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두산 천지, 한라산 백록담
역사는 당장 손에 잡히는 실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존재한다. 역사가 지금 당장 한 벌의 솜옷을 당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건 이런 시련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그것의 존재를 믿을 때, 그리고 행동할 때 그것의 실체는 드러난다. 37-38
기차 안에는 민간인보다 군인들이 더 많았다. 중공군 특유의 누비솜옷을 입은 군인들은 태평스럽게 트럼프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저기 좀 보십시오. 공산혁명을 이룩한 중공군들이 제국주의자들의 놀이인 트럼프를 치고 있습니다.”
이학송이 건너편을 눈짓했다.
“네에, 아까부터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뭔가 안 어울리는 게, 모순적으로 보여요.”
김미선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 동무가 보는 건 표피모순입니다.”
..
“아 네, 겉보기에 불과한 모순이란 뜻입니다. 그냥 제 맘대로 지어붙인 말인데, 말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학송은 약간 멋쩍게 웃고는, “김 동무가 저걸 모순된 행동이 아닌가 하고 이상하게 보는 건 김 동무 생각이 어느 면에서 경직되고 획일화되어 있다는 증거지요.”
..
“그럼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저 군인들은 누굽니까? 장개석 군대를 몰아내고 거대한 중국혁명을 성취시킨 사람들입니다. 그 모태는 물론 모택동 주석이 이끌고 대장정을 마친 홍군이었죠. 10여 만 명이 출발해서 장정을 마치고 나자 홍군은 8천여 명 정도밖에 안 되었고, 공산당은 중국의 공동의 적인 일본놈들을 무찌르자는 명분으로 장개석과 화해를 했습니다. 그리고 홍군은 깃발을 내리고 장개석 군대의 제8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그 명분은 당당하고 떳떳한 것이었습니다만, 세상은 그 사실을 어떻게 보았겠습니까? 장개석이 승리감에 도취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인들이나 세계의 눈은 마침내 중국공산당이 종말을 고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표피관찰이었죠."
김미선이 재빠르게 말을 끼워넣었다.
“아이쿠, 이런 제가 한방 먹었군요."
이학송이 고개를 젖히며 웃었고, 김미선은 장난기 어린 눈으로 웃었다.
“맞습니다. 그게 완전히 빗나간 표피관찰 아니었습니까. 그 소수의 홍군은 팔로군이 되어 국민당군과 힘을 합쳐 일본군과 싸우는 한편, 국민당군을 아래로부터 붕괴시켜 나갔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일본놈들을 막아내고, 장개석 정부를 몰아내는 이중목적을 달성시키면서, 20세기 정치의 기적이라고 하는 중국혁명을 성취시켰습니다. 도대체 그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건 너무 간단하게도, 혁명이념을 투철하게 지키면서, 그것을 지속적으로 실천에 옮기는데 충실했던 것입니다. 레닌 동지의 그 기본적인 지도이념을 바탕으로 홍군 전체가 모주석에 대한 신뢰로 한 덩어리가 된 결과가 중국혁명 아닙니까. 그 강철같이 강한 정신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바로 저 군인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트럼프 놀이를 한다고 해서 그 정신에 제국주의적 훼손을 입거나 무슨 병이 들겠습니까? 저사람들에게 트럼프라는 건 그저 오락의 재미를 주는 단순한 도구일 뿐입니다. 저것보다 더 여러 가지 묘미를 주는 어떤 도구가 생기면 그들은 트럼프를 미련 없이 팽개쳐버릴 겁니다. 그런데 겉에 드러난 그런 하찮은 현상을 가지고 그들의 기본적인 정신상태나 의식문제 같은 걸 판단하려고 의미확대를 하는 건 위험천만한 병적 경직이고, 편벽된 아집이라 그겁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우리 조선사람들이 화투를 즐기는 것을 보고, 조선사람들은 일본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느니, 식민지시대를 그리워한다느니, 하는 식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우를 범하는 일입니다. 우리 조선사람들이 화투를 친다고 해서 어디일본놈들에 대한 증오나 원한이약해집니까?" 44-47
2 아시아인은 미국인과 동등하지 않다 아시아인은 인간이 아니며, 인간 이하의 존재다
