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초인철학 - 강대석(전 대구효성여대 교수)

니체의 아버지는 개신교 목사였으며 니체의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도 다 같이 목사였다.  13


아폴로는 가상, 조형, 절제, 겸손, 이성 등을 상징하는 신이고 디오니소스는 정열, 도취, 오만, 불손, 반항 등을 상징하는 술의 신...

니체는 한 시대의 정신문화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주도할 때에 발전하고 아폴로적인 것이 주도할 때에 쇠퇴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니체의 모든 철학은 이 원리를 조명하는 데 집중되었다.  14


니체 철학이 지니는 일곱 가지 특징

1 반주지주의 - 주지주의란 삶의 가치를 지식에 두는 철학사조이다. 주지주의는 '지=덕=행복'.

니체에 의하면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 철학은 제자들을 망쳤을 뿐만 아니라 2000년에 걸쳐 내려오는 서구 허무주의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2 반도덕주의 - 니체는 도덕을 '군주도덕'과 '노예도덕'으로 구분한다. 군주는 고귀하고 힘센 인간 혹은 집단을 대표하는 자로서, 이러한 강자들은 항상 스스로와 합치되는 것을 '좋은 것'으로 보고 그들보다 약하고 못한 사람들의 도덕을 '나쁜 것'으로 보았다.

선이란 군주도덕에서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강인하고 고귀함을 나타내는 특성이다. 이에 반하여 허역, 비겁, 공포, 아부, 저속, 위선 등은 약한 자의 덕이다.  

약자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약자들은 군주도덕을 노예도덕으로 바꾸어 버렸다.

종래의 노예도덕을 다시 군주도덕으로 복귀시키려는 도덕혁명가였다. 


3 반기독교주의 - 모든 종교는 결국 허무주의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니체의 결론이다.


4 반염세주의

쇼펜하우어에서는 세계의 본질이 맹목적 의지이고 그러한 의지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비극이다. 삶은 결코 살 만한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든 본능적인 욕망을 억누르는 금욕을 통해 해탈의 길을 찾아야 한다.

니체는.. 삶의 비참함에서 도피하려는 쇼펜하우어의 허무주의가 소극적 허무주의라면 삶의 무가치성을 부정하고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스스로의 철학은 적극적인 허무주의이다. 니체는 철저하게 현세의 삶을 긍정하려 한다.


5 반여성주의 - 약자의 천한 도덕인 복수심에 불타 있는 여자들은 이기적이고 폭군적이며 교묘하고 잔꾀를 발휘하여 강한 남자를 유혹하므로 여성적인것이 우세할 때 인류는 점차 허무주의에 빠져 퇴폐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강인한 의지를 가진 남자들은 여성들을 무자비하게 다루어 부엌일이나 시키면서 남자에게 봉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니체의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6 반민주주의 - 니체는 보통사람을 '어중이떠중이'라 부르며 모멸했다. 인류는 강인한 지배자에 의하여 초인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니체는 '평등'이라는 말을 '동정'이라는 말과 함께 너무 싫어했다.

니체으 이상은 귀족주의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해야 한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은 많은 부분 니체 철학을 답습하고 있다.


7 반사회주의 - 시민민주주의가 정치적 평등을 목표로 했다면 사회주의는 여기에 경제적 평등까지 덧붙이려 한다.  15-22


니체는 이 작품을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이 자신을 덮쳤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며 ㄴ계시받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에게도 차라투스트라를 읽는 대신 체험하라고 권한다.  23


이 책이 제시하는 핵심사상은 무엇인가?

권력의지(힘에의의지), 초인(위버멘쉬), 영겁회귀라는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이상은 니체가 망치를 들고 종래의 가치를 모조리 파괴한 후에 내세우는 긍정적인 것들이다.  25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  39


나는 자기 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신을 징벌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는 자기 신의 분노 때문에 파멸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

나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모든 것이 자기 안에 들어올 정도로 영혼이 넘쳐나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렇게 하여 모든 사물은 그가 몰락하게 하는 것이다.  44


인간은 춤추는 별을 탄생시킬 수 있기 위해 자신의 내부에 혼돈(Chaos)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45


세 단계의 변화

잘 견디는 정신은 가장 무거운 것들을 모두 짊어진다. 짐을 지고 사막으로 서둘러 가는 낙타처럼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간다. 

그러나 가장 외로운 이 사막에서 두 번째의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정신은 사자가 되고, 사자는 자유를 획득하려 하며, 자신의 사막에서 주인이 되려 한다.

정신은 최후의 주인, 최후의 신에 대적하려 하며, 승리를 위해 거대한 용(독창적인 개인을 집어삼키려는 도덕을 상징한다)과 싸우려 한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이나 신으로 부르려 하지 않는 그 거대한 용이란 무엇인가? 거대한 용의 이름은 "너는 해야 한다"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겠다"라고 말한다.

"너는 해야만 한다"는 황금빛을 내면서 정신의 길을 막고 있다. 그것은 비늘 달린 하나의 짐승이며 그 비늘 하나하나에서 "너는 해야만 한다!" 가 황금빛으로 반짝거린다.

천년 묵은 가치가 그 비늘들 위에서 반짝거리고, 모든 용 중에서 가장 힘센 용이 이렇게 말한다. "만물의 모든 가치, 그것이 내 몸에서 빛난다."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고, 창조된 모든 가치는 바로 나다. 진실로 '나는 하겠다'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용은 그렇게 말한다.

나의 형제들이여, 무엇을 위해 정신 속에 사자가 필요하겠는가? 왜 체념과 경외심으로 가득 찬 짐 싣는 짐승으로 만족하지 않는 것인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것, 그것은 사자도 아직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를 창출해내는 것, 그것은 사자의 힘이 할 수 있다.

자유를 창조하고 의무 앞에서도 신성한 부정을 말하는 것, 그것을 위해 형제들이여, 사자가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가치에 대한 권리를 획득하는 것, 그것은 잘 견디고 경외심으로 가득 찬 정신에게 가장 두려운 획득이다. 

이 정신은 일찍이 '너는 해야 한다'를 자신의 가장 신성한 것으로서 사랑했다. 그러나 이제 이 정신은 가장 신성한 것 속에서도 환상과 자의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자기가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를 약탈한다. 그러한 약탈을 위하여 사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말해보라. 형제들이여, 사자도 할 수 없는 무엇을 어린아이가 할 수 있겠는가? 어째서 약탈하는 사자가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며 망각이다. 새로운 시작이며 유희이다.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고 하나의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의 유희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잃어버린 자는 자신의 세계를 얻는다.  58-59


잠을 잘 자기 위해 깨어 있어라. 그리고 실제로 삶이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내가 무의미를 택할 수밖에 없다면, 잠은 내가 선택할 만한 가장 가치 있는 무의미가 될 것이다.

