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철학 2장 - 포이어바흐를 넘어서 도달한 곳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은 각 개인에게 내재된 추상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은 본질이란 말뜻처럼 불변하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관계가 만들어내는 앙상블과도 같다는 것이다.  ... 개별 연주자들이 최상급 연주 실력을 뽐내도 다른 연주자들의 연주에 녹아들지 못하면, 연주는 불협화으믕로 끝나고 만다. 앙상블 연주로는 완전히 실패한 셈이다.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인간을 솔로 연주자로 보지 말고 앙상블에 참여한 개별 연주자로 보자는 것이다. ... 마르크스는 ‘본질주의(Essentialism)’, 즉 개인이나 사물 안에는 본질이 내재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해체하고자 한다. 겉보기에 아ㅜ리 달라 보여도 서양철학 전통 일반은 모두 이 본질주의에 발을 걸치고 있다.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중요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본질주의 대신 마르크스는 ‘관계주의(Relationalism)’라고 부를 만한 입장을 표방하기 때문이다. 관계주의는 개인이나 사물 등 우리 눈에 식별되는 대상들이 아니라 직접 눈에 띄지 않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223-224

식사를 하던 아이가 귀가 가려웠는지 젓가락으로 귓속을 긁는다. 식탁에 있던 어머니는 기겁을 하며 아이를 나무란다. “젓가락은 음식을 집어먹는 거야. 귀를 파고 싶으면 귀이개를 써야지.” 익숙한 밥상 풍경이지만, 여기에도 보질주의와 관계주의가 작동하고 있다. 젓가락의 본질은 무엇인가?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음식을 집어먹는 것’리다.  ... 본질주의가 삶에서나 정치엣 항상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본질주의는 본질이란 이름으로 기존 질서를 맹목적으로 따를 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224-225

자유란 별게 아니다. 어떤 사물과 하나의 관계만 가능한 사람보다 서너 가지의 관계가 가능한 사람이 더 자유로운 법이다. 아이는 의자가 없어도 근사한 바위에 앉아서 쉴 수 있고, 사용하지 않는 냄비에 흙을 담아 꽃씨를 묻을 수도 있다. 물론 급하게 소변을 보고 싶으면, 아이는 신속하게 인기척이 없는 곳에서 시원하게 소변을 볼 수도 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어머니나 선생임의 훈육으로 사회적 규범에 동화되고 만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사회구조가 지정한 관계로만 세상과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가 말한 초자아가 제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초자아라는 내적 검열지구가 작동하자마자, 모든 사물은 하나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결과적으로 이제 사물은 본질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  225-226

남편이 있는 아내나 아이의 엄마만을 강조하는 순간, 이 사람의 본질은 여성이 되고 만다. 혹은 이 삶이 편의점에서 일하는 것만 강조되는 순간, 이 사람의 본질은 프롤레타리아, 그것도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최악의 프롤레타리아가 된다.  227

마르크스에게 부르주아 경제학자들 대부분은 일조으이 본질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방적기, 목화솜, 공장, 그리고 노동자등 개별적인 대상들만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본과 노동이란 관계, 원초적으로 불평등한 관계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자본가는 돈으로 공장을, 방적기를, 목화솜을, 그리고 노동자를 산다. 면직물을 만들어 투자한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다. 반면 노동자는 일체의 생산수단과 생계수단을 박탈당해 노동력만 가지고 잇다. 생계를 위해 돈이 필요한 노동자는 면직공장에 취업해야만 한다.  228

억압과 수탈 관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생각해 보자. 생산수단과 생계수단을 누군가 독점하는 순간, ‘3P의 삼각형(the triangle of 3P)’으로 작동하는 지배관계는 탄생한다. 먼저 소수가 부유해지면서 다수는 가난해진다. 첫 번째 P는 재산(property)이고 두 번째 P는 가난(poverty)이다 부유한 소수는 가난한 다수를 지배하게 된다. 세 번째 P는 권력(power)이다. 권력은 재산과 가난 사이의 관계를 영속화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이자 공권력이란 이름으로 이 원초적 관계를 지키려는 힘이다. ‘재산-가난-권력’으로 이루어지는 ‘3P의 삼각형’은 대부분의 인간을 자기 안에 감금해 피지배계급으로 포획한다. 3P의 삼각형이 만들어지면, 지배관계는 공고화된다. 그러니 권력을 해명하고 싶다면, 우리는 재산과 가난의 문제를 우회해서는 안 된다. 재산을 비판하고 싶다면, 우리는 권력과 가난의 문제를 숙고해야만 한다. 그리고 가난을 해결하고 싶다면, 우리는 권력과 재산의 문제를 극복해야만 한다. 재산과 가난이 분열되면서 권력을 낳고, 재산과 권력이 결합하면서 가난을 지속시키고, 마지막으로 권력이 가난을 적대시하면서 재산은 안정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대상이 아니라 관계를 사유해야 한다! 이것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이다. 지배계급 이데올로그들은 소수의 재산과 다수의 가난이 서로 무관하다고, 소수의 재산과 소수의 권력이 서로 무관하다고, 나아가 소수의 권력과 다수의 가난이 서로 무관하다고 역설한다. 이 궤변을 다수의 가난한 자들이 받아들이는 순간, 억압과 착취의 체제는 승리를 구가하게 된다.  245-246

억압과 착취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소작농이 지주가 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새로운 소작농을 양산하는 길일 뿐, 불평등한 관계 자체를 소멸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자본가가 생산과 생계의 절대적 수단, 즉 돈을 독점했기에, 노동자들에게는 팔 수 있는 노동력만 남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자본가-노동자’ 관계를 인식하지 못한 노동자는 자신의 처지를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이제 그에게 남은 꿈은 단순하다 많은 임금을 받기를 꿈꾸거나 아니면 언젠가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자본가가 되는 걸 꿈꾸게 된다. 자본가가 있기에 자기 삶이 비참해졌다는 것을 알았다면 노동자가 이런 헛된 꿈에 매진할 리 없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가 자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노동자’ 관계가 소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억압받는 자들은 폐부에 새겨 잊지 말아야 한다. 대상이 아니라 관계를 사유하라! 불평등한 관계가 다수를 “눈물의 골짜기”에 던져 넣었다면, 그 억압적 관계를 우리는 돌파해야만 한다. 넘어진 곳이 바로 우리가 일어나야 할 곳이다.  247
마르크스는 ‘인간의 감성’ 이외에 ‘실천적 활동’이란 의미를 강조했던 것이다. “실천적인 인간적-감성적 활동”으로서 감성은 우리의 몸적 인식이자 실천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사실 “무언가 했더니 사람이로구나”라는 인식이나 “사람인 줄 알았는데, 바위구나”라는 인식도 이미 이런 몸적 인식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니 지성의 판단이나 개념의 자발성도 결코 몸과 무관한 정신만의 고유한 기능이 아니라, 엄격히 말하면 몸적 인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피지렌’이란 독일어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비가 얼굴에 떨어지면 우리는 그걸 느낀다. 비가 우리를 촉발한 것이다. 태양이 작열하면 우리는 그걸 느낀다. 태양이 우리를 촉발한 것이다. 매혹저긴 향내가 나면 우리는 그걸 느낀다. 향기가 우리를 촉발한 것이다. “직관이 감성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즉 우리가 대상에 의해서 촉발되는 방식만을 포함한다는 것은 우리 본서으이 필연적 결과다.” 여기까지 칸트의 말은 옳을 뿐만 아니라 정확하다. 그렇지만 우리 몸이 비오는 날 집 밖에 있었다는 사실, 우리 몸이 여름날 바닷가에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 몸이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다는 사실도 그만큼 중요하다. 온몸으로 물을 느끼려면 대홍수가 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그저 계곡물이나 바닷물, 아니면 욕조물에 몸만 담그면 된다. ‘아피지렌!’ 그것은 무엉ㅅ보다도 특정 시공간을 점유하는 몸들 사이의 마주침이 전제된 것이다. 일단 마주쳐야 타자든 나든 상대방을 촉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253

산길을 걷다가 “무언가 했더니 사람이구나”라는 인식에 이르렀다. 이 인식을 바꾸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 “마음의 수용성을 감성”이라고 정의하면서 감성의 의미를 축소했던 칸트의 입장을 밀어붙이면 된다. 다시 말해 일체의 미동도 하지 않고 걸음을 멈추고 있으면 된다. 다시 말해 일체의 미동도 하지 않고 걸음을 멈추고 있으면 된다. 칸트가 감성의 능력을 ‘직관’이나 ‘관조’라고 표현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직관’이나 ‘관조’를 뜻하는 독일어 ‘안샤우웅(Anschauung)’은 원래 동사 ‘안샤우엔(Anschauen)’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말은 ‘거리를 두고 관찰하거나 바라본다’는 의미이기에 보통 ‘관조한다’는 말로도 번역된다. 결국 대상을 직관하거나 관조하는 칸트식 감성이 작동하려면, 우리 몸은 결코 움직여서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 X를 관조하면 “무언가 했더니 사람이구나”라는 인식은 수정될 여지가 없다. 바로 이것이 핵심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감성을 ‘직관’이나 ‘관조’의 기능에 국한하지 않고 “실천적인 인간적-감성적 활동”이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칸트의 감성이 수동적 감각에 지나지 않는다면, 마르크스의 감성은 수동성과 능동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몸적 인식, 혹은 실천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강조했던 감성의 원래 모습을 복원하지 않으면, ‘바위구나’라는 새로운 인식이 만들어질 여지가 없다.  254-255

역사적 인식은 무언가 사라지고 무언가 새롭게 생기는 과정에 대한 앎이다. 무엇이 사라졌을까? 무엇이 새롭게 생겼을까? 왜 사라졌을까? 이런 의문은, 오직 무언가 없어지고 무언가 새로 생기는 일은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260

잊지 말자. 피지배계급의 무기력을 조장하거나 증폭시키는 주범은 항상 지배계급이라는 사실을, 과거부터 지금까지 지배계급은 항상 원한다. 자기 의지가 관철된 모든 것을 피지배계급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관조하고 순응하기를, 이런 식으로 소수의 지배계급은 다수를 배제한 채 역사의 주체로 등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포이어바흐적 관조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수 피지배계급이 소수 지배계급에 필적할 만큼 분명한 역사의식을 갖는 것이다.  266

역사의식이 중요한 이유는 이를 토대로 우리가 실천의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 하나의 공식처럼 기억해두자. 역사의식이 사라지면 우리는 세상을 관조하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전락하게 된다는 사실.  266-267

“우리는 단지 유일한 과학, 역사의 과학만을 알 뿐이다.” 마르크스가 남긴 유명한 명언 중 하나다. 이 문장이 담긴 전체 단락이 없어질 뻔했다니 섬뜩한 일 아닌가? 역사의 과학이다! 이것을 흔히 역사학이라고 불리는 과목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가 말한 역사의 과학이란 정확히 말해 관조의 과학이 아니라는 뜻이니까 말이다. 역사의 과학이란 말은 인간의 모든 학문과 인식이 역사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반면 역사학은 과거의 역사를 불변하는 팩트로 고정시킨다. 결국 역사의 과학이 가변성과 실천성을 강조한다면, 역사학은 불변성과 관조성에 기반을 둔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학마저 시대에 따라 부팀을 거듭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의 역사학과 지금 시대의 역사학이 동일한 과거를 다뤄도 그 함의가 다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268-269

지금 배운 진리가 ‘역사적’일 수밖에 없다는 걸 자각한 학생들이 있을 수 있다. 마르크스적인 과학도들인 셈이다. 이들은 자연의 법칙을 새롭게 해명해 언젠가 교재에 자신의 이름이 붙은 법칙을 남길 가능성이 크다. 이제 물리학은 ‘물리에 대한 역사 과학’, 화학은 ‘물질 변화에 관한 역사 과학’, 그리고 생물학은 ‘생물에 관한 역사 과학’의 줄임말이라고 생각하자. 진정한 물리학자는 물리를 관조하지 않고 실천적으로 개입하고, 진정한 화학자는 변화를 관조하지 않고 변화에 참여하며, 진정한 생물학자는 생물을 관조하지 않고 생명체의 거동에 관여한다. 과학자들의 이런 실천적 참여로 해당 과학의 내용은 급변한다. 그래서 자연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은 과학사라고 할 수 있다.  269-270

