우리의식에 던져지는 방할이다. 가치를 추구하는 자라면 이 책을 읽은 후 얻는 깨달음을 만세 만민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272

4.3과 여순을 연결 짓는 최초의 고리는 바로 김익렬 중령이다. 9연대 연대자ㅏㅇ인 그가 민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의 멱살을 잡고 항의한 그 다음날, 5월 6일자로 제주 제9연대장에서 해임된다. 김익렬 중령은 군인으로서 매우 당당한 경력의 보유자이고 유능한 지도자였기 때문에 군에서 축출되지는 않았다. 대신 전출되었는데, 전출된 곳이 바로 여수 제14연대였다. 273

박진경의 암살사건은 전국에 배치되어 있는 군대의 분위기를 엄청 변화시켰다. 박진경의 암살로 군대 내에 “빨갱이들”이 엄청 포진되어 있다는 근거 없는 선입견이 이승만 이하 지배층의 조선경비대인식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내쫓는 것은 보통 전문용어로 “숙군(肅軍)”이라 부른다. 275

박진경 암살사건은 전군 차원의 사상검열(screening)을 불러일으켰고, 숙군작업에 합법성과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신임 국방장관에 취임한 철기 이범석(1900~1972, 독립운동가이며 대한광복군의 대표적 인물이지만 해방 후 그의 행적은 이승만과 미군정의 철저한 앞잡이로서 우파적 만행을 끊임없이 저질렀다)은 이승만의 신임을 얻기 위해 강력하고도 조직적인 숙군을 전개한다. 279

군대가 경찰을 습격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1948년 8월 15일대한민국(제1공화국)이 수립되기 이전까지는 "국군"이라는 것이 없었다. 미군정 하에서는 아직 나라가 성립되기 이전이었으므로 명목상 "국군Republic of Korea Armed Forces" 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군이 창설한 것이 “남조선국방경비대”였는데 미소공위에서 소련이 "국방"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고 항의하는 바람에 “국방"을 빼고 “조선경비대”로 했던 것이다.
북한도 “보안대”라는 말을 썼고, 군간부양성기관도 그냥 “평양학원”(사관학교에 해당)이라 불렀던 것이다(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 창설).“조선경비대”는 영어로 “Korean Constabulary Reserve”라 했는데, 그 뜻을 짚어 번역하자면 “조선경찰예비대”라는 뜻이다. “Constabulary”라는말자체가 "경찰체제 내에 속한" 의 뜻이다.
그러니까 조선경비대는 경찰의 입장에서는 경찰명령계통 내에 속하는 일종의 예비대이며 항구적인 조직체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조선경비대에 속한 사람들도 확고한 군인비젼을 갖기에는 자신들이 너무도 어정쩡한 조직에 속해 있다는 자괴감, 불안감이 있었다. 그리고 경찰 입장에서는 조선경비대원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경찰예비대라는 경찰체계 내의 하급기관일 뿐이었으며, 사상적으로 불순하고 향토적 색채를 띠는 오합지졸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정치범, 일반범죄자, 깡패, 실업자들의 입대도 허락되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경찰에 비해 무기지급, 보급, 복장, 계급장, 급식문제에 있어서 열악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군대에 들어간 사람 중에는 새롭게 탄생하는 국가의 보위를 책임지는 군인으로서 프라이드를 지니고 입대한 이상주의자들이 많았으며, 이들의 입장에서는 과거"일제의 주구"였던 자들이 자신들보다 높은 대우를 받고 있으면서 자신들을 멸시하는 경찰이야말로 증오와 경멸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경찰은 지나가는 군인을 불러 자기들 구두를 닦게 하는가 하면, 말 안 들으면 조인트를 까고 하는 말도 안되는 모욕적인 언행을 공공연히 자행했다. 지금 우리 감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당시에는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은 조선경비대를 빨갱이소굴이라 비난하였고, 조선경비대는 경찰을 일본놈 앞잡이 하던 친일파 꼴통 새끼들로 규정했다. 경찰은 미군정에 조선경비대를 비방하는 보고서를 끊임없이 제출하고 있었다.
미군정 하에서 경찰복장은 미군복장과 같게 하고 무기도 미제 M1소총으로 무자앟게 하였으나 국방경비대는 일본군복을 입히고 무기는 일제 38식이나 99식 소총으로 무장하였다. 계급장도 경찰계급장을 뒤집어서 사용하게 하였다고 한다. 281-283

283



미군정의 가장 큰 문제는 앞서 지적한 바대로 미국인들의 순전한 무지에 있었다. 그 무지가 야기한 최대의 실책은 경제정책에 있었다. 미군정이 경제만 안정시켰다 할지라도 해방 후 정국에서 보여지는 그러한 혼란은 없었을 것이다. 건준은 해방의 날로부터 이미 식량문제가 해방정국을 이끌어나가는 데 가장 긴요한 과제상황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3개월간의 식량을 확보할 것을 조선총독부에 요청하고, 산하에 양정부(糧政部)와 식량대책위원회를 두어 식량의 수집과 운송, 분배, 모리배 감시에 주력했다. 이러한 활동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식량이 시장에 유출되거나 모리배가 사재기를 하는 현상이 없었다. 미군정은 사회주의자들의 통제정책에 반발하고 건준의 식량관리계획을 부정했다. 건준에게 식량운영권을 넘길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곡을 자유시장에 내맡겨 버리는데 그것은 결국 쌀의 매점매석, 그리고 과대소비로 이어지면서 쌀값 폭등을 야기시켰다. 그러자 미군정은 도시민에 대한 식량배급을 명분으로 1946년 1월 25일 "미곡수집령"을 공포하고 식량공출을 단행하는데, 결국 미곡 자유시장을 포기하고 과거 일제 강점기의 공출보다 더 잔인한 강제수거를 단행했다. 미군정의 배급정책은 농촌에까지 적용되었는데, 그 결과 곡물섭취량은 오히려 식민지시대보다도 못한 처지가 되었다. 힘없는 농민은 쌀을 시장가격의 5분의 1에 불과한, 실제 생산비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강탈당했다. 그리고 쌀을 사기 위해서는 수집가격의 5배나 높은 가격에 사야 했다. 할당량을 못 채우면 투옥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경무부 수사국장 최능진이 1946년 말 한·미회의the Korean-American Conference에서 한 말은 당시 상황을 리얼하게 전해준다:
“나는 농촌을 돌아보았는데 그들로부터 여름에 경찰들이 공출할당량이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농가로 찾아가 농민들에게 쌀을 내놓으라고 강요한다는 말을 들었다. 쌀을 내놓지 못하면 경찰은 그들에게 수갑을 채워 경찰서로 데려가 음식도 주지 않고 하루종일 가두어둔다고 한다.”(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p.206).
한국경찰과 공무원은 미군의 권세 하에서 “탈취대"라고 불리는 쌀 수집반을 구성하였다.
이 미군정의 미곡수집령이야말로 1946년 전국적인 10월봉기의 주요 원인이었으며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의 가장 근원적인 요인이다. 이것은 남로당의 정치적 공작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남로당은 그러한 대중동원조직체계나 지지기반을 갖지 못했다. 그것은 몇몇 지식인들이나 지식인 반열에 들고 싶어하는 허영끼 있는 인간들의 픽션에 불과했다. 민중에게 절실한 것은 오직 "쌀"이지 공산이념이 아니었다. 293-294

297

“토벌”이라는 것은 “진압”보다도 더 심각한 단계의 작전이다. 제주인민을 토벌하기 위하여 출동하라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거부”는 “항명”이 아니다. .. “출동거부”는 “항명”일 수가 없다. “항명”은 그 명이 “정당한 명령”일 때만이 성립하는 것이다. 298

반란이 되기 위해서는 주도세력이 정부요직에 있거나 대병력의 동원이 가능한 군사지휘자들을 포섭하고 있어야 한다. 반란은 물리적인 힘이 있어야 하며, 오랜 기간의 철저한 계획 하에 진행되어야 하며, ㅈㅇ기항전의 계책도 있어야 한다. 여수 14연대의 항거는 부당한 명령에 대한 거부일 뿐이며, 사회사적, 정치사적으로 보더라도, 그것은 가벼운 “소요”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든지 정상적 궤도로 컴백될 수 있고, 다스려질 수 있는 요소였다. 이것을 댁모 국민학살극으로 확대시킨 것은 오로지 국가 폭력의 업이었다. 여순민중항쟁은 14연대 사람들의 합리적 판단에 여순 지역 인민 전체가 호응한 결과의 산물일 뿐이다. 302

이승만의 명령 : 어린아이들까지 다 죽여라!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며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팔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방위해야 될 것” 303

여순민중항쟁으로 이승만은 강고한 우익체제를 구축했다. 예비검속, 연좌제를 실시했고, 보도연맹을 창설했다(30만 이상을 죽임). 군대로부터 완벽히 좌익세력을 청산하는 숙군사업을 완성했으며, 반민특위활동에 밀린 친일경찰까지도 대거 군대로 들어갔다. 향토연대의 특성은 해체되었으며, 여순민중항쟁으로 손실된 병력공백에 우익청년단체 사람들이 대거 입대하였다. 군대가 체제수호의 수단적 기구로 변모하여 부패하였다(박정희는 이러한 군대의 부패를 청산하는 정풍운동의 리더로서 결국 쿠데타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대학에는 학도호국단이 창설되었고, 주한미군철수가 6개월 정도 연기되었고, 국가보안법이 통과되었다. 경찰병력이 확대되면서 서북청년단원들을 대거 정규경찰화 시켰다. 그리고 국민의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고 감시체계를 강화하는 유숙계제도를 만들었다. 이러한 모든 변화를 구축하는 계기가 바로 여순민중항쟁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민중항쟁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공권력에 대한 공포감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불신감만 키웠다.
우리는 너무 몰랐다. 우리는 너무 조용했다. 304-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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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하는 말 - 나는 ‘4.3’을 알지 못한다 (서경식, 도쿄 케이자이대학교 현대법학부 교수)
‘4.3’이라는 사건. .. 그것을 ‘알지 못한다.’라는 것 자체가 무섭고 부끄러운 그런 사건인 것이다. 우리들은 자신이 무엇을 알지 못하는가를 알아야만 한다. 평화와 사람다움을 위하여. 9



피살
“박재옥 여인은 젖먹이 아기를 안은 채 식산 은행 철문 앞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병원에 옮겨 온 후에도 몇 시간 동안 목숨이 붙어 있었습니다만 끝내 운명하고 말았지요. 총알은 그 여인의 오른족 옆구리를 관통, 왼쪽 둔부 쪽으로 빠져나갔습니다. 망루처럼 높은 곳에서 쏜 총탄에 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젖먹이 어깨에도 총알이 지나갔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하두용, 1994년 67세. 제주시 삼도1동, 당시 제주 도립 병원 경리 주임. 56




고문
“둘째 오빠가 행방불명되어 버리자 우리는 졸지에 ‘폭도 집안’으로 몰렸어요.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당시 열세 살이던 나까지도 서북청년회에 끌려가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옷을 모두 벗긴 채 고문을 했는데, 거꾸로 매달아 몽둥이로 때리거나 고춧가루 탄 물을 코와 입에 부어 댔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입을 다무니까 쇠붙이를 사용해 이빨 사이를 억지로 벌리는 바람에 이가 다 부러졌어요. 전기 고문을 받은 곳은 살이 썩어 갔어요. 토벌대는 우리가 오빠를 숨긴 채 밥을 날라주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며 윽박질렀습니다. 기절하면 물 뿌려 깨운 뒤에 또 고문했어요. 결국 서청은 도피자 가족이라며 어머니를 총살했습니다. 그때 언니랑 나도 함께 끌려갔는데 서청은 우리한테 ‘어머니가 죽는 것을 잘 구경하라.’고 하면서 총을 쏘았어요. 난 그때의 충격으로 성장이 멈춰, 다 자란 후에도 몸무게가 30킬로그램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쳐집니다.” - 정순희. 2007년 72세. 서귀포시 강정동. 64




약탈
“난 본래부터 우익 활동을 했어요. 그리고 사태 때에는 중문면 면사무소 산업계 서기적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북 청년회가 문제였어요. 서청은 무전취식하며 민폐를 심하게 끼쳤습니다. 돈을 갈취하기 위해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주민들에게 강매했습니다. 처음엔 오백 원에 팔다가 곧 천 원으로 올렸어요. 당시 천 원은 큰 돈이었습니다. 서청은 면사무솎가지 찾아와 행패를 부렸습니다. 면 회계원에게 돈을 요구하는가 하면, 나한테는 쌀을 강요했어요. 난 우익이라고 해서 매일 아침 담벼락에 날 숙청하라는 좌익 삐라가 나붙어 위험을 느끼던 터였는데, 이번엔 서북 청년회에게 밉보인 겁니다. 그래서 급히 경찰에 투신했습니다. 그 직후 사태가 악화되면서 서청에 의한 대대적인 학살이 있었습니다. 전에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을 사지 않은 사람, 그리고 면사무소 직원으로 서청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개 총살당했습니다. 아마 내가 그 직전에 경찰에 투신하지 않았다면 나도 서청한테 죽었을 겁니다.” - 이기호. 1997년 80세. 서귀포시 중문동. 66




겁간
“서북 청년회 단장 김재능은 여자들을 많이 괴롭혔습니다. 김재능이 양 아무개를 범했지만 그 여자는 죽을 위기에 놓인 남동생을 살리기 위해 감수할 수밖에 없었지요. ‘토벌대에게 누가 당했다더라.’는 소문이 퍼지면 우린 전전긍긍했습니다. 당시 멋쟁이 여성들도 많았지만 무서워서 가급적 바깥나들이를 삼갔고 일부러 바보처럼 꾸미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 강소희. 1997년 78세. 제주시 도평동. 당시 분 동맹 집행위원. 68



신촌 회의
“무장봉기가 결정된 것은 1948년 2월 그믐에서 3월 초 즈음의 일이다. 신촌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도당 책임자와 각 면당 책임자 등 19명이 신촌의 한 민가에 모였다. 참석자는 조몽구, 이종우, 강대석, 김달삼, 나(이삼룡), 김두봉, 고칠종, 김양근 등 19명이다. 이덕구는 없었다. 이 자리에서 김달삼이 봉기 문제를 제기했다. 감달삼이 앞장선 것은 그의 성격이 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경파와 신중파로 갈렸다. 신중파로는 조몽구와 성산포 사람 7명인데, 그들은 ‘우린 가진것도 없는데, 더 지켜보자.’고 했다. 강경파는 나와 이종우, 김달삼 등 12명이다. 당시 중앙당의 지령은 없었고, 제주도 자체에서 결정한 것이다. 오르그(조직원을 뜻하는 러시아어. 여기서는 당 정책이나 조직을 집행하기 위해서 파견되는 책임 있는 지도원을 뜻함)는 늘 왔으며, 김두봉의 집이 본거지였다. 해방 후 강문석은 한 번도 제주에 오지 않았다. 김달삼은 20대의 나이이지만 조직부장이라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장년파는 이미 징역살이를 하거나 피신한 상태였다. 안세후느 오대진, 강규찬, 김택수 등 장년파는 이미 제주를 떠난 뒤였다.
그런데 우린 당초 악질 경찰과 서청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지 경비대는 아니었다. 미군에게도 맞대응할 생각이 없었다. 미군에 대해 다소 감정이 있었지만 그들은 신종 무기가 많은데 …… 우리가 공격한 후 미군이 대응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우선 시위를 하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정도의 생각이었다. 장기전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익렬(9연대 연대장)과도 회담한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지식과 수준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가 정세 파악을 못하고 신중하지 못한채 김달삼의 바람에 휩쓸린 것이다. 그러나 봉기가 결정된 후,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니까 ‘우리의 결정이 정당한 거 아닌가.’하는 분위기였다.” - 이삼룡. 2002년 78세. 일본. 당시 대정면 모슬포. 76


망보는 소년들
5.10선거가 파탄나자 미군 함정이 해안을 봉쇄한 가운데 군(국방 경비대)이 본격 투입되어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 시작되었다. 소년들은 마을 동산 위에서 깃대를 세우고 망을 보았다. 멀리 토벌대가 출현하며 깃대를 눕혀 마을에 알리고, 군인이면 ‘노랑개 온다’ 경찰이면’검은개 온다’하고 하였다.

“청년들은 3.1 사건 이후 계속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고민에 빠진 어른들은 마을을 살리기 위해 양면 작전을 썼습니다. 즉 산 쪽에 협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찰의 요구도 잘 들어줘서 어느 쪽으로부터도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요. 그러나 토벌대가 마을에 오면 아무래도 피해가 생기니까 빗개(보초)를 서면서 토벌대가 오면 호각으로 신호를 보내 청년들이 피하도록 했습니다. 어린 우리들도 수신호를 배워 연락을 했지요. 그러나 북촌 대학살 때에는 마구 불을 지르고 죽였으니까. 그런것도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 신수교. 1998년 62세. 조천읍 북촌리. 92




부모들
젊은이를 둔 부모들은 도피 입산한 자식을 대신하여 추궁당한 끝에 죽임을 당했다.

“경찰은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먼저 한 부인을 끌어내더니 옷을 홀딱 벗겼습니다. 배가 많이 나온 임산부였습니다. 남편이 산에 오른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경찿ㄹ은 그 부인의 겨드랑이에 밧줄을 묶어 팽나무에 매달아 놓고 대검으로 마구 찔렀습니다. 이어 토벌대는 주민들을 선별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폭도 가족’을 가리는 것인데 우리는 아버지가 앞서 토벌대에게 총살당했다는 이유로 끌려 나오게 됐습니다. 우린 4형제였는데 열세 살이던 내가 장남이고 밑으로 열한 살, 일곱 살, 그리고 젖먹이 동생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호소로 동생들은 풀려났지만 나는 ‘눈망울이 둥글둥글한 게 폭도들에게 연락함직한 놈’이라며 풀어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13명이 인근 밭으로 끌려가게 됐는데, 경찰들은 ‘칼로 찔러 죽이자.’ ‘시간이 없으니 총으로 쏘자.’며 자기들끼리 잠시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그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칼에 찔리면 고통이 오랠 것이니 총에 맞는 게 낫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순간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어머니가 나를 덮치며 쓰러졌습니다. 총에 맞은 어머니의 몸이 요동치자 내 몸은 온통 어머니의 피로 범벅이 됐습니다. 난 경찰이 떠날 때까지 어머니 밑에 깔려 있어서 무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졸지에 고아가 됐는데 일곱 살 난 동생은 홍역으로, 젖먹이 막내는 젖을 못 먹어 곧 죽었습니다. 만일 영화나 연극으로 만든다면 난 그날의 모습들을 똑같이 재연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도 눈에 선합니다.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 안인행. 1999년 4세. 애월읍 장전리. 100




붉은 바다
“1948년 12월 14일 오후 5시쯤 갑자기 군인과 경찰이 마을에 들이닥쳐 한 사람도 빠짐없이 향사로 집결시켰습니다. 그들은 열여덟 살에서 마흔 살 사이의 남자들과 얼굴이 고운 처녀만을 골라 밧줄로 묶어 표선리로 끌고 갔습니다. 그 후 남자는 12월 18일과 19일 양일에 걸쳐 표선 백사장에서 학살당했고, 여자는 군인들의 노리갯감이 되다가 군대가 이동하게 되자 최종적으로 12월 27일에 표선 백사장에서 총에 맞은 후에 또 칼로 찔려 죽었습니다.” - 김양학. 1998년 58세. 표선면 토산1리. 113



젖먹이
“우리 마을 북촌리에 대학살이 벌어지던 그날, 아침부터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군인들이 마을 동쪽부터 불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연설이 있으니 학교 운동장으로 집합하라 했습니다. 군인들은 우선 경찰 가족, 군인 가족을 따로 분리시키더군요. 낌새가 이상하다 여긴 사람들은 사돈의 팔촌이라도 경찰이 있으면 경찰 가족 쪽으로 줄을 섰습니다. 군인은 우선 민보단 간부를 불러 내 바로 총살했습니다. 사람들이 동요해 흩어지기 시작하자, 군인들이 사람들 머리 위로 총을 난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댓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중엔 한 부인도 있었는데, 업혀 있던 아기가 그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더군요. 그날 그곳에 있었던 북촌리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겁니다.” - 김석보 1998년 63세. 조천읍 북촌리. 118




십자가
“제주 출신 재일 동포 중에는 자신이 마치 4.3 사건 때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런 말하는 사람에게 반감을 갖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당신이 진정으로 투쟁을 했다면 제주도에서 죽었어야지, 어떻게 지금 살아 있는가? 불만 질러 놓고 떠난 것은 무책임한 것 아닌가?’ 라고 반박합니다. 또한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나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 선생처럼 끝까지 제주도에 남아 있던 분을 존경합니다. 내가 산을 올라 보니 ‘이덕구 노래’가 있을 정도로 선생은 신망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노래는 소련의 소년단 노래에 가사를 붙인 것입니다.”
‘머리에 쓴 것은 도리구치로구나.
손에다 권총 쥐고서 싸움을 나가네.
누구냐 그 이름 무섭다고
박박 얽은 그 얼굴
이- 이- 이덕구!’ - 김민주. 1994년 63세. 일본. 당시 조천 중학교 학생. 126




빌레못굴의 유골
“토벌대는 마구잡이로 청년들을 죽였습니다. 난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순 없었기에 도망쳤습니다. 그 무렵 알게 된 빌레못굴로 숨어들었는데 그곳에는 남읍리 주민 28명이 있었고, 우리 마을 사람으로는 강규남의 가족 5명(어머니, 아내, 아들, 딸, 누이), 송시영과 그의 처, 양신하 등이 있었습니다. 입구가 좁고 은밀한 곳이라 모두들 안심했지만 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여차하면 숨을 만한 곳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요. 결국 굴이 발각됐습니다. 겨울철이라 온도 차이로 인해 굴 밖에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김 때문인 것 같습니다. 군경 토벌대와 민보단원들이 굴 안으로 들어오자 급히 숨었지요. 그런데 토벌대가 ‘살려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고 유혹을 하자 대부분 나갔습니다. 굴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의 신원을 파악한 토벌대는 붙잡은 사람을 통해 내 이름을 부름 나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난 끝까지 버티며 나가지 않았어요. 토벌대는 사람들이 굴 밖으로 나가자마자 굴 입구에서 바로 학살했습니다. 강규남의 아내는 두어 살 난 딸을 업은 채 도망쳤는데, 나처럼 인근에 숨지 않고 더 깊숙이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 빠져나오지 못한 채 굶어 죽었습니다. 굴이 너무나 크고 복잡해 길을 잃은 겁니다. 모녀의 유골은 나중에 굴 탐사팀에 의해 발굴되었습니다.” - 양태병. 1998년 71세. 애월읍 어음리. 134






자료1 제주 4.3 항쟁의 역사적 의미 -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위원

2000년 1월 공포된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주4·3특별법)에 의해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 (제주 4·3 위원회)가 설치되었는데, 이 '제주4·3 위원회'에 2001년 5월까지 신고된 4·3 관련 피해자는 사망 10,715명, 행방불명 3,171명, 후유 장애 142명 등 총 14,028명이었다. 이들 중 20세 미만이 3,840명이고, 60세 이상이 860명이었다. 피해자 중 여자는 2,875명이었다. 제주도 마을마다 피해자들이 있었다. 4백 명 이상 희생된 것으로 신고된 마을만 3곳이고, 1백 명 이상신고된 마을은 무려 45곳이었다.
2003년에 통과된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진상 조사 보고서)에서는 인구 감소같은 여러 가지 근거를 통해, 신고된 피해자의 두 배쯤 되는 2만 5천 명에서 3만 명이 4·3 때 희생된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제주도 주민이 약 30만 명이었으니까 10분의 1정도가 희생된 것이다.
제주도에서의 희생은 우리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임진왜란(1592~1598) 때나병자호란(1636년) 때도 한 지역에서 그렇게 많은 민간인 희생이 나지는 않았다. 그 점은 주민 집단 학살이 몇 차례 있었던 일제 강점기 때도 마찬가지다. 한국 전쟁(1950~1953) 때도 많은 주민 집단 학살이 있었고, 전쟁이 시작된 직후 군경이 저지른 '보도 연맹원 대량 학살'은 제주도에서의 희생보다도 규모가 컸지만, 그것은 남한 지역 전체에서 저질러진 것이었다.
..
제주도를 온전히 느끼려면 빼어난 풍경과 함께 젲 4.3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48-149

남로당 제주 도당의 무장봉기는 제주 도민이 가세하여 항쟁으로 변모하였다. 제주 4.3 사건을 연구한 미국 정치학자 존 메릴(John Merril)은 “2차 세계 대전(1939~1945) 후 점령군에 대항하여 이처럼 치열한 민중 반란이 분출된 곳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었다.”라고 기술 했다. 149

4·3 사태는 꼭 유혈 참극을 빚어야 했을까? 4·3 사건이 경찰의 탄압과 서청단원의 빈번한 불법 행위로 일어났다고 판단한 연대 연대장 김익렬은, 이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그리하여 제주 군정장관 맨스필드(John S. Mansfield) 중령의 승인하에 4월28일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 평화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는 72시간 안에 전투를 중지하고, 무장은 점차로 해제하며, 무장 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루어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김달삼이 진심으로 평화적 해결을 원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김익렬이 한 것처럼 그 뒤로도 사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선무 공작을 벌였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왔을 것이고 당국을 신뢰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4.28 평화 회담 직후의 도민 반응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5월 1일 '오라리 방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경찰은 이 사건을 무장대 소행으로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우익청년단체에서 평화를 깨기 위해 일부러 저지른 짓이었다. 미군은 이 오라리 방화 사건'을 입체적으로 촬영해 무장대의 폭력성을 알리는 선전용으로 써먹었다. 강경 진압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였다. 1948년 5월 3일, 미군은 무장대 총공격을 지시했다. 9연대 연대장은 김익렬에서 박진경으로 바뀌었다. 154