이제야 분명히 알겠다. 일찍이 사람들이 덕의 스승을 구할 때 그들이 제일 먼저 구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은 좋은 잠과 그것을 위한 마취제와도 같은 덕을 구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찬양받는 강단의 현자들에게는 지혜란 꿈 없는 잠이었다. 그들은 삶의 더 깊은 의미를 알지 못했다.  63


육체와 대지를 경멸하고, 천상적인 것들과 구원의 핏방울을 만들어 낸 것은 바로 병들어 죽어가는 자들이었다...

허루를 만들어내고 신에 매달리는 자들 가운데는 항상 병든 사람들이 많았다.  66


형제들이여, 오히려 건강한 육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그것이 더 정직하고 더 순수한 목소리이다.  67


인간은 극복되어야만 할 그 무엇이다. 그 때문에 그대는 그대의 덕을 사랑해야만 한다. 그대는 그 덕으로 인하여 파멸하게 도리 것이기 때문이다.  72


쓰인 모든 것들 가운데에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곧 정신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타인의 피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한가한 독서가들을 증오한다.  76


산과 산 사이에서 가장 가까운 길은 봉우리에서 봉우리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그대는 긴 다리를 갖고 있어야 한다. 잠언은 산봉우리여야 한다. 그리고 잠언을 들으려면 키가 크고 몸집이 거대해야 한다. 희박하고 맑은 공기, 가까이 있는 위험, 즐거운 악의로 가득찬 정신, 이들은 서로 잘 어울린다...

지혜는 우리가 용기 있고 태연하고 조소하고 난폭하게 굴기를 원한다. 지혜는 여자로서 항상 투사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77


진실로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은 인생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광기가 들어 있다. 그러나 광기에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이성이 들어 있는 것이다...

내가 신을 믿게 된다면 춤출 줄 아는 신만을 믿으리라.

그리고 내가 나의 악마를 보았을 때 나는 그가 신중하고 철저하고 심오하고 엄숙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무거운 정신이었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낙하하고 만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웃음이다. 자, 무거운 정신을 죽이도록 하자!

나는 걷는 법을 배웠다. 그때부터 나는 달렸다. 나는 나는 법을 배웠다. 그때부터 나는 움직이기 위해 누군가에 의해서 밀쳐지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나는 가볍고, 이제 나는 날고 있다. 이제 나는 내 자신을 내려다 본다. 이제 어떤 신이 나를 통해 춤을 추고 있다.  78


차라투스트라는 젊은이가 앉아 있는 옆의 나무를 붙잡고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나무를 내 손으로 흔들려 해도 나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바람은 이 나무를 괴롭히고, 이 나무를 그것이 원하는 쪽으로 굽어지게 한다. 우리를 가장 심하게 구부러뜨리고 괴롭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다."

..

인간도 나무와 다를 것이 없다. 

높고 밝은 곳으로 올라가려 하면 할수록 뿌리는 더욱더 강하게 땅 속으로, 밑으로, 어둠 속으로, 심연 속으로, 악 속으로 뻗어가는 것이다."..

"많은 영혼은 우리가 먼저 창조하지 않는 한 결코 벗겨지지 않는 것이다."  79


정신의 자유를 얻은 자라고 할지라도 자신을 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내부에는 아직도 많은 감옥과 부패물들이 남아 있다. 그들의 눈이 한층 더 맑아져야만 한다...

그대를 악의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들도 그대가 고귀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고귀한 자는 모든 사람드에게 방해물이 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고귀한 자는 새로운 것을, 새로운 덕을 창조하려 한다.  81


국가란 모든 냉혹한 괴물 중에서 가장 냉혹한 괴물이다. 그것은 냉혹하게 거짓말도 한다. 다음 같은 거짓말이 그 입으로부터 새어나온다. "나 곧 국가가 민족이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민족을 창조하고 민족의 머리 위에 믿음과 사랑을 걸어놓은 것은 창조자들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삶에 봉사했다.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덫을 설치해 놓고 그것을 국가라 부른 것은 파괴자들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머리 위에 한 자루의 칼과 백 가지의 욕망을 걸어놓았다. ..

국가는 선과 악에 대한 모든 언어를 동원하여 거짓말을 한다. 국가각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며,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훔친 것이다. 

국각의 모든 것이 가짜이다. 물어뜯기를 잘하는 국가는 훔쳐낸 이빨로 물어뜯는다. 국가의 내장까지도 가짜이다. ..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자들이 태어났다. 이 잉여인간들을 위해 국가가 만들어진 것이다. 

보라, 국가가 어떻게 그들을, 어중이 떠중이들을 유인하는가를! 국가가 어떻게 그들을 삼키고, 씹고 또 씹는가를!

"지상에서 나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나는 모든 것을 정리하는 신의 손가락이다"-이 괴물은 이렇게 외친다. 그러면 긴 귀를 가진 자나 눈이 어두운 자만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이 아니다!

아, 그대 위대한 영혼들이여, 그대들의 귀에도 국가는 음침한 거짓말을 속삭인다! 아, 국가는 자신을 아끼지 않는 풍요로운 마음들을 쉽게 알아낸다!

그렇다. 그대 낡은 신을 이겨낸 자들이여, 국가는 그대들의 마음까지도 알아낸다! 그대들은 전쟁에 지쳤고 지친 나머지 이제 새로운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이 새로운 우상은 영웅과 영예로운 자들을 주위에 거느리고 싶어한다! 이 냉혹한 괴물은 양심의 햇빛을 쬐고 싶은 것이다!

그대들이 이 새로운 우상인 국가를 숭배하기만 한다면 국가는 그대들에게 모든 것을 주려 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국가는 그대들의 빛나는 덕과 자랑스러운 눈빛을 매수하는 것이다.

국가는 그대들을 이용하려 어중이떠중이들을 유혹하려 한다! 그렇다. 여기서 지옥의 요술이 고안되었으니 그것은 신성한 명예로 장식되어 방울소리를 내는 죽음의 말(馬 말마)과 같다!

그렇다, 여기서 삶으로 찬미되는 만인을 위한 죽음이 고안되었으니. 그것은 진실로 모든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봉사인 것이다!

선한 자나 악한 자 모두가 독을 마시게 되는 곳을 나는 국가라 부른다. 선한 자나 악한 자 모두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곳을 나는 국가라 부른다. 모든 사람의 만성적인 자살이 '삶'이라고 불리는 곳을 나는 국가라 부른다!

보라, 이 잉여인간들을~ 그들은 발명가들의 작품과 현자들의 보물을 훔쳐낸다. 그들은 자기들의 도둑질을 교양이라 부른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병이 되고 재앙이 된다!