‘인류가 지구 환경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시대’라는 뜻의 인류세는 1990년대 네덜란드 대기화학자 크뤼천(Paul Jozef Crutzen, 1933~)이 사용해 유명해진 개념이다. ... 1900년에 16억 명이었던 인구는 2000년에 돌입하면서 60억 명을 돌파한 뒤 지금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당연히 다른 종들은 멸종의 길을 걷거나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인간은 엄청난 규모의 숲도 없애고 거대한 댐도 만들고 대도시도 확장하고, 심지어는 기차와 자동차로 대지를, 비행기로는 대기를, 대현 선박으로는 대양을 가로지르고 있다. 환경오염 외에도 다른 종들이 살 수 있는 공간 자체가 협소해진 것이다. 현재 기린은 약 8만 마리, 늑대는 20만 마리, 침팬지는 25만 마리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한정된 땅덩어리에 인류의 개체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생태 환경이 파괴됨에 따라 다른 생물들은 멸종으로 떠밀리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나무늘보를 포함한 동물원의 동물 대부분은 멸종 위기 상태에 있다. 바로 이것이 인류세의 풍경이다. 인류가 멸종한 뒤, 다른 지적인 생명체가 지구의 역사, 혹은 자연의 역사를 탐구한다고 해보자. 아마 그들은 인류세를 방사능 물질, 이상화탄소, 그리고 플라스틱의 시대였다고 말할 것이다. 혹은 그들은 인류세를 보여주는 지층에서 엄청난 닭 뼈를 발견하고 경악할지도 모른다. 인류는 한 해 평균 600억 마리의 닭을 먹어치우니, 수백 년 동안 지층에 쌓인 닭뼈의 양은 무시무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274-275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인류세라는 용어가 낳을 수 있는 오해와 관련된 것이다. 마치 인류가 환경 파괴의 주범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나올 수 있으니까. 사실 중요한 것은 소수의 지배계급이 존재하는 억압사회다. 대다수 인류를 생태 파괴의 현장으로 몰아넣고 동시에 그들을 자연 재앙에 제일 먼저 노출시킨 장본인이 누구인가? 바로 소수의 지배계급이다. BC3000년 전후 인간이 문자로 자기 역사를 기록한 이후 인류의 힘은 비약적으로 커졌고 문명은 발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억압체제는 외양만 바뀌었을 뿐 구조적으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농업혁며으이 시대냐 산업혁명의 시대냐의 구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농업경제 기반의 억압사회가 산업경제 기반의 억압사회로 바뀌었을 뿐이니까.
토지가 생산수단과 생계수단이란 절대적인 지위를 돈에 양보하고, 지주는 지배계급의 권좌를 자본가에게 물려주고, 그와 동시에 농민, 천민, 혹은 여성 등은 노동력을 제외한 모든 것이 박탈된 새로운 인간형, 즉 노동자라는 새로운 피지배계급이 되었을 뿐이다. 여전히 지배계급은 두 종류의 착취를 지속적으로 자행하고 있다. 하나는 동료 인간을 착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지배계급을 매개로 자연을 착취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세라는 표현은 수정이 필요하다. ‘지주-농민’이란 사회적 관계를 대신해 등장한 ‘자본가-노동자’란 사회적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토양과 하천, 나아가 바다까지 오염시키는 방사능 물질. 대기를 치명적으로 교란하는 이산화탄소. 깊은 바닷속 어패류의 소회기관에까지 침투한 플라스틱 조각들. 농업경제 시절 짐작도 못할 정도로 인류는 지구를 망가뜨리고 있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진정한 원인은 인류 전체가 자본주의체제에 포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류세라는 용어를 ‘자본세(capitolocene)’로 바꾸자는 논의가 나온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 용어는 스웨덴의 생태학자 안드레아스 마름(Andreas Samuel Magnus Malm, 1977~)이2009년 처음 사용했지만, 그와 무관하게 해러웨이(Donna J. Haraway, 1944~)가 2012년 대중강연에서 독립적으로 사용해 유명해진 개념이다.
인류세라는 용어는 환경 파괴의 원인을 막연히 인간 전체로 돌릴 위험이 있다. 이 용어는 지구라는 별에서 인간이 사라져야 생태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잘못된 생각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원인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인류세라는 용어보다 자본세가 더 좋다는 것이다. 생태계 교란과 파괴의 책임은 자본주의체제를 주도하면서 잉여가치에 대한 맹목적 충동에 사로잡힌 자본계급에게 있기 때문이다. 소수의 자본계급이 다수의 인간과 지구 환경을 수탈하고 착취하고 있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 아닌가? 이에 비해 자본계급에게 착취당하는 노동 계급, 나아가 자본주의체제와 다르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환경 파괴의 피해자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어떻게 자본주의체제를 극복할 것인가?” 2015년 해러웨이가 자본세라는 용어에 만족하지 못하고, ‘커스루센(Chthulucene)’이란 용어를 다시 만들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인간이 부분으로 속해 있는 힘들(forxe)과 역능들(powers),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지구와 함께하는 이런 힘과 역능들에는 하나의 이름이 필요하다고 나는 주장했다. 물론 지금 이 지속성이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아마도, 정말 아마도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종들이 풍요로운 앙상블을 이루는 시대가 가능할 것이다. 나는 과거든, 현재든, 그리고 미래든 이런 시대를 커스루센이라고 부르고 있다. 커스루센은...... 지구 도처에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촉수적인(tentacular) 역능들과 힘들, 그리고 서로 모여 사는 사물들(collected things)을 본떠 만든 말이다. ...... 커스루센은 적어도 하나의 (물론 하나 이상의 함의를 갖는) 슬로건을 요구한다. ...... “아이를 만들지 말고 친족을 만들어라(Make kin not Babies)!” ...... 지구를 함께 공유하면서 (sym-chthonically), 그리고 함께 만들어가면서(sym-poetically) 우리는 친족을 만들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를 지구에 속한 것들과 함께 만들고 생성하고 구성해야만 한다. 나는 친족의 확장과 재구성이 모든 지상의 것들이 가장 깊은 의미에서 친족이라는 사실로 긍정된다고 생각한다. ...... 모든 생명체는 수평적으로, 기호학적으로, 그리고 계보학적으로 공통된 ‘살(flesh)’을 공유하고 있다. 조상들은 매우 흥미로운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분명하지만, 친족은 (우리가 가족이나 부족이라고 생각하는 것 바깥에 있기에) 익숙하지 않고, 기묘하고, 매력적이고, 능동적인 것이다. 작은 슬로건에 너무 많은 것을 부여했다는 사실, 나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노력해야만 한다. 지금으로부터 200년이 지나면 아마도 이 혹성의 인간종은 다시 20억이나 30억으로 줄어들고, 동시에 지금까지 목적만이 아닌 수단으로 간주되었던 다양한 인간 존재들과 다른 생명체들의 행복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아이들이 아니라, 친족을 만들자!’ - <인류세, 자본세, 플렌테이션세, 대지세 : 친족 만들기(Anthropocene, Capitalocene, Plantationocene, Chthulucene : Making Kin)>
<환경 인문학(Environmental Humanities)>(2015, 6번째 권)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 자연의 역사, 즉 지구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산업 자본주의체제와 거기에 포획된 인류의 힘을 우회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시대를 규정하려는 다양한 용어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인류세란 용어가 막연히 인류의 힘을 강조했다면, 자본세는 자본주의체제의 무한한 탐욕을 강조한다. 나아가 2014년 덴마크 오르후스대학에서 열린 학술대회에는 플래ㅐㄴ테이션세라는 용어가 제안된 적이 있다. 이 용어는 제3세계 국가에 다국적 자본들이 만든 수많은 플랜테이션들이 생태 파괴의 주범이라는 걸 강조한다. 플랜테이션이라고 불리는 기업화된 농장들은 생태 문제뿐만 아니라 심각한 인권 문제를 야기한 것으로 유명하다. 거의 노예제에 가까운 노동조건으로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을 착취했으니까. 플랜테이션세라는 용어는 전체 인간 세계가 하나의 자본주의체제로 묶이면서 선진국과 제3세계 국가 사이의 관계에도 ‘자본가-노동자’라는 관계가 관철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은 자신들의 공장을 제3세계 국가들로 이식하면서, 유럽에만 국환된 생태 문제를 전 지구적 문제로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인류세든 자본세든, 아니면 플래네이션세든 모두 지구 환경 파괴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견을 같이하는 용어다. 인류세가 인류의 반성을 촉구하고, 자본세가 자본주의체제의 폐단을 강조하고, 플랜테이션세가 자본의 세계화가 낳은 재앙을 경고한다. 이런 용어들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자본주의체제를 극복해 생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막연하기만 하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커스루센’이란 근사한 용어를 고안한 것이다.
2016년 저서 <곤경과 함께하기(Staying with the Trouble)>에서 그녀는 커스루센이란 용어가 ‘지상의’, 혹은 ‘대지의’라는 뜻의 희랍어 ‘크토니오스(khthonios)’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굳이 번역하자면 ‘대지세’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대지세는 하나뿐인 지구에 모든 생명체가 서로 공존하며 사는 시대,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종들이 풍요로운 앙상블을 이루는 시대”를 가리킨다. 여기서 대지세라는 용어가 인류세나 자본세, 혹은 플랜테이션세와는 다른 이유가 분명해진다. 그것은 산업자본주의 체제가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라 그걸 극복한 싣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인류세, 자본세, 그리고 플랜테이션세가 ‘구성적인(konstitutiv)’ 용어였다면 대지세는 ‘규제적인(regulativ)’ 용어였던 셈이다. 대지세는 산업자본주의시대를 해명하려는 용어가 아니라 산업자본주의체제를 극복하고 이루어야 하는 시대를 뜻하니까 말이다. 해러웨이가 대지세를 위한 실천적 강령을 제안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아이를 만들지 말고 친족을 만들어라!” 해러웨이의 요구를 친족이 아닌데 친족을 억지로 만들라는 이야기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녀에 따르면 “모든 지상의 것들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친족이고, ...... 모든 생명체를 수평적으로, 기호학적으로, 그리고 계보학적으로 공통된 ‘살’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는 공통된 살! 그건 지속적으로 살아 있는 지구를 가리킨다. 죽은 몸이나 혹은 무생물에게는 살이라는 용어를 쓰지는 않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들과 무관하게 지구가 살아 있다는 의미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생명체들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하고 있기에 지구는 살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친족을 확장하고 재구성하라고 요구한다. 인간은 이미 자연과 함께 살아가며, 지구라는 거대한 생태계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에서도 확인되는 인간중심적인 사유, 인간은 자연 바깥에 존재하며 자연을 지배하고 소유하는 존재라는 사유에서 벗어나라는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다른 종의 생명체뿐만 아니라 동료 인간을 지배하거나 소유하려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생며체는 수평적으로, 기호학적으로, 그리고 계보학적으로 공통된 ‘살’을 공유하는” 대등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녀가 왜 아이를 만들기보다는 친족을 만들라고 요구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내 아이’, 혹은 ‘우리 아이’라는 소유의식이 문제였던 것이다. 농업경제 시절 생겼단 오래된 인간중심주의다. 아이들, 특히 남자 아이를 선호한 이유는 그만큼 농사일을 감당할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문맥에서 부모와 자식은 양유고가 부양이란 교환관계에 묶이고, 이로부터 가족이란 배타적인 공동체가 형성된다. 이런 배타성이 어떻게 “공통된 살”을 공유하는 삶과 공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아이를 낳더라도 그 아이와 ‘친족’관계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내가 낳은 아이든, 남이 낳은 아이든, 아니면 나무늘보든 가시연꽃이든,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공통된 살을 공유하는 친족관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니까. 이렇게 친족이 많아지면 인간이 구태여 많은 아이를 낳을 이유가 있을까? 자기편을 많이 만들려고 노력할 이유가 있을까? 해러웨이가 꿈꾸는 대지세에서 인간의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친족관계를 이루는 것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삶은 충만함에 둘러싸일 테니까. 그래서 그녀는 대지세에 돌입한 지구의 미래를 조심스레 다음처럼 묘사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0년이 지나면 아마도 이 혹성의 인간종은 다시 20억이나 30억으로 줄어들고, 동시에 지금까지 목적만이 아닌 수단으로 간주되었던 다양한 인간 존재들과 다른 생명체들의 행복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275-281

친족이 된다는 것! 해러웨이의 칸트식 표현을 빌리자면 자연을 “단지 목적만이 아니라 수단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말 그것들과 친족이 되면, 어떻게 우리가 자본주의체제에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잉여가치 확보라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다수의 인간뿐 아니라 자연 전체를 수단으로 치부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체제니까.  282-283


거리를 두고 사람을 관조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삶에 뛰어드는 것!
후자는 전자가 줄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가르쳐준다. 그중 중요한 것 두 가지만 언급해보자. 첫째, 타인들의 삶에 뛰어들면 누구나 자신의 과거 관계를 자각하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 그 누구도 백지 상태에서 새로운 관계에 돌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그는 자신처럼 타인들도 자신만의 고유한 관계와 역사를 전제한다는 걸 알게 된다. 타인을 이해하려면, 첫인상이나 직업 등 그에 관한 표면적인 정보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그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리고 과거에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그 역사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외국에 가야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걸, 나아가 자신이 특정 삶의 형식에 따라 살았다는 걸 자각하는 법이다. 결국 타인들의 삶이 낯설어 보였던 이유는 우리 자신이 특정 사회관계에 적응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낯선 도시를 관광하는 것보다 그곳에 사는 것이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낯선 사람들이 내면화한 관계와 우리 자신이 내면화한 관계가 우리 자신이 내면화한 관계가 모두 드러나니 말이다.  290-291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영위되는지에 관한 진실 말이다. 이렇게 되물어보자. 지금 우리의 일상적 삶은 관광객이 아니면서도 관광객처럼 영위되고나 있지 않은지.  292-293

이제 생각해보자. 직장에서 우리는 관광객이지 않은가? 자신이 다니는 회사가 어떻게 작동하며 무엇을 생산하는지, 그리고 그 상품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고민하지 않으니까. 심지어 우리는 직장 동료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잇는지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업무상 관계로만 연결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관광객의 달러나 신용카드처럼 월급은 직장관계의 유일한 혈액이 된다. 가족들과 함께할 때도 우리는 관광객이지 않은가? 시부모가 친정부모도 심지어는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식들을 고립된 개인들로 식별하고 관조하고 있으니까. 돈과 선물이 가족관계를 유지하는 가느다란 끈이 되고 만다. 편의점이나 카페, 극장 등에 들를 때도 우리는 관광객이지 않은가? 계산을 해주는 젊은 이들이나 안내를 해주는 젊은이들의 내면과 그들의 역사를 읽으려고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돈을 받은 만큼 그에 어울리는 서비스를 행해야만 하는 사람들로 보일 뿐이니까. 여기서는 돈과 신용카드가 유일한 연결 줄이 된다.
여기에 스마트폰까지 가세하면 우리의 관광객 모드는 그야말로 정점을 찍게 된다. 파리의 시위 현장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는 것처럼, 이제 액정화면은 마치 영화를 보듯 세상을 관조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댓글을 달면서 사회에 참여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들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에 공감하고 악당을 욕하는 행위와 어떻게 다른가? ‘사변적 관조’가 아니라 ‘감성적 활동’이다. 관광객적 인식이 아니라 주체적 인식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모두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규정되어 있다는 걸 자각할 수 있다. 소망스럽고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모색하려면, 우리는 먼저 자신이 어떤 관계에 포획되어 있는지 봐야 하는 것 아닐까?  293-294