미군은 이미 김익렬에게 초토화 작전을 지시한 바 있었다. 5.10 선거가 무효화된 후에 제주 지구 미군 사령관으로 온 브라운 대령 (Rothwell H. Brown)은 "사건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고 공공연히 강경 일변도의 발언을 했다. 9연대가 11연대로 재편되어 11연대장이 된 박진경은 무자비한 강공 작전을 폈다. 무장대가 5백 명 안팎이었는데도, 정부는 5월 27일까지 3,126명을 잡았다고 발표했고, 6월 12일 <조선일보>는 체포된 자가 약 6천 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155

1948년 10월 17일, 새로 재편된 9연대 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의 지점과 산악 지대를 허가 없이 통행하는 자는 총살에 처하겠다는 포고를 발표했다. 초토화작전이 임박했음을 말해 주는 포고였다.
다음날인 10월 18일, 제주 해안이 봉쇄되었다. 유일한 지역 언론사인 <제주신보> 사장이끌려가고 편집국장은 총살되었다. <경향신문>과 <서울신문> 지사장도 끌려가 총살되었다.초토화 작전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철저히 제거되었다.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정부는 아무런 법적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때부터 다음 해 3월까지 어린아이부터 70, 80대 노인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주민들이 집단으로 학살되는 참극이 벌어졌다.
곳곳에서 주민 집단 학살을 불러온 초토화 작전은 1차적으로는 9연대(연대장 송요찬)와1948년 12월 29일, 9연대와 교체되어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2연대(연대장 합병선)에 있다.그렇지만 최고 책임은 1948년 12월 서청 총회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제주도에 내려온 한 서청 단원이 "이 대통령의 허락 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 라고 증언한 바가 시사하듯, 이승만 대통령한테 있다.이 대통령은 1948년 늦가을에 서청 단원을 대거 제주도에 투입해 섬을 초긴장 상태에 몰아넣었고, 1949년 4월 9일 제주도를 방문해 잔존 폭도들을 완전히 소탕하라고 지시했다.
주민 집단 학살은 국제적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이 제주도에서는 작전의일환으로 버젓이 자행되었다. 1948년 12월 14일, 중산간 마을에서 옮겨 온 표선면 토산리주민 157 명이 9연대 병력에 의해 포박당한 채 표선 백사장으로 끌려가 집단 학살되었다. 또1949년 1월 17일에는 군인들이 조천면 북촌 마을을 포위한 채 4백여 채의 집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 천여 명을 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그중 약 3백 명을 인근 밭에서 학살하였고, 다음날에는 함덕 해수욕장으로 끌고 가 약 1백 명 정도를 학살했다. 이러한 주민 집단 학살로 1백 명 이상 희생된 마을이 45곳이나 된다는 것은 맨 앞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많든 적든 150곳이 넘는 마을에서 이와 같은 희생자가 나왔다.
인간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일도 버젓이 저질러졌다. 토벌 작전을 펴면서 13명의 목을 잘라서 시내를 두루 다니며 구경시키기도 하고, 서북청년회에서 주민들을 모아 놓고 서로 뺨을 때리게 했는데, 할아버지와 손자 간에도 이런 짓을 하게 했다. 토벌대가 주민들을 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놓고 발가벗긴 채 매질을 하고, 남녀를 지목하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하게 했다. 또 자식을 맨 앞줄에 세워 놓고 부모가 총살당할 때 손뼉을 치고 만세를 부르게 했다.
잔혹 행위는 끝이 없었다. 과거 나치나 일본군이 저질렀던 '살도 빈번히 발생했다. 남편이 산에 올라갔다고 아내를 죽이고 자식이 입산자라고 부모를 죽였다. 도피자 가족으로 여자나 노인, 어린아이 같은 주로 노약자들이 끌려가 살해되었다. 1948년 12월 10일 개수동에서는 도피자 가족과 외지인 36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이곳에서는 1949년 1월 24일에도 한 여인이 세 살 난 아이와 함께 총살당한 것을 비롯해 8명이 남편 또는 자식이 피신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학살은 무장대에 의해서도 저질러졌다. 4·3 초기,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 단원 같은 우익 청년 단체 소속원, 그리고 토벌대에 협조한 우익 인사와 그 가족들을 살해했다. 그러다 토벌대의 진압으로 곤경에 빠지게 되자, 토벌대 편이라고 생각한 마을들을 덮쳐 주민들을 집단으로 학살했으며, 어린아이와 여자, 노인도 살해했다. 제주 4·3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중 78.1%는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었지만, 12.6%인 1.764 명은 무장대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나타났다.
주민 집단 학살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일어났다. 제주도도 육지와 마찬가지로 보도연맹원과 요시찰 대상자를 예비검속해 살해했다. 제주의 경우 첫 번째 학살은 1950년 8월 4일 일어났다. 이날 예비검속자 수백 명이 해군 경비정에 실려 바다에 수장되었다. 또 8월 19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수백 명이 현재의 제주 비행장에서 총살당해 암매장되었다. 서귀포에서는 7월 29일에 150명 정도가 살해되었고, 8월 12일에도 학살이 있었다.
모슬포 경찰서 관할 지역에서는 1950년 8월 20일에 집단 학살이 있었다. 이때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던 한림 지역 주민들은 1956년에 몰래 61구의 시신을 수습해 안장했다. 모슬포절간고구마 창고에 수감되었다가 희생된 사람들의 유족들도 같은 해 당국의 허가를 받아 132구의 시신을 거두어 한 자리에 묻고, 그곳을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의 땅'이라는 뜻으로 '백조일손지지'라고 이름 붙였다. 155-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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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새


사는 곳이 멀어지고 각자의 굴곡을 통과하는 동안 만남의 간격이 차츰 벌어졌다.  31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내기 어려운 선택들을 척척 저지르고는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이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떤 행로를 밟아간다 해도 더이상 주변에서 놀라게 되지 않는 사람들.  33

집이 싫었어. 외딴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삼식 분 넘게 걸어야 하는 길도 싫고, 버스에 실려 도착하는 학교도 싫었어. 수업 시작을 알리는 <엘리제를 위하여>가 싫었어. 수업시간이 싫고, 아무것도 그리 싫어하지 않는 것 같은 아이들이 싫고, 주말마다 빨아서 다려 입어야 하는 교복이 싫었어.
그러던 언젠가부터 엄마가 싫어지기 시작했어. 그냥, 이 세상이 역겨운 것처럼 엄마가 역겨웠어. 나 자신이 혐오스러운 것과 똑같이 엄마가 혐오스러웠어 엄마가 해주는 음식이 지긋지긋하고, 흠집투성이 밥상을 꼼꼼히 행주질하는 뒷모습이 끔찍하고, 옛날식으로 틀어올린 하얗게 센 머리가 싫고, 무슨 벌을 받는 사람처럼 구부정한 걸음걸이가 답답했어. 점점 미움이 커져서 나중에는 숨도 잘 쉴 수 없었어. 무슨 불덩이 같은 게 쉬지 않고 명치께에서 끓어오르는 것 같았어.
결국 집을 나온 건 살고 싶어서였어.  77

엄마가 어렸을 때 군경이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그때 국민학교 졸업반이던 엄마랑 열일곱 살 이모만 당숙네에 심부름을 가 있어서 그 일을 피했다고 엄마는 말했어. 다음날 소식을 들은 자매 둘이 마을로 돌아와, 오후 내내 국민학교 운동장을 헤매다녔대.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여덟 살 여동생 시신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포개지고 쓰러진 사람들을 확인하는데, 간밤부터 내린 눈이 얼굴마다 얇게 덮여서 얼어 있었대. 눈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니까, 이모가 차마 맨손으론 못하고 손수건으로 일일이 눈송이를 닦아내 확인을 했대. 내가 닦을 테니까 너는 잘 봐, 라고 이모가 말했다고 했어. 죽은 얼굴들을 만지는 걸 동생한테 시키지 않으려고 그랬을 텐데, 잘 보라는 그 말이 이상하게 무서워서 엄마는 이모 소맷자락을 붙잡고, 질끈 눈을 감고서 매달리다 시피 걸었대. 보라고, 네가 잘 보고 얘기해주라고 이모가 말할 때마다 눈을 뜨고 억지로 봤대.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84

엄마는 말했어.
내가,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86

이상하다, 살아 있는 것과 닿았던 감각은. 불에 데었던 것도,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데 살갗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109

건강해 보여도 방심할 수 없어.
아무리 아파도 새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횃대에 앉아 있대. 포식자들에게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견디는 거야. 그러다 횃대에서 떨어지면 이미 늦은 거래.  112

속솜허라.
동굴에서 아버지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에요.
..
숨을 죽이라는 뜻이에요. 움직이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거예요.  159



2부 밤


제목이 뭐야?
..
우리 프로젝트 말이야.
..
작별하지 않는다.
..
작별인사만 하지 않는거야. 정말 작별하지 않는거야?
..
완성되지 않는 거야, 작별이?
..
미루는 거야, 작별을? 기한 없이?  191-193

정말 헤어진 건 아니야, 아직은.  197


…… 누군가 더 있는 것 같을 때가 있어.
..
뭔가가 더 남아 있어.
..
너도 그럴때가 있어?
..
언제부터 그랬어?
..
뼈들을 본 뒤부터야.
..
그 가을에 유골들이 발굴됐어.
어디에서?
제주공항 …… 활주로 아래에서.  208-209

산 위 무장대 삼백 명과 내통할 수 있다고 군경에게 의심받을 나이의 남자는 맏아들뿐이어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ㅇ직 아버지만 걱정했어. 이북 사투리를 쓰는 경찰들이 마을마다 들이닥쳐서 젊은 남자들을 잡아가 실적을 올린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니까. 일제 때 부역하던 고등계 형사들이 그대로 남아 해방 전에 하던대로 고문을 한다고, 그렇게 읍내 경찰서에서 죽은 고등학생이 있다는 이야기를 할아버지가 듣고 온 뒤로는 아버지 혼자 동굴에 숨어 지내게 했대. 동굴에서 아버지는 낮엔 호롱불을 켜고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시국이 지나가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시험을 쳐보고 싶다고 생각했대, 해가 지면 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불을 끄고 앉아 있었어. 자정 녘에야 집에 들러 식은밥을 먹고 눈을 붙이고, 찐 감자 서너 알이랑 종이에 싼 소금 한 첩을 동트기 전에 싸 들고 다시 동굴로 올라갔대.  216-217

그 11월 밤에도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동굴을 나와 집으로 오는 길이었어. 건천을 건너는데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며 별안간 사위가 밝아졌다. 집들이 불타기 시작한 거야.
어디로도 움직여선 안 된다는 걸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알았어. 건천 기슭 대숲에 몸을 숨기고 있는데 마을 공터 쪽에서 일곱 발총성이 울렸다. 뒤이어 군인들이 호각을 불며 사람들을 이동시키는 걸 아버지는 숲 사이로 지켜봤어. 먼 거리였지만 손을 잡고 걷는 두 동생을 알아보았다. 더 어린 아이들을 앞세워 걸리거나 아기를 업은 여자들, 허리가 굽은 노인들이 넘어지거나 빨리 걷지 못해 자꾸 행렬이 지체됐는데, 그때마다 군인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개머리판을 휘둘렀대.
더이상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아버지는 마을로 달렸어. 뒤돌아보자 가호 수가 더 많은 아랫마을에서도 불길이 타오르는 게 보였대. 불꽃이 얼마나 크고 밝은지, 연기가 솟아 닿는 구름의 흰빛이 보였대.
집담과 밭담들, 돌로 된 집들의 벽체들만 남기고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어. 아버지가 집에 들어서자 마당 가득 붉은 게 흩어져있어서 놀랐는데, 달아오른 고추장 장독이 터진 거였어. 집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총소리가 들렸던 팽나무 아래로 달려가보니 일곱 명이 죽어 있었대. 그중 한 사람이 할아버지였어. 가호마다 주민 명부를 대조한 군인들이, 집에없는 남자는 무장대에 들어간 걸로 간주하고 남은 가족을 살 거야.
집까지 시신을 업고 가서 마당 가운데 뉘어놓고, 아버지는 닥치는 대로 댓잎 한아름을 끊어왔다. 헝겊 대신 그걸로 얼굴과 몸을덮고, 아직 잔불이 타고 있는 창고 자리에서 자루가 타버린 삽을끌어냈다. 달궈진 쇠가 식기를 기다려 댓잎 위로 흙을 덮었대.  217-218

군이 데려간 사람들은?
P읍에 있는 국민학교에 한 달간 수용돼 있다가. 지금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12월에 모두 총살됐어.
..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220


보이기사 우리집서 제일 잘 보였주. 저디 보라. 이디 마루에만 앉앙 이서도 바당이랑 모살왓이랑 훤하게 보염시네. 그날도 안방에서 봤주게. 문 열기 겁이 나난 창호지에 손가락 구멍을 뚫어그네.

어두운데다 본문의 활자들이 작아, 촛불 바로 아래 책을 놓고 얼굴을 가까이해야만 읽어갈 수 있다. 수년 동안 우기에 물기를 먹었다 마르길 반복하며 배었을 헌책 냄새가 난다.

해거름에 트럭으로 두 대 가득 사름들이 실려와서. 못해도 백명은 되실 거라. 군인들이 저 모살왓에 총검으로 네모지게 금을 그어놔그네, 사름들신디 그 안에다서 이시랜 하데. 똑바로 서라. 앉지 마라, 줄 맞추라 허고 군인들이 소리를 울르는 거 같긴 헌디 바람이 바당 쪽으로 불어난 잘 안 들려서. 호루라기 소리가 계속 들렴신디, 나중에 사름들이 차분히 줄 서그네 금 안에 이시난더이상 안 불어서.
높은 사름 같은 군인이 무신 명령을 울르난, 금 안에 있던 사름들 열 명이 앞으로 나 반듯이 바당을 보고 서서, 무신 벌을 줄라는가 가만 보고 이시난, 군인들이 뒤에서 총을 쏴그네 몬딱 앞으로 넘어지는 거라. 다음 열 명을 또 나오렌 하난 서로 안 나가줄이 흐트러져서. 군인들이 총신을 휘두르멍 똑바로 서라 울르는디, 뒤쪽에 이시던 여남은 명이 금 밖으로 튀어그네 우리집 쪽으로 막 도망 오는 거라.
내가 스물두 살, 우리 큰아들이 백일되실 때라. 우리집 쪽으로 군인들이 총을 막 쏴댐시난 울 애기를 보듬고 솜이불을 뒤집어썼주. 애기 아방은 그때 막 민보단 들어가그네, 매일 경찰서에 일 보레 댕기멍 밤까지 집에 안들어와서. 허이고, 애기랑 나랑 둘밖에 어신디……… 그추룩 총소리를 하영 들은 거는 그때 첨이고 마지막이라. 한참 지낭 잠잠해져그네 벌벌 떨멍 문구멍을 내당보난, 그추룩 하영이시던 사름들이 모살왓에 자빠져 이서서. 군인들이 둘씩 짝을 지어그네 한 사름씩 바당에다 데껴넣어신디, 꼭 옷들이 물우에 둥둥 떠다니는 것추룩 보여서.  223-224

방으로 총알이 들어올까봐 이불을 쓰고 총소리를 듣는데, 아이들이 있었던 게 자꾸 생각나서 가슴이 떨렸습니다. 우리 아들만한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들도 봤고, 산달인지 배가 불러 허리를 짚고서 있는 여자도 있었어요. 어둑어둑해지는데 총소리가 멈춰서 문구멍으로 내다봤더니, 피투성이로 모래밭에 엎어져 있는 사람들을군인들이 바다에 던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옷가지들이 바다에 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다 죽은사람들이었어요. 다음날 새벽에 내가 우리 아기를 업고 아기 아빠 몰래 바닷가로 갔습니다. 떠밀려온 젖먹이가 꼭 있을 것 같아서 샅샅이 찾았는데 안보였어요.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옷가지 한 장 신발 한짝도 없었어요. 총살했던 자리는 밤사이 썰물에 쓸려가서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습니다. 이렇게 하려고 모래밭에서 죽였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225-226

우리 서방은 시국 때 피해 본 거 어서. 육이오 참전용사라 전쟁 나강 죽을 고비 넘긴 게 전부라. 그때 제주 사름들이 해군에 많이 가서, 섬에 이서봤자 군경한테 끌려 죽든가, 민보단이라고 군경 따라댕기멍 못 볼 것 보든가 둘 중 하나 아니라? 섬만 떠나민 하루라도 발뻗엉 잘 거렌, 우리 서방은 제주도에서 제일 먼저 자진 입대해서 살아신지 죽어신지 삼 년 소식도 엇다가 돌아와신디, 이녁은 운이 좋아신디 제주 사름들이 하영 전사했다주게. 제주도 사름들 다 빨갱이라고 수군대는 것 들어난 몸사리기가 어려웠다곡.
전쟁 전에 우리 서방이 군경 따라댕기 무신 일 해신지는 나한테 안 고랐으니 어떵알크냐? 서방이 원해서 따라댕긴 건 아니메 사름들하고 울력 나강 성 쌓고 이신디 경찰이 와그네 몇 명 뽑아간 거라. 그때는 요즘 같은 세상이 아니메하라민해야 되는 세상이라.
서청-서북청년단-사름들이 잔인해그네, 내내 같이 댕기던 민보단원들도 수틀리민 죽여분다는 소문이 이시난 나는 걱정되었주게. 파출소 마당에다 산사름 각시를 총검으로 찔렁 눕혀놔그네민보단 사름들헌티도 다 한 번씩 죽창으로 찌르렌 했다는 이야기도 들어난, 아무헌티도 원수 살 일 하민 안 된다고 내가 거념허민우리 서방은 항상 그래서. 이녁은 통역 일만 한다곡, 서청이 제주말을 못 알아듣곡 제주사름들은 서청 말을 못 알아들으난 소까이-소개-때 중산간에 불 놓으렁 댕길 때도 우리 서방은 문 두드렁 나옵서, 인제 불나난 혼저 나옵서, 고라주멍 다닌 게 다라고 그래서, 경헌디 이상해신 건 그때부텅 입대할 때까지 우리 아기를 안지 않은 거라. 이녁헌티 닿으면 부정 탄덴, 눈도 마주치민 안된덴 하고 정말 눈길도 안 줘서.
죽는 날까지 우리 서방은 군경 욕을 안 해서. 좋다 나쁘다 아예 입에 담질 않아서. 대신 빨갱이라 허멍 질색을 주게. 무장대 그 사람들이 한 거 무신거 있느냐고. 경찰 멫 명 죽이고 죄 어신 가족헌티 복수하고 산에 도망가불민 그 마을에서만 이백 명 삼백 명이 보복으로 떼죽음 당햄신디, 지상낙원 만든다 허멍 그거 지옥이주게 어떵 낙원이냐곡.

경 하난 나는 그 일이섰던날 서방헌티도 말 안해서. 한밤에 발소리도 어시 들어왕 등 돌리곡 웃목에서 쪼그려 자는 사헌티무신 말을 하냐.
딱 한 번뿐이여, 연구소 사름들 오기 전에 누구헌티 고랐던 거는 그 시국 때 젖 먹던 우리 아들이 중학교 댕길 적이그네, 한 십오년 지나실 때.

아침저녁 찬보름은 났어도 볕이 뜨거울 때여서. 대문 앞에 홍고추 널엉 말리고 이신디 몰르는 남자가 찾아와서 물어볼 말씀이 있던 공손하게 말을 꺼내신디, 전쟁 나기 전에도 우리가 이 집에 살아냐는거라.
그때는 군사혁명 때라, 그 시국 일이라민 아무도 입도 벙긋 안할 때여. 다른 데 살당 이사왔다고 하민 잘도 좋은 대답이어실 건디, 내가 원래 요령이 엇고 그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라. 관에서 나온 사름같이 안 보이곡, 눈이나 음성이나 꼭 버렝이도 못 죽일 것추룩 생긴 사람이 일단 들어오라 주게. 댓돌에 앉혀, 내외한다고 대문은 열어, 누가 들으카덴 가만가만 물어봤주게. 무신거 궁금하난 왔느냐곡. 경 하난 그 사이 우물쭈물하멍 사과를 하는 거라. 난데없이 이디 찾아와 미안하다곡, 폐를 끼치령 허는 것은 아니렌 허멍. 허이고, 내가 한건 못 참는 성미라. 괜찮다고, 어서 물어 가시렌 재촉을 해서. 경 하난 그 사름이 입을 떼신디, 그날 모래밭에서 아이들을 봤느냐곡.

그 말을 막 들어신디 명치 이신데 이디, 오목가심 이디, 무쇠다리미가 올라앉은 것추룩 숨이 막혀서. 내가 죄지은 것도 어디 무사 눈이 흐리곡 침이 말라신디 모르주. 몰른다고 내보내야 하는 것을 알멍도 이상하게 대답을 하고 싶었져. 꼭 내가 그 사람을 기다렸던 것추룩. 누게가 이걸 물어봐주기만 기다리멍 십오 년을 살았던 것추룩.
그래 사실대로 대답을 했져. 아이들이 이서나긴 했다고. 심장이 벌어질 것추룩 뛰멍 말이 더듬더듬 나와신디, 정작 그 사름은 도근하게 한참 가만히 있당 또 물어봐서 혹시 갓난아기 울음소리도 들었느냐곡.
처음 보는 사름인디, 우리 서방이 알민 큰일이 날 건디, 내가 넋이 나간 것추룩 또 대답을 해서. 울음소리는 못 들었지마는 애기를 안고서 이신 여자들을 봤다고. 정말로 내가 봐서난 모래에다그어는 금 바로 안쪽이서 여자 셋이 젖먹이를 보듬곡 붙어서 이 서서. 네 살, 일곱 살, 많으멍 열 살 먹은 거 같은 아이들 일고여덟이 그디 모여 이서서. 아이들이 그 여자들헌티 고개를 쳐들곡 가끔씩 입을 벌리는디, 뭐렌 고르는 건지 울르는 건지 보름이 바당쪽으로 불어난 안 들려서.
그 사름이 꼼짝 안 허곡 앉아만 이시난, 이제는 더 물을 말이어신가보다 생각해서. 경헌디 그 사름이 다시 묻는 말이, 바닷갓에 떠밀려온 아기가 있었느냐고. 그날 아니라 담날이라도, 담달에라도.