보라, 이 잉여인간들을! 그들은 항상 병들어 있고, 자기들의 담즙을 토해내며, 그것을 신문이라 부른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삼켜버리지만 소화하지 못한다.

보라, 이 잉여인간들을! 그들은 부를 손에 넣지만 그로 인해 더욱더 가난해진다. 그들은 권력을 원하며, 무엇보다도 권력의 지렛대인 많은 돈을 원한다. 이 무능한 자들은!

보라, 기어 올라가는 이 약삭빠른 원숭이들을!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기어오르며 싸우다 진흙과 심연 속으로 떨어져버린다.

그들 모두가 왕좌에 오르려 한다. 마치 행복이 왕좌 위에 앉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은 그들의 광기이다. 그러나 대부분 왕좌 위에는 진흙이 있고 또한 와좌는 진흙 위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미치광이들이며, 기어오르는 원숭이들이며, 열병환자들이다. 그들의 우상인 저 냉혹한 괴물은 악취를 풍기며 우상숭배자들 또한 모두 악취를 풍긴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저들의 입과 욕망이 풍기는 악취 속에서 질식 하기를 원하는가? 차라리 창문을 깨고 바깥 공기 속으로 뒤어나가라!

악취를 피하라! 잉여인간들의 우상숭배를 멀리하라!

악취를 피하라! 사람을 제물로 만드는 독기를 벗어나라!

위대한 영혼들을 위해 아직도 대지는 열려 있다. 홀로 있는 자들과 둘이서 있는 자들을 위해 아직도 많은 빈자리가 남아 있고, 그 주위로 고요한 바다 냄새가 불어온다.

위대한 영혼들을 위해 아직도 자유로운 삶이 열려 있다. 진실로 적게 소유한 자는 그만큼 소유하는 것도 적다. 적당한 가난이여, 찬미받을지어다!

국가가 끝나는 곳, 그곳에서 비로소 잉여인간들이 아닌 인간이 시작된다. 그곳에서 비로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의 노래가, 독특하고 대치 될 수 없는 가락이 시작된다.

국가가 끝나는 곳, 형제들이여, 그곳을 보라! 그대들에게는 보이지 않는가, 무지개와 초인(위버멘쉬)으로 나아가는 다리가?  88-91


고독이 끝나는 곳, 그곳에서 시장이 시작된다. 그리고 시장이 시작되는 곳에서 위대한 배우들의 소으모가 독파리들의 윙윙거림이 시작된다.  91


만일 그대가 친구를 갖고자 한다면 그대 또한 그 친구를 위해 싸울 각오를 해야 한다. 싸우기 위해서는 적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친구 속에 들어 있는 적까지도 존경해야 한다. 그대는 몸을 던지지 않고서도 그대의 친구에게 접근할 수 있는가?  98


그대는 그대의 친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그가 잠들어 있는 것을 살펴본 적이 있는가? 친구의 얼굴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면이 고르지 못한 불완전한 거울에 비친 그대 자신의 모습이다.

그대는 그대의 친구가 잠들어 있는 것을 살펴본 적이 있는가? 친구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어 놀라지 않았는가? 오, 친구여.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친구는 추측과 침묵의 대가여야 한다. 그대는 모든 것을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대는 그대의 친구가 깨어 있을 때 하는 일을 그대의 꿈을 통해 알아내야 한다. 

그대의 동정은 추측이어야 한다. 그대의 친구가 동정을 원하는지 아닌지를 우선 알아보기 위해서. 어쩌면 그가 사랑하는 것을 그대의 맑은 눈과 영원한 눈초리일지도 모른다.

친구에 대한 동정은 단단한 껍질 속에 숨겨져 있어야 한다. 그것을 깨뜨리려다 이빨 한 대쯤 부러져야 한다. 그렇게 하면 동정은 비로소 달콤한 맛이 날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친구에 대하여 맑은 공기이며 고독이며 빵이며 약인가? 자기 자신의 쇠사슬은 풀지 못하면서 친구에게는 구제자인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대는 노예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친구가 될 수 없다. 그대는 폭군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친구를 가질 ㅅ 없다.

여자 내부에는 너무나 오랫동안 노예와 폭군이 숨어 있었다. 그 때문에 여자는 우정을 맺을 수 없는 것이다. 여자는 사랑만 알고 있을 뿐이다.

여자의 사랑 속에는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한 불의와 무분별이 들어 있다. 심지어 여자의 지적인 사랑 속에도 빛과 함께 갑작스러운 공격과 번개와 밤이 들어 있다. 아직도 여자는 우정을 맺을 능력이 없다. 여자들은 여전히 고양이요, 새이다. 아니면 고작해야 암소이다.

아직도 여자는 우정을 맺을 능력이 없다. 그러나 말해보라, 그대 남자들이여, 그대들 가운데 누가 우정을 맺을 능력을 갖고 있는가?

오, 그대 남자들이여. 그대들의 영혼은 얼마나 가난하고 초라한가! 그대들이 그대들의 친구에게 주는 것만큼 나는 나의 적에게까지도 주려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때문에 내가 더 가난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동료의식이라는 게 있다. 그러나 우정이 있기를!  99-100


차라투스트라는 지상에서 선과 악보다 더 강한 임을 발견하지 못했다. 

평가하지 않는 민족은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민족이 스스로 보존하려면, 이웃 민족이 평가하는 것과 똑같이 평가해서는 안 된다. 

어떤 민족에게는 선으로 간주되는 많은 것들이 다른 민족에게는 조소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어떤 곳에서는 악이라고 불리는 많은 것들이 다른 곳에서는 화려한 영예로 장식되어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100


사랑하는 자는 경멸하기 때문에 창조하려 한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경멸한 적이 없는 자가 사랑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형제여. 사랑과 함께, 창조와 함께 그대의 고독으로 가라. 그러면 정의가 절름거리며 그대의 뒤를 따라갈 것이다.

형제여, 눈물과 함께 그대의 고독으로 가라.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하기를 원하며 그리하여 멸망해가는 자를 나는 사랑한다.  109


여자에게는 남자가 하나의 수단이며, 그 목적은 언제나 아기이다. 그런데 남자에게는 여자가 무엇인가?

진정한 남자는 두 가지를 원한다. 위험과 유희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남자는 가장 위험한 장난감으로서 여자를 원한다.

남자는 전쟁을 위해 훈련을 받아야 하며, 여자는 전사의 휴식을 위해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어리석은 짓이다.

전사는 지나치게 달콤한 과인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사는 여자를 좋아한다. 아무리 달콤한 여자라 할지라도 씁쓸하기 때문이다.  110


그대는 자식을 원해도 될 사람인가?  ..