관계의 변화가 바로 역사의 동력이다. 아니 더 단호하게 말한다면 관계의 변화 자체가 역사라고 할 수 있다.   294

그렇다고 관계와 역사를 파악하는 일이 만만하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둘 사이의 관계를 포착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처음에는 순간적으로 고립된 두 개체만 보일 것이다. 한 사람은 안경을 착용한 30대의 젊은 여성으로 청바지를 입고 있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리듬을 타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편안한 차림의 캐주얼 복장을 한 40대 초반의 남성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다. 여기까지가 포이어바흐의 직관적 유물론이 적용되는 지점이다. 그렇지만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나아가 두 사람이 각각 과거에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를 아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아주 천천히 두 사람을 관찰해야만 한다. 다행스럽게도 남성이 손을 들어 여성의 어깨를 감싼다면, 우리는 쉽게 두 사람이 연인관계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둘은 언제 어디서 만났을까? 둘은 왜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연인일까, 아니면 부부일까? 그것도 아니면 불륜관계일까? 벤치의 관찰마으로 해명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다. 그들을 계속 따라다니며 관찰해야 하고, 나아가 그들이 남긴 과거 흔적들을 찾아 헤매야만 한다.  294-295

‘3P의 삼각형’을 기억해보라. 권력(power)은 재산(property)과 가난(poverty)을 통해서 형성되고 재산과 가난 사이, 즉 부유한 소수와 가난한 다수 사이의 위계를 지키는 기능을 한다.  297

1863년 1월 1일 당시 미국 북구 비역의 지지를 받던 대통령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은 <노예해방 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을 발표한다. 1861년 4월 12일 시작된 미국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이 북부 지역이 승리로 끝나리라는 확신을 링컨이 피력한 셈이다. 흔히 남북 전쟁은 인권과 자유의 전쟁이고, 링컨은 민주 투사로 기억된다. 그렇지만 남북전쟁의 이면은 인궈느 자유, 혹은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남북전쟁은 산업자본주의체제에 맞게 값싼 노동자가 필요했던 미국 북부 지역과 목화농장을 위해 400만의 흑인 노예가 필요했던 미국 남부 지역 사이의 충돌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고대사회와 부르주아사회가 기이하게 병존했던 신대륙 국가 미국은 1965년 4월 9일 북부 지역의 최종 승리로 400만 흑인 노예를 흑인 노동자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해방된 흑인 노예뜰은 이미 노예로 태어난 노예 1세대의 까마득한 후예들에 지나지 않는다. 1619년 처음으로 흑인 노예 19명이 영국 식민지였던 북미대륙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에 들어온 이후로 수많은 노예선이 엄청난 흑인 노예를 실어 날랐다. 조상들의 땅 아프리카는 상사도 할 수 없는 그저 까마득한 전설의 땅에 지나지 않았기에, 해방된 흑인들 대부분은 그곳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가진 것이 몸뚱어리밖에 없었던 그들로서는 노동계급으로, 그것도 쵷ㅎ하의 노동계급으로 편입되었다.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선택지였던 것이다.
관계의 변화가 역사의 핵심이다! 문제는 그 관계가 억압적 관계라는 데 있다. BC 3000년부터 지금까지 지배계급은 억압의 양상을 변화시키면서 억압적 관계라는 본질은 그대로 유지해왔다. 역사의 발전을 외치는 모든 지식인이 기본적으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그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들은 과거보다 지금이 낫고, 지금보다 미래가 낫다는 진보의 이념을 표방하기 때문이다. 노예제를 극복하고 농노제가 들어온 것도 진보이고, 농노제가 사라지고 자본주의체제가 들어온 것도 진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소수 지배계급과 다수 피지배계급으로 구성된 근본적 억압구조는 조금도 변한 적이 없지 않은가. 단지 지배계급이 노예주에서 영주로, 그리고 자본계급으로 그 스타일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 노예는 목줄에서 벗어났지만 땅에 묶인 농노가 될 수밖에 없었고, 땅에 묶인 농노는 돈에 목을 매는 노동자가 되었을 뿐이다.  300-301

3P의 삼각형이 노예 재의 얼굴로 나타나자, 그 자유정신은 노예제와 맞서 싸웠다. 로마제국의 노예제에 도전했던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Spartacus, BC 111?~71)와 6만의 해방된 노예들이 바로 그들이다. 3P의 삼각형이 농노제로 변형되자, 이번에 그 자유정신은 농노제와 맞서 싸웠다. 1534년 에서 1535년까지 제빵사 얀 마티스(Jan Matthys, 1500?~1534)와 재단사 얀 반 레이덴(Jan van Leiden, 1509~1536) 등이 이끄는 재세례파가 독이 ㄹ뮌스터에 억압이 없는 공동체, 즉 코뮌을 구성해 봉건체제와 맞서 싸웠던 것이다. 3P의 삼각형이 이번에는 자본주의체제로 변신하자, 다시 자유정신은 이 자본주의체제와의 싸움에 목숨을 걸었다. 1871년 3월 18일에서 5월 28일까지 블랑키(Louis Auguste Blanqui, 1805~1881)의 정신으로 무장한 파리 시민들이 파리 코뮌으로 부르주아 정권과 맞섰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여기서 조금의 오해도 있어서는 안 된다. 스파르타쿠스 군단은 노예제 대신 농노제를 원했던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얀 마티스와 얀 반 레이덴이 농노제 대신 자본주의체제를 원했던 것이 아니다. 파리코뮌 전사들 역시 자본주의체제 대신 스탈린의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모두 원했던 것은 코뮌, 즉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였을 뿐이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스파르타쿠스가 1871년 파리에 있었다면 자본주의체제와 맞서 싸웠을 것이고, 얀 마티스와 얀 반 레이덴이 BC 72년 로마에 있었다면 자유군단에 속했을 것이고, 블랑키가 1535년 독일 뮌스터에 있었다면 봉건체제의 포위를 뚫으려고 분투했을 것이다.  301-303

노예제는 노예가 스스로 자유인이 되었을 때 소멸되는 것이지, 누군가가 자유를 부여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유는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니까. 남이 허락한 자유는 언제든 바로 그 사람에 의해 취소될 수 있다. ... 자유인은 스스로 자유로워져야만 한다. 그래야 누군가 자유를 뺏으려 할 때 그에 맞서 싸울 수 있으니까.  308

포이어바흐! 그는 관계도, 그리고 역사도 인식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저 자신 앞에 있는 것을 관조했던 순진한 철학자였다. 그가 로마시대에 살았다면 그는 노예는 노예로, 귀족은 귀족으로 보았을 것이다. 노예는 귀족의 발을 씻겨주고, 귀족은 역사와 삶을 논하는 풍경을 그저 당연한 이치로 여겼을 것이다. 주인뿐만 아니라 로마제국과 맞섰던 스파르타쿠스를 보았다면, 그는 이걸 일회적 사건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사실 노예가 주인에게 반기를 드는 사건은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 권력이 귀족들의 노예 소유권을 공권력으로 확실히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순종하는 노예와 자애로운 귀족 사이의 조화와 평화, 그리고 질서는 이렇게 억압적으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는 화려한 외양을 자랑하는 로마 제국의 피 묻은 뼈대, 즉 고대사회의 사회적 관계와 그 역사를 백일하에 폭로한 사건이다. 포이어바흐는 스파르타쿠스를 통해 고대사회 전체를 지탱했던 억압구조를 간파했어야 했지만, 불행히도 그는 그것을 일시적 일탈로만 보았으리라.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가 “유물론자인 한 포이어바흐는 역사를 다룰 수가 없고, 역사를 고찰하는 한 그는 결코 유물론자가 아니다.  ... 마르크스의 이야기처럼 포이어바흐의 직관적 유물론은 “역사와는 완전히 결별되어”있는 절름발이 유물론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309-310

불행한 것은 봉건사회에 태어났어도 직관적 유물론자로서 포이어바흐의 길은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는 점이다. 귀족의 거대한 농장에서 농노들이 올리브를 수확하는 장면이나 아니면 귀족의 저택에서 주인의 발을 씻겨주는 농노의 부인의 모습이 그의 눈에 조화롭고 평화로운 풍경화처럼 보였을 것이고, 여우 사냥을 즐기러 나온 영주를 보고 잠시 농사일을 멈추고, 경의를 표하는 농노의 모습이 아름다운 풍경화로 들어왔을 테니 말이다. 물론 간혹 소작료에 저항하는 농노도 나오겠지만, 포이어바흐는 이것도 일시적 일탈로 치부했을 것이다. 영주와 농노를 관조하는 그에게 땅을 미리 독점해 무위도식할 수 있는 영주의 계급성이 보일리 없으니까. 직관적 유물론의 맹점은 부르주아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미 부르주아사회로 돌입한 19세기 부르주아국가 독일에서 태어났기에 포이어바흐의 눈에는 도자기공장, 자기 장인과 아내와 같은 자본계급, 그리고 노동자들이 평화로운 풍경화처럼 들어온다. 아내와 자신은 가까운 냇가에서 돗자리를 깔고 일몰을 응시하고 도자기공장에서 노동자들은 휴식시간에 해맑게 대화를 나눈다. 혹은 그가 공장에 들르기라도 하면 그곳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밝은 모습으로 자신에게 인사는 건넨다. 물론 그 자신도 노동자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는 걸 잊지 않는다. 자본가는 자본가이고 노동자는 노동자일 뿐이고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수탈관계를 볼 수 없기에 그의 마음은 편하기만 하다. 파업이라는 이례적인 사건이 벌어져도, 포이어바흐에게 있것은 노동자들의 일시적 일탈로 보일 뿐이다. 그는 노동자의 파업이 부르주아사회의 억압적 구조가 드러나는 징후라는 걸 알 수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으니까. 세계를 관조했던 대가는 이렇게 치명적이다. 자신도 모르게 포이어바흐는 부르주아사회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310-311

실천이 아니라면 삶에서 남는 것은 과조일 뿐이다.  312

‘낡은 유물론의 입장(Standpunkt)은 ‘부르주아사회’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장은 ‘인간사회(menschliche Gesellschft)’ 또는 ‘사회적 인간(gesellschaftliche Menschheit)’이다. -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10
...
마르크스의 “사회적 인간”이란 개념. .. 인간 사회에서 모든 인간은 사회에 참여하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고, 모든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운명을 타인에게 맡기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결국 “인간사회”는 “사회적 인간들”의 공동체라는 생각이다.  312-313

스파르타쿠스 군단이, 뮌스터코뮌이, 파리코뮌이 원했던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 혹은 마르크스의 새로운 유물론이 서고자 했던 인간사회는 단호하게 분업체계와 배타적 활동을 거부하는 공동체다.  318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가 지향하는 두 가지 원칙만 확인하면 되니까. 첫째, 사회가 생산 전반을 통제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자본가 한 사람이 생산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 전체가 생산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는 그 일을 언제든지 멈출 수 있는 자유를 전제한다는 점이다. 생산의 사회성과 노동의 자유! 인간사회, 혹은 사회적 인간의 두 다리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가 “참된 현실적 공동체(der wirklichen Gemeinschaft) 속에서, 각 사람들은 그들의 연합(Assoziation) 속에서, 그 연합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자유(Freiheit)를 획득하게 된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319


BRIDGE - 다시 불러보는 인터내셔널의 노래

<인터내셔널 찬가>
일어서라!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이여!
일어서라! 기근의 죄수들이여!
이성은 화산처럼 요동친다.
이것은 종말의 분출이다.
과거를 백지로 만들자.
노예가 된 대중들이여! 일어서라! 일어서라!
세계의 토대가 바뀌고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다.

<코러스 ; 마지막 싸움이다.
함께 모이자, 그리고 내일
인터내셔널은
인류가 되리라.>

최상의 구원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도 아니고, 케사르도 아니고, 호민관도 아니다.
생산자들이여! 스스로를 구하라.
공동의 구원을 포고하라!
도둑이 자기가 먹은 것을 토해내고
정신이 자기 감옥에서 풀려나올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풀무질을 하고,
뜨거울 때 쇠를 두드려라.

<코러스>

국가는 억압하고, 법은 기만하고
세금은 피 흘리게 한다, 불운한 자들을.
어떤 의무도 부유한 자에게 부과되지 않고
가난한 자의 권리는 공허한 말일 뿐.
감시는 충분히 힘들 만큼 견뎠다.
평등은 다른 법을 원한다.
의무 없이는 권리도 없다고 새로운 법은 말한다.
평등하게 권리 없이는 의무도 없다고.

<코러스>

찬양에 몸을 숨긴
광산의 왕들과 철도의 왕들!
그들은 지금까지 노동을 훔치는 일 외에
무슨 일을 했었나!
도둑들의 견고한 금고 안에는
노동이 창조했던 것들이 들어가 있다.
그 도둑들에게 그걸 되돌려주라고 명형하자.
민중들은 단지 자기 몫만 원할 뿐.

