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 자기와 마주하는 시간
상담을 잘 견뎌낸 사람들은 삶을 다르게 받아들인다. 자기 자신에게 더 솔직해지고, 자신을 더 수용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덜 보게 되고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헛된 노력을 멈춘다.
어찌 보면 정신분석이란 자기 자신에 대해 철저하게 아는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여기 다섯 사람의 그러한 과정이 있다. 남편으로 인해 우울한 채영씨, 느닷없는 사고로 절망에 빠진 은철씨, 관계에 대한 집착으로 언제나 목마른 제니스. 주변사람들에 대한 분노에 휩싸여 괴로워하는 미영씨,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고 낙담한 어느 성직자. 7
깊은 우울, 극심한 좌절, 사랑에 대한 집착, 타인을 향한 분노, 자신의 무가치함으로 인한 주눅 듦. 이 다섯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8
레슬러의 사랑
- 관계란 손안에 든 물과 같다. 놓치지 않으려 주먹을 꼭 쥘수록 물은 더 빨리 손에서 빠져 나간다. 그렇게 관계를 잃고 나면 필사적으로 잡으려 했던 힘보다 더한 분노가 찾아온다. 그러나 사실 그 분노는 관계가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지 못한 자신을 향한 책망이다.
관꼐의 경계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해야 할 분석가들도 종종 경계선 성격장애라는 명명에 한 인간의 모든 삶을 밀어 넣음으로써 또 다른 경계를 지어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16
처음의 조용하고도 서로에게 예의 바른 그 시기를 우리는 '신혼(Honeymoon period)'이라고 불렀다. 24
나는 내가 '정상'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34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제 전부를 주려고 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제 의도를 모르는 것 같아요.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요."(제니스) 39
내가 완전히 받아들여져 본 적이 있던가, 누군가 내게 100%를 주는 경험은 고사하고 아무런 사심 없이, 편견 없이, 의도 없이 온전하게 나를 받아들여준 사람이 있던가, 결국 나는 누군가의 목적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졌구나 하는 생각이요. 그러니 제겐 100%를 줄 기회도 없었던 거예요."(제니스) 39-40
정신분석적 이론에서는 초기 애착관계에서 형성된 불안정 애착, 양가감정형 애착을 경계선 성격장애의 주원인으로 설명한다. 43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계가 아니라 공간이 아닐까요? 경계는 오직 하나의 선이어서 바로 눈앞에 두고도 넘어갈 수 없게 하는 장벽, (투명한) 차단막입니다. 따라서 경계는 관계의 균열입니다. 하지만 관계 사이의 공간은 공명을 가능하게 하죠. 공간은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때로는 물리적인) 영역이고, 그것은 사생활의 존중이라는 방식으로, 또는 정서적 여유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적, 또는 특수한 환경으로서 공간의 제공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46
우리는 어떻게 관계의 공간을 마련할 것인가? 47
단정적인 말투는 갈등을 불러온다. 단정적인 태도 역시 갈등을 일으킨다.
자녀나 배우자나 친구들을 대하는 자신의 말투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지면 좋겠다. 47
그가 내게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그의 감정이 자유롭게 전해질 수 있도록 채근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가 내 기분대로 해주지 앟아도 나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을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상대가 내 뜻대로 해주지 않을 때, 사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자기 실망감 때문에 좌절한다. 그래서 좌절감을 느끼게 만든 그 사람을 증오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심리적 기제를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왜 화가 나는지 알지 못한다. 48
사실 증상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통로인 것이다. 49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경계선 성격장애는 완전한 사랑르 받지 못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사랑을 받지 못해 생겨난다고 말이다. 54
스스로를 없앤 청년
- 걸려 넘어진 돌을 딛고 일어서 오히려 디딤돌로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넘어지던 바로 그 순간에 어떤 실수를 했는가, 다시 잘 돌이켜본다. 실수에 대한 수치심을 무릅쓰고서라도.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많은 것들 중 잃어버린 그 하나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할 때가 너무나 많다. 60
'난 장애에 대해 아무런 편견도 없어.'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사실은 '난 장애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어'.'가 더 정확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86
그는 태어나서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에 소아마비를 앓았다.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으세요?"
"한 번도 달려본 적이 없어서 달린다는 것이 어떤 감각인지 알지 못해요. 그러니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죠."
달리는 감각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사람과 달리는 감각을 또렷이 기억하는 사람이 달리지 못할 때, 그 고통은 어느 쪽이 더 클까? 90
'내담자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그들이 진정으로 변해야겠다고 결심하게 하는 것이 어렵다.'