무엇보다도 먼저 그대는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바로 세워야 한다.  115


어떤 남자는 진리를 찾으려 영웅처럼 떠났으나, 결국 치장된 보잘것 없는 거짓을 손에 넣었다. 그는 그것을 자기의 결혼이라고 부른다.  116


언젠가 그대들은 그대들 자신을 넘어 사랑해야 한다! 그러므로 먼저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그러기 위해 그대들은 사랑의 쓴 잔을 마셔야 했다.  117


진실로 나누어 주는 사랑은 이처럼 모든 가치의 강탈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탐욕이 있다. 그것은 너무나 가난한 탐욕, 굶주려 있기 때문에 항상 훔치려 하는 탐욕, 병든 자들의 탐욕, 병든 탐욕이다. 

이 탐욕은 모든 빛나는 것들을 도둑의 눈으로 바라본다. 이 탐욕은 먹을 것을 풍부하게 갖고 있는 자를 굶주림의 탐욕으로 헤아리고, 나누어주는 자들의 식탁 주위를 항상 어슬렁거린다.

이러한 탐욕은 질병과 눈에 보이지 않는 퇴화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 도둑 같은 탐욕은 육체가 병들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23


나는 그대드에게 나를 버리고 자신을 찾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대들이 모두 나를 부인했을 때, 비로소 나는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127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꿰뚫어보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완전히 이해된 것은 아니다.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침묵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141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는 덕을 갖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리고 적어도 자기는 '선'과 '악'에 정통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 모든 거짓말쟁이와 바보들에게 "도대체 그대들이 덕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대들의 덕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대들로 하여금 바보와 거짓말쟁이들에게서 배운 낡은 말에 싫증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온 것이다.  149


그대들은 미지근한 자들이다. 그러나 모든 깊은 인식은 차갑게 흐르는 것이다. 정신의 가장 깊은 샘물은 얼음처럼 차다. 그것은 뜨거운 손과 열정의 행동가에게 청량제이다.  161


영원히 변치 않는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176


선과 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하는 자는 진실로 먼저 파괴자가 되어야하며 가치를 깨뜨려야 한다.  177


한 가지만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있으며 그 밖의 것들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는 인간들 - 하나의 커다란 눈, 하나의 커다란 입, 하나의 커다란 배 혹은 하나의 커다란 그 무엇에 불과한 인간들 - 나는 그들을 거꾸로 된 불구자라고 부른다.  206


순종을 가르치는 이 교사들! ..

나는 무신론자인 차라투스트라이다. 무신론자인 나는 묻는다. "나보다 더 신을 믿지 않는 자는 누구인가? 그의 가르침을 기꺼이 받겠다."

나는 무신론자인 차라투스트라이다. 나는 나와 동등한 자를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자신에게 자신의 의지를 부여하며 모든 순종을 거부하는 자들은 모두 나와 동등하다. 

나는 무신론자인 차라투스트라이다. 나는 어떤 우연도 모두 나의 솥에 넣어서 삶는다. 그리하여 우연이 그 속에서 잘 삶아졌을 때, 비로소 나는 그것을 나의 음식으로서 환영한다.

실로 많은 우연이 나에게 주인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나의 의지는 우연에게 더 높은 주인처럼 말했다. 그러자 우연은 애원하며 무릎을 꿇고 말했다. 

내게서 머물 곳을 찾고 사랑을 얻고자 애원하면서 "보라, 오 차라투스트라여. 친구만이 친구에게 찾아오는 것을!" 하고 아부하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그러나 아무도 내 말을 알아들을 귀를 갖고 있지 않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불어오는 바람에게 이렇게 외치련다.

그대 소인들이여! 그대들은 점점 더 왜소해질 것이다. 그대들은 부서져 사라질 것이다. 그대 안일한 자들이여! 그대들은 곧 멸망할 것이다.

- 그대들의 왜소한 덕으로 인해, 그대들의 온갖 체념으로 인해, 그대들의 온갖 바보 같은 복종으로 인해!

너무나 관대하고 너무나 연약하다. 이것이 그대들의 대지 모습이다! 그러나 한 그루의 나무가 크게 자라기 위해 그 나무는 단단한 바위 속에 강한 뿌리를 내려야 한다!

하찮은 것이라 하여 그대들이 제쳐놓은 것까지도 인류의 미래라는 옷감으로 짜이며, 그대들의 허루(Nichts)까지도 하나의 거미줄이고, 미래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한 마리의 거미인 것이다.

그대들 왜소한 덕을 가진 자들이여, 그대들이 무엇인가 받을 때, 마치 훔치는 것과 흡사한 모습이다. 그러나 악한 사이에서조차도 명예심이라는 것이 있어 이렇게 말한다. "강탈할 수 없을 경우에만 훔쳐내야 한다."

"기다리면 주어진다." - 이것 또한 순종이 가르치는 것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대 안일한 자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말한다. 빼앗는 일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더욱더 많은 것을 빼앗길 것이다!

아, 그대들이 어중간한 의욕을 다 버리고, 행동할 때나 나태할 때나 항상 단호해지기를!

아, 그대들이 다음과 같은 나의 말을 이해하기를! "항상 그대들이 의욕하는 것을 행하라. 그러나 먼저 의욕할 수 있는 자가 되어라!"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항상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나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라.

큰 사랑으로써 사랑하고 큰 경멸로써 사랑하라!" 신을 믿지 않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248-249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창조자 이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창조자란 인간의 목표를 창조하고 대지에 그 의미와 그 미래를 부여하는 자이다. 이 사람이 비로소 선과 악이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것이다.  282


자기 자신에게 명령하지 못하는 자는 복종해야 한다.  285


고귀한 영혼을 지닌 자들은 무엇이든 공짜로 소유하기를 원치 않는다. 특히 삶을.

천민의 근성을 가진 자는 공짜로 살고자 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삶을 선물로 부여받은 우리는 그에 대해 가장 잘 보답하기 위해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를 항상 생각한다.

"삶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을 우리는 삶을 위해 지켜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다.

우리는 즐거움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곳에서 즐기려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 즐기려 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즐거움과 순결은 가장 부끄러움을 잘 타는 것들이다. 이 둘은 추구의대상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소유해야 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죄아 고통이어야 한다.  286


진실해지는 것,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는 드물다! 그리고 진실할 수 있는 자들도 아직 그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선한 자들이 가장 진실해 질 수 없는 자들이다. 

오, 이 선한 자들! 선한 자들은 결코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한 선은 정신에 대해 일종의 병인 것이다.

이러한 선한 자들은 양보하고 복종한다. 그들의 가슴은 흉내 내고, 그들은 마음으로 부터 복종한다. 그러나 복종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법이다!

