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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2.20 시선으로부터 - 정세랑 문학동네 2020 03810




할머니의 죽음은 화수에게 이상했다. 처음 이 삼 년은 무철 단단하고 확실히 느껴졌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할머니가 계속 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계속된다는 말은 좀 미묘하지만, 육체의 죽음을 받아들이자 육체가 아닌 부분은 지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16

질문자 : 성공적인 결혼의 필수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심시선 : 폭력성이나 비틀린 구석이 없는 상대와 좋은 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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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 선생님도 참. (웃음) 폭력서오가 비틀린 구석이 없다는 건 너무 베이직 아닌가요?
심시선 : 베이직은 갖춘 사람이 오히려 드물다고 봅니다. 안쪽에 찌그러지고 뾰적한 철사가 있는 사람들. 배우자로든 비즈니스 파트너로든 아무데도 못 갖다 써요. 꼭 누군가를 해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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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시선 : .. 대화는 친구들이랑 합니다. 이해도 친구들이랑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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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시선 :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구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간절히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한 사람이 가지고 있을 확률은 아주 낮지 않을까요? 그리고 규칙적인 근사한 섹스의 가치를 너무 박하게 평가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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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시선 : 사흘에 한 번씩 섹스를 하고 싶은 사람들 말고는 결혼을 안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19-21

“.. 겉도는 대화는 절대 안 하는 분이었달까.”
“겉도는 대화?”
“보통은 며느리가 뭘 하고 사는지 그렇게까지 궁금해하지 않잖아. 그런데 어머님은 정말로 내가 뭘 하고 지내는지 궁금해했어. 무슨 책을 읽는지, 어떤 내용인지,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22

외국어도 잘하고 욕도 잘하는 사람이었고, 어쩌면 그것은 같은 능력일지도 몰랐다.  27

명혜는 명은더러 다른 모두가 더하기의 인생을 살 때 혼자 빼기의 인생을 산다며 감탄인지 비난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했었다. 명은은 자신이 택한 빼기의 인생이 싫지 않았다.  31

폭력은 사람의 인격을 조각한다. 조각하다가 아예 부숴버리기도 하지만, 폭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폭력의 기미를 감지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얻은 감지력을 유용하게 쓰는 사람도 있고 절망해 방치해버리는 사람도 있어서 한 가지 결로 말할 수는 없다.(심시선)  126

약간의 아슬아슬함을 감수하더라도 지금까지 몰랐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라 여겼다. 사람이 제일 신나는 모험이었다.(우윤)  130

‘에디 우드 고(Eddie would go)’ - 에디 아이카우라는 유명한 서퍼를 기념하는 문장. “구조대원일때 물에 빠진 사람들을 엄청 구했다던데? 수영으로도 구했지만 보드를 손으로 척척 젓고 가서 끌어올렸대.” .. “그리고 사는 게 멋졌던 사람은 죽는 것도 멋졌더라. 고대 항해 기술을 재현하려는 탐사대에 합류했는데, 탐사대 전체가 조난을 당하고 만 거야. 그때 에디가 구조대를 불러오겠다며 혼자 자기 서핑 보드를 타고 바다를 가로질러갔대. 막상 탐사대는 다른 배에 구조되었고, 에디는 실종되고 말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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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 우드 고, 라는 말 자체가 서핑 대회 때 어미어마하게 큰 파도가 왔을 때 누가 한 말이라지만 사실 다르게 해석되기도 하겠다.”
“결정적인 순간에 타인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스스로가 다치게 되어도, 그런 의미로?”  139-141

“.. 쓰는 게 뭐 대단한 것 같지? 그건 웬만큼 뻔뻔한 인간이면 다 할 수 있어. 뻔뻔한 것들이 세상에 잔뜩 내놓은 허섭스레기들 사이에서 길을 찾고 진짜 읽을 만한 걸 찾아내는 게 더 어려운 거야.”(난정)  166

“할머니는 할머니의 싸움을 했어. 효율적이지 못했고 이기지 못했을ㅈㅣ 몰라도. 어찌되었든 사람은 시대가 보여주는 데까지만 볼 수 있으니까.” (화수) 182

할머니는 욕도 표현의 일종이라고, 다만 정확하고 폭발력있게 욕을 써야 한다고 말했었다.(화수)  183

“젊어”
걷다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땅이 너무나 젊었다. 걸어도 걸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 평소 명은이 거닐고 파들어가는 땅은 늙고 고정된 땅이었다. 그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기분 전환이 되었다.(명은). 195

매일 비슷한 날들이 지속되면 머릿속에 깃발 같은 것이 남지 않는다. 깃발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단편적인 이미지들만이 종종 떠오른다.(심시선)  201

열려 있는 사람(체이스)  204

“나는 세상에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생각해. 남이 잘못한 것 위주로 기억하는 인간이랑 자신이 잘못한 것 위주로 기억하는 인간. 후자 쪽이 훨씬 낫지.”
“두 종류로 나누는 건 너무 단순화시킨 거 아냐?”
“그러게, 그러면 안 되는데.”(체이스와 지수)  208