내가 더 고라줄 힘이 없었져………… 무사 십 년이나 지낭 나헌티 와그네 이러는곡 묻고 싶어나신디 그 말은 입에서 안 떨어졌주. 아무도 안 떠내려왔다고 겨우 가만가만 고라신다. 그 사름샤쓰가 목깃부터 등짝까지 몬딱 땀에 젖은 게 그제사 눈에 들어오는 거라.
그래 내가 부엌에 들어강 물 한 대접 떠와서. 경헌디 그 사람이 그걸 안 받아서. 두 손을 떨멍 무릎우에 올려놓고 있는 것이, 겨우 그릇을 받아 해도 마시기도 전에 엎엉벌를 것 같았다. 그걸 이녁도 알아크네 못 받곡, 인제는 그걸 나도 알아 해도 매정허게 그릇을 물려갈 수도 엇어그네 그추룩한참 서 있어서.
금방 아이들이 학교서 돌아올 건디 어서 가시 해서. 우리 서방이 알면 난리가 날 건디 제발 그전에, 도로 부엌으로 들어강물그릇을 내려놓고, 몇 번 오목가심을 문지르당 나왕보난 그 사름이안보여서. 아무 흔적도 어신 댓돌에 내가 앉아 시퍼런 바당을 내당봐서. 꼭 그 사름 발소리가 다시 들릴 거 같아신디, 그걸 내가 기들리는 것인지 겁내는 것인지 알 수가 어섰주게.  227-232


아버지 손이 물그릇을 받을 수 없을 만큼 떨렸던 건 그 순간의 감정 때문이 아니야.
심장 자리에 주먹을 얹으며 인선이 말한다.
이것보다 조금 넓은 돌을 데워서 여기 얹고 안방 벽에 기대앉아 계시곤 했어. 눕는 것보다 그 자세가 숨이 잘 나온다고 했어.
..
돌이 식으면 아버지가 나를 불렀어. 미지근해진 그걸 들고 내가 부엌으로 가면, 엄마가 받아서 냅비에 넣고 끓였어. 까만 돌에 숭숭 뚫린 구멍에서 거품이 일 때까지 지켜봤던 기억이 나, 뜨거운 물을 엄마가 따라 버리고 행주에 돌을 싸서 주면 받아들고 아버지에게 갔어. ..
심장이 아프셨어?
협심증 약을 드셨어. 결국 심근경색이 왔어.
손이 떨리던 것도 고문 후유증이었어.  234-235


개가열람실 창문의 블라인드 틈으로 들어오던 육 년전 겨울햇빛이 그때 내 눈앞에 떠오른다. 이 섬의 마을 단위 구술 증언들을 과감히 건너뛴 날, 두 권의 책을 골라 들고 복도 끝 간이 책상에 앉아 본 빛이었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석 달 동안 중산간이 불타고 민간인 삼만 명이 살해된 과정을 그 오후에 읽었다. 무장대 백여 명의 은거지를 알아내지 못한 채 초토화작전이 일단락된 1949년 봄, 이만 명가량의 민간인들이 한라산에 가족 단위로 숨어 있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즉결심판이 이뤄지는 해안으로 내려가는 것이 굶주림과 추위보다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3월에 임명된 사령관은 빗질하듯 한라산을 쓸어 공비를 소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효율적인 작전 수행을 위해 먼저 민간인들이 내려오도록 삐라를 뿌렸다. 아이들과 노인을 등뒤로 숨기고, 총에 맞지 않기 위해 흰 수건을 나뭇가지에 묶어 들고 내려오는 깡마른 남녀들의 행렬이 자료 사진으로 실려 있었다.
처벌하지 않겠다던 약속과 달리 수천 명이 체포.  262-263

1948년 정부가 세워지며 좌익으로 분류돼 교육 대상이 된 사람들이 가입된 그 조직에 대해 나는 알고 있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정치적인 강연에 청중으로 참석한 것도 가입 사유가 되었다. 정부에서 내려온 할당 인원을 채우느라 이장과 통장이 임의로 적어 올린 사람들, 쌀과 비료를 준다는 말에 자발적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들도 다수였다. 가족 단위로도 가입되어 여자들과 아이들과 노인들이 포함되었고, 1950년 여름 전쟁이 터지자 명단대로 예비검속되어 총살됐다. 전국에 암매장된 숫자를 이십만에서 삼십만 명까지 추정한다고 했다.  273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런 지옥에서 살아난 뒤에도 우리가 상상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291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골짜기와 광산과 활주로 아래에서 구슬 무더기와 구멍 뚫린 조그만 두개골들이 발굴될 때까지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고, 아직도 뼈와 뼈들이 뒤섞인 채 묻혀 있어.
그 아이들.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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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탈주 제보
“어이구, 이거 뉘신가 했드만 김 선생 아니시요?”
.. 상업학교에서 무슨 주임인가를 맡고 있는 조한규였다.
김범우는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는 눈길을 돌렸다. 교육자라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간교한 인상을 풍기는 조한규의 얼굴을 마주대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
그가 조한규를 싫어하는 것은 인상 때문만이 아니었다. 일제말엽에 조한규가 자행했던 일련의 행위를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40여 명이 전부인 학생들을 줄을 세우고 구령을 붙여가며 신사참배를 다닌 그 유별난 열성은 접어둔다 하더라도 그는 두 학생을 가미카제 특공대로 설득, 자원시킨 공로로 서장의 표창을 받은 위인이었다.  27-28

무질서하고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모략이 진실을 살해할 수도 있었고, 중상이 순수를 파괴할 수도 있었고, 허위가 진실로 둔갑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34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되려면 정당한 사회개혁의 절차를 거쳐 지주계급도 한 사람의 시민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주계급을 보호하고 있는 이남의 체제는 민주주의라는 허울뿐 봉건사회의 답습이고 연장일 뿐입니다. 과감한 사회개혁 없이 이런 식으로 계속되게 되면 사회혼란은 점점 더 심해질 것입니다.  41

괜한 말을 했다는 후회와 불필요하게 긴말을 한 다음의 허탈이 무겁게 밀려왔다. 의식이나 인식의 차이는 어찌할 수 없는 평행선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고 있었다.(선우진 선생과의 대화 후)  42



24 분노의 소작인

정 사장은 .. 법이고 질서라는 것이야말로 돈과 힘의 편이라는 사실을 그는 확고부동하게 믿었다. 왜냐하면 법이나 질서라는 것은 언제 어느때나 돈과 힘이 있는 사람들이 만들게 마련이었던 것이다.  170



25 농민, 그 사무치는 설움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땅이 촉촉하게 젖을 만큼 하염없이 내리는 세우였다. 하늘이 낮았다. 제석산 중턱이 묻히고 선수머리까지의 포구가 반나마 가릴 정도로 하늘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큰비라도 쏟아낼 것처럼 험상궂어 보였다. 바람기는 없었다. 어디서 행보를 시작했는지 모를 가랑잎들이 갈 길을 멈춘 채 함초롬히 몸을 적시고 있었다. 그러나 기온은 싸늘했다. 냉기 서린 실비게 읍내가 스사하게 젖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행인이 드물었다.  187


화순탄광의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사람들은 마을마다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뭉쳐졌다. 미군정의 미곡수매에 반감이 쌓일대로 쌓이고, 그 정책을 강압적으로 수행하는 경찰들의 횡포에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사람들에게 화순탄광의 사건은 큰 충격인 동시에 행동에 불을 붙이게 하는 더없는 계기였다. 거기다가 인민위원회가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결속시켰다.
인민위원회에서는 전단을 뿌렸고, 농민들은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구호를 외치며 대열을 이루었다.
“공출제도 쳐 없애고 토지개혁 단행하라!"
"이북식 토지개혁 그것만이 살길이다!"
이런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각 마을사람들은 읍내로 몰려갔다. 이 마을, 저 마을 사람들은 큰길에서 합류했고, 그 구호는 더 한층 어기차게 11월의 하늘로 퍼져올랐다. 그들의 목소리에 기운이 오른 만큼 징소리 북소리도 크고 빠르게 울렸다.
농민들만이 나선 것이 아니었다. 학생들도 머리띠를 두르고 대열을 꾸몄다. 학생들은 팔을 치뻗어 주먹으로 하늘을 치며 외쳤다.
"미군정은 각성하라. 조선은 식민지가 아니다!"
"경찰은 각성하라. 어느 나라 사람이냐!"
"민족을 살해하는 경찰을 타도하자!"
학생들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영세 상인들도 하나로 뭉쳐졌다.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된 사람들은 경찰서로, 읍사무소로 몰려갔다. 징소리에 맞추어 구호를 외치고, 북소리에 맞추어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의 얼굴은 오랜 굶주림으로 광대뼈가 불거져나오고 볼들이 패어 있었다. 광목 일색이다시피 한 입성들도 궁기가 흘렀다. 그러나 소리를 합친 구호는 힘이 넘쳐났고, 메마른 얼굴얼굴에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지잉, 지잉, 지잉, 징징징...……… 징!
"공출제도 쳐 없애고 토지개혁 단행하라!"
“민족을 살해하는 경찰을 타도하자!"
둥둥둥둥.....… 두둥둥!
"이북식 토지개혁 그것만이 살길이다!"
"미군정은 각성하라. 조선은 식민지가 아니다!"
분위기는 갈수록 고조되었다.
그러나 경찰서나 읍사무소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해결 방안이 아니었다. 그것은 총구멍이었다. 대기하고 있던 경찰·소방관·청년단원 들은 시위대가 가까이 가자 총을 쏘아댔다. 시위대의 전진이 멈춰지며 대열이 헝클어졌다.
"모두 진정하시오. 저건 공포요!"
빠지고 남자들이 앞으로 나오시오!""겁먹을 것 하나도 없어요. 우린 당당하게 우리 권리를 주장하는 겁니다."
"여자들은 모두 뒤로 빠지고 남자들이 앞으로 나오시오!”
인민위원회 청년들과 학생들이 대열을 정비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묶고 있었다. 남자들이 앞으로 나서고 여자들이 뒤로 물러나면서 대열은 곧 정비되었다. 사람들의 굳어진 얼굴에는 더 강한 결의가 드러나고 있었다.
"우리는 이 기회에 기필코 우리의 권리를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다 같이 찰떡처럼 뭉쳐지면 틀림없이 우리의 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똘똘 뭉칩시다. 구호도 더 크게 외칩시다. 그리고 정당한 우리의 권리를 찾도록 합시다. 갑시다. 경찰서로!"
경찰은 공포를 쏘아 시위대를 저지할 수 없게 되자 마침내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피를 쏟으며 퍽퍽 쓰러졌다. 시위대에서는 비명과 아우성이 터져올랐다. 대열도 헝클어지고 흩어졌다. 대열은 다시 정비되지 않았다. 총 맞은 사람들을 수습하느라고 아까처럼 앞에 나서는 청년도 학생도 없었다.
대열은 흩어지고, 사람들은 총소리에 계속 쫓겼다. 경찰들은 공포를 쏘아대며 뒤쫓고 있었고, 사람들은 자기네 동네 쪽으로 각기 밀려가고 있었다. 총에 맞은 사람들에 대한 불안과 경찰에 대한 분노를 안고 사람들은 동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총 앞에서 맨주먹으로 버틸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경찰은 그날 밤 총을 꼬나들고 각 마을을 덮쳤다. 주모자들을 체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기습은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런 수법을 일정 때부터 겪어온 데다가, 특히 화순에서 경찰이 저지른 행투를 알고 있는 인민위원회 사람들이나 학생들은 미리 피해버렸던 것이다. 경찰들이 집집마다 뒤지고 다니며 폭행을 가하고 협박을 하고 해서 사람들의 분노는 더 뜨거워졌다.
다음날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 내내 내는 조용했다. 그리고 모든 마을도 평온할 뿐이었다.
그런데 밤이 깊어지자 제석산에 봉화가 타올랐다. 그 봉홧불을 따라 마을마다 둥둥둥 두둥 둥둥 두둥 두둥 두둥.....…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어둠을 헤치고 마을 당산나무 아래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각기 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 무기는 각양각색이었다. 대창이 제일 많았고, 쇠스랑·괭이낫 같은 농기구를 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이 그런 무기들 말고 공통적으로 지닌 무기가 있었다. 그건 허리에 찬 망태기나 보자기에 담은 감자 크기만큼씩 한 돌들이었다. 경찰의 총알에 맞서는 그들의 총알이었다.
구호를 외치지 않고 어둠에 몸을 감추고 읍내로 밀려든 그들에게 경찰서와 읍사무소는 삽시간에 장악당하고 말았다. 경찰은 미처 몇 방의 총을 쏘아보지도 못하고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낮의 조용함에 방심한 경찰에서는 서너 명만을 숙직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들은 누구인지 모를 많은 발에 채이며 쏟아지는 욕들을 고스란히 먹어야 했다. 그러나 경찰이 두 명을 죽이고, 여섯 명을 부상 입힌 것처럼 그들은 경찰을 죽이거나, 죽게 패지는 않았다. 그들은 경찰서와 읍사무소를 뒤져 미곡수집대장을 찾아내서 불 질러버렸다.
다음날부터 싸움은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다른 지방에서 경찰병력이 밀려들었고, 그 뒤를 기관총을 단 미군 지프차들이 따랐다. 동네마다 들이닥친 경찰들이 젊은 남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갔다. 집집마다 남자들은 뒷산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경찰은 그들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그날 밤 다시 봉화가 오르고, 북소리에 징소리까지 울리면서 남자들은 모여들었다. 그들은 또 어둠에 몸을 감추며 읍내로 나아갔다. 읍내에서는 오래도록 총소리와 사람들의 외침이 뒤섞여 울리고 있었다.
양쪽이 서로 죽고 다친 그날 밤의 싸움을 고비로 농민과 학생들의 기세는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경찰이 인민위원회 사람들을 잡아내려고 혈안이 된 데다가, 젊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갔고, 읍내 안통으로 이어지는 길목길목에다가 모래가마니를 쌓아올리고 언제라도 총을 갈겨댈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싸움이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힘을 합쳐 경찰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피했을 뿐 한두 마을씩이 합쳐져 여기저기서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 싸움이야말로 경찰들을 더 신경질나게 만들었고, 괴롭히는 방법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공격표적을 친일파나 악질지주로 바꾸었기 때문에 경찰은 피해를 입은 그들에게 항의를 받고 시달림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친일파들은 나무에 거꾸로 매달리기가 예사였고, 눈치 없이 불호령을 놓다가 대창이나 쇠스랑에 찔려 죽어가기도 했다. 그리고 악질지주들의 쌀창고는 문이 박살나 속이 텅 비어버리기 일쑤였다.
악이 받칠 대로 받친 경찰들은 장터거리에서든 마을 고샅에서든 개머리판으로 사람을 개 패듯 했고, 청년단원들은 제철을 만난듯 몽둥이며 자전거 체인을 말아들고 다니며 닥치는 대로 폭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들도 혼자서는 어느 마을에도 접근할 수가 없었다. 혼자 나돌며 그런 짓을 했다가는 누구의 손에 당했는지 모르게 목숨이 끊어져 철둑에 버려지거나, 농가의 커다란 똥구덩이에 처박혔다. 처음에 그런 꼴을 당한 경찰이나 청년단원이 네댓이었다. 그 뒤부터 그들은 대여섯씩 패를 짜게 되었다.
젊은 남자들이 당하는 수난은 말이 아니었다. 젊은이들은 무조건 잡혀 들어갔고, 뼈가 부러지는 매타작을 당하며 주모자로 몰렸고, 결국에는 빨갱이가 되어 죽거나 감옥살이로 넘어갔다. 젊은이들은 경찰과 청년단의 무자비한 손길을 피해 도망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군데, 군대였다.
새로 조직을 만들어놓고 자원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군대는 그들에게 더없는 좋은 은신처였다. 그리고 그들도 무장을 갖출 수 있는기회이기도 했다.
날이 날마다 들려오는 것이 소문이었다. 나주에서 수천 명이 일어났다고 하는가 하면, 다음날이면 해남에서 또 수천 명이 일어났다고 했고, 그 다음날이면 영산포에서 일어나 얼마가 죽었다고 하고, 또 그 다음날에는 무안에서 얼마가 일어나 얼마가 죽었다는소문이 잇따라 들려왔다. 11월이 저물어갈 때까지 그런 소문이 빠진 날이 거의 없었고, 소문의 반만 잡는다고 하더라도 한 달 동안에 죽어간 사람들의 수는 수천을 헤아렸다.결국 농민들만 수없이 죽어간 채로 11월의 커다란 싸움은 끝났다. 미곡수매는 더 강력하게 시행되었고, 경찰들은 더욱 인정사정없이 몰아쳐댔다. 기가 꺾일 대로 꺾여버린 농민들은 당장 끓일 쌀이 없어도 할당량을 채우기에 숨을 헐떡거려야 했다. 사람은 죽었으되 시체도 찾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한은 그 밑에 깔려 또 한 겹의 켜를 이루었다.
"그려라, 요리 말얼 혀바도 결국에는 천불만 끓어올께 말얼 허덜 말아야제라. 참말로 나넌 해방만 되면 배 안 곯고 사는 존 시상이 올 줄 알았는디………….”
목골댁이 어깨를 부리며 말끝을 흐렸다.
"염상진이 그 사람, 딱 한 가지 잘못한 것이 있구만."
남양댁이 느닷없이 말이었다.
"그 사람이 멀?"
조성댁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고, 장흥댁과 목골댁도 의문스럽게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들 체면 보지 말고 술도가놈얼 그때 죽였어야 허는겨!"남양댁은 야멸치게 내쏘았다.
“워메, 저 뜸금없는 소리 허는 것 잠 보소. 겁나게 징허시"장흥댁이 놀란 얼굴로 어이없어했고, 조성댁은 기가 질린 표정으로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고, 목골댁은 아랫입술을 문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못쓰겠다. 요리 앉었다가 집안 망칠 중죄인 되었다. 싸게 파허자."
장흥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망칠 집안이나 머 있고라?"
목골댁이 말을 받으며 따라 일어섰다.
"워따, 염병한다.”
조성댁이 목골댁의 어깻죽지를 치며 눈을 흘겼다.  202-209



27 우리의 국토를 양단시킴으로써 민족을 분열시키어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하려 한다 - 백범 김구

“하늘이 세상만물을 창조하실 ㄸ 상호간에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생존해 나갈 수 있는 질서와 지혜를 주셨지. 그 질서를 인간의 말로 하자면 먹이사슬이고 지혜는 동면을 위한 영양섭취나 갈무리가 되겠지. 그런데, 만물 중에서 유일하게 하늘의 뜻을 거역한 존재가 일찍부터 있었어. 그게 바로 인간이야. 하늘이 내린 지혜를 활용하되 탐욕적 이기(利己)를 채우는 무기로 악용하기 시작한 거야. 인간의 역사란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지혜를 악용해 가며 인간끼리 살육을 되풀이해 온 기록에 불과해. 뱀이나 개구리가 동면을 위한 영양섭취를 하나 다음 해 봄까지 빈사상태로 견딜 수 있을 정도만 하는 것이고, 개미나 벌이 겨우살이 갈무리를 하지만 마찬가지로 해동이 될 때까지 필요한 최소량의 먹이만을 보관해. 그런데 인간은 어떤가. 다음 해 봄까지가 아니라 자신의 평생을 위해,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자손대대로 이어질 갈무리를 하고자 탐욕한 것이야. 그 탐욕의 부가 상대적인 빈을 낳게 되고, 더 큰 탐욕을 채우고 지키기 위해 필연적인 폭력이 조직화되고, 그 폭력에 대항하고자 하는 또다른 힘이 결속됨으로써 필연적으로 살육이 자행되는 것 아닌가. 먹이다툼을 해서 동류끼리 살육을 자행하는 것도 인간뿐이야. 동물끼리 상대방의 생활터전이나 사냥터를 침범하지 않는 것은 모든 동물들의 불문율이네. 동물들이 동류끼리 싸우는 경우가 있긴 하지. 그러나 그건 먹이 때문이 아니라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수컷들의 힘겨룸이지. 힘세고 건강한 수컷이 암컷을 차지함으로써 우량한 새끼를 낳게 하려는 것, 그것이야말로 싸움이 아니라 종족보존을 위한 신성한 의식 아닌가. 그런데 인간들이 스스로를 일컬어 뭐라고 했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건 신의 섭리를 거역한 존재로서 당연히 저지르게 된 자만이야. 탐욕과 자만으로 가득 찬 인간사회는 착취를 위한 폭력이 조직화되고 상대적으로 인간의 노예화와 굶주림이 상습화되었네. 모든 만물은 신의 섭리에 따라 골고루 나눠 먹고 겨울을 무사히 넘기는데 인간만은 헐벗고 굶주려 죽어갈 수밖에 없게 된 거야. 그건 인간들 스스로가 만든 지옥이지. 그 지옥 다음에 올 것이 무엇이겠나. 파멸이지. 그 극점에 이르러 하나님은 인간들을 일깨우고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를 보내신 거야.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하신 말씀이 '서로 사랑하며 고루 나누어 먹으라는 것이었네. 곧, '박애의 실천'으로 스스로 만든 지옥에서 벗어나 천국을 얻게 되리라는 일깨움이었지. 그러나 인간들은 그 일깨움을 알아듣지 못했어.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실천한다는 성직자들까지 인간의 탐욕과 자만을 키워 하나님을 욕되게 했네. 중세 암흑시대가 그 좋은 증거 아닌가. 성직자들까지 그 모양이었으니, 인간이란 과연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 존재인지 회의로워. 나 스스로부터 말이야. 그런 회의를 바탕으로 하여 보자면 인간의 역사는 끝없이 발전한다는 변증법적 논리나, 물질중심의 가치체계로 인간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드는 유물론이나 다 동의할 수가 없어 난 크리스천 입장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유물사관이나 마르크시즘을 상대적 감정으로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야. 지배와 피지배로 얼룩져온 인간사의 과정을 통해 볼 때 그런 것들의 발생은 충분한 당위성을 가지고 있어. 또, 인간사의 모순을 해결하고 불합리를 개혁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그런 것은 소중하고 값진 거지.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내는 그 어떤 새로운 주의나 주장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고, 인간의 행복을 절대적으로 보장할 수가 없네. 왜냐하면 인간이란 탐욕과 자만을 근본적으로 버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야. 인간이 탐욕과 자만을 버리지 못하는 한 제아무리 새로운 주의나 사상을 내세워도 거기에는 또다른 모순과 불합리를 내포하게 마련이야. 마르크시즘은 핍박받는 민중을 혁명세력으로 응집시킴으로써 최초의 불꽃이 되었고, 혁명을 성취시킴으로써 최후의 불꽃이 되었네. 공산주의 정치체제를 수립함으로써 마르크시즘은 정작 살해당하기 시작한 거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내세움으로써 새로운 지배계층이 형성되었고, 그에 따라 공산주의적 계급사회가 이루어지면서 공산주의적 귀족이 생겨나게 되었지. 그리고 전인류적 인민해방이라는 미명하에 코민테른이란 국제조직을 만들어 세력 팽창을 꾀했는데, 소련의 그 팽창주의가 황금만능이란 자본주의를 앞세운 미국의 패권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나로선 구분이 안 되는구먼.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근본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고, 그 어떤 것도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네." 그래서 그분은 기독교사회주의의 실천이 그 길이라 믿고, 자신의 농토를 공동소유화해서 몸소 농사를 짓는 생활을 한다는 결론이었다. 그분을 교장 자리에 끌어내고자 했던 자신의 의도가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나를 생각하며 손승호는 그분이 전에 했던 말을 새롭게 되새기고 있었다.  319-322



29 대나무 전설

“우리가 이렇게 양쪽으로 갈라져 싸우는 것은, 아니, 싸운다고하는 것이 말이 될지 모르겠는데, 이게 대체 누구 잘못인가요? 꼭 미국이나 쏘련의 잘못일까요?”

“원장님 말씀은 …… 바로, 분단의 책임은 누구한테 있느냐 하는 것인데요. 글쎄요. 그게 한마디로 하기는 불가능한 일일 것 같습니다. 지금 원장님께서 의문을 표시한 대목만 잡아 말하자면, 물론 미국과 쏘련만의 책임일 수 없습니다. 각 개인의 집에 주인이 있듯이 한 나라에도 분명 주인이 있스빈다 어느 집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도둑이 든 것까지는 주인의 책임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들어온 또둑에게 어떻게 대처하고, 무슨 방법으로 몰아낼 것이냐 하는 것은 주인의 책임입니다. 도둑을 맞아 한 집안이 망하게 되었을 때, 도둑은 그 집안을 망하게 한 원인일 뿐이지, 책임을 물을 대상은 아닙니다. 도둑은 직업상 책임을 지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다만 그 집안 사람들이 비겁하고 빙충맞아 자신들이 져야 할 책임을 도둑에게 전가시킬 수는 있겠지요. 아니면, 무식하고 아둔해서 원인과 책임을 구분조차 못하고 있거나 말입니다.”
“.. 그런데 도둑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들었는데 어째서 힘을 합쳐 도둑들을 몰아낼 생각은 안 하고 양쪽으로 갈랒 도둑들 편을 드나요?”

“먼저 외적인 원인과 내적인 원으로 대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적인 원인을 다시 열강들의 국제정치 역학과 이데올로기의 상충으로 나눕니다. 국제정치 역학은 세계 2차대전 전과 후로, 이데올로기의 상충은 미쏘의 냉전상황으로 세분합니다. 그리고 내적인 원인은 사회적인 측면과 정치적인 측면으로 구분합니다. 사회적 측면은 다시 전통적 인습사회와 서구적 개조사회로, 정치적 측면은 식민지시대와 해방후 시대로 나눕니다. 또한 서구적 개조사회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로, 식민지시대 저치는 보수적 독립운동과 진보적 독립운도으로, 해방후 시대 정치는 식민지시대 정치세력과친일세력으로 세분됩니다. 대충 이렇게 갈라놓고 보면 외적인 원인은 수평적이고 횡적이 되며, 내적인 원인은 수직적이고 종적이 되어 상호 교차하게 됩니다. 위에서 구분한 항목들을 따라 세밀하게 조사하고, 그것들의 상관관계를 따져가며 종합하게 되면 원인이 규명되지 않을까 생가하고 있습니다. ..”  391-393

있는 집 자식으로 아무런 고생을 모르고 자라 영문학을 전공했고, 지주의 기득권을 천부적 절대권인 것처럼 믿어 그 부(富)가 형성된 과정의 모순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의문을 제기하거나 회의해 본 적이 없는 사나이. 그러므로 시대의 흐름이나 사회의식의 변화를 이해하거나 수용하지 못한 채 스스로의 우리에 갇혀 불행을 키워가는 연약한 사나아. 가문의 재산이나마 보호되어 있으면 모르되 빈손에 혈혈단신이 되어버린 처지에 세파를 헤쳐나가기에는 부적격한 사나이. 김범우가 긴 복도를 걸어나오며 정리하고 있는 선우진이었다.  399



30 전라도

부처님이야 부부는 3천 년 인연으로 맺어지는 것이라고 하셨지만, 모자라는 소견으로 보면 제비뽑기 요행수 같은 것이 남녀의 만남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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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체포

“남 서장,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오. 김범우 그놈이 나한테 뭐랬는지 한마디만 해주겠소. 아무리 공산주의 활동을 한 자라도 재판을 거치지 않은 처형은 있을 수 없고, 피해자 가족의 감정이 개입된 보복행위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떠들었소. 용공주의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함부로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소. ..”(국회의원 최익승이 남인태서장에게 한 말) 14

해방이라는 것은 참으로 느닷없이 떨어진 벼락이었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불길이었다. 대일본제국이 망하다니…… 그건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세상 판세 돌아가는 것을 빈틈없이 읽어낸다는 소위 지식인이란 사람들은 일본이 적어도 200년 동안은 조선땅을 지배하게 될 거라고 했고, 그 사실을 의심 없이 믿지 않았던가. .. 200년은 곧 영원이었고, 조선이란 나라는 없어지게 되어 있는 운명에서 고작 육심 평생을 살다 가는 인생 설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너무나 자명한 결론이었다. 내선일체에 앞정서며 살아온 인생에 예고 없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죽음과 맞닥뜨리는 절망이었다. 그러나 그 암담한 절망은 결ㅋ 오래가지 않았다. 해방이 몰아온 그 거센 바람을 요령껏 피하고, 그 성난 물결을 눈치껏 타넘을 수 있는 기회가 뒤따라왔던 것이다. 그 결과 어둠으로 앞을 가로막았던 해방이라는 흉물은 정반대의 광명을 가져다준 보물로 둔갑했다. 일정시대의 사업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이란 권력까지 손에 쥐게 해주었던 것이다. ..
군정이 베풀어준 두 가지 은혜에 대해서 그는 그저 감읍하고 감읍할 따름이었다. 미군은 군정을 실시하자마자 민심을 선동해 대고 있던 공산당을 외면하고 한민당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일본식의 통제방법을 전면 폐지하고 미국식의 ‘자유시장’체제를 실시했던 것이다. 그는 재빨리 기부금을 내고 한민당원이 됨으로써 정치적 신분보장을 확보했고, 자유시장체제의 허점을 신속히 파악함으로써 경제적 이익의 확대를 꾀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나갔다. 보성군 일대를 정치발판으로 삼아 한민당 조직을 지주 중심으로 짜나가는 한편, 그 조직을 이용해서 무작정 쌀을 사들였다. ..
일정시대부터 사업을 해온 손 큰 사람들은 뒤늦게 자유시장체제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서로 다투어 매점매석에 뛰어들게 되었다. 다만 그는 남들보다 서너 달이 빨랐을 뿐이다.
시장마다 쌀이 동났고, 쌀값은 날이면 날마나 치솟기 시작했다. 한 달 사이에 세 배로 오르다가, 두 달 사이에 여덟 배로 뛰어올랐다. 쌀을 창고에서 잠을 재울수록 돈은 불어나고 있었다. 19-21