하나의 진리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선한 자들이 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함께 모여야 한다. 오, 형제들이여. 그대들 또한 이러한 진리에 어울릴 정도로 악한가?

대담한 시도, 오랜 불신, 잔혹한 부정, 혐오, 살아 있는 것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 - 이러한 것들이 함께 모이기란 얼마나 드문 일인가! 그러나 진리는 그러한 씨앗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이제까지 모든 인싱은 양심의 가책과 더불어 성장해왔다! 부숴버려랴, 그대 인식하는 자들이여. 부숴버려라. 낡은 가치표를!  287


선과 악이라고 불리는 낡은 망상이 있다. 지금까지 이 망상의 수레바퀴는 예언자들과 점서악들 주위를 돌았다.

일찍이 사람들은 예언자들과 점성가들을 믿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모든 것은 운명이다. 그대는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해야 한다!"라고 믿었다...

별들과 미래에 관해서는 이제까지 인식이 아니라 망상만 존재해왔다! 그러므로 선악에 관해서도 이제까지 인식이 아니라 망상만 존재해왔다!  288-289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일찍이 사람들은 이런 말들을 신성하게 생각해왔다. 사람들은 이러한 말들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고, 신발을 벗었다. ..

부숴버려라 부숴버려라, 낡은 가치표를!  289


나는 그대들을 새로운 귀족으로 임명하고 그 길을 제시한다. 그대들은 미래를 잉태하는 자, 미래를 가꾸는 자, 미래의 씨를 뿌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대들이 어디서 왔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가고 있느냐가 앞으로 그대들의 명예가 되게 하라!  290-291


오, 형제들이여. 잘 먹고 잘 마시는 것, 그것은 실로 헛된 일이 아니다! 부숴버려라 부숴버려라, 결코 즐거워할 줄 모르는 자들의 가치표를!  292


가장 훌륭한 자에서도 구역질 나는 그 무엇이 있다. 그리하여 가장 훌륭한 자들까지도 극복되어야 할 존재인 것이다!  293


부숴버려라, 형제들이여. 이 새로운 가치표를 부숴버려라!.. 예속을 권장하는 설교이기 때문이다!  294


그대들은 오직 창조하기 위해 배워야 한다!  295


그대들의 결혼이 나쁜 결합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대들은 너무 빨리 결합한다. 그 때문에 결혼의 파탄이 뒤따르는 것이다...

"나는 결혼을 파괴했어요. 그러나 그보다 먼저 결혼이 나를 파괴했어요!"

잘못 결합된 부부는 최악의 복수심으로 가득 찬 자가 된다는 것을 나는 항상 보아왔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 사랑하도록 노력하자! 아니면 우리의 언약은 실수가 아니었을까?" ..

"..항상 둘이 함께 지낸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니!"  301


"선이란 무엇이며 의로움이란 무엇인지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 아직도 그것을 찾고 있는 자들에게 화 있으라!"라고 말하며 마음속으로 그렇게 느끼고 있는 자들에게!

악인들이 어떠한 해악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선한 자들이 저지르는 해악이야말로 가장 해로운 것이다!  302-303


선한 자들은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다. 그들은 항상 종말의 시작인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가치표에 새로운 가치들을 써넣는 자를 십자가에 못박고, 자기 자신들을 위해 미래를 희생한다. 그들은 전 인류의 미래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303


모든 것이 선한 자들에 의해 뒤틀리고 철저하게 왜곡되어왔다.  304






서문 - 레지널드 홀리데일


니체는 '진리'라는 게 발견될 수 있기나 헌 것인지, 또는 오류는 인류에게 부득이한 것은 아닌지 하는 문제를 더 당당하게 직시하고 더 절박하게 논의한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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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 오늘 우리는 왜 니체를 읽는가


근대의 '철학적 다이너마이트'였던 니체 철학은 현대라는 시점에서 '토대학으로서의 철학'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14


니체가 보여준 현대성의 길은 다방면에서 확인된다. 먼저 철학 영역에서 그가 제시했던 탈형이상학적 전환, 이성중심주의 모델과 절대주의 모델의 파기, 실체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의 전환, 다원주의 모델을 통한 일원론 극복 프로그램 등은 서양 철학에서 지각변동을 일으켜, 근대적 패러다임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것은 곧 현대 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변동이었다. 니체 철학의 현대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또 다른 영역은 예술이다. 이성적 경험과 심미적 경험 사이에 놓여 있던 경계를 파기해버리고, 예술의 '탈미메시스'를 감행했던 니체에게서 예술가들은 다양한 꽅을 피울 수 있는 씨앗을 찾아냈다. 음악, 회화, 건축, 무용, 조각 등의 넓은 영역에서 그 씨앗들은 예술의 현대성이라는 아우라를 피워냇다고 할 수 있다. 문학 영역 또한 예외는 아니다. 언어에 대한 회의, 문학과 역사의 관계, 예술과 실제의 관계, 심리 현상과 글쓰기의 관계에 대한 니체의 질문들은 현대 문학이 주목할 만한 소재를 제공했으며, 니체 작품 자체가 문학적 찬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외에도 신의 죽음에 대한 니체의 선언을 둘러싼 신학담론들, 스스로를 철학적 심리학자로 자화자찬할 정도로 예리하게 세공된 심리분석의 내용을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에서 눈여겨본 것은 이미 오래되었으며, 근대 사회의 허무적 요소에 대한 통찰이나 권력국가와 법률국가에 대한 니체의 신랄한 비판은 사회학, 정치학을 넘어 이제는 법학 영역에서도 문제해결 과정에 영감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듯 니체 철학은 현대를 종횡무진 누비는 철학이 되었다.

하지만 니체의 철학은 미래에도 여전히 고전일 것이다. 철학의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을 철학 자신의 수단인 비판을 통해 보여준 모범으로서, 철학이 삶의 창조적 가능성을 고취시켜야 하고 늘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으 보여준 모범으로서,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정신의 높이를 자랑스러워하는, 거리의 파토스가 깃든 자유정신의 모범으로서, 삶을 사랑하고 세계를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적 영혼의 모범으로서... 무엇보다도 인간과 사회의 건강성을 염려하고 그것의 확보를 과제로 삼는, 철학자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모범으로서...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 우리는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될 것이다.  15-16




니체는 어떤 사상가인가 - 니체의 철학적 실존과 자화상


철학자들의 글과 삶은 어느 정도 관계가 있을까?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은 그들의 삶에 대한 지식이 없이도 글을 읽는 것만으로 그들의 사유를 이해하기에 충분한 경우다. 글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철학자들은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홉스, 루소 등이 있다. 그런데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삶을 꼭 들여다보아야 하는 철학자들도 있다. 소크라테스, 파스칼, 키르케고르, 비트겐슈타인이 그러하고, 니체 역시 여기에 속하며 그 전형적인 경우다.  21


"일체의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쓰려면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읽기와 쓰기에 관하여]  22


삶과 철학의 통일적 관계를 보여준 니체에게서 철학은 인식적 차원의 지혜를 찾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철학은 이제 삶의 지혜를 찾는 실존적 행위가 된다. 그 지혜는 바로 디오니소스적 지혜다. 즉 건강한 삶의 본능에서 나오고 건강한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혜, 파괴와 창조라는 두 계기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생명성 자체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아는 지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거대한 관계세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깨닫는 지혜, 그 속에서 모든 것이 의미 잇고 모든 것이 필연적이어서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통찰하는 지혜다.  25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며,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었을까? 

