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자 기야스 벡은 페르시아의 귀족이었다. 왕의 명을 어긴 죄로 불같은 미움을 사게 된 그는, 어느날 가족들을 대동한 채 야반도주를 시도했다. 목적지는 인도였다. 그런데 그에게는 메흐루니샤라는 어린 딸이 있었다. 길고 험한 여정속에 딸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짐이었다. 라자스탄의 사막에 다다랐을 때 닥쳐온 기갈과 추위는 그에게 독한 맘을 품게 했다. 새벽녘, 잠이 든 어린 딸에게 모래를 이불삼아 덮어준 채 식솔을 다그쳐 길을 떠났다. 수시로 늑대와 전갈이 출몰하는 모래언덕 위로 집채만한 태양이 솟아오를 때 그는 가족들 몰래 아침 노을보다도 더 붉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메흐루니샤의 생명은 질겼다. 아이는 미르자 기야스 벡의 뒤를 따르던 상인들에 의해 모래더미 속에서 발견됐다. 상인들은 자신이 섬기던 귀족의 딸을 비단에 감싸서 아그라로 데려왔다. 이 장면은 그들 부녀의 인생은 물론 무굴제국의 흥망까지 엇갈리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미르자 기야스 벡은 무굴제국의 아크바르 황제의 마음에 들어 새로운 영화를 누리게 되고, 그의 딸은 아름답게 자라 페르시아 소속의 장군에게 출가를 한다. 하지만 사막의 굶주린 늑대에게 먹이가 될 뻔했다가 살아난 그녀의 인생이 그렇게 한갓지게 막을 내리지는 않았다.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서른의 청상이 된 기구한 팔자의 그녀는 아버지가 살고 있는 인도의 아그라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아크바르 황제의 후궁 중 한 살마의 시녀가 되어 아그라 성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그녀는 극적인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바로 아크바르의 뒤를 이은 제항기르 황제의 넋을 빼앗고 만 것이다. 풍류남아였던 제항기르는 수많은 여인들 중에서도 범상치 않은 과거를 지닌 페르시아 출신의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단숨에 제국의 왕비가 된 그녀는 누르자한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천성적으로 호방한 성격이고 놀기를 좋아했던 제항기르는 인도 대륙의 북서부에 있는 카시미르 지역을 좋아해 재임 중에 그 지역의 대표 도시인 스리나가르를 자주 방문했다. 스리나가르에 '살리마르 박'이라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 누르자한에게 바칠 정도였으니까 제항기르의 인생에 있어 카시미르와 누르자한은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실제로 제항기르는 카시미르에 빠져 영리하고 아름다운 아내 누르자한에게 정치를 맡겨버렸다. 미르자 기야스 벡을 비롯한 페르시아 출신의 와척들이 득세하자 제국의 문화는 급속하게 페르시아 풍으로 변모한다. 힌두문화에 비해 비교적 앞서 있고 세련됐던 이슬람 문명은 누르자한에 의해 대폭 수용되고 심지어는 궁중에서 페르시아어가 통용되기도 했다. 미술과 건툭, 문학과 의상, 음악 등 문화 전반에 걸쳐 아라비아 반도와 인도대륙이 조화를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생겨난 문화는 인도 역사상 가장 독특한 문화로 평가받는다.
누르자한은 자신의 아버지가 죽자 야무나강 북쪽에 이슬람 양식의 무덤을 축조한다. '이티마드 우드 다울라'라는 이 무덤은 훗날 타지마할 죽조의 교과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무덤을 '리틀 타지마할'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완벽한 사각대칭의 건축 양식은 물론이며, 대리석 바탕에 밑그림을 그리고 선을 따라 구멍을 뚫어 각기 다른 색깔의 돌을 끼워 넣어 그림을 완성하는 일종의 상감기법인 '피에트라 두라'는 원래 페르시아의 장식기법인데 이 무덤을 축조할 때 인도에서 처음 사용하였고, 나중에 타지마할을 건설할 때도 중요하게 사용된다.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은 이 기법이 핵심적 역할을 한다.