군정은 6개월 만인 147년 2월에 쌀의 자유거래를 중단시키게 되었다. 걷잡을 수 없는 쌀값의 폭등과 품귀현상을 막기 위해 내려진 조처였다. 그 대안으로 군정은 배급제를 내놓았다. 그건 일정말기 방법으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 한민당의 조직을 통해서 그런 조처가 내려지리라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고, 그동안 재산을 막대하게 불려놓았던 것이다. 23

쌀값은 9월까지 줄기차게 올라 자유거래를 실시할 당시보다 300배가 넘어 있었다. ..
해방 직후 한 달 가까운 동안 풍전등화 같던 신세가 가장 위력 있는 정당인 한민당의 지구당위원장으로 발판이 확고해졌고, 거기다가 재산까지 어마어마하게 느렁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미군정이 아니었으면 이룰 수가 없는 은혜로움이었고, 보살핌이었다. 미국이야말로 생광의 나라요, 은혜의 나라요, 부모의 나라가 아닐 수 없었다. 24

“곧 군부대가 주둔하게 될 모양입니다.”
..
“별로 많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
“글쎄요, 벌교까지 군대가 주둔할 필요가 있을까요?”
“작전상 그런 모양이라 하더군요. 벌교 자체의 문제보다도 전체적 소탕계획에 따라 이뤄지는 일이라고 해요.”(김범우의말)
전 원장은 간접화법을 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전 원장도 그 소식을 들으며 읍내의 군대 주둔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다는 반증이었다. 38

김씨 문중은 일본 서장도 함부로 하지 못했던 걸찍한 집안이었다. 43



12 구만리 장천을 떠도는 구름

누가 좌익이 되고 잡아 좌익이 되간디? 옳은 소리 혀도 좌익, 바른 소리 혀도 좌익, 다 좌익으로 몰아쳐서 꼼지락달싹 못허게 맹그는 판잉께, 좌익질도 한분 똑바라지게 못혀보고 경찰이 맹근 대로 좌익죄 받느니 진짜배기 좌익질이나 한판 해뿔고 보자 허고 남정네덜 맘이 서로 통헌 것 아니겄능가. 고런 속사정 다 암스롱도 자네가 외서댁 볼 때마동 그리 에맨소리 해싸먼 서로 졸 것이 머시가 있능가.”
왕주댁은 샘골댁을 달래는 듯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외서댁은 왕주댁에게 더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57

미곡수매라는 억지법이 생기면서 입 달린 사람이면 누구나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미군정을 욕했고, 한민당을 욕했고, 경찰들을 욕했다. 그런데 경ㅊ찰에서는 그런 욕을 하는 사람들을 무더기로 잡아들여 몽둥이찜질을 해대며 좌익으로 몰아붙였다. 그래도 욕하는 사람들은 늘어만 가고, 손이 모자라게 된 경찰에서는 소방관들과 청년단까지 동원했다. 그렇게 되니 사람들은 소방서나 청년단에 끌려가서 매타작을 당했다. 갑자기 경찰서가 셋으로 불어난 셈이었다. 사람들의 원성이 더 커지는 가운데 좌익으로 생각을 돌리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그즈음에 남편이 숨죽여가며 마을사람들에게 열성으로 손을 뻗친 것을 외서댁은 잘 알고 있었다. 59

마침내 고대하고 고대하던 세상이 왔다고 남편은 있는 대로 활갯짓을 쳤지만 그녀는 좀처럼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건 시아버지 때문인지도 몰랐다. 시아버지는 남편이나 그 사람들이 하는 일을 마땅찮아했다. 지주들이 아무리 못된 짓을 했고 부자들이 아무리 미운 짓을 했어도 그렇게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들몰댁의 생각) 71

말이 좋아 농지분배였지 진작에 부자나 지주들과 한패거리가 되어버린 군정이 한 일은 배부른 놈 더 배불려주는 것일 뿐이었다. 소작인들은 벌써부터 군정을 믿지도 않았고, 신용하지도 않았지만 그 일로 더욱 그들이 꼴사나운 ‘양코배기’고 ‘양귀신들’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기게 되었다. 군정은 그보다 몇 달 앞서서는 소작료를 삼칠제로 내린다고 했었다. 반타작 오오제에서 삼칠제가 된다는 것은 눈이 번쩍 띄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추수를 하게 되자 지주들은 누넹 불을 달고 호령을 해댔던 것이다.
“누구 맘대로 삼칠제여, 삼칠제가! 삼ㅊ칠제 주장허는 놈덜언 당장나서봐. 영영 소작 띠고 말 것잉께. 땅임자는 나고, 억울허먼 군정에 가서 남치지 물어도라고 혀!”
그 서슬 앞에서 고개 들고 입 놀릴 작인은 없었다. 지주들은 반타작을 밀고 나갔고, 군정에서는 지주들이 하는 일을 모른 척하고 말았다. 73-74

“양코배기도 양코배기제만 그 앞장서서 설레발치는 관공서놈덜이고 순사놈덜이 더 문제시.” “금메 말이여, 고 잡녀러새끼덜언 일정 때넌 왜놈덜 앞잽이로 그리 날치등마 인자 양코배기덜 앞잽이로 또 그리 날쳐대니 오것이 무신 염병헐 놈에 일이당가.” “긍께 쳐죽일 놈덜이제.” 사람들은 모여앉기만 하면 분을 끓였다. 75

“이 사람아, 내 죄럴 이리 키워놓을 수가 있는가. 자네의 깊은 속어찌 모르리. 내 무슨 말을 더 할까.”
정 참봉은 월녀를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월녀는 그 품에서 비로소 쏟아지기 시작하는 눈물을 흘렸다. 정 참봉이 조끼주머니에서 꺼낸 한지에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素花’였다.
“고맙구만이라, 고맙구만이라.”
월녀는 방바닥에 엎드리며 흐느꼈다. 108



13 냉철한 비판을 생리로 가진 역사의 정체는 무엇인가

해방의 소식과 더불어 지리산을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자 자신을 맞이한 것은 기쁨에 넘쳐 있는 읍민들이었다. 못 먹어 메마르고 억눌림에 찌들었던 얼굴들에 밝은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그 밝게피어난 얼굴 얼굴에 어울리게 활갯짓도 시원스러웠다. 자신을 대하는 어떤 사람의 눈길에서나 신뢰와 반가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무슨 일인가를 어서 해주기를 기대하면서, 그들 자신이 벌써 그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친일파나 일본에 붙어먹은 것들은 모두 몰아내고 새 사람들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일치를 보이고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자신은 안창민과 손승호 등을 규합해서 민중들의 그런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군단위 조직을 서둘렀다. 그 조직을 통해 동네마다 이장이 바뀌면서 동시에 건준지부가 결성되었고, 전국 형무소에서 2만여 명의 독립투쟁자들이 석방되었다는 소식을 뒤따라 김태규 선배를 맞이했고, 읍민들은 열렬한 환영을 보냄으로써 독립투쟁자가 겪은 고통을 영광으로 바꿔주었고, 그 아낌없는 박수가 과거의 노고에 보내는 것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대라는 것을 민중들은 일깨우고 있었고, 조선인민공화국 선포에 따라 건준지부는 인민위원회로 바뀌면서 새 나라 세우기는 거침없이 이루어져갔다. 일체의 친일반민족세력이 제거된 상태에서 민중들은 인민위원회에 적극적으로 호응했고, 인민위원회를 맡은 책임자들은 민중들을 위해 헌신했다. 지주나 유지가 인민위원회에 개입한 경우는 김사용 같은 양심적이고 신망 있는 사람에 한했다. 읍이나 면단위에서 그들의 죄상 유무를 가려내는 데는 새로운 심사나 기준이 하등 필요하지 않았다. 읍민이나 면민들이 먼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거침없고 막힘 없던 새 나라 세우기는 미군의 점령과 함께 실시된 군정의 조선인민공화국 부정으로부터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군정의 인공 부정은 혁명적 인민의 나라를 파괴하는 1단계 공작이었다. 그리고 미군정은 연속적으로 파괴공작을 펴나갔다. 각 지역으로 군정중대를 파견한 것이 2단계 공작이었고, 그 조직을 이용해 반민족세력인 경찰과 관리를 재등장시킨 것이 3단계 공작이었다. 그리고 경찰을 무장시킨 다음 모든 지역에서 인민위원회를 강압적으로 해체시켜 나간 것이 4단계 공작이었다. 따라서 인민위원회 해체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공산당 활동 불법화와 동시에 체포를 감행하기 시작한 것이 5단계 공작이었다.
공산당의 합법활동은 지하활동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고, 인민위원회 조직이 다 깨어진 상태에서 대부분의 간부들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자신도 예외일 수 없었고, 감옥에 가서 보니 해방이 되고 풀려난 독립투쟁자 3분의 2가 다시 잡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정치하에서 경찰질을 해먹었던 자들의 손에 다시 잡혀 들어온 그들의 죄목은, 일본이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인 것처럼 ‘독립투쟁자’에서 '공산주의자'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자신들의 조직이 지하화되자 군정의 폭력적 파괴공작은 가속화되었고, 그에 맞서기 위해 자신들도 무장투쟁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정은 남쪽에 미국식 정권을 세우기 위해 혁명세력의 말살을 추진하는 한편으로 강제적 경제정책인 미곡수매로 인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강제로 시행된 미곡수매와, 관리들의 부정으로 균형을 상실한 배급제도 때문에 인민은 굶주림에 시달리며 군정에 대한 불만을 키워갔다. 그 불만이 최초로 폭발한 것이 화순에서였다. 첫 번째 맞이한 해방기념일에 광부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시위를 벌였고,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광주를 향해나아갔다. 광부들의 생활 대책을 해결하라는 그 경제성 시위는 군정에 대한 인민들의 최초의 도전인 동시에 군정의 경제정책 실패를 입증하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 중대성을 인식했던 것인지 군정은 그들의 관례를 깨고 미군들을 직접 내세워 시위진압에 나섰다. 미군들은 기관총으로 무장한 자동차들을 동원해 시위자들을 위협하는 한편 설득작전을 폈다. 곧 요구조건을 들어 해결해 주겠으니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시위대는 그 말을 믿고 화순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것이 시위를 막으려는 미봉책이고 기만이었다는 것은 얼마 가지 않아 드러났다. 군정은 한 달이 지나고, 다시 한 달이지나도 아무런 해결책을 내놓지 않았다. 굶주림에 지친 광부들은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고 다시 들고일어났다. 그 시위는 전보다 사람 수도 많았고, 움직임도 더 격렬했다. 미군들의 대응도 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그들은 탱크를 동원했던 것이다. 10월이 끝나는 날 시작된 미군의 폭력진압은 그들의 잔인성을 스스로 입증했다. 그들은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맨몸의 시위 군중을 탱크로 밀어붙이며 총격을 가해 사람들을 죽였던 것이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쌀 배급이 중단되면서 터지기 시작한 민중항쟁은 경상남도 전역으로 불붙어내려와 마침내 섬진강을 건너 전남으로 그 불길을 옮기게 되었다. 동학농민봉기가 전북에서 일어나 그 불길이 삽시간에 전남을 뒤덮고 섬진강을 건너 경남으로 옮겨붙은 것과는 반대의 경로를 밟은 것이었다. 서로 이웃하고 있으면서도 산맥으로 막혀 있는 두 지역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가 섬진강이었다. 10·1항쟁의 불씨를 품은 바람이 섬진강을 건너와 전남에서 제일 먼저 불꽃을 피운 곳은 화순이었다. 화순은 삼팔 이남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의 탄광지대였기 때문에 일제시대부터 주된 경제권은 다른 지방과는 달리 농토를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탄광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 따라서 사회변혁세력도 3천여 명을 헤아리는 광부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일제 때부터 철도청이 있었던 순천의 철도 노동자, 항구로서 일본과의 뱃길이 열려 있었던 여수의 부두 노동자와 함께 지방적 특성을 강하게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해방이 되면서 화순에는 예기치 못한 이변이 밀어닥쳤다. 일본이 물러가면서 사회변동이 생긴데다가 삼팔선이 그어짐에 따라 석탄 소비량이 격감되어 생산이 반으로 줄어버리자 광부들은 날로 심해지는 생활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더구나 쌀을 공출하고 배급을 타먹도록 통제된 군정의 미곡정책 아래서 쌀을 공출한 실적이 없는 그들은 쌀배급마저 제대로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날로 심해만 가는 굶주림 속에서 그들이 살아날 가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마침내 지난 8월의 시위에서 속은 분노와 경상도에서 번져온 불길과 함께 일제히 들고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이 10월 끝날이었다. 그들은 다시 도청소재지인 광주를 향해 나아갔다. 이번에도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미군들이었다. 언제나 경찰을 앞세우고 자신들은 뒤에서 조정만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는 그들이 두 번째로 그 원칙을 깬 것이다.
"우리는 굶어죽을 수 없다. 채탄작업을 정상화하라!"
“석탄생산 복구시켜 우리 생계 해결하라!"
3천여 명의 광부들이 미군의 저지에 맞서며 구호를 부르짖었다. 그 대열 속에는 광부만이 아니라 때 묻은 머릿수건을 쓴 아낙네들과 굶주림으로 비쩍 마른 아이들도 끼여 있었다.
미군은 또 설득을 하고 나섰다. 그러나 시위대는 그 말을 듣지않았다. 지난번에 한 번 속은 것으로 족했던 것이다. 설득작전이 먹혀들지 않자 미군 대령이 나섰다. 자기를 믿으라고, 틀림없다고, 요구사항을 금방 해결하겠다고 미군 대령은 자기의 계급을 내세우며 믿어달라고 했다. 전과 다른 높은 사람이라서 광부들은 믿기로 했다. 그래서 시위행진을 중지하고 대열을 다시 화순으로 돌렸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경찰력이 투입되어 주모자 색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자신들을 똑같은 거짓말로 속이고, 보복행위까지 가하게되자 광부들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그들은 총을 가진경찰들에게 맨주먹으로 맞붙었다. 광부들의 기세에 경찰들은 총을 쏘아댔다. 경찰의 총알에 광부들이 무기로 하여 맞선 것은 채탄작업에서 캐낸 돌멩이들이었다. 아무리 총을 가졌다고 하지만 오랜 굶주림에다가 분노까지 겹친 수많은 사람들의 결사적 대항을 이겨내지 못하고 경찰들은 쫓겨갔다. 경찰의 총에 부상당한 동료들의 피를 보자 분노가 더욱 거세어진 광부들은 또다시 광주를 향해 성난 물결이 되어 밀려갔다. 그러나 그들은 광주에 다다르지 못하고 미군에게 앞을 가로막혔다. 그들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밀고나갔다. 미군들은 그들을 향해 총을 갈겨댔다. 그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변했다. 사방으로 흩어진 그들은 돌팔매질을 퍼부으며 미군들에게 맞섰다. 그리고 돌격대를 만들어 미군 지프차를 공격했다. 여러 사람이 통나무를 지프차 밑에 밀어넣었다. 그리고 지프차를 엎어버렸다. 그들은 매일같이 갱도를 뚫어나가는 생활 속에서 통나무다루기는 그 누구보다 익숙했던 것이다. 막장의 삶을 살아온 고통스러운 인내를 목숨을 내건 살기로 바꾼 광부들의 대항은 악착스럽고 처절했다. 그들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미군들은 도망쳤다. 그러나 미군들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들 또한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글이글 불붙은 석탄덩어리가 된 그들이 광주로 치달아갈 때 그 앞을 차단한 것은 미군의 탱크였다. 탱크는 그들의 머리 위에다 불을 토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공포라고 하지만 소총에 비해 그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차량도 미군들도 몇 갑절 늘어나 있었다. 기동성이 빠른 미군들이 인접 지역에서 동원된 것이었다. 아무리 기를 쓰고 돌멩이를 던져도 쇳덩어리인 탱크는 끄떡도 하지 않고 불을 토하는 괴물로 그들을 밀어붙였다. 그들을 향해 날아오는 건 탱크포만이 아니었다. 탱크포와는 달리 소총은 그들의 가슴을 향해 날아왔다. 광부들은 허기진 피를 토하며 땅바닥에 죽어넘어졌고, 부상을 당해 쓰러졌다. 그들은 동료들을 떠메고 쫓길 수밖에 없었다. 쫓기는 그들을 향해 쇳덩어리 괴물은 계속 불을 토하며 육박해 오고 있었다. 누가 죽고, 누가 다쳤는지를 알 수도 없이 제자리로 쫓겨온 그들을 에워싼 것은 미군들과 경찰이었다. 경찰들은 미군 덕에 되살아나 미군을 위해 충성했던 것처럼 다시 미군들의 엄중한 보호를 받아가며 주모자 색출을 하기 시작했다. 세 명이 즉사했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미군들은 사망자는 물론 부상자들마저 아랑곳하지 않은 채 50여 명을 주모자로 체포해 갔다. 그러나 광부들의 저항은 끝나지 않았다. 처음처럼 전체가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산으로 숨어든 사람들이 여러 개의 조를 만들어 산발적이고 다각적인 공격으로 미군과 경찰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러는 동안에 병원치료를 받을 도리가 없는 부상자들은 호박속이나 찧어 붙이고, 쑥가루를 밀가루에 이겨 붙이면서 하나씩, 둘씩 죽어가고 있었다.
화순탄광사건의 소문은 삽시간에 번져나가는 들불이 되어 산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폭력을 불사하는 강압적인 미곡수집에 불만이 쌓일 대로 쌓여 있던 농민들에게 탄광사건은 행동을 충동질하는 도화선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미군들이 탱크로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밀어붙여 죽였다는 것은 민족감정을 예리하게 자극시켰고, 경찰들이 또 그 앞잡이놀이를 했다는 것은 그동안 누적되어온 적개심을 폭발시키게 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농민들은 벌써부터 경상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해서, 이북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단행했다는 소식을 알고 있는 것처럼 환히 듣고 있는 터였다. 미군정의 파괴공작에도 불구하고 인민위원회 조직은 그들을 결속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은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다! 미군은 물러가라!"
“공출제도 쳐없애고 토지개혁 단행하라!"
이런 구호들이 터져나오며 곳곳에서 민중들이 들고일어났다. 10·1항쟁은 마침내 전라도땅에서 바람 탄 불길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염상진의 생각을 통해 역사 서술) 124-131



14 까마귀떼

소문이란 으레 그렇듯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채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소문들을 믿게 마련이었고, 끝내는 그 소문들에 휘둘리게 되었다.
정부는 ‘여순반란사건 관련자 8명이 11월 1일 사형을 당했다’는 사실을 신문에 보도했다. 168

여수와 순천의 소식들은 끔찍스러웠다.
여수읍민들이고 순천읍민들이고, 표나는 우익들을 빼놓고는 모두가 동네별로 학교 운동장에 끌려나가 심사를 받는다고 했다. 눈이 감겨진 채 실시되는 그 심사는 손가락질로 좌익을 가려내는 것이었고, 거기서 지목당한 사람들은 다시 몇 마디씩의 조사를 받았다. 그 간단간단한 조사에서 생사가 결판나는 것이었다. 손가락질은 이장이나 피해자 가족들이 맡았다. 그러나 간단한 조사마저 필요 없이 확실한 좌익으로 지목된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대창으로 난자해서 죽였다. 조사를 거쳐 좌익 혐의를 받은 사람들은 삼사십 명씩 차에 실려 가까운 산골짜기나 해변으로 끌려나가 무더기로 총살당해 죽었다.
순천에서 죽어간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지만 특히 여수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그 수를 알 수가 없을 지경이라고 했다.
특히 여수에서는 학생들이 많이 죽어갔다. 14연대 주력은 후퇴를 하면서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동조자들에게 일단 동행을권유했다. 운신이 어렵게 된 일반인들은 상당수 따라나섰지만 학생들은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학생들이 따라나서려고 해도 부모네들이 만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까짓 만세 좀 부른 걸 어쩌겠느냐, 그까짓 삐라 좀 뿌린 게 무슨 큰 죄겠느냐, 하며 자식들을 붙들어앉힌 것이다. 핏줄을 귀히 여기는 마음이 그런 일들을 설마 하고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한 학생이 한둘이 아닌 데다가, '학생'이라는 신분에 대한 믿음도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경의 처벌은 학생이라고 해서 예외를 두지 않았다. 만성리해수욕장뒤 터널의 골짜기로 끌려간 학생들은 줄줄이 총살을 당해갔다. 기관총의 난사 앞에서 시체들은 차곡차곡 쌓였고, 그 수는 수백을 헤아렸다. 물론 거기에는 학생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장소도 그곳만이 아니었다. 허리에 맷돌이며 돌을 매달고 배에 실려나가 바다로 떠밀려 들어가 죽어갔고, 심사를 받는 학교 운동장에서도 죽어갔다. 특히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에 대한 소문은 사람들 속에 찬바람을 일으키며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그는 시범을 보이기 위해 사람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공개처형을 했는데, 좌익들을 줄지어 세워 손수 닛뽄도를 휘둘러 목을 쳐죽였다. 그가 닛뽄도를 단 한 번 내려치는 것으로 목 하나씩이 뎅겅뎅겅 잘려 땅바닥에 굴러떨어졌고, 피와 모래가 범벅된 그 두상들은 가족이 손도 못 대고 가마니에 쓸어넣어져 동네마다 전시되었다.
그러나 피해자 가족들은 그 누구도 원망할 사람이 없었다. 강압으로 그 일에 동조한 것이 아니었고, 인민위원장은 14연대가 자원자들을 이끌고 후퇴하던 날 그 대열을 산마루에서 지켜보다가 목매달아 자살을 했던 것이다. 그 책임에 대해서 더 할 말이 있을 수 없었다. 169-171

하댗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걷다가 무심결에 샅을 걷어올렸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마누라 들몰댁의 얼굴이었다. 하대치의 머릿속에서는 퍼뜩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건 마누라와 밥집 여자의 차이였다. 마누라와 밤일을 치르고 나면 지금 같은 기분이 아니었다. 어딘가 편안하고 흡족하고 맺힌 데 없이 확 풀린 기분이었다. 목까지 잠기는 뜨거운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 같은 시원함이나, 땀 뻘뻘 흘린 들일 중간에 점심 배불리 먹고 그늘에서 낮잠을 자고 난 다음의 개운함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간밤의 일은 전혀 그런 맛이 없었다. 발목까지밖에 차지 않는 찬 개울물을 첨벙댄 것 같은 석연찮음과 미흡함이 남아 있었다. 미지근한 된장국에 식은 밥덩이를 급히 먹었을 때처럼 영 속이 거북스럽고 허했다. 횟수만 거듭하다 보니 샅이 뻐근하고 당겨올리는 것도 과히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 짓거리는 짚은 정 있고서야 지맛이 나는 모냥인갑구만. 하대치는 밤일의 오묘함을 깨닫고 있었다. 비록 마누라는 무덤덤하고 무심한 듯 자신을 받아들였어도 따ㄸ스하고 깊은 물이었고, 장터댁은 활짝활짝 웃고 간드러지는 꽃이었지만 결국은 차갑고 얕은 개울물이었다. 그러니 마누라가 만들어준 쌈지와 장터댁이 사다 준 궐련갑의 감촉이 같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179-180



15 기습이다!