(1) 예술가-철학자, 니체 : 문헌학 교수였던 니체가 <비극의 탄생>이라는 철학적 저술을 집필할 때부터 이미 그는 자신을 예술가-철학자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의 예술가는 그림을 그리거나 곡을 짓는 예술가적 실천을 하는, 좁은 의미의 예술가를 넘어서는 개념이다. '철학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철학적 예술가는 '위대하고도 고귀한 목표'를, 즉 위대한 문화와 위대한 인간과 위대한 미래를 '창조'해내려는 '과제'를 지니고, 그 과제를 건강성 회복을 수단으로 실제로 수행하는 존재다.  26


(2) 계몽가와 교육자, 니체 : 니체는 19세기 당대를 총체적으로 진단하고 치료하고자 했던 시대진단가이자 계몽가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살던 시대를 총체적인 의미 상실과 목표 상실의 시대, 인간의 생명력이 퇴화되어 병들어 있는 시대, 철학과 문화와 정신이 방황하는 시대로 진단한다.

시대와 인간과 문화가 앓고 있는 병증을 인간과 사회의 '건강성' 회복의 길을 제공하면서 치유하는 것이다.  28


(3) 자유정신, 니체 : 자유정신은 말 그대로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다시 소유하는, 자유롭게 된 정신"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자유정신을 위한 책]으로 이해하는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자유정신은 단순히 이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삶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도 니체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유정신은 여러 가지 덕목을 갖추어야 한다. 지적 성실성과 정직성, 비판의 힘과 새로운 대안 제시의 힘,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자기 자신을 믿는 '용기', 자신에 대한 '긍지' 등 수많은 덕목들이 거기에 속한다.  29-30


(4) 철학적 심리학자, 니체 : 니체는 자신을 '타고난 심리학자' 혹은 '영혼의 분석가'로 이해하기도 한다. 실제로 아들러나 융 등의 정신분석학자들이 프로이트보다 한 수 위라고 찬탄할 정도로.  30


니체 철학은 낭만적 시기(<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실증적 시기(<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즐거운학문>), 창조적 시기(<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후)로 구분될 수 있다.  31


1881년을 기점으로 니체의 철학이 변모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생성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 프로그램이 본격화됨.  31-32




1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라는 실험철학의 과제


실험철학은 몇 가지 측면에서 실험적이다. 첫째, '지금까지의 철학의 주체'를 '새로운 척도와 새로운 방식'을 사용하여 해명한다. 새로운 척도는 바로 '건강한 삶'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세계를 긍정하는 삶으로, 오로지 이 척도에 의해 모든 것이 재평가된다. 이때 실험철학은 둘재, 질문의 방식을 변경한다. 평가대상 '그 자체'에 대해 묻지 않고, 평가대상의 '가치'에 대해 묻는다. 즉 그것이 갖고 있는 의미와 기능을 점검한다. 그래서 실험철학의 질문방식은 '그것은 무엇인가?'가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삶을 위해 그것은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가?'이다. 평가척도와 질문방식을 변경하여 실험철학은 셋째, 기존의 자명성의 '토대'를 점검하는 실험을 시작한다. 서양의 온갖 자명성의 토대가 될 정도로 가치 있다고 여겨졌던 것들의 '가치'를 의문시한다. 그런데 그 실험적 이문은 매우 부정적인 답변을 듣게 된다. 그 가치들이 삶에 대한 부정의식에서 출발했고 삶의 건강성을 해치고 있는 실상이 목격된 것이다. 그래서 실험철학은 '기존 가치의 탈가치화(Entwertung)를 수행하는, 파괴와 해체의 망치를 든다. 여기서 실험철학의 네 번째 실험적 성격이 확보된다. 기존 가치의 탈가치화가 심리적 공황 상태를 발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즉 토대의 상실은 곧 의미근거와 가치근거의 상실이며, 이것은 다시 '왜?'. '무슨 목적으로?'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실험을 두고 위 인용문에서의 '부정의 말에, 부정에, 부정에의 의지'에 머무르는 '허무주의의 가능성을 선취'한 것으로 표현한다. 결국 실험철학 스스로 망치를 들어 기존 가치들을 탈가치화시키면서 허무주의라는 장을 시험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하지만 실험철학은 다섯째, 그런 허무적 상태를 넘어서는 또 한 번의 실험을 한다. 새로운 의미근거와 가치의 토대를 제공하게 만드는 실험을, 그것은 인용문이 말하듯 '정시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견뎌내는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감행하는가?'를 척도로 진행되는 실험이다. 그것은 곧 '인간이 얼마나 건강한가?'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건강한 인간은 진리를 수없이 감행하고, 수많은 진리를 견뎌낸다. 정확히 말하면 그 스스로 건강한 삶을 위해 진리들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을 다시 건강한 삶의 조건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는 삶의 건강성을 척도로 새로운 가치체계를 구성해낼 수 있다. 그럴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의 힘이 강하다. 결국 허무적 상태를 넘어서게 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건강한 디오니소스적 인간'을 창출해내는 것이며, 이것이 실험철학이 감행하는 '가치의 척도(Umwertung)라는 실험의 목적이다.  41-42


자기 삶에 대한 사랑을 니체는 운명애라고 부른다. 운명애는 이미 결정되어 주어져 있는 삶에 대한 숙명적 체념과는 다르다. 오히려 운명애는 자신이 창조적 주체로서 구성해가는 삶에 대한, 스스로 구성해가는 운명에 대한 그야말로 운명적인 필연성을 지닌 사랑이다.  45