무굴제국에 누르자한의 그림자는 계속 이어진다. 제항기르를 이은 샤자한 황제의 왕비인 뭄타지마할이 바로 누르자한의 조카였기 때문이다. 샤자한은 왕비를 끔찍하게 사랑했다. 17년의 결혼생활 중 열네 명의 아이를 낳앗다고 한다. 물론 자녀의 숫자가 금슬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엔나 소시지처럼 주렁주렁 아이를 낳을 정도였으니 그들의 사랑이 가볍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고 심지어 전장에도 대동하고 다닐 정도였으니 샤자한이 왕비에게 쏟은 열정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왕비가 열다섯 번째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나버렸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자 애통함을 참지 못한 샤자한의 머리카락은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105-108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사원으로 다가간 나는, 맙소사,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사원의 외벽에 새겨진 조각들이 나를 까무러치게 만들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신들을 모신 사원의 외벽에는 온갖 난해한 체위를 한 성애상이 난무했다. 서양화가 임영재 형이 먼저 이곳을 다녀와서 내게 일러준 적이 있어 선지식은 있었지만, 차마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나는 우선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한국에서 온 젊은 대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이 없는가 하고, 그들과 함께 이 조각들을 본다면 체면이 말이 아닐 것 같아서 헛기침을 하면서 주위를 살폈지만,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동양인 처녀는 보이지 않았다. 상투만 틀지 않앗을 분이지 마지막 유생임을 자처하셨던 아버지의 정신이 순간적으로 내 피에도 흘렀는가 보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사실은, 세상에 이렇게 노골적일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의 각종 체위가 등장하는 이들 성애상들이 천박하거나 상스럽게 여겨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슴과 둔부가 지나치게 발달해서 상대적으로 허리가 가늘어 보이는 여인이 한쪽 다리로 사내의 허리를 감고 두 팔로 목을 휘감은 채 눈을 허공에 매달고 있었다. 사내 또한 한 쪽 다리를 들어 여인의 가녀린 허리를 감은 채 이 농염한 여인의 도발을 어떻게 감당할까 난감해 하는 표정이고, 마치 기계체조 선수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고난도의 체위를 돕기라도 하려는 듯 좌우에 하녀들이 이들의 교합을 거들고 있었다. 하지만 한 하녀는 고개를 외면한 채 얼굴을 붉히고 있었고, 한 여인은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이 장면은 바로 카마수트라에 나오는 '쟈타베슈티타카'라는 체위다.
그 뿐인가, 오랜 병영생활에 지친 병사가 자신의 말을 상대로 수간을 벌이고 있었고, 그 뒤에서 다른 병사가 하품을 하고 있었다. 다음 순번을 기다리는 그 병사는 기다림에 지친 듯했다. 그 앞을 지나는 여인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가리고 그 광경을 외면하고 있었다.
외벽은 그렇다 치저라도 사원 안의 제단에는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곳에는 시바의 거대한 성기인 링가를 모신 제단이 있고 그 주위로 36가지의 성애 기교를 묘사한 조각상이 있었다. 링가상 앞에는 작은 제단이 또 하나 놓여있는데 그 제단은 젊은 여사제가 올라와 완전 나체로 춤을 추던 곳이라고 한다.