(경찰서장) 남인태의 고향은 담양 옆에 있는 장성이었다. 그는 아홉 살 때부터 주재소의 소사 노릇을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반농사꾼에 반노동자였다. 그래서 집안 형편은 소작인보다 더 쪼들렸다. 그 대신 그의 아버지는 땅밖에 모르는 농사꾼에 비해 세상 보는 눈치는 빨랐다. 읍내 중심가에서 품을 팔며 귀동냥 눈동냥 한 것들이 밑천이었다. “주걱 든 년이 한술 더 뜨고, 정재 파고드는 쥐가 더 기름도는 법잉께, 앞으로 시상에 그래도 배 안 곯고 살자먼 일본사람헌테 붙어야 써. 시상이 일본 시상인디 뒷전에서 일본놈, 일본놈 욕험시로 정작 딱 맞닥뜨리먼 꼼지락도 못 허는 고런 인종덜언 빙신중에 상빙신이여.” 그의 아버지의 지론이었고, 그에 따라 그는 보수없는 소사 노릇을 해야 했다. 그를 하루빨리 일본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아버지의 욕구는 거의 광적이었다. 일본말 일본글을 제대로 익힐 때까지 그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회초리질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의 그런 광적인 욕구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는 갈수록 일본 순사들의 사랑과 신임을 받았고, 독학으로 계속 검정고시를 치러 학력을 쌓아갔다. 그는 결국 아버지가 열망한 대로 일본 순사제복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아홉 살 때부터 주재소의 공기를 마시고 산 그는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고 뛰어난 일본 순사였다. 권력의 맛을 만끽하고, 권력이 당연히 배당하는 부의 맛까지 즐기다가 별안간 해방을 맞게 되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진 것같은 절망감과, 공로가 죄로 뒤바뀌는 공포감에 안절부절을 못했다. 몰매를 맞아 죽을 위기를 서너 차례 모면하며 한 달을 조금 넘게 전전긍긍하다 보니 뜻밖에도 광명이 찾아들었다. 과거 경력자를 주축으로 해서 경찰조직이 재구성된 것이었다. 그에게 해방이 갑작스럽게 몰아닥친 캄캄한 밤이었다면 그 조직이야말로 또 갑작스럽게 열린 눈부신 광명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돌변에 그는 잠시 어리둥절했고, 그리고 이내 당당해졌다. 경찰제복이 그의 과거를 말끔히 가려주었고, 서장이라는 계급이 그의 권력을 떠받들고 있었다. 222-223

“빨갱이 사상으로 말하자면 이북은 복숭아고 이남은 수박이요. 이남 주에서도 여기 전라도하고 경상도는 아주 특제 수박이요.” 이북에서 월남해 순천경찰서에 간부로 있는 어느 경찰이 한 말이었다. 공산주의자를 내세우고 있는 이북은 겉이 붉고 속은 흰데,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이남은 겉은 푸르고 속은 붉다는 뜻이었다. 223

안창민은, 어서 기운을 모아 병원으로 가야 된다고 스스로를 일깨웠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언제까지나 이대로 있고 싶은 나른함에 이끌리고 있었다. 그 나른함은 이상스럽게 혼미한 편안함이었다. 양쪽 어깨를 그 어딘가 든든한 곳에 눕히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견디기 어려운 상처의 통증과는 또 다르게 일어나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안창민은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때 의식의 어느 구석에선가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동맥을 자르는 로마 귀족들의 처형방법이었다. 피가 흘러나옴에 따라 서서히 죽어가는 그 방법은 아무런 고통이 없이 황홀경에 젖어들며 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의식이 흐려지기 전까지 유언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시간 여유가 있다고 그 글은 적고 있었다. 235

“도대체 이념이 인간의 뭘 해결한다는 거야."
자신의 부르짖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건 손승호의 말이었다. 한때 누구 못지않게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었던 손승호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그렇게 외쳤다. 그건 분명 외침이었다. 손승호는 낮은 목소리로 냉정하게 말했지만 그건 분명 외침이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자기의 생각하는 바를 굽히지 않은 그 말이 바로 외침이 아니고 무엇일 것인가. 염상진이 그의 이마에 권총을 겨누고서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까닭도 그 외침의 무게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념이라는 것이 정치지향적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소. 변증법도, 유물론도, 봉건주의도,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모두 정치지향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기적인 지배도구일 뿐이오. 봉건 왕조를 타도하고 세운 공산주의나 민주주의 사회가 도대체 절대다수 인간의 삶을 위해 한 것이 뭐가 있소. 그것들은 새로운 구속일 뿐이고 인간의 본질적 문제는 하나도 해결한 것이 없소.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는 20세기의 인간들이, 지배본능이 강한 인간들이 윤색해 낸 정치연극의 각본일 뿐이오. 그것들은 절대적일 수가 없소. 왜냐하면 모순투성이고 부정확한 존재들인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오. 그것들은 인간이 갖고 있는 만큼의 모순과 부정확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해야 하오. 그러므로 그것들은 절대적일 수가 없고, 신봉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오. 그런데 그것들을 절대적 존재로 신봉하게 되면 그만큼 인간들을 불행하게 만들 것이오. 인간은 인간이 만든 기계가 아니오. 인간이 인간을 장담하는 것처럼 어리석음을 범하는 일은 없소. 나는 다만 인간이고 싶을 뿐이오."
손승호는 완전무결하게 사회주의를 버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상진은 손승호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며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그가 사회주의를 버린 대신 자본주의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정말 그가 다시 사회주의로 전향할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논리의 타당성을 인정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옛정을 생각했기 때문일까.
안창민은 손승호의 생각을 이해해 주고 싶었다. 그의 말대로 인간은 인간이 만든 기계가 아니었고, 그가 파악하고자 하는 인간에 대한 인식 또한 하나의 가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손승호에게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역사현실을 외면하고 있었고, 인간의 본질적 문제가 삶 자체라는 인식을 결여하고 있었다. 그런 추상적 관념에 지배되고 있는 손승호가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땅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기를 선택하지 않는 한, 그러나 그 생각을 염상진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238-240



16 감꽃은 먹을 수 있는 꽃

“이 해당분자!”
염상진은 차려자세를 취하고 있는 강동식을 후려쳤다. 강동식은 비척비척하다가 곧 똑바로 섰다. 그런데 코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 내렸다. ..
“하 동무, 이자를 끌어다가 저 나무에 묶으시오!”
염상진은 숨을 몰아쉬었다. 피를 보자 더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 감정을 자제하려고 노력했다. 손찌검은 하지 말아야 된다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말했다. 그건 나이의 고하간에 낮춤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과 함께 엄연한 당의 규율이었다. .. 생사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안창민에 대한 초조와 염려가 뒤바뀌어 표출된 것이었다.
피를 보자 염상진의 감정은 일순간에 싸늘하게 식어들었다. 동지의 피는 한 방울이라도 소중한 것이었다. 그건 혁명의 원동력이었다. 피 한 방울, 한 방울은 굶주리며 핍박받으며 생성시킨 생명의 원천이었다. 피를 흘리고 있는 동지에게 또 손찌검을 해서 더 많은 피를 흘리게 할 권리는 자신에게 없었다. 이미 피를 흘리게 한 것도 반혁명적 행위였다. 262-263

염상진은 안창민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나약한 체구가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를 노출시켰던 것이 또 후회로 씹혀졌다. 그것이 부질없는 생각인 줄 알지만 그 후회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이번에 일으킨 혁명사업에 대한 미심쩍음과 연관된 문제였다. 아무리 당중앙이 지하로 잠적해야 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이번 사업의 허망한 실패에 대해서는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제일 납득이 안 되는 것이 당조직의 분열현상이었다. 각 도마다 지방당조직이 엄연한데 어찌하여 일제봉기가 이뤄지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당조직에 이상이 없다면, 그럼 이번 사업은 당중앙의 계획거사가 아니고 지엽적인 것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치밀하고 구체적인 사전계획 없이 충동적이고 순간적으로 일으킨 사업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반혁명적인 행위인가. 공산주의를 적으로 삼는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마당에 부분적이고 산발적으로 일으키는 사업은 힘의 소모만 자초하고 상대적으로 적의힘만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뿐이었다. 그런데 사업확대지령은 엄연히 당으로부터 하달되지 않았던가. 다시 혼란의 미궁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가정은 금물이었지만, 사태 전반을 놓고 가정을 한다면, 당의 그 지령은 여수, 순천지구에서 사업을 일으킨 다음 뒤늦게 내려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지극히 반당적인 회의적 추리르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실패를 의식할 때마다 머리를 드는 생각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263-264

이상한 우수가 뭉클 가슴에 괴어왔다. 나무에 묶인 강동식 탓이고 총상을 입고 혼자 버려진 안창민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가슴에 괸 우수가 설명되지 않았다. 아내의 안부가 염려스러워 조직의 명령도 어기고, 위험도 불사하고 행동한 강동식이 과연 나쁘기만 한 것인가 하는 자문이 무슨 앙금처럼 우수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었다. 부모에 대해서, 자식에 대해서, 배우자에 대해서 마음이 쏠려가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 인간의 삶을 가장 비인간적으로 만든 악조건들을 척결해야 하는 마당에 그 기본조건에 대한 충족은 당분간 유보시켜야 한다. 그런 인내의 고통 업이 혁명의 성취는 얻을 수 없고, 혁명의 성취 없이는 그 기본조건마저 파괴되는 것이다. 265



17 배고픔과 동물과 인간

“.. 공산당은 너나읎이 공평하게 사는 시상 맹근다는 말얼 두고 허는 소리요. 그런 시상이 꿈속에서나 있고, 말로나 있는 것이제 사람이 사는 시상에 워디 있을랍디여. 우리 냄편 따라 공산당 허는 농꾼들도 다 그말만 믿고 나선 것이제라. 대대로 물림허는 가난에 한이 맺히고, 배운 것 읎이 무식헌 농꾼덜이 고런 조청맹키로 달디단 말에 워찌 귀 솔깃혀지지 않컸소. 우리 남편맹키로 식자깨나 들었다는 사람덜이 가난허고 불쌍헌 사람덜헌테 죄 많이 짓고 있는 것이제라. 그라고 워디 빨갱이 된 사람덜만 귀 솔깃혔을랍디여. 쌔고 쌘 가난헌 사람덜언 나라가 금허고 순사가 겁난께 표식 안 내서 그렇제 다 귀 솔깃해 있구……”(죽산댁(염상진 부인)이 토벌대장 인만수에게 조사받으면서 했던 표현) 299-300

“무릇 정치라는 것은 명분이나 합법으로 가장된 인간의 탐욕과 이기의 절정의 표현이지요. 하므로, 그 탐욕이나 이기를 채우는 데 반하는 모든 요소는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시키는 것이 정치새리지요.”(스님과 김범우의 대화중 스님의 말) 314

“절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선생님의 말씀대로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개혁 없이는 사람 사는 세상이 될 수 없지요.”
김범우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선생도 그런 생각을 지녔으니 여기 오실밖에요.” 그분은 나직한 소리로 웃는 듯하더니, “세존께서 일찍이 인생 사고(四苦)를 생(生) 노(老) 병(病) 사(死)라 설파하셨는데, 내 주제넘은 소견으로는 ‘주릴 아(餓)’ 아고를 하나 더 첨가시키고 싶습니다. 굶주리는 고통,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부처님께서도 인간의 몸을 타고 나이서 판단을 하시는 데 환경젹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던게 아닌가 합니다. 인도는 열대에 속하는 땅이라서 최소의 노동을 바치면 절대적 아(餓)는 벗어날 수가 있지요. 땅도 무한히 넓고. 그 대신 기후에 따른 병마는 인간이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병고(病苦))는 있으나 아고(餓苦)는 없는 게 아닌가 합니다. ㄸ고같은 사람끼리 짧은 한평생 살다 가면서 누구는 기름지게 먹고 누구는 굶주림에 허덕여야 합니까. 배부른 자에게 이승은 극락일지 몰라도 굶주림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이승은 지옥입니다. 그리고 굶주리는 자들이 절대다수를 이룰 때 그 세상은 바로 지옥인 것이지요. 이건 인간사의 끝없는 숙제일 것입니다.” 316



18 수혈


19 새가 창공에 그 발자국을 새기지 못하듯이 인간사 그 무엇이 영겁 속에 남음이 있으랴

성일(죽임당한 금융조합장의 아들)이 방에만. 틀어박히게 된 것은 하판석 영감의 사망 소식을 듣고부터였다.
“너 생각대로 하판석인가 뭔가 하는 영감탱이가 죽었다.”
윤태주가 이 말을 하는 순간 성일이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야, 정신 차려 임마. 정신 차리라구.” 381

그날 밤부터 성일은 하판석 영감을 꿈에서 만나야 했다. 몰매질을 가했던 그날 밤의 일이 생생하게 재현되기도 했고, 죽어 있던 영감이 벌떡 되살아나기도 했고,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쫓아 오기도 했고, 영감과 낯 모르는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아 자신이 죽어가곧 했고, 붉은 완정을 찬 영감의 아들에게 붙들려 대창에 전신을 찔려 죽기도 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아버지일 뿐이라고, 아버지는 마흔일곱에 돌아가셨는데, 그 영감은 예순도 더 넘었다고, 아버지는 금융조합장이었는데 그 영감은 농사꾼일 뿐이었다고, 그 어떤 합리화 앞에서도 자신이 그 영감을 죽였다는 죄의식에서는 벗어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382-383

“.. 그래도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현실쯤은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것이 신문을 열심히 읽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무언가 전체적인 맥을 잡을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할 터인데, .. 김 선생은 전공이 역사시니 그런 눈을 가지셨으리라 믿는데, 저도 좀 맥을 잡을 수 있도록 해주시지요.”(자애병원 전원장의 말) 399

"역사학자들이 대체로 규정한 통설에 의하면 역사적인 한 사건에 대한 객관적 비판이나 정당한 평가는 100년 후에나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발생하기 시작한 모든 사건들은 2045년쯤에나 가서 냉엄한 역사의 심판대 위에 올려질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전제로 하면 제 이야기가 얼마나 주관적인 것이 될 거며 불확실한 것인지는 상상할 수 있으시지요? 그래도 들으시겠어요?"
입을 꼭 다문 전 원장은 고개만 끄덕였다.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제가 파악하고 있는 대로 대충만 얘기하죠. 그러니까, 2차대전 종전 무렵의 세계적 정치상황은 윌슨이 위장적이나마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던 시대는 이미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의 주역이 식민주의의 대표적 국가인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이었다면 2차대전 종전 무렵에는 그 주역이 미국과 소련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항쟁을 계속해서 벌인 데다, 독일의 침략을 받음으로써 식민주의 국가들은 협공을 당하는 이중적 상황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의 한편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소련이 그 세력을 팽창시켜 나가고 있었고, 자본주의 국가 형성을 완성시킨 신생 미국은 그 힘이 갈수록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미국은 2차대전에 참전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궁지에 몰리고 지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자연스럽게 연합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소련도 뒤늦게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상반된 이념을 추구하면서도 그들이 동지가될 수 있었던 것은 독일과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서로를 방어하고자 하는 공동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실리적인 결합이었고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계를 무대로 삼아 자신들의 이념을 확장시키려는 서로 다른 꿈을 속으로 감추고 있었습니다. 2차대전 종전 전에 그들은 이미 그 준비를 했던 것이고, 종전과 동시에 그들은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들의 이념 팽창주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분할점령입니다. 우리나라의 분할점령은 독일의 분할점령과는 전혀 그 성격이나 의미가 다릅니다. 미국과 소련이 전범국인 독일을 분할점령한 것은 승전국으로서 전리품을 처리하는 당연한 권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그런 권한은 또 하나의 전범국인 일본에게 행사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들은 우리나라를 분할점령하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팽창주의는 소련의 팽창주의가 일본에까지 미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연합국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미국은 특히 일본 문제에 있어서는 발언권이 절대적이었지요. 일본을 도맡다시피 해서 싸운 것이 바로 미국이니까요. 그래서 미국은 일본 열도를 독일식으로 나눠먹지 않고 독식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건 태평양으로 뻗치는 소련의 힘을 견제하는 동시에 태평양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의 세력권을 형성하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그 계획에따라 당연히 한반도 분할이 필요했고, 독일에서와는 달리 일본 쪽에 전적이 미미한 소련은 한반도의 반이나마 차지하는 데 동의한것입니다. 그들은 처음에 일본 지상군의 항복을 받기 위해 한반도에 진주하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고, 뒤이어 '통치능력이 생길동안 신탁통치'를 해주겠다는 일방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해방을 갈망해 왔고, 독립국가 건설을 열망하는 우리 민족의 뜻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전개된 것입니다. 두 나라의 점령군을 맞으며 우리는새로운 역사의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첫째, 두 강대국이 내세운 명분을 무산시킬 수 있도록 일사불란한 민족적 단합을 보여야 했습니다. 둘째로, 그들의 정치적 도구가 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며 제2의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첫째도 실패, 둘째도 실패함으로써 식민지 상황보다 나을 것 없는 분단국가를 만드는 데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늘과 같은 정치·사회적 혼란과 자체분열을 일으키는 민족적 희생이 야기되게 되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을 떠나기 전 그의 앞을 가로막는 군중들에게 ‘여러분, 나에게 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 주시오' 한 말은 우리 민족의 행동방향을 단적으로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해방은 식민지 시대의 종식이 아니라 새로운 식민지 시대의 개막이었습니다. 전 시대에는 일본을 공동의 적으로 삼는 민족적 명제나 자존이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백인들이 만들어낸 이즘이라는 것에 최면이 걸리고 마취되어 우리끼리 적을 삼아 살육을 자행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즘을 일단 정치도구화한 이상 상호 양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 실현을 위한 상호 상승작용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정치생리이며 힘의 역학입니다. 벌써 서로를 괴뢰라고 공공연하게 욕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유치하고 졸렬하고 파렴치한 짓들입니까. 그러나 그 뻔뻔스러움과 무모함과 이율배반이 곧 우리의 정치현실입니다. 비판이나 선택이 용납되지 않는 획일적 모순의 질서에 줄을 맞춰야 하는 것이 앞으로의 우리의 길입니다. 그 줄에서 이탈하는 자는 적이고, 적은 처단하는 논리만이 절대적일 뿐입니다. 이 현실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확실한 것은, 다만 시작이라는 것뿐입니다. 미·소의 세력에 우리가 아무리 민족적으로 단결해서 대항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부류들이 서로 양쪽의 정치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 편가름은 앞으로도 무수한 인명의 희생을 요구할 것입니다. 100년 후의 역사는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비판하고 판정 내리게 될지 모릅니다. 지금, 남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혼란은 원장님도 다 아시는 바대로 그런 정치적 대결로부터 파생되는 피할 수 없는 현상들입니다. 아주 복잡한 문제들입니다." 400-404



20 토벌대 물러가라!

“과거란 망각이 아니라 현재의 축적이라는 말이 맞군.”
김범우는 손승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무슨 소린가?”
“왕년의 마르크시스트다워.”
손승호가 고개를 저었다. 444

"자넨 아까부터 날 자꾸만 놀리는군."
손승호가 지친 듯한 표정으로 김범우를 건너보았다. "놀리는 게 아니라 너무 경이로워서 그러네. 이제 치료도 끝났으니 경위나 간단히 듣세."
그때 간호원이 차를 날라왔다. 무쇠로 만든 찻주전자의 무게감이 고풍스러움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장좌리에 가정방문을 나갔었지. 마침 토벌대가 빨갱이 색출을 나왔는데, 동네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한쪽은 잔치 준비라도 하는 것처럼 음식냄새 풍기며 소란스러웠고, 다른 한쪽은 금방 누구라도 죽일 것처럼 살벌한 분위기였지. 남자들은 모조리 모아 세워놓고 사상조사를 하는 거였네. 장만하고 있는 음식은 그 조사를 적당히 잘해달라는 뜻으로 만드는 것이고, 그거야 이미 동네마다 행해진 일이니까 그러려니 외면을 했지. 그런데 술에 밥에 배 터지게 먹은 그들이 휴식이랍시고 낮잠을 자기 시작했는데, 글쎄 한 놈이 빠져나와 처녀 혼자 있는 집으로 뛰어든 거야. 그래 어찌 됐겠나. 처녀는 반항을 하고 그놈은 덤벼들고 하는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는데 밖에 나갔던 처녀 오빠가 돌아온 거네. 상황이 어찌 됐겠어. 다급해진 그놈이 총을 갈겨댄 거야. 마당에 죽어 넘어진 그 참혹한 꼴이라니. 그 집이 내가 몇 시간 전에 들른 학생 집이었고, 그때 만났던 사람을 피 흘리는 시체로 보아야 했지. 이게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총 든 자들 앞에 인명이 파리 목숨이야. 그런데 나를 더 미치게 만들어버린 건 그 부모들의 체념이야. 분하고 원통하지만 자기네처럼 힘없는 사람이 어쩔 수 있느냐는 것이었네. 나는 더 참을 수가 없었네. 나는 그 시체와 절망적 체념에 빠진 부모의 슬픔을 외면하고 돌아설 수가 없었어. 그런 비굴과 비겁을 저지를 용기가 없었던 거야. 그렇다고 내가 그들보다 나은 힘을 가진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또한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네. 그 순간 나는 내가 한 마리 작고 하잘것없는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어.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 인간인가, 이런 집중적인 회의 앞에서 나는 완전히 해체되고 있었어. 그 장소를 외면할 비굴한 용기도 없고, 그렇다고 폭력에 대항할 당당한 용기도 없는 나는 이미 내 눈앞의 시체와 다를 것이 없었지. 그 순간 난 각오했어. 인위적인 힘을 만들자고, 그들에게도 힘이 있음을, 관권의 폭력을 쳐부술 수 있음을 실증시켜 주고 싶었어. 그때의 절망스러움은 나를 내 정신이 아니게 만들었어. 나는 선생이란 무기를 최대한 이용해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했지. 그 시체까지 동원한 선동은 30분도 안 걸려 완료됐지. 줄을 세우고, 구호를 몇 번 연습시키고, 그리고 토벌대놈들이 뺑소니쳐버린 읍내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한 거야." 446-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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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판 서문(1995)
사람이 살면서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겠지만 궂은일들이 남기는 상처는 시간낭비와 함께 정신적 육체적인 손상까지 입힌다. 사람에 대한 실망과 사람에 대한 회의, 그러나 그것마저 삶의 피할 수 없는 내용으로 받아들이며 소설의 자양으로 소화하려고 애썼다. 인간의 역사 위에 분명 훌륭한 사람들은 존재했었고, 소설은 어찌할 수 없이 인간 긍정의 작업이니까.  6

최근 사오 년 동안에 터무니없이 범람하고 남용되는 단어가 ‘문화’와 ‘철학’이다. 그 두 단어는 아무 말에나 붙어 복합면ㅇ사를 이루면서 허위성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모호성을 가중시켜 혼란을 일으키게 한다. .. 그런 모호한 치장을 즐기는 사회심리는 무엇일까.  7


1 일출 없는 새벽

“나 대물림굿 하는 것 봤소.”
“야아?”
자신은 너무 놀라 얼결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바로 눈앞에 정하섭의 화가 난 것 같은 얼굴이 있었고, 그 눈이 불이라도 붙은 듯한 뜨거움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길을 받아낼 수가 없어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왜 무당이 됐소?”
“……”
“엄니가 시켜서 그랬소?”
“……”
“되고 싶어서 그랬소?”
“……”
눈물을 참느라고 목에 메었다. 정하섭은 또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자신은 눈물을 넘기고 또 넘기며 ‘니같이 이뿐 애가 워째무당딸이 됐는지 몰르겄다’ 했던 어린 날의 정하섭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답답하게 그러고 있지 말고 왜 무당이 됐는지 대답 좀 해보시오.”
정하섭이야말로 정말 답답한 말을 묻고 있었다. 그럼 나더러 어찌하란 말인가 …… 자신은 입술을 깨물며 대답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것이 지 운명이구만요.”
“운명 …… 운명 …… 운명 ……”
정하섭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바람에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은 새로운 눈물로 젖고 있었다.
“소화ㅏ가 무당딸만 아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하섭은 그런 말과 함께 자신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빼려 했지만 빠지지 않았다. 자신이 또 한 가지 놀란 것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은 이름만 가졌지 그건 좀체로 누가 불러주지 않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그저 ‘무당딸’이었을 뿐이다.  29-30

그가 첫 수음을 했던 중학 3학년 때, 죄의식과 부끄러움과 전신 마디마디가 시리도록 저릿거리며 퍼지는 어지러운 자극의 쾌감에 신음하며 보았던 두 여자. 하나는 책방집 딸 정님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소화였다.  32

“임무수행 중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소. 술과 여자요. 그건 둘 다 독이오. 술은 감정을 해이하게 만드는 독이고, 여자는 의지를 약화시키는 독이오. 철저히 경계하라. 단, 냉철한 당원의 이성으로 판단했을 때 사업에 절대이익을 줄 수 있는 여자까지 포함시키는 건 아니오. 그 판단기준은 당원의 이성에 맡기겠소.”
서울에서 세뇌교육을 받을 때 임철수라는 중간간부가 전혀 감정이 섞이지 않은 낮고도 일정한 음향의 목소리로 한 말이었다.  36

“버마 전선에서 꼬박 나흘을 자지도 먹지도 못하면서 싸웠네. 모두 지쳐 쓰러져 있는데 소대장이 한다는 소리가, 지금 밥을 먹겠느냐 여자를 갖겠느냐, 하고 묻는 것이야. 그런데 다 여자를 갖겠다고 했네. 그게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인간의 기묘한 심리네. 인간이란 그렇게 복잡미묘한 것인데 어찌……” 김범우 선생의 말이었다.  37



2 가슴으로 이어진 물 줄기

그려, 다 이 못난 애비 죄여. 이 애비 원망을 속 풀릴 때꺼정 혀. 근디, 불쌍헌 내 새끼야, 니 팔자는 애비를 원망헌다고 풀리는 것이 아녀. 피 타고남스로 매듭매듭맺힌 한(恨)인디, 고걸 워째야 쓸끄나, 한은 맺히기만 혔지 풀리는 것이 아닝께 한인 법인디, 고건 풀라고 발싸심허먼 헐수록 헝클어진 실꾸리맨치로 얽히고 설키다가 종당에는 지 명(命)꺼정 끊어묵는 법인디……(판석 영감, 하대치 아버지)  42

나라가 금하는 일을, 그것이 제아무리 옳고 바르다고 해도 나라와 맞서 이기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건 판석 영감이 칠십 평생을 통해서 겪어온 경험이었다. 동학란이 그러했고 일정 때의 독립운동이 그러했다.
“니넌 이름땜 허니라고 그리 드세게 사는갑다. 큰 대(大)에, 다스릴 치(治), 애시당초 가당찮은 이름이었제. 느그 할아부지의 택읎는 욕심이었는디, 고 이름을 그대로 붙인 나가 더 큰 잘못을 저질른 것이여……”  43-44

하대치의 아내 들몰댁.  44

“요것은 니 애비가 동학 따라 집 떠남스로 이 할애비헌테 냄긴겨. 나가 살아서 니 아들헌테 붙여줬어야 헐 이름인디, 앞자가 큰 대자, 뒷자가 다스릴 치자라고 혔다. 고것이 느그 애비가 생전에 품은 한스런 맴이었는디…..”(판석 영감의 할아버지의 생전 마지막 말)  49

나날의 생활이 아무리 고되어도 세월은 흘러가는 맛이 있어 살아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52

학식을 깨우친다는 것이 병이 되는 것일까.  54

아들놈은 저희들이 하는 일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것을 알지만, 하고 또 해야 된다고 했었다. 아버지도 그런 마음으로 동학에 가담한 것일까. 판석 영감은 확연히 잡히지 않는 그런 어릿거림 속에서도 결코 아들을 원망하거나 서운해하지는 않았다.  55

하대치가 오늘에 이른 것은 모두 염상진이 끼친 영향에 의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관계를 맺어온 것도 10년 세월이 넘어 있었다. 사범학교까지 나온 염상진은 하대치의 여백 많은 머릿속에다가 많은 모종으 ㄹ이식시켰다. 기질적으로 피의 농도가 짙고, 환경적으로 불만요인이 많고, 태생적으로 자학성이 강한 하대치는 그런 나무가 자랄 수 있는 최적의 기름진 토양이었는지 모른다.  58