디오니소스적으로 삶을 마주한다는 것,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니체 자신의 해명을 들어보자.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가혹한 문제들에 직면해서도 삶 자체를 긍정한다 ; 자신의 최상의 모습을 희생시키면서 제 고유의 무한성에 환희를 느끼는 삶에의 의지-이것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다." -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46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첫째, 창조와 파괴, 대립과 싸움을 통해 형성되고, 그 어떤 계기라도 불필요하지 않으며, 그런 것으로서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성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생명은 매순간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파괴가 일어나는 과정이다. 생명은 즉 파괴와 창조라는 모순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모순성은 생명의 생성적 성격을 보증해준다. 그런데 니체는 생명의 이런 모순성을 삶에의 의지에 의한 것으로 생각한다. 즉(힘에의 의지로서의) 삶에의 의지가 매순간 자신이 구현해놓은 '최상의 모습'을 스스로 파괴하고, 삶에의 의지의 파괴작용은 곧 삶에의 의지의 새로운 창조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생명의 지속은 곧 삶에의 의지의 무한성 및 영원성에 대한 증거가 된다. 이렇게 해서 니체는 생명 그 자체의 모순성 및 모순적 생명의 무한서오가 영원성을 각각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생명은 모순적이기에 디오니소스적이며, 모순으로서 무한하고 영원하기에 디오니소스적이다...

둘째, 디오니소소즉인 것은 기쁨과 환희로 전환된 고통을 의미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고통에서 발생한 환희"다. '자신이 구현해놓은 최상의 모습'을 파괴해야만 하는 생명은 파괴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니체는 생며을 가능하게 하는 삶에의 의지는 파괴의 고통을 피해야 할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오히려 기쁨이다. 생명의 모순적 구조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셋째, 디오니소스적인 것은-수사적 표현이기는 하지만-"넘쳐흐르는 살모가 힘의 느낌"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생명의 모순성과 지속은 생명력(삶에의 의지)이 결여되거나 결핍 상태에 있을 때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것이 계속 유지되고 고갈되지 않고 풍요로워야 가능하다...

넷째,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최고의 긍정 양식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니체는 이 점을 "디오니소스적 상징 안에는 긍정이 그 궁극적인 지점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긍정의 여러 양식 중에서 최고의 긍정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성이 보여주는 모든 계기에 대한 조건 없고 유보 없고 예외 없는 긍정을 하기 때문이다.  47-50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개념이 갖는 의미는 힘에의 의지를 방법적 개념으로 삼은 니체의 후기 사유에서도 여전히 지속된다. 이제 그것은 힘에의 의지와 동의어가 된다. 힘에의 의지의 복수(plural)적-상승적-관계적 수행은 영원히 지속되는 모순적 생명성, 그 과정이 보여주는 고통의 기쁨으로의 전환, 생명력의 지속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63


후기 사유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그것이 갖는 긍정의 함의다... 디오니소스적 인간이야말로 '고통 자체와 삶 자체의 모든 의문스럽고도 낯선 것들에 대한 아무런 유보 없는 긍정'의 전제인 것이다. 긍정의 철학은 그래서 '긍정하는 인간'에 대한 철학이 된다. 니체가 그런 인간을 육성하는 과제를 절실한 철학적 과제로 상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후기 사유 전체는 바로 그런 '긍저하는 인간'을 어떻게 육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라고도 할 수 있다.  64




2 '신의 죽음에 대한 선언'은 '신의 죽음에 대한 고발'


<즐거운 학문>에서 미친 사람의 입을 빌려 처음 고지된 신의 죽음은 니체의 그리스도교 비판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보여주는 방향타 역할을 한다. '인간이 신을 죽게 한 장본인이라는 것, 그리스도교 교회는 살아 있는 신의 집이 아니라, 죽어버린 신의 무덤과 묘비에 불과하다는 것'.  69


사제들의 권력추구 욕망 때문...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사랑하지 못할 때, 그리스도교가 제시한 신 개념은 전략적으로 인간에 의해 부정될 수밖에 없다는 고백을 듣게 된다.  70


인간이 태양을 잃은 세계에서 헤매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 스스로 신의 '역할'을 대신하여 존재와 의미와 가치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그럴 정도로 강해져야 하고, 그럴 수 있는 자신의 힘을 긍정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자시을 건강한-디오니소스적 인간으로, 위버멘쉬로 고양시켜야 한다.  7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4부 [나귀의 축제]에서 재등장하는 더없이 추악한 자는 '신을 다시 믿는 자'로 설정되어 있다. 물론 그가 믿는 신은 옛 신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신의 '나귀'를 섬긴다. 이것은 최악으로 뒤틀린 심사에서 나온, 신에게 보내는 비웃음이자 신엑 최대의 모욕을 안겨주는 방식이다. 그러면서 그는 신을 '철저히' 살해한다. '나귀'는 이제 그가 찾아낸 새로운, 지상에 있는-국가든, 돈이든, 과학이든-우상이다. 이것을 그는 다시 신격화한다. 병리적 인간인 그가 자기부정이라는 병리적 상태를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형하고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창조적 주체로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지도, 자신에 대한 긍지를 갖지도 못한다.  76-77




4 건강한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대명사, 위버멘쉬


인간을 '우연과 사제'의 손에서 해방시키고, 인간이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을 사랑하고 긍정하는 길을 철학적으로 확보한다. 니체의 철학적 야심은 이것이었다. ..

'누가 있어 긍정의 노래를 함께 부를 것인가?' 니체의 눈에 비친 사람들은 하나같이 방황하는 정신을 지닌 무기력한 "인간 말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I [머리말]  133


위버멘쉬는 오로지 인간이기 때문에, 오로지 인간만이 획득할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134


위버멘쉬는 기본적이면서도 일차적인 의미의 항상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인간이다. 즉 자신의 현 상태를 늘 넘어서는 '자기극복'의 노력을 의식적-의지적으로 기울이는 인간이다.  135


인간존재의 의미이자 이상적인 실존의 모습인 위버멘쉬, 그것의 의미는 먼저 '자유정신'이라는 개념으로부터 획득된다. 자유정신은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파토스를 지니고 가치의 새로운 중심을 제시할 수 있는 정신의 자유로운 상태를 말한다.  136


자유정신은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고 획득할 수 있는 자다...

"..평가라는 것을 통하여 비로소 가치가 존재하게 된다. 귀담아듣도록 하여라. 창조하는 자들이여! 가치의 변천, 그것은 곧 창조하는 자들의 변천이기도 하다. 창조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자는 끊임없이 파괴를 하게 마련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I [천개의 목표와 하나의 목표에 대하여]  137


여기서 창조는 가치평가작용 혹은 의미창조작용, 즉 '해석(Interpretation)'을 말한다.  138


인간이 '그의 세계'를 더 이상 구성하지 않는 경우는, 다으모가 같은 경우들일 것이다. 그의 창조력이 무기력해졌을 경우, 혹은 자신이 구성해낸 세계를 세계 그 자체와 동일시하여 절대화시켜버리는 경우,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구성된 가치와 의미의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여버리는 경우. 이 경우들이 모두 '크나큰 피로'의 증후이며, 그것은 삶의 지속적인 창조를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반면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고,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인간, 니체가 '해석자'라고도 부르는 그가 자신의 삶의 상승을 위해 해석을 할 때, 그는 이제 위버멘쉬의 조건 하나를 갖춘 것이다.  139


도대체 이성활동과 지각활동, 그리고 의식층은 어느 정도로 관계적이며, 어느 정도로 힘에의 의지의 규제를 받는 '도구'인 것인가? ..