어른들은 기대보다 현저히 모르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해림은 인생의 중요한 선택은 스스로 알아서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226-227


예술에 통계 같은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워낙 특수한 사례들이 많아서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은 헐거운 관찰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할 테지만, 지켜본바 작가들이 이십 년에 한 번씩 큰 변곡점을 그리지 않나 생각해왔습니다. .. 농담이 아니라 여든 살에도 변화는 옵니다. .. 일종의 도약 지점 같은 것일까요? ..
이십 년에 한 번 씩 오는 격변은 표현 능력의 도약일 수도 있고, 새로운 주제로의 전환일 수도 있고, 갑자기 마음을 빼앗는 재료일 수도 있고, 그때껏 발견하지 못해ㅐㅆ던 색일 수도 있고, 참선 끝의 득오일 수도 있습니다.(심시선)  228-229

다시 떠올리기 싫은 어설픈 젊음이었다.
그 어설픔이 이제 사라졌는지? .. 모친이 늘 하던 말이 맞았다. 같은 일을 이십 년쯤 하면 계단 턱 같은 것을 만나게 되고 그것을 뛰어넘는 것은 성취감이 있었다.(명준)  231

“빼앗긴 것은 영영 복구되지 않고, 빼앗아간 사람들은 자기가 뭘 했는지도 몰라. 미국을 봐. 2차대전 때 군국주의자들이랑 싸웠다는 것만으로 정의의 편인 것처럼 굴지만 하와이에 한 짓을 봐.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한 짓도. 제국주의자들은 자기가 제국주의자인 걸 몰라. 인정을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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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히 어느 지역 사람들이 더 잔인한 건 아닌 것 같아.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에겐 기본적으로 잔인함이 내재되어 있어. 함부로 굴어도 되겠다 싶으면 바로 튀어나오는 거야. 그걸 인정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에 따라 한 집단의 역겨움 농도가 정해지는 거고.”
“역겨움의 농도라니 재밌네.”
“비슷한 일을 겪어놓고 여기 하하호호 하며 관광 오면 안 되었던 것 같아.”
“큰누나한테 그렇게 말해봐.”
“무서워서 못해…… 어쨌든 하와이를 좋아하면 하와이에 오면 안 되는 거였어. 제주도를 아끼면 제주도에 덜 가야 하는 것처럼.”
“오기 전엔 몰랐잖아. 와야 알 수 있는 것들인데.”
“그건 그래.”(명준과 난정)  234-235

“응, 당신은 괜찮은 벽이야.  내가 생각을 던지면 재밌게 튀어 돌아와.”(난정)  237

심시선 : .. 어떤 시대는 지나고 난 다음에야 똑바로 보이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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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시선 : .. 세상은 참 이해할 수 없어요. 여전히 모르겠어요. 조금 알겠다 싶으면 얼굴을 철썩 때리는 것 같아요. 네 녀석은 하나도 모른다고.  256

“여자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큰 거 해야 해요. 좁으면 남들 보고 비키라지. 공간을 크게 크게 쓰고 누가 뭐라든 해결하는 건 남들한테 맡겨버려요. 문제 해결이 직업인 사람들이 따로 있잖습니까? 뻔뻔스럽게, 배려해주지 말고 일을 키우세요. ..“(심시선)  269

“전형적인 집안에서 태어나 뭔지 알 수 없는 집안으로 장가를 왔지.”(태호)  274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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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에게 주어진 질문 하나에 온 평생으로 대답하는 것은 질리기 쉬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대가들일수록 질려하지 않았다. 즐거워했다는 게 아니다. 즐거워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질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심시선)  288-289


기억하지 않고 나아가는 공도에는 본 적이 없다. ..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손맛이 생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무것도 당연히 솟아나진 않는구나 싶고..  298-299

“.. 사랑은 돌멩이처럼 꼼짝 않고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빵처럼 매일 다시,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거래..”  304

“.. 세상의 일그러지고 오염된 면을 너무 가까이서 보게 되면, 그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는 거야. 그걸 설명할 언어를 찾을 때까지는. 어떤 건지 이해가 가?..”  305

결혼을 매 순간 갱신하는 계약으로 생각하는 집안의 딸과 결혼하는 게 아니었어. 알면서도 뛰어들었지. 바보였지……  305

언젠가 시선이 픽션은 존재하는 사람들과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대화라고 했던 것이 생각나 ..  311

경아가 잠든 해림의 티셔츠를 가리키며 “노란색을 입었어, 내가 몰래 넣어놓은 걸 입었어” 하고 기뻐하며 속삭였다. 해림의 티셔츠 색깔 말고도 무언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앞서 짚기보다는 천처니 발견해나가기로 마음먹고 등을 기댔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331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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