마누라였다. 들몰은 마누라의 친정이었다. 그래서 순심이라는 이름이 분명히 있는데도 사람들은 마누라를 들몰댁이라 불렀다.  68

경찰들이 그렇게 허망하게 도망할 줄은 몰랐고, 경찰이 없는 세상에 지주며 유지라는 것들이 또 그렇게 맥을 못 쓸 줄을 몰랐었다.  71



3 민족의 발견

아버지(김사용)가 읍내에서 손꼽히는 지주 중의 한 사람인 것은 강아지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그건 인민이 정하는 기준이니까. 김범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인민이 정하는 기준, 그건 넘어설 수 없는 난해한 벽이었다.  77

김범우는 아버지가 염상진을 마치 자식 이름 부르듯 하는 것을 듣자 가슴이 먹먹해오는 감정의 굴절을 느꼈다. 아버지는 염상진이 타고난 낮은 신분의 피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의 총명함과 사리분명함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기 자식이 염상진과 호형호제하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 서로 다른 입장에서 마음의 진부(眞否)를 놓고 머뭇거리세 된 것이다.
“아무래도 아부님도 떠나셔야 헐 것 같습니다.”
“어허, 쓰잘디읎는 소리. 상진이 지를 못 믿겄으먼 이 애비도 피허라고 허드람서. 그 말이 무슨 뜻이냐. 상대방이 내보인 진심을 믿지 않는 것만치 큰 죄가 읎는 법이여. 그때부터 생사람 잡는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가그라, 싸게 떠나.”  78

김범우는 하나의 악마를 보고 있었다. ..
전혀 다른 두 모습의 문 서방, 그 어느 쪽이 진짜인가. 어떻게 한 사람이 그렇게 표변할 수 있는가. 그 어느 쪽이 진실인가.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이중적일 수 있을까. 그때 퍼뜩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있는 자들은 자기들만 사람인 줄 알지. 더러 그렇지 않은 우등생도 있지만 말야. 난 그 단순한 자만을 고맙게 생각하네. 거기에 우리가 설 자리가 있고, 그게 그들 스스로가 빠져들어갈 함정이니까.” 염상진의 말이었다. 그렇다, 인간은 복합적 사고와 다양한 감정의 줄기를 소유한 동물이다. 문 서방의 전혀 다른 두 모습은 그런 인간의 속성이 표출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두 가지 모습은 다 문 서방의 참모습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면서 외부의 영향과 상황에 따라 그것은 반응하는 것이다. 문 서방은 아버지에게는 선한 인간으로 반응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악한 인간으로 반응한 것뿐이다. 만약 아버지가 악한 지주였다면 문 서방은 여지없이 악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 서바으이 악은 악이 아니라 선인 것이었다. 88-89

그들이 무장투쟁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미군정의 무력탄압에 그 명백한 원인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행위를 ‘폭력’으로 간주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방어적 폭력’이었고 ‘상대적 폭력’이었다. 미군정은 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 부인, 친일파 핵심세력인 한민당의 옹호, 민족반역세력인 군 경찰 출신들의 재등용 비호, 공산당 활동 불법화, 청년단 구성과 백색테러 감행, 공산당원들의 무차별 체포와 조직 파괴공작,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폭력행위를 조직적이고 단계적으로 시행해 왔던 것이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남로당은 지하활동 속에서도 수난과 피해로 얼룩진 세월을 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차별한 폭력 앞에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방법, 그것은 또다른 폭력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제국주의적 지배술수에 말려든 것일 수 있었고, 군정이 더 가혹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타당성과 근거를 만들어 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쪽의 폭력이 상대의 폭력을 이기지 못할 때 그건 자멸의 길을 재촉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게 폭력의 생리이고 법칙이었다.  90

김범우는 그 ‘방어적 폭력’의 외로움과 한계성이 너무 답답할 뿐이었다.

“.. 나는 이제 OSS 첩보훈련원 톰슨이 아니라 조선인 김범우라는 사람인 것을 확실히 구분해 주기 바랍니다.”(김범우가 미군정 화이트 대위와 만나 대화중일부)  103

“사회주의 건설만이 그 길이야.”(염상진)
..
“좋아요, 어떤 주의를 따르든 그건 개인의 자유지요. 그러나, 그것이 곧 민족 전체를 위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성급한 판단은 금물입니다. 미국이다, 소련이다, 민주주의다, 공산주의다, 자본주의다, 사회주의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그런 정치적 택일이 아닙니다. 그건 한 민족이 국가를 세운 다음에나 필요한 생활의 방편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민족의 발견입니다. 그 단합이 모든 것에 우선해야 해요.”(김범우)
..
“자네 말은 아주 그럴듯해 보여. 그러나 그건 부르주아적 환상이야.”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미국과 소련에 점령당한 상태에서 그들이 내세우는 이데올로긴가 이념인가 하는 것에 놀아나 민족이 서로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뜻인데, 그게 부르주아적 환상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요?”
“우리에게 해방은 곧 인민혁명이야. 해방은 곧 새 역사의 시작을 의미하고, 그 시작은 인민혁명을 통한 새 나라의 건설부터네. 그런데 자넨 시대역행적으로 케케묵은 민족이나 찾고 잇지 않느냔 말야.”
“그렇게 속단하지 마세요. 민족이라고 하니까 핏줄만을 중시해서 어중이떠중이 다 싸잡아서 말하는 민족인 줄 압니까? 현시점에서 친일반역세력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어요. 그런 부류들을 완전히 제거한 상태에서 절대다수의 민중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집단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굳이 ‘민족의 발견’이라고 했어요. 형은 그게 바로 인민혁명세력의 규합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건 아닙니다. 그 민족에는 일체의 정치성이 배제되어야 합니다. 아니, 더 확실하게 말해 그 민족 아래 모든 정치이념들은 단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미국과 쏘련에 점령당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소련은 자기네들 이익추구를 위해 우리의 앞길을 방해하는 훼방꾼들일 뿐이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갈려 이념을 먼저 선택하면 우리 민족은 결국 분열밖에 할게 없다 그겁니다.”
..
“그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린가! 일정 때부터 쏘련만큼 우리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관심 쓰고 도와준 나라가 도대체 어디 있는가?”
“과연 그럴까요? 내가 두 가지 사실만 지적해 볼게요. 첫째는 신탁통치 결의고, 둘째는 미군정이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탁통치라는 건 미국이 혼자서 결정한 일입니까? 그건 엄연히 쏘련이 두 개의 제국주의국가와 나란히 앉아 작당하고 야합해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장소까지 모스크바에서. 우리나라를 먹이로 놓고, 제국주의자들과 서로 이익을 분배하고 있는 쏘련의 처사가 과연 옳은 것입니까? 그런 쏘련이 어찌 우리 편일 수 있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자네가 상상할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쏘련의 전략전술이야.”
“그래요? 철저한 그들의 대변자로군요. 그들의 입장에서 우리를 보지 말고, 우리의 입장에서 그들을 보려고 노력해 보세요. 그럼 그 모순과 허위가 보일 겁니다.”
..
“.. 둘째로 미군정이 인공을 부인했는데, 그게 미국이 현실적으로 힘을 쓰지 못해서 취한 처삽니까. 그건 곧 자기네 점령지구에서 공산주의를 부정한 것이고, 혁명을 부정한 것입니다. 이래도 미국이 힘을 못 쓰는 겁니까?”
..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행동통제를 받지 않는 포로로 특별취급을 받으며 수용소에서 내가 한 일이 뭔지 압니까? 미국과 쏘련의 세계전략에 관한 책들과 논평들을 읽는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얻어진 것은, 미국은 제국주의적 팽창주의고, 쏘련은 그에 못지않은 공산주의적 패권주의라는 사실입니다. 그 두 개의 어마어마하게 큰 발에 짓밟히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땅과 우리 민족입니다. ..”
“지름길을 두고 돌아갈 건 뭔가. 오늘 얘기로 자네가 사회주의를 버렸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확인했네. 자네 생각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허황한 것인가는 곧 알게 될 거네. ..”
염상진은 일어섰다. 김범우는 염상진을 올려다보았다. 염상진의 얼굴에는 노기가 서린 것 같았고, 김범우의 얼굴에는 쓸쓸함만이 머물러 있었다. ..
그의 머릿속에는 염상진과 함께 사회주의를 논했던 먼 기억이 가득 차 있었다. ..
“범우 자네 맘 내가 다 알어. 허나, 나는 자네하고는 피가 다르네.”  110-115



4 소화, 하얀 꽃이라는 이름의 무당

그녀는 미약한 한줄기 바람의 힘에 순종하여 떨어짐을 짓는 꽃잎처럼 요 위로 무너져내렸다.  120

“이 말은 자네(정하섭)가 제일 싫어하는 말일지 모르겠네만, 자넨 아마 광적인 사회주의자는 못 될 거야. 자네가 부잣집 아들로서 출신성분이 부적합하다는 말이 아냐. 부디 공부에 충실하고, 하나의 행동을 선택하기 전에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생각이 앞서야 하네. 지금은 진정 어려운 시대야. 자네 같은 젊은 피들한테는 말이야……”
작별인사를 하러 갔을 때 김범우 선생이 자신의 마음을 환희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눈길을 보내며 한 말이었다.  150

염상진 위원장은 .. “김범우 선생은 참 좋은 분이다. 마음이 바르고, 인정이 있고, 학식이 풍부하다. 그런데, 생각하는 것이 환상적인 게 흠이지. 좋게 말해서 꿈속에 사는 이상주의자야.”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정하섭은 인간 김범우와 염상진을 저울질해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저울눈금은 언제나 수평이었다. 비슷하게 큰 키에 염상진의 인물도 기울지 않았다. 염상진도 마음씀이 컸고, 치밀하고 침착했고, 아는 것이 많으면서도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었다. 그런데 표나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분위기였다. 김범우가 사색적이고 지성적이라면 염사진은 야성적이고 행동적이었다.  152-153

정하섭이 마른 볏단에 불붙듯 사회주의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염상진에 의해서였다. 좀더 순서를 잡아 말하자면, 염상진을 접하기 저넹 벌써 당의정을 빨듯 책방주인 문기수를 통해서 초벌구이는 되어 있었다.
정하섭은 책방집 딸 정님이에게 정신이 팔려 뻔질나게 책방을 드나들었고,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책을 사들고 나오고는 했다. 주인 문기수는 그 눈치를 어렵지 않게 챌 수가 있었다. 한다하는 부잣집 아들이 자기 딸을 좋아한다는 것이 문기수로서는 기분 괜찮은 일이었고, 족보로나 재력으로나 비교도 안 되는 처지였지만 그물에 제 발로 든 고기를 놓치기는 아깝다는 욕심이 동했고, 목적을 당성하자면 있는 집 자식의 장난기일지도 모르니까 정신부터 뜯어고치자 작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과 다른 친절을 보이고 관심을 쓰면서 서서히 사회주의의 분말을 딸년의 눈웃음에 버무려 먹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기수는 자기의 힘으로는 벅찬 단계에 이르자 사상적 연관을 맺고 있는 염상진에게 넘긴 것이다.  153

족보와 더불어 세습되는 혜택 속에서 평생을 편안하게 사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154-155



5 조계산 숯막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북조선의 힘은 막강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해방과 더불어 혁명의 붉은 깃발을 세웠고, 이듬해에 지주와 부르주아 계급 말살과 함께 토지개혁을 완료한 북조선의 조직화된 공산주의의 힘은 경이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미군정하에서 시작된 남조선은 어떠했는가. 친일파와 지주계급이 군정과 어울려 득세를 했고, 새 시대의 국민을 위해 실시한다는 토지개혁은 해방 3년이 지나도록 단행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건 오합지졸이 모인 힘의 비조직화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힘은 조직화될수록 강해지고, 그 힘은 공격을 감행할 때 더 강해지고, 그리고 승리를 쟁취했을 때 그 힘은 절정의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그건 힘의 법칙이고, 힘의 미학이었다.  163

힘은 힘 앞에서만 굴복한다.  163-164

염상진은 깊이를 더해가는 회의를 떠쳐내려고 괴로운 신음을 물었다.  164

안창민은 염상진의 사범학교 후배이기도 했다. 염상진에게 3년이, 김범우에게 1년이 아래인 안창민은 두 사람을 형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그들 셋은 사회주의 이념에 마음을 하나로 뭉친 때가 있었다.  169

안창민은 고읍들의 지주 안재윤의 하나뿐인 손자였다. 한말(韓末)까지 행정의 중심을 이루었던 낙안 고을에 대대로 뿌리를 내려온 안 씨 문중은 그 뼈대로나 재력으로나 넉넉히 큰기침할 만했다. .. 말년에 망나니 아들로 속을 썩일 대로 썩이다가 화병을 얻어 제명을 다 못 살고 죽었다. 그때 벌써 아들 안수규는 투전판을 들락거리고 주색에 빠져 재산의 반 이상을 날린 상태였다. 안재윤이 죽고 나자 가세는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졌다. 안서규는 방탕한 생활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마침내 전답 거의를 헐값에 팔아치워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것으로 안재윤의 집안은 겨우 논 30여 마지기를 가진 소지주로전락. .. 종적을 감춘 안서규는 3년이 미처 못 되어 남원에서 객사했다는 소식이 바람에 묻어 왔다. 안창민의 나이 열세 살 때였다.  171-172

염상진 .. “이눔아, 사람 한시상 사는 것이 똑 갱물 흐르디끼 허는겨. 큰 물줄기 따라감스로 지 몫아치 딱 잡고 앞만 보고 애써 살아가자먼 시나브로 풀리게 돼 있는겨. 무식헌 애비 말이라고 뒷등으로 듣지 말고 얼렁 맘 고쳐묵어. 이 애비야 암시랑 않다만 처자석 생각혀서 맘 고쳐묵고 선상질이나 열심히 허란 말이다. 이눔아, 선상님 지체먼 하늘에 별 딴 것이지 멀 더 바래는겨. 애비 말듣고 있는겨?” .. 그러나 길이 잘못 잡힌 큰 물줄기를 따라 흐르는 한 방울의 물이기를 거부하는 그의 마음은 아버지를 이해하는 마음보다 우선했다.  174

염상진의 아버지 염무칠이 지주 최씨네에서 꼴머슴살이를 벗어나 읍내의 숯가게에 취직한 것이 열여섯 살 때였다. 염무칠의 아버지는 낙안벌의 토호 최씨네의 가복이었다. 국법에 의해 노비제도가 폐지됨과 동시에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땡전 한 닢 없는 신세로 어디로 거주를 옮길 것이며, 이미 소작을 부치고 사는 작인들도 농지가 줄어들까 봐 급급하는 판에 소작인들 어디서 구할 것인가. 천생 소작을 얻게 되는 경우는, 주인이 그동안의 노고와 종리를 생각해서 소작 나가 있는 농토를 재조정해서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어느 만큼 마음을 쓰는 지주들은 다 그런 방법으로 거느렸던 가복들의 생활 대책을 세워주었다. 그런데 염뭋칠의 아버지는 불행하게도 그런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 .. 도리 없이 최씨네에 눌러앉아 문서 없는 가복 노릇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175-176

“날로 달로 개명혀 가는 시상이니께 농새만 짓고 한평생 살라고 허덜 말어. 이 애비가 산 시상허고 니가 살 시상허고는 생판 달블 것잉께.” 눈을 감기 전날 염뭋칠ㄹ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염무칠이 숯가게 배달원으로 취직을 한 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그 말을 좇아서였다.  176

본건사회의 세습제와 유교전통의 불문율인 장자(長子)제일주의 인습을 염무칠은 미련하도록 철저하게 지켰던 것이다. 두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염무칠은 장남과 차남의 위치를 엄격하게 구분했다. 모든 것이 장남 본위, 장남 우선이었다.  181

염무칠이 세상을 떠난 것은 큰아들이 사범학교를 졸업한 그 다음해였다. .. 사람들은 두 아들놈이 불쌍한 염 서방을 잡아먹은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큰 아들은 사범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나오고도 선생을 마다하고 농사일을 시작했고, 완전히 주먹패가 되어버린 작은 아들은 철교 아래 선창에서 칼부림을 해 일본 선원을 찔러죽이고 도망친 사건이 터진 것이다.  182

김범우의 아버지 김사용을 찾아가기로 했다.
염상진은 일본군국주의 정신을 주입하는 선생 노릇을 차마 할 수 없어 농사를 짓기로 결심했다는 요지의 말을 김사용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정연하게 해나갔다.
“저에게 농사지을 땅을 좀 빌려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농사를 짓고 있는 전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그런 땅을 얻고자 하면 다른 소작인들이 피해를 보게 됩니다. 개간을 해서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빌려주시가는 겁니다.”  183

“잔네의 그런 큰 결단 앞에 내 어찌 땅뙈기 내놓기를 주저허겄는가. 자네가 필요헌 만큼, 개간을 헐 수 있는 만큼 쓰도록 해줌세.” ..
“외레 내가 고마우네. 농담으로 묻는 말인디, 그래, 땅을 빌려 쓰면 사용료는 얼마를 어떤 방법으로 낼 심산인가?”
김사용이, 어디 보자, 하는 애정이 넘친 표정으로 염상진을 쓰다듬듯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어르신의 소작인이 되기는 싫습니다. 그러니 사용료 같은 것은 없이 일정 기간 동안 빌려 쓴 다음 반환하기로 하겠습니다. 반환받으실 때는 박토가 옥토로 변해 있을 것입니다.”  184-185

상진이가 두 학년이나 차이가 나는 번우와 가까이 지내게 된 것은 바로 ‘김범준’ 때문이었다. 독립운동을 한다는 그 사람, 그건 꼭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그런 형을 가진 범우가 너무나 부럽고, 범우와 가까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웠다.  188

염상진, 김범우 ..
그들은 러시아 혁명에 관한 책들을 거의 빼놓지 않고 탐독했던 것이고, 거기서 잃어버린 나라의 독립의 길을 찾으려고 했다. .. 사회주의 서적을 접하는 데 있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어찌 할 수 없는 인식의 차이가 내재해 있었다. 김범우는 지주의 아들로서 소작농들의 헐벗고 굶주리는 비참한 생활에 대하여 자책과 죄의식을 느끼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이상적 평등사회를 이룩하려면 필연적으로 봉건계급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인식의 기둥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염상진에게는 그런 자책과 죄의식의 과정은 아예 생략되었고, 이상세계의 빠른 실현을 위해 지주계급이나 경제적 지배세력을 타도할 수 있는 무산자들의 힘의 조직화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김범우가 인간생존의 양심을 밝히는 불씨를 얻었다고 한다면, 염상진은 인간생존의 방법을 뒤바꾸는 부기를 얻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3-194

염상진이 김범우를 동지일 수 없다고 판단 내린 것은 범우가 하병에서 돌아온 다음부터였다. 김범우도 똑같은 시기에 염상진의 극렬적 좌경을 체념해 버렸다. 염상진은 한때 김범우를 완전한 적으로 속단할 뻔했다. 김범우가 교직에 몸담으면서 좌익학생조직을 와해시키는 행동을 시작해서였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태워올리고 있는 불길에 찬물을 끼얹는 결정적 행위였다. 그건 재고의 여지가 없는 정면도전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의 깃발 아래 감상적인 옛우정이란 한갓 두엄더미 옆에 구르는 똥덩어리 같은 것이었다. 염상진이 김범우를 혁명의 적으로 단정하려 할 즈음에 김범우의 실체가 드러났다. 백범 김구식의 민족주의 통일노선을 김범우는 실현시키고자 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범우는 경찰서고 군정청이고 드나들며 좌익계 학생들을 석방시키기에 바쁘고, 한편으로는 좌익 학생들을 설득시키느라고 진땀을 빼는 것이었다.  194-195

그가 지향하는 바나 행동하는 것은 그 나름으로 일관성과 순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의 동지도 아니었고 적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의 동지도 아니고 적도 아니었다. ‘민족’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었지만 그건 또다른 ‘주의’는 될 수 없었다.  195

읍내를 점령하기 전날 밤 굳이 김범우를 찾아가 피신하라고 일렀던 것도 그의 ‘민족 발견’을 위한 행위 때문이었다. ..
미리 피신시키는 것이 우정 때문이 아니라는 말을 김범우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했지만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김사용 어른을 인민재판의 단상에 세웠던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먼저, 지주인 그분을 보호하는 데 떳떳한 명분을 세우고자 함이었고, 다음은, 다른 지주들을 처단하는 데 확실한 기준을 세우고자 함이었다.  196-197



6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

김범우는 깊이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느리게 뿜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또 염상진이 생각났다. 김범우는 그의 생각을 떼쳐내려고 했다. 6일째 꼼짝없이 갇혀 지내는 동안 신물이 나도록 그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끝까지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투철한 의식의 사회주의자가 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그토록 성급한 공산주의자로 변할 줄은 몰랐었다. 그의 지성은 어디고 증발했기에 인민재판을 주도할 수 있었으며, 공개처형을 감행할 수 있었을까. 죄지은 자의 죽음은 마땅하다 하더라도 그 즉흥적인 방법과 감정적 행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202

이념의 현수막을 내건 정치적 전쟁은 바야흐로 그 수레바퀴를 본격적으로 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어느 쪽에서나 민족은 내세워졌으나, 정작 수레바퀴 아래 깔려야 하는 건 민족이었다.  203

벌교와 낙안에 걸쳐 뼈대나 재산을 자랑할 수 있는 집안들은 꽤나 있었지만 그 자식들이 독립운동에 몸 바치고 있는 경우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경사났다고 벌이는 잔치는 법관시험에 합격했다거나 은행원이 되었다거나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204

벌교는 한마디로 일인(日人)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된 읍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벌교는 낙안 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던 갯가 빈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인들이 전라남도 내륙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시킨 것이었다.  205

“문 서방, 문 서방은 문 서방 이름으로 된 땅을 갖고 싶지요?”
“하먼이라, 살아생전에 안 되먼 저승에 가서라도 풀고 잡은 소원인디요.”
“그럴 테지요. 만약 그 소원이 풀려 열 마지기쯤 논이 생겨 농사를 지었는데 그 쌀을 몽땅 빼앗긴다면 어떻게 되겠소?”
“워따 워따, 그럴라면 염병헌다고 농새를 지어라?”
문 서방은 눈까지 부릅뜨며 소리쳤다.
“그렇지요, 농사지을 필요가 없지요. 그럼, 쌀을 그냥 빼앗긴 것이 아니라 다 나라에 내놓고 매달 배급을 타다 먹으면 어떻겠소?”
‘미쳤간디요? 지가 진 농새 죽이 끓든 밥이 끓든 지 손으로 간수허는 맛에 살제 무신 초친맛이라고 배급을 타다 묵어라, 닌장맞을. 동냥아치도 아니겄고, 고런 농새도 안 지어라.”
“그런 농사도 안 짓겠다면, 그럼 이런 것은 어떻겠소? 그 누구의 명의도 아닌 수백 마지기 논에 공동으로 동네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정해진 양을 배급 타먹는 것 말이요.”
“어허, 갈수록 태산이시웨. 아, 니 것도 내 것도 아닌 논에 그눔에 농새 아조 자알 되야묵겄소. 지 농새 짓대끼 쎄 빠지게 일헐 놈 하나또 읎을 것잉께 가실허고 나먼 쭉징이만 수불헐 농새 지나마나 아니겄소?”
“문 서방, 염상진이가 논을 분배한다는 것이 바로 그 방법이오.”
..
“.. 고것도 말이라고 헌당가? 그려서다 항꾼에 잘살게 된다고 떠들어쌓는감구만. 근디 고건 공염불이여. 시상 사는 이치를 몰라서 허는 소리제, 내 텃밭 배추가 쥔네 밭 배추보다 속살이 더 여물게 차는 이치가 먼지도 몰르고.”  209-210

농지개혁에 대비해서 지주들은 자기네 농토를 가난한 친척들 앞으로 명의변경을 해서 은폐시키거나, 타인에게 매도하거나 하는 일들을 벌이고 있었다. ..
“참말로 순사가 들었다 허먼 몽딩이찜질당헐 소리제만 서방님 앞이니께 허는 소린디, 사람덜이 워째서 공산당 허는지 아시요? 나라에서는 농지개혁헌다고 말대포만 펑펑 쏴질렀지 차일피일 밀치기만 허지, 지주는 지주대로 고런 짓거리덜 해대제, 가난허고 무식헌 것덜이 워디 믿고 의지헐 디 읎는 판에 빨갱이 시상 되먼 지주다 쳐읎애고 그 전답 노놔준다는디 공산당 안 헐 사람이 워디 있겄능가요. 못헐 말로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덜이 빨갱이 맹근당께요!”  212