<코러스>

왕들은 우리를 연기에 취하게 했다.
우리 안의 평화, 폭군에 대한 전쟁!
군대들이 파업해,
진압을 포기하고 서열을 해체하도록 만들자!
만일 그들이 완강히 버틴다면, 이 카니발들은
우리를 영웅으로 만들 것이고,
그들은 곧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총탄이
우리 장군들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코러스>

일꾼들이여! 농민들이여! 우리는
노동자들의 가장 큰 부분이다.
대지가 인간들에 속할 때만.
게으른 자는 다른 곳에 머물 것이다.
얼마나 많은 우리의 살을 그들은 소진시켰는가?
그러나 성직자들, 고리대금업자들이
어느 날 사라진다면,
태양은 언제나 항상 빛나리라.

<코러스>

- <인터내셔널 찬가> (1871)  323-325



역사철학 2강 - 파리코뮌을 보아버렸던 시인 랭보

70여 일 짧은 시간 동안 유지된 파리코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찬란했던 순간에 랭보는 코뮌의 핑크빛 후광을 받은 파리와 파리 시민들을 가장 자연적으로 그리고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했던 겁니다. 그러나 70여 일이 지나 파리코뮌이 괴멸되고 과거의 위계 질서가 복원된 뒤 돌아보면, 1881년 3월 18일에서부터 5월 28일까지 존속했던 그 찬란했던 시간은 마치 꿈인 것처럼, 마치 상징인 것처럼, 마치 초현실적인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냥 간단히 이렇게 정리해보죠. 파리코뮌 시기에 랭보의 시는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자연적인 것이었다고, 그렇지만 그 찬란했던 시기가 지나고 나자 이제 그의 시는 상징적이고 초현실적인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입니다. 이런 착시효과는 현재 우리의 의식에도 그대로 적용되죠. 파리코뮌의 인문주의나 민주주의에 온몸으로 공명하는 독자라면 랭보의 시는 심장을 바로 뛰게 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감동을 바로 전달할 겁니다. 반대로 권위적인 정치질서나 신자유주의로 노골화된 자본주의체제에 적응한 독자라면 래보의 시는 상징적이고 초현실적인 것으로, 그만큼 난해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간신히 머리로만 이해될 수 있을 겁니다.  343

지배계급의 눈치를 보면서 피지배계급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는 순간, 문학은 그리고 시는 억압체제에 대한 찬가가 됨.  352

‘주관적 시’는 객관에 대한 투철한 인식 없이, 그냥 주관이 백일몽을 꾸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강철 덩어리가 물에 둥둥 뜨는 몽상에 빠지고 희희낙락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죠. 반면 ‘객관적 시’는 실현 불가능한 백일몽이 아니라, 세상을 변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객관적 시’는 강철의 속성들을 정확히 알고, 그 속성을 어기기는커녕 그걸 이용해 물에 뜰 수 있는 강철 배를 설계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죠.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객관적 시’가 가능하려면, ‘객관(=대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만일 이런 인식이 없다면 아무리 ‘객관적 시’를 썼다고 해도 그것을 바로 ‘주관적 시’로 전락할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객관(=대상)’을 정확히 인식한 사람이 없다면, ‘객관적 시’는 불가능한 법입니다. 바로 이것이 랭보가 “저는 시인이 되고 싶고, 스스로 견자(見者, voyant)가 되려고 분투하고 있다”(<1871년 5월 13일 이장바르에게>)고 말했던 이유입니다. 견자는 글자 그대로 보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내 의지나 바람에 따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나 바람을 좌절시키면서 내 앞에 주어진 것을 봐야 합니다. 만일 내 의지나 바람, 혹은 감정에 따라 본다면, 그것은 객관적으로 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주관적으로 본 것에 지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대상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지 않더라도 대상이 보라고 강요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 바로 그가 견자입니다. 결국 견자가 되려면, 우리는 이미 훈육되어 익숙한 사유나 감정들, 혹은 우리 내면에 이미 각인되어 작동하는 견해나 감정, 그리고 의지를 해체해야만 합니다. 랭보가 견자가 되는 방법으로 “모든 감각들의 착란”을 이야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354

이것만 보고 저것은 보지 말라고 하는 체계는 우리를 훈육하고, 그 결과 우리는 정말 눈에 보이는 것마저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니 보지 말라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에게는 불안감과 불쾌감이 엄습할 겁니다. 보이는 대로 보려면, 아니 정확히 말해 이렇게 보라고 강요하는 대상을 제대로 보려면, 우리는 감각의 질서를 규정하는 지배적인 사유체계와 가치체계를 전복해야만 합니다. 결국 견자가 된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주체로 태어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스스로를 노예로 자처했던 노동자들이 당당히 주인이라고 선언했던 것이 파리코뮌이라면, 체제가 강요하는 감각들의 질서를 뒤죽박죽 만드는 것이 바로 랭보의 견자였던 셈입니다. 감각들의 착란을 통해 견자가 되었을 때, 그가 보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가 보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바로 이것이 랭보가 말한 ‘미지(l’inconnu)’입니다 한국어로 ‘미지의 것’으로 번역된 프랑스어 ‘랭코뉘(l’inconnu)’는 이외에도 ‘보잘것없는 것’이나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사실 무언가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는 ‘미지’라는 뜻보다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이란 의미가 훨씬 더 랭보가 말한 ‘랭코뉘’의 뜻에 가까울 듯합니다.  355

랭보가 제안했던 ‘견자의 미학’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자유로운 주체, 즉 견자가 되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을 보게 된다고 말입니다.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을 보게 된 견자가 그것을 언어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시인이 될 수 있습니다. 랭보가 말한 ‘객관적 시’는 바로 이렇게 탄생하게 되지요.  356

그(랭보)에게 “시인은 진실로 불의 도둑”. 제우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불을 건네준 프로메테우스! 시인은 바로 프로메테우스 같아야 한다는 겁니다. 권력자나 지배계급의 불이 힘이 있는 이유는 다수 피지배계급에게 불이 없어서 입니다. 어둠 속에서 공포와 탄식의 삶을 피지배계급이 영위하는 것도 지배계급이 불을 독점했기 때문이죠. 프로메테우스처럼 그 불을 훔쳐 피지배계급에게 가져와 암흑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들이 갈 길을 명료히 보도록 도와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의 소임이자 자부심의 원천이죠. “인류, 심지어는 동물까지도 모두 짊어지는 것!”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가 그리고 1871년 랭보가 감당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357-358

랭보는 관료들과 글쟁이들을 작가, 창작자, 시인과 구별합니다. 그에 따르면 기존의 규칙, 기존의 이성, 혹은 기존의 사유에 따라글을 쓰는 사람들이 바로 관료들이나 글쟁이들입니다. 그러나 감각들을 착란시켜 기존의 규칙, 이성, 사유를 전복시켜서 감각들의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글들이 출현할 수 없는 법이지요. 바로 이래야 진정한 시인, 혹은 진짜 시인이 탄생하는 것 아닌가요. 반대로 가짜 시인도 존재하죠. 그것은 관료처럼 글을 쓰는 시인들, 과거 위대한 시들에서 규칙과 테크닉을 축출해 그에 따라 시처러 ㅁ보이는 시들을 쓰는 시인일 겁니다. 진정한 시인은 이런 식으로 탄생할 수 없습니다.  358-359

기존 사유에서 해방된 감각, 혹은 착란된 감각으로 세계를 느끼는 사람이 견자라면, 이렇게 느낀 세계에 새로운 언어를 부여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작가이자 창작자, 그리고 랭보의 경우에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각들의 착란으로 기존 사유가 붕괴됩니다. 자유와 해방은 바로 여기서 가능해지는 셈이지요. 바로 이 해방된 감각들의 힘으로 견자는 세계를 보게 됩니다.  359

관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주관적 시’를 쓰는 시인들에게 견자의 삶이나 시는 무언가’비규범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고, 당연히 저주받고 모욕당하기 쉽지요.  359-360

파리코뮌을 경험했던 사람들이나 지금 새로운 코뮌을 꿈꾼느 사람들의 눈에는 랭보의 작품은 너무나 규버적이고 쉬워 보일 겁니다. 반대로 파리코뮌을 부정하거나 애써 회피하면서 자본, 국가, 종교에 포획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면 랭보의 시는 비규범적이고 난해해 보일 테죠.  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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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종교적인 것과 관조적인 것을 넘어서


역사철학 1장 - 붉은 피로 지켜낸 파리코뮌

블랑키.
1885년 출간된 <사회적 비판 (Critique Sociale)> 두 번째 권에 “자본가의 기생이 대중들의 빈곤을 낳는 원인이다.” ... 항상 생산수단 독점은 폭력수단 독점과 함께하는 법입니다. 결국 피억압자가 억압자의 힘을 압도할 수 있는 ‘힘(force)’을 가지지 않는다면, 정의와 평등은 그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생산수단 독점에 맞서 싸우면서 폭력수단 독점과는 싸우지 않겠다는 투쟁, 즉 간디식 비폭력 투쟁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승리야 가능하겠지만, 이런 투쟁이 현실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을 테니 말입니다. 47

파리코뮌 시기 혁명가 트리동(Gustave Tridon, 1841~1871)의 책 <에베르주의자: 역사의 재난에 맞서는 탄식(Les Hebertister: plainte contre une calomnie de I’Histoire)>에 블랑키가 쓴 서문입니다.
‘승리는 옳은 자(le droit)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승리가 없다면 옳은 자는 더 이상 옳을 수 없게 되고, 대천사의 발톱 아래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탄처럼 될 테니 말이다.’ - <서문> (1864) 49

19세기의 파리는 단순히 프랑스의 수도만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의 수도였죠. 이 도시를 ‘악의 꽃(Les Fleurs)’이라고 느꼈던 시인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보들레르(Charles Pierre HBaudelaire, 1821~1867)입니다. ‘악의 꽃’은 매춘부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돈이 있어야 품을 수 있는 존재가 매춘부인 것처럼, 자본주의의 수도 파리도 돈이 없다면 향유할 수 없는 ‘악의 꽃’이었던 겁니다. 51

어떤 것을 정의하려면 그것에 대립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법입니다. 73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생산수단을 가진 자가 그렇지 못한 자를 지배한다는 정치경제학적 진리를 말입니다. 81

생산수단, 특히 토지나 자본을 공동 소유하는 것이 원칙인 사회, 바로 그것이 코뮌입니다. 83

자유를 되찾은 사람에게 항복은 죽음보다 끔찍한 일이죠. 85



정치철학 1장 - 종교적인 것에 맞서는 인문정신

자기소외((Selbstentfremdung), 혹은 소외(entfremdung)라는 개념. 이는 자신이 만든 것이 자신에게 낯선 것으로 다가오는 현상을 가리킨다. 103

무언가를 긍정한다는 것은 그것을 다른 걸로 바꿀 수 없다는 의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긍정이 항상 단독성의 긍정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
니체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개체, 그리고 세상을 “존재하는 유일한” 것, 즉 단독적인 것으로 긍정하려고 한다. 119

모든 지배와 억압의 논리 이면에는 단독성을 특수성으로 치환하는 작업이 수행된다는 걸 잊지 말자. 120

불멸하는 영혼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몸을 경멸하게 된다. 돈이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상품으로 팔리는 굴욕을 겪는 것처럼, 혹은 인간, 노동자, 학생, 여자, 남자, 유대인, 한국인, 일본인 등등 일반 개념이 등장하면서 단독적인 개체들은 특수한 개체들로 분류되어 지배되는 것처럼. 121

신으로부터 창조행위를 빼앗은 인간, 억압된 창조력을 폭발시키는 인간을 니체는 위버멘쉬라고 부른다. ... 위버멘쉬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을 뜻하는 ‘멘쉬(mensch)’가 아니라 ‘넘어선다’는 의미의 ‘위버(Uber)’다. 124


고고학에 따르면 농업혁명이 일어나기 전 인류에게는 전쟁도 없었고, 종교도 없었다. ... 종교나 정신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수렵채집 시기에는 ‘우월(superiority)과 열등(inferiority)’이라는 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들소 사냥에 성공했다고 해도 인간은 자신이 들소보다 우월하다고 느끼지 않았고, 반대로 사냥 중에 들소의 뿔에 받혀 죽어가면서도 인간은 들소보다 자신이 열등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야생 사과를 딸때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자신이 우월하고 그 사과가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한마디로 말해 자연에 대해 인간은 우월이나 열등에 대한 의식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애니미즘으로 상징되는 이런 자연관은 그대로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한 인간은 다른 인간보다 약할 수는 있지만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반대로 다른 인간보다 강할 수는 있지만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26-127

BC 8000년 즈음 농업혁명이 발생하면서 모든 것이 변한다. 분명 농업혁명이 수렵채집 시기보다 더 큰 풍요와 안정을 가져다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 잉여 생산물의 증가는 인구 증가와 인구 밀집을 낳았고, 이것이 인간을 기아와 질병에 노출시켰다. 127

농업시대에 들어서면서 생산수단을 가진 자가 그렇지 않은 자를 지배하고 수탈하는 억압과 착취 형식이 발생한 것이다. 129

농경생활에 들어오면서 인간에게는 ‘우월’과 ‘열등’이란 의식이 발생한다. 129

농경생활이 진행되면서 전체 우주는 우월과 열등의 질서로 재편되고 만다. 마침내 ‘신-인간-자연’, 조금 구체화하면 ‘신-지배자-피지배자-자연’이란 위계질서가 탄생한 것이다. 130-131