천 년 전 이 제단에서는 성(聖)스러운 성(性)의식이 행해졌다. 승려들은 북을 치고 신자들은 횃불을 밝혔다. 북장단에 춤을 추던 여사제의 춤사위가 절정에 이르면 승려들은 북채를 던지고 차례로 제단으로 올라와 여사제와 정사를 벌였다. 오랜 수도 생활로 다져온 요가 자세로 고난도의 체위를 구사하며 이루어지는 교합에서 승려들은 번번이 패하고 말았다. 여사제의 관능을 극복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였던 것이다. 이 교합에서 사정을 해버린 승려는 다시 수도의 길을 걸어야 하고, 여사제의 온갖 기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텨 그녀를 녹초로 만들어 놓고도 사정을 하지 않은 승려는 드디어 득도의 세계로 접어든다는 것이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찬츠라 수행의 한 방법이다. 힌두에서 생각하는 바에 의하면 인간의 정액은 머리에서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뇌하수체의 자극에 의해 정액이 생성되기 때문에 이 말이 영판 거짓은 아니다. 머리에서 생겨난 정액은 밑으로 내려와 배꼽 아래에 모여 있다가 남녀의 교합에 의해 성기를 통해 바깥으로 배출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힌두에서는 이 정액을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에너지로 본다. 이 에너지가 고갈되면 결국 인간은 죽고 마는 것이다. 일종의 엔트로피 개념이다. 그런데 이 에너지를 사정하여 허비하지 않고 다시 머릿속으로 되돌려 보내면 그 때 비로소 해탈의 순간을 맞는다는 것이다. 자아를 극복하는 것이 깨달음의 첫 번째 문이라면, 탄트라 수행은 득도를 위한 가장 극단적 수행법임이 확실하다.
나는 카주라호의 사우너에서 카마수트라가 종교 속에서 어떻게 승화되었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인도에서는 이처럼 사원에서도 성(性)을 가르친다. 성은 인간이 사는 세상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므로 성(聖)과 속(俗)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힌두 세계에서는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144-147
테레사 수녀님은 콜카타 빈민촌에 있는 '사랑의 집'에 살면서 가난과 질병, 그리고 기아 속에서 죽어가는 인도인과 평생을 함께 보냈다.
하루는 영국의 한 여기자가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그녀에게 물었다.
"사랑이란 콜카타의 한 소년이 들고 온 사흘 분의 설탕입니다."라고 테레사 수녀님이 선문답처럼 대답했다. 어느날 사랑의 집에 설탕이 떨어졌다는 소문이 있었고, 콜카타의 모든 시민들이 그 소문을 들었다. 그날 저녁 한 소년이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오늘부터 사흔 동안 저는 사탕을 먹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 제가 먹지 않은 그 사흘 분의 사탕을 제게 주십시오." 사흘 후 이 소년은 자신이 아낀 사흘 분의 사탕을 들고 사랑의 집에 찾아왔다. 콜카타의 모든 시민이 사랑의 집에 대한 소문을 들었지만, 남에게 걸식조차 할 수 없는 절대 고통의 행려병자들에게 자기 몫의 설탕을 가지고 간 사람은 오직 어린 소년 한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테레사 수녀님이 강조한 사랑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소박한 사랑, 작은 일에도 비분강개하여 정의를 세우고자 하고, 옆집 개가 고뿔에 걸려도 호들갑스럽게 침소봉대하여 박애를 강조하는 사랑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실천할 수 있고, 타인을 위해 작은 희생을 할 수 있는 사랑을 강조한 것이다. 244
인도에서는 항상 갈증을 느낀다. 더운 날씨 탓도 있겠지만 모든 것들에서 욕구불만을 느끼기 때문에 그 갈증은 끝도 없이 반복한다. 마셔도 마셔도 풀리지 않는 갈증을 달래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느 하나 수월한 것이 있다면 인도 여행의 매력은 반으로 뚝 떨어진다. 고통과의 정면승부, 그것은 인도 여행만이 주는 매력일 것이다. 325
만사가 여유롭고 유머러스하며 넉넉하고 망상적이다. 다중적 특성을 가진 것이 인도인의 캐릭터다.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 닥쳐도 서두르지 않고 아무리 난처한 입장이어도 익살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이해관계에 맞닥뜨리면 절대로 양보하지 않다가도 상대가 곤경에 처하면 발 벗고 나서 도와준다. 참으로 묘한 민족이다. 334
내가 아는 인도와 인도인들은 세간이 평가하는 만큼 그렇게 지리멸렬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일부 호사가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내는 것처럼 신비와 명상으로 치장된 나라도 아니다.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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