주리안 토스들, 영국 병사
“빌어먹을! 작전권을 외국군에게 넘겨주다니, 그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유일한 넌센스고, 코메디요. 물론 맥아더가 요구했다는 말도 있고, 이 대통령이 넘겼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거나 요구했다고 넘겨준 사람이나, 넘겨준다고 받은 사람이나, 둘 다 똑가티 미친 사람들이오. 그럼 당신도 그 미친 사람들의 가엾은 피해자로군요.” 75
“지금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모든 미군들에게는 적을 증오하게 하는 생각을 고취시키고 있소. 적을 증오하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서 먼저 이렇게 가르칩니다. ‘아시아인은 미국인과 동등하지 않다. 아시아인은 인간이 아니며, 인간 이하의 존재다. 이런 정의를 내려놓고, 그러므로 아시아인은 물건과 같으 취급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동물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동물을 쥭이는 것과 같은 이유로 그들은 동물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동물을 죽이는 것과 같은 이유로 그들을 죽이는 것이며, 우리는 동물을 죽일 때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는 논리를 주입시킵니다. ..” 76
4 죽음의 대열, 해골의 대열
“.. 우리는 앞으로 적들보다 더 큰 힘을 길러야만 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힘은 무엇일까요? 적보다 좋은 무기를 갖는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힘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정신적인 힘과 물질적인 힘이 그것입니다. 정신적인 힘이란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 하나 죽더라도 혁명을 이루어내고야 말겠다는 돌처럼 단단한 마음, 강철같이 굳은 결심이 먼저 갖추어져야만 합니다. 그런 다음에 물질적인 힘인 무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강한 결심 없이는 아무리 좋은 무기를 가져도 싸움에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신무장’이라는 말도 생긴 것이고, ‘사상무장’이라는 말도 생긴 것이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도 매일 실시되는 학습을 통해서 사상무장을 철저히 해야만 여러분이 바라는 세상을 만들수 있고, 용맹스러운 혁명 전사인 빨치산도 될 수 있습니다. ..” 129
빨치산은 .. 러시아의 말입니다. 러시아는 지금의 쏘련으로, 바로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레닌 동지의 지도 아래 인민혁명을 성취시키게 되자 망하고 만, 왕이 다스리던 나라였습니다. 그 말을 우리말로 바꾸면 유격대가 됩니다. .. 유격대란 간단한 뜻은, 우리 편의 군대를 도와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적의 배후 곧 뒤나, 측면 곧 옆을 쳐서 적진을 어지럽히고 적군을 무찌르는 군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한 가지를 더 보태, 인민을 상대로 한 당의 정치 활동, 즉 혁명사상의 선전과 선동까지 받는 것이 빨치산이 할 일입니다. 그러니까 빨치산은 싸우면서 당의 선전활동과 선동활동까지 겸하는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치산을 당의’정치군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학습을 하는 것은 첫째, 여러분들 자신의 마음을 혁명하기 위해서이고, 둘째, 당이 내린 임무를 충실히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130-131
인민군이 전선에서 적과 정면으로 맞서서 싸우는 군대라면, 빨치산은 전선이 없이 이곳저곳에서 싸우는 군대입니다. 인민군이 싸우는 것을 전적으로 하는 것에 비해 빨치산은 당활동을 앞세우면서 싸움도 하는 군댑니다. .. 적을 쳐서 적의 무기로 무장해야 하고, 그 무기로 다시 적을 무찌르는 것이 빨치산입니다. 그리고 식량이나 옷 같은 것은 인민들의 지원과 협조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인민과 빨치산의 관계는 물과 고기와의 관계와 같습니다. 인민은 물이고, 빨치산은 고기라는 말입니다. 131