마르크스는 국가나 사회가 ‘전도된 세계’라고 단언. 전도된 세계라는 것은 제대로 서 있는 세계가 아니라 뒤집혀 있는 세계라는 의미다. 생부지의 사람 10명이 식사를 하려고 한다. 9명이 짜장면을, 나머지 1명은 김치찌개를 먹고 싶었다. 9명은 중국집에 가고 나머지 1명은 한식집에 가면 된다. 이것이 정상적인 세계, 혹은 제대로 서 있는 세계다. 그런데 이들 10명은 모두 한식집에 가서 김치찌개를 먹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9명은 1명의 압도적 힘에 굴복하고, 그 결과 원하지 않은 음식을 먹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도된 세계다. 154-155

‘약하다’는 의식과 ‘열등하다’는 의식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자신이 약하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은 차근차근 강해질 준비를 하거나 혹은 자신을 지배하는 사람이 약해질 때를 호시탐탐 노릴 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이 열등하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은 그저 우월한 사람이 자신을 더 아껴주기를 기대할 뿐이다. 열등한 사람들이 언제든지 최고로 근사한 지배자를 상상하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의 고난을 속속들이 아는 지배자, 자신의 고난을 덜어주려는 의지를 가진 지배자, 그래서 하염없이 자신을 사랑하는 지배자를 꿈꾸게 된다. 바로 이때 신은 탄생한다. 마르크스가 “이 국가, 이 사회는 전도된 세계이므로 종교, 즉 전도된 세계의식을 생산한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계보학적으로 생각해보자.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한다. 그 지배를 영속화하기 위해, 혹은 약한 자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지배자는 피지배자의 내면에 열등의식을 각인시킨다. 155-156

‘종교에 대한 투쟁은 간접적으로 정신적 향료로 종교가 가지고 있는 저 세계, 즉 피안(jene Welt)에 대한 투쟁이다. 종교적 고통은 현실적 고통의 표현인 동시에 현실적 고통에 대한 저항이다. 종교는 억압된 자들의 한숨이자, 심장 없는 세계에서의 심장이고, 영혼 없는 상황에서의 영혼이다. 한마디로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민중에게 환각적 행복을 낳는 종교를 폐기하라는 이유는 민중으로 하여금 현실적 행복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민중에게 자기 삶의 조건에 대한 환각을 포기하라고 요청 한다는 것은 환각을 필요로 하는 조건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 비판은 태생적으로 종교가 후광이 되는 눈무르이 골짜기에 대한 비판일 수밖에 없다.’ - <서문> <헤겔 법철학 비판> (1843). 158

마음껏 사유하고 마음껏 의지하고 마음껏 사랑하는 격조 높은 삶, 인간 일반의 본질을 실현하는 근사한 삶을 살지 못해서 인간이 종교를 만들고 그것을 믿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차안에서 사는 삶이 너무나 불행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가 파는 아편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해 피안에서의 작은 행복이나마 꿈꾸었던 것이다. ... 마르크스가 “민중에게 환각적 행복을 낳는 종교를 폐기하라는 이유는 민중으로 하여금 현실적 행복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 이유다. 환각적 행복에 취해 있다면, 민중은 현실적 행복을 얻으려는 투쟁에 나설 수 없으니까. 1559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 종교는 단지 인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환상적인 태양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피안(Jenseits der Wahrheit)이 사라진 뒤에, 차안의 진리(Wahrheit des Siesseits)를 확립하는 것은 역사의 임무다.’ -<서문> <헤겔 법철학 비판> 162


‘열등’과 ‘우월’과 관련된 감정이 종교적 감정이라면, 가장 최고의 종교적 감정은 바로 자본주의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168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불교든 세게 종교는 하늘, 고독, 여행, 그리고 무역과 함께하는 종교일 수밖애 없다. 결국 숙명적으로 세계 종교는 자본주의와 같은 혈족이었던 셈이다. 즉 화폐경제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면서 수많은 지역 종교들은 자의 반 타의 반 고사와 괴멸의 길을 걸어갔다. 185

18세기와 19세기 영국 도처에서 일어났던 ‘인클로저(enclosure)’, 즉 ‘울타리 치기’와 ‘고지대 청소’라고 번역할 수 있는 ‘하이랜드 클리어런시스(highland Clearances)’에 주목해야 한다. ‘울타리 치기’는 소수의 자산가들이 과거 공유지엿던 곳에 울타리를 쳐서 그곳을 사유지로 만드는 과정을 말한다. 엄청난 양의 공유지가 사라지자, 수많은 빈농들은 이제 더 이상 땔감을 얻거나 사냥을 하거나 소나 양을 키울 수 없게 된다. 당시 ‘울타리 치기’를 시행했던 소수의 기득권층들은 국가로부터 법률적 보호를 받았지만, 생계의 위험에 노출된 다수의 농민들은 공장이 있는 대도시로 몰려가 저임금노동자로 전락하고 만다. 인클로저 법인이 영국 국회를 처음으로 통과했던 때는 1773년이었다. 농민을 임금노동자로 만들 필요가 더 많아지자, 1845년부터 1882년까지 국회를 장악하고 있던 기득권층들은 인클로저 법안을 자그마치 15번이나 개정하게 된다. 그만큼 당시 지배계급들은 농민들을 프롤레타리아로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고지대 청소’는 영국 북부 고지대에서 농사를 짓던 소작농들을 깨끗이 청소하는 과정을 말한다. <자본론>에 등장하는 서덜랜드 공작부인(the Duchess of Sutherland, 1765~1839)이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녀는 영국군을 고용해 1만 5000명의 소작농을 내몰고 80만 에이크의 땅에 양 13만 1000마리를 방목한다. 1마 ㄴ5000명의 고지대 농민들도 ‘울타리 치기’로 대도시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던 농민들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고, 아울러 고지대에서 키운 양털들은 맨체스터나 글래스고 등에서 번성했던 직물산업의 원료로 공급된다. 191

체제의 대변인들은 18세기에도, 19세기에도, 20세기에도, 그리고 지금 21세기에도 동일한 이야기를 반복한다. 자본주의 이후 인간의 삶은 생각하지 못할 만큼 좋아졌다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데 이로운 자료들을 알아볼 만큼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기에, 예나 지금이나 그들은 이런 자료들을 토대로 자본주의를 옹호하기에 여념이 없다. 첫째, 노예제도나 농노제도가 사라지면서 인격을 긍정하는 사회가 열렸다. 둘째, 사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않았던 폐쇄적인 공동체가 사라지면서 개방성이 확산되었다. 셋째, 장인이 되려는 사람들에게 도제 생활을 강요했던 장인공동체가 소멸되고 평등하고 보편적인 교육제도가 정착되었다. 넷째, 여성들의 삶을 옥죄던 가부정적 가족 질서도 힘을 잃게 되면서 여성이 해방되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자기 찬양도 이 정도면 거의 정신분열 수준이다. 이 안에는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피로 얼룩지고 불길에 타오르는 문자”로 기록될 수밖에 없는 강압과 수탈의 역사가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 농민에게 지대를 받는 것보다 그들을 노동자로 만들어 착취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걸 지배계급이 자각했을 뿐이다. 192-193

산업자본주의체제가 정착될 때마다 ‘울타리 치기’나 ‘고지대 청소’와 같은 정책이 항상 수반되었다는 사실이다. ... ‘울타리 치기’와 ‘고지대 청소’ 정책은 스탈린체제의 경우 ‘집단농장’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으로, 그리고 중국이나 인도, 브라질의 경우 지역공동체 해체 정책으로 반복되었던 것이다. 195

‘자유로운 노동자(Freie Arbeiter),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자, 그러므로 노동을 파는 자가 있다.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뜻이다. 즉 노예와 농노처럼 그들 자신이 직접 생산수단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에서 자유롭다는 의미이고, 또 자영농민의 경우처럼 그들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즉 생산수단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유롭다는 의미다.’ - <자본론> 1권 (1867) 197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에게 자유란 아주 제약된 것임을 폭로한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어느 자본가에게 팔 것인지를 결정할 자유만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이것은 전혀 자유가 아니다. 자기 노동력을 판매할 수도 있고 판매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는 노동자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을 자유는 노동자들에게 단지 자살할 자유만을 의미할 뿐이다. 200

자본주의가 단순한 억압체제를 넘어서는 지점은 그것이 종교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노동력을 팔아야만 생활할 수 있는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를 양산한 주범이면서도, 자본주의체제는 노동계급마저 자본을 숭배하도록 유혹할 수 있다. 돈은 피안의 막연한 행복보다 차안의 행복을 보장한다는 악마의 속삭임이다. 201

농업경제가 지배하던 시절 제정신을 가진 농민들은 땅을 독점하는 억압체제에 저항했고, 산업경제가 지배하던 시절 정상적인 노동자들은 돈을 독점한 체제와 맞서 싸웠던 것이다. 이와 달리 자본교도로 거듭난 노동자의 안중에는 억압이 없는 사회, 즉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의 속내에는 지배자가 되려는 욕망만이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교도는 자본가로부터 착취당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자본가가 되려는 뒤틀린 욕망을 가지고 있다. 맞는 사람이 되기보다 때리는 사람이 되겠다는 말초적 생각이니, 이것보다 왜곡된 욕망이 어디에 있겠는가. 자본교가 교세를 확장할수록, 자본주의의 억압구조는 그만큼 어떤 저항이나 도전도 받지 않는다. ...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가 “종교 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라고 말했던 이유다. 202

마르크스나 짐멜이 기독교와의 유사성을 통해서 자본교를 해명하려고 했다면, ... 벤야민은 기독교와 자본교 사이의 유사성뿐만 아니라 그 차이점도 분명히. 203

벤야민에 따르면 자본교의 첫 번째 특징은 “숭배의 구체화”다. 자본교도는 감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대상, 즉 구체적인 상품을 숭배한다는 것이다. 우상숭배를 금지하며 감각을 초월한 신성에 몰두하는 기독교의 숭배와는 완전히 반대 방향이다. 두 번째 특징으로 벤야민은 “숭배의 영속화”를 이야기한다. 매일매일 휴일도 없이 자본교도는 강박증적으로 상품숭배에 몰두한다는 의미다. 반면 기독교도는 보통 주일을 기다려 예수와 신을 숭배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자본교가 기독교와 달라지는 지점은 자본교의 세번째 특징에서 분명해진다. 벤야민은 자본교의 “숭배는 ‘죄를 만드는(verschuldend)’ 것”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숭배가 속죄행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자본교는 그야말로 기독교와 완전한 대척점에 있는 종교였던 것이다. 벤야민의 주장은 명확하다. 상품에 대한 숭배, 즉 “구체적인” 상품을 “영속적으로” 구매하는 행위는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신적인 돈을 상품의 성전에 제물로 바치니, 이것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벤야민은 부연한다. “자본주의는 아마도 속죄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만드는 숭배의 첫 번째 사례일” 것이라고, 여기서 벤야민이 사용하는 단어 ‘슐트(schuld)’에 주목하자. 독일어 ‘슐트’는 ‘죄’만이 아니라 동시에 ‘부채’를 의미한다. 그러니 자본교의 숭배는 죄를 만드는 숭배이자 동시에 부채감을 만드는 숭배였던 셈이다. 208-209

자본주의가 종교로 기능하는 이유는 이 체제가 인간에게 우월과 열등에 대한 신앙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 신분사회만이 인간에게 열등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만큼 집요하게 열등의식을 우리 뇌리에 각인하는 체제도 없으니까. 억압체제가 항상 승승장구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억압받는 사람들이 지배계급의 주문에 걸려 자신이 열등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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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은신처를 평등하게 분재하는 것, 은신처 속에 숨을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것, 사회의 지배적 여론과 정동으로부터 집요하게 탈주하는 것, 과잉 연결된 관계들을 해체하는 것, 인간들의 세계를 떠나 비인간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 과열된 자본주의적 삶의 형식을 벗어나는 것,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새로운 가능세계를 발명하는 것, 이것이 21세기의 새로운 은둔의 실천이다. 은둔은 이제 생존을 위한 생명의 필사적 재조립이라는 의미를 띤다. 은둔 속에서 노동하고, 생각하고, 산책하고, 읽고, 쓰고, 견디고, 저항하고, 소통하고, 창조하며 다른 무언가로 생성되어가는 이들을 나는 은둔기계라 부른다. 이 책은 은둔기계의 삶에 관한 것이다.  6


1부 은둔하는 삶

악인이 사라진 자리에서, 악인과 싸우던 선인이 새로운 악의 형태들을 발명하고 실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31

자식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인격의 바닥을 드러낸다. 비겁, 용기, 탐욕, 광기, 연민, 죄책감, 불안, 공포 혹은 아주 드물지만 자기-비움(케노시스kenosus).  36

실패한 결혼이 치명적 불행이 아닌 것은, 모든 결혼이 근본적으로 성공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37

사랑 없는 정의보다는 차라리 정의 없는 사랑을 선택할 것. 사랑으로부터 정의가 생성되는 것은 가능하지마, 정의 안에는 사랑의 씨앗이 존재하지 않는다.  37

우리가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지, 우리의 사랑이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사랑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
악이 그러하듯이.  42

우리는 ‘미리’ 강건해질 수 없다. ‘미리’ 용맹해질 수도 없고, ‘미리’ 굳건할 수도 없다. ‘미리’ 생존할 수 없다. 오직 때가 닥쳐왔을 때만 그렇게 할 수 있다. 때가 오기전에, 모든 것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때는 모든 것에 존재와 질서와 가시성을 부여한다.  45