지난 4월 19일 김구가 김규식과 함께 남북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있는 열성을 다 바쳤었다. 제발 서로가 정치적 욕심을 앞세우지도 말고, 강대국이 내세우는 이념에 얹혀 춤추는 꼭두각시 노릇도 하지 말고, 나라 잃어버리고 산 36년의 굴욕과 슬픔을 먼저 생각하며 민족이 똘똘 뭉쳐 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222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약소민족들의 자존이나 독립을 철저하게 우롱하고 기만하며 강대국들의 상호 이익 보호를 위한 연극적 대사였듯 연합국이라는 존재들이 해방된 한반도를 위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깊이 회의하게 만들었다. 민족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공동의 살을 방어하고 옹호하는 집단이어야 한다는 구체적 개념으로 바뀌어 있었다. .. 해방된 땅의 정치적 혼돈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백범 김구가 바로 자신과 똑같은 주장을 내세우고 있었다. 아, 백범! 김범우는 그 옛날부터 지녀왔던 그분에 대한 신뢰감 위에 감동의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후로 김범우는 백범에게 모든 기대를 걸게 되었다. 그분이 2월 10일에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다하는 성명으로 발표한 <3천만 동포에 읍고함>이란 글은 민족의 현실과 장래를 진정으로 염려하고 사랑하는 피가 통하는 진실의 기록이었다. ‘마음속에 삼팔선이 무너지고야 땅위에 삼팔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내가 불초하나 일생을 독립 운동에 희생하였다. 나의 연령이 이제 칠심 유 삼인바, 나에게 남은 것은 금일 금일 하는 여생이 있을 뿐이다. 이제 새삼스럽게 재화를 탐내며 명예를 탐낼 것이랴! 더구나 외국 군정하에 있는 정권을 탐낼 것이랴!’ 하는 대목에서 그분의 인간적 진실을 보았고,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하는 대목에서도 지도자로서의 외로움을 보았다. 그러나, 김범우가 소망했던 남북협상은, 5월 10일 남한에서 유엔 한국위원단 감시하에 첫 번째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고, 5월 14일 북한에서는 남한에 대한 송전을 중단함으로써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남한에서는 8우러 15일에 대한민국 수립을 선포했고, 북한에서는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하게 되었다. 그로써 김범우의 소망은 그야말로 환상이나 망상이 되고 말았다. 40여 년 만에 가까스로 찾은 선택의 기회를 그처럼 망가뜨려버리는 현실 앞에서 그는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그의 망막 속에서 백범의 초상은 하얗게 표백되고 말았다. 그는 교단에서도 그저 지식을 전달하는 기계로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했고, 그 죄책감으로 학교를 떠나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몇 번인가 되풀이했던 것이다.  223-224

자기 나름대로 억울하게 죽은 자가 남긴 피는 단순한 액체가 아니라 저주하는 영혼인 것이다. 염상진은 코웃음치며 이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
경찰서뿐만이 아니라 읍사무소고 세무서고 우체국이고 다 불 질렀다 한들 어떠랴. 인명을 어떤 객관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그리 성급하게 살상하지 말고 그런 것들이나 다 태웠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
핏자국이 나타날 때마다 김범우의 흔들리는 의식 속에서 염상진은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가 소화다리를 다 건넜을 때는, 한 개의 작은 점으로 변해있던 염상진은 그의 의식 밖으로 사라져 갔다.  226

김범우는 염상구의 뒷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찝쩝 입맛을 다시고는 발을 떼어놓았다. 그는 염상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것도 그의 가슴을 덮는 우울이었다. 무슨 견원지간이라고 염상구는 또 형 염상진과 반대 입장에 서 있게 됐을까……. 230

염상구는 작년 9월에 결성된 대동청년단의 열성단원으로 좌익 지하조직을 파내는 데 적잖은 공을 세웠을 것이다. 그건 형 염상진이와 맞서 싸우는 일이었고, 그래서 염상구는 그 일에 더 신바람이 났을지도 모른다.  232

손승호 .. 그는 작년 6월까지만 해도 좌익에 발을 넣고 있었다. 그런데 우익의 탄압에 맞선 좌익 테러가 속출하면서부터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고, 국제공산주의라는 것이 결국은 지역을 불문한 세력확장의 도구고 사용되는 허구성을 발견하고는 사상적 변화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를 버렸을 뿐 그 반대개념의 사상을 취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사상적 ‘전향’을 한 것이 아니라 사상의 공백상태에 있었다. 그가 괴로워한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주의든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그 사상의 실현을 위해서 인간을 폭력의 대상으로 삼는 점이었다. 인간을 위한 주의가 아니라 어떤 주의를 위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 변질을 그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설득과 이해의 균형이 없이 폭력을 수단으로 하는 그 어떤 주의나 사상보다는 차라리 원시상태가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손승호의 생각은 김범우의 생각과도 거리가 있었다. 김범우가 관심하는 ‘민족’이라는 자리에 손승호는 ‘인간’을 놓고 있는 셈이었다.  238-239

“아까 자네가 오기 직전에 무슨 말 했는지 아는가? 손승호 그 사람이 자네 형한테 붙들려 죽을 뻔했던 이야기를 하던 참이야. 자네 형은 다시 전향하라고 했고, 끝까지 말을 안 들으니까 총까지 들이대더라는 거야.”
“그 말을 워처케 믿냐니께요.”
염상구는 교활하게 느껴지는 웃음을 입가에 바르고 있었다. 형의 이야기에 조금도 감정변화를 보이지 않는 차가움이었다.
“이 사람아, 그런 식으로 의심하자면 나는 어떻게 믿나?”
김범우는 두려운 벽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집단화된 의식의 단면이었던 것이다.  240-241



7 그리고 청년단

다 식어빠진 고구마 위에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그 투명하고도 섬세한 무늬의 날개를 늘어뜨리고 앉아 있었다. 싸리나무의 명주실보다 가는 끝가지에 살폿 앉아 네 개의 투명하게 붉은 날개를 비스듬히 치켜세우고 허공에 미세한 율동이 파문을 일구던 여름의 생명력을 고추잠자리는 이미 잃고 있었다. 10월이 저물어가는 찬기운 서린 대기 속에서 고추잠자리는 한 생애를 살아낸 고단한 육신을 싸늘하게 식은 고구마 위에 부려놓고 있었다. 여자가 파리를 쫓듯 손부채를 부쳤지만 고추잠자리는 날아갈 줄을 몰랐다. 손바람에 늘어뜨린 날개가 둔하게 흔들렸을 뿐이다. “무신 놈에 잠자리가……” 여자가 중얼거리며 마디 굵은 손가락으로 고추잠자리를 잡아 무심하게 허공으로 던져버렸다. 허공에 떠오른 고추잠자리는 본능적인 날갯짓을 했지만 몸은 비상을 하지 못하고 아래로 아래로만 떨어져내렸다. 푸른 음향이 맑게 흐를 것 같은 10월의 깊은 하늘만이 한 마리 고추잠자리의 임종을 침묵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253

철교 아래 선창에서 일본 선원을 찔러죽이고 도망쳤던 염상구가 읍내에 다시 나타난 것은 해방과 함께였다. 그는 이미 쫓김을 당하는 살인자가 아니었다. 일본놈을 용감하게 처치한 당당한 독립투사로 변해 있었다. 그가 물건 훔쳐내다가 들켜 살인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254

염상구의 가슴을 뿌듯하게 했던 것은 읍내 치안대의 장악에 있었다. 그것은 해방과 동시에 여운형(呂運亨)이 발족시킨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벌교지부에 소속되기를 바라며 자생적으로 생겨난 조직이었다. .. 염상구로서는 여운형이고 건준(建準)(미군정이 시작되면서 해체됨)이고 알 바 아니었고, 지부에 소속이 안 되어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목전에 펼쳐져 있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만이 중요한 현실이었다. 지안대의 실권자로서 염상구가 제일 먼저 내세운 것이 자신의 이력 변조였다.  257

이유야 어찌 되었건 40년에 이르는 일제의 지배를 받는 동안 벌교읍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근동에서도 일인을 살해한 것으로는 염상구가 유일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258

그는 치안대가 해산되자 전국청년단체총동맹의 지부 실권자가 되었고, 1947년에 이르러서는 정치 발판을 굳힌 이승만이 결성한 대동청년단의 지부 실권직인 감찰부장 자리에 앉았다. 그의 이러한 권력지향성은 어찌할 수 없이 형 염상진과 대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258-259

아버지의 구박과 편애, 형의 자만과 무시 속에서 그나마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다독거림이 있어서였다. 어머니가 아무도 몰래 건네주던 콩누룽지를 받아들고 뒷산 팽나무 아래서 얼마나 목메어 울었던가. 콩누룽지 한 덩어리가 고마워서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형만이 아니라 자신도 사랑하고 있다는, 어머니의 정이 고마워 목이 메었던 것이다.  259

염상구가 형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 것은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공산당의 모든 조직이 지하로 잠적하면서부터였다. 염상구로서는 공산당이나 사회주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를 아예 느끼지 않았다. 그건 적이었다. 경찰에서 그렇게 단정했으니까 적이었고, 형이 가담해 있으니까 더욱 적이었다.  260

“머시냐, 아무리 무당딸이라도 이름은 있을 것인디, 이름이 머시요?”
“소화구만요.”
“소화? 소화? 밥 묵고 소화시킨다는 소화는 아닐 것이고, 무신 뜻이요?”
“흰 꽃이라는 뜻인디요.”
“흰 꽃? 허어, 참말로 누가 진 이름인지 생김허고 딱 맞아떨어지는 기맥힌 이름이시.”
얼결에 말을 해놓고 염상구는 그만 스스로 민망해졌다. ..
염상구는 서둘러 돌아섰다. 그러나 되돌아서 멀어져가는 소화라는 무당딸의 뒷모습을 음탕한 눈길로 지켜보고 서 있었다. 저, 저 살랑살랑 흔드는 방댕이 잠 보소. 무당춤 폴짝폴짝 얼싸얼싸 잘 춰대는 아랫심 씬 것 보먼 저년 니노지가 아매 낯짝 이쁘게 생긴 거맨치로 쫄깃쫄깃허고 옴죽옴죽헌 것이 꼭 겨울꼬막 맛일 거이다. 헌디, 신 내린 무당 잘못 건디렸다가는 급살을 맞등가 빙신이 된다니께 말이여. 화아, 저것 한번 조지고 급살을 맞을 수도 읎고, 운 좋아 급살을 면해야 빙신이 되는 건디, 와따메 참마로 사람 환장허겄네잉.  269-270

한 팔로 그녀의 목을 감으며 몸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등을 더듬어내리고, 허리에 잠시 머무른 손은 둔부를 지나 허벅지까지 내려갔다. 그는 애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을 기억해 두고 싶은 욕구가 성욕에 앞서 있었다. 그의 손은 다시 그녀의 어깨로 올라왔다. 그녀를 끌어안았다. 꼭꼭 끌어안으면서,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자 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그건, 내가 가고 있는 길이 과연 옳은 길인가, 하는 평소의 자문(自問)이었다.  286

정하섭은 돌아섰다. 그리고 뒷산 쪽을 향하여 날쌔게 뛰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은 이내 어둠에 묻혔고, 눈을 부릅뜨다시피 한 소화의 시야에서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소화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의 가슴에서는 실타래가 풀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끝은 정하섭에게 묶여 있었다. 아무리 험한 길을 아무리 멀리 가도 끊어지지도 동이 나지도 않을 실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가슴에서 끝도 한도 없이 만들어지는 인연의 실이었던 것이다.  289-290



8 이념 이전의 인간

재판소의 이 판사. .. 일제치하에서 고등고시라는 것을 거쳐 판검사가 된 거의 모든 인간들이 그렇듯 그도 철저한 일제의 주구 노릇을 감행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친일한 거의 모든 인간들이 그러했듯 그도 아무런 속죄의 표현도 없이 군정과 함께 다시 그 뻔뻔스러운 얼굴을 들고 판사 노릇을 해먹고 있었다. 더 한심스러운 것은 지난 5월에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서 애국을 부르짖은 것이었다. 일제치하에서 자신이 소작인의 권익옹호를 위해 분투한 것이 얼마며, 피해 받는 동포의 인권옹호를 위해 헌신한 것이 얼마인지 아느냐고 목청을 돋우었다. 그건 친일지주 계급들이 자위책으로 한민당을 결성하여 신속하게 미군정을 등에 업었고, 그것도 불안하여 민중의 지지를 쉽게 받을 수 있는 인물로 이승만을 골라 당수에 앉히고자 했고, 민족개념이나 통일조국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이 집권욕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이승만은 굴러들어온 떡을 마다할 리가 없었고, 그리하여 그 힘이 전국적인 정치세력으로 확장되면서 그드르이 정치형태는 시궁창보다 더 더럽게 변해갔고, 마침내 이 판사 같은 인물이 애국자로 둔갑해 국회의원에 출마할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293-294

처남 신석주와 좌익과 …… 그건 아무래도 걸맞지 않았다. 좌익을 하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만큼 체질적인 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주의’나 ‘사상’이라는 말이 붙어 있는 한 그건 이미 ‘감상’이나 ‘환상’이 아닌 것이다. 그 어떤 주의나 사상이든 그 최종목표는 실천에 있었다. 첫째가 의식의 실천인 것이며, 둘째가 행동의 실천인 것이다. 특히 사회주의라는 것은 그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처남은 그런 조건에 전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298

“노상에서 이리 서 있지 말고 어디 다방에라도 좀 들어갑시다. 이렇게 얼굴 대하게 된 것마도 천행 아닙니까.”
선우진이 김범우의 팔을 끌었다. 그의 예사로운 것 같은 말이 김범우의 가슴에 찡한 파문을 일구었다. 그는 1946년 상반기에 황해도에서 월남한 사람이었다. 토지개혁 실시로 지주였던 그의 집안은 파탄을 맞아야 했고, 그는 삼팔선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토지는 말할 것도 없고 값나가는 살림살이까지 몰수를 당하는 바람에 대학졸업장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어 졸업앨범 하나만을 달랑 가지고 내려온 그의 일화는 선생들의 우스갯감이 되고는 했다. 감정 같아서는 다른 월남민들처럼 경찰에 투신해서 남한에 박힌 빨갱이들을 잡아내는 족족 쏴죽이고 싶다고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런데 그는 총구멍만 보면 사지가 오그라붙는 것 같아 경찰에 투신을 못하고 졸업앨범을 졸업장 대신 내밀어 선생이 된 것이다. 토지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는 총구멍에 어지간히 혼쭐이 난 모양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그의 공산당에 대한 증오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봉건적 사회체제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극복되어야 하고, 친일반민족세력을 냉정하고 엄정하게 처벌해서 민족단위의 국가를 만든 다음 모든 일에 앞서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은 농민이 8할을 점하고 있는 현실에서 농지개혁은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김범우와는 논리적 대화가 성립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타향살이의 외로움 탓인지 김범우에게 계속적인 호감을 표시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300-301

“.. 선우 선생이 사회주의 사상을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것이나, 그들이 자본주의 사상을 적대시하는 것이나 결국 확일주의이기는 마찬 가지니까요. 내가 놀라는 건 그들이 총살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봐요, 주의를 앞세워 서로가 서로를 원수 삼아야 하는 이 땅의 비극이 무엇을 위하는 것인지 말이오.”  303

“.. 선우 선생이 그냥 평범한 직업인이 아니고 ‘선생’인 한 그건 좀 곤란한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선생은 더 말할 것 없이 학생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은 최소한 객관적 판단을 견지하면서, 정치적 견해도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런데 선우 선생은 너무나 한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교육자 입장에서, 그리고 객관적 판단력을 가진 지식인 입장엥서 서청을 보아야 하고, 이번 사태도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서청의 행위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비난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제주도에서 4.3 사건이 발생한 금년부텁니다. 반공을 앞세운 그들의 잔혹행위가 사회적 말썽을 일으킨 것은 그들이 확실한 공산주의자만을 처단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에 대한 개인적 감정에 휩쓸려 무고한 양민들까지 무분별하게 살상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다 아는 그런 잘못을 저지른 서청을 선우 선생이 무조건 지지하고 두둔한다면 학생들이 선우 선생을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건 선우 선생의 사상 문제 이전에 인격 자체를 불신당하는 계기가 될 겁니다.”  304-305

“..선우 선생은 역사 앞에서 최소한이나마 냉정을 회복한 다음,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월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가를, 왜 그들이 경찰, 군인이 되고 또 서청 같은 단체를 조직했는가를, 그리고 왜 그들에 대해서 사회의 일반적 인식이 나쁜가를 따져볼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모두 너무 자명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를 선우 선생이 찾아내지 못하면 선우 선생은 계속 불행할 겁니다. 내가 끝으로 한다미만 하겠습니다. 해방이 되고, 그게 공산주의 체제가 아니었더라도 선우 선생은 지금과 똑같은 형편에 처했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지주계급의 몰락, 그것은 올바른 역사의 흐름입니다. 친일반역세력의 척격, 그것 또한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입니다. 선생으로서 그 사실을 납득해야만 합니다.”
“그건 바로 공산주의자들의 주장 그대로요. 김 선생, 도대체 당신 정체는 뭐요!”
선우진이 느닷없이 소리 지르는 바람에 김범우는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가 그만 성냥을 도로 놓았다.
“알겠소, 그만 일어납시다. 난 아직 바쁜 일이 남아 있소.”
김범우는 체념적인 얼굴로 담뱃갑을 챙겨들었다. 선우진은 의혹스러운 눈으로 김범우를 쳐다보며 무겁게 따라 일어섰다.  306

“셰익스피어는 역시 인도하도고 안 바꿀 만큼 위대한 모양이네, 자네의 시간 때움을. 해줄 수 있으니 말야. 그 잡품이 어던 것이었나.”
김범우는 친근한 웃음을 띠어 보였다.
“햄릿을 그냥 뒤적이던 중이네.” 손승호는 무언가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라도 있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그런 자신의 태도가 상대방에게 어떻게 보일지 또 신경에 거실리기라도 한 듯, “셰익스피어가 위대한지는 몰라도 그런 비유법을 쓴 영국인들은 한심한 종자들이야. 그 과장의 정도야 아무래도 상관할 게 없지만, 비유의 대상을 한 나라로 잡았다는 건 용서할 수가 없는 일이야. 셰익스피어가 제아무리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한들 어찌 인도보다 더 위대할 수 있느냔 말야. 인도라는 거대한 땅덩어리는 차치하고라도 거기엔 4억을 헤아리는 인간들이 엄영히 생존하고 있어. 그 생명들의 존엄성보다 셰익스피어가 더 위대하다니, 그따위 발상법을 가진 영국인들은 일본놈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식민주의자들이야. 물론 어떠 ㄴ유식한 자가 무심코 쓴 비유법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무심코’ 만족을 느낀 것이고, 자기네 민족의 우월감을 과시하는 한 방법으로 계익스피어를 세계호ㅘ시키면서 또 그 비유를 ‘무심코’ 써먹은 거야. 셰익스피어가 분명 봉건 왕조시대의 작가지만 자기의 작가정신이 그처럼 수없이 많은 인간들의 존엄성을 짓밟는 것으로 비유되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을 거야. 오히려 그 반대였겠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아예 그런 좋은 작품들을 써내지 못했을 테니까. 셰익스피어는 후대를 잘못 둔 셈이지.”  
손승호는 경멸적인 웃음을 입가에 물고 있었다.
김범우는 놀라운 눈으로 손승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그야말로 무심코 던진, 그 예사가 된 한마리를 붙들고 그처럼 긴 이야기를 하는 데 놀랐고, 자신으로서는 및치지 못했던 그 논리추출의 예리한 시각과 논리개진의 완벽한 방법에 놀랐다. 손승오희 그런 논리는 그가 왜 좌익의 테러화와 함께 사상적 전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건 문학적 인도주의를 사고의 바탕으로 마련하고 있는 손승호의 필연적 귀결인지도 몰랐다.  318-320

어떤 사실의 모순이나 왜곡에 대해서 아무리 논리적 비판을 가하고 이론적 규명을 한다 한들 현실적으로 아무런 영향력을 미칠 수 없을 때 허망감에 빠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었다. 그 논리가 명징하면 할수록, 그 이론이 명확하면 할수록 그 정도는 심해질 터였다.  320

“.. 그 누가 감히 그 현실적 삶을 거부하거나 기피할 수 있겠는가. 역사 비판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겠나. 다 지나가버린 세월, 아무리 열 올리며 비판한다고 해봤자 이미 그르쳐진 일이 바로잡힐 리가 있겠나. 그런데도 그게 계속이거든. 왜 그러겠는가. 인간은 현실을 살 수밖에 없는 동물이고, 그 과거적 삶 속에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비워주는 거울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나. 자네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소릴 나야말로 부질없이 지껄여대고 있구먼.”
김범우는 담배를 빼들었다.
“사람 참, 별소릴……”
손승호는 김범우 앞으로 통성냥을 밀어놓으며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이고 있었다.  321

“자네도 알겠지만, 핵심 좌익들은 벌써 다 도망을 쳐버렸네. 물론 붙들려온 사람들 중에는 및처 피하지 못한 자들도 있긴 있을 것이고, 세포들도 끼여 있겠지. 그런 것을 가려내는 거야 경찰의 업무니까 말할 바 못 되고, 그 과정에서 피해자 가족 등의 감정이 개입돼 무고한 사람들이 다칠 염려가 있네. 그 피해를 최소한 막아보자는 거네.”  322

“범우, 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고, 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네. 허나, 자네가 그런 제안을 했으니 내 생각을 마하려네. .. 자네나 나나 염상진 선배가 애초에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던 것은 오늘 같은 날을 위해서는 아니잖은가. 그런데 해방이 되면서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것도 변질되기 시작했네. 금년에 남북 양쪽에서 서로 다른 주의를 앞세워 서로 다른 이름의 나라를 세우면서 우리 모두는 인간적으로 민족적으로 우리 스스로를 살해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죄를 저질렀네. 그리고 나타난 현상이 뭐였나. 서로의 사상을 정치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해 인간을 폭력의 대상으로 삼는 극렬적 충돌이었네. 그런 야만적 행위가 또 어디 있겠나. 난 완전히 환멸하고 절망했네. .. 범우 자네의 뜻을 이해하면서도 행동적 동의를 할 수 없는 것은, 그런 경직된 상황 속에서 자네와 같은 뜻이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고, 자칫 잘못하다간 그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실수를 범할 것이기 때문이네. 날 비겁자라고 해도 어쩔 수 없네. 난 모든 것에 선행해 인간이고 싶네. 난 그걸 지키기 위해서 사회주의를 버렸고, 총을 들이댄 염상진의 위협에도 굽히지 않았네. 자네의 뜻이 바로 순수한 인간적인 것임을 아네만 현실은 그걸 순수하게 받아들여주지 않을 것이네. 자네가 좌익학생들을 위해 분투했던  때와는 상황이 너무나 다르네. 협조를 할 수 없어 미안하네.”  323-324

그는 인간의 인간다운 삶의 길을 위하여 사회주의를 택했었다. 그런데 결국 그가 만난 것은 인간부재의 현실일 뿐이었다.(손승호)  328

김범우는 그 어스름 속을 걸어가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손승호의 말이 새로울 것은 없었다. 주의가 정치적 대결자으이 무기로 변한 것도, 그 속에서 한 인간의 힘이 얼마나 미약한가 하는 것도, 터무니없는 오해를 야기시킬 위험성도, 김범우는 이미 생각했던 바였다. 그러나 김범우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엇던 것은 주의가 정치 폭력화햇다는 점이었다. 미군정이 공산당 활동의 불법화 조치를 취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폭력대결은 정부수립을 기점으로 남쪽에서 공산주의라는 것은 절대 용납이 안 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북쪽에서의 자본주의라는 것은 절대 용납불가가 된 것이다. 그 결과의 표현이 바로 이번 사건이었다. 염상진이 겨우 5일 동안에 100명 이상의 인명 살상을 자행할 줄 상상이나 했던가. 그건 염상진이라는 개인의 뜻이 아니라 정치 폭력화한 주의의 충돌이었던 것이다. 염상진은 이미 주의를 지배하는 이성적 인간이 아니라 주의의 정치적 실현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변신한 것이었다. 정치라는 것만큼 본질을 전도하는 것도 없을 것이고, 염상진은 그 전도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100명쯤은 의당 죽일 수 있는 타당성을 마련했을 것이다. 그러나 염상진이 그러했다면, 그 상대적인 힘은 두 배 이상의 가격을 할 권리르 얻게 되는 것이다. 정치 폭력의 역학이라는 것은 별것이 아닌 것이다. 일본 교사들이 조선인 학생들에게 즐겨 써먹었던 ‘서로 따귀 갈기기’의 처벌법이 갖는 가해성과 마찬가지였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점점더 상대방을 세게 갈길 수밖에 없는 가해성, 그때 내가 때리고 있는 것이 내 친구라는 사실은 이미 망각해 버린다. 상대는 오직 나를 아프게 하는 적일 뿐이고, 내가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공격성만 가속화하는 것이다. 김범우는 그 정치적 가해성은 외면하고 있었다. 그건 비탈길을 굴러내리기 시작한 수레바퀴의 불가항력적인 힘이었기 때문이다. 김범우의 관심은 그 수레바퀴 아래 멋모르고 깔려 압사해야 하는 민중들의 억울에만 쏠려 있었던 것이다.  328-330

사람의 운명이란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354



9 문딩이 가시내, 팔자도 참 험허게 변했다

“문딩이 가시내, 팔자도 참 험허게 변했다.”
점례는 멀어져가는 옛 친구 순심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360

방죽 위에는 관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관들의 수효만큼 여러 음색이 곡성이 뒤엉키고 있었다. 들몰댁은 숨을 헐떡이며 질린 눈으로 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소스라쳐 놀라 돌아섰다. 들목댁은 방죽의 비탈을 구르듯이 내려갔다. 갈숲은 흰 꽃술을 달고 무성했다. 들몰댁은 갈숲을 휘젖기 시작했다.
..
“저 여자 왜 저러는겨?”
“보면 모르남? 뻔허제.”
“몰라서가 아니라 갈밭에는 인자 시체가 하나또 읎다는 말이시.”
“냅두소. 말해 줘도 소양읎을 것잉께. 지 눈으로 읎다는 것을 확인헐 때꺼정 저러고 댕겨야 허네.”
방죽 위에서 두 남자가 들몰댁을 내려다보며 하는 말이었다.  378-379

들몰댁은 경찰서를 찾아갔다. .. 그녀는 북국민학교를 찾아갔다. 거기서도 마찬가지로 그녀를 떠밀어냈다. .. 다시 방죽을 향해 걸었다. .. 갈숲을 헤치자 헤치다 들몰댁이 방죽의 비탈에 지쳐 쓰러졌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했다. .. 고구마 두 개씩으로 점심을 때운 새끼들이 배가 고파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거였다. ..
들몰댁이 동구에 들어선 것은 어둑어둑해서였다. 그녀는 비척거리며 고샅을 돌았다.
“엄니이!”
소리치며 뛰어오는 것은 길남이었다. ..
“엄니, 워디 갔다 인자 와. 할아부지가 오셨는디.”
“머시여?”
..
“참말이여? 은제여?”
그녀는 목멘 소리로 외쳤다.
“아까 점심때 지내서.”
“워메, 내년이 넋 빠진 년이다, 넋 빠진 년.”
..
들몰댁은 다급함 속에서도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시아버지는 아랫목에 반듯이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
들몰댁은 서둘러 보리쌀을 안치고 불을 지피면서야 맘 놓고 눈물을 흘렸다. 380-382