니체는 이것에 대한 전통철학의 논의가 형이상학적으로만 진행되어 왔으며, 그래서 매우 제한적이면서도 비과학적이었다고 비난한다. 의식이나 정신은 신체의 특수한 기능에 대한 명칭이며, 신체는 육체성과 심리성의 구분 자체가 어려운 '관계적 유기체'다. 그래서 의식과 정신에 대한 물음은 곧 인간 유기체 전체에 대한 물음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철학적-생물학적-생리학적-심리학적 등 개별적 탐구방식이 모두 동원되어야 한다. 그런 총체적인 탐구에 의해서도 완전한 파악으ㄴ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형이상학적의식 탐구의 결과가 "정신과 의식을 과대평가"하는 "엄청난 실책"에 불과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경험성과 육체성을 무시하고 간과하는 "반과학적 정신"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신경계와 세포와 혈행과 근육계 등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모든 기관과 기능과 현상 전체를 고려해보면, 의식이라고 불리는 것은 첫째, 단일체가 아닌 흐름이고, 둘째, 그 과정은 우리에게 의식디는 부분과 의식되지 못하는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잇지만, 셋째, 그 구분은 고정되거나 확정된 불리가 아니라, 우리에게 의식되지 못하는 부분들이 의식되는 부분들로 이행하는 것이고, 그것도 경우에 따라 달리 진행된다는 것 등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의식과 의식 이전의 층은 진행의 정도에 따른 구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의식되는 부분을 '의식-이라는 명사형으로 이해한다. 마치 의식이 단일한 어떤 것처럼, 의식 이전적 현상과 분리 가능한 어떤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필요에 의해 그렇게 사용하는 언어적 표현방식일 뿐이다.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익숙해져 '생각행위와 느끼는 행위와 욕구행위의 담지자'로서의 의식, '정신적 원인'으로서의 의식이라는 생각을 도출시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언어적 표현에 불과할 뿐, 사실은 아니다.  143-144


창조자이자 해석자이며 신체적 존재라는 자의식의 소유자, 삶의 창조적 구현을 매순간 이루어내는 존재, 파괴와 창조를 하는 자유정신의 눈, 이성의 수단적 성격 및 의식의 기호적 속성과 한계를 인지하는 인간, 그러면서 자기극복의 과정을 이어가는 인간.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위버멘쉬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음 장들에서 추가될 위버멘쉬의 다른 특징들-주권성, 귀족성, 주인의식, 책임과 자유 등-을 부가하지 않아도, 이미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렵고도 고단하다. 도대체 왜 이런 쉽지 않은 일을 니체는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일까? 그래야 비로소 인간이 인간일 수 있다고, 인간의 존재의미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그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147-148


위버멘쉬적 삶을 사는 것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고단함과 어려움은 어느 순간 위버멘쉬로의 노력을 중단하게 할 수 있다. 니체도 그런 위험을 잘 알고 있다. 그가 우리에게 실존적 결단을 내리라고, 온전한 의미에서의 실존적 결단을 내리라고 강요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148




5 관점주의라는 인식 모델 : 절대적 진리? 해석적 진리!


니체는 '같지 않은 것을 같게 만드는' 작용이라고 부른다. 영원한 흐름 속에 있는 생성세계를 포착해내고 파악해내고 붙잡아내어 한 가지 면으로 고정시키는 것, 여러 경험들 중에서 특정한 것만 받아들이는 것, 비교하고 도식화하고 예속시키고 범주화하고 일반화하는 것, 그래서 특수성과 개별성보다는 범주성과 일반성에 주목하는 것, 이런 모든 일들이 지성뿐만 아니라 감각기관을 포함한 우리 신체 전체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알고 싶은 것만 안다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고 친숙한 형태의 것으로 포섭시켜 유형화해서 말이다. 그래야 우리가 낯설고 친밀하지 않은 새로운것들 속에서 생기는 불안감과 공포를 떨치고 삶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같지 않은 것을 같게 만드는 일'은 그 자체로 삶을 위한 전략적 행위다. 우리 인식이 이런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치기에, 해석은 대상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묘사나 기술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주관적 필요에 의해, 우리에게 이해 가능한 형태로 구조조정되어 있다. 그것은 결국 삶의 상승이라는 우리의 실천적 욕구들이 반영된 오류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오류들을 통해서만 세계와 소통하고, 이런 오류들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 결국 삶에 대한 유용성 전략은 해석의 필연적 오류성을 이미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65




6 자유와 평등을 원하는가? 먼주 주권적 존재가 되어라


니체는 .. '인간은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

'오로지 주권적 존재만이 약속도 할 수 있고, 책임도 질 수 있다. 따라서 오로지 주권적 개인만이 자유와 평등을 요구할 수 있다. 약속과 책임과 자유와 평등이라는 것은 이렇듯 주권적 개인만이 획득 가능한 특권이다.'  177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조건이 바로 약속권리에 있다고 니체가 생각.  178


기억은 앞으로의 자신의 사고와 행위를 산정하고, 그것을 규칙적인 것으로 만들며, 그것을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만드는 인간의 능력이다. 이 능력에 의해서 약속도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렇기에 기억은 약속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려는 인간의 (망각보다) 고급한 기능일 수 있는 것이다. 기억능력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에게 보증할 수 있다. 그런데 니체는 이런 기억을 '의지'의 능력으로 이해한다. 

"일단 의욕한 것을 계속하려는 의욕, 즉 본래적인 의지의 기억인 것이다." - <도덕의 계보>  180


누구나 다 자신의 해위와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책임질 수 있음은 그래서 특권이다.  183





맺음말


그는 인간과 세계의 병증을 진단하고 치유하는의사, 건강하게 살기를 가르치고 권유하는 교육자이자 계몽가다. 

먼저 네 자신을 창조할 수 있어야, 세계가 네 작품이 된다. 네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세계도 지배할 수 있다. 네 자신을 사랑하고 긍정할 줄 알아야, 세계가 너의 화원이 된다. 네 자신에 대한 긍지를 지녀야, 세계도 경외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 먼저 네 자신이 되어라!  347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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