진실의 시간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니다. 그것은 ‘머지 않아’이다. 진리는 오직 머지않아 드러난다.
예언자는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발언한다. 진실은 머지않아 나타나기 때문에, 진실의 발언은 언제나 예언처럼 보인다.
우리가 쓰는 글의 참된 의미도(만에 하나 그런 것이 있다면) 머지않아 드러난다. 지금 환호하거나 비판하는 독자들이 아니라 ‘머지않아’의 독자들이 참된 독자다.
‘머지않아’를 잃는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머지않아’를 위해서 우리는 지나친 성공, 갈채, 칭찬, 환호를 누리면 안 된다. 그 향유 가능성을 전략적으로 파괴해야 한다.  50

심오한 고립, 심오한 분리, 심오한 비사회성.  55

20세기가 이상화한, 광기에 가득찬, 생산적 삶의 가치를 파상(破像 깨뜨릴파 형상상)할 것. 사회적 삶을 탈도덕화할 것.  55

도처에 은둔지가 형성되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견디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서로의 살, 냄새, 얼굴, 말, 현존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시대. 인간은 서로에 대해 지쳤고, 서로를 지겨워한다. 두려워한다. 사람들 사이에 광대한 사막이 형성되었다. 그 사막은 여러 형태의 기술적 장치들에 가로질러진다. 21세기의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을 의심하고, 경계하고, 직시한다. 인간중심주의와 휴머니즘의 자명성이 파열되고 있다. 이는 병리현상이라기보다는 문명사적 변동의 한 징후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첫번째 세대다. 모더니티의 잠에서 깨어나 충혈된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는 인간이 광폭한 힘을 발휘하여 변형시켜놓은 중생(衆生, 부처의 구제 대상이 되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이나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말-다음사전)의 고통의 극장이다. 인간의 인간성에 자기-제한을 가할 것. 인간의 인간성을 스스로 비워낼 것. 해방이 아니라 포기, 전진이 아니라 이탈, 사교가 아니라 은둔.  55-56

누구는 커피로 은둔하고, 누구는 음악으로, 누구는 산책으로, 누구는 철학으로 은둔한다. 성격으로, 질병으로, 작품으로, 광장에, 대중 속에 은둔하는 자들도 있다. SNS로 은둔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SNS로부터 은둔하는 사람도 있다. 은둔지는 발명될 수 있다. 은둔지를 구축하는 능력이 참된 창조력이다.  56

단순한 생명의 기쁨을 회복하고 싶은 자는 은둔을 꿈꾼다.  56

숨는 것은 인정받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지금의 기준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 지금 인정받으면, 미래의 인정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것. 끝까지 인정받지 않고 버티면서, 후일 최대치의 인정을 얻겠다는 귀여운 간계.  59

탈-성장. 반핵(反核). 페미니즘. 생태주의. 포스트휴머니즘. 소박하고 단순한 삶. 비거니즘. 지나친 생산과 이동의 포기. 독신주의. 열린 영성.  20세기적 상상력과의 결별. 신유물론. 61

과도한 연걸, 과도한 생산, 과도한 소통, 과도한 소비, 과도한 학습, 과도한 경쟁, 과도한 활동, 과도한 이동, 과도한 여행, 과도한 존재, 과도한 체험, 과도한 섭취, 과도한 존재로부터의 이탈. 덜 움직이고, 덜 먹고, 덜 소비하고, 덜 벌고, 덜 생각하고, 덜 쓰고, 덜 일하고, 덜 만나고, 덜 경쟁하고, 덜 여행하고, 덜 가르치고, 덜 배우고, 덜 제작하고, 덜 존재하기. 덜 있을 수 있는 능력. 코나투스의 자기-제한. 61
(라틴어 Conatus, 사물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고 스스로를 계속 높이려는 경향을 말한다)

은둔기계는 겁쟁이다. 그는 지배를 두려워하고, 상처를 두려워하고, 폭력을 두려워하고, 갈등을 두려워하고, 오해를 두려워하고, 감염을 두려워하고, 관계를 두려워한다. 그는 의(義)를 말하지 않는다.  (그가 의를 말하는 매우 드문 순간에도 그는 결코 대의를 말하지 않고 오직 소의(小義)만을 말할 것이다.) 우유부단하고, 기회주의적이고, 이기적이다. 소심하며, 잡스럽다. 그것을 숨기지 못한다. 숨기려 하지만 언제나 쉽게 발각된다. 이 모든 약점들이 그의 힘이다.  62-63

은둔기계는 세계를 바꾸거나, 계몽하거나, 비판하려는 열정이 없다. 그는 오히려 세계를 두려워한다. 세계 위에 서지 않는다. 그는 세계의 무서운 힘을 잘 알고 있다. 은둔기계는 지사(志士 뜻지 선비사)가 아니며 선비도 아니고 열사도 아니다. 그는 생존주의자다. 그는 도망치면서라도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 생존은 그에게 지상의 가치다. 다만, 그 지상성(至上性 이를지 윗상 성품성)은 신중하게 은폐되어 있다.  65

은둔기계는 자신의 물러남을 책임진다. 물러난 자들은 대개 모든 것을 비판할 수 있는 자리에 선다는 착각을 하기 쉽다. 이러한 인식은 관객성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 된다는 것은 물러남을 통해 무대의 권리를 내려놓는 것이다. 무대는 언제나 객석보다 더 위대하다. 물러나는 것은 무대로부터의 물러남이며, 그리하여 물러난 자는 자신의 하찮아짐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이것이 물러남의 윤리다.  66-67

부재하는 무언가를 현존시키는 것이 상상이라면, 현존하는 것의 공성(空性 ‘진여’의 다른이름. 우주 만유의 보편한 본체로서, 현실적이며 평등무차별한 절대의 진리)을 직관하거나 체험하는 것이 파상이다.  72

파상은 자기-비움의 체험이다.  75

파상 이후, 우리는 은둔기계가 된다.  78

비운다는 말은 그리스어 동사 ‘케노오(kenoo)’이며, 영어로 ‘emptrying’ 혹은
‘making empty’로 번역된다. 그리스어 케노시스(kenosis)는 한자로 자기-비허(卑虛 낮을비 힐허)’, 한글로는 대개 ‘자기-비움’으로 번역된다.  84

중독은 반복에 대한 사랑이다.  95

산책은 걸음으로 선을 긋는 행위다. 바로보는 것은 눈으로 선을 긋는 것이며, 생각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알 수 없는 어딘가에 선을 긋는 것이다. 세계는 선들로 구성되어 있다.  99

사람들은 각자의 막(膜) 속에 산다. 보이지 않는 캡슐이 사람들을 두르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막을 유지하고, 그것이 파손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 악수할 때, 손의 막은 다른 손의 막을 더듬는다. 키스나 성교 속에서 한 인간의 막은 다른 인간의 막과 가장 가깝게 밀착한다. 하지만, 막은 찢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막에 갇혀 있다. 오해, 증오, 불신, 혐오, 경멸이 오갈 때, 불쾌하고 자극적인 스파크가 일어난다. 막과 막 사이에는 무수한 것들이 흘러다닌다. 그런데 이 흐름은 아무에게도 인지 되지 않는다.  103

속도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곳에서 부패가 시작된다. 속도는 연결에서 생긴다. 이동은 연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104

어디가 가려운지 알지 못하면서 피가 날 때까지 아무 곳이나 마구 긁어대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111


2부 글쓰기에 대하여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나쁜 글을 쓰지 않아야 한다. 나쁜 글을 ‘쓰지 않는 것’이 좋은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어렵다. 무언가를 ‘쓰지 않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무언가를 ‘쓰는 법’도 알지 못한다.  115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글을 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문제는 글쓰기 테크닉이 아니라 주체성이다. 무엇이 당신을 휘감고 있는 소용돌이인가? 당신을 통해 말하는 자(것)들은 누구(무엇)인가?  115

좋은 글은 심지어 역겹다. 생명력으로 범람하기 때문이다. 생명은 다른 생명을 탈취하는 잔혹성을 갖고 있다. 좋은 글을 그 잔혹성에 닿아 있다. 진리를 드러내거나 인식을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진실로 간주되어온 것을 무너뜨리고 뭉개버리는 것이다. 생명의 힘에 걸려 진리는 추악한 표정으로 일그러진다.  117

진실을 말하려 하지 말고 진실의 기준을 바꾸라.  117

쓰인 적조차 없거나, 쓰였지만 발표되지 않았거나, 발표되었으니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그런 글이 좋은 글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좋은 글은 무언가를 전달하는 글이 아니라 전달 가능성을 창조하는 글이다.  122

가장 명확한 인정의 증거는 질투이다. 당신의 글이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면, 당신은 이미 인정받은 것이다.  123

반드시 사용하지 않기로 정해놓은 단어들의 목록을 갖고 있어야 한다.  124

비판은 우리 시대 교육의 낡고 비생산적인 관행이다.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나오는 상품처럼, 자동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식상하고 무례한 말들이 비판으로 오인되고 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모든 언술의 결론을 차지하게 된 저 습관적인 공격.  125

뛰어난 비판자는 타인의 작품이나 인격에 흠집을 내고, 생채기를 내고, 피를 흘리게 하지 않는다. 대상을 모욕하지 않는다. 대신 대상이 미처 달성하지 못한 잠재적 세계를 재창조하여 보여준다. 이를 통해 작가와 잡품은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벤야민이 말한 것처럼, 비판의 대상은 ‘타격’이 아니라 차라리 ‘소각’의 대상이다. 대상에 벼락을 때려 전소시켜보리고 불타고 남은 자리에서 사리를 줍는 것이다. 비판자는 대상의 정수(精髓)를 구제하여 제시한다. 이런 비판을 받는 행운을 누리는 자는, 분노가 아닌 부끄러움과 용기를 동시에 느낀다.  126

건조하고 단순하지 않으면 삶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다.  129

의미는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체감된다. 의미를 느끼는 기관은 뇌가 아니라 피부, 살, 뼈, 내장이다. 의미는 우리를 때리고, 우리에게 통증과 쾌감을 준다.  129

단 한 번이라도 시인인 적 있는 사람은, 시가 아닌 문장을 쓸 때 어려움을 느낀다.  130

학문 세계에는 언제나 소수의 앞선 자들이 있고 다수의 뒤진 자들이 있다. 세상이 앞선 자들의 비시대적 통찰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진화한 이후에야 비로소 뒤진 자들은 아무런 저항이나 어려움 없이, 마치 오래전부터 불운했던 선구자들을 이해해온 것처럼, 그들의 지식을 섭취하고 선전하고 찬양하고 소비한다. 그러나 뒤늦은 자들이 뒤늦은 지식을 전파하는 데 열심인 동안, 소수의 앞선 자들은 이미 또다른 세계로 걸어가버렸다는 것.  159

어떤 사회도 충분히 적대하고 있지 못하며, 어떤 사회도 충분히 통합되어 있지 못하다.  159

사회는 꿈이다. 사회 속에서 어느 누구도 모방과 암시를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믿지 않는 그것을 믿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그것을 옳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혐오하는 것을 혐오하지 않음을 밝히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159-160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사교가 아니라 따뜻한 친교다. 사회의 익명성과 억압, 그리고 사회생활에 내재하는 긴장과 고통에 대한 해독제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부담 없는 관계에서 온다.  160

헐벗은 자가 아직 헐벗지 않은 자에게 하는 말은 단상처럼 들린다. 헐벗지 않은 자는, 오직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자신도 헐벗은 이후에야 비로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188

취하면 단상을 쓰지 못한다. 술에도, 기분에도, 감각에도, 자아에도, 세계에도 도취하지 않아야 한다. 명정해야 한다.  188

단상의 생산은 기계적이다. 카메라가 풍경을 끊어내듯, 프레스 기계가 철판을 찍어내듯, 메스가 피부를 절개하듯, 그렇게 하나의 문장이 잘려나온다. 단상은 반-유기적이다.  189

실패한 단상은 꼰대의 훈계이거나 애송이의 트윗이다. 헐벗지 않은 자가 쓰는 단상은 실패한 단상이다. ‘무엇’을 쓰느냐보다 ‘누가’ 쓰느냐가 더 중요한 이유가 이것이다. 단상은 충만하고 풍요로운 정신으로는 쓸 수 없다. 오만하거나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단상에 실패한다.  189

꼰대도 애송이도 단상을 쓸 수 없다. 양자 모두 자신은 헐벗지 않은 채 타인을 헐벗기려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헐벗을 때, 주관이 헐벗을 때, 자아가 헐벗을 때, 문장이, 표현력이, 욕망이 헐벗을 때 단상이 가능하다.  189

객관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오만한 만큼이나, 주관을 정의의 원천으로 내세우는 것은 사악하다.  190

단상은 읍소도 고발도 비판도 아첨도 신음도 엄살도 과장도 아니다. 단상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타자가 사라지면 곧바로 허물어지는 그런 언어가 아니다. 단상은 듣는 자가 ‘아직’ 없을때 행해지는 말이다. 타자의 부재는 단상의 조건이다. 단상 속에서 말은 그 빈약함과 가난함과 헐벗음 속에서도, 꼿꼿함을 상실하지 않는다. 그것이 단상의 자존심이다.  190-191


3부 난류 속으로

인류학자 에두아르도 콘은 아마존 숲에서 ‘인간이 재규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라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재규어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라는 점을 지적한다. 숲은 생존 공간이다. 거기서 우리는 다른 존재자들과의 위험하고, 물질적이고, 해석학적인 관계를 갖는다. 인간만이 자기(self)인것이 아니다.  197