‘자유주의 배격 11훈’ 이라고도 하며, ‘자기비판 지침 11가지’
첫째, 동창·친지·부하· 동료의 잘못을 알면서도 책하지 않고 화평의 수단으로 방임해서는 안 된다. 둘째, 전면에서 말하지 않고 배면에서, 회의에서 말하지 않고 회의 후에 이러쿵저러쿵 시비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셋째, 타인을 책하지 않고,말하지 않는 것을 명석한 보신술이라고 치고 침묵하는 것은 잘못이다. 넷째, 간부라고 해서 자기 의견만 고집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다섯째, 개인 공격을 일삼아 보복하려는 태도는 좋지 않다. 여섯째, 반혁명분자의 말을 듣고도 당 기구에 보고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일곱째, 선전·선동하지 않고 당원의 임무를 망각하는 것은잘못이다. 여덟째, 군중의 이익에 해독이 되는 행동을 보고도 격분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하다. 아홉째, 자기가 맡은 바 일에 충실하지 않고 하루를 되는대로 지내는 것은 좋지 않다. 열째, 선배연하여 큰일을 할 능력은 없으면서 작은 일을 하기 싫어하는 태도는 좋지 않다. 열한 번째, 자기의 잘못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것, 또는 자기를 반성하되 비관과 실망으로써 그치고 마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 이상과 같이 11가지입니다. 134-135
6 거창, 그 오지의 낮과 밤
국방군 제11사단은 후방 즉 추풍령 이남의 공비섬멸이라는 분명한 작전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
작전 명령
연대작전명령부록의 지시사항은 세 가지였다.
첫째, 작전지역 내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
둘째, 공비의 근거지가 되는 가옥은 전부 소각하라.
셋째, 식량은 안전지역으로 운반하여 확보하라. 212-213
7 빨치산, 그 이름 없는 사람들의 진정성
미군 .. 그들은 다시 서울을 무자비하게 쑥밭을 만들어대고 있었다. 적이고 민간인이고를 가리지 않는 그들의 무차별한 폭격은 그야말로 자기네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제국주의적 잔학이고, 발악이었다. 다만, 그들의 무자비한 초토화작전에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는 인간들은 이미 서울을 떠나 이승만 정권을 에워싼 채 덕을 보고 있는 친일반민족세력들과 새롭게 생겨난 기회주의자들뿐이었다. 248
국민방위군 교육대는 훈련소가 아니었다. 난민수용소거나 병자수용소라는 것이 옳았다. 모두가 영양실조 상태인 데다가, 반 이상이 동상환자였다. 그런데 세끼 밥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고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급식이 해결되지 않고 있는 형편이었으니 다른 것들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피복 지급이 될 리가 없었으며, 추위를 막을 잠자리가 제대로 갖추어졌을 리가 없었고,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의무시설이 규모 있게 꾸며질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전시라고는 하지만 무계획과 우격다짐 앞에서 시재모는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그가 해야 할 급선무는 교육대장의 임무가 아니라 난민수용소장의 임무였다. 251
방위군교육대라는 울타리는 생사람들을 몰아넣고 서서히 굶겨죽이고, 병들여죽이고 있는 살인장에 지나지 않았다. 252
'밑줄여행 > 인문,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리 소설 읽는 법 - 양자오 유유 2017 e-book (0) | 2023.03.13 |
---|---|
우린 너무 몰랐다-해방,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 - 도올김용옥 통나무 2019 03910 (0) | 2023.03.06 |
시선으로부터 - 정세랑 문학동네 2020 03810 (0) | 2023.02.20 |
동백꽃지다 - 강요배그림 증언34명 증언정리 김종민 보리 2008 03910 (0) | 2023.02.13 |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문학동네 2021 03810 (1) | 2023.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