며칠 만에 되찾은 잠자리였다. 들몰댁은 이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처음 그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을 때는 꿈인가 했다. 그러나 두번째 그 소리를 듣고 들몰댁은 번쩍 잠이 깼다.
“이봐, 문 열어, 문!”  382

어둠 속에서 남자가 아이들에게 소리치며 들몰댁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들몰댁은 끄는 대로 끌려 마루로 나왔고, 토방으로 굴러떨어졌다. 눈에서 불꽃이 번쩍 하며 가슴이 컥 막혔다.
“경찰에서 풀려났다고 너희들 죄가 다 끝난 줄 알았다감 천만의 말씀이야. 우리가 누군 줄 알어? 하대치, 바로 그 악질 빨갱이새끼한테 아버지를 잃은 사람들이다. 지금부턴 우리가 내리는 벌을 받아야 된다 그런 말씀ㅇ야. 알아들어?”
마당에 버티고 섰던 다섯 개의 그림자가 몽둥이를 치켜들며 일제히 몰려왔다. 들몰댁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려박았다. 몽둥이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들몰댁은 이빨을 뿌득뿌득 갈다가 결국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애들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를 아슴푸레하게 들으며 끝내 까무러치고 말았다.
들몰댁이 깨어났을 때는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엄니, 엄니, 항아부지가 죽었어.”
..
“아부님, 아부님……”
들몰댁은 넋 나간 얼굴로 시아버지를 흔들었다.
“집집마다 댕김서 우리 할아부지, 엄니 잠 살려도라고 사정사정 했는디도 아무도 안 왔어.”
길남이가 울음을 추스르며 말했고, 비로소 들몰댁은 ‘아부님’을 섧게 부르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384-385

그들의 보복행위는 벌써 사흘 밤째 감행된 것이었다. 처형을 당한 집들을 제외한 나머지 집들이 보복대상이었다. 그 정보는 쉽게 그들의 손에 들어왔다. 윤태주가 청년단장 아들 현오봉을 앞세워 염상구를 만났던 것이다.
“죽이지는 않겄다 그 말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염상구가 다짐하듯이 물었다. ..
“그렇구만요.”
윤태주가 분명하게 대답했다.
“고것덜이 이뻐서가 아니고 다 쓸 디가 있어서 그냥 내보낸 것잉께 만약 죽으먼 느그덜이 당혀. 그 약속만 지킨다먼 나가 도와줄껴.”
염상구는 독기 서린 찬 웃음을 입가에 물었다.
“저어…… 염상진은 감찰부장님 형님 아니십니까.”
“근디?”
..
“그 집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
“요것 잠 보드라고 대학상 양반, 워째 하나는 알고 둘은 몰르는가 그래.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고런 말씸이시. 알아들으시겄능가?”
..
“나 바쁜게 그만들 가보드락. 죽이지만 말고.”
염상구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염상진의 집부터 시작해서 오늘 밤 하대치의 집까지, 사흘 밤 동안 일곱 집을 쓸었다. 밤마다 일을 마치고는 윤태주의 집에 모여 밤참을 먹고 다음날 일을 계획하고는 했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그들의 젊은 핏속에는 쾌락적인 승리감과 함께 보복감이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395-396




10 암약(暗躍)

“.. 투쟁은 무기로만 하는 게 아닌 것 또한 사실이오. 무기에 앞서 정신력, 여건, 환경 등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투쟁결과는 나타나게 되어 있소. 그 좋은 예가 바로 제주도에서 전개되고 있는 투쟁이오. 그들은 골비된 섬인데도 불구하고 벌써 7개월째 투쟁을 계속하고 있소. 양키들이 발악적으로 비행기며 군함을 동원해 최신무기를 사용하고, 서청이고 군,경을 그렇게 토입해 무자비한 학살을 감행해도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 말이오. ..”(염상진과 안창민의 대화중 염상민)  434

사람들은 스스로 한 덩어리가 되어 해방의 기쁨을 나누었던 힘으 ㄹ그냥 사장ㅇ시키지 않고 새 세상 만들기오아 새 나라 만들기의 힘으로 바꾼 것이었다. .. 민중들은 압제 속에 살면서 이미 그런 준비를 해왔음을 깨달아야 했다.
사람들의 그런 자발성에 따라 건준지부와 치안대가 탄생했다. 그리고 건준지부는 곧 인민위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인민위워노히의 여러 기구에 친일반역자들이 얼씬도 하지 못한 것은 더 말할 껏도 없었다. 5만을 헤아리는 읍민들 중에 9할이 농민이고, 그 농민들 중에서 8할이 넘게 소작인인 그들이 인민위원회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는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했다. 신속한 토지문제의 해결이었다. 그 요구와 공산주이 혁명과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맞아떨어졌다. 해방된 땅의 전체 분위기는 똑같았고, 그건 곧 혁명으로 치달아가는 길이었다. 인민은 곧 혁명 이데올로기의 거대한 연료로서 불꽃이 당겨지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삼팔선 이남을 미군들이 점령했고, 그들은 군정을 선포하면서 마침내 10월 10일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하고 나섰다. 그때부터 인민들의 욕구는 깨져나가기 시작했고, 공산당은 피나는 투쟁 속에서 세력의 약화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440-441

강동식은 하대치와 함께 그 투쟁경력이 화려한, 염상진 휘하조직의 중추이며 골수분자였다. 그는 벌교 토박이로 회정리에서만 대대로 살아온 소작인 집안 자식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하대치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중도의 간척논 소작인이었다. 그런데 그가 소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논에서 발을 찔렸는데 그것이 덧나기 시작해서 반년이 넘게 고생고생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5학년에서 학교를 그만두고 농사일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꿈을 버릴 수가 없어서 혼자 힘으로 나머지 소학교 과정의 공부를 마쳤다. 하대치보다 두 살이 많은 그는 하대치와 같은 시기에 염상진과 인연을 맺었다. 그래서 징용을 끌려갔다왔고, 바로 사회주의에 빠져들었다.  444

하대치가 뜨거운 기질이라면 그는 끈질긴 기질이었다.  445

배성오는 칠동리에서 부자 축에 드는 과수원집 아들이었다. 그는 순천농업학교 출신이었다. 순천농업은 순천에 있는 학교들 중에서 좌익세가 제일 강한 학교였다. 공부가 별로 마음에 없었던 그는 운동에 열중하는 한편으로 좌익에 기울어졌다. 타고난 뼈대가 굵은 그는 유도에 남다른 솜씨를 보이면서 좌익학생세력의 중심부에서 움직였다. .. 그는 정하섭의 소학교 1년 후배였다. 그리고 같은 좌익활동을 할 뿐 아니라 염상진의 영향 아래 있었다. .. 정하섭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배성오는 정하섭을 적대시하고 있었다. 책방집 딸 문정님 때문이었다. 그는 문정님에게 눈독을 들인 채 기회만 엿보며 시간을 소모하고 있었는데 정하섭과 그 여자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나돌게 되었다. 정하섭을 기운으로 해치울 수도 없는 일이었고, 그의 피해의식은 적대감으로 바뀌어갔다.  446-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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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지대라는 사선을 넘어왔지만 또 다른 사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오기뿐만 아니라 자존심도 내려놔야 한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했다.  28


탈북민은 한국에서 사회구성원으로 자리하고 인정받기 위해 오랜 기간에 걸쳐 탈북민사회의 호소와 집단행동을 통해 노력해왔다. 소수자가 피해자로 전락하면 안 된다는 외침으로부터 평등한 국민으로 봐달라는 호소까지, 통일의 동반자로 함께하고 민주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하기까지의 과정은 민주주의의 발전과 그 궤를 함께해왔다고도 볼 수 있다.  30


2016년 기준 한국인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4.6명으로 OECD 회원국 중 13년 연속 1위였다. 그런데 탈북민의 자살률은 그의 3배에 달한다. 2016년 9월 새누리당 김도읍 국회의원실에서 인용한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탈북민 중 2012년까지 모두 22명이 자살했는데, 2015년 한 해에만 9명이 자살했다. 이처럼 자살자가 급증하는 것은 '따뜻한 남쪽 나라'인 줄 알고 넘어왔던 한국에서의 삶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고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42


탈북민이 가장 문제로 꼽는 것은 경제적 빈곤이나 정착 관련 정책보다 탈북민을 대하는 한국사회의 편견과 차별, 배제가 압도적이다. 이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배태하고 있는데, 첫 번째가 오랜 분단 시대가 만든 적대와 대립의 아비투스(habitus)로, 관습의 차원에서 유래한 것이다. 반공, 반북 의식의 오랜 관습은 북한 정부뿐만 아니라 탈북민에게까지 그대로 투영된다. 2010년 11월, 북한의 연평도 폭격 직후, 어느 면접장에서 "당신네 북한은 왜 저러녀?"라고 내게 묻던 면접관의 태도에서 배타적인 타자성을 보았다.

두 번째는 남북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였다는 우월적 인식에 기인한 태도다. 못나고 가난한 아우를 바라보는 묘한 승자적 감정이다. 탈북민은 일상의 자리에서부터 끊임없이 자신이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생존과 생계의 기회를 얻는다. 이를 강요하고 탈북민을 하대하며 가타르시스를 얻는 사람들을 직면하는 것은 언젠 불편한 일이다. 

세 번째는 무한경쟁사회가 초래한 소외와 배제다. 탈북민은 한국이라는 처음 맞이하는 막막한 환경에서 홀로 서야 한다. 무한경쟁사회에서 탈북민은 애초부터 포용이 대상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이 될 뿐이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경쟁에서 배제된 채 과연 홀로 선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43-44


오래전부터 북한 주민들은 당구그이 선전을 통해서든 탈북민을 통해서든 한국이 무한경쟁사회라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다. 그럼에도 탈북민은 한국이 북한보다는 나을 거라는 희망과 우리는 결국 한 동포라는 믿음으로 탈북을 감행한다. 하지만 탈북에 성공하더라도 한국사회에서 직면하는 지독한 편견과 차별, 배제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44


자유가 존재하는 사회에 온 것은 맞지만 탈북민도 똑같이 존중받고 살기 위해서는, 한국의 평범한 시민들보다 더 많이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이었다.  44-45


나름 좋다고 하는 대학을 졸업했고 각종 자격증 취득이며 어학연수까지 다녀와 이른바 8대 스펙에도 거의 근접했다고 생각했는데, 서류전형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길 없이 어느 날 지원 서류를 다시 한 번 찬찬히 돌아보았다. 이력서의 군 복무 여부를 뭊는 칸에는 굳이 탈북민이라고 기재했고, 자기 소개서의 성장 과정과 입사 후 포부에서조차 나는 스스로 북한 출신임을 친절하게 밝히고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탈북민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고 입사 지원을 했다. 그때부터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서류를 제출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았는데 줄줄이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던 것이다. 1차 서류합격만으로도 기쁨을 느낀다는 '서류가즘'이라는 신조어도 있지만 나에겐 그 따위에 비교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격한 슬픔과 비애가 온몸을 감쌌다. 민주주의의 발전과 성숙한 의식 수준을 자랑한다는 한국에서 탈북민이라는 이름은 경쟁사회의 아웃사이더이자 분단사회의 주홍글씨와 같은 꼬리표엿던 것이다.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며 백안시하는 태도를 애써 감추려 하지만, 실제 모습은 제도와 시스템속에 철저히 내재화되어 있었다. 여기에 물질과 이기의 논리가 덧칠해져 유사한 얼개로 괄시와 배척이 가중된다.

흔히 조선족 동포는 '이등 국민'이라는 이미지로 우리 사회에 굳어져 있다. 그동안 주민등록증을 가진 대한민국 국민임에도 북쪽출신이라는 것을 밝히지 못하고 조선족 동포로 행세하며 일하는 탈북민을 종종 봐왔다. 조선족 동포라고 하면 취업이 가능하지만 탈북자임이 알려지면 취직이 어려웠던 까닭이다. 사실상 탈북민은 이등 국민도 아닌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에 가까웠다.  59-60


주민등록번호(000000- 125 0000) 하나로 탈북민인 것을 구별해내는 시스템도 신기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되어 어느 탈북민은 북한에서처럼 강가에서 자동차를 세차하다가 주변의 신고로 파출소로 연행된 적이 있었다.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던 경찰이 곧바로 북에서 왔냐고 소리쳐 당황했다고 한다. 범죄자가 아님에도 수배자처럼 탈북민을 바로 확인해내는 전산시스템을 마주하던 그때의 경험이 훗날 탈남을 결심한 계기였다고 그는 고백했다. 일반 국민과 탈북민을 이중적 공간으로 분리하고 마치 탈북민사회를 특수 집단으로 경계하는 제도와 시스템이 존재하는 한 한국사회에서 탈북민은 결코 당당해질 수 없으며 또한 이들을 향한 한국사회의 무시와 경시 또한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63


- 2009년 '북한 이탈주민 보호, 정착지원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하나원의 소재지를 기준으로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았던 탈북민은 한 차례에 한해 정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입국한 탈북민들도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125나 225로 시작하지 않는 번호를 부여받았다.  64


전부가 정한 공식적인 법적, 행정적 명칭은 '북한이탈주민'이고 별칭은 '새터민'이지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탈북민이 호칭은 수십 가지가 넘는다. 이는 탈북민 정착 재도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현상이다.  67


수년 전 어느 연구 기관에 탈북민 박사 몇 명과 함께 북한과 통일 문제 연구 프로젝트의 자문으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 북한과 통일 문제에 문외한인 담당 연구원들과 전문가이지만 실직자에 가까운 탈북민 자문위원들 간의 만남은 어색하고 불편했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한 탈북민 박사가 "이런 꼴을 보자고 어렵게 학위를 취득한 것이 아닌데..."하고 탄식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오히려 외국에 나가면 우리를 난민이 아니라 정치적 망명자로 존중해줍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자 인문학 분야에서 최정상급으로 인정받는 네덜란드의 레이던 대학교에서 일개 탈북 작가인 저를 학과장 대우로 초빙했는데 국내에서는 어떤가요. 국내에 탈북민이 3만 명인데 북한학과에 탈북민 출신 교수가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70-71


오랜 시간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지내는, 국책 기관에서 일하는 어느 ;탈북민 금수저'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매번 골프 치러 가고 비싼 술을 먹는 것 같지만 매일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살고 있다. 직장에서 끊임없이 받는 경계심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너는 상상하지 못할 거다." 탈북민사회에서 이들의 위치는 성골일지 모르지만, 한국사회에서는 결국 '탈북자'로 대접받고 있다는 고충의 토로였다. 탈북민사회에서 그들은 분명 금수저이지만 그들조차 긴장하며 살아야 할 곳이 바로 만만치 않은 한국사회라는 점도 확인했다.  72


2014년 오준 한국 유엔대사가 임기 마지막 연설에서 "북한 주민은 우리에게 남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한국과 세계의 언론들은 세계를 울린 연설이라고 극찬했다. 이를 지켜보던 한 탈북민 후배의 중얼거림이 지금껏 가슴에 남아 있다. "그럼, 우린 남일까요?"  73


목숨을 걸고 입국한 한국을 다시 등지는 탈북민의 행렬은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정확한 통계가 공개된 적이 없어 구체적으로 알수는 없지만, 일각에서는 약 5,000명의 탈북민이 탈남했거나 탈남했다가 되돌아온 것으로 추산한다. 2017년까지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이 3만 명이니 6명 중 1명이 탈남했거나 탈남 경험이 있는 것이다.  89


배고파서 온 사람들이라서 배만 부르면 잘 정착할 것이라는 판단은 너무나 안일했다. 배고픔보다 더한 고통이 같은 민족으로부터 받는 차별이라는 것이 탈남과 재입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92


2007년 작고한 이기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식사 자리에서는 음식이 담긴 그릇을 앞에 두고, "그릇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함부로 만지지도 담지도 말라"는 또 하나의 당부를 하셨다. 만들어져가는 그릇에 뜨거운 물을 붓거나 손자국을 낸다면 기형적인 모습으로 완성된다는 의미였다.  95


2007년 4월, 32명을 사살하고 17명이 넘는 이들에게 부상을 입혀 세계를 경악케 했던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주범은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난 미국 영주권자였지만, 미국민들은 그를 한국인 모두와 동일시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미국인들의 분노가 한국과 한국인을 향할 것이라는 일각의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미국 언론들은 오히려 이 사건을 이민자 출신의 국민을 제대로 포용하지 못한 미국사회의 문제로 보도했다. 서독에서 간첨 사건이 터질 때 서독에 정착한 탈동독민은 불이익을 받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탈동족민도 서독의 국민이라는 이념적 포용력과 성숙한 인식이 서독사회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독일이 보여준 성숙한 의식을 우리는 언제쯤 확인할 수 있을까.  98


학부 전공 수업에서 들었던 인상 깊은 문장이 아직까지도 뇌리에 남아 있다. "민주주의는 일방적 동화(同化)를 강요하지 않는다."  111


통일로 한 걸음씩이라도 나아가기 위해서는 북한 사람들에게만 일방적 동화와 적응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북한을 모르고서는 함께 살아가야 할 통일도 없다. 독일 통일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도 국민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베를린장벽 붕괴를 주도한 것은 동독 시민이었지만, 통일 국가를 위한 국민투표를 추동하며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라고 외쳤던 이들은 동독과 서독 시민 모두였다. 합법적 방식과 민주적 절차를 통해 동독은 자기보다 우월한 서독으로의 평화적인 체제 이행을 단행했다. 서독으로의 편입을 선택한 동독 시민에게는 통일 국가에서 동등한 주체로 대접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꿈이, 동독 시민을 받아들인 서독 시민에게는 민족의 소망을 이뤄내기 위해서라면 경제적 비용을 비줄하겠다는 각오가 있었다. 오늘날 유럽연합을 주도하는 통일 독일의 저력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111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북한 사람들이 지금의 한국사회에 만연한 탈북민에 대한 자별과 배제를 목격하고, 자신들을 향한 천민자본주의적 행태를 경험한다면, 가까스로 통일을 이워내더라도 그 통일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옛 소련의 해체를 예언했던 정치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전쟁이 끝난다고 평화가 찾아오는 게 아니며 그 다음에 찾아오는 것은 전쟁보다 더 잔인한 것일 수도 있다"라고 했다. ..

나는 통일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 다시 타오르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 통일은 한밤중에 얻는 '대박'보다는 시나브로 '작은 통일'이 모여 결실을 맺는 끈기와 인내의 열매여야 한다.  114-115


공문서와 여권 등에 새겨진 각인은 점차 지워지고 있지만, 한국사회 안에서의 주홍글씨는 더욱 선연해지고 있다.

언젠가 북한 말투를 고쳐 신분을 세탁해보려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표준말을 따라하다가 감정이 북받쳐 크게 울었던 날이 있었다. 그날 깨달았던 것은 분단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탈북자'란 꼬리표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121



서북청년단은 해방 직후 북한이 단행한 친일 숙청과 토지개혁등에 의해 탄압받고 재산을 빼앗긴 이북의 청년들이 남한으로 내려온 후 만든 반공단체다. 지주, 자본가, 개신교도, 민족주의자, 친일파 등으로 구성된 이들은 대부분 황해도와 평안도 출신들이었다. 공산당에 의해 재산을 빼앗기고 고향에서 쫓겨나듯 도망쳐야했던 아픈 경험 탓에 북한의 공산당뿐만 아니라 남한의 진보적인 세력까지도 '빨갱이'로 매도하며 거부감과 증오를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특히 남한에 내려온 후 아무런 기반도 없는 처지와 경제적 궁핍함으로 인해 생존이 막막한 현실이 서북청년단의 잔혹성을 키웠다. 서북청년단은 점차 폭력과 테러 등을 통해 존재를 과시했다. 

학자들은 해방 후 한국전쟁까지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월남자 숫자를 80~10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신윤동욱, "박근혜 이후를 묻다", [한겨레21] 1153호, 2017) 이들은 북한에 대한 피해 의식으로 반공, 반북 이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미군정과 우익 세력은 이러한 성향을 간파하고 이들을 최대한 이용했다.  130


서북청년단은 창단 직후부터 미군정과 경찰의 비호를 받고 서북 출신 재력가들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으면서 무소불위의 세력이 되었으며 잔악한 활동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131


1949년 6월 26일 정오 무렵, 서북청년단의 간부였던 안두희는 경교장에 들어가 백범 김구를 암살했다. 그들은 정치 지도자뿐만 아니라 좌편향이란 혐의를 씌워 현직 검사에게 테러를 감행했으며 문화계 인사들이 모인 부산극장에 다이너마이트를 던지기도 했다. 큰 공로를 세운 단원들은 경찰과 군에 취직이 되었고, 이들처럼 출세하려는 이들의 부역 활동은 더욱 극렬해졌다.

서북청년단의 대표적인 만행이 바로 제주 4.3 사건 중에 일어났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로 민간이 6명이 사망한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소요 사태와 무력 충돌,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건이다. 당시 30만 명 정도였던 제주도민 중 3만 명 이상이 학살되었는데, 제주도를 피로 물들게 한 이 학살을 주도한 것이 바로 서북청년단이다. 얼마나 끔찍한 학살과 엽기적 만행이 있었는지 지금까지도 정확한 피해 규모조차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132-133


서북청년단은 이 시기에 벌어진 광기의 학살에 가담한 테러 조직이라는 역사의 오명을 쓰게 되었다. 오죽하면 당시 민군정청 사령관이었던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마저 서북청년단의 만행을 보고 진저리를 치며 단체 해산을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결국 이들의 존재는 이승만 정권에게도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왔고, 1948년 12월 모든 청년 단체를 통합해 대한청년단을 출범시켜 서북청년회를 해체해버렸다. 이후 서북청년단 출신 중 남한에서는 출세한 이가 거의 없었다.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경제적 보상도 없이 토사구팽의 신세로 전락했다.  135



남쪽이 방종이 만연한 사회였다면, 북쪽은 부자유가 숨통을 조이는 사회였다.  139


지금도 남북한 어디에도 참여할 수 없는 낯선 이방인들이 있다. 탈북민은 아직 광장을 마음것 누리지 못한다. 탈북민은 아직도 '이명준(최인훈<광장>)'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회적 광장으로 초대받는 데 실패한 이들이, 자신이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고 깨달을 때 할 수 있는 선택이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이 ㄹ수밖에 없다. 제3국으로의 탈남, 아니면 북한으로의 재입북, 다시 재탈북.... 아니면 이명준과 같은 최후의 선택.

1950년대의 이명준처럼, 탈북민은 지금도 북한과 관련된 안 좋은 사건이 터지면 빨갱이라는 말을 듣고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한다. 끌려가서 린치를 당하는 일은 없지만 온라인 댓글과 오프라인에서의 수군거림은 기실 폭력보다 더 매섭고 아프다. 취업도 어렵고 저임금 3D 업종에도 감사하라고만 한다. 차별과 편견에 대해 입을 열면 곧바로 너희의 조국인 북한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나한에 입국 후 얼마간은 안도감을 느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탈북민은 고통스럽고 힘들어한다.  143


유엔난민기구(UNHCR)가 2017년 6월에 발표한 [연간 글로벌 동향 보고서]에 의하면, 외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탈북민이 1,422명, 난민 지위를 받으려고 신청 대기 중인 탈북민이 533명에 달한다.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통계와 이처럼 차이가 나는 이유는 탈남하는 이들이 난민 심사에서 탈락해 강제 추방되거나 해외 정착에 실패할 것을 대비해 임대아파트 등은 정리하지 않고 떠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000년대부터 탈북민사회에서는 '탈남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한동안 해외의 남민 심사에서 한국 국적을 가진 탈북민의 추방 조치가 강화되자 탈남 바람이 주춤하기도 했지만, 최근 캐나다와 영국처럼 한국 국적의 탈북민도 신변의 위험과 위협 등의 상당한 이유가 있다면 난민과 이민 신청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늘고 있다. 

목숨 걸고 경계선을 넘어 한국에 왔으나 극심한 빈곤을 겪고 다시 한국을 떠나려는 사람들, 다시 목숨을 걸고 북한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 한국도 북한도 마땅치 않아 다른 나라에 난민 신청을 하는 사람들... 과연 그들은 자유와 전엄의 땅에 닿을 수 있을까.  188-189


나는 이곳에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것들을 겪었다. 아프고 힘들었던 경험도 재산이라고 스스로 위로로 삼았다. 인내하며 얻어낸 여러 성취의 결과에도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탈북민에 대한 한국사회의 일그러진 민낯 앞에서 나는 여전히 절망하고 좌절한다. 대학교수로 일하는 나조차도 보통의 시민들을 제대로 마주 보거나 말을 건네기가 조심스럽다. 나도 이러한데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탈북민이나 사회적 지위가 빈한한 이들은 얼마나 힘들까.  189




맺는말


대부분의 국민들이 통일을 말하지만 이를 준비하려는 사람은 드물다. '먼저 온 통일'이라 했던 탈북민이 3만 명을 넘어섰지만 그들과 함께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가물다. 탈북민에 대한 무관심만큼이나 통일 이후에 대한 고민도 극히 적다.  191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자 백범 김구 선생은 "아, 왜적 항복! 이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었다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라고 통탄했다. 이역만리에서 풍찬 노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해왔건만 조선의 해방은 우리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해방을 이룬 것이 아니라 해방을 당한 것이라는 그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고 새로운 비극인 분단이 찾아왔다.  195-196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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