숲에서, 모든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들이 발산하는 기호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다. 인간만이 언어를 갖고, 비인간 세계는 언어가 없는 죽은 물질의 세계라는 착각을 하는 자는 아마존 숲에서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물, 공기, 바람, 흙, 곤충, 식물, 작은 동물, 큰 동물, 날씨, 습도, 정령(spirit), 사자(死者)는 모두 자기(self)다. 이들은 각자의 시선과 권능과 생명과 영혼을 갖는다. 이들은 서로가 발산하는 기호를 읽고 탐구하는 해석학자들이다. 아마존 숲에서 먹이를 찾아 산책하는 재규어와 마주친 인간은 (인간의 관점에서는) 주체이지만 (재규어의 관점에서는) 잠재적 먹이, 즉 대상이다. 자신이 재규어의 먹잇감이 아니라 그와 동등한 또다른 자기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는 재규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재규어에게 아우라를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즉, “재규어의 시선을 돌려 주어야 한다.”(콘, 2018:12)  197-198

“수마코 화산 기슭에 있는 사냥 캠프의 초가지붕 아래서 엎드려 누워 있는데, 후아니쿠가 내게 다가와 경고했다. ‘반듯이 누워 자! 그래야 재규어가 왔을 때 그 녀석을 마주 볼 수 있어. 재규어는 그걸 알아보고 너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엎드려 자면 재규어는 너를 아이차(aicha, 멋잇감)로 여기고 겅격한다고’, 후아니쿠의 이 말은 재규어가 우리를 마주 응시할 능력이 있는 존재로 본다면, 우리를 가만히 놓아둔다는 뜻이다.  그러나 재규어가 우리를 멋잇감-‘그것’-으로 보게 된다면, 우리는 죽은 고기나 다름없다. 다른 부류의 존재들은 우리를 어떻게 볼까? 이 문제는 중요하다”(콘, 2018:12)  198

인간의 악을 직시할 것. 인간의 악을 용서할 것. 자신의 악을 직시할 것. 자신의 악을 용서하지 말 것.  205

“옛 시대의 장비들로 현재의 도전에 응하는 것보다 더 큰 지적 범죄는 없다”(Latour, 2004:231).  206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지 말고 무엇을 ‘수행’하는가를 물을 것.  206

‘실존’하는 것들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있을 수 있기’위해 고투하고 있다. 그저 있는 듯이 보이는 나무는 광합성하고 있고, 성장하고 있고, 분열하고 있다. 바람에 버티고 있으며, 흙을 뚫고 내려가고 있다. 그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자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부단히 운동하고 있다. 흐르고 있고, 불타고 있고, 대립하고 있고, 버티고 있다. 가까이에 다가가서 보면, 모든 존재는 무수한 작용과 겪음의 지속적 ‘과정’이다. 존재가 아니라 생성, 혹은 생존이다.  209

비인간 행위자들의 기호학적 소통능력. 모든 존재자들은 기호의 생산자이며 해석자다. 구름과 별, 동물의 배설물, 식물의 색깔과 모양, 벌레의 움직임, 땅의 냄새, 어떤 분위기.  211

의미한다는 것은 차이를 갖는다는 것이다. 차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아니고 저것을 선택할 때, 거기에 의미가 발생한다. 왜 이것이 아니고 저것인가? 인간의 중대한 선택은 결단이라 불리지만, 결단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미생물도 결단한다.  211

비인간 행위능력을 간파하지 못하는 사람은 ‘센스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가령, 금연중인 친구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짜증을 낼 때, 그것을 혈중 니코틴 부족으로 금단현상을 겪는 ‘뇌’의 짜증이 아니라, 그 친구의 ‘인격의 짜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센스가 없다.  214

에일리언은 존재하기 위해, 연속해서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존재-과정이다. 어떤 주저도, 지체도, 망설임도 없이, 먹이와 숙주를 발견하고 그 생명을 탈취한다. 연민도 슬픔도 없이. 기계를 닮은 냉정한 작동. 에일리언의 벌린 입과 거기 흐르는 산성 타액은 생명현상에 내재한 깊은 공허, 그 텅 빈 성격을 드러낸다. 생명에 대해서 ‘왜’라는 질문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그저 생명을 지속해나가는 끝없는 작동을 수행하는 것뿐이다.  215-216

지구의 여러 생명체에게는 인간이 에일리언이다.  216

바이러스는 단백질과 지질 껍질에 싸여 있는 RNA 혹은 DNA조각들로서,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하지 못하고 물질을 합성하지도 못하는 유전단위다. 오직 숙주세포의 핵산과 단백질 합성기구를 이용하여 자신을 복제해야 하는 기생체다.  

숙주에 침투하기 이전의 바이러스는 캡시드(바이러스 게놈의 핵산을 감싸는 단백질의 집합체)에 둘러싸인 입자에 불과하다. 비리온(virion)이라 불리는 이 입자는 혼자서는 성장, 생식, 대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숙주와의 감염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는 동안에 바이러스는 생명활동을 멈춘 채 그냥 존속한다. 그러나, 일단 숙주에 침투하면, 바이러스는 자기복제를 실행하기 시작한다.

바이러스는 죽음도 아니고 생명도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의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 생명 속에 죽음을 초대함으로써 생명의 능력을 극대화시킨 존재다. 바이러스는 존재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환경에 위탁함으로써 평소에는 차라리 죽어 있기를 택한다.  219

생명의 작동이 멈추었지만 죽지 않은 것. 부활-가능성 속에서 잔존하는 것. 조건이 주어지면 맹렬하게 자기복제하는 것. 유보, 정지, 멈춤을 내장한 생명력. 막강한 변이능력. 그리고 면역 시스템에 식별되지 않을 수 있는 은폐능력. 바이러스의 힘.  220

사람들이 바이러스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미 그들이 바이러스를 행위자로 인정하기 시작했으며, 그 행위능력(agency)을 지각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221

봉준호의 <기생충>에서 아버지 기택(송강호)은 아들 기우(최우식)가 ‘기생’ 작전을 수립하자 감탄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바이러스에게도 계획이 있다. 바이러스는 다음 네 가지 계획을 실행해야 생존한다. 1) 숙주세포를 감염시키기, 2) 숙주세포 내부에서 복제하기, 3) 숙주의 방어막을 피해가기, 4) 새로운 숙주로 옮겨가기(Sompayrac, 2013:4-5). 바이러스는 최소 30억 년 이상 위의 네 가지 목표망을 실행하면서 지구상에서 생존해왔다. 생존에 관한 한, 바이러스는 호모사피엔스보다 훨씬 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222

도서관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에 인쇄된 글자들은 비리온(virion,  비리온이란 바이러스가 숙주 외부에 있을 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내부 중심부에는 핵산이 있으며 외부는 캡시드라 불리는 단백질 막으로 둘러쌓인 바이러스성 입자이며 중심부의 핵산은 감염성을 가지고 있으며 캡시드라 불리는 단백질 막의 구조는 바이러스의 특이성을 결정한다.-위키)상태의 바이러스와 유사하다. 인지되고 이해되기 이전의 글자들은 물리적으로 현존할 뿐이다. 그것은 작용하지도 감응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페이지가 펼쳐지고 어떤 의식이 그것을 읽는 순간, 글자와 뇌가 연결되는 순간, 글자는 인쇄된 특정 모양을 지닌 단순한 잉크 자국에서 의미의 활발한 파동으로 변신한다. 글자는 살아나고, 이미지와 생각과 느낌이 되어 읽는 자의 신체와 그 외부로 퍼져나간다.  223

커뮤니케이션은 ‘전염’이다. 기호는 의식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바이러스다.

읽는다는 것은 숙주가 되는 과정이다. 저자가 생산한 바이러스가 읽는 의식에 기생체로 밀려들어온다. 의식 내부에서, 바이러스의 영토화가 발생하고, 새로운 기호의 배치가 생산된다. 쓴다는 것은 의식에 침투한 바이러스의 변이다.  223

바이러스적으로 작용하는 대부분의 기호는 면역계에 의해 차단되고, 파괴되고, 무력화되어 자아의 내부에 침투하지 못한다. 반지성주의, 편견, 우상, 혐오, 독단, 신앙과 같은 강력한 면역 시스템.  224

기호의 핵심에는 ‘의미’가 아니라, 의미의 단속적 ‘출현’이 있다. 의미가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미가 특정 ‘순간’에 나타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의미는 상황에서 솟아나 증식한다.  224

인간은 지구와 뒤엉켜버렸다. 자연은 사회와 뒤엉켜버렸다. 우리에게는 초월적 위치도, 객관적 위치도, 실험적 위치도 없다. 우리는 붙들려 있고, 침투당했고, 피폭되었다. 이것이 21세기 파상적 리얼리티의 풍경이다. 이 냉혹하고 초현실적인 생태-존재론적 위급상태의 이름이 바로 ‘인류세(Anthropocene)’다(김홍중, 2019). 231

인간을 뜻하는 ‘안트로포스(anthropos)’와 시간을 뜻하는 ‘카이노스(Kainos)’를 결합한 신조어인 인류세는, 노벨 화학상 수상자 폴 크뤼첸과 생태학자 유진 스토머가 2000년에 IGBP의 뉴스 레터에 기고한 짧은 글에 처음 등장한다. 이들은 수온 상승과 수질 산성화로 인해 산호초가 탈색되는 현상을 연구하다가 암석, 물, 대기에 인간활동에서 비롯된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인식을 지질학적 시간에 반영해야 할 필요성을 공식적으로 제기한다.

“인간 행위가 지구와 대기에 미친 중요하고 점증하는 영향을 고려해보건대 (...) 지질학과 환경학에서 인류의 중심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참으로 적절하게 보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현재의 지질학적 시대를 ‘인류세’라고 부를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어쩌면 아마 다가올 몇백만 년 동안 주요한 지질학적 힘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Crutzen&Stoermer, 2000:17-8)

11700년을 이이온 홀로세(Holocene)가 끝나고 인류세라는 새로운 지질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주장의 타당성에 대한 논쟁은 어느 정도 정리된 듯이 보인다.  231-232

자연은 아니지만 자연처럼 느껴지며, 언젠가는 소멸할 것이지만 그 소멸을 역사적으로 상상하기 힘든 세계를 타연(他然 다를타 그러할연)이라 부르고자 한다. 가령 21세기 테크노 자본주의 문명.

기술은 우리에게, 세계가 더욱 더 향유 가능한 것이 되었으며, 세계를 더욱 더 향유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의 느낌을 제공한다.  236

인터넷을 통해 우리는 타자들의 얕은 내면에 흐르는 생각과 감정을 즉각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이 기술적 가능성은 사회라는 관념을 위기에 빠뜨린다. 사회적 삶은 내면을 서로 에게 은폐하고, 예의의 가면을 쓴 채 공존하겠다는 암묵적 계약이다. 만일 타인이 우리의 진심을 읽는다면 사회적 관계는 불가능하다.  237

타연을 살아가는 인간은 사고의 주체, 욕망의 주체, 생산의 주체, 언어의 주체, 창조의 주체가 아니라, 향유의 주체다. 향유는 존재(being)가 아니며 소유(possession)도 아니다. 오히려, 향유는 존재를 덧없게 하고 소유물을 파손시키는 것에 더 가깝다. 그 과정에서 흔적들의 묘한 폐허가 만들어진다.

향유는 즐기는 것을 넘어서 즐기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이며, 즐기는 것을 가치화하는 것이며, 즐김의 가능성을 확장해가는 실천이다. 향유에는 부정성이 없다. 향유는 자본주의적 삶의 정점에서 비로소 나타날 수 있는 실천양식, 존재양식, 사유양식이다.

향유대상이 향유 속에서 파손되고 소실된다. 파손과 소실은 향유가 생산하는 가치의 형식이다. 이처럼 반-생산을 생산하고, 반-축적을 축적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물적 자본의 파괴를 새로운 형태의 자본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향유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극한에 접근한다(김홍중, 2017). 향유는 명령한다. 무엇이 되었건 그것을 향유하라. 향유 속에서 대상을 무화시켜라. 물질적 실체들을 사라짐 속으로 투입하라. 없어지는 것이 되도록 변형시켜라. 없어짐을 생산하라. 없어짐의 생산의 증인이 되어라. 덧없음을 추적하여 체험하라. 향유의 체험을 공표하라, 공유하라, 공식화하라. 자본주의의 끝으로 가라. 가서 자본화할 수 없는, 있음과 없음 사이에 펼쳐져 있는 분산된 존재자들을 자본의 회로에 넣어, 그들의 소멸에 현실성을 부여하라. 자본주의의 한계를 경신하라. 향유를 향유하라. 241-242


4부 모든 것을 단순하게

욕망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해방을 욕망하게 하는 ‘억압’을 동시에 욕망한다.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자기(自己)를 창조해야 한다. 대다수 오류와 죄악은 이 과정에서 발생한다. 자기를 아직 정립하지 못한 자가 그 괴로움을 벗어나 주체가 되기 위해 몸부림칠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누구나 자신과의 사이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거리, 우회로, 이해할 수 없는 상징들, 막다른 골목, 미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사막을 갖고 있다.

타인을 험담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두 부류가 있다. 첫째, 타인을 험담하기에 너무나 고결한 품성을 타고난 사람들. 둘째, 타인을 험담하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견디지 못할 만큼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  257

비겁한 자들은 용기 속에 숨어 평온하다. 용기 속에서, 용기 밖에 있는 자들을 경멸한다. 그러나 용기는 용기 안으로 들어가 거기에 안착하려는 욕망과도 싸울 수 있는 힘이다. 용기는 비겁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비겁을 내포한다. 비겁할 수 있는 자들만이 용기 있는 자들이다.  258

혐오하는 자들은 빈곤하다. 그것이 존재의 빈곤이건, 인정의 빈곤이건, 금전의 빈곤이건, 혹은 빈곤의 빈곤이건.

냉소는 가장 저렴한 방어기제다.  