심지어 라캉은 "내담자들은 변화하기 위해 분석을 받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유지할 방법을 찾기 위해 분석가에게 온다."고까지 말한다. 103
구원받기를 원하는 여자
- 분노가 자신을 향할 때 우울이 된다. 우울한 사람은 사실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왜, 누구에게 분노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납득하지 못한다면 우울은 해결되지 않는다.
가족들은 자신들이 만든 과거의 고통에 매몰되어 있었다. 113
얼마나 많은 부부들이 사실은 애정 없이 사는지, 놀라울 일도 아니다. 117
처음에는 공감능력이 없는 남편들을 원망하다가 남편에게 없는 것을(공감능력) 달라고 징징대는 아내들에게 더 공감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120
"교활한 거죠. 채영 씨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교활하다고 느껴질 만큼 교묘하고 복잡합니다. 그렇게 복잡하게 얽어놓아야 자기 치부가 쉽게 드러나지 않으니까요." 131
화를 내는 궁극적인 목적은 화나게 한 이유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많은 사람들이 화에 대해 잘못된 생가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화를 내면 자신이 화난 이유가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화의 뜨거움만큼 화난 이유가 강력하게 전달될 것이라고 믿지만, 사실은 그 뜨거움만큼 상대의 방어벽도 강력해진다....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날것의 감정 그대로를 드러내기보다는 그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해낼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합시다.." 141
우리는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농담', 그런 건 없다. 농담이야말로 가식 없는 진심이다. 정신분석은 농담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그것만이 진심이라고 확정한다. 147
누락된 자의 슬픔
- 외로움으로 인한 상처는 대화할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로부터도 말 걸어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체험에서 비롯된다.
남자 분석가들조차도 자신의 아내를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고, 친밀한 정서적 관계를 맺지 못해 발생하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을 가지고 있다. 197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경험을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괴로움의 원인으로 돌아가, 그 자리에 붙박여 있던 자기 자신을 만나고 미뤄왔던 삶의 과정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205
많은 사람들이 외롭다고 느낀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외로운 것이 아니라 심심한 것이다. 그 심심함이 반복되면 불만이 쌓인다. 그래서 남편에게, 자녀들에게 놀아달라고 요구한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좀 더 멀리 있는 관계를 찾는다. 친구나 이웃, 동호회 사람들과 만나 심심함을 달랜다. 그 순간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깊은 외로움은 이런 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그들과 아무리 수다를 떨어도 오히려 헛헛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외로움은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심심함과 외로움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외로움이란, 내가 말할 대상이 없는 데서 비롯된 상처가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도 말 걸어지는 대상이 아니라는 데서 비롯도니 것이고 했다. 말 걸어지는 대상이라는 것은, 존재감의 확인이다. 우리에게는 말 걸어주기를 진정 원하는 사람, 오직 한 사람, 또는 소수의 몇 명이 있다. 그들은 대체로 부모들이다. 그들의 말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수용적이어야 한다. 어루만지는 말이어야 한다. 그것이 최선이다. 217-218
마음이 가난한 자
-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바로 가난이다. 가난을 가장 소중한 재산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신은 주저함 없이 그를 참된 아들로 삼을 것이다.
부모는 우리를 살리기도 하지만, 그들만큼 우리를 금지하고 명령하고 체벌하는 사람도 없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들을 생각해보라. "하지마!", "만지지 마!", "울지마!", "가만히 있어!", "뚝!", "혼난다!", "맞는다!", 납득할 수 없는 체벌을 누구로부터 가장 많이 받았는지 생각해보라. 222-223
사랑하지만 무엇을 주어야 할지 모르거나 자식에 대해 아예 고민을 하지 않기도 한다. 223
후회는 과거를 바꿀 수 없지만 미래를 실패로부터 구원한다. 그런 후회의 경험은 성찰로 승화된다. 하지만 상습적인 후회는 변화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것이다. 229
무의식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고 사는지 우리는 잘 인식하지 못한다. 252
우리는 대체로 가능하면 고통을 빨리 잘라내고 싶어 한다. 어떤 고통들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삶의 핵심과 관련된 고통일수록 단박에 잘라내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고통을 친구로 삼아야 한다.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의 삶이 불행하다는 반증이다. 고통을 없애려는 노력보다 고통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장악하고, 고통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마음의 품격이 고매한 사람일수록,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안다. 그들은 삶과 고통은 한 몸이라는 것을 알고 받아들인 이들이다. 264
맺음말 - 자신을 안다는 것
성찰이란, 어떤 상황이나 원칙에 자신의 삶과 경험을 대입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더 나은 자신으로 변화하기 위해, 어떤 배움을 얻기 위해 적극적인 사유 활동을 할 때 가능하다. 269
더 이상 교활해지지 말고, 자신에게 있는 그대로 솔직해져야 한다.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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