시련은 인간을 단련시킨다. 그런데 단련이 반드시 성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종종 인격의 왜곡, 질병, 혹은 정신질환으로 귀결된다.  259

“역사가는 과거로 들어가서는 안 되고, 과거가 그에게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Tiedemann, 2004:240)

마음도 이와 같다. 타인의 마음으로 들어가고자 하면 안 되고, 타인의 마음이 자신에게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공감이란 타인의 마음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오만한 시도다. 오직 통감(痛感 아플통 느낄감)만이, 세상의 마음이 자신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김홍중, 2015:151-61)  260-261

도취의 가장 위험한 점은 영혼을 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정신의 어딘가에서 무언가 썩는 냄새가 풍겨오는 순간, 그것은 오래된 도취의 결과임을 깨닫게 된다.  261

우리는 멀리 있는 흉악범보다 주변의 저열한 인간들을 더 견디기 어려워한다. 범죄 행위보다 에티켓의 실수가 더 견디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우리를 가장 분개시키는 것, 우리가 가장 혐오하는 것은 ‘사소한’ 것이다.  261

혐오를 통한 경계의 확정. 우리가 무언가를 멀리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혐오하는 감정을 통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듯이 보인다. 자연 속에서 혐오는 회피와 오염의 방지를 위한 행동 촉구 기제였다.  262-263

너무나 섬세하고 상처를 쉽게 받지만, 회복력도 뛰어난 마음의 소유자. 항상 다치면서도, 결코 냉소나 혐오의 갑옷으로 자아를 보호하지 못하는 사람.  263

소위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과오를 타인의 탓으로 처리하는 단순한 사고회로의 강화에 성공한 사람이다. 정신적 건강은 괴물성과 연결되어 있다.  263

자신을 유쾌하게 비웃지 못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만일 당신이 스스로를 유쾌하게 비웃지 못한다면, 당신은 스스로를 가장 조심해야 한다.  266

타인을 좋아하는 것은 노동이다. 임금으로 보상받아야 한다. 자신이 흠모하고 동경하는데(흠모와 동경의 노동을 그렇게 수행해왔는데) 정작 그 대상이 상응하는 감정을 되돌려주지 않을 때 분노를 느끼는 것은, 등가교환의 원칙이 위배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마음속으로 흠모하면서 그의 응답을 기다리는 자의 ‘사랑’은 그래서 쉽사리 ‘증오’로 돌변한다. 감정의 무상증여는 없다. 적절한 대가를 받지 못한 감정 노동을 한 사람들은 폭력의 정당성을 쉽게 획득한다. 억울하다는 심정의 근저에는 ‘제 몫을 받지 못했다’는 판단이 자리 잡고 있다.  267-268

페이션트(patient)가 된다는 것은 인격이 사라지거나 특이성이 소멸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가 수동적이 될 때, 우리는 능동성을 발휘할 때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우리 자신이 된다. 환자의 자리는 대체될 수 없는 나의 자리다. 내 몸, 내 질병, 내 장기, 내 죽음의 자리는 대체되지 않는다. 대역을 쓸 수 없다. 그것은 단독자의 자리다. 활동이 아니라 감수의 자리에서 우리는 자신을 만난다. 겪어내야 하는 것을 겪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자기(自己)가 된다.  273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의 제조라기보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상태’에 처(處 머무를처)하는 것에 더 가깝다.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일어나는 정황을 ‘겪는 것’. 이렇게 보면, 생각의 힘은 순수한 행위능력이 아니다. 행위와 감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흘러가는 그 흐름을 따를 수 있는 능력이다. 바람이 불어야 떠오르는 연처럼 생각은 떠오른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의 끝을 붙들고, 생각이 움직이는 대로 내가 따르는 것이다.

생각하는 자는 골똘한 자다. 이 골똘함은 ‘제스처’다. 몸짓이다. 골똘한 자세는 생각하지 못하는 자를 생각이 일어나는 상태로 진입하게 해준다. 생각하는 자의 주변환경은 이미 생각들을 품고 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직전 무거워진 구름처럼, 생각은 밀집된 수증기처럼 온통 퍼져서 주변을 감사
싸고 있다. 우리는 안에서 밖으로 생각을 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으로부터 안으로 생각을 끌어들인다.

어떤 문제에 봉착하여 깊이 고민할 때,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장기 말이나 바둑돌을 놓아 수순을 상상하고 전략을 짜듯이 그렇게 내적 표상을 구성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생각 이전의 분화되지 않은 정동적 기류에 휘말려 있다. 고개를 숙인 채 바닥에 의미 없는 글자를 쓰거나, 도형을 반복해서 그리거나, 어떤 단어를 혼자 중얼거리거나, 한숨을 쉬고 누웠다가 뒤채고, 이렁나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할 뿐이다. 아직 울음을 터뜨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오랜 시간 후에 비로소 그 표현이 가능해질, 어떤 봉쇄 속에 우리는 갇혀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몸짓을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다. 고민한다는 것은 생각에 도달하기 이전, 상당 시간을 이런 부대낌을 견디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견디는 동안 표상은 부서지고, 뭉개지고, 흩어진다. 표상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고민을 통하여 시간과 자신을 발효시킨다. 페이션시(patiency)’.  274-276

사람들은 무언가를 잊기 위해 노력하지만, 노력은 대개 망각을 지연시킨다. 잊으려 애쓸수록 대상은 의식에 더 달라붙는다. 의지를 통해 무언가를 잊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지금’ 잊는 자는 없다. 망각은 행위가 아니라, 과거에 발생했던 것이라고 나중에서야 인지되는 사건이다.  279

감당은 관념이나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구호나 선언이 아니다. 감당은 생명의 방만한 방출이 아니다. 그것은 절제, 삭감, 위축이다. 감당하는 자는 공격하지 않고, 비판하지 않고, 함성을 지르지 않는다. 그는 침묵하면서 짊어진 무게를 견딘다.

박수근의 나무들은 이파리가 하나도 없다. 나목(裸木)은 거의 죽은 듯이 보이기도 한다. 고요히 늙어가는 사람 같다. 나무 주변에 아이를 업은 여인이나 짐을 짊어진 여인이 걸어간다. 나무와 사람이 모두 감당하고 있다. 나무는 나무의 헐벗음을, 사람은 사람의 헓벗음을 짊어지고 있다. 박수근의 그림에 서려 있는 희망은 감당하는 자들이 고독하게 품고 있는 미래로부터 온다. 짊어진 것의 무게가 감당의 유토피아를 만든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견디어내겠다는 의지.  280

헐벗음은 <세한도>의 주제다. 헐벗은 것들의 꼿꼿한 공존. 겨울의 한복판에서 헐벗은 것들이 버티고 있다. 감당은 고독한 사업이지만, 환락이 아닌 감당 속에서야 우리는 참된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추워져야 송백(松柏)이 시들지 않음을 안다.” 계절이 헐벗으면, 헐벗으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것이 다른 무언가를 알아본다. 꼿꼿한 잣나무는 뒤틀린 소나무를 알아본다. 시간을 거슬러, 경계를 거슬러, 차이를 거슬러, 감당하는 자가 감당하는 자를 알아본다. 은둔기계라 은둔기계를 알아본다. 그것과 친구가 된다. 별로 친하지도 애틋하지도 않지만, 함께 헐벗음을 살아내는 것이다. 추사가 그려내는 이 유교적 쿨(cool).  281

감당하는 자들은 대개 침묵한다. 감당에 몰두하여 표현하고 목소리를 낼 힘조차 갖지 못한다. 질병을 감당하는 사람들, 사랑을 감당하고, 부모의 역할을 감당하고, 직무를 감당하고, 존재 자체를 감당하는 자들. 이들의 힘으로 삶이 흘러간다. 자신에게 부과되는 것들을 잘 감당하는 존재자들은 드러나지 않는다.  281-282

서로에게 감당할 수 있는 것만을 기대하는 것이 도덕이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해서 타인을 괴롭히는 사회는 사악하다.

자신에게 닥쳐오는 사태를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이 참된 윤리다.  283

가까운 사람에게 가한 상처,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대개 가까운 곳에서 온다.  287

존재는 시선에 의해서도, 고통에 의해서도, 언어에 의해서도, 모멸에 의해서도, 실수에 의해서도 벗겨진다. 헐벗음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 헐벗음과 씨름해본 적이 없는 사람, 헐벗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은 천박하고 건강하다.  288

학문이 민중의 감각에 결코 미치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 헐벗은 삶에 대한 감수성이 없기 때문이다.  289

헐벗음은 무능력으로 귀결된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과 부딪힐 때, 그때마다 우리의 영혼은 헐벗는다. 자식이 원하는 무언가를 해줄 수 없을 때, 그 무력감 속에서 부모는 헐벗는다.

헐벗음이 집중된 한 지점, 그곳이 장애(障礙)다.

욕망의 정화, 이것이 생명체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업이다. 정화는 헐벗음이다. 오직 헐벗음의 사건들만이 우리를 정화시킨다.  290

어질다는 것은 도덕이나 철학이나 아름다움에 가해지는 제한이다. 인의 규범이 후퇴이며, 진리의 축소이며, 아름다움의 유보다. 불완전성에 대한 항복이다.

‘치열하게’와 같은 오만한 말에 속지 않는 것이다. 두려움을 버리지 않는 것. 용기 따위로 두려움을 이기지 않는 것. 방관하는 것.

어진 이는 허술하다. 규칙이나 규범을 어기며, 심약하고, 애매하고, 어리숙하다. 어진 자는 잘 속고, 매번 속고, 진다. 그러면서도 마음을 상실하지 않는다. 침묵하고 웃는다. 어리석음과 어짊 사이에는 은밀한 연관이 존재한다. 어리석음을 통해서, 이 타협주의와 우유부단을 통해서, 어진 사람은 주어진 관계를 파괴하지 않고 이어나간다. 그는 세계를 멀리서 본다. 세계가 그저 존재하는 무언가로 나타나는 지점까지 물러가서, 세계가 그저 생존하는 무언가로 나타나는 지점까지 물러가서 바라본다. 어짊은 생존주의다. 생존을 존재보다 더 성스러운 것으로 읽는, 처절한 실용주의다.  302-303

희망이 허망함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희망은 미래의 건축이지만, 언제나 실패를 내포하는 잔인한 건축이다. 우리는 안다. 희망은 부서진다는 것을,  그래서 미리 부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을, 그래야 살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절망에 빠져드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절망은 희망보다 더 화려한 몸짓이며 도취일 수 있다. 그것도 깨어져야 한다. 희망에서 벗어나는 힘이 파상력이라면 절망을 깨는 힘도 파상력이다. 파상력은 삶을 향한다. 지금 여기의 물질적 세속을 단호하게 지향한다.  303-304

은둔 속에서, 세상에의 참여가 좌절된 자리에서, 공부에 뜻을 두고 공부의 기쁨을 함게 누리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 생의 흐름, 만물이 함께 얽혀 흘러가는 저 생의 흐름이 야기하는 경이로움에 잠기는 것.

이것은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y)이아니라 생에 대한 사랑(philo-zoe)이다. 필로-조에. 정치적 삶(비오스)이 아니라 생물학적 삶(조에). 필로-조에의관점에서 보면, 학문은 어느 지점에서 멈춰야 한다. 도덕도 현명함도 멈춰야 한다. 종교적 열광도, 예술적 천재도 멈춰야 한다. 더 나갈 수 있는데 멈추는 힘이 참된 힘이다. 공자 사상의 본령에는 냇가에서 정신을 놓고 흐름을 바라보는 저 은둔기계가 있다. 그는 그저 어짊 속에 있는 인간이다. 도덕도 훈계도 진리도 없이, 풍경과 대면하고 세속을 직시하는 저 허름한 얼굴, 이것이 어짊의 참된 얼굴이다.  306

여행에 대한 두려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310

갑자기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여행중이었다. 자기기만이라 생각하며 자신을 비웃는다.  310-311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무렵, 모든 순간이 이미 지나갔고 이제 다시는 그 시간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낄 때가 있다. 예리한 통증을 동반하기도 하는 이 상실의 느낌은 실체가 묘연하다. 여행자는 상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여행을 다녔고, 기억을 소유하게 되었고, 장소들을 체험하게 되었다. 시간을 즐겼으며, 친교와 추억을 축적했다. 상실한 것이 딱히 없는데 그가 느끼는 이 예리한 서운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316-317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과 장소들을 만나는 경험은 우리에게 ‘가능한 삶’을 상상하게 한다. 내가 지금의 나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삶은 어떠했을까? 나는 저 어부였을 수도 있고, 저 어부의 아들이었을 수도 있다. 일본인이었거나, 인도네시아인, 혹은 프랑스인이었을 수도 있다. 이 고장에 이주했다면, 저 직업을 선택했더라면, 저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졌더라면, 저런 집에서 살았더라면, 여기에서 죽었더라면.... 여행은 현실의 자아를 가능세계의 자아들과 연결시킨다. 여행이 끝날 때 상실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여행지 그 자체의 사실적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여행지와 만나면서 촉발된 가능세계들이다.  317

여행하는 인간의 뇌리를 스치는 이미지들은, 살아진 시간과 살아보지 못한 공간의 몽타주다. 여행이 끝날 때쯤 여행자는 여행을 통해 예상치 않게 변화해버린 새로운 자아, 실제 자아의 사실성을 부식시키면서 나타나는, 가능한 자아들과 엮여버린 이상하게 새로운 ‘자아’를 획득한다. 317-318

우리를 실망시킨 것들. 우리가 살 수도 있었던. 가능성들. 살았다 한들 패배하고 허겁지겁 도망쳐나왔을지 모르는 길들. 이들의 총체가 삶이라면, 우리는 여행을 통해서만 삶과 만날 수 있